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는 우리 의지를 부인하는 것이며, 우리를 아무 데로나 되는 대로 끌고 돌아다니는 미친 생각에 대한 반대 심정에 불과하다. 그것은 이 자에게 지난 날의 도덕과 순결성을 부정하게 한다.

 - 몽테뉴

 

 * * *

 

<조국 사태>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가능성은 이제 거의 사라진 듯하다. 검찰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조국이 죽든지 윤석열이 죽든지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이 게임이 끝나게 생겼다. 돌이켜 보면, 임명 강행이냐 철회냐를 두고 고민하던 시절이 그나마 좋았다. 사태는 언제나 옴싹달짝 못하는 구석으로 점점 내몰리게 마련이다.

 

조국의 가족 입장에서라면 지금의 시간을 어디까지로 되돌리고 싶을까? 법무장관 임명장을 받기 직전? 아니면 청문회가 끝난 직후? 아니면 동양대 총장과의 통화가 끝난 뒤? 그것도 아니라면? 어쩌면 민정수석에서 물러날 때쯤이 가장 알맞은 때로 보일지 모른다. 법무장관 자리만 탐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끔찍한 악몽이 눈앞의 현실로 나타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테니 말이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다 무슨 소용일까. 억센 운명에 휩쓸리면 인간의 판단력이 얼마만큼 나약하면서도 보잘 것 없는 것인지를 절감할 수밖에 없다. '그 때 멈췄더라면' 하는 매 순간들까지 아무리 되돌려 놓고 생각하더라도, 과연 그 때 정말로 멈출 수 있었을까 의심스러운 게 인간사의 진행 방식이니 말이다.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았더라면 어느 누가 불행의 심연 속으로 끌려들어갔겠는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내가 그토록 뜯어말렸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별 일 없으리라 믿고' 원로원에 나아갔다가 기어이 브루투스에게 칼을 맞아 죽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힘만을 믿고 모스크바까지 넘보다가 결국 수십 만 군대를 잃고 자신마저 황제에서 쫓겨났다. 나폴레옹과 전쟁터에서 마주쳤던 프로이센의 장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을 써서 '승자의 교만'을 경계했다. 승리의 한계 정점을 알고 적당할 때 멈출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 책의 가장 큰 핵심 교훈이다.

 

<조국 사태>가 바야흐로 정점을 향해 가파르게 치닫는 느낌이 든다. 현직 법무장관의 자택을 압수수색한 이후에 전개되는 소식들은 대략 어떤 것들일까. 내신이나 외신이나 아마도 이런 뉴스들로 장식되지 않을까.

 

한국 검찰, 신임 법무장관의 부인에 대해 구속영장 청구

한국 법원, 신임 법무장관의 부인에 대해 구속영장 발부, 구속 수감

한국 검찰, 역사상 최초로 현직 법무장관을 피의자로 소환 조사

한국 사회, 법무장관 퇴진 요구 및 대통령에 대한 비난 시위 갈수록 확산

한국 검찰, 조국 사태 관련 수사 결과 발표, 법무장관 (불)구속 기소

한국 정부, 법무장관 사임(해임) 발표,

한국 대통령, 대국민 사과문 발표

 

기껏 쓰고 보니 조국 장관 임명 직전에 썼던 관전평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결국 이번 사태는 이런 식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장관으로 임명한 사람이나 장관에 임명된 사람이나 '검찰 개혁'에만 너무 집착한 나머지 그보다 훨씬 중요한 '헌법 정신'을 무시한 탓이 크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고, 다수의 국민이 부적격이라고 반대하는 인물을 기어이 법무장관에 앉혔으니, 검찰로서도 끝까지 파헤칠 수밖에 없을 터이다. 주권자인 국민 대다수는 '진실'을 알고 싶어 하고, 그런 주권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헌법 정신'에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두 달 가까이 이어지는 <조국 대전>은 과연 언제쯤 마무리될까. 10월말? 11월말? 어느 누가 그걸 알겠는가?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예측할 수 있을 듯하다. 오래 끌면 끌수록 대통령과 집권여당에게 불리하리라는 사실이다. 주권자인 국민들은 <조국 대전>이 하루라도 빨리 마무리되길 원하기 때문이다.

 

 * * *

 

우연과 역(逆)의 우연

  

그 사람만이, 이탈리아와 이집트에서 만들어낸 영광과 위대(偉大)의 이상,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난 자기 찬미, 대담한 범죄, 그럴듯한 거짓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이 이제 일어나려고 하는 일을 정당화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에 필요한 인간이었으므로 거의 자기의 의지에 관계없이, 그의 우유부단과 무계획, 그가 하는 모든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는 권력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음모에 휘말려 그 음모가 성공을 거둔다.

 

우연이, 무수한 우연이 그에게 권력을 주고 모든 인간들이 상의라도 한 것처럼 그 권력의 강화에 협력한다. 우연이, 당시의 프랑스 총재들의 성격을 그에게 복종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

 

…… 그런데 갑자기 그때까지 계속된 일련의 승리에 의해서, 실로 시종일관해서 그를 예정된 목적지로 이끌어온 우연과 천재 대신에, 보로지노의 코감기에서, 혹한과 모스크바에 불을 붙인 하나의 불꽃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역(逆)의 우연이 나타난다. 그리고 천재 대신에 유례없는 어리석음과 비열함이 정체를 드러낸다.

 

침략자는 패주하여 뒤로 물러났고, 다시 패주해서 모든 우연이 이제는 그의 편을 들지 않고 끊임없이 그에게 등을 돌린다.

 

파리ㅡ최종 목적지에 도착한다. 나폴레옹 정부와 군대는 붕괴된다. 나폴레옹 자신은 이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의 모든 행위는 분명히 비참하고 혐오스럽다. 그런데 또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이라는 것이 생긴다. 동맹자들이 나폴레옹을 자기들의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미워한다. 힘과 기능을 빼앗기고 악행과 간지(奸智)가 폭로된 이상, 그는 10년 전이나 1년 후에 그랬던 것처럼 동맹자의 눈에 무법한 악당으로 비쳐야 했다.

 

(…)

 

그 막은 끝난다. 마지막 연기가 끝난다. 배우는 옷을 벗고 눈썹과 입술연지를 씻어내도록 명령된다ㅡ그는 이제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간이 고독하게 자기의 섬에서 스스로 자기에게 비참한 희극을 연출하고, 정당화가 이제 필요 없을 때에 자기 사업을 정당화하려고 쩨쩨한 책략을 꾸미며 거짓말을 하고, 보이지 않는 손이 이 사나이를 인도하고 있었을 때, 사람들이 힘이라고 착각했던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를 온 세계에 알리는 데에 수년의 세월이 흐른다.

 

모든 일을 꾸몄던 자가 연극이 끝났을 때 배우의 옷을 벗기고 우리들에게 보인다.

 

"보시오. 당신들이 믿었던 것을! 이거요! 이제 알겠죠? 이 사나이가 아니라 내가 당신들을 움직였다는 것을."

 

태양이나 우주 공간의 하나하나의 입자는 그 자체로서 완결되어 있지만, 너무나 거대해서 인간으로서는 알 수가 없는 전체적인 것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각 개인도 자기 자신 속에 자기의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목적은 인간에게는 알 수 없는 전체의 목적에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꽃에 머물고 있던 벌이 어린이를 쏘았다. 그래서 어린이는 벌을 무서워하고, 벌의 목적은 사람을 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꽃 속에서 꿀을 따고 있는 벌에 정신이 팔려, 벌의 목적은 꽃의 향기를 들이마시는 일이라고 말한다. 양봉가들은 벌이 꽃가루를 모아 벌집으로 가져오는 것을 보고 벌의 목적은 꿀을 모으는 일이라고 말한다. 다른 양봉가는 더 자세히 벌들의 생활을 연구하여, 벌은 새끼를 기르고 여왕벌을 양성하기 위해 꽃가루를 모으고 있으며 그 목적은 종(種)의 유지에 있다고 말한다. 식물학자는 암수가 서로 다른 식물의 꽃가루를 몸에 묻혀 암꽃으로 날아옴으로써 벌이 수분(受粉)을 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식물학자는 그것을 벌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은 식물의 확산을 관찰해서 벌이 그 확산을 돕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관찰자는 이것이 벌의 목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벌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지(人知)가 분명히 밝힐 수있는 제1, 제2, 제3의 어느 목적에 의해서도 모두 밝혀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목적을 해명하는 데에 있어 인지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궁극적 목적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 더욱더 분명해진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벌의 생활과 그 이외의 생활 현상과의 상관을 관찰하는 것뿐이다. 역사적 인물과 여러 국민의 목적도 마찬가지다. (1545-1551쪽) 

 

 -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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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09-25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관자리에 욕심내지 않았다면...386세대의 흔히착각하는 소명의식(자신은 절대선이란 생각)이 강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정도까지 몰리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ㅡ.ㅡ
 
사기 세트 - 전6권 - 개정판 사기 (민음사)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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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상이 틀리지 않았소? 사슴을 말이라 하니 말이오."

 - 사마천, 『사기 본기』, <진시황 본기> 중에서

 

 * * *

 

 - 사마천(BC 145∼86)

 

사마천이 지은 『사기』는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하다. 동서양의 온갖 역사를 기록한 방대한 책들 가운데 『사기』만큼 풍부하고도 뛰어난 기록을 찾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한무제 때 태사령이라는 직책으로 근무했던 공무원이었다. 태사령의 직무는 공식 문서를 보관하고 왕의 언행을 기록하면서 천상과 지상의 조짐과 징조를 관찰하고 해석하고 기록하는 게 주된 임무였다. 그는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훌륭한 역사가로 탈바꿈하여 '제왕학' 분야에 크게 이름을 남겼다는 점에서는 마키아벨리를 닮았고, 역사가이면서도 하늘의 뜻을 살폈다는 점에서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쓴 플루타르코스를 닮은 듯한 인상을 준다. 플루타르코스도 무려 30년 동안이나 델포이 신전을 지키는 신관으로 지내면서 아폴론의 신탁을 해석했기 때문이다.

 

사마천이 『사기』라는 방대한 역사책을 남기게 된 까닭은 몹시 흥미롭다. 우선, 진시황의 분서갱유(BC 213∼212)가 한 원인이 되었다. BC 221년에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중앙집권적인 통치 방식에 비판적인 학자들이 자주 인용하던 제자백가의 저서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460여 명의 학자들을 생매장했다. 다행스럽게도(?) 진나라는 그런 비극이 있고 나서 불과 7년도 지나지 않아 멸망(BC 206년)하고 만다. 진나라 말기에 진승과 오광이 난을 일으키고, 뒤이어 항우와 유방이 건곤일척의 승부를 펼치면서 진나라는 멸망하고 한고조 유방이 천하를 차지한다. 새롭게 출범한 한나라가 차츰 안정되자 분서갱유 사태로 인멸된 책자를 체계적으로 되살리는 복원 작업이 진행되면서, 태사령에게 완벽하고 체계적인 역사책을 집필하라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과거의 역사와 문헌들을 발굴하고 체계적으로 복원하고 기록하는 일은 사마천보다 앞서 태사령 직책을 맡았던 부친 사마담에게 주어졌다. 그가 생전에 미완성인 채로 남겨놓은 역사 기록 작업은 사마천에게 유업으로 남겨졌다. 사마담이 BC 110년에 사망하고, 사마천에 의해 마침내 BC 97년에 『사기』가 완성되었다.

 

사기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2,100년 전에 쓰여진 역사책이며, 궁형을 당한 사마천이 오로지 개인의 힘으로 이룩한 거대한 성과다. 당시만 하더라도 책은 종이에 쓰여진 게 아니라 죽간(가로3cm, 세로 30cm 정도의 대나무쪽)에 쓰여졌고, 소가죽 끈으로 일일이 엮어 매는 형태였는데, 전체 52만 6,500자에 이르는 분량이 얼마만큼 많은 대나무쪽에 쓰여졌을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득하다.

 

『사기』는 전체 130장으로 이루어진 웅편거작이다. 황제들의 역사를 기록한 『사기 본기』는 12장이다. 제후들의 역사를 기록한 『사기 세가』는 30장이다. 황제와 제후들을 보좌했던 영웅적인 인물들을 다룬 『사기 열전』은 70장이다. 각 시대의 연표를 기록한 『사기 표』가 10장이고, 제도와 문화를 다룬 『사기 서』가 8장이다. 인물 전기로만 따진다면 모두 112장인 셈인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단지 50명의 영웅들을 다루는 데 비해『사기』가 얼마만큼 더 풍부하고도 방대한 인물들을 다룬 저술인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 『사기 본기』, 『사기 세가』, 『사기 열전』은 '인물 중심'의 역사 기록이다. (네 권을 합하면 3,314쪽)

 

사기가 다루는 역사의 범위는 무려 2,600년에 이른다. 사마천이 이미 2,100년 전의 인물이니만큼 그가 기록한 역사가 얼마나 까마득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는지를 짐작할 만하다. 아주 먼 옛날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가 다스리던 시절 만큼이나 아득한 '신화의 세계'까지도 역사로 다루는 셈이다. 그런 까닭에 『사기 본기』의 초반부인 <오제 본기>, <하 본기>, <은 본기>, <주 본기>는 신화와 전설과 역사가 혼재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은 본기>에 실린 사마천의 기록들은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 덕분에 구체적으로 실증되었으며, 『사기』의 기록이 얼마만큼 사실을 바탕으로 정확하게 쓰여졌는지를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기』는 그 규모만으로도 엄청나게 놀랍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2,100년이 지난 오늘날에 읽어도 여전히 흥미롭다는 점이다. 사마천이 그만큼 뛰어난 문장가였고, 그의 역사관이 그만큼 현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서양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토스만큼이나 부지런했다. 그는 고문서의 기록이나 풍문 또는 전설로만 존재했던 희미한 과거를 찾아서 중국 전역의 숱한 도시들과 고문서 보관소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또한 자신이 살던 시대와 가까운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서 한나라 왕실의 도서관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과거의 역사를 최대한으로 꼼꼼하고 정확하게 기록하기 위해 애썼던 그의 노력은 『사기』의 전편에 고루 스며들어 있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에 '묘비명 수집가'로 맹활약했던 포조 브라치올리니를 떠올리게 만든다.(그는 1,000년 이상이나 먼지 속에 묻혀 있던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을 발굴해냈다.) 그가 직접 발로 뛰어 찾아낸 금석문의 글들이 『사기』의 곳곳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했던가를 알려주는 유명한 일화 하나가 있다. 20세기 초에 일부 중국 학자들이 사마천의 <은 본기>에 기록된 여러 왕들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논쟁이 벌어진 이후 고고학적 발굴팀이 사마천이 옳았음을 입증한 것이다. 사마천이 자신이 살았던 시대보다 1,000년이나 앞선 통치자들에 대하여 그토록 정확하게 기술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사기』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확한 기록뿐만 아니라 위대한 역사가인 동시에 탁월한 문장가였던 사마천의 혜안이 담긴 책으로도 유명하다. 사마천은 사기를 쓰기 이전부터 육경六經을 비롯한 제자백가의 책들을 두루 섭렵하고 있었다. 10살 때 아버지를 따라 수도인 장안에 와서 고문을 배웠기 때문이다. 20세 때부터 황제를 따라 순행하면서 중국 전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고적을 탐방하고 자료를 수집한 경험이 『사기』 편찬의 귀중한 바탕이 되었다. 태사령으로 일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3년이 지나자 사마천도 태사령이 되어 무제를 시종하는 한편, 부친의 유업을 계승하기 위해 국가의 장서가 있는 석실금궤를 드나들었다. 그곳에서 수많은 자료를 정리하고 수집하면서 4년의 준비기간을 거친 뒤 기원전 104년에 정식으로 사기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집필에 열중한지 5년이 지났을 때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흉노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어떤 장군을 옹호하다가 황제로부터 극도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그 일로 인해 1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끝내 거세형에 처해졌다. 황제가 신하들의 불충에 대해서는 몹시도 포악하게 대응하는 폭군임을 뻔히 알면서도 큰 잘못이 없는 장군을 위해 충언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옳은 일이라면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직언을 서슴치 않는 사마천의 강직하고도 대담한 성격이 엿보이는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리라고 예상했지만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업이었던 『사기』 편찬의 대업을 위해 환관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사마천의 『사기』가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흥미로운 이유는 여럿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치 않는 인간 심리에 대한 탁월한 통찰 때문이다. 사마천이 다룬 역사는 크게 나눠서 온갖 군웅들이 할거하던 춘추전국시대, 진시황에 의해 중국이 최초로 통일되는 시대,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가 세워지는 시기, 한나라의 건국부터 한무제의 통치기까지다. 이 시기에 활약했던 인물들이 얼마만큼 치열한 삶을 살았고, 그들의 삶이 얼마만큼 놀라웠던지는 『사기』로부터 비롯된 고사성어가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많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기 본기』에서 비롯된 고사성어는 <진시황 본기>에 등장하는 분서갱유(焚書坑儒)와 지록위마(指鹿爲馬)를 빼놓을 수 없다. <항우 본기>에 나오는 사면초가(四面楚歌)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한 대목을 떠올릴 만큼 강렬하다. <오제본기>에 나오는 고복격양(鼓腹擊壤)은 백성들이 태평세월을 누리는 모습을 묘사한 사자성어다.

 

『사기 세가』에서 비롯된 고사성어 중에는 <월왕 구천 세가>에 나오는 와신상담(臥薪嘗膽)과 토사구팽(兎死狗烹)이 유명하다. <초 세가>에 나오는 득국오난(得國五難)은 '나라를 통치하는 데 따르는 다섯가지 어려움'을 일컫는 말이다.  <공자 세가>에 나오는 상가지구(喪家之狗)는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고국을 떠나 이웃 나라들을 떠돌던 무렵의 공자 스스로의 초라한 모습을 빗댄 말이다. 같은 편에 나오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은 책이 닳고 닳을 때까지 여러 번 읽었던 공자의 독서습관에서 비롯된 말이다. <진 세가>에 나오는 할고봉군(割股奉君)은 충신 개자추가 허벅지 살을 베어 임금을 섬긴 일화에서 유래된 말이다. 한식()은 개자추를 기리기 위한 행사에서 비롯된 관습이다.

 

"진나라 문공은 옛날에 현명한 군주로서 나라 밖으로 망명하여 19년이나 지내면서 지극히 곤궁하였으니 군주의 자리에 오르고서 공신들에게 상을 내리면서 오히려 개자추를 잊어버리기도 하였으니 하물며 교만한 군주이겠는가. …… 따라서 군주가 된 자가 그의 신하를 부리는 것은 정녕 쉽지 않구나!"(338쪽)

 

 - 사마천, 『사기 세가』, <진 세가> 중에서

 

고사성어의 보고는 무엇보다도 『사기 열전』이 으뜸이다. <관 · 안 열전>에 나오는 관포지교(管鮑之交), <계포 · 난포 열전>에 나오는 계포일락(季布一諾), <맹상군 열전>에 나오는 계명구도(鷄鳴狗盜), <소진 열전>에 나오는 현량자고(股), <염파 · 인상여 열전>에 나오는 교주고슬(膠柱鼓瑟),  완벽귀조(趙), <평원군 · 우경 열전>에 나오는 낭중지추(囊中之錐)와 모수자천(毛遂自薦), <회음후 열전>에 나오는 배수지진(背水之陣)과 천려일실(千慮一失),  <평진후 · 주보 열전>에 나오는 토붕와해(土崩瓦解), <유림 열전>에 나오는 곡학아세(曲學阿世) 등이 유명하다.

 

그러나 지금껏 소개한 고사성어들은 『사기』라는 거대한 숲에 담겨 있는 무수한 이야기에서 들춰낸 극히 일부일 뿐이다. 일설에 따르면, 『사기』에서 유래된 사자성어만 하더라도 무려 600여 개에 이른다고 하니 그것만으로도 두툼한 책을 따로 엮을 정도이다. 『사기』에는 사자성어만큼이나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주역급 인물들만 하더라도 대략 200명에 이르며, 전체 등장인물은 대략 4,000명에 이른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는 중국과 같은 문화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인물들이 꽤나 많다. 황제급 인물로는 진시황, 항우, 유방, 여태후가 대표적이다. 제후급 인물로는 강태공, 월왕 구천, 진섭(진승), 소하, 장량, 진평 등을 꼽을 만하다. 제후들과 동급으로 볼 수 있는 성인급 인물로는 공자, 맹자, 노자, 묵자, 손자, 한비자가 자주 등장한다. <열전>에 실린 인물들은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만큼 많다. 굳이 고르자면 백이, 숙제, 관중, 포숙, 오자서, 소진, 장의, 사공자(맹상군, 평원군, 신릉군, 춘신군), 여불위, 굴원, 이사, 회음후 한신, 편작 등을 꼽을 수 있다.

 

『사기』는 출간되자 말자 베스트 셀러가 되지는 않았다. 사마천이 생존할 당시의 황제였던 한무제와 부친인 경제를 신랄하게 비판한 탓도 있었다. 그러나 당대(唐代)부터 관리 임용 과목으로 채택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당송 팔대가로부터 문장 학습의 기본서로 인정받았다. 송대의 구양수를 비롯한 숱한 문장가들이 『사기』 애호가가 되었으며, 중국 근대화의 공헌자인 양계초는 사마천을 '역사계의 조물주'라고 치켜세웠다. 위대한 문학가인 루쉰은 '역사가의 빼어난 노래요, 운율이 없는 『이소』'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오랜 세월동안 공을 들여 『사기』 전체를 완역한 김원중 교수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사기 열전』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해 다양한 해답을 제시한다. 사마천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겪는 고충을 거의 모든 인물이 똑같이 겪었음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말해 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대에 맞선 자, 시대를 거스른 자, 그리고 시대를 비껴간 자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 역시 적지 않다.

 

이러한 열전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사마천은 인간 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대립과 갈등, 배반과 충정, 이익과 손실, 물질과 정신, 도덕과 본능, 탐욕과 베풂 등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인간을 제시하고, 그런 갈등 자체가 인간이 사는 모습임을 강조한다. 『사기 열전』을 생명력 넘치는 산 역사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 본위의 역사를 읽게 만든 작가의 각고의 노력 덕분이다. 사마천은 역사의 뒤안길로 살아져 간 인물들을 현재에 살아 있는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24쪽)

 

 - 사마천, 『사기 열전』, <작품 해제> 중에서

 

인류는 사마천으로부터 큰 신세를 졌다. 그가 남긴 『사기』 덕분에 '역사 서술의 훌륭한 모델'을 얻었기 때문이다.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인 24사는 모두 사마천을 모범으로 삼았고, 각 왕조는 바로 앞 왕조의 역사를 기록하는 걸 신성한 의무로 삼았다. 중국이 기원전 2세기부터 20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공식 역사서를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사마천 덕분이다. 우리나라와 일본 역시 사마천으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중국과 같은 문화권에 속한 우리나라의 독자들은 서양 사람들에 비해 『사기』를 읽는 일이 훨씬 더 쉬운 형편에 놓여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더군다나 고등학교 때 고문(古文)과 한문(漢文)을 배운 독자들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공자와 맹자, 노자와 장자, 손자와 한비자, 관중과 포숙, 오왕 합려와 월왕 구천, 진시황과 여불위, 항우와 유방 등등을 한꺼번에, 그것도 위대한 역사가가 남긴 명문장으로 만날 수 있다는 건 몹시 특별한 경험이다.

 

사마천은 70장으로 이루어진 『사기 열전』의 맨 마지막에 <자서전>을 한 편 끼워 넣었다. 『사기』 전체의 머리말에 해당하는 글이기도 한데, 작품의 구성 체제뿐 아니라 자신의 집안 내력과 학문적 배경 등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어 많은 도움이 된다. 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아무래도 <집필 동기> 부분이다. 발분저서()라는 말이 여기서 태어났는데, 마치 그의 유언을 듣는 기분이 든다. 그 대목을 인용하며 서평을 맺는다.

 

그로부터 칠 년 뒤에 태사공은 이릉의 화를 입고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한숨을 쉬고 탄식하며 말했다.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망가져 쓸모없게 되었구나."

 

그는 물러나 깊이 생각한 끝에 이렇게 말했다.

 

"대체로 『시경』과 『서경』의 뜻이 은미하고 말이 간략한 것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펼쳐 보이려 했기 때문이다. 옛날 서백西伯(주나라 문왕)은 유리羑里에 갇혀 있으므로 『주역』을 풀이했고,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춘추』를 지었으며, 굴원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이소』를 지었고, 좌구명左丘明은 눈이 멀어 『국어』를 남겼다. 손자는 다리를 잘림으로써 『병법』을 논했고, 여불위는 촉나라로 좌천되어 세상에 『여람呂覧(여씨춘추)』을 전했으며, 한비는 진秦나라에 가서 감옥에 갇힌 중에 『세난說難』과 『고분孤憤』 두 편을 남겼다. 『시』300편은 대체로 현인과 성인이 발분하여 지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울분이 맺혀 있는데 그것을 발산시킬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한 것이다."(882쪽) 

 

 - 사마천, 『사기 열전』, <태사공 자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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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는 아주 방대한 역사책이다. 서양 언어로는 아직까지도 완전하게 번역된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으니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하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여러 해 전부터 훌륭한 번역본이 완역되어 나와 있으니 그 얼마나 다행인가. 현재 민음사에서 나온 개정판을 보면 전6권에 무려 5,400쪽을 자랑하는데, 이는 저 유명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가 민음사 판본으로 전6권에 4,150쪽이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동서문화사 판본으로 전3권에 2,019쪽인 사정과 비교해 보더라도 단연 압도적이다.

 

이 방대한 역사책은 총 130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기 본기』가 12장, 『사기 표』가 10장, 『사기 서』가 8장, 『사기 세가』가 30장, 가장 유명한 『사기 열전』이 70장으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는 게 특색이다. 이 가운데 본기는 주로 황제들의 전기를 다루고, 세가는 제후들의 전기를 다루고, 열전은 이름난 정치가나 장군들 혹은 선비들이나 책략가들을 다룬다. 표는 각 시대의 연표를 기록하고, 서는 제도와 문화(의례, 음악, 책력)를 다룬다. 인물 전기로만 따진다면 모두 112장인 셈인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단지 50명의 영웅들을 다루는 데 비해『사기』가 얼마만큼 더 풍부하고도 방대한 인물들을 다룬 저술인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12장의 전기 가운데서도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아무래도 중국 최고의 스타(?) 황제였던 '진시황'에 얽힌 이야기들을 담은 부분들이다. 『사기 본기』에 실린 <진시황 본기>와 『사기 열전』에 실린 <이사 열전>, <몽염 열전>, <백기·왕전 열전>이 진시황 시대의 역사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진시황에 얽힌 이야기가 『사기』 중에서도 유독 흥미로운 까닭은 간단하다. 진시황이 그토록 강력한 카리스마로 중국 최초의 대제국을 건설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의 경우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그토록 짧은 기간에 허망하게 붕괴되고 만 과정 속에서 <분서갱유>와 <지록위마>라는 전설적인 이야기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야말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담긴 숱한 영웅들 중에서도 가장 우뚝한 인물들인 카이사르, 브루투스, 안토니우스에 얽힌 이야기인 <브루투스, 너 마저!>에 필적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분서갱유>는 익히 알려져 있듯이 진시황이 대제국을 통일한 이후 선비들의 '정부 비판'을 강제로 틀어막기 위해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훌륭한 책들을 모조리 불태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정부에 비판적인 학자들을 한꺼번에 생매장한 '언론 탄압'의 상징적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에 얽힌 이야기를 일부나마 인용하면 이렇다.

 

"내가 전에 천하의 책에서 쓸모없는 것을 거두어 모두 없애 버렸다. 문학과 방술을 하는 선비를 무더기로 부른 것은 태평성대를 일으키고자 함이요, 방사(신선의 술법을 닦는 도사)를 부른 것은 배워 익혀 기이한 약을 구하게 하려 함이다. 지금 들으니 방사 한중이 떠나서는 보고하지 않고, 서불 등은 온갖 방도를 썼는데도 끝내 불사약을 얻지 못하고 한갓 간사한 이익만 챙긴다는 보고가 날마다 들려온다. 내가 노생 등을 존중하여 그들에게 많은 것을 내렸으나 이제는 나를 비방함으로써 나의 부덕함을 더하고 있다. 함양에 있는 유생들에 대해 내가 사람을 시켜 조사해서 물어보도록 하니 어떤 자는 요사스러운 말로써 백성들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에 어사를 보내 유생들을 심문했다. 유생들이 서로를 고발하니 법령으로 금지한 것을 범한 자가 460여 명이었다. 그들 모두를 함양에 생매장하고 천하에 알려 후세에 경고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을 징발하여 변경으로 유배시켰다. 진시황의 맏아들 부소가 간언하여 말했다.

 

"천하가 막 평정되었으나 먼 곳의 백성들은 아직 따르지 않고 있으며, 유생들은 모두 암송하여 공자를 본받고 있는데, 지금 황상께서 법을 엄격하게 하여 그들을 옭아매니, 신은 천하가 안정되지 않을까 봐 두렵습니다. 황상께서 이 점을 살펴 주십시오."

 

그러자 진시황은 노여워하며 부소를 북쪽으로 상군에 파견하여 몽염을 감시하게 했다.(242∼243쪽)

 

 - 사마천, 『사기 본기』, <진시황 본기> 중에서

 

 

이 짧은 이야기 하나만 보더라도 진나라가 왠지 모르게 일찍 붕괴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방금 살펴봤듯이 진시황의 맏아들인 부소는 올곧은 인물이었는데도 황제에게 직언을 했다는 이유 만으로 미움을 받아 변방으로 쫒겨나고 만다. 이런 부자간의 갈등이 결국 진나라가 예상보다 훨씬 일찍 멸망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진시황이 순행을 나섰다가 갑자기 병으로 죽었을 때 결국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부소에게 후일을 맡긴다'는 진시황의 친필 유서가 환관 조고의 농간으로 조작되고, 무능한 막내아들 호해가 '2세 황제'로 등극하기 때문이다. 그에 얽힌 이야기를 잠시 들여다 보자.

 

 

평원진에 도착했는데 병이 났다. …… 황제의 병이 더욱 깊어지자 옥새를 찍은 조서를 써서 공자 부소에게 보내 일렀다.

 

장례에 참석하고 함양에 안장하라.

 

그러고는 편지를 밀봉하여 중거부령 조고의 관부에 놓아 둔 채 사자에게 주지 않앗다.

 

7월 병인일에 시황제가 사구의 평대에서 세상을 떠났다. 승상 이사는 황제가 외지에서 죽었기 때문에 여러 공자와 천하에 변란이 생길 것을 두려워하여 비밀로 하고 발상하지 않았다. 관을 온량거溫凉車 속에 안치하고 예전에 총애를 받던 환관이 참승이 되어 도착하는 곳마다 황제에게 음식을 올렸으며, 모든 신하가 전과 다름없이 나랏일을 아뢰었다. 환관이 온량거 안에 있다가 보고된 일을 결재했다. 공자 호해와 조고 및 총애를 받던 환관 대여섯 명만이 황제가 죽은 것을 알았다. …… 조고는 곧 공자 호해, 승상 이사 등과 은밀히 모의하여 진시황이 공자 부소에게 내린 밀봉 서찰을 뜯어 승상 이사가 사구에서 유조를 받았다고 거짓으로 바꾼 후, 공자 호해를 태자를 삼았다. 그러고는 다시 서찰을 만들어 공자 부소와 몽염에게 주고 그들의 죄를 낱낱이 지적하면서 자살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 일은 전부 「이사 열전」에 기재되어 있다.(247∼248쪽)

 

 - 사마천, 『사기 본기』, <진시황 본기> 중에서

 

열두 살에 황제에 오른 호해는 환관 조고를 낭중령으로 삼아 나랏일을 좌지우지하게 했다. 조고는 온갖 감언이설로 이세 황제에 아첨하면서 진시황 시절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던 숱한 대신들과 관리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체포, 감금하고 도륙했다. 이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지고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진승과 오광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세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고 진나라를 통째로 주무르기 시작한 조고는 진나라 통일의 일등공신인 이사마저 제거한 끝에 기어코 황제 자리를 넘보기에 이른다. 이때 등장하는 이야기가 저 유명한 <지록위마>이다. 조고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이처럼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화는 일찌기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 부분은 『사기 열전』의 <이사 열전>에도 상세히 나와 있지만, 『사기 본기』의 <진시황 본기>에서도 거듭 다뤄진다.

 

8월 기해일에 조고가 모반을 일으키기로 하고는 신하들이 따르지 않을까 걱정되어 먼저 시험해 보려고 사슴을 끌고 와서 이세황제에게 바치며 말했다.

 

"말입니다."

 

이세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승상이 틀리지 않았소? 사슴을 말이라 하니 말이오."

 

그러고는 좌우 사람들에게 물으니 어떤 이는 침묵하고, 어떤 이는 말이라고 대답해 조고를 따르며 아부했다. 어떤 이들은 사슴이라고 말했는데,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자들을 몰래 법을 빌려 중상모략하였다. 이후로 신하들은 모두 조고를 두려워했다.(258쪽)

 

 - 사마천, 『사기 본기』, <진시황 본기> 중에서

 

이세 황제는 제위에 오른지 불과 3년 만에 온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그 책임을 몽땅 조고에게 돌리려 한다. 낌새를 알아챈 조고는 미리 일을 꾸며 이세 황제를 제거하는 초강수를 둔다. 그러고는 이세황제 형의 아들인 자영子嬰을 후임으로 내세운다. 진나라의 3대이자 마지막 황제에 오른 자영은 이내 '망국의 주범'인 간신 조고를 붙잡아 죽이고 삼족을 처형하는 결단을 내리지만 이미 때가 너무 늦었다. 진나라 말기의 어지러운 틈을 타 거병한 유방에 의해 진나라의 수도가 함락되고 자영은 끝내 항우에게 살해된다. 황제 자리에 오른지 불과 세 달도 지나지 않을 때였다.

 

진나라 말기의 극심한 혼란상은 토붕와해(土崩瓦解)라는 유명한 말을 탄생시켰다.(자세한 내용은 『사기 열전』의 <평진후·주보 열전>에 실려 있다.) 사마천은 <진시황 본기>를 마무리하면서 특별히 가생이라는 탁월한 문장가의 기나긴 글을 전부 인용해 놓았다. 나라가 어떻게 해서 어지러워지고 망국에 이르는가를 '울림 가득한 문장'으로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극히 일부만 옮기면 다음과 같다.

 

 태사공(사마천)은 말한다.

 

"…… 주나라가 쇠퇴할 무렵 진나라가 일어나 서쪽 변경 지역에 도읍을 정했다. 목공 이래로 차츰 제후들을 잠식하여 마침내 시황始皇이 되었다. 시황제는 스스로 공적이 오제를 뛰어넘고 영토도 삼왕보다 넓다고 여겨서 그들과 나란해지는 것을 수치스러워했다. 훌륭하다, 가생賈生이 추앙한 말이여! 그는 말한다.

 

 

진나라는 산동 제후들의 30여 군郡을 손아귀에 넣었고 나루터와 관문을 수리하고 험준한 요새에 의거해 무장한 병사를 정비하여 그곳을 수비했다. 그러나 진섭이 수졸守卒 중 어지럽게 흩어졌던 무리 수백 명을 데리고 팔을 휘두르며 큰소리를 쳤다. 활과 창 등 무기를 쓰지 않고 호미와 서까래와 몽둥이를 가지고 민가를 보는 대로 집어삼키며 천하를 거리낌없이 마구 돌아다녔다. ……

 

진왕은 탐욕스럽고 비루한 마음을 품고는 이기적인 지모를 행하고 공신들을 믿지 않고 선비들과 백성들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왕도를 없애고 사사로운 권위를 세워 문서를 금하고 형법을 가혹하게 했으며, 기만과 폭력을 앞세우고 인의를 뒤로하여 포학함을 천하 통치의 시작으로 삼았다. ……

 

이제 진나라 이세가 자리에 오르자 천하에서 목을 빼고 그 정치를 바라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추운 자에게는 해진 짧은 옷이라도 이롭고 굶주린 사람에게는 술지게미라도 달콤하다. 따라서 천하 백성들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새로운 군주에게는 오히려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고달픈 백성들에게는 인仁을 행하기가 쉽다는 말이다. 만약 이세가 평범한 임금의 품행을 품고 충신과 현인을 임용하고 나서 신하와 임금이 한마음이 되어 세상의 우환을 걱정하고, 소복을 입고서 선제의 잘못을 바로잡으며 봉토를 가르고 백성들을 나누어 공신의 후예들에게 봉해 주고, 제후국을 세우고 군주를 옹립하여 천하를 예로써 다스리고, 감옥을 비우며 사형을 면제해 주고 죄인의 처와 딸을 노비로 삼는 추잡한 죄를 없애 그들을 각기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창고와 곳간을 열어서 재물과 화폐를 나누어 외롭고 곤궁한 선비들을 구제해 주고, 세금을 가볍게 하고 일을 줄여 백성들의 급한 일을 도와주고, 법령을 간략히 하고 형벌을 줄여 그들의 후손을 유지하게 하며, 천하의 백성들에게 모두 스스로 새롭도록 하여 태도를 고치고 행동을 닦으며 각자 몸을 삼가게 하여 모든 사람의 바람을 만족시키고 위엄 있는 인덕으로 천하와 함께했다면 천하가 모여들었을 것이다. 설령 천하 안이 모두 기뻐하며 각자 자기 처지를 편안히 여기고 즐기며, 오직 변란이 생길 것인가만을 걱정하고 교활한 백성들이 있더라도 군주를 배반할 마음이 없다면, 궤도에서 벗어난 신하도 그 지략을 꾸밀 수 없을 것이며 사납고 어지러운 간악함도 멈출 것이다. 이세는 이 방법을 행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무도한 것을 더했으며 종묘와 백성들을 훼손하고 다시 아방궁을 짓기 시작했으며, 형벌을 번잡하게 하여 사형을 엄하게 했고, 관리들의 다스림에 각박함이 심하고 상과 벌은 합당하지 않았으며, 세금의 징수에 한도가 없고 천하에 일이 많아 관리들이 관리를 할 수 없었으며, 백성들이 곤궁한데도 임금은 구휼하지 않았다. 그러자 간사함과 거짓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위아래 사람이 서로 속이고 죄를 입은 자가 많아져 거리에서 형을 받아 죽는 사람을 보게 되어, 천하가 그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군후와 공경 이하로부터 시민들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스스로 위태롭다는 마음을 품었는데 몸은 고달프고 고통스러운 현실에 처해 모두가 그 위치를 불안해했으므로 쉽게 동요되었다. 진섭이 탕왕과 무왕의 현명함을 갖추지 못하고 공후의 존귀함에 의지하지 않았는데도 대택에서 팔을 걷어붙이자 천하가 호응한 것은 백성들이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 선왕들은 시작과 끝의 변화를 보고서 존망의 기미를 알아 이로써 백성들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삼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데 힘쓸 뿐이었다. 천하에 비록 바른 길에 거스른 행동을 하는 신하가 있어도 분명 호응하는 도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안정되어 있는 백성들은 함께 의를 행할 만하나 위험에 처한 백성들은 함께 그릇됨을 행하기가 쉽다." 라고 한 것은 이런 점을 말한 것이다. 귀하여 천자가 되었고 부유하여 천하를 소유했으나 몸은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기울어진 것을 바로잡으려는 방법이 잘못되어서이다. 이것이 이세의 잘못인 것이다.

 

(272∼273쪽)

 

  - 사마천, 『사기 본기』, <진시황 본기> 중에서 

 

 

 * * *

 

사마천의 『사기』에는 사마천이 직접 쓴 부분 말고도 후세 사람들이 가필한 부분도 더러 담겨 있다. <진시황 본기>에는 후한 시대의 유명한 역사가인 반고班固의 글이 덧붙어 있어 흥미롭다. 사마천과 가의를 동시에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중략)

 

이윽고 이사와 풍거질을 죽이고 조고를 임용했다. 가슴 아프다, 이 말이여. 사람의 머리로 짐승처럼 우는 꼴이로구나. 위험하지 않았다면 죄악으로 인해 정벌되지 않았을 것이고, 죄악이 심하지 않았다면 허망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제의 자리에 이르러서도 머무를 수 없었으며, 잔인하고 포악하여 때를 재촉했으니, 비록 지형이 유리한 나라를 차지했다 해도 오히려 국토조차 보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영은 순서를 뛰어넘어 자리를 이을 수 있었고, 옥관을 쓰고 화불華紱(아름다운 인수)을 차고, 황색 지붕의 수레를 타며, 관리들을 모두 이끌고 칠묘를 찾아뵈었다. 하찮은 사람이 적당하지 않은 지위에 올라 직무를 잘 처리하지 못해 당황하지 않음이 없었고 눈앞의 안일함만을 날마나 꾀하니, 자영은 홀로 오랫동안 생각하고 근심을 없애고 아버지와 아들이 득실을 따져 가까이로는 집안 내에서 마침내 교활한 신하를 죽임으로써 선왕을 위해 역적을 정벌했다. 조고가 죽은 다음, 빈객과 친지들이 서로의 노고를 채 위로하지도 못하고, 음식이 미처 목구멍을 내려가지도 못했으며, 술이 아직 입술을 적시지도 않았는데 초나라 병사들이 이미 관중을 도륙하고 진인眞人(유방)이 패상에 날아드니, 흰 수레에 인수를 매고 황제의 부절과 옥새를 받들어 새로운 천자에게 넘겨주었다. 이는 정백이 두 손에 모정과 난도를 들자, 초나라 장왕이 물러나 버린 것과 같다. 강물은 터지면 다시 막을 수 없고, 물고기는 썩으면 다시 온전하게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가의와 사마천은 말한 것이다. "만약 자영에게 평범한 군주의 재능이 있었고 겨우 중간 정도의 재능을 지닌 보좌가 있었다면, 산동이 비록 어지러웠더라도 진나라의 국토는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을 것이며, 종묘 제사가 끊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나라가 쇠퇴한 지 오래되자 천하는 흙이 무너지고 기왓장이 부서지듯 했으니, 비록 주공 단의 재주가 있었더라도 다시는 그 간교함을 펼칠 곳이 없을 터이니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 버린 자영을 [가의와 사마천이] 책망한 것은 잘못된 일이구나! 속세에 전하기로는 진시황은 죄악을 일으키고 호해는 죄악이 극에 이르렀다 하니 일리가 있다. 그런데 다시 자영을 책망하며 진나라의 국토를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른바 시세의 변화를 통찰하지 못한 것이다. …… 나는 「진시황 본기」를 읽다가 자영이 조고를 거열형에 처하는 데에 이르면, 일찍이 그 결단을 탄복하고 그 의지를 애석해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자영은 삶과 죽음의 도의를 갖추었다.

 

 (279∼280쪽)

 

  - 사마천, 『사기 본기』, <진시황 본기>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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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봉황새야, 봉황새야!

너의 덕은 어찌 이다지도 쇠락했느냐!

지난날의 일은 돌이킬 수 없지만,

앞으로의 일은 따라갈 수 있구나!

그만두자, 그만두자!

지금 정치를 하는 자들은 위험할 것이다!

 

 - 사마천, 『사기 세가』, <공자 세가> 중에서

 

 

 * * *

 

 

자로가 말했다.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우대하여 정치를 맡기시면, 선생님께서는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아야겠다."

 

자로가 말했다.

 

"그런 일이 [언제] 있었습니까? 선생님의 [생각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무엇을 바로잡는다는 말씀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거칠구나, 유由여!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나지 않고, 예악이 일어나지 않으면 형벌이 들어맞지 않고, 형벌이 들어맞지 않으면 백성들은 손발을 둘 데가 없다. 군자는 무슨 일을 하든지 반드시 명분이 들어맞아야 하고, 말을 했으면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 군자는 자신의 말에 대하여 거리끼는 바가 없어야 한다."

 

 - 사마천, 『사기 세가』, <공자 세가> 중에서

 

(나의 생각)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도 어려울 정도로 명분이 없는 '법무장관 임명 강행' 때문에 초래되는 엄청난 후과(後果)들을 이토록 명쾌하게 드러내는 글도 찾기 어려울 듯하다.

 

 

 * * *

 

 

노나라 애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자, 대답하여 말했다.

 

"정치란 좋은 신하를 고르는 데에 있습니다."

 

계강자가 정치에 대해 묻자 말했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여 정직하지 않은 사람에게 놓으면, 정직하지 않은 사람도 정직해집니다."

 

 - 사마천, 『사기 세가』, <공자 세가> 중에서

 

(나의 생각)

정치란 참으로 쉽고도 어렵구나... 빤히 알고도 정작 실행에 옮기기는 그토록 어려우니...

 

 

 * * *

 

 

저 선생은 말한다.

 

"남편은 용과 같이 변한다. 전하여 말하기를 '뱀이 변하여 용이 되는데, 그 무늬는 변하지 않는다. 가家가 변하여 국國이 되었지만 그 성씨는 변하지 않는다.'라고 했으니 남편이 부귀할 당시에는 온갖 죄악이 없어지고 가려져 영화만이 빛나지만, 빈천할 때에는 어찌 그리 잘 연루되는가?"

 

 - 사마천, 『사기 세가』, <외척 세가> 중에서

 

 

 * * *

 

 

태사공(사마천을 말함)은 말한다.

 

"나라가 흥성하려면 상서로운 징조가 꼭 있게 되고, 군자는 임용되고 소인은 물러나게 된다. 나라가 멸망하려면 어진 사람은 숨게 되고 어지럽히는 신하들이 귀하게 된다. …… 어진 사람이여! 어진 사람이여! 자질이 내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를 등용할 수 있겠는가? 지나치구나! '나라의 안정과 위험은 명령을 내리는 데에 있고, 나라의 존재와 망함은 임용하는 신하에 달려 있다.'라는 말은 진실로 옳은 것이구나."(741쪽)

 

 - 사마천, 『사기 세가』, <초원왕 세가>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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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9-15 0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명절 잘 보내셨어요? 늘 건강하시고 편안한 주말 되십시오 전 인제 한숨 돌리네요^^

oren 2019-09-15 16:41   좋아요 1 | URL
오랜만입니다, 카알벨루치 님..
길어 보이던 연휴도 벌써 끝나가네요.. 얼마 남지 않았지만,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모든 좋은 사람들이 동감하고 모든 좋은 사람들이 말하네.
좋은 사람들은 다 우리(we)이고 나머지는 다 그들(they)이라고.

- 러디어드 키플링, 『가족의 친구(A frend of the Family)』

 

 * * *

 

두 달째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는 '조국 사태'를 보면서 깨닫게 되는 게 정말 많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보여지는 뉴스 하나를 두고도 사람들마다 어쩌면 그토록 다양한 생각들을 품을 수 있는지, 그런 관점의 차이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울 지경이다.

 

완전히 동일한 하나의 사건을 두고도 서로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견해를 표출하는 현상들을 보노라면 사람들마다 태어날 때부터 깊이 각인된 '고유의 인쇄 회로'를 갖춘 게 틀림없어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어떤 자극이나 정보가 입력되면 그 회로를 따라 생각들을 굴린 끝에 각자에게 가장 흡족한 결과물을 자동으로 생성해 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어쩌면 이건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사실일지도 모른다.

 

『빈 서판』이라는 책을 쓴 스티븐 핑커에 따르면 우리들은 태어날 때부터 '백지 상태'로 태어나는 게 결코 아니며, 태어나서 자라는 매 순간마다 미리 정해진 '본성'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게끔 만들어진 존재이다. 진화심리학이나 인지과학 등이 발달한 덕분에 오늘날 '마음의 작동 원리'를 이만큼이나마 과학적으로 밝혀 냈지만,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실로 다양한 견해들이 뒤죽박죽으로 혼재해 왔었다.

 

널리 알려져 있다 시피 '흰 종이'와도 같은 인간의 마음이 오로지 '경험으로부터' 채워진다고 주장한 철학자는 영국의 존 로크였다. 그가 『인간 오성론』에서 주장한 개념이 바로 타블라 라사(빈 서판)였다. 그의 경험론은 교회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자유 민주주의의 토대를 확립하는 데 유용한 정치 철학으로 활용된다.

 

로크의 경험론은 교육과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기초로도 작용했다. 토머스 홉스가 흔히 자연 상태의 인간은 서로를 증오하고 파괴하는 비합리적 충동에 사로잡힌 야만인이라고 주장했던 것에 영향을 받아, 루소는 소위 '고상한 야만인'이라는 개념을 내세웠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욕심이 없고 평화로우며, 탐욕, 근심, 폭력과 같은 병폐는 문명의 산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로크와 루소, 베이컨과 데카르트 등을 거치면서 경험적 합리주의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던 시간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어느새 찰스 다윈이 등장하여 인류의 개념 자체를 완전히 뒤바꿔버렸기 때문이다. 인류는 알고 보면 결국 긴꼬리원숭이에서 진화한 포유류의 일종일 뿐이었고, 인간의 마음 속에 내재된 온갖 다양한 성격들도 결국은 '무리 본능'과 같은 생물학적 본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이 밝혀졌다.

 

무리 본능이 우리들의 생각과 행동을 얼마만큼 강력하게 제어하는지는 따로 강조할 필요가 없다. 우리 스스로 그 끈질긴 본능을 매번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라는 느낌은 언제나 편안하다. 정반대로, '그들'이라는 느낌은 언제나 불편하다. 여기에 무슨 부연 설명이 필요할까.

 

그런데 '우리와 그들'로 편가르기를 할 수 있는 카테고리가 너무나 많다는 게 문제다. 인간 부류는 무한히 쪼개질 수 있다. 한 가지 부류만 놓고 봐도 그 속에서 또다른 하위 범주를 찾을 수 있고 그 하위범주들 속에서 또다시 새로운 하위 범주들을 찾을 수 있다. 인종, 국가, 종교, 언어가 모두 똑같더라도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또다시 세분하는가. 출신지역, 출신학교, 직업, 거주지, 경제력뿐만 아니라 눈으로 살필 수조차 없는 이념까지도 범주로 작용한다.

 

어떤 인간 부류는 인간이 아닌 것까지도 포함한다. 예컨대 당신의 가족이라는 부류에는 머나먼 타지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가깝게 느껴지는 개나 고양이가 포함될 수도 있다.

 

 - 데이비드 베레비,『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우리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한 마리가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굳이 나무랄 필요는 없다. 인간이란 어쩔 수 없이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단지 '부적절한' 부족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서로를 죽이기까지 한다. 9.11 사태 하나만 보더라도 그렇다. 한때의 미국인들은 전세계 곳곳에 사는 아무런 죄 없는 선량한 아랍인들 대부분을 테러리스트로 의심할 정도였다.

 

그런데 자세히 알고 보면 '우리'라는 개념이 단지 마음이 만드는 산물일 뿐이며, '우리'와 '그들'을 구분짓는 선이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옮겨질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늘 낯선 사람들과 만나고 일하는 사회에서 아는 사이가 된다는 것은 공유하는 인간 부류의 상징을 다루는 일이다. 같은 출신 대학, 같은 영화 취향, 당신이 사는 곳에 내가 살았다는 사실 등 어떤 공통점이라도 좋다. 당신을 배제하는 어떤 선 긋기(“서부 영화를 좋아하세요? 나는 못 보겠던데”)도 고난을 예견하는 작은 먹구름이다. ‘우리’를 느끼는 인간의 능력에는 대가가 따른다. 우리에 속한다는 감정적 안정은 쉽게 얻어지는 만큼 쉽게 잃을 수도 있다. 그것이 단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음을 여행자라면 알 것이다. 그럴 때 당신의 감정은 경종을 울린다. ‘우리’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들’에 속하기 때문이다.

 

 - 데이비드 베레비,『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개인이 어느 한 부류로 규정되지 않고 처한 상황과 마음에 따라 수시로 쉽게 합치고 갈라서기를 반복하는 것은 이상할 게 조금도 없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의 광팬들이 경기장에서 격렬하게 고함을 지르고 상대편을 욕하다가도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우연히 상대팀의 유니폼을 입은 '대학 동기'와 마주친다면 금방이라도 웃고 떠들며 학창 시절의 옛 이야기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게 사람 사는 방식이다.

 

'우리'와 '그들'이라는 마음 속의 분류 기준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우리'라는 느낌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상태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그들'을 만들어 내고 구분짓기 위해 애쓴다. 인간의 마음 속에 면면히 흐르는 '무리 본능'이 그걸 자극하기 때문이다. 아주 먼 옛날의 원시 부족들에겐 우리 마을을 벗어난 다른 마을 종족들은 오로지 '적'일 뿐이었다.

 

먹는 것과 못 먹는 것

······ 사람들의 도덕적 범위에는 모든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친족, 마을, 부족의 구성원들만 포함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이 모순을 이해할 수 있다. 그 범위 안에 포함된 사람들은 공감의 대상이고, 범위 밖에 있는 사람들은 돌이나 강이나 음식물처럼 취급된다. 이전의 한 책에서 나는 아마존에 사는 와리 부족의 언어에는 먹는 것과 못 먹는 것을 구별하는 일련의 명사 분류사가 있는데, 그 부족의 구성원이 아닌 사람은 누구나 먹는 것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언급한 적이 있다.

 - 스티븐 핑커, 『빈 서판』 

 

 

우리와 그들이라는 이분법은 이토록 다양한 범주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어떨 땐 나의 일상과는 별로 상관없는 일에서조차 '그들'이 '우리'를 흥분시킨다. 이번 <조국 사태>가 그랬다. 어떤 사람들은 조국 후보자에게 쏟아진 수많은 의혹들에 대해 맹렬하게 분노했지만, 또다른 사람들은 후보자 가족과 그 주변인물들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언론과 검찰의 수사에 대해 도리어 거센 비난을 쏟아붓는다. 우리와 그들을 구분짓는 '선'이 이토록 극명하게 어긋나는 경우도 보기 드물다.

 

이번 사태에서 '진영 논리'를 가장 크게 자극한 인물들은 뜻밖에도 <조국 편> 사람들이었다. 논란의 최선봉에 선 사람은 유시민이었다. 꽤나 오랫동안 침묵을 굳게 지키던 그는 조국 후보자에 대한 의혹이 급속도로 확산될 무렵 마침내 거의 맨 처음으로 총대를 매고 나섰다. 조국에 대해 의혹만 갖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 '다 헛소리'라고 일축하고 나선 것이다. 경희대의 모 교수는 ‘조국을 먹잇감으로 넘기겠다는 자들은 그가 누구든지 이제 적’이라 주장했고, 안도현 시인은 ‘조국을 물어뜯으려고 덤비는 승냥이들이 더 안쓰럽다’며 '무리 본능'을 한껏 자극했다.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쏟아져 나온 유명 인사들의 '조국 옹호론'을 여기에 일일이 덧붙이고 싶지는 않다. 이쯤되면 충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낼 만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어떤 인물들이 끝끝내 침묵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지, 집권여당에 속한 어떤 의원이 '오버하지 말라'는 식으로 아군을 향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가 얼마만큼 호되게 곤욕을 치렀는지도 자세히 언급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번 사태의 주인공을 옹호하는 논리가 거의 대부분 '진영 논리'에만 기댄 억지와 궤변으로 점철된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사태가 이쯤에 이르자 공격하는 쪽에서도 '진영 논리'로 맞불을 놓기 시작했다. 홍준표가 대표적이다. 거칠기 짝이 없는 그의 말 속에 늘상 빠지지 않는 핵심 단어가 하나 있다면 그게 바로 '그들' 혹은 '니들'이었다.

 

총성 없는 전쟁이나 다름없는 '정치적 투쟁'에서 '진영 논리'가 배제될 수는 없다. '우리'와 '그들'이라는 선명한 이분법만큼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상대편을 공격하기 쉬운 수단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영 논리에만 기댄 억지스러운 주장들을 마냥 옹호하고 권장할 수는 없다. 진영 논리가 횡행할 수록 진실은 호도되고, 감정적인 대립과 거친 충돌만 자극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번 조국 사태가 극한으로 치달은 과정도 아주(!) 넓게 보자면 결국 '우리 사회'를 보다 정의롭고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로 만들자는 데 있다고 믿고 싶다. 그런 암묵적 합의가 전제된 긍정적 갈등이라면 얼마든지 더 세게 충돌하고 부딪쳐도 좋다. 그러나 과연 이토록 너그러운 시선으로 이번 사태를 바라볼 여지가 얼마쯤이나 있을까. 오로지 '니들은 그르고 우리가 옳다'는 식의 원시적인 진영 논리만 앞세운 야만스러운 갈등만으로 가득찼던 게 사실이니 말이다.

 

진영 논리에 기댄 무비판적인 억지와 궤변은 지금까지 쏟아져 나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이번 사태의 본질은 결국 <정의, 평등, 공정>의 가치가 한순간에 무너졌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그 어떤 정부보다도 절박하게 <정의, 평등, 공정>의 가치를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내세워온 대통령과 핵심 실세의 합작으로 이뤄졌다는 게 진짜 문제다. 촛불로 탄생된 정권이 촛불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이 사태를 '진영 논리'를 배제한 채 순수하고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2016년 겨울에 광화문을 그토록 뜨겁게 달궜던 '촛불'은 단지 부당한 권력자를 향한 분노의 표출 수단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주권자인 국민을 위해서 올바르게 행사되어야 마땅할 권력이 권력자의 입맛대로 행사되는 데 대한 분노를 넘어서서, 그 촛불은 우리 모두에게 좀 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갈등과 분열을 넘어 다 함께 '정의로운 나라'에서 더 멋지게 어울려 살 수 있다는 공감을 느꼈다. 그토록 연약한 촛불이 한겨울의 추위마저 녹여낼 듯한 뜨거운 온기로 느껴진 까닭은 무엇인가. 결국 우리 모두 함께 한다는 느낌이 가져다주는 '삶의 온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삶의 온기

 

이처럼 내용 없는 '우리라는 느낌(we-feeling)'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것이 바람직한 상태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상태에 있기를 원한다. 수단의 소설가 타옙 살리(Tayeb Salih)는 7년 만에 고향 마을로 돌아와 그러한 감정에 사로잡힌 한 남자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마치 내 안에서 한 덩이의 얼음이 녹아내리는 기분, 마치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 있는 꽁꽁 언 물체가 된 기분이었다." 자신이 되찾은 것은 "부족이 주는 삶의 온기"라고 남자는 말한다.

 

삶의 온기, 우리라는 느낌은 음식이나 거리의 소음, 어린 시절 창 밖으로 보이던 불빛들이 주는 친숙함과 쉽게 결부된다. 그러나 냄새와 광경은 느낌의 '표현'일 뿐,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우리라는 느낌은 사람들에 관한 것이지 사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라는 느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당신이 아는 것이 적절하며, 따라서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고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하며 당신의 행동이 그들에게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우리 부류 속에 있다는 느낌이며, 버지니아 울프의 묘사에 따르면 "남의 이목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고, 함께한다는 편안한 느낌이며, 친밀함과 온전함과 신속한 상호협력을 지향하는 공통 가치를 느끼는 것"이다.

 

 - 데이비드 베레비,『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조국 사태>는 아직까지도 그 결말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어디론가 계속 굴러가고 있다. 우리가 조국 사태를 통해서 느끼는 불편한 감정들은 비단 '진영 논리'에만 갇힌 채 온갖 억지와 궤변으로 무조건적인 지지와 옹호만을 부르짖는 사람들 때문에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대다수의 국민들은 도리어 조국 후보자의 '언행 불일치'와 '공감 능력 부재'에 분노했을 지도 모른다.

 

그는 청문회때 자신의 제자였던 여당 국회의원으로부터 핀잔에 가까운 질책까지 받았다. "후보자의 언행 불일치에 대한 젊은이들의 정당한 분노에 동문서답식 답변을 해서 그들의 상처를 깊게 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할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은 것이다. 그 제자는 과거 조 후보자의 SNS 발언을 지적하며 "우리 편을 대할 때와 다른 편을 대할 때 기준이 다르면 편 가르기다. 법무부 장관으로 큰 흠"이라고도 말했고, "후보자의 단점은 공감 능력이 없다는 점"이라면서 인격 모독에 가까운 지적까지도 불사했다. 그만큼 품성 자체에 문제가 많다고 본 것이다. 그가 자신을 향해 철벽을 두른 듯한 모습을 바라 보노라면 그는 마치 '규칙을 익히지 못한 아이'처럼 비쳐진다. 

 

 

규칙을 익히지 못한 아이

 

자기 자신을 조절하는 일도 그러한 예다. 어른과 어린아이의 감정의 차이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어른들은 진지하고 비극적인 경험에 울지만 어린아이들은 놀이터를 떠나야 할 때도 운다. 어른들은 우스운 것을 보고 웃지만 어린아이들은 멍청한 행동이나 난처한 상황을 보고도 키득거린다. 아이들도 태어난 첫날부터 슬픔과 기쁨을 느낄 줄은 알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에 '대해' 슬퍼하고 기뻐해야 하는지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은 쓰러져 통곡하는 행동이 국가적 참사에는 어울려도 초콜릿 바를 갖지 못했을 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알지 못한다. 그런 것은 배워야 한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들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기분에 맞추는 법을 배운다. 이는 '우리 부류'가 따르는 규칙을 배운다는 의미다. 그런 규칙을 익히지 못한 아이는 어떤 감정이 적절한지 알려주는 지침 없이 강렬한 감정들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자기 자신이라는 작은 감옥에 갇힌 채 살아갈 것이다.(258쪽)

 

 - 데이비드 베레비,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중에서

 

 

나는 이번 조국 사태에서 역사에 남을 만한 명장면이 하나 있다면 그게 바로 조국 제자의 가차없는 스승 비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제자야말로 '진영 논리'를 훌쩍 뛰어넘어 주권자인 국민이 진정으로 바라마지 않는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에게 허물이 있다면 사제지간의 인연보다 국가와 국민을 더 중시한 것뿐이다. 그토록 바람직스러운 의원을 비판한 사람들이 내세울 수 있는 근거가 '진영 논리' 혹은 '무리 본능' 말고 또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와 '그들'을 구분짓는 예민한 본능을 몸 속에 지니고 타고났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그들'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이타적인 도덕감정 또한 오래도록 진화시켜 온 것도 사실이다. 인간에게 <정의, 평등, 공정>과 같은 도덕감정이 발달하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무리 본능에 의지한 채 살벌하게 상대방을 공격하고 물어뜯기 바쁠 지 모를 테니 말이다.

 

다윈주의는 일찌감치 인간 부류의 수수께끼를 다루었다. 자연선택의 원리에 따르면, 환경에 더 잘 적응한 유기체만이 자손을 갖고 그들의 특성을 전파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다윈에게는 생물들이 때때로 남을 위해 자신의 적응도를 감소시킨다는 사실도 분명해 보였다. 꿀벌이 적에게 침을 쏘면, 벌집을 지키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침을 쏜 자신은 죽는다. 다가오는 고양이를 조심하라고 경계음을 내는 새는 다른 새들에게 도움이 되지만 정작 자신은 고양이의 주의를 끌게 된다. 남을 돕는 방식으로 자신의 적응도를 감소시키는 이런 행동은 생물학적 의미에서 이타주의다. 실제로 도덕적 코드들의 거의 대부분이 다윈의 표현대로, 적응도를 극대화하려는 충동의 억제와 관련된다. 도덕적 행동은 공정성, 친절, 타인의 권리를 위해 개인의 욕구를 억제하는 것이다. 다윈은 자연선택의 법칙이 개체뿐 아니라 집단 차원에서도 작용한다고 추론했다.

 

 - 데이비드 베레비,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중에서

 

 

새로운 법무장관 후보자가 지명된 이래로 지금까지 진행된 격렬한 찬반 논쟁이 상당 부분 <진영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법무장관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불의와 불평등과 불공정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워야 마땅하며, 그런 자리에 합당한 인물일수록 '진영 논리'에서도 가장 멀치감치 떨어져 있어야 마땅할 터인데, 그런 논란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이 바로 법무장관이니 이런 기묘한 아이러니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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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la 2019-09-12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정의, 공정, 평등이 실현되는 사회를 바랍니다~^^

oren 2019-09-14 15:09   좋아요 0 | URL
아무쪼록 이번 사태가 보다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사줘 2019-10-04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당한 논리네요

oren 2019-10-04 20:31   좋아요 0 | URL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