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user/ojcojj/community


영상 업로드를 하고 나면 며칠은 쫌 쉬는 편이랍니다. 
물론 '다음 영상을 뭘로 할까'를 구상하면서요... 

사실, 업로드와 업로드 사이의 짧은 틈새시간이 저로서는 제일 행복한 시간입니다.
고된 영상 편집작업에서 벗어나, 아무런 부담 없이 맘껏 릴렉스할 수 있으니까 말이죠.

다음 작품의 후보작들을 '그냥' 쭈욱 아무 생각없이 써 보면 다음과 같네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전쟁과 평화>, 톨스토이 
<국가>, 플라톤 
<백년 동안의 고독>, 가브리엘 마르케스 
<적과 흑>, 스탕달 
<모비딕>, 허먼 멜빌 
<역사>, 헤로도토스 
<신곡>, 단테 
<셰익스피어 비극 중 아무거나>, 셰익스피어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방인>, 알베르 카뮈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
<로빈슨 크루소>, 다니엘 디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농담>, 밀란 쿤데라
<마의 산>, 토마스 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선악의 저편>, 니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예브게니 오네긴>, 푸슈킨 
<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윌리엄 포크너 
<성>, 프란츠 카프카 
<인형의 집>, 헨릭 입센 
<문명의 충돌>, 새뮤얼 헌팅턴 
<일리아스>, 호메로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찰스 디킨스 
<황무지>, T.S.엘리어트... 

사실 이들 작품들은 '언젠가는' 영상으로 만들 생각을 지닌 작품들이긴 하지만,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은 '다시' 읽어봐야 겨우 영상 제작이 가능할 것 같은, 
난이도가 제법 느껴지는 작품들이기도 합니다... 
(몇몇 작품들은 읽은지 너무 오래 지나서 갖고 있는 책조차 없고요...) 

물론 대본 녹음까지 다 마쳤지만, 
영상 제작을 시도하다가 중지한 작품들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요. 

이들 작품들을 쭈욱 나열하고 나니, 
이 작품들을 앞으로 1년 이내에 동영상으로 만들 수만 있어도 참 좋겠다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이 가운데 과연 어떤 걸 만드는 게 가장 좋을까요? 
'4월은 잔인한 달'이니, <황무지>를 한번 다녀와 볼까 싶기도 하고요.... 

p.s
제 영상을 정말 열심히 봐주시는 어떤 구독자분께 달았던 댓글인데, 
오늘도 이런 고민을 계속 하면서, 
이 목록에 언급된 책들을 그냥 한번 불러내서 사진으로 담아봤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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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03-18 01: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하세요. 프로페셔널 한 느낌이 들어요!! 취미에서 프로의 세계로? ^^
4월은 잔인한 달이니, 좀 재밌는 책의 영상을 준비해 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잔인한 달이라서 더 삭막한 책 보다는요. ^^;

oren 2021-03-18 19:38   좋아요 1 | URL
다음에는 또 어떤 책을 소개하는 영상을 만들까,
이런 고민을 한 달이면 두세 번씩 하곤 하는데,
매번 선택지 앞에서 고민이 많더라구요.^^
이번에는 어떤 책을 읽을까,
하는 고민이야말로 참으로 사치스러운 고민이었다는 생각도 들곤 하고요.
해마다 4월만 되면 엘리엇의 잔인한 시구절이 떠오르니,
그 작품을 언젠가는 한번 다뤄보긴 해야 할 듯해요.
어쨌든 라로 님 말씀대로라면,
4월엔 잔인한 데다가 삭막하기까지 한 책은 피해야 좋겠군요!

scott 2021-03-18 0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거슨 진정한 책탑!의 경지!!4월 황무지 부터 시작하신다면 본격적으로 벽돌책 하나씩 돌파하는 유툽 콘텐츠가 될것 같네요 홧팅!!

oren 2021-03-18 19:48   좋아요 1 | URL
텍스트에서 나열한 순서대로 책탑을 쌓았는데,
맨 나중에 언급된 <황무지>는 너무 얇은 책이어서,
책탑의 머리 장식으로는 완전 대실패네요.^^
그나마 빵빵한 부피를 자랑하는 작품들을 먼저 꺼내든 덕분에,
책탑의 밑받침이 든든해지는 효과는 확실히 본 듯해요.^^

p.s
작품 목록에는 있고 책탑에는 없는 책들은 주로 1980년대에 읽은 작품들인데,
그 작품들의 실물이 없다는 게 조금 아쉬워요.^^
 

놀라워라!

잘생긴 인물들이 여기에 참 많기도 하구나!

인간은 참 아름다워! 오 멋진 신세계여,

이러한 종족이 살다니.

 - 셰익스피어, 『템페스트』, <5막 1장> 중에서

 

 * * *

 

안녕하세요? 오늘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소개할까 합니다.

 

이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작가에 대해 조금 살펴보고 넘어가지요. 올더스 헉슬리는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두루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였습니다. 그가 지닌 독특한 지성의 면모를 생각하면 『멋진 신세계』와 같은 작품이 결코 우연히 탄생한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문학과 철학은 물론 과학과 심리학을 비롯한 온갖 학문 분야에 두루 박학다식한 인물이었고,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언제나 '삶의 의미'를 근원적으로 사색하고 규명하려고 평생 동안 애쓴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지성적 면모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집안의 가계도를 잠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영국의 저명한 과학자 집안과 문학가 집안의 피를 고루 물려받았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찰스 다윈 이후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였던 토머스 헨리 헉슬리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교육자였고, 어머니는 『교양과 무질서』라는 유명한 작품을 쓴 매슈 아놀드의 조카딸이었고, 그녀 스스로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여류시인이었습니다. 올더스의 형인 줄리안 헉슬리는 저명한 생물학자이면서 초대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지냈고, 이복동생인 앤드류 헉슬리는 노벨 의학상을 수상한 유명한 생리학자였습니다.  

 

작가의 할아버지인 토머스 헉슬리에 대해서는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찰스 다윈이 쓴 『종의 기원』의 서문에도 등장할 정도로 탁월한 생물학자였습니다. 그는 단테의 작품을 원어로 읽기 위해 이태리어를 배울 정도로 학구열이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된 이후 종교계의 극단적인 반발과 반론을 최선두에서 가장 논리적이고도 효율적으로 반격한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인간의 조상이 동물로 이어진다는 주장을 담은 그의 대표작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는 훗날 헉슬리 가문을 관통하는 중요 연구 관심사가 되었으며, 올더스 헉슬리의 세계관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왕립학회 회장을 지낸 그는 존 러스킨, 틴덜, 매슈 아놀드, 토머스 칼라일 등과도 두루 교류했습니다. 찰스 다윈, 토머스 헉슬리, 틴덜은 버지니아 울프가 쓴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도 함께 등장하는데, 버지니아 울프의 아버지가 토머스 헉슬리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아버지 레오나드 헉슬리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재학중에 부인 줄리아 아놀드와 만났습니다. 그녀는 옥스퍼드 영문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훗날 시집을 출간하여 삼촌인 매슈 아놀드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레오나드는 시골에서 학교 교감으로 지냈지만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공방에는 늘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들 부부의 3남 1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난 올더스 헉슬리는 14세에 어머니를 잃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 시력마저 나빠져 또다른 충격을 받은 그는 각막염 수술을 받았고, 나중에 옥스퍼드 의대에 진학했다가 결국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꿉니다. 연극·예술 비평가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그는 작품 활동 내내 언제나 사물의 궁극적인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 집요한 노력을 기울인 끝에 온갖 난해한 주제에 대한 엄청난 백과사전적 지식을 습득하게 됩니다.

 

과학 문명의 발달이 초래할 암울한 미래상을 그린 작품은 『멋진 신세계』 말고도 『원숭이와 본질』 같은 작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동경해 마지않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사회를 그린 작품도 아예 없지는 않았습니다. 『섬』이라는 작품이 대표적이지요. 그 작품을 두고 그가 스스로 논평한 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위대한 역사, 폴리네시아 인류학, 산스크리트어와 중국어로 된 서적, 그리고 불교 경전, 약리학, 신경생리학, 심리학, 교육에 관한 논문들, 더불어 소설, 시, 비평, 기행문, 정치 논평, 철학자에서부터 배우, 정신병원의 환자로부터 롤스로이스를 타고 다니는 재벌들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람들과의 대화, 이 모든 것이 나의 유토피아적 방앗간의 깔때기 속으로 곡물이 되어 들어가 이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 하나에 대한 그의 관심 분야가 이 정도로 폭이 넓었으니 그의 작품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관심 분야가 얼마나 다양했을지는 넉넉히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이지요.

 

온갖 분야에 두루 해박한 지식을 지녔던 천재 작가 올더스 헉슬리가 그려낸 『멋진 신세계』는 과연 어떤 세계였고, 그런 세계가 미래에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또 얼마나 될까요?

 

포드 기원 632년으로 설정된 '멋진 신세계'의 시대 배경은 대략 2540년쯤입니다.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첨단 생명공학의 발달입니다. 인간들은 더이상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시험관에서 수정되고 조건에 맞게 배양되어 조건반사 양육을 받으며 자라납니다. 소설의 맨 처음에 등장하는 회색 빌딩의 중앙 현관 위에는 '런던 중앙 인공부화 · 조건반사 양육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습니다. 방패 모양의 현판에는 '공유 · 균등 · 안정'이라는 세계 국가의 표어가 달려 있지요. 이 두 가지가 '신세계'를 상징합니다.

 

인간들이 인공부화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는 사실로부터 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화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필요없는 세상이 된 것이지요. 번거로운 자녀양육 의무가 뒤따르는 결혼제도도 사라집니다. '만인은 만인을 위한 공유'가 세계 국가의 이념입니다. 격정을 유발하기 마련인 '연인 관계'라는 것도 없습니다. 자유 연애가 보편적인 사랑의 형태이고, 섹스 파트너를 오래 독점하는 연인 관계는 사회적 지탄을 받거나 금기로 여겨집니다. 첨단 의학의 발달 덕분에 인간의 신체는 육십이 되도록 젊음을 유지하지만 그 이후에는 '시체 처리소'로 직행합니다. 죽음은 더 이상 회피하거나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점은 양육 과정에서 세심하고 철저하게 주입식으로 교육됩니다. 더군다나 부모, 자녀, 친인척이 따로 없는데 그토록 죽음을 슬퍼하고 연연할 이유 자체도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미래 세계는 강력한 중앙 통제 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무엇보다 공유와 균등과 안정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세계입니다.

 

미래 세계의 또다른 특징은 철저한 계급 사회라는 점에 있습니다. 전세계 인구는 20억 명으로 제한되며, 피라미드 식으로 이뤄진 각각의 계급에 필요한 인원은 철저한 사전 계획에 따라 생산되고, 조건반사 양육소에서 '각각의 계급에 가장 알맞은 정도로' 양육 받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물론 오랜 시행착오 끝에 검증되고 정착된 시스템이지요.

 

겨우 34층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회색 빌딩에서 시작된 미래 세계는 '런던 중앙 인공부화 · 조건반사 양육소' 소장의 안내를 받는 견습생들 덕분에 독자들까지도 '첨단 생산 시설'을 두루 살펴볼 수 있지만, 센터 내부는 온갖 실험실용 플라스크와 니켈과 스산하게 빛나는 도자기류뿐이지요.

 

모든 것이 살벌함을 겨루고 있었다. 거기서 근무하는 자들은 흰 작업복을 입었고 손에는 시체같이 창백한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조명은 차갑게 죽어 있었다. 유령 바로 그것이었다.(7쪽)

 

도무지 등장 인물들 사이의 대화 조차도 없을 듯한 숨막히는 세계에서도 사건들은 일어나고 갈등이 생겨납니다. 알파 계급에 속해 있으면서 최면 교육 전문가로 근무하는 버나드 마르크스와 감정공학 대학의 감성교육 엔지니어인 헬름홀츠 왓슨은 신세계의 통치 체계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약간의 반감과 혐오를 품은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일종의 과잉상태에 있으며 스스로의 개성을 인식하고 있으므로 몰개성적인 통치 체계에 종종 비판적인 견해를 표출합니다. 그들은 서로가 공감대를 가진 부분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차츰 그런 감정들을 공유하기 시작합니다.

 

버나드는 성격마저 우울하고 소심한 데다 사교성이 부족한 탓에 또래의 여자들과 제대로 사귈 기회도 갖지 못합니다. 사교적이면서 발랄한 처녀인 레니나는 수줍음이 많은 버나드에게 거꾸로 대쉬하지만 그녀를 쉽게 수용하지 못하고 겉으로만 맴돕니다. 이들 커플은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해 휴가 기간 동안 뉴멕시코의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함께 놀러갈 계획을 세웁니다. 야만인들은 고도로 문명화된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는 철저히 분리된 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이며, 오랜 옛날의 생활 습관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격리된 채 살고 있습니다. 안내자들을 따라 조심조심 야만인들의 풍습을 둘러본 두 사람은 자신들의 방식과는 너무나 다른 생활 습관을 지닌 '야만인들의 풍속'에 기겁을 하지요. 그곳은 몹시 불결할 뿐만 아니라 보기에도 흉측한 늙은이들도 많았고,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 기우제를 올리는 기이한 원시 풍속 등 어느 하나 낯설지 않은 게 없었습니다. 비록 레니나에게는 극도로 혐오스러운 모습일지 몰라도 예민한 감성을 지녔던 버나드는 도리어 그런 삶의 모습에 깊은 흥미를 품습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오래 전에는 문명세계에 속해 있다가 언젠가 우연한 사고 때문에 거기서 정착해 살고 있는 린다라는 늙은 여성을 만납니다. 그녀는 25년 전에 인공 부화 센터 소장이던 남자 친구와 함께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놀러 왔다가 그만 길을 잃는 바람에 끝내 실종 처리된 여성이었습니다. 베타 계급에 속했던 그녀는 거기서 존이라는 아들을 낳아 키웠지만 원주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온갖 간난고초를 겪으며 어렵게 생활해 왔던 터였습니다. 

 

그녀는 그곳 생활이 힘겨울 때마다 아들에게 문명 세계에서 지냈던 행복한 지난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곳으로 되돌아갈 날을 꿈꾸며 아들에게 글과 노래까지 가르쳐 줍니다. 그때 존이 심취해서 읽은 책이 셰익스피어 전집이었습니다. 존은 비록 책 속의 모든 내용을 전부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온갖 다채롭고 풍성한 감성들이 넘쳐나는 인간미 넘치는 세계를 동경하게 됩니다. 버나드와 레니나는 린다와 존을 설득시켜 그들을 마침내 문명 세계로 이끌고 나오지요. 무료한 대중들의 폭발적인 관심과 연구 대상이 될 것임을 확신하면서 말입니다.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어머니와 함께 핍박받고 따돌림을 당하며 살아오던 존에게는 '런던으로 가겠느냐'는 버나드의 제안이 더없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명세계로의 이주 제안에 대해 존이 감격에 벅차 내뱉은 대답이 바로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서 미란다가 외쳤던 말이었습니다. 멋진 신세계!

 

"오오,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존이 말했다. 그의 눈에서는 광채가 났고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 훌륭한 피조물이 여기에 있는가! 인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피조물인가!" 그의 홍조는 갑자기 더욱 깊어졌다. 그는 레니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진한 초록색 인조견 옷을 입고 피부는 젊음과 영양크림으로 윤기 있고, 포동포동하고 자애롭게 미소짓는 천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음성이 더듬거리고 있었다. 

 

"오오, 멋진 신세계여!" (177쪽)

 

버나드와 레니나 덕분에 '야만인 보호 구역'에서 문명 세계로 끌어올려진 존과 린다는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도리어 더욱 난처한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린다는 늙고 뚱뚱한 데다가 모습마저 추하게 일그러져 문명세계에서는 한낱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야만인 씨'로 불리는 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편, 체제 부적응자로 분류된 버나드는 언제라도 험지 아이슬란드로 전출당할 위기를 의식하고 있었고, 그런 좌천 발령을 모면하기 위해서라도 존을 활용한 실적 쌓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런 영문도 모르고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존은 문명 세계로 올 때부터 미모에 이끌렸던 레니나에게 차츰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를 자주 중얼거리면서 말이지요.

 

촉감 영화관에서 존과 함께 데이트를 즐긴 이후로 레니나는 존이 자신을 연모하고 있다는 걸 확실하게 알아챕니다. 자유 연애에 익숙한 레니나는 오래 고민할 겨를도 없이 적당한 기회를 틈타 야만인의 방으로 먼저 찾아갑니다. 그러나 정작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상태였던 존은 제발로 찾아온 그녀를 극도로 혐오하고 도리어 밀쳐냅니다. 연애 단계에서 반드시 거쳐야만 마땅할 듯한 섬세한 밀당 단계가 생략된 걸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지요. 이런 희극적인 모습이야말로 가치관이 전도된 문명 세계와 야만인 사이에 펼쳐지는 '아이러니의 극치'입니다.

 

"기절할 때까지 키스해줘요. 오! 내 사랑, 안아주세요. 아늑하게 ……."

 

야만인은 그녀의 팔목을 잡더니 어깨를 잡았던 그녀의 손을 풀고 팔을 뻗어 그녀를 거칠게 밀었다.

 

"오! 아파요! 당신은 나를…… 오!" 그녀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공포로 인하여 고통도 잊은 상태였다. 눈을 떴을 때 그의 얼굴이 보였다 ㅡ 아니, 이것은 그의 얼굴이 아니었다. 전혀 낯선 인간의 창백하게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미친 듯한 분노로 경련하는 얼굴이었다.(245∼246쪽)

 

존은 문명 세계의 사람들이 불편한 감정을 잊고 행복감에 빠져들도록 도와주는 '소마'를 배급하기 위해 모여든 인조 인간들을 향해 분노를 가득 담아 외칩니다. 소마는 행복을 주는 약이 아니라 독약이라고 말이지요. 그렇게 소동을 부린 끝에 존은 버나드와 헬름홀츠와 함께 서유럽 통치자인 무스타파 몬드에게 불려갑니다. 총통의 서재로 안내된 야만인 존은 도리어 총통을 향해 '인간다운 삶'을 역설하고, 몬드는 한편으로는 야만인의 주장을 인정하면서도 감정의 기복조차 느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안정된 문명세계가 더 행복하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행복을 위해서는 예술, 과학, 종교까지도 불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신의 존재까지도. 그들 사이의 격론은 야만인 존이 마침내 다음과 같이 외칠 때까지 계속됩니다.

 

"하지만 저는 불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 총통이 말했다.

 

"우리는 여건을 안락하게 만들기를 좋아하네."

 

"하지만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

 

"그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야만인은 반항적으로 말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305쪽)

 

 

야만인은 마침내 그곳을 견디지 못하고 멀리 외딴 데로 도망칩니다. 그러나 그곳도 끝내 안전한 곳은 되지 못했습니다. 언론의 집요한 추격을 피하지 못한 그는 열광적인 취재 열기에 시달리다 끝내 자살하고 말지요. 그가 은신처로 피난하기로 결심하면서 버나드에게 했던 말은 이랬습니다.

 

"나는 문명을 먹었어."

"문명이 나에게 독을 먹였어. 그래서 나는 오염되고 말았어."

 

『멋진 신세계』는 1949년에 쓰인 조지 오웰의 『1984』보다는 조금 덜 우울합니다. 오웰의 작품에 담긴 1984년의 세계는 실제 세계보다 훨씬 더 암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고도의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이 스크린을 통해 철저하게 감시받고 통제되며, 체제에 순응하지 못하는 반체제 인사들은 사상 경찰들을 통해 색출되고, 혹독한 고문을 거쳐 개조되거나 끝내 흔적도 없이 제거됩니다. 거기엔 어떠한 자유나 방임도 허용되지 않지요. 그에 반해 올더스 헉슬리가 그린 미래 세계는 비록 전체주의 지배 체제인 점에선 닮아 있으나,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끝에 도래하는 '인간 본연의 삶이 파괴된 황량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 다르지요.

 

기술 문명이 발달할수록 더욱 강조되기 마련인 공유와 안정 같은 가치들이 도리어 궁극적으로는 인간다운 삶 자체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만다는 헉슬리의 경고는 미래로 나아갈수록 점점 더 강한 설득력을 얻을 주제임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헉슬리가 내다본 까마득한 미래 세계는 우리의 생각보다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습니다. 시험관 아기는 어느새 보편적인 자녀 획득 방식으로 자리잡은지 오래입니다. 유전공학을 비롯한 첨단 과학의 발전은 질병과 노화에 대한 극복 능력을 갈수록 증대시키고 있으며, 인간 생활의 편리함과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첨단 생명공학이라도 기꺼이 감수할 정도로 과학 기술에 대한 의존도는 커져가고 있습니다.

 

올더스 헉슬리가 쓴 『멋진 신세계』가 출판된지 9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세상은 온갖 혁신적인 기술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멋진 신세계에서 주인공들이 즐겼던 '촉감 영화관'은 현실 세계에서도 이미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기술이 등장하면서 디지털 아바타가 가상의 공간에서 유명 아이돌 그룹과 함께 공연을 즐기며 춤을 추는 등 메타버스 공간이 실제의 삶과 뒤섞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율주행과 인공지능에 기반을 두고 움직이는 고도로 발달된 미래 기계 문명은 사소한 사고 하나로도 끔찍한 대혼란을 일으킬 위험도 품고 있습니다. '만인은 만인을 위해 공유한다'는 공유 이념 또한 마냥 좋을 리만은 없습니다.

 

『멋진 신세계』는 탄탄한 서사가 뒷받침된 멋진 소설이라기보다는 예언적 우화에 가까운 소설입니다. 또한 작품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작품 속엔 작가 특유의 유쾌한 아이러니가 곳곳에 가득합니다. '멋진 신세계'를 꿈꾸며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벗어나 고도 문명 사회로 뛰어든 존이 도리어 그 세계를 지배하는 총통에게 대들듯이 싸우며 '과학과 철학과 종교의 가치를 역설'하는 장면이야말로 아이러니의 극치입니다. 홀로 독학하다시피 셰익스피어를 탐독한 존은 인간 삶의 본질을 절묘하게 꿰뚫는 듯한 명대사들을 아무 때라도 주저없이 쏟아냅니다. 그때마다 문명인들은 야만인 청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어리둥절해 합니다. 존은 비록 문명세계로부터 격리된 곳에서 야만인 취급을 받을 정도로 고통을 겪으며 자랐지만 셰익스피어로 상징되는 문학의 힘을 통해 인간 삶의 본질을 터득합니다. 인간의 행복이란 결코 그저 얻어지는 알약과 같은 것이 아니며, 행복과 고뇌는 서로 동전의 앞뒤처럼 표리관계에 있다는 사실 등등을 말이지요.

 

끝내 문명 세계의 공기를 견디지 못한 야만인이 목을 매고 자살하는 <멋진 신세계>의 결말이 너무 비참하게 여겨졌던 탓일까요. 올더스 헉슬리는 이 작품을 출간한지 14년이 흐른 뒤 이 소설의 재판본 서문에 작가의 입장을 새롭게 추가했습니다. 『멋진 신세계』를 처음 쓸 때만 하더라도 야만인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 밖에 없었다고 말이지요. 문명국에서 미치거나 야만국으로 컴백하거나. 그러나 다시 그 작품을 쓴다면 제3사회의 존재를 설정하겠노라고 말이지요. 문명국으로부터의 망명자나 도망자들이 건설하는 새로운 세계를 그려내겠다는 말이었지요. 그런 작업으로도 부족했던 것일까요. 작가는 1958년에 기어이 새로운 작품을 하나 더 썼습니다. 그 작품의 이름은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였습니다. 인간의 주요 관심사들에 대하여 그처럼 빠짐없이 의견을 표명한 인물도 찾기 어렵습니다. 미래의 고도 문명 사회가 어떠한 모습일지 궁금한 독자들은 한번쯤 올더스 헉슬리가 창조한 '멋진 신세계'를 다녀올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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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3-15 17: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은 글입니다. 소마만 기억하는 저로서는 ㅠㅠ 헉슬리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좀 더 깊이있게 느껴져요. 표지를 보니 제가 갖고 있는 건 문예출판사거네요. ㅎㅎ

oren 2021-03-15 20:34   좋아요 2 | URL
아.. 저도 문예출판사 판으로 읽었습니다! 이번에 영상을 만들면서 올더스 헉슬리의 어머니, 할아버지(토마스 헉슬리), 외할아버지의 형님(매슈 아놀드), 친형, 이복동생까지... 실로 많은 사람들의 실물 사진을 찾아봤네요..

책으로 읽을 땐 그저 막연히 상상만 했던 <책 속 내용들>을 실제적인 영상으로 재탄생시키는 재미가 때론 쏠쏠하긴 합니다. 물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영상 자료들을 긁어모으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설마 이 모든 것을 윌리엄이 썼다고 믿습니까?”


이 말은 '미국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마크 트웨인이 내뱉은 말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문인 집안 출신도 아니고, 옥스퍼드나 캠브리지 대학을 나온 적도 없는 시골 출신 청년이었는데, 그런 인물이 어떻게 갑자기 그토록 많은 걸작을 쏟아낼 수 있었는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 담긴 말이었지요.


셰익스피어라는 인물이 진짜로 원작자가 맞느냐는 가짜 논쟁은 예로부터 자주 있었으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미국 여성 델리아 베이컨이었습니다. 그녀는 영리했지만 가난 때문에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열다섯에 소녀가장이 되어 가족의 생계를 떠안은 채 교사로 일하던 즈음에 그녀는 셰익스피어에 빠져들었는데, 각종 기록을 세밀히 검토한 그녀는 셰익스피어 작품의 원작자가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놀라운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 유명한 얘기는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에도 고스란히 실려 있습니다.


선량한 베이컨: 곰팡이 냄새 어린 채. 셰익스피어가 베이컨이라는 황량한 논법.251)


251) Shakespeare Bacon's wild oats. 미국의 여류 소설가 델리아 베이컨(1811∼1859,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과 인척관계라 주장함)은 그녀의 저서인 『드러난 셰익스피어 연극의 철학(Philosophy of the Plays of Shakespeare Unfolded』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썼다고 주장함. 또한 셰익스피어 작품은 그보다 학식이 많은 어떤 사람에 의하여 씌어졌을 것이라는 부정적 설도 있음.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제9장 국립도서관(스킬라와 카립디스)>


이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수많은 '셰익스피어 전문가들'조차 델리아 베이컨의 의견에 대해 동조 내지는 지지했다는  사실입니다. 셰익스피어를 극찬한 대표적 인물인 랠프 왈도 에머슨은 단정 짓지는 못해도 프랜시스 베이컨 등 주변 인물의 도움이 분명 있었을 거라며 델리아의 의견을 옹호했으며, 에머슨과 오랜 우정을 쌓았던 토머스 칼라일도 델리아의 작업을 지지했습니다. 에머슨과 헨리 데이빗 소로우 등과 함께 콩코드에서 살았던 너대니얼 호손은 델리아의 책 출간을 은밀하게 지원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니 마크 트웨인이 저런 말을 했다고 해서 별로 놀랄 일도 아닌 셈이지요. '음모론적 시각'은 무슨 일에든 이처럼 끼어들기를 좋아하는 법이지요.


셰익스피어는 20여 년간 무려 37편의 극작품과 154편의 소네트를 썼습니다. 그는 무려 1,100여 명의 캐릭터를 창조하였고, 등장 인물들이 느꼈던 수만 가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2만여 개의 단어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았습니다. 우리가 그에게 압도되는 건 작품의 분량 때문만은 아닙니다.


비록 톨스토이는 '셰익스피어의 대사'가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혹독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지만, 수많은 작가와 비평가들은 '천재가 빚은 예술작품'에 여전히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작품들이 골고루 걸작이기 때문이지요. 고대 그리스 시인들조차도 각자 서사시, 비극시, 희극시 등으로 그 분야를 나뉘어 작품을 썼지만 이 인물에게만은 그런 '영역 구분'조차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희극 · 비극 · 사극 · 로맨스 · 소네트 · 시 등에 전방위적으로 두루 걸출했습니다. 또한 모든 작품들이 고유의 색깔과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심지어 10편의 사극에서조차 인물의 성격 뿐만 아니라 작품의 분위기와 구성 등이 모두 다르지요.


셰익스피어는 소년 시절 문법학교에 다닌 게 교육의 전부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년 셰익스피어는 이 단계에서 로마의 희극 작가 테렌티우스나 웅변가 키케로뿐 아니라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등 로마 시인들의 작품을 두루 접했습니다. 나중에 런던으로 진출하여 극작품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몽테뉴의 『수상록』등으로부터 특히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문학의 천재답게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놀라운 재능 덕분에 그는 '원전'과는 또다른 분위기를 지닌 온갖 독창적인 작품들을 쏟아낼 수 있었습니다.

단적인 예가 초창기에 쓴 『비너스와 아도니스』란 작품이지요. 오비디우스가 약 70행으로 읊은 이 짧은 이야기를 셰익스피어는 무려 1200행가량의 장시로 늘렸습니다. 이 무렵 셰익스피어는 사극 『헨리 6세』3부작과 『리처드 3세』의 창작을 마친 신출내기 극작가였습니다. 이처럼 사극을 쓰다가 느닷없이 오비디우스풍의 서사시를 쓴 것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건 이 작품이 출판되자마자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점과 셰익스피어가 시인으로서 일약 명성을 얻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바로 이 무렵에 로버트 그린이라는 작가가 셰익스피어의 극작가로서의 성공을 시기하여 그를 "벼락출세한 까마귀"로 비하한 일이 있었는데, 셰익스피어가『비너스와 아도니스』를 써서 보기 좋게 한 방 제대로 먹인 셈이었지요.

그 작품의 제사(題詞) 또한 흥미롭습니다. 그는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노래>에서 인용했습니다.

속물들은 잡것에 혹하게 놔두고
금빛 머리 아폴로여, 저에게는
영감이 가득한 샘물 잔 내리소서.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기(1564∼1616)는 엘리자베스 여왕 치세였습니다. 또한 유럽 사회 전체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의 거대한 물결이 휩쓸고 지나간 후였고, 에스파냐에서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소식이 온 유럽으로 퍼져 나갈 무렵이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1517년)도 시작된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돈키호테』의 저자인 세르반테스는 그 무렵 레판토 해전(1571년)에 참가했고, 몽테뉴(1533∼1592)는 『수상록』(1580년)을 간행했습니다.


이 무렵 우리나라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황진이가 『청산리 벽계수야』(1565년)라는 시조를 지었고, 정철이 『관동별곡』(1580년)을 발표했으며, 셰익스피어가 『로미오와 줄리엣』, 『한여름 밤의 꿈』을 완성했을 땐 임진왜란이 터져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과 노량대첩을 벌일 때였고, 『리어 왕』(1605년)과 『맥베스』(1606년)을 발표할 무렵에는 허균이 『홍길동전』(1607년)을, 허준이 『동의보감』(1613년)을 간행할 무렵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점은 당대의 독특한 시대적 배경을 '훨씬 뛰어넘는' 작품들을 썼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언제나 '살아 있으면서 고민하거나 괴로워하거나 기뻐하는 인간 그 자체'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의 비극이 고대 그리시 비극시인들의 '운명적 비극'과 달리 '성격적 비극'으로 불리는 이유 또한 지극히 현대적입니다. 『햄릿』을 비롯한 그의 수많은 희곡 작품들이 현대에 와서도 활발하게 연극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는 자체가 셰익스피어 작품의 탁월한 예술성을 증명하는 셈이지요.


그의 희곡이 빛나는 또다른 이유는 문장이 너무나 절묘하고도 아름답다는 점입니다. 그는 음악처럼 그 다음이 듣고 싶어지는 대사를 쓰기 위해 '운문' 형식을 특히 많이 사용했습니다. 또한 리듬이 넘치는 말을 사용해서 극적 효과를 높였습니다. 가령 '적의 아들인 로미오를 사랑하다니 어찌된 일인가'라고 말할 상황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아, 로미오, 로미오, 어째서 당신의 이름은 로미오인가."

뒷날 『리어 왕』을 썼을 때, 그는 짧은 한 문장을 주인공에게 말하게 했다. "부탁하네, 이 단추를 풀어주지 않겠는가?" 이 글은 겨우 다섯 단어로 되어 있으면서 적어도 세 가지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실제로 옷의 단추를 풀라는 의미와 현세의 허영의 상징인 의복을 벗어버린다는 의미, 그리고 이 삶의 고뇌를 벗고 떠나고 싶다, 즉 죽고 싶다는 주인공의 비통한 소망을 포함한 의미이다. 등장인물의 성격과 상황에 대응한, 유연한 살아있는 말을 쓰는 능력을 셰익스피어는 긴 세월 동안 창작 활동을 통해 습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뛰어난 시란 어떤 것일까? 간결한 말에 여러 의미를 포함시킨다. 말에서 각각의 이미지가 넓어진다. 읽는 이가 분명 그러하다고 납득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저마다 나름대로 해석하는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다. 이런 시가 있다면 그것은 뛰어난 시라고 평가될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그러한 작품을 썼다. 그의 희곡작품은 극이면서 동시에 시인 극시인 것이다. 결국 셰익스피어는 시인이었고, 그가 시성(詩聖)이라고 불리는 이유와 작품의 끝없는 깊이도 거기에서 나온다.


 - 동서문화사,『햄릿/오델로/리어 왕/맥베드/로미오와 줄리엣』, <셰익스피어의 생애와 사상> 중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후세에 끼친 영향을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파악할 수 있을까요? 문학, 연극, 음악, 미술, 영화 등 수많은 예술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이걸 종합적으로 조망하는 그림을 그려내기란 결코 쉽지 않을 듯합니다. 셰익스피어는 심지어 정치학과 철학, 심리학과 정신분학석 등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도 『자본론』과 『경제학·철학수고』에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인용했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편지'에도 셰익스피어가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지요. 프로이트 또한 '오이디푸스 이론의 근간을 마련하기 위해 소포클레스의 희곡과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탐닉했다고 하지요. 프로이트 역시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난 셰익스피어가 그려낸 작품들이 지나치게 높은 문화수준을 갖추었다는 점 때문에 '원작자'가 따로 있다고 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마르크스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자주 읽었고, 이를 굉장히 좋아하여 매우 높게 평가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셰익스피어를 그리스의 아이스퀼로스와 함께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극작가 중 한명으로 존경했다. 또한, 그는 작품에 등장하는 단역까지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저서에도 셰익스피어의 대사가 상당히 많이 인용되고 있다.


"볼테르는 셰익스피어를 술 취한 야만인이라고 했다. 이처럼 프랑스인에게 반발심을 불러 일으킨 영국 비극의 특성 중 하나는 숭고한 것과 저속한 것, 두려운 것과 익살스러운 것, 영웅과 광대가 독특하게 어우러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영웅극의 서두를 이야기하는 역할을 광대역에게 맡기지는 않았다." <의회에서의 전쟁토론>(1854년)


 - 오다시마 유시, 『셰익스피어가 내가 찾아왔다』, <괴테, 톨스토이, 마르크스가 읽은 셰익스피어>


이토록 온갖 분야에 두루 영향을 끼친 셰익스피어는 과연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어떤 '사상이나 철학'을 설파하고자 했을까요? 놀랍게도 셰익스피어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항상 열린 자세로' 독자들의 판단에 맡길 뿐 자기 스스로 '결론'을 내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의 작품에 제시된 세계는 '모색(摸索)으로 가득 찬 세계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어떤 사상을 배우려고 하는 건 헛된 노력일지도 모릅니다.

『평생독서계획』을 쓴 클리프턴 패디먼도 이 점을 간파하고 명쾌하게 결론내렸습니다. "그는 위대한 독창적 사상가는 아니다. 시인들은 대개 독창적 사상가가 아니다. 이것은 그들의 주특기가 아니다. 세상을 바꾸어 놓은 사상을 찾는 사람은 셰익스피어에게 물어보면 안 된다."라고 말이지요.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그는 당대의 인기 최고의 드라마 작가였습니다. 오늘날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우리가 '인기 최고의 드라마'를 보면서 거기서 무슨 고매한 철학이나 사상을 배우려고 하지는 않으니까 말이지요. 셰익스피어의 이런 경향은 그가 '철학'을 두고 표현하는 '극중 인물들의 대사'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에게는 논리에 맞지 않는 것이 인간의 진짜 모습이다. 그는 'Philosophy(철학=논리적인 것)'이라는 말을 그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14번 사용했는데, 모두 부정적인 의미로 쓰고 있다.


예를 들어,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자. 줄리엣의 사촌을 죽여 베로나에서 추방당한 로미오는 자신을 위로하려고 논리로 설득하는 로렌스 신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직도 '추방' 얘깁니까? 철학 따윈 개나 줘버려요! 철학으로 줄리엣을 만들 수 있나요, 마을 전체를 뒤집어엎을 수 있나요, 아니면 영주님의 판결이 뒤바뀔 수 있게 하나요. 철학 따윈 아무 필요 없어요, 그러니 더 말씀 말아 주세요."


그리고 햄릿은 아버지의 망령에게서 친동생이 자신의 목숨과 왕관과 부인까지도 빼앗아갔다는 말을 듣는다. 그때까지 갖고 있던 인간관이 모두 무너진 그는 친구 호레이쇼에게 이렇게 말한다.


"호레이쇼, 이 세상에는 우리들의 철학으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많다네." (58∼59쪽)


 - 오다시마 유시, 『셰익스피어가 내가 찾아왔다』, <셰익스피어의 인간관·역사관의 형성>


시정이 이렇더라도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이 훼손될 일은 없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여전히 문학의 최고봉으로 우뚝 솟아 있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 이후에 활동한 수많은 작가들은 결코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작가들과 작품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기조차 힘들 정도입니다. 오죽하면 괴테가 이런 말을 남겼을까요.

"셰익스피어를 연구하면 그가 인간의 본성 전체를 모든 면에서, 그리고 모든 깊이와 모든 높이에서 철저히 연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그 이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괴테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극작가나, 소설가, 시인이 모두 펜을 접어야 하는 건 물론 아니지요. 이미 셰익스피어 스스로도 다른 사람이 쓴 책을 여럿 참고해서 자신의 작품을 썼습니다. 매사가 그런 식이지요. 괴테는『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는데 그 작품은 괴테가 쓴 『햄릿』이라고 평가받는 작품입니다. 체호프의 <갈매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햄릿』을 다시 쓸 수 있는 자유마저 박탈당한 건 아닌 셈이지요. 물론 세익스피어의 작품에 그만 압도된 나머지 작가가 되는 길을 지레 포기한 사람도 있을 테지요. 그런 사람들 가운데는 셰익스피어를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토록 우뚝 솟은 '문학의 거인'이 자신의 품 안에서 먹여 살릴 사람들의 숫자는 얼마나 많을까요. 이 또한 오래 전부터 반복된 '익숙한 전통'이자 당연한 귀결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플루타르코스의 판단에 의하면, 호메로스는 독자에게 언제나 전혀 다르게 나타나며, 항상 새로운 우아미로 개화하며, 결코 사람들을 물리게 하거나 염증 나게 하는 일이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가라는 특별한 찬사를 받는다장난하기 좋아하는 알키비아데스는 학자로 자처하는 어떤 자에게 호메로스 한 권을 달라고 요구했더니, 가진 것이 없다고 하자, 따귀를 한 대 갈겨 주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 신부님들 중에 성무 일과서(聖務日課書)를 갖지 않은 자를 보는 식이다.


크세노파네스가 어느 날 시라쿠사의 폭군 히에론에게 자기는 하인 둘을 먹여 살릴 거리도 갖지 못했다고 불평을 하자, 그가 대답했다. "뭐? 그대보다 훨씬 더 가난하던 호메로스는 아무리 죽을 지경이언정 만 명 이상의 학자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파나이티오스가 플라톤을 철학자들의 호메로스라고 말했을 때에, 이 말에 무슨 부족한 것이 있었던가?


 - 몽테뉴, 『수상록』, <가장 탁월한 인물들에 대하여>


셰익스피어의 삶이 미스터리에 둘러싸인 까닭은 그가 '작품' 말고는 다른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친필 원고는 전무하고 그가 서명한 서류 몇 건과 출생 및 사망 증명서가 있을 뿐이니까요. 그러니 그의 작품을 통해 거꾸로 '작가의 삶'을 연구하고 밝혀 보려는 시도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질 듯합니다. 정답이 없는 문제만큼 마음놓고 계속 떠들 수 있는 주제도 드물기 때문이지요. '셰익스피어 전기'만 하더라도 이미 셀 수도 없을 만큼 쏟아져 나왔으니까요. 

구매를 차일피일 미루면서 도서관에서 대충 훑어 보기만 했던 책들 가운데서도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 매력적인 책들은 꽤나 많았습니다. 가령 스티븐 그린블랫의 세계를 향한 의지와 리처드 폴 로의 셰익스피어의 이탈리아 기행 같은 책들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런 류의 책들은 잘만 읽으면 무척이나 유익하지만 너무 성급하게 달려들다 보면 도리어 쓰디쓴 맛만 안겨주는 고약한 책으로 돌변하기도 쉽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지닌 아름다움과 감동을 두루 충분히 맛보지 않은 상태에서 읽으면 저자가 느낀 만큼의 깊은 감흥에 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마치 몸이 몹시 허약한 사람한테는 비싼 보약조차도 함부로 처방하기가 어려운 경우를 닮았다고나 할까요.

셰익스피어 원작자를 둘러싼 논쟁이나 음모론들은 사실 일반 독자들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겐 밥줄이 달린 문제이긴 하겠지만 말이지요. 셰익스피어에 관한 일반 독자들의 문제는 언제나 셰익스피어의 숱한 명작들을 직접 읽느냐 마느냐에 달렸다고 봅니다. 그것이 『햄릿』이든 『로미오와 줄리엣』이든 『한여름 밤의 꿈』이든 『겨울 이야기』든 말이지요. 선택은 언제나 독자들의 '뜻'에 달렸습니다.

『좋으실 대로(As you like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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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주소는 ☞ https://youtu.be/JYDyrTfqX7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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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1 0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1 14: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1-03-01 1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ren님께서는 오래 활동 하셔서 변화를 감지하시고 계시나봅니다. 저는 알라딘 서재가, 이런 공간인 줄 모르고 줄창 독백하듯 리뷰만 올리다가 ˝북플˝기능 덕분에 작년부터 소통하게 되었거든요. 예전에는 더욱 화기애애하고 북적였나봐요 이 서재들이^^

oren 2021-03-01 15:07   좋아요 0 | URL
예전에는 좋은 글들이 올라오면 댓글이 순식간에 수십 개씩 붙었었죠. 인기 있는 알라디너의 글엔 수백 개씩 댓글이 붙은 적도 있었고요. 그런 글들을 보면 도저히 댓글을 안 달 수가 없어서(댓글을 안 달면 괜히 찔리는 기분까지도 들었을 정도니까요.) 반 강제로 댓글에 동참한 경우도 더러 있었던 듯하고요.^^

얄라알라 2021-03-01 14: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참! 처음에 몇번 oren님 영상 보다가 최근에는 죄송하지만 안 찾아봤는데 조회수가 10000대, 정말 축하드립니다! 꾸준히 듣겠습니다용

oren 2021-03-01 15:09   좋아요 1 | URL
유튜브 채널을 개설한지 1년 남짓 지났고, 아직까지도 동영상 제작에 많이 서툴긴 하지만, 제 채널 방문횟수만큼은 꾸준히 늘고 있어서 무척이나 고무적입니다. 초창기만 하더라도 제 채널 방문횟수가 하루 몇십 회가 고작이었는데, 요즘은 하루 1천회씩은 나오는 듯해요.^^ 갈수록 휑한 알라딘에 비하면 엄청난 조회수이긴 하죠.^^

2021-03-01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1 1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1 16: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1 16: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간에게 전후를 살피도록 풍부한 판별력을 부여하신 분이,

그런 능력과 존엄한 이성을 주었을 땐,
사용도 못해본 채 곰팡이가 생기도록
하시려 함은 확실히 아니렷다.


<햄릿> 4막 4장, 36-39


 * * *


안녕하세요? 오늘은 셰익스피어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셰익스피어는 한마디로 문학의 최고봉입니다. 그를 인도와도 맞바꾸지 않겠다는 어느 영국인의 호언장담이 빈 말이 아닐 정도로 말이지요. 그는 인도보다 훨씬 더 넓은 땅을 자신의 그림자로 가릴 만큼 우뚝 솟은 거인이었습니다. 그런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세상이 얼마나 다채롭고도 장엄할까요? 그러나 그가 거대한 사람이니만큼 그에게 다가서려는 독자들은 그만큼 주춤거려지는 것도 사실이지요.


『평생 독서 계획』의 저자이자 유명한 문학비평가였던 클리프턴 패디먼은 그런 '셰익스피어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요약했습니다.


"셰익스피어를 읽는 것은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는 것과 약간 비슷하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등정의 결과가 달라진다."


참으로 멋진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도 젊어서 한 때는 암벽 등반을 배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만났던 등산학교 담임 선생님께서 직접 네팔에서 사다 주신 '에베레스트 실물 사진'이 아직도 제 책상 머리맡에 걸려 있습니다. 한때나마 저는 꽤나 자주 그 사진을 올려다 보며 '언제쯤 저길 오를 수 있을까' 하고 꿈꾸었지만 이젠 좀처럼 그 사진을 올려다 보지 않습니다. 그런 도전을 하기엔 세월이 너무 흘러버린 탓이지요. 다만, 그런 사연들이 쌓인 덕분에 마침내 2013년에 히말라야로 떠날 수 있었고, 그때 비로소 '희박한 공기'를 온 몸으로 체감하며 눈덮힌 고봉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를 말이지요.


제가 경험했던 체르코리(해발 4,984m) 등정만 하더라도 되돌아보면 몹시 힘겨웠습니다. 평소 풍부한 등산 경험과 막강한 체력을 갖춘 등반 애호가들 12명이 함께 도전에 나섰으나 상당수는 4,500m를 쉽게 넘어서지 못하고 픽픽 쓰러졌더랬습니다. 저를 포함해 겨우 셋만 정상을 넘봤는데 4,500m 이상에서 허리까지 푹푹 빠지는 눈덮인 너덜지대를 통과할 땐 털썩 주저앉고 싶은 때가 정말 여러 번이었습니다. 불과 두세 걸음만 옮겨도 극심한 메스꺼움을 느끼면서 가쁜 숨을 연신 몰아쉬어야 했습니다. 거기엔 산소가 평지의 1/3에 불과했으니까요. 그토록 희박한 공기 속에서 중력과 사투를 벌이는 일이 얼마만큼 고역인지는 경험해 보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는 체험이었습니다.


히말라야 트레킹 때 들었던 웃픈 얘기 하나도 문득 떠오릅니다. 한국 사람들은 성미가 너무나 급해서 히말라야 트레킹을 '거꾸로' 다녀가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방법은 이렇습니다. 해발 4,000m든 5,000m든 최종 목적지를 헬기로 먼저 이동한 다음 거기서부터 도보로 천천히 내려온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주 가끔씩 시도되는 그런 방식이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 진짜로 문제였습니다. 대략 해발 2,800m 이상에서는 으레 '고산병 증세'가 찾아오기 마련인데, '고소 적응 과정'도 없이 갑자기 4,000∼5,000m 고지에 오르면 '고산병'이 아주 극심해지기 때문이지요. 한국 사람들 가운데 이런 식으로 트레킹에 나섰다가 하산 도중에 고산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목숨을 잃는 경우도 실제로 있었다고 합니다.


다시 셰익스피어로 돌아오지요. 에베레스트를 오르고 싶은 욕망이 아무리 크더라도 우리는 단번에 그 높은 봉우리를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듯이, 어쩌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접근하는 것도 사정은 비슷해 보입니다. 그와 같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오를 수만 있다면 그와 함께 절경을 내려다볼 수도 있겠지만 도리어 섣불리 뛰어들었다가는 '참패'를 맛볼 가능성도 동시에 지니고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아무리 셰익스피어가 거인이라고 하더라도 에베레스트에 비유한 건 과장이 좀 심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를 악물고 도전한다면 누구라도 셰익스피어를 읽어낼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등정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어느 문학비평가의 말에는 고도의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고소 적응 훈련'도 생략한 채 너무 무리해서 셰익스피어에 다가가다가는 자칫 '고산병 증세'를 견디지 못하고 너무 일찍 하산할 우려도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들이 셰익스피어에 다가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가 보여주는 멋진 절경들'을 즐겁게 보며 만끽하고 싶은 것이지 온갖 고통을 겪더라도 단지 오르는 데만 최종 목표를 둔 게 결코 아닐 테니까요.


이쯤에서 패디먼의 말을 조금만 더 들어보지요. 그의 말엔 좀 더 효율적인 등반 안내 지침도 있으니 말이지요.


그는 인간이었지 반신半神이 아니었다. 그는 콜리지가 말한 것처럼 "일천 가지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매슈 아놀드가 말한 것처럼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무오류의 인간도 아니었다. 인류가 낳은 많은 천재들 중 하나였다. 그는 극단에 소속된 장인이었고, 바쁜 배우였으며, 영리하여 점점 번영을 구가한 사업가였다. 천재도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고, 셰익스피어가 그 좋은 사례이다.

셰익스피어의 전집을 읽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사람이 평균적으로 70세를 산다고 보고 그 중에서 반년 정도의 시간을 투입하여 전집을 읽는다면 충분한 보상이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중에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사람마다 다르게 판단하겠지만, 셰익스피어의 드라마 37편 중에서 다음 12편을 필독서로 권한다. 한꺼번에 다 읽을 생각을 하지 말고 평생에 걸쳐 한 권씩 한 권씩 읽는 방법이 더 좋다. 『베니스의 상인』, 『로미오와 줄리엣』, 『헨리 4세』1부와 2부, 『햄릿』,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 『되에는 되로』, 『리어왕』, 『맥베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오셀로』, 『태풍』.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독서계획』


이쯤 되면 패디먼의 이야기는 '에베레스트 정복'보다 한결 수월해 보이고, 한껏 고무적인 이야기로 변합니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제가 바로 저런 이야기를 가슴에 꼭꼭 담아 두고서 '세익스피어는 최대한 천천히 만나자'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더랬습니다. 제가 앞에서 인용한『평생 독서 계획』속 문장들을 글로 옮겨 놓은 게 어언 11년 전이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셰익스피어를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했으니 말이지요.


셰익스피어를 억지로 외면한다고 해서 그가 영영 우리들 눈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네팔이나 히말라야까지 가지 않더라도 평소에 영화나 TV 프로그램 등을 통해 '에베레스트'를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가 꾸준히 책을 읽다 보면 아무런 예고조차 없이 불쑥 나타나는 셰익스피어를 가끔씩은 마주칠 수밖에 없습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사실 이 영상의 시작 부분에 인용한『햄릿』의 대사 또한 제가 2004년에 읽은 어떤 책 속에서 우연히 마주친 문장인데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어서 이번에 다시금 인용하게 된 것이니까요.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이처럼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나는 셰익스피어와 언제 어디서라도 아무런 예고 없이 마주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 유명한 『햄릿』을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읽지 못한 독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그 작품 속의 대사 몇 가지는 충분히 외울 정도로, 우리는 이미 셰익스피어에게 익숙하기도 합니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 혹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와 같은 그 유명한 대사조차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여기저기서 거듭 셰익스피어를 마주치고 나서도 한사코 그를 계속 외면하는 일은 적잖은 고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셰익스피어를 다시 만나러 가자니 그런 거인 앞에 서면 너무나 작아질 것만 같은 내가 너무 두렵고, 그를 계속 피하자니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들을 내가 너무나 몰라볼까 두렵다고나 할까요?


혹시라도 누가 어느 날 불쑥 내 앞에 나타나『오셀로』에 나오는 그 나쁜 이아고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본다면? 『헨리 4세』의 1부와 2부에 계속 연이어 등장하는 폴스태프에 대해 물어본다면? 헨리 4세조차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폴스태프를 알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로미오와 줄리엣』에 관한 이야기라면 또 모를까...


제가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무지한 탓에 정말로 곤혹스러웠던 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라는 책을 읽을 때였습니다. 저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는 동안에 몇 번씩이나 후회를 하곤 했습니다. 어쩌자고 내가 셰익스피어를 건너뛰고 이 책부터 붙잡고 나서 이 고생이란 말인가, 하고 말이지요. 그리고 몇 번씩이나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이대로 아일랜드 더블린에 계속 남을 것인가, 아니면 영국 런던으로 당장 건너갈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하고 말이지요.


왜냐하면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속 공간인 '아일랜드 더블린'에 계속 남아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계속 따라가기엔 작품 속 인물들이 나누는 '셰익스피어 이야기'에 대해 제가 모르는 게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를 좀 더 빨리 만나도록 제게 큰 자극을 준 또다른 인물은 미국의 사상가인 에머슨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만일 전 세계의 도서관이 불타고 있다면 나는 뛰어 들어가 『셰익스피어 전집』과 『플라톤 전집』 그리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구해낼 것이다” 라는 말로 '셰익스피어'를 극찬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에머슨의 말을 들을 때만 해도 온통『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만 관심이 있었고, 셰익스피어에게는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더랬습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두 번이나 거듭 읽고 난 뒤에 에머슨의 『위인이란 무엇인가』를 펼쳤습니다. 제가 그 책으로 건너간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로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에머슨의 평가'가 어떤지 몹시 궁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그 책 속에 몽테뉴가 등장한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몽테뉴가 가장 좋아한 작가가 플루타르코스였으니 에머슨이 들려주는 '몽테뉴 이야기'가 너무나 궁금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저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습니다. 『위인이란 무엇인가』 속에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등장하는 '영웅'도 없었고, 몽테뉴도 없었습니다!


사정을 좀 더 살펴 보고 나서야 그 까닭을 알았습니다. 그 책은 원제목이 《대표적 인물 Representative Men》(1849)이라는 책이었고, 거기엔 원래 나폴레옹, 괴테, 셰익스피어, 스베덴보리, 몽테뉴, 플라톤이 담겨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 번역할 때 하필이면 '몽테뉴'만 쏙 빼버렸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러나 뭐 어떠랴 싶었습니다. 그 책엔 뜻밖에도 '셰익스피어에 대한 놀라운 통찰'이 가득 들어 있었으니까요.


'여태껏 셰익스피어도 모르면서 잘도 지내 왔군.' 하고 제게 말을 건네는 듯한 느낌을 안겨준 또다른 인물은 예일대에서 오랫동안 문학을 강의해온 헤럴드 블룸 교수였습니다. 그가 쓴 『교양인의 책읽기』는 여러 명의 소설가와 시인과 극작가를 다루고 있는데 셰익스피어는 특별히 <시인편>과 <극작가편>에 거듭 얼굴을 내민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극작가로서의 셰익스피어를 다룬 부분에서는 『햄릿』을 매우 깊이있게 다루고 있어서, 그 작품을 미처 읽어보지 못한 저로서는 여간 당혹스러운 게 아니었습니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한 편도 제대로 읽지 못한 학생이 '셰익스피어의 <햄릿> 특강'을 다루는 예일대 강의실에 불쑥 끼어든 꼴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당혹감이야말로 더 이상 셰익스피어와 햄릿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더없이 강력한 자극제였습니다.


견디다 못한 저는 마침내 셰익스피어의 책들을 사들였습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햄릿』부터 펼쳐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저는 '햄릿'의 대사에 화들짝 놀랐습니다. 거기엔 놀랍게도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가 숨어 있었고, 심지어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와 에우리피데스의 『헤카베』까지도 숨어 있었습니다. 『햄릿』2막 2장에 나오는 '극중극'에서 햄릿은 배우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은연중에 그 자신이 '배우'이자 '시인'이 되어 '극중극'의 대사를 배우에게 들려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음과 같이 말이지요.


              햄릿

그 극에서 내가 제일 좋아했던 대목이 있는데 그건 아이네이아스가 디도에게 해 준 얘기로, 특히 그가 프리아모스의 도륙을 말하는 부근이야. 기억할 수 있거든 이 줄에서 시작해 보게 ㅡ 어디 보자, 어디 보자 ㅡ


'험상궂은 퓌로스가 히르카니아의 야수처럼' ㅡ

이게 아냐. 퓌로스로 시작하는데 ㅡ

'험상궂은 퓌로스가 불길한 목마 속에

쭈그리고 앉았을 땐 칠흑 같은 갑옷이

자신의 의도처럼 검은 밤을 닮았더니

지금은 그 무섭고 검은 모습 더욱더

불길한 색깔로 물들었소. 그는 지금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전히 시뻘겋게

아비, 어미, 딸들과 아들들의 핏물로

끔찍이 채색되어 그들 왕의 살해에

포악과 저주를 더하면서 불타는 거리에서

바짝 말라 구워졌소. 분노와 불길에

딱딱해진 피껍질을 온몸에 덮어쓰고

석류석 붉은 눈빛, 지옥 같은 퓌로스가

프리아모스 노친을 찾는다오.'

이어서 자네가 계속하게


    폴로니우스

          맹세코, 왕자님, 잘 읊으셨습니다. 억양도 좋으시고 분별력도 좋습니다.

                                                                                  

                                                                                 - 『햄릿』, <2막 2잘> 중에서


셰익스피어가 『햄릿』에서 '극중극'으로 '퓌로스'를 등장시킨 건 뚜렷한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친부 살해'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햄릿의 롤모델이 바로 퓌로스였기 때문이지요. 사실 『햄릿』에서 '햄릿'과 똑같은 처지, 즉 자신의 부친이 살해당한 데 대해 복수를 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 아들의 위치에 있는 인물은 햄릿 말고도 포틴브래스와 레어티스까지 무려 셋이나 됩니다. 거기에 더해 셰익스피어는 '극중극'을 통해 '퓌로스'까지 끌어들인 것이지요. 퓌로스는 일명 네옵톨레모스라고도 불리는데, 호메로스의 서사시『일리아스』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아킬레우스의 아들입니다.


고전 중의 고전인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주제로 하는 작품이지요. 그의 분노가 트로이아 전쟁 전체를 멈추게도 하고 원정군을 극도로 위험한 상황에 내몰리게도 만들지만, 그의 분노가 가라앉을 땐 적국의 대왕인 프리아모스를 감동시킬 때조차 있으니까 말이지요. 어쨌든 아킬레우스는 전쟁 중에 파리스의 화살에 아킬레스건을 맞아 죽고, 그의 아들 '퓌로스'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 전쟁에서 놀라운 맹활약을 펼칩니다. 


그는 10년 동안이나 함락되지 않는 트로이아를 무너뜨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헤라클레스의 활'을 구하기 위해 필록테테스를 만나러 갈 때에도 중요한 임무를 띠고 오뒷세우스와 함께 렘노스 섬으로 파견됩니다. 결국 꾀많은 오뒷세우스는 섬에 버려져 있던 가엾은 필록테테스와 그가 지닌 '헤라클레스의 활'을 동시에 얻게 되지만, 필록테테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꾀고 설득하는 임무를 띤 건 '착한 퓌로스'였지요. 그는 필록테테스가 잠든 사이에 활을 훔쳐내지만 '활도 없이 섬에 홀로 남아 지낼' 그를 너무나 가엾게 여겨 그에게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훔친 활을 도로 돌려주지요. 그토록 착한 퓌로스였지만 그가 아버지를 잃은 뒤에 트로이아를 함락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분노'는 트로이아의 왕과 왕비에겐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가혹했습니다.


저는 『햄릿』을 읽다가 갑자기 오래 전에 읽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다시 펼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킬레우스의 아들 퓌로스가 정말 그토록 '분노와 불길에 딱딱해진 피껍질을 온몸에 덮어쓰고' 맹렬하게 날뛰었는지를 새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주욱 이어서 설명드린 것처럼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가 곳곳에 가득 숨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미리부터 속속들이 알고 있던 당대의 관객들이나 후대의 독자들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해 그토록 뜨거운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다 까닭이 있었던 셈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셰익스피어의 로맨스극 『겨울 이야기』를 번역했던 이윤기 선생님의 설명도 참고할 만합니다.


종교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종교에 빠진 사람들이 종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신비 참여 체험' 때문이다. 이 '신비 참여 체험'은 오로지 종교에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독서는 어떨까? 나는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은 책을 탐독하는 것이 '문맥에 참여하는 재미의 체험' 때문이 아닐까 종종 생각한다.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보면서 혹은 텍스트를 읽으면서 오비디우스의 텍스트를 떠올리는 재미는 참으로 별난 경험이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텍스트에서 자주 신화의 편린을 찾아내고는 한다.

 - 셰익스피어 지음, 이윤기 이다희 옮김,『겨울 이야기』, <『겨울 이야기』재미나게 읽기> 중에서



저는 이제야 겨우 셰익스피어의 작품 여섯 편을 읽었지만 그 속에서 호메로스, 소포클레스, 오비디우스, 플루타르코스의 영향들을 심심찮게 자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줄리어스 시저』등을 읽을 땐 플루타르코스를 통해 읽었던 '영웅들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셰익스피어의 붓끝에 의해 얼마나 훌륭하게 '연극'으로 되살아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었습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역사적인 대사건을 두고도 천재 시인은 몇몇 제한된 배우들의 극적인 대사 만으로도 더없이 훌륭하게 되살리는 비상한 재주를 맘껏 뽐내고 있었습니다.


복잡한 배경 설명이 필요한 경우에도 셰익스피어는 단지 배우들의 아주 짧은 방백만 가지고도 더없이 날렵하게 다른 장면들로 사뿐히 건너뛰고 내달렸습니다. 그런 재미까지 두루 맛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어느 정도의 선행 독서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쩌면 이윤기 선생님의 다음 말은 셰익스피어를 읽기 위한 예비 독자들에겐 더없이 훌륭한 조언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뒤늦게 셰익스피어를 만났지만 저는 그의 말에 격하게 동의합니다.


셰익스피어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작가가 아니다. 나는 셰익스피어를, 호메로스로부터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같은 신화 작가들,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 같은 그리스 비극 작가들, 헤로도토스, 플루타르코스 같은 역사가들로부터 흘러온 길고 깊은 강이라고 생각한다. 도도하게 흐르는 서양 문학의 강이라고 생각한다. 셰익스피어를 읽는 일은 그 강으로 풍덩 뛰어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셰익스피어 지음, 이윤기 이다희 옮김,『겨울 이야기』, <셰익스피어, '압축 파일' 풀기> 중에서


셰익스피어를 극찬한 사람들은 예로부터 아주 많았습니다. 그만큼 높이 솟은 문학의 봉우리를 우리는 앞으로도 영영 다시는 발견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제 겨우 셰익스피어의 작품 대여섯 편을 읽은 독자 주제에 제가 셰익스피어에 대해 너무 호들갑을 떨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먼 발치에서라도 에베레스트를 한번 힐끗 올려다본 사람은 그 아득한 봉우리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늘상 떠들기 마련입니다.


이미 이십여 년쯤 전에 히말라야를 훌쩍 다녀온 친구 녀석으로부터 제가 들었던 가장 강력한 말은 이랬습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지. 히말라야에 가 본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음하하하." 수많은 작가들을 높은 산들에 비유한다면, 셰익스피어에게도 누군가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상엔 셰익스피어를 읽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분류할 수 있다고 말이지요.


셰익스피어를 읽는 행위를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는 데 비유한 클리프턴 패디먼의 설명은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는 고도로 훈련된 전문 산악인만이 도전할 수 있는 에베레스트처럼 그렇게 난공불락의 봉우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패디먼도 그걸 모를 리 없었습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를 "고전"이라고 생각하며 접근하는 것보다, 새로운 드라마의 첫 공연에 참석하는 것 같은 기대감으로 접근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셰익스피어를 읽으면서 에베레스트를 오를 때처럼 '희박한 공기' 때문에 숨을 헐떡거리거나 메스꺼움을 느낄 리도 없습니다. 든든한 장비를 두루 갖추고 아주 유능한 셀파와 함께 목숨을 걸고 도전할 일은 더더욱 아닐 테고요.


히말라야를 다녀온 사람들은 '거기에서 무엇을 발견했느냐'는 사람들의 물음에 가끔씩 전혀 예상밖의 엉뚱한 대답을 하곤 합니다. 거기서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이지요. 제가 보기엔 셰익스피어도 아마 그와 비슷한 작가인지 모르겠습니다. 끝까지 다 오르기는 몹시 힘들어도 그의 작품을 꾸준히 읽게 되면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걸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그런 거대한 산 같은 작가이니까 말이지요.


 * * *


동영상 링크 주소는 ☞ https://youtu.be/-nfaX0qe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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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emy 2021-02-21 0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Hamlet 에서 님께서 인용하신 대사, 발췌해봅니다.
어쩐지 한국말이 더 어려운 것 같은....그런 느낌입니다.

36 Sure, He that made us with such large (discourse),>>>> (power of reasoning)
37 (Looking before and after), gave us not >>>>(seeing cause and effects)
38 That capability and god-like reason
39 To (fust) in us unused. Now, whether it be >>>>(mould-grow moldy)
Hamlet Act IV, Scene 4

Shakespeare 를 long-term project 으로 천천히 열공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반가운 마음으로 댓글 달아봅니다.
Cyrus님 글에 댓글 처음으로 달아본 뒤, 님글이 두 번째입니다.

최근에 극상의 탐미주의자, Oscar Wilde 의 유일한 소설인,
˝The Picture of Dorian Gray˝ 를 다시 읽었는데 이 책에 언급된 Shakespeare 작품 인물들,
(많이 나옵니다.) 다 제대로 인지할 수 있어서 너무나 즐거웠답니다.

일단 ˝Art for art‘s sake˝ 로 유명한 서문부터
˝The nineteenth century dislike of Realism is the rage of Caliban seeing his own face in a glass.˝
(Caliban is a monstrous creature in ˝The Tempest˝.)
from The Preface, The Picture of Dorian Gray

Shakespeare 자체가 문학 자체에 드리운 영향력이 너무나 커서 그의 작품을 읽지 않으면
Shakespeare 이후의 거의 모든 다른 책들의 미묘한 암시, allusion/reference 를
제대로 다 catch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꼭 (?) 넘어야만 할 산인데 그의 작품수가 너무나 많아서, 또 읽다보면
Shakespeare 가 Virgil 의 Aeneid, Homer 의 Odyssey 뿐만 아니라 다른 Greek Tragedians
작품까지 한, 두 줄로 요약해서 전달해버리는 기술 (?) 내지 마법을 부리며
진짜 고전중의 고전들을 읽어야만 하겠구나,
라는 숙제를 안겨주기 때문에 아마도 Mt. Everest 에 비유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도 자꾸 읽다보면 소위 Modernism, 혹은 Postmodernism 이라 불리는
다른 책들보다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Shakespeare 가 딱히 더 어려운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한텐 영어로 읽는 Vladimir Nabokov 나 어떤 면에선 William Faulkner 의 글이 더 숨이 차기때문에.

저는 님께서 언급하신 Shakespeare 에 대해 쓴 책들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님의 독서량과 깊이에 감탄하며 님의 다른 글들도 읽어보려 합니다.
Shakespeare 안내서 비슷한 책이나 다른 사람들의 서평을 자꾸 읽다보면
저 같은 경우, 자꾸 집중력이 흩어져서
웬만하면 제 힘으로 책 그 자체를 먼저 읽으려 하는 편이거든요.

일단 4대 비극들을 다 읽고 난 후에 그냥 Public Domain 에서 유명한 A.C. Bradley 의
Shakespearean Tragedy: Lectures on Hamlet, Othello, King Lear & Macbeth 를 쭉 훑어보았는데
나름 열심히 읽는다고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제가 놓친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일단은 책 자체를 제 힘으로 다 읽었기 때문에
놓친 것들에 대한 즐거움이 더 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지난 달에는 대학 이후 다시 한 번 ˝The Tempest˝ 를 정독해서 끝냈고
이번 달은 일단 종이책으로 가지고 있고 대학 English 1B 에서 공부한 적 있었던
‘A Midsummer Night‘s Dream‘ 를 다른 책들 읽는 사이사이, 천천히 읽고 있습니다.
이 희극에서도 시작하자마자 바로 The Queen of Cartage, Aeneid의 Dido 가 또 언급됩니다.

전 그냥 한 달에 한 편씩 Shakespeare 읽는 걸로 올 해 목표를 세웠고
Twelfth Night, Much Ado About Nothing, As you Like It, The Taming of the Shrew, 그리고
The Merchant of Venice 까지 읽은 후, Histories 의 시작으로 Julius Caesar 를 파 볼까 계획 중입니다.
위에 누군가 추천한 것과는 좀 다른 길을 걷는 것 같지만 책읽기에 왕도란 없는 것이니까요.

4대 비극과 ˝Romeo and Juliet ˝까지는 대사를 줄줄 외울 정도는 아니지만
어디서 어떤 대사가 나왔었는지 인식할 정도의 집중을 쏟은 읽기를 작년에 마쳤고
Hamlet 의 Metafiction으로 유명한 Tom Stoppard 의
˝Rosencrantz & Guildenstern Are Dead˝ 까지 다시 읽었습니다.
책을 읽는 것과 읽은 책들에 대해서 님처럼 depth of knowledge 가 있는 글을 쓰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요.

발췌한 김에 제 Hamlet 책을 온갖 색깔의 깨알글씨로 빼곡 채우게 만든
Act II, Scene 2 , Lines 445-465 대사들도 적어봅니다.
댓글에 왜 사진 첨부의 기능이 없는건지....
왕 수다쟁이에 너무나 아는 것 많은 Hamlet 의 폭풍대사긴 하지만 나름 rhyme 이 있어서
소리내어 읽다보면 뭔 말 하려는지... 알 것 같은, 그런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HAMLET

very much more handsome than fine. One speech (much more fitting than flashy. One speech)
in it I chiefly loved: ‘twas Aeneas‘ tale to Dido; (it was the story that Aeneas told to Dido.)
and thereabout of it especially, where he speaks of (and specially that part of it.)
Priam‘s slaughter: if it live in your memory, begin (the slaying of Priam, the elderly King of Troy.)
at this line—let me see, let me see:

˝The rugged Pyrrhus, like the Hyrcanian beast—˝ (Hyrcanian beast: a ferocious tiger-like)
‘Tis not so: it begins with Pyrrhus: ( Pyrrhus: cruel son of Achilles)
˝The rugged Pyrrhus, he whose sable arms, (sable: black>>>>meaning the Greeks hiding in the Trojan horse)
Black as his purpose, did the night resemble
When he lay couched in the ominous horse, (the Trojan horse)
Hath now this dread and black complexion smear‘d
With heraldry more dismal; head to foot
Now is he total gules; horridly trick‘d ( Heraldic terms: gules: blood-red/ trick‘d: drawn, adorned.)
With blood of fathers, mothers, daughters, sons,
Bak‘d and impasted with the parching streets,
That lend a tyrannous and damned light
To their lord‘s murder. Roasted in wrath and fire, (Priam‘s murder)
And thus o‘er-sized with coagulate gore,
With eyes like carbuncles, the hellish Pyrrhus (carbuncles: deep-red jewels which shine in the dark)
Old grandsire Priam seeks.˝
So, proceed you. (pick up where I left off)

POLONIUS
‘Fore God, my lord, well spoken, with good accent
and good discretion.

Hamlet 이 줄줄이 암송 읊으며 저리 잘난 척 한 다음에 계속 이어서 말해보라고
challenge 했을 때 Polonius 가 과연, 딱히 뭘 더 말 할 수 있을까요?
그냥 물개 박수 치면서 ˝OMG, 네, 왕자님 정말, 잘 나셨어요.˝
그저 왕자님 폭풍 칭찬하는 것 외엔.

oren 2021-02-21 01:23   좋아요 1 | URL
Shakespeare 를 장기적으로 천천히 열공하고 계시는 분을 만나니 더욱 반갑습니다.^^
또한, 제가 인용했던 <햄릿>의 대사를 원문으로 다시 소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선, 셰익스피어 시대의 영어를 현대의 우리말로 번역하는데는
아무래도 많은 난관이 있을 듯합니다.
제가 <평생독서계획> 속에서 발견했던 <오셀로> 속의 어떤 대화 하나도,
영어 원문에서는 상당히 다른 뉘앙스로 쓰인 걸 알고 깜짝 놀랐던 적도 있었답니다.
https://blog.aladin.co.kr/oren/9446811

Oscar Wilde의 ˝The Picture of Dorian Gray˝에서도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는군요.
다른 작가의 작품 속에 셰익스피어가 자주 등장하는 건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닌데,
제가 읽었던 작품 가운데서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말고는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다음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정도가 아닐까 싶었는데,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에서도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인물들이 그렇게나 많이 등장하는군요.
저도 언제 기회가 되면 오스카 와일드의 그 작품을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속에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인용된 정도는 아래 글을 참고하셔도 좋을 듯합니다.^^
https://blog.aladin.co.kr/oren/10142866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고전들이 가득 숨어있는 건 맞으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나 윌리엄 포크너의 어려운 작품들보다 더 어려운 것도 아니라는 말씀,
저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저 역시 셰익스피어를 읽을 때 무슨 <해설서>를 일부러 찾아 읽은 적은 별로 없는데,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라는 책과 푸른숲에서 나온 대형 판형의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를 이해하는 데 특히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4년 전에 제가 cyrus 님께 달아드렸던 댓글이 생각나 재인용해 봅니다.)

『HOW TO READ 셰익스피어』의 저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7개‘를 ‘일곱 개의 단어‘로 기가 막히게 설명해 놓았더군요. 가령, 『햄릿』은 ‘벙어리들‘로, 『맥베스』는 ‘안전한‘으로,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는 ‘끄덕임‘으로 설명하는 식이죠. ‘주석이 없는 셰익스피어‘를 읽을 수밖에 없는 독자들은 ‘셰익스피어의 언어‘가 갖는 온갖 놀라운 비밀들을 ‘거의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냥 지나치며 읽고 있다고 봐야 옳겠더군요.
* * *
…… 그러나 이러한 단어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드퀸시(Thomas De Quincey, 1785∼1859)가 1823년 셰익스피어를 읽는 경험에 대해 했던 말이 얼마나 예리했는지 입증할 수 있기를 바란다. 드퀸시는 이렇게 말했다. ˝탐구를 계속할수록, 조심성 없는 눈은 우연성밖에 보지 못하던 곳에서 설계와 자립적 배치의 증거를 점점 더 많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저는 여태껏 (소네트와 설화시 작품을 제외하고) 셰익스피어의 희곡작품을 21편 정도 읽었는데,
민음사에서 출간 중인 전10권 운문번역이 5권까지만 출간되고 그 뒤로 감감무소식이어서,
아직도 못 읽은 16편의 희곡작품은 동서문화사 판본으로 읽어볼까 고민중이랍니다.^^
https://blog.aladin.co.kr/oren/10791621

너무나 친절하게도, <햄릿> 속에서 제가 인용했던 부분을 재인용해 주셔서,
제게도 아주 유익한 참고가 되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속에 담긴 무궁무진한 깊이는,
아마도 니체의 다음 말에 요약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해봤더랬습니다.
기나긴 댓글 남겨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 *

호메로스와 셰익스피어의 경우

예를 들어 우리는 다시 호메로스를 : 어떤 고귀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 (호메로스의 광막한 정신을 비난했던 생 테브르몽Saint-Evremond 같은 17세기 프랑스인들이나, 그 세기 마지막 인물인 볼테르조차도) 쉽게 소화할 수 없었으며 ㅡ 거의 즐길 수조차 없었던 호메로스를 우리가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아마 우리의 가장 행복한 우월성일 것이다. 그들 미각의 매우 단호한 긍정과 부정, 쉽게 일으키는 그들의 구토, 온갖 이질적인 것에 대해 머뭇거리는 신중함, 활발한 호기심이 가지고 있는 몰취미 자체에 대한 그들의 경계심, 그리고 일반적으로 어떤 새로운 탐욕이나 자기 것에 대한 불만, 또는 이질적인 것에 대한 경탄을 스스로 인정하는 고상하고 자족적인 모든 문화가 가지고 있는 저 나쁜 의지 : 이 모든 것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거나 노획물이 될 수 없는 것이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 해도 호의를 보이지 않는다. ㅡ 그리고 이와 같은 인간들에게는 바로 역사적 감각이나 거기에 굴종하는 천민적 호기심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감각은 없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도 경우가 다르지 않다. 이 놀라운 스페인식과 무어식, 색슨적인 취미의 종합을 보았다면, 아이스킬로스와 친교가 있던 고대 아테네 사람들이라면 반쯤 죽도록 웃거나 화를 냈을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ㅡ 바로 이러한 거친 다채로움을, 가장 섬세한 것과 조야한 것, 예술적인 것의 혼합을 은밀히 신뢰하고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비축된 예술의 정수로 셰익스피어를 즐기며, 이때 그의 예술과 취미가 살아 있는 영국 천민의 불쾌한 수증기가 근처에 감돈다 해도 거의 그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나폴리의 키아야 천민 지역의 하수구 냄새가 공기 중에 떠다닌다 해도,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매혹된 채 즐거이 우리의 길을 걷는 것과 마찬가지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24절


Jeremy 2021-02-21 14: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답글 잘 읽었습니다.
저 역시 길게 이것저것 더 썼었는데 홀라당 날려버리고 의욕상실해서
그냥 제 댓글은 잊어버리고 oren 님 글을, 더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James Joyce 의 Ulysses 는 아직 저한텐 힘든 책이라서
작년에도 괜히 Annotation 이 많이 붙은 The Gabler Edition 까지 샀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군데군데 펼쳐 읽어보는 소소한 기쁨만 누리고 있습니다.
oren 님글, 읽어보면 확실히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oren 2021-02-21 14:27   좋아요 1 | URL
그러셨군요..
기나긴 댓글을 좌악 써내려가다가 한순간에 싹~ 날려버리고 나면,
좀처럼 다시 쓸 기분이 들지 않더군요.. ㅎㅎ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가끔씩 펼쳐보는 것만으로도‘ 독서가 되는,
참 묘한 책인 건 분명한 듯합니다.
저도 그 책을 읽기 전까지 그냥 심심풀이로 몇 번 뒤적거려 본 적이 있었는데,
그런 경험들이 자꾸만 축적되어야 그 험준한 산을 기어오를 동기가 부여되는 것 같더라구요.
아무쪼록 건투를 빕니다.^^
 

용기를 잃는다는 것은 철저한 패배를 의미한다. 철저한 패배를 원하는가?그렇지 않다면 용기만은 잃지 말아야 한다.
 - 플루타르코스

 

 * *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소개합니다.


이 유명한 책을 쓴 플루타르코스는 그리스 사람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한때 영어식으로 번역해서 『플루타크 영웅전』으로도 많이 소개되었었지요. 탁월한 문장가이자 철학자이자 역사가였던 플루타르코스에게 붙은 별명은 '최후의 그리스인'이었습니다. 플루타르코스가 죽은지 1,800년도 더 지나서 그리스의 소설가였던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멋진 인물을 등장시키지 않았더라면 플루타르코스는 여전히 '최후의 그리스인' 타이틀을 굳건히 움켜잡고 있었을 테지요. 이 탁월한 고대의 인물은 기원후 46년경 태어나 120년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가 살았던 시대의 그리스는 사실 로마의 속주가 된 지도 2백 년이나 지난 상태였습니다.


훗날『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이 '인류 역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라고 절찬한 '5현제의 시대'를 살았던 그가 '최후의 그리스인'이라는 영광스러운 별칭으로 불리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는 고대 그리스의 주요 작가들에 아주 통달한 끝에 그리스어로 쓰여진 수많은 작품들을 쏟아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생애의 마지막 30년을 '고대 그리스의 상징'인 델포이 신전에서 사제 노릇을 하며 헌신적으로 일한 점도 그런 별명을 얻는데 보탬이 됐을 듯합니다. 그가 오랜 세월 동안 신관으로 일했던 건 아폴론의 신탁을 받던 유서깊은 델포이 신전이 더 이상 황폐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하지요. 그런 그에게 '최후의 그리스인'이라는 별명 만큼 멋진 타이틀도 없었을 듯합니다.


그는 아폴론 신전으로 유명한 델포이에서 가까운 도시인 카이로네이아에서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습니다. 스무 살부터는 아테네로 건너가 아카데미에서 철학을 배웠습니다. 그런 뒤에 이집트와 이탈리아 등 지중해 연안의 여러 지방을 여행하고, 로마에도 두세 차례 방문해 강의도 하고 집정관 등 고위층의 명사들과도 친분을 쌓았다고 합니다.

 

그가 쓴 대표작은 저 유명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인데, 원래 제목은 『비교 열전』(Bioi paralleloi)이었습니다. 스물세 쌍의 그리스 영웅과 로마 영웅을 '비판적으로 비교'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제목이 붙었습니다. 애초에 그 책엔 이들 마흔여섯 명의 영웅들만 담겼으나, 나중에 그가 따로 쓴 「로마 황제전」에서 두 사람을 더 보태고(갈바와 오토), 또 다른 제왕전 중에서 남아 전해지던 두 사람(아라토스와 아르타크세르크세스)를 후세 학자들이『영웅전』에 포함시킴으로써 그 책은 모두 50명의 영웅들의 전기를 담은 방대한 책이 되었습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펼치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영웅들인 알렉산드로스, 카이사르, 브루투스, 폼페이우스, 안토니우스 등을 두루 만날 수 있지만, 그 영웅전에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 마땅할 인물들이 몇몇 제외되어 있어서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4세기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람프리아스 목록'에는 테바이의 영웅 에파메이논다스(키케로는 그를 '최초의 그리스인'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결정타를 가한 대(大)스키피오의 전기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방금 언급했던 '람프리아스 목록'에는 플루타르코스의 작품으로 모두 227개의 제목이 발견되는데, 그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작품은 50편의『영웅전』과 78편의 『윤리론집』뿐이라고 하지요. 그가 쓴 작품 가운데 대략 절반 정도만 남은 셈입니다. 그런데 그가 쓴 그토록 많은 작품 가운데 그리스어로 쓰여진 원전을 우리말로 직접 번역한 책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제가 알기로는 대략 다음의 네 권쯤 되는 듯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도 그리스어 원전을 완역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없는 셈이지요.


방금 소개했던 네 권도 모두 그리스어 원본을 저본으로 삼아 번역한 책이긴 하지만 한결같이 '완역'이 아니라 '발췌 번역'으로 출간되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플루타르코스의 원전이 워낙 방대하다보니 발췌 번역으로나마 번역본을 읽을 수 있다는 게 반갑긴 하지만, 원전의 명성이 워낙에 우뚝한 만큼이나 독자들로서는 완역본에 대한 갈증도 클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지요.

 

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 또한 『영웅전』못지않게 방대한 저작인데, 무려 78편의 작품이 담긴 원전의 완역본을 기대하기란 힘들 듯합니다. 국내엔 원전에서 딸랑 6편만 추려 뽑아 번역한『수다에 관하여』(천병희 번역, 279쪽)라는 책과 5편만 추려 뽑은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허승일 번역, 418쪽) 정도가 나와 있을 뿐인데, 두 권의 발췌번역본을 합치더라도 전체 작품의 겨우 14%(11/78) 정도만 번역된 셈이니까요.

 

이런 사정들만 대충 살펴보더라도 플루타루코스의 『영웅전』과 『윤리론집』이 얼마나 방대한 저작이며, 그 두 작품의 원전 번역이 나오기 위해서는 얼마나 풍부한 주석 작업이 뒤따라야 하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까지 국내에 나와 있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그리스어 원전의 완역본이 아니거나 혹은 원전의 발췌 번역본이라고 하더라도, 이 위대한 작품의 가치를 제대로 음미하기 어려울 정도로 형편이 나쁘진 않은 듯합니다.


우선, 지금까지 국내에 번역되어 나온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도대체 얼마나 많을까요? 누가 그런 걸 일일이 다 헤아리고 있겠습니까마는, 제가 읽은 어느 책에서 발견한 간략한 '참고문헌'에 의하면 대략 다음과 같았습니다.(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던『두 정치연설가의 생애』라는 책의 말미에 실린 목록입니다.)

 

김병철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1∼8, 범우사, 1999.

박시인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1∼6, 을유문화사, 1966.

이다희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1∼6, 휴먼앤북스, 2010∼2012.

이성규 옮김,『플루타르코스 영웅전』1∼2, 현대지성사, 2000.

외국어번역연구회 옮김,『플루타르코스 영웅전』1∼9, 한아름, 1994.

천병희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선집), 숲, 2010.

홍사중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1∼2, 동서문화사, 2007.

 

제가 이 책들을 모조리 살펴볼 재간은 없습니다. 다만 이 가운데 휴먼앤북스에서 나온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번역의 문제' 보다는 '주석' 때문에 독자들로부터 신뢰를 크게 잃은 책인 둣합니다. 번역자가 고(故) 이윤기 선생님의 딸이어서 더욱 세간의 기대와 주목을 받았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대작 번역'에 매달린 끝에 마침내 내놓은 번역 작품이 독자들로부터 기대밖의 푸대접을 받는 듯해서 볼 때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책입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은 한때 서유럽에서 거의 천 년 동안(5∼15세기)이나 실종된 상태였다고도 하는데, 프랑스의 성직자 아뮈요가 1559년에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1579년에는 아뮈요의 프랑스어 번역을 중역한 영문판이 나옴으로써 일약 서양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가 되었다고 하지요.


플루타르코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는 단연 몽테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수상록』에서도 자신이 얼마만큼 플루타르코스의 문장들을 좋아하는지를 여러 차례 거듭해서 밝힐 정도였지요.


나는 플루타르코스의 저서는 여간해서 놓지 못한다. 그는 너무나 보편적이며 충실하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우리가 어떠한 하찮은 일을 처리할 때도 그는 우리 일에 참견해 오며, 풍부와 미화의 무궁무진하고 관후한 손을 내밀며 거들어 준다. 나는 그를 애독하는 자들의 글에, 그에게서 따온 부분이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 울화가 터진다. 그리고 그를 읽어 보기만 하면 내 글의 날개와 허벅다리를 거기서 따오지 않을 수 없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역사가들은 내게는 입에 맞는 떡이다. 그들은 재미나고 평이하다. 그들은 또 인간의 내적 조건들의 잡다성과 진실성의 전부와 세부적인 것, 그가 총체로 가진 여러 방법의 다양성과 그를 위협하는 사건들, 즉 내가 알고 싶어하는 인간 전체가 다른 어떤 데서보다도 여기서 더 생기 있게 나타난다. 그런데 인물들의 전기를 쓰는 자들은 그 인물들이 겪는 사건보다도 그 목적에, 또 외부에서 닥쳐오는 것보다도 그들 내부에서 나오는 것에 더 흥미를 갖기 때문에 플루타르크는 특히 나의 마음에 드는 작가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사실 몽테뉴가 쓴 수상록은 플루타르코스가 쓴『윤리론집』을 본따서 만든 작품이지만, 그가 다루는 소재와 주제들이 플루타르코스의 작품에 비해 훨씬 더 다양하고 독특했기 때문에 플루타르코스의『윤리론집』과는 전혀 다른 놀라운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두 사람이 살던 세상이 대략 1,500년의 간극이 있을 만큼 서로 확연히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다루는 인물들과 작품들에는 겹치는 부분이 아주 많습니다. 


그들은 아주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인물과 작품들'에 너무나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쏟아낸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아주 좋아한 인물들은 고대 그리스 시인과 철학자들이었으며, 호메로스,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이 대표적이었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저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흥미로운 전기를 남긴 일만으로 그토록 유명한 인물이 된 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철학자였으며 문장가였습니다. 그의 책 속에는 숱한 인물들의 생애를 탁월하게 묘사하는 격조높은 문장들과 두고 두고 기억할 만한 유명한 일화들 말고도 아주 매혹적인 옛 시인들의 싯구들과 당시의 세태를 풍자하는 구수한 속담들과 작가 특유의 날카로운 안목과 비판이 가미된 역사 비평들이 차고 넘칩니다. 몽테뉴가 쓴 수상록이 그토록 흥미진진한 옛 이야기들을 가득 담아낼 수 있었던 것도 그 책의 저자가 플루타르코스를 그만큼 열심히 탐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속에는 우리가 이미 영화 등을 통해 어려서부터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인물들도 꽤나 등장합니다. 가령 테미스토클레스(영화『300』과 『제국의 부활』등에 나왔던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 알렉산드로스(영화『알렉산더』에서 훌륭하게 묘사된 것처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등등이 대표적이지요. 이런 인물들을 플루타르코스의 '온전한 전기'를 통해 아주 디테일하게 만나는 반가움은 영화와는 또다른 묘미가 책 속에 가득 숨어 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플루타르코스가 쓴 영웅들의 전기 속에 등장하는 너무나 유명한 문장들, 가령 "주사위는 던져졌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브루투스! 너마저..." 등을 '플루타르코스의 작품 전체'를 통해 '각색없이' 아주 디테일하고도 생생하게 마주치는 기쁨은 때로는 격한 감동마저 불러 일으킬 때도 있습니다.


셰익스피어 또한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읽고 그의 탁월한 문장력과 인간 심리 묘사 등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자신의 손길로『줄리어스 시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코리올라누스』등의 작품을 재창조했습니다. 베토벤의 작품「코리올란 서곡」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때문에 작곡되었다고 전해지지만, 그 영웅적인 인물의 전기가 플루타르코스의 작품 속에 담기지 않았더라면 셰익스피어나 베토벤의 작품은 결코 탄생하기 어려웠겠지요.


미국의 사상가였던 랄프 왈도 에머슨은 "전세계의 모든 도서관에 불이 날 경우 목숨을 걸고라도 꺼내고 싶은 책"으로『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꼽았던 적이 있었지요. 서양의 숱한 인물들이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을라치면,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이 지금까지도 출간되지 않았다는 핑계를 앞세워 이 유명한 고전을 독파하는 일을 계속 외면할 수도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책의 가치를 단번에 알려주는 랄프 왈도 에머슨의 명언을 인용하면서 이 작품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만일 전 세계의 도서관이 불타고 있다면 나는 뛰어 들어가 『셰익스피어 전집』과 『플라톤 전집』 그리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구해낼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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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링크 주소는 ☞ https://youtu.be/d6ZoU1IYl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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