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계령 어느 이름모를 계곡



2. 한계령의 맑은 물
 




3. 치어들이 사는 곳
 




4. 맑은 바람, 맑은 물
 




5.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곳
 




6. 달 아래 젖은 계곡 / 첩첩산중 




7.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곳




8. 천진난만한 코스모스




9. 길가의 코스모스




10.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11.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12. 신흥사의 가을
 




13. 저 멀리에선 케이블카만 오르락 내리락
 




14. 먼 발치에서 그저 바라만 보는 울산바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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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0 0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oren 2012-10-10 11:11   좋아요 0 | URL
***님께서 예전에도 한번 추천해 주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여태 써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꼭 한번 써봐야 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12-10-10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번에 시선 집중, 입니다. ㅋ

oren 2012-10-11 01:43   좋아요 0 | URL
(사진에는 물론 안 보이지만) '2번 사진'을 찍기 위해서 카메라를 들고 매우 위험한 '포인트'까지 다가갔다는 점도 아울러 생각해 주셔요. ㅎㅎ

카스피 2012-10-10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오 정말 아름답네요^^

oren 2012-10-11 01:4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카스피님~
 

 

멀리까지 가는 촉각

돌은 던져져야 하지만, 인간은 시선에 복종한다. 그러나 둘 다 충분한 원인에 의해, 따라서 동일한 필연성과 함께 움직인다.(71쪽)

단순한 감각이란 참으로 얼마나 빈약한 것인가! 가장 고귀한 감각기관에서조차 감각은 국지적이고 특수한 것으로서, 그 자신의 방식으로 약간 변화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는 언제나 주관적인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느낌은 객관적인 어떤 것도, 따라서 직관과 유사한 어떤 것도 함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종류의 감각은 유기체 자체 안에서의 사건이며, 그것으로 머무르기 때문이다.(76쪽)

시각은 접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실상 시각은 어떤 접근도 요구하지 않는다. 시각의 영역은 측정할 수 없으며, 별에까지 이른다. 또한 시각은 빛, 그림자, 색, 투명함의 가장 세밀한 차이를 감각하므로 세밀히 규정된 많은 자료를 오성에게 제공한다. 이 자료로부터 오성은 획득된 숙련성에 따라 물체의 형태, 크기, 거리, 성질을 구성하고 그것을 즉시 직관적으로 표현한다. 반면에 촉각은 비록 접촉에 속박되어 있지만, 확실하고 다양한 자료를 제공하므로 가장 근본적인 감관이다. 시각의 지각들은 결국 촉각에 관련된다. 사실상 보는 것은 불완전하지만 멀리까지 가는 촉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광선이 긴 촉각막대로 사용되는 것이다. 바로 그래서 시각은 많은 착각에 노출되어 있다.(79쪽)

 - 쇼펜하우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 <제21절 인과개념의 선천성> 中에서


 

눈의 탐욕

호기심이라는 용어는 그 특징상 보는 것에 제한되어 있지 않고 세계를 독특하게 감지하며 만나게 하는 경향을 표현한다. 우리는 이 현상을 원칙적으로 실존론적-존재론적인 의도를 가지고 해석하지, 좁게 인식함에 방향을 잡지 않는다. 인식이 이미 일찍부터 그리스 철학에서 "보려는 욕망"에서부터 개념파악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존재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글들을 모은 논문집의 첫번째 논문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 모든 인간은 본성상 보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의 존재에는 본질적으로 보는 것에 대한 염려가 있다.(234쪽)

"봄"의 기이한 우위를 누구보다도 아우구스티누스가 욕망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본디 눈에 딸린 것이 보는 것인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른 감관으로 무엇을 알려고 할 때에도 "보다"라는 낱말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 '들으라, 얼마나 번쩍이는지', '맡으라, 얼마나 빛나는지', '입을 대라, 얼마나 찬란한지', '만져라, 얼마나 눈부신지.' 그러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보라고 말하고 이 모든 것이 보인다고 말한다. 따라서 눈만이 감각할 수 있는 것을 '보라, 얼마나 빛나는지' 할 뿐 아니라, '소리를 들어보라', '냄새를 맡아보라', '맛을 보라', '얼마나 단단한지 만져보라' 하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체의 감각적 경험을 '눈의 탐욕'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나머지 감관들도, 비슷한 점에서 인식함이 문제가 될 때면 눈이 윗자리를 차지하는 봄의 기능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235쪽)

 -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제36절 호기심> 中에서



 * * *



1. Shooting Date/Time 2012-09-28 오후 6:36:26



f 9.0  / 0.6"sec / 59.0 mm / iso 200 / Canon EOS 5D Mark II / Lens EF24-70mm f/2.8L USM


2. Shooting Date/Time 2012-09-28 오후 6:43:52 





3. Shooting Date/Time 2012-09-28 오후 6:58:29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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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9-29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 너머에 있는 풍경 같아요. 제 눈의 감각이 빚은 탐욕일 수도 있겠군요.
사진 멋집니다.^^

oren 2012-09-29 19:31   좋아요 0 | URL
첫번째 사진은 '조리개'를 적당히 열고, (광량에 비해) 노출을 조금 짧게 했더니 '기대 너머' 다소 환상적인 풍경이 나왔답니다. 제가 가졌던 느낌과 비슷한 댓글이어서 더 반가워요.^^

사마천 2012-09-29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통찰이 담긴 명언과 사진이 잘 어울리네요.. 멋진 추석 보내시기를 ^^

oren 2012-09-29 19:32   좋아요 0 | URL
언제나 발길 내디뎌 댓글 남겨주시니 고맙습니다.
사마천님께서도 즐거운 추석 연휴 되시길 바랄께요~

페크pek0501 2012-10-04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기심이란 말을 보니까, 며칠 전에 타계한 에릭 홉스봄의 말이 생각나는군요
"호기심을 가져라. 호기심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자산이다"

제가 책을 사 보는 것도 호기심 때문이겠죠. 오렌 님의 사진도 결국 호기심의 결과물이 아닐까, 생각되어요.
해 질 무렵에 제일 가깝다고 보이는 2번의 사진이 가장 맘에 들어요.(다 좋지만요.) 제가 해 질 무렵을 좋아해서요.
감정이 부드러워지는 시간이라서 이때 사랑을 고백하면 다른 시간에 비해 성공률이 높다는 걸 어디서 읽은 것 같아요.
좋은 감상을 하고 갑니다.

oren 2012-10-09 15:34   좋아요 0 | URL
긴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드려요. 그리고 우물쭈물하다가 제 답글이 너무나 많이 늦어진 점 죄송스럽구요. 페크님의 감성어린 댓글을 다시 읽어보니 앞으로는 '해질 무렵'에 사진을 찍으면서 '지금은 감정이 부드러워지는 시간'임을 자주 떠올리고 싶습니다. ㅎㅎ
 


올핸 처음으로 한 해에 태풍이 네 번씩이나 우리나라를 휩쓸고 지나갔는데,
그나마 예상보다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지는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는 하나,
일부 지역에서는 회복하기 어려울만큼의 아픈 상처를 남긴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뿐......

태풍을 전후로 한가하게 '일몰 사진'이나 찍으러 다녔던 게 마음 한켠으로는 좀 캥기기도 하지만,
그래도 오묘한 저녁 구름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그냥 무심히 스쳐 지나기엔 너무 아쉽다는 생각도...

 

 

접힌 부분 펼치기 ▼

 

 

차원 높은 숭고함은 시련 속에서만 얻을 수 있다.

자연은 때때로 사나운 회오리바람을 내보낸다.
주위는 짙은 어둠에 뒤덮이고,
하늘에는 거친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다.
우리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는 바위는 거대하며
대지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보이지 않는다.
강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면서 거품을 일으키며 흐른다.
골짜기를 스며드는 바람은 귀신의 비명소리를 방불케 한다.

그렇게 우리는
손과 발이 묶인 채
자연과 싸워야만 한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도 - 
고통이나 고뇌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인식의 순수한 주체인 나는 모든 것을 분명하게 통찰할 수 있다.

객관적인 인식과 냉정한 통찰은 -
우리에게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다.
이러한 인식과 냉철한 사고가 없다면
우리는 수많은 세파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무모함과 거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논리적이며 이성적인 사고뿐이다.

 -
쇼펜하우어

 

펼친 부분 접기 ▲


 

 * * *


1. 이 때는 태풍이 다가오기 한참 전이라 별로인 듯
    Shooting Date/Time 2012-09-10 오후 6:39:54

 

 

 



2. 태풍 '산바'가 상륙하기 이틀 전, 평소와는 많이 다른 듯
    Shooting Date/Time 2012-09-15 오후 6:34:47

 

 




3.
Shooting Date/Time 2012-09-15 오후 6:44:45

 

 

 

 

 


4. Shooting Date/Time 2012-09-15 오후 6:52:35
 






5. Shooting Date/Time 2012-09-15 오후 6:53:46
 







6. 태풍이 지나간 다음날 저녁
   Shooting Date/Time 2012-09-18 오후 6:21:54

 

 




7. Shooting Date/Time 2012-09-18 오후 6:22:14
 

 

 

 




8. Shooting Date/Time 2012-09-18 오후 6:23:00
 

 

 

 




9. Shooting Date/Time 2012-09-18 오후 6:23:43
 

 

 

 

 



10. Shooting Date/Time 2012-09-18 오후 6:25:38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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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2-09-22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치아노의 그림 같은 느낌이 확 들어옵니다 ^^

oren 2012-09-25 16:27   좋아요 0 | URL
태풍이 지나간 뒤의 하늘과 구름이 정말 '붓질 자국'이 뚜렷한 그림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어느 유명한 화가의 그림과도 비슷한가 보군요. 제겐 타치아노라는 화가의 이름조차 생소하긴 합니다만.. ㅎㅎ

페크pek0501 2012-09-26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8일 때 제가 눌렀으니 9번째 추천은 제가 눌렀다는 것이죠.
그때 로그인 상태가 아니라서 댓글은 못 썼어요...ㅋㅋ
이 사진들은 평범한 차원을 넘어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렇게 좋은 감상을 하게 해 주시다니... 오렌 님은 복 받으실 거예요. 호홋^^
한 번만 보고 말기엔 아까운데, 달력으로 만들어 보심은 어떠하신지...

oren 2012-09-27 14:02   좋아요 0 | URL
9번째 추천과 댓글에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만, 제 사진에 대해 너무 과분하게 말씀해 주신 부분에 대해서는 뭐라고 답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ㅎㅎ
 
장엄함......
단순한 발단에서 지극히 아름답고 경탄스러운 장관들이 생겨났음을 밝힌 책

 

 


결국 동일종의 변종이라고 생각되는 것과 같은 종족의 유사성

현상은 매우 다양하지만, 물자체로서 의지는 하나다. 이것을 인식해야 비로소 자연의 모든 산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경탄할 만하고 지극히 명백한 유사성과, 동시에 주어지지는 않더라도 결국 동일종의 변종이라고 생각되는 것과 같은 종족의 유사성이 이해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위에서 말한 화성, 세계 모든 부분의 본질적인 연관, 방금 고찰한 그들 각 단계의 필연성, 이런 것들을 명백하게 깊이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모든 유기적인 자연의 산물이 갖는 부정할 수 없는 '합목적성'의 내적 본질과 의의를 올바르고 충분하게 통찰할 수 있게 된다. (679쪽)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8년), <제2권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1고찰> 中에서




 * * *

 

생명은 최초의 창조자에 의해 소수의 형태로, 또는 하나의 형태로 모든 능력과 함께 불어 넣어졌다고 보는 견해

온갖 종류의 식물이 자라고, 숲속에서는 새가 노래하고 곤충은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축축한 땅속을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번잡스러운 땅을 살펴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그러한 개개의 생물은 제각기 기묘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서로 매우 다르며 매우 복잡한 연쇄를 통해 서로 의지하고 있지만, 그런 생물이 모두 지금 우리 주위에서 수행되고 있는 여러 가지 법칙에 따라 만들어진 것임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그러한 법칙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말한다면, '생식'을 수반하는 '성장', 거의 생식 속에 포함된다고도 할 수 있는 '유전', 생활의 외적 조건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작용에 의한, 또 용불용에 의한 '변이성', 생존경쟁과 나아가서는 '자연선택'을 초래하고, 마침내 '형질의 분기'와 열등한 생물을 '멸종'시키는 높은 '증가율' 등이다. 그리하여 직접적으로 자연계의 싸움에서, 또 기아와 죽음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사항, 즉 고등동물의 산출이라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생명은 최초의 창조자에 의해 소수의 형태로, 또는 하나의 형태로 모든 능력과 함께 불어 넣어졌다고 보는 견해, 그리고 이 행성이 확고한 중력의 법칙에 의해 회전하는 동안 이렇게 단순한 발단에서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경탄스러운 무한의 형태가 태어났고, 지금도 태어나고 있다는 이 견해에서는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480쪽)

 - 다윈, 『종의 기원』(1859년), <제14장 요약과 결론> 中에서

 



 * * * * *

 

단 한번 만들어진 의지표명

사실상 모든 기관은 하나의 보편적인, 즉 단 한번 만들어진 의지표명, 즉 개별자가 아니라 종(種, Spezies)의 고정된 하나의 동경, 하나의 의지작용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모든 동물 형상은 상황에 의해 불러 일으켜진, 생명에의 의지의 한 동경이다. (90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자연에 질서와 무늬를 넣은 것은 지성이어야 한다는 자연신학적 사상은 완전히 잘못

우리는 우선 "세계는 인식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래서 또한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만들어진다"라고 말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세계의 '핵심'을 입증하려고 애쓴다. 자연에 질서와 무늬를 넣은 것은 지성이어야 한다는 자연신학적 사상은, 단순한 오성에 의해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진다 해도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은 우리에게 동물적 자연에서만 알려져 있으며, 그래서 전적으로 세계의 이차적이고 종속적인 원리로서, 즉 가장 늦은 근원의 산물로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성은 결코 세계 현존의 조건이었을 수 없으며 지성계(mundus intellegibilis)가 감성계(mundus sensibilis)에 선행할 수도 없다. 지성계는 감성계로부터만 재료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지성이 자연을 산출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지성을 산출했다." 그러나 물론 의지가 모든 것을 실현하고 그 각각에서 자신을 직접적으로 표명하는 것으로서, 이를 통해 그 모든 것을 자신의 현상이라고 지칭하면서 도처에서 근원적인 것으로서 나타난다. 바로 그로 인해 목적론적인 모든 사실은 그 사실들이 발견되는 존재 자체의 의지로부터 해명된다. (94쪽∼95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자연의 절약 법칙'은 어떤 여분의 기관도 허용하지 않는다.

'자연의 절약 법칙'은 어떤 여분의 기관도 허용하지 않는다. 바로 이 법칙은, 다른 한편으로 어떤 동물에게도 지금까지 자신의 생활방식이 요구하는 기관이 부족하지 않았고, 모든 기관은 가장 다양한 기관들조차 조화를 이루며 전적으로 특별히 규정된 생활방식을, 그 동물의 노획물이 있는 영역을, 추적을, 승리를, 그 노획물을 분쇄하고 소화시키는 것을 계산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두 합쳐져서, 동물이 자신의 생계를 위해 영위하려는 생활방식이 그 동물의 구조를 결정한 것이었으며 그 반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 법칙은, 그 상황이 바로, 생활방식과 그 외적 조건에 대한 인식이 구조에 선행하고 그에 맞게 모든 동물이 형체를 얻기 전에 자신의 도구를 선택하는 식으로 되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이는 마치 사냥꾼이 사냥 전에 자신의 모든 도구, 즉 산탄총, 산탄, 화약, 사냥 포대, 사냥칼, 의류를 그가 죽이려는 사냥감에 적합하게 고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엽총을 갖고 있으므로 야생 암퇘지를 쏘는 것이 아니라, 야생 암퇘지를 잡으러 나섰으므로 새총이 아니라 엽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러나, 그 증명을 보충하기 위해 다음의 사실이 부가된다. 즉 많은 동물에게서 그것들이 아직 성장하는 동안에는 의지의 지향이 그 지향에 필요한 신체 부분이 있기도 전에 표현되며, 따라서 그 신체 부분의 사용이 그 현존에 선행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린 숫염소, 숫양, 송아지는 아직 뿔을 갖기도 전에 맨머리로 들이받는다. 어린 수퇘지는 자신의 행위가 의도하는 결과에 상응할 어금니가 아직 나지 않았는데도 자신을 둘러싼 측면을 들이받는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침으로 무장한 곤충들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이 점을 표명했다. "그것들이 투지를 가지므로 무기를 갖는다"(『동물의 부분에 관하여(de partibus animalium)』, 제4권, 6장). 나아가 그는 (12장에서) 대체로 "자연은 그것의 활동을 위해 기관들을 만들지만 기관들로 인해 활동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 결과는, 모든 동물의 구조는 그 의지에 따른다는 것이다. (98쪽∼100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동물의 원형들이 다른 원형에서 불러일으켜졌으며

그러나 알을 부수고 나오는 어린 닭이 왜 동일한 수의 두개골 뼈를 가져야 하는지를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해부학적 요소가 한편으로는 생명에의 의지 일반의 통일성과 동일성에, 다른 한편으로는 동물의 원형들이 다른 원형에서 불러일으켜졌으며(『여록과 보유』, 제2권, 91절), 따라서 종족 전체의 기본 유형이 보존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해부학적 요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필연적 자연성질"로서 이해하는 그것이다. 그리고 그 요소 형태의 변화 가능성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각의 목적에 따라 "목적에 맞는 자연성질"이라고 부르며(아리스토텔레스, 『동물의 부분에 관하여』,제3권, 2장), 이로부터 뿔 달린 가축에게서 위 앞니의 재료가 뿔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이 설명은 매우 정확하다. 왜냐하면 낙타와 사향노루처럼 뿔 없는 반추동물만이 뿔 있는 것들에서는 없는 위 앞니를 갖기 때문이다.(116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유기체는 기적으로서 거기에 서 있으며 인식의 등잔 불빛에서 꾸며진 인간의 작품과 비교될 수 없다

여기 골격에서 설명된, 동물이 목적과 외적 생활 관계들에 대한  구조의 정확한 적합성뿐 아니라 동물의 내부 작용에 있는 경탄할 만한 합목적성의 조화는 다른 어떤 설명이나 전제를 통해서보다, 동물의 신체는 표상으로서 직관된, 따라서 뇌에 있는 공간, 시간, 인과성의 형식에서 직관된 자신의 의지 자체일 뿐이라는, 그래서 의지의 단순한 가시성, 객체성일 뿐이라는, 내가 이미 다른 곳에서 확인한 진리를 통해서 불분명할지라도 가장 잘 이해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가정 아래에서는 신체에 종속되었거나 신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최종 목적을 위해, 즉 그 동물의 생명을 위해 공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체 안에서는 어떤 불필요한 것, 과도한 것, 결여된 것, 목적에 모순되는 것, 불충분한 것, 그 방식이 불완전한 것도 발견될 수 없고, 필요한 모든 것은 그 필요한 만큼 정확히 그곳에 있어야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여기서는 장인, 작품, 재료가 하나이며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유기체는 극도로 완벽한 걸작이다. 여기서는 의지가 먼저 의도를 갖고 목적을 인식하고 그다음에 수단을 목적에 맞추고 물질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의욕이 직접적으로 목적이고 또한 직접적으로 성취다. 그래서 먼저 억제되어야 할 이질적인 어떤 수단도 요구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의욕, 행위, 성취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유기체는 기적으로서 거기에 서 있으며 인식의 등잔 불빛에서 꾸며진 인간의 작품과 비교될 수 없다. (117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칸트의 위대한 학설의 의미

의지 작용의, 즉 이 진정한 형이상학적 존재의 근원적 통일성과 불가분성은 이제 부분들의 병존과 기능들의 연속으로 분산되어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이것들은 상호 간의 수단과 목적으로서 서로 돕고 지지하기 위해, 서로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결합된 것으로서 표현된다. 이것을 그렇게 통찰하는 오성은 부분들의 질서와 기능들의 조합이 깊이 숙고된 것에 경탄한다. 오성은 (자신의 인식형식이 최초로 초래한) 다수성으로부터 되찾아진 근원적 통일성을 발견한 그 방식을 당연히 또한 이 동물 형태가 발생한 방식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는 합목적성이 오성에 의해 비로소 자연에 보내진다는 칸트의 위대한 학설의 의미다. 그에 따라 오성은 자신이 처음으로 만든 기적을 놀라 바라본다. ······ 자연신학적 논증은 오성 안에 있는 세계의 현존을 그 실재 현존에 선행하게 한다. 그리고 그 논증은, 세계가 합목적적이어야 한다면, 세계는 그것이 있기 전에 표상으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칸트의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가 표상이라면 그것은 합목적적인 것으로서 표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합목적적인 것은 최초로 우리의 지성에 나타난다. (121쪽∼122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모든 존재는 자신과 정확히 같은 다른 어떤 것에 생명의 불을 점화할 뿐

나의 학설로부터 당연히, 모든 존재가 자신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도출된다. 자연, 즉 결코 속일 수 없고 천재처럼 순진한 자연은 자신을 꾸밈없이 표명한다. 모든 존재는 자신과 정확히 같은 다른 어떤 것에 생명의 불을 점화할 뿐이며, 그다음에 그것의 재료는 밖에서, 형식과 운동은 자신으로부터 조달하여 우리 눈앞에서 자신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성장과 발전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경험적으로도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작품으로서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너무 간단하기 때문이다. (122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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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9-16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글 올리신 걸 이제야 알았답니다.
이거 인쇄해서 의자에 편안히 앉아 커피를 마시며 글을 깊게 음미해야겠군요.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도 그렇게 읽었답니다. 나중엔 책을 사고 말았지만요. ㅋㅋ

oren 2012-09-18 10:37   좋아요 0 | URL
pek님께서 반가운 댓글을 달아주셨는데 제 답글이 너무 늦었네요.
pek님께서도 쇼펜하우어를 무척 좋아하시죠?

제가 윗 글을 통해 많은 내용을 옮겨놓은 책『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를 pek님께서 혹시라도 아직 읽어보지 않으셨다면, 꼭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내용이 무척이나 흥미로우면서도 '자연과학과 철학'을 함께 다루는 멋진 책인 데다가, 책의 내용도 쉽고 부피도 가벼워 금방 읽을 수 있답니다.(제가 읽어본 쇼펜하우어 책 가운데 이 책을 가장 빠르게 읽었던 것 같아요. 이보다 더 얇은 책으로는『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라는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제목의 책도 있는데 그건 쇼펜하우어의 '박사학위 논문'이더군요. 내용은 물론(?) 어려워서 그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보다 더 어렵다고도 평가받는 책인데, 그의 철학의 중요한 밑바탕을 이루는 책이어서 '건너뛰기'할 수도 없는 책이긴 합니다.)

한가지만 덧붙여 말씀드리면,『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의 소개글 가운데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아마도 다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 * *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는 당시 자연과학의 연구 성과를 빠짐없이 기술하면서 이 성과를 철학과 연결시킨 최초의 책이라 할 수 있다. 포이어바흐는 칸트의 인간학도 프리스의 인간학도 이루지 못한 사유의 인간학적 전회가 이 책에서 일어났다고 평가한다.

페크pek0501 2012-09-20 16:36   좋아요 0 | URL
좋은 정보에 감사 드립니다.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은 읽어 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쇼펜하우어 인생론>을 가끔씩 반복해서 읽는 정도랍니다. 이 책이 그의 저작 중 세 번째로 읽는 책인데, 과거에 읽었던 두 권의 책 내용과 겹쳐지는 부분도 많답니다.
님이 말씀하신 책은 겹치지 않을 것 같으나 좀 벅차게 느껴지네요. ㅋㅋ
서점에 갈 기회가 될 때 찾아보겠습니다. 부담스러울 땐 직접 본 다음에 사는 게 최고...ㅋ
이 분야에 대해선 오렌 님이 계셔서 마음 든든합니다. ^^
 












 


 


"나"는 모든 개념들을 수반하는 단순한 의식

"나"는 모든 개념들을 수반하는 단순한 의식이다. 이 '나'로써 "사유의 초월론적 주체 외에 어떤 다른 것도 표상되고 있지 않다." "의식 자체는 표상이 아니고 ······ 표상 일반의 형식이다." 17) "나는 사유한다"는 "모든 경험에 붙어 있고 그것을 선행하는 통각의 형식"18)이다.

칸트는 "나"의 현상적 내용을 옳게도 "나는 사유한다"라는 표현으로 파악하거나 또는 "실천적 인격"이 "지성[예지]"에 연관되고 있음을 함께 고려해서 "나는 행위한다"로 파악한다. '나는 말한다'는 칸트의 의미로는 '나는 사유한다고 말한다'로 파악되어야 한다. 칸트는 '나'의 현상적 내용을 '사유하는 사물(res cogitans)'로서 파악하려고 한다. 그는 이때 이 '나'를 "논리적 주체"라고 명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나' 일반이 논리적 방법으로 획득된 순전한 개념에 불과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논리적 행동관계의, 즉 결합함의 주체이다. "나는 사유한다"는 나는 결합한다를 말한다. 모든 결합함은 "나는 결합한다"이다. 모든 한데 모음과 연관지음에는 언제나 이미 '나'가 밑바탕에 놓여 있다. 나는 곧 휘포케이메논(기체, 실체)이다. 그러므로 주체는 "의식 자체"이고 표상이 아니며 오히려 표상의 "형식"이다. 이것이 말하려는 것은 다음과 같다 : '나는 사유한다'는 표상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써 표상된 것과 같은 것이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그런 표상함 그 자체의 형식적 구조이다. 표상의 형식은 어떤 테두리나 또는 어떤 보편적인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에이도스(형상)로서 모든 표상된 것과 표상함을 그것이 무엇인 그것으로 만드는 바로 그것이다. '나'는, 표상의 형식으로 이해될 때, 나는 "논리적 주체"이다라는 것과 동일한 것을 말한다.(423쪽∼424쪽)

17) 『순수이성비판』제2판, S.404 참조
18) 같은 책, S.354.

 



'나'는 "나는 사유한다"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이다.

칸트의 분석에서 긍정적인 것은 두 가지이다 : 첫째, 그는 '나'를 존재적으로 실체로 환원시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았으며, 둘째, '나'를 "나는 사유한다"로서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나'를 주체로 파악하며 그로써 존재론적으로 부적합한 의미로 파악하고 있다. 왜냐하면 주체의 존재론적 개념은 자기로서의 '나'의 자기성을 성격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눈앞에 있는 것의 동일함과 지속성을 성격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존재론적으로 주체로 규정함은 '나'를 일종의 언제나 이미 눈앞에 있는 것으로 단초지음을 말하는 것이다. '나'의 존재는 '사유하는 사물'의 실재성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칸트가 진정한 현상적 단초를 "나는 사유한다"에서 존재론적으로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주체"로, 다시 말해서 실체적인 것으로 되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나는 사유한다"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이다. 그러나 칸트 자신은 언제나 거듭, '나'는 나의 표상과 연관된 채 남아 있고 표상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지 않는가?(425쪽∼426쪽)

 

 

 

칸트는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의 존재론적 "전제"가 '자기'의 근본규정성임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 표상들이 그에게는 '나'에 의해서 "수반되는" "경험적인 것", 즉 '내'가 거기에 "붙들려" 있는 현상들이다. 그러나 칸트는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붙들림"과 "수반함"의 존재양식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것은 근본에서 '내'가 나의 표상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함께 눈앞에 있음으로 이해되고 있다. 칸트는 분명히 '나'를 사유에서부터 끄집어내는 일은 피했다. 그렇지만 "나는 사유한다" 자체를 그 완전한 본질구성에 있어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로서 단초짓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의 존재론적 "전제"가 '자기'의 근본규정성임을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라는 단초도 존재론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여기에서 "어떤 것"이 규정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일종의 세계내부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 경우 거기에는 말없이 세계가 전제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만일 실제 '내'가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와 같은 어떤 것이 될 수 있어야 한다면, 바로 이 현상이 '나'의 존재구성틀을 함께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고 - 말함'은 각기 그때마다 "나는 하나의 세계 안에 있다"로서의 '나'인 그런 존재자를 의미한다. 칸트는 세계라는 현상을 보지 못했고, "표상"을 "나는 사유한다"의 선험적 내용과 떼어놓을 정도로 충분히 결론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로써 '나'가 다시 존재론적으로 전혀 규정되지 않은 방식으로 표상들을 수반하는 고립된 주체로 도로 갇혀버리고 만다.
(426쪽)

 

 

 

나는, 개념으로서 현존재[=있음]에 도달한 순수 개념 자체이다

정신의 실현과 더불어 정신이 부정의 부정으로서 규정된 시간 안으로 떨어져들어가는 것이 정신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정신 자체가 어떻게 이해되어 있어야 하는가? 정신의 본질은 개념이다. 헤겔은 개념을 사유된 것의 형식으로서의 종이라는 직관된 일반자로 이해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스스로를 사유하는 사유 자체의 형식으로 이해한다. 즉 자신을 ― 비-자아의 파악으로서 ― 개념파악하는 것이다. -자아의 파악이 일종의 구별을 나타내고 있는 한, 이러한 구별의 파악으로서의 순수 개념에는 구별을 구별함이 놓여 있다. 그러므로 헤겔은 정신의 본질을 형식적-서술적으로 부정의 부정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절대적 부정성"은 데카르트의 '나는 내가 사물을 사유한다는 것을 사유한다(cogito me cogitare rem)' ― 그는 의식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 를 논리적으로 형식화한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므로 개념은 자기를 개념파악하고 있는 이 자기의 개념파악되어 있음이다. 자기는 그러한 그것으로서 그가 있을 수 있는 바와 같이 본래적으로, 다시 말해서 자유롭게 있는 것이다, "나는, 개념으로서 현존재[=있음]에 도달한 순수 개념 자체이다."31)  "그러나 나는 첫째로 자기를 자기에게로 연관시키는 순수한 통일성인데, 직접적으로 그것[통일성]이 아니라, 내가 그 모든 규정성과 내용에서 추상되어 자기 자신과의 제한 없는 동일함의 자유 속으로 돌아감으로써 그런 것[통일성]인 것이다." 이렇듯이 자아는 "보편성"이지만 마찬가지로 직접적 ― "개별성"이다.
(562쪽∼563쪽)

31) Hegel, Wissenschaft der Logik(『대논리학』), 제2권(Lasson 편집, 1923), 제2부, S.220 참조.

 


 

정신의 전개의 목표는 "자신의 고유한 개념에 도달하는 것"

정신은 그의 "진보"의 매 발걸음에서 "자기 자신을 그의 목적을 진실로 막는 적대적인 장애로서 극복해야 한다."34)  정신의 전개의 목표는 "자신의 고유한 개념에 도달하는 것"35)이다. 전개 자체는 "자기 자신과의 끝이 없는 고달픈 투쟁"36)이다.

자신을 자신의 개념으로 데려오는 정신의 전개의 동요가 부정의 부정이기 때문에, 자기를 실현하면서 부정의 직접적인 부정으로서의 "시간 안으로" 떨어져들어오는 것이 정신에게 적합한 것으로 남아 있는다. 왜냐하면 "시간은, 거기에 있는, 텅 빈 직관으로서 의식에 표상된 개념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신은 필연적으로 시간 안에 나타나며, 그가 그의 순수 개념을 파악하지 못하는 동안은, 다시 말해서 시간을 말살해버리지 않는 동안은, 시간 안에 나타난다. 시간은 자기에 의해서 파악되지 않은 외적으로 직관된 순수 자기, 즉 단지 직관되기만 한 개념이다." 37)
(563쪽)

34) Hegel,『역사 속의 이성. 세계사 철학 입문』,G.Lasson 편집, 1917, S.132 참조.
35) 같은 곳.
36) 같은 곳.
37) Hegel,『정신 현상학』, 글로크너 판 전집 제Ⅱ권, S.60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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