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매를 잘못 서면 뺨이 석대라지만 책을 추천하는 일도 만만치는 않다. 사랑하는 작가의 책을 추천할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설마 책 한 권 잘못 권했다고 뺨이야 때리겠냐만, 나도 몰래 두근거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마치 사랑을 고백한 소년소녀처럼 상대의 반응만 초조히 기다리게 된다.

밀란 쿤데라의 에세이집 <커튼>에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폴란드의 소설가 곰브로비치를 무척이나 좋아하던 쿤데라는 한 프랑스인 친구에게 그의 작품을 꼭 읽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며칠 후, 다시 만난 친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한다. “당신 말대로 했어요. 그런데 정말이지 무엇 때문에 당신이 그렇게 열을 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당황한 쿤데라가 무슨 책을 읽었느냐고 묻자 <저주받은 것들>을 읽었다고 대답하는 친구. 쿤데라는 탄식한다. “이런 제기랄! 왜 하필이면 <저주받은 것들>이죠?”

쿤데라의 말에 따르면 그 작품은 곰브로비치의 대표작이 아닐뿐더러, 생전에 출판조차 거부했던 작품이다. 곰브로비치의 정수를 느끼려면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있는) <페르디두르케>나 <포르노그라피아>를 읽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친구는 우울한 표정으로 쿤데라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친구여, 내 앞에 펼쳐진 인생은 짧아요. 내가 당신 작가를 위해 소비한 시간의 분량이 바닥나 버렸어요.” 결국 소개팅이건 독서건 첫인상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이야기.

그런 의미에서 필립 K. 딕의 <높은 성의 사내>는 추천하기엔 조금 곤란한 책이다. 물론 ‘스펙’은 그럴듯하다. 일단 함께 출간된 <화성의 타임슬립>, <닥터 블러드머니>보단 훨씬 상식적인 제목이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독일과 일본이 지배하는 세계를 그린 대체역사소설이니 (‘진지한’ 독자들이라면 흔히 경계하곤 하는) 외계 생명체나 과학기술에 대한 장황한 설명도 없다. 게다가 휴고상까지 수상한 딕의 대표작이라고들 하지 않던가. “(딕은) <높은 성의 사내>로 현대 미국 소설에 혁명을 일으켰다”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추천사는 덤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만으로 책장을 넘기다간 십 분 이내에 졸음이 몰려올 것이다. 별 상관도 없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분명한 플롯 없이 중구난방으로 진행되고, 그들을 이어주는 유일한 연결고리인 ‘높은 성의 사내’는 사실상 아무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 맥거핀에 불과하며, 과학기술에 대해 장황한 설명 대신 일본에 의해 전 세계에 수출된 <주역>에 관한 지루한 설명이 수시로 등장하고, 그것으로 부족해 중반 이후 갈피를 잃은 이야기는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한 마디로 지루하고 심심한 소설이란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묘한 매력이 있다. 분명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보다 장르적 재미가 떨어지고, <유빅>에서 느낄 수 있는 상상력의 폭발·사고의 확장 같은 느낌도 없건만, <높은 성의 사내>만의 맛이 있는 것이다. 마치 평양냉면 같다고 해야 할까. 처음 먹을 때는 밍밍하고 무슨 맛인지 모르겠지만, 뒤돌아서면 자꾸만 생각나는 그런 맛이. 그러니 오늘의 (억지) 결론. 소개팅이건 독서건 한 번에 모든 걸 알 순 없으니, 인생 비록 짧을지언정 여유를 갖고 살아가자는 그런 이야기.




 
 
다락방 2011-10-14 17:20   댓글달기 | URL
취지는 좋고 이 글도 좋아서 저는 기꺼이 추천을 했지만, 그렇지만 저는 소개팅에 나온 찌질한 남자를 보고 절대로 여유를 가질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책이라면 여유를 갖고 읽어볼 생각이 조금쯤은 있지만요.

poptrash 2011-10-14 19:26   URL
음, 언젠가 이탈로 칼비노의 <우주 만화>에서 본 구절이 생각나네요. 한 남자 생물이(정말 생물임... 진화의 도정에서 갓 육지에 상륙한) 한 여자 생물을 쫓아다니는데, 이 여자아이는 아직 연못에서 살고 있는 남자 생물의 할아버지에게 반해요. 그런데 남자아이가 눈치도 없이 계속 쫓아다니니까 참다 못해 한 소리 하는 거죠. "꺼져, 이 올챙이야!" ... 언제 한 번 소개팅에서 써보세요.

하이드 2011-10-14 17:43   댓글달기 | URL
lg의 가을야구에도 여유..를? 아.. SK가 올라왔으니, 롯데는 이제 광탈만 남았어요. ^^

poptrash 2011-10-14 19:26   URL
저는 롯데가 이겼으면 좋겠지만, 이미 제 달력에서 야구란 건 이미 끝났으므로 책을 읽고 술을 마시겠습니다...

코르타사르 2011-10-14 19:10   댓글달기 | URL
덤으로 붙은 볼라뇨 추천사를 보니 복합적으로 므흣하군 ㅎ

poptrash 2011-10-14 19:27   URL
thanks to 라도 넣을 걸 그랬나 ㅎㅎ

비로그인 2011-10-15 13:41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추천하시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ㅋㅋㅋ 그동안 바쁘셨던 모양이네요^^

poptrash 2011-10-15 14:01   URL
정신이 나갔었어요. 좀 잘 나가요.

LAYLA 2012-01-10 00:38   댓글달기 | URL
poptrash님 근데 이 책 마지막이 무슨 말이에요?
저는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되어요
주역의 점괘처럼 메뚜기 책이 진실이라면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허구라는 것인가요? (매트릭스처럼)

힘들어도 결말 바라보고 열심히 읽었는데
밤 12시에 이 카오스라니 OTL

poptrash 2012-01-10 00:58   URL
이런, 어쩌죠.
그런 카오스 저도 뭔지 아는데,
도와드릴 수가 없네요.
지금 제게는 책도 없고,
지나버린 페이지는 대개는 잊어버리는 편이라.
다만 저는 그 부분을 읽을 때 별다른 의문이 들지 않았단 기억인데,
그렇다면 아마 생각하시는 게 맞을 거예요.
(혹은, 그냥 몽롱하게, 아무 비판의식 없이,
쭉쭉 단어들만 읽어나갔을 가능성도...;)

LAYLA 2012-01-10 01:41   URL
고맙습니다 poptrash님
모든 리뷰와 페이퍼를 샅샅이 뒤졌는데
poptrash님이 제일 잘 아실거 같드라구요
생각하는게 맞다는 이야기가 이렇게 설득력을 가지다니 ㅎㅎ
갑자기 카오스 종료 ^,^

poptrash 2012-01-11 01:53   URL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ㅎㅎ
하지만 정작 저는 저만의 카오스에 빠져 버린 밤이에요 ㅜ_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