낡은 등산화 한 켤레

리 호이나키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그가 이반 일리치와 맺었던 우정과 함께, '신발' 한 켤레에 얽힌 이야기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1995년 마릴린 스넬이 쓴 글 '이반 일리치―상투성과 기계에 맞서는 현인'이라는 글이 <녹색평론>에 번역, 소개(1997년 11-12월호)된 뒤로, 바로 그 '신발' 이야기는 예민한 독자들의 마음에 쉽게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을 남겨 두었을 거라고 믿는다.

1993년에 그 자신 전에는 사제(司祭)이기도 했던 호이나키는 일리치의 조언을 받아들여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순례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스페인의 도시는 9세기 이래 유럽의 순례자들이 찾아가는 주요 목적지였다. 일리치는 그러한 친구의 결정을 축하하여 자신의 벽장에서 오래된 튼튼한 보행용(步行用) 신발 한 켤레를 꺼내어서 그것을 친구에게 선물로 주었다.

일리치가 그 신발을 샀던 것은 1973년 칠레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가 살해된 날이었다. (…) 20년 동안 아주 드물게 사용되었던 그 신발은 호이나키에게 썩 잘 맞았다. 그러나 순례는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시험하는 일이다. 맨 첫날 호이나키는 깎아지른 산길이 아직 눈에 뒤덮여 있는 모습을 올려다보면서, 그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는 고사하고 그 산길을 통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바위에 기댄 채, 이미 이 지점을 지나간 수천, 아마도 수백만의 사람들을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그는 이 순례자들을 북부 스페인으로 이끌었던 신앙의 위대한 신비와 자기 자신을 거기로 이끌었던 우정(友情)의 위대한 신비를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예순다섯 살의 리 호이나키가 이반 일리치의 권유로, 그리고 그로부터 선물받은 20년 된 낡은 신발('낡았지만 튼튼해 보이는 이탈리아제 등산화'였다고 한다)을 신고 떠났던 30여 일간의 순례, '신앙의 위대한 신비'와 '우정의 위대한 신비'에 대한 기록이 바로 <산티아고, 거룩한 바보들의 길>이다.

이미 번역 출간된 <正義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김종철 번역, 녹색평론사 펴냄)와 함께, 또 한 편의 '뛰어난 이야기체 담론'을 접할 기회가 온 것이다. <正義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를 번역한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은 그 책의 역자 후기에서 "이 책 전체를 하나의 장편 산문시로 읽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시적 언어는 본질적으로 육화(肉化)된 언어이다. 그리고 육화된 언어는 특정한 장소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삶의 체험 혹은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없이는 성립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일반화된 논리,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세계인식으로는 결코 삶의 구체적인 진실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좀 성급하게 말하자면, <산티아고, 거룩한 바보들의 길>(김병순 옮김, 달팽이 펴냄)은 바로 이 '육화된 언어'와 '참된 인식'에 대한 핍진(逼眞)한 탐구의 기록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 책이야말로 '하나의 장편 산문시'로 읽는 것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베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역사, 가톨릭과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의 갈등과 투쟁, 가톨릭 신앙과 종교의 역사 등에 관한 풍부한 '사실'과 저자의 '해석'들이 이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이 책을 다른 여행기나 역사서와 구별 짓는 탁월함은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순례와 뿌리내리기


▲ <산티아고, 거룩한 바보들의 길 : 리 호이나키의 카미노 순례길>(김병순 옮김, 달팽이 펴냄). ⓒ달팽이
스페인을 관통하여 산티아고에 이르는 순롓길을 '카미노'라고 한다. "카미노는 말 그대로 '길' 또는 '도로'를 뜻한다. 카미노라는 말은 여러 가지 강력하고 풍부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진흙 먼지 길을 가리키는 것에서 '나는 길이요…'(요한복음 14:6)처럼 그리스도 자신을 지칭하는 의미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그 카미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땅 끝')는 중세 전성기 동안 서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아간 도시였다. 많은 사람들은 스페인까지 가서 이 지역을 '복음화'했던 성 야고보의 무덤이 그곳에 있다고 믿었다.

그 '성지'에 이르는 길은 수많은 산과 언덕, 숲을 지나야 하고, 때로는 오직 지평선밖에 보이는 것이 없는 들길을 지나야 하는 험난한 길이다. 그리고 과거 거기에는 순례자들의 금품을 노리는 도둑들에서부터 간교한 여관 주인들, 그리고 늑대를 비롯한 산짐승들과 순례자들을 타락의 길로 이끄는 창녀들의 유혹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위험들이 길모퉁이마다 도사리고 있었다. 지금이야 스페인 정부뿐 아니라 유럽 국가들 전체가 나서서 이 카미노를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관광 코스'로서 '제도화'하기에 여념이 없지만(1987년 10월 27일에 이미 카미노는 '유럽 제일의 문화 탐방지'로 선정되었다), 1000년 전 카미노는 결코 순탄치 않은 고난의 순롓길이었다.

그런데 왜 그 많은 순례자들이, 멀리는 "아일랜드의 서쪽 해안에 있는 골웨이처럼 먼 곳에서조차 그곳을 찾아왔을까?" 리 호이나키는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길은 한 가지뿐이라고 결론지었다. 내 스스로 콤포스텔라까지 걸어가는 것."

예수회 회원이자 가톨릭 주간지인 <아메리카>의 부편집장 신부 제임스 마틴은 <루르드 일기>(가톨릭출판사 펴냄)에서 "순례는 하느님을 의지하는 자세를 키워주는 유서 깊은 관행으로, 순례자는 동료 순례자나 길에서 만난 이들의 자애와 친절로 나타나는 하느님의 은총에 온전히 몸을 맡기게 된다"고 썼다. 그리고 이어서 순례는 "우리가 소유 면에서 아주 적은 것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흔치 않은 방식으로 일깨워주는 수단이 된다"라고도 적고 있다.

<산티아고, 거룩한 바보들의 길>을 읽다 보면, 카미노가 단지 지도 위에 선으로 표시된 길이 아니라, 지난 1000년 동안 먼저 이 길을 걸어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순례자들, 그리고 그 길 주변에 '뿌리내리고' 살면서 순례자들을 돕고 보살펴 온 역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일구어온 역사적 '공동체'라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그리고 순례(걷기)라는 행위 자체가 이 카미노라는 공간에서는 '노마드'가 아닌 전통과 대지, 신앙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자 '뿌리내리기'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순례의 초입에서 리 호이나키는 이렇게 간구한다. "일찍이 순례자들이 쉬어갔던 바로 그 하늘 아래서 그들이 밟았던 바로 그 땅에 내 발을 뿌리내리고 싶다."

무엇보다 카미노의 순례자들이 쉬거나 묵어갈 수 있도록 마련된 쉼터인 '알베르게'에 관한 많은 에피소드들은 깊은 인상과 감동을 준다. 알베르게(공식적으로는 '오스피탈'이라고 부른다)는 마을마다 그 모양과 역사가 다를 뿐만 아니라, 수도원과 교회 혹은 신도회가 운영하는 것에서부터 순례자를 돌보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기는 개인(가족)이 운영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알베르게에서 리 호이나키는 더없이 따뜻한 친절과 환대를 받는다. 그리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카미노에서 만나게 되는 다른 순례자들과 먹을 것을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고 돌본다. 배낭 하나와 낡은 등산화 한 켤레, 그리고 지팡이 하나만을 의지하고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가는 순례자들에게 이들 소박한 쉼터의 환대와 동료 순례자들끼리 나누는 우정은 곧 '하느님의 은총'으로 '체험'된다.

알베르게에 조용히 앉아 있으면 내가 어떤 특별한 차원의 고귀함 속에 잠겨 있는 참 공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곳은 거대한 존재를 구성하는 사슬과 같다. 로사리오 묵주의 구슬처럼 각각 독립된 장소들이 서로 둥글게 거대한 원을 그리며 연결되어 있다.

기도와 걷기

이러한 깨달음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오직 자신의 발로 고통스럽게, 겸손하게 걸어가는 고독한 순례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발바닥에 와 닿는 길의 느낌, 변화무쌍한 하늘과 땅과 햇빛의 표정을 느끼고 발견하면서, 리 호이나키는 아버지의 유품(遺品)인 묵주를 꺼내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로사리오 기도를 바친다.

순례 첫날부터 시작된 무릎의 통증을 인내하면서 걷는 그 길 위에서 그는 "이제 비로소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도는 새로운 방식으로 내 신체의 일부가 된다"고 털어놓는다. 한때 사제이기도 했던 예순다섯의 지식인이 마치 기도를 처음 배우는 순진무구한 아이마냥 "기도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생생하게 살아나며 마음 속 깊이 짙은 향내를 풍긴다"고 기뻐하는 장면, 그리고 오랜 세월 지녀왔던 '회의론자'의 태도와 '범신론'의 공허함을 돌이켜 반성하는 대목은 묵직한 감동마저 준다.

이러한 기도의 발견, 새로운 '인식'은 결코 '논리'나 추상적인 '관념'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내 육신의 존재를 믿기 전까지는 하느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 어쩌면 사람들은 이 모진 고통과 피곤함을 통해 비로소 자기 육신의 존재를 믿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가톨릭의 수많은 기도문과 성경에 '걷는 것'이 나온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이것들은 바로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인간으로 육화(肉化)했음을 알리는 소박하고 비밀스러운 중요한 행사"들이자, 그 행위 자체가 바로 성육신(成肉身) 자체를 의미하거나 성육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른다.

감각과 인식

"고요와 경이로 가득찬 고독" 속에서, "이 길을 앞서 걸었던 옛 순례자들과 함께", 보폭에 맞추어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며 걷는 이 순례가 반드시 기쁨과 평화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든 목격하게 되는 '환경 파괴'와 '지형 변형'이라는 불경(不敬)의 현장은 이 카미노에서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전통적인 농촌 공동체들과 마을 장인들이 일구어 온 소박하고 품위 있는 삶의 양식들은 스페인의 오래된 마을들이라고 해서 더 이상 온전할 수는 없다.

거기다가 카미노의 일부인 주요 '간선 도로'들에서는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들이 순례자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묵상을 방해한다. 이런 현실들이 '개발'에 대해 일관되게 비판해온 리 호이나키의 '타고난 비판 본능'을 수시로 일깨운다. 그리고 이 비타협적인 순례자는 그때마다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1차선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2~3킬로미터를 걷고 있다. (…) '산티아고 가는 길' 이렇게 쓰인 표지판이 나올 때마다 지팡이로 그 표지판을 거칠게 두드리며 "안돼! 안돼! 카미노는 자동차를 타고 가는 길이 아니라고" 하면서 큰 소리로 외친다. 아무도 내 목소리를 못 듣겠지만 그래도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밖으로 분출시키지 않을 수 없다. (…) 이 표지판들은 그들이 카미노를 달리고 있다고 알려준다. 그들은 실제로 카미노를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카미노는 실제로 자기 발로 땅을 밟고 가는 사람들만이 접근할 수 있다.

더욱 참담한 것은 스페인 정부와 '유럽 공동체'가 카미노를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전 세계의 관광객들을 끌어오기 위해 벌이고 있는 '현대화'된 프로젝트들이다. 많은 구간의 길들이 볼썽사납게 포장되고, 카미노와 순례자들을 '이미지화'한 경박한 홍보물과 상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잘 포장된 길을 따라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조금이라도 새로운 지식과 깨달음을 줄 수 있을까. 리 호이나키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진정한 지식은 접촉하는 것에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세계는 오직 느끼고 만지는 것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현대 문명은 사람들의 그런 감각을 변형시키고 '정제'하여 마비시켰다. 리 호이나키에게 카미노를 날마다 터벅터벅 걷는 힘겨운 몸부림은 그 감각들을 복원시키고 그 기능을 되살리는 과정이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의미를 (인간 내면의) 정신적 활동이라고 부르는 것만큼 그릇된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리 호이나키는 이렇게 화답한다. "의미란 내 의식의 내면에 있는 신비스러운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라고 하는 역사적 자아가 주변 세계와 물질적, 사회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낡은 등산화

마릴린 스넬이 말한 대로 "가장 단순하게 말하면, 이것은 한 켤레의 소박한 신발을 예외적으로 이용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절제, 고통의 감내, 그리고 '걸음'에 관해" 말해주고 있다.

책을 덮으며, 지금 낙동강을 비롯해 이른바 '4대강 살리기' 사업이 추진되는 '파괴'와 '변형'의 현장들에서, 풀뿌리 시민과 활동가들이 벌이고 있는 힘겨운 저항을 떠올려 본다. 지율 스님을 비롯한 몇몇 예민한 영혼들로부터 영감을 받은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이 삼복의 무더위 속에서도 강을 따라가는 '도보 순례'를 이어가고 있다.

이것은 '항의 행진'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순례들이다. 지금껏 우리가 감각의 왜곡과 마비로 인해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던 이 땅의 '강'들과의 접촉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렸던 '이야기'를 다시 찾고 회복시키고자 하는 고통스러운, 그러나 겸손한 발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순롓길에 먼저 나섰어야 할 사람들은 이 가공할 프로젝트를 입안하고 추진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강을 살리겠다"는 그들의 말을 믿는 사람이야 물론 많지 않겠지만, 그러나 당분간 공사와 일방적인 선전, 정치적 협잡을 멈추고 대통령을 위시한 주요 책임자들이 순전히 '걸어서' 4대 강의 전 구간을 터벅터벅 '순례'한 다음, 이 사업의 계속적인 추진 여부를 시민과 토론하겠다고 선언한다면, 우선 나부터라도 '낡은 등산화'를 손질해 그들에게 기꺼이 빌려줄 용의가 있다.

사족

<산티아고, 거룩한 바보들의 길>의 역자 후기에 따르면, 마침 올해 2010년이 '성 야고보의 축제일'인 7월 25일과 일요일이 겹치는 카미노의 성년(聖年)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의 초판 번역 출간일은 그 축제일을 며칠 앞둔 7월 16일이다. 시점이 절묘하다. 그런데 혹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 책의 출간 시점을 '서둘러' 잡기라도 한 것일까.

자세한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책 앞날개의 저자 소개에 저자 이름이 잘못 적힌 것에서부터 장(章)의 제목에 터무니없는 오기가 있는 것까지, 평소 내가 신뢰하고 존경하는 출판사의 작품답지 않은 실수가 눈에 너무 자주 띄어 아쉬웠다는 점을 사족으로 붙이지 않을 수 없다. 다음 쇄에서는 이런 오류들이 바로잡아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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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2015-01-06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2쇄를 보니 지적하신 오자는 수정이 되었군요! 이 지적이 이책의 가치를 떨어트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