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는 거짓말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바로 출판관계자들이 퍼트린 말이라는 것. 단순한 문장 뒤에 “그랬으면 좋겠다”, 혹은 “그래야 우리도 먹고 살지 않겠습니까”라는 절박한 마음이 숨어있는 것이다. 실제로 가을은 출판업계 최대의 비수기이고, ‘독서의 계절’이 ‘천고마비의 계절’과 더불어 가을을 수식하는 대표적인 문구가 된 오늘에도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말이 살을 찌우건 말건, 누가 책을 읽건 말건 도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물론 그들 입장에서야 무더위도 한풀 꺾이고, 시원한 바람도 불어오니 독서에 맞춤한 계절이라 말하고 싶겠지만, 건강한 영혼이라면 이런 날 방구석에 앉아 책이나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 법이다. 낮이면 문득 떠나고픈 마음을 주체할 길 없고, 밤이면 살갗을 스치는 선선한 바람에 술 생각 간절하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세상엔 책보다 아름답고 또  즐거운 것들이 존재한다. 출판관계자들이 독서의 계절이란 문구를 떠올린 것도 어느 나들이나 술자리에서였을 거라는 데에 소주 두 병과 오뎅탕을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지켜야 할 직업과 가족이 있고, 매달 납부해야 하는 핸드폰 요금과 카드대금이 있다. 훌쩍 떠날 수도, 술로 세월을 보낼 수만도 없는 노릇인 것이다. 그럴 때 당신을 위로하는 것은, 다름 아닌 책이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렇다. 세상엔 책보다 아름답고 또 즐거운 것들이 존재하겠지만, 가만히 앉아 몇 번의 클릭으로 받아볼 수 있는 것 중에 책보다 나은 것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그런 경우라면 진탕 술을 마시고 미련도 후회도 없이 세상을 떠도는 이야기가 좋겠다. 그 분야의 전문가는 물론 평생 술을 마시며 미국 전역을 떠돌던 찰스 부코우스키지만, 사회주의 체제의 구소련에서 17년간 신분증도 없이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했던 베네딕트 예로페예프의 이야기도 그에 못지 않다. 이를테면 술을 너무 사랑해 술 없이는 삶을 한시도 견딜 수 없는 남자의 애틋한 여행기인 <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에서, 출구 없는 현대인의 삶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는 이런 부분을 보라.

  “예를 들어 나는 술을 한 달 마시고, 또 한 달을 마십니다. 그리고 무슨 책이든 간에 집어 들고 읽으면 그 책은 아주 좋은 책인 것 같고, 내 자신은 바보같이 보여서 완전히 실망하고 책을 읽을 수가 없어서 책을 내던지고 술을 마시기 시작합니다. 한 달을 마시고, 또 한 달을 마시고, 그리고 그 후에는……. (중략) 이런 순환이, 이런 존재의 악순환이, 그것이 내 목을 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난 훌륭한 책을 읽어야만 합니다. 나는 누가, 왜 술을 마시는지 충분히 해명할 수 없습니다. 하류 사회는 위를 쳐다보고, 상류 사회는 밑을 쳐다봅니다. 그러면 나는 이미 어쩔 수 없이 책을 내던집니다. 한 달을 마시고, 또 한 달을 마시고, 그리고 그 후에는…….”

  이런 순환이 덧없게만 느껴진다면 볕 좋은 창가에 의자를 놓고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겠다. 아무려나, 하늘이 높은 계절이다. 인간이 아무리 책을 읽고 애를 쓰고 소리 높여 자신의 철학을 늘어놓아 본댔자 하늘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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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런 글을 쓰려던 게 아니었는데, 술이 한 잔 들어가면 언제나 이 모양이 된다.
아무려나 마무리는 시로. 이제 잘 시간이다.


가을 아침 등을 구부리고
신을 신는다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이 고요한 통곡은
어디서 오는가
번개가 치는구나
내가 그리운 사람이다

- 이승훈, '현관에서'

 

낮 동안 해를 품은 탓일까. 설거지를 하는 수돗물이 따뜻하다.



 
 
비로그인 2011-09-27 11:17   댓글달기 | URL
제가 추천했음. 새로운 주정뱅이를 발굴하셨군요. '알코올이 흥건한 환상의 고전'이라는 카피는 정말이지 실소를 자아내게 하지만... 저게 틀린 말이 아니라. 차라리 '알코올이 출간한 환상의 고전'이었으면 더 좋았을 걸. 작가도 편집자도 발행인도 모두 알코올 아래 하나된 환상의 고전 뭐 이렇게. 그리하여 독자도, 가을은 오뎅탕에 소주냐, 소주냐 나냐 그것만 말해, 뭐 이렇게.

poptrash 2011-09-27 19:02   URL
술 마시고 춤을 추고 노랠 해봐도... 하지만 정작 나는 오뎅탕을 좋아하지 않는다네 그렇다고 닭한마리라고 쓰면 그건 또 너무 마이너한 거 같고, 정말 그게 '(이를테면 하림)닭한마리'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고 그래서 오뎅탕이라고 쓰고 말았다지만 나는 언제나 소주의 편에 서겠소.

자노아 2011-09-27 15:24   댓글달기 | URL
요네하라 마리의 <러시아 통신> 속에 언급된 것만 보고도 비범한 책이겠구나 했는데 팝 님 페이퍼 보니 역시,군요. 읽어봐야겠어요.
가을은, 정말이지,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 없는 계절이군요. 하물며 책 따위가 읽히겠습니까.ㅎㅎㅎ

poptrash 2011-09-27 19:01   URL
아, <러시아 통신>에 실려 있군요. 문화편력기 이후로는 읽지 않았는데 찾아봐야겠네요.
정말요 가을이 아주 미치겠어요.

영구 2011-09-27 23:52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을 타시는가봐요. 전 그런 것도 안타고 사람이 너무 뭉툭한 듯.. 저 책은 표지가 정말 을유문화사적이네요. 물론 나쁜 의미로요.

전 요즘 <머니볼> 읽는데(영화로 만들어졌는데 무지 재밌다길래. 소셜 네트워크의 야구 버전이라나 뭐라나요) 야구를 잘 알면 훨씬 더 재밌을 것 같습니다. 몰라도 읽는데 지장은 없지만 언급되는 선수도 하나도 모르겠고 말이죠. 시간 날 때 읽어보셔요. 참, 절판된 책이니-..-문의는 가까운 도서관으로 해주시고요.

poptrash 2011-09-28 00:15   URL
봄 여름 겨울에는 가을을 타고 싶어도 탈 수 없으니, 그렇다고 겨울에 스노보드나 스키를 타러 가는 것도 아니니 가을이라도 탈 수 있을 때 타야겠지.

'내가 한때 메이저리그를 즐겨봐서 아는데' 이제 부자 구단들이 다 빌리 빈식 야구를 도입해서 정작 오클랜드는 별 볼일 없는데 브래드 피트 나오는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해서 조금 놀랐음. 근데 왜 절판이 된 건지? 번역 문제가 조금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영화 개봉 맞추어서 개정판을 내려나.

하지만 역시 야구는 LG 야구. 혹시라도 야구를 볼 생각이 있다면 LG 트윈스 경기를 보렴. 야구 따위에 인생을 낭비하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질 테니...

비로그인 2011-09-28 07:35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세상엔 책보다 아름답고 즐거운 것들이 많아요. 우선 가을부터가 그렇잖아요ㅎㅎ^^

poptrash 2011-09-28 18:30   URL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 란 노래가 생각나는 댓글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