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처음 받은 책 선물은 <바틀비와 바틀비들>이었다.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지만 동시에 너무 노골적인 제목이라 어쩐지 읽기 싫어지기도 하는 그런 종류의 책이었는데, 그래서 사지 않고 빌려 볼 생각이었으나 이 책의 존재 자체를 처음으로 알려준 친구가 새해의 첫날에 선물해주었다. 무척 재미있게 읽었지만 별 내용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읽었던 대부분의 책들은 벌써 뇌리에서 사라진지 오래이므로 놀랄 일은 아니다. 다만, 새해의 첫 책으로는 무척이나 적절했다는 기억이다.
두 번째로 받은 책 선물은 이승훈의 <해체시론>과 김상환의 <해체론 시대의 철학>이었다. 전자는 다시 나올 가능성이 없는 품절도서고, 후자는 제 값 주고 사기는 아까운, 이미 시기가 지나 버린 책이다(나는 언젠가부터 이렇게 계산적인 독자가 되었다). 사실 이 책들에는 조금의 사연이 있는데, 사연 없는 책은 세상엔 없다는 생각이므로 길게 쓰는 일은 피곤하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이주 남짓 계속했더니 이 시간만 되면 머릿속이 혼곤하다. 아침을 먹으면 점심 무렵에 더욱 배가 고프고, 담배를 끊으면 (적어도 며칠 동안은) 목이 더 아픈 것과 마찬가지로, 규칙적인 생활은 나를 더 피곤하게 하는 모양이다.
다만 이 책이 누군가의 손에서, 알라딘 중고서점(온라인)을 거쳐, 나의 장바구니에 잠시 동안 머물러있었지만, 내가 그것을 주문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어, 아니 도대체 세상에 누가 이런 책을, 하필 이 시점에, 그것도 중고로 구입했을까 의문을 품고 있던 차에, 간단한 검색을 거쳐 이 책이 알라딘 중고서점(부산_오프라인)에 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마침 그날 나와의 약속을 미루고 부산에 내려간 누군가가 있어 그에게 부탁을 하게 되었다. (함께 장바구니에서 사라진 <길리아드>도 그곳으로 갔다고 하나, 그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다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결국 술잔을 앞에 두고 책을 받아들게 된 나는 책 값을 물어는 보았으나, 그냥 감사한 마음만 주었다. 살다보면 종종 신세를 지게 되는 일이 있는데, 그런 경우에 대비해 감사한 마음만은 항상 넉넉히 준비하는 편이다. 나는 그렇다.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그가 언젠가 내가 찾아 해맸던 어떤 '등'이 등장하는 정지용의 시를 찾아주었다는 것인데, 그 등의 정체는 '장명등'이었고, "혹시 프랑스가 들어간 제목에 장명등이 나오는 거 아냐?"라는 그의 질문에 나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등이라는 반응을 보였으므로 당연히 그 시가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났으나, 조금 전에 검색을 해본 결과 장명등이 맞았고 그 시가 맞았다(따라서 나는 아직 이것에 대해 적절한 감사를 표하지 못했다). 여전히 장명등은 난생 처음, 물론 이제는 한 두어번쯤, 들어본 것 같은 등이지만 그것은 순전히 내 기억력의 문제다. 그것은 이런 시였다.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밑에
빗두루 슨 장명등,
카페 · 프랑스에 가자.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뻣적 마른 놈이 앞장을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멘트에 흐느끼는 불빛
카페 · 프랑스에 가자.
이 놈의 머리는 빗두른 능금
또 한놈의 심장은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간다.
「 오오 패롤서방! 꿋 이브닝!」
「꿋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울금향 아기씨는 이밤에도
경사 커-틴 밑에서 조시는 구료!
나는 자작의 아들도 아모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뺌이 슬프구나!
오오, 이국종 강아지야
내 발을 빨어다오.
내 발을 빨어다오
사실 처음 장명등이 나오는 부분까지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페이브멘트에 흐느끼는 불빛'에서 바로 이 시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시기 모더니스트들의 이국 취향에는 어딘지 모를 향수가 배어있으므로, 나는 분명히 그것을 기억한다. 향수란 표현은 이상하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가진 적이 없는 어떤 나라를, 항상 상상 속에서만, 어떤 이미지로, 그려 왔으므로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해체시론>이건 <해체론 시대의 철학>이건 학창시절에 읽었으면 좋았을 책이라는 생각이지만, 지금 읽는 것에는 또 나름의 재미가 있다. 세상 모든 독서에는 나름의 재미가 있다. 그러니 독서는 끊기 힘든 악이다. 세상 모든 일 또한 나름의 재미가 있겠지만, 사실 이만큼의 재미가 있는 일도 그리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늘은 고기를 먹고, 담배를 피고, 술을 마시고, 당구를 치고, 농담을 따먹었는데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