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TILESCHI, Artemisia
    Italian painter (b. 1597, Roma, d. 1651, Napoli)

Biography

1592년에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화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의 딸로 태어났다.
카라바조, 라파엘로, 루벤스,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등과 함께 17세기의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위대한 여성 화가이다.


카라바조 화파로 독특한 화풍을 지녔던 아버지에게 그림 수업을 받아, 열일곱의 나이에 그녀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수산나와 두 늙은이」를 완성했다.

 



Susanna and the Elders
1610, Oil on canvas, 170 x 121 cm, Schloss Weissenstein, Pommersfelden

   17세의 어린 나이에 [수산나와 두 늙은이]와 같은 대작을 남겼다는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설에 의하면 타시의 성폭행 사건의 증거자료로 사용하기 위해, 성폭행 당하기 1년전에 이와 같은 훌륭한 작품을 그릴 정도로 유능한 여성이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후에 아버지 오라치오가 연도를 나중에 앞당겨 놓았을 거라는 설과, 착오에 의해 연도를 잘못기재했다는 설이 있다.
열여덟 살에는 아버지의 동료인 화가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강간 당했다. 1612년 아홉 달에 걸친 소송과 고문 끝에 명예를 되찾는데, 당시로서는 성폭행에 관한 최초, 최대의 사건이었다.

이후 결혼하여 피렌체로 떠났다. 피렌체에서 갈릴레오 갈릴레이, 코시모 2세 드 메디치 등 유명 인사들과 교류하며 화가로서의 명성을 쌓아 한림원에 가입한 최초의 여성 직업 화가가 되었다.
그녀의 작품 「흘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살인 장면을 끔찍할 정도로 묘사하여 찬사와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보티첼리, 카라바조 등 남성 화가들이 그렸던 같은 주제의 그림들과는 전혀 다른 도발적인 작품이었다.


Judith Beheading Holofernes
1611-12 Oil on canvas, 158,8 x 125,5 cm Museo Nazionale di Capodimonte, Naples

 


Judith Beheading Holofernes (detail) - 이 그림의 유디트는 자신이 모델이고, 홀로페르네스는 타시가 모델이라 한다.

 


Judith Beheading Holofernes 2
1612-21 Oil on canvas, 199 x 162 c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Judith and her Maidservant
1612-1613 Oil on canvas, 114 x 93.5 cm Galleria Palatina (Palazzo Pitti), Florence

로마에서 시작한 그녀의 여정은 피렌체, 제노바, 베네치아를 거쳐 런던에까지 이른다. 아버지 오라치오와 함께 완성한 런던 그리니치 궁의「평화와 예술의 비유」는 결혼 이후 25년 동안 헤어져 지내면서 사랑과 증오의 팽팽한 긴장을 유지했던 아버지와의 관계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이었다.
1633년 아버지가 죽은 후 그녀는 나폴리로 돌아오지만 그 후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몇점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
1653년 나폴리에서 사망했다.


Mary Magdalen

 

 



Portrait of a Condottiero

 

 

 


Self-Portrait as the Allegory of Painting
1630s Oil on canvas Royal Collection, Windsor


출처 : http://blog.naver.com/hslee1943.do#


 

 

 

 

 

[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 라는 책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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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탈리스키
    from 고치 2007-09-02 01:01 
    사실 그 방안에는 아마인 유와 아교, 테레벤틴과 니스의 악취가 진동하고 있었다. 몇 발자국 거리의 희미한 어둠 속에서 누더기를 걸친 견습생 둘이 구부린 자세로 희죽거리는 표정으로 물감을 으깨고 있었다. 주사에는 흰 대리석을, 청금석에는 붉은 얼룩 반암을 빻아넣고 있는 소리가 마치 심장의 박동처럼 무겁고 규칙적이며 뭔가를 찌르는 듯 날카로웠다. 한낮의 빛은 돼지기름에 절인 종이 판대기를 투과해서 하나뿐인 창문을 통해 바닥에 크고 누런 빛 웅덩이를 만들
 
 
icaru 2005-03-10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서사시를 보는 거 같은...!
최초의 여성 화가였군요.. 멋지다...

panda78 2005-03-10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죠- 저 시대에 여자가 창녀이외의 직업을 갖는다는 것만도 멋진데, 배타적이기 그지 없는 화가의 세계에 당당하게 자리매김을 하다니- 언니로 모시고 싶어요. 흐흐..
그리구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는 정말 실감나지 않습니까? ^^ 저 튼실한 팔! ;;

비연 2005-03-10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네요! ㅊㅊ and 퍼갈께요~^^

marine 2005-03-10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여자, 진짜 멋지죠? 유디트 그림은 특히나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 정도로 사실적인 것 같아요 카라바조가 그린 것 보다 목이 잘리는 홀로페르네스 모습이 훨씬 더 무서운 것 같아요 참, 대단한 화가죠 ^^

누에 2007-09-02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
 



 

출처 : http://blog.naver.com/hslee1943/120000810854
출처블로그 : 꿈을 꾸는 소년

Edvard Munch 에드바르드 뭉크  (1863.12.12 ~1944.1.23)


노르웨이의 위대한 화가 에드바르드 뭉크에 대하여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림 1 : 담배를 든 자화상 : 1895

 

 

...

 

뭉크는 어렸을 때부터 순탄치 않은 환경에서 자랐어요.
6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결핵으로 돌아가시고,
그 후 14살때는 누나 역시 어머니와 같은 병(폐결핵)으로 죽게 되죠.


뭉크의 아버지는 아내를 잃은 뒤 한층 신경질적이 되셨고
어린딸의 죽음으로 그 증상은 더욱 심해졌어요.
게다가 뭉크는 선천적으로 병약한 아이였어요.

 

이처럼 어린 시절의 뭉크는 병, 죽음 등의 우울한 환경속에서 성장했고
아버지와의 말다툼도 잦을 수 밖에 없었지요.


"내 예술에 있어서 우리 집안의 분위기는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산파와 같다.

나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베개와 병상과 이불의 나날이었다."
그와 같은 환경과 육체가 그의 정신과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어요.

 
 

 그림 2 : 병든 아이 : 1885-1886
▶왼쪽은 죽음을 눈 앞에 둔 누나 소피에, 오른쪽은 슬픔에 고개를 떨구고 있는 이모 카렌의 모습.
 
"이 작품으로 인해서 나의 예술전체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 작품은 내 예술의 돌파구가 되었다.
이후 나의 거의 모든 작품들도 이 작품 덕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그림은 내 어린 시절, 우리 집안의 일들이다.
 우리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사람만이
이 작품 제작에 다른 어떤 것보다도 어린 시절의 체험이 도움이 되었음을 이해할 것이다.
 나는 확신 한다. 어떤 화가도 내가 <병든 아이>에서 경험한 것처럼
깊은 슬픔을 작품의 주제에서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그림 3 : 봄 : 1889

▶ <병든아이(그림2)>를 주제로 하여 전통적 기법으로 그린 작품이예요.
뭉크는 흑-백, 어둠-밝음으로 구성된 이 그림에서
삶과 죽음을 선명하게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그림 4 : 누이동생 잉게르의 초상 : 1892
▶ <검은색과 자주색의 하모니>라는 제목으로 출품되었던 초상화로
29세때 두번째 개인전에서 발표한 초기의 대표작이예요.
 
 
...
 
 
1889년, 뭉크는 국비장학생으로 파리로 유학을 떠납니다.
하지만 그 해 말 ,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은 뭉크에게 또 한번의 충격을 주게됩니다
.


 

 그림 5 : 생-클루 의 밤 : 1890
▶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뭉크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 듯 해요.


 



 그림 6 : 칼 요한 거리의 봄날 : 1891
▶ 파리의 활기찬 분위기는 뭉크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고,
위와 같이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몇점 제작하기도 합니다.
 


 



 

  그림 7 : 칼 요한 거리의 저녁 : 1892

그림6그림7을 비교 해보세요.
<칼 요한 거리의 봄날>에서 생기넘치던 사람 들이
<칼 요한 거리의 저녁>에서는 이유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있어요.
낮과 밤 사이인 저녁무렵의 텅 빈 공간의 체험을
존재감의 상실, 절망, 죽음의 두려움으로 표현한 그림입니다.

 

 





 

 그림 8 : 절망 : 1892

"나는 두 사람의 친구와 길을 걷고 있었다.
태양은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약간 우울한 기분이었다.
돌연 하늘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나는 멈추어 서서 난간에 매달렸다.
피곤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피처럼 칼날처럼 피어오르는 구름이 보였다.
바다와 곶은 푸른색을 띤 검은 색이었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가 버렸다.
나는 거기에 멈추어 서서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자연을 관통하는 커다란 절규가 끝없이 계속되는 것을 들었다"
 


 

 그림 9 : 절규 : 1893
▶ 뭉크는 이 작품의 판화작품 아래쪽 여백에 이런 말을 적어 넣었어요.
"나는 자연을 뚫고 들려오는 절규를 느꼈다"
 
 
 
...
 
 
 
1880년대부터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아 운동'이라고 불리는 사상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 운동은 철저한 개인의 자유를 위해 일체의 인습에 도전하고, 사회악을 고발하며,
 더 나아가서는 국가 권력의 폐기까지 요구하는 아나키즘을 이념적 기조로 삼고 있었습니다.
청년 뭉크는 그 뜻에 많은 공감을 느끼고
 그 사상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인 한스 에거르를 존경했어요.
 



 그림 10 : 다음날 아침 : 1893
▶ 환락의 밤을 보낸 후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자고 있는 여자를 묘사한 그림.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아의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예요.
다만 뭉크의 관심은 이데올로기, 사회현실문제가 아니라
이 여자의 운명에 대한 인간적 통찰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보헤미아운동의 영향에 따라 뭉크는 '자유연애'를 실행에 옮겼는데
프랑스 유학오기 전에 약 6년간 연상의 유부녀 헤이베르그와 연애를 했습니다.
헤이베르그는 모든것을 제멋대로하는 자유분방한 보헤미안적 기질의 여자였어요.


 그림 11 : 월광 : 1893
▶ 뭉크는 자신에게 있어서 여자의 의미를 차갑게 되씹어 보고
여자의 거짓말과 가면 뒤에 감추어진 '메두사의 얼굴',
인생에 대한 불신과 허무함 등 을 주제로 이 작품을 남깁니다.
 
 
...
 

뭉크는 거의 평생동안 '생의 프리즈'(Frieze of Life)에 관심을 쏟았어요.
프리즈(frieze)란 그리스 로마 건축에서
 기둥과 지붕 사이의 조각이나 문양으로 장식된 긴 띠 부분을 말하는데 
 중세 건축에 많이 이용되었다고 해요.

뭉크는 긴 화면을 자기 나름대로의 연작 형식을 통해서 한 편의 웅장한 교향곡을 연출하려 했죠.
연작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자신의 모든 작품을 하나로 묶어...
 인생의 파노라마로 만들려는...
 참으로 끈질긴 노력이었어요...
 
"남자들이 책을 읽고 , 여자들이 뜨게질하고 있는 따위의 실내화는 더이상 그릴 필요가 없다.
내가 그리는 것은 숨을 쉬고, 느끼고, 괴로워하고, 사랑하며,살아있는 인간이어야 한다.
보는 사람은 이 주제에서 신성함과 숭고함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모자를 벗을 것이다."
 
생의 프리즈는 1893년 베를린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30여점의 회화가 '인생'이라는 큰 주제의 연작으로,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6점의 유화가 연작으로 시도 되었어요
이 '사랑'연작이 '생의 프리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데
뭉크의 사랑 연작은
<여름밤(목소리)(그림12)>, <입맞춤(그림 19)>,<흡혈귀(사랑과 고통)(그림13)>
<마돈나(사랑하는 여인)(그림14)>,<멜랑콜리(질투)(그림21)>, <절망(그림8)>
의 6작품으로 되어있어요.
 
사랑에 대한 기대와 동경에서부터..
사랑의 아름다움을 거쳐..
배신, 질투, 죽음, 절망에 이르는 삶의 파노라마를 전개하는것이죠.
 


 

 그림 12 : 여름밤(목소리) : 1893
▶ 뒷짐지고 고개를 쳐든 채로 정면을 보는 소녀...
그 뒤에는 나무에 가려 조그맣게 보이는 보트 위의 두 사람..
묘한 심리적 긴장관계가 느껴지는 작품이네요
 


 

 그림 13 : 흡혈귀 : 1893-1894
▶ 뭉크에게 여자라는 존재는 여러가지의 의미로 다가왔어요..
여자는 어머니와 같은 푸근한 존재..
그러나
 동시에 남자 위에 올라타 남자의 개성을 파괴하는 존재..
 


 

 그림 14 : 마돈나 : 1893-1894


 

 그림 15 : 여자의 세 시기(스핑크스)
▶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왕에게 던진 '탄생→전성기→말년'의 인생의 삼단계를 상징하는
수수께끼에서 유래한 작품이예요.
"... 나체의 여인 오른쪽 나무 줄기에 서 있는 검은 옷의 여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수도사로 그것은 여인의 그림자, 고통, 죽음인 것이다.
 나체의 여인은 삶의 환희를 상징한다.
왼쪽에는 흰 옷의 여자가 바다의 무한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녀는 기대의 상징이다."


 

 그림 16 : 사춘기 : 1894
▶ 첫 월경을 맞은 소녀의 두려움, 불안 일수도 있고 이제 막 눈떠가는 성욕일수도 있어요.
뭉크는 그림을 통해 여러 의미들을 상징적으로 통일시키는 데 뛰어난 재주가 있었어요.
 


 

 그림 17 : 불안 : 1894
그림 7그림 9를 먼저 보세요.
<칼 요한의 거리(그림 7)>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절규(그림 9)>의 풍경을 합쳐 놓았음을 알수있죠?
 


 
 그림 18 : 병실에서의 죽음 : 1895

▶ 죽음,,, 이것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뭉크는 항상 고민했습니다.


 

  그림 19 : 입맞춤 : 1897


 


 그림 20 : 입맞춤 : 1898 (목판화)

▶ 뭉크는 판화를 회화만큼 중요시 다루었고,
판화를 통해서
 창의적 시도, 기법 혁신, 같은 모티브에 대한 재확인 등의 방식으로
 깊이 있게 연구해갔어요.
 


 

 그림 21 : 멜랑콜리(질투) : 1891
▶ 이 그림의 모델은 삼각관계에서 실패한 친구 닐센이라고 전해지고 있어요.
다리 위의 두 사람은 크로그와 그의 후처라고 합니다.
 


 

 그림 22 : 다리위의 소녀들 : 1899
▶ 다리의 먼 쪽 끝부분에서는 어둡고 무서운 미래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는듯 하네요.
하지만 뭉크의 아이디어는 항상 승화된 차원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명확하게 의미를 규정할 수는 없겠죠.
 


 

 그림 23 : 생명의 춤 : 1900
▶ 뭉크의 '생의 프리즈' 연작의 핵심이 되는 작품이예요.
좌우에 서있는 대조적인 두 여인은 <여자의 세 시기(그림 15)>와 주제가 비슷한듯하네요.
왼쪽에 꽃에 손을 내미는 흰 옷의 여자는 인생의 가능성과 기대를 상징하고
무표정하게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오른쪽의 검은 옷의 여자는
지나간 과거 또는 잃어버린 세계를 나타내서.
중앙의 인물들이 느끼는 사랑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1900년을 전후로 하여 뭉크에겐 튤라 라르슨이라는 애인이있었어요.
그녀는 결혼을 원했으나. 뭉크는 결혼해서 가족을 갖는다는 것을 정말 두려워했죠.
 
1902년 결혼을 조르는 튤라와 실랑이 중에 권총이 잘못 발사되었고
뭉크는 이때  왼쪽 가운뎃손가락 절반을 부상 당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뭉크는 또 한 번의 정신적, 육체적 고뇌와 표류의 시기를 맞게 됩니다.


 


 그림 24 : 마라의 죽음 : 1907

▶ 피로 얼룩진 침대 앞에 똑 바로 서 있는 암살자는 튤라 라르슨이고
죽은 남자는 뭉크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요.
 


 그림 25 : 해수욕하는 남자들 : 1914-1915

▶ 여자의 세 시기(그림15)와 비교해볼 수 있는 작품이네요..인생의 3단계를 표현한 작품.
 


 


 



 그림 26 : 기둥시계와 침대 사이의 자화상 : 1940
▶ 말년의 대표작이예요. 죽음을 알고 있고 있으며 조용히 기다리겠다는 뜻을 나타내는 듯하네요..
 
...

뭉크는 1944년 1월 23일 80세의 나이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나게됩니다.
그는 총 1천 400여점 의 유화, 4천 500점 가량의 수채화 와 드로잉,
700종의 판화를 찍은 1만 5천점의 작품 등을 남겼으며
살아있는 동안 열정적인 작품활동으로
사랑, 고통, 죽음, 불안을 주제로한 내면의 세계를 시각화하여
미술사의 하나의 전환점을 제기했고, 또한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시켰습니다.
 
"내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일종의 병이었고. 도취였다.
 그 병은 벗어나고 싶지 않은 병이었으며 그 도취는 내게 필요한 도취였다"
 
 
 
그림 보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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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5-03-09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리도리~~

panda78 2005-03-09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보이나요?! 저만 보이나봐요. ㅜ_ㅜ 그림만 따 와야지..

플레져 2005-03-09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보여요~ ^^ 추천하고 퍼갈게요!

panda78 2005-03-09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정했거든요. ^^ 이제 잘 보인다니 다행입니다--

水巖 2005-03-09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군요. 뭉크 또한 제가 좋아하는 화가중에 한 사람이랍니다. 추천하고 퍼 갑니다.

책읽는나무 2005-03-09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수고 하셨어요..^^

2005-03-09 0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3-09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님, 돌아오셨군요. 오랜만이에요.
바쁜 일은 끝나셨나요?
이거 추천하고 퍼갈게요.
중간의 푸른빛 방 그림 특히 참 좋네요.^^

비연 2005-03-09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님..넘 오랜만인거 같아요~ 퍼갈께요^^

urblue 2005-03-09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져가요.
반가와요, 판다님. ^^

마냐 2005-03-09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저만 보는 방에 넣어둘랍니다..흐흐)
그동안 혹시 '욕구불만' 아니셨슴까? ^^: 마구 쏟아내시는군요. 얏호.

2005-03-09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울보 2005-03-09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인사먼저 하고 퍼갑니다,,,,

panda78 2005-03-10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원글 작성하신 분이 받아야 할 칭찬을 제가 거저 먹고 있네요.;; 아, 죄송스러워라..

울보님, 안녕하세요오? ^^

수암님! 뭉크도 좋아하셨군요- 몰랐어요 ^-^ 수암님이 퍼 가신다니 기뻐요!
책나무님, 로드무비님, 유아블루님, 비연님, 여울효주님, 얼마든지 가져 가셔도 되구요- 저도 무진장 반가워요-제 마음 아시지요? ♡▼♡

나나님- 녜에- 그럼 보내고 말씀드릴게요- ^^
 

 



 

 

 

 

 

 

 

 

 

 

 

 

 

     <줄리아노 디 메디치의 무덤> 1526-33년

 

 

 

 

 

 

 

 

 

 

 

 

 

 

   <로렌초 디 메디치의 무덤> 1526-33년

 

또한 그는 교황 레오 10세의 주문으로 1520년에 메디치 채플에 네머스의 공작이었던 줄리아노와, 우르비노의 공작이었던 로렌초의 무덤을 제작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만든 묘의 주인공들은 미켈란젤로가 직접 보았거나, 초상화가 남아있던 인물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별로 닮지 않았다.

줄리아노의 얼굴은 오히려 그가 젊었을 때에 제작한 <다비드>의 얼굴과 같은 유형이어서, 구체적인 한 인물의 얼굴이라기보다 이상적인 인간형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 두 조각상을 통하여 인간의 두 유형, 즉 행동하는 유형(칼을 들고 있는 줄리아노)과 명상하는 유형(생각하는 자세의 로렌초)을 만들었다. 그리고 명상하는 로렌초의 석관 위엔 아침과 저녁을, 행동하는 줄리아노의 석관 위엔 낮과 밤을 놓음으로써 시간의 운행과 영원함을 동시에 설정해 놓고 있다.

 

 


<피에타> 1546-55년 대리석,높이233cm

 

말년의 미켈란젤로는 누구로부터 주문을 받지 않고, 자신을 위한 피에타상들을 제작하였다. 

위의 <피에타>는 그의 나이 70세쯤에 자기무덤에 놓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 또한 미완성이지만 종래의 피에타 도상과는 전혀 다른 이 <피에타>의 구성은 그의 종교관을 짐작케 한다. 양쪽의 두 마리아가 시체를 부축하고 있지만, 시신은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는 듯 미끄러져 내리는 듯 하다.

그리고 그의 뒤에 있는 거대한 니코데모는 마치 건물의 도움과 같이 그를 보호하며, 얼굴엔 미켈란젤로 자신의 자화상을 새겨놓았다. 니코데모는 원래 예수를 비난한 율법학자들과 같은 유대인이었으나 모험을 무릎 쓰고 예수의 무덤을 제공한 사람이다. 그의 존재를 이렇게 크게, 그리고 그의 얼굴엔 자신의 모습을 새긴 미켈란젤로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학자들은 카톨릭세계에 있었던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개혁적인 성향을 이렇게 나타낸 것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 개혁성향의 사람들을 다시 탄압하던 1555년경 그가 이 상을 부수려 했던 행동은 이를 반증하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론다니니 피에타> 1552-64년, 대리석, 높이 195cm 밀라노, 스포르제스코 성

 

일명 <론다니니 피에타>라고 부르는 또 다른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죽기 며칠 전까지 붙들고 있던 작품이다. 시신은 길게 늘려 있고 예수를 부축하여야 할 마리아는 오히려 시신에 얹혀있는 듯 불안정하다.

죽음이 가까운 시기에 만든 이 <피에타>는 그가 청년기에 만든 바티칸 소장의<피에타>와 너무나 큰 대조를 보인다. 아름다운 균형과 완전한 기법은 모두 사라지고 절절한 간구만이 남았다. 그러나 이 피에타는 무르익던 르네상스 시대가 가고, 종교개혁과 반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을 마감하던 미켈란젤로가 구원을 갈구하는 참 모습일 것이다.

http://blog.naver.com/jarnet0116.do

 

미켈란젤로는 1564년에 숨을 거두었으며,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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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20 10: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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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tella.K > 까미유 피사로

글 쓴 이 : 참나무. 날 짜 : 2004/10/31 22:53:18

커피를 마시는 농부 소녀 1881
캔버스에 유채; 65.3 x 54.8 cm 시카고 미술 대학

Louveciennes: The Road to Versailles
1870; Foundation E. G. Bührle Collection, Zürich



까미유 피사로. 1897년작. 유화.
1897년의 겨울과 봄, 피사로는 "파리의 거리들"이라는 제목으로 일련의 거리 풍경을 그려낸다.
이 연작은 그의 이름을 점묘주의와 연관짓던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피사로는 그가 러시아 호텔의 객실을 빌려서 창밖의 풍경을 스케치한 후,
에라니에 있는 화실에서 그림을 완성하였다.
피사로는 동일한 풍경을 하루 중 다른 시간, 다른 날씨에서 각각 묘사하여
같은 관점에서 13개의 서로 다른 그림을 그려냈다. 이 작품에서 화가는
우울한 날의 몽환적 분위기, 복합적인 색채와 다양한 색조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화가는 빠른 붓놀림에 의하여 숨가쁘고 역동적인 도시의 삶을
설득력있게 포착하고 있으며, 근대 도시의 이미지를 잘 드러낸다.
이러한 도시적 풍경은 피사로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를 형성한다.
참고로, 연작 중 다른 작품들을 보자.


밤의 몽마르트 거리(The Boulevard Montmartre at Night). 1897년작.
유화.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 London).


겨울 아침의 몽마르트 거리(The Boulevard Montmartre on a Winter Morning). 1897년작.
유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흐린 오전의 몽마르트 거리(The Boulevard Montmartre on a Cloudy Morning) 1897년작.
유화. 빅토리아 국립 미술관(National Gallery of Victoria, Melbourne).

[Camille Pissarro, 1831 ~ 1903]

프랑스의 화가. 서인도제도의 세인트토마스섬 출생.

1855년 화가를 지망하여 파리로 나왔으며, 같은 해 만국박람회의 미술전에서

코로의 작품에 감명받아 그로부터 풍경화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몇 차례

살롱에 출품하였으나 번번이 낙선하고 18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때는

런던으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모네와 함께 터너 등의 영국 풍경화를 연구하였다.

전후에는 파리 북서쪽 교외에 정주하면서 다시 질박한 전원풍경을 연작,

1874년에 시작된 인상파 그룹전에 참가한 이래 매회 계속하여

출품함으로써 인상파의 최연장자가 되었다.

그의 작풍은 인상파 특유의 기법을 바탕으로 수수하면서도 견실성을 보여

모네와 시슬리보다 한층 구성적인 면에 특색을 보였으나, 1850년대 중반경

한때 쇠라의 점묘법에 끌려 밝고 섬세한 규칙적인 필법에 의한 작품도 남겼다.

만년에는 시력이 약화되었으나 최후까지 제작활동을 계속하여

인상주의 운동과 운명을 함께 하려는 성실성을 보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붉은 지붕》(1877) 《사과를 줍는 여인들》 《몽마르트르의 거리》

《테아트르 프랑세즈광장》 《브뤼헤이 다리》(1903) 《자화상》(1903) 등이 있다.

빨간지붕들(1877) 캔버스에 유채; 54.5 x 65.6 cm 오르세(Orsay) 박물관, 파리

이 작품은 틀림없이 피사로의 걸작 가운데 하나이며, 인상주의의 본질적인 목표 가운데

몇가지를 보여준다. 이 그림은 이중적인 느낌을 전달한다. 그 하나는 마치 그림을 보는 사람이

그 장소로 옮겨진 듯이 정확하게 사실적으로 묘사된 특정 지역과 자연의 면면에 대한 사실성이다.

다른 하나는 이런 효과를 창출하면서 그 자신 고유의 감동과 서정적인 감정의 고조를

야기하는 색채의 사실성이다. 피사로는 들쑥날쑥하는 화가로 묘사되어 왔으나,

비록 이것이 하나의 관점에서는 단점으로 간주된다고 하더라도 이는 또한

그로 하여금 때로 독자적인 우수성을 부여하는 장점이기도 하였다.

Peasants Gathering Grasses 1885; Gouache, red chalk, and pecil on paper,

30.5 x 61.5 cm; Private collection

Washerwomen, Eragny-sur-Epte
Washerwomen, Eragny-sur-Epte, 1895, private collection
Apple Picking at Eragny-sur-Epte
Apple Picking at Eragny-sur-Epte, 1888, Dallas Museum of Art.

양치기 소녀(지팡이를 들고 있는 어린 농부 소녀) 1881
캔버스에 유채; 81 x 64.7 cm 오르세(Orsay) 박물관, 파리

출처 : 엠파스 사전과 블로그

참조 : http://user.chollian.net/~k1129/pissarro.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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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 1475-1564)

카프레세 출생의 미켈란젤로는 13살때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피렌체의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 문하에서 3년 간 도제 수업을 받았다. 기를란디오의 화실에서 미켈란젤로는 화가로서 갖추어야할 일반적인 교양과 프레스코 벽화와 여러 기법의 기초를 쌓았으며, 1489년부터 도나텔로 제자인 베르톨도로부터 조각을 배웠다.

 


<계단의 성모> 1490-92년, 대리석, 55,5×40cm

미켈란젤로는 16세 경에 이미 <켄타우로스의 전투>와 <계단의 성모>와 같은 작품을 제작했는데, 이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그의 개인적 역량이 보이기 시작했다.


<피에타>1499년,대리석, h.74cm,



<다비드> 1504년 대리석 높이4.1m


1498년에 제작한 <피에타>와 1504년 작 <다비드>로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다.

 


<천지창조> 1508-12년 프레스코 바티칸. 시스틴 예배실

교황 줄리오 2세(Julio Ⅱ , 즉위 1503-)는 1506년 미켈란젤로에게 교황청 안의 시스틴 예배실 천장화를 주문하였다.  교황의 처음 주문은 창문들 사이에 12사도를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장식 모티브를 그려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훨씬 거대한 계획을 세워 교황을 설득하고 지금의 천장화를 남겼다. 그는 빛의 창조에서 노아의 홍수에까지 이르는 <천지창조>의 주제를 택하였다. 그는 기존의 건축구조를 바탕으로 하면서, 천장에 이와 연결된 건축구조를 그림으로 만들었다. 즉 그리자이유의 단색 기법으로 대리석 조각이 새겨진 기둥을 이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생긴 9개의 면적에 천지창조 이야기를, 그리고 창문 위 삼각형 사이의 큰 공간에는 예언자와 무녀들을 그렸다. 이 장대한 프로그램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빛의 창조, 아담과 이브의 창조와 그들의 원죄, 노아의 타락에 이르기까지 신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양쪽의 예언자와 무녀들은 구원자가 올 것임을 알려준 존재들이다.


시스틴 예배실

 


<최후의 심판> 1537-41년,프레스코, 1370×1220cm 바티칸, 시스틴 예배당

 그 후 1537년부터는 <최후의 심판>을 제작했으며,

 


<율리우스 2세의 무덤> 1545년, 대리석 로마, 산 피에트로 교회

 1515년부터 시작한 율리우스 2세의 무덤도 우여곡절 끝에 처음의 계획보다는 많이 축소되었지만 1545년에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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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11-19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님, 오랜만이어요^^ 미켈란젤로 작품들은 참 친숙하죠. 저두 다 알아요!!! 킥킥.

panda78 2004-11-19 0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흙! 마태님... 이제 저 안 보실 줄 알았셔요... 어어어엉- 철푸덕.

와 주셔서 기뻐요. <(_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