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몹시 차다. 이런 날씨만큼 '따뜻한 모닥불'이 그리울 때가 또 있을까.

소로우의 『월든』을 읽으면서 아주 오랜 옛날에 내가 겪었던 '추운 겨울'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가 월든 호숫가의 숲 속에서 보낸 이야기들이 까마득히 잊혀진 채 묻혀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너무나 생생하게 되살려 놓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가 손수 월든 호숫가의 숲을 개간해서 밭을 갈고 콩을 심고 거둬들인 경험을 바탕으로 쓴「콩밭」이라는 한 장의 글만 읽어보더라도 나는 그가 쓴 분량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 듯한 자신감마저 무럭무럭 솟는다. 다만 소로우의 글처럼 생생하고도 푸릇푸릇한 문장들을 엮어낼 자신이 있다는 얘기는 아니니, 소로우처럼 이야기를 힘차게 이끌어나가는 강인한 근육을 갖추지 못한 나로서는 마치 초여름 가뭄에 풀죽은 잡초처럼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내 헛된 욕심을 서둘러 접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콩과 나눈 교제

내가 콩과 나눈 긴 교제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고 수확해서 도리깨질하고 좋은 콩을 선별해서 팔았다-파는 게 가장 어려웠다- 그런데 콩을 맛보기도 했으니 먹어본 경험도 덧붙일 수 있겠다. 나는 콩에 대해 알아보기로 결심했다.48 ······ 나는 잡초의 미묘한 조직들을 무자비하게 깨뜨렸고, 괭이로 몹시 불공평한 차별을 하며 잡초에 속한 풀은 완전히 없애버리고 콩은 꼼꼼하게 가꾸었다. 저놈은 유럽산 쑥-저놈은 돼지풀-저놈은 괭이밥-저놈은 포아풀-덤벼들어 저놈을 잘라내라. 뿌리째 뽑아 햇볕에 던져버려라. 저놈의 수염뿌리 하나라도 그늘에 두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저놈이 반대편으로 몸을 뒤집어, 이틀 만에 부추처럼 벌떡 일어설 것이다. 그것은 긴 전쟁이었다. 두루미와의 전쟁이 아니라 잡초와의 전쟁이었다. 잡초는 태양과 비와 이슬을 자기편으로 둔 트로이 사람들이었다. 콩들은 매일 내가 괭이로 무장하고 자기들을 구하러 오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내가 그들의 적을 솎아내며 밭고랑을 잡초의 시체더미로 채워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주위에 꽉 들어찬 전우들보다 1피트는 크고 기운차게 볏을 흔들던 수많은 헥토르49가 내 무기 앞에 속절없이 쓰러져 먼지 속에 뒹굴었다.50


주석

48. 뉴잉글랜드에서 '콩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은 무식함을 간접적으로 빗댄 표현이었다. 이 말을 뒤집어 사용한 것이다.

(나의 생각)

우리 말에도 '숙맥'이란 표현이 있음을 떠올리지 못할 바보가 있을까. 머나먼 북아메리카의 시골에서도 '콩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은 무식한 바보로 통했다니 '콩'을 너무 가볍게 여겨서는 안될 듯하다.

49. 프리아모스 왕과 헤카베의 아들로, 트로이에서 가장 용감한 전사였다.
 

50.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빗댄 표현이다. "마침내 그는 먼지 속에 뒹굴었다."(알렉산더 포프 번역)

 


소로우의 이런 글들을 읽으며 나는 '괭이로 새 흙을 긁어 이랑 쪽으로 끌어당길 때'의 그 까마득한 옛 '순간들'을 순식간에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괭이가 돌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도 다시금 들었다. 그리고 그가 밭을 일구다 발견한 '모닥불이나 햇볕에 탄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자연석들'을 나도 다시 찾아냈다. "그 순간부터 내가 괭이질하는 곳은 콩밭이 아니었고, 콩밭을 괭이질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그가 콩밭의 잡초와 전쟁을 치른 얘기는 고스란히 내가 어릴 때 뜨거운 태양 아래 콩죽같은 땀을 흘리며 벌였던 '잡초와의 전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콩밭을 매던 우리 형제들이 그 때 굳이 입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우리 형제들의 가슴 속에는 소로우와 똑같은 외침을 그 콩밭에서 틀림없이 들을 수 있었던 것만 같다. "뿌리째 뽑아 햇볕에 던져 버려라. 저놈의 수염뿌리 하나라도 그늘에 두지 마라."

콩이 노랗게 무르익을 무렵엔 콩서리를 마음껏 즐겼고, 도리깨질을 하며 콩타작을 즐길 때 노란 콩들이 '콩콩'거리며 마당을 튀어오르던 모습조차 아직까지도 내 눈에 선하다. 가마솥 그득 삶은 콩을 멧돌에 넣어 돌리며 두부를 만들던 그 겨울밤의 정겹기만 하던 내 고향집 안방의 모습을 어찌 까마득히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콩으로 메주를 쑤고 안방의 두 벽면을 따라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메주를 '간식'처럼 뜯어 먹기 위해 서로 등어리를 교대로 내어 주며, 우리 형제들의 보잘것 없는 겨울철 한낮의 수확량에 감질이 나던 그 때를 떠올리는 일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짐작조차 하기가 어렵다.

내 얘기가 콩밭에 너무 오래 머문 잘못을 용서해 주기 바란다. 나도 서둘러 내 얘기를 이 추운 계절에 맞출 욕심을 아까부터 억누르기 힘들었다는 점을 믿어 줬으면 좋겠다.

  

땔감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장작더미를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본다. 나는 창문 앞에 장작을 쌓아두는 걸 좋아한다. 나무토막이 높이 쌓일수록 내가 즐겁게 일하던 순간들이 더 잘 떠오른다. 내게는 주인이 누군지 모를 낡은 도끼 한 자루가 있었다. 겨울날이면 내 집의 양지바른 곳에서 나는 콩밭에서 캐낸 그루터기들을 그 도끼로 팼다. 내가 밭을 갈 때 소를 몰던 사람이 예언했듯이, 그루터기들은 나를 두 번이나 따뜻하게 해주었다. 한 번은 내가 그루터기들을 도끼로 쪼갤 때였고, 다른 한 번은 그루터기를 쪼개 얻은 땔감으로 불을 지필 때였다. 따라서 그루터기보다 더 많은 열을 주는 땔감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땔감'들에 대해서조차 소로우 못지 않게 많은 이야기들을 펼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불과 백여 년 전만 하더라도 거의 대부분 시골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고 그곳에서 삶을 마감했었다. 유독 우리들 세대에 접어들어서 유난히 거칠게 진행된 '변화의 속도' 덕분에 이미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땔감'은 커녕 '도끼'조차 제대로 만져본 적이 드물고, 그래서 겨울철 이맘때 '장작을 패는 즐거움'조차 이미 낯선 일이 되어 버렸음은 안타까운 일임에 틀림없다.

소로우가 '그루터기'로 두 번 따뜻했다면 나는 무수히 많은 땔감들 덕분에 셀 수도 없을 만큼 여러번 따뜻했다. 물론 좋은 화력을 뽐내는 땔감으로는 '장작'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장작을 팰 때 등줄기를 타고 내리던 굵은 땀들은 웃통을 훌쩍 벗어던질 때 찬 겨울의 공기 속으로 무럭무럭 솟아나던 하얀 김으로 승화되어 얼마나 멋진 그림들을 그려냈던가.

내가 경험한 땔감들은 소로우의 그것보다 훨씬 더 다양했다. 고추와 담배 농사를 많이 지었던 내 고향에서는 무엇보다 고추 대궁과 담배 대궁들이 가장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땔감들이었다. 그런 땔감들은 무엇보다 집에서 가까운 이밭 저밭에서 아주 손쉽게 거둬들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한겨울이 닥치기 전까지, 다시 말해서 본격적인 난방이 개시되기 전까지는 주로 밥을 짓는데 필요한 화력으로는 충분했고, 그 땔감들 역시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 정도는 얼마든지 떠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겨울의 기나긴 추위를 건너가기 위해선 무엇보다 굵직한 통나무에서 얻을 수 있는 소나무 장작들이 최고였다. 그 옛날 겨울철이 되면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또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저마다 맞춤한 지게들을 하나씩 메고 줄로 잘 갈아둔 쇠톱을 숨긴 채 깊은 산속으로 나무를 하러 다녔다. 어른들은 우리가 보기에도 정말 믿음직스러웠으며 그들의 허리둘레만큼이나 굵은 통나무들을 두세 개씩 지게에 지고 산길을 내려왔고, 우리들은 각자 자신의 허벅지만 한 통나무들을 대여섯 개씩 지게에 지고 끙끙 거리며 오르막 내리막길을 돌고 돌아 마침내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그런 통나무들을 톱질하고 도끼로 패는 일은 겨울철에 아이들에게 부과된 가장 가벼운 의무이자 즐거운 놀이였다.

땔감 가운데 특별히 기억나는 건 단연 '물거리'였다. 나는 이게 지금까지도 내 고향 주변에서만 쓰는 순수한 경상도 사투리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 촌스럽고도 독특한 땔감의 이름이 표준말이라는 걸 이번에 난생 처음으로 알았다. 물거리라는 이름은 아마도 내가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떠올려보지 못한 말이 아닐까 싶다. 이게 다 오래 전에 멀리 떨어진 미국에서 살았던 사람이 쓴 책 한 권을 읽다가 우연히 얻어낸 수확이라니 나는 그게 더 놀랍다. 물거리는 주로 밭둑이나 강둑이 아니면 산자락 등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주로 어른들이 '조선낫' 하나를 들고 익숙한 솜씨로 낫질을 해야만 얻을 수 있는 다소 고난도의 기술을 요하는 땔감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와 같은 조무래기들한테는 '물거리'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땔감이었다.


이밖에도 겨울의 땔감들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갈구리로 긁어 모은 뒤 싸리나무로 밑받침을 대고 칡넝쿨로 요령있게 묶어야만 무사히 지게에 꾸려 집에까지 옮겨올 수 있었던 마른 솔잎들은 불쏘시개로는 단연 최고였다. 마른 솔잎들은 가장 푹신하고도 부드러운 땔감이었던 데다가 아주 쉽게 불이 붙었고, 아궁이 속에서 활활 타오를 때 내뿜는 솔향기는 언제나 향기로웠다. 솔잎과 함께 따라온 싸리나무들은 아궁이 속에 들어가면 특이하게도 뜨거운 김을 쉭쉭 내뿜을 때도 있었다. 가끔씩은 그들의 단단한 몸 속에 숨겨진 수액들만 부글부글 끓을 때도 있었다. 싸리나무가 마치 회초리가 되지 못해 분풀이라도 하는 듯했다.

겨울의 아궁이는 단지 가마솥 엉덩이를 뜨겁게 달구는 데 그치지는 않았다. 아궁이 스스로가 '화덕'이 되어 요리를 만들어 낼 줄도 알았다. 그들이 고구마와 감자를 구워 내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고, 한겨울엔 가끔씩 미지근한 잿불의 온기로 무우도 뭉긋하게 구워낼 줄 알았다. 엄마가 홍두깨로 국시를 만들 땐 '썰다 남긴 국시 꼬랑지'가 아궁이를 들락거렸고, 아주 가끔씩은 마당에 뛰어놀던 암탉의 닭똥집을 구워 내기도 했다.

추운 겨울에 따뜻한 모닥불을 떠올리자면 나는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겨울철 기나긴 시간들을 아낌없이 바쳤던 '썰매 타던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모닥불의 진정한 효용은 추위로 꽁꽁 얼어붙은 몸을 뜨뜻하게 녹여주는 데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나는 오늘처럼 몹시도 추운 겨울날 내 고향 마을을 둘러싸며 흐르던 강들이 두꺼운 얼음으로 꽝꽝 얼어붙었던 풍경과, 우리가 약속이나 한 듯이 썰매를 챙겨오는 일 말고도 부엌으로 몰래 숨어 들어가 '성냥'을 훔쳐 나오는 걸 잊지 않았던 그 옛날의 이야기를 마저 꺼내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기 어렵다.

쌩쌩 부는 찬바람을 마치 친구인 양 두툼한 겨울 외투의 뒷덜미에 업고 다니며 손발이 얼얼하도록 썰매를 즐기고 나면 우리들은 서둘러 강가에 널린 땔감나무들을 주워 모아서 모닥불을 피웠다. 아아, 그 때 그 모닥불은 얼마나 아낌없이 제 몸을 불태워 뜨겁게 타올랐던가! 그때 우리의 그 차갑던 손발과 얼어붙은 뺨과 가슴은 얼마나 따뜻하게 녹아 내렸던가. 그런 '모닥불'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 추운 겨울을 도대체 어떻게 견녀낼 수 있었을까.

소로우의 글을 읽으며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하니, 어느덧 나는 내 고향에서 어린 시절에 보았던 대장간의 모습까지도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하겠다. 초여름의 그 무덥던 농번기에도 대장간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장작불을 지피고 바쁘게 풀무질을 하면서 시뻘건 쇠붙이들을 연신 두드려대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들이 윗저고리조차 벗어 놓은 채 일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듬직한 등줄기에서는 언제나 굵은 땀방울이 시원스레 흘러내리던 모습조차 내 눈에 아른거린다.

내가 살던 고향 마을은 내가 중학교에 다녔던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옛 모습들을 제법 많이 간직했던 듯하다. 비록 시골이긴 했지만 마을이 제법 컸던 덕분에 동구밖 잔디밭 한켠에는 아이들이 모여 미끄럼틀처럼 오르내리며 뛰어놀았던 커다란 '연자방아'도 있었고, 오래 전에 나라가 위태로웠을 때 큰 공을 세우신 조상님 덕분에 종가(宗家)에서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모시는 까닭에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적힌 하마비는 지금까지도 남아 있으며, 지금은 어떻게 사라진지 까닭조차 알 수 없지만 우리 마을 입구에 있던 친구네 밭 한가운데엔 커다란 '고인돌'까지도 남아 있었다.

고인돌까지 떠올리다니... 내 얘기가 정말 너무 멀리까지 온 게 이제 확실해졌다. 아무튼 나는 이번에『월든』을 두 번째로 읽으면서 맨처음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숱한 보물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을 얻었다.『월든』을 처음 읽었을 때도 나름대로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때의 감동은 이번과는 확실히 다른 듯하다. 왜 내가 처음으로 그 책을 읽었을 땐 까마득한 옛 추억들을 이번처럼 생생하게 떠올리지 못했을까. 내가 혹시『월든』이라는 책을 그저 읽어 내기에 급급했던 것은 아닐까.
 
이 추운 겨울에도 나는『월든』을 읽으면 그 순간부터 곧장 월든 호숫가의 숲속 오두막으로 달려가 소로우와 함께 얘기를 나누는 듯한 착각에 빠져 들며 그가 이끄는 대로 계절이 마구 뒤바뀐다. 그가 들려주는 여름철 '콩밭' 이야기와 겨울철 '난방' 이야기가 이토록 오래 묻혀둔 내 어릴 적 기억들을 거침없이 끌어낼 줄은 미처 몰랐다.『월든』은 내게 참 놀라운 책이다.

이 추운 겨울날, 아늑한 고향집이 다시금 그립고, 온갖 땔감들을 태우던 아궁이와 그 속에서 익혀져 나오던 구운 고구마와 감자가 그립고, 그 아궁이에서 타닥타닥 불타던 솔잎 냄새가 더욱 그립다. 그리고 제 몸을 아낌없이 불태워 우리의 얼어붙은 몸을 따뜻하게 덥혀주던 그 모닥불이 그립다.
 
 * * *

 

이제 화로의 시대가 되면서, 우리가 과거에는 인디언의 방식을 따라 감자를 재에 넣어 구웠다는 사실은 곧 잊히고 말 것이다. ······ 그래서 나는 친구 하나를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불에서는 언제나 어떤 얼굴이 보인다. 노동자는 저녁이면 불을 들여다보며, 낮 동안 쌓인 무가치한 것과 불순물을 생각에서 지워내지만, 나는 이제 불 앞에 앉아 불을 들여다볼 수 없다. 그 때문인지 한 시인이 적절히 표현한 시구가 새로운 힘을 얻어 내 기억에 되살아났다.



 

밝은 불꽃이여, 삶의 모습을 비춰주는
그대의 사랑스럽고 친근한 공감을 내게 거절하지 마소서.
내 희망이 아니면 무엇이 그처럼 밝게 치솟아 올라가겠는가?
내 운명이 아니면 무엇이 밤에 그처럼 낮게 가라앉았겠는가?

왜 그대는 우리의 벽난로와 응접실에서 추방당했는가?
모두에게 환영받고 사랑받던 그대였는데,
이제 우리 삶에서 흐릿하기 그지없는 흔한 빛에 비하면
당시 그대의 존재는 얼마나 환상적이었던가?
그대의 밝은 불빛은 우리 영혼과 마음에 맺는다고
신비로운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가?
너무나 대담하게 비밀까지도?
그래, 우리는 이제 희미한 그림자조차 흔들리지 않고
기쁨도 슬픔도 없이
그저 불기운이 손과 발을 따뜻하게 해주는
난롯가에 앉아 있어 안전하고 안정되기는 했지만
더 큰 열망을 품지 못한다.
아담하고 실용적인 난로 옆에서
현재라는 시간은 자리 잡고 앉아
잠에 빠져들기도 하겠지만,
어둑한 과거에서 걸어나와 모닥불의 휘청대는 불꽃 옆에
우리와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유령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73


                                                                                                               - 후퍼 부인


주석

73. 미국 시인인 앨런 스터기스 후퍼(Ellen Stergis Hooper, 1812∼1848)의 「모닥불」을 인용한 것으로 구두점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이 시는 《다이얼》제2호(1840년 10월)에 처음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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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겨울, 옛 추억들
    from Value Investing 2016-01-23 11:36 
    * 고 드 름 * 시린 밤 내내 네 집앞 기웃거린 죄로 하 많은 세월 물구나무서기 해서 살아도 그대 앞에선 결코 얼굴 붉히지는 않겠다. 이 겨울, 날카로움의 끝을 그대에게 들이대고 있지만 내 뜻은 그게 아님을 투명하게 보여주고 싶다. 그대 안에 꽃 피우기 위해서라면 가장 양지 바른 날 열렬함의 이름으로 깨끗이 녹고 말겠다. 똑,또옥 그대 가슴만 몇 번 두드려 보고 - 석청 신형식 * * * 매서운 추위다. 이럴
 
 
 


소로우의 글을 읽으면서 찰스 다윈과 앙리 베르그송의 생각까지도 엿볼 수 있다는 건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홉스의 '야만인'과 루소의 '고상한 야만인'도 함께 떠오른다.)

스스로 '때로는 삼류시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소로우는 하버드 대학교의 관리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교사-개인 가정교사, 측량사-정원사, 농부-페인트공, 목수, 벽돌공, 일용 노동자, 연필 제조공, 사포 제조공, 작가, 때로는 삼류시인입니다"라고 자신의 직업을 소개했다.") 그가 찰스 다윈의 책을 열심히 읽었다는 사실이 내겐 몹시 흥미롭다.

『월든』이 출간된 1854년까지만 하더라도 다윈의 『종의 기원』(1859년 출간)은 아직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그렇지만 소로우는 다윈의 첫 작품인 『비글호 항해기』는 무척 감명깊게 읽었던 듯하다. 그런 흔적이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는 『종의 기원』이 출간된 이듬해인 1860년 1월에 다윈의 주저를 읽었다고 한다. 1860년은 링컨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해였고, '노예제도'에 대해 극단적인 혐오감을 나타낸 그가 죽기 불과 2년 전의 일이었다. 그가 다윈의『종의 기원』을 읽고 난 느낌들을 좀 더 자세히 접할 수 없어서 몹시 안타깝다. 

소로우의 자연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뿐만 아니라 그의 막힘없는 생각들과 드넓은 안목에 비춰보면, 소로우는 이미 '다윈의 생각'쯤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았을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래서 그는 아마도 다윈의『종의 기원』에 대해서도 어느 탁월한 자연과학자의 '당연한 귀결'쯤으로 여겼을지 모르겠다. 내 주제넘은 생각으로는, 아마도 소로우 또한 뛰어난 자연과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쇼펜하우어가 다윈의 그 책에 대해 반응했던, 그리 대수롭지는 않다는 식의 '딱 그만큼'에 가까운 호의를 보여주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 * *


 

 

동물적 속성

우리는 내면에 동물적 속성이 감춰져 있어, 고결한 본성이 잠들 때 그 속성이 깨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동물적 속성은 파충동물처럼 비열하고 도덕적으로 방종하며, 결코 완전히 떨쳐낼 수 없는 것인 듯하다. 말하자면, 동물적 속성은 건강한 삶을 살아갈 때도 우리 몸에서 기생하는 벌레와도 같다. 우리가 그런 동물적 속성을 멀리할 수는 있지만 속성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따라서 동물적 속성이 고유한 활력을 지니기 때문에 우리가 건강하더라도 순수하지 못할까 봐 걱정된다. ······ 맹자의 말을 빌리면 "인간이 금수와 다른 점은 지극히 사소한 부분 때문이다. 범인은 그 차이를 금세 잃어버리나 군자는 그 차이를 조심스레 유지한다."39 우리가 순수의 경지에 이르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나에게 순수가 무엇인지 가르쳐줄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어디 있는지 안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그를 찾아 나설 것이다. 『베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욕망을 억제하고 몸의 외적인 감각을 억제하는 힘과 좋은 행실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정신력만으로 잠시나마 몸의 모든 부분과 기능을 지배해서, 천박한 감각에 따르는 형태를 띤 것을 순수하고 경건한 것으로 바꿔갈 수 있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나태할 때 생산적인 에너지는 헛되이 낭비되며 우리를 불결하게 만들지만, 절제할 때는 그 에너지가 우리에게 활력을 주고 영감을 준다. 순결은 인간성을 꽃피우기 위한 조건이다. 천재적 재능, 영웅적 자질, 신성함 등은 모두 순결의 결과로 얻는 다양한 열매에 불과하다. 인간은 순수의 항로가 열릴 때 하느님에게 곧장 다가갈 수 있다. 순수한 행실은 우리에게 영감과 용기를 북돋워주고, 불순한 행실은 우리를 낙담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다. 우리 삶은 이러한 부침의 반복이다. 내면에서 동물적 속성은 매일 조금씩 죽어가는 반면 신성한 면은 굳건해진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자신의 열등하고 동물적인 속성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파우누스와 사티로스41처럼 신이나 반신반인半神半人, 즉 신성과 수성이 결합된 존재고 탐욕으로 가득한 피조물일까 봐 두렵다. 또한 우리 삶 자체가 어느 정도는 우리에게 치욕을 안겨 주는 것이 아닌지 두렵기도 하다. (300∼302쪽)


주석

39. 포티에의 프랑스어 번역판 『공자와 맹자』에서 「맹자」부분을 소로가 직접 번역해 인용한 것이다.

41. 파우누스는 로마 신화에서, 사티로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반인반양半人半羊으로 숲과 산을 지배하는 신이며, 탐욕스럽고 주색을 즐긴다.

 

 

 

도덕 감각

도덕 감각에 대해 다윈은 J.S.밀이 말한 '도덕감정이 천성적인 것이 아니라 얻어진 것이라 하여도 그 때문에 본디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를 주로 인용하면서 동물의 사회적 본능과 결부된 천성의 감각임을 설명하고 있다.

'다음 명제는 고도로 개연적이라고 생각된다. 즉 부모와 자식의 애정을 포함해 현저한 사회적 본능이 풍부한 동물이라면, 어떤 동물도 그 지적인 능력이 인간과 같거나 혹은 그에 가까운 정도까지 발달하면 당장 도덕 감각, 혹은 양심을 획득할 것이다.'

 - 찰스 다윈, 『종의 기원』中에서(책의 말미에 실린 '다윈의 생애와 사상' 中에서)

 

 

 

모두가 동일한 계통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인간과 그외의 다른 모든 척추동물들이 동일한 보편적 모형에 따라 만들어졌고, 왜 그들의 배발생 초기 단계가 모두 동일하며, 또 왜 그들이 특정한 흔적을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들 모두가 동일한 계통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만 한다. 다른 어떠한 견해가 있더라도 우리 자신과 주위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자기만 갖고 있는 것과 같은 구조는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기 위해 놓은 덫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만약 전체 동물 계열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동물의 인척 관계와 분류, 그리고 지리적 분포와 지질학적 계통에서 얻은 증거들을 다 함께 고려한다면 이러한 결론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선천적인 편견이며 우리의 조상이 반신반인에서 유래되었다고 선언하는 오만불손함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과 여러 포유동물의 비교해부학과 발생 과정에 박식했던 박물학자들이 각각의 생물을 독자적인 창조 활동의 작품이라고 믿었다는 사실이 불가사의하게 여겨질 날이 머지않아 오게 될 것이다.(70∼71쪽)

 - 찰스 다윈, 『인간의 유래』 <제1장 인간이 하등동물에서 유래되었다는 증거> 中에서
 


 

 

우리가 인정해야만 할 것

이 작품에서 도달한 주요 결론, 즉 인간이 하등동물에서 유래했다는 결론은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의 비위를 크게 상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개인에게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야생의 황폐한 해안에서 처음으로 푸에고 제도 원주민 무리를 보고 느꼈던 그 경악스러움을 나는 절대로 잊을 수 없다. 내 마음속에 하나의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조상의 그림자였다. 그들은 완전히 벌거벗고 있었고 온몸에는 얼룩덜룩 칠을 한 채였다. 그들의 긴 머리털은 헝클어진 채였고 흥분하여 입에서는 거품이 일었다. 그들의 표정은 거칠고 놀라움과 의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술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야생동물과 마찬가지로 주위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먹고 살았다. 정부도 없었고 자기가 속한 작은 부족의 구성원이 아니면 누구에게나 무자비했다. 토착지의 미개인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혈관 속에 비천한 생물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큰 수치심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내 자신의 처지에서 본다면, 적을 괴롭히며 즐거워하고 엄청난 희생을 바치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유아를 살해하고 아내를 노예처럼 취급하며 예절이라고는 전혀 없고 천한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미개인에게서 내가 유래되었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의 목숨을 구하려고 무서운 적에게 당당히 맞섰던 영웅적인 작은 원숭이나 산에서 내려와 사나운 개에게서 자신의 어린 동료를 구해 의기양양하게 사라진 늙은 개코원숭이에게서 내가 유래되었기를 바란다.

인간은 비록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된 것은 아니지만 생물계의 가장 높은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는 자부심을 버려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낮은 곳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는 사실이, 먼 미래에 지금보다 더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희망이나 두려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이성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진실을 밝히려는 것뿐이다, 그리고 나는 내 능력이 닿는 데까지 그 증거를 제시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인정해야만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고귀한 자질, 가장 비천한 대상에게 느끼는 연민,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가장 보잘것없는 하등동물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는 자비심, 태양계의 운동과 구성을 통찰하고 있는 존엄한 지성 같은 모든 고귀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그의 신체 구조 속에는 비천한 기원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571∼572쪽)

 - 찰스 다윈, 『인간의 유래』 <제21장 전체 요약과 결론> 中에서 

 

 

 

동물과 식물

"우리는 동물을 감수성과 깨어난 의식으로, 식물을 잠든 의식과 무감각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리고 다른 한편 동물계의 진화는 식물적 삶에 보존되어 있는 경향에 의해 끊임없이 지연되거나 멈추거나 아니면 뒤로 돌아가기도 한다. 실제로 한 동물 종의 활동이 아무리 충만하고 넘치는 것처럼 보여도 마비나 무의식이 언제나 노리고 있다. 동물의 활동은 노력에 의해 피로를 대가로 해서만 그 역할을 유지할 수 있다. 동물이 진화한 길을 따라 수없는 쇠퇴와 퇴락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대부분 기생적 습관들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그만큼의 식물적 삶을 향한 방향전환들이다."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中에서 

 

 

 

음울하고 불길한 본질적 특성

고상한 야만인의 학설은 새로운 진화적 사고에 의해 그 오류가 더욱 무자비하게 노출된다. 자연 선택의 산물 중에는 그야말로 고상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 다음 세대의 발현을 위한 유전자들의 경쟁 속에서 고상한 것들은 도태되기 때문이다. 두 동물이 한 물고기를 먹을 수 없고 같은 짝을 독점할 수 없기 때문에 이익을 위한 투쟁은 모든 생명체에 편재한다. 사회적 동기가 자신의 복제를 최대화하려는 유전자들의 적응의 산물이라면, 그것은 그러한 투쟁에서 경쟁자들을 이기도록 설계되어야 하는데, 이기는 방법에는 경쟁을 중화시키는 방법도 포함된다. 윌리엄 제임스의 화려한 표현에 따르면, "경쟁자들을 차례차례 도살하는 장면을 성공적으로 연출했던 자들의 직계 후손인 우리는, 아무리 평화로운 미덕을 소유했을지라도 여전히 어느 한 순간에 화염처럼 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수많은 학살을 통해 다른 존재들을 죽이고 자신은 살아남기 위해 휘둘렀던 음울하고 불길한 본질적 특성이다."
 (112쪽)

 

 - 스티븐 핑커, 『빈서판』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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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12-20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누구의 저작을 읽고 영향을 받았다는 글을 접하면 신기해서 한 번 더 읽게 됩니다.
지금의 우리에겐 똑같이 위대하게 생각되는 저술가라도 그 당시엔 혹평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요. ^^

oren 2013-12-20 10:09   좋아요 0 | URL
이미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신들의 계보'처럼, 수많은 책들 속에서 '누구는 누구의 자식이고, 누구는 누구의 아버지'라는 식으로 서로 주고받은 영향들을 자연스레 드러내는 경우가 참 많은 듯해요.

소로우 또한 대단한 의욕을 가지고 출판했던 첫 작품인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이 참담한 실패로 돌아간 이후, 9년 동안 무려 일곱 번이나 고쳐 쓴 끝에 『월든』이라는 불후의 걸작을 내놓았지만 그 당시로서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듯해요. 물론 작가 자신은 자신의 작품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틀림없이 세상으로부터 널리 인정받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확신했던 듯하고요.
 
자만에 빠진 철부지


어제 모처럼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그 중 셋이서 함께) 소주 3병을 마셨다. 그런데 아이들이 재미삼아 들려준 얘기들은 소위 '금수저나 은수저를 물고 나온 또래들'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그런 '철부지들'을 너무 부러워하지 말라고 아이들을 조금 다독여(?) 주었다.

문득 오래 전에 읽었던 책 속 구절들이 떠오른다. '철부지들'을 부러워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두려워해야 할 이유조차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 또한 얼마나 큰 오류인가 싶다. 이래저래 철부지들이 여기저기서 너무 설쳐대는 꼴이 요즘 온통 화제인 듯하다. 그들의 얘기가 얼마나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지를 상상해 보면 감히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나로서는 그들의 얘기가 내 귀에 자주 담기는 것조차 불편하다. 꼴도 보기 싫다고 말한다면 너무 괴퍅한 사람일까?

 * * *

 

풍요,결핍,투쟁

우리는 풍요로운 세계에서 태어난 인생이, 결핍과 투쟁의 와중에 있는 인생보다 더 낫고 더 우수하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판단에는 매우 엄밀하고 근본적인 이유들이 있긴 하지만 지금 그것을 거론할 때는 아니다. 여기서는 그 이유들을 열거하는 대신, 모든 세습귀족의 비극에 등장하는 언제나 되풀이되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귀족이 뭔가를 상속한다는 것은 자신이 창조하지 않은, 따라서 자신의 개인적인 삶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않은 인생 조건들을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태어나면서 졸지에 영문도 모른 채 부와 특권을 소유한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래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부와 특권은 다른 사람, 다른 인간, 곧 그의 조상이 남긴 거대한 갑옷이다. 그래서 그는 상속자로 살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의 갑옷을 걸쳐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걸까? 세습 '귀족'은 자신의 삶을 사는 걸까, 아니면 선조 귀족의 삶을 사는 걸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그는 타인의 삶을 재현해야 하며, 따라서 타인도 자신도 아닌 운명을 짊어진 것이다. 그의 삶은 불가피하게 진정성을 상실하고 순전히 다른 삶을 재현하거나 꾸미는 것으로 변화한다. 그가 관리해야 할 과다한 재산은 자신의 개인적인 운명을 살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그의 삶을 위축시킨다. 모든 삶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싸움이며 노력이다. 인생을 살아가며 부딪치는 어려움은 나의 활동과 능력을 일깨워 활용하게 해준다. 만일 대기가 내게 압력을 가하지 않는다면 내 몸은 이리저리 떠다니는 흐물흐물한 유령처럼 느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습 '귀족'의 인격은 삶의 노력과 활용 부족으로 점차 모호해진다. 그 결과 옛 귀족 가문 특유의 어리석음만이 남는다. 이는 아직까지 아무도 그 내부의 비극적 메커니즘 - 모든 세습귀족을 어쩔 수 없이 퇴보하게 만드는 - 을 그려낸 적이 없는 어리석음이다.

 

 

 

자만에 빠진 철부지

삶의 본질 그 자체와 접촉하지 않는 것이 위험요소이자 문제의 근본이다. 인간의 삶 중에서 등장할 수 있는 가장 모순적인 삶의 형태가 '자만에 빠진 철부지'이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다. 실제로 '부모 슬하의 자녀'는 이런 환상을 갖는다. 우리는 그 까닭을 잘 알고 있다. 가족 내에서는 어떤 큰 잘못을 범해도 전혀 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 세계는 상대적으로 인위적이기에, 사회나 외부 세계에서는 자동적으로 파국적이고 피치 못할 결과를 초래할 행위들이 묵인된다. 그러나 '철부지'는 집밖에서도 집안에서처럼 행동할 수 있다고 보며, 돌이킬 수 없고 취소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뭐든 해도 좋다고 여긴다. 이 얼마나 엄청난 오류인가!

* 가정과 사회의 관계는, 크게 보면 국가와 국제사회의 관계와 같다. '철부지주의'가 보여주는 가장 명백하고 대규모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는 일부 국가들이 국제사회 속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순진하게도 '민족주의'라고 불리고 있다. 나는 국제주의에 대한 맹종에도 반대하긴 하지만, 아직 덜 성숙한 국가들의 일시적인 '철부지주의' 또한 어리석은 짓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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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2-18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숱한 중학생들을 만나면서,
딱 그 시기에 힘과 체력은 남아돌고, 아직 판단은 미성숙하며, 머리는 다소 굵었고, 사회적 처신은 서투른 이 녀석들이 아무 생각없이 저지르는 만행들을 보고, 제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회적 가치나 규율에 대해서 이해시켜야 하는게 첨에는 참 힘들었습니다. 사회의 총체적인 문제인데, 감을 잡지 못하고 있네요, 아직.

그런 철부지로 성인까지 주욱 자라는 사람들이 많아 보입니다, 아마 저도 그렇지 않을까 두려워지기도 해요, 가끔. 옛날에는 당연히 성인이었던 나이대가 지금은 청소년이나 마찬가지로 구분합니다.
법적 청소년이 만24세까지더군요.

oren 2013-12-18 13:33   좋아요 0 | URL
요즘의 중학생들은 정말 '두려운 철부지들'이지요. 법적 청소년이 만24세까지인 줄은 미처 몰랐네요.

마녀고양이 2013-12-18 16:32   좋아요 0 | URL
네, 청소년 기본법의 청소년은 만 9세에서 만 24세랍니다. ^^
 



책이라고 해서 덫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 * *

 

인간은 얼마나 자주 진퇴양난에 빠지는가!

······ 이런 덫들이341 우리 허리띠에 주렁주렁 매달려, 우리에게 정해진 거친 땅에서 한 발짝을 내밀 때마다 우리는 덫까지 질질 끌고 가야 한다. 차라리 덫에 걸린 꼬리를 잘라버린 여우가 운이 좋은 여우였다. 사향쥐는 덫에 걸리면 세 번째 다리를 물어뜯어서라도 도망치려고 한다.343 우리 인간이 융통성을 잃어버린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얼마나 자주 진퇴양난에 빠지는가! "잠깐만요, 무례한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무슨 뜻으로 진퇴양난이란 말을 쓴 겁니까?" 당신이 천리안을 지닌 사람345이라면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이 지닌 모든 것은 물론이고, 그 사람이 뒤로 감추고 자기의 것이 아닌 척하는 것, 예컨대 부엌 가구와, 그가 아끼면서 불태워버리지 못하는 하찮은 것까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런 것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고 발버둥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자신의 몸은 어렵사리 옹이구멍이나 대문을 빠져나갔지만 가구를 실은 썰매는 뒤따라 나오지 못해 꼼짝 못하고 서 있다는 뜻에서 나는 그 사람이 진퇴양난이라고 말한 것이다. 말쑥하게 차려입고 옹골차게 보이며, 겉으로는 자유분방하게 보이는 사람이 잔뜩 긴장해서 자기 입으로 자기 가구가 보험에 들어 있다느니 그렇지 않다느니 하며 떠들어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내 가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화려한 나비는 이미 거미줄에 걸려든 것이다. 오래 전부터 어떤 가구도 지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꼬치꼬치 따져 물으면, 다른 사람의 헛간에 적잖은 가구를 보관해두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보기에 요즘의 영국은 엄청난 짐을 끌고 다니며 여행하는 노신사와 비슷하다. 오랫동안 살림살이를 하면서 축적된 하찮은 것들도 불에 태워버릴 용기가 없어 거추장스럽게 짐으로 끌고 다닌다. 큰 여행가방, 작은 여행가방, 모자 상자, 꾸러미 따위 등등. 적어도 앞의 세 가지는 버려도 상관없다. 요즘에는 건강한 사람도 자기 침대를 등에 지고 걷기는 힘들다.347 따라서 나라면 병든 사람에게 침대를 내려놓고 뛰라고 충고해줄 것이다. 나는 자신의 모든 재산이 담긴 보따리를 짊어지고 비틀거리며 걷는 이민자를 보았다. 보따리가 마치 그의 목덜미에서 자라는 거대한 혹처럼 보였다. 나는 그 사람이 한없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그 보따리가 그의 전 재산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전 재산을 짊어지고 다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런 덫을 끌고 다녀야할 처지가 된다면, 덫을 가볍게 처리해서 덫에 내 중요한 부분이 걸리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다. 그러나 가능하면 애초부터 발을 덫에 넣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한 짓일 것이다.
(112∼113쪽)


주석

341. 말장난이 섞여 있다. 여기에서 '덫'은 올가미라는 뜻이기도 하며, 외적인 장식물이나 세간을 뜻하기도 한다.

343. 소로는 일기에서 "사향쥐는 자신의 다리를 물어뜯어 끊어내는 대단한 녀석이다. 언젠가 나는 사향쥐 한 마리를 잡았는데 녀석은 세 번째 다리를 물어뜯어 끊어냈다. 그런데 그때가 세 번째로 덫에 걸린 때였다. 하지만 한 다리로는 도망칠 수가 없어 녀석은 덫 옆에 죽어 있었다"라는 콩코드의 덫 사냥꾼 조지 멜빈의 말을 인용했다. 이 이야기에 대해 소로는 "이런 비극이 이 지역에서, 또 우리의 평화로운 강가에서 일어나며, 사냥꾼은 그런 용기를 보여주는 사냥감에 경외감을 표하며, 결국에는 사냥감을 치료하는 의사가 된다"라고 말했다. 소로는 1854년 2월 5일 일기에서도 이 야야기를 언급하며 "자기의 세 번째 다리를 물어뜯어 끊어내는 사향쥐를 어떻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동정심은 사향쥐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똑같이 유한한 목숨이기 때문에 사향쥐의 엄청난 고통과 영웅적인 힘을 인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345. seer. 이 단어는 직역하면 '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뜻이 확대되어 예언자와 시인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 에머슨은 「신학교 강연」에서 "천리안을 지녔다는 예언자는 자신의 깨달음을 세상에 전하는 전령이다. 자신의 꿈을 어떤 식으로든 알린다. 그 꿈을 어떻게든 신성한 즐거움으로 알린다. 따라서 때로는 캔버스에 연필로 그림을 그려서, 떄로는 끌로 돌을 조각해서, 때로는 화강암으로 탑을 쌓거나 건물을 지어서, 때로는 송가를 통해서 그의 영혼이 숭배하는 것을 표현하지만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분명하고 오래 지속되는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347. 「요한복음」5장 8절의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들고 걸어가거라"를 빗댄 표현이다.



 

단순하게, 소박하게, 수수하게!

우리 삶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우왕좌왕한다. 정직한 사람은 열 손가락 넘게 헤아릴 게 거의 없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열 발가락을 보태고 나머지는 대충 하나로 뭉뚱그리면 충분하다. 단순하게, 소박하게, 수수하게!69 당신의 일을 둘이나 셋으로 줄이고, 100가지나 1,000가지로 늘리지 마라. 100만 대신에 여섯까지만 세라. 장부를 엄지손톱에 기록하라. 문명화된 삶이라는 변덕스런 바다 한가운데에서는 구름과 폭풍과 유사流砂 등 온갖 것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침몰해 바닥에 가라앉아 항구에 도착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으려면 추측항법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성공한 사람은 뛰어난 계산가인 것이 분명하다. 단순화하라, 단순화하라! 하루에 세 끼를 먹는 대신, 꼭 먹어야 한다면 한 끼만 먹어라. 100가지 요리 대신 다섯 가지로 만족하라. 다른 것들도 같은 비율로 줄여라.
(142∼143쪽)

주석

69. 1848년 3월 27일, 해리슨 그레이 오티스 블레이크에게 보낸 서간에서 소로는 "나는 소박하게 살아야 한다고 믿네. 안타깝고도 놀라운 일이지만, 지혜롭기 그지없는 사람도 하루에 사소한 문제들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나. 그 때문에 중요한 문제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지. 수학자가 어려운 문제를 풀 때를 생각해보게. 방정식에서 거추장스런 것을 없애 간단한 식으로 만들지 않나. 이처럼 우리도 삶을 단순화해야 하네. 정말 필요한 것과 실재적인 것을 구분해야 하네. 우리의 중요한 뿌리가 어디로 뻗는지 철저히 탐구해봐야 하네"라고 썼다. 1853년 9월 1일 일기에서 소로는 두 유형의 단순함을 구분하며 이렇게 말했다.

미개인은 무지하고 나태하며 게으르기 때문에 단순하게 살지만, 철학자는 지혜롭기 때문에 단순하게 산다. 따라서 미개인의 경우에는 단순함에 나태라는 결함이 동반되지만, 철학자의 단순함은 최상의 경지까지 발달한 삶의 모습이다. 미개인과 태반의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뭔가를 심고 꾸미고 만들어내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만, 철학자나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의 능력을 최고의 상태로 함양하며, 뭔가를 심고 꾸미며 만드는 데 최소한의 시간을 사용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미개인은 삶에 불필요한 물건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보다 더 못한 짓을 하기 때문에 그들의 단순함은 잘못된 것이지만, 철학자는 사치품을 얻으려고 바쁘게 사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을 하기 때문에 철학자의 단순함은 바람직한 것이다. 결국 문제는 자유를 누리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다.




소로우는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의 삶으로 그대로 보여준 사람이었다. '책'이라고 해서 별다른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비록 무수히 많은 책들을 '빌려' 읽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의 '서고'는 여전히 놀랍기만 하다.

 

주석

102. 소로는 1853년 10월 27일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내 책을 출간해준 출판사가 아직 팔리지 않는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재고들을 어떻게 처분해야 겠느냐고 묻는 편지를 지난 한두 해 동안 가끔 보내다가, 재고들이 차지한 공간을 그들이 급히 사용해야 할 일이 생겼다고 내게 알려왔다. 그래서 나는 전부 여기로 보내달라고 부탁했고, 그 책들이 속달로 오늘 도착했다. 짐마차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았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4년 전에 먼로에게 사서 그 이후로 조금씩 값을 치렀지만 아직 완납하지 못한 1,000권 중 남은 706권이었다. 그 책들이 마침내 내게 보내졌고 이제야 내 물건들을 살펴볼 기회를 갖게 됐다. 그 책들을 등에 짊어진 채 층계참을 돌고 두 계단을 올라, 그것들이 원래 있었을 곳과 비슷한 공간까지 옮겼다. 290권 남짓한 책들 중 75권은 기증하고 나머지가 겨우 팔린 것이었다. 이제 나는 거의 900권에 달하는 서고를 갖게 됐지만, 그 중 700권 이상이 내가 쓴 책이다. 저자가 자신이 기울인 노고의 열매를 지켜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내 책들이 내 방 한 귀퉁이에 허리 높이까지 쌓여 있다. 내 오페라 옴니아(opera omnia, 모든 저작물-옮긴이)다. 내가 원작이고, 내가 머리를 짜내 빚어낸 작품이다.




그가「독서」에 대해 쓴 훌륭한 문장들을 굳이 여기까지 길게 덧댈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이 글의 제목에 어울리는 그의 글들을 조금쯤 옮겨 오는 수고는 너무 아낄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다.

 

그들은 어떤 것도 허투루 버리는 걸 용납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런 것들을 읽어내는 기계다.

우리는 이미 문자를 배웠기 때문에 기왕 책을 읽을 바에는 가장 뛰어난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24  평생 4학년이나 5학년 교실에서, 혹은 학교 앞에 있는 가장 낮은 벤치에 앉아 에이 비 에이와 단음절 단어를 끝없이 반복할 수는 없잖은가. 대부분의 사람은 읽거나 누군가 읽어주는 걸 듣는 것으로 만족하며 한 권의 좋은 책, 예컨대 『성경』에 담긴 지혜에 의해 죄인이 되어버리는 듯하다. 그래서 그 이후 평생을 무기력하게 지내며, 이른바 쉬운 읽을거리를 읽으면서 그들의 능력을 헛되이 날려버린다. 우리 순회도서관에는 몇 권으로 구성된 책이 있다. 그 책에는 『리틀 리딩』이라는 제목이 붙어, 나는 그 제목이 내가 가보지 못한 어떤 마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가마우지와 타조처럼 고기와 야채로 실컷 배를 채우고도 이런 종류의 책들을 너끈히 소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것도 허투루 버리는 걸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하찮은 읽을거리를 만들어내는 기계라면, 그들은 그런 것들을 읽어내는 기계다. 그들은 제불론과 세프로니아31에 대한 9,000번째 이야기를 읽는다. 두 연인이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격렬한 사랑을 나누지만 그들의 진정한 사랑은 결코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한다는 이야기32, 그들의 사랑이 잘나가다 장애물에 부딪혀 비틀거리지만 다시 일어서서 계속된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또 종탑까지는 결코 올라가지 말았어야 할 어느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이 교회의 첨탑까지 올라가는 이야기도 읽는다. 그럼 그 사람을 쓸데없이 그곳까지 올려놓고 희희낙락하는 소설가는 종을 시끄럽게 울리면서 세상 사람들을 모아놓고 "아, 그 사람이 다시 내려왔습니다!" 라며 어떻게 내려왔는지 들으라고 떠벌린다. 내 생각을 솔직히 말하면, 옛날에 주인공들이 별자리에서 활약했듯이 지금의 일반적인 소설 세계에서는 그런 향상심에 불타는 주인공들을 인간 풍향계로 바꾸어 그들이 못된 장난으로 정직한 사람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녹슬 때까지 어딘가 꼭대기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내려오지 못하게 하는 편이 더 나을 듯하다. 소설가가 다음에 종을 울리면 나는 교회당이 불타 없어지더라도 꼼짝하지 않을 것이다. "『티틀 톨 탄Tittle-Tol-Tan』을 쓴 유명 작가의 신작인 중세를 배경으로 한 연애소설, 『살금살금 펄쩍-뛰어넘기The Skip of the Tip-Toe_Hop』가 매달 분책으로 출간될 예정. 혼잡이 예상되오니 한꺼번에 오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눈을 부릅뜨고, 원초적인 호기심이 발동하여 이런 소설을 읽는다. 그들의 모래주머니는 지치지도 않아 주름37을 예민하게 다듬을 필요도 없다. 마치 네 살배기 꼬마가 벤치를 지키고 앉아 금박을 입힌 2센트짜리 『신데렐라』를 열심히 읽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내가 보기에, 그런 소설을 통해서는 아무리 읽어도 발음이나 말투 혹은 강조하는 법에서 어떤 향상도 이뤄내지 못한다. 또한 교훈을 끌어내고 끼워넣는 능력을 키우지도 못한다. 눈이 침침해지고 생명 유지에 필요한 순환 능력이 떨어지며 지적 능력이 전반적으로 저해되면서 서서히 감퇴하는 결과를 빚을 뿐이다. 이처럼 말초적인 신경만 자극하는 생강 빵이 거의 모든 집의 화덕에서 순수한 밀이나 호밀과 옥수수로 만든 빵보다 더 부지런히 매일 구워지며, 시장에서도 더 확실하게 팔린다.
(158∼160쪽)


주석

24.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에서 소로는 "가장 좋은 책을 먼저 읽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 책들을 읽을 기회를 영원히 놓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 영혼을 맑게 하는 건강한 책을 읽어야 한다

31. 제불론은 『성경』에서 야곱과 레아의 여섯 번째 아들이다(「창세기」30장 19-20절, 『성경』에서는 스불론이라 표기한다). 세프로니아는 16세기 이탈리아의 시인인 타소(Torquato Tasso, 1544-1595)의 서사시 「해방된 예루살렘」에 등장하는 소프로니아라는 인물의 이름을 약간 변형했을 가능성이 있다.

32.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서 "진정한 사랑은 결코 순조로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를 빗댄 표현이다.

37. 씨를 먹는 새의 모래주머니 벽에는 주름이 있어 소화하는 데 유리하다.




내가 혹시 '병아리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니는 암탉처럼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줄 모른다'고 누군가 비웃을 지도 모르겠다. 설령 그렇더라도 나는 '지네'를 닮고 싶지는 않다. 내가 좇는 병아리가 혹시 독수리가 아닌지 그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말이다.

 

암탉과 지네

병아리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니는 암탉처럼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것도 실제로는 병아리가 아니라 새끼 오리였다. 반면 오만 생각을 하고 텁수룩한 머리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한 마리의 벌레를 쫓아다니는 100마리의 병아리를 돌봐야 하고, 매일 아침 이슬에 병아리 20마리가 길을 잃어버리는 통에 그 녀석들을 찾아다니느라 애를 태우고 온 몸이 더럽혀지는 암탉과도 같은 사람들이었다. 다리 대신 머리를 앞세우는 사람, 즉 지능을 지닌 지네로 어떤 것에나 집적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컨대 화이트 산맥에서 그렇게 한다면서 방문객들이 이름을 적어놓는 방명록을 준비해두는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는 사람이 있었다.46
(216쪽)


주석

46. 1824년 초, 화이트 산맥의 워싱턴 산 정상에는 그곳까지 올라온 관광객들을 위한 방명록이 실제로 있었다. 소로가 "누군가 당신에게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못한다면, 그의 이름이라도 남겨야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일기)라고 쓴 1852년 1월 22일 일기를 기초로 이 구절을 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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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12-16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께 책이 배달되어 왔어요.
이 책 보자마자 만족해서 주석달린 빨간머리 앤도 사고 싶어졌어요.
소로가 문학적 글쓰기를 했다는 사실에 무척 놀라면서도 신선하게 다가오네요^^*
오렌님 감사합니다.^^*
주석달린 시리즈 중 괜찮은 것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현재는 빨간머리 앤만 욕심 나네요.
오렌님은 남자분이라 취향이 아니실 듯.

oren 2013-12-18 09:14   좋아요 0 | URL
『주석달린 월든』을 마침내 받으셨군요. 책이 만족스럽다니 다행이에요. 그런데 책이 생각보다 너무 크고 해서 어디 들고 다니면서 읽을 수 없다는 게 좀 아쉽더라구요. 어제 저녁에 (흔히 그렇듯이 '슬픈' 일로) 갑자기 안동엘 다녀왔는데, 마침 '오가는 길'에 책이라도 읽을 요량으로 둘러보니 딱 이 책밖에 없어서 대략 난감하더군요. 이렇게 큰 책을 아무데서나 태연하게 펼쳐 읽기는 좀 힘들겠더라구요.

『월든』에서 자연을 아름답게 묘사한 문장들은 정말 감동적인 구절들이 많지요. 그런데 제 생각으로는 '문학적 표현'에 있어서는 『주석달린 월든』보다는 강승영 님이 번역하신 『월든』이 훨씬 뛰어난 듯해요. 팜므님 말씀대로 저는 '주석 안 달린' '빨간머리 앤'조차 그다지 취향이 아니긴 해요. ㅎㅎ

다크아이즈 2013-12-18 08:10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두껍습니다.ㅋ
하지만 판형이 이뻐서 (주석 달아야 되니 그렇게 했겠지요.)용서가 되어요.
이걸 밖에 들고 다니면서 읽는다는 건 어차피 제 머리로는 무린 걸요.

강승영 번역의 월든도 찾아나서 볼게요.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 2013-12-16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페이퍼의 짧은 댓글 대신
이 페이퍼를 열심히 읽고 있네요... 책도 덫이 될 수 있다는 부분에서 벌써 눈을 떼지 못하고...

이후 단순하라! 에서 한숨을 쉽니다. 다른 것은 노력하겠는데
밥 한끼만은 도저히 못 먹을거 같아요. ^^

oren 2013-12-17 16:05   좋아요 0 | URL
『월든』의 매력이 소로우 님의 '과격한 표현' 내지는 '모순어법'에 있기도 하지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라 하다가는 굶어 죽을지도 몰라요. ㅎㅎ

모순어법에 대해서는 자신의 일기에서도 다음과 같이 반성하는 빛을 내보이기도 했어요.

* * *

1852년 9월 2일

나의 잘못은 다음과 같다.
패러독스 - 정반대의 것만을 말함 - 모방일지 모르는 방법.
착상의 교묘함.
말로 희롱함 - 되웃어주는 것 - 단순 - 강건 - 명료하지 않을 때도 있음.
나 자신의 말을 해야 할 때에도 유명한 표현이나 격언을 사용함.
진지하지 못할 때도 있음. '요컨대', '사실', '참으로!' 등. 의식의 결여.
 


소로우의 문장을 읽다가 정말 뜻밖에도 어디선가 본 듯한 '구경꾼'을 만났다. 온 몸에 전율감이 느껴졌다.

 * * *

 

연극이 끝나면 구경꾼도 떠난다

나는 나 자신이 인간이라는 존재, 달리 말하면 생각과 감정을 지닌 존재라는 걸 알고 있다. 또한 내게는 어떤 이중성이 있어, 타인에게만큼이나 나 자신에게서 초연할 수 있는 듯하다.20 내 경험이 아무리 치열하게 진행되더라도, 그 경험에 참여하지 않고 구경꾼 입장에서 그 경험을 기록하는 나의 일부가 내 안에 존재하는 걸 알고 있다. 엄격히 말하면, 그 일부는 나의 일부가 아니다.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다. 삶이라는 연극은 비극일 가능성이 크다. 그 연극이 끝나면 구경꾼도 떠난다. 구경꾼의 입장에서 보면 삶이라는 연극은 일종의 허구, 즉 상상이 빚어낸 작품일 뿐이다.
(195쪽)
 - 『주석달린 월든』, 「고독」중에서


주석

20. 소로는 일기에서 이런 이중성에 대해 언급했다. "내가 일기 쓰는 것들에 대해 실제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깜짝 놀란다." 에머슨도「뉴잉글랜드의 삶과 문학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에서 "이 시기의 핵심은 정신이 정신 자체를 인지하게 됐다는 것인 듯했다"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지워 버릴 수 없고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전율감(Grausen)'이 초래되는 것

무한한 과거나 무한한 미래에서도 고뇌에 가득 찬 끝없는 세계는 그에게는 미지고, 또한 옛날 이야기이기도 하다. 보잘것없는 그의 일신, 길이가 없는 그의 현재, 순간적인 그의 기쁨, 이것들만이 그에게는 현실성을 갖고 있으며, 그 이상의 인식으로 눈이 뜨이지 않는 한, 그는 이것들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하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단지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막연한 예감이 있어서, 이 모든 것들이 본래 자기와는 그다지 관계없는 것이 아니고, 개별화의 원리에 의해 차단할 수 없는 어떤 연관이 그 사이에 있다고 느끼고 있다. 이 예감에서, 아무래도 지워 버릴 수 없고 모든 인간(뿐만 아니라 아마 비교적 영리한 동물까지도)에게 공통된 '전율감(Grausen)'이 초래되는 것이다.(892쪽)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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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15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경꾼이 아닌 주인공이 되면 언제나 그곳에 아름답게 있겠지요.

oren 2013-12-16 09:56   좋아요 0 | URL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부터 연극의 무대위에 올려진 '주역배우'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싶어요. 그런데 가끔씩은 연극의 주인공이 자신의 연기를 하면서도, 그 연극을 바라보는 객석의 구경꾼마저 '또다른 나'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그 '이중성'이 우리를 되돌아 보게 하고, 그래서 무대 위의 배우조차 불현듯 그 '이중성'에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는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