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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은 <미식 예찬>의 한 구절을 이렇게 썼다“당신이 먹은 것이 무엇인지 말해 달라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그럴듯한 말이다한국의 서평가인 나는 <서서비행>에 미처 쓰지 못한 문장을 여기에 쓴다“당신이 읽은 책이 무엇인지 말해 달라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물론 이 문장은 사실이 아니다그러니 내게 당신이 읽은 책을 말해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작가란 무엇인가>를 읽는 당신에 대해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60년의 역사를 가진 미국의 문학잡지 ‘파리 리뷰’에서 진행했던 작가 인터뷰 중 열두 편을 추린 책이다움베르토 에코에서 오르한 파묵무라카미 하루키폴 오스터이언 매큐언필립 로스밀란 쿤데라레이먼드 카버,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어니스트 헤밍웨이윌리엄 포크너그리고 E.M. 포스터까지모두 쟁쟁한 작가들이다(그리고 나는 그들의 이름을 모두 나열함으로써 최소한의 ‘리스펙트’를 표했다.결코 지면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럼 지금부터 당신에 대해 말해보겠다일단 당신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다그중에서도 소설을 즐겨 읽는 독자다당신은 작가를 꿈꾸거나이미 작가이거나최소한 언젠가 한 번쯤은 그런 꿈을 꿨을 것이다앞서 나열한 열두 명 중 좋아하는 작가가 하나 정도는 있을 테고둘이나 셋넷일지도 모르겠지만 설마 다섯 명은 아닐 것이다그리고 분명 어렸을 때 마당에 커다란 대추나무가 한 그루 있었겠지없었다고그럼 다행이다만약 대추나무가 있었다면 당신은 이 글을 영영 읽지 못할 수도 있었다큰 화를 입는 대신 이 글을 읽고 있는 것이니 액땜이라고 생각하시라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아무튼 올 여름에는 물가를 조심해야 한다가을에는 횡재수가 있지만 지출은 규모 있게 하는 게 좋다.


미안하다하지만 아직 당신은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작가란 무엇인가>를 손에 든 당신이 제일 먼저 읽은 인터뷰가 누구의 것인지아직 읽지 않았다면 누구의 인터뷰를 제일 먼저 읽을 생각인지그때 비로소 나는 당신들 각자에게 말을 걸 수 있을 것이다하루키 인터뷰를 찾는 당신에게 하는 말과 포크너 인터뷰를 펼친 당신에게 해야 하는 말은 서로 다를 테니까당신들은 서로 다른 취향을나아가 다른 문학관을어쩌면 다른 세계관을 가졌을 테니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먼저 에코를 읽고 다음으로 파묵을 읽었으며다른 작가들을 읽은 뒤 마지막으로 포스터의 인터뷰를 읽었다한 마디로순서대로 읽었다는 말이다그게 바로 서평가가 책을 읽는 방식이다한 손에 연필을 들고인용할 만한 부분을 찾아 밑줄을 그으며처음에는 그들의 글만큼이나 각기 다른 개성을 읽었고어느 순간부터는 (여전한 차이에도 불구하고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들에 주목하며 읽었다이런 것들이다 : 1)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다. 2) 비평가의 말은 듣지 않는다. 3) 유머 감각은 중요하다. 4) 가난과 궁핍은 작가의 적이다. 5) 어쨌거나 쓴다.


소설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무엇보다 직접 소설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특히 진정으로 작가를 꿈꾸는 당신이라면 다음과 같은 포크너의 말을 명심해야 한다비평의 기능을 묻는 질문에 포크너는 이렇게 답했다“예술가들은 비평가들이 하는 소리를 들을 시간이 없습니다작가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서평을 읽겠지만진정으로 글을 쓰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서평을 읽을 시간이 없어요.


시사인 3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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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4-02-18 08:47   댓글달기 | URL
뭔가 폰트가 이상한 거 같은데... 노트북으로는 확인이 잘 안 되네...

다락방 2014-02-18 09:46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폰트 예쁜데요? 이건 무슨 폰트에요? 궁서체도 아니고 바탕체도 아닌것 같은데??

poptrash 2014-02-18 17:03   URL
한글 파일을 메일로 보내면(한메일) 보낸 메일함에서 파일을 클라우드로 볼 할 수 있거든요. 그걸 그냥 복사했어요. ㅎㅎ

건조기후 2014-02-18 10:40   댓글달기 | URL
저는 서평가도 아닌데 차례대로 읽었네요 ㅎ 매사에 좀 무신경한 성격이 이런 데서도 나오는군요..
글을 다른 데서 썼다가 복사붙이기를 하면 자간이 좀 넓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폰트가 이상하게 보이는 걸 거예요.

poptrash 2014-02-18 17:03   URL
네... 그냥 복사했더니... 근데 노트북으로 보는 거하고 데스크톱으로 보는 거하고 또 틀리네요 ㅎㅎ

pek0501 2014-02-18 13:50   댓글달기 | URL
오호... 서서비행을 구입한 사람으로서 님의 글을 관심 있게 읽었습니다.
1)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다. 3) 유머 감각은 중요하다.
이 두 가지는 저도 요즘 명심하고 있는 것이라서요.
제가 제대로 짚어냈다는 걸 확인하네요.
저도 신문에서 보고 이 책에 관심 있어 검색해 봤어요. ^^

poptrash 2014-02-18 17:06   URL
나열된 작가들 중 몇 명을 좋아하신다면 읽어보실만 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
 

마침내 돌아온 작가의 신작을 앞에 둔 채 지난 그의 잠적을 둘러싼 뒷소문을 늘어놓는 것은 점잖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글이라는 게 그렇다.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보는 하얀 종이(혹은 모니터)의 시선을 일단 의식하게 되면 뭐라도 시부렁거리게 되는 법이다. 첫 만남의 어색함을 견디지 못해 필사적으로 실없는 농담을 쏟아내는 사내아이처럼. 그러니 점잖은 인생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글 따위는 멀리하는 편이 좋다. 더불어 말도 아끼고, 사람들과의 접촉도 가능한 피할 것을 권한다. 물론 삶은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백민석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작가다.


그러니까 소문이 있었다. ‘전위·신세대·뉴웨이브 문학의 아이콘’으로 불렸(다)던 그다. 당시에는 ‘그로테스크’나 ‘엽기’ 같은 단어들이 그를 더 자주 수식했던 것 같지만, 아무려나, 촉망받는 젊은 작가가 종적을 감추었으니 소문이 없을 리 없다. 사소한 흔적조차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근거 없는 소문은 스스로 제 몸피를 불려갔다. 그는 충남 어느 바닷가에서 농사를 지었고, 식당에서 밥을 날랐으며, 세상과 담을 쌓은 채 평생의 대작을 집필하기도 했다. 지난 십 년 간의 일이다.


마지막 소문을 들은 것은 지난여름이었다. 그가 곧 돌아온다는 이야기였다. 반가웠지만 온전히 믿을 수도 없었다. 어차피 소문에 불과했으니까. 십 년이라는 세월이 내게 가르친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돌아왔다. 아홉 편의 단편이 담긴 소설집 <혀끝의 남자>와 함께. 나는 조금 놀랐다. 지금껏 그를 둘러싼 숱한 소문을 들었지만, 사실로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는 아직 이르다. 문제는 내가 만들어낸 소문이었다. 그러니까 ‘평생의 대작’ 설. 그것이 백민석을 잊지 못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내가 점잖지 못하게 주장해온 것이었다. “나는 작가가 되기 훨씬 전부터 도서관 소년이었”다고 말하는 작가가 책을 읽지 않을 리 없고, 읽는다면 쓰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며, 따라서 그는, 코르크로 방문을 막은 채 집필에 몰두했다던 누군가처럼, 세상을 놀라게 할 대작을 쓰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건 철없는 독자의 바람일 뿐이었지만, 소문이 대개 그렇듯, 어느덧 나는 스스로 그것을 믿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두 편의 신작과 새롭게 고쳐 쓴 일곱 편의 기발표작이라는 구성이 성에 찰 리 없다.


물론 그것은 백민석의 비즈니스가 아니다. 돌아보면 그는 언제나 그랬다. 유령처럼 되돌아오는 어제의 기억과 목을 죄어오는 오늘의 현실, 한국문학의 평균치를 상회하는 폭력과 섹스, 도무지 구해지지 않는 구원과 어디에도 쓸모없는 진실 등등. 그는 독자들이 기꺼이 듣고자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예의 무표정으로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들을 쓸 뿐이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십 년 만에 만나는 백민석의 새 소설들이다. 그러니 그것으로 일단 만족하기로 하자.


절필 당시의 심경을 담담하게 적고 있는 마지막 단편 ‘사랑과 증오의 이모티콘’에서 그는, 작가로서의 자신을 죽인 것이 나머지를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음을 고백한다. 앞으로도 그런 위기가 또다시 닥치면 몇 번이라도 작가로서의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다짐도 함께. 하지만 나는 그가 끝내 돌아올 거라고 믿는다. 그가 한 번 돌아왔다는 사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작가의 말’의 마지막에 그가 쓰고 있는 것처럼, 언제나 “가장 소중한 독자는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자는 원래 점잖지 못한 법이다.


시사인 3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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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차달 2013-12-17 17:58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말입니다. 팝 님께서 한수철 님에게 정영문 씨는 한수철 님에게 술 한잔 사야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말입니다. 백민석 씨는 팝 님에게 술 한잔 사야된다는 말을 제가 여기서 하고 싶네요. ㅋ (아, 인간의 기억이란, 아니, 나의 기억이란... 분명히 팝 님께서 한수철 님에게 하신 말로 기억하는데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불현듯 드는군요. 어쨌든 제 마음은 아시겠죠?)

poptrash 2013-12-18 11:16   URL
음... 역시 술은 얻어먹는 게 제 맛이라는 거죠? ㅎㅎ
 

처음엔 봄이라고 했다. 작년에 나올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은데, 확실하지 않으니 일단 넘어가도록 하자. 봄이 되자 상반기에 나온다고 했다. 상반기에는 여름에 나온다고 했고, 여름에는 추석 전에 나온다고 했다. 추석이 지나자 이번에는 시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11월이다. 여태껏 무언가를 이렇게 간절히, 그리고 길게 기다려본 적은 없었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마지막 장편소설 <2666> 이야기다. 아마 사람이었다면 모습을 나타내기를 기다려 흰 장갑으로 뺨을 때리며 결투라도 신청했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참을 수 없는 가우초>의 출간은 다소 뜬금없다. 2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얄팍한 책이다. 천 페이지가 넘는다는 둥, 전례 없는 ‘메가 소설’이라는 둥 소문만으로도 무시무시한 <2666>과 비교하자면, 치킨을 기대하고 있는데 삶은 메추리알을 준 격이다. 삶은… 계란도 아니고 삶은… 메추리알이라니 양이 찰 리 없잖아. 삶은 언제나 우리를 실망시킨다. 작고, 초라한데다 배까지 고프다. ( ) 우리는 살아간다.


앞선 문장에 존재하는 괄호, 그곳은 바로 문학의 자리다. 그리고, 그래도, 그런데, 그러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은 저마다의 말들로 괄호를 채운다. 볼라뇨는 그 자리에 ‘아무려나’라고 쓴다. 아무려나. 그것은 잇고, 부연하고, 강조하고, 뒤집고, 체념하는 다른 단어들과는 달리, 앞선 문장을 가볍게 넘어버린다. ‘삶’이야 어쨌건, 아무려나,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삶은 전부다. 아니라면 거짓말이다. 물론 볼라뇨는 삶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무시하는 것도, 그렇다고 긍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 도대체 뭐람?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삶이 먼저 있고 그것을 따라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들 각자가 사는 것이 바로 삶이라고. 그렇게 볼라뇨는 사람들이 삶이라는 것에 대해 떠들어대는 모든 헛소리를 날려버린다. 볼라뇨는 그것을 용기라고 불렀다.


<참을 수 없는 가우초>에는 모두 다섯 편의 단편과 두 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그리고 나는 앞서 ‘메추리알’이라고 한 것을 취소해야겠다. 국내에 출간된 그의 모든 작품을 따라 읽은 자신만만한 독자라도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들이 여기에 있다. 사실 길이로 작품을 판단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삶의 길이로 그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는 것처럼. 그리고 우리는 볼라뇨의 너무 이른 죽음을 알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뿐이다.


모든 작품들이 주옥같지만(나는 지금 아무런 회한도 부끄러움도 없이 이 단어를 쓰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단편 ‘경찰 쥐’와 두 편의 에세이가 좋았다. 특히 죽음을 앞둔 소회를 ‘문학적으로’ 밝히고 있는 ‘문학+병=병’과 스페인어권 문학의 현재를 러브크래프트 풍의 기괴한 이야기로 만들어버리는 ‘크툴루 신화’는 압권(나는 이 단어를 즐겨 쓰지 않는데, 어쩌면 볼라뇨에 대해 쓸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이다. ‘한국 문학의 오늘’ 같은 쓸데없는 주제를 종종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읽어볼 것을 권한다. 어차피 길이도 짧지 않은가.


나는 이 책을 세 번 읽었지만 조만간 한 번 더 읽을 생각이고, 그때까지는 <2666>이 출간되었기를 바란다. 아니라면, 한 번 더 읽지 뭐. 기다림에도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시사IN 323호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8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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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12월이 되었고 <2666>이 곧, 그것도 5권 세트로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쁘다.



 
 
패딩없는영구 2013-12-10 19:23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드디어 <4001>과 대적할만한 책이 나오나여!는 개소리고.. 완전 기대됩니다.

poptrash 2013-12-11 22:20   URL
총 5권. 세트로만 판매. 가격은 66600원이라고 하더군. 으아 떨려

곰곰생각하는발 2013-12-11 04:14   댓글달기 | URL
가우초가 그리 재미있네요... 아, 이거 좀 미리 땡겨서 쓰시지 그러셨습니까. 저 방금 책 지르고 오는 길인데 말입니다...

poptrash 2013-12-11 22:21   URL
<2666>과 함께 구입하세요 ㅎㅎㅎ
 

1

최근 책과 나 사이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못하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표현을 빌자면 “그리스 선박왕과 그 아내의 관계, 다시 말해 아내를 사랑하는 유부남이지만 아내를 최대한 안 보려는 관계” 같다고나 할까. 누구나 그렇듯 내게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무엇도 읽지 않은 채 말과 글의 침묵 속에서 보내는, 텅 비었지만 그 자체로 충만한 시간…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책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보낼 수 있는 그런 잠깐의 시간, 시간, 시간들이 필요할 뿐이다. 모든 유부남들이 꿈꾸는 것처럼.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밥벌이 탓이다. 어디서 무얼 하건 마음 속 한 구석에 있는, 읽고 써야하는 책들의 존재가 나를 심란하게 한다. 결국 억지로 책을 집어 들지만, 점점 소원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누군가 내게 “4주 후에 뵙겠습니다”라고 한다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것 같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잠 못 드는 새벽, 책들에 둘러싸인 채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느덧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한 책들의 부피가 나를 숨 막히게 한다. 책과 나 사이의 ‘아름다운 거리(한 마디로 “나는 침대, 너는 책장”)’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그렇다고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루가 멀다고 인터넷 서점을 클릭한 건 나였고, 숨어 있는 헌책방들을 찾아 발품을 판 것도 나였으니까(타임머신이 있다면 그때의 나는 오늘의 나에게 영문도 모른 채 두드려 맞을 것이다). 잠도 잊은 채 울고 웃으며 하얗게 지새던 밤들이 기억난다. 행여나 삐뚤어질까 정성스레 밑줄을 긋고, 조금씩 줄어드는 페이지가 아쉬워 이미 읽은 페이지를 읽고 또 읽던 날도 많았다. 더는 아니다. 생활이 우리를 집어삼켰고, 어느덧 우리는 같은 통장을 두고 고민하는(돈을 벌기 위해서는 책이 필요하고 책을 사려면 돈이 필요하지만 돈은 언제나 부족하다)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어 있었다.


2

이렇게 쓰고 보니 이 무슨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는 한심한 유부남의 일기인가 싶다. 나는 중년도 아니고 유부남도 아니다. 한심하긴 하지만 새로운 뉴스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비유라는 게 이렇게 무섭다는 사실이다. 고삐를 똑바로 쥐지 않으면 순식간에 우리를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데려가고 마는 것이다 - 캉디드를 자꾸만 사형장으로 데려가던 그의 말(馬)처럼. 운명을 암시하는 듯한 말의 행동에 캉디드는 불안에 떨었고, 그 말이 원래 장의사의 것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밝혀진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쓰는 비유 또한 장의사의 비유인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때때로 어떤 비유는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하지만 모든 비유는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는 법이다. 오늘의 진실은 이렇다 : 나와 책은 지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중이고, 그 책임은 전적으로 내게 있다. 내게는 그리스의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처럼 거창한 이름도, 어마어마한 재산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나의 처지를, 조건을, 혹은 입장을 찬찬히 들여다보기를 거부한 채 끊임없이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두도록 하자. 더는 책이라는 존재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반적인 서평을 기대하며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그것이 오늘 나의 입장이다. 그러니 오늘은 이쯤에서 장사를 접겠습니다, 그만 돌아가 주시길, 4주 후에 뵙겠습니다.


3

어라, 아직도 안 가셨네. 곤란한데…. 그럼 이렇게 합시다. 손님들의 요구를 들어드린답시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엉터리 글을 짓느니, 물론 손님도 그런 걸 바라진 않으시겠죠, 대신 제 것보다 훨씬 훌륭한 서평들을 소개해드리는 걸로요. 글 팔아서 장사하는 입장에서야 썩 달갑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는 게 마음이 편할 거 같네요. 네, 뭐, 다 사람 사는 일이니까요. 지금 당장 인터넷 서점에 접속해서 <이모부의 서재>를 쳐보세요. 저자 이름은 임호부입니다. 네, 임 호 부. 아니, 책 제목은 이모부고요. 원하신다면 가까운 서점으로 달려가셔도 좋겠지만, 큰 서점에 가야 할 거예요. 작은 출판사에서 낸 책이고, 그리 많은 부수를 찍지도 않았다고 하니까요. 네? 큰 출판사에서 많이 찍어야 좋은 책 아니냐고요? 세상에, 손님에게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만 돌아가 주시겠어요? 지금 당장이요.


4

임호부는 ‘입장들’이라는 꼭지를 이렇게 시작한다.


입장(立場)은 입장(入場)을 부른다. 말장난이다. 설 입(立)자와 들 입(入)자가 공통적으로 거느린 마당 장(場)을 떠올리다가 문득 입장에 가장 어울리는 장면은 결혼식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입장(立場)은 결혼식장에서 하객을 앞에 두고 신랑 혹은 신부로서 혼인서약이 이루어질 연단을 바라보며 ‘서는 것’이고, 입장(入場)은 신랑 신부로서의 입장이 분명해진 뒤 연단을 향해 ‘들어서는 것’이다. 입장이 정해지지 않으면 입장이 허락되지 않는다. (183쪽)


그는 이어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이렇게 설명한다. “하지만 우유부단하다는 것은 분명한 입장을 갖지 못하는 것, 즉 어느 쪽도 제대로 바라보고 서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쪽으로든 입장해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주저하는 것일 뿐이다.”(184쪽) 그는 입장(立場)이 분명한 사람이고, 그것은 어디에도 입장(入場)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그것은 단순히 ‘우유부단’이라는 말로 치부할 수 없는 입장이기도 하다. “소설의 입장(立場)은 어느 쪽으로도 입장(入場)하지 않을 때 가장 분명해진다”(186쪽)는 그의 말처럼, 그것은 문학의 입장이며 동시에 독자의 입장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독자(讀者)로서의 독자(獨子)의 입장이라고 할까. 또는 독자(獨子)로서의 독자(讀者)의 입장이라고 해도 좋다. 어차피 말장난이다.


하지만 모든 말장난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는 법이다. 그는 책을 읽겠다는 입장을 취하자마자 책 속으로 곧장 입장하는 행복한 독자는 아니지만, 그런 의미에서는 차라리 불행한 독자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그의 입장이 그의 글을 특별하게 만든다. 정치한 분석을 한다거나 방대한 정보를 준다거나 투명한 감수성을 엿볼 수 있다는 게 아니다. 그런 말이 아니다. 다만 그는, 책이 제공하는 이야기의 흐름에 자신을 의탁하기를 끈질기게 거부하는 그는, 더 많은 것을 본다. 김훈의 소설을 읽으며 병상 옆자리에서 “나이 아흔이나 돼서 병원에 누워 남의 손에 의탁하고 있으려니까 사는 게 참 치사하다, 그치, 엄마?”라고 말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카프카의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도 여전히 만연한 합의와 치욕을 보고, 정성일의 평론을 읽으며 곳곳에 숨겨진 (열광하는 자의) 숨 가쁜 헐떡임과 감탄사를 읽는다. 마치 외주교정자로서 그가 책과 거리를 둔 채 각종 오탈자와 비문을 읽어내는 것처럼.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그의 글은 사랑에 빠진 열정적인 연인보다는, 특별할 것도 없고 때론 지루한 결혼생활을 담담하게 이어가는 노부부를 닮았다고. 이때 중요한 것은 거리다.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되고, 너무 멀어서도 안 된다. 그것을 위해서는 거리를 가늠하는 감각이 필요하고 끊임없이 자신과 상대를 돌아봐는 세심함이 필요하며, 세상 속에 자신들의 입장을 매일 새롭게 세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다, 용기. 치사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니 <이모부의 서재>를 가리켜 용기의 기록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지도 모르겠지만, 오늘 나는 그렇게 말해야겠다. 책 바깥에 ‘현실’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멍청이들은 엿이나 처먹으라지.


서평집은 대개 세 종류로 나뉜다. 독자를 향해 쓴 것, 다른 저자들을 향해 쓴 것 그리고 저자 자신을 향해 쓴 것, 첫 번째 경우는 대개 독자를 통쾌하게 해주거나 최소한 독자에게 유용하다. 반면 거론된 저자들은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다(장정일의 <독서일기>와 로쟈의 번역비평이 여기에 해당된다). 두 번째 경우는 독자는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거론된 책의 저자는 손발이 오그라들게 만든다(이른바 주례비평으로 채워진 비평집들이 이 경우다). 세 번째 경우는 저자의 만족으로 그친다(서평 형식으로 쓰인 에세이집들이 대개 그렇다). 책은 소통의 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저자와 독자와 평자가 서로 다른 길을 가는 셈이다. (67쪽)


임호부의 서평은 어느 부류에도 들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책을 향해 쓴 것이라고 할까. 한 권의 책이 아니다. 책이라는 ‘장(場)’을 향한 것이다. 그곳에는 그가 읽은 모든 책들이 있고, 나와 당신이 읽었고 또 읽을 모든 책들이 있다. 책들을 향해 세워진 그의 입장이 있고, 그 입장에 선 채 그가 살아가는 세상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 각자의 입장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내가 무척이나 부끄러웠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부끄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지만, 아무려나, 마침내 ‘저자’라는 입장에 자신을 세운 그의 입장을 환영한다. 그가 본격적으로 서평을 쓰기 시작한다면 나는 아마 새로운 밥벌이를 고민해야 할 것 같다. 



* 덧붙임 : ‘어느 외주 교정자의 독서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모부의 서재>는 인터넷 서점의 서재에서 ‘후와’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가 그간 썼던 글을 추려 모은 책이다. 임호부라는 이름은 필명인데,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외주 교정 일을 시작하며 출판사 직원들이(“식당에 가면 주인아주머니에게 무람없이 이모라고 부르는 것”처럼) 이모부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을 어느 신입 편집자가 이름으로 착각하고 교정지가 담긴 봉투 겉면에 ‘임호부께’라고 써서 내밀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임호부가 되었고, 그의 첫 책은 <이모부의 서재>가 되었다.
















http://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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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서재에 글을 옮긴다. <이모부의 서재>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무언가 쓰고 싶었는데, 이제야 썼다. 그의 분류에 따르면 이 글은 '저자의 만족'에 그치는 글이겠지만, 아무려나, 기분이 좋다.


근데 이제 보니 '캉디드의 말'이 아니라 '자크의 말'인데 헷갈렸네... 



 
 
곰곰생각하는발 2013-11-09 20:46   댓글달기 | URL
자주 올려주십시요 !!

poptrash 2013-11-13 00:44   URL
그러겠습니다 ㅠㅠ !!
 

한윤형과 나는 몇 가지의 경험을 공유한다. 일단 세대가 같고(비록 내가 한두 살 많긴 하지만 그가 내게 말을 놓는 것으로 보아 동갑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비루한’ 자유기고가의 삶에 필요 이상으로 익숙하며(탈출에 성공한 그는 어엿한 기자가 되었고, 나는 여전히 연명 중이다), 같은 정당에 당비를 내고(상근자들에게 “한 푼이라도 보태기 위해 탈당을 유예”한다는 그와 달리 한 푼이 아쉬운 나는 종종 탈당을 고민한다), 공통의 지인들이 있다(출판계라는 게 워낙 좁은 동네라 어쩔 수 없다).


그러니 내가 그의 책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흥미롭게 읽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년배의 이야기다. 그만큼 공감의 여지가 많다는 말이다. 이쯤에서 당신은 그럼 그렇지, 혀를 찰지도 모른다. 이것을 또 하나의 ‘세대론’으로, 익숙한 편 가르기로 받아들인다면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또래 독자만으로 만족하기엔 그의 포부가 너무 큰 탓이다. 서문을 통해 분명하게 밝히고 있듯 “이 책은 또래에게는 위안을 주고, 다른 세대에겐 이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 읽어봐야 하는 책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


그는 청년 세대의 문제야말로 한국 사회의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표층이라고 말한다. 대학 등록금과 청년 실업, 점점 힘겨워지는 결혼과 출산, ‘내 집 장만’에 이르는 청년들의 문제는 곧 그들 부모의 문제이기도 하다. 부모야 제 자식이 안정적인 정규직이 되어 받아 마땅한 몫을 챙기기 바라지만 현실은 요원하기만 하다. 우리 모두는 IMF를 거치며 폭주하기 시작한,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한국식 자본주의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자식들에게 ‘투자’하느라 적절한 노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부모들은 기대했던 만큼의 수익을 돌려받지 못한 채 길고 궁핍한 노년을 보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이 청년층의 부모들은 하필 이 사회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베이비부머에 해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밥값을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내면화한 청년들은 스스로를 잉여로 부르며 만성화된 불안 속에서 어두운 미래를 향해 마지못해 걸어갈 뿐이다.


자, 이제 익숙한 질문이 등장할 차례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세대론의 대답은 명쾌하다. 저놈들이 나쁘다는 것이다. 차라리 ‘세대론’이라고 쓰고 ‘개새끼’라 읽는 편이 나을 지경이다. 기성세대는 이런 세상을 바꾸려하지 않는 무능한 청년세대를, 청년세대(를 지지하는 쪽)는 이런 세상을 만든 부패한 기성세대를 비난하며 서로에게 화살을 돌린다. 때로는 온 국민이 사이좋게 개새끼가 되기도 하지만 달라질 건 없다. 애당초 복잡하고 다층적인 정치사회적 문제를 단순한 세대론으로 환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이러한 세대 담론에서 정작 당사자인 청년들이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20대는 본인들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 모르고 관심도 없으며, 윗세대들은 그들의 견해를 참고하지 않으며 누구를 참고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규정하기 힘든 것에 대해 억지로 규정하려는 시도가 반복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비평거리가 된다. 따라서 오늘날의 청년 세대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맞닥트린 어떤 불안감의 실체를 대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불안감의 이면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우는 청년 세대의 삶의 문제를 발견한다.”(170쪽)


그리하여 <청춘을 위한 세대는 없다>는 일종의 ‘메타-세대론’이자 세대론을 극복하고 한국 사회의 다종다양한 문제들을 직시하려는 당사자의 목소리가 된다. 본인의 표현을 따르자면, 세대 담론의 유행 속에서 본의 아니게 담론 생산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 젊은 필자의 “청년 문제에 대한 당사자의 발언권을 사수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의 결과물인 셈이다. 그는 공허한 고담준론을 늘어놓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무심코 넘기는 일상사에 대한 섬세한 관찰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잉여(청춘)의 초상을 생생하게 그리는 동시에, 우리 사회의 각종 현안들에 대한 명민한 분석과 요약을 통해 일종의 지적 대리만족을 선사한다. 그렇다고 정치와 사회와 경제와 기타 등등에 대한 골치 아픈 고민을 그에게 ‘아웃 소싱’한 채 단지 책을 읽는 행위만으로 의식 있는 독자가 될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 그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가 딛고 선 자리를 돌아볼 것을 집요하게 요구하는데, 사실 조금 피곤할 정도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을 리 없다. ‘잉여 시대를 명랑하게 돌파하는 청춘 여행’이라는 서문의 제목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명랑이라는 단어의 주인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를 통해 스스로를 ‘낭만 혹은 명랑 공산주의자’라고 소개한 우석훈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한윤형을 처음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우석훈 박사님?”이라고 중얼거린 사람의 한 명으로서, 혹시 생길지도 모르는 불필요한 오해는 피하는 게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다.
















경향신문 2013. 4. 2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4192135225&code=90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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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문단은 물론 농담이지만, 어느 정도는 진심이고, 농이건 진이건 없어도 좋을 부분이다. 아는 이의 책에 서평을 쓴다는 게 어쩐지 겸연쩍어 부린 수작이고, 누군가 웃는다면 그걸로 그만이라는 생각이었지만, 사실 웃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지만,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구절에 대해 몇 마디 덧붙이는 걸로 만족하기로 한다. '교양의 실종'이라는 꼭지의 도입부다.


"세기말엔 지식인들이 '요즘 대학생들은 사회과학 도서를 보지 않고 <인물과 사상>이나 보고 있다'고 비판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나는 <인물과 사상>을 읽고 있었는데 내가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뜨끔했다. 십 년이 지나기 전에 <인물과 사상>은 망했고 지금 대학생들은 시사 잡지는커녕 소설책도 보기 힘들다. 나는 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오늘날의 <인물과 사상>은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110쪽)


서평 청탁 전화를 받은 게 월요일이었고, 마감은 목요일 오전이었지만, 정작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수요일 밤이었다. 책을 받은 게 그때였다. 하루 종일 집에서 택배를 기다리다, 결국 늦기 전에 교보문고에라도 다녀오자는 생각으로 집을 나서던 중 1층 우편함에 꽂혀 있는 책을 발견했다. 책을 읽는 마음이 급하지 않을 리 없다. 그럼에도 저 구절에서 독서를 멈추고, 한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해야만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십 년이 지나기 전에 <인물과 사상>은 망했고 지금 대학생들은 시사 잡지는커녕 소설책도 보기 힘들다."라는 문장 때문이다. 처음에는 비문인줄 알았다.


(A) "십 년이 지나기 전에 <인물과 사상>은 망했다"와 (B) "지금 대학생들은 시사 잡지는커녕 소설책도 보기 힘들다"라는 두 개의 단문이 합쳐진 중문이다. 비문이 아니다. 하지만 내겐 그 문장이 어색했다.  (A)를 읽으며 내 머릿속에서 이어진 문장은 (C) "요즘은 시사 잡지는커녕 소설책을 읽는 대학생들도 찾기 힘들다"였기 때문이다. 나라면 (B)와 같은 문장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A)와 (C)로 이루어진 문장, 그러니까 "십 년이 지나기 전에 <인물과 사상>은 망했고 요즘은 시사 잡지는커녕 소설책을 읽는 대학생들도 찾기 힘들다"는 무리 없는 문장이다. <인물과 사상>은 망했고(어떤 뜻으로 말했는지는 알겠지만 사실 망하지는 않았다...), 요즘 대학생들은 시사 잡지는커녕 소설책도 읽지 않는다는, 일종의 객관적인 진술 아닌가?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그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앞선 문장에 고등학교 떄 <인물과 사상>을 읽었고, 그러면서도 지식인들의 비판에 자기 반성을 하는 '나'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 뒤에 (C)가 등장한다면, 그것은 더는 객관적인 진술이 될 수 없다. '고등학교 시절에 <인물과 사상>을 읽었던 나'와는 달리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시사 잡지는커녕 소설책도 읽지 않는 대학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옛날엔 이랬는데 요즘 애들은... - 전형적인 꼰대의 문장. 이렇게 보자면 <인물과 사상>이 망한 것(물론 안 망했지만)도 대학생 책임인지 모른다. 읽지 않으니까 망할 수밖에. 이어질 이야기도 뻔하다. 사회에 관심을 갖고, 책도 좀 읽고, 스스로에게 매몰되지 말고... 뭐 그런 '어른'의 질타, 충고, 그리고 격려. 너무나 익숙하지만, 익숙하다고 당연한 건 아니다(그러니까 이건 너무 당연하게 (C)가 와야 한다고 생각한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다).


반면 (B), 그러니까 한윤형의 문장대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금 대학생들은 시사 잡지는커녕 소설책을 보기도 힘들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학생들이 힘들다는 것이다. 소설책을 보기도 힘들 정도라면, 그렇게 힘든 이유가 무엇인가? 말하자면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바로 그 대답이다.


세기말에 고등학교를 다니며 <인물과 사상>을 읽었던, 그럼에도 '<인물과 사상>이나 본다'는 지식인들의 비판에 뜨끔해했던 '나'의 성장담과(1부), 그런 '나'가 자라 시사 잡지는커녕 소설책도 읽기 힘든 대학생들의, 청년 세대의 현실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여러가지 고민들이(2부와 3부) 특유의 관찰과 분석, 요약과 정리를 통해 그려지는... 그런데 존나 따듯한 이야기...... 


그러니까 원래 저 서평은 이런 식으로 쓰여질 계획이었다. 

대부분의 계획이 그렇듯 그저 계획으로만 남긴 했지만.


무척 재미있는 책이다. 어떤 부분은 살짝 감동적(!)이기도 하다. 

그와 같은 세대는 물론 마더 파더 젠틀맨 모두 한번쯤 읽었으면 좋겠다.



 
 
하이드 2013-04-22 14:40   댓글달기 | URL
한윤형이 강남 교보 티움에서 ㅇ일 7시에 강연회.인가 사인회.인가 한다고 해서 지금 샵에 와서 날짜가 언제지? 찾아보다보니, 아마, 꿈이었던듯. 그리고 꿈의 원인은 이 글이었던듯. 합니다.

아, 꿈과 현실을 구별 못하는 이 봄날.

poptrash 2013-04-22 15:37   URL
오늘 강남 교보에서 7시에 강연회인가 사인회인가 한다던데요 ㅎㅎ
현실도 꿈처럼 느껴지는 이 봄날!

하이드 2013-04-22 17:37   URL
앗! 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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