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제위 공백으로 인한 어떠한 소란도 발생하지 않았다. 포부가 큰 장군들의 야심은 서로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견제되었고, 동생 누메리아누스와 현장에 없던 형 카리누스가 함께 만장일치로 로마 황제로 승인되었다. 국민들은 카루스의 후계자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페르시아인들이 냉정을 되찾을 여유를 주지 않은 채 수사와 에크바타나의 궁전까지 칼을 들고 진격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병력과 기강 면에서는 우세했지만 당시 로마군은 가장 절망적인 미신에 사로잡혀 당황하고 있었다. 카루스 황제의 죽음에 대한 억측을 막기 위해 실행된 모든 술책에도 여론을 불식시키기는 불가능했다. 여론의 힘이란 억누를 수 없는 것이다. 종교적인 공포심을 가지고 있던 옛 사람들은 벼락을 맞았던 장소들이나 사람들을 특별히 신에게 헌납된 것으로 여겼다. 티그리스 강을 로마 군대의 운명적인 한계로 정해 주었던 어느 신탁이 상기되었다. 카루스의 운명과 자신들에게 닥친 위험에 놀란 군대는 젊은 누메리아누스에게 신들의 의지에 복종하여 자신들을 이처럼 불길한 전쟁터에서 데리고 나가 달라고 큰 소리로 요구했다. 이 나약한 황제는 그들의 완강한 편견을 불식시킬 수 없었고, 페르시아인들은 승승장구하던 적의 돌연한 퇴각에 놀랐다.(417∼418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_1권』 

 

 

 

(나의 생각)

 

최고 통치자의 갑작스런 병사(病死)나 암살 혹은 탄핵 등으로 인해, 갑작스럽고도 운 좋게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경우를 떠올려 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 * *

 

 

전대 황제의 불가사의한 죽음에 대한 정보는 머지않아 페르시아의 변경에서 로마로 전해졌고, 속주들뿐만 아니라 원로원도 카루스의 두 아들의 즉위를 축하했다. 그러나 이 운 좋은 젊은이들은 옥좌를 차지하는 것을 마치 당연한 것인 양 손쉽게 해 주는 출신 가문이나 재능에 있어서는 전혀 우월하지 않았다. 그들은 평민 신분으로 태어나고 교육받았으며, 아버지의 등극으로 일거에 왕자의 신분으로 올라선 데 불과했다. 그리고 그 후 대략 16개월 만에 일어난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들은 광대한 제국이라는 뜻밖의 유산을 받았다. 이처럼 급속한 영달을 침착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미덕과 사려분별이 필요했다. 그런데 형인 카리누스는 이 두 자질이 일반적인 경우보다도 더 부족했다. 그는 갈리아 전쟁에서는 어느 정도의 개인적인 용기를 드러냈지만, 로마에 도착하는 순간부터는 수도의 향락에 빠져 행운을 남용했을 뿐이다. 나약하지만 잔인했고, 쾌락에 탐닉했지만 심미안은 부족했다. 게다가 허영심에는 영향을 받기가 몹시 쉬웠지만, 국민의 평가에는 무관심했다. 불과 몇 달 만에 연달아 아홉 명의 처와 결혼했다가 이혼했고, 더욱이 그들 대부분은 임신 상태였다. 또한 그는 이처럼 합법적인 바람기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과 로마의 최고 명문가들에 불명예를 안겨 준 온갖 부정한 욕망에 탐닉할 여유까지 가졌다. 카리누스는 이전의 자신의 미천한 신분을 기억하거나 현재의 행동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모두 집념 어린 증오심을 가지고 대했다. 그는 아버지가 미숙한 젊음을 이끌어 주도록 그의 주변에 두었던 친구들과 조언자들을 모조리 추방하거나 처형했다. 또한 몹시 비열한 복수심을 가지고 자신에게 잠재해 있던 황제로서의 위엄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았던 학우들과 친구들을 박해했다. 카리누스는 원로원 의원들에 대해서는 거만하고 제왕다운 태도를 즐겨 취하고, 종종 그들의 재산을 로마 시민들에게 분배해 줄 계획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쓰레기 같은 자들을 자신의 총신, 심지어는 대신으로도 발탁했다. 궁전뿐 아니라 심지어 황제의 식탁에까지도 가수, 무희, 창녀를 비롯하여 그 밖의 모든 잡다한 악덕과 우행의 추종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문지기 가운데 한 사람에게 수도의 행정권을 위임하기도 했다. 또 카리누스는 자신이 처형한 근위대장의 자리에 방종한 쾌락의 추종자 가운데 한 명을 대신 앉힌 적도 있었다. 똑같이 아니 심지어는 좀 더 파렴치한 또 다른 총신에게는 집정관직을 부여하기도 했다. 위조 기술이 보기 드물게 뛰어났던 심복 비서관 한 사람은 황제의 승낙을 얻어 서류에 대신 서명함으로써 게으른 황제를 지루한 임무에서 구해 주었다고도 한다.(418∼419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_1권』

 

(나의 생각)

 

어떤 경우이든 관계없이 갑작스럽게 '국가 최고의 지도자'로 올라서게 되는 경우는 역사에서 그리 드물지 않다.(지금 현재의 남북한의 최고 통치자들 역시 '준비가 덜 된 상태로' 갑작스레 무대에 데뷔했다는 점에서는 서로 닮았다.) 그러나 그런 직위에 오른 사람이 '급속한 영달을 침착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미덕과 사려분별이 필요'하다. 한 국가의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풍부한 인물이 어떻게 우연히 찾아온 그런 기회를 기가 막히게 활용했는지, 혹은 그와 반대로 자질이 부족한 인물이 그런 기회를 틈타(?) 국가와 국민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폐혜를 끼쳤는지는 숱한 지난 날의 역사만 살펴 봐도 충분하다. 

 

 

* 카루스(재위 282∼283년)

 

276년 프로부스가 황제로 즉위하자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근위대장)가 되었다. 프로부스가 죽은 뒤, 군인들에 의하여 황제로 추대되었다. 황제가 된 뒤, 두 아들 카리누스와 누메리아누스를 카이사르(부황제)로 삼았다. 다른 부족들이 도나우강과 판노니아 지역을 침범하자 누메리아누스와 함께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프로부스가 계획하였던 메소포타미아 정복을 실현하기 위하여 누메리아누스와 함께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 카리누스는 로마에 남게 하여 서부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283년 페르시아 군대를 무찔러 티크리스강 유역까지 진격함으로써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장악하고, 주변 지역까지 압박하였다. 그러나 폭풍우가 심하게 몰아치던 날에 갑작스럽게 목숨을 잃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질병에 걸렸다는 설과 벼락에 맞았다는 설, 훈족과 벌인 전투에서 입은 상처 때문이라는 설 등이 있다. 또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이는 데 반대한 군대에서 암살하였다는 설도 있다. 아들 카리누스와 누메리아누스가 뒤를 이어 공동황제가 되었다.(출처:네이버 백과)

 

 

* 카리누스(재위 283∼285년)

 

카루스의 장남이다. 282년 카이사르(부황제) 칭호를 받았다. 283년 아버지가 죽은 뒤, 동생 누메리아누스와 공동 황제가 되었다. 카리누스는 서부 지역을, 누메리아누스는 동부 지역을 통치하였다. 284년 아버지 카루스가 페르시아 원정을 승리로 이끈 것을 기념하여 경기를 벌였다. 또 게르만족이 라인 지방을 침범하자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같은 해 누메리아누스는 페르시아 원정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오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285년 봄, 베네치아의 총독 아우렐리우스 율리아누스가 스스로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하자, 베로나 부근에서 그의 군대와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285년 6월 모이시아에서 누메리아누스의 뒤를 이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군대와 전투를 벌이던 중 마르구스 강변에서 살해당하였다. 황제로서 통치하는 동안 악정()을 펼쳐 민심을 잃었다.(출처:네이버 백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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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데키우스는 격렬한 전란 속에서 분투하는 동시에, 전쟁의 소용돌이 가운데서도 침착하고 신중하게 안토니누스 시대 이래로 위대한 로마의 쇠퇴를 그처럼 급속도로 재촉한 보다 총체적인 원인들을 고찰하고 있었다. 그는 곧 공공의 미덕, 예로부터 전해 온 원칙 및 풍속 그리고 짓밟힌 법의 위엄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로마의 위대성을 항구적인 기반 위에 복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처럼 숭고하지만 달성하기는 어려운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는 우선 유명무실했던 감찰관직을 부활시키기로 결심했다. 이 직책은 원래 형태 그대로 유지되는 동안에는 국가의 존속에 크게 기여했었으나, 역대 황제들이 그 권리를 침해하면서 점차로 등한시되어 왔다. 군주의 호의로 권한을 부여할 수는 있지만 오직 국민의 존경만이 권위를 수여한다는 것을 깨달은 데키우스는 감찰관의 인선을 원로원의 공정한 투표에 맡겼다. 만장일치의 투표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환호로 발레리아누스가 이 영예로운 직위의 최적임자로 선포되었다. 그는 나중에는 황제가 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데키우스 군대의 요직에 복무하고 있었다. 원로원의 결정이 황제에게 전달되자 곧 그는 진중에서 대회의를 소집하고 감찰관 내정자를 임명하기에 앞서, 그에게 이 고귀한 직책의 어려움과 중요성에 관해 알려 주었다. 황제는 이 뛰어난 신하에게 이렇게 말했다.

 

축하하오, 발레리아누스. 원로원과 로마 공화국의 전적인 찬성을 얻었음을 축하하오! 인류의 검열관이자 우리 풍습의 심판관인 이 직위를 수락하기 바라오. 원로원 의원직을 계속 수행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을 가려내고, 기사 계급에게 옛날의 영광을 되돌려 주며, 국고 세입을 개선하되 국민의 부담을 경감해 주기 바라오. 가지각색의 수많은 시민들을 질서정연하게 계층별로 분류하고 로마의 군사력, 재정, 덕목, 자원을 정확하게 살피도록 하시오. 그대의 결정 사항은 법률과 같은 효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군대, 궁정, 재판관들, 그리고 제국의 고관들 모두가 그대의 직권에 복속될 것이오. 집정관, 수도의 장관, 대제사장, 그리고 베스타 성전의 수석 성처녀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을 것이오. 엄격한 처사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소수의 사람들조차도 로마 감찰관의 존중을 받기를 간절히 열망할 것이오.

 

 

(…) 국민의 마음 속에 자리한 명예와 미덕에 대한 예리한 감각, 여론에 대한 깊은 존중심, 그리고 국가의 풍속을 위하여 싸울 수 있게 해 주는 일련의 유용한 선입견들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러한 공직자가 자신의 권위를 유익하게, 심지어 효과적으로 행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원칙들이 소멸된 시대에, 감찰관의 재판권은 한낱 공허한 겉치레로 전락하거나 성가신 압제의 불공정한 도구로 전환될 것이 틀림없었다.(295∼297쪽)

 

(나의 생각)

 

특별감찰관 제도는 우리나라에서도 도입된 바 있다. 에드워드 기번의 지적대로, '한낱 공허한 겉치레로 전락한 셈'이나 다름없었지만 말이다. 적폐 투성이였던 전임 정권에서조차 형식적으로나마 임명되고 운영되었던 '특별감찰관' 제도가 새로운 정권에서는 유명무실해진 것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새로운 정권이 출범된지 무려 2년 가까이 흘렀음에도 어찌 된 셈인지 감감무소식이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따지는 사람조차도 구경하기 힘들다. 에드워드 기번의 언급은 이번에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킨 새로운 헌법재판관 임명 문제도 새삼 상기시킨다. 기번의 말대로, '국민의 마음 속에 자리한 명예와 미덕에 대한 예리한 감각, 여론에 대한 깊은 존중심' 등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인물을 억지로 그 자리에 끌어앉히려는 모습이 너무 역력해 보이기 때문이다.

 

 

 * * *

 

 

인류의 총체적인 재난 가운데서도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는 철학자가 있다면, 그 냉담한 철학자에게는 오두막에서 옥좌로 다시 옥좌에서 무덤으로 이어지는 이 급속하고 끊임없는 변천 과정이 한낱 웃음거리에 불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타의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 황제들이 옹립되어 권력을 누리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은 그들의 신하와 지지자들 모두에게 똑같이 파멸을 안겨다 주는 것이었다. 군대에게는 즉각적으로 이 치명적인 옹립에 대한 응분의 보상이 주어졌는데, 이것은 피폐한 국민들로부터 쥐어 짜낸 막대한 기부금으로 충당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품이 아무리 고결하고 의도가 아무리 순수하다 할지라도, 자신들이 탈취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빈번하게 약탈과 잔혹 행위를 자행할 수밖에 없다는 냉엄한 필연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몰락할 때면, 휘하 부대와 속주들도 여기에 휘말리게 되었다. 일리리쿰에서 황제를 사칭하고 나섰던 인게누우스를 진압한 후 갈리에누스가 대신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보낸 매우 잔인한 내용의 명령서가 지금도 남아 있다. 온순한 듯하지만 사실은 냉혹한 이 군주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기를 들고 나섰던 자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네. 전투를 통해서만이라도 그 정도 효과는 거둘 수 있었을 것이네. 모든 연령대의 남성은 절멸시켜야만 하며, 다만 어린아이와 노인을 처형할 때는 짐의 평판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도록 하게. 짐에 대항하여, 발레리아누스의 아들이며 수많은 군주들의 아버지이자 형제인 짐에 대항하는 말을 한 마디라도 입 밖에 냈거나 그러한 생각을 품었던 자들은 모두 죽여 버리게. 인게누우스가 황제인 양 행동했던 사람임을 잊지 말고 그를 찢어 죽여 잘게 조각내도록 하게. 짐이 그대에게 짐의 손으로 친히 글을 써 보내는 것은 그대에게 짐의 감정을 느끼도록 하기 위함이네.

 

국가의 공식적인 군사력이 사적인 싸움에 소모되고 있는 동안 무방비 상태의 속주들은 온갖 침략자들에게 노출되어 있었다.(332∼333쪽)

 

(나의 생각)

 

전임 대통령이 탄핵된 끝에 새로운 정권이 출범한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정권 교체 이후로 나날이 심화되는 정파간의 싸움 때문에 국민들은 너무나 피곤하다. 싸움이 가열될수록 국가의 공식적인 권력을 '사적인 싸움'에 동원하는 듯한 느낌도 떨치기 어렵다. 극심한 정쟁의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임을 뻔히 알 텐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휘두르는 데만 골몰할 뿐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모습이다.

 

 

 * * *

 

 

아우렐리아누스의 통치 기간은 불과 4년 9개월가량 지속되었을 뿐이지만 그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순간이 기억할 만한 업적들로 충만했다. 그는 고트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고 이탈리아로 쳐들어온 게르만족을 응징했으며 갈리아와 에스파냐, 브리나티아를 테트리쿠스의 손아귀에서 탈환했다. 나아가 유린당한 제국의 폐허 위에 제노비아가 건설한 동방의 저 오만한 군주국까지 멸망시켰다.

 

그의 군대가 이처럼 연이어 성과를 올렸던 것은 규율에 관해서라면 아주 사소한 조항까지도 신경을 썼던 아우렐리아누스의 엄격한 태도 덕분이었다. 그가 제시한 여러 가지 군대 규정이 휘하 하급 장교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보낸 매우 간결한 한 통의 편지에 열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이 장교에게 군단 참모장교가 되고 또한 목숨을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이 규정들을 실행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도박과 음주, 점술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휘하 병사들이 절도 있고, 검소하며, 근면하기를 원했다. 갑옷은 항상 빛이 날 정도로 손질해 두어야 하고 무기는 예리하게 갈아 두며 군복과 군마는 즉시 사욯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어야 했다. 병영 내에서는 금욕과 금주를 실행해야 하며 곡물 경작지에 피해를 입혀서는 안 되고 양이나 닭 한 마리 혹은 포도 한 송이조차 훔쳐서는 안 되었다. 또 지주들에게 소금이나 기름, 목재를 무리하게 요구해서도 안 되었다. 황제는 계속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국가의 급여만으로도 그대들이 생활하기엔 충분하다. 재물은 적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으로 모으는 것이지 지역 주민들의 눈물로부터 모으는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실례만으로도 아우렐리아누스가 엄격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무자비하기까지 했다는 것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병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 묵고 있던 집주인의 아내를 유혹하여 농락한 일이 있었다. 유죄를 선고받은 이 비열한 병사는 좌우에서 억지로 끌어당겨 휘어진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 묶였고, 묶인 두 나무 사이가 갑자기 절단되면서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이런 몇 가지 본보기는 병사들을 깜짝 놀라게 하여 유익한 효과를 가져왔다. 아우렐리아누스의 처벌은 끔찍한 것이었지만, 그 때문인지 똑같은 위반 행위에 대해 한 번 이상 처벌을 가할 필요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의 품행이야말로 이러한 군율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다. 따라서 불온했던 군대도 군율 준수가 몸에 배고 통솔자로서도 손색이 없는 이 지배자를 두려워하게 되었다.(352∼354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_1권』 중에서

 

(나의 생각)

 

우리나라 공직자들의 규율을 까마득한 옛날 '로마 군대'와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조직이든지 '기강 해이 문제'야말로 그 조직이 얼마나 건강한가 병들어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척도임에는 틀림없다. 아무리 작은 조직이라도 기강이 바로 잡히지 않고는 좋은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전 국민들의 생활에 두루 영향을 미치는 '국가'의 경우에 '기강 해이'가 얼마나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는가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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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

Shooting Date/Time 2019-04-16 오후 5:07:50

 

 

 

 - 사랑하는 연인들이 많군요 ♬♬

 

 

 

 - 알 수 없는 친구들이 많아요♬

 

 

 

 - 그대여 우리 이제 손잡아요 ♬

 

 

 

 - 좋아요♬♬

 

 

 

 - 봄바람 휘날리며~

 

 

 

 - 흩날리는 벚꽃잎이 울려퍼질 이 거리를~

 

 

 

 - 둘이 걸어요♬

Shooting Date/Time 2019-04-16 오후 6:07:48

 

 

 

 - 개나리도 좋아요 ♬ 벚꽃도 좋아요 ♬

 

 

 

- 따스한 봄 햇살도 좋아요 ♬

Shooting Date/Time 2019-04-16 오후 6:17:38

 

 

 - 이렇게 또 하루가 저무네요 ♬

Shooting Date/Time 2019-04-16 오후 6: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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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7 0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17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9-04-20 1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예술입니다. 계절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셨네요.

oren 2019-04-21 12:26   좋아요 0 | URL
언제쯤 만개할까 궁금해 하던 차에, 마침 이 날이 절정이더군요.

평일인데도 어찌나 사람들이 많이 나왔던지,
그 사람들이 어찌 그리 귀신같이 ‘오늘이 절정‘인 줄 알았는지,
저도 때마침 운 좋게 이 날에 저 꽃들을 만날 수 있었는지,
그런 생각들을 하니 여러모로 기분좋은 날이었답니다.^^
 

 

그 훌륭한 왕친(王親)의 ㅡ 못돼먹은 임금이라니!

그럼에도, 경들, 이 끔찍한 태풍 다가오는 소리 듣기만 하고,

폭풍우 피할 은신처를 우리는 찾지도 않고 있구려.

 -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2막 1장> 중에서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에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흉상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황제는 『명상록』의 저자로 유명하다. 그가 얼마나 자신을 엄격하게 수양했는지는 『명상록』만 읽어봐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황제로서 마땅히 누려도 좋을 온갖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기 보다는 도리어 황제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마땅히 갖춰야할 인격을 도야하는데 훨씬 더 노력했다.

 

그는 로마 제국의 황제이면서도 스토아 학파 철학자였다. 그는 『명상록』에서 보듯이, 숨이 막힐 정도로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약삭빠른 재능과 지식은 타고나지 않았을지 모르나, 타협하지 않는 철저한 진지함, 인간적 성실함, 근엄함은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었다.

 

그가 재위했던 때는 이른바 '5현제의 치세'의 마지막 20년 동안이었다.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맨 처음으로 다룬 시기도 바로 5현제가 다스렸던 '서기 98년∼180년'이었다. 기번의 대작은 이렇게 시작된다.

 

서기 2세기의 로마 제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토와 가장 문명화된 인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광대한 군주국의 변경은 예로부터 전해 오는 명성과 엄격하게 훈련된 용맹으로 지켜졌다. 법과 관습의 온건하지만 강력한 영향력은 점진적으로 모든 속주들을 하나로 결속시켜 나갔다. 그곳의 평화로운 주민들은 부와 사치를 마음껏 향유하고 또 남용하기도 했다. (…) 80년이 넘게 지속된 행복한 시기 동안에는 미덕과 능력을 두루 갖춘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그리고 두 명의 안토니누스 황제에 의한 선정이 베풀어졌다. …… (1쪽)

 

 - 『로마 제국 쇠망사』, 제1장, 안토니누스 가 황제들 시대의 로마 제국의 범위와 군사력, 서기 98∼180년

 

* 에드워드 기번이 말한 '두 명의 안토니누스  황제'란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년) 황제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재위 161∼180년) 황제를 말한다.(oren)

 

 

이들 다섯 황제가 다스리던 시대만 하더라도 로마 제국 전역은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넘쳐 흘렀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였다. 온갖 이민족들이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고, 온갖 다양한 종교들이 넘쳐났지만 그들 사이엔 '종교 갈등'조차 없었다. 대중들은 로마에서 유행하던 다양한 형태의 숭배가 모두 똑같이 진실하다고 생각했고, 철학자들은 똑같이 거짓되다고 생각했으며, 행정관들은 똑같이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종교에 대한 관용과 화합은 그렇게 작동되었다.

 

고대인들은 대체로 온화하고 관대했기 때문에 종교 간의 차이점보다는 유사점에 더 주목했다. 그리스인, 로마인, 야만족들이 서로 다른 제단에서 마주쳤을 때, 그들은 비록 신의 이름이나 예배 형식은 다르지만 결국은 같은 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호메로스의 품위 있는 신화는 고대 세계의 다신교에 아름답고 전형적인 형태를 부여하고 있다.(33쪽)

 

 

두 명의 안토니누스 황제는 하드리아누스(재위117∼138)가 발굴해냈다. 그는 가장 훌륭한 황제 둘을 한꺼번에 찾아냄으로써 길이 후세의 칭송을 받았다. 그는 일생 동안 그 어떤 오점도 남기지 않은 50세의 원로원 의원을 그의 양자로 입양하면서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양자로 하여금 '성인이 되면 모든 미덕을 갖출 것이 분명해 보이는' 17세의 소년을 양자로 받아들이게 했다. 그렇게 해서 한꺼번에 발굴된 두 명의 황제는 42년간 변함없는 지혜와 미덕으로 로마 제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영광보다는 제국의 번영을 생각해서' 자신의 딸 파우스티나를 양자로 입양한 마르쿠스와 결혼시켰다. 그에게 호민관과 집정관의 권력을 주었으며 나중에는 황제의 자리까지 넘겨주었다. 에드워드 기번은 말한다. 이 두 황제가 다스리는 시기야말로 '정부의 목표가 오로지 전국민의 행복이었던 역사상 유일한 시대일 것'이라고.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 전체에 질서와 평화를 전파했다. 그의 시대는 역사에 거의 자료를 남기지 않은 시대로 손꼽히는데, 사실 역사란 인간의 범죄와 우행과 불행의 기록에 다름 아닌 것이고 보면, 이것은 참으로 보기 드문 영예라 하겠다. 사생활에서의 그는 선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천성이 소박해서 허영이나 위선을 몰랐다. 그는 지위에서 비롯되는 편의나 악의 없는 쾌락들은 적당히 누릴 줄도 알았고, 자비로운 마음과 유쾌하면서도 차분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황제의 미덕은 보다 엄격하고 근면한 수련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미덕은 수많은 학자들을 만나고 수많은 강의들을 인내심 있게 듣고 밤 늦게까지 공부해서 얻은 결실이었다. (…) 소란한 병영에서 기록한 그의 『명상록』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는 현자의 겸손이나 황제의 권위와는 다소 동떨어진 방식으로 공개 철학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의 삶 자체가 제논의 교훈에 대한 고귀한 해설이었다.(86∼87쪽)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황제의 유일한 약점이라면 '온화한 성품'이었다. 그는 이성적인 사람이었지만 의심할 줄 모르는 순진한 마음 때문에 종종 기만당했다. 특히 황제는 양부(養父)의 딸인 파우스티나와 아들 콤모두스에게 무조건적인 애정을 쏟았는데, 그들의 악덕으로 인한 폐해가 너무 커서 공적인 피해로 연결되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딸이자 마르쿠스의 아내였던 파우스티나는 미모뿐만 아니라 화려한 연애 편력으로도 유명했다. 엄숙하고 고지식한 성격을 지녔던 마르쿠스 황제로서는 아내의 자유분방한 기질이나 무모한 열정을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로마 제국 안에서 파우스티나의 부정을 모르는 사람은 남편밖에 없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황제는 아내의 부정을 새까맣게 몰랐다는 게 문제였다. 그는 아내의 연인을 위해서도 고위 공직을 맡겼고, 30년 동안 한결같이 아내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존중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그녀가 죽은 후까지도 그녀를 존경했다.

 

마르쿠스는 『명상록』에서 그토록 정숙하고 온화하며 검소한 부인을 내려주신 것에 대해 신께 감사드리고 있다. 아첨 잘 하는 원로원은 황제의 진지한 요청을 받아들여 그녀를 여신으로 선포했고, 그녀는 유노, 베누스, 케레스의 특성을 지닌 여신으로 신전에 모셔졌다. 모든 청춘남녀는 결혼식 날에 이 정숙한 수호 여신 앞에서 서약해야 한다는 법령까지 선포되었다.(94쪽)

 

 

파우스티나, 프랑스 국립박물관

 

마르쿠스 황제를 뒤이은 아들의 극악무도한 악덕은 아내의 부정과는 비교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젊은 콤모두스의 편협한 정신을 열어주고 악독한 마음을 순화시키기 위해 아버지와 신하들은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허사였다. '교육의 힘이란 교육이 필요 없는 타고난 우수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행해질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법'(기번)이기 때문이다. 아들이 겨우 14∼15세가 되었을 때 '황제의 권력'을 함께 누리게 만든 것도 치명적이었다. 이 때문에 어린 콤모두스는 어떤 제약에도 굴하지 않는 오만불손한 젊은이로 변해버렸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누릴 것만 있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이를 두고 기번은 다음과 같이 통찰하고 통탄한다.

 

사회의 내부적 평화를 위협하는 범죄의 대부분은 필요하기는 하지만 불공평한 소유의 법칙이 모든 사람이 갈망하는 대상을 소수의 소유로 국한시킴으로써 인간의 욕구를 제약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모든 열정과 욕구 중에서도 권력욕이 가장 중대하면서도 반사회적인 것이다. 한 사람의 권력과 자부심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복종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내란의 소용돌이에서는 사회의 법률은 효력을 잃고 그 빈자리를 인간성의 법칙이 대신하지도 못한다. 경쟁심, 승리에 대한 갈망, 좌절된 희망, 과거의 상처에 대한 기억, 미래의 위험에 대한 불안 등이 정신을 극도로 자극시켜 인간적인 동정심을 잠재운다. 위에 열거한 동기들로 인해 역사의 모든 페이지는 내전의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이런 동기들로도 콤모두스의 이유 모를 잔인성을 설명할 수는 없다.(95쪽)

 

 

카피톨리니 미술관의 헤라클레스 모습의 콤모두스 석상

 

 

콤모두스는 유아기부터 잔인한 행동을 서슴치 않은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사악하기보다는 유약했고, 단순하고 소심했기 때문에 측근들의 말만 믿었고, 그들 때문에 저지른 잔인행 행동들이 점점 습관화된 끝에 마침내 잔인성이 그의 영혼을 지배했던 케이스였다.

 

아버지인 마르쿠스 황제가 도나우 강변의 전장터에서 죽고 나서 19세에 황제에 오른 그는 치세 첫 3년 동안은 그럭저럭 사정이 괜찮은 편이었다. 마르쿠스 황제 시대의 형식과 정신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고, 아버지가 남겨 놓은 훌륭한 고문관들이 있었기때문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빚어진 치명적인 사건이 그를 망쳐놓고 말았다. 어느날 밤 어둠에 잠긴 콜로세움의 좁은 주랑을 지나는 길에 한 자객으로부터 습격을 받은 사건이 일어났다. 암살은 실패했고 음모를 꾸민 일당들은 체포되었지만 이 사건 때문에 충격을 받은 그는 원로원 전체를 마음속 깊이 두려워하고 증오하게 되었다. 황제가 원로원 의원들의 불만과 음모를 찾아내려 하자 약삭빠른 밀고자들이 갑자기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마르쿠스 황제가 언제나 '국가최고회의'로 생각하며 존중했던 원로원은 가장 고결하고 훌륭한 로마 시민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이제 그들은 모두 범죄자가 되어 버렸다. 부자들은 밀고자들의 주요 목표가 되었고, 엄격한 미덕을 갖춘 자는 콤모두스의 방탕에 무언의 비난을 노내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주요 공직에 오른 자는 너무 뛰어나서 오히려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었으며, 아버지 마르쿠스 황제의 친구들은 항상 아들의 혐오를 불러일으켰다. 의심은 곧 증거가 되었고 재판은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지명도가 높은 원로원 의원을 처형할 때는 그 죽음을 슬퍼하며 복수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까지 함께 처형했다. 이렇게 한번 피의 맛을 알게 되자 톰모두스는 연민을 느낄 줄도 후회를 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98쪽)

 

 

이 대목을 읽으면 갑자기 불쾌한 기억이 솟아오른다. 39년 전 어느 봄날 국가 방위를 위해 만든 군대를 동원하면서까지 잔인하게 무고한 시민들을 죽였던 흉포한 독재자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번 피의 맛을 알게 되자 그 독재자는 집권기간 내내 철권통치로 일관했으며, 국민들의 손으로 직접 지도자를 뽑게 해달라는 '직선제 개헌 요구'마저 거부하다가 온국민이 들고 일어난 6.10 항쟁 앞에서 겨우 폭주를 멈췄다. 그를 제대로 단죄하지 않고 아직까지도 뻔뻔스런 얼굴로 궤변을 늘어놓도록 놔둔 건 한국 정치의 오랜 수치이자 오욕으로 기록될 것임에 틀림없다.

 

다시 콤모두스로 돌아오자. 능력보다는 우행이나 만행을 과시하기 바빴던 콤모두스 황제 덕분에 벼락 출세한 인물들이 잇따라 등장했고, 그들은 황제와 더불어 덩달아 춤을 추었다. 고위직에 있으면서 국민들을 착취하고 부정축재를 일삼는 무리들이 점점 늘어났다. 도적떼들이나 다름없던 인물들 중엔 콤모두스의 제위를 넘볼 만큼 뻔뻔스러운 인물들도 더러 있었지만 음모가 조기에 발각된 덕분에 모조리 실패로 돌아갔다. 이런 일들을 겪는 동안에 갈수록 의심이 늘어난 군주는 측근들만 총애하고 중용하기 시작했다. 교활한 신하들이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자 콤모두스는 '자신의 발밑에 갖다 바치는 어머어마한 선물'에만 점점 눈이 멀기 시작했다. 이때 목욕탕, 주랑, 경기장들이 황제의 이름으로 많이 건설된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목숨을 걸고 충언을 마다하지 않는 충신들도 더러 나타났으나 폭군은 그들이 건넨 충언의 보답으로 그들의 목숨을 빼았았다.

 

혹사병과 기근까지 겹쳐 로마의 재앙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첫 번째 기근은 신들의 정당한 분노 탓으로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기근은 클리안데르가 부와 권력을 이용해 곡식을 전매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생각되었다. 대중의 불만은 오랫동안 은밀히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사람들이 운집해 있던 대경기장에서 폭발했다. 그들은 복수라는 더 즐거운 오락을 위해 그들이 무척 좋아하던 여흥을 포기하고 교외에 있는 황제의 별장으로 몰려가서 공공의 적, 클리안데르의 머리를 내놓으라고 사납게 요구했다. 근위대의 지휘권을 갖고 있었던 클리안데르는 기병대를 보내서 폭도들을 해산시키도록 했다. 사람들은 로마 시내로 재빨리 도망쳤다. 이 과정에서 몇몇은 기병대의 칼을 맞아 죽었고 훨씬 많은 사람들이 밟혀 죽었다. 그러나 기병대가 로마 거리로 들어서자 주택의 창문이나 지붕에서 돌과 화살이 날아와 그들을 저지했다 (…) 기병대가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자 대중의 분노는 더욱 불타올라 그들은 성난 파도와 같이 거침없이 황제의 궁전까지 나아갔다.(102∼103쪽)

 

 

이 대목에서 우리가 겪었던 지난날의 여러 '유혈 시위 사태'를 떠올리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머나먼 다른 나라의 케케묵은 역사를 다시금 살피는 목적도 바로 그런 데 있을 터이다. 다시금 로마로 눈을 돌리자. 콤모두스가 시시각각으로 극도로 위험한 상황에 내몰려 있기 때문이다. 황제의 애첩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클리안데르의 죄상과 대중의 분노를 설명하고 성난 군중이 곧 황제의 궁전으로 들어닥칠 것이라고 황제에게 알렸다. 황제는 급히 묘책을 떠올렸다. 성난 군중들에게 클리안데르의 머리를 던져 줄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폭동은 곧 가라앉았다.

 

이를 계기로 콤모두스가 정신을 바짝 차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럴 능력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는 무능한 총신들에게 제국의 통치를 맡겨두고는 관능적인 욕구에 빠져들었다. 모든 계급, 모든 속주에서 모아들인 300명의 아름다운 여인들과 후궁에서 모든 시간을 보냈다. 고대 역사가들은 이 방탕한 매음굴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지만, 기번은 자신의 점잖은 언어로 그 기록들을 다시 옮겨놓기를 거부한다.

 

품위 있는 시대의 영향력 아래서 세심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거칠고 야수 같은 마음에는 학문의 흔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콤모두스는 학문의 즐거움을 전혀 몰랐던 최초의 로마 황제였다. 네로 황제조차도 음악과 시에 뛰어났거나, 적어도 뛰어난 척은 했다. (…) 그러나 콤모두스는 어린 시절부터 이성적이거나 학문적인 것은 혐오했고, 대경기장과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경기들, 즉 검투사들의 시합과 맹수 사냥 같은 대중적인 오락만을 즐겼다. 마르쿠스가 아들을 위해 불러 모은 학문의 대가들은 산만하고 쉽게 싫증 내는 학생을 가르쳐야 했지만, 투창이나 활 쏘는 법을 가르쳤던 무어인이나 파르티아인들은 즐겁게 배우면서 눈썰미나 기교에서 곧 스승을 따라잡는 기특한 학생을 가르쳤던 것이다.(104∼105쪽)

 

 

황제의 악덕을 부추기고 함께 놀아났던 측근들은 황제의 저열한 취미에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들은 네메아의 사자와 에리만투스의 야생 멧돼지를 죽임으로써 신의 반열에 오른 헤라클레스를 상기시켰다. 맹수들의 조용한 은거지를 애써 찾아다니며 포획해서 로마로 끌고 온 다음, 황제가 직접 죽이는 장관을 연출하는 오락이 잦아졌다. 콤모두스는 어느새 자신을 '로마의 헤라클레스'로 여겼다. 황제의 옥좌 옆에는 황제의 기장은 물론 사자 가죽과 곤봉까지 함께 놓여 있었다. 콤모두스의 동상은 이내 헤라클레스를 본따 만들어졌다. 콤모두스는 아첨꾼들의 칭찬에 한껏 고무되어 궁전 안에서의 이벤트를 대규모 장외 행사로까지 격상시켰다. 로마 시민들을 원형경기장으로 끌어모은 것이다.

 

콤모두스는 초승달 모양의 화살촉이 달린 화살로 재빨리 질주하는 타조의 길고 여윈 목을 정확히 맞추었다. 풀어 놓은 표범이 떨고 있는 죄수에게 달려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정확히 화살을 쏘아서 표범은 죽이고 죄수는 전혀 다치지 않게 만들기도 했다. 경기장에 백 마리의 사자를 풀어 놓고 그것들이 경기장 안을 으르렁거리며 달리는 동안 정학하게 백 개의 화살을 쏘아 모두 죽이기도 했다. 코끼리의 거대한 몸집도 코뿔소의 단단한 가죽도 그의 화살을 피할 수는 없었다. 에티오피아와 인도로부터 희귀한 동물들이 보내져 왔고, 예술 작품이나 공상 속에서나 나왔던 진귀한 동물들도 원형경기장에서 죽임을 당했다.(106쪽)

 

 

급기야 황제는 몸소 검투사가 되어 경기장에 '선수'로 등장했다. 그는 세쿠토르(Secutor)의 의복과 무기를 갖추고 나타났는데, 그와 싸우는 상대인 레티아리우스(Retiarius)의 대결은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시합들 중에서도 가장 생생하면서도 잔인한 시합이었다. 황제는 세쿠토르의 역할을 맡아 735번이나 시합을 벌였다.

 

콤모두스의 악행과 오욕이 남긴 희생자들의 긴 목록은 그가 얼마나 자신의 신변에 닥칠 위험을 두려워했으며, 만성화된 살육의 습관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준다. 에드워드 기번은 이 당시 로마의 총독이나 군 지휘관들이 거의 매일 매시간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의 극단적인 잔인성이 결국에는 자신의 죽음까지 초래하였다. 그는 가장 고귀한 로마인들을 죽이고도 무사했지만, 가신들까지 그의 잔인성을 두려워하게 되자 그의 죽음이 찾아왔다. 친구들이나 동료들의 죽음에 놀란 애첩 마르키아와 시종장 엘렉투스, 근위대장 라에투스는 황제의 미친 듯한 변덕이나 국민의 분노의 폭발로 언제 자기들 머리에 떨어질지 모르는 죽음을 미연에 방지하기로 결심했다. 마르키아는 맹수 사냥 후 지친 콤모두스에게 포도주를 가져다줄 때를 노려 독약을 탔다. 잠자리에 든 콤모두스가 독과 술기운 때문에 정신을 가누지 못하고 있을 때 레슬링 선수였던 한 건장한 젊은이가 방으로 들어와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그를 목 졸라 죽였다. 황제의 죽음을 궁정 사람들이나 국민들이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유해는 은밀히 궁전 밖으로 운반되었다. 이것이 마르쿠스의 아들의 최후였다. 13년의 치세 동안 가상적인 권력을 이용해 힘이나 능력에서 자신보다 못할 것이 없던 수백만의 국민들을 억압해 온 폭군의 종말은 이렇게 쉽게 찾아왔다.(108∼109쪽)

 

 

음모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를 지지해 줄 새로운 황제를 재빨리 찾아냈다. 집정관급 원로원 의원이자 그 당시 로마 총독이었던 페르티낙스는 밤늦은 시간에 시종장과 근위대장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황제의 명령대로 어서 자신을 처형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로마의 황제 자리를 받아주라고 읍소했다. 그는 황제의 자리가 진심으로 내키지 않았지만 마지못해 그 제의를 받아들이고는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냈다.

 

기나긴 그날 밤이 지나자 서기 193년 새해의 첫날이 밝았다. 페르티낙스는 원로원 회의를 소집하고 자신보다 더 고귀한 원로원 의원 몇 명을 새로운 황제로 선출해줄 것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콤모두스에게는 죄과에 합당한 수치가 주어졌다. 폭군, 검투사, 공공의 적이라는 칭호들이 부여되었고, 모든 동상들을 파괴할 것, 대중의 분노를 만족시키기 위해 시체를 갈고리에 찍어 검투사들의 탈의실로 끌고 갈 것 등이 법률로 선포됐다.

 

원로원이 황제가 살아 있을 때에는 아첨하면서 비굴하게 굽실거리다가 죽은 다음에야 이렇게 무기력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납득이 가기는 하지만 다소 비열한 복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법령들은 로마 제정의 원칙 내에서는 완전히 합법적인 것이었다. 공화국의 최고 행정관이 자신에게 위임된 임무를 남용했을 때 원로원이 그를 탄핵하고 폐위하거나 처형할 권리는 오랫동안 확고하게 유지되어 왔다.(111쪽)

 

 

역사를 살펴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쩌면 이토록 닮았을까' 싶은 대목이 너무 많아 깜짝깜짝 놀라기도 한다.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제국 쇠망사』라고 해서 사정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가 쓴 역사 기록을 살펴 보더라도 우리가 이미 겪었던 숱한 불행한 과거사들이 너무 자주 떠오르기 때문이다. '로마사'를 깊이 연구했던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와 똑같은 현상이 숱한 사람 사이에서 여러 차례 되풀이되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입버릇처럼 하게 되었다.

 

"정계에만 들어가면 재야 때의 뜻은 어디로 가 버리는지." 

 

 -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제1권> 제47장 중에서

 

 

예나 지금이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가장 중대하면서도 반사회적인 '권력욕'이 늘 문제다. 에드워드 기번의 말대로, 한 사람의 권력과 자부심을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복종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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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4-14 11: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책 명성에 비해 시시하군, 하고 느꼈어요. 지금 읽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요....
문제는 권력욕이군요. 그리고 올바르게 보지 않는 시각. 신하들을 범죄자로 보고 의심하는 본인도 괴로웠을 것 같습니다.
복수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까지 죽였다니... 유능한 사람들은 전부 없어지고 무능하고 아첨 떨기 좋아하는 사람들만
옆에 남았겠군요. 역사는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북한의 누구도 조금만 의심 들면 처형하고 그랬잖아요.

인용하신 글과 오렌 님의 글, 이 두 가지가 잘 구분되지 않은 채로 읽었습니다. 오렌 님의 글로 읽고 나면 인용문이었고,
인용문이구나 하고 읽으면 오렌 님의 글이고... 좋은 뜻으로 말하는 거예요. ㅋ 잘 읽었습니다.

oren 2019-04-14 14:30   좋아요 2 | URL
로마 제국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공화정에서 다시 제정으로 바뀌었는데,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이 5현제의 시대때 다시 ‘공화정‘으로 되돌리지 못한 걸 못내 아쉬워하더군요. 그 정도로 훌륭한 사람들이었으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었다고 보더군요. 그때 다시 공화정으로 되돌아갔다면 서양 역사가 통째로 뒤바뀌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고대 그리스로부터 ‘민주주의‘를 비롯한 온갖 탁월한 문명들을 거의 다 모방하고 받아들였으면서도, 통치자 한 사람에게로 모든 힘이 집중되는 비민주적인 권력구조만큼은 끝내 바로잡지 못했던 로마 제국은 필연적으로 ‘황제가 바뀔 때마다‘ 나라의 운명도 그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던 듯합니다. 카이사르나 옥타비아누스에게 맞서서 목숨을 걸고 로마의 공화정을 끝까지 지키려고 애썼던 인물들이 그래서 더욱 빛나 보이고요. 브루투스, 카토, 키케로 같은 인물들 말이지요.^^

겨울호랑이 2019-04-14 1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 쇠망사」의 시작을 5현제로 잡은 것은 상당히 인상적이라 여겨집니다. 제국의 절정에서 쇠망의 요인을 끌어내는 것도 이 책을 고전으로 끌어올린 요인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oren 2019-04-14 20:28   좋아요 1 | URL
로마 제국의 기나긴 쇠퇴 과정을 다루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모든 것이 훌륭하게 작동되었던 전성기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겠다 싶기도 합니다. 제국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로마 제국의 광대한 영토, 막강한 군사력, 내부적 번영, 예술, 사람들, 정치 체계 등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이 끝나자 말자, 어리석고 잔인한 황제들의 잔인성, 우행, 살육, 학정, 찬탈, 내전, 폭동 등등이 줄줄이 이어져 ‘찬란했던 한 때‘가 과연 있긴 있었나 싶은 심정이 들기도 하더군요.^^
 

 

“만일 전 세계의 도서관이 불타고 있다면 나는 뛰어 들어가 『셰익스피어 전집』과 『플라톤 전집』 그리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구해낼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 * *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각자 나름대로 얼마쯤의 '독서 목표'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목표들은 처음엔 대체로 소박하게 시작하는 게 보통인 듯하다. 왜냐하면 읽어야 할 책들이 얼마만큼 많은지를 처음부터 자세히 가늠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처음부터 무턱대고 '1만 권의 독서'를 목표로 하겠으며, 어느 누가 처음부터 '플라톤 전집'과 '셰익스피어 전집' 완독을 목표로 하겠는가.

 

그런데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더 많은 읽을거리를 자꾸만 더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건 마치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 공복감을 느끼는 고대 서양 신화의 에뤼식톤을 닮았다.

 

 

그자는 더 많이 뱃속으로 내려보낼수록 더 많이 요구했소.

마치 바다가 전 대지로부터 강물을 받아들여도

그 물로는 성에 차지 않아 멀리서 흘러 온 강물들까지 들이키듯이,

마치 모든 것을 삼키는 불이 영양분을 거절하는 일 없이

무수한 통나무들을 불태우고 더 많이 받을수록 더 많이 요구하고

많을수록 그로 인하여 더욱더 탐욕스러워지듯이,

꼭 그처럼 불경한 에뤼식톤의 입은 그 모든 음식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더 많은 것을 요구했소. 그에게는 음식이 곧 음식을

먹게 되는 원인이 되었고, 먹을수록 늘 공복감을 느낄 뿐이었소.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제8권 834∼878행

 

 

뒤늦게 셰익스피어에 입문했을 때, 나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만이라도 천천히 한번 읽어 봐야지 했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어느새 '셰익스피어 전집'을 모조리 다 읽는 쪽으로 '독서 목표'가 바뀐 걸 알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었다. 내가 언제부터 이토록 거창한(?) 욕심을 겁도 없이 품게 되었을까 싶었던 것이다.

 

아무튼 내가 셰익스피어를 만나자 말자 내처 읽었던 작품들이 결코 적지는 않았다. 비록 한꺼번에 전집을 끝까지 다 읽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걸 세어보니 정확히 21편이었다. 읽은 차례대로 그걸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

『로미오와 줄리엣』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줄리어스 시저』

『한여름 밤의 꿈』

『베니스의 상인』

『좋으실 대로』

『십이야』

『잣대엔 잣대로』

『겨울 이야기』

『태풍』

『헨리 4세 1부』

『헨리 4세 2부』

『헨리 5세』

『헨리 8세』

『리처드 2세』

『리처드 3세』

『말괄량이 길들이기』

 

보시다시피 여기서 딱 맘췄다. 더 이상 진척이 없었다. 셰익스피어의 나머지 작품을 다 읽기까지는 아직도 16 작품이 더 남았다. 그의 희곡 작품이 무려 37개나 되니 말이다. 미처 6할도 못 읽은 셈이다. 셰익스피어 전집 읽기가 여기서 멈춘 데는 출판사의 사정도 얼마간 영향을 미쳤다. 나는 민음사에서 '전 10권'을 목표로 새롭게 내놓은 <셰익스피어 전집>으로 셰익스피어 읽기를 시작했는데, 그 전집이 아직까지도 후속작을 내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최종철 교수가 '전10권'을 목표로 출간한 『셰익스피어 전집』시리즈. 전집 1권, 4권, 5권 , 7권에 담긴 작품들(모두 16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걸작들이다. 이 시리즈의 장점은 무엇보다 셰익스피어 전공 교수의 '운율을 살린 운문 번역'이면서 '가장 최신의 번역'이라는 점이다. 작품마다에 딸린 '풍부한 작품 해설'과 '충실한 주석' 등도 돋보인다. 간혹 지나친 '운문 번역'이 드라마틱한 극중 대사의 묘미를 반감시키는 면도 없지는 않다.)

 

 

민음사판 『셰익스피어 전집 시리즈』<전10권>(예정)  가운데 5권까지는 비교적 순조롭게 출간된 듯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딱 거기까지 진행되고 감감무소식이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틈날 때마다 후속작들이 나온 게 없나 하고 살펴보지만 맨날 그 모양이다. <셰익스피어 전집 10 : 소네트.시>가 마지막으로 출간된 이후로 꼬박 3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후속작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완전히 도외시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출판사마다 번역의 품질(?)이 꽤나 들쭉날쭉이었다. 그래서 또다시 브레이크가 걸렸다. 기왕지사 민음사의 최종철 번역본으로 읽기 시작했으니 후속편들이 출간되면 그 때 다시 '이어서' 읽어야지 싶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딱히 '이어서' 읽는 느낌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사극들이라면 인물들 사이에 어느 정도의 연관성이라도 있겠지만 다른 작품들이야 그런 연관성조차도 전혀 없으니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떤 특정한 셰익스피어 전집 시리즈의 깔끔한 완독을 내심 더 바랐는지도 모른다.

 

(민음사 판 <셰익스피어 전집 시리즈>로는 미출간된 작품들 가운데 다른 번역자의 판본으로 읽은 책들. 신정옥 교수가 '전작품'을 완역한 '전예원' 판은 번역된지 너무 오래된 상태여서 '외국어 표기'가 눈에 거슬리는 경우가 많고, 산문체 번역이어서 '시적인 대사'를 감상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이성일 교수가 번역한 '나남'의 『리처드 2세』는 '감정을 격동시키는 대사'에 관한 번역이 특히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았다. 동서문화사의 번역들도 대체로 무난했다.)

 

 

오늘도 심심하던 차에 알라딘에 들어왔다가 혹시나 하고 살펴 봤다. <민음사판 셰익스피어 전집 시리즈>가 새로 나온게 없나 하고. 그랬더니 뜻밖에도 전혀 새로운 <셰익스피어 전집>이 한꺼번에 완간된 게 있어서 깜짝 놀랐다. <동서문화사판 셰익스피어 전집 시리즈>가 무려 <전8권>으로 떡 하니 나와 있는 게 아닌가!

 

이걸 보는 순간 갑자기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동서문화사판 셰익스피어 전집>을 한꺼번에 몽땅 사들이자니 <민음사판 셰익스피어 전집>으로 이미 읽은 작품들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이미 읽은 작품들까지 새로 사들일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이리저리 살펴 봤더니, 내가 읽은 작품들이 여기저기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게 문제였다. 셰익스피어 전집을 '동서문화사판'과 '민음사판'으로 각각 한 번씩 완독하겠다는 거창한 야심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동서문화사판 셰익스피어 전집>을 한꺼번에 몽땅 사들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한번 정리해 봤다. <민음사판 시리즈>로 일부를 읽은 나 같은 사람은 <동서문화사판 시리즈>에서는 어떤 책을 골라 사야 좋은지를 한번쯤 따져봐야 했기 때문이다.

 

 

* 세 종류의 판본에 실린 작품들의 제목은 대체로 큰 차이가 없는데, 유독 한 작품에서는 크나큰 편차가 엿보인다. <잣대엔 잣대로>, <말은 말로 되는 되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로 번역된 작품이다. 원제는 ‘Measure for measure’이다. 이 작품의 제목을 <이척보척(以尺報尺)>으로 번역해 놓은 경우도 있었다.

 

원래 measure for measure란 성경에 나오는 표현으로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복음 7장 1절-5절)에서 따온 제목이라고 한다. ‘함부로 남을 심판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담은 이 구절을 제목으로 삼은 이 극은 이른바 문제극이다.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맺지만 분위기는 사뭇 어둡기 때문이다. 권력자를 대신해서 임시로 권한대행을 맡은 인물이 감옥에 갇힌 죄수를 풀어주는 댓가로 성 상납을 강요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법과 정의, 용서와 화해, 권력과 자비, 법과 도덕의 판단 문제 등이 다각도로 날카롭게 조명되는 작품이다.

 

 

이렇게 표를 만들어 놓고 비교해 봐도 난감한 건 마찬가지였다. <동서문화사 전집> 가운데 구입할 필요가 없는 책은 <전집 3>과 <전집 5> 정도에 불과했고, 나머지 여섯 권에는 내가 못 읽은 작품들이 최소 1작품에서 최대 5작품까지 골고루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동서문화사 셰익스피어 전집> 가운데 대충 서너 권만 더 사들이면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모조리 구비할 줄 알았는데 실제 사정은 영 딴판이었다.

 

게다가 <동서문화사 전집 시리즈>의 책값도 책의 분량만큼이나 만만치 않았다. <전8권>은 반양장본 4,572쪽에 152*223mm (A5신), 무게는 6,401g, 가격은 108,000원이었다. 전집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낱권의 표지는 다음과 같다. 표지 그림도 독특하고 책의 제목도 몹시 복잡하다.

 

 

 

 

 

 

 

 

 

 

 

 

 

 

 

 

 

 

 

 

 

 

 

 

 

 

 

이만한 분량과 이만한 책값을 보니 문득 예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셰익스피어 전집이 생각났다. 단 한 권에 셰익스피어를 몽땅 다 담아낸 그 엄청난 책은 1,808쪽에 240*308mm, 무게는 4,516g, 가격은 108,000원이다. 그 책이 아무리 번역이 좋다 해도 무려 4.5Kg이나 되는 책을 사서 읽을 엄두는 나지 않는다. 예전에 <생각의 나무>에서 나온 <율리시스>에서 이미 한번 곤욕을 치러봤기 때문이다. 그 책의 사양은 지금 다시 봐도 겁부터 난다.

 

 

 

 

 

 

 

 

 

 

 

 

 

 

 

이렇게 다시금 셰익스피어 전집을 다시금 찬찬히 살펴 보노라니 문득 마크 트웨인이 했다는 말이 다시금 생각난다.

 

“설마 이 모든 것을 윌리엄이 썼다고 믿습니까?”

 

아무튼 셰익스피어는 20여 년간 무려 37편의 극작품과 154편의 소네트를 썼다. 그는 무려 1,100여 명의 캐릭터를 창조하였고, 등장 인물들이 느꼈던 수만 가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2만여 개의 단어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았다. 우리가 그에게 압도되는 건 비단 작품의 분량 때문만은 아니다. 비록 톨스토이는 '셰익스피어의 대사'가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혹독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지만, 수많은 작가와 비평가들은 '천재가 빚은 예술작품'에 여전히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그 많은 작품들이 골고루 걸작이기 때문이다.

 

대 그리스 시인들조차도 각자 서사시, 비극시, 희극시 등으로 그 분야를 나눠 작품을 썼지만 이 인물에게만은 그런 '영역 구분'조차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그는 희극 · 비극 · 사극 · 로맨스 · 소네트 · 시 등에 전방위적으로 두루 걸출했다. 또한 모든 작품들이 고유의 색깔과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심지어 10편의 사극에서조차 인물의 성격 뿐만 아니라 작품의 분위기와 구성 등이 모두 다르다고 한다.

 

셰익스피어는 소년 시절 문법학교에 다닌 게 교육의 전부로 알려져 있다. 소년 셰익스피어는 이 단계에서 로마의 희극 작가 테렌티우스나 웅변가 키케로뿐 아니라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등 로마 시인들의 작품을 두루 접했다. 나중에 런던으로 진출하여 극작품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몽테뉴의 『수상록』등으로부터 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문학의 천재답게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놀라운 재능 덕분에 그는 '원전'과는 또다른 온갖 독창적인 작품을 쏟아낼 수 있었다. 

 

셰익스피어가 느닷없이 나타나 걸작들을 한꺼번에 마구 쏟아내자 어떤 작가는 시샘이 나서 셰익스피어를 두고 "벼락출세한 까마귀"로 비하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작자의 판단이 얼마나 못난 것이었는지를 증명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 없었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작품 제사(題詞)에서 그런 인물들을 노골적으로 비꼬았다.

 

속물들은 잡것에 혹하게 놔두고

금빛 머리 아폴로여, 저에게는
영감이 가득한 샘물 잔 내리소서.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점은 당대의 독특한 시대적 배경을 '훨씬 뛰어넘는' 작품들을 썼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언제나 '살아 있으면서 고민하거나 괴로워하거나 기뻐하는 인간 그 자체'에 흥미를 느꼈다. 그의 비극이 고대 그리스 비극시인들의 '운명적 비극'과 달리 '성격적 비극'으로 불리는 이유 또한 지극히 현대적이다. 『햄릿』을 비롯한 그의 수많은 희곡 작품들이 현대에 와서도 활발하게 연극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는 자체가 셰익스피어 작품의 탁월한 예술성을 증명하는 셈이다.

 

그의 희곡이 빛나는 또다른 이유는 문장이 너무나 절묘하고도 아름답다는 점이다. 그는 음악처럼 그 다음이 듣고 싶어지는 대사를 쓰기 위해 '운문' 형식을 특히 많이 사용했다. 또한 리듬이 넘치는 말을 사용해서 극적 효과를 높였다. 가령 '적의 아들인 로미오를 사랑하다니 어찌된 일인가'라고 말할 상황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아, 로미오, 로미오, 어째서 당신의 이름은 로미오인가." 

 

뒷날 『리어 왕』을 썼을 때, 그는 짧은 한 문장을 주인공에게 말하게 했다. "부탁하네, 이 단추를 풀어주지 않겠는가?" 이 글은 겨우 5단어로 되어 있으면서 적어도 3가지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실제로 옷의 단추를 풀라는 의미와 현세의 허영의 상징인 의복을 벗어버린다는 의미, 그리고 이 삶의 고뇌를 벗고 떠나고 싶다, 즉 죽고 싶다는 주인공의 비통한 소망을 포함한 의미이다. 등장인물의 성격과 상황에 대응한, 유연한 살아있는 말을 쓰는 능력을 셰익스피어는 긴 세월 동안 창작 활동을 통해 습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뛰어난 시란 어떤 것일까? 간결한 말에 여러 의미를 포함시킨다. 말에서 각각의 이미지가 넓어진다. 읽는 이가 분명 그러하다고 납득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저마다 나름대로 해석하는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다. 이런 시가 있다면 그것은 뛰어난 시라고 평가될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그러한 작품을 썼다. 그의 희곡작품은 극이면서 동시에 시인 극시인 것이다. 결국 셰익스피어는 시인이었고, 그가 시성(詩聖)이라고 불리는 이유와 작품의 끝없는 깊이도 거기에서 나온다.(571쪽)

 - 동서문화사,『햄릿/오델로/리어 왕/맥베드/로미오와 줄리엣』, <셰익스피어의 생애와 사상> 중에서


이토록 온갖 분야에 두루 영향을 끼친 셰익스피어는 과연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어떤 '사상이나 철학'을 설파하고자 했을까. 놀랍게도 셰익스피어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항상 열린 자세로' 독자들의 판단에 맡길 뿐 자기 스스로 '결론'을 내리는 법이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의 작품에 제시된 세계는 '모색(摸索)으로 가득 찬 세계'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어떤 사상을 배우려고 하는 건 헛된 노력일지도 모른다.
 

셰익스피어에게는 논리에 맞지 않는 것이 인간의 진짜 모습이다. 그는 'Philosophy(철학=논리적인 것)'이라는 말을 그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14번 사용했는데, 모두 부정적인 의미로 쓰고 있다.

 

예를 들어,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자. 줄리엣의 사촌을 죽여 베로나에서 추방당한 로미오는 자신을 위로하려고 논리로 설득하는 로렌스 신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직도 '추방' 얘깁니까? 철학 따윈 개나 줘버려요! 철학으로 줄리엣을 만들 수 있나요, 마을 전체를 뒤집어엎을 수 있나요, 아니면 영주님의 판결이 뒤바뀔 수 있게 하나요. 철학 따윈 아무 필요 없어요, 그러니 더 말씀 말아 주세요."

그리고 햄릿은 아버지의 망령에게서 친동생이 자신의 목숨과 왕관과 부인까지도 빼앗아갔다는 말을 듣는다. 그때까지 갖고 있던 인간관이 모두 무너진 그는 친구 호레이쇼에게 이렇게 말한다.

 

"호레이쇼, 이 세상에는 우리들의 철학으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많다네." (58∼59쪽)

 

 - 오다시마 유시, 『셰익스피어가 내가 찾아왔다』, <셰익스피어의 인간관·역사관의 형성>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은 연구할수록 더욱 심해질 뿐이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여전히 문학의 최고봉으로 우뚝 솟아 있다. 셰익스피어 이후에 활동한 수많은 작가들은 그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작가들과 작품들은 일일이 나열하기조차 힘들 정도다. 오죽하면 괴테가 이런 말을 남겼을까.

 

"셰익스피어를 연구하면 그가 인간의 본성 전체를 모든 면에서, 그리고 모든 깊이와 모든 높이에서 철저히 연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그 이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괴테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작가들이 모두 펜을 접을 리는 없다. 이미 셰익스피어 스스로도 다른 사람이 쓴 책을 여럿 참고해서 자신의 작품을 썼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가 쓴 『햄릿』이라고 평가받는다. 체호프의 <갈매기> 역시 마찬가지라고 한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햄릿』을 다시 쓸 수 있는 자유마저 박탈당한 건 아닌 셈이다.

 

글이 자꾸만 옆으로 새고 있다. 여기서 그만 멈추고 다시 나만의 문제로 되돌아 오자.

 

기다릴 것이냐, 지를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민음사판 전집이냐, 동서문화사판 전집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전부 다 살 것이냐, 일부만 살 것이냐, 그것도 문제로다!

 

뜻대로 하세요?

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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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4-14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기 위에, 읽은 차례대로 그걸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에서 리스트를 보니 거기에서 제가 읽은 게 반 이상이네요.
셰익스피어를 저는 세로 줄 전집으로 읽었어요. 나중에 가로 줄로 나온 책을 사 놨지만 사 놓기만 하고 이미 읽었다고
안 봤어요. 물론 살 때는 다시 읽으려고 샀는데 말이죠. 희곡은 읽기가 좀 불편해요.

저도 서머싯 몸의 유명한 작품을 거의 읽었고 딱 하나 <과자와 맥주>만 못 읽었어요. 이건 동서문화사 것만 있는데
제가 읽은 <달과 6펜스>와 함께 있더군요. <달과 6펜스>는 이미 두 번이나 읽었고 각기 다른 출판사로 두 권이나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또 사기가 망설여지더군요. 과자와 맥주가 단독으로 출간되는 출판사가 있다면 앞으로 사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과자와 맥주는 고 마광수 교수가 극찬한 작품인데 좋은 작품은 단독으로 나온 책으로 갖고 싶거든요.

oren 2019-04-14 12:10   좋아요 1 | URL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세로로 쓰인 책들로 읽으셨다면 까마득한 옛날에 나온 책들로 읽으셨다는 말씀이군요. 옛날엔 그런 책들이 조금도 아상할 게 없었는데, 요즘 그런 책들을 보면 너무 낯설어서 ‘이런 책들을 어떻게 읽었지‘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더군요.

서머싯 몸의 작품 가운데 <과자와 맥주>라는 작품도 있었군요. 저는 금시초문이어서요. 고전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 읽다 보면 ‘주요 작품‘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한글 번역본‘이 나온 게 아예 없어서 아쉬울 때가 많더라구요. 그럴 때 가끔씩 동서문화사에서 ‘국내 유일의 번역본‘을 발견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땐 어찌나 반가운지 번역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찾아 읽게 되더라구요.

Angela 2019-05-30 0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는 동서와 민음을 섞어서 구입했는데 일목요연한 설명 감사합니다~

oren 2019-05-30 12:05   좋아요 1 | URL
저는 아직까지도 민음사 전집 시리즈의 나머지 출간 예정작들을 계속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전집 시리즈도 일부는 사서 읽어볼 계획입니다.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gasina 2019-07-24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정말 저도 민음사 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 답답하던 차에, 이렇게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서문화사 책도 고려해봐야겠어요~~

oren 2019-07-24 18:39   좋아요 0 | URL
민음사 책이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네요.
저도 기다리다 지치면 동서문화사 책을 슬슬 사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