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안톤 슈낙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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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아득히 들려오는 장닭의 울음소리를 나는 사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런 움직임도 소리도 없는, 졸음과 납덩어리 같은 아른함이 몰려오는 뜨거운 여름 한낮이어야 한다.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지상에 아무것도 없는 듯 느껴지는 그때, 그 우렁찬 계명(鷄鳴)이 나팔 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것이다.

 

9월의 어느 날 밤, 투명한 정적 속으로 한 알의 사과가 툭 떨어지는 소리는 쾌적하게 울려온다. 이튿날 아침 풀밭에서 그 열매를 찾다가 눈에 띄었을 때의 기쁨이란!

 

아침나절 길다란 낫을 가는 망치 소리는 잠을 깨우는 울림이다. 공기에서는 취할 듯이 짙은 향내가 난다. 이제부터 뜨겁고 건조한 하루가 되리라. 이글이글 열을 지은 채원(菜園)의 풀줄기가 햇볕 속에서 찌듯이 익어가리라.

 

화려한 농촌의 소음으로는 길다란 장대에 달린 나무 갈퀴로 마른 풀을 뒤적거릴 때 들려오는 메마른 바삭거림이 있다. 그 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어느덧 경건한 기도 소리 들리는 밤을 생각하게 된다. 초원 사이로 열린 오솔길을, 그리고 마주 걸어오는 쟈네트의 어깨 위로 드리워진 새하얀 수건을 생각하게 된다.

 

어느 어린아이의 손에 쥐어진 펜촉의 사랑스러운 끄적임. 그것은 '사랑하는 어머니!' 라는 구절 다음에 한동안 막혀버린다.(14∼15쪽)

 

(나의 생각)

 

장닭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지 너무 오래다. 한겨울 새벽을 힘차게 열어젖히던 그 우렁찬 목소리가 그립다. 까마득한 옛날, 마당에 풀어놓고 기르던 암탉들이 소 외양간이며 마루 밑에도 숨겨 놓곤 하던 달걀의 따스한 감촉도 그립다. 암탉이 알을 품고 있을 때마다 괜스레 훼방이나 놓곤 하던 그 옛날, 그 암탉들은 우리가 얼마나 야속했을까.

 

 

 * * *

 

 

마을 대장간의 망치 소리를 나는 즐겨 듣는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이웃에서 들려와서는 안 된다. 얼마간 바람결을 타고 불어와 조화된 소리여야 한다. 그 금속성은 내 어린 가슴을 한껏 설레게 했었다. 프랑켄의 장터에 자리잡은 대장간에서는 섬뜩한 느낌의 풀무가 훨훨 타오르는 석탄 불길 속에서 용해되고 있었고, 시커먼 칠을 묻힌 대장장이가 멀찌감치 서서 쇠망치로 달아오른 쇳덩이를 때리면, 불똥의 빗줄기가 꿈처럼 아름답게 곡선을 그으며 어두운 대장간 창고 안으로 비산(飛散)하는 것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분수의 낙수 소리. 중세풍의 슈바벤 할 시(市)의 어느 주막 앞에는 분수가 하나 서 있어 온 달밤을 지새우도록 전설과 동화를 이야기하는 것이다.(15∼16쪽)

 

(나의 생각)

 

까마득한 옛날이긴 하지만, 우리 마을에도 대장간이 있었다. 그 대장간은 마을의 신작로를 살짝 벗어나 냇가로 이어지는 길 옆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대장간 바로 옆에 '상여'를 보관하던 곳집이 있어서 어린 아이들에겐 괜한 공포심을 심어주는 곳이기도 했다. 대장간은 주로 여름철에 바빴던 것 같다. 우리가 대장간 구경을 실컷 즐길 수 있었던 때도 주로 '매미'를 잡기 위해 그곳까지 진출했던 여름방학 때였으니까. 아무튼 대장간 구경은 소리 보다는 빛이 중심이었다. 시뻘겋게 달궈진 쇠를 두드릴 때마다 불똥이 이리저리 튕겨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좋은 구경거리도 없었다. 

 

 

 * * *

 

 

폭풍이 몰아칠 때 소나무 수관(樹冠)을 휙휙 스치는 바람 소리. 그리고 그 바람은 벽난로 안에서도 노래를 한다. 이 두 개의 소리에 나는 언제까지나 귀 기울일 수 있다. 바람 부는 날 고성(古城)이나 농장의 뜰에서 들리는 그 소리는 도깨비라도 나올 듯 매우 기묘한 것이다.

 

거울처럼 잔잔하게 잠든 호면(湖面)에서 보트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 보라. 끌어올린 노에서는 이따금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구원의 물방울. 알아보기도 힘든 자디잔 물체와 들릴 듯 말 듯한 소음. 그것은 은빛으로 반짝이며 스러져가는 것이다.

 

바다의 소음. 칠흑 같은 밤, 그것이 그윽하게 성난 듯이 백사장의 조약돌이나 해변의 암석에 탄식하듯이 부딪히는 소리는 우리를 야릇한 그리움과 설렘 속에 몰아넣는다. 그것은 속세의 음성이 아니라 해신(海神)의 음성이며, 수정(水精)의 유혹하는 호소이며, 인어의 노래이다.

 

산골짜기에서 와르릉 꽝꽝 바위 구르는 소리. 저 푸른 절벽의 심연 속으로 사라져가는 무시무시하게 쿵쾅거리는 굉음! 다시 한번 이 죽음의 음성은 바로 곁에까지 왔다가 다시금 스쳐 지나가버린다. 그러고 나면 얼마나 깊고 탐욕스럽게 가슴 깊숙이까지 안도의 한숨을 들이쉬었던가.(16∼17쪽)

 

(나의 생각)

 

몹시도 추운 한겨울, 썰매를 타러 나간다거나 연을 날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몹시도 추운 한겨울이 닥치면, 문풍지 바른 문틈 사이로 '우웅~ 우웅~' 하는 겨울바람 소리가 들리곤 했었다. 그런 날에는 꼼짝없이 방에 틀어박혀 지내면서 하루종일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든다거나 자전거를 만들며 놀곤 했다. 그런 날 점심 매뉴는 으레 김치와 콩나물이 적당히 버무려진 질펀하면서도 뜨끈뜨끈한 비빔밥이었는데, 거기다 고추장을 적당히 비벼 먹으면 이내 후끈하게 땀이 났었다. 밥을 먹고 나서도 수수깡 놀이는 저녁나절까지 계속 되곤 했다. 그런 날에는 '우웅~ 우웅~' 울부짖는 듯한 바람 소리도 온종일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들리곤 했었다.

 

 

 * * *

 

 

전차바퀴의 덜컹거리는 운율을 나는 더없이 사랑한다.

 

또 그르릉거리는 뱃고동과 추진기 주변을 소용돌이치는 물소리를 나는 얼마나 사랑하는지! 닻의 쇠사슬이 쩔렁거리는 소리, 배를 정박시키는 말뚝의 삐걱대는 소리. 투박한 시골의 우편마차 위에서 철썩 내리치는 채찍의 울림. 비행기 모터의 성급한 붕붕거림. 이것은 귀가 겪는 순수한 음향의 모험들이다. 고도(古都)의 아치 성문을 덜그럭덜그럭 지나는 말발굽 소리를 나는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른다. 그때 나는 방랑하는 시인 아이헨도르프를 생각하고, 마리안네 폰 빌레머(장년기 괴테의 애인)의 여행복에서 풍기는 라벤더의 방향(芳香)을 생각하게 된다.(17쪽)

 

 

 * * *

 

 

타닥타닥 장작불 타는 소리와 그 위에 얹힌 물주전자의 노랫소리는 나를 환상으로 몰아넣는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부엌, 파란 그릇들로 가득 찬 할머님의 부엌, 곡식과 과일 냄새 풍기는 농촌의 부엌에서 들려오는 자장가와 같은 소음인 것이다.

 

헤센과 프랑켄의 작은 마을들, 고향에서의 잊을 수 없이 화려한 밤의 소음들이 있다. 밀가루 덮인 농촌의 물방앗간 방파제 위로 단조로운 파도를 치면서 끊임없이 좔좔 흐르는 시냇물 소리. 버릇에 젖은 어느 주정뱅이가 포도(鋪道) 위를 비틀비틀 비척거리고 걸어가며 끊임없이 끄륵대는 트림 소리. 돌풍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이의 손마디인가, 덧문을 쾅쾅 두들겨대는 소리. 문간 구석에서 새어나오는 어느 처녀와 총각의 입맞춤 소리. 그리고 교회 탑의 시계가 뚝딱거릴 때마다 녹이 슨 듯 한숨을 쉬고 있었다.(18쪽)

 

(나의 생각)

 

언제나 쌀가루가 뽀얗게 덮여 있던 우리 마을 방앗간은 언제 없어지고 말았던가. 벼베기도 다 끝난 초겨울쯤, 볏가마를 리어카에 가득 싣고 방앗간에 갈라치면, 그곳엔 언제나 곡식 가루를 하얗게 뒤집어 쓴 아저씨가 계셨다. 온갖 벨트들이 바삐 돌아가고, 여기저기서 새하얀 쌀알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던 그 풍경들이 새삼 그립다. 가끔씩 바삐 돌던 벨트가 멈춰 서면 비로소 마을 사람들이 참았던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기계가 돌아가는 동안엔 소음 때문에 너무 시끄러워서 서로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방앗간이 멈춰 설 때마다 방앗간 뒤켠에 있던 큼지막한 발동기의 시동 거는 소리만큼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도 드물었다. TV가 없던 시절, 라디오에서 자주 들었던 백남봉의 소리 모사에서도 언제나 백미는 발동기 시동 거는 소리였다.  ‘돼지가 새끼를 납니다. 그때 나는 소리입니다. 꿀꿀’, ‘부산에서 인천으로 날아온 지친 기러기입니다. 끼룩 끼룩’ 하면서 온갖 소리를 멋지게 흉내 내던 그 옛날의 소리 모사꾼들의 목소리도 이젠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 * *

 

 

풀베기를 끝낸 초원 위를 구름처럼 떼지어 나르는 뇌명(雷鳴) 같은 찌르레기의 날개 치는 소리도 나는 듣기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벌써 여름이 갔구나, 철새들이 먼 여행을 준비하는구나, 또 어느덧 한 해가 흘러가는구나 ㅡ 하는 가슴 속의 일말의 울적함을 떨칠 수가 없다.(18∼19쪽)

 

 

 * * *

 

눈(雪)이 일으키는 소음도 내가 사랑하는 소리에 속한다. 섬세하고 알알한 싸라기 내리는 소리에서부터 봄철 높새바람에 무너져내리는 눈사태의 우레 소리까지. 마을 우편배달부가 눈 속을 사박거리며 걸어오는 발소리도 독특한 매력이 있다 ㅡ 반갑고 궂은 소식, 아득히 먼 세계가 이 소리와 함께 들려온다. 기차역의 덜커덕대는 소리. 도시의 왁자한 소음. 해변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뜨거운 그리움이 사박거리며 함께 들려오는 것이다. 미움과 사랑, 환희,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들을 수 없는 죽음의 발소리까지.

 

썰매를 끄는 말방울 소리. 그것 역시 신비스럽다. 들리는가 하면 어느덧 지나쳐버린다. 그렇게 불현듯 스쳐 불어가는 것이면서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소리이다.

 

어느 오케스트라가 악기를 연주할 때, 그것은 얼마나 묘한 일인가! 꽥꽥 긁어대며 활주(滑奏)하는 불협화음 뒤에는 베토벤의 제9교향곡의 장려하고 거창한 음(音)의 바다가 높이 펼쳐지는 것이다.(19쪽)

 

(나의 생각)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겨울방학때 가장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이 빨간 색 자전거를 타고 오던 우편배달부였다. 그 아저씨가 눈 속을 사박거리며 달려오다가 우리집 골목길에서 자전거를 멈춰 세우고, 소가죽 냄새가 물씬 풍기는 우편물 가방을 열어젖히면, 거기선 어김없이 '연재 만화'가 실린 소년동아일보가 특유의 신문지 냄새와 함께 튀어나왔다. 그 당시엔 어린이용 '연재 만화' 만큼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 것도 드물었다. 연재 만화 속의 풍경들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던 '아득히 먼 세계' 그 자체였으니까.

 

 

 * * *

 

 

뚝…… 뚝…… 끝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던 지난날 수업 시간에 들리던 납같이 무거운 소음. 교실에서는 선생님의 피로에 지친 울먹한 음성이 들려왔다. "Nemo ante mortem beatus" ㅡ 어느 누구도 죽음에 직면해서 행복을 구가할 수는 없다. 소년은 노(老) 교수의 육중한 지혜에는 아랑곳없이 창 앞에서 간간이 들리는 소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곳에는 비스듬히 걸려 있는 전선줄 위로 수백 개의 물방울이 나란히 매달려 있어서, 일순간 가만히 방울 지어 있다가는 다음 방울에 밀려 곧 부서져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뚝…… 뚝…… 그것은 대자연의 언어이며, 구름의, 하늘의, 무한한 세계의 언어이다. 또한 그것은 바다의 인사이다. 쏟아지는 폭포수의, 넘쳐흐르는 샘물의, 돌 고드름 열린 종유동으로부터의 인사이다. 소곤거리는 분수와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인사이며, 나이아가라와 라인 강의 뇌성(雷聲)이며, 아득한 해안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이다 ㅡ 이렇듯 엄청나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야성과 위대함, 충만함과 풍요함이 이 단 한 방울의 물방울 속에 스며 있는 것이다!(20쪽)

 

 

 * * *

 

 

봄날 저녁 떼지어 들끓는 풍뎅이의 붕붕거림. 이제 곧 붉은 만월이 떠오르리라. 거리는 어느덧 시골 처녀들의 다감한, 조금은 구슬픈 노랫소리로 가득 찬다. 하모니카의 부드러운 선율이라도 끼어든다면, 그곳에야말로 깊어가는 밤의 알 수 없는 고뇌와 감미로움이 자리잡는 것이다.

 

아코디언 켜는 소리. 그 소리를 못 들어 본 지가 얼마나 되었던가!

 

깊은 밤, 방 안에서 무엇인가 가구에 딱 부딪히는 소리. 누가 오는 것일까? 아니면 가는 걸까?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바람이었을까?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리들의 잠자리를 굽어보시는 어머니였을까? 요정이었을까? 겁 많던 어린 시절부터 나는 한밤중 방 안에서 나는 유령 같은 소리를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또 내가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환희에 겨운 두 연인의 잔 부딪치는 소리. 춘삼월, 습기 찬 풀밭에서 연주하는 개구리의 울음소리 ㅡ 그것은 목신(牧神)이 새로이 인생의 불멸을 구가하는 소리였다.(20∼21쪽)

 

 

 * * *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 눈 녹은 물줄기가 홈통으로 흐느낌처럼 후둑후둑 쏟아지는 소리. 물고기가 잔잔한 수면으로 팔딱 뛰어오르는 소리. 어린아이의 종종거리는 발소리. 바람 잠든 날, 전선줄의 윙윙거리는 소리 ㅡ 이것은 마을 소년들이 먼 곳의 사람들의 욕설처럼 변덕스럽게 생각하는 신비스런 기상의 신호이다.

 

아, 한 잎 가랑잎이 살그머니 떨어질 때, 가슴 아프도록 지친 소리. 아직도 나무에는 여름이 달려 있는데 어느덧 한 잎이 떨어지고 있다.

 

그에 비하면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의 팔락거림이나 출발을 앞둔 말의 울음소리는 얼마나 우렁차고 자랑스러운 소리이며 승리의 소리인가! 대목을 앞둔 장터에서 물건을 사라고 외치는 목쉰 음성은 얼마나 고무적인가. 또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무희가 막 사이로 미끄러져 나와 감사와 축복, 자랑과 기쁨의 미소를 띄울 때, 터져 나오는 갈채 소리는 얼마나 감동적인가.(21∼22쪽)

 

(나의 생각)

 

불현듯 스치며 떠오르는 옛 추억들은 섬광처럼 반짝 빛났다가 이내 사라지는 게 특징이다. 그처럼 짧게 스쳐 지나가는 아스라한 옛 추억들이 누구에겐들 없겠냐마는, 그런 느낌들을 이토록 섬세하고도 아름답게 포착하고 그려낼 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수필가였던 안톤 슈낙의 글 솜씨가 참으로 부럽다.

 

 

 * * *

 

 

찾아오는 여인의 발소리는 온 심장과 기대를 끌어당긴다.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정원에 깔린 자갈 위로 그녀의 발소리가 울려온다. 가볍고 날렵하게 사뿐사뿐 걷는 우아하고 경쾌한 발소리. 축복의 발소리, 후광을 지닌 발걸음, 그것은 걸음 중의 걸음 소리이다.

 

정적의 소리야말로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무위(無爲)로부터, 근원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듯한 심연의 흐름 ㅡ 바로 오르간의 음악 소리요, 조개껍질의 소리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 속을 흐르는 피의 음악이다. 심실(心室)의 노래이며, 자체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인 것이다.

 

한껏 부풀어 격동하는 심장을 가진 자는 축복을 받은 자이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입맞춤은 심장을 그렇게 고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심장과 나의 심장이 질주하며 울리는 격동을 듣고 있다. 이 이중창을 듣는 것보다 더 충만하고 축복단은 일이란 지상에 그 어느 것도 없는 것이다.(22∼23쪽)

 

 - 안톤 슈낙,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내가 사랑하는 소음, 음향, 음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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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안톤 슈낙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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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옛 친구를 만났을 때, 학창시절의 친구 집을 방문했을 때. 그것도 이제는 그가 존경받을 만한 고관대작, 혹은 부유한 기업주의 몸이 되어,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하는 한낱 시인밖에 될 수 없었던 우리를 보고 손을 내밀기는 하되, 이미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할 때.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 죽어가는 한 마리 사슴의 눈초리. 재스민의 향기, 이 향기는 항상 나에게 창 앞에 한 그루 노목(老木)이 섰던 나의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공원에서 흘러오는 은은한 음악 소리. 꿈같이 아름다운 여름 밤, 누구인가 모래 자갈을 밟고 지나는 발소리가 들리고 한 가닥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히는데, 당신은 여전히 거의 열흘이 다 되도록 우울한 병실에 누워 있는 몸이 되었을 때.

 

달리는 기차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스름 황혼이 밤으로 접어드는데, 유령의 무리처럼 요란스럽게 지나가는 불 밝힌 차창에 미소를 띤 어여쁜 여인의 모습이 보일 때.

 

화려하고 성대한 가면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때. 대의원 제씨(諸氏)의 강연집을 읽을 때. 부드러운 아침 공기가 가늘고 소리 없는 비를 희롱할 때. 사랑하는 이가 배우와 인사할 때.

 

공동묘지를 지나갈 때. 그리하여 문득 "여기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 잠들다" 라는 묘비명을 읽을 때. 아, 그녀는 어린 시절 나의 단짝 친구였지.

 

하고많은 날을 도회(都會)의 집과 메마른 등걸만 바라보며 흐르는 시커먼 냇물. 숱한 선생님들에 대한 추억, 수학 교과서.(10∼12쪽) 

 

 

 * * *

 

 

오랫동안 사랑하는 이의 편지가 오지 않을 때. 그녀는 병석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편지가 다른 사나이의 손에 잘못 들어가, 애정과 동경에 넘치는 사연이 웃음으로 읽혀지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마음이 돌처럼 차게 굳어버린 게 아닐까? 아니면 이런 봄밤, 그녀는 어느 다른 사나이와 산책을 즐기는 것이나 아닐까?

 

초행의 낯선 어느 시골 주막에서의 하룻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곁방 문이 열리고 소곤거리는 음성과 함께 낡아빠진 헌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둔탁하게 치는 소리가 들릴 때. 그때 당신은 불현듯 일말의 애수를 느끼게 되리라.

 

날아가는 한 마리의 해오라기. 추수가 지난 후의 텅 빈 논과 밭, 술에 취한 여인의 모습. 어린 시절 살던 조그만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는 이 없고, 일찌기 뛰놀던 놀이터에는 거만한 붉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데다 당신이 살던 집에서는 낯선 이의 얼굴이 내다보고, 왕자처럼 경이롭던 숲도 이미 베어 없어지고 말았을 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12쪽)

 

(나의 생각)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골 마을에서 너무나 자주 보았던 풍경이 '추수가 지난 후의 텅 빈 논과 밭'이었다. 그곳은 찬바람이 쌩쌩 부는 한겨울에는 연을 날리는 장소였고,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면 눈싸움 장소였다. 추운 겨울에 하루 종일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기엔 너무나 따분한 날, 거기선 개구장이 녀석들과 옹기종기 모여앉아 훔쳐 낸 성냥불로 불장난도 치곤 했다. 어른들처럼 몰래 잎담배를 말아 피워보기도 했다. 내가 입대하기 전까지 살았던 고향 마을 우리 집에는 30여 년 전에 우리 식구가 서울로 떠나올 때 이웃 마을에서 이주해 온 그 식구들이 아직도 거기서 눌러 살고 있다. 나는 고향에 갈 때마다 그 옛날에 우리 집이었던 그 집을 찬찬히 둘러 보고 오지만, 여태껏 단 한 번도 그 옛날 우리 집이었던 그 집 안으로 선뜻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돌아선다. 그 집은 이미 남의 집이기 때문이다. 이미 30년 이상이나 남의 집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남의 집으로 남아 있을 그 집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슬프기보다는 안타깝고 아련한 느낌부터 맛본다. 내가 한 때 몹시도 사랑했던 사람이 내 곁을 떠나 다른 낯선 사람과 함께 살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 * *

 

 

하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것뿐이랴. 오뉴월의 장의행렬(葬儀行列),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바이올렛색과 검정색. 그리고 회색의 빛깔들, 둔하게 울려오는 종소리, 징소리, 바이올린의 G현. 가을 밭에서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져 있는 비둘기의 깃. 자동차에 앉아 있는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유랑 가극단의 여배우들.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어릿광대.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때묻은 서류를 뒤적이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 만월(滿月)의 밤, 개짓는 소리. '크루트 함순'(1859∼1952: 노르웨이 작가. 1920년 노벨문학상 수상. 가난, 방랑, 노동이 그의 작품의 주제다)의 두세 구절.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 철창 안으로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는 하얀 눈송이 ㅡ 이 모든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13쪽)

 

(나의 생각)

 

'가을 밭에서 보이는 연기'를 바라보는 느낌은 슬프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한 게 아닐까. 한 해 동안의 고된 노동이 비로소 마무리되고, 이제는 거기서 무언가를 불에 태울 정도로 한결 여유롭다는 느낌부터 들지 않는가. 고요한 한밤중에 시골 마을에서 가끔씩 들려 오던 '컹컹' 개짖는 소리 또한 슬프기보다는 뭔가 아련한 느낌부터 먼저 떠오르는 소리가 아닐까. 그 개가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짖는 지와는 상관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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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12-31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oren 2019-01-01 13:45   좋아요 0 | URL
카스피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세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50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송태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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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자키 준이치로(1886∼1965)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나쓰메 소세키(1867∼1916)보다 20년쯤 늦게 태어났다. 나쓰메 소세키가 메이지(재위 1868∼1912)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였다면,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그보다 한참이나 뒤늦게 활동했던 작가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그는 메이지 유신 이후 다이쇼 시대를 거쳐 점차 팽창하는 제국으로 변모하던 쇼와(재위 1926∼1989)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일본을 대표하는 국민 작가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의 국력이 한창 기세좋게 뻗어나가던 시기에 부유한 도쿄 상인의 집에서 태어났다.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가난에서 미처 벗어나지도 못하던 시절에 이미 고도로 서구화된 도쿄의 도회적 분위기를 만끽하며 자랐으나, 도쿄제국대학 졸업을 앞둔 무렵에는 급작스럽게 가세가 기울어 등록금조차 대지 못해 퇴학을 당했다.

 

그의 인생은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 1923년(38세)을 기점으로 크게 변한다. 당시 요코하마의 외국인 거주 지역에 살았던 그는 대재난의 충격 때문에 아내와 자식까지 버리고 혼자서 오사카로 이주하는데, 그때부터 간사이 문화에 깊이 매료된다. 오사카는 도쿄보다 일본의 전통 문화를 지키려는 보수적인 경향이 강했고, 서구풍의 유행과 패션이 넘쳐나고 물질 문화가 빠르게 확산되던 도쿄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는 이내 열렬한 오사카 매니아로 변모한다.

 

작가의 이같은 독특한 인생 내력은 차츰 당대의 일본 사람들이 겪고 있는 일종의 문화적 긴장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간다. 일본 전통 문화에 대한 짙은 향수와 물질 문명 중심의 서구 문화에 대한 반감은 때로 『여뀌 먹는 벌레』(1928년)에서 보듯이 전통과 현대의 갈등을 견디지 못하는 결혼 생활로 그려지기도 하고, 『세설』(집필 1942∼44년, 발표 1946∼48년)처럼 간사이 문화에 대한 짙은 애정이 담긴 결혼 풍속 소설로도 그려졌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성(性)과 결혼 문제를 다룬 소설을 유난히 많이 발표한 덕분에 '동양의 D H 로렌스'라는 별칭까지 얻을 정도였다. 그의 대표작인 『세설』 또한 그런 명성에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전세계의 주요 문학 작품 가운데 '결혼 문제'를 다룬 작품만을 따로 헤아려 본다면 이 소설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작품 속의 등장 인물들 대부분이 '혼기를 놓친 노처녀의 결혼 문제'에 온통 매달려 있는 데다가, 혼담이 있을 때마다 온 가족들이 매번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비상한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보자면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 못지 않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세설』속에는 혼담을 통해 신랑 후보감이 신규로 등장할 때마다 매번 반복되는 온갖 세밀하고도 까다로운 사전 조건 탐색이나, 맞선 이후로 바쁘게 전개되는 관련 인물들 사이의 분주한 대화와 서신들, 혹은 만남이 진척될수록 더욱 복잡하고도 미묘하게 굴절되는 심경 변화와 심리 묘사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소설의 무대는 오사카와 고베 사이에 낀 아시야라는 좁은 동네가 중심이지만, 넓게 보면 오사카와 고베뿐 아니라 교토와 나라 등지를 포함하는 간사이 지방 일대를 두루 아우르고 있다. 그 지역이야말로 도쿄와 요코하마로 대표되는 간토 지역과 뚜렷이 대비되는 특별한 고장이며,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이 끊임없이 불편을 느끼고 긴장감을 늦추지 못했던 도쿄와는 달리 언제나 한가로운 기분으로 옛 추억들을 떠올리며 안온하게 살 수 있는 장소였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오사카에서 대대로 부유한 상업 가문으로 명성을 떨치다가 이제 막 쇠락으로 접어든 마키오카 가(家)의 네 자매들이 핵심이다.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 미묘하면서도 꽤나 현실적인 여러 문제들을 떠안고 있다. 가업을 이을 상속자가 없어 양자 신분으로 입양되었다가 마키오카 가(家)의 맏딸과 결혼한 다쓰오 부부는 자식을 여섯이나 두는 바람에 가문의 대소사를 챙길 여력조차 부족하다. 둘째인 사치코는 경제적 능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되는 든든한 남편과 함께 딸 하나를 키우며 살지만, 미혼인 두 여동생까지 거두느라 신경 쓸 일이 한둘이 아니다. 셋째인 유키코는 아리따운 외모를 지녔지만 성격이 활달한 편이 아닌 데다가 혼기마저 놓친 노처녀로, 주위에서 걸핏하면 혼담을 주선하지만 번번이 허사가 되면서 사람들의 애를 태운다. 막내인 다에코는 네 자매 가운데 가장 활달하고 재주도 많아서 사회 생활도 왕성하지만, 10대 시절에 벌써부터 겉멋만 번지르르한 부잣집 아들과 애정의 도피 행각까지 벌일 정도로 철부지인 데다가, 미혼인 언니한테 가로막혀 결혼도 못하고 차츰 집안의 골칫덩이로 전락한다.

 

이 소설 속엔 등장 인물들 사이의 극심한 갈등이나 드라마틱한 사건 전개와 같은 요소는 별로 없다. 그래서 네 자매의 일상이 계절따라 꽃잎이 피고 지는 것처럼 아주 평화롭고도 차분하게 흘러간다는 느낌을 준다. 바깥 세상이 온통 전쟁통에 난리를 겪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고요하고도 평화로운 분위기는 더욱 극적으로 대비된다. 그래서 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독자 스스로가 세밀한 감각으로 문장들 사이로 흐르는 미세한 결들까지 음미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는 느낌도 받는다. 가령, 다음의 짧은 대목 하나만 보더라도 작가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문장들의 틈새 사이로 쉽게 흘려 넣으면서도 사태의 미세한 차이들을 얼마만큼 능숙하게 표현해 낼 줄 아는 것인가.

 

사치코의 바로 아래 동생 유키코가 어느새 혼기를 놓치고 벌써 서른이나 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이렇다 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면, 큰집 언니 쓰루코도, 사치코도 또 본인인 유키코도 노년인 아버지의 호화로운 생활, 마키오카라는 오래된 집안의 명예, 요컨대 지체 높은 집안이었다는 옛날의 격식에 사로잡혀 집안에 어울리는 혼처를 바랐다는 데 있었다. 처음에는 혼담이 빗발쳤으나 모두 어딘가 좀 아쉬운 듯해서 거듭 거절해 버리자 그 뒤로는 사람들도 점차 정나미가 떨어졌는지 혼담도 뜸해졌고, 그러는 동안 가세도 더욱 기울어 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 일은 생각하지 마시라>는 이타니(미용실 여주인이자 중매인)의 말은 정말이지 상대를 위해서 해준 친절한 충고인 셈이었다.(16쪽)

 

 

이런 식으로, 잊을 만하면 어디선가 불쑥 등장하는 '새로운 혼담'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매번 특이한 신랑 후보자와의 흥미로운 에피소드와 모처럼의 부푼 기대와 어이없는 불운과 느닷없는 교착으로 이어지다가 끝내 파경을 맞는다. 그러면서도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읽는 동안에 다른 작품에서는 흔히 느낄 수 없는 몇 가지 특이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 느낌들 가운데 첫 번째로 꼽고 싶은 건 바로 이상하리만치 짙게 풍겨 나오는 <여류 문학풍>의 소설 분위기이다. 소설을 이끌고 가는 핵심 인물들이 (수시로 화장을 고치고 옷을 갈아 입는) 네 명의 자매들인 데다가, 유키코의 혼담을 진행하는 과정이나 막내인 다에코의 연애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숱한 인물들도 거의 대부분 여성들이 중심을 이루며, 심지어 네 자매들과 교류하며 지내는 몇몇 외국인들조차 거의 대부분이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가령 슈토르츠 부인이나 그녀의 딸 로제마리, 혹은 러시아 처녀 카테리나 등등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 다니자키 문학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바로 일본 문학에 면면히 흐르는 에로티시즘의 전통이고, 거기에 혼재된 이상 성욕이나 악마주의적인 경향까지도 포함하는 '여성 숭배'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런 점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특히나 '위대한 예술은 통속적이면서도 고급 문학이어야 한다'는 게 다니자키의 예술론이고 보면 '여자들'을 제쳐두고 도대체 무슨 문학이 가당키나 했던가 싶은 작가의 생각도 염두에 둘 만하다.

 

미시마 유키오는 「다니자키 준이치로」라는 글에서 <만일 천재라는 말을, 예술적 완성만을 기준으로 삼아 결코 자기 자신의 자질을 오판하지 않고 계속 그것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면, 80 평생을 통해 자기 자신의 자질을 오판하지 않았던 다니자키야말로 천재>라고 했다. 그리고 이토 세이의 말대로 <남성이 여성을 숭배하는 것도 사상>이라면 다니자키의 소설들은 <남성이 여성을 숭배>하는 그 하나의 사상으로 수렴된다. 그의 실제 인생도 오로지 그 사상을 현실화하는 데 바쳐졌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그가 숭배하는 대상, 즉 그를 둘러싼 여성들을 보지 않을 수 없다.(924∼925쪽)

 

 - 다니자키 준이치로, 『세설』, <다니자키와 여자들, 그리고 발> 중에서

 

 

이쯤에서 문득 다니자키의 실제 결혼 생활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해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다니자키는 맨 처음엔 한때 기생이었던 치요코와 결혼하는데, 결혼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치요코는 다니자키보다 열 살 아래였다. 치요코는 다니자키의 기대와 달리(?) 현모양처였던 탓에 사이가 멀어졌고, 그때 나타난 사람이 치요코의 여동생인 열네 살의 세이코였다. 이때 다니자키의 집에 드나들던 문인 사토 하루오가 남편 한테 구박 받던 치요코를 동정하게 되고, 두 사람은 결국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게 그 유명한 <오다와라> 사건이다.

 

 

이번에 우리 세 사람이 합의하여 치요코는 준이치로와 헤어져 하루오와 결혼하기로 하였기에 알려 드리오며, 준이치로의 딸 아유코는 어머니와 같이 살기로 하였습니다. 물론 쌍방의 교류는 종전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가까운 시일 안애 적당한 중매인을 내세워 결혼 피로연을 갖고자 하며, 그 일은 추후 통지해 드리겠습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치요코

           사토 하루오

(「아사히 신문」 1930년 8월 19일자)

 

 

이 사건이 있고 난 이듬해인 1931년에 다니자키는 도미코와 두 번째로 결혼한다. 그녀는 문예춘추사 기자였고, 다니자키보다 스무 살 연하였다. 이 결혼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고, 1935년에 마침내 '숙명적인 사랑'을 느낀 네즈 마쓰코와 세 번째로 결혼한다. 다니자키는 그 결혼을 <주종 관계>를 맺는 것으로 표현했고, 식사도 한 식탁에서 하지 않고 그녀의 식사 시중을 든 후에 혼자 먹었다고 한다. 『세설』 또한 마쓰코 부인의 자매들을 소재로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의 이상적인 여성은 어머니 '세키'였다고 한다. 소문난 미녀였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그의 여러 작품에 등장하며, 그 어머니와 가장 닮은 여성이 마쓰코 부인이었다고 한다.

 

『세설』이 여느 소설들과 다른 두드러진 특징을 하나 더 꼽자면 그건 '시류에 대한 무관심'이다. 이 소설이 쓰인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이었고, 소설 속 시간들은 대략 1936년부터 1941년까지였다. 그 기간 동안에 일본은 중일전쟁(1937∼1945)이 한창이었던 데다가 나중에는 태평양 전쟁에 뛰어들었고, 유럽에서는 나치 독일이 전세계를 상대로 거대한 전쟁을 벌이던 때였다. 『세설』속에도 어쩔 수 없이 '세상이 온통 전쟁에 휩쓸린 분위기'가 느껴지긴 하지만, 그저 스쳐 지나가는 토막 뉴스에 불과할 뿐이다. 전쟁 자체가 온갖 풍성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다른 작품들과는 너무나 달라 독자들이 도리어 당황스러울 정도다. 다니자키는 이 작품을 통해 시종일관 간사이 지방 특유의 느낌이 가득한 '당시의 풍속'을 잔잔하게 전할 뿐이다. 다른 목적은 없다.

 

『세설』은 무척 세심하게 쓰인 소설이다. 극적인 사건보다는 사계의 흐름과 함께 실제 생활처럼 소설 속의 시간도 천천히 지나간다. 봄의 벚꽃 구경, 여름밤의 반딧불이잡이, 가을의 단풍 구경, 후지 산, 가부키, 피아노, 인형, 프랑스어 교습, 무용 교습, 무용 공연, 각기병, 장티푸스, 주사, 약, 만주, 홍수, 기모노, 사진기, 전화, 도쿄 말과 간사이(오사카) 사투리, 미용실, 파마, 호텔, 병원, 학교, 셋집, 독일인, 백계 러시아인, 갖가지 일본 음식들, 피아노, 커피, 제과점, 백화점, 신혼여행, 해수욕, 온천, 기차, 연애, 맞선, 여객선 등이 계절의 변화와 함께 쓰루코, 사치코, 유키코, 다에코의 주위를 파노라마처럼 지나쳐 간다. 그런 세세한 풍속을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부끄러워서 걸려 온 전화조차 받지 못하는 유키코가 여동생 다에코에게 설교를 해대는 당찬 모습, 그리고 맞선을 보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진행시켜 나가는 유키코의 의뭉스러운 모습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930쪽)

 

 

『세설』이 다른 소설들과 구별되는 또다른 특징이라면 '자연에 대한 묘사'가 극히 절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계절 따라 바뀌는 다양한 바깥 풍경들을 자주 묘사하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계절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통해 '시간이 좀 더 흘렀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쪽에 훨씬 가깝다. 정원에 핀 가지각색의 꽃들이나 교토의 벚꽃놀이를 묘사할 때조차 풍경 자체보다는 그 풍경 속에 담긴 등장 인물들의 내면에 대한 심리 묘사가 중심일 정도로, 작가는 등장 인물들의 '세심하고 복잡한 마음 속 미로'를 탐구하는데 집중한다.

 

특히나 셋째인 유키코의 혼담을 두고 양가의 중매인들이나 가까운 가족 구성원들이 주고 받는 대화나 편지 속에는 '말해야 할 것과 숨겨야 할 것'에 대한 미묘한 선택지들이 얼마나 구불구불한 선들을 따라 미세하게 이어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세설』이 일본판 『오만과 편견』이라는 평을 듣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싶다. 소설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길게 이어지는 '유키코의 다양한 혼담 진행 상황'을 보노라면, 마침내 한 쌍의 커플이 결혼에 골인할 때까지 검토될 수밖에 없는 온갖 미묘하고도 세세한 고려사항들이 총망라된 느낌이 들 정도다.

 

『세설』과 외견상 비슷한 느낌을 주는 소설로는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도 빼놓긴 어려운데, 두 작품 모두 유서 깊은 상업 도시에서 '사업'으로 오랫동안 번창했던 가문이 몰락하는 모습을 다룬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무척이나 닮았다. 그러나 토마스 만의 소설이 누구라도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말해서 오랫동안 번창했던 가문이 마침내 '어떤 원인과 과정'을 통해 몰락하게 되는가를 (유전적인 분석까지 포함하여) '남자들의 세계'를 중심으로 세밀하게 그려냈다면, 다니자키의 소설에서는 이제 막 가문의 쇠락이 시작될 무렵의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만을, 그것도 여성들의 세계를 중심으로 섬세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극명하게 비교된다.

 

『세설』은 서구 문학에서는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운 일본 특유의 전통과 문화와 아름다움이 녹아 있다. 벚꽃놀이 하나만 하더라도 오사카와 교토의 풍경이 다르고, 교토에서도 기온의 밤벚꽃 다르고 헤이안 신궁이 또 다르다. 후지산의 풍경 또한 어디서, 누구와 함께 보느냐에 따라 느낌이 매번 달라진다. 일본의 다양한 전통 무용과 악기와 의상들에 대한 느낌도 그때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오사카 지방 고유의 사투리나 억양, 혹은 고베의 도미맛까지도 도쿄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세세한 차이까지도 아주 세밀하게 그려놓은 작품이 『세설(細雪)』인데, 일본을 그저 주마간산 격으로 몇 차례밖에 구경하지 못한 독자로서는 그런 차이까지 두루 자세히 음미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다니자키가 몇 년만 더 살았더라면 그가 일본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을 뻔했다는 말은 결코 지어낸 풍문이 아니다. 일본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작가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였다. 그는 다니자키가 죽은 뒤 3년이 지나서야 그 상을 받았다. 그런데 다니자키가 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려 5년 연속으로 노벨상 후보에 올랐던 작가는 정작 다니자키였다고 한다. 사르트르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만사 제쳐놓고 교토 근교에 있는 다니자키의 묘에 참배했던 것도 그의 문학적 위상을 반증한다. 제국 시대의 일본은 중국과 미국까지도 한꺼번에 맞붙어 상대할 정도로 욱일승천의 기세였다. 그런 난리통에 이처럼 고요하고도 세심하면서 아름다운 작품이 쓰였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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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12-29 1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의 대립이 있었던 17세기 이전부터 오사카로 대표되는 관서지방과 관동지역의 문화에는 차이가 있는 듯 합니다. 이처럼한 나라 안에서도 다른 자연환경으로 인해 생기는 문화차이를 보자면, 자연의 힘을 새삼 깨닫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

oren 2018-12-29 20:25   좋아요 1 | URL
생각해 보면 일본만큼 지방색이 저마다 뚜렷하게 구별되는 나라도 드물지 싶어요. 나라의 생김새부터가 아래위로 길쭉하게 펼쳐져 있으니까요. 단지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런 차이를 그들만큼 자세히 구분할 줄 모를 뿐이겠지요. 『세설』을 다른 나라의 언어로 번역하는 사람들이 가장 애를 먹는 것도 그런 지역적인 차이들, 가령 ‘간사이 사투리‘ 하나만 하더라도 그걸 제대로 옮길 방법이 없다는 것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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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나이 들면 모두 강심장이 되지. 내가 아는 기타(北)의 게이샤가 있는데, 그 사람은 벌써 마흔이 넘은 노기야. 그런데 도쿄에 가서 전차를 타면 일부러 오사카 사투리로 <내립니더> 하고 큰소리로 외친다나. 그러면 반드시 내려 준다는 거야.」(216쪽)

syo 2018-12-29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 혹시 다른 매체나 지면에도 투고하고 계신가요?? 알라딘 서재에만 무료로 풀어놓기에는 아까운 글을 항상 쓰시니까요....

oren 2018-12-29 20:34   좋아요 0 | URL
여기서도 어쩌다 한번씩 겨우 글을 올리는 형편인데, 어딜 감히 다른 델 기웃거릴 여력이나 있을까 싶습니다^^

박균호 2018-12-29 2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알라딘 서재에 흔히 보이는 트렌디(?)한 서평 비스무리한 글과는 차원이 다르군요. 품격있고 지성미 넘치는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이래야 알라딘 서재인데요.

oren 2018-12-29 20:41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박균호 작가님. 신통찮은 제 글에 너무 과분한 글을 남겨주셔서 제가 도리어 당혹스럽습니다.

알라딘 서재든 어디든, 요즘엔 쌔고 쌘 게 서평글이고 독후감인지라, 어떻게든 남들과는 조금이라도 다른, 저만의 감상을 담은 글을 써 보려고 애써 보지만, 늘상 그게 쉬운 게 아니라는 사실만 더욱 절감하고 있답니다.^^

격려의 댓글 담겨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박균호 2018-12-29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ren님이 추천하신 책을 정신없이 담았습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광란의 쇼핑을 했습니다.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oren 2018-12-29 20:50   좋아요 1 | URL
와... 제가 흥미롭게 읽었던 책들을 박균호 작가님께서도 한꺼번에 왕창 사들이셨다니, 저도 몹시 기쁘고 기대됩니다.^^
 
탄허록 - 미래사회를 이끌어 갈 주인공들에게 남긴 100년을 내다본 지혜 모음
탄허 지음 / 휴(休)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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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우리나라에는 우주의 기본 원리를 밝힌 비책 《천부경》이 있다. 단제(檀帝; 탄허 스님은 여러 역사적 기록을 들어 중국이 우리의 단제檀帝를 단군檀君이라고 칭호를 붙인 것은 소국小國이라고 얕잡아 본 것이므로 단군이 아니라 단제라 이름 붙여야 한다고 봄-편집자주) 때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천부경》은 신라 최치원이 한자로 번역하여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책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 선가仙家 사상의 연원이 되었으며, 《주역》의 시원을 이룬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천부경》은 총 81자로 된 아주 짧은 내용이지만 매우 난해하고, 역학의 원리와 공통점이 많다. 물론 유교의 원리는 그 깊이가 방대하기 때문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지만, 《천부경》은 역학의 축소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천부경》의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一은 시작인데 시작하지 않는 1一이요,

또 일一은 끝냄인데 끝냄이 없는 일一이다.  

 

천天은 양陽이므로 1一이며, 지地는 2二, 인人은 3三으로 되어 있다. 태극太極에서 시작된 수數는 삼극三極, 즉 무극無極·태극太極·황극皇極을 거쳐 1로 귀일歸一한다는 것인데, 1의 사상은 천하는 둘이 아니라는 불교의 원리와 부합하며, 역학의 원리와도 부합한다. 일설에는 《천부경》으로부터 역학의 시원이 이루어졌으며, 단제 민족이 우주의 근본 원리를 밝힌 사상으로 중국의 기본 사상을 이룬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내가 알기에는 《천부경》의 시원은 중국의 요순과 동일한 시대다. 그러므로 《천부경》이 먼저 나오고 그 뒤에 복희씨의 팔괘가 나왔으며, 그 뒤에 문왕의 《주역》이 만들어진 것이다.

 

만약 《천부경》이 단제 때 만들어진 것이라면 우리 민족의 위대한 사상이 중국으로 전해져서 중화사상으로 꽃피워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이 사상에 의해 세계는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김정배 교수가 쓴 논문 〈한국 민족 문화의 기원〉에 보면 복희씨 때 황하 유역에 살던 민족과 단제 시대의 고조선 민족은 같은 고古아시아 족으로 형제지간, 즉 구이족九夷族이고, 그 후로 주周나라 때부터 한족漢族이 황하 유역의 고아시아 족을 몰아냈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이제까지 역학이 중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다는 종래의 일반적인 의견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학의 시초는 《천부경》이고, 단제의 지배 영역은 전 동아시아 일대였으며, 여기에서 발생된 문화가 동아시아 전체에 파급되었다는 발상도 해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토인비 교수가 말했던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시대의 전개는 중국이 아닌 바로 우리나라로 볼 수도 있다. 즉 현재 한반도는 지구의 주축에 속하고, 한민족은 ‘간艮’의 시종始終을 주도하고, 《천부경》 사상은 새로운 세계의 근본이 된다고 할 때, 앞으로 세계의 중심은 우리나라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우리나라는 중국의 말초신경 정도에 해당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나라와 중국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수십억 인구를 가진 중국보다 우수한 인재가 월등히 많이 나왔다. 그뿐인가. 우리 민족사에는 중국 대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록이 얼마든지 있는데 그런 것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증명해 주고 있다. 《천부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하나가 모여서 열이 되고, 우주의 기틀이 갖추어지되 모두 셋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말은 복희씨가 팔괘를 요순시대에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구절로, 《천부경》이 복희씨의 팔괘보다 좀 더 빨리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단제의 《천부경》이 나올 때 음陰의 문자와 양陽의 문자가 함께 사용되었는데, 중국은 양이기 때문에 음만을 수용할 수 있어서 음의 문자인 한문을 쓰게 되었고, 양의 문자는 그대로 우리나라에 남아 구어口語로만 전해 오다가 세종대왕 때 한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중국의 한문자漢文字도 우리나라에서 건너갔다고 할 수 있지 않느냐는 의견을 제시한 사람도 있다.문자에 관해서는 이러한 일설을 수긍할 수도 있다.

 

그보다 여기서 꼭 밝혀 둘 것이 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도 요즘 표현으로 한다면 한국계 만주인이었다고 한다. 그가 명천자明天子에 즉위하자 신하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폐하의 계보를 어느 곳에서 찾을까요?”

 

그랬더니 명천자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장검長劍을 잡고 남쪽으로 오니, 그 선조는 ‘모른다’고 써라[長劍南來 其先莫知].”

 

물론 요순시대의 황하 유역 민족이 고조선족과 같은 고아시아족이므로 복희씨도 한민족이었음에 틀림이 없다고 볼 것이고, 오늘의 중국 역사가 주나라 때부터를 한족漢族으로 치고 있는 것으로 보았을 때 그 이전,즉 복희伏羲·신농神農·요순堯舜 등 삼황오제三皇五帝가 있었던 하은夏殷 시대는 우리와 같은 민족이었을 것이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노자의 《도덕경》이 단제에게 전해 내려온 비책秘冊을 체계화해서 저술한 것이라 하는데, 이 또한 상당히 설득력 있다.

 

노자는 생사가 분명치 않는 인물이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그는 80년 동안 모태母胎에 있다가 태어났는데, 나오자마자 머리가 백발이 되어 ‘노자老子’라 불렸다고 한다.

 

노자가 지금으로 말하자면 도서관장으로 있을 때 어떤 비책의 자료를 발견하고 그것을 발전시켜 《도덕경》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천부경》과 《도덕경》뿐만 아니라 그동안 소외시켰던 동양 사상을 중심으로 정신무장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동서양이 지닌 부조리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학적易學的 정치 철학이 필요하다.(58∼62쪽)

 

(나의 생각)

 

여러 해 전에 《天符經》이라는 비책을 우연한 기회에 선물로 받은 적이 있었는데, 81자의 내용이 너무나 난해하여 따로 해석해 놓은 내용을 읽어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펼쳐봤지만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책이 이토록 중요한 책인 줄은 확실히 알겠다. 내가 가진 책에 소개된 <천부경이 전해온 길>을 일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 *

천부경은 9000여년 전 桓國(환국)으로부터 口傳(구전;말로 전해지는 것)으로 전해져 오던 것을 6000여년전 桓雄天皇(환웅천황)께옵서 神市開天(신시개천)을 여시고 배달국을 세우신 후에 神誌赫德(신지혁덕;벼슬 이름)에게 일러 鹿圖文(록도문:사슴 그림문자)으로 기록하여 전하여 주신 것을 4345년전 檀君聖祖(단군성조)께옵서 篆書(전서)로서 碑文(비문)에 새겨 남기신 것이다.

 

이를 신라말 유,불,선에 大覺(대각)을 이루신 고운 崔致遠(최치원) 선사께서 우리글인 韓字(한자)로 새로이 번역하여 비석에 새기고 서첩으로 만들어 후세에 전해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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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록 - 미래사회를 이끌어 갈 주인공들에게 남긴 100년을 내다본 지혜 모음
탄허 지음 / 휴(休)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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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기)

 

앞에서 언급한 결실의 시대란 간방인 우리나라에 간도수가 와서 열매를 맺고, 그 열매는 새로운 씨앗이 되는 시종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중대한 전환기에 새로운 인류사의 출발, 후천의 세계는 어떻게 열어 가야 할까?

 

후천 세계가 오는 것을 ‘후천도수後天度數’라 하는데, ‘문왕팔괘文王八卦’가 후천이면 ‘복희팔괘伏羲八卦’가 선천先天이 된다. 하지만 정역正易의 시대가 오면 ‘정역팔괘正易八卦’가 후천이고 문왕팔괘가 선천이 된다. 이렇게 순환되는 정역의 원리로 보면 간도수가 이미 와 있기 때문에 후천도수는 곧 시작된다고 하겠다.

 

모든 역학의 원리가 그렇듯이, 후천도수가 오는 것을 인간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낮 12시가 지나면 이미 밤이 온 것인데 사람들은 문밖이 밝은 낮이라고 하여 낮으로 알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미 오래 전부터 간도수가 시작되었고, 후천의 세계가 눈앞에 와 있는데도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한다.

 

세계적인 역사학자 토인비 교수는 미래 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측했다. “미래 세계는 중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가 주역이 되어 세계사를 주도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첫째, 전 세계적으로 세계 국가의 지역적 모델이 되는 제국을 과거 21세기 동안 유지해 온 중국 민족의 경험

둘째, 중국사의 장구한 흐름 속에 중국 민족성이 가지고 있는 세계정신

 

셋째, 유교적인 세계관에서 나타나는 휴머니즘

 

넷째, 유교와 불교가 지닌 합리주의

 

다섯째, 동아시아 사람들이 지닌 우주의 신비성에 대한 감수성과 인간이 우주를 지배하려고 하면 자기좌절을 초래하게 된다는 도교의 직관

 

여섯째,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를 바탕으로 하는 중국 철학의 근본성

 

일곱째, 동아시아 여러 국민은 이제까지 서양인들이 자랑으로 삼아왔던 군사·비군사非軍事의 양면 그리고 과학을 기술에 응용하는 근대의 경기競起에서도 서구제국민西歐諸國民을 이길 수 있음을 입증한 것

 

여덟째, 동아시아 제국諸國들의 용기

 

이러한 근거를 들며 중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시대의 전개를 내다보았다.

 

토인비 교수가 ‘중국이 동아시아의 미래를 좌우하는 것은 물론 세계를 주도해 나갈 것이다’라고 한 예측은 어디까지나 현실을 바탕으로 한 역사적이며 철학적인 논거에 의한 견해다. 그의 견해는 현실적으로 보면 정당하고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을 초월하여 우주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나의 견해와 많은 차이가 있다.

 

앞으로 동아시아의 미래에 있어 토인비 교수의 예측과 달리 중국의 주도적 역할보다는 우리나라의 역할이 더 강화될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서구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것은 특히 젊은이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는 주제이기도 하다.

 

미래를 예측할 때 물론 토인비 교수처럼 역사적·철학적·논리적으로 현실을 분석하고, 수학적·지리적 현실을 파악함으로써 미래를 내다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의 견해가 역사적 현실로 보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역학의 원리에 근거하여 미래를 보는 눈은 그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며 나아가서 인류 사회의 미래를 우주적인 차원에서 볼 수 있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56∼58쪽)

 

(나의 생각)

 

토인비는 분명 위대한 역사가였다. 문명  자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포착하고, 그 생멸()에 일정한 규칙성을 발견한 건 이전까지의 역사가들이 결코 제시하지 못한 개념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세계 1등 국가 부상 가능성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한 점이나 세계사의 중심 무대에 중국을 너무 빨리 추켜 올리는 듯한 부분은 (당시로서는 충분히 각광받았지만) 지금으로서는 너무 성급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런데, 그런 토인비의 역사관을 창조적으로 비판하면서 '우주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탄허 스님의 역사관이야말로 내겐 훨씬 더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탄허 스님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느 누가 이토록 새로운 역사관을 들려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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