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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크하기 나이에 대하여... (공감12 댓글6 먼댓글0) 2014-01-29
북마크하기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공감8 댓글0 먼댓글0) 2014-01-21
북마크하기 고대로의 여행을 이끄는 초대장 (공감10 댓글0 먼댓글7) 2014-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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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크하기 잠과 꿈 (공감3 댓글0 먼댓글0) 2013-07-29
북마크하기 묘한 '말', 묘한 '욕망' (공감3 댓글2 먼댓글0) 2013-07-29
북마크하기 재미있는 '동물' 이야기, 그 뒤를 잇는 '비슷한' 생각들 (공감8 댓글2 먼댓글0) 2013-07-26
북마크하기 이달의당선작 언젠가는 기차를 타게 되겠지만...... (공감10 댓글15 먼댓글1) 2013-01-11
북마크하기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에 관한 이야기 (공감7 댓글4 먼댓글0) 2013-01-08
북마크하기 해가 바뀔 즈음의 겨울 풍경 (공감11 댓글11 먼댓글0) 2013-01-03
북마크하기 이달의당선작 사진에 담아본 두꺼운 책들 (공감40 댓글9 먼댓글0) 2012-12-24
북마크하기 이달의당선작 [생각의 역사] 도끼에서 싹튼 '생각'의 과거, 현재, 미래 (공감9 댓글2 먼댓글1) 2012-11-30
북마크하기 모든 사랑은 그 속을 벗겨보면...... (공감5 댓글2 먼댓글0) 2012-11-07
북마크하기 눈의 탐욕 (공감12 댓글6 먼댓글0) 2012-09-29
북마크하기 쇼펜하우어와 다윈 (공감3 댓글3 먼댓글0) 2012-09-15
북마크하기 칸트, 데카르트, 스피노자, 의지와 표상, 자유의지 (공감7 댓글0 먼댓글1) 2012-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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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지혜>
2012-05-29
북마크하기 하루, 아홉 달, 60년, 천년, 2,000년 (공감2 댓글2 먼댓글0) 2012-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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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2012-05-29
북마크하기 라플라스의 가설에 따르면...... (공감0 댓글0 먼댓글0) 2012-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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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201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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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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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크하기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허식을 경계해야 한다 (공감4 댓글0 먼댓글0) 2012-01-08
북마크하기 "卽是現今 更無時節"(즉시현금 갱무시절) (공감10 댓글8 먼댓글0) 2011-12-31
북마크하기 '가장 심각하고 흔히 저지르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공감3 댓글4 먼댓글0)
<세상을 보는 지혜>
2011-12-19


그 나이에 해당된 재능을 갖지 못한 사람은
그 나이에 해당된 불행을 맛보게 된다.
 - 볼테르

나는 25세와 35세 때의 내 초상화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들을 지금의 것과 비교해 본다.
이미 몇 갑절이나 내가 아니게 되었던가!
 - 몽테뉴

 * * *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설날의 추억은 시골의 골목길을 가득 뒤덮은 새하얀 눈을 밟으며 새벽 일찍 세배를 가는 풍경이다. 그때 우리집은 아마도 초가집이었을 테고 우리 형제들은 설빔조차 따로 차려 입을 형편이 아니었음이 틀림없다. 그날 우리 형제들은 새벽 일찍 집을 나서서 친척 할머니 집으로 세배를 하러 나섰다. 형을 맨 앞에 세운 우리 형제들은 아마도 고사리손을 호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한줄로 줄지어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마치 병아리떼가 종종종 걸음을 옮기듯이 그렇게.

그해-아마도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이 나온 때보다 몇 해 뒤였으리라- 설날 아침엔 새햐안 눈이 온통 세상을 눈부시게 뒤덮고 있었다. 내가 조금 과장해서 말하는 데 습관이 붙었더라면 나는 그 새해 첫날 아침을 틀림없이 내가 여태껏 봤던 시골 풍경 가운데 가장 하얗게 빛났던 세상이라고 말했으리라.

그 설날 아침에 봤던 새하얀 눈을 나는 아직도 뚜렷이 기억한다. 우리 형제들은 비록 때때옷도 제대로 차려입지 못했지만 할머님께 세배를 드리고 나면 '세뱃돈'을 받을 수 있다는 들뜬 마음을 앞세우고 뛸듯이 집을 나섰다. 한복을 차려 입으신 아버님이 미처 우리집 마루턱을 내려서기도 전에 우리는 벌써 마당을 서둘러 벗어나 돌담길을 따라 주욱 이어진 황토길을 가득 뒤덮은 새하얀 눈을 밟으며 종종걸음을 옮겼다. 그때 우리가 걸었던 골목길엔 그 어떤 발자국도 없었다. 오직 소복하게 쌓인 탐스런 새하얀 눈과 거기에 내리비치는 눈부신 아침 햇살만 있을 뿐이었다.

6형제 가운데 둘째였던 나는 형이 앞장서며 남겨놓은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그러다가 슬쩍 형을 앞질러 걸으며 내가 맨처음 남긴 첫발자국을 바라보며 몹시 흐뭇해 했던 기억도 나는 듯하다. 그때 내가 본 눈길에 뚜렷이 새겨졌던 자그마하고 예쁜 발자국들은 아마도 내가 여태껏 본 발자국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나는 그때만 회상하면 '내 발자국, 동생 발자국' 하던 동시를 항상 떠올린다.

우리가 항상 설날만 되면 가장 먼저 세배를 드리러 가는 친척 할머니는 한국전쟁 이후 늘 혼자 사셨다. 그 할머니는 아버님한테 당숙모였으니 우리가 큰집이었던 내 할아버님한테는 종수씨(從嫂氏) 되는 분이었다. 그 할머니의 남편분, 그러니까 내 할아버님의 사촌 동생이었던 그 분은 6.25 동란 때 인민해방군이 마을을 점령했을 동안 그들의 일을 도운 전력 때문에 결국 서울이 수복되고 인민군들이 서둘러 북으로 쫓겨날 무렵 그만 인민군들을 따라 월북하고 말았다고 들었다.(어른들로부터 가끔씩 그 당시 얘기를 들으면 어김없이 이문열의 소설 『영웅시대』가 겹쳐 떠오른다.)

아버님한테 당숙모 되시는 그 할머님은 언제나 인자하신 모습으로 '큰집 손자들'인 우리 형제들을 반갑게 맞아주셨기에 그 할머님께 세배를 드리러 가는 길은 언제나 즐거웠다. 더군다가 그 할머님께서는 세뱃돈을 주실 때에도 우리 형제들을 한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으셨다. 그때 받았던 세뱃돈은 주로 10원짜리 지폐였는데 그 당시만 하더라도 10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나같은 코흘리개 어린아이에겐 10원짜리 몇 장만 있어도 갑자기 생긴 '너무 많은 돈'을 어디다 어떻게 써야 할지 걱정이 될 정도로 큰 돈이었다. 그무렵 형한테 들었던 얘기지 싶은데 '형이 어렸을 때'는 세뱃돈을 주로 '십환짜리'로 받았다고 했던 것 같다. 10원은 그 열 배에 해당하는 고액권이었던 셈이다.

그해 겨울의 설날 아침은 지금 되돌아보니 아마도 내게 가장 행복한 설날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조차 든다. 그만큼 나는 어느새 많은 세월을 살아왔고 또 그만큼 나이를 많이 먹었다. 이제 내 나이는 쉰셋이다. 쉰으로도 까마득한 나이인데 거기다 셋을 더 보탰다. 문득 내 나이를 돌아보면 나 스스로도 놀랄만큼 나이를 많이 먹었다 싶지만 그렇다고 내가 여느 누구보다 더 빨리 나이를 먹은 건 결코 아니다. 신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여러 평등한 사물들 가운데 나이만큼 공평한 것도 없지 싶다.

내가 까마득한 옛날의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설날을 떠올리면 겹쳐 떠오르는 또다른 풍경 가운데 하나가 연말연시면 주고받던 '크리스마스 카드'나 '연하장'을 장식하던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설날 아침'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림들이다. 이젠 그런 연하장조차 구경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어젯밤 문득 까마득한 옛날에 내가 경험했던 설날 아침의 그 눈부셨던 고향 풍경과 연하장을 수놓았던 그 아름다운 겨울 풍경들이 너무나 그리워 부랴부랴 책장 서랍 안에 수북히 쟁겨둔 편지 뭉치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내가 머릿속에 떠올렸던 연하장 그림들은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묻혀 있었던 그 색바랜 연하장들을 펼쳐보며 잠시나마 옛 추억들에 푹 잠길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어릴 땐 나이를 한 살이라도 더 먹는 게 무에 그리 좋아 설날만 되면 내 나이가 몇 살이 되었다고 자랑하며 마냥 의기양양해 했던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때마다 어릴 때와는 정반대의 마음이 드는 것도 '나이'가 지닌 묘한 속성이 아닐까 싶다. 이래저래 '나이'를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는 섣달 그믐 하루 전이다.




(2001년 연말에 받은 연하장)
 


 


(1994년 겨울에 받은 연하장)



(1992년 겨울에 받은 연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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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내가 이 책 저 책 속에서 찾아낸 '나이에 대한 글들'이다. 마침 이 뭉치들을 꺼낼 때가 되었다.


* 『몽테뉴 수상록』에서 발견한 글들

 

20세가 되면

나로서는 우리 심령은 20세가 되면, 그것이 장차 될 싹수는 다 풀려져서 할 수 있는 능력을 모두 약속해 준다고 본다. 이 나이에 자기 능력의 명백한 징조를 보여 주지 않은 심령으로서, 그 후에 그런 능력을 가진 증거를 보여 준 일은 없었다. 자연의 소질과 덕성은 이 시기가 되면 그 심령이 가진 강력하고 아름다운 표시를 보여 준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보여 주지 않는다.(349쪽)



 

30세 이후보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아름다운 인간 행동들 중에서, 그것이 무슨 종류이건, 옛 시대나 오늘날에나 대부분은 30세 이후보다 그 전에 이루어진 것을 더 많이 헤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한 인간의 생애를 두고 보아도 그렇다. 한니발의 생애와 그의 위대한 적수인 스키피오의 생애에서도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생애의 아름다운 반생을 그들은 젊었을 때에 얻은 영광으로 살아 보았다.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에 비교해 보니 위대하였다.(349쪽)



 

마지막 쾌락

노령에 이르면 몸이 불편해져서 어디건 의탁하고 싶어지며 마실 것이 필요하게 되는 법이니, 내가 이런 재미를 찾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생의 흐름이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는 마지막 쾌락인 까닭이다. 좋은 친구들의 말로 인간 천성의 열기가 처음으로 발에 오른다고 하나, 그것은 어릴 때의 일이다. 그 열기는 몸의 중허리로 올라가며, 오랫동안 거기에 박혀서 내가 보기에는 육체 생활의 유일하고 진실한 쾌락을 지어 준다. 다른 쾌락은 거기에 비하면 잠자는 따위에 지나지 않는다. 종말에는 그것이 올라가서 날아가는 김과 같이 열기는 목구멍에 도달하며, 거기서 마지막 자리를 잡는다.

플라톤은 18세 전에 술 마시는 것을 금하고 40세 전에 취하도록 마시는 것을 금했다. 그러나 40세가 넘은 자들에게는 취하기를 즐기며, 식사 때 인간에게 쾌활을 주고 노년에게 청춘을 돌려 주며, 마치 쇠가 불에 물러지는 것처럼 심령의 정열을 무르고 부드럽게 해 주는 착한 신 디오니소소의 영향을 많이 받으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그의 《법률편》에서는 술 마시는 모임을(그 집단에 우두머리가 있어 전부를 통제하고 조절한다면) 유익하다고 본다. 술에 취함은 각자의 본성을 다루기에 좋고 확실한 시련이며, 그와 아울러 나이 먹은 사람들에게 제정신을 가지고는 해 볼 생각도 못하는 춤과 음악을 즐기는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그는 술이 마음에 절도를 주고 신체에 건강을 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부분적으로 카르타고 인들에게서 빌려온 다음의 제한 규칙을 마음에 들어했다. 즉, 전쟁에 나갈 때는 삼갈 것, 모든 재판관들이 직무를 처리하는 때나 국무를 토의할 때는 술을 들지 말 것, 일을 보아야 할 낮 동안에는 거기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 것, 또 어린애를 만들기로 작정한 밤에도 들지 말 것을 권한다.(364쪽)



 

35세 결혼설

나는 33세에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는 35세 결혼설에 찬성합니다. 플라톤은 30세 전에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55세 뒤에 결혼을 하려는 자들을 조롱하며, 그들의 소생은 먹여살릴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것은 옰습니다.

탈레스는 여기에 진실한 한계를 두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에 그에게 결혼하라고 재촉하는 모친에게, 아직 때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넘은 다음에는 이미 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귀찮은 행동에는 좋은 기회를 거절해야 할 일입니다.
(412쪽)



 

반쪽의 존재밖에

청춘의 힘과 정기는 점점 없어지고
나이와 함께 우리는 늙어 간다. 
 
    (루크레티우스)


이제부터 내가 되어 갈 것은 반쪽의 존재밖에 없으며, 그것은 이미 내가 아닌 것이다. 나는 날마다 사라지며, 내 자신에서 빠져나간다.

흘러가는 세월은 하나하나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 간다.      (호라티우스)                                      
(709쪽)



 

나이 탓

나는 나이 탓으로 일어나는 우발적인 후회감을 혐오한다. 옛 사람들이 말하던 것처럼 나이 탓으로 탐락에 끌릴 필요도 없어졌다고 고마워하던 사고방식은 내 의견과는 다르다. 나는 결코 나이 때문에 좋은 일을 누릴 수 없음을 고맙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약점까지도 최선의 사물들의 열(列)에 배치되어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신의 뜻은 그 피조물에 적대적이 아니다."(퀸틸리아누스) 우리의 정욕도 노년기에는 희박해진다. 끝난 다음에는 심한 포만감에 사로잡힌다. 나는 그 점에서 양심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침울과 허약은 우리에게 류머티즘에 걸린 비굴한 덕성밖에는 남겨주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 때문에 판단력을 변질시킬 정도로 자연적인 변화(늙음)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

지금 힘주어서 이성을 조심스레 진작시키고 있는 나는, 이제 늙어 가며 약화하여 못 쓰게 된 것이 아니라면, 내 이성은 더 방자하던 시절과 같은 상태로 있다고 본다. 신체의 건강에 해로울까를 고려해서 이성이 나를 이 탐락의 도가니 속에 집어넣기를 거절하는 것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정신 건강을 위해도 그런 짓을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성이 전투력을 잃었다고 해서 더 용감해졌다고는 보지 않는다. 나의 유혹받은 마음은, 너무 시달리고 부서졌기 때문에 이성으로 대항할 거리가 못 된다. 나는 오히려 손을 앞으로 내밀며, 이런 유혹을 간청할 뿐이다. 누가 그 옛날의 색욕을 내 이성 앞에 내어 준다면, 나는 이 이성이 옛날에 가졌던 만큼 거기 저항할 힘을 갖지 못하지나 않을까 두렵다. 나는 이성이 그때 판단하던 것을 벗어나서 달리 판단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그것이 어떤 새로운 광명을 얻었다고도 보지 않는다. 그 때문에 거기에 무슨 회복이 있다 해도 그것은 오히려 나빠지게 된 회복이다.
(897쪽)



 

나는 내 계절의 풀과 꽃과 열매를 보았다

내 육체 상태의 경과가 모든 일을 그 계절에 맞추어 이끌어갔다는 것은, 내가 운명에게 고맙게 여기는 중요한 사항들 중의 하나이다. 나는 내 계절의 풀과 꽃과 열매를 보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 말라가는 것을 본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되어 온 노릇이니 다행한 일이다. 나의 질병들은 모두 제철에 왔으며, 그들은 지난 날의 오랜 행복을 더 쉽게 회상시키는 만큼, 이 불행들을 더 수월하게 참아 넘긴다.
(898쪽)



 

노년의 주름살

우리의 심령은 노년기에는 젊은 시절보다 더 번거로운 폐단, 불완전과 질병에 매이기 쉬운 것 같다. 어리석고 노쇠한 자존심과 진력이 나는 잔소리, 사귈 수 없는 가시 돋친 성미, 미신, 그리고 사용할 기회도 없는데 재간에 관한 꼴같잖은 걱정 따위 말고도 더 많은 시기심과 부정과 악의를 발견한다. 노년은 우리의 이마보다도 정신에 더 주름살을 붙여 준다. 그리고 늙어 가며 시어지고 곰팡내 나지 않는 심령이란 없으며, 있다 해도 매우 드물다. 사람은 그 전체가 성장과 쇠퇴로 향해 간다.
(899쪽)



 

저절로 흘러드는 강력한 질병

나는 노년기가 수많은 내 친지들에게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가를 보았던가! 노년이란 자연히 자기도 모르는 새에 저절로 흘러드는 강력한 질병이다. 노년이 우리에게 짋어지우는 결함을 피하려면, 적어도 그 진전을 막으려면, 대단히 많은 연구와 조심스러운 준비가 필요하다. 나는 아무리 몸을 아껴도 이 노년이 한걸음 한걸음 나를 이겨감을 느낀다. 나는 힘 닿는 대로 버티어 볼 뿐이다.
(899쪽)



 

노령기의 상태

노령기의 상태는 너무나 내 정신을 경계하여 타이르고 나를 사리 분별을 할 능력이 있게 만들고, 내게 설교한다. 과도한 쾌활성을 가졌던 나는 이제 반갑지 않게 지나친 근엄성에 빠져 있다. 그 때문에 지금은 일부러 좀 방자하게 생각을 바꿔 본다. 그리고 때로는 경박한 젊은 생각에 마음을 쓰며, 마음만은 거기에 머문다. 나는 이제 너무 침착하고 둔중하고 노숙해졌다. 나이는 날마나 내게 냉철과 절제를 가지고 훈계한다. 이 몸은 무절제한 생활을 피하며 두려워한다. 이번에는 육체가 정신을 개선하도록 지도할 차례이다. 신체는 제 차례로 더한층 혹독하게 강압적으로 지배한다. 신체는 자나깨나 죽음과 인내와 금욕을 가르치기에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나는 옛날에 탐락에 대해 하던 식으로 지금은 절제에 대해서 자신을 방어하고 있다. 절제는 얼떨떨해질 정도로 나를 뒤로 끌어당긴다. 그런데 나는 어떤 의미로서나 내 자신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예지에도 지나침이 있어서 어리석음 못지않게 절제가 필요하다.
(925∼926쪽)



 

우리는 자연에서 이탈한다

나는 빨리 늙는 것보다는 노년이 짧은 편이 낫다. 쾌락을 얻을 수 있는 한 가장 조그만 쾌락의 기회까지도 놓치지 않는다. 나는 여러 가지 신중하고 강력하고 영광스런 쾌락을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소문 때문에 여간해서 나는 그런 욕심을 내지 못한다. 나는 이런 쾌락이 광대하고 장엄하고 호화롭기보다는, 달콤하고도 바로 얻을 수 있는 손쉬운 것이기를 바란다. "우리는 자연에서 이탈한다. 우리는 어느 점으로도 좋은 지도자가 못 되는 세상 사람들의 의견을 좇는다."(세네카)
(927쪽)



 

오십 고개를 넘은 자

아아, 가련하게도
이제 오십 고개를 넘은 자를
두려워 마오.     
                      (호라티우스)


자연은 이 나이를 꼴사납게 만들 것 없이, 가련하게 만든 것만으로 만족했어야 할 일이었다. 나는 이것이 일주일에 세 번쯤 허약한 힘으로 일어나며, 뱃속에 당연히 해낼 어떤 위대한 힘이나 가지고 있는 것처럼 거칠게 부스럭거리는 꼴이 보기도 싫다. 솜털에 불이 붙은 꼴이다. 그리고 지금 둔중하게 얼어붙어서 볼이 꺼진 이 나이에 이렇게도 생기 있게 팔딱거리는 자극이 놀랍다. 이런 욕망은 청춘의 꽃다운 시절에나 가질 일이다. 이런 충동을 믿고, 그대에게 있는, 이 피로할 줄 모르게 꾸준하고 충만하고 장엄한 열기를 한번 거들어 보라. 좋은 꼴을 보게 될 것이다.
(982쪽)



 

노년의 사랑

나는 숨가쁘게 내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어떠한 다른 정열도 없다. 다른 사람들이면 나처럼 일정한 직업이 없을 경우, 탐욕·야심·싸움·소송 사건 같은 일에 마음이 잘 매여 지내지만, 나로서는 사랑에 매여 지내는 편이 더 기분 좋은 일이다. 사랑은 다시금 내게 주의력과 소박성과 우아미와, 내 인품에 대한 생각을 가꾸게 하고, 이 늙음의 얼굴 찌푸림이, 이 측은할 만큼 비뚤어진 찌푸림이 나의 용모를 타락시키지 않게 보장해 주고, 나에게 다시 건전하고 현명한 공부를 시작하게 하고, 그래서 내 정신이 자신과 자신의 쓸모에 관해서 절망하는 심정을 없애고, 자신에게 다시 정이 붙게 하여 더 사랑받고 존경받을 수 있게 해 줄 것이고, 할 일은 없고 건강 상태는 나빠지기 쉬운 이런 나이의 수천 가지 불쾌한 생각과 우울한 번뇌를 흝어 준다. 또 적어도 공상으로라도 대자연에 버림받기 시작하는 이 피에 다시 따스함을 넣어 주며, 이제 마지막 파멸을 향해 줄달음치는 가련한 인간에게 턱을 괴어 주고, 근육과 심령의 정력과 쾌활성을 조금은 연장시켜 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여간해서는 회복하기가 쉽지 않은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몸은 허약해지고, 오랜 경험으로 우리 취미는 한층 더 연약하고 꾀까다로워져서, 내놓는 것도 별로 없이 요구만 많아지며, 용납될 만한 가치가 아주 없는 터에 가장 좋은 상대만 고르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사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젊었을 적만큼 과감하지도 못하며, 사람을 더 믿어 주지도 못한다. 우리 조건과 여자들의 조건을 알고 있는 만큼 우리는 아무것도 사랑받을 자신을 가질 수 없다. 나는 저 피끓는 새파란 청춘들 사이에 끼여 있기가 부끄럽다.
(990쪽)



 

서른 살

나바르의 여장 마르그리트는 여자이니 여자의 장점을 한껏 연장시키며, 서른 살에 이르면 그 칭호를 '예쁜'에서 '착한'으로 바꾸라고 명령한다.
(993쪽)



 

40이나 50세 전에

청춘이 정열을 추구하는 것은 용서하고, 노년이 쾌락을 찾는 일은 금지하는 것은 잘못이다. 나는 젊었을 때는 불타는 정열을 조심성으로 은폐했다. 이제 늙어서는 음산한 심정을 방종으로 풀어 준다. 그 때문에 플라톤의 법칙은 편력을 더 유익하고 교양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40이나 50세 전에 돌아다니는 것을 금지한다. 나는 바로 이 규칙의 제2항으로 60세가 넘어서는 편력을 금지하는 데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이에 길을 떠나다가는 그 먼 길에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아니오?" 무슨 상관이 있나? 나는 여행에서 돌아오거나 여행을 완수하려고 떠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움직이는 것이 기분 좋은 동안은 움직여 보려고 하는 것이다. 바람을 쏘이기 위해서 나는 바람을 쐰다. 이득이나 토끼를 보고 달려가는 자는 달려가는 것이 아니다.
(1085쪽)



 

60이 되기를 기다리느라고

내가 학문을 가지고 말하고 싶었더라면 더 일찍이 말했을 것이다. 즉, 내가 재치도 있고 기억력도 더 좋았고 공부하던 때에 가깝던 시절에 써 보았을 것이다. 그때에 이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던들, 그때의 젊은 패기에 지금보다는 더 자신을 가졌을 것이다. 게다가 운이 이 작품을 통해서 내게 베풀어 주는 이런 우아한 혜택이, 그때에는 더 유리했을 것이다. 이 소질을 크게 가진 내 친지들 중의 두 사람은 60이 되기를 기다리느라고 40대에는 글 쓸 생각을 않고 있다가, 재질의 반은 잃었다고 나는 본다. 성숙기에는 청춘기처럼 그때의 결함이 있고, 그 결함이 더 심해진다. 그리고 노년기가 이런 일에는 다른 어느 시절보다도 나쁘다. 아무라도 자기 노쇠기를 많은 사람들 앞에 내보이며, 그가 나이의 은총을 잃은 자이고 몽상가이며 정신이 잠든 자라는 것을 느끼게 하지 않는 기분으로 표현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미친 수작이다. 우리 정신은 늙어 가면서 변비증에 걸리고 오그라든다.
(1177∼1178쪽)



 

지난 날의 내 그림에서 얼마나 더 멀어진 것인가!

죽음은 사방에 우리의 생명과 섞이며 혼동된다. 쇠퇴가 그 시간에 앞서 오며, 바로 우리가 나아가는 길 속에 섞여 든다. 나는 25세와 35세 때의 내 초상화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들을 지금의 것과 비교해 본다. 이미 몇 갑절이나 내가 아니게 되었던가! 지금의 내 그림은 나의 죽음의 그림자보다도 지난날의 내 그림에서 얼마나 더 멀어진 것인가!
(1232쪽)



 

50세

나는 지난번에 50세를 넘어섰다. 50세란, 어떤 국민들은 이 나이를 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인생의 아주 적당한 종점으로 정해 놓았던 나이로, 이것은 이유 없는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불확실하고 짧기는 하지만, 너무나 확실하게 이 나이를 훌쩍 넘었기 때문에, 젋었을 떄의 건강과 안일을 못 가졌다고 불평할 거리는 거의 없다. 나는 정력과 쾌활성은 말하지 않는다. 정력이 이 한계 너머까지 나를 따라올 이유는 없다.

이제부터는 애인의 집 문턱에서
궂은 날을 무릅쓰고 기다려 볼 기운조차 없다. 
     (호라티우스)                                                 
(1226쪽)



 

인간 수명의 한계는 70

내 죽음이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우며, 이제부터는 운명에게 혜택을 요구하거나 바란다는 것이 부당한 일이라고 내 죽음에 관해서 생각하며, 여기서 위안을 느낀다. 사람들은 옛날에는 인간이 키가 컸던 만큼 더 오래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옛날 사람이던 솔론은 인간 수명의 한계를 70으로 잡고 있다. 옛날의 그 '탁월한 중용'을 그렇게도 찬양하며, 중용의 절도를 가장 완벽한 것으로 간주하던 내가, 어이없게도 내 수명은 터무니없이 높게 요구해야 할 일인가? 자신의 흐름에 거꾸로 되어 가는 것은 모두 불쾌해야 할 일이며, 자연대로 되어 가는 것은 항상 유쾌해야 할 일이다. "자연과 합치하여 생성하는 사물과 형상은 모두 선(善)이라는 수(數) 중에서 계산되어야 한다."(키케로) 그 때문에 플라톤은 부상이나 질병이 가져오는 죽음은 횡사라고 불러도 좋으며, 노령이 우리들을 그리로 인도해서 닥쳐오는 죽음은 모든 것 중에 가장 가볍고 어느 점에서 감미로운 죽음이라고도 하였다. "청년에게는 난폭이, 노년에게는 성숙이 생명을 빼앗아 간다."(키케로)
 
(1231쪽)




 * 쇼펜하우어의 『삶의 예지』에서 발견한 글들


유년시절의 환경과 체험이 언제나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은......

사람의 두뇌는 일곱 살쯤 되면 상당히 커지며, 지능도 그 무렵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여 외부 세계를 인식하려고 한다. 인식의 대상인 외부 세계는 매우 신선한 느낌을 준다. 모든 것이 생기발랄해 보이기 때문에 유년시절은 그대로 하나의 아름다운 서사시가 된다. 사실 모든 시와 예술의 본질은 플라톤이 말한 바와 같이 이데아(사물의 실체)를 붙잡는 일, 다시 말해서 개체를 통하여 보편적인 것을 직관하는 일이다.

또한 유년시절의 환경과 체험이 언제나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은 그 무렵에는 외부 세계가 선명하게 드러나 하나하나의 사물이 대표적으로 보이며, 직관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유년시절에는 환경에 전적으로 몰입하여 눈앞에 나타나는 사물을 그 종류 가운데서 유익한 실재로 인식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인식보다는 의지의 힘에 의해 움직이므로 외부의 사물은 대부분 고뇌를 안겨 준다. 요컨대 모든 사물은 인식의 눈으로 보면 매우 선량하고 아름답지만, 의지의 눈으로 보면 무척 사나운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후자보다는 전자의 편에 속하는 것이 유년시절의 특징이다.




온 세계가 에덴동산처럼 생각되기 때문에......

이 무렵의 인간은 사물의 아름다운 일면만을 알고 두려운 점을 모르며, 우리 자각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에 순수한 그 사물 자체 또는 예술에 묘사된 것과 흡사하여 매우 선량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므로 온 세계가 에덴동산처럼 생각되기 때문에 누구나 한 번쯤은 으레 행운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절을 벗어나면 차츰 인식보다 의지가 생활의 중심이 되어 생활의 대상으로서 선과 미를 의욕의 대상으로 삼는다. 즉, 사물과 의지의 여러 가지 반작용이 일어나 괴로운 운명에 시달리면서 '삶의 난동' 속에 빠져 들어간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서 사물과 또 다른 일면, 즉 의욕의 대상으로서 무서움을 알게 되며, 의욕적인 생활에 따르는 모든 장해와 근원을 체험하고 인생에 대한 아름다운 꿈이 깨어진다. 그리고 아름다운 환상을 즐기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고 한탄하여 회한에 잠기게 되는데, 이런 실망은 나이가 들어 늙어갈수록 더욱 심해진다. 유년시절의 인생은 먼 데서 바라본 극장의 장식물과 같지만, 노년기의 인생은 그 장식물을 가까이서 목격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봄에는 모든 나무 잎사귀가 다 초록빛으로 보이는 것처럼

이 밖에 유년시절에 평온과 축복을 가져오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마치 봄에는 모든 나무 잎사귀가 다 초록빛으로 보이는 것처럼 미래의 영웅이나 학자, 농부, 시골사람 할 것 없이 서로 조용히 친밀한 사이가 되어 독특한 사회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개인차가 심해지고, 그 차이는 중심에서 원주까지 점점 멀어져 가는 원의 반지름처럼 점점 더 커진다.

우리 생애의 후반기보다 전반기가 더욱 이상적으로 보이고 후반기가 대체로 불쾌하고 불행하게 생각되는 것은, 우리가 생애의 초기에 행복의 실제를 믿고 이를 손에 넣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있는 힘을 다 기울였지만, 오히려 그것이 실망과 재앙의 근원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와 같은 노력의 결과는 언제나 되풀이되는 실패와 실망, 그리고 이에 따르는 불만이다. 젊은이들에게는 꿈같은 행복의 그림자가 여러모로 눈앞에 아른거리지만 이것은 결코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손에 넣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청년시절의 공통된 망상에서 떠날 수 있다면......

모든 청년들이 자신의 처지나 환경에 대하여 불만을 느끼는 것은 결국 인생 자체가 공허하고 비참한 데 원인이 있다. 청년들은 그것을 처지나 환경 탓으로 본다. 그들은 나중에 꿈에서 깨어나야 비로소 인생은 결코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알고 이것을 자기 처지나 입장의 탓으로 돌리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이 만일 올바른 교육을 받아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행복과 만족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청년시절의 공통된 망상에서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이겠는가.



 

시나 소설에 묘사된 인생과 친숙해졌기 때문......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이와 정반대의 방향을 더듬게 된다. 이것은 그들이 인생의 참된 모습을 알기 전에 시나 소설에 묘사된 인생과 친숙해졌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눈에는 문학에 표현된 인생이 매우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에 자기도 한번 그처러머 실제로 해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래서 자기 생애를 하나의 소설처럼 실현해 보려고 하는데, 이것은 무지개를 붙잡으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결국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대문소리......

인간의 전반기 특징이 이와 같이 행복에 대한 충족될 수 없는 동경이라면, 후반기의 특징은 불행에 대한 두려움이다. 후반기에 오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행복은 하나의 망상이요, 고통만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상식이 있고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나이가 들어 늙어갈수록 행복보다는 차라리 견디어 나가기 쉬운 상태를 원하며, 근심과 걱정이 없는 처지를 원하게 된다. 나는 젊어서는 대문 소리가 나면,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나?' 하고 기뻐했지만, 나이를 먹고 나서부터는 대문 소리가 들리면, '무슨 귀찮은 일이 생기려나?'하고 불안을 느끼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소유에 대하여 애착을 가지는 것은......

생명력, 즉 체력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36세까지는 그 이자로 살아가는 사람과 같아서 오늘 소모한 체력은 내일이면 회복된다. 그러나 이 무렵을 고비로 그 후로는 자기 자본을 갉아먹기 시작하는 자본가가 된다. 처음에는 사태의 변화가 거의 눈에 뜨이지 않아 지출의 대부분은 자연히 원상복구가 되어 이 무렵의 손실은 대수롭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손실이 점점 늘어가면 눈에 띄게 된다. 그것은 날마다 팽창하여 점점 뿌리를 깊이 박고, 오늘이라는 하루가 돌아올 때마다 어제보다 가난해진다. 그 동안에 그 감퇴는 물체의 낙하처럼 더욱 속도를 내고 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이처럼 생명력과 재산이 날로 줄어든다면 그보다 더 딱한 일은없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소유에 대하여 애착을 가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성년에 도달하고 나서 몇 해까지는 생명력에 관해 말하자면 이자 중에서 얼마간은 자본에 보태는 사람과 같다. 그렇게 하면 지출한 금액이 다시 자연히 충당될 뿐더러 자본도 늘어간다. 오, 행복한 청춘! 오, 서글픈 늙은이······. 어쨌든 인간은 청춘의 힘을 소중히 간수해야 한다.



 

인생의 모든 사물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작아 보인다.


젊은이의 입장에서 보면 인생이란 하나의 끝없이 긴 미래로 보이며, 노인의 입장에서 보면 극히 짧은 과거에 지나지 않는다. 인생의 모든 사물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작아 보인다. 청년시절에는 그처럼 크게 보이던 인생이 꿈과 같이 덧없고, 다만 급격한 현상의 무의미한 교체로 생각되어 허무와 무상이 뚜렷이 들여다보이고 또 마음에 스며든다.


청년시젏에는 시간이 가는 것이 무척 더디다. 그러므로 일생의 4분의 1은 행복한 시기고 또 가장 길게 생각되는 부분이며, 그 동안에 기억하는 일들은 어느 시기의 기억보다 훨씬 많다. 자기의 생애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때 누구나 그 4분의 1에 해당하는 부분에 관해서는 그 밖의 4분의 3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 기간은 계절에 있어서 봄과 마찬가지로, 인생에서도 해가 너무 길어 지루하게 생각될 정도지만,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면 낮이 무척 짧아지는 대신에 맑은 날씨가 계속된다.


노년기에는 왜 과거의 생애가 그처럼 짧게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조금도 소중할 것 없는 대부분의 불쾌한 일들이 기억에서 사라지고, 극히 작은 부분만 남아있기 때문에 그 내용이 빈약해지고 길이도 짧아지는 데서 오는 것이다.





 * 케케로의 《노년에 대하여》에서 발견한 글들

나는 불평하지 않고 노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네. 그런 사람들은 욕망의 사슬에서 해방된 것을 기뻐하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받지도 않는다네. 그런 종류의 불평은 모두 성격 탓이지 나이 탓이 아니야. 절제할 줄 알고 괴팍하지 않으며 인정이 있는 사람은 노년을 쉽게 견디지만, 가혹하고 몰인정한 사람은 어느 나이에나 괴로운 법이지.


 


인생의 행로는 정해져 있네. 자연의 길은 하나이고, 게다가 되짚어올 수 없는 길이라네. 그리고 인생의 각 단계에는 각각 그때에 어울리는 성질이 주어져 있네. 소년의 나약함, 젊은이의 패기, 안정기에 든 자의 중후함, 노년기의 원숙함, 모두 제 때에 거둬들여야 하는 자연의 결실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법이라네.


 

 

건강을 생각해야 하네. 적당한 운동을 하고 음식은 체력을 해칠 정도가 아니라 체력이 회복될 정도로 섭취해야 하네. 또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과 마음을 더욱 보살펴야 하네. 이 두 가지 또한 램프에 기름을 보충하듯이 해주지 않으면 늙음과 함께 사라져버리기 때문이지. 육체는 단련하는 동안 피로가 쌓이면 무거워지지만, 마음은 단련할수록 가벼워는 법이라네..

 


 

"자연이 인간에게 준 병독 가운데 육체의 쾌락만큼 치명적인 것은 없다. 그 쾌락을 손에 넣기 위해 만족을 모르는 탐욕스러운 욕망이 부추김을 받기 때문이다. 조국에 대한 배신, 국가의 전복, 적과의 밀통이 모두 여기서 생겨난다. 요컨대 모든 범죄와 악행은 다 쾌락에 대한 욕망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간통과 음행 같은 온갖 악행은 다름 아닌 쾌락의 유혹에 의해 유발된다.

또한 인간은 자연 또는 신으로부터 정신보다 더 귀한 것은 받지 않았다. 이 신성한 선물에 쾌락만큼 유해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욕망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자제력이 나설 무대가 없고, 쾌락의 왕국에서는 덕이 설 자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더욱 잘 이해하려면, 즐길 수 있는 최대한의 육체의 쾌락에 빠져 있는 인간을 상상해 보면 된다. 그런 기쁨에 잠겨 있는 동안 정신을 작용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이성과 사색으로 달성할 수 있는 일도 아무것도 없는 것은 누가 봐도 자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쾌락이 점점 커지고 점점 장기화함에 따라 영혼의 빛은 완전히 꺼져버리니, 쾌락만큼 혐오스럽고 유해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쾌락에 대해 내가 왜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일까? 쾌락을 그다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노년에 대한 비난이 아닐 뿐만 아니라 최고의 찬사이기 때문이라네. 노년은 연회와 잔뜩 차려놓은 식탁과 자꾸자꾸 돌아오는 술잔과는 거리가 멀지만, 바로 그 덕분에 술주정과 소화 불량, 불면과도 거리가 멀다네. 그러나 쾌락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면 - 그것은, 인간이 마치 물고기처럼 그것에 낚여버린다는 점에서 플라톤이 절묘하게도 쾌락을 '악의 미끼'라고 부른 것처럼, 쾌략의 매력에 저항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네만 - 노년에는 무절제한 연회는 안 되지만 절도 있는 술자리를 즐길 수는 있는 거라네.



 

노인의 경우에는 쾌락의 쑤석거림 같은 것은 그리 크지 않다는 말인가? 그렇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아예 바라지도 않는다네. 사람이 원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괴롭힐 수가 없지. 이미 노쇠기에 소포클레스는 아직도 성생활은 즐기고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멋지게 대답했다네.
"이런 맙소사! 거칠고 포악한 주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처럼, 거기서 빠져나오게 된 것을 기뻐하고 있는 중이오."
· · · · · ·
노년에, 말하자면 육욕과 야망, 투쟁, 적대감, 그리고 온갖 욕망에 대한 복무 기간이 끝나, 마음이 스스로 만족하는, 이른바 마음이 자기 자신과 함께 산다는 것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정말 연구와 학문이라는 양식이 얼마든지 있다면, 한가한 노년만큼 즐거운 것도 없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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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살기 2014-01-30 03:06   댓글달기 | URL
올해에는 올해대로 아름다운 설 누리셔요.
그러고 보니, 참말
요사이는
강원도나 경북 또는 전북이나 충북
깊은 시골로 들어가지 않으면
눈 덮인 설을 누리지 못하네요.

그렇네요.

oren 님 어릴 적 그림들이
오늘날 아이들 마음속에도 깃들 수 있기를 빕니다.
모두들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oren 2014-01-31 22:42   URL
함께살기 님께서도 설 잘 쇠셨는지요? 떡국도 맛있게 드셨고요?

요즘엔 눈 덮인 설도 누리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황토길도 구경하기가 너무나 어려워졌지요.
참 안타깝고도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설날을 앞두고 제 고등학교 친구들하고 그런 푸념들을 늘어놓았더니 어떤 친구가 '시'를 하나 보내줬더라구요. 인터넷에도 올라온 게 없어서 직접 타이핑을 했다고 하더라구요. 시를 좋아하시는 함께살기 님께서도 한번 감상해 보셔요~

* * *

내 유년의 황토길

김혜숙

흙먼지가 봄바람에 쓸려가던
내 유년의 황토길

마른 햇살에 입술이 터진 아이들이
떨어진 신발을 끌며
상여 뒤를 따르던,

며칠에 한 번씩
도살장으로 끌려가던 덩치 큰 황소가
하늘을 쳐다보고 슬프게 울던
슬프게 울며 뒷발질하던,

고향집
대문 열면
언제나 거기
묵묵히 엎디어 있던
그길

어디서 시작되어
거기 와서 엎디어 있던 길이었을까
그 황토길

무너져 내린 서당방집 담모롱이를 돌아서
재봉틀 소리 끊이지 않던 과부집 마당을 가로질러
오슬오슬 추워 떨던 파란 보리밭을 가르며
입 다물고 기어가던,

느릿느릿 기어가서
첩첩산중, 저 먼 산 뒤쪽으로
막막하게 사라져 버리던 길,

오부자집 소실댁이 드디어 미쳐서
너울너울 춤추며 발가벗고 달려가던,
떡고물 무치듯 온 몸에 황토흙 바르고
미쳐서 달려가던 길,

어스름 해질녘이면
식만지 시대의 나의 아버지
아직도 젊은 나의 아버지
그 마디 굵은 손을 잡고
나란히 서서 바라보던 길,

실눈을 뜨고서
그렇게 바라보던 길,
그길,

어디로 가던 길이었을까
내 유년의 길
그 슬픈 황토길은

<잠깨우기, 문학세계사, 1988>

2014-01-30 2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oren 2014-01-31 22:53   URL
저도 2002년 말띠해를 맞았을 무렵만 해도 연하장을 50통은 족히 받았던 듯한데, 어느새 연하장 한 통 받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는 서글픈 세월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놀라 흠칫했어요...

알라딘 서재는 참 독특한 곳이에요. 저도 2003년부터 이곳에 발을 들여 놓았지만, 6개월씩, 1년씩, 어떨 땐 1년 6개월 동안이나 단 한 번도 알라딘을 찾지 않은 경우가 있었지요. 살다보면 꼭 여기가 아니더라도 들러야 할 데도 많고 신경써야 할 곳도 많은 때가 있더라구요. 어떤 사물에든 너무 악착스럽게 매달리지 않는 쪽이 오히려 스스로 편안해지고 좀 더 객관적으로 대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듯해요.

설날 저녁에 쓰는 댓글이라 느낌이 또다르네요. 올 한 해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랄께요. 건필하시고요!

2014-02-03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04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