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 클럽
배수아 지음 / 해냄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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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클럽>은 내가 처음으로 읽은 배수아의 작품이다. 나는 크리스천 여자의 고통부분을 읽고 혐오스러워하는 부류인가보다. 읽지 말았어야 했다. 잘 쓴 글인 것 같다. 배수아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나와는 맞지 않는 듯 하다. 단지 사람의 손이 튀김솥에 들어가는 묘사 때문은 아니다.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방에서 개밥그릇에 시리얼을 부어 먹는 한나 때문도 아니다.

글을 읽는 동안 눈앞을 둥둥 떠다니던 그 끔찍스런 이미지들. 눈알이 흘러내리고 갈비뼈가 살을 찌르고 나와 몸을 덮은 손이 붉게 물들다. 작가가 원했던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저런 이미지를 뚫고 그것을 탐색하기란 내겐 거의 불가능 했다. 흰된장을 풀고 마지막에 치즈를 얹는 라면을 끓이면서 '나는 불감증'이라고 말하는 첫부분을 읽으면서, 호. 어쨌든 이 주인공은 고독한 지식인입네 하는 부류는 아니군 하며 흥미를 가지게 되었는데, 섬뜩한 손 그림이 나올 때부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이후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보고 싶지 않은 이미지들의 연속이었다. 끝까지 보지 않으면 오히려 더 찜찜할 것 같아 결국 마지막 장을 보았지만, 지금도 무섭다. 작가 인터뷰를 읽으면 뭔가 더 이해할 수 있을까, 이 무서운 상상 속에 숨겨진 다른 의미를. 작가인터뷰를 보았다. 배수아는 그녀의 작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사람이었다. 40이 다 된 나이에 소녀처럼 보이는 작가 사진을 봐도 그렇고 도대체 어떻게 이런 글을 써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작가 인터뷰를 다 읽고 나서 더욱 무서웠다. 읽기전엔 아무 느낌도 없었던 표지그림조차 너무 섬뜩해 책을 어떻게든 처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젠 이 글보다 작가 자체가 더 무섭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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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 동서 미스터리 북스 18
딕 프랜시스 지음, 김병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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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 프랜시스는 호주 출신 작가로, 경마를 소재로 한 추리소설을 주로 썼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적이 있는 작품은 29편중 이 책 <흥분>까지 합해도 5-6권뿐이다. 아쉬울 따름이다. 경마라는 특이한 소재도 소재려니와, 이 작가의 책에는 모두 아주 쿨한 성격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첫째. 혈연에 의해서든 재능에 의해서든 우연에 의해서든, 경마장, 경마, 기수, 말과 관련이 있는 것이고, 둘째.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거의 완벽한 포커페이스이며,셋째. 어린아이와 동물, 여성에게 친절한 구식 신사라는 점이다.

비속어가 거의 나오지 않는 점도 마음에 든다. <흥분>에서는, 전혀 가망없는 말들이 경주에서 우승을 하여 약물검사를 받지만 아무 것도 검출되지 않는 상황이 연이어 발생하자, 경마계에서 사건을 조사할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을 잠입시키기 위해서 주인공을 초빙(?)한다. 주인공은 호주의 목장주로, 사건이 일어나는 곳인 영국 경마계에는 낯선 인물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이를 수락하고 영국으로 건너와 사건을 조사하면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솜씨가 아주 뛰어나다.

다른 동서추리문고에 비해 번역도 그다지 거슬리지 않는다는 것도 추천할 만한 점. 참고로 국내에 소개된 딕 프랜시스의 작품으로는 미래향에서 출간한 <표적><귀향>(또는 경마1,2), 미래세대의 <오른손>, 고려원 미디어의 <경마장의 비밀>이 있다. 모두 절판된 것이 아쉽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언젠가 출간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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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티새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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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서 출간된 바나나의 작품들은 모두 사 보고 있다. 순정만화를 연상시키는 감성과 진부한 듯 하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주는 비유가 마음에 들어서다. 획기적인 변화가 없다면 결코 대가의 자리에 도달하지는 못할 수준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것은 또 그걸로 족하지 않은가. 이런 소설을 필요로 하고 또 즐기는 (나같은)사람들도 있으니까.

티티새(원제 : 츠구미 = 티티새 or 개똥지빠귀)가 출간된 것을 알고 바로 샀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그녀의 최신작은 아니었다. 미번역된 예전 작품인 것 같은데, 읽고 난 느낌은 그녀의 다른 작품들과 비슷비슷하면서도 뭔가 약간 다르다. 다른 책을 읽을 때 흔히 느낄 수 있었던 수채화를 보는 듯한 감각은 많이 약해졌고 등장인물들의 성격묘사가 주가 되어 있어서인지, 예쁜 비유도 별로 없다. 제2회 야마모토 슈고로상 수상작이라는데, 글쎄 다른 글보다 깊이가 있는 걸까?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살짝 다른 글이었다. (전 키친과 암리타를 제일 좋아합니다)

작가는 츠구미가 자신과 아주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아마 이 작가를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따뜻한 흐름이 있다고 해도, 정말이지 너무 밉살스럽다. 아마 츠구미의 성격을 내가 싫어해서 이 글이 마음에 와닿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흔히 등장하는 오컬트적 요소(은근히 기대하고 있던)도 없고. 나의 바나나 리스트에서 제일 밑에 위치하겠지만, 어쨌든 바나나의 새로운 작품을 만난 것만으로 어느 정도는 만족했으니. 별점은 세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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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방의 영혼
마루야마 겐지 / 예문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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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 작가의 장편 소설 <천년 동안에>를 읽다 만 적이 있다. 그 땐 마루야마 겐지의 문체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우연하게 내 손에 들어온 <좁은 방의 영혼>은 같은 작가의 작품인데도 문체가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이다. 그동안 내가 바뀐 건지, 작가의 문체가 <좁은 방의 영혼>에서 <천년 동안에>에 이르는 동안 변한 건지 알 수 없지만(아직 <천년..>를 다시 읽어보지 않았다).

우선 마루야마 겐지의 첫 작품이자 그에게 최연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자라는 표찰을 달게 해준 <여름의 흐름>이라는 단편은 사형수 감방(?)에 근무하는 간수의 이야기인데, 읽는 동안 내내 스티븐 킹의 <그린 마일>이 떠올랐다. 일본인 간수들의 이야기인데 그림은 서양인으로 그려지니 읽는 동안 미묘한 어긋남이 끊임없이 느껴져 이 작품만은 그리 좋은 그림이 보여지지 않았고, 글 자체도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른 단편들을 읽으면서는 모두 아름다운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좁은 방의 영혼>에서 병실에서 나가지 못하는 소년이 자신이 연어가 되었다는 상상을 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맑은 물의 흐름을 거슬러 헤엄치는 연어와 바닥의 깨끗한 모래알이 눈 앞에 떠오르는 듯 했다.

화려한 미사여구로 장식한 장황한 문체도 아닌데 세부사항까지 완벽하게 한 장의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니 참 대단한 재주라고 생각한다. <소설가의 각오>라는 이 작가의 에세이를 읽고, 작가 자신에 대해서 그리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없었기에 '재주'라는 단어를 쓰게 되었지만, 어쨌든 소설 하나는 잘 쓴다. 글쓰는 것으로 먹고살겠다 다짐한 작가라 그런지 수록된 단편 모두가 그리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 없는 듯하다. 그런 단편집도 참 드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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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산책
돈 슈나이더 지음, 김정우 옮김 / 사람과책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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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IMF로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잃었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아버지는 실직하지 않으셨지만, 그것을 계기로 그 이후 종종 아버지가 직업을 잃는다면 아버지는 어떻게 살아가실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텔레비젼을 틀면 끊임없이 나왔던 많은 실직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보며, 저렇게만은 되지 말아야지 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아직도 직장엘 다니시고 나는 아직 공부를 하고 있지만, 지금도 가끔 두렵다. 매달 일정액의 돈이 통장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이 책의 저자이자 주인공인 돈 슈나이더는 영문학과 교수였다. 더 나은 보수를 위해 대학을 계속 옮기지 않았더라면 정년에 달할때까지 안정적인 교수직을 보장받았을 텐데, 더 나은 조건을 위해 자꾸 자리를 바꾼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본문에서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저자는 자신이 너무 열심히 강의를 하고 너무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아서, 다른 교수들이 위협을 느끼고 자신을 몰아낸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도 하다.

그리고 다른 교수들의 십몇년동안 변하지 않는 기말고사 문제, 일주일에 9시간(그것도 몹시 불성실하게) 일하면서 80시간 일하는 간호사들이 자신들보다 많은 보수를 받는다고 불평하는 교수들을 이야기한다. 어쨌거나 갑작스레 직장을 잃어버린 그는, 계속해서 다른 대학에 지원서를 보내보지만, 계속해서 채용거절통지를 받게 된다. 아이가 넷이나 딸린 가족의 가장으로서 머물 곳, 먹을 것, 입을 것을 마련해야 하는데 말이다.

한동안 잘못된 사회를 탓하고, 타인을 비난하며 좌절과 실의에 빠져있다가, 결국 그가 얻은 직업은 골프장 직원. 이후 페인트공과 목수의 일을 하게 된다. 그것이 전직 대학교수인 그가 찾은 새로운 직업이다. 프리랜서 목수와 페인트공.

그는 새로 찾은 그 직업에서 보람을 느끼고 그 직업에 만족하는 것 같다. 눈높이를 낮추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자꾸만 그가 진실로 진실로 새 직업에 만족하는지가 의심스럽다. 뿌듯한 듯 희망적 어조로 적어놓은 마무리에도 불구하고, 만약 좋은 대학에서 정년을 보장하며 자리를 제공한다면 그는 어떻게 할까. 결국 실직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어떻게든 새로운 직업을 찾았고 그것으로 가족을 부양하면서 살아가고는 있지만, 글쎄, 나는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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