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밤에는 이상한 뉴스를 하나 읽었다. 일본 지진에 관한 최신 뉴스였다.

 

“30년 이내 80%의 확률로 일어난다”고 알려진 일본 난카이 트로프(남해 해저협곡) 대지진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고 닛칸겐다이가 최근 보도했다.

 

난카이 트로프는 시즈오카현 쓰루가만에서 규슈 동쪽 태평양 연안 사이 깊이 4000m 해저 봉우리와 협곡지대다. ‘수도직하지진’(首都直下地震·진원이 도쿄 바로 밑에 있는 지진)과 함께 현재 일본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지진 위험 지역이다. 수도직하지진이 도쿄를 강타해 국가 기능을 마비시킬 우려가 있다면 난카이 트로프 지진은 거대한 쓰나미(지진해일)로 태평양 연안 일본 주요 도시가 물에 잠기는 대재앙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참으로 가깝고도 먼 나라다. 나는 고작 세 반밖에 가 보지 못했지만, 아직도 1995년에 맨 처음 그 나라를 갔을 때의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렇게도 가까운 나라가 이렇게도 잘 살고 있다니!

 

눈으로 보는 거의 모든 것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박물관을 가 봐도 놀라웠고, 도요타 전시장을 가 봐도 놀라웠고, SECOM이라는 유명한 보안회사를 가 봐도 놀랄 일 천지였다. 말로만 들었던 전자상가인 아키하바라도 어마어마했다. 들른 김에 SONY 캠코더와 큼지막한 올림푸스 자동카메라를 샀고, 빌 게이츠가 즐긴다는 최신 유행 게임인 MYST라는 CD 게임까지 샀다. 그때 내가 산 게임 CD 1장 가격이 무려 7만원쯤 했었다. 지금 되돌아 보니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 같다. 아, 참, 지금 이렇게 한가롭게 여담을 할 때가 아니다.

 

일본은 오랫동안 그저 단순히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나라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이 뉴스를 보고 나니 지진 위험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니구나 싶다. 용어조차 생경한 '수도직하지진'이니 '난카이 트로프 지진'이니 하는 것들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 충격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일으켰던 8년 전 대지진과는 비교도 하기 힘들 듯하다.

 

전문가도 경종울렸다…日 난카이 대지진 ‘전조’ 잇달아

 

그런데 일본은 생각할수록 장래가 참 아리송한 나라다. 미래에는 일본이 망한다는 예언도 수도 없이 나왔었다. 지진만 문제가 아니라 일본 열도가 통째로 가라앉는다는 얘기도 자주 등장했다. 마침 그저께는 세계적인 투자가인 짐 로저스 할아버지까지 한마디 보탰다. 일본은 경제학적으로도 아예 사라질 나라라고 규정해 버린 것이다.

 

 로저스의 日비관론 "사라질 나라… 주식 다 팔았다

 

이 두 가지 뉴스를 하루 사이에 접하고 보니 문득 짚이는 게 하나 있었다. 얼마 전에 읽었던 『탄허록』이라는 책에 담긴 내용들이었다. 그 책은 탄허스님이 입적하신 후에 스님의 말씀들을 모아 펴낸 책인데, 그 책 속에 담긴 스님의 예언 중에서도 마침 일본이 해수면 아래로 잠길 운명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탄허록』에 담긴 스님의 미래에 대한 예견은 단순히 일본 열도만 가라앉는다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변화가 도래한다. 그 내용들을 일부만 소개하면 이렇다. 무려 46억 년에 달하는 지구의 기나긴 역사가 우리 세대에 와서 다시 한번 중대한 변화를 맞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변화는 23.7도로 기울어진 지축이 바로 선다는 점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변화인가. 그런데 지구의 역사를 자세히 알고 보면 이 정도의 변화는 도리어 사소한 변화로 치부될 정도다. 지구상에서 가장 험준한 지형을 자랑하는 히말라야 산맥들도 한 때는 해저였으니 말이다.

 

 5억 년 전에는 공기중에 지금보다 20배나 많은 이산화탄소가 있었다. 2억 년 뒤 이산화탄소의 양이 줄어들었을 때 역전된 '온실효과'가 일어났다. ...... 심지어 지구의 하루에 해당하는 시간도 변해왔다. 달은 그 이웃의 자전에너지를 약화시키기 때문에, 지구의 자전 속도가 느려진다. 산호는 매일 변동하는 활동과 연간 변동하는 활동을 하는데, 4억 년 전부터 만들어진 성장 고리는 당시에는 1년이 400일이었음을 말해준다.(402쪽)

 

 - 스티브 존스, 『진화하는 진화론』 중에서

 

 

다시, 탄허 스님의 예언으로 돌아 오자. 스님은 일본이 미래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나라가 될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그들이 저지른 죄악이 틀림없이 인과응보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란다. 내 눈으로 봐도 그렇다. 아직도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강제 징용과 위안부 문제까지도 저런 식으로 다루는데 달리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일본은 지난 5백 년 동안 무려 49차례나 우리나라를 침략했다. 만약 임진왜란 때 천운이 우리 편이 되어 주지 않았다면 세력으로만 보자면 일본에게 우리 땅을 열 번도 더 빼앗겼을 것이다. 수차례 왜군의 침략으로 삼남三南은 쑥대밭이 되었고, 결국 함경도까지 함락되면서도 나라를 완전히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우리나라의 국운 덕분이었다. 즉 우리 선조들이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동양의 전통적 가치를 지키며 남을 해칠 줄 모르고 살아온 것이 결국은 우리나라의 미래를 밝히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동양 사상의 근본 원리인 인과법칙이자 인과응보이며 우주의 법칙이다. 이것을 역학의 원리로 풀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주역》의 팔괘에서 우리나라는 ‘간방艮方’에 위치해 있다. 《주역》에서 ‘간艮’은 사람에 비유하면 ‘소남小男’이다. 이것을 나무에 비유하면 열매다. 열매는 시종始終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소남을 풀이하면 ‘소년少年’이라 할 수 있는데, 소년은 시종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소년은 청산靑山이면서, 아버지 입장에서는 결실이기 때문이다. 소년이 다시 시작되면 성장하여 언젠가는 아버지가 된다. 열매는 결실 전 뿌리에 거름을 주어야 효과가 있고, 일단 맺게 되면 자기를 낳아 준, 다시 말해 열매를 만들어 준 뿌리와 가지의 말을 듣지 않는다. 오히려 열매는 뿌리를 향하여 자기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간艮’의 원리이자 소남의 해석이며 시종의 논리다.

 

《주역》을 지리학상으로 전개해 보면 우리나라는 간방에 해당되는데 지금 역의 진행 원리로 보면 이 간방의 위치에 간도수(艮度數; 《주역》에서 인간과 자연과 문명의 추수 정신을 말함)가 비치고 있다. 이 간도수는 이미 1900년 초부터 시작되었다.(42∼44쪽)

 

 

일본 열도가 물에 잠기면 우리나라라고 안전할까. 그럴 리는 없다. 우리나라 또한 동남 해안 쪽 1백 리의 땅이 피해를 입는다고 본다. 그러나 서부 해안 쪽으로 약 2배 이상의 땅이 융기해 도리어 국토는 늘어나리라 본다. 지구 대변화의 시기에 우리나라는 가장 적은 피해를 입으리라 본다. 한반도가 지구의 주축 부분에 위치하기 때문이란다. 우리나라는 간방에 간도수가 접합됨으로써 새로운 역사 또한 우리 땅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남북 문제에 대한 스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최근 1년 동안 북핵을 둘러싸고 숨가쁘게 진행된 움직임까지도 소상히 내다본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결국 시종을 함께 포함한 간방의 소남인 우리나라에 이미 간도수가 와 있기 때문에 전 세계의 문제가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게 될 것이다.

 

구체적인 예로 우리나라의 남북 분단과 통일 문제를 살펴보자. 전체 인류사적 관점에서 보면 작고 사소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이 문제야말로 오늘날 국제 정치의 가장 큰 쟁점이며, 한반도 문제 해결이 곧 세계 문제 해결로 직결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현상은 곧 지구의 남극과 북극의 상대적인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하겠다. 지구에 남극과 북극은 있지만 서극과 동극은 없지 않은가. 이는 지난 세기에 있었던 동서의 문제가 바로 역사의 결실기를 맞아 남북의 문제, 즉 지구의 표상인 남극과 북극의 상대적인 현상과 닮아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중략) 

 

역시 역학의 원리로 본다면 오늘날 우리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도 일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일본이 우리나라를 36년 동안 강점할 당시 그들은 일본 황궁皇宮을 한반도로 옮기려고 궁터까지 마련한 적이 있었다. 또한 영구히 일본 본토로 만들기 위해 우리 민족의 대부분을 만주 등으로 이전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36년이라는 일시적 강점 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끝이 났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가 일시적 현상으로 끝났듯이 우리나라의 남북 분단 문제 또한 그러할 것이다. 물론 위정자나 학자들이 남북 분단 문제를 민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 중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앞으로도 멈추지 말고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천륜天倫의 법칙에는 당할 수가 없다. 인간이 자연에 아무리 강력하게 도전한다 해도 결코 자연을 완전히 정복할 수 없듯이 말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추세가 아닌가.

 

결국 머지않아 통일을 위한 우리의 모든 노력에 하늘의 섭리가 필연적으로 작용할 것이다.(44∼47쪽)

 

 

여기서 꼭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은 '미국의 역할'이다. 좋든 싫든 미국은 우리의 군사동맹국이다. 일찌기 마키아벨리가 얘기했던 것처럼, 자국의 군대로 자신의 나라를 지킬 수 없을 때는 강력한 군사동맹만이 스스로를 보호하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나라에 주한 미군이 주둔하게 된 것도 다른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군대만으로는 우리 자신을 지켜낼 힘이 없다는 게 근본 원인이다. 또한 우리 주변에 강대국들이 너무 많은 탓이다. 탄허 스님은 우리나라와 주변국의 관계에도 음양의 이치가 작용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우리나라와 미국과의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 8·15 광복은 미국의 힘이 크게 작용했는데, 이것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 등 여러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나라를 일본으로부터 독립시킨 것은 알다시피 우리나라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이 일본을 항복시키고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독립을 도왔다는 것은 역학으로 풀이하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자 우주의 필연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역학에서 ‘소남小男’과 ‘소녀小女’, ‘장남長男’과 ‘장녀長女’, ‘중남中男’과 ‘중녀中女’는 서로 음양陰陽으로 천생연분의 찰떡궁합의 배합配合이다. 미국은 역학에서 ‘태방兌方’이며 ‘소녀’다. 이 소녀는 소남인 우리나라와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고, 그런 까닭에 해방 이후 정통적인 합법 정부를 수립한 우리나라가 미국을 제일의 우방으로 삼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미국은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건국을 도왔고, 6·25 동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함께 전선戰線에서 피를 흘린 맹방盟邦이 되었으며, 전후에는 수많은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물론 그 원조 속에는 미국의 국가적 이익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정치적 이익관계를 떠나서 우주의 원리에서 본다면 미국은 소녀이자 부인婦人으로 풀이된다. 미국이 우리나라에 도움을 준 것은 마치 아내가 남편을 내조하는 것과 같아 결과적으로 남편의 성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중략)

 

여기에서 미국과 월남전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나는 이미 오래 전에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을 확대해 나가자, 미국은 월남에서 망신만 당하고 물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함께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행원 스님(화계사 조실 숭산 스님; 미국으로 건너가 우리나라 불교 포교에 힘씀)은 당시 내 견해에 의구심을 가지고 반문했다.

 

“미국이 가지고 있는 핵무기 하나면 월남은 꼼짝 못할 것 아닙니까?” 그러다 3년 후 일본에 갔을 때 그곳에서 행원 스님을 다시 만났는데, 그때 내 예언이 어쩌면 그렇게 적중할 수 있느냐고 놀라워했다.

 

역학의 원리로 보았을 때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역학의 오행으로 보더라도 월맹은 ‘이방离方’인 남쪽으로, 이것은 ‘화火’로 풀이된다. 반면 미국은 태방兌方으로 ‘금金’인데, ‘금’이 불[火]에 들어가면 녹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화극금火克金’의 원리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금덩어리가 워낙 크다 보니 다 녹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손해를 본 것은 사실이다. 역학적으로 미국은 소녀少女, 월남은 중녀中女다. 두 나라가 음陰이어서 서로 조화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로 나는 미국의 국력이 제아무리 막강하더라도 월남전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음을 예견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우리나라는 간방에 위치해 있으며, 지금은 결실의 시대로 진입해 있다. 결실을 맺으려면 꽃잎이 져야 하고, 꽃잎이 지려면 금풍(金風; 여름의 꽃이 피어서 열매를 맺게 하려면 가을의 차가운 기운이 있어야 한다. 가을은 ‘금’ 기운의 상징이고 방위는 서쪽임)이 불어야 한다.

 

이때 금풍이란 서방西方 바람을 말하는데, 이 바람은 우리나라에 불기 시작한 이른바 미국 바람이다. 금풍인 미국 바람이 불어야만 꽃잎이 떨어지고 열매가 맺는 가을철인 결실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미국의 도움으로 인류사의 열매를 맺고 세계사의 새로운 시작을 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47∼50쪽)

 

 

이 대목은 지금 다시 읽어도 소름이 돋을 정도다. 1983년에 입적하신 스님은 마치 오늘 밤 베트남에서 열리고 있는 제2차 북미정상회담까지도 훤히 내다보는 듯하니 말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일본이 정말로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마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스님은 다음과 같이 소상히 예견했다. 스님이 살아 계실 당시만 하더라도 화석 연료의 과다 사용에 따른 이산화탄소 과다 배출이 결국 지구 온난화로 이어지고 북극의 빙하를 녹여 해수면 상승을 초래한다는 정도로까지 과학이 발전하지 못했을 터인데, 1983년에 입적하신 분이 어떻게 이토록 멀리, 정확하게 내다봤는지 그저 스님의 혜안이 놀라울 뿐이다.

 

서양 종교의 예언은 인류 종말을 말해 주고 예수의 재림으로 이어지지만, 정역의 원리는 후천 세계의 자연계가 어떻게 운행될 것인가, 인류는 어떻게 심판받고 부조리 없는 세계에서 얼마만한 땅에 어느 정도의 인구가 살 것인가를 알려 주고 있다.

 

미국의 어느 과학자는 25년 내에 북빙하北氷河가 완전히 녹을 것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1980년 〈경향신문〉과의 대담 중). 북빙하의 해빙으로부터 시작되는 정역 시대는 ‘이천·칠지二天·七地’의 이치 때문이다. 《성경》에 따르면 말세末世의 세계는 불로써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되어 있고, 그때는 아기 가진 여자가 위험하니 집밖에 나가 있으라고 쓰여 있다. 이것은 곧 지진에 의하여 집이 무너진다는 말이다. 여기에 열거한 사례들은 지구의 종말에 대하여 어느 지점에서 일치하는 점이 있다.

 

그렇다면 북빙하의 빙산이 완전히 녹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다음과 같은 일이 예상된다.

 

첫째, 대양大洋의 물이 불어서 하루에 440리의 속도로 흘러내려 일본과 아시아 국가들을 휩쓸고 해안 지방이 수면에 잠기게 될 것이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미국 캘리포니아 서부 해안이 점차 가라앉고 있으며, 바닷물이 강으로 역류하는 현상이 관찰되고 있는데, 이것은 북빙하의 빙산이 녹아서 물이 불어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한 이제까지 지구의 주축主軸은 23도 7분이 기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지구가 아직도 미성숙 단계에 있다는 것을 말하며, 4년마다 윤달과 윤날이 있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과학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1890년 이래로 지구의 기온은 상승하고 있다고 한다. 역학의 이천 칠지에 의하면 지축地軸 속의 불기운[火氣]이 지구의 북극으로 들어가서 북극에 있는 빙산을 녹이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소규모 전쟁들이 계속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인류를 파멸시킬 세계 전쟁은 일어나지 않고 지진에 의한 자동적 핵폭발이 있게 되는데, 이때는 핵보유국들이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남을 죽이려고 하는 자는 먼저 죽고, 남을 살리려고 하면 자신도 살고 남도 사는 법이다. 수소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민중의 맨주먹뿐이다. 왜냐하면 오행五行의 원리에서 ‘토극수土克水’를 함으로써 민중의 시대가 핵의 시대를 대치해서 이를 제압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비극적인 인류의 운명인데, 이는 세계 인구의 60퍼센트 내지 70퍼센트가 소멸된다는 것이다. 이중 수많은 사람이 놀라서 죽게 되는데, 정역 이론에 따르면 이때 놀라지 말라는 교훈이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이때는 일본 영토의 3분의 2가 침몰할 것이고, 중국 본토와 극동의 몇몇 나라들이 피해를 입게 되는데, 이러한 조짐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넷째, 파멸의 시기에 우리나라는 가장 적은 피해를 입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한반도가 지구의 주축主軸 부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정역 이론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지구 중심 부분에 있고 ‘간태艮兌’가 축軸이 된다고 한다. 일제시대 일본의 유키사와行澤 박사는 계룡산이 지구의 축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과거에 우리 민족은 수많은 외국의 침략과 압제 속에서 살아왔으며, 역사적으로 빈곤과 역경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앞으로 펼쳐질 후천시대에는 한반도의 미래가 매우 밝다고 하겠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는 이 정역 시대正易時代에 태어났음에 감사해야 한다. 오래지 않아 우리나라에는 위대한 인물들이 나와서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고, 평화로운 국가를 건설할 것이다. 또한 모든 국내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나라의 국위를 선양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새로운 문화는 다른 여러 나라의 귀감이 될 것이며 전 세계로 전파될 것이다.

 

중·러 전쟁과 중국 본토의 균열로 인해 만주와 요동 일부가 우리 영토에 편입되고, 일본은 독립을 유지하기에도 너무 작은 영토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영향권 내에 들어오게 되며, 한·미 관계는 더욱 더 밀접해질 것이다.

 

이러한 대변화의 시기를 세계의 멸망기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정역의 시대는 지구의 멸망이 아니라 성숙기라 할 수 있다. 결국 복희팔괘는 천도天道를 밝혔고, 또 문왕팔괘는 인도人道를 밝혔으며, 정역팔괘正易八卦는 지도地道를 밝힌 셈이다. 특히 정역팔괘는 후천팔괘後天八卦로서 미래역未來易이므로 이에 따르면 지구의 멸망이 아니라 지구는 새로운 성숙기를 맞이하게 되며, 이는 곧 사춘기 처녀가 초조初潮를 맞이하는 것과 같다.

 

20년 전후에 북극 빙하가 녹고, 23도 7분가량 기울어진 지축이 바로 서고, 땅속의 불에 의해 북극의 얼음물이 녹는 현상은 지구가 마치 초조 이후의 처녀처럼 성숙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지구 표면에는 큰 변화가 온다. 현재는 지구 표면에 물이 4분의 3이고, 육지가 4분의 1밖에 안 되지만, 이와 같은 변화를 거치고 나면 바다가 4분의 1이 되고, 육지가 4분의 3으로 바뀌게 된다. 또 인구의 60∼70퍼센트가 소멸되고, 육지의 면적이 3배로 늘어나는데 어찌 세계의 평화가 오지 않겠는가.

 

후천의 세계는 마치 처녀가 초조 이후에 인간적으로 성숙하여 극단적인 자기감정의 대립이 완화되듯이, 지구에는 극한과 극서가 없어질 것이다.

 

불이 물속에서 나오니

천하에 상극相克의 이치가 없다.

 

이 구절은 《주역》에 나오는 문장으로 미래 세계는 전쟁이 없는 평화시대가 온다는 뜻이다.(50∼55쪽)

 

 

그러고 보니 마침 내일 모레가 3.1절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굳이 시시때때로 전해지는 이웃 나라 일본의 '대지진 조짐'이 아니더라도, 일본이라는 나라의 미래에 도대체 무슨 희망이 있을까 싶기는 하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저 모양 저 꼴이니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라마저 빼앗겼던 1913년에 태어나 일제의 식민 지배와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까지 겪는 등 평생 동안 나라의 위태로운 모습만 보고 겪었던 스님이 우리나라의 미래를 이토록 밝게 내다본다는 사실이 놀랍다. 또한 스님이 입적할 당시와는 비교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나라가 눈부시게 발전해 왔음에도, 다가올 미래에는 우리나라가 세계의 중심국가 위치로까지 올라서게 된다니 말로만 들어도 가슴이 부푼다. 알고 보니 스님의 부친도 건국훈장을 받은 이름난 독립운동가였다. 때마침 들려온 이웃나라의 지진 소식과 베트남에서 열리는 북미회담 때문에 탄허록에 대한 인용글이 생각보다 너무 길어졌다. 그러나, 이럴 때가 아니라면 언제 또 탄허 스님의 혜안을 이토록 길게 인용할 기회가 있을까 싶긴 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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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의 임무는 질문에 답변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 헨릭 입센

 

 

헨릭 입센(1828∼1906)

 

 

입센은 현대 연극에 가장 큰 영향을 끼진 극작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노르웨이의 부유한 선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극작가로 입지를 굳힐 때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어릴 때 아버지가 파산하는 바람에 약국 수습원 생활을 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고, 20대에는 운문극과 시와 역사소설에도 손을 댔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나마 23세 때부터 12년 동안 노르웨이 극장의 전속작가 겸 무대감독으로 일한 경험이 훗날의 성공 기반이 되었다. 34세 때 노르웨이 극장이 파산한 뒤 약간의 보조금을 받아 설화 수집을 위한 여행을 떠났는데, 그때 《페르 귄트》의 소재를 얻은 것도 훗날의 창작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36세때 국왕의 외유 연구비를 받은 덕분에 고국을 떠난 그는 그로부터 무려 27년 동안이나 외국에서 생활한다. 덴마크와 독일을 거쳐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오래도록 체류했던 그는 '남국의 밝은 태양 아래에서' 다시 태어난 느낌을 받고 창작에 몰두한다. 이 무렵부터 노르웨이 국회가 연금을 지급하기로 결의하면서 생활도 차츰 안정되었다.

 

39세에 발표한 《페르 귄트》는 오늘날까지도 작가의 대표작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당대 노르웨이에서는 악의적으로 국민성을 과대 묘사했다는 심한 악평을 들어야 했다. 이 작품은 발표된지 9년 만에 그리그의 음악을 배경으로 음악극 형식으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뒀다. 페르귄트 모음곡 가운데 <솔베이그의 노래>와 <아침의 기분> 은 지금도 클래식의 명곡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어서 입센의 희곡을 뛰어넘은 느낌이 든다.

 

입센을 하루 아침에 세계적인 극작가로 변모시킨 작품은 로마에 살면서 51세에 완성한 《인형의 집》(1879)이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여성해방운동의 상징으로 떠받들지만, 당대 사람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신성한 결혼과 가정생활을 파괴하고 부추긴다는 비난이 쏟아졌던 것이다. 이런 반응에 자극받은 입센은 더욱 대담하고 충격적인 후속작인 『유령』(1881)을 발표했고, 거기서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중의 적》(1882)을 잇따라 발표했다. 이들 세 작품으로 크게 고무된 입센은 1884년에 걸작 《들오리》까지 완성함으로써 가장 숨가쁜 창작 시즌을 보낸다.

 

60세에 쓴 《바다에서 온 여인》(1888)은 《인형의 집》, 《유령》과 함께 '여성해방 문제를 다룬 3부작'으로 여겨지는 작품인데 다른 작품들과는 분위기와 색채가 많이 다른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62세에 작가의 또다른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헤다 가블레르》(1890)를 완성한 작가는 이듬해인 1891년 마침내 기나긴 외국 생활을 마무리하고 고국에 안착한다. 1899년, 작가의 나이 71세때 지어진 노르웨이 국립극장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고, 입센은 1905년 조국이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할 때까지도 생존했고, 이듬해 국장(國葬)으로 예우를 받으며 삶을 마감했다.

 

《인형의 집》은 1879년에 출판되자 말자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결혼이나 가정에서의 남편과 아내의 지위는 결코 신성불가침의 영역도 아니고 고정불변의 것도 아니라는 주장을 담았기 때문이었다. 당대의 도덕관념으로는 쉽게 용납하기 어려운 주장을 담은 이 작품은 여러 나라에서 상연 자체가 금지되거나, 결말 부분이 수정되어 공연될 정도였다. 세 아이를 버려두고 집을 나간 노라의 행위를 둘러싼 격론은 두 갈래로 나타났다. 여성해방론자들과 일부 문학 관계자들은 적극 환영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가가 결혼과 가정의 신성함을 파괴했다고 격렬하게 비난하는 쪽에 섰다.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는 이 작품을 쓸 때만 하더라도 입센이 스스로 여성해방론자를 자처한 적은 결코 없었다는 점이다. 이 작품 발표 이후로도 그런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입센의 작품을 극찬했던 제임스 조이스는 심지어 이런 말을 남길 정도였다. "만일 입센이 페미니스트라면 나는 카톨릭 주교다." 작가 스스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내 자신이 의식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위해 일한다는 명예로운 사실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입센을 두고 여성해방론자가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할 수도 없다. 《인형의 집》을 쓰던 해인 1879년 10월 19일 작가의 노트에 남긴 기록만 읽어봐도 작가의 입장이 어땠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비극을 위한 비망록>

 

'두 종류의 도덕규범이 있다. 두 종류의 양심이 있다. 하나는 남성의 것이고, 하나는 전혀 다른 여성의 것이다. 그들은 서로 융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여성은 여성의 기준이 아닌, 남성의 기준으로 재판받는다.

 

여성은 현대사회에서 독립된 인격체가 될 수 없다. 이 사회는 완전히 남성적이어서, 남성이 만든 규범으로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의 행동을 판단한다.

 

작품 속 여인은 문서를 위조하고 이를 자랑스러워한다. 그것은 남편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남편을 구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상식에 기대어 그녀를 비판하고, 법률의 잣대와 남성의 눈으로 정황을 판단한다.

 

도덕적 갈등, 권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서 그녀는 아내이자 여성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 및 자녀양육의 의무에 대한 확신을 잃는다. (……) 모든 것을 혼자서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다. 파국은 무자비하고 돌이킬 수 없다. 절망, 저항, 그리고 파멸.'(462쪽)

 

 - 동서문화사, 『인형의 집 / 유령 / 민중의 적 / 들오리』중에서

 

작가가 《인형의 집》에서 말하고자 했던 궁극적인 메시지는 보다 심오했다.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깨닫고 그에 따라 살아갈 때 타자성에 매몰되지 않는 진정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남자든 여자든 관계없이. 입센은 철저하게 인생의 허위를 파헤쳐 진실을 드러내 보이고자 했고, 그걸 위해서라면 어떤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인형의 집》은 등장 인물과 줄거리가 간단한 편이다. 변호사인 토르발 헬메르와 아내 노라는 '남편의 은행장 취임'을 앞두고 몹시 들떠 있다. 어느 날 이들 부부에게 오랜 친구인 랑크 박사와 노라의 학교 친구였던 린데 부인이 찾아온다. 린데 부인은 최근에 남편과 사별하고 나서 변변한 수입조차 없어서 '취직 부탁'을 위해 들른 참이었다. 노라는 남편에게 부탁하면 그 정도는 쉽게 해결되리라고 장담한다. 그런 틈에 일종의 대출 브로커나 마찬가지인 크로그스타가 불쑥 집을 찾아온다. 노라는 오래 전에 남편이 과로로 건강이 몹시 나빠졌을때 남편 몰래 그 남자에게 찾아가 돈을 융통한 적이 있었다. 남편의 실업과 요양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여자로서는 대출 자격조차 없었던 터라 노라는 궁리 끝에 친정 아버지의 명의로 대출을 받았고, 아버지의 서명은 그녀가 대신 써넣었다.

 

크로그스타는 은행장이 바뀐다는 소문을 듣고 일찌감치 헬메르의 집으로 미리 찾아온다. 그는 오래 전부터 은행의 말단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지만 부도덕하고 부패한 인물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헬메르에게 찾아봐 자신이 해고되지 않도록 도움을 요청했지만 매정하게 거절당한 그는 노라에게 다시 부탁한다. 자신이 짤리지 않도록 남편에게 영향력을 발휘해 달라고. 노라 역시 그런 부당한 부탁을 단호히 거절한다. 그러나 크로그스타는 물러서지 않는다. 그는 마침내 노라의 '불법 대출'을 문제삼는다. 친정 아버지가 서명한 대출 서류가 위조됐다는 것이다. 마침내 헬메르까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평소에 노라를 끔찍하게 사랑하던 남편의 태도는 돌변한다.

 

헬메르 어리석기는……. 당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기나 해?

노라 떠나게 해주세요. 나 때문에 당신이 곤란해져선 안 돼요. 나 대신 죄를 뒤집어쓰면 안 돼요.

헬메르 비련의 여주인공 흉내는 그만둬! (복도로 나가는 문을 잠근다) 여기서 얌전히 설명해 봐. 당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 있어? 대답해 봐! 알고 있느냐고!

노라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굳은 표정으로) 그래요. 이제야 진실을 알겠군요.

헬메르 (방을 서성이며) 아!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람! 8년 동안 나의 기쁨이고 자랑이던 여자가 위선자에 거짓말쟁이…… 게다가 범죄자였다니! … 당신에게 이렇게 추악한 면이 있었다니……! 에잇!

노라 (말없이 계속 바라본다)

헬메르 (노라 앞에 멈춰 서서) 이런 일이 생길 줄 예상했어야 했어, 미리 짐작했어야 했다고. 이게 다 당신 아버지의 무책임한 성격…… 입 다물어! 당신 아버지의 무책임한 성격을 물려받아서 그래. 믿음도 없고, 도덕심도 없고, 책임 의식도 없지……. 아, 당신 아버지를 잘못 본 벌을 이렇게 받다니. 난 당신을 위해 그렇게 한 거야. 그런데 그 보상을 이렇게 하는군.

 

 

이런 식의 험담을 계속 쏟아낸 헬메르는 앞으로는 아이들 양육까지도 아내에게 맡길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러다가 상황이 급반전된다. 노라의 친구인 린데 부인이 크로그스타를 유혹했고, 자신에게 은인이나 마찬가지인 노라를 위해서라도 더이상 위조 서명을 문제삼지 말아달라고 그에게 부탁한 것이다. 온갖 오명과 불명예로부터 순식간에 해방되는 감격에 휩싸인 헬메르는 다시금 아내를 사랑하기로 마음을 되돌린다. 다음과 같은 낯뜨거운 말들을 쏟아내면서.

 

"남자란 아내를 진심으로 용서했다고 스스로 인정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뿌듯함과 만족함을 느끼는 법이지. 그럼으로써 아내는 두 가지 의미에서 남편의 소유가 되는 셈이야. 남편이 아내에게 새 생명을 준 거나 마찬가지지. 말하자면 아내는 남편의 아내인 동시에 자식인 거야. 당신도 오늘부터는 그래, 갈 곳 잃고 쩔쩔 매는 내 귀여운 아가,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마, 노라, 나한테 다 털어놓기만 해."

 

노라는 이토록 순식간에 태도가 돌변하는 남편을 도저히 수긍하지 못한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남편은 단지 자신을 인형을 다루듯 대해왔다고. 그 옛날 자신의 아빠가 그녀를 대했던 것처럼. 그러면서 이제 아이들조차 키울 자격을 상실한 자신은 집을 떠나겠노라고 선언한다. 아이들을 키우는 일보다 먼저 자신을 가르치는 일이 더 급선무라면서.

 

헬메르 (펄쩍 뛰듯 일어서며) 지금 뭐라고 했어?

노라 나 자신과 세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완전히 독립해야 해요. 그래서 더 이상 당신과 살 수 없어요.

헬메르 노라, 노라!

……

헬메르 이 무슨 미친 짓을!

노라 내일, 내가 살던 옛날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뭘 하든 그곳에서 하는 게 더 쉬울 것 같아요서요.

헬메르 세상 물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모르는 주제에!

노라 그걸 알려고 이러는 거예요, 토르발.

헬메르 집도, 남편도, 애들도 버리고! 사람들이 뭐라고 수군댈지 생각해 봤어?

노라 그런 건 신경 안 써요. 내가 아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뿐이에요.

헬메르 최악이군! 가장 신성한 의무를 저버리겠다는 거야?

노라 뭐가 가장 신성한 의무죠?

헬메르 꼭 말해야 알겠어?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의무잖아!

노라 나에겐 그것만큼 신성한 의무가 또 있어요.

헬메르 그런 건 없어. 도대체 무슨 의무를 말하는 거야?

노라 나 자신에 대한 의무요.

헬메르 당신은 무엇보다 아내이자 어머니야.

노라 이젠 그런 것도 믿지 않아요. 난 무엇보다 사람이에요, 당신하고 똑같은. 아니라면 적어도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거예요.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신처럼 생각한다는 걸 알아요, 토르발. 책에서도 그렇게 말하고요. 하지만 난 이제 사람들의 말이나 책에 쓰인 것에는 믿음이 안 가요. 나 스스로 깊이 생각해서 이치를 깨달을 거예요.(89∼90쪽)

 

결국 그날밤 노라는 여행가방을 꾸린다. 그리고 손가락에 꼈던 결혼반지마저 남편에게 돌려준 뒤 끝내 집을 나간다. 그렇게 연극은 막을 내린다. 입센의 걸작  《인형의 집》은 이렇게 끝난다.

 

아래쪽에서 탕 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토록 충격적이고 놀라운 결말이라니! 입센은 《인형의 집》을 발표한 이후 세상 사람들의 놀라운 반응에 자못 신명이 났던지 더욱 충격적인 작품을 집필한다. 후속작은 1881년에 발표한 《유령》이었다.

 

이 작품은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열정적으로 자선사업을 하는 어느 미망인이 주인공이다. 마침 남편의 서거 10주년을 맞아 그녀는 고아원 개원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그 와중에 프랑스 파리에서 그림을 공부하던 외아들까지 휴가를 얻어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오랜만에 재회한 아들 녀석이 어느 틈에 가정부를 유혹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미망인은 '남편의 유령'을 보는 듯한 착각과 충격에 빠진다.

 

《유령》의 공연 모습

 

남편은 세간의 고상한 평가와는 달리 몹시 방탕하고 무절제한 삶을 살다가 일찍 병들어 죽었고, 아내는 그런 남편의 과오를 감추는 대신 세인들이 고인을 우러러 보도록 남편의 유산을 자선사업에 쏟아부었다. 그런데 아들이 지금 유혹하려는 가정부는 과거에 자신의 남편이 하녀를 범해서 얻은 자식이었다. 미망인은 가정부와는 가까이 말라고 아들을 간곡히 타이르지만 별로 소용이 없다. 아들은 이미 심각한 병을 얻어 발작을 경험했고, 한번 더 발작이 일어나면 가망이 없다는 선고를 들은 터였다. 그래서 그녀에게서 마지막 삶의 위안을 찾겠다는 것이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병은 아버지의 성병 때문에 유전된 불치병이었다. 아들은 벌써부터 품속에 독약을 지닌 채 살아온 터였다. 3막에서 아들은 끝내 발작을 일으키고, 미망인은 아들과 약속한 대로 아들에게 약을 주어 죽게 할지 아니면 아들을 살려 가망없는 불치병자로 계속 살게 할지 고심한다. 바로 그 순간 연극은 막은 내린다.

 

'유령'은 작품에서 단지 스치듯 두세 번 짧게 언급될 뿐이다. 그 가운데 인상적인 한 대목은 이렇다.

 

만데르스 뭐가 나타나요?

알빙 부인 유령이요! 아까도 레지네와 오스왈드가 저기서 무슨 말을 하는 것을 듣고, 꼭 유령을 만난 기분이었지 뭐예요. 이런 생각마저 들었어요. 우리 모두가 유령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요. 부모님께 물려받은 유령이 우릴 따라다니는 거예요. 그뿐만이 아니죠. 모든 낡은 사상과 온갖 낡은 신앙도 우릴 따라다녀요. 진짜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몸속에 달라붙어 있을 뿐인데도 우린 그걸 밖으로 몰아내지 못하죠. 신문이라도 읽을라치면 유령이 활자들 사이에서 꾸물대는 것 같아요. 분명 온 나라에 유령들이 득실대는 거예요.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잔뜩. 그래서 우리가 빛을 무서워하는 거예요.(133쪽)

 

 

입센은 이 작품을 발표하기에 앞서서 미리 세간의 반응을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 《유령》은 사회 일각에서 꽤 큰 소란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것을 쓸 필요도 없었던 셈이니까요.'

 

작가의 예상은 적중했다. 《유령》은 출판되기가 무섭게 북유럽 전역에서 거센 비난을 받았다. 입센은 이 작품을 쓰기 전부터 《유령》이 《인형의 집》과는 관계가 없음을 강조했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인형의 집》의 주제를 한층 더 심화시킨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작가는 사랑이 결여된 결혼과 남들의 이목을 위해 거짓된 삶을 살아가는 낡은 인습이라는 유령이 어떻게 인간의 삶을 망치는지를 알빙 부인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대중들은 작가의 진정한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작품 속의 사건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거나, 아버지에 대한 존경의 의무와 같은 전통적인 사회관습을 공격한다고 비난하기 바빴다.

 

입센은 그런 독자들의 반응에 대해 자신을 지지했던 작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답장했다.

 

'저도 그런 난리가 벌어질 것은 이미 각오했습니다. 우리 스칸디나비아의 비평가들 몇몇은 다른 재능은 없을지 몰라도, 자신들이 판단하려는 책의 저자를 완전히 오해하고 잘못된 해석을 내리는 재능만큼은 틀림없이 갖추고 있더군요. 그러나 그것이 진정 오해에만 그치는 문제일까요? …… 그들은 희곡의 등장인물 중 누군가가 말한 의견에 대해 제게 책임을 묻습니다. 그렇지만 이 희곡에는 작가의 책임이 될 만한 의견이나 발언이 어디를 봐도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죠. …… 제 의도는 독자들이 제 작품을 통해 마치 현실의 경험처럼 생생한 인상을 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사 안에 작자 개인의 의견을 끼워 넣는 일만큼 그런 인상을 효과적으로 방해하는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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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7 0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7 1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입센의 희곡 『들오리』는 제목만 들어서는 전혀 짐작조차 가지 않는 특이한 작품이다.

 

들오리? 집오리도 아니고?

 

그 작품을 다 읽고 나서 갑자기 들오리의 모습이 너무나 궁금해서 이미지를 검색해도 마땅한 게 도통 나오질 않는다. 그렇다! 들오리는 잠수의 명수다! 그러니 들오리를 구경하기가 그만큼 힘이 드는 게 당연한 지도 모르겠다.

 

입센의 『들오리』는 생각할 거리를 아주 많이 던지는 '비극적 희극'이다. 이 작품의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기는 쉽지 않지만, 어쨌든 대략이나마 요약하면 이렇다.(5막극인 이 작품은 3막극인 『인형의 집』이나 『유령』보다 훨씬 길다. 심지어 같은 5막극인 『민중의 적』보다도 두 배쯤 길다. 그러니 짧은 요약이 쉽지는 않다.)

 

주인공은 얄마르 엑달이라는 남자다. 그는 아내 지나와 열네 살 된 딸 헤드비와 늙은 아버지 엑달 노인, 넷이서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의 직업은 사진사다. 가난한 탓에 아내까지도 사진 작업을 열심히 도와 준다. 아버지인 엑달 노인도 옛 친구네 집에서 따내 오는 필사 작업으로 용돈벌이는 하고 지낸다.

 

얄마르는 어느 날 제재소 등을 경영하는 거상(巨商) 베를레 씨네 집으로 만찬 초대를 받는다. 베를레 씨와는 그저 알고 지내는 사이지만 그의 아들 그레거스와는 학교 동창이자 친구다. 그가 간청하는 바람에 가게 된 참이다.

 

얄마르와 베를레 씨와는 오래 전부터 상당한 인연이 있던 사이였다. 우선, 자신의 아버지인 엑달 노인이 베를레 씨와 젊을 때부터 친구 사이였고, 사업상으로 동업자 관계였었다. 그런데 베를레 씨의 간교한 속임수에 걸려드는 바람에 엑달 노인은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전과자로 전락했고, 그 후론 영영 회복불능이 되어 늙어서도 자식 한테 얹혀 사는 인생의 낙오자 신세다. 그런데도 엑달 노인과 얄마르는 베를레 씨가 꾸몄던 음모를 전혀 모른다.

 

베를레 씨의 아들인 그레거스는 아버지의 공장에서 경영자 수업을 받고 있지만 내심 불만이 많다. 어려서부터 온갖 권모술수에 능란하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온갖 나쁜 짓을 서슴치 않는 아버지를 오래도록 지켜봐 왔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가 엑달 노인을 어떻게 나락으로 빠트렸는지 그 내막을 빤히 꿰고 있다. 더군다나 남편 때문에 속이 문드러지다시피 지내다가 일찍 세상을 하직한 어머니로부터도 '아버지의 나쁜 행실'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터였다. 그는 스스로 '진실의 사도'임을 내세우면서 아버지에게 대항한다.

 

연극의 시작은 이렇다.

 

거상 베를레의 집. …… 식당에서 떠들썩한 말소리며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가 나이프로 유리잔을 두드린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건배 소리가 울려 퍼진다. 박수가 일고 다시 시끌벅적한 말소리가 들린다.

 

페테르센(하인) (난로 위 등불을 켜고, 갓을 씌운다) 옌센, 지금 나리가 셀비 부인을 위해 저렇게 길게 건배하는 거지?

 

옌센(임시고용 급사) 그 소문, 진짜야? 두 분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연극의 첫 대사만 봐도 거상 베를레는 이미 불미스런 소문에 휩싸인 부도덕한 인물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업을 일군 덕분에 떵떵거리고 살지만, 아내에게는 골치만 썩이는 못난 난봉꾼일 뿐이었고, 아들에게도 불한당처럼 비춰질 뿐 존경심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이제는 나이가 들고 차츰 시력도 나빠져 곧 실명할지 모른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나서 부랴부랴 집안의 가정부로 일하던 셀비 부인과 '재혼'을 도모하는 중이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 갈등 구조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외관상으로 가장 도드라지는 갈등은 거상 베를레와 아들 그레거스 사이에 존재한다. 아들은 늙은 아버지의 재혼 자체도 반가울 리 없지만 아버지의 과거 행적에 대한 누적된 불만 때문에 도무지 아버지를 존중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

 

저녁 만찬을 끝낸 뒤 그레거스와 얄마르는 오랜만에 만난 만큼 그동안 살아온 얘기를 나눈다. 그들 사이엔 '지난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한 커다란 인식 차이가 있음을 발견한다. 얄마르 가족은 '알고 보면' 그레거스의 아버지 때문에 이만저만 고생을 겪은 게 아니다. 그런데도 얄마르네 식구들은 그게 그저 '그 끔찍한 사건' 때문에 우연히 격게 된 불행인 줄로만 알고 지내왔다. 그게 다 베를레의 교묘한 흉계 때문인 줄도 모른 채.

 

그레거스 그건 그렇고 얄마르, 어때, 지금은 다 잘 되지?

 

얄마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응, 그럭저럭, 불평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니까, 처음에는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 환경이 완전히 바뀌었으니까, 그 뿐만이 아니지, 그 밖에도 모든 것이 변했으니까, 아버지에게 닥친 그 끔찍한 시련…… 수치와 오명, 그레거스…….

 

그레거스 (동정하며) 응, 알지, 알아.

 

얄마르 공부를 계속할 생각은 꿈도 못 꿨어. 손안에는 한 푼은커녕, 있는 거라곤 빚더미뿐이었지. 그것도 대부분은 자네 아버지에게서 빌린 돈이었고.

 

 

더우기 얄마르는 자신이 사진술을 배워 사진사가 된 것도 베를레의 보살핌 덕분인 줄로만 안다. 산 속의 공장에서만 일하다가 16∼17년 만에 마을로 내려와 옛 친구 얄마르를 만난 그레거스는 이런 사정을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들에겐 일부러 이런 사실들을 비밀로 숨겨왔기 때문이다. 얄마르의 말을 들어보니, 자신의 아내와 결혼할 수 있게 도와주신 분도 그레거스의 아버지 덕분이란다. 세상에! 자기 아버지가 그런 착한 일까지?

 

그런데 결혼한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묻는 과정에서 그녀가 지나임을 알게 된다. 그레거스의 집에서 한때 잠깐이나마 가정부로 일하던 바로 그 지나 한센이 얄마르의 아내였던 것이다! 세상에! 얄마르가 지나를 사귀게 된 것도 아버지의 주선 덕분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부부가 되었고, 결혼 이후 사진 기술을 배운 것도 베를레 씨 덕분이었단다.

 

일의 자초지종을 알아차린 그레거스는 나중에 얄마르네 집으로 다시 방문할 것을 약속한 후 그와 작별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나누자면서. 그를 돌려보내자 말자 그는 대뜸 아버지에게 따지듯 대든다.

 

그레거스 엑달 일가는 어떡하고요?

 

베를레 그래, 그 사람들한테 어떻게 해줘야 직성이 풀리겠느냐? 엑달은 교도소에서 나올 때 이미 폐인이 되어 있었어. 구제할 길이 없다고, 세상에는 총알 한두 방에 맥없이 밑바닥까지 잠겨서 두 번 다시 떠오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야. 거짓말이 아니다, 그레거스, 나도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의혹이나 가십거리를 뿌리고 다니지도 않았고……

 

그레거스 의혹이요? 아, 그렇군요.

 

베를레 엑달에게는 사무소에서 필사하는 일만 시키고 실제보다 훨씬, 훨씬 높은 임금을 주고 있어…….

 

그레거스 (고개를 돌리며) 흥! 어련하시겠어요.

 

 

이렇게 해서 베를레의 '과거의 행적'은 서서히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른다. 그레거스는 그날 저녁에 곧장 친구 얄마르네 집으로 찾아간다. 자신이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불편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그런데 그 와중에 돌연 들오리가 등장한다. 오밤중에 웬 들오리가? 그레거스는 친구네 집에서 엑달 노인과 오랫만에 반갑게 재회한다. 그 두 사람은 이내 까마득한 옛날 엑달 노인이 아버지와 함께 산 속 공장에서 일할 때 자주 함께 사냥을 즐겼던 추억을 떠올린다. 그러던 와중에 엑달 노인은 자꾸만 그레거스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엑달 노인은 '야생의 소리'에 마음을 빼앗겼던 옛 시절을 잊지 못해 집안 한 켠에 있는 창고 속에 온갖 새들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엔 비둘기와 토끼도 있었고, 들오리도 있었다.

 

그레거스 상자 안에 새가 한 마리 있는 것 같은데요.

 

엑달 흠…… "새"라고……?

 

그레거스 오리 아닙니까?

 

엑달 (발끈하며) 오리인 줄 아는군.

 

얄마르 어떤 오리인 것 같나?

 

헤드비 그냥 오리가 아니에요……,

 

엑달 쉿!

 

그레거스 터키오리는 아닌 것 같고.

 

엑달 이봐, 베를레 군, 이건 그냥 오리가 아니라 들오리야.

 

그레거스 네, 정말입니까? 들오리요?

 

엑달 그렇다네, 자넨 새라고 하겠지만, 들오리지, 우리 집 들오리라고,

 

헤드비 내 들오리예요. 저건 내 거니까요.

 

 

저걸 어떻게 잡았냐는 물음에 노인은 자초지종을 자세히 들려준다. 베를레 씨가 사냥을 하던 중에 저 오리를 노렸는데, 시력이 나빠진 탓에 날개만 맞혔고, 들오리는 곧장 잠수했단다. "들오리란 그게 버릇이니까. 곧장 바닥으로 잠겼지. 들어갈 수 있는 만큼 끝까지. 그러고는 온갖 물풀에 닥치는 대로 매달려 두 번 다시 물 밖으로 나오지 않는 거지."

 

그래서 엄청 영리한 개를 시켜 오리를 물 속에서 끄집어 냈고, 베를레 씨가 하인한테 처리를 맡겼고, 그 소식을 들은 엑달 노인이 마침내 그 들오리를 집으로 데려오게 된 것이고, 이제는 손녀딸 헤드비에게 더할나위없이 소중한 친구가 된 거라고 했다. 창고에서 자란 그 들오리는 어느새 살도 통통하게 오르고, 진짜 야생 생활이 어떤 건지 잊어버릴 정도로 잘 지내고 있다고. 이쯤에서 2막이 끝난다.

 

3막에서는 인물들 간의 갈등이 차츰 고조된다. 그레거스는 화가 치민 나머지 아버지의 집에서 가출한 끝에 당분간 얄마르네 셋방에서 지내기로 한다. 그 소문을 들은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온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뿌리 깊은 불화의 원인들'을 샅샅이 들춰내며 격렬한 말싸움을 주고받는다.

 

베를레 어젯밤 네가 이상한 말들을 했었다……. 그래 놓고 이렇게 엑달의 집으로 이사를 와 있으니, 네가 나한테 반항할 마음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구나.

 

그레거스 제가 생각하는 건 얄마르 엑달의 눈을 뜨게 해주는 일입니다. 자기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똑똑히 알아야 하니까요. 그것뿐입니다.

 

베를레 그게 어제 네가 말한 네 사명이냐?

 

그레거스 네, 아버지가 제게 주신 건 그것뿐이니까요.

 

베를레 네 머리가 돌아버린 것도 내 탓이란 거냐, 그레거스?

 

그레거스 아버지가 제 인생을 망친 겁니다. 어머니에 관한 건 그래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도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하는 건 아버지 때문입니다.

 

베를레 내 참! 이상한 양심도 다 있구나!

 

그레거스 전 아버지에게 반항했어야 했습니다. 엑달 중위 앞에 함정을 놓았을 그때 말입니다. 그분에게 경고할 걸 그랬어요. 결과가 어떨지는 제게도 훤히 들여다보였으니까요.

 

 

제4막은 지나와 딸이 아빠의 귀가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식사시간도 지나서 겨우 모습을 나타낸 얄마르는 완전히 돌변한 태도로 가족들을 대하기 시작한다. 그레거스를 통해 얄마르가 기어코 '아내의 추악한 과거'를 알아내고 말았기 때문이다.(그녀가 베를레 씨네 집에서 가정부로 일할 때 그레거스의 아버지가 그녀를 범했고, 열네 살 난 딸 헤드비는 알고 보니 베를레의 자식이었다. 헤드비는 베를레를 닮아 시력이 몹시 나쁘다. 더군다나 베를레는 임신한 가정부가 집을 나가자 엑달 노인의 아들과 결혼하도록 일을 꾸미기까지 했다.) 얄마르는 아내와 딸에게 온갖 이상한 태도를 내보인 끝에, 마침내 자신의 딸(?)과 창고에서 생일파티를 열기로 약속한 일에서조차 짜증을 부린다.

 

헤드비 하지만 아빠, 약속했잖아요. 거기서 내일 축하하기로…….

 

얄마르 흠, 그렇군……. 그럼 모레부터. 재수 없는 들오리 새끼, 모가지를 비틀어 죽이고 싶다고.

 

헤드비 (비명을 지르며) 들오리를 왜요!

 

지나 그런 심한 말을!

 

헤드비 (아버지를 흔들며) 아빠, 저건 제 들오리잫아요!

 

얄마르 그래서 안 하잖아. 할 마음도 없어……. 네가 불쌍하니까, 헤드비,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꼭 그러고 싶다. 그런 자식한테 받은 건 이 집에서 한 마리도 기를 수 없으니까.

 

 

지나와 얄마르는 '아내의 과거'를 두고 누구의 잘잘못인지를 두고 격렬한 말싸움을 벌인다. 헤드비는 지산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가 갑자기 차갑게 돌변한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더군다나 아빠와 엄마의 말싸움으로부터 자신이 아빠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마저 눈치채고 만다. 이 와중에 그레거스는 친구의 딸을 도와준답시고 헤드비에게 이상한 권유를 한다. 들오리만 보면 아빠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는 형편이니, 아빠를 위해, '이 세상에서 네가 가장 아끼는 보물을 스스로 희생하면 어떻겠니?' 하고.

 

아빠를 위해, 아빠와의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다시 평화롭고 따스하던 옛 가정의 회복을 위해, 아빠가 보관해 놓은 권총을 들고 몰래 창고로 들어간 헤드비는 끝내 들오리 대신 자기 자신을 죽이고 만다. 연극은 이처럼 비극적으로 끝나고 만다. 독자나 관객들에게 형언하기 어려운 여운만 남긴 채.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비극이?

 

《들오리》에는 아주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이 작품을 발표할 당시 입센의 입지는 확고부동했다. 《인형의 집》과 《유령》과 《민중의 적》을 마치 3부작처럼 연이어 발표하면서 문제적 작가로 확실하게 자리를 굳혔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들오리』는 출간되자 말자 초판 8천 부가 순식간에 동이 났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재판을 찍었다. 그러나 그 재판이 다 팔리는 데까지는 무려 30년이 걸렸다. 독자들이 이런 작품을 받아들이기가 그만큼 어려웠다는 얘기다. 심지어 전문 비평가들도 처음엔 이 작품의 진가를 잘 몰랐다고 한다. 그만큼 걸작으로 인정받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얘기다. 독일의 시인이었던 릴케는 1891년에 파리에서 이 연극을 감상한 뒤 시(詩)처럼 느껴진다고 술회했다.

 

이 작품 직전에 발표했던 《민중의 적》을 통해 '허위에 기초한 사회악'을 고발했던 작가는 후속작인 《들오리》를 통해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는 평범한 인간이 과연 '과거의 진실'을 얼마만큼 견딜 수 있는지를 그려보고자 했다. 이 작품에서 '추악한 과거'를 숨긴 핵심 인물은 베를레였다. 지나 역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며 살아왔지만, 진실을 덮기 위해 일부러 애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베를레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베를레의 아들인 그레거스는 두 사람의 추악한 과거를 드러내기 위해 몹시 안달하는 인물이었다. 그레거스의 눈에 비친 알마르의 결혼은 마치 베를레의 총에 맞아 창고에 갇힌 채 더이상 날지도 못하는 불쌍한 들오리 신세나 다름없었다.

 

그는 조급한 정의감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이제는 날지도 못하는 들오리를 구제하기 위해 억지를 쓰는 인물처럼 보인다. 얄마르는 사진사 일은 부인에게 미뤄놓을 정도로, 늙은 아버지인 엑달 노인과 함께 '새로운 사진술 발명'에 몰두한다. 그는 아버지의 잃어버린 명예와 자존심을 회복할 영광스런 그날만 기다린다. 또한 시력이 몹시 나빠 장래가 걱정되는 딸과 가난한 아내를 행복하게 해 줄 꿈을 소중히 간직한 채 열심히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느닷없이 자신들의 삶에 불쑥 끼어든 옛 친구 때문에 결국 맥없이 주저앉는다. 그는 폭로된 진실 앞에 당황하면서 '들오리를 죽이고 싶다'는 뜬금없는 분풀이 욕망을 드러낸다. 순식간에 아빠의 사랑을 잃어버린 헤드비의 해결책 또한 아빠 대신 들오리를 쏘아 죽이는 일로 왜곡되어 표출된다. 도대체 들오리한테 무슨 잘못이 있길래.

 

극도로 예민한 사춘기 소녀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들오리를 쏘려다가 도리어 자신의 가슴으로 총구를 돌린 것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갑작스레 아빠의 사랑을 잃은 자식이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친구같은 존재였던 들오리마저 죽이고 나서 도대체 무슨 힘으로 삶을 견딜 수 있겠는가. 이 작품을 읽으면 요즘 우리나라의 현실이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때도 있다. 조현아 동영상에 등장하는 '두 귀를 틀어막은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상처입은 들오리가 겹쳐 떠오르는 건 이상할 게 조금도 없다. 과거의 상처 혹은 출생의 비밀 때문에 평화롭기만 하던 가정에 거센 소용돌이가 생겨나고 가족이라는 튼튼한 울타리가 하루 아침에 얼마나 쉽게 풍비박산이 나고 마는지는 최신의 드라마가 즐겨 다루는 핵심 주제들이다.( ☞ 궁금해하지 말라)

 

이 작품이 출간된 해인 1884년은 청나라가 베트남과 전쟁을 벌이고, 네덜란드인이 보르네오 섬을 정복하던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극작가 입센이 벌써 그 무렵에 이토록 현대적인 작품을 썼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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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란 참 이상하다. 나는 그저 '들오리의 모습'이 너무나 궁금해서 인터넷을 조금 뒤졌을 뿐인데, 그런 궁금증이 결국 이런 엉뚱한 글로 이어졌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내가 원래부터 쓰기로 마음 먹었던 글은 '들오리의 습성'과 관련된 다음 문장을 인용하고 내 생각을 아주 조금 덧붙이는 정도였다.(들오리의 모습을 찾게 되면 왠지 조금은 더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지나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글을 다 쓰고 보니 엉뚱하게도 내가 진짜로 인용하고 싶었던 글은 아예 수면 아래로 깊숙히 잠기고 말았다. 그 대목을 이런 식으로라도 되살리고 싶다...

 

 

그레거스 그러면서 저 창고에는 저런 것들을 기르나? 일에 방해가 되거나 정신이 산만해지지 않아?

 

얄마르 당치 않은 소리. 그렇게 말하면 곤란하네. 나라고 일 년 내내 한 가지 문제만 생각하며 사는 줄 아나? 기분전환거리가 있어야지. 영감이나 계시 같은 건 다 때가 되야 오는 거야. 애간장 태운다고 오는 게 아니라니까.

 

그레거스 얄마르, 자네한테는 들오리 같은 구석이 있군.

 

얄마르 들오리? 무슨 의미지?

 

그레거스 자네는 물속에 들어가서, 바닥에 난 물풀에 매달려 있는 거야.

 

얄마르 그걸 말하는 거군. 그 일격. 하마터면 아버지도 쏴 죽여서 내 신세까지 망치려고 했던?

 

그레거스 그런 뜻이 아니야. 자네 신세가 망가졌다는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라고. 하지만 자네가 독이 든 진창 속에 빠져 있는 건 사실이네, 얄마르. 자넨 잠행성 질병에 걸려 있어. 그래서 자꾸만 물속으로 파고드는 거네. 어둠 속에서 죽으려고.

 

얄마르 내가? 어둠 속에서 죽는다고? 이봐, 그레거스, 그런 이야기는 집어치우게.

 

그레거스 그렇게 당황할 것 없어. 조만간 내가 재기시켜 줄 테니까. 나도 내 사명이 어디에 있는지 그 정도는 똑똑히 안다고. 어제 그걸 깨달았지.

 

얄마르 그건 잘된 일이지만, 나는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군. 분명히 말해 두지만, 우울한 천성을 제외하고는 어디에도 불만이 없으니까.

 

그레거스 불만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독에 감염됐다는 증거야.

 

얄마르 그만하세, 그레거스. 질병이니 독이니 하는 이야기는 그만두자고. 그런 이야기는 익숙하지 않아. 식구들은 그런 듣기 싫은 소리가 내 귀에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니까.

 

 - 《들오리》, <제3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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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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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괜찮은가, 괜찮지 않은가, 그것이 문제로다.

 - 셰익스피어, 『햄릿』 중에서

 

 

나쓰메 소세키(1867∼1916)

 

 

 * * *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을 대표하는 '국민 작가'다. 그가 사망한지 벌써 100년도 더 지났지만 그의 명성이나 위상이 흔들린 적은 거의 없다. 그의 작품은 중고생들의 교과서에서 세대를 바꿔가며 끊임없이 읽혀졌고, 그의 얼굴은 1,000엔 권 지폐를 가장 오랫동안 장식했다. 무슨 이유로 그는 이토록 일본 사람들의 존경과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을까.

 

그는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한 뒤 일본 문부성이 서양 문물을 직접 배워오도록 영국으로 파견한 국비 유학생의 원년 멤버였다. 비록 신경쇠약으로 중도에 귀국하기는 했지만 그때의 유학 경험은 작가에게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나쓰메는 유학 시절에 이미 선진 문물을 모방하고 뒤따라가기 바쁜 조국의 모습에 일말의 불안감을 느낀 터였다. 그는 일본이 피상적인 근대화를 추구한 나머지 서양에 대한 정신적인 예속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일본 학계는 그의 논설과 강연을 이내 '문명 비판'이라는 층위로 격상시켰고 그는 점차 국민적 지식인으로 떠올랐다.

 

국민 작가라는 칭호는 자연스레 정치적인 이념과 결부되기 마련이었다. 민족 공동체의 문화적 정체성 혹은 국가적 신념과 결부된 나쓰메의 작품들은 차츰 '소세키 신화'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인들은 어느 공동체든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나쓰메의 문학 작품들 속에서 찾아내기 시작했다.

 

일본 열도가 러일 전쟁의 승리에 한껏 들떠 있던 바로 그 즈음 처녀작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년)로 뜻밖의 성공을 거둔 나쓰메는 그 직후 잇따라『도련님』과 『풀베개』 등을 써냈고, 도쿄제국대학의 영문학 교수라는 명예로운 자리마저 가볍게 내던지고 《아사히 신문》에 소속된 전업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좀 더 원대한 포부를 향한 걸음을 내디딘 셈이었다. 창작을 통해 자신의 삶의 목표를 구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배 위에서 스스로 맹세했네. …… 단지 엄청나게 격변하는 요즈음 세상에서 (나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얼마만큼 나의 감화를 받고, 내가 얼마만큼 사회적 존재가 되어 다음 세대 청년들의 삶과 피가 되어 존속할 수 있을지 부딪쳐 보고 싶다네.

 

한 자루의 붓을 들고 낡은 세상을 뜯어고치고 자신이 꿈꾸는 멋진 세상을 그려보고픈 당찬 포부가 그대로 묻어나는 이런 출사표야말로 나쓰메의 본심이었다. 그는 문학을 통해 일본인들의 자의식을 일깨우고 그들로 하여금 서양 문명을 극복하도록 부단히 독려했다. 비록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이 총칼을 들고 서양과 직접적인 전쟁에 나선 적은 없었지만 문화 전쟁에서는 늘 그들에게 뒤처져 있다는 열패감이 그를 지배했고, 그는 문학을 통해서라도 서양에 대적할 정신적인 힘을 얼마든지 키울 수 있다고 여겼다.

 

1914년에 발표된 『마음』은 여러 다른 인기작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인정받는 작품이다. 왜냐하면 나쓰메 문학의 본령은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일본 근대 문학의 선구자라는 상징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고, 이 작품이야말로 작가 특유의 시대적 불안과 문화적 소외감이 등장 인물들을 통해 고스란히 투영된 작품일 뿐만 아니라, 작가가 이상화하고 싶었던 인물들의 성격적 특징들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그리고 싶었던 이상적인 성격적 특질들을 『마음』을 바탕으로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꾸준히 용맹 정진하고, 추호도 비겁하거나 비굴하지 않고, 금욕적이면서도 도의적이고, 향상심을 잃지 않고 맹진하는 인간 유형. 이런 유형은 작중 인물인 '선생님'을 통해 자신의 더 나은 미래를 암중 모색하는 '나'에게서는 아직까지 쉽사리 발견되지 않는다. '선생님'의 경우도 성격과 자질은 충분히 갖춰졌지만 여전히 실현되지는 못한다. 거의 모든 면에서 언제나 선생님보다 앞서 있었지만 끝내 '사랑 때문에' 자결로 생을 마감한 K의 경우가 바로 작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격적 특질들을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그런 K의 안타까운 죽음이 선생님의 삶을 끊임없이 압박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로 보여진다. 작가가 『마음』을 통해 일본의 독자들에게 부단히 일깨우고 호소하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런 두 사람의 '참을 수 없는 안타까운 죽음'에 있었던 듯싶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그분을 늘 선생님이라 불렀다. 그러니 여기서도 그냥 선생님이라고만 쓰고 본명을 밝히지는 않겠다. 이는 세상 사람들을 의식해서 삼간다기보다 나로서는 그렇게 부르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을 떠올릴 때마다 바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글을 쓸 때도 그런 마음은 같다. 어색한 이니셜 따위는 도무지 쓸 마음이 들지 않는다.(16쪽)

 

이렇게 시작되는 『마음』의 전체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화자인 '나'는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는 생기발랄한 학생이다. '나'는 여름방학때 친구들과 함께 놀러간 가마쿠라의 해수욕장에서 우연히 어떤 중년 남자를 알게 된다. 그저 막연한 호기심 때문에 그를 관찰하던 나는 며칠 후부터 그와 함께 해수욕을 즐길 정도로 가까워진다. '나'는 나중에 도쿄에 돌아와서도 선생님 댁을 다시 찾게 된다.

 

선생님은 이렇다할 직업도 없이 아름다운 부인과 함께 도쿄의 주택가에서 조용하고 단촐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선생님은 대체로 비사교적인 데다가 사람들에게 냉담한 편이다. 그의 일상에서 주목할 만한 유일한 특징이 하나 있다면 매달 어김없이 정해진 날짜에 조시가야 묘지에 성묘를 간다는 점이다. 물론 선생님은 그 묘지의 주인공을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다. 소설속 주인공이 일부러 거기까지 찾아오는 것조차 거북해 한다.

 

선생님은 처음부터 나를 싫어한 것이 아니었다. …… 가엾은 선생님은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사람에게, 가까이할 만한 사람이 아니니 그만두라는 경고를 보냈던 것이다. 남이 반가워하는 것에 응하지 않는 선생님은 남을 경멸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경멸한 것 같다.(24∼25쪽)

 

선생님의 마음은 도무지 오리무중이다. '나'는 선생님의 부인으로부터 '학생이었을 때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선생님이 왜 지금과 같은 성격으로 바뀌었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그가 대학생일 때 겪었던 친한 친구의 갑작스런 변사가 한 원인이 아닐까 막연하게 추측만 할 뿐이다.

 

주인공인 '나'는 도쿄에서 학업을 마치고 잠시 고향에서 지내기 위해 낙향한다. 더군다나 아버님은 최근에 신장병으로 쓰러진 적이 있는데 병세가 위중했다. 병환 중에도 아버지는 매일 배달되는 신문을 아주 꼼꼼히 읽는다. 그러다가 어느 여름날 메이지 천황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나서는 아버지의 병세도 갑자기 악화된다.

 

그 무렵 신문은 사실 시골 사람들이 날마다 기다릴 만한 기사로 가득했다. 나는 아버지 머리맡에 앉아 꼼꼼하게 읽었다, 읽을 시간이 없을 때는 슬쩍 내 방으로 가져와 빠짐없이 훓러보았다. 나는 군복을 입은 노기 대장과 궁녀 같은 차림을 한 부인의 모습을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132쪽)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멀리 타향에 나가 있는 형과 매형이 불려오고, 하루하루 병세가 위중한 가운데 어느날 선생님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는다. '양복 입은 사람만 봐도 개가 짖는 곳에서는 전보 한 통조차 대사건이었다." 전보에는 잠깐 만났으면 하는데 올 수 없겠느냐고 간단히 쓰여 있었다. 주인공인 '나'는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부탁에 응할 수 없다는 상세한 설명을 담은 긴 편지를 보내지만 그 후로 별다른 답장을 받지 못한다.

 

아버지의 병환이 마지막 일격을 앞둔 시점에 뜻밖에도 선생님으로부터 매우 두툼한 편지가 등기로 배달된다. 그 편지에는 뜻밖에도 자신의 자살을 암시하는 문장이 들어있다. 주인공은 만사를 제쳐두고 황급히 도쿄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품안에서 다시 꺼내 찬찬히 읽기 시작한 편지는 결국 '선생님의 유서'였다. 거기엔 자신의 지나온 과거가 소상히 담겨 있었다. 자신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으며 왜 지금에서야 죽기로 결심했는지 하나도 숨김없이 담겨 있었다.

 

나는 수천만 명이나 되는 일본인 중에 오직 자네에게만 내 과거를 이야기하고 싶네. 자네는 진실하니까, 자네는 진실하게 인생 자체에서 살아 있는 교훈을 얻고 싶다고 했으니까.

 

나는 어두운 인간 세상의 모습을 기탄없이 자네에게 보여주겠네. 하지만 두려워해서는 안 되네. 어두운 것을 가만히 응시하고 그 안에서 자네에게 참고가 될 만한 것을 붙잡게. 내가 어둡다고 한 것은 물론 윤리적으로 어둡다는 것이야.(151쪽)

 

편지 내용은 길게 이어진다. 선생님은 스무살도 안 되어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다.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부모를 잃고 나서 한동안 숙부가 자신을 살뜰하게 보살펴 주는 줄 알았지만 나중에야 도리어 숙부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이후로 그는 인간 부류를 통째로 불신하게 된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유산을 정리한 그는 고향을 영영 떠나 홀로 도쿄에서 대학을 다닌다. 적당한 하숙집을 물색하던 그는 청일전쟁때 전사한 남편 때문에 마땅한 수입이 없던 아주머니의 집으로 들어간다. 하숙집 아주머니는 학교에 다니던 외동딸과 하녀와 함께 셋이서만 살고 있다.

 

다다미 여덟 장이 깔린 널찍한 하숙방으로 이사한 뒤로 조금도 불편한 점 없이 학교에 다니던 그는 이내 한 집안 식구처럼 그 집에서 지낸다. 주인 아주머니와 아가씨와도 곧잘 차를 함께 마시며 담소를 나눌 정도가 되면서 선생님은 차츰 하숙집 아가씨를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하필 그 무렵 그의 운명을 뒤흔들어 놓을 중대한 변화가 찾아온다. 같은 고향 출신이자 같은 대학에 다니던 K라는 친구가 부모와 갈등 끝에 의절하다시피 하면서 오갈데 없는 처지로 내몰리자 그 친구를 하숙집으로 데려온 것이다. 그게 바로 운명적인 사건의 발단이었다.

 

남몰래 아주머니의 딸을 사랑하기 시작했다가 어느새 아주머니로부터 자신의 딸을 '빨리 치워버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말까지 들었던 그로서는 K가 자신의 연애 경쟁 상대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K는 태생부터 스님의 아들이었던 데다가 보통의 승려보다 훨씬 승려다운 성격을 지녔고, 스스로도 장차 종교적인 방면이나 정신적인 지도자가 되려는 고상한 인품을 지닌 친구였다.

 

K는 악인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는 스스로 끊임없이 정진하는 인물이었고, 그의 머리속엔 온통 훌륭한 사람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었다. 과묵하면서도 사교에 서투른 그런 친구를 보다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애쓴 사람들이 바로 그의 친구였고, 하숙집 아주머니와 아가씨였다. 그런 노력의 결과는 전혀 엉뚱한 데서 문제를 일으킨다. 선생님의 눈에 비친 K의 행동들은 차츰 의심스러운 것들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는 이제 영락없이 오셀로의 처지로 내몰린다. 질투심에 사로잡혀 결백한 아내 데스데모나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그 오셀로 말이다. 다음 대목만 읽으면 인간의 정념 중에서 가장 지독하다는 질투심이 이제 막 독기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 눈앞에서 선하게 보이는 듯하다. 

 

어느 날 나는 간다에 볼일이 있어 귀가 시간이 평소보다 훨씬 늦어졌다네. 잰걸음으로 대문 앞까지 와서 격자문을 드르륵 열었지. 그와 동시에 나는 아가씨의 목소리를 들었네. 목소리는 분명히 K의 방에서 들리는 것 같았지. …… 나는 들어와 바로 격자문을 닫았네. 그러자 아가씨의 소리도 금방 그치더군. 나는 그때부터 하이칼라여서 벗는 데 시간이 걸리는 편상화를 신고 있었는데, 내가 허리를 굽히고 구두끈을 푸는 동안 K의 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더군. 나는 이상하게 생각했지. 어쩌면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평소처럼 K의 방을 지나가려고 장지문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거기에 두 사람이 앉아 있더군. K는 여느 때처럼 이제 오나, 라고 말했지. 아가씨도 앉은 채 "오셨어요?" 하고 인사하더군.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그 간단한 인사가 내게는 좀 딱딱하게 들렸네. 내 고막엔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어조로 울렸지.(205쪽)

 

 

이때부터 급작스럽게 조성된 선생님과 K 사이의 팽팽한 긴장 상태는 늦여름에서 이듬해 봄에 이르기까지 숨막힐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된다. 의심은 의심을 낳고 한번 불타오르기 시작한 질투심은 꺼질 줄 모른다. 그렇다고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무턱대고 K를 추궁할 수도, 그와 담판을 벌일 수도 없다. 자신의 마음을 먼저 친구에게 털어놓거나 아주머니에게 고백하고도 싶지만 끝내 결행에 이르지는 못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어느 날엔가 K로부터 청천벽력과도 같은 충격적인 고백을 듣게 된다. 자신이 하숙집의 아가씨를 사랑하고 있는데 어떡하면 좋겠느냐는 얘기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숙집 안주인과 아가씨에게까지 직접 자신의 사랑을 고백할 정도로 상황이 진척된 게 아니라는 사실뿐이었다. 자신의 연인을 한순간에 빼앗길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인 선생님은 온 신경을 곤두세워서 K를 경계하기 시작하고, 심지어는 그가 아가씨를 포기하도록 잔인한 말까지도 서슴치 않는다. "정신적으로 향상심이 없는 인간은 쓰레기다."라는 K의 평소 지론까지 곁들이며서.

 

교묘한 방법으로 K를 궁지로 몰던 선생님은 마침내 자신이 먼저 선수를 칠 계획에 골몰한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아주머니에게 딸을 달라고 요청한다. 아주머니도 시원스럽게 두 사람의 결혼을 승낙한다. 당사자의 의견은 확인할 필요도 없다면서. 그런데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며칠 지나지 않아 K는 자신의 방에서 자살하고 만다. 그가 친구에게 남긴 유서에는 아가씨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었다. 단지 "의지와 실천력이 박약해서 도저히 살아갈 희망이 없다'는 고백만 있었을 뿐이고, 친구에게는 도리어 그동안 자신에게 베풀어준 후의에 감사를 표한다는 내용까지 덧붙였다.

 

사건은 원만하게 수습되지만, 자신의 비열한 행동 때문에 친구가 세상을 등졌다는 죄책감에 사로 잡힌 선생님은 그 누구에게도 친구와 자신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밝히지 못한다. K의 자살에 대해서라면 그 어떤 내막조차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던 하숙집 아가씨는 아무런 영문도 모른채 선생님과 결혼한다. 결혼 이후 아내와 함께 할 때마다 언제나 그 두 사람 사이에 K의 죽음이 개입되어 있다는 느낌 때문에 선생님은 뿌리 깊은 죄의식에 시달린다.

 

결혼할 때 아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둘이서 K의 묘에 다녀오자는 말을 꺼내더군. 나는 까닭도 없이 그저 가슴이 철렁했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 거냐고 물었지. 아내는 둘이서 묘를 찾아가면 K가 무척 기뻐할 거라고 하더군.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는데 왜 그런 얼굴을 하느냐는 아내의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지.

 

아내가 바란 대로 둘이서 조시가야에 갔네. 나는 K의 새 묘석에 물을 끼얹어 깨끗하게 씻어주었지. 아내는 묘 앞에 향을 피우고 꽃을 꽂았지. 우리는 머리를 숙이고 합장을 했네. 아내는 필시 나와 결혼한 전말을 알리면 K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나는 속으로 그저 내가 잘못했다고 되풀이할 뿐이었네.(262쪽)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는 건 그저 외관에 그칠 뿐이고, 친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죄책감을 극복하지 못한 그는 매달 한 번씩 친구의 묘소를 찾을 때마다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한편 숙부로부터 당한 배신감 때문에 인간들을 경멸했던 자신이 바로 그런 경멸의 대상이 된 점을 깨닫고 부끄러워한다. 그런 불행한 삶을 하루하루 이어오던 그는 메이지 천황의 병사 소식과 노기 장군의 순사(殉死) 보도를 접하고 마침내 자신도 죽기로 결심한다. 그가 낙향해 있는 '나'에게 전보를 보낸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런데 여름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 메이지 천황이 서거했네. 그때 나는 메이지의 정신이 천황으로 시작되어 천황으로 끝났다는 생각이 들더군. 메이지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은 우리가 그 후에 살아남는 건 결국 시대에 뒤처진 것이라는 느낌이 강렬하게 내 가슴을 쳤네. 나는 분명히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지. 아내는 웃으며 상대해주지 않았지만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갑자기 나에게 그럼 순사라도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놀리더군.(271쪽)

 

 

나쓰메의 소설에 깊이 매료된 일본 독자들은 아마도 이런 대목에서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깊은 공감과 감동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역사 의식이 다를 수밖에 없는 우리 독자들은 묘한 반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앞서 등장했던 '나'의 아버지도 병환 중에 들려온 천황의 붕어 소식에 충격을 받고 급작스레 죽음을 의식하기 시작하는데, 바로 그 무렵에 배달된 선생님의 편지 속 내용에서 그런 모습이 거듭 반복되기 때문이다. 기억의 밑바닥에서 가라앉은 채 썩어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순사(殉死)라는 말이 선생님과 강하게 결부된 모습은 다음 대목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그러고 나서 한 달쯤 지났지. 천황의 장례식이 치러진 날 밤 나는 여느 때처럼 서재에 앉아 예포 소리를 들었네. 나에게는 그것이 메이지 시대가 영원히 사라졌음을 알리는 소리로 들렸지. 나중에 생각하니 노기 대장이 영원히 떠난 것을 알리는 소리이기도 했네. 나는 호외를 들고 무심코 아내에게 순사다, 순사다, 하고 말했지.

 

나는 신문에서 노기 대장이 죽기 전에 써서 남긴 글을 읽었네. 세이난 전쟁 때 적에게 깃발을 빼앗긴 이래 사죄하기 위해 죽자, 죽자, 하면서도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의미의 구절을 보았을 때 나는 무심코 손가락을 꼽아 노기 씨가 죽을 각오로 살아온 세월을 헤아려 보았지. 세이난 전쟁은 1877년에 일어났으니 1912년까지 35년의 거리가 있네. 노기 씨는 그 35년간 죽자, 죽자, 하면서 죽을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야. 나는 그런 사람에게 그때까지 살아온 35년이 고통스러울지, 아니면 칼로 배를 찌른 한순간이 더 고통스러울지를 생각했네.(272∼273쪽)

 

그러고 나서 며칠 후 선생님은 죽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남기는 일이 '인간을 아는 일'에 헛수고는 아닐 거라며, 모든 것을 자네 가슴에 묻어두라는 부탁을 끝으로 편지를 맺는다.

 

이 작품은 독자에 따라 읽는 방법이 다양할 수 있지만, 대체로 '선생님'과 'K'라는 두 젊은이의 내면에 자리잡은 이기심과 윤리 의식 사이의 맹렬한 투쟁, 그리고 친구의 죽음으로 빚어진 뿌리깊은 죄의식이 압권인 소설이다. 혈기왕성한 젊은이들 사이에 흔히 발생할 수 있는 삼각관계에서 자신의 사랑을 관철시키기 위해 온갖 책략들을 동원하는 일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또한 경쟁자가 있든 없든, 그 과정이 조용하거나 떠들썩하거나 관계없이, 구애 과정은 언제나 자연계를 지배하는 가장 강렬한 본능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그런 싸움에서 돌연 패배한 친구의 급작스런 자살이 행복을 구가해야 마땅할 나머지 두 사람마저 끝내 비극으로 몰아간다는 이야기는 너무 암울하다.

 

그런데, 소설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부분에 등장하는 천황의 죽음과 노기 대장의 순사 이야기는 너무 낡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봉건적 군신 관계를 상징하는 '순사' 풍습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아버지와 '선생님'의 자살 동기에 동시에 드리워져 있다. K의 죽음만 순수할 뿐 나머지 두 사람의 죽음엔 마치 충군애국의 이념이나 명예를 위한 자기희생의 색깔이 너무 짙게 채색된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천황과 선생님과 아버지의 죽음을 동일선상에 놓고 본다는 생각이야말로 군사부 일체라는 케케묵은 충효사상의 재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미 지적했듯이,『마음』은 정진, 자활, 맹진, 금욕, 도의, 향상심 등으로 대표되는 K의 덕목들을 적잖이 강조한다. 그는 그토록 권장할 만한 훌륭한 성품들을 두루 지녔으면서도 끝내 실연의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하지만 최후의 순간까지도 의연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탓할 뿐이다. 선생님 또한 자신의 삶에 그 어떤 오점 하나라도 남길 수 없다는 결연한 자세로 자신의 비겁함과 죄과를 참회하는 구도자적 모습을 보이긴 마찬가지이다. 이런 점들을 주목해서 살펴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쓰메는 메이지 천황의 죽음 이후에 쓴 『마음』을 통해서 비로소 오래 전부터 자신이 그토록 열망했던 마음 속의 다짐 일부를 이룩한 게 아닐까 하고. '다음 세대 청년들의 삶과 피가 되어 존속할 수 있을지 부딪쳐 보겠노라'던 그 다짐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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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을 하나만 덧붙이고 싶다. 이 책의 말미에 붙은 어느 문학평론가의 해설 가운데 어느 한 문장이 도무지 마음에 걸려 내려올 줄 모르기 때문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에는 사실 마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275쪽)

 

이게 정말 사실일까? 이게 사실이라면 내가 읽은 소설 속에 담긴 그 무수한 '마음'이라는 단어는 도대체 무슨 말을 번역해 놓은 괴물이란 말인가. 이 소설 속엔 (잘만 찾아보면) 마음이라는 단어가 정말로 자주 등장한다! 또한 마음이라는 넓은 범주 안에 얼마든지 포함될 수 있는 마음과 비슷한 어휘들도 무수히 많이 등장한다. 답답한 마음에 일부러 찾아 봤다. 내가 불과 60쪽 이내에서 찾아본 마음 비슷한 어휘들만 나열해도 이렇게나 많다!

 

질투심, 비겁, 담판, 결심, 의심, 고백, 회한, 정진, 이기심, 양심, 정직, 각오, 고집, 인내, 용서, 의혹, 번민, 오뇌, 교활, 통절, 참회, 슬픔, 행복, 속죄…. (208∼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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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2-17 2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음>의 전체 내용을 다 읽지 않아 모르겠지만, K는 죽음을 통해 자신의 친구에게 최대의 복수를 한 것 같습니다... 그만큼 소중했을 수도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작은 모욕에도 칼을 뽑거나, 할복을 통해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는 근대 이전의 일본 정신 ‘무사도‘를 K의 모습 속에서 발견할 수도 있지 않나 추측해 봅니다...

oren 2019-02-17 23:43   좋아요 1 | URL
K의 죽음이나, 선생님의 죽음이나, 노기 장군의 순사나 모두 ‘일본 사무라이 정신‘이 깊숙히 드리워져 있는 건 부정하기 어렵죠. 그런데 나쓰메가 세심하게 묘사한 ‘K의 모습‘에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친구에게 복수한다는 듯한 뉘앙스는 조금도 발견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K는 어쨌든 고결한 구도자의 역할을 떠맡고 있는 인물이니까요.^^

겨울호랑이 2019-02-18 00:02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 oren님 말씀을 들으니 참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주는 좋은 작품이라 여겨집니다. 좋은 작품을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oren 2019-02-18 11:48   좋아요 1 | URL
별말씀을요.^^

『마음』은 ‘마음‘에 다가가는 일의 어려움을 형상화한 소설로도 읽힌답니다.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K와 선생님이 ‘장지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은 하숙집, 같은 대학, 같은 고향 출신이면서도 끝내 서로의 속마음을 툭 터놓고 지내질 못하는 모습도 그렇고, 하숙집 아가씨 또한 결혼한 이후에도 남편의 속마음을 (그가 죽을 때까지도, 어쩌면 죽고 나서도 영영) 알지 못하는 측면도 그렇고요. 마음의 문을 열기 어려운 ‘인간의 고독‘을 그린 소설로 읽어도 재미있습니다.^^

cyrus 2019-02-18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학평론가가 ‘마음’이라는 단어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요? 일반적으로 독자들은 책의 제목을 보고 그 제목이 뭘 의미하는지 궁금해 하고, 나름대로 그에 대한 의미를 찾아냅니다. 나스메 소세키가 남긴 작품들의 제목은 독자들의 궁금증을 유발하게 만들죠. ^^

oren 2019-02-18 18:33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입니다. 『마음』이라는 소설은 제목이 특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작품이지요. 그런데 평론가가 단정적으로 표현한 저 문장(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에는 사실 마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은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딱 알맞은 말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떨치기 힘들더군요. 나쓰메 소세키가 정말로 ‘마음‘이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도 <제목이 ‘마음‘일 수밖에 없는 걸작>을 쓴 게 아닐까 하고 말이지요. 그래서 저도 사족을 덧붙였던 거고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그 부분을 통째로 덧붙여 놓겠습니다.
* * *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에는 사실 마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은 <선생님과 나>, <부모님과 나>, <선생님의 유서>의 세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왜 소설의 제목이 『마음』이어야 하는지 저절로 이해하게 된다. 『마음』이 『마음』일 수밖에 없는 까닭, 그게 바로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을 읽는 첫 번째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그 많은 작품들 가운데 여태껏 내가 읽은 작품은 하나도 없다. 정말? 정말!

 

그런데 이렇게 내 독서 경험의 좁고 얕음을 빤히 드러내도 괜찮을까. 물론이다. 괜찮고 말고! 내 마음이 불편했다면 이런 글을 애시당초에 쓰지도 않았을 터. 그런데 이런 뻔뻔함이 다 나이 탓이라는 걸 소세키는 이렇게 표현한다.

 

"간단히 말하면 늙어빠졌다는 거네."

 

"선생님은 왜 예전처럼 책에 흥미를 가질 수 없는 거죠?"

 

"딱히 이유는 없지만……. 말하자면 아무리 책을 읽어도 그만큼 훌륭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 탓이겠지. 그리고……."

 

"그리고 또 있습니까?"

 

"또 있다고 할 만한 이유는 아니지만, 예전에는 사람들 앞에 나선다거나 사람들의 질문을 받고 모르면 수치인 것 같아서 거북했는데 요즘에는 모른다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러다 보니 무리해서라도 책을 읽어보려는 마음이 안 생기는 거겠지. 간단히 말하면 늙어빠졌다는 거네."(75∼76쪽)

 

 

나쓰메 소세키의 특징들은 『마음』 하나만 읽어도 금세 알 것만 같은 착각도 든다. 그의 글이 독자들의 마음에 아주 쉽게 와닿는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형체도 없는 사람의 마음을 참 잘도 건드리고 다독이고 어루만진다. 그가 왜 일본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지 알 것도 같다. 비록 그가 셰익스피어처럼 기가 막힌 대사들을 시적으로 화려하게 펼쳐놓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의 작품의 또다른 특징 하나는 책 뒷면에 커다랗게 박힌 글씨 대로 "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이야기"로 들린다는 점이다. 그런 느낌을 나는 『마음』을 읽는 동안에 너무 자주 맛보고 있다. 가령, 다음의 대목 하나만 읽어도 그렇다.(그 대목을 잠시 뒤에 인용하는 점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소세키의 문장을 인용하기 전에 이쯤에서 뭔가 끼워넣어야 할 것만 같은 우리들의 현재 사정들에 관한 얘기가 있어서 그렇다.)

 

요즘처럼 취업난이 심각한 때가 도대체 언제였던가. 젊은이들의 취업난은 너무나 심각해서 차마 글로 옮기기가 두려울 정도다. 주변에서 매일같이 들리는 이야기가 '청년들이 취업이 안 된다.'는 얘기 뿐이다. 뉴스에 보도되는 취준생들과 공시생들의 규모만 봐도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다. 옛날엔 이런 적이 없었다.

 

중장년층들의 어려움도 사정이 좀 다르긴 하지만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만 보면 별반 차이가 없다. 50대에 평생 직장인 줄로만 알고 다니던 회사에서 짤리는 순간, 특별한 능력과 스펙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일자리를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공인중개사니 공동주택관리사니 온갖 자격증을 따놓은 사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아파트 관리소장 한 사람 뽑는데 4,50 명씩 지원한다니, 도대체 무슨 수로 그 좁은 틈을 비집고 내 일자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자식들은 거의 다 컸지만 그네들도 일자리를 얻지 못하니, 다니던 직장에서 밀려난 늙은 애비라도 일자리를 얻어 딸린 식구들을 부양해야 할 처지인데, 그것조차 도통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아무리 사정이 나빠도 옛날엔 이 정도로 나쁘진 않았던 듯하다. 우리의 부모 세대들은 조혼 풍습도 한몫 했던 터여서 50대에 설사 은퇴를 하더라도 30대의 자녀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부모를 부양했었다. 물론 반드시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런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가. 50대가 아니라 70대, 80대가 되어도 자식들에게 부양의 의무를 지우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노후는 노인들이 알아서 해결하는게 보편적 상식이 되었다.

 

많이 꾸물거렸다. 다시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로 돌아오자. 작가의 말대로, 『마음』은 1914년 4월부터 8월까지 도쿄와 오사카의 《아사히 신문》에 동시에 연재한 소설이다. 지금으로보터 무려 105년 전에 일간지에 연재된 소설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어떻게 된 게 요즘은'으로 시작되는 옛 어른들의 푸념섞인 말투가 요즘 사람들이 들어도 어쩌면 그토록 생생하게 들어맞는지 기가 막힐 뿐이다. 정말? 정말!

 

9월 초가 되어 나는 드디어 도쿄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당분간 지금까지처럼 학자금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여기서 이렇게 있어봐야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나는 아버지가 바라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도쿄로 가겠다고 말했다.

 

"물론 일자리를 얻을 때까지만요." 하고도 말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일자리가 아무래도 내 머리 위에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 물정에 어두운 아버지는 어디까지나 그 반대로 믿고 있었다.

 

"그야 얼마 안 되는 기간일 테니까 어떻게든 마련해보마. 그 대신 길어지면 안 된다. 적당한 일자리를 얻는 대로 독립해야지. 원래 학교를 졸업한 이상 다음 날부터는 남의 신세 같은 걸 지면 안 되는 거니까. 요즘 젊은 사람은 돈을 쓰는 것만 알지 버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더구나."

 

아버지는 그 밖에도 이런저런 잔소리를 했다. "옛날에는 자식이 부모를 부양했는데 어떻게 된 게 요즘은 부모가 자식을 먹여 살린다니까" 하는 말도 했다.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121∼122쪽)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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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2-15 2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재밌게 읽었어요. 유머가 있고 짠하게 만드는 게 있고 통쾌한 부분도 있고
교훈도 있어요. 무엇보다도 도련님의 따뜻한 마음이 감동으로 전해 와서 좋았어요.

oren 2019-02-15 21:44   좋아요 0 | URL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와 『도련님』(1906)이 워낙 유명한 덕분에 그 작품부터 읽은 분들이 많을 듯해요. 그런데 어떤 평론가는 ‘전작은 재기가 너무 과다하게 발휘되고 있고, 후작은 감상이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다‘는 평을 남겼더라구요. 자신으로서는 『마음』이 가장 마음에 와 닿는다나요. 그래서, 저도 『마음』부터 읽어보기로 마음먹고 그 책부터 읽어보고 있어요.^^

겨울호랑이 2019-02-17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많이 접하질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사실, 다른 작가들 작품도 마찬가지긴 합니다만.ㅜㅜ) 작가의 글이 시원하다는 느낌을 oren님께서 소개해주신 글을 통해 느껴 봅니다.^^:)

oren 2019-02-17 23:32   좋아요 1 | URL
저도 나쓰메의 작품들을 읽어본 게 없어서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타고난 이야기꾼이자 탁월한 문장가임엔 틀림없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