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투스, 너 마저?"


(카이사르 암살)

 

이 짧은 대사만큼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말도 드물지 싶습니다. 이 말은 사회생활 경험이 일천한 동네 꼬맹이들 사이에서도 패러디로 널리 쓰일 정도이지요. 누구나 한 번만 들으면 금세 '상황 파악'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친구들끼리 장난을 치다가도 "아무개, 너 마저?" 라고 외칠 만한 상황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맞닥뜨렸던가요.

 

고대 로마의 역사에 대해서 무지했던 저도 저 짧은 대사만큼은 부지불식간에 듣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언제였는지는 결코 알 수 없지만. 그 이후로 오랫동안 제가 품었던 생각은 이랬습니다. '브루투스는 '참 나쁜 사람'이었구나, 카이사르가 자신을 그토록 믿고 아껴주었는데 어떻게 그 끔찍한 '암살'에 가담하게 되었을까?' 그런 오해와 의문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마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거듭 읽고 나서였지 싶습니다. 몽테뉴가 '저 위대한 브루투스'라고 말하며 칭송을 거듭할 때까지도 저는 브루투스의 위대성을 도무지 실감할 수 없었으니까요.


(플루타르코스의 작품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가 남긴 『영웅전』에는 '카이사르 암살 장면'이 두 번씩이나 거듭해서 나오는데, 한 번은 「카이사르 편」에서, 다른 한 번은「브루투스 편」에서였지요. 그런데 플루타르코스가 쓴 책에는 "브루투스, 너 마저?"라는 표현은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없습니다. 두 사람씩 짝지어 대비시킨 23쌍 46명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영웅들 가운데 「카이사르 편」을 거듭 뒤져 봐도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말고는 더 이상 인상적인 대사는 없습니다. 카이사르 암살 장면에서 플루타르코스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는 카이사르의 목소리는 기껏해야 "비겁한 놈! 카스카, 이게 무슨 짓인가?"가 전부입니다. 「브루투스 편」에서도 마찬가지이지요. 일부러 살짝 비틀어 번역한 "카스카, 이 못된 놈! 이게 무슨 짓이냐?"라는 문장을 발견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저 유명한 대사는 말 그대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이었습니다!

 

        카스카

손이여 말해 다오!  (그들이 시저를 찌른다.)

 

           시저

브루투스, 너 마저? ㅡ 그럼 시저, 죽으리라. (죽는다.)

 

           신나

자유다! 해방이다! 독재는 무너졌다!

뛰어가서 공포하라, 길거리에 외쳐라.

 

 - 『줄리어스 시저』, <3막 1장> 중에서

 

 

이 '역사적인 장면'에서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했다는 그 유명한 말에 대해 좀 더 정확한 내막을 알기 위해서는 천병희 선생님이 열 명의 영웅전만 발췌 번역한 한 권짜리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펼칠 필요가 있습니다.

 

브루투스도 카이사르의 아랫배에 일격을 가했다. 일설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저항하며 그들의 가격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틀면서 도와달라고 소리쳤으나 브루투스가 단검을 빼어든 것을 보자 머리에 토가를 뒤집어쓰고는 …… 폼페이우스의 입상이 서 있던 대좌에 쓰러졌다고 한다. (550쪽)

 

주석)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했다는 "내 아들아, 너 마저?"(kai su, teknon?)라는 유명한 그리스 말은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전』중 「율리우스 카이사르 전」82장에 기록되어 있다. "브루투스여, 너 마저?" 라는 말은 셰익스피어의 사극 『줄리어스 시저』에 나온다.

 

 - 천병희 번역,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중에서

 

이 짧은 주석이야말로 로마 역사상 가장 유명한 국가 원수 시해 사건을 둘러싼 논란의 정답을 제시하는 셈인데, 이 주석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포인트가 하나 더 있습니다. 카이사르가 죽으며 브루투스에게 했다는 말 "내 아들아, 너 마저?"라는 말은 결코 카이사르가 죽을 때 정신줄을 놓으며 내뱉은 '헛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간의 사정을 플루타르코스의 설명을 통해 좀 더 알아 보지요.


(마르쿠스 브루투스)

 

카이사르도 브루투스를 무척 아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부하들에게, 전투를 할 때에도 브루투스는 죽이지 말라는 특별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만일 그가 항복하면 자기에게 데려오고, 끝까지 저항하더라도 절대로 다치게 하지 말고 도망가도록 놓아두라고 했다. 카이사르가 이렇게까지 한 것은, 브루투스 어머니인 세르빌리아 때문이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젊은 시절에 세르빌리아를 알게 되어 한때 서로 깊이 사랑했던 사이였다. 브루투스가 태어난 것도 바로 그 무렵 일이었으므로 카이사르는 어쩌면 그가 자기 아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언젠가 로마를 뒤엎으려는 카틸리나의 음모를 밝히기 위해 원로원에서 회의가 열렸을 때였다. 서로 반대 의견을 주장하던 카토와 카이사르는 열띤 논쟁을 벌였다. 그때 카이사르에게 쪽지 한 장이 전해졌고, 이를 본 카토는 분명히 적과 내통하는 자들로부터 온 편지일 것이라며 카이사르를 공격했다. 다른 의원들까지 카이사르를 몰아세웠으므로 카이사르는 하는 수 없이 그 쪽지를 카토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그것은 카토의 누이인 세르빌리아가 카이사르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였다. 카토는 그 편지를 카이사르에게 도로 던져주며 이렇게 말했다.

 

"에이, 술주정꾼 같으니라고. 어서 가져가게."


카토는 다시 회의에 정신을 쏟았다. 카이사르와 세르빌리아의 사랑 이야기는 이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모두 알려졌을 만큼 유명했다.(1775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마르쿠스 브루투스 편>

 

 

이쯤에서 다시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 잠시 되돌아가 보지요. 셰익스피어가 쓴『줄리어스 시저』에서는 모두 여덞 명의 등장인물이 죽는데, 카이사르가 맨 처음으로 죽고, 브루투스는 맨 나중에 죽습니다. 이 극의 핵심 주제는 그토록 위대했던 두 사람이 왜 그렇게 죽었는지 그리고 그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드러나지요. 그 주제는 '이상주의'입니다. 로마의 기나긴 역사를 통해 볼 때 브루투스만큼 '고귀한 성품'을 지닌 인물도 드물었습니다. 

브루투스의 이상주의는 '공화정 옹호와 독재 반대'로 나타나면서 불가피하게 카이사르의 암살로 이어집니다. 브루투스가 생각하는 공화정 최고의 가치는 '자유'였습니다. 그로서는 이 자유가 한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왕정'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자유 수호'를 위해서 그는 기꺼이 자신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카이사르 암살)


셰익스피어가 그려낸 '이상주의와 현실의 충돌'은 극의 도입부에서부터 선명하게 그려지는데, 카이사르의 개선 장면에 열광하는 '로마 시민들'을 보고 한심해 하는 셰익스피어의 '대사'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왜 축하해? 그가 뭘 정복해서 가져오지?

어떤 조공 사신들이 포로 되어 묶인 채

전차 바퀴 장식하며 로마로 따라오지?

 

로마 시민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폼페이우스가 개선할 때 카이사르와 똑같은 방식으로 열광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죽이고 돌아오는 지금도 로마 시민들의 반응은 똑같았습니다. 로마의 군중들은 "목석 같은 멍청이, 짐승만도 못한 것들"이라고 욕을 잔뜩 먹었습니다. 물론 셰익스피어가 등장시킨 극중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서였지요.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잡기 위해 서로 죽고 죽일 뿐인 국가 지도자를 보면서, 매번 똑같은 역할을 떠맡지만 '등장 인물'만 바뀔 뿐인데 거기에 매번 열광하는 로마 시민들을 셰익스피어는 그렇게 꾸짖었던 셈이었습니다.


(카이사르 동상)

 

이제부터는 '카이사르 암살'에 대한 브루투스의 태도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브루투스가 처음부터 '카이사르 암살'을 주도했을 만큼 나쁜 인물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사정을 자세히 살펴 보면 우리는 뜻밖에도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먼 조상인 '유니우스 브루투스'까지도 이 사건에 희미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브루투스, 지금도 살아 계셨더라면!


그러나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 음모를 꾸미게 된 까닭은 카시우스와는 좀 다르다. 그와 가까운 친구들과 시민들이 끊임없이 그를 설득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익명의 편지들이 그에게 쏟아졌던 것이다. 어떤 시민은 옛날에 왕정을 뒤엎었던 유니우스 브루투스 동상에 이런 글을 새기기도 했다.


"브루투스, 지금도 살아 계셨더라면!"

 

"브루투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해요."

 

그리고 법무관인 브루투스가 법정에 나갈 때면, 그의 자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힌 쪽지들이 수북하게 쌓였다.

 

"브루투스, 아직도 잠자고 있는가?"

 

"당신이 진정한 브루투스인가?"

 

하지만 브루투스가 카이사르를 암살하기로 마음먹게 된 결정적 까닭은 카이사르에게 아첨하는 이들의 경솔한 행동 때문이었다. 그들은 민중의 이름을 빌려 카이사르에게 온갖 영광을 주려 했고, 한밤에 몰래 카이사르 동상 위에 왕관을 씌워놓아, 집정관을 넘어서 왕으로 내세우려 했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은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것은 카이사르 전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1779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마르쿠스 브루투스 편>


 (유니우스 브루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을 주도했던 인물은 브루투스의 의동생이었던 카시우스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엔 브루투스와 카이사르 사이의 돈독한 관계 때문에 브루투스에게 '자신의 의중'을 솔직히 밝힐 수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브루투스를 암살 계획에 가담시킬 방법을 궁리하던 카시우스는 마침내 그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합니다. 카시우스가 브루투스를 설득하는 대사가 매우 길지만 거기에서도 역시 '또 한 명의 브루투스'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이 시저가 무엇을 먹었기에

이렇게 커졌지? 시대여, 넌 창피당했다!

로마여, 네 고귀한 혈통은 다 사라졌다!

대홍수 이래로 어느 한 시대가

한 사람만으로 유명한 적 있었단 말인가?

지금까지 로마를 얘기할 때 그 누가

그 넓은 거리가 한 사람만 품었다 할 수 있나?

오로지 한 사람만 있게 된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게다가 여지가 충분한 로마로다.

오, 자네와 난 선친들이 하는 얘기 들었지,

일찍이 또 한 명의 브루투스는 로마에서

왕이 쉽게 자기 옥좌 지키게 하느니

영원한 마왕이 그러도록 놔뒀을 거라고.


(『줄리어스 시저 』, <1막 2장>)

 

 

셰익스피어가 『줄리어스 시저』를 쓰면서 참고한 책이 바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었습니다. 그는 플루타르코스가 쓴 원전을 조금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도 '원작'보다 훨씬 더 생생한 극작품을 탄생시켰습니다. 그것도 오로지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서 말이지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플루타르코스는 과연 어떻게 썼는지 살펴 보면 셰익스피어의 극작품이 얼마나 독자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자극하는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조상은 유니우스 브루투스이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타르퀴니우스를 쫓아내고 왕정을 몰락시킴으로, 로마인들은 그가 칼을 빼들고 선 동상을 카피톨리움에 있는 왕들 동상 사이에 세웠다. 성격이 지나치게 강직한 그는 남들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학문으로도 그런 성격을 누그러뜨리기는커녕 오히려 독재자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독재자와 공모한 자기 아들들까지 모두 사형시켰다.

 

그러나 이제부터 쓰려는 브루투스는 성격이 유순한 데다가 철학과 학문을 갈고닦아 더할 나위 없이 조화롭고 훌륭한 인격을 갖춘 인물이다. 그는 이러한 성품으로 나랏일에 헌신했으며, 그 때문에 사람들은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뒤에 좋은 일들은 모두 브루투스 공으로 돌리고, 나쁘거나 잔인한 일들은 브루투스의 친척이자 친구인 카시우스 잘못으로 돌렸다. 그만큼 카시우스는 정직함이나 동기의 순수함에서 브루투스를 따라가지 못했다. ……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는 철학자 카토와 남매 사이였다. 브루투스는 로마 사람들 가운데 외삼촌인 카토를 가장 존경했으며, 뒷날 카토의 딸 포르키아를 아내로 삼았다.(1772∼1773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마르쿠스 브루투스 편>


(브루투스 가계도)

 

이런저런 이유로 마침내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 계획에 합류하게 되고, 암살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자 '비밀 유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관건이 되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훗날 마키아벨리가 쓴 『로마사론』에서도 <음모에 대하여>라는 유명한 장에서 다양한 역사적 사례들과 함께 치밀하게 분석되어 있는데, 카이사르 암살 음모가 실행 전 단계에서부터 일찌감치 탄로날 위험성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암살 계획에 뒤늦게 합류한 브루투스가 어느날부터인가 갑자기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은 그의 아내 포르키아였습니다.

 

브루투스는 이제 용맹과 문벌에서 로마 으뜸가는 인물들 운명이 모두 자기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집 밖에서는 행동을 조심하면서 여느 때처럼 일을 처리했지만, 일단 집 안에 들어온 뒤에는 여러 문제들로 고민하며 밤을 꼬박 새기도 했다. 그러나 한방을 쓰는 아내가 이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중대한 문제로 고민하고 있거나, 아니면 매우 위험한 일을 계획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브루투스의 아내 포르키아는 카토의 딸로, 두 사람은 사촌 간이었다. 포르키아는 젊었을 때 첫 남편이 죽자, 어린 아들 비불루스를 데리고 브루투스와 재혼했다. 비불루스는 뒷날 《브루투스 회상록》을 남기기도 했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철학을 사랑했으며, 용기도 뛰어나고 이해심도 넓었던 포르키아는 남편에게 비밀을 묻기 전에 먼저 자기 의지력을 시험하기로 했다. 그녀는 시녀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낸 다음 손톱을 깎는 날카로운 칼로 자신의 허벅지를 세게 찔렀다. 많은 피가 쏟아졌고, 심한 통증에 포르키아는 온몸을 덜덜 떨었다. 포르키아는 자신을 간호하는 브루투스에게 통증을 참으며 이렇게 말했다.

 

"브루투스, 나는 카토의 딸이에요. 내가 당신과 결혼한 것은 당신과 잠자리나 하려던 것이 아니라 운명을 함께하기 위해서였지요. 이제껏 우리는 잘 지내왔고 당신도 잘못한 게 없었어요. 그러나 지금 당신은 무언가로 무척 괴로워하면서도 내게는 말 한 마디 안 하고 있어요. 물론 당신이 나를 걱정하기 때문이라는 걸 잘 알아요. 그런 중대한 일이라면 비밀과 믿음이 꼭 지켜져야 하겠지만, 나는 무슨 일인지 알아야겠어요. 당신에게 나의 사랑을 증명할 기회를 주세요. 본디 여자들은 마음이 약해 비밀을 잘 지키지 못한다는 건 나도 알아요. 그러나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바른 교육을 받고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여자들도 달라지는 법이에요. 나는 카토의 딸이고, 브루투스의 아내예요. 그리고 나는 이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 전에는 내가 정말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이제 나 스스로 시험해 보니 어떤 고통도 참고 이겨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러고는 허벅지 상처를 남편에게 보여주며, 이것은 자신의 의지를 시험한 증거라 털어놓았다. 브루투스는 깜짝 놀라더니, 포르키아에게 부끄럽지 않은 남편이 되고, 자기 계획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포르키아에게 자신의 계획을 모두 알려주었다.(1782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마르쿠스 브루투스 편>


(브루투스의 아내, 포르키아) 

 

위험천만했던 카이사르 암살은 결국 성공했고, 브루투스는 로마 시민들을 상대로 '암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명연설을 했으나 이 모든 노고가 로마 시민들을 향한 '안토니우스의 선동'으로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카이사르 암살 직후에 안토니우스가 취한 놀라운 행동과 로마 시민들을 격분시키는 명연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줄리어스 시저』에서도 특히 돋보이는 장면이지요.


(브루투스의 죽음)

 

브루투스에게는 졸지에 '카이사르 살해자'라는 오명이 씌어졌습니다. 그는 안토니우스와 간신히 타협하여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 자격으로 망명하듯 길을 떠났습니다. 로마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급부상하면서 안토니우스와 손잡고 암살 공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복수에 착수하지요. 오늘날 북마케도니아에 위치한 '필리피 전투'에서 브루투스는 잘 싸우고도 전황을 오판하여 끝내 자결합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로마 공화정'도 이내 끝나고 말지요. 남편의 자결 소식을 들은 카토의 딸 포르키아도 남편 못지 않게 인상적인 죽음을 택했습니다.

 

브루투스의 아내 포르키아는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친구들 감시 때문에 도저히 죽을 수가 없었다. 끝내 그녀는 벌겋게 달아오른 숯덩이를 입에 물고 질식해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철학자 니콜라우스와 역사가 발레레우스 막시무스 기록에 나와 있다.(1814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마르쿠스 브루투스 편>

 

(포르키아)

 

셰익스피어는 이처럼 용기 있는 죽음을 택한 브루투스의 아내 포르키아를 위해서도 특별한 배려를 잊지 않았는데, 『베니스의 상인』에서 악덕 유태인 상인을 굴복시키는 기지를 발휘하는 여주인공 이름을 포셔(포르키아의 영문 이름)로 지었을 뿐 아니라, 극증 인물의 대사를 통해서까지 그녀의 미덕을 칭송하기 때문이지요.


        바사니오

  그녀는 아름답고, 그보다 더 아름답게 

  놀라운 미덕을 가졌다네. …… 

  이름은 포셔이고,ㅡ 로마 장군 카토의 딸

  브루투스의 포셔보다 평가가 못지않고 

  이 넓은 세상 또한 그녀 값을 알고 있지.

 

 - 『베니스의 상인』, <1막 1장> 중에서

 

로마 역사상 보기 드분 훌륭한 인격을 두루 갖춘 브루투스의 안타까운 죽음을 두고 셰익스피어는 '안토니우스의 입'을 빌려 다시 한번 각별하게 애도했습니다.

 

 안토니

이 사람이 그들 중 가장 귀한 로마인이었다.

그를 뺀 나머지 공모자들 모두는

위대한 시저에게 악심 품고 그 짓 했다.

오직 그만 공적이고 정직한 생각에서

모두의 공익을 위하여 한 패가 되었다.

그의 삶은 고귀했고 인성은 완벽하여

자연의 여신조차 일어서서 온 세상에

'이게 사람이었다.'라고 했을 것이다.

 

(『줄리어스 시저』, <5막 5장> 중에서)

 

 

이제부터는 '브루투스 가문'의 인물들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였던 마키아벨리의 평가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브루투스 가문의 사람들만큼 '로마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준 인물도 흔치 않은데, 마키아벨리의 얘기를 들어 보면 "브루투스, 너 마저?"라는 짧은 대사에 담긴 의미가 얼마나 다양한 함의를 지니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습니다.


(마키아벨리)

 

속속들이 썩어버렸기 때문

 

로마의 실례만큼 이 점에 꼭 맞는 것은 달리 없을 것이다. 타르키니우스 가를 멸망시킨 뒤 로마는 곧바로 자유를 획득하여 이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나 가이우스 칼리굴라, 그리고 네로가 죽고 카이사르의 혈통이 완전히 절멸한 뒤에 로마는 자유를 유지하기는 커녕 그에 한 발도 접근할 수 없었다. 같은 도시를 무대로 해서 같은 조건 아래 생긴 일인데도 결과가 아주 정반대로 되어 버린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즉 타르키니우스 시대에는 로마인이 아직 그다지 타락해 있지 않았던 데 비해, 카이사르 시대에는 속속들이 썩어 있었다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타르키니우스 시대에는 로마의 민중으로 하여금 국왕의 압제 정치를 물리치고자 굳게 결의시키는 대신, '로마에서는 앞으로 어떤 왕도 통치할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민중에게 맹세시키는 일만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시대가 되자 전 오리엔트의 지지를 배경으로 가진 브루투스의 권력이나 가혹함을 가지고도 로마 민중을 분기시켜서 자유를 지키게 할 수는 없었다. 이 브루투스는 초대 브루투스를 본받아서 로마 민중에게 자유를 되돌려주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이처럼 자유를 회복하는 일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그때까지 가이우스 마리우스 일파가 민중에게 심어 놓은 타락한 풍조 때문이다. 그리고 마리우스의 평민당 수령이 된 카이사르는 교묘하게 민중의 눈을 가려 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목에 칼을 쓰고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207쪽)

 

 - 마키아벨리, 『로마사론』,

   제1권 제17장 <퇴폐한 민중은 해방된다 하더라도 자유를 유지해 나가기가 매우 어렵다>

 

<왕정을 종식시킨 브루투스의 조상>에 관한 마키아벨리의 날카로운 분석을 조금만 더 들어보지요.

 

훌륭한 일을 수행했기 때문에 그 철저한 배려와 현명함을 높이 찬양받는 인물이라 하더라도,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바보처럼 가장하고 수행한 그 행동에는 가까이 따라갈 수 없으리라 생각된다.

 

티투스 리비우스는 브루투스가 그런 짓을 한 것은 자기의 몸의 안전과 집안의 대를 지켜 나가기 위해서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브루투스가 한 행동을 생각해 보면, 그가 바보를 가장하고 있었던 것은 자신의 속셈을 눈치채이지 않으려는 수단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는 왕을 타도하고 로마를 해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아폴로 신전의 신탁에 대한 해석 방법을 보면 그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탁을 받을 때 그는 자기의 계획에 신의 가호를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일부러 발부리를 차고 넘어져서 남몰래 어머니인 대지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루크레티아의 죽음에 즈음해서는, 아버지와 그의 남편과 그 밖의 친척들이 모인 가운데서 맨 먼저 그 상처에서 단도를 뽑고는, 앞으로는 어떤 왕의 지배도 로마에서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맹세를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켰다.

 

이 브루투스의 고사는, 군주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배워야 할 일이다. 즉 우선 자기 자신의 실력을 측량해야 한다. 그리하여 상대를 적으로 맞아 당당하게 싸워 나갈 만한 확신이 설 만큼 자기의 실력이 갖추어져 있다면 당연히 싸움에 돌입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위험이 적은 자랑스러운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434쪽)

 

- 마키아벨리, 『로마사론』,

   제3권 제2장 <백치를 가장하는 것이 때로는 가장 현명할지도 모른다> 



  

타르키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아주 가증스런 방법으로 왕국을 손에 넣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그가 이전의 왕들의 유훈에만 따랐더라도 그의 입장은 그대로 용인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원로원과 평민이 힘을 합해서 그의 손으로부터 국가를 빼앗는 사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추방된 것도 그의 아들 섹스투스가 루크레티아에게 무례함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본인 자신이 국법을 유린하고 제멋대로 폭정을 폈기 때문이다.

 

(중략)

 

앞에서 말한 루크레티아에 대한, 아들 섹스투스의 능욕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뭔가 다른 사건이 벌어져서 결국은 같은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타르키니우스 자신이 자중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그 때까지의 국왕과 변함 없는 행동을 했더라면, 아들 섹스투스가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브루투스도 콜라티누스도 섹스투스에게 복수하겠다는 것을 타르키니우스에게 호소했을 뿐이지 인민에게 호소해서까지 그와 같은 행동을 일으킬 리는 없었다.(438∼439쪽)

 

 - 마키아벨리, 『로마사론』,

   제3권 제5장 <국왕이 세습한 왕국을 잃는 이유에 대하여>


마키아벨리의 책에서 언급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고대 로마의 왕정을 종식시킨 덕분에 '공화정의 창시자'라는 영광스런 칭호가 붙을 만큼 로마인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왕정의 마지막을 장식한 타르키니우스 왕의 아들 섹스투스는 전방부대를 이탈하면서까지 몰래 부하장교의 아내를 겁탈했는데, 이 유명한 '고대 로마의 성폭행 사건'을 두고도 셰익스피어는 『루크리스의 강간』이라는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무려 1885행에 달하는 기나긴 설화시로 말이지요. 


(타르퀴니우스와 루크레티아)


난폭하게 성폭행을 당한 루크레티아는 죽기로 결심하고 심부름꾼을 시켜 친정 아버지와 남편을 급히 불러모은 뒤에 강간범 섹스투스의 범행을 알리고 자신의 복수를 다짐받은 직후 자결하지요. 이 때 범행 고발 현장에 있었던 사람 가운데에는 브루투스의 조상인 유니우스 브루투스도 있었습니다. 폭정을 거듭하던 강간범의 아비를 왕위에서 끌어내릴 기회만 기다렸던 그는 자결한 루크레티아의 몸에서 손수 칼을 뽑으면서 '타르키니우스 가문 전체를 뿌리 뽑겠다'고 맹세하였고, 루크레티아의 시신을 끌고 광장으로 가서 '독재 왕정의 폐단'과 '범죄 만행'을 고발했고,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콜라티누스는 로마 최초의 집정관에 오르게 되지요. 


(루크레티아의 죽음)


그로부터 물경 5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다시 '왕관'을 욕심낸다는 소문이 파다했을 때 '브루투스'가 다시 나타나 그를 찔렀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었습니다. 『루크리스의 강간』까지 창작해낸 셰익스피어가 살해당한 카이사르보다 살해범 브루투스에게 얼마만큼 더 깊이 공감했는지는 브루투스의 다음 대사만 들어봐도 능히 짐작할 수있을 듯 합니다.

 

"왜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에 대항하여 그를 죽였는지 이유를 요구한다면, 이것이 저의 대답입니다. 카이사르에 대한 나의 사랑이 결코 모자라서가 아니라, 내가 로마를 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카이사르가 죽음으로써 모두가 자유인으로 살기보다 카이사르가 살아서 모두가 그의 노예로 죽는 것을 원하십니까? 카이사르는 나를 사랑했기에, 나는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립니다. 그가 행운을 타고났기에,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 그가 용감했기에, 나는 그를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가 야심을 품었기에, 나는 그를 죽였습니다. 그의 사랑에 대한 눈물, 그의 행운에 대한 기쁨, 그의 용기에 대한 존경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야심에 대해서는 죽음이 있습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줄리어스 시저』
3막 2장 중에서

 

이것으로 브루투스 가문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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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피지 쪽들에 호메로스가 다 담기다니!

일리아스와 오뒷세우스의 그 많은 모험이

프리아모스 왕국의 적이었던 오뒷세우스 말야!

그 모든 것이 양피 한 조각에 갇혀 버리다니

겨우 자그마한 몇 장으로 접은 양피 조각에!


- 마르티알리스


* * *

호메로스

세상에서 오직 단 한 명의 작가나 시인을 꼽으라면? 셰익스피어? 단테? 괴테? 이들도 물론 탁월한 시인임에는 틀림없지만 가장 좋은 대답은 아마도 호메로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제아무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감정들과 성격과 인물들을 창조해 냈다고 하더라도,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라는 작품을 통해 그토록 많은 인물들과 대규모의 전투씬들과 심오한 역사관과 사상들을 담아냈다고 하더라도, 저 까마득한 옛날 눈먼 음유시인이었던 호메로스가 남겨놓은 양대 서사시와 비교하기만 하면 우리는 그런 대비가 어딘가 잘못된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게 됩니다. 그만큼 호메로스가 인류 문명에 남겨놓은 유산이 탁월하고도 심원하기 때문일 테지요.

호메로스가 쓴 양대 서사시 가운데 본편이라고 할 만한 『일리아스』만 하더라도, 이 작품 속엔 고대의 숱한 전설적인 영웅들뿐 아니라 그 당시 그리스인들이 믿었던 온갖 신들이 총망라하다시피 등장합니다. 트로이아 전쟁은 외관상으로는 인간들이 벌인 전쟁이었으나 그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신들의 전쟁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저 유명한 헬레네 납치 사건 하나만 하더라도 신들의 사소한 불화 때문에 빚어졌던 일이 아니고 무엇이었던가요?

신들의 회의

신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우스는 바다의 여신인 테티스를 사랑하지만 그녀가 아버지보다 더 강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는 일찌감치 마음을 접고 그녀를 아이아코스의 아들 펠레우스와 결혼시킵니다. 이 펠레우스가 바로 『일리아스』의 주인공인 아킬레우스의 아버지였지요. 펠레우스와 여신 테티스의 결혼식엔 당대의 온갖 저명인사들이 두루 참석했지만 불화의 여신 에리스만은 초대 받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앙심을 품은 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주특기를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결혼 잔치에 참석한 여신들 사이에 문제의 황금 사과를 툭~ 내던지는 묘수를 떠올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사과 한 알이 어머어마한 대사건으로 발전되리라는 건 불보듯 뻔했습니다.

던져진 황금사과

여신들은 사과를 보자말자 서로 앞다퉈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다가 결국 트로이아의 왕자였던 파리스에게 심판을 받게 되지요. 이게 바로 그 유명한 '파리스의 심판'이었습니다. 여신들은 그 황금사과를 차지하기 위해 각자 자신들에게 어울릴 만한 달콤한 반대급부로 파리스를 유혹하지요. 헤라는 '아시아에 대한 통치권'을, 아테네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아프로디테는 절세 미인을 아내로 주겠다면서 자신을 밀어달라고 호소하지요. 그러자 파리스는 그 사과를 아프로디테에게 건네주고, 파리스는 그 여신의 도움을 받아 이미 다른 남자의 부인이었던 절세미인 헬레네를 얻게 되고, 트로이아와 그리스 연합군은 바로 그 사건 때문에 결국 파멸적인 10년 전쟁에 뛰어들게 되지요.

여신들의 약속

고대의 숱한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해 유별난 탐구심을 발휘했던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가 이 대사건을 모른 체 할 리는 없었습니다. 그는 특유의 입심으로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멋지게 요약했습니다.


이 수천 수만의 무장한 인간들의 가공할 장비, 그 맹위·정열·용기, 이런 것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원인으로 일어나서, 가벼운 인연으로 사라지는가를 고찰해 보면 기가 막힐 일이다.

파리스라는 사람 때문에 저 처참한 전쟁이

그리스와 외족(外族) 국가 사이에 야기되었다고 전한다. (호라티우스)

아시아 전체가 파리스의 오입질 때문에 전쟁으로 불타 버려 파괴된 것이다. 단 한 남자의 시기심, 울분, 쾌락, 가족 간의 질투 등, 수다스런 마나님 둘이 서로 할퀴며 대들게 할 만큼 성나게 할 것도 못 되는 원인들, 이것이 전쟁의 핵심이며 직접적인 원인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트로이아 전쟁

인류의 역사에서 아마도 가장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전쟁이 있다면 그건 바로 트로이아 전쟁입니다. 그 누가 용맹무쌍한 아킬레우스와 꾀많은 오뒷세우스와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를 모를 것이며, 그 누가 트로이의 목마를 모를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 유명한 고대의 전쟁도 자세히 따지고 보면 결국 '신들의 집안 싸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싸움의 원인 제공자인 헬레네는 족보로 따지자면 엄연히 제우스의 딸이었습니다. 스파르테 왕 튄다레오스와 그의 아내 레다 사이에는 2남 2녀가 태어났는데, 클뤼타임네스트라와 헬레네와 카스토르와 폴뤼데우케스가 그들이지요. 그런데 제우스가 백조의 모습을 하고 레다에게 접근한 까닭에 흔히 헬레네와 쌍동이 남자 형제들은 '제우스의 자식들'로 인정받습니다. 카스토르와 폴뤼데우케스는 훗날 로마의 수호신으로도 인정받아 로마 시내를 대표하는 건축물에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요.

로마 시청사

헬레네의 언니인 클뤼타임네스트라는 트로이아 전쟁때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의 아내였고, 헬레네는 아가멤논의 아우 메넬라오스의 아내였습니다. 그러니 제우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의 딸이 자신의 사위를 배신하고 외간 남자와 눈이 맞아 멀리 트로이아까지 도망친 사건을 해결해야 할 입장에 빠진 셈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사랑했던 여신인 테티스의 간절한 호소 때문에라도 자신이 그 전쟁에 적극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테티스는 고대 그리스 최고의 영웅인 아킬레우스를 낳았는데, 하나뿐인 자식이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한 이후 혁혁한 무공을 세웠음에도 그리스군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으로부터 부당한 처사를 당하자 곧바로 제우스를 찾아가 무릎을 붙잡고 간청합니다. 전쟁터에서 죽을 운명을 타고난 명 짧은 자신의 아들을 불쌍히 여겨서라도 어떡하든 아킬레우스의 명예를 드높여 달라고 말이지요. 제우스는 일이 그렇게 되도록 우선 아킬레우스가 전쟁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에 트로이아 군대가 분발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 트로이아 전쟁 내내 수세에 몰려 있던 트로이아 군대는 전세를 뒤집었고, 그리스 군대는 해안까지 밀려나 자신들이 타고 온 함선들이 모조리 불에 탈 위기에까지 내몰리지요.

제우스에게 간청하는 테티스

이처럼 제우스와 테티스는 트로이아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데, 이들 말고도 그리스 군대를 편드는 신들은 여럿 더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와 제우스의 딸인 아테네가 가장 적극적이었습니다. 두 여신들은 이미 파리스의 심판에서 아프로디테에게 보기 좋게 한 방 먹었기 때문이지요. 더군다나 아테네는 전쟁의 여신이니 고비때마다 자신의 전투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제우스와 형제 사이인 포세이돈 역시 그리스 편이었습니다. 대지를 흔드는 신인 포세이돈은 과거에 한때 트로이아의 성벽을 튼튼하게 쌓아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트로이아 왕이었던 라오메돈의 부탁으로 1년 동안이나 성의껏 도와줬지만, 성벽이 완성되자 라오메돈은 약속한 보수를 주지 않고 포세이돈을 몹시 박대했습니다. 그때의 일을 회상하는 포세이돈의 하소연을 잠시 들어 볼까요.


이번에는 아폴론을 향해 대지를 흔드는 통치자가 말했다.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생각이 모자라구려. 그대는 여러 신들 중에

우리 둘만이 일리오스에서 고생하던 일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가!

그때 우리는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 오만한 라오메돈에게 가서

정해진 보수를 받기로 하고 만 일 년 동안 그자를 위해

봉사했고 그자는 우리에게 명령을 내렸었지.

나는 트로이아인들을 위해 그들의 도시가 함락되지 않도록

도시 주위에 넓고 더없이 아름다운 성벽을 쌓아주었고

포이보스여! 그대는 숲이 우거지고 주름이 많은 이데 산의

계곡에서 걸음이 느리고 뿔이 굽은 소 떼를 먹였지.

하지만 즐거운 계절들이 보수의 기한을 다 채웠을 때

무서운 라오메돈은 우리에게서 보수를 전부 빼앗고는

협박하며 우리를 내쫓았지.

그는 우리의 손과 발을 함께 묶어

멀리 떨어진 섬에 갖다 팔겠다고 위협했지.

그리고 그는 우리 둘의 귀를 청동으로 자르겠다고 공언했지."


- 『일리아스』, 제21권 441행∼455행


라오메돈 왕은 요즘으로 치자면 악덕 임금체불업자나 다름없었습니다. 더군다가 그가 실컷 부려먹었던 사람들이 막강한 아폴론과 포세이돈이었으니 라오메돈은 돌이킬 수 없는 대형사고를 친 셈이었습니다. 라오메돈의 아버지는 일로스였고, 이 이름에서부터 '일리아스'라는 이름이 생겨났지요. 할아버지는 트로스였는데, 이 이름에서는 '트로이아'라는 이름이 생겨났습니다.


라오메돈 왕의 '약속 불이행'은 비단 이때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딸이 바다괴물에게 붙잡히자 딸을 구해주면 자기 명마들을 주겠다고 해놓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데, 이때 사기를 당한 인물은 그 유명한 헤라클레스였습니다. 열이 잔뜩 받은 헤라클레스는 '약간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가 트로이아를 손쉽게 함락하고 라오메돈과 그의 아들들을 모조리 죽입니다. 그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트로이아 전쟁때의 왕이었던 프리아모스 대왕이었습니다.

트로이아 왕가 계보

헤라클레스는 이때 바다괴물로부터 라오메돈의 딸 헤시오네를 구한 뒤 부하 장수 텔라몬에게 주었고, 그녀는 그리스군의 명궁이자 '큰 아이아스'의 이복동생인 테우크로스를 낳았습니다. 트로이아 전쟁에는 텔라몬의 두 아들인 큰 아이아스와 테우크로스는 물론이고, 헤라클레스의 아들까지도 전쟁 영웅으로 활약하는데, 포세이돈과 아폴론은 이들 영웅들의 아버지가 팔팔하던 젊은 시절부터 이처럼 다양한 사건들로 이래저래 엮여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그리스 연합군 vs 트로이아

다시 '신들의 전쟁' 이야기로 되돌아 오지요. 방금 『일리아스』에서 인용한 싯구에서 보듯이, 아폴론과 포세이돈은 한때 트로이아의 튼튼한 성벽을 함께 쌓아준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아폴론은 트로이아에게 적대적이지 않고 도리어 트로이아를 편들고 있는 걸까요? 그건 바로 아폴론의 사제였던 크뤼세스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전쟁통에 붙잡혀간 자신의 딸을 구하려고 아가멤논을 찾아갔지만 거기서 난폭하게 쫓겨났기 때문이지요. 아폴론은 자신을 위해 신전을 짓고 제물을 바친 사제의 간절한 청탁을 듣고 전쟁 내내 트로이아를 도와줍니다. 자신의 주특기인 날카로운 화살들로 그리스인들을 괴롭히고 그리스 군대에 역병이 돌게 만든 것도 아폴론이 벌인 일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전쟁이라면 아무런 계획도 절제도 없이 마구 뛰어드는 '전쟁의 신' 아레스까지 트로이아 전쟁에 뛰어듭니다. 그는 만용이 지나쳐 그리스군 장수 디오메데스의 창에 부상당하기도 하고, 오토스와 에피알테스 형제에게 13개월 동안이나 포로로 붙잡히기도 합니다. 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체통이 말이 아니지요. 아레스는 또한 헤파이스토스의 아내인 아프로디테와 밀애를 즐기다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고안한 교묘한 그물에 갇혀 신들의 웃음거리가 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레스가 애인 아프로디테와 함께 트로이아 군대를 편들고, 오쟁이 진 남편인 헤파이스토스가 그들에 맞서 그리스 군대를 편드는 건 자연스런 일이었습니다.


또한 헤파이스토스는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에게 크나큰 선물을 안기는데, 무구(武具)마저 잃어버린 아킬레우스를 위해 온갖 심혈을 기울여 창과 방패와 투구와 정강이받이 등 제구일습(諸具一襲)을 만들어주기 때문이지요. 그 전에 아킬레우스는 전쟁을 보이콧하던 와중에 절친인 피트로클로스에게 자신의 무구를 몽땅 빌려 줬는데, 그가 헥토르와 싸우다가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아킬레우스의 무구까지도 한꺼번에 다 빼앗기고 말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듯 트로이아 전쟁은 외견상으로는 '한 남자의 오입질' 때문에 빚어진 인간들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지만 음유시인 호메로스는 이 모든 것들이 다 신들의 뜻이었노라고 노래합니다. 한낱 필멸의 인간들이 어찌 감히 신의 뜻을 거스를 수 있겠느냐면서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넌지시 충고하는 셈이지요.


그러나 인간들은 비록 필멸의 존재라고는 하지만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언제나 최고의 미덕이었습니다. 신과 같은 아킬레우스나 제우스의 아들로 인정(?) 받았던 헤라클레스와 같은 영웅들 또한 자신들의 운명을 미리 알고도 불굴의 인내와 노력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지난한 과업들을 이룩해 냈습니다. 참혹한 트로이아 전쟁이 끝나고도 10년을 더 방황한 끝에 고향 이타케에 당도한 오뒷세우스나 불구덩이 속에서도 아버지를 등에 업고 트로이아를 빠져나와 간난신고 끝에 로마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아이네이아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난이 없는 영웅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세이렌의 유혹을 견디는 오뒷세우스

그런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는 방대한 등장 인물들은 물론이고 온갖 상세한 지명과 사건들 사이의 뚜렷한 인과관계 등이 너무나 구체적으로 담겨 있어서 이 이야기가 정말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인지, 아니면 눈 먼 음유시인이었던 호메로스가 고대로부터 오랫동안 전승된 이야기에 자신의 창작 솜씨를 덧붙여 꾸며낸 이야기인지 도무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그 경계가 모호합니다.


『일리아스』의 초반부에 마치 거대한 진입장벽처럼 버티고 있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그 유명한 <함선 목록>만 살펴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이토록 구체적인 연합군의 함선 목록이 실제적인 사실의 뒷받침 없이 어떻게 꾸며질 수 있을까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을 정도로, 그 목록이나 함선의 숫자들은 너무나 구체적입니다. 어디서 누가 몇십 척씩 이끌고 왔다는 설명이 그리스 군대에서만 29차례에 걸쳐 낱낱이 소개되고, 함선들의 숫자는 3척, 7척, 9척까지도 일일이 따로 소개한 끝에 도합 1,186척에 이릅니다. 척당 80명씩만 잡아도 무려 10만에 가까운 대군이 트로이아 땅에 집결한 셈인데, 그토록 많은 군대와 말들을 먹일 식량이 10년 동안에 어떻게 조달되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지요. 그러니 실제와 허구와 상상이 이처럼 한꺼번에 절묘하게 녹아 있는 고대의 문학 작품도 찾기 어려운 셈입니다.

트로이아 전쟁에 참가한 도시국가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가 그토록 훌륭하고 완벽한 고대의 영웅 서사시라고 하더라도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근원적인 한계마저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비록 호메로스가 아무리 교묘한 솜씨로 이들 영웅들의 과거와 미래까지도 자주 엿보게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독자들은 『일리아스』를 아무리 거듭해서 읽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트로이아 전쟁을 둘러싼 이야기를 일부분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가령, 파리스의 심판으로부터 비롯된 전쟁이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불화 때문에 그리스 군대의 패전 위기로 내몰렸다가 아킬레우스의 절친인 파트로클로스의 참전으로 다시 재역전되고, 파트로클로스가 헥토르마저 죽이겠다고 덤벼들다가 전사하고, 절친을 잃고 비탄과 분노에 휩싸인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죽이고, 트로이아 군대의 핵심이자 가장 사랑했던 아들인 헥토르를 잃고 비탄과 절망에 빠진 프리아모스가 아들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홀홀단신 아킬레우스를 찾아가고, 아킬레우스의 막사에서 극적으로 회동한 두 사람이 '동병상련'을 느끼며 함께 꺼이꺼이 울고 난 뒤에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고, 잠정적인 휴전 상태에서 헥토르의 장례를 무사히 치른다는 얘기 말이지요. 『일리아스』는 딱 여기서 끝납니다.

헥토르의 시신을 옮기는 트로이아 사람들

그러니 독자들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아무리 열심히 읽더라도 궁극적으로 영웅 아킬레우스가 과연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고, 그때 그토록 훌륭한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어머니 테티스의 비탄과 고통이 얼마만큼 컸고, 10년 동안이나 함락하지 못한 트로이아를 무너뜨리기 위한 극비 작전인 '트로이의 목마'가 누구의 아이디어로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트로이아가 최종적으로 어떻게 함락된 끝에 비참하게 무너졌으며,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 군대가 어떤 방식으로 전리품들을 나눠 가진 끝에 귀향길에 올랐으며, 또 각자 귀향길과 자신의 궁궐에서 어떤 비참한 운명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 모든 나머지 이야기들은 호메로스의 관심 영역 밖이었을까요?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일리아스』가 훨씬 더 방대한 전체 이야기의 자그마한 일부라는 사실을 한번쯤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의 수많은 영웅 서사시가 얼마만큼 많이 존재했는지, 고대의 트로이아 전쟁을 둘러싼 거대한 이야기가 얼마만큼 인류의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가는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를 '거대한 전체 속의 일부'로서 들여다볼 때 보다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분야를 연구한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트로이아 서사시권(敍事詩卷)'이라는 큰 전체의 일부분입니다. 하나의 통일된 전체를 이루는 서사시들은 모두 8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지요. 지금부터 간략하게나마 이들을 살펴 보지요.

트로이아 서사시권

그 첫 번째는 『퀴프리아』입니다. 여기서는 이른바 '파리스의 심판'에서부터 그리스군의 트로이아 도착까지를 취급합니다. 우리가 『일리아스』를 통해 희미하게나마 그 전말을 알고 있는 '황금의 사과' 이야기 또한 『퀴프리아』에 자세히 담겨 있으리라고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가 바로 『일리아스』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일리아스의 다음 이야기가 제일 궁금한데, 그 내용이 바로 세 번째인 『아이티오피스』에서 이어집니다. 여기에는 아킬레우스가 여인족 아마조네스의 여왕 펜테실레이아와 아이티오페스족의 왕 멤논을 죽이고 나서 자신도 아폴론 또는 파리스가 쏜 화살에 죽는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 갑자기 등장하는 멤논이라는 인물은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제법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고대 이집트의 도시인 테베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대한 석상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을 정도인데, 오이디푸스 왕이 다스렸던 고대 그리스의 도시 테바이도 이집트의 테베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고 하지요. 그런데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는 이 인물의 이름조차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멤논과 싸우는 아킬레우스

저는 여러 해 전에 이집트의 고대 도시 테베에 갔을 때 '멤논의 거상'을 직접 본 일이 있었지만, 그에 관한 이야기라고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읽을 때 잠깐씩 들어본 게 다였습니다. 그가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아들이며, 헥토르가 죽은 뒤에야 뒤늦게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했다가 아킬레우스에게 죽었고, 나중에는 제우스의 배려로 불사의 존재가 되었다는 정도만 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일리아스』에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포함하는 거대한 전체인 '트로이아 서사시권'의 일부를 장식하는 핵심 인물이 될 수도 있고, 그런 인물의 이름을 붙인 거대한 석상이 이집트에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트로이아 서사시권'이 얼마나 방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인류 문명에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는지를 새삼 반증하는 셈입니다.

멤논의 거상

트로이아 서사시권의 네 번째인 『소(小) 일리아스』와 다섯 번째인 『일리오스의 함락』에는 아킬레우스가 죽은 뒤 그의 무구(巫具)들을 놓고 오뒷세우스와 아이아스가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이야기인 '무구 재판'과 '트로이아의 목마 작전'에 따라 트로이아가 함락되는 이야기를 노래합니다. '대장간의 신'인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었다는 그 유명한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두고 그리스를 대표하는 두 영웅이 벌였을 엄청난 경쟁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고대 그리스 비극시인인 소포클레스의 작품 『아이아스』에서도 다루고 있고,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도 거듭 자세히 묘사한 덕분에 후세에 널리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숱한 예술 작품들이 탄생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결하는 아이아스

또한 『일리오스의 함락』에 등장하는 '트로이의 목마 이야기'야말로 트로이아 전쟁을 상징하는 가장 희귀한 창조물인데, 오늘날 트로이아의 목마에 얽힌 이야기가 온전히 전해지는 문헌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형편이지요. 그토록 놀라운 발명품을 만들어낸 꾀많은 오뒷세우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오뒷세이아』에서도 그 이야기는 그저 흘러간 옛 이야기 중에서 희미하게 잠깐씩 비칠 뿐입니다. 숱한 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들도 트로이의 목마를 핵심 포인트로 삼은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이토록 대중적인 관심을 집중시킨 사물이 온전한 텍스트도 없이 3,000년이 넘도록 인류의 기억 속에 지속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사례도 찾기 어렵지 싶습니다.


어쩌면 트로이의 목마에 관한 이야기는 고대 로마 시인이었던 베르길리우스가 쓴『아이네이스』에서 살펴보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건국 신화를 담은 그 이야기 속엔 '트로이아가 얼마만큼 비참한 모습으로' 몰락했는지를 빼어나게 묘사하고 있고, 그런 이야기 속에 '트로이의 목마'가 빠질 리 없기 때문입니다.

트로이 함락

그때 라오코온이 수많은 무리가 뒤따르는 가운데

앞장서서 성채 위에서 쏜살같이 뛰어내려오며

멀리서 외쳤습니다. '오! 가련한 동포들이여,

그대들은 그토록 제정신이 아니란 말이오? 그대들은 적군이

배를 타고 떠난 줄 아시오? 일찍이 다나이족의 선물에

음모가 없었던 적이 있나 생각해보시오.

그대들은 오뒷세우스를 그런 사람으로 알고 있었소?

이 목조물 안에 아카이오이족이 숨어 있거나,

우리의 집들을 들여다보고 위에서 시내로 내려와

우리의 성벽들을 공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거나

아니면 어떤 다른 계략이 숨어 있음에 틀림없소. 말(馬)을 믿지 마시오,

테우케르 백성들이여.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다나이족이 선물을 가져올 때에도 두렵소.'

이렇게 말하고 그는 짐승의 옆구리에, 널빤지들을 둥그스름하게

이어붙인 복부에 힘껏 큰 창을 던졌습니다. 창은 떨면서 그곳에 꽂혔고,

충격이 가해지자, 텅 빈 뱃속이 공허하게 울리며

신음 소리를 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뒤틀리지만 않았더라면,

신들께서 내리신 운명대로 우리는 아르골리스인들의 은신처를

칼로 열어젖혔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트로이야는

아직도 서 있을 것이고, 프리아모스의 높은 성채여, 너도 남아 있겠지.


-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제2권 40∼56행



라오콘 조각상

이제껏 살펴본 '트로이아 서사시권'의 다섯 편이 전쟁을 노래하는 데 반해 나머지 세 권에서는 전쟁 이후의 이야기를 노래합니다. 여섯 번째인 『귀향』은 오뒷세우스를 제외한 다른 그리스군 장수들의 귀국을 노래하며, 일곱 번째가 바로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입니다. 여덟 번째는 『텔레고노스 이야기』인데, 고향 이타케 섬으로 돌아온 오뒷세우스가 그의 아들 텔레고노스에 의해 살해당하는 이야기를 노래합니다.


이처럼 많은 이야기가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 말고도 여섯 편에 더 담겨 있었다니 그것만으로도 숨이 벅차고 충분히 놀라운데 그리스인들은 이것 말고도 트로이아 전쟁 이야기만큼 흥미로운 '테바이 서사시권' 이야기까지 남겼습니다. 그나마 '테바이 서사시권'은 규모가 훨씬 단촐하기는 합니다.


이것은 오이디푸스 왕의 놀라운 운명을 노래한 『오이디푸스 이야기』(Oidipodeia)와 오이디푸스 왕의 추방된 아들 폴뤼네이케스를 중심으로 모두 일곱 장수들이 테바이를 공격한 이야기를 노래한 『테바이 이야기』, 그리고 이들이 테바이 공략에 실패한 뒤에 그의 아들들이 결국 테바이 공격에 성공한 이야기를 담은 『후예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테바이를 떠나는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아무리 방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작품은 결국 '트로이아 서사시권'과 '테바이 서사시권'을 아우르는 방대한 전체의 일부라는 사실은 『일리아스』를 읽는 동안에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트로이아 전쟁에 참가하는 무수히 많은 영웅호걸들 가운데에는 '테바이 서사시권'에 속하는 이야기인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의 후손들까지도 자주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튀데우스의 아들 디오메데스입니다. 그는 힙폴로코스의 아들 글라우코스와의 일전을 앞두고 서로의 조상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렇다면 그대는 먼 옛날 부조(父祖) 때부터 나의 빈객(賓客)이오'라는 말을 건네면서 전차에서 뛰어내려 서로의 손을 잡고 우정을 다짐합니다. 그리고는 곧장 서로의 무구들을 교환합니다. 이때 글라우코스가 얼마나 분별력이 없었는지는 플라톤의 『향연』에서도 인용될 정도였는데, 그는 황소 백 마리의 값어치가 있는 자신의 황금 무구들을 황소 아홉 마리의 갑어치밖에 안 되는 디오메데스의 청동무구들과 맞바꾸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거대한 전체의 일부분에 불과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증거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들의 작품들입니다. 흔히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로 불리는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는 모두 305편에 달하는 어머어마한 작품들을 썼다고 알려져 있는데, 지금까지 온전히 전해지는 작품들은 불과 33편에 불과합니다. 그 33편 가운데 트로이아 전쟁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은 그 절반인 16편인데, 그 가운데 사건이 발생한 시간으로 따져보면 『일리아스』와 겹치는 작품은 『레소스』 하나밖에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 비극작품 개요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오레스테스 이야기'란 뜻으로, 『아가멤논』,『제주를 바치는 여신들』,『자비로운 여신들』로 구성된 현존하는 유일한 비극 3부작)만 하더라도 『일리아스』에서 다루는 사건들과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작품인가요? 트로이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온 아가멤논은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의 손에 무참하게 살해되고 마는데, 아가멤논이 살해될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오레스테스는 훗날 청년이 되어 누이동생 엘렉트라와 함께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어머니인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죽입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벗어나면 이토록 비극적이면서도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또다시 새롭게 펼쳐지는 셈이지요.

아가멤논을 살해하는 클뤼타임네스트라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 가운데『필록테테스』도 『일리아스』에서 다루는 시기를 조금 벗어납니다. 그의 이름은 <함선 목록>에도 당당히 올라 있을 정도로 트로이아 전쟁에서는 꽤나 비중 있는 인물이었지만 『일리아스』에서는 딱 한 번만 언급될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호메로스가 이 희귀한 인물에 얽힌 가슴 아픈 사연들까지 몰랐던 건 결코 아니었습니다. 『일리아스』에서 잠깐이나마 그의 운명을 넌지시 암시하기 때문이지요. 서유럽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 인물에 대한 회화와 조각작품들이 도처에 널려 있을 정도인데, 『일리아스』에서만큼은 그저 잠깐 스쳐가는 인물일 뿐입니다.


그가 서양예술의 온갖 분야에서 오랫동안 비중있는 인물로 기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로빈슨 크루소의 진정한 원조(元祖)여서? 아니면 그 유명한 헤라클레스의 신궁(神弓)을 물려받은 인물이어서? 아니면 그가 전쟁의 원흉인 파리스를 쏘아 죽여서? 아무튼 그는 『일리아스』를 벗어나면 꽤나 유명한 인물로 돌변하는 인물임엔 틀림없습니다.


메토네와 타우마키에에 사는 자들과,

멜리보이아와 울퉁불퉁한 올리존을 차지한 자들,

이들의 함선 일곱 척은 궁술에 능한 필록테테스가 지휘했다.

배마다 선원들이 쉰 명씩 타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궁술에 능한 용감한 전사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지휘자는

심한 고통으로 괴로워하며 신성한 렘노스섬에 누워 있었다.

파멸을 꾀하는 물뱀에게 심하게 물려 괴로워하던 그를

아카이오이족의 아들들이 그곳에 남겨두고 왔기 때문이다.

그는 그곳에 괴로워하며 누워 있지만, 아르고스인들은 머지않아

함선들 옆에서 바로 그 필록테테스 왕을 생각해야 할 운명이었다.


- 『일리아스』, 제2권, 716∼725행


렘노스 섬에 버려진 필록테테스

고대 그리스 3대 비극작가 가운데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들은 트로이아가 함락된 이후에 '트로이아 여인들'이 겪는 끔찍한 참상들을 낱낱이 묘사하는 작품들이 많아서 『일리아스』 이후의 사정들을 파악하는데 더없이 요긴합니다. 한때 가장 많은 부와 명예를 누렸던 트로이아의 왕비 헤카베가 전쟁통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딸과 막내 아들을 어떻게 비통하게 잃었으며, 헥토르의 아내였다가 패전 후에는 아킬레우스의 아들인 네옵톨레모스의 첩으로 전락한 안드로마케가 어떤 기구한 운명을 겪었는지는 『일리아스』에서 예고편으로 슬쩍 엿보여준 내용들과는 비교조차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투구를 번쩍이는 위대한 헥토르가 그녀에게 대답했다.

"난들 어찌 그런 모든 일들이 염려가 안 되겠소, 여보!

(…)

나는 물론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소.

언젠가는 신성한 일리오스와 훌륭한 물푸레나무 창의

프리아모스와 그의 백성들이 멸망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그러나 트로이아인들이 나중에 당하게 될 고통도,

아니 헤카베 자신과 프리아모스 왕과 그리고 적군에 의해

먼지 속에 쓰러지게 될 수많은 용감한 형제들의 고통도,

청동 갑옷을 입은 아카이오이족 가운데 누군가 눈믈을 흘리는

당신을 끌고 가며 당신에게서 자유의 날을 빼앗을 때

당신이 당하게 될 고통만큼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소.

(…)

그때는 당신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누군가 말하겠지요.

'저 여자가 헥토르의 아내야. 사람들이 일리오스를 둘러싸고 싸울 때

그는 말을 길들이는 트로이아인들 중에서 으뜸가는 전사였었지.'

누군가 이렇게 말할 것이고, 그러면 당신은 굴종의 날에서

당신을 구해줄 그러한 남편이 없음을 새삼스레 슬퍼하게 될 것이오.

당신이 끌려가며 울부짖는 소리를 듣기 전에

쌓아 올린 흙더미가 죽은 나를 덮어주었으면!"


- 『일리아스』, 제6권 440∼465행


헥토르와 안드로마케

이토록 많은 이야기가 『일리아스』의 밖에서 또다시 차고 넘치도록 쏟아져 나왔다고 하더라도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가 지니는 불후의 위상이 낮아지는 이유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바로 이 점을 날카롭게 파고들었습니다. '트로이아 서사시권' 가운데 유독 호메로스의 두 작품만이 온전히 전해진 데에는 그만큼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는 '플롯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에 그 사이를 헤집고 들어갈 틈이 엿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 점에 대해서는 호메로스를 따를 시인이 없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직접 들어보지요.


그런데 호메로스는 다른 점에 있어서도 뛰어나지만, 이 점에 있어서도 숙련에 의했든 천분에 의했든 바로 이해했던 것 같다. 그는 『오뒷세이아』를 쓸 때 주인공에게 일어난 사건을 모두 취급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오뒷세우스가 파르낫소스 산에서 부상당한 일이라든지, 출전 소집을 받았을 때 광증을 가장한 사건은 취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 두 사건 사이에 필연적 또는 개연적 인과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대신 그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은 통일성 있는 행동을 주제로 하여 『오뒷세이아』를 구성했던 것이다. 『일리아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다른 모방 예술에 있어서도 하나의 모방은 한가지 사물의 모방이듯, 시에 있어서도 스토리는 행동의 모방이므로 하나의 전체적 행동의 모방이어야 하며 사건의 여러 부분은 그 중 한 부분을 다른 데로 옮겨놓거나 빼버리게 되면 전체가 뒤죽박죽이 되게끔 구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있으나마나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전체의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제8장 中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을 통해 '호메로스의 탁월한 점'을 거듭 강조하는데, 다음의 인용문을 살펴보면 그가 왜 10년 동안 벌어진 '트로이아 전쟁' 가운데 단 며칠 동안의 사건만을 다뤘으면서도, 『일리아스』가 영원불멸의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는지 그 연유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아울러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 덕분에 '트로이아 전쟁'과 '고대 그리스 비극'과의 관계도 조금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호메로스는 앞서도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이 점에서도 다른 시인들보다 탁월한 것 같다. 그는 트로이아 전쟁이 시초와 종말을 가진 전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부 다 취급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필시 그 스토리가 너무 방대하여 통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든지, 혹은 그 길이를 제한한다 하더라도 그 속의 사건이 다양해서 너무 복잡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전체에서 한 부분만 취하고, 그 외 많은 사건은 삽화로 이용하고 있다. 예컨데 「함선 목록」이나 다른 사건은 이야기의 단조로움을 덜기 위하여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시인들은 한 사람 또는 한 시기를 취급한다지만, 그들이 취급하는 행위는 하나라 하더라도 그 속에 여러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예컨대 『퀴프리아』와 『소(小) 일리아스』의 작가들의 경우가 그렇다. 그 결과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로부터는 각각 한 편, 또는 많아야 두 편의 비극이 만들어질 수 있는 데 비하여 『퀴프리아』로부터는 다수의 비극이, 그리고 『소(小) 일리아스』로부터는 8편 이상의 비극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즉 『무구 재판』, 『필록테테스』, 『네옵톨레모스』, 『에우뤼필로스』, 『걸인 오뒷세우스』, 『라케다이몬의 여인들』, 『일리오스의 함락』, 『출범(出帆)』, 『시논』및 『트로이아의 여인들』이 그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제23장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만 하더라도 '너무나 방대해서' 좀처럼 완독하기가 쉽지 않은데 여기에 더해 '트로이아 서사시권'의 나머지 6편까지도 지금까지 온전히 전해졌더라면 과연 어땠을까요. 아마도 그 작품들을 모두 읽는 일은 누구에게나 벅찬 독서과제였을 게 틀림없습니다. 물론 몽테뉴와 같은 인물들은 우리와는 정반대로 두 팔을 들고 환호작약했겠지만 말이지요. 이러한 사정은 고대 그리스 비극의 경우까지를 포함하면 더욱 심해집니다. 소위 '그리스 3대 비극작가'의 작품만 하더라도 무려 305편에 이르는데 그 작품들이 온전히 다 전해졌더라면 어땠을까요. 그나마 현재까지 온전히 전해 내려오는 작품이 고작 33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도리어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요.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고대 그리스 비극작품들

『일리아스』에서 비롯된 이야기가 '트로이아 서사시권'을 거쳐 고대 그리스 비극작품들로 확장되다 보니 이 영상이 다루는 이야기가 너무 방대해진 느낌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이제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되돌아 가지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벗어난 고대의 작품들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일리아스』라는 단 하나의 작품이 품고 있는 방대함과 탁월함은 그 어떤 다른 문학작품들과도 비교하기 어렵다는 사실 말입니다. 모두 24권으로 된 『일리아스』 하나만 하더라도 '트로이아 서사시권'의 다른 4개의 전쟁 서시사를 모두 합친 것(22권)보다 길며, 24권으로 된 『오뒷세이아』 또한 다른 영웅들의 귀국을 노래한 것(5권)보다 훨씬 더 방대하니 말입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함선 목록>처럼 단지 물질적인 요소들만 방대하게 수록한 작품이 결코 아닙니다. 인간이 지닌 온갖 다양한 감정들이 등장인물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채롭게 담겨 있습니다. 그토록 등장 인물들도 많고, 각각의 인물들마다 사연도 많고, 전투에서 적과 맞닥뜨려 싸우다가 다치고 죽는 모습들도 그야말로 각양각색인데, 호메로스는 10년 동안이나 길게 이어졌던 그 유명한 전쟁 이야기를 과연 어떤 식으로 들려줬을까요.

호메로스

호메로스는 『일리아스』 안에서 진행된 9년 동안의 일들을 단지 50일 동안의 사건을 통해 놀랍도록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역병이 만연하던 9일, 올륌포스의 신들이 아이티오페스족의 잔치에 가 있던 12일,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모욕하던 12일, 헥토르의 화장을 위해 장작을 준비하던 9일을 빼고 나면 실제로 '실시간 생중계 화면'처럼 구체적으로 묘사된 날들은 불과 며칠밖에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일리아스』를 읽고 나면 마치 온갖 무기들이 격렬하게 맞부딪쳐 굉음을 내고, 전차와 말들이 순식간에 주인을 잃고 이리저리 나뒹굴고, 두개골이 박살난 시신들이 처참하게 벌판을 가득 채운 피비린내 나는 전장터에서 겨우 빠져나온 듯한 느낌을 갖게 되지요. 호메로스의 묘사가 그만큼 탁월하고 박진감이 넘치기 때문이지요.


호메로스를 다루게 되면 그를 흠모했던 숱한 인물들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데, 그런 인물들 모두가 호메로스에게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플라톤만 하더라도 『국가』에서 호메로스의 문장들을 얼마나 심하게 타박했던가요. 수많은 문장들을 일일이 적시하면서까지 말이지요. 그의 비판 요지는 간단했습니다. 시인은 진실재인 '이데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대상을 화가처럼 '모방'하기만 하는 모방자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플라톤은 스스로 '시의 매력'에 한없이 이끌리면서도 결국 '이데아'를 추구하는 자신의 철학과 모순되기 때문에 '시인'을 비판해야만 했습니다. 플라톤의 '시인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나중에 결국 쇼펜하우어에 의해 '플라톤의 결함'으로 비판받게 되고, 니체는 거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플라톤을 '유럽이 낳은 예술의 가장 강력한 적'으로까지 몰아부칩니다,

<호메로스의 대관식>(부분)에 잠가한 인물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스승과 제자 사이였지만 '시'에 대한 입장만큼은 서로 확연히 달랐다는 점은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자가 무작정 스승의 입장만을 옹호했더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결코 쓰여지지 못했을 테니 말이지요. 호메로스를 흠모했던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 가운데 으뜸으로 꼽고 싶은 사람은 아무래도 몽테뉴가 아닐까 싶습니다. 입심좋기로 소문난 그가 호메로스를 두고, '자기 권위로 많은 신들을 세상에 내놓고 사람들을 믿게 한 그가, 자신이 신의 지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자주 이상하게 여겨왔다.'고까지 말한 것도 지나친 너스레가 아니라 진실로 아름다운 칭찬으로밖에는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탁월한 인물들에 대하여

누구든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특출한 인물을 골라 보라고 하면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게 탁월한 인물 셋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호메로스이다. ······


사실 나는 자기 권위로 많은 신들을 세상에 내놓고 사람들을 믿게 한 그가, 자신이 신의 지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자주 이상하게 여겨 왔다. 앞을 보지 못하며 궁핍한 몸으로 학문이 아직 규칙과 확실한 관찰로 사물들을 기록해 놓기도 전에, 그는 이런 일을 모두 알고 있어서, 다음에 정치를 세우고 전쟁을 지휘하고, 어느 학파에 속하건 종교나 철학에 관한 것을 쓰고, 기술을 다루는 일에 간섭하는 자들을 누구나 다 그를 모든 사물들에 관한 지식의 지극히 완벽한 스승과 같이 보며, 그의 작품을 모든 종류의 능력을 기르는 기초 터전 같이 이용했다.

그가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탁월한 것을 생산해 냈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사물들은 출생할 때에 대개 불완전하며 성장하면서 불어 가고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옛 사람들이 그를 두고, 자기 앞에 아무도 모방할 자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 뒤에 그를 모방할 자가 없었다고 말한 이 아름다운 증언에 따라, 우리는 그를 시인들 중에서 처음이며 마지막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의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생기와 행동을 가진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유일한 실질적인 언어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다리우스 왕의 전리품 가운데에 호화롭게 장식된 한 상자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호메로스를 넣어 두는 데에 사용하라고 명령하며, 이 시인은 자기 군사 업무에 가장 훌륭하고 충실한 고문이라고 말하였다.

플루타르코스의 판단에 의하면, 그는 독자에게 언제나 전혀 다르게 나타나며, 항상 새로운 우아미로 개화하며, 결코 사람들을 물리게 하거나 염증 나게 하는 일이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가라는 특별한 찬사를 받는다. 장난하기 좋아하는 알키비아데스는 학자로 자처하는 어떤 자에게 호메로스 한 권을 달라고 요구했더니, 가진 것이 없다고 하자, 따귀를 한 대 갈겨 주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 신부님들 중에 성무 일과서(聖務日課書)를 갖지 않은 자를 보는 식이다.

그뿐더러 어떤 영광을 그의 영광에 비겨 볼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이름과 작품보다 더 사람들의 입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트로이의 헬레네와 그녀로 인한 전쟁만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고 인정받은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네 아이들은 3천 년이 넘는 옛날에 그가 꾸며 댄 이름을 아직도 쓰고 있다.

누가 헥토르와 아킬레우스를 모르는가? 어느 사사의 가문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가 꾸민 이야기 속에 자기들의 근원을 찾고 있다. 이 작품은 국왕들과 국가들과 황제들이 그렇게 오랜 세기를 두고 그 속에 자기의 역할을 연기해 오고, 이 큰 우주 전체가 그것의 무대로 쓰이는 한 고상한 연극이 아닌가?(825∼828쪽)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호메로스에 대한 수많은 상찬 가운데 몽테뉴가 했던 말보다 더한 상찬을 과연 어디서 찾아낼 수 있을까요? 이 위대한 문학작품은 현대인들이 단번에 완독하기에는 분명 쉽지 않은 작품이지만, 끝까지 다 읽고 나면 마치 거대한 우주정거장을 다녀온 듯한 느낌마저 들 만큼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인간계뿐 아니라 신계까지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호메로스의 세계가 그만큼 드넓고도 심원하기 때문이지요. 이것으로 호메로스에 대한 소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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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 관한 정의 가운데 진부하지만 꽤나 유명해진 이야기가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 라는 말입니다. 이 유명한 정의는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작가 이탈로 칼비노가 쓴 『왜 고전을 읽는가』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문장입니다.


그런데, 톨스토이의 대표작이자 세계 최고의 장편소설로 불리는 『전쟁과 평화』를 보고 있노라면 이 작품만큼은 칼비노가 말한 고전의 첫 번째 정의에서 살짝 벗어나는 작품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전쟁과 평화』는 평생에 한 번 읽기에도 분명 벅찬 작품인데, 단지 이름난 고전이기 때문에 이걸 '지금 다시 읽고 있다'고 가볍게 말할 사람은 그리 쉽게 찾아보기 어려울 테니 말입니다.




이 유명한 작품을 2016년에서야 겨우 한 번 읽었던 저로서는 이 방대한 작품의 엄청난 분량에 놀라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몽테뉴 수상록』,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등과 같은 두껍기로 소문난 대작들과 함께 놓고 작품의 길이를 서로 비교해보기까지 했더랬습니다. 과연 어마어마했습니다. 이 작품의 길이는 대략 『돈키호테』의 1.3배, 『안나 카레니나』의 1.6배, 단테의 『신곡』의 1.8배,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의 3.0배 정도였으니까요.


이토록 방대한 작품을 내 평생 다시 읽을 날이 과연 있기나 할까 싶은 예감 때문에 『전쟁과 평화』를 처음으로 읽는 동안에도 이 작품에 담긴 빛나는 문장들을 적잖이 필사해 놓았는데, 정말 뜻밖에도(!) 이 작품을 다시 읽을 수밖에 없는 참으로 고약한 기회가 금년 봄에 찾아왔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터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도 한때 구소련 연방의 종주국이자 우크라이나에게는 큰 집이나 다름없던 러시아가 다짜고짜 우크라이나로 쳐들어간 전쟁이었습니다. 지금이 도대체 어떤 시절인데? 전세계인이 유튜브 생중계로 밤낮없이 빤히 쳐다보는데도 이토록 볼썽사나운 전쟁이 터진단 말인가? 누군가 명령을 내리기만 하면 수십 만 군대가 하루 아침에 탱크를 몰고 이웃나라 영토를 마구 짓밟아도 좋단 말인가? 지금이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연유로?


전쟁의 발발 원인은 놀랍게도(!) 러시아의 지도자 푸틴이 스스로를 21세기판 '러시아 제국의 차르'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무슨 기묘한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싶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10년 전인 1812년에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가 이끄는 60만 대군에 맞서 러시아 국민들이 온 힘을 다해 적들을 물리쳤던 영광스런 '조국전쟁'의 기억은 벌써 말끔히 잊어버렸단 말인가? 


모스크바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


조국전쟁 당시 수도 모스크바까지도 통째로 적군에게 내어주고 끝없이 도망치면서도 언젠가는 기어이 자신들의 영토를 되찾을 희망을 결코 버리지 않았던 그 위대한 러시아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지고, 제국주의 군대에 무참하게 침략당했던 러시아가 도리어 무람한 침략자로 돌변해 나폴레옹의 군대를 흉내낸단 말인가? 러시아가 낳은 위대한 예술가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1812년 서곡의 영광과 찬미는 하루 아침에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져도 좋다는 말인가! 


6년 만에 다시 읽는 『전쟁과 평화』는 매일 긴박하게 전해지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 때문에라도 결코 허투루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비롯, 2014년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부터 강제로 빼앗은 크름 반도 등은 마침 『전쟁과 평화』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지명이어서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왔습니다. 또한 이 작품을 쓴 톨스토이는 젊어서 한 때 포병 장교로 근무하면서 크름 반도의 군사적 요충지인 세바스토폴에서 터키와의 격렬한 전투를 치른 경험까지 있던 터였습니다. 어쨌든 하루하루 우크라이나의 여러 도시에서 긴박하게 진행되는 살벌한 전쟁 상황을 지켜보면서 다시 읽는 『전쟁과 평화』는 그저 평화로운 시대에 특별한 긴장감 없이 읽었던 『전쟁과 평화』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는데, 그건 바로 이번 전쟁 때문에 수많은 도시가 폐허로 변하고 숱한 민간인 사상자가 속출하는 참극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폐허가 된 모습



사실 인류의 역사를 장식했던 대전쟁들은 수십 만의 군대가 막대한 자원을 총동원하여 사생결단으로 서로 맞붙어 싸운 만큼 인류의 삶에 오래도록 파괴적인 후유증을 남기기 마련이지만, 그토록 끔찍한 전쟁의 결과에 비해 그 전쟁의 원인이라는 게 따지고 보면 보잘 것 없는 한 인간의 헛된 욕망에 불과한 경우도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고대로부터 다양한 전쟁의 원인들을 고찰했던 역사가나 철학자들은 바로 그 때문에 한결같이 비슷한 장탄식을 쏟아냈습니다.


"그토록 사소한 사건 하나가 그토록 엄청난 대사건으로 비화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고대의 여러 이름난 전쟁과 인물들의 이야기에 유난히 탐닉했던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는 이같은 전쟁의 고약한 특성을 특유의 입심으로 다음과 같이 재치있게 표현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수천 수만의 무장한 인간들의 가공할 장비, 그 맹위·정열·용기, 이런 것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원인으로 일어나서, 가벼운 인연으로 사라지는가를 고찰해 보면 기가 막힐 일이다.

파리스라는 사람 때문에 저 처참한 전쟁이
그리스와 외족(外族) 국가 사이에 야기되었다고 전한다. 
  (호라티우스)


아시아 전체가 파리스의 오입질 때문에 전쟁으로 불타 버려 파괴된 것이다. 단 한 남자의 시기심, 울분, 쾌락, 가족 간의 질투 등, 수다스런 마나님 둘이 서로 할퀴며 대들게 할 만큼 성나게 할 것도 못 되는 원인들, 이것이 전쟁의 핵심이며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런 전쟁을 일으킨 주요한 인물이며, 동기가 된 자들의 말이면 바로 믿어 주어야 할 일인가?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영화 <트로이>(2004)


1812년에 러시아가 나폴레옹의 60만 대군에 맞서 싸웠던 조국전쟁 역시 그 원인을 따지고 보면 나폴레옹의 권력욕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나폴레옹은 자신이 벌인 전쟁을 스스로 숭고하다고 여겼지만, 톨스토이가 보기에 나폴레옹의 그런 인식이야말로 자신의 무가치함과 나약함을 인정하는 데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숭고에서 (그는 자기 내부에 무슨 숭고한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우스개 사이의 거리는 불과 한 발짝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온 세계가 50년에 걸쳐서 '숭고! 위대! 위대한 나폴레옹! 숭고와 우스개 사이는 단 한 발짝이다!'고 되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선악의 기준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함을 인정하는 것은 다만 자신의 무가치와 한없이 비소(卑小)함을 인정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 동서문화사, 『전쟁과 평화』



모스크바에서 퇴각하는 나폴레옹


인류의 황제가 될 뻔한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점령했던 그해 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서둘러 도망친 끝에,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니우스에 이르러서야 겨우 한숨을 돌렸다고 합니다. 그때 그가 말했던 '숭고와 우스개 사이의 거리는 불과 한 발짝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은 톨스토이뿐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 자신의 범죄가 발각될까 극도의 두려움에 떨면서도 잠시나마 나폴레옹을 떠올리고 나서 자신의 죄는 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면서 거의 웃음을 터뜨릴 뻔하지요.


 

<아니, 그 사람들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어. 진짜 《거인》,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는 사람은 툴롱을 호령하고 파리에서 대학살극을 벌이고, 이집트에서 군대를 《잃고》, 모스끄바로의 진군에서 50만의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빌니우스에서는 그 일을 우스갯소리로 넘겼다. 그런데도 죽은 후에는 그를 우상으로 떠받들지 않았는가. 즉 《모든 것》이 허용된 것이다. 아니, 아마도 이런 사람의 몸은 살로 되어 있지 않고 청동으로 되어 있는 모양이다!> (398쪽) - 열린책들, 『죄와 벌』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


일생 동안 러시아 민중들의 삶에 대해 늘 각별한 애정과 연민을 지녔던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으로 빚어진 조국전쟁(1812년 전쟁)의 대서사를 외면할 리는 결코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마치 전 인류를 구원할 듯이 파죽지세로 전 유럽을 휩쓴 끝에 마침내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 원정까지 감행했지만, 사실 러시아 민중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은 한낱 전쟁 기술의 천재가 벌인 무모한 침략 전쟁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민중이야말로 역사의 진정한 주체'라는 톨스토이식 역사관이 녹아든 작품이 바로 『전쟁과 평화』였습니다.


톨스토이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빛나는 예술작품으로 완성하기까지는 적잖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젊어서 한 때 포병 장교로 복무하면서 크림전쟁(1853∼1856) 당시 세바스토폴 전투에 직접 참전한 경험도 있었고, 단편 「12월의 세바스토폴」, 「1855년 8월의 세바스토폴」등을 집필하기도 했는데, 흑해 최대의 항구 도시 세바스토폴은 2014년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부터 크름 반도를 강제로 빼앗을 때까지 숱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고대 그리스 식민지 시절부터 따지자면 무려 2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배권 쟁탈이 벌어진 흑해의 전략적인 요충지였습니다.


세바스토폴



톨스토이는 크림 전쟁이 끝난 1856년, 5년 동안의 포병장교 생활을 마치고 퇴역하면서 크름 반도를 떠났는데, 바로 그해에 그는 유형지에서 막 러시아로 돌아오고 있던 어느 데카브리스트에 대한 장편소설에 착수하게 됩니다. 그 작품에 대한 구상은 『전쟁과 평화』의 창작이 본격화된 1863년까지도 길게 이어졌는데, 따지고 보면 데카브리스트 혁명이 일어난 근본적인 이유 또한 1812년 전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데카브리스트의 난(1825)


일명 '12월 당원'으로도 불리는 데카브리스트들은 1812년 조국 전쟁때 나폴레옹을 추격하여 파리까지 뒤쫒아간 러시아 귀족 출신의 청년 장교들이 서유럽 자유 사상을 접하면서 태동하기 시작했으며, 1816년부터 혁명적 결사를 조직하여 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활동을 계속했는데, 1825년 알렉산드르 황제가 갑작스레 사망한 뒤 반동 보수 성향의 둘째 동생 니콜라이 1세가 후계를 잇게 되자 황제 즉위식이 열리던 당일 무장 봉기를 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이들은 곧바로 황제의 군대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고, 전도유망했던 명문가 귀족 청년들 중심의 데카브리스트들은 시베리아 유형을 떠나 대부분 그곳에서 죽었으며, 이 비극적인 사건은 푸슈킨을 비롯한 러시아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오래도록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지요.


"1856년에 나는 가족과 함께 러시아로 돌아오고 있던 한 데카브리스트를 주인공으로 한 중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현재에서 내 주인공의 오해와 불행의 시기인 1825년으로 옮아갔고, 시작했던 작업에서 손을 놓아버렸다. 그를 이해하려면 그의 젊은 시절로 옮아갈 필요가 있었고, 그의 젊은 시절은 1812년의 러시아, 그 영광의 시대와 일치했다 ……"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유배지에서 돌아온 어느 혁명가의 귀가 모습)


1869년 12월에야 최종적으로 완성된 『전쟁과 평화』는 끝끝내 데카브리스트를 주인공으로 삼은 1856년의 작품 구상과는 멀어지고 마는데, 1812년 전쟁을 다루기 위해서는 또다시 그 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 시기인 1805년부터 본격화된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등이 각축을 벌였던 여러 전쟁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전쟁과 평화』는 1805년부타 시작하여 1812년 조국 전쟁에 이르는 일련의 기나긴 과정을 시간적 배경으로 다루는데, 1825년에 일어난 데카브리스트 혁명까지 한 작품에 모두 담아내기에는 서사의 범위가 너무 방대했기 때문에 대문호 톨스토이조차도 엄두가 나지 않았던 셈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구상 단계에서부터 이처럼 커다란 변화를 겪었지만 집필 과정에서도 끊임없는 수정 보완작업을 거친 것으로 유명한데, 작가 스스로도 이런 다짐을 남길 정도였습니다.


"주요한 것을 쓰기 위해서는 서두르지 말고, 수정을 지겨워하지 말 것이며, 똑같은 것을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고쳐 쓰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야스나야 폴랴나 영지



톨스토이가 7년 동안이나 심혈을 기울여 손질한 끝에 탄생한 작품은 어느 장면이든 예외없이 현실 세계를 그대로 묘사한 듯한 생생한 느낌이 드는데, 톨스토이 평전을 쓴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 소설을 읽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창문 너머로 현실 세계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고, 막심 고리키는 그의 형상들은 지극히 조형적이고 "거의 육체적으로 느껴져서" 그것들을 "만지려고"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을 뻗을 만큼 감각적이고 실제로 우리를 흥분시킨다고 평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얘기들은 랄프 왈도 에머슨이 『몽테뉴 수상록』을 두고 표현했던 말과도 쏙 빼닮았습니다.


"성실성과 정수는 그 사람이 쓴 문장에 나타난다. 여기 실린 문장에서 단어를 잘라 내면 피가 쏟아질 것이다. 문장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 랄프 왈도 에머슨, 『위인이란 무엇인가』


톨스토이는 섬세한 세부 묘사와 장편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사상적 개념 모두에 자신의 생활 경험을 생생하게 녹여냈는데, 포병장교로 복무하는 동안 캅카스와 세바스토폴 전투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했던 인상들을 꼼꼼히 기록해 놓은 일기장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쟁과 평화』를 집필하면서 톨스토이는 인물 묘사와 세부적인 심리 묘사, 플롯과 관련된 상황을 창조하기 위해 1860년대와 1850년대뿐만 아니라 1840년대에 쓴 일기까지 뒤적일 정도였습니다.


포병장교 시절의 톨스토이(1854)



톨스토이는 이 장편소설의 집필을 위해 역사적 저작과 회고록 등의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는 데에도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부었습니다. 톨스토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대함에서 비롯된 위업으로 보는 것을 속물적인 우쭐거림으로 보았고, 다른 사람들이 위대함을 발견한 행위에서 오히려 그의 약점을 발견하고자 애쓸 만큼 언제나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보는데 힘썼습니다.


예를 들면 보로디노 전투의 생생한 묘사를 위해 톨스토이는 장군용 지도를 가지고 이틀간이나 말을 바꿔타고 전선을 누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생존한 어느 전쟁용사의 세부적인 경험담을 직접 들으려고 수 킬로미터나 기차를 타고 그를 찾아간다. 그는 모든 서적을 독파하고, 도서관들의 구석구석을 이 잡듯 뒤지고, 심지어는 귀족이나 문헌담당자에게 실종된 문서나 사적인 서한들을 보여달라고 요구하는데, 그것은 오직 그로부터 현실의 본질을 캐내고자 함이다. 이렇게 여러 해를 거듭하면서 수없이 많은 사소한 관찰로부터 미소한 양의 정수가 수은덩이처럼 옹골차게 모여지고 또 그것은 점차 유연하게 상호 침투됨으로써, 둥그렇고 순수하며 완전한 형식으로 발전하는 것이다.(64쪽) - 슈테판 츠바이크, 『톨스토이를 쓰다』


보로디노 전투, 1812년


"『전쟁과 평화』란 무엇인가?" 톨스토이는 이 특별한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스스로 '저자의 견해'를 잡지에 기고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이것은 장편소설도 아니고, 서사시도 아니고, 역사적 연대기는 더더욱 아니다." 아니, 세계 최고의 장편소설로 널리 인정받는 이 소설이 장편소설이 아니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요?


『전쟁과 평화』는 실제로 여느 장편소설과는 사뭇 다른 형식과 구성을 지닌 매우 독특한 작품입니다. 기본적인 줄거리는 가공의 등장인물들 간에 복잡하게 얽힌 개인적인 운명들이 1812년 조국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면서 어떤 시련들을 겪으며 새로운 변화와 운명들을 맞게 되는가를 그리고 있지만, 그 사이사이에는 1812년 조국전쟁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의 흐름을 좌지우지했던 나폴레옹을 비롯한 다양한 실존 인물들의 움직임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특히 아우스터리츠 전투와 보로디노 전투 등 당대 유럽의 수십 만 대군이 격렬하게 싸웠던 유명한 전투들은 여느 역사가의 서술 못지 않게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거대한 건조물이며 얼마나 놀라운 정연함인가! 어떤 문학도 우리에게 그와 비슷한 어떤 것도 제시하지 못한다. …… 국가 및 개인 생활의 모든 영역, 역사, 전쟁, 땅 위에 있는 온갖 공포, 모든 열정, 신생아의 고고성에서부터 죽어가는 노인의 마지막 감정 폭발에 이르기까지 인간 생활의 모든 순간, 동료에게서 지폐를 훔친 도둑의 감정에서부터 영웅주의의 고상한 움직임, 그리고 내적 깨달음에 대한 생각들에 이르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기쁨과 슬픔,  이 모든 것이 이 그림 속에 구현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어느 한 인물도 다른 인물을 가리지 않고, 어느 장면, 한 인상이 다른 장면과 인상을 방해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적재적소에 배치되고, 모든 것이 명확하고, 모든 것이 독립되어 있으며, 모든 것이 서로서로 그리고 전체와 조화를 이룬다." 

- N. N. 스트라호프(1828∼1896)



작품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는 이 정도로 그치고, 이제부터는 작품 속에 담긴 구체적인 이야기로 들어가보지요.


소설이 시작되면 1805년 어느 여름날 러시아의 군사적, 정치적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하는 당대 최상위급 인물들이 황태후를 모시는 어떤 관리의 저택으로 속속 모여드는데, 그날 저녁 모임에서 귀족들이 주고받는 나폴레옹 황제의 움직임을 비롯한 '최신 국제 정세에 관한 다양한 대화'들은 민중들의 삶과 괴리된 당대 러시아 귀족 사회의 위태로운 일면을 여과없이 드러내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위태로운 역사적 시기에 러시아 미래의 희망인 '새로운 젊은 세대'가 바야흐로 봄꽃처럼 피어나기 시작했으니, 그 무대는 바로 로스토프가의 영지였습니다. 거기에는 이 작품의 여주인공인 열세 살의 나타샤, 앳된 장교 보리스, 대학생 니콜라이, 열다섯 살의 소냐, 어린 막내 페챠가 온갖 자유분방함과 꾸밈 없는 활발함으로 매혹적인 장면들을 마음껏 발산합니다. 장난스러운 아이들의 세계는 온갖 권력다툼의 총화로 나타나는 전쟁과 정확히 대비되는 '평화로운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동심, 따스함, 발랄함, 명쾌함은 독자들에게 즉각적이면서도 더 바랄 게 없을 만큼의 행복감을 고조시킵니다.


로스토프 가 인물들


한편, 로스토프가에 뚜렷이 대비되는 또다른 주인공의 집안은 볼콘스키 공작 집안입니다. 한때 황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육군 원수까지 지낸 늙은 공작에겐 본분에 충실하면서도 근엄한 아버지를 그대로 빼닮은 젊은 안드레이 공작과 귀여운 젊은 공작부인, 여동생 마리야 등이 엄격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함께 생활합니다. 안드레이 공작의 친구이자 병든 베주호프 백작의 사생아인 피예르는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가 이제 막 모스크바로 돌아온 순박한 청년인데, 러시아의 대부호였던 부친이 사망하자 그는 일약 모스크바에서 가장 핫한 신랑감으로 떠오르지만, 그는 뚜렷한 직업도 없는 데다 몸가짐조차 상류사회의 다듬어진 예절에 어긋나기 일쑤였고, 세상물정도 모르고 그저 물려받은 재산만 많은 무람한 청년일 뿐이었습니다.


볼콘스키 가 인물들



이들 세 집안과는 또다른 분위기의 귀족집안은 바실리 쿠라긴 공작 집안입니다. 바실리 공작은 몹시 출세지향적인 성격이어서 화려한 미모를 지닌 외동딸 옐렌을 피예르와 결혼시키며, 차남인 아나톨은 불량배 친구들과 어울려다니며 사고나 저지르던 끝에 안드레이 공작과 약혼한 나타샤를 유혹해 야반도주까지 시도합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은 1805년의 아우스터리츠 전투때부터 차례대로 군에 입대하여 여러 전장에 배속되어  나름대로 군대의 규율과 전투 경험들을 쌓게 되는데, 젊은 안드레이 공작은 러시아군 총사령관 쿠투조프의 부관으로, 니콜라이는 견습사관에서 시작하여 기병장교로, 피예르는 전쟁 막바지에 뒤늦게 민병대의 일원으로 참전했다가 프랑스 군대의 포로로 끌려가며, 로스토프가의 어린 막내 페챠까지도 세상물정 모르는 10대의 어린 나이에 군대에 자원입대하지만 막상 전쟁터에서는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한 채 전사하고 맙니다. 


수많은 전쟁 장면에서 톨스토이는 서로 다른 계층과 다양한 근무 환경에 놓인 등장인물들을 모두 전쟁에 참여시키며 그들의 행동들을 서로 긴밀히 연결시켜 민족적 이해로 단합시키는데, 최초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쇤그라벤과 아우스터리츠 전투 장면에서 티모힌의 중대, 투신의 보병 중대, 바그라티온 총사령관의 임무 수행 모습들은 그로부터 7년 후에 벌어진 1812년의 보로디노 대전투에 참전했던 러시아 민중들의 행동에서도 그대로 재현됩니다.


러시아군 총사령관 쿠투조프



톨스토이가 이 작품에서 그려내고자 애쓴 대목들은 대규모 군대들이 접촉하는 전선 보다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 속에서 인물들마다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독특한 개성들을 통해 최대한으로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유럽 세 나라의 황제가 동시에 참전했던 아우스터리츠 대전투에서 전투 경험이 전무했던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은 엉겁결에 큰 부상을 입고 쓰러지는데 바로 그때 안드레이 공작이 들판에 드러누워 쳐다본 파란 하늘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전쟁과 평화 사이의 거리'가 얼마만큼 아득한가를 각인시키는 동시에, 작가 자신의 실제 전투 경험이 그대로 담긴 듯해서 다시 읽어봐도 여전히 감동적입니다.


‘뭐야, 이건? 나는 쓰러져 있는 것인가?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뒤로 쓰러졌다. ……  머리 위에는 하늘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ㅡ개어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없이 드높고, 그 아래를 회색 구름이 조용히 흐르고 있는 높은 하늘이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조용하고 평온하고 엄숙할까. 내가 달리고 있었던 때와 판이하다.‘ 안드레이는 생각했다. ‘우리들이 달리고 외치고 서로 잡고 싸운 것과는 전혀 다르다ㅡ구름이 이 드높고 끝없는 하늘을 흘러가는 모습은 전혀 다르다. 왜 나는 전에 이 높은 하늘을 보지 못했을까? 그리고 이것을 알아차린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그렇다! 모든 것은 공허다. 이 끝없는 하늘 이외에는 모든 것이 거짓이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다. 아니, 이 하늘 외에는 그것조차도 없다. 정적과 평안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고맙게도!‘(384-385쪽)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들은 이렇게 하나둘씩 각자 자신만의 '고난의 여정'을 겪게 되지요. 남주인공 격인 젊은 부호 피예르 베주호프 백작은 옐렌이라는 외모만 번지르르한 사치스런 여성과 결혼하면서부터 불행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피예르와 친구 사이인 안드레이 공작은 전쟁터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고통을 겪습니다. 로스토프가의 장남 니콜라이는 무모한 도박에 빠져 기울어가는 집안 형편을 더욱 궁지에 빠트리게 되고 둘째딸 나타샤는 자신의 사랑을 보리스에서 피예르로, 또다시 바람둥이 아나톨과 안드레이 공작에게로 거듭 옮아가는 과정 속에서 고통을 겪지요. 


한편, 『전쟁과 평화』의 여주인공 나타샤는 타고난 청순하고 아리따운 외모와 특유의 밝고 활기찬 성격 때문에 로스토프가의 젊은이들 가운데서도 유난히 돋보이는 매력을 발산하는데, 그녀가 얼마만큼 쾌활하고 사랑스러웠는지는 1956년에 만든 불후의 명작 영화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오드리 햅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런 행동으로 언제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독차지한 데다가, 그녀 스스로도 주위 사람들을 언제나 기분좋게 만드는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생기발랄하고 사랑스런 그녀도 젊은 아내와 사별한 안드레이 공작에게 반해 그와 약혼하면서 한순간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고 맙니다. 건달이나 다름없는 바람둥이의 유혹에 빠져 안드레이 공작과 파혼에 이르고, 게다가 그 남자와 야반도주까지 시도한 끝에 음독자살을 기도하는 등 온갖 시련과 극심한 고통을 겪은 나타샤는 예전의 발랄함과 건강과 미소까지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파혼 후 극심한 고통을 겪는 나타샤


저는 『전쟁과 평화』를 맨 처음으로 읽을 때는 그녀가 그렇게나 자주 사랑하는 남자를 쉽게 바꿔가며 방황한 끝에 최종적으로 피예르와 결혼하게 되는 과정을 보면서도 벅찬 감동까진 느끼지 못했는데, 두 주인공 사이의 행복한 결말을 미리 다 알고 나서 다시 찬찬히 읽는 동안에는 처음 읽을 때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의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나타샤와 피예르 사이에 일찍부터 움튼 사랑은 처음부터 몹시 특별했으며, 이 두사람을 둘러싼 여러 등장인물들이 차츰 성장하면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는 와중에도 오로지 그들 두 사람 사이에 움튼 사랑의 감정만큼은 언제나 한결같았으며, 나타샤가 극도로 방황하는 동안에도, 가령 안드레이 공작과의 약혼과 파혼뿐 아니라 아나톨에게 매혹되어 야반도주를 도모했을 때조차도 더욱 깊어만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재회하는 나타샤와 피예르


『전쟁과 평화』는 가공의 등장인물들 사이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만 다루는 게 아니라 1812년 전쟁의 발생 원인과 그 결과에 대해서도 몹시 진지하게 고찰하는데, 그토록 대규모의 군대가 충돌한 전쟁이 그저 몇몇 황제들의 권력욕으로만 설명될 수는 없으며, 당대 민중들의 온갖 의지가 한데 모여진 끝에 그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필연성까지도 성찰하면서, 한발 더 나아가 인간의 자유의지가 과연 인류 역사에 얼마만큼 개입될 여지가 있는가 하는 철학의 근본 문제까지도 파고듭니다. 톨스토이의 몇몇 다른 작품에도 그러한 경향이 있듯이, 『전쟁과 평화』에도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곳곳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데, 쇼펜하우어 특유의 '의지의 형이상학'을 그대로 베낀 듯한 다음 문장은 특히 인상적입니다.


쇼펜하우어



역사의 노예


인간은 의식적으로는 자신을 위해서 살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전 인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도구의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행하여진 행위는 되돌아오지 않고, 인간의 행위는 시간 속에서 다른 인간들의 무수한 행위와 결부되어 역사적인 뜻을 얻는다. 어느 인간이 사회의 상하관계에서 높은 위치에 있으면 있을수록, 많은 사람과의 관계를 가지면 가질수록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더욱 큰 권력을 가지게 되고, 그 일거일동이 미리 결정되고 필연적이라는 것이 더욱 명백해진다.


황제는 바로 역사의 노예인 것이다. (841-842쪽)



『전쟁과 평화』는 전4권, 15부 361장, 에필로그 2부 28장으로 구성되고, 559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실로 웅대한 장편 역사소설입니다. 당대 최고의 권력을 가진 여러 황제들과 최고사령관뿐 아니라 이름조차 생소한 까자크의 농노들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온갖 인물들이 러시아뿐 아니라 흑해의 크름 반도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광활한 무대를 배경으로 격동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겪게 되는 인생의 온갖 희로애락들에 대한 묘사와 서사 자체도 놀랍지만, 작가 스스로도 온갖 사건들의 틈바구니 속으로 뛰어들어 필요할 때마다 자신의 목소리를 길게 서술해 놓은 '역사 비판'과 '전쟁 철학' 등이 한데 녹아 있어서 몹시 특별한 느낌을 줍니다.


한편, 전쟁이 제아무리 치열하게 벌어지는 와중에 있다고 하더라도, 전쟁터에서 비켜나 있었던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기 앞의 생'을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 소설 속엔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 이야기 말고도 당대 러시아의 명문 귀족 집안 사람들이 어떻게 각자의 삶을 꾸려나가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소설의 또다른 한 축을 이룹니다. 각양각색의 등장인물들이 겪는 즐거움과 행복, 좌절과 불행, 사랑과 배신, 소박과 탐욕을 작가는 놀랍도록 섬세하고도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바로 그러한 점들이 이 소설을 전쟁소설만이 아니라 가정소설 혹은 연애소설이나 심지어 성장소설처럼 읽히게 만듭니다.


2022년 2월에 러시아가 벌인 무모하기 짝이 없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어느새 열 달째 이어지고 있지만 종전의 기미는 여전히 오리무중인 듯합니다. 어느덧 끝없는 소모전으로 변한 참혹한 전쟁이 어서 빨리 마무리되고,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땅에도 평화가 다시 찾아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이것으로 『전쟁과 평화』에 대한 작품 소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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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22-12-28 1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렌님의 페이퍼를 보니 독서욕구가 뿜뿜합니다. 제가 지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벽돌깨기를 하고 있는데 현재 추세로 보면 아마도 2034년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전쟁과 평화를 읽게 되겠습니다. ㅋㅋㅋㅋ 2034년!!! ㅋㅋㅋㅋ

oren 2022-12-29 00:41   좋아요 0 | URL
2034년이라면 <멋진 신세계>의 시간적 배경이 아닐까 싶을 만큼 아득하게 느껴지지만, 막상 2034년이 닥치면 무슨 엄청난 미래 같지는 않을 듯한 느낌도 듭니다. 아무쪼록 부지런히 달려서 <전쟁과 평화>와 멋지게 조우하시길 바랄께요.^^ 2034년도 좋고, 물론 그 이전이나 그 이후로도 좋아요.^^
 



한때 구소련 연방의 핵심 국가였던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뜬금없는 대규모 무력 침공 때문에 하루 아침에 참혹한 전쟁터로 돌변했습니다. 구소련 연방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경제 부흥 등을 위해 NATO 가입을 추진하는 등 친서방 행보를 보이자 소비에트 연방 대제국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현대판 차르' 푸틴 대통령이 외교적 해법조차 무시한 채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무참하게 대규모 침략 전쟁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유럽대륙에서 이토록 대규모의 전쟁이 발발한 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무려 80여년 만에 처음 보는 광경입니다. 이처럼 세계의 곳곳에서는 독재자의 영토확장 야욕에 의해서든 자유에 대한 염원 때문이든 끊임없는 갈등과 분쟁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구소련 연방이 해체된 이후 극단적인 냉전체제를 벗어나 마침내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하는 듯했지만, 소비에트 연방을 대신해 절대 양강 체제를 구축한 미국과 중국은 어느새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며 서로 으르렁대고 있습니다. 1979년 국교 수교 이래 처음으로 '강 대 강'으로 맞붙어 첨예한 무역 전쟁을 벌였으며, 앞으로도 치열한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일 것이라고 누구든 쉽게 예상하고 있습니다. 최근 홍콩에서 느닷없이 불거졌던 격렬한 반중 시위는 중국과 서방세계 사이에 전에 없던 극도의 긴장을 불러왔으며, 대만과 중국 사이의 해묵은 갈등 또한 언제든 큰 싸움으로 비화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야를 조금 더 남쪽으로 옮기면, 거기엔 남중국해 영유권을 둘러싼 중국과 여타 이해 당사국 간의 갈등이 언제 무력충돌로 비화될지 모르는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홍콩 반중 시위)

 

시야를 더욱더 넓혀 전지구적으로 돌리면 어떤가요? 2011년에 시작된 시리아 내전은 언제 마무리 될 지 기약조차 없으며, 남수단 내전은 국제 사회(미국, 중국, 아프리카 연합)의 중재로 휴전협정을 체결했음에도 여전히 유엔평화유지군이 주둔 중이며 한빛부대는 아직도 그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간을 좀 더 거꾸로 돌려 구소련 연방이 해체될 무렵인 1989년까지로 돌려 보면 어떨까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로 그토록 강고하게 유지된 냉전 체제가 급작스럽게 붕괴되고,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이라는 거창한 표현까지 내세우며 서구식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자유민주체제의 완전한 승리를 선언했음에도, 국가적, 종교적, 인종적 분쟁과 갈등은 끊임없이 발발하고 있습니다.

 

1991년에는 역사상 최초로 미국 중심의 다국적 연합군이 이슬람 국가인 이라크를 상대로 대규모 지상전을 벌였고, 아프가니스탄 분쟁은 미군이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끊임없는 내전을 벌였습니다. 미국과 이슬람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은 빈 라덴이 서방세계의 심장부 건물인 세계무역센터를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드라마틱하게 침공함으로써 하이라이트를 장식했으며, 전세계 유일 강국인 미국 사람들을 거대한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중동의 화약고인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네 차례의 중동 전쟁 이후로도 끊임없는 분쟁이 계속 발생하고 있으며, 대규모 인종 청소를 낳았던 발칸 반도의 보스니아 내전과 코소보 사태도 오랜 기간 동안 국제 뉴스를 장식하였습니다. 이밖에도 체첸 분쟁,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등이 잊을 만하면 또다시 분쟁으로 얼룩졌습니다.


(걸프 전쟁)


도대체 이토록 빈번한 지역간 분쟁과 갈등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계속 발생하는 걸까요. 이런 질문에 대한 새로운 시각틀을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진 게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었습니다. 이 유명한 책은 1996년에 출간되자 말자 전세계적으로 뜨거운 반응과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책에서 주장하는 요지는 이렇습니다. 탈냉전 이후로 발생하는 전세계적인 분쟁과 갈등은 '문명 사이의 충돌'로 바라볼 때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분쟁의 해결책 또한 그러한 시각틀로 바라볼 때 올바르게 도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실로 방대한 시공간적 범위에 걸쳐 '문명의 본질'을 탐구하고, 전세계 여러 문명들의 부침들을 살핍니다.


(새뮤얼 헌팅턴)

 

그가 분류하는 문명의 구분은 종교가 핵심적인 바탕을 이룹니다. 종교 말고도 문명을 구분짓는 요소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마을, 지역, 전통, 인종, 언어, 문화 등등이 문명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들입니다. 문명은 뚜렷한 경계선이 없으며 딱 부러지게 시발점과 종착점을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문명은 진화하고 적응하며, 인간들의 결속체 중에서도 유독 질긴 생명력을 갖습니다. 새뮤얼 헌팅턴의 말대로 그것은 극단적인 '장기 지속'의 양상을 지닙니다.  

 

문명의 독특하고 특별한 본질은 바로 그 장구한 역사적 지속성이며 사실상 가장 오래 된 이야기는 문명이다. 제국은 일어섰다 무너지고 정권도 왔다가 사라지지만 문명은 유지되며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이념적 격변의 와중에서도 살아남는다.(50쪽)

 

과거의 주요 문명과 현재의 주요 문명에 대해 학자들의 견해는 대체로 일치되고 있습니다. 다만 역사적으로 존재한 바 있는 문명의 총수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이견이 분분합니다. 역사상 뚜렷한 흔적을 남겼으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문명은 대략 일곱 개로 요약할 수 있으며,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크레타, 그리스-로마, 비잔틴, 중미, 안데스 문명이 그것입니다. 지금까지 가장 뚜렷하게 현존하는 주요 문명은 다섯 개를 꼽을 수 있는데, 중국, 일본, 인도, 이슬람, 서구 문명이 그것입니다. 여기에 새뮤얼 헌팅턴은 세 개의 문명을 추가해서 자신의 분석틀로 삼고 있습니다. 비잔틴 문명이나 서구 크리스트교 문명과는 별개로 진화한 러시아 정교 문명, 라틴 아메리카 문명, 아프리카 문명이 그것입니다.


이들 문명들은 실로 오랜 시간 동안에 걸쳐 서로 조우하고, 접촉하고, 정복하고, 복속시키고, 사상과 기술을 전파하고, 교역하였습니다. 유럽의 크리스트교권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476년)한 이후인 8세기와 9세기 무렵에 독자적 문명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은 당 · 송 · 명 시대에, 이슬람은 8세기에서 12세기까지, 비잔틴은 8세기에서 11세기까지 유럽을 훨씬 능가하는 경제력, 영토,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예술적, 학술적, 과학적 성취도 면에서도 유럽을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다른 문명에 비해 뒤쳐져 있던 서유럽 문명이 부상한 때는 15세기부터였습니다.


(정화함대)

 

문명과 문명 사이의 제한적, 간헐적 접촉은 다른 모든 문명들에 대한 서구의 지속적, 일방적, 압도적 영향력 행사로 성격이 바뀌었다. 15세기 말이 되자 무어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마침내 축출당하고 포르투갈의 아시아 정복과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 250년 동안 서반구 전역과 아시아 주요 지역은 유럽의 지배를 받거나 그 주도권 아래 들어간다. 18세기에 들어서면 유럽의 직접적 통치는 처음에는 미국에서, 그 다음에는 아이티에서 축소되었다. 라틴아메리카의 대부분 지역이 유럽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독립을 쟁취하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에는 재부상한 서구 제국주의가 아프리카의 전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였으며 아시아에서도 인도를 비롯한 광범위한 지역을 지배권 아래 끌어들였다. 20세기 초반으로 접어들면 터키를 제외한 중동의 거의 모든 지역이 서구의 직간접적인 영향력 아래 들어갔다. 유럽인 또는 과거 유럽 식민지 이주민은 1800년에 이르러 세계 육지의 35퍼센트를 점유하였다. 1878년에는 그 비율이 67퍼센트로 높아졌고 1914년에는 다시 84퍼센트로 껑충 뛰었다. 1920년에 가서도 오스만 제국이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 의하여 분할되면서 그 비율은 더욱 높아졌다.(60∼61쪽)

 

1500년 이후 400년 동안 문명과 문명의 관계는 '서구 문명에 대한 다른 문명들의 종속'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독특하고 극적인 사태를 낳은 원인들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것은 바로 기술이었습니다. 대양 항해술의 발명과 화약과 대포로 무장한 첨단 군사력 앞에 다른 문명들은 한마디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서구의 팽창은 산업 혁명으로 더욱 탄력을 받았습니다. 서구는 가치관이나 종교의 우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직화된 폭력의 우위'로 세계를 정복하였던 셈이었습니다.



 

서구 문명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유럽 민족들은 자기네들끼리도 싸웠습니다. 유럽의 국가들 사이에서 평화는 일상이 아니라 예외였습니다. 서구 문명 내부의 정치 역학을 지배한 것은 왕조 전쟁 아니면 종교 전쟁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서구인은 국민 국가를 만들었으며 프랑스 혁명 이후로 분쟁의 주역은 군주가 아니라 국가로 바뀌게 됩니다. 어느 역사가의 말대로 "왕들의 전쟁은 끝났고 민족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던" 셈이었습니다. 이러한 양상은 1차 대전까지 지속됩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국민 국가들 사이의 분쟁은 처음에는 파시즘과 공산주의, 자유 민주주의 사이의 대결로, 그 뒤에는 공산주의와 자유 민주주의 사이의 이념 대결로 바뀌었다. 냉전 시대에 이 이념들은 두 초강대국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이들은 모두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념에서 찾았고 둘 다 유럽적 의미의 전통적 민족 국가가 아니었다. 마르크시즘이 처음에 러시아에, 곧 이어 중국과 베트남에서 권력을 잡으면서 유럽식 국제 체제는 탈유럽적 다극 문명 체제로 이행하였다. 마르크시즘은 유럽 문명의 산물이었음에도 유럽에서는 뿌리를 내리지도 성공을 거두지도 못했다.(63쪽)

 

20세기에 들어와 모든 문명들 사이에서 다각적인 교섭이 강하게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단계로 접어들게 됩니다. 역사가들이 즐겨 쓰는 표현대로 '서구의 팽창'이 끝나고 '서구에 대한 반항'이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비서구 사회들은 서구가 만든 역사에서 단순한 대상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제는 자기 자신의 역사는 물론 서구의 역사를 조금씩 움직일 정도에 이릅니다. 서구가 주도하던 단계를 벗어나면서 문명의 쇠락을 좌우하던 이데올로기의 자리를 종교 또는 문화에 바탕을 둔 정체성이 물려받게 됩니다. 서구 정치 이념이 빚어낸 문명 내적 충돌은 문화와 종교가 주축이 된 문명간 충돌로 대체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새뮤얼 헌팅턴이 제시하는 시각틀의 요지였습니다.


이 책의 특장점 가운데 하나는 현존하는 여러 문명들의 장기간 동안의 변화를 구체적인 지도나 도표를 통해 명확하게 제시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대목들을 보노라면 『총, 균, 쇠』와 『문명의 붕괴』라는 책을 통해 장기간 동안의 인류 문명의 거대한 변화를 어느 누구보다 생생하게 보여주었던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20세기의 100년 동안에 서구의 쇠퇴를 보여주는 극적인 통계들은 여럿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문명들이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면적'의 백분율입니다. 서구 문명은 1920년에 48.5%로 정점을 보인 이후 1993년 현재 24.2%까지 감소했습니다. 극적으로 부상한 문명은 이슬람 문명입니다. 1920년에는 3.5%에 불과했지만 1993년에 21.1%로 치솟았습니다. 1993년 기준으로 세 번째 문명은 14.9%의 라틴 아메리카였으며, 동방 정교 문명이 13.2%로 네 번째를 차지했습니다. 이때로부터 어느새 30년 가까이 흐른 오늘날의 수치는 과연 얼마나 바뀌었을까요.

 

문명들이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세계 인구의 상대적 비중 또한 극적으로 변했습니다. 서구는 1920년에 48.1%를 차지하다가 2025년에는 10.1%까지 감소할 전망입니다. 중화 문명은 1920년에 17.3%였다가 2025년에는 21.0%로 선두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슬람은 더욱 극적인데요, 1920년에는 불과 2.4%에 불과했으나 2025년에는 19.2%까지 치솟아 중화문명을 턱밑까지 추격할 것으로 전망합니다. 네번째 문명은 힌두 문명으로 2025년에는 세계 인구의 16.9%까지 차지할 전망입니다.

 

주요 언어의 사용 인구(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를 보면 일반적인 상식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1992년 기준으로, 압도적인 1위는 15.2%를 치지한 북경어입니다. 2위는 이 수치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7.6%의 영어였습니다. 세 번째는 6.4%를 차지하는 힌두어, 네 번째가 6.1%의 스페인어, 다섯 번째가 4.9%의 러시아어입니다.



 

문명별 세계 총생산 비중으로는 서구 문명의 비중이 아직까지 탄탄하다고 볼 수 있으나 통계치가 1992년에 머무른 탓에 21세기의 빠른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측면이 아쉽습니다. 책에 실린 도표에 따르면, 서구문명의 세계 총생산 비중은 1928년 84.2%까지 치솟았다가 1992년에는 48.9%까지 줄어듭니다. 1992년 기준으로 두 번째 비중을 차지하는 문명은 11.0%의 이슬람입니다. 세 번째는 중화 문명(10.0%)이고, 네 번째는 라틴 아메리카 문명(8.3%), 다섯 번째는 일본 문명(8.0%)입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2020년의 세계 총생산 전망입니다. 이 책이 출간될 무렵(1996년)만 하더라도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의 기세가 워낙 대단했던 탓인지, 전망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제법 커 보입니다.

 

1992년 현재 세계에서 경제 규모가 가장 큰 나라는 미국이고 10개 상위국 가운데 서구 국가가 5개국, 나머지 5개국은 다른 문명들의 주도 국가인 중국, 일본, 인도, 러시아, 브라질이다. 신빙성 높은 전망에 따르면 2020년에 가서 중국이 세계 최대 규모의 경제력을 자랑하게 된다. 5개 상위국은 5개 문명의 몫으로 골고루 돌아가고, 10개 상위국은 중화 문명권 3개국(중국, 한국, 대만), 서구 문명권 3개국(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인도, 인도네시아, 태국이 차지한다. 10대 경제 강국 중에 아시아권이 7개국 포함되고 그 중에서 6개국이 동아시아권이다. 1960년 동아시아는 세계 총생산의 4퍼센트를 차지하였고 북미는 37퍼센트를 차지하였다. 그러던 것이 1995년에는 똑같이 24퍼센트가 되었다. 한 보고서는 2013년경에 가서는 서구는 세계 총생산의 30퍼센트를, 아시아는 40퍼센트를 차지할 것이라고 전망한다.(111쪽)

 

(2021. 5.20 파이낸셜뉴스 보도)


세계통화기금(IMF)이 내놓은 경제 전망 보고서를 분석한 CNBC에 따르면, 2019년 12위였던 한국은 코로나 발생 후 10위로 상승했다. 명목 국내 총생산(GDP) 규모에서 한국이 세계 10위를 차지한 것이다. 1위부터 4위는 미국, 중국, 일본, 독일 순으로 2019년과 동일하다. 견고한 상위 4개국 외에 2019년 5위였던 인도는 6위로 내려가고 6위였던 영국이 5위로 올라갔다.

 

새뮤얼 헌팅턴의 연구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변화하는 문명의 균형'을 인구 변화와 경제력의 변화에서 찾는다는 점입니다. 서구 문명에 도전하거나 뛰어넘을려는 문명의 뚜렷한 두 주자는 아시아와 이슬람인데, 이 책이 쓰여질 무렵에는 이들 두 문명의 발전이 지금보다 더욱 눈부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슬람과 아시아 문명의 극적인 발전은 자신들의 문명에 대한 자부심과 서구적 가치와 제도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미국의 학자인 저자 입장에서는 이들 두 문명의 거센 도전이 부담스러웠을 게 틀림없습니다. 다음의 문장 속에는 서구인의 이슬람과 중국의 급부상에 대한 두려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아시아의 자기 주장은 경제 성장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슬람의 자기 주장은 상당 부분 사회적 동원력과 인구 증가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도전은 지금도 그렇지만 21세기에 가서도 세계 정치에 심각한 불안 요소로서 파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파장의 성격은 상당히 다르다. 중국과 여타 아시아 국가의 경제 발전은 이들의 정부가 대외 관계에서 적극적으로 자기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와 자원을 제공한다. 이슬람 국가들의 인구 증가, 특히 15세에서 25세 사이 연령층의 폭발적 증가는 원리주의, 테러리즘, 폭동, 노동력 수출에 필요한 인력을 제공한다. 경제적 발전은 아시아 정부를 강화시키고 있지만 인구 증가는 이슬람 정부와 비이슬람 사회에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한다.(133∼134쪽)

 

20세기 후반부터 최근까지 진행 중인 수많은 지역적 분쟁들은 구소련 연방의 해체에 따른 탈냉전 시대의 도래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강대국을 중심으로 이념에 따라 맺어진 제휴 관계가 극적으로 사라지고 문화와 문명을 축으로 제휴 관계가 재편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경계선이 문화적 경계선 곧 민족적, 종교적, 문명적 경계선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급속도로 바뀌었습니다.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NATO와 EU 가입 문제를 결정했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다짜고짜 무력으로 침공한 최근의 사태는 제휴 관계의 핵심이 이념에서 문명으로 옮겨간 영향의 극단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구 유고 연방이었던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는 이념에서 탈피하여 민족과 종교에 따라 각각 분리되었으며, 냉전 시대에 소련에 맞서 부자연스런 동맹을 맺었던 그리스와 터키는 탈냉전 시대에 접어들자 말자 NATO와 EU에서의 역할을 둘러싸고 사사건건 충돌하는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홍콩, 대만, 싱가포르와 동남아시아의 화교들은 점차 중국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본토 의존도가 커지는 추세로 바뀌었습니다. 냉전 질서가 무너지면서 세계 각국은 새로운 대립과 제휴를 진전시키거나 해묵은 대립과 제휴를 소생시키는 쪽으로 재편되는 과정에 놓여 있습니다.

 

냉전의 종식은 분쟁을 종식시킨 것이 아니라, 문화에 뿌리를 둔 새로운 정체성, 가장 광범위한 수준에서는 문명을 형성하게 될 상이한 문화에서 유래한 집단들 사이의 새로운 갈등 양상을 낳았다. 아울러 공통의 문화는 그 문화를 공유하는 국가나 집단 사이의 협조를 낳는다. 이것은 특히 경제 부문에서 국가들 사이의 지역 연합이 출현하는 현상에서 확인된다.(171쪽)


탈냉전 이후의 문명과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특히 중국의 역할이 급속도로 바뀌는 점은 안보와 경제 모두에서 직접적인 영향권에 놓인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도 눈여겨 볼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국 정부는 중국 본토를 중국 문명의 핵심국으로 이해하고 다른 모든 중국인 공동체가 이 핵심국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홍콩 사태야말로 이런 생각이 현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셈이었습니다.

 

'대중국'은 그러므로 단순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급속히 성장하는 문화적, 경제적 현실이며 이제는 정치적 현실의 성격마저 띠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극적으로 전개된 동아시아 경제 발전을 주도한 것은 본토, 호랑이들(네 마리 중에서 한국을 제외한 세 마리가 중국계), 동남아시아의 중국인이었다. 동아시아의 경제는 점차 중국 중심, 중국 주도로 운영되고 있다. 홍콩, 대만, 싱가포르의 중국인은 1990년대 본토에서 이루어진 눈부신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되었던 자본을 실질적으로 제공하였던 층이다. 그 밖에도 동남아시아의 화교들은 이 지역 경제를 틀어쥐고 있다. …… 일본과 한국을 제외하면 동아시아 경제는 기본적으로 중국 경제이다. 227∼228쪽)

 

이념 중심에서 문명 중심으로 세계 정치 구도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문명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충돌의 원인은 무역 갈등, 강한 라이벌 의식, 경쟁적 공존, 군비 경쟁 등으로 매우 다양합니다. 세계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핵심국 분쟁'은 상이한 문명에 속한 주요국들 사이에서 발생합니다. 그들 사이에 분쟁을 낳는 핵심적 쟁점들은 국제 정치의 고전적 주제들인 셈입니다. UN, IMF 등 국제 기구의 운영을 둘러싼 문제, 핵 확산 금지, 무기 규제, 무역과 투자 문제, 인권 문제, 가치관과 문화의 갈등 등이 바로 그런 주제들입니다.

 

문명의 핵심국들은 지리적으로 인접한 경우가 아니면 직접적 군사 충돌은 상호 자제합니다. 그러나 문명들의 세력 균형에 변화가 올 때, 핵심국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저자는 경고합니다. 이른바 그 유명한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주장이지요. 미중 무역분쟁이 격화 일로를 걸어 온 최근 몇 년 사이에 수많은 언론에서 숱하게 화두로 삼은 용어 또한 이 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문명의 충돌』이라는 책이 인용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용어가 바로 '투키디데스의 함정'이기 때문입니다.

 

투키디데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 문명 내부에서 아테네의 힘이 강성해졌을 때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서구 문명의 역사는 부상하는 강대국과 쇠락하는 강대국 사이에 벌어진 '헤게모니 전쟁의 역사다. 상이한 문명에 속해 있으면서 부상하는 핵심국과 쇠락하는 핵심국 사이의 분쟁 촉발 정도는 이들 문명에 속한 국가들이 새로운 강대국의 부상 앞에서 견제를 추구하느냐 편승을 추구하느냐에 달려 있다. 아시아 문명에서는 편승 현상이 더 지배적으로 나타나지만, 중국의 부상은 미국, 인도, 러시아 같은 다른 문명권의 국가들로 하여금 세력 균형을 도모하도록 자극할 수 있다. 서구의 역사를 볼 때 영국과 미국 사이에서는 헤게모니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 팍스 브리타니카에서 팍스 아메리카나로의 이행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은 두 사회의 문화적 유대감이 강하였기 때문이다. 서구와 중국 사이에는 그러한 종류의 유대감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서구에서 중국으로 패권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군사 충돌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런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은 상당히 많다. 이슬람의 역동성은 비교적 소규모로 벌어지는 단층선 분쟁의 지속되는 원천이 되고 있으며, 중국의 부상은 핵심국 사이에 벌어지는 대규모 문명 전쟁의 잠재적 원천이 되고 있다.(279쪽)

 

몇 해 전부터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한 미중 무역전쟁은 소규모의 관세 전쟁에서부터 시작하여 대규모 관세 폭탄을 주고받는 단계를 지나 '화웨이 사태'로까지 확산일로를 걷다가 잠시 멈춰서 있습니다. 남중국해의 영유권 주장을 둘러싼 갈등, 홍콩과 대만의 지위를 둘러싼 '하나의 중국 정책'에 대한 미국의 입장, 티벳과 위구르 자치구에 대한 인권 문제 등도 미중간에 잠재된 폭발력 있는 갈등 요소들입니다. 미중간의 갈등은 아직까지는 전쟁으로까지 확전될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습니다. 중국의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아직까지는 미국과 상당한 격차를 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또다시 '투키디데스의 함정' 앞에서 두 나라가 건곤일척의 대전쟁을 벌이느냐 마느냐로 심각한 양상을 보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어쨌든 이 책이 1996년에 출판된 점을 고려해 보더라도 20여 년 후의 미중 갈등의 본질을 날카롭게 꿰뚫어 본 명저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문명 충돌에 관한 광범위한 주제들'은 오늘날까지도 현재 진행형인 사안들이 너무나 많아서 뒤늦게 이 책을 붙잡고 읽는 독자들한테도 놀라움을 안겨 줍니다. 핵무기 개발을 위해 온갖 집요한 노력을 기울여 온 이란과 북한의 사례는 24년 전에 이 책을 쓴 저자가  2020년에 최신 개정판을 다시 낸다고 하더라도 이미 기술한 내용에 대해서는 특별히 손댈 만한 곳이 거의 없을 만큼 정확하고 날카롭습니다.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북한의 핵무기는 한국과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바뀔 때마다 ('전략적 인내' 등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해 오면서) 문제를 점점 더 키워오다가 어느새 '핵동결 내지는 핵군축의 단계'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더욱 복잡하고 중차대한 문제로 발전하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입니다.


수많은 문제들이 여전히 미해결인 채 남아 있고, 어떤 문제들은 처음 등장할 때만 하더라도 심각한 위기로 대두되다가(쿠바 위기 등)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이내 사그라지기도 합니다. 또한 과거부터 오랫동안 잠재된 갈등들이 기나긴 잠복 기간을 거쳐 일순간 거대한 분노로 표출되는 경우도 더러 나타납니다. 가장 최근에 일어났던 홍콩의 격렬한 반중 시위는 100년 동안의 서구화를 겪은 사회가 아무런 갈등도 없이 중국 본토 문명으로 재흡수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새뮤얼 헌팅턴이 제시한 '문명끼리의 충돌 관점'은 고작(?) 수십 년 동안만 존재했던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얼마만큼 허약한 기반 위에 존재했던가를 새삼 되짚어보게 만드는 한편, 1,000년 혹은 2,000년 이상의 장구한 세월 동안에 걸쳐 단단하게 형성된 문명이라는 범주가 얼마만큼 강렬한 힘을 비축한 채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힘을 발휘하는가를 다시금 깨닫게 만듭니다. 또한 수많은 역사가들이 예견했듯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문명들은 시간이 경과하는 동안에 축적되는 인구 증가 및 인구 구성의 변화, 경제력의 차이, 군사력의 변화 등에 따라 갈등과 충돌을 겪으면서 차츰 쇠락한다는 사실도 다시금 깨닫게 만듭니다.

 

실로 오랬동안 미국이 주도해 온 서구 문명도 차츰 쇠락하고 나면 멀지 않아서 아시아 문명, 그 가운데서도 중국 문명이 지구 최강의 경제력과 인구와 여러 친족국들(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을 대동한 채 새로운 질서 재편 과정을 밟아나갈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입니다. 수천 년 동안 유교 문명권에 속해 있으면서 중국과 접촉했던 우리나라는 과연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미국의 핵심 우방으로 계속 남게 될까요, 아니면 중국 문명으로 재차 복귀할까요.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 그 누가 속시원히 대답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우리나라가 언젠가는 그런 어려운 선택지 앞에서 의사결정을 강요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오랫동안 서구식 합리주의와 민주주의에 적응해 온 다른 문명들은 아직까지도 민주적인 선거 절차와 지도자 선출 과정조차 경험하지 못한 권위주의적인 중국 문명과 어떤 갈등과 충돌을 빚을까요. 새뮤얼 헌팅턴의 책을 읽노라면 이런 새로운 걱정들이 계속 떠오릅니다.

 

이 책은 온갖 첨예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국제적인 분쟁들을 보다 냉철하게 분석해 볼 수 있는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한 번쯤 읽어볼 가치가 충분한 책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는 세계적인 분쟁들의 근원적인 이유들이 이 책 곳곳에 숨어 있다는 느낌이 결코 과장은 아니니까요. 과연 서구 문명은 언제쯤 다른 문명에게 자신의 주도권을 내놓을까요? 30년 후? 100년 후?

 

모든 문명의 역사에서 적어도 한 번은, 그리고 대개는 여러 번 역사의 막을 내린다. 문명의 보편 국가가 등장하면 그 문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토인비가 말한 대로 '영속성의 망상'에 눈이 멀어 자기네 문명이 인류 사회의 최종 형태라는 명제를 신봉하게 된다. 로마 제국이 그러했고 압바스 왕조가 그러했으며, 무굴 제국과 오스만 제국도 다를 바 없었다. 보편 국가에 거주하는 국민들은 그 보편 국가를 황야의 하룻밤 거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 인간의 궁극적 목표점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절정기의 대영 제국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1897년의 영국 중산층은 역사는 종착역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그들은 이 역사의 종말이 자신들에게 베풀어 준 영구 불멸한 열락의 상태를 자축해야 할 이유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역사가 궁극점에 이르렀다고 전제하는 사회는 대체로 몰락기로 접어든 사회이다.(413쪽)

 

이것으로 『문명의 충돌』에 대한 소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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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성이 탁월한 미모와 재능을 타고난 덕분에 당대의 저명한 여러 인물들과 폭넓은 교제를 갖는다는 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또한 그녀가 뛰어난 미술가들의 영혼을 뒤흔든 끝에 세기적인 명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단지 몇몇 유명한 그림에 등장하는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니라, 당대를 주름잡았던 세계적인 음악가와 건축가와 문학가와도 두루 함께 살아 보기도 했다면? 그것도 세 번에 걸친 정식 결혼을 통해서라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싶지만,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는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았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알마 말러였습니다. 그녀가 미술 작품의 실제 모델이라고 알려진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와 오스카 코코슈카의 그림 <바람의 신부>였습니다. 우선, <바람의 신부>라는 유명한 그림부터 간단히 살펴 보지요. 그녀의 '바람 같은 삶'이야말로 '바람'과는 결코 떼어놓을 수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바람의 신부> 혹은 <폭풍우>, 1914년

 

폭풍처럼 강렬한 사랑이 격정적으로 표현된 이 작품은 오스카 코코슈카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힙니다. 그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화가였으며, 특유의 개인적이고 독창적인 화풍을 선보였습니다. <바람의 신부> 또는 <폭풍우>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작품에서 코코슈카는 가슴에서 뿜어져나오는 뜨거운 감정을 거친 붓 터치를 통해 그대로 담아냈습니다.


이 작품이 유독 격정적으로 느껴지는 까닭은 그림 속의 남녀 모델이 바로 화가 자신과 그가 격정적으로 사랑했던 연인 알마 쉰들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알마 쉰들러는 당대의 유명한 화가 에밀 야곱 쉰들러의 딸로 태어났으며, 타고난 미모와 지성으로 숱한 남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녀는 스물세 살의 꽃다운 나이에 당대 최고의 작곡가이자 40대의 노총각이었던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하였고, 말러가 사망한 이후에는 바우하우스를 창설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재혼했으며, 그와 헤어진 이후에는 작가 프란츠 베르펠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역시 한 때 이 여인과 연인관계였습니다.


 

알마 말러(Alma Mahler: 1879-1964)

 

그렇습니다. 알마 말러는 화가의 딸이자 작곡가의 아내였으며, 자신의 직업 또한 '작곡가'였습니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반에 걸쳐 음악 도시 빈을 대표하는 지휘자이자 작곡가로 명성을 떨친 천재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가 그의 첫 남편이었습니다.


그녀의 이름 뒤에 말러라는 성이 따라붙지 않았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녀의 이름은 알마 쉰들러였습니다. 그녀는 1879년 당대의 저명한 화가였던 에밀 야콥 쉰들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말러와 결혼하기 전부터 이미 공연 감독 막스 부어카르트, 작곡가 알렉산더 쳄린스키, 그리고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염문설을 뿌리고 다녔습니다. 그 가운데 클림트는 알마 쉰들러의 첫 키스를 차지한 남자로 알려졌으며, 그 덕분에 그녀는 (뜻밖이면서도 영광스럽게) 클림트의 대표작인 <키스>에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예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The Kiss (Lovers), 1907–1908.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알마 쉰들러는 구스타프 클림트를 비롯한 여러 남성들의 구애를 뿌리치고 1902년 3월 9일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합니다. 무려 19살의 나이차를 극복한 결혼이었습니다. 결혼 후 그녀는 작곡가의 꿈을 접고 두 딸의 어머니로 살아가지만, 첫 딸이 죽자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깊은 관계에 빠집니다. 말러도 이 사실을 알고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씁니다. '천인 교양곡'으로도 불리는 교향곡 8번은 바로 그 무렵에 그녀를 위해 쓰여진 곡이었습니다.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

 

1911년에 구스타프 말러가 불과 51세에 죽자, 알마 말러는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두 번째로 결혼하지만 첫 남편과 사별한지 한참이나 뜸을 들인 후였습니다. 그로피우스와 재혼하기 전까지 연인 관계로 지낸 또다른 남자가 천재화가 오스카 코코슈카였습니다. 이 화가는 알마 말러가 건축가와 재혼한 이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그녀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보였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오스카 코코슈카(1886∼1980)

알마와 헤어지자 코코슈카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자진해서 입대했고, 이내 전쟁터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되돌아 옵니다. 사랑의 아픔을 잊기 위해 군대에 갔다가 몸까지 다친 셈이었습니다. 그는 옛 사랑을 잊지 못해 '알마를 닮은 인형'을 제작해서 함께 생활할 정도로 알마 말러에게 집착을 보였습니다. 심지어 오페라 공연을 갈 때에도 그 인형의 자리를 예약할 정도였다니 그의 집착이 어느 정도였는지 능히 짐작할 만합니다. 

그는 그녀에게 아주 많은 편지를 썼는데, 70번째 생일날에도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나의 알마! 

당신은 아직도 나의 길들지 않은 야생동물이오. 당신의 생일을 준비하는 친구들에게 '덧없는 달력의 시간에 나를 묶어놓지 말라'고 하오. 대신 시인을 찾아요.

그래서 우리가 함께 무엇을 했으며 서로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후세에 우리들의 살아있는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그에게 이야기를 전해 줘요. 우리가 서로에게 불어넣은 그 뜨거운 열정과 비교되는 사랑은 없었으니까.

당신의 오스카.

ps : 코코슈카의 가슴은 당신을 용서하기에.


그토록 끈질겼던 코코슈카의 구애를 뿌리친 끝에 시작된 두 번째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로피우스의 잦은 해외 출장과 새로 태어난 아들의 '친부 논란'등이 문제였습니다. 그때 친부 논란을 일으킨 남자가 바로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프란츠 베르펠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공공연히 알마의 애인으로 소문나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두 번째 결혼 생활을 청산한 알마는 무려 10년 동안 베르펠과 동거하다가, 1929년에 이르러 그와 정식으로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린 뒤에는 그가 죽을 때까지 내내 함께 합니다. 유태인이었던 부부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다녔고, 알마는 남편과 함께 유럽 각지를 전전하다가 결국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여생을 보냅니다.

 

프란츠 베르펠(1890∼1945년)

 

 

여담이지만, 몇 년 전에 저는 그림을 통해서나마 알마 말러와 잠깐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가 소장되어 있는 벨베데레 궁전에 갔을 때였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때 이후로 저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의식하지도 못한 채) 그녀와 입을 맞추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빈을 떠날 때 마침 클림트의 <키스>가 그려진 날렵한 커피잔이 눈에 띄었고, 오랫동안 그때 집어 든 그 커피잔으로 커피를 마시기 때문이지요.

 

 

벨베데레 궁전(출처 : 위키 백과)

클림트의 대표작인 <키스>, <유디트> 말고도 에곤 실레의 걸작 <죽음과 소녀>, <포옹>등이 소장되어 있다.

비록 <바람의 신부>는 없지만 오스카 코코슈카의 다른 작품들도 볼 수 있다.

 

 

그런데, <키스> 속의 그 여자가 '말러의 부인'이었다는 얘기는 어디선가 얼핏 들었던 것 같지만, 그녀가 코코슈카의 그림 <바람의 신부>의 주인공과 동일 인물일 줄은 몰랐습니다. 더군다나 어떤 책에서 우연히 발견한, 제게는 몹시 낯선 이름의 소설가에 불과했던 프란츠 베르펠이라는 사람이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인 줄은 더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좋은 책은 좋은 사람과 비슷한 점이 많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잘 알 수 없듯이 책도 한 번 읽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는 과정에서 그 책을 잘 알게 되고 그리하여 아주 가까운 친구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가 없으면 더 이상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갖게 된다. 이것을 보여주는 좋은 에피소드가 있다. 독일의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은 토마스 만의 『부덴부로크 가의 사람들』이라는 장편소설을 너무 좋아하여 평생 30번 가량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으로 그 소설을 읽은 것은 죽기 한 달 전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30번이라는 횟수가 아니라 죽기 한 달 전의 경황없는 상황에서도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베르펠에게 있어서 죽음은 곧 만의 소설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으리라.


 - 클리프턴 페디먼, 『평생독서계획』, <역자 후기> 중에서



최근에 저는 알마 말러에 관한 또다른 놀라운 사실 하나를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자주 찾는 이웃님의 유튜브 동영상 덕분이었는데요. 그 영상은 1943년에 만들어진 고색창연한 흑백영화 <베르나데트의 노래>라는 작품을 소개하는 영상이었는데, 그 영화의 원작을 쓴 작가가 놀랍게도 프란츠 베르펠이었던 것입니다. 그 유태인 소설가는 1938년 자신의 아내 알바 말러와 함께 나치의 박해를 피해 국경을 넘어 피신하던 중 프랑스의 어느 산간마을에 숨어들어 2년 동안이나 은신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마을 루르드에서 전해지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자신을 숨겨준  마을사람들에게 보답하는 심정으로 <성 베르나데트 수비루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썼으며, 그 원작을 바탕으로 영화 <베르나테트의 노래>가 탄생했던 것입니다. 1943년에 만들어진 그 영화는 제16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촬영상, 미술상, 음악상을 수상했으며, 제1회 골든 글로부 시상식에서도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고 합니다. 




알바 말러와 프란츠 베르펠이 한때 나치의 박해를 피해 무려 2년 동안이나 꼭꼭 숨어 지냈던 그 산골 마을은 <베르나데트의 노래>라는 소설과 영화의 배경으로도 유명하지만, 지금은 매년 3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찾는 성모 발현지로도 널리 알려진 관광명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바람의 신부 알바 말러에 얽힌 놀라운 이야기 소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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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1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좋은 글을 제가 왜 못 봤을까요 ㅠㅠ 페이퍼 당선 축하드립니다 ~

oren 2022-03-09 12:09   좋아요 1 | URL
아이고.. mini 님 댓글이 아니었더라면 이 글이 이달의 당선작으로 뽑힌 줄도 모를 뻔했네요.^^
댓글 남겨주셔서 정말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