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배경으로 한 존 스칼지의 순도 100% 오락소설 <노인의 전쟁>을 읽다 그만 눈물을 흘릴 뻔 했다. 75세 이상의 노인들이 우주전쟁에 참전한다는 중심 플롯과는 별 상관없는 어떤 장면 때문이었다.
입대를 결심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테스트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한 노인이 분통을 터트린다. 테스트를 진행하던 검사관이 “월드시리즈 우승도 한번 못하고 200년이 지났으니 컵스는 마이너리그로 강등시켜야 한다(2011년 현재 그 기록은 103년이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에 다른 노인이 그거 말 되는 이야기라고 맞장구를 치자 노인은 정색하며 말한다. “절대 그런 말 꺼내지 마, 젠장. 나 진심이야. 컵스에 대해 허튼 소리 말라고.”
그래, 나도 진심이었다. LG 트윈스가 9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향해 순항하고 있던 올 시즌 중반까지는. 누군가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는 김재박 전 감독의 명언을 들먹이기라도 할라치면 올 시즌은 다르다고 정색하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달라 보였다. 비록 잠시나마 5016일 만에 정규시즌 1위를 탈환했던 시즌 아닌가. 하지만 어느덧 시즌도 막바지를 향하고 있는 지금, LG는 5위를 기록하고 있다. 수많은 팬들의 진심어린 정색과는 상관없이 LG는 내려갈 팀이었던 것이다.
높이 올라갈수록 더 깊이 추락한다고 노래했던 게 아마 메탈리카였던가(5016일 전에는 나도 메탈리카를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삐걱대기 시작한 팀은 말릴 새도 없이 미끄러지기 시작했고, 많은 프로야구 팬들의 공분을 산 트레이드까지 단행했지만 한 달 넘게 루징 시리즈를 이어간 끝에 결국 지금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익숙한 자리다. 그렇다고 패배까지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참다못한 팬들은 청문회를 열었고, 구단 측의 대응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이 자리에서 지루한 갑론을박에 한 마디를 보탤 생각은 없다. 나는 그저 야구 대신 책을 집을 뿐이었다. 나 자신의 평정심을 위해서. LG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지난 8년간 인생이 내게 가르쳐준 게 하나 있다면, 야동과 야식과 야구는 인생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올 시즌 넥센이나 두산, 특히 SK를 응원하던 팬이라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거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책을 읽으면서도 야구, 아니 스포츠 관련 서적은 절대로 손에 잡지 않았다. 버나드 맬러무드의 <수선공>을 읽은 후 그의 <내추럴>까지 내처 읽으려다가 그만두었고, 정우영 캐스터가 번역한 <괴짜 야구 경제학>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그런데 닉 혼비를 읽은 게 잘못이었다. 마침 새로 시작한 연재와 관련해서 <런던스타일 책읽기>를 다시 읽다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맞닥뜨렸고, 결국 참아왔던 분통을 터트리게 된 것이다.
“사실 오랫동안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스포츠의 핵심이란 패배의 쓰라림이다. 모든 스포츠 선수는 이를 알고 있다.”
이봐, 닉 혼비. 당신이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 승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 당신이 아스날의 암흑기와 함께 패배의 쓴 맛을 느껴왔다는 것도 잘 알겠고. 그렇지만 쓰라림으로만 가득한 스포츠가 가능하다고 생각해? 정작 당신의 아스날은 티에리 앙리와 함께 EPL 03/04 시즌 무패우승을 이룩하기도 했잖아? 그러니까 내 앞에서 절대 그런 말 꺼내지 마. 젠장, LG 트윈스 팬한테 허튼 소리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