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할 일이 몇 가지 있었지만 빈둥대던 새벽. 시급한 일을 하기 싫어 비교적 덜 시급한 일을 반쯤 끝내고 나니, 비로소 할 마음이 생겨 결국 아침에 잠들고 말았다. 문득 정겨운 후배 녀석이 생각났는데, 신년 초에 전화를 걸어 와 "그런 일이 있으면 제발 남한테 듣게 하지 마!"라고 나를 윽박지르던 녀석이었다. 나는 나를 윽박지르는 남자를 좋아하므로, 물론 여자는 더 좋아하지만 어쨌거나 녀석은 남자였으므로, 하지만 최근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나를 윽박지르는 인간은 점차 사라지고 있는 추세였으므로, 그 녀석을 생각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언제나. 두 시간을 자고 일어나 점심을 먹으러 합정에 나갔고 두 친구를 만났고 갈비탕을 먹었고 책 선물을 받았고 커피를 마셨고 잡담을 나누었다. 책 이름은 밝히지 않을 생각이다. 한 친구가 떠나고 남은 자리에서 나는, 그러니까 남은 둘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녀석을 남겨두고 향한 곳은 또 다른 커피숍이었고, 아는 후배와 선배가, 그러니까 둘은 부부였는데, 운영하는 작은 커피숍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작년에 빌렸던 책을 반납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책 이름은 밝히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여전히 마음속 한 구석으로는 후배를, 커피숍을 운영하지만 나를 윽박지르지는 않는 후배가 아닌 전화를 통해 나를 윽박지르던 정겹고 윽박지르는 후배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건 정말 생각일까. 시간은 항상 빠르거나 늦고, 대개는 늦다. 그런데 늦이라는 글자는 이상하다. 무척 게으르고 나른하면서도 어딘가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니까 나다. 나는 어떤 시인이었고 나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늦었다. 무엇에? 성애가 낀 창에 고양이 한 마리를 그렸다. 이름 없는 고양이. 창밖으로 고양이가 지나간다. 이름을 지어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도 생각일까. 문득 여자친구를 만나러 갔다.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내 모든 일은 예정에 벗어나있지만 그 자체로 조화로웠다. 어떻게? 그리고 그 자리엔 후배가, 윽박지르는 후배가 더없이 다정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없이 조화롭게. 몇 잔의 술을 마셨고, 몇 잔의 술을 마셨고, 몇 잔의 술을 마셨다. 커피도. 이야기도. 같은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가 각각의 질서에 따라 차례로 흘러나왔다. 세 번째의 커피숍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어제 알라딘에서 도착한 열네 권의 책이 나를 기다린다. 하나 같이 중고였다. 내가 펼쳐보지 않았는데도. 언제부터? 그리고 나는 책 이름을 밝히지는 않을 생각이다. 도무지 생각이 없다. 도무지, 생각이라는 것은 아마도 그때의, 어쩌면 정말 그때의, 의, 의, 의, 의, 의 생각이리라.
나는 조금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