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록 - 미래사회를 이끌어 갈 주인공들에게 남긴 100년을 내다본 지혜 모음
탄허 지음 / 휴(休)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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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중국에 당개라는 선비가 운명을 보았는데 “천정무원穿井無源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즉 “우물을 파는 데 근원이 없다”라는 뜻으로 다시 말해서 “너의 팔자는 기구해서 어렵다”는 말이었다.

 

그러자 당개는 즉각 “천정무원穿井無源가?”라고 현토를 고쳐서 반박했다. 이 말의 뜻은 “우물을 파는 데 근원이 없을 소냐?”라는 말로 파다가 중단하면 근원이 없지만 끝까지 파면 근원의 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꾸준히 70년을 공부했다. 그러면서도 결코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를 몰라준다고 세상을 원망하는데도 그는 한 번도 원망함이 없이 꾸준히 노력했다. 대신 학문이 능통하면 내가 벼슬을 할 텐데, 학문이 부족하니 내가 이렇듯 등용 안 되었지 하면서 늘 반성하고 노력을 했다.

 

그러다 일흔이 되던 해에 역시 글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공중에서 “당개, 당개!” 하고 불러서 밖으로 나가보니 허공은 공적하고 부르는 소리만 있지 모양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자 당개가 “무엇이 나를 찾느냐” 하니 공중에서 귀신이 하는 말이 “너의 운명을 어찌하겠니?” 물었다. 듣고 보니 젊었을 때 말과 같았다. 우물을 파서 근원이 없다는 말이나 지금의 “운명을 어찌하겠니?” 이 두 문장은 말만 다르지 뜻이 같으니 당개가 다시 반박을 했다. 

 

“야, 이놈아 운명인들 당개를 어찌하겠느냐?”

 

“당개가 밀고 나가는데 어찌 운명이 당개를 이길 수 있단 말이냐?”

 

이렇게 호통을 쳤다. 그리고 그 해에 등과를 했다. 이렇게 운명은 당개처럼 자기 자신이 개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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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a 2018-12-14 11: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때 제 짝꿍은 고교졸업 후 노동운동에 투신, 감옥에도 다녀왔는데요. 그 친구가 어느 날 친구따라 점집엘 갔었대요. 그 때 점쟁이가 제 친구를 보자마자 그러더래요. ˝당신은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라 이런 데 올 필요가 없소.˝라고요. 아주 당찬 친구였는데 늘 경제적인 문제로 어려워했어요.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지만 가끔 마음이 약해질 때 이 친구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지곤하지요. 그리운 친구입니다.

oren 2018-12-14 12:05   좋아요 0 | URL
그런 친구분이 계셨군요. 사람들 중엔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경우도 능히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예지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 또한 아예 무시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사실 <탄허록>에 보면 오늘날에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개인의 운명을 훨씬 뛰어넘는) 굵직굵진한 예언들이 아주 많고, 오늘날의 현실과도 잘 맞아떨어지는 부분들도 적잖아서 꽤나 놀라운 책인데, 가끔씩 곁들여 놓은 ‘개인의 운명‘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들까지 있어서 금세 다 읽게 되더군요.^^
 
탄허록 - 미래사회를 이끌어 갈 주인공들에게 남긴 100년을 내다본 지혜 모음
탄허 지음 / 휴(休)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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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강태공이 부인을 왜 소박했습니까?

강태공은 생활이 어려울 때 소 잡는 일을 했다.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었다. 강태공이 80년을 수조垂釣, 즉 ‘낚시’를 하니 이를 답답해하던 부인이 도망갔다. 견디기 어려워서 떠난 것이다.

 

강태공은 훗날 문왕에게 발탁되어 부귀공명을 누렸다. 문왕은 그를 존위사부尊爲師傅 라고 높여서는 사부라 했다. 또 호위상부號爲尙父라 하여 호를 높은 아버지라 했다. 그래서 사상부師尙父라는 별호가 생긴 것이다.

 

그렇게 왕에게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던 어느 날 떠났던 부인이 태공을 다시 찾아왔다. 이때 태공은 부인에게 물을 한 동이 가져오게 한 다음 그 물을 땅에 쏟으라고 했다. 그리고 부인에게 물을 다시 쓸어 담으라고 했다. 그러자 부인이 대답했다.

 

“못 담겠습니다.”

 

이에 태공이 다음과 같이 말하며 거절했다.

 

“당신과 나는 바로 이와 같소.”

 

이 말은 들은 부인은 자살을 했다고 한다.(235∼236쪽)

 

 

 * * *

 

 

주매신周梅臣은 강태공과 반대로 떠난 부인을 다시 맞아했다는데 사실입니까?

주매신의 표맥漂麥이란 유명한 말이 있다. 보리멍석이 떠내려갔다는 이야기는 주매신의 일화다. 그는 일생을 무릎이 썩을 정도로 글만 읽은 선비인데 부인이 하루는 이웃 마을에 가면서 검은 구름이 곧 비를 몰고 올 것 같아 남편 주매신에게 부탁했다.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은데 만약 비가 오면 보리멍석을 거두어 주십시오.”

 

주매신은 “그렇게 하리다”라고 대답을 하고서 글을 계속 읽었다. 그런데 소나기가 내려서 보리멍석이 다 떠내려 가버렸다. 부인이 돌아와서 이 광경을 보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남편을 책망하며 개가해 버렸다.

 

얼마 후 주매신이 대과에 급제해서 군수로 발령받아 가는 길에 도망간 부인을 만났다. 그녀는 가난한 집에 개가를 했던지 산에서 나물을 뜯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주매신은 옛날의 고생을 위로하면서 부인을 데려와 다시 재결합해서 살았다고 한다. (236∼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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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만큼 못된 천사도 없지."

 - 셰익스피어, 「사랑의 헛수고」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

 

가와바타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년 전인 1968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때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대표작이 『설국』이었다. 지금도 사정은 변치 않았다. 이 소설은 분량이 짧은 데다가 뚜렷한 플롯이 없을 정도로 스토리가 모호한 느낌이 들지만, 독자들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특이한 매력을 지녔다. 그것은 눈으로 가득 찬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덧없는' 사랑 이야기가 너무 애틋하거나 허무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쿄에서 놀러 온 무위도식하는 여행자에 불과한 시마무라와, 그 남자를 사랑하는 게이샤 신분의 고마코 사이에는 산골 마을이라는 비교적 좁은 공간과 짧은 틈새 시간밖에 없다. 그런 시공간을 매번 다양한 빛과 소리가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자연이자 드넓은 우주의 일부분으로 능수능란하게 확장시키는 재주야말로 가와바타에게 특유한 재능이었다. 『설국』은 계절이 바뀌면 눈처럼 녹아 없어지고 마는 덧없고 허무한 '사랑의 헛수고'를 그리고 있지만, 그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인 자연 공간에 대한 작가의 아름답고도 슬픔 가득한 묘사를 빼놓고선 결코 온전히 감상할 수 없다. 그만큼 설국의 무대는 아주 협소하지만 읽는 사람들에게 그곳 자연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설국』은 일본에서만 특유한 게 아니라 작가에게서도 동시에 특유한 서정으로 가득하다. 일본 소설이 아니라면 구경조차 하기 힘든 단어들, 이를테면 게이샤, 기모노, 오비, 가부키, 유카타(浴衣), 다다미, 샤미센, 지지미 등의 용어만 들어도 그렇다. 가와바타는 특히 빛과 소리에 아주 예민한 감각을 지닌 작가였다. 해마다 겨울이면 눈이 스무 자나 쌓이는 한적한 산골 마을의 다채로운 풍경들은 작가가 바라보는 시점마다 매번 그 모습을 달리한다. 그 눈 마을은 가을 한철엔 단풍객들이 더러 찾지만, 눈이 내리는 한겨울엔 온천욕과 스키를 즐기려는 여행객들로만 잠깐식 붐빌 정도로 조용하면서도 작은 마을이다. 그 마을을 외부와 연결하는 통로는 기차였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이처럼 소설은 독자들을 단숨에 눈의 고장으로 이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펼쳐지는 이야기는 사뭇 독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남자 주인공인 시마무라는 기차 안에서 홀로 여행 중인데, 기차가 멎자 아까부터 은연중에 그의 관심을 끌던 처녀가 다가와 시마무라 앞의 유리창을 열어젖히고 (그녀와 서로 아는 사이인 듯한) 역장님과 짧은 대화를 나누는데, 그 대화를 듣고 나서 시마무라는 그 처녀에게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여기서부터 소설은 갑자기 주인공의 내면 속으로 빠져든다. 서사는 잠시 뒤로 밀려나고, 어느새 습기 찬 기차 유리창에 비친 풍경을 묘사하는 작가의 독특한 미의식(美意識) 속으로 깊숙히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독자들에겐 생경스러운 것이다.

 

벌써 세 시간도 전의 일로, 시마무라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왼쪽 검지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 바라보며, 결국 이 손가락만이 지금 만나러 가는 여자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군, 좀더 선명하게 떠올리려고 조바심치면 칠수록 붙잡을 길 없이 희미해지는 불확실한 기억 속에서 이 손가락만은 여자의 감촉으로 여전히 젖은 채, 자신을 먼데 있는 여자에게로 끌어당기는 것 같군, 하고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있다가, 문득 그 손가락으로 유리창에 선을 긋자, 거기에 여자의 한쪽 눈이 또렷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러나 이는 그가 마음을 먼데 두고 있었던 탓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그저 건너편 좌석의 여자가 비쳤던 것뿐이었다. 밖은 땅거미가 깔려 있고 기차 안은 불이 밝혀져 있다. 그래서 유리창이 거울이 된다. 하지만 스팀의 온기에 유리가 완전히 수증기로 젖어 있어 손가락으로 닦을 때가지 그 거울은 없었다.

 

그렇다. 시마무라가 지금 기차를 타고 찾아가려는 눈 마을엔 게이샤로 일하는 고마코가 살고 있었고, 지난 봄 등산철에 우연히 그 마을을 찾았다가 처음 만났던 그녀를 잊지 못해 이번에 다시 찾아가는 중이다. 그런데 시마무라의 건너편 좌석에서 병든 젊은 남자를 간호하는 처녀가 아까부터 그의 주의를 끌었다. 기차에 올라탈 때부터 내내 안색이 파리한 그 남자를 극진하게 보살피느라 여념이 없던 그 처녀의 이름은 요코였다.

 

거울 속에는 저녁 풍경이 흘렀다. 비쳐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 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처녀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커졌을 때, 시마무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12쪽)

 

기차가 그 신호소를 지나고 나서 30분쯤 뒤에 시마무라는 기차역에서 내리는데, 뜻밖에 요코 일행도 같은 역에서 내린다. 이제 이야기가 펼쳐질 무대는 한적한 눈 마을이 거의 전부다. 여기까지만 소개해도 소설의 무대와 등장 인물은 거의 다 밝힌 셈이다. 그만큼 소설은 단촐하다. 주인공 시마무라와 게이샤로 일하는 여주인공 고마코와 눈 마을에서 춤을 가르치는 선생님 댁의 아들과 그 아들을 간호하는 처녀인 요코가 등장인물의 거의 전부나 마찬가지다.

 

시마무라는 오랜만에 다시 찾은 그 마을에서 반갑게 고마코를 만난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녀는 정식 게이샤는 아니었다. 주인공 시마무라는 뚜렷한 직업도 없이 무위도식하는 남자다. 한때는 일본춤을 연구하다가 서양무용 쪽으로 방향을 바꾼 뒤, 서양무용에 관한 서적들과 사진을 수집하거나 서양무용에 대해 글을 쓰는 게 고작이었다.

 

지난 봄, 산이 제일이라면서 혼자 눈 마을로 찾아와 산행을 즐기다가, 이레 만에 온천장으로 내려와서 게이샤를 불렀는데, 그 때 만난 여자가 고마코였다. 그녀는 샤미센과 춤을 가르치는 선생님 댁에서 살고 있다. 정식 게이샤는 아니지만 큰 연회가 있는 경우 더러 부탁받아 춤 두어 가지만 보여주고 돌아오는 처지로 지내는 여자였다.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 시마무라는 화들짝 놀라 앉음새를 고칠 정도로 강한 인상을 받는다.

 

여자의 인상은 믿기 어려울 만큼 깨끗했다. 발가락 뒤 오목한 곳까지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했다.(19쪽)

 

둘이서 처음 만난 때는 신록이 한창일 무렵이었다. 그녀는 도쿄에서 동기(童妓)로 있을 때 몸값을 치르고 나와 일본무용 선생으로 성공할 작정이었는데, 겨우 1년 6개월만에 남편이 죽고 말았다고 했다. 나이는 열아홉 살이라 했다. 시마무라는 그녀와는 '친구 사이로 남고 싶으니까' 다른 게이샤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한다. 양심의 가책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끝낼 수 있는 여자를 원했다. 그녀는 너무 깨끗했고,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를 다른 게이샤와 달리 생각했다.

 

소문을 들으니 고마코는 그녀가 묵고 지내는 선생님 댁의 아들이 장결핵을 앓게 되자 게이샤로 나서서 요양비를 댈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님 댁 아들의 약혼녀라는 소문이 나 있었다. 간호사 지망생이던 요코는 바로 그 병약한 선생님의 아들을 데리러 먼 길을 다녀오던 터였다.

 

고마코가 아들의 약혼녀, 요코가 아들의 새 애인, 그러나 아들이 얼마 못 가 죽는다면, 시마무라의 머리에는 또다시 헛수고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고마코가 약혼자로서의 약속을 끝까지 지킨 것도, 몸을 팔아서까지 요양시킨 것도 모두 헛수고가 아니고 무엇이랴.(55쪽)

 

 

등산을 마치고 온천욕이나 즐기고 떠날 요량이었던 시마무라는 고마코라는 뜻밖의 여자를 만나 금세 친근한 말동무로 가까이 지내지만, '사랑의 헛수고'에 대한 자각 때문인지도 모를 묘한 자제심을 발휘한다. 고마코는 외지에서 찾아든 젊잖은(?) 시마무라에게 몹시 이끌리지만 더는 가까워지지 못하고, 결국 어정쩡한 상태로 기약없이 헤어진다.

 

정확히 199일 만에, 겨울이 되어 눈 마을을 다시 찾은 시마무라는 그 겨울의 풍경에 매료되고, 시도때도 없이 자신이 묵고 있는 여관방을 들락거리는 고마코를 차츰 사랑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내와 자식을 두고 있는 남자가 외딴 시골 마을에서 게이샤로 일하는 고마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갈래요」

 

「갈 필요 없어」

 

힘들어요. 당신은 이제 도쿄로 돌아가세요, 힘들어요」 하고 고마코는 고다쓰 위에 얼굴을 묻었다.

 

 힘들다는 건 여행자에게 깊이 빠져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 때문일까? 아니면 이럴 때 꾹 참고 견뎌야 하는 안타까움 때문일까? 여자의 마음이 여기까지 깊어졌나 보다 하고 시마무라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70쪽)

 

 

맺지 못할 사랑 때문에 서로가 힘겨워할 때 이별 말고 무슨 해결책이 있단 말인가. 시마무라는 다음날 오후 3시 기차로 떠나기로 하였고, 고마코는 기차역까지 배웅을 나간다. 출발 시각 20분을 남겨 놓고 요코가 헐레벌떡 나타난다. 선생님 댁의 아드님이 위급하다는 전갈을 전하러 온 것이다. 발을 동동 구르는 요코와 시마무라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고마코는 한사코 시마무라를 끝까지 배웅한다. '배웅'은 중요하다면서. 그녀가 동기 생활을 위해 도쿄로 팔려갈 때 배웅해 준 유일한 인물이 선생님 댁 아드님이었는데도.

 

「플랫폼에는 들어가지 않을래요. 안녕」 하고 고마코는 대합실 안 창가에 서 있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기차 안에서 바라보니까 초라한 한촌(寒村) 과일 가게의 뿌연 유리상자 속에 이상한 과일이 달랑 하나 잊혀진 채 남은 것 같았다.

 

기차가 움직이자마자 대합실 유리가 빛나고 고마코의 얼굴은 그 빛 속에 확 타오르는가 싶더니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바로 눈 온 아침의 거울 속에서와 똑같은 새빨간 뺨이었다. 시마무라에게는 또 한번 현실과의 이별을 알리는 색이었다.(75쪽)

 

 

시마무라가 다시 그 마을을 찾은 때는 억새가 한창일 무렵이었다. 그 사이에 선생님 댁 아들은 죽었고, 고마코는 거처를 다른 데로 옮겨서 여전히 게이샤로 일하고 있었다. 시마무라가 그 마을에 발을 디딘지도 벌써 3년째였고, 고마코가 그 마을에서 일한 지는 벌써 5년째였다. 요코는 결핵으로 죽은 젊은 남자의 무덤으로 성묘만 다니고 있다고 했다.

 

고마코와 시마무라 사이는 한층 허물없이 가까워졌지만, 늦은 밤이든 이른 새벽이든 시시때때로 내집처럼 시마무라의 방을 찾는 고마코의 발길은 늘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마을이 너무나 좁기 때문이었다. 나쁜 소문이 나더라도 그 마을을 떠나 딴 데로 옮겨 일하면 그만이지만.

 

어느날 문득 고마코는 시마무라에게 고백한다. "힘드니까 돌아가줘요. 이제 입을 옷이 없어요. 당신한테 올 때마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싶지만 이젠 남은 게 없어요. 이건 친구에게 빌린 옷이에요. 나쁜 애죠?" 라면서. 둘 사이는 가까이 하면 할수록 현실적인 여러 장벽은 하나도 변하는 게 없었고, 둘은 차츰 또다시 이별을 예감하기 시작한다.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잊은 듯, 오래 머물렀다. 떠날 수 없어서도, 헤어지기 싫어서도 아닌데, 빈번히 만나러 오는 고마코를 기다리는 것이 어느새 버릇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고마코가 간절히 다가오면 올수록 시마무라는 자신이 과연 살아 있기나 한 건가 하는 가책이 깊어졌다. 이를테면 자신의 쓸쓸함을 지켜보며 그저 가만히 멈춰 서 있는 것뿐이었다. 고마코가 자신에게 빠져드는 것이 시마무라는 이해가 안 되었다. 고마코의 전부가 시마무라에게 전해져 오는데도 불구하고, 고마코에게는 시마무라의 그 무엇도 전해지는 것이 없어 보였다. 시마무라는 공허한 벽에 부딪는 메아리와도 같은 고마코의 소리를, 자신의 가슴 밑바닥으로 눈이 내려 쌓이듯 듣고 있었다. 이러한 시마무라의 자기 본위의 행동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다.

 

눈 내리는 계절을 재촉하는 화로에 기대어 있자니, 시마무리는 이번에 돌아가면 이제 결코 이 온천에 다시 올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여관 주인이 특별히 꺼내준 교토 산(産) 옛 쇠주전자에서 부드러운 솔바람 소리가 났다. 꽃이며 새가 은으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솔바람 소리는 두 가지가 겹쳐, 가깝고 먼 것을 구별해 낼 수 있었다. 또한 멀리서 들리는 솔바람 소리 저편에서는 작은 방울 소리가 아련히 울려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시마무라는 쇠주전자에 귀를 가까이 대고 방울 소리를 들었다. 방울이 울려대는 언저리 저 멀리, 방울 소리만큼 종종걸음치며 다가오는 고마코의 자그마한 발을 시마무라는 언뜻 보았다. 시마무라는 깜짝 놀라, 마침내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133∼134쪽)

 

 

시마무라가 고마코를 따돌리고 홀로 이웃마을을 구경하고 돌아온 날 밤, 마을에서 느닷없이 화재 경보 종소리가 울린다. 평소에 극장으로 쓰던 누에고치 창고에서 불이 난 것이었다. 마침 그날 저녁에 영화 상영이 있었던 모양이다. 시마무라와 고마코는 여관에 머물던 사람들과 함께 불구경을 하다가 서둘러 화재 현장으로 내달린다. 그 와중에도,

 

 

「은하수예요. 예쁘죠?」

 

고마코는 중얼거리고는 하늘을 쳐다보며 다시 달려나갔다.

 

아아, 은하수, 하고 시마무라도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순간, 은하수 속으로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은하수의 환한 빛이 시마무라를 끌어올릴 듯 가까웠다. 방랑중이던 바쇼가 거친 바다 위에서 본 것도 이처럼 선명하고 거대한 은하수였을까. 은하수는 밤의 대지를 알몸으로 감싸안으려는 양, 바로 지척에 내려와 있었다. 두렵도록 요염하다. 시마무라는 자신의 작은 그림자가 지상에서 거꾸로 은하수에 비춰지는 느낌이었다. 은하수에 가득한 별 하나하나가 또렷이 보일 뿐 아니라, 군데군대 광운(光雲)의 은가루조차 알알이 눈에 띌 만큼 청명한 하늘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은하수의 깊이가 시선을 빨아들였다.(142∼143쪽)

 

 

불길이 이는 쪽으로 달려가면서도 둘은 어디까지 함께 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불난 곳까지 당신을 데려가면' 마을 사람들한테 놀림을 받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불길이 치솟는 고치 창고로 함께 내달리는 동안에도 시마무라와 고마코는 여전히 은하수가 빛나는 하늘 아래에서 발 밑이 땅으로부터 살짝 들떠 있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시마무라는 "매일 밤 이런 은하수인가?" 하고 고마코에게 묻는다.

 

올려다보고 있으니 은하수는 다시 이 대지를 끌어안으려 내려오는 듯했다.

 

거대한 오로라처럼 은하수는 시마무라의 몸을 적시며 흘러 마치 땅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도 주었다. 고요하고 차가운 쓸쓸함과 동시에 뭔가 요염한 경이로움을 띠고도 있었다.

 

「당신이 가고 나면 전 성실하게 살 거예요」 라고 말하며 걸음을 옮긴 고마코는 흐트러진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대여섯 걸음 가다가 뒤돌아보았다.

 

「왜 그러세요? 싫어요」

 

시마무라는 그저 서 있기만 했다.(145∼146쪽)

 

 

서로 떨어진 채 마을 사람들 틈에 섞여 타오르는 불을 구경하는 동안, 불길 속에서 여자의 몸이 '인형처럼'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고치 창고는 극장으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2층에 나즈막한 객석을 갖추고 있었는데, 거기서 어떤 여자가 실신한 채 아래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추락한 여자가 요코라는 사실을 시마무라가 안 것도, 사람들이 앗 하고 숨죽인 것도, 고마코가 아앗 하고 외친 것도 거의 동시였다.

 

요코는 하늘을 보며 떨어졌다. …… 시마무라는 왠지 죽음은 떠올리지 않았으나, 요코의 내부에서 생명이 변형되는 순간임을 느꼈다.

 

요코가 떨어진 2층 관람석에서 나무기둥이 두세 개 무너져내려 요코의 얼굴 위에서 타올랐다. 요코는 그 찌르듯 아름다운 눈을 감고 있었다. 턱을 내밀어 목선이 길었다. 창백한 얼굴 위로 불빛이 흔들리며 지나갔다.

 

몇 해 전인가, 시마무라가 이 온천장으로 고마코를 만나러 오는 기차 안에서 요코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커졌을 때의 모습을 문득 떠올리고, 시마무라는 다시 가슴이 떨렸다. 일시에 고마코와 함께한 시간들이 환히 비쳐진 것 같았다. 뭔가 애절한 고통과 비애도 여기에 있었다.(150∼151쪽)

 

 

고마코는 게이샤의 긴 옷자락을 끌며 비틀거리듯 달려들어 요코를 끌어안는다. 정신없이 울부짓는 고마코에게로 다가가던 시마무라는 요코를 받아 안으려는 사내들에 떠밀려 휘청인다. 그때 발에 힘을 주며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시마무라는 쏴아 하고 은하수가 자신의 가슴 속으로 쏟아져 흘러드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소설은 마무리된다.

 

『설국』이라는 소설은 사실 제목만 들어도 누구나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은 눈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환상적인 러브 스토리'를 떠올릴 만큼, 그 자체로 이미 비현실적이거나 일종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나 『설국』은 작가 자신이 직접 소설의 배경이 된 온천장 여관에 머무르며 집필했고, 무려 13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생각날 때마다 이어 쓴 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시킨 만큼 플롯이 모호할 뿐 핍진성이 부족한 작품은 아니다.

 

한 번만 읽고서는 소설을 온전히 체감하기 어려워 잇따라 두 번째로 읽는 동안에, 가와바타 특유의 '아름다움과 슬픔이 절묘하게 혼재된' 느낌이 소설 속에 얼마나 알알이 박혀 있는지를 새삼 느꼈다. 어떤 비평가는 『설국』에 짙게 스며있는 '아름다움과 슬픔이 혼재된 느낌'을 두고 '성욕과 상실감 사이의 긴장'이 느껴진다고도 보았다. 본질적으로 '헛수고'일 수밖에 없는 남녀 사이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로맨스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눈의 고장'에서 펼쳐진다는 건 생각할수록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긴긴 겨울이면 스무 자씩이나 눈이 쌓여 기차도 다니지 못할 정도로 아득한 별천지로 변모했다가, 온갖 생명이 약동하는 봄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마는, 마법처럼 놀라운 힘을 지닌 새하얀 눈이야말로 '허무한 아름다움'의 상징일 테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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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슬램 2018-12-10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가운 겨울날,

그랜드슬램 2018-12-10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춥다는 것은 세상의 편견,

그랜드슬램 2018-12-10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편견을 건너 글의 행간을 생각해봅니다.

그랜드슬램 2018-12-10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알고있는 게 과엔 본질을 뚫고 정확히 바라보는건지를오ㅡ?

그랜드슬램 2018-12-10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맥주가 나오고 치킨이 준비되는 재건축 건물앞에서 한해의 무언가를 곱씹어 보는데 투명한것은 단 한가지뿐입니다.,터널을 지나 눈 다음에 나올 그무엇인가를 홀로 생각해봅니다. 문학이 아름다운건 이토록 다양한 각도로 보는 귀한 독자가 있는 것은 아니지 ... 독서의 의미를 생각해봅니다. 죄송한 말씀은 취중이라 글에 두서가 없어서,미안하지만 이런 제가 조금 귀엽군요 글 감사합니다^^

oren 2018-12-10 22:45   좋아요 0 | URL
마침, 가와바타의 『설국』에서도 ‘두서없는 대화‘가 엄청 많이 등장한답니다. ㅎㅎㅎ
그리고, 취중댓글이라 그런지 느낌이 확실히 귀엽습니다.^^
 

 

동화만큼 널리 퍼져 읽히는 이야기도 드물다. 이야기가 대체로 짧은 데다가 한번 들으면 좀처럼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동화는 아이들만의 전유물도 아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무한한 상상력과 끊임없는 호기심 때문에 언제나 동화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든다. 그 동화책을 읽는 독자가 아이들 자신이 되었든, 아니면 온갖 다양한 목소리와 몸짓까지 섞어가며 과장되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느라 애쓰는 어른이 되었든 상관없이.

 

그런데 가끔씩은 명백히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정작 어른들을 위해 쓴 작품들도 그리 드물지는 않다. 『걸리버 여행기』나 『로빈슨 크루소』, 혹은 『돈키호테』와 같은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들은 세계 명작 동화 목록에서도 결코 빠지지 않는 걸작이지만, 집필 동기나 작품의 성격으로 보아서는 어른들을 위해 쓰인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흰 토끼와 짝퉁 거북이 등장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어떨까? 이 유명한 이야기는 방금 내세운 작품들과 도리어 정반대의 길을 걷는 아주 특이한 작품이다. 틀림없이 어린이를 위해 쓰인 동화지만 어른들이 읽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으며, 어른들이 일부러 찾아 읽을 정도로 독특한 깊이를 지닌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마치 『어린 왕자』처럼 어른들한테까지 심오한 철학적 깨달음을 던져 주는 교훈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도대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왜 이처럼 독특한 지위를 지닌 채 아이들과 어른을 동시에 오랫동안 매료시키는 것일까?

 

 - 찰스 러트위지 도지슨(1832년∼1898년)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이유는 우선 작가로부터 찾을 수 있지 싶다. 루이스 캐럴은 동화 작가였지만 정작 본업은 수학 교수였다. 루이스 캐럴은 필명이었고 본명은 찰스 러트위지 도지슨이었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졸업후 자신이 다녔던 옥스퍼드 대학의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서 수학 교수를 거쳐 학장까지 지냈다. 그는 평생 숫총각으로 지냈을 만큼 수줍음이 많으면서도 예의바른 사람이었고, 유쾌하면서도 수학을 사랑했던 따분한 학자풍의 교수였다. 그는 변덕이 심하면서도 여성스럽고 친절했고, 소아성애자로 의심받을 만큼 어린 소녀들을 특별히 좋아했다. 이런 독특한 배경을 지닌 작가가 앨리스 리델이라는 실존했던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쓴 동화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고, 작가는 이 작품 속에 자신이 지녔던 독특한 '수학의 세계'까지 은밀히 주입시켰다.

 

그의 작품이 어린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의 관심을 유독 붙잡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의 편지나 일기에는 프로이트나 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날카로운 통찰이 담겨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그는 이 작품이 쓰여진 150년 전보다 오늘날 훨씬 더 주목을 받는 작가가 되었다.

 

그는 모든 나라의 보통 사람들을 즐겁게 할 뿐만 아니라 최고의 지식인들도 매혹시켰다. 가령 에드먼드 윌슨, W.H.오든, 버지니아 울프,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버트런드 러셀, 아서 스탠리 에딩턴 같은 논리학자와 과학자들, 그 외에 무수한 철학자, 언어학자, 정신분석학자들이 앨리스를 사랑했다.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 독서 계획』

 

 

평범한 독자들이 앨리스의 모험 속에 담긴 작가의 '수학에 대한 세계관'까지 두루 헤아리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이 책에는 무수한 전문 연구자들이 방대한 주석이나 새로운 해석을 끊임없이 덧붙여 왔다. 수학자 도지슨이란 정체성에 기초한 작품 분석은 20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니, 그에 대한 관심이 21세기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얼마나 뜨거울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시간과 시간이 처한 곤경! 수학자 찰스 도지슨은 동화 작가 루이스 캐럴이었고, 그 경계를 횡단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의 속성이야말로 논리와 더불어 가능한 세계들을 구상하는 데서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문학적 장치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죠. 동사의 시제 표현, 구어적 요소, 꿈이라는 설정, 게임, 말장난(PUN)과 수수께끼, 난센스를 통해 다양한 계산과 과정이 전개되고 가세합니다. 시간은 확대되고, 연장되고, 비틀리고, 굴절하고, 팽창합니다. 그리고 축합되죠. 엘리스를 지하의 '놀라운 세상(Wonderland)'으로 인도하는 것은 다름 아닌 흰 토끼의 회중시계입니다. …… 결국 물리학자들이 알려주듯이, 시간은 은밀한 방식으로 공간에 파묻혀, 공간과 결부돼 있었던 것이죠. 프리먼 다이슨이 말한 캐럴 우주 말입니다. 캐럴은 수학자였고, 엄격한 유클리드주의자였습니다. 그는 환상문학 작가였고, 이렇게 공상합니다. 토끼 굴 아래로 내려가면, 저 너머에 다른 세상이, 다른 공간이, 다른 시간이 존재할 거라고 말입니다.(9∼10쪽)

 

 - 루이스 캐럴 지음, 정병선 옮김, 『주석과 함께 읽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존 테니얼의 삽화, <시계를 보고 있는 흰 토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모험심 가득한 여주인공 앨리스를 살피는 일이야말로 이 작품이 탄생한 배경을 알아보는 일이다. 1862년 어느 날, 도지슨(루이스 캐럴)은 세 명의 어린 소녀들을 데리고 템스 강 상류로 보트 여행을 떠난다. 세 아이들은 옥스퍼드 대학교 부총장 겸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의 학장이었던 헨리 조지 리델의 딸들이었다. 그들은 각각 열세 살, 열 살, 여덟 살이었는데, 열 살배기 소녀의 이름이 앨리스 플레전스 리델이었다. 소녀들은 보트 여행을 하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아저씨한테 조르고, 도지슨은 앨리스라는 아이가 모험에 나서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급기야 앨리스 리델은 그 이야기를 책으로 써달라고 부탁하고, 도지슨은 정말로 2년 만에 손으로 직접 쓴 이야기를 앨리스에게 선물한다. 그 수고본의 제목이 《앨리스의 지하 세계 모험》이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865년에 도지슨은 루이스 캐럴이라는 필명으로 그 책을 대폭 개편해서 《앨리스의 놀라운 세상 모험》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번역으로 굳어진 이야기는 이렇게 탄생했다.

 

 - 도지슨이 직접 찍은 앨리스 리델의 7세 때 모습(출처:위키 백과).

    그녀는 82세까지 살았고(할머니가 되었고), 1934년에 죽었다.

    위키 백과를 살펴 보면 앨리스에 대한 다양한 사진과 기록들이 줄줄 나온다.

 

앨리스는 생각했다. '커졌다 작아졌다 하지 않아도 되고, 쥐나 토끼한테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집이 좋았어. 토끼 굴로 글어오는 게 아니었어. 하지만 그래도, 참말이지 이상한 곳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거지! 동화를 읽을 때도 그런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여기는 마치 동화 속 세상 같아! 내가 나오는 책을 써야 해. 반드시! 크면 한 권 꼭 쓰고 말 거야. 하지만 맙소사, 벌써 다 커버렸잖아. 게다가 여기서는 더 클 여지도 없어.' 앨리스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슬펐다.

 

앨리스는 계속해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게 되는 걸까? 지금보다 말이야. 그렇다면 다행이지. 할머니가 되지 않는 거니까. 하지만 그러면 맨날 공부를 해야 해! 으, 그건 싫은데!"(85∼86쪽)

 

 - 루이스 캐럴 지음, 정병선 옮김, 『주석과 함께 읽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시간과 공간들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실제 세계와는 아주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앨리스가 모험을 겪었던 세상이 앨리스가 살던 현실 세계와 완전히 동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앨리스는 흰 토끼나 겨울잠쥐, 혹은 체셔 고양이나 털벌레 등과 다양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끊임없이 '학교에 다니는 어린 소녀'로서의 본분(?)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밀린 숙제를 떠올린다거나 수업시간에 제때 도착하지 못할까봐 늘상 걱정하는 어린이처럼. 그것은 마치 꿈을 꾸면서도 '현실 세계에서의 부채 의식'을 좀처럼 떨치지 못하는 어린 아이의 심정과도 유사하다. 어릴 때 무척이나 자주 꾸었던 꿈들의 아련한 추억들을 앨리스가 좌충우돌하는 원더랜드에서 재발견하는 일은 어른 독자들에겐 여간 특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루이스 캐럴이 아니었다면 어느 누가 그런 꿈들의 편린들을 그토록 쉽게 되살린단 말인가.

 

눈이 빨간 흰 토끼를 따라 토끼 굴로 들어간 앨리스는 '빠져나올 방법은 생각도 해보지 않고' 낯선 세상으로 빠져든다. 자신의 몸집에 비해 너무 작은 틈새로 내다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에 들어가지 못해 안달하다가도 어느새 이상한 음료를 마신 후에 몸집이 너무나 작아져서 자신이 흘린 '눈물의 소금 바다'에 빠져 쥐와 함께 그 속을 허우적거린다. 소금 바다에서 헤엄치다가 만난 쥐와 함께 뭍으로 올라온 뒤로는 여러 동물들과 함께 몸을 말리는 방법을 논의한다. 뭍으로 오른 캐릭터들은 쥐를 비롯해서 오리, 도도, 진홍앵무, 새끼 독수리 등이었다. 어느새 그들은 코커스 경주에 나서고, 갑자기 달리기 경주를 멈추고, 모두가 승자라면서 다같이 상을 받아야 한다면서 소란을 피운다. 앨리스가 자그마한 틈새로 내다보았던 '멋진 정원'에 대한 욕망들은 어느새 까맣게 잊혀지고, 앨리스는 흰 토끼를 다시 만난다.

 

바로 그때 토끼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앨리스를 인지했다. 앨리스의 귀에 성난 어조의 외침이 들려왔다. "메리 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당장 집으로 가서 장갑과 부채를 가져와! 어서, 냉큼!" 앨리스는 깜짝 놀랐고, 토끼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부리나케 뛰었다. 토끼가 사람을 잘못 알아본 것이라고 말해줄 생각조차 안 든 것이다.(82쪽)

 

 - 루이스 캐럴 지음, 정병선 옮김, 『주석과 함께 읽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나의 생각)

얼마나 우스운가! 앨리스가 토끼의 사정부터 미리 살피다니! 그리고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부리나케 '토끼의 심부름'을 수행하러 무작정 달려나가는 모습이라니! 마음씨 착한 앨리스의 '본연의 모습'을 이토록 재미있게 묘사할 수 있다니! 물론 앨리스는 자신의 행동을 뒤늦게 후회한다. 이어지는 대목처럼.

 

앨리스는 달려가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토끼가 날 제 하녀로 아는 것 같아. 내가 다른 사람인 걸 알게 되면 얼마나 놀랄까! 하지만 일단은 부채와 장갑을 갖다주는 게 좋겠어. 찾을 수만 있다면 말야." 바로 그때 작고 아기자기한 집 한 채가 앨리스의 눈에 들어왔다. …… (82쪽)

 

근심 많은 흰 토끼를 위해 부채와 장갑을 찾으러 갔던 앨리스는 거기서 눈에 띈 음료를 (이제는 모험심이 발동해서 부푼 기대를 안고) 마신 뒤에 방 안을 꽉 채울 정도로 몸집이 불어났다가, 방 안에 널린 자갈돌이 마룻바닥에서 케이크로 바뀌는 바람에 그걸 먹고 다시 몸이 작아져 그 집을 빠져 나온다. 울창한 숲에 다다른 앨리스는 혼자 중얼거린다. "맨 먼저 할 일은, 원래 크기로 돌아가는 거야. 그 다음에는 어여쁜 정원으로 가야 하구." 바로 그때 거대한 강아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앨리스를 쳐다본다. 앨리스의 몸집이 어느새 '버섯만큼' 작게 변했던 것이다. 이처럼 원더랜드에서는 새로운 캐릭터와 공간들이 뚜렷한 방향성도 없이 끊임없이 새롭게 펼쳐진다. 그곳에서는 흡사 꿈처럼 비논리적인 상황이 현실을 지배하는 논리와 기이하게 뒤섞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관통하는 또다른 핵심은 넌센스이다. 현실의 세계가 커먼 센스, 즉 상식이 통하는 세계라면, 원더랜드는 '터무니 없는 말이나 생각'이라는 의미의 넌센스가 정상적인 것처럼 통하는 세계일 수밖에 없다. 앨리스는 모험적이면서도 당돌하고 당당한 소녀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토끼나 쥐, 털벌레나 고양이와도 얼마든지 곧바로(?) 대화가 통할 만큼 머리가 몹시 말랑말랑한 어린 소녀였다. 온통 넌센스로 가득한 원더랜드는 '따분한 현실 세계'에 지겨워 하던 앨리스에게는 (내심 불안하긴 하지만 이미 별탈이 없을 거라는 지레짐작까지 하면서) 마음껏 활보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가득한 세계'이면서 동시에 몹시도 가변성으로 가득 찬 흥미 넘치는 넌센스의 세계였다. 그러니 앨리스가 넌센스로 가득한 '그들만의 대화' 앞에서 매번 당황하고 동요할 까닭은 없었다. 모험을 좋아했던 앨리스는 넌센스와 무의미에 능히 대응하고 수용할 만큼 충분히 어리기도 했던 것이다.

 

 

"여기는 어떤 사람들이 살아?"

 

"저기로 가면 ……" 고양이가 오른발을 휘저으며 말했다. "이상한 모자가 살고 있고, 또 저기로 가면 ……"(이번에는 왼쪽 발을 흔들면서) "삼월이(March Hare, 3월 토끼, 뜀박질 토끼)를 만날 수 있지. 아무 데로나 가. 다 미쳤거든."

 

"미치광이들은 싫어." 앨리스가 말했다.

 

"잘 안 될걸." 고양이가 말했다. "여기는 다 제정신이 아니야. 나도 미쳤고, 너도 미쳤지."

 

"내가 미쳤다는 걸 어떻게 알지?" 앨리스가 물었다.

 

"틀림없는 사실이야." 고양이가 대꾸했다. "안 그러면 네가 여기 왔겠어?"

 

앨리스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이렇게 말을 더했다. "네가 미쳤다는 건 어떻게 아는데?"

 

"우선은 …… 개는 미치지 않았어. 인정해?"

 

"응 그런 것 같아."

 

"그러니까 개는 화가 나면 으르렁거리고,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흔들지. 하지만 난, 나는 기분이 좋으면 으르렁거리고, 화가 나면 꼬리를 흔들어. 내가 미쳤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지."(133쪽)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이상하리만큼 나이를 먹어서 읽은 독자로서 마지막으로 덧붙일 게 아직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이 진귀한 동화가 태어날 무렵을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으로 그려낸 작가의 서문 일부다.

 

 

찬란한 오후

느긋한 주항(航).

두 개의 노에 얹힌 가녀린 팔,

변변찮은 흉내.

쓸데없는 손짓.

그렇게 떠가는 우리의 소풍.

 

우악스런 삼총사가

그 꿈결 같던 오후에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지.

노를 젓느라 힘들어 죽겠는 아저씨한테.

허나 연약한 사람 한 명의 목소리가

셋의 아우성을 무슨 수로 당하리요?

 

프리마(Prima)의 고압적인 명령,

"시작하세요!"

세쿤다(Secunda)의 바람은,

"짱 재미있는 걸로!"

허나, 테르티아(Tertia)는 수시로 끼어드는 방해꾼.

 

(중략)

 

놀라운 세상 이야기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천천히, 느리게, 하나, 그리고 또 하나.

아저씬 기묘하고 기발한 사건을 지어냈고,

이제 그 이야기를 내놓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 행복한 탐험대원.

그리고, 지는 해.

 

세상의 모든 앨리스여!

이 놀라운 세상 모험을 즐겨주세요.

어린 시절의 꿈은 신비한 기억으로 저장되고,

이 이야기도 살포시 거기 놓이겠지요.

먼 나라에서 꺾어 온 꽃으로 만든,

순례자의 시든 화환처럼 말입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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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11-21 2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렌 님의 글을 읽고 나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동화 한 편 읽은 것 같은 느낌입니다. 어른을 위한 동화요...
동화는 저처럼 상상력이 빈곤한 사람이 읽으면 좋은 장르예요. 기발해서 배울 게 많죠.


oren 2018-11-21 23:31   좋아요 0 | URL
어린이를 위해 쓴 동화를 어른이 된 지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읽는 느낌이야말로 ‘갑자기 원더랜드에 떨어진 어른이 느낄 법한 이상한 감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더군요. 어른이 되어서 동화책을 읽다 보니, 아이처럼 책 속 이야기에 온전히 풍덩 빠져 들지 못하고, 툭하면 ‘어른이라면 이런 유치한 생각은 하지 않을 꺼야‘ 라고 중얼거리게 되니까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때문에 새삼 깨닫게 된 것도 있었어요. 아이가 어른이 되고픈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어른이 되면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요. ㅎㅎ
 
캔터베리 이야기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15
제프리 초서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지성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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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Homer), 초서(Chaucer), 그리고 세익스피어(Shakespeare)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전달 매체가 무엇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스토리와 그 스토리를 전달하는 기술이었다."

 - 마이크 아이스너

 

 * * *

 

 

 - 제프리 초서(출처 : 위키백과)

 

『캔터베리 이야기』는 중세 영문학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이 작품을 쓴 제프리 초서(1342∼1400)는 일부 문학비평가들로부터 영문학 사상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위대한 작가로 인정받을 정도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겐 너무나 멀게만 느껴진다. 왜 그럴까?

 

이 유명한 작품은 중세를 대표하는 걸작들인 단테(1265∼1321)의 『신곡』이나 나관중(1330?~1400)의 『삼국지연의』 보다는 조금 뒤늦게 나왔지만, 누구에게나 익숙한 이야기인『천일야화』(1500년경)나 근대 소설의 효시라 불리는 라블레(1483∼1553)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보다는 훨씬 앞서 나왔다. 말 그대로 까마득한 옛날에 쓰여진 이야기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역사에 다시 한번 슬쩍 비춰보면 이 작품은 일반적인 통념보다 훨씬 더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진다. 대략 1387년부터 집필되기 시작해서 작가가 죽은 해인 1400년까지도 막바지 작업이 이뤄졌던 작품이니, 조선이 건국되기도 전에 쓰여지고, 한글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세상에 널리 퍼져 읽혔던 작품인 셈이다.

 

이 오래된 중세의 이야기가 서양 문학사에서 우뚝 솟아오른 이유는 여럿이지만,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이유 하나는 아주 명백하다. 그때까지 존재했던 위대한 이야기들이 주로 '신들의 이야기'였다면, 초서의 이야기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이 확연히 달랐던 것이다. 가장 대비되는 작품은 물론 단테의 『신곡』이었다. 그 위대한 서사시가 '신성한 코미디'였다면, 초서의 서사시는 '인간의 코미디'였다. 단테가 신을 사랑했다면, 초서는 불완전하고 죄 많은 인간을 사랑했다. 단테는 <지옥편>에서 <천국편>에 이르는 여행을 통해 파멸, 정화(淨化), 지복에 이르는 길들을 묘사했지만, 초서는 캔터베리 대성당으로 이르는 순례 여행을 통해 인간 삶의 복잡다단한 이야기에 집중했다.

 

단테의 여행이 상상 속의 상징적인 세계로의 여행이었다면, 초서의 여행은 14세기에 30여 명의 순례객들이 영국의 질퍽한 도로 위로 말을 타고 떠나며 나눴던 실제 세계에서의 여행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했다. 초서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야기의 화자들은 런던 교외에 실재했을 법한 타바드라는 여관에서 순례 여행을 시작하며, 최종 목적지인 캔터베리 대성당이라는 실재하는 장소에서 끝난다.

 

탁월한 이야기꾼이었던 제프리 초서와 결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인물은 셰익스피어였다. 영문학 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히는 셰익스피어(1564∼1616)는 초서보다는 훨씬 나중에 태어났지만 그로부터 아주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오늘날 대부분의 독자들은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는 물론이고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들까지도 산문으로 변역된 상태로 읽는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태생적으로 시인이었고, 그들이 남긴 작품들은 대부분 운문시로 쓰였다. 영어로 쓰인 최초의 걸작이자 더군다나 운문으로 쓰인 탁월한 이야기들을 셰익스피어가 그냥 지나칠 리는 만무했다. 셰익스피어는 『캔터베리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이야기들을 참고하여 그보다 훨씬 세련되고도 독창적인 이야기들을 무수히 새로 지어냈다.

 

초서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화자로 등장하는 순례자들의 다양한 신분 만큼이나 각양각색이지만 그렇다고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초서는 주로 고대 로마의 역사가인 티투스 리비우스가 쓴 『로마사』, 플루타르코스가 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혹은 키케로나 세네카의 여러 작품들에서 인물이나 이야기를 끌어온 경우가 적지 않은데, 초서가 두루 섭렵했던 이들 작가와 작품들이야말로 셰익스피어도 똑같이 사랑했던 작가들이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형으로 알려진 <퓌라무스와 티스베 이야기>가 오비디우스의 작품에서뿐 아니라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도 거듭 등장하며, 티투스 리비우스와 플루타르코스가 비중있게 다룬 고대 로마 시대의 '루크레티아 성폭행 사건'이 『캔터베리 이야기』 에 다시 등장하고, 셰익스피어에 의해 설화시(說話詩)인 「루크리스의 능욕」으로 재탄생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캔터베리 이야기』에 담긴 많은 이야기들은 그보다 앞선 작가들인 페트라르카와 복카치오와 단테의 영향을 엿볼 수 있으며, 초서 이후에 등장한 작가들 중엔 셰익스피어뿐만 아니라 몽테뉴(1533∼1592)와 세르반테스(1547∼1616)에게 끼친 영향들도 적잖게 발견되는 듯하다. 예를 들어, 초서의 이야기 가운데 아내의 정조를 극단적으로 시험하는 이야기인 <옥스퍼드 서생의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나중에 쓰인 『돈키호테』에 담긴 액자 소설 가운데 하나인 <당치 않은 호기심을 가진 자에 대한 이야기>와 몹시 닮았다. 그런데 아내의 정조를 시험하는 이 두 이야기의 진정한 모태는 오비디우스의 『변신』에 담긴 <케팔루스와 프로크리스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초서와 세르반테스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기 보다는 도리어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로부터 직접적으로 영양분을 빨아들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초서는 생애의 대부분을 왕실 사업의 감독관이나 왕의 경제 사절 등 고위 공무원으로 지냈는데, 그의 삶의 일부분은 셰익스피어의 역사극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자못 흥미롭다. 초서는 젊어서 한 때 영국왕 리처드 2세와 프랑스 공주 마리의 결혼을 위해 수 차례에 걸쳐 프랑스를 다녀온 적도 있으며, 초서의 아내는 랭커스터 공작(존 오브 곤트)의 부인 밑에서 일하기도 했다. 랭커스터 가(家)의 에드워드 3세(1377년 사망)의 셋째 아들이 바로 랭커스터 공작이었고, 그의 맏형(에드워드, 검은 갑주의 왕자)의 아들이 당시 국왕이었던 리처드 2세(1377∼1399년 재위, 1400년 살해)였다.

 

랭커스터 공작의 아들은 영국사에서도 빛나는 인물인 헨리 볼링브로크였다.(그는 셰익스피어가 창조해 낸 가장 흥미로운 인물인 '폴스타프'와 절친일 정도로 청년 시절에 온갖 기행을 일삼았지만 즉위 이후에는 국왕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명군이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국왕 리처드 2세는 나약하고 무능했다. 국왕인 어린 조카보다 더 막강한 힘을 지닌 랭커스터 공작은 언제나 늠름했던 그의 아들 헨리 왕자와 함께 언제나 요주의 인물이었다. 늘 왕위에 불안을 느낀 리처드 2세는 결국 헨리를 프랑스로 추방시키지만, 훗날 때맞춰 씩씩하게 영국으로 귀환한 헨리는 무능한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다. 셰익스피어가 쓴 역사극 열 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 바로 '헨리 볼링브로크의 영웅적인 일대기'를 극화한 《헨리 4세》이고, 그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끝에 감옥에서 비참하게 살해된 '리처드 2세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그린 《리처드 2세》또한 그에 못잖게 인기있는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셰익스피어와 초서 사이에 놓인 유별난 인연을 새삼 헤아려 살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쯤에서 잠깐 리처드 2세 때문에 영국에서 추방당하는 헨리 볼링브로크와,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등지게 된 아들에게 따스하고도 지혜 넘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친 랭커스터 공작(존 오브 곤트) 사이에 있었던 대화 장면을 셰익스피어의 명대사로 잠깐 감상하고 넘어가자.

 

존 오브 곤트

 

태양이 내려 쪼이는 장소는 모두가 다

현자에겐 항구요 아늑한 정박지니라.

곤경에 처해서는 이렇게 생각해라 ㅡ

곤경처럼 도움이 되는 것 또 없다고.

전하께서 너를 추방했다 생각지 말고, 네가 전하를

멀리한다고 생각해라. 괴로움을 심약하게 받아들이면,

괴로움은 한층 더 무겁게 짓누르는 법.

가거라. 영예를 쟁취하라고 내 너를 보내는 것 ㅡ

전하께서 너를 추방하심이 아니다. 아니면,

생명을 삼키는 역병이 대기 중에 맴돌아,

네가 신선한 풍토를 찾아 도피한다 생각하거라.

네가 무엇을 값진 것으로 여기든, 네가 가는 곳에

그것이 있는 것이지, 그것을 뒤에 남긴다 생각 마라.

지저귀는 새들을 악사들로 여기고,

네가 밟는 초원을 골풀 깔린 접견실로,

꽃들은 아리따운 여인들로, 그리고 네 발걸음은

흥겨운 무도의 율동이나 춤으로 여기거라.

이빨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슬픔도 그걸 조소하고

가볍게 여기는 자를 몰 힘이 약해지나니.

 

 -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제1막 제3장> 중에서

 

초서와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치고 다시 『캔터베리 이야기』로 되돌아 오자. 이 방대한 중세의 이야기는 캔터베리 대성당에 안치된 성인(聖人) 토마스 베켓을 참배하러 영국 각지에서 모인 다양한 신분의 순례객들이 차례로 화자로 등장하는 게 가장 큰 특색이다. 그런데 캔터베리는 어떻게 당대 최고의 순례지가 되었을까.

 

캔터베리 대성당의 대주교였던 토머스 베켓은 1170년에 헨리 2세의 측근이었던 '4인의 기사들'에 의해 살해된다. 국왕의 권력과 교회 권력 사이에 빚어진 극심한 갈등 때문에 결국 토머스 대주교가 국왕에 의해 살해된 것이었다. 그가 죽자, 많은 사람들이 제단 위로 승천하는 기적을 보았고, 교황은 그를 성인으로 시성한다. 훗날, 대주교가 헨리 2세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로마는 국왕에게 캔터베리로 순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국왕은 회개자의 옷을 걸치고 맨발로 순례를 떠나 캔터베리 대성당에 모인 모든 주교들로부터 채찍의 형벌을 받으며 공개적으로 참회한다. 그후 모든 영국 군주들은 토머스의 무덤으로 순례를 하게 되고, 토머스 성인은 영국 최고의 성인이 된다.

 

초서가 살던 시대의 캔터베리는 로마나 예루살렘 혹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못지 않게 최고의 순례지였다. 그러니 런던에서 대략 56 마일 정도 떨어진 캔터베리로 순례를 떠나는 사람들은 쉽게 구경할 수 있었고, 그들은 온통 구덩이가 패이고 수레바퀴 자국으로 가득한 질퍽한 길을 말이나 나귀를 타고, 혹은 걸어서 순례에 나섰다. 물론 그들은 도중에 수많은 거지와 사기꾼들과 싸워야 했고, 가짜 수도사들이나 창녀나 구경꾼들한테도 시달렸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레 무리를 지어 함께 순례에 나서기도 했다.

 

초서가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다양한 인물들을 화자로 등장시켜 제각기 서로 다른 독특한 이야기를 펼치는 이유 또한 영국의 방방곡곡에서 모인 순례자들이 런던 근교 서더크의 타바드 여관에 모여 다함께 무리를 지어 순례를 떠난다는 설정 때문이었다. 그렇게 모인 순례자들은 모두 33명에 이르렀고, 이 속에는 작가인 초서와 타바드 여관 주인까지도 포함된다. 그들은 머나먼 순례길을 떠나기에 앞서 흥미로운 내기를 한다. 순례를 떠나 목적지인 캔터베리까지 갔다가 되돌아 오는 동안 각자 두 가지씩 재미있는 이야기를 서로에게 들려주자는 것이다. 순례 여행이 따분하지 않고 훨씬 더 재미있도록. 물론 그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에게는 모두가 크게 한 턱 쏘기로 합의가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순례자들의 '길 위의 이야기'가 바로 『캔터베리 이야기』를 구성한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작가인 초서의 이야기를 포함하더라도 모두 24편에 불과(?)하므로 당초의 웅대한 계획에는 턱없이 못 미치는 미완성작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화자들은 순례를 가는 길에 두 가지, 오는 길에 두 가지씩, 모두 네 가지의 이야기를 하기로 약속했고, 실제로 당초의 계획대로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 작가가 오래도록 살았더라면 이 이야기는 무려 128개에 이르는 실로 방대한 이야기가 될 뻔했다.(32명×4개씩=128개)

 

당초 계획의 1/5에 불과한 이야기만 담겼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초서가 등장시킨 화자들인 순례자들의 신분이나 옷차림만 하더라도 너무나 각양각색이고, 그들이 펼쳐내는 이야기 가운데는 지루한 설교조의 <본당신부의 이야기> 정도만 빼놓고는 모두 흥미롭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우연히 모인 이 순례자들은 영국의 방방곡곡에서 몰려든 사람들이다. 가령 배스의 여인은 서머싯셔, 학생은 옥스퍼드, 청지기는 노퍽, 요리사는 런던, 소환리는 링컨셔, 선장은 데번셔 출신이다. 이렇게 출신 지역이 다르다는 것 이외에도, 이 순례자들의 사회적 신분 역시 각각이다. 똥통을 수없이 나르는 농부의 초라한 행색은 기사의 위대한 업적과 대비된다. 또한 왕 앞에서조차 모자를 벗지 않는 최고 변호사는 신원이 의심스러운 요리사와 함께 간다. 세련되기 그지 없는 수녀원장은 거칠기 짝이 없는 방앗간 주인과 대조를 이룬다. 또한 모법적인 본당신부는 뻔뻔스런 면죄사와 대비된다. 서생의 지식은 무식하기 그지없는 사회자와 대조를 이룬다.(648∼649쪽)

 

 - 제프리 초서, 『캔터베리 이야기』, <작품 해설> 중에서 

 

초서는 중세를 대표하는 천재 시인인 단테에서 발견되는 엄청난 깊이와 비통함과 강렬함, 방대한 학식과 복잡한 상상력은 갖추지 못했지만,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뛰어난 재주를 지녔다. 또한 인정과 유머도 많았고, 인간의 약점을 재빨리 간파하면서도 동시에 관용하는 부드러운 시선을 가졌다. 또한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는 재주가 탁월한 작가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중세에 캔터베리로 순례를 떠난 여행객들이 우리의 옷깃을 붙들고 바로 곁에서 들려주는 듯한 온갖 흥미진진한 그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접할 수 있었겠는가.

 

몹시도 바쁜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이 까마득한 옛날의 이야기를 지금도 찾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나 우리나 결국 똑같은 인간임을 새삼 깨닫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이 사는 모습이 세월의 간극뿐 아니라 삶의 터전과 언어와 종교와 관습마저 완전히 다른 경우에도 그 본질은 그다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은 즐겁다. 그런 이야기가 독특한 환경에 처한 독특한 신분의 사람들에게도 언제나 공통적으로 발견된다는 건 더더욱 흥미롭다. 14세기의 영국 시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인간의 삶에 보편적으로 내재된 지극히 자연스런 욕망들, 가령 결혼생활에서의 부부간의 주도권 싸움이나 재산 다툼이나 성욕(性慾) 때문에 빚어지는 온갖 헤프닝들을 아주 천연덕스럽게 드러내 놓는다. 때로는 영국판 고금소총(古今笑叢)을 엿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음탕하면서도 웃음이 터져 나오는 얘기들도 가득하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아쉬움 한 가지는 '운문 소설이 지녔던 묘미'를 맛볼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캔터베리 이야기』에 깔린 어조가 '언어의 아이러니'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까지 알고 나면 아쉬움이 더욱 커진다. 어쩌면, 영어라는 언어가 몹시도 원시적인 단계에 머물던 무렵에 천재 시인이 온갖 다양한 방식과 기교를 통해 구사했던 '언어의 아이러니'를 산문으로 번역된 한글 문장에서 맛보려는 욕심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딱딱한 산문으로 번역된 부분을 우연히 맞닥뜨린 '운문 번역'으로 다시 읽어 보니 그런 느낌이 더했다. 그 부분을 덧붙임으로써 '운율이 없는 번역'에 대한 아쉬움과 '언어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조금이나마 달래 본다.

 

4월의 감미로운 빗줄기가
3월의 건조함을 속속들이 꿰뚫고,
모든 줄기가 그 생명력의 물기에 흥건히 적시어지고
그리하여 꽃들이 피어나고,
서쪽에서 불어오는 봄바람(西風)은 그의 달콤한 입김으로
들녘과 작은 숲의 연한 가지들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다.
아직 이른 태양은 숫양궁(宮)의 반 여정을 지났을 뿐이며,
자연이 그들의 가슴에 춘심(春心)을 자극하여
뜬 눈으로 온 밤을 지새운 작은 새들은
애욕스런 노래소리를 쉴새없이 지저귄다.
이 때 사람들은 순례를 염원하게 된다.

 

 - 초서, 『캔터베리 이야기』, <전체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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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1-14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서가 세익스피어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그 메시지만 기억하네요 초서 이야기하면 일화가 생각나는데, 미문학사였던가 암튼 그랬는데, 강의 첫날 어디서 많이 본 분이 들어오시는 겁니다 알고보니 고등학교때 지리를 가르친 선생님이신겁니다 그분이 수업시간에 박학다식하게 딴 이야길 많이하셔서 참 재미있었는데 그분이 교사를 그만두고 교수가 되신거예요 초서의 <캔터배리 이야기>가 나오면 그 교수님이 생각나네요 ㅎㅎ

oren 2018-11-14 10:19   좋아요 2 | URL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그런 기막힌 사연이 연결되는 일도 있군요. ㅎㅎ
저도 문학쪽은 아니지만, 엇비슷한 경험이 하나 있긴 합니다. 저도 대학에 다닐때 일이었죠. 군복무를 위해 3년간 휴학했다가 다시 복학 후 대학 4학년때 전공 과목 하나를 들으러 강의실 맨 앞자리 교탁 앞에 앉아 있다가 깜놀한 사건이죠. 강의가 시작될 무렵 고개를 들었더니 강의를 맡으신 분이 저랑 1학년 2학기때 같은 방을 함께 썼던 룸메이트 선배시더군요.(그 분은 경영학과에 다녔던 복학생 4학년 과선배였고, 졸업을 앞둔 무렵에 명문 대학원에 합격한 것까지만 알고 있었죠.) ˝아, 여러분, 잠깐만~˝ 하고는 둘이서 복도로 나가서 짧은 대화를 나누고 다시 들어와서 강의를 시작했더랬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