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 - 신영복의 언약, 개정신판
신영복 글.그림 / 돌베개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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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내가 읽은 신영복 선생님의 <처음처럼>은 개정신판이다. 2007년에 초판으로 출판된 걸 읽었었는데, 올해 독서토론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읽기 위해 개정신판을 구입해서 다시 읽었다. 초판보다 분량이 늘었고, 시대의 아픔-세월호-에 관한 글이 새롭게 실렸다. 이 대목에서 신영복 선생님의 꾸준한 성찰적 자세를 엿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회 현상을 통해 스스로를 포함한 우리 인간의 꾸준한 성찰을 해야 한다는 자세, 매 순간이 언제나 처음이어야 한다는 결기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선생님께서는 매 순간을 성실하게 사셨다는 반증 아닐까 한다.

 이십대 중반 무렵 나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시작으로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만났다.(후로 두 번 정도 선생님의 강연을 직접 들을 수도 있었다.) 그 후로 <더불어 숲> <나무야 나무야> <담론> <강의> <변방을 찾아서>을 읽었다. 또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을 읽었는데, 그건 뒤에 신영복 선생님께서 뒤친(번역한) 글이란 걸 알게 되었다. 전반부의 책들은 짧은 에세이를 묶어 놓아 읽기가 쉬울 것 같지만, 내용이 진중할 뿐만 아니라 글에 힘 있이서 곱씹게 되는 내용이 많았다. 그러니 한 편의 에세이를 읽고서, 그것이 아무리 짧다 하더라도 다시 읽어보고 되새기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책 <처음처럼>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의 글이 이처럼 진중하고 도저한 뜻을 품고 있는 것은 고전에 대한 깊은 공부에서 길어온 것이어서도 그렇겠고, 감옥에서 보낸 시간, 그러니까 사람이나 본인, 그리고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빚어진 정수같은 것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 책의 앞 부분은 이렇게 시작한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길게 보면서,

먼 길을 함께 걸었으면 합니다.

저도 그 길에 동행할 것을 약속드리지요.

 이 말씀은 생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독자들에게 남긴 말이다. 선생님께서는 `길게`와 `함께` , `동행`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셨고, 실천하셨다. 그리고 영면에 드셨어도 우리들과 함께 길게 동행하겠다는 약속을 하신다. 삶 전체, 아니 죽음 이후에까지 이렇게 치열하게 실천하시는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책 본문은 책 제목이 된 짧은 걸로 시작한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책 21쪽) 

 

 이 글은 책의 초판에서도 제일 처음 실린 것으로, 그만큼 선생님의 삶을 대하는 자세를 담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매 순간을 처음처럼 대하는 선생님의 성실함은, 긴 영어의 생활도 꿋꿋하게 이겨낼 수 있었던 배경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그 후로도 흔들림없이 깊은 사상적 성찰을 설파해오실 수 있도록 한 원천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선생님의 글은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버릴 것 없이 마음에 꾹꾹 새겨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 모든 걸 여기다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무리이고, 특히 마음에 남는 구절 몇 개 정리해 두어야겠다.

 

물은 빈 곳을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

결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차곡차곡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  (책 124쪽)

 

 `盈科後進`의 제목이 달린 글의 전부이다.

 소위 지금의 시대를 속도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빠른 일처리에 능숙한 사람이 능력있다 평가받는 경우가 많고, 기계의 성능도 빠른 일처리로 평가되고 값이 매겨진다. 생활의 속도는 우리 부모 세대보다 더 빨라졌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빨라졌기 때문에 좋아진 것도 있을 것이다. 일의 효율이 높아졌다는 것이 대표적이겠지. 그런데 삶의 질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바빠 죽겠다는, 사람이 주위에 많다. 아니, 기계의 일처리 속도도 전보다 빨라졌고, 많은 일들을 자동화했는데, 왜 우리는 바빠 죽는 걸까?

 어떤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집중하기 보다, `이 일을 끝내고 나면 저 일을 해야지.`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현재에 충실한 삶보다 오지 않은 순간을 걱정하며 준비하며 각오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현재에 만족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현재에 충실한 경우도 많지 않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빈 곳을 채우고서야 다음이 있다, 말씀하신다. 일에는 과정이 있다는 말씀같기도 하고, 현재에 충실한 것이 미래를 기약하는 것이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내가 다시 이 서재에 글을 남기기로 마음 먹은 것은, 실은 선생님의 이 글이 남긴 여운 때문이다. 거기다 독하지 못한 독서는 진정한 책 읽기가 아니라는 선생님의 말씀과 함께!

 

세상에 완성이란 없습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이 삶의 참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삶은 반성이며 가능성이며 항상 새로운 시작입니다. (책 153쪽)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누구나 갖고 있다. 나 역시 그래서 조마조마한 마음을 갖는 경우가 많고, 때로는 아예 실패가 두려워 도전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실패가 참 삶이라 말씀하신다. 그 속에 반성이 있으며 가능성이 있다고, 그래서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씀하신다. 마음에 눌어담아 두어야겠다. 완전히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진 못하더라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되면 좋겠다.

 

바깥에서만 열 수 있는 문은 문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열어 주는 문도 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손으로 열고 나가는 문이라야 합니다.

자기 발로 걸어 나가는 문이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책 172쪽)

 

 

 `감방문 안쪽`이라는 제목이 달린 글이다. 선생님의 체험에서 길어올린 글임은 분명하다. 답답한 감방을 스스로 걸어나오고야 말겠다는 결의같은 것이 무겁게 느껴진다. 누군가의 힘을 빌어 자유를 얻겠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의 결기로 자유를 쟁취하고야 할겠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나는 언제라도 한 번 이런 주체적인 의지를 세워보겠다 다짐했던 적이 있었나. 부끄럽다.

 

세월호의 참사는 하부의 평형수를 제거했기 때문입니다.

과적 증축 정원 초과 등 상부의 과도한 무게에 비하여

하부의 중심이 허약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부를 증축하는

감시권력의 강화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부의 중심이 든든해야 합니다.

하부는 서민들의 삶이며 그것을 지키려는 민중운동입니다.

이러한 서민들의 의지를 억압하고 상층권력을 강화하는 것은

평형수를 제거하고 또다른 세월호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책 272쪽)

 

 `세월호`라는 제목의 따끔한 글이다. 새로운 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 운동이 한창인 요즘, 우리들의 표심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 이대로 괜찮은지 걱정스러울 때가 있다. 과도한 상층 권력의 무게를 빼내고 삶과 민중을 지키려는 민중운동의 흐름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인지, 아니면 새로운 상층권력을 뽑아 또다른 세월호를 만드는 우를 범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그래도 선생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은 잊지 않으셨다. 강연이나 글에서 여러 차례 밝히신 `碩果不食` 씨 있는 과일은 먹지 않는다는 의미다. 언제고 씨앗을 틔워 새로운 열매를 맺을 가능성 때문이다. 지금 우리 현실이 암울하고 참담하다 해도, 희망의 언어를 놓아서는 안 된다. 함께 손잡고 같이 비를 맞는 자세로 앞으로 올 희망을 노래하길, 선생님께서는 당부하고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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