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진주 > 안착

9년이 지난 현재를 사는 나는 9년 전의 그 슬픔을 알아채지 못 하였다. 그래서 나는 우울했다는 9년 전 어제 일기를 남의 일처럼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 친절한 알라딘 북플 기능은 9년 전 오늘을 다시 소환시켜 주었다. 기억상실 같았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그가 입원했던 병원 복도가 빛의 속도로 되살아났고, 복도 벽에 걸렸던 어떤 그림도 떠올랐다. 9년전 어제의 번호표 대기자 28명도 그제사 알 것 같았다. 입원 전 날 병원에서 검사나 서류를 떼기 위해 몇 번의 대기가 있었던 것이다. 담당 주치의 이름도 생각난다. 장ㅂㄱ. 무겁게 입을 떼던 의사의 표정도.....그래서 그 때  나는 슬펐고 어느 그림 앞에서 소리죽여 울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늘 ‘9년 어린 나‘를 다독여 주고 싶다. 너, 많이 힘들지....감당하기 힘든 걸 홀로 떠안고 두렵고 슬퍼서 떨고 있구나. 누구와도 나눌 수 없어서 외로웠지. 그러나 혼자가 아냐. 이제는 9년 더 늙은 내가 그 아픔을 알잖아. 그리고 이제는 편안해진 그도 알아줄거야.


달려갈 길이 멀기에 일기에서조차 다 표현하지 않고 담담하려고 했던 나. 고단한 마음일랑 그림 한 장에 걸어놓고 돌아섰던 9년 전 내가 의연해 보인다. '퍼질러 우는 건 나중에 언제라도 할 수 있어!'라며 다부지게 마음 먹었지만 한없이 가녀렸던. 예감이나 했을까? 그 후로 몰아칠 거센 인생의 격랑을.....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몰라도 진심을 다해 한 발씩 나아가는 것.





/20200330ㅇㅂㅊ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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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0-04-06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빛처럼 빠르게
빛처럼 느리게
그러나
언제나 빛으로...

진주 2020-04-14 22:29   좋아요 0 | URL
아이들 많이 자랐겠어요....식구 모두 건강하시죠?

반딧불,, 2020-04-08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끝내 눈물을 떨구게 하시네요.. 9년 전 슬퍼했던 진주님과 오늘의 진주님께...괜찮다고..꼭 안아주고 싶네요.

진주 2020-04-14 22:28   좋아요 0 | URL
그때...돌이키기 힘들다는 전문가의 말을 듣곤 일순간 다리에 힘이 다 풀렸던 기억이 나요.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았었어요. 우리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그 이후의 결과는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더라구요. 머리는 그렇게 이해하자 아는데 가슴은 금방 그렇게 받아들여지는게 아니란.

hnine 2020-04-10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9년이 되었고, 9년의 세월도 부족한거군요.

진주 2020-04-14 22:20   좋아요 0 | URL
그때도 댓글 남겨주셨는데....
그로부터 한 3년간 치열했었죠. 그리고 6년이 지나가고 있어요. 순간이 영원같고, 영원이 순간이기도 한가 봐요

moonnight 2020-04-26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주님..ㅠㅠ

moonnight 2020-04-26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신지 안부 묻고 싶어서 들렀어요. 주제넘게도, 꼭 안고 싶은 진주님ㅠㅠ
 
 전출처 : 진주 > 번호표를 받아들고

9년 전의 나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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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진자들의 동선 문자를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인근 읍 면까지 다 합하여 인구 40만인 작은 도시에 60명의 확진자가 발생하다 보니 '시내'라고 불리는 내 사는 곳은 촘촘한 거미줄마냥 그들의 동선이 얼키고 설켜 있다. 본의 아니게 나도 한 달 가까이 (일을 못하니 자동으로)자가격리 당해 있어서 한 발짝도 현관 밖으로 안 나가는 날이 더 많지만, 그래도 산 사람이라 움직여야 할 때가 있을거라고 생각하여 꼼꼼하게 확진자의 동선을 살피게 된다.



그들의 동선은 다른 듯하면서도 비슷하다. 비슷해도 소름끼치게 비슷하다. 신천지 확진자들의 동선에 신천지 관련 행사나 모임이 있다는게 다를 뿐, 그것을 빼면 동선들은 대개 닮은 면이 있다.



20~30대 비교적 젊은 이들은 한결같이 커피 가게에 일수 도장 찍듯이 간다는 것이 신기하다. 처음엔 약 일 주일치 동선이 공개되었는데 커피 가게를 날마다 가는 사람도 적잖았다. 촌동네에 무슨 장사가 되겠나 싶어도 한 잔 커피값에 손 덜덜 떨리는 비싼 브랜드 커피 가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어느덧 우리는 커피 없이는 못 사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나에게 커피 가게는 누군가를 만나서 밥 먹고 다음 순서로 가는 곳이다. 만난 이와 함께 회포를 풀며 이야기하는 간간이 홀짝거리며 마시는 것. 만남의 댓가를 커피값으로 기꺼이 지불하고 커피는 그저 향기로운 배경이 되어주는 곳일 뿐이다. 그러나 요즘은 많은 이들이(특히 젊은 세대) 나처럼 고루한 이유로만 커피 가게를 찾지 않는가 보다. 커피는 밥 보다 더 자주 마셔야 하는 생필품이 되었다. 커피 맛이나 향에 매료된 것인지 아니면 각성없이는 버텨낼 수 없는 세상에 살기 때문인지? 나처럼 집이나 사무실에서 커피를 내린다거나 하다못해 봉지 커피 따위로 그 기호를 채우기보다는 전문점에서 바리스타가 내려준 커피를 사는 게 일상이 되었나 보다. 



그리고 30~50세 여성들의 동선에는 빠지지 않고 크고 작은 마트가 있었다.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고 해도 주부가 식구들 먹거리 해결하는 사명은 여전한가 보다. 주부들의 동선에 애잖함을 보내는 건 섣부르다. 그 또래의 남성들은 회사와 집 두 군데만 찍는 장면이 많았기 때문이다. 집과 회사만 오가는 모습을 상상하니 짠하기 그지없다. 설마 일터와 집만 반복하며 살았을까, 다 공개 안 한 건 아닐까 싶은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사람이 어떻게 거의 날마다 두 곳만 오가며 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나만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코로나 이전에 나는 밖에 나가서 일하고 집에 와선 잤다. 남들도 나만큼이나 단조롭게 산다니.....



기억의 한계치까지 생각나는 그간 나의 동선은,


10(수) 집

11(목) 차로 10분거리 사무실 2시간 - 셀프주유소 - 아들자취방에음식배달

12(금) 집, 집근처 산책로 1시간

13(토) 집

14(일) 집

15(월) 집, 집근처 산책로 40분 - 드라이브스루 버거킹

16(화) 인근 아파트 1시간 - 약국20분 대기 후 마스크 구입 - 아들자취방에음식배달

17(수) 현재까지는 종일 집



흠냐........

누군가가 나의 동선을 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이거 산 사람 맞아? 이 사람이 확진자와 접촉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데? 라고 말할지도. 그리고 또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 사람, 한 주 동안 사람 만나는 건 없어? 이러다 우울증되는 거 아냐? 이렇게 외롭게 버려져도 되는 건가? 



모르겠다. 확실한 건, 외로움보다 전염병이 더 무섭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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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3-18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세드신 분들이 코로나보다 외로움이 더 무섭다 하시며 마스크 끼고 있을테니 노인회관 문 열어달라 하셨단 기사에 찡했던 기억 나네요ㅜㅜ 저도 아직은 전염병이 더 무서워서 집과 직장만 오갑니다만은.. 확진된 분들 동선이 낱낱이 공개되는 것도 참 못 할 일이에요ㅠㅠ

진주 2020-03-27 15:38   좋아요 0 | URL
저도 5주째 이러고 있네요...그저께 월급받았는데...흠 십분의일 정도 나왔어요ㅠ 생활안정지원금 대출받아서 살림꾸려보네요....
햐~~~~
이거참....제발 이젠 좀 수그러들면 좋으련만....
그나저나 달밤님은 어느 동네 사시나요? ㅎ

moonnight 2020-03-27 21:13   좋아요 0 | URL
진주님. 저도 TK.. ㅠㅠ;; 초반에 직장 근처 건물 두 군데서 확진자 다녀갔다고 방역하고 건물 폐쇄하고 해서 한참 흉흉했어요-_-;;; 코로나 걸릴까봐 걱정도 되고 걸린 줄도 모르고 수퍼전파자 될까봐 걱정도 되고 하여간에 노이로제 상태네요-_-;;;; 경제적으로도 어서 해결됐으면 좋겠는데 장기전으로 갈 것 같아 걱정이 태산이에요ㅠㅠ 진주님 우리 굳게굳게 버팁시다ㅠㅠ;;;;;;

라로 2020-03-20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신문(?)에서 한국에 그런 앱이 있다는 기사를 읽었는데
진주 님의 글로 읽으니 정말 좀 살벌한 느낌이 드네요.
그 사람들의 존엄성은 어떻게 되는 건가? 싶은...
어쨌든 저는 오늘 시험을 봤는데 4월 6일까지 숙제도 없다고 하니까
좋은지 싫은지 뭔지 모르겠었는대 아마도 무서운 건가봐요.

진주 2020-03-27 15:44   좋아요 0 | URL
존엄성이요? 존엄성도 사람이 살았을 때 의미있는게 아닐까요? 이건 단순한 감기몸살이 아니예요...무서운 전파력 때문에 혹시라도 확진자 동선과 겹치면 재깍 검사, 격리 등의 조치가 이뤄져야해요. 잠복기가 길어서 늦게 발견될 수록 무의식 중에 감염원이 될 수 있으니까요
걷잡을 수없이 번지는 역병을 잡기위해선 개인의 동선정도는 탈탈 털리는 희생감수하는거지요
...

진주 2020-03-27 15:42   좋아요 0 | URL
그리고 라로님 확진자의 동선은 사설 앱에서 보는건 아니고, 우리나라 질병본부에서 공식적으로 안전문자로 보내와요. 국민의 안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위급한 위험을 공식적으로 알려주죠. 폰으로 다른 걸 보다가도 안전문자 뜨면 강제적으로 안전문자 반드시 확인하게끔 되어있어요

라로 2020-03-28 11:55   좋아요 0 | URL
앱이 아니군요. 안전문자로 보내는 거라니 역시 뉴스도 잘 알지 못하면서 그런 기사를 실었네요.
코로나에 대응하는 안전문자라니 정말 훌륭한 시스템이에요!
여기도 곧 그런 시스템이 도입되면 좋겠어요.
현재 여기는 재난시나 앰버 얼러트라고 키드닙핑을 하면 울리거든요.

그리고 존엄성에 대해 제가 애기를 꺼낸 이유는 아마도 제가 학교에서
사람이 죽더라도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는 교육을 계속 받아와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더라도 그것이 죽음으로 연결이 된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존엄성은 언제든 지켜져야 한다고 배우거든요.
이제 제가 그런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제 생각은 여전히 존엄성이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사용하는 시스템은 누구의 존엄성도 헤치는 것이 아닌 현명한 방법이라 응원합니다.
제가 힘이 없지만 이런 시스템이 한국에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네요.
어쩌면 전세계의 시장들이 모임을 한다니까 TK지역의 시장이 이런 정보를 나눌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제가 모르는 것을 바로잡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독립운동 100주년 시집 - 님의 침묵,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그날이 오면, 모란이 피기까지는, 광야, 쉽게 씌어진 시
한용운 외 지음 / 스타북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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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ㅡ 과거, 추보식 구성

하늘이 처음 열리고 ㅡ 광야의 탄생

어디 닭 우는 소리가 들렸으랴. ㅡ생명의 기척



끊임없는 광음을 ㅡ 오랜 세월

부지런히 계절이 피어선 지고 ㅡ 세월을 꽃에 비유, 추상적 개념을 시각화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ㅡ 역사의 시작




지금 눈 내리고 ㅡ 현재 일제 강점하의 시련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ㅡ 현실극복(광복) 의지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ㅡ 독립을 향한 강인한 생명력, 명령형 종결은 의지적 태도



다시 천고의 뒤에 ㅡ 미래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ㅡ조국광복을 가져오는 민족의 구원자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ㅡ 예언자적 태도, 미래지향적



===

지금 눈발이 날린다.
눈 속에서 매화 향기는 어찌나 황홀하던지!
얼마 전에 뜰에 매화 핀 걸 보고 사진 찍어
카톡 프로필에 담아 다니면서도
뭔가 허전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는데
눈이 나리니 비로소 잃었던 짝을 찾은 것 같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육사의 싯구 이 부분 덕분에
매화와 눈은 따로 뗄 수 없는 조합인가 보다.


일제 강점기에 감히 비할 순 없지만

내 개인의 삶에도 지금 갑작스런 눈이 내리고, 나는 지금 눈에 갇혀있다.
강인하진 못해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텨내야 할 텐데...
회사에서 생활안정자금을 무이자로 지원해준다니
내일은 신청해봐야 겠다.


눈이 내리면 언제까지 내리려구..
한파라고 해봤자 지가 어쩌겠냐구, 이미 춘삼월인데.
찬 바람이 잉잉 댈지라도 며칠 남지 않았다.
며칠 남지 않았다.
봄이여, 얼른 백마타고 오길.


200315ㅇㅂㅊㅁ


※ 사진에 이육사 이름 한자는 수인번호 264를 생각하여 일부러 64라고 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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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20-03-16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로나에 묻혀 봄이 오는지도 몰랐는데, 우리집 마당에도 매화가 피고 거리엔 목련도 활짝 피었더군요.
바람은 차도 바다도 너무 푸르고 아름다워, 친구랑 산책하고 들어왔어요.
매화에 눈이라, 상상만 해도 좋네요.
코로나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봄은 오고 꽃은 아름답네요.

진주 2020-03-16 23:53   좋아요 0 | URL
역경이 어우러져야 인생도 좋은 것일까요?
평탄하길 바라지만 화약을 짊어지고 불길로 들어가는게 인생이기도 하고...ㅎㅎ
혜덕화 님, 봄맞이 즐거우셨나 봐요^^

hnine 2020-03-17 0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험에 자주 나오는 시라서 저렇게 행마다 의미 해석까지 외워가며 배웠던 시였죠. 옛날 생각 납니다.
어려운 시절 잘 넘겨야지요. 우리 모두.

진주 2020-03-18 11:24   좋아요 0 | URL
찬찬히 읽으면 저 정도는 이해하리고 생각했지만, 제 착각이더라구요. 어쩔 수 없이 아해들에게 저렇게 반강제로 공부시켜놓고 감상은 두번째죠. 저도 안그러고 싶은데 요즘은 공부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요. 시를 머리로 익혀요.
우리 어릴 적이 좋았어요!
저는 아직도 중학교 시절에 시 배우던게 생각나요.
사실 그게 저의 전 재산이죠...
제가 배웠던 방식으로 요즘 아해들에게 가르치고 잡습니다 진심ㅠ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 인생이 빛나는 곤마리 정리법
곤도 마리에 지음, 홍성민 옮김 / 더난출판사 / 2016년 2월
평점 :
품절



나는 더이상 넓은 집이 필요없게 되었다. 




전처럼 찾아올 손님도 친척도 없을 뿐만 아니라 끼고살것만 같던 내 피붙이 애들마저도 군으로 학교 기숙사로 떠났지 않았는가? 혼자서 감당하기에 너무 큰 집이었다. 나는 혼자서 눈 뜨고 혼자서 밥을 먹었다. 생명체라곤 나와 내 그림자밖에 없었다. 내 그림자는 살아있고 나는 유령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나와 내 그림자에겐 공허하기 짝이 없는 휑뎅그런 공간이었다. 이 기막힌 현실이 믿어지지 않아서 어떤 날은 눈이 떠져도 일어날 엄두를 못 내고 이부자리에 파묻혀 있었다. 아침 햇살에 이리저리 부유하는 먼지톨을 눈길로 쫒다가 마침내 나는 작은 집으로 옮겨 가기로 마음먹었다.




이사를 결심하고 꼬박 2년 6개월간 내 살림살이를 정리하였다. 못해도 하루에 하나씩은 버리기로 마음 먹고 '365개 버리기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지어붙였다. 혹시나 오해할까봐 미리 말하겠는데, 정리하기와 버리기를 혼돈해서는 안 된다. 세간에 미니멀 라이프가 유행하면서 아낌없이 다 버리는 걸 종종 본다. 막 버리는 것은 정리하기가 아니다. 다 버릴 것 같으면 48평 세간살이 정도는 하루 아침에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 우리 집에 있는 물건들은 살아가는데 각기 필요한 기능과 역활이 있어서 들인 것들이기 때문에 내가 죽으러 가지 않는 한 계속 필요할 것이다. 노동의 댓가를 지불하고 집에 들인 내 재화들을 일순간 쓰레기 취급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언제라도 요긴하게 쓰일 물건이 있고, 또 어떤 건 추억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버리기는 쉬워도 정리는 결코 쉽지 않다.  




그 시절 나는 도서관에서 정리 기술에 관련된 책들을 빌려보았다. 깨끗하게 단장한 작고 예쁜 집 화보집도 많이 보았다. 정리는 손으로 하는 게 아니고 정신으로 하는 것, '정리는 마인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원하는 미래의 집 모습을 그려도 보고 의지도 다지게 되었다. 다니던 시립 도서관의 서가에서 정리관련 도서를 남김없이 다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에 가장 도움을 받았던 책이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이다. 사실 책 전체 내용보다 책 제목 저 한 마디에 전율했다는 것이 맞겠다. 설레는 감정을 여기까지 적용시키리라곤 생각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책 내용은 제목을 길게 설명해 놓은 정도이다. 제목의 이 한 마디 속에는 정리에 관한 고민과 갈등, 그리고 고난이도 기술이 굉장히 압축되어 있다.




설렘, 설렘이라.........나에게 아직도 설렐 일이 있을까, 어떤 물건들이 아직도 내 심장을 뛰게 할까, 반신반의하며 나는 저자가 시키는대로 눈을 감고 (버릴까말까 결정해야할 대상의)물건에 손을 얹었다. '설레지 않는다-그럼 그렇지, 살아도 산 것같지 않은 허깨비같은 내가 설레다니 말도 안 되지.' 하나 하나 정리해나가다가 어느 날엔가 내 심장이 반응하는 것이 나왔다. 믿어지지 않지만 나는 설레고 있었고, 눈을 떠보니 전자레인지가 묵묵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전자렌지는 글을 쓰고 있는 오늘로 19년째 나와 함께 하고 있다. 그 외에도 냉장고가 그러했고, 아이들 성장 사진이 담겨있는 사집첩이며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나를 설레게 했다. 그림자보다 더 죽어있던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설렘은 살아있기에 느끼는 감정이니까.




그 후로 8.5톤의 짐을 3.5톤을 줄여 작은 집으로 이사왔다. 나는 소박하고 아늑한 새 보금자리에서 조금씩 생기를 되찾게 되었다. 어쩌면 나의 리뷰는 얼토당토 않게 무거울지도 모르겠다. 객관적인 서평이 아니라서 페이퍼로 올리는게 더 옳았을지도. 책은 간결하고 밝다. 정리하다가 한번쯤은 봉착할 갈등의 단계에서 어떤 것을 버릴지에 관한 기술을 쉽게 설명해준다. 그러나 뭐 어떠랴, 어차피 전문적인 서평을 위해 쓰는 것도 아니고 보는 이들도 큰 기대를 하고 보는 것도 아닐 테니 말이다. 책이 저자의 손에서 떠나면 어떻게 읽고 어떻게 받아들이냐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니...여튼 나에겐 이 책이 참 그랬다.





/20200314ㅇㅂㅊ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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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3-14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톤을 줄이시다니@_@;;;;;; 존경합니다@_@;;; 저도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정리해보려고 노력해보지만 잘 안 되더라구요.(가장 큰 문제는 책-_-) 이사라도 해야 좀 해결이 될른지-_-;;;

진주 2020-03-14 19:06   좋아요 0 | URL
5톤보다 2년 6개월을 하루도 빠짐없이 한결같이 그 일을 해냈다는게 저는 놀라워요! 비로소 저도 의지의 한국인 반열에 들어간 느낌이랄까..ㅎㅎㅎ 달밤 님 책 많으시죠? 이사도 딱히 해결책이 안 되리라고 경험상 알아요. 우야노 ㅎㅎ

라로 2020-03-14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ㅂㅊㅁ뭔지 알았는데 거기에 ㅇ이 있으니 ㅇ은 뭘까? 생각을 하게 됐어요.
아무튼 저는 곤도 마리에의 정리하는 방법을 넷플릭스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어요.
그당시 저도 정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더랬죠.
저는 주로 옷,,,,^^;;;
진주 님의 글이 참 그리웠나봐요,,,괜히 글썽이게 되는 걸 보니...하하
아무튼 그런데 왜 평점은 3개 밖에 안 주셨어요? ㅋ

진주 2020-03-14 19:10   좋아요 0 | URL
배춘몽을 아시는군요~ 나는야 배춘몽 ㅋ
별 3개는 오롯이 제목에 드리는 점수입니다.
별 3개짜리 제목이예요. 제목 아주 잘 뽑은 것 같아요^^

흐음...라로 님은 상당한 멋쟁이라고 사료되네요~ㅎㅎ
옷이 그만큼 많다면 패쑝에 관심도 그만큼 지대한 법.

cyrus 2020-03-14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렘이 느껴지지 않은 책을 팔다가 나중에서야 후회한 1인이 바로 접니다... ㅎㅎㅎ

진주 2020-03-14 19:15   좋아요 0 | URL
세상에 완벽한 건 없나 봐요.
설레냐 안 설레냐의 기준 역시 완벽한 건 아니었어요.
당시엔 분명 안 설레서 깔끔하게 마음에서 지웠더랬는데
세월이 지난 후에 후회막급한 게 나오더라구요ㅎㅎ
그렇기에 남아있는 3.5톤을 더 아끼고 사랑하려고 해요.
남아 있는 것한테 더 잘 하면 안 될까요? ㅎㅎ

반딧불,, 2020-03-14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오랜만입니다. 이사하고 좋으시다니 더 좋네요. 봄..건강도 조심하시구욧!

진주 2020-03-15 14:24   좋아요 0 | URL
아 아..반딧불 님, 반가워요. 방금 기억의 등 하나가 반짝 켜졌어요. 아니 반딧불 하나가 반짝 켜졌다고 할까요?ㅎㅎ 우리 제법 오순도순 지냈던 거 맞죠? 기억의 저편에서 어떤 느낌들이 몽실몽실 피어나네요^^

hnine 2020-03-14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요 이 먹먹해지는 가슴은. 진주님.

진주 2020-03-15 13:40   좋아요 0 | URL
짐정리하게 된 동기를 말하다보니 좀 그렇게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