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워라!

잘생긴 인물들이 여기에 참 많기도 하구나!

인간은 참 아름다워! 오 멋진 신세계여,

이러한 종족이 살다니.

 - 셰익스피어, 『템페스트』, <5막 1장> 중에서

 

올더스 헉슬리(1894∼1963)

 

 * * *

 

올더스 헉슬리는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두루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였다. 그가 지닌 독특한 지성의 면모를 생각하면 『멋진 신세계』와 같은 작품이 결코 우연히 탄생한 게 아님을 느끼게 된다. 그는 문학과 철학은 물론 과학과 심리학을 비롯한 온갖 학문 분야에 두루 박학다식한 인물이었고,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삶의 의미'를 언제나 근본적으로 사색하고 규명하려고 평생 동안 애쓴 인물이었다.

 

그의 지성적 면모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집안의 가계도를 잠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는 영국의 저명한 과학자 집안과 문학가 집안의 피를 고루 물려받았다. 더구나 그의 할아버지는 다윈 이후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였던 토머스 헨리 헉슬리였다. 그의 아버지는 교육자였고, 어머니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시학 교수이자 『교양과 무질서』로 유명한 매슈 아놀드의 조카딸이었고, 그녀 스스로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여류시인이었다. 올더스의 형인 줄리안 헉슬리는 저명한 생물학자이면서 초대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지냈고, 이복동생인 앤드류 헉슬리는 노벨 의학상을 수상한 유명한 생리학자였다.

 

할아버지인 토머스 헉슬리에 대해서는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찰스 다윈이 쓴 『종의 기원』의 서문에도 등장할 정도로 탁월한 생물학자였다. 그는 단테를 원어로 읽기 위해 이태리어를 배울 정도로 학구열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는 다윈의 『종의 기원』 발표 이후 종교계의 극단적인 반발과 반론을 최선두에서 가장 논리적이고도 효율적으로 반격한 중심 인물이었다. 인간의 조상이 동물로 이어진다는 주장을 담은 그의 대표작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는 훗날 헉슬리 가문을 관통하는 중요 연구 관심사가 되었으며, 올더스 헉슬리의 세계관에도 영향을 끼쳤다. 왕립학회 회장을 지낸 그는 존 러스킨, 틴덜, 매슈 아놀드, 토머스 칼라일 등과도 두루 교류했다.(찰스 다윈, 토머스 헉슬리, 틴덜은 버지니아 울프가 쓴 『댈러웨이 부인』에도 함께 등장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아버지는 토머스 헉슬리와 친구 사이였다.)

 

올더스 헉슬리의 아버지 레오나드 헉술리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재학중에 부인 줄리아 아놀드와 만났다. 그녀는 옥스퍼드 영문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훗날 시집을 출간하여 삼촌인 매슈 아놀드로부터 찬사들 받기도 했다. 레오나드는 시골에서 학교 교감으로 지냈지만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공방에는 늘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들 부부의 3남 1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난 올더스 헉슬리는 14세에 어머니를 잃고 큰 충격에 빠진다. 시력이 나빠져 또다른 충격을 받은 그는 각막염 수술을 받았고, 나중에 옥스퍼드 의대에 진학했다가 결국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연극·예술 비평가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그는 작품 활동 내내 언제나 사물의 궁극적인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 집요한 노력을 기울인 끝에 온갖 난해한 주제에 대한 엄청난 백과사전적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다.

 

과학 문명의 발달이 초래할 암울한 미래상을 그린 작품은 『멋진 신세계』 말고도 『원숭이와 본질』 같은 작품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동경해 마지않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사회를 그린 작품도 아예 없지는 않았다. 『섬』이라는 작품이 대표적이다. 그 작품을 두고 그가 스스로 논평한 글은 다음과 같다.

 

“위대한 역사, 폴리네시아 인류학, 산스크리트어와 중국어로 된 서적, 그리고 불교 경전, 약리학, 신경생리학, 심리학, 교육에 관한 논문들, 더불어 소설, 시, 비평, 기행문, 정치 논평, 철학자에서부터 배우, 정신병원의 환자로부터 롤스로이스를 타고 다니는 재벌들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람들과의 대화, 이 모든 것이 나의 유토피아적 방앗간의 깔때기 속으로 곡물이 되어 들어가 이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 하나에 대한 그의 관심 분야가 이 정도로 폭이 넓었으니 그의 작품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관심 분야가 얼마나 다양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다.

 

온갖 분야에 두루 해박한 지식을 지녔던 천재 작가 올더스 헉슬리가 그려낸 『멋진 신세계』는 과연 어떤 세계였고, 그런 세계가 미래에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또 얼마나 될까.

 

포드 기원 632년으로 설정된 '멋진 신세계'의 시대 배경은 대략 2540년쯤이다.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첨단 생명공학의 발달이다. 인간들은 더이상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라지 않는다. 모든 인간들은 시험관에서 수정되고 조건에 맞게 배양되어 조건반사 양육을 받으며 자라난다. 소설에 맨 처음에 등장하는 회색 빌딩의 중앙 현관 위에는 '런던 중앙 인공부화 · 조건반사 양육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방패 모양의 현판에는 '공유 · 균등 · 안정'이라는 세계 국가의 표어가 달려 있다. 이 두 가지가 '신세계'를 상징한다.

 

인간들이 인공부화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는 사실로부터 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화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필요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번거로운 자녀양육 의무가 뒤따르는 결혼제도도 사라진다. '만인은 만인을 위한 공유'가 세계 국가의 이념이다. 격정을 유발하기 마련인 '연인 관계'라는 것도 없다. 자유 연애가 보편적인 사랑의 형태이고, 섹스 파트너를 오래 독점하는 연인 관계는 사회적 지탄을 받거나 금기로 여겨진다. 첨단 의학의 발달 덕분에 인간의 신체는 육십이 되도록 젊음을 유지하지만 그 이후에는 '시체 처리소'로 직행한다. 죽음은 더 이상 회피하거나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점은 양육 과정에서 세심하고 철저하게 주입식으로 교육된다. 더군다나 부모, 자녀, 친인척이 따로 없는데 그토록 죽음을 슬퍼하고 연연할 이유 자체도 이미 사라지고 없다. 미래 세계는 강력한 중앙 통제 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무엇보다 공유와 균등과 안정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

 

미래 세계의 또다른 특징은 철저한 계급 사회라는 점이다. 전세계 인구는 20억 명으로 제한되며, 피라미드 식으로 이뤄진 각각의 계급에 필요한 인원은 철저한 사전 계획에 따라 생산되고, 조건반사 양육소에서 '각각의 계급에 가장 알맞은 정도로' 양육 받는다. 이러한 과정은 물론 오랜 시행착오 끝에 검증되고 정착된 시스템이다.

 

겨우 34층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회색 빌딩에서 시작된 미래 세계는 '런던 중앙 인공부화 · 조건반사 양육소' 소장의 안내를 받는 견습생들 덕분에 '첨단 생산 시설'을 두루 살펴보는 행운이 뒤따르지만, 센터 내부의 분위기는 실험실용 플라스트와 니켈과 스산하게 빛나는 도자기류뿐이다.

 

모든 것이 살벌함을 겨루고 있었다. 거기서 근무하는 자들은 흰 작업복을 입었고 손에는 시체같이 창백한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조명은 차갑게 죽어 있었다. 유령 바로 그것이었다.(7쪽)

 

도무지 등장 인물들 사이의 대화 조차도 없을 듯한 숨막히는 세계에서도 사건들은 일어나고 갈등이 생겨난다. 알파 계급에 속해 있으면서 최면교육 전문가로 근무하는 버나드 마르크스와 감정공학 대학의 감성교육 엔지니어인 헬름홀츠 왓슨은 신세계의 통치체계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약간의 반감과 혐오를 품은 인물들이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일종의 과잉상태에 있으며 스스로의 개성을 인식하고 있으므로 몰개성적인 통치 체계에 종종 비판적인 견해를 표출한다. 그들은 서로가 공감대를 가진 부분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차츰 그런 감정들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버나드는 성격마저 우울하고 소심한 데다 사교성이 부족한 탓에 또래의 여자들과 제대로 사귈 기회도 갖지 못한다. 사교적이면서 발랄한 처녀인 레니나는 수줍음이 많은 버나드에게 거꾸로 대쉬하지만 그녀를 쉽게 수용하지 못하고 겉으로만 맴돈다. 이들 커플은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해 휴가 기간 동안 뉴멕시코의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함께 놀러갈 계획을 세운다. 야만인들은 고도로 문명화된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는 철저히 분리된 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이며, 오랜 옛날의 생활 습관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격리된 채 살고 있다. 안내자들을 따라 조심조심 야만인들의 풍습을 둘러본 두 사람은 자신들의 방식과는 너무나 다른 생활 습관을 지닌 '야만인들의 풍속'에 기겁을 한다. 그곳은 몹시 불결할 뿐만 아니라 보기에도 흉측한 늙은이들도 많았고,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 기우제를 올리는 기이한 원시 풍속 등 어느 하나 낯설지 않은 게 없었다. 비록 레니나에게는 극도로 혐오스러운 모습일지 몰라도 예민한 감성을 지녔던 버나드는 도리어 그런 삶의 모습에 깊은 흥미를 품는다.

 

그들은 거기에서 오래 전에는 문명세계에 속해 있다가 언젠가 우연한 사고 때문에 거기서 정착해 살고 있는 린다라는 늙은 여성을 만난다. 그녀는 25년 전에 인공 부화 센터 소장이던 남자 친구와 함께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놀러 왔다가 그만 길을 잃는 바람에 끝내 실종 처리된 여성이었다. 베타 계급에 속했던 그녀는 거기서 존이라는 아들을 낳아 키웠지만 원주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온갖 간난고초를 겪으며 어렵게 생활해 왔던 터였다. 

 

그녀는 그곳 생활이 힘겨울 때마다 아들에게 문명 세계에서 지냈던 행복한 지난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곳으로 되돌아갈 날을 꿈꾸며 아들에게 글과 노래까지 가르쳐 준다. 그때 존이 심취해서 읽은 책이 셰익스피어 전집이었다. 존은 비록 책 속의 모든 내용을 전부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온갖 다채롭고 풍성한 감성들이 넘쳐나는 인간미 넘치는 세계를 동경하게 된다. 버나드와 레니나는 린다와 존을 설득시켜 그들을 마침내 문명 세계로 이끌고 나온다. 무료한 대중들의 폭발적인 관심과 연구 대상이 될 것임을 확신하면서.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어머니와 함께 핍박받고 따돌림을 당하며 살아오던 존에게는 '런던으로 가겠느냐'는 버나드의 제안이 더없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문명세계로의 이주 제안에 대해 존이 감격에 벅차 내뱉은 대답이 바로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서 미란다가 외쳤던 말이었다. 멋진 신세계!

 

"오오,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존이 말했다. 그의 눈에서는 광채가 났고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 훌륭한 피조물이 여기에 있는가! 인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피조물인가!" 그의 홍조는 갑자기 더욱 깊어졌다. 그는 레니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진한 초록색 인조견 옷을 입고 피부는 젊음과 영양크림으로 윤기 있고, 포동포동하고 자애롭게 미소짓는 천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음성이 더듬거리고 있었다. 

 

"오오, 멋진 신세계여!" (177쪽)

 

버나드와 레니나 덕분에 '야만인 보호 구역'에서 문명 세계로 끌어올려진 존과 린다는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도리어 더욱 난처한 상황에 처하고 만다. 린다는 늙고 뚱뚱한 데다가 모습마저 추하게 일그러져 문명세계에서는 한낱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전락한다. '야만인 씨'로 불리는 존도 마찬가지다. 체제 부적응자로 분류된 버나드는 언제라도 험지 아이슬란드로 전출당할 위기를 의식하고 있었고, 그런 좌천 발령을 모면하기 위해서라도 존을 활용한 실적 쌓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영문도 모르고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존은 문명 세계로 올 때부터 미모에 이끌렸던 레니나에게 차츰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자신도 모르게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를 자주 중얼거리면서.)

 

촉감 영화관에서 존과 함께 데이트를 즐긴 이후로 레니나는 존이 자신을 연모하고 있다는 걸 확실하게 알아챈다. 자유 연애에 익숙한 레니나는 오래 고민할 겨를도 없이 적당한 기회를 틈타 야만인의 방으로 먼저 찾아간다. 그러나 정작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상태였던 존은 제발로 찾아온 그녀를 극도로 혐오하고 도리어 밀쳐낸다. 연애 단계에서 반드시 거쳐야만 마땅할 듯한 섬세한 밀당 단계가 생략된 걸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런 희극적인 모습이야말로 가치관이 전도된 문명 세계와 야만인 사이에 펼쳐지는 '아이러니의 극치'다.

 

"기절할 때까지 키스해줘요. 오! 내 사랑, 안아주세요. 아늑하게 ……."

 

야만인은 그녀의 팔목을 잡더니 어깨를 잡았던 그녀의 손을 풀고 팔을 뻗어 그녀를 거칠게 밀었다.

 

"오! 아파요! 당신은 나를…… 오!" 그녀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공포로 인하여 고통도 잊은 상태였다. 눈을 떴을 때 그의 얼굴이 보였다 ㅡ 아니, 이것은 그의 얼굴이 아니었다. 전혀 낯선 인간의 창백하게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미친 듯한 분노로 경련하는 얼굴이었다.(245∼246쪽)

 

존은 문명 세계의 사람들이 불편한 감정을 잊고 행복감에 빠져들도록 도와주는 '소마'를 배급하기 위해 모여든 인조 인간들을 향해 분노를 가득 담아 외친다. 소마는 행복을 주는 약이 아니라 독약이라고. 그렇게 소동을 부린 끝에 존은 버나드와 헬름홀츠와 함께 서유럽 통치자인 무스타파 몬드에게 불려간다. 총통의 서재로 안내된 야만인 존은 도리어 총통을 향해 '인간다운 삶'을 역설하고, 몬드는 한편으로는 야만인의 주장을 인정하면서도 감정의 기복조차 느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안정된 문명세계가 더 행복하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행복을 위해서는 예술, 과학, 종교까지도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신의 존재까지도. 그들 사이의 격론은 야만인 존이 마침내 다음과 같이 외칠 때까지 계속된다.

 

"하지만 저는 불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 총통이 말했다.

 

"우리는 여건을 안락하게 만들기를 좋아하네."

 

"하지만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

 

"그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야만인은 반항적으로 말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305쪽)

 

야만인은 마침내 그곳을 견디지 못하고 멀리 외딴 데로 도망친다. 그러나 그곳도 끝내 안전한 곳은 되지 못했다. 언론의 집요한 추격을 피하지 못한 그는 열광적인 취재 열기에 시달리다 끝내 자살하고 만다. 그가 은신처로 피난하기로 결심하면서 버나드에게 했던 말은 이랬다.

 

"나는 문명을 먹었어."

"문명이 나에게 독을 먹였어. 그래서 나는 오염되고 말았어."

 

『멋진 신세계』는 1949년에 쓰인 조지 오웰의 『1984』보다는 조금 덜 우울하다. 오웰의 작품에서 나타난 1984년의 세계는 실제 세계보다 훨씬 더 암울하게 그려져 있다.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고도의 전체주의 지배 체제 하에서는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이 스크린을 통해 철저하게 감시받고 통제되며, 체제에 순응하지 못하는 반체제 인사들은 사상 경찰들을 통해 색출되고, 혹독한 고문을 거쳐 개조되거나 끝내 흔적도 없이 제거된다. 거기엔 어떠한 자유나 방임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올더스 헉슬리가 그린 미래 세계는 비록 전체주의 지배 체제인 점에선 닮아 있으나,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끝에 도래하는 '인간 본연의 삶이 파괴된 황량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기술 문명이 발달할수록 더욱 강조되기 마련인 공유와 안정 같은 가치들이 도리어 궁극적으로는 인간다운 삶 자체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만다는 헉슬리의 경고는 미래로 나아갈수록 점점 더 강한 설득력을 얻을 주제임에 틀림없다. 또한 헉슬리가 내다본 까마득한 미래 세계는 우리의 생각보다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다. 시험관 아기는 어느새 보편적인 자녀 획득 방식으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유전공학을 비롯한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은 질병과 노화에 대한 극복 능력을 갈수록 확대하고 있으며, 인간 생활의 편리함과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생명공학이라도 기꺼이 감수할 정도로 첨단 과학 기술에 대한 숭배가 과도한 측면도 간과하기 어렵다.

 

올더스 헉슬리가 쓴 『멋진 신세계』가 출판된지 겨우 87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세상은 온갖 혁신적인 기술들로 넘쳐나는 판국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주인공들이 즐겼던 '촉감 영화관'은 현실 세계에서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으며,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과 같은 실감형 기술들도 앞을 다투듯 현실화되고 있다. 그러나 자율주행과 인공지능에 기반을 두고 움직이는 미래 기계 문명은 사소한 사고 하나로도 끔찍한 대혼란을 일으킬 위험을 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만인은 만인을 위해 공유한다'는 공유 이념 또한 마냥 좋을 리만은 없다.

 

『멋진 신세계』는 탄탄한 서사가 뒷받침된 멋진 소설이라기보다는 예언적 우화에 가까운 소설이다. 또한 작품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작품 속엔 작가 특유의 유쾌한 아이러니가 곳곳에 가득하다. '멋진 신세계'를 꿈꾸며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벗어나 고도 문명 사회로 뛰어든 존이 도리어 그 세계를 지배하는 총통에게 대들듯이 싸우며 '과학과 철학과 종교의 가치를 역설'하는 장면은 얼마나 역설적인가. 홀로 독학하다시피 셰익스피어를 탐독한 그는 인간 삶의 궁극적인 본질들을 절묘하게 꿰뚫는 듯한 명대사들을 아무 때라도 주저없이 쏟아낸다. 그때마다 문명인들은 야만인 청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한다. 야만인 존은 비록 문명세계로부터 격리된 곳에서 외계인 취급을 받을 정도로 고통을 겪으며 자랐지만 셰익스피어로 상징되는 문학의 힘을 통해 인간 삶의 본질을 터득한다. 인간의 행복이란 결코 그저 얻어지는 알약 같은 것이 아니며, 행복과 고뇌와는 표리관계에 있다는 사실 말이다.

 

끝내 문명 세계의 공기를 견디지 못한 야만인이 목을 매고 자살하는 결말이 너무 비참하게 여겨졌던 탓일까. 올더스 헉슬리는 이 작품을 출간한지 14년이 흐른 뒤 이 소설의 재판본 서문에 작가의 입장을 새롭게 추가했다. 『멋진 신세계』를 처음 쓸 때만 하더라도 야만인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 밖에 없었다고. 문명국에서 미치거나 야만국으로 컴백하거나. 그러나 다시 그 작품을 쓴다면 제3사회의 존재를 설정하겠노라고. 문명국으로부터의 망명자나 도망자들이 건설하는 세계를. 그런 작업으로도 부족했던 것일까. 작가는 1958년에 기어이 새로운 작품을 하나 더 썼다. 그 작품의 이름은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였다. 인간의 주요 관심사들에 대하여 그처럼 빠짐없이 의견을 표명한 인물도 찾기 어렵다. 미래의 고도 문명 사회가 어떠한 모습일지 궁금한 독자들은 한번쯤 올더스 헉슬리가 창조한 '멋진 신세계'를 다녀올 필요가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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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2-15 1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984』는 읽었는데『멋진 신세계』는 읽지 못했어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305쪽) - 그야말로 뒤집힌 생각이네요. 우리 고정관념의 반전을 보여 주네요.


oren 2019-02-15 14:35   좋아요 1 | URL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1984』는 이미 지나간 과거를 ‘다가올 미래‘로 그린 소설이 되어버렸지만,
『멋진 신세계』는 여전히 다가올 미래를 그린 소설이라는 점에서 더 오래 살아남지 싶어요.^^
그렇다고 조지 오웰의 작품이 올더스 헉슬리보다 덜 뛰어나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두 작품 모두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계의 모순‘을 적나라하면서도 심오하게 파헤친 작품이나까요.

외유내강 2019-07-02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930년대에 미래를 예언한 소설이기만 하지만 과학과 기술 등의 문명의 발달이 가져온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측면에서는 예측이 딱 들어맞는거 같아요. 인간의 행복이 단순히 알약하나로 얻어지는 미래세계가 읽는사람 입장에서는 지구 밖에서 객관적으로 보기 때문에 무섭게 느껴지지만 정작 내가 그 속에 살고 있는 알파나 베타 같은 사람이였다면 그게 무서운지도 모르고 훈련받은대로 만족하며 살았을꺼 같아요...모든 사람들이 회의를 품지 않는 안정된 틀 속에서 의심을 품거나 의식을 가지고 체제를 거부하기란 쉽지 않을듯 하거든요..어쩌면 우리 모두 점점 멋진 신세계로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진입하고 있는지도 모를거란 생각이 듭니다.

oren 2019-07-02 18:10   좋아요 0 | URL
쓰여진지 100년 가까이 지난 소설인데도 오늘날의 여러 ‘실제 상황들‘을 날카롭게 예견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놀라운 소설임에는 분명한 듯합니다.^^
 
댈러웨이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8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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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여, 내 너에게 뛰어들리라,

패배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서!

 - 버지니아 울프의 묘비명

 

버지니아 울프(1882∼1941)

 

 * * *

 

버지니아 울프는 이야기할 게 아주 많은 작가이다. 그녀는 자신이 쓴 작품들보다 자신의 생애를 둘러싼 책들이 더 많이 출간될 정도로, 그 이름만으로도 많은 호기심을 자아내는 작가다. 그녀는 19세기 말에 태어나 2차 대전 중에 홀연히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리 오래된 작가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21세기에 와서도 그녀가 쓴 작품을 바탕으로 꾸며낸 멋진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작품의 작가, 그 작품을 읽는 독자, 그 작품의 주인공이 동시에 등장하는 매혹적인 이야기는 니콜 키드먼 주연의 『디 아워스』라는 이름으로 개봉됐고. 그 영화의 원작을 쓴 마이클 커닝햄은 그 작품으로 퓰리처 상과 펜 포크너 상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그녀는 21세기 들어 더욱 확산되고 있는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로도 유명하다. 여성이 작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은 에세이 『자기만의 방』은 '페미니즘 비평의 고전'이 된지 오래다.

 

그러나 그녀는 문학외적인 영향 보다는 문학 자체로도 커다란 업적을 남긴 탁월한 작가였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20세기 초반에 갑자기 터져 나온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 중 한 명이었다.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 프란츠 카프가(1883∼1924),  제임스 조이스(1882∼1941), T. S. 엘리엇(1888∼1965) 등으로 대표되는 쟁쟁한 거장들이 그녀와 함께 새로운 문학의 흐름을 주도했다.

 

그녀는 19세기의 보수적인 교육 풍토 탓에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 대신 학자이자 비평가였고 이름난 문필가였던 부친 덕분에 어려서부터 지적인 자극을 흠뻑 받으며 성장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집엔 당대를 대표하는 문사들의 출입이 잦았다. 다윈 이후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였던 토머스 헉슬리도 부친과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왕립학회 회장을 지낸 토머스 헉슬리는 다윈의 『종의 기원』(1859년) 서문에도 등장한다. 『멋진 신세계』를 쓴 올더스 헉슬리는 그의 손자다. 『댈러웨이 부인』에도 찰스 다윈과 토머스 헉슬리가 잠깐 등장한다.)

 

10대와 20대에 부모를 차례로 잃은 버지니아 울프는 언니 바네사를 따라 블룸즈버리로 이사했고, 여기서 그 유명한 블룸즈버리 그룹이 탄생한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니던 오빠의 친구들이 집으로 드나들었고, 버지니아 울프는 언니 바네사와 함께 그들이 나누던 예술과 철학과 문학 토론 모임의 안주인 역할을 떠맡았다. 여기엔 저명한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즈와 소설가 E.M. 포스터도 끼어 있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1912년에 블룸즈버리 그룹의 멤버였던 레너드 울프와 결혼한다. 그는 작가이자 잡지 편집인이자 좋은 남편이 되었고, 결혼 후 재미 삼아 시작한 <호가스 출판사>는 점차 번성하여 T. S. 엘리엇의 『황무지』를 출판하는 등 일류 작가들의 등용문으로 발전했다.

 

비범한 성격과 용모를 지녔을 뿐만 이나라 화가인 언니 바네사와 함께 블룸즈버리 그룹의 중심 인물이 된 그녀는 문학과 예술의 첨단 조류를 이끌면서 활기찬 삶을 살았으나 끝내 만성적인 정신 분열증을 극복하지 못했다. 30년 가까이 병약한 아내를 대신해서 살림을 떠맡고 창작을 격려해 줬던 남편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 속엔 그녀만의 깊은 고뇌가 담겨 있었다. <나는 정말로 다시 미쳐 가는 것 같아요. ……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인생을 망칠 수 없어요.> 아침 일찍 집을 나선 그녀는 주머니에 돌멩이를 가득 넣은 상태로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 1941년 3월 28일이었다.

 

1925년에 발표한 『댈러웨이 부인』은 그녀의 실험 정신이 낳은 대표적 걸작이다. 이 작품은 1922년부터 오랜 시간 동안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쓴 역작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당대 작가들은 '쓸데없는 것들을 묘사하는데'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바람에 정작 가장 중요한 '인생의 진실'을 포착하는 데는 실패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마음속을 들여다보세요. 그러면 삶이란 전혀 <이러한> 게 아닌 듯합니다. 여느 때 여느 마음을 잠시 살펴보세요. 마음은 갖가지 인상들을 받아들입니다 ㅡ 사소한 것, 환상적인 것, 덧없는 것, 또는 날카로운 강철로 새긴 듯한 것. 사방에서 그런 인상들은 마치 무수한 원자들의 그치지 않는 소나기처럼 밀어닥치고, 그런 소나기가 월요일 또는 화요일의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 강조점이 달라질 수밖에요. …… 그 가변적이고 알 수 없는, 한계가 지어져 있지 않은 영혼을, 비록 그것이 다소 상궤를 벗어나고 복잡하더라도, 가능한 한 외적이고 무관한 것과 뒤섞이지 않게끔 전달하는 것이 소설가의 임무가 아닐까요.(「현대 소설론」)

 

 

<새로운 소설을 위한 새로운 형식>으로 시도한 실험적 작품은 1921년 말에 완성하고 이듬해 10월에 출간된 『제이콥의 방』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 해에는 공교롭게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T.S. 엘리엇의 『황무지』 등이 동시에 출간된 해였다.(프루스트는 같은 해 11월에 사망했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5년 뒤에 출간됐다.)

 

새로운 방법에 확신을 얻은 버지니아 울프는 1922년 8월에 『댈러웨이 부인』을 창작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작업은 아주 더디게 진행되었다. <너무 많은 생각들>을 그 작품에 집어넣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하나씩 해결책을 찾아 나갔다.

 

<나는 내 인물의 등 뒤에 아름다운 동굴을 판다. 그럼으로써 내가 원하는 바로 그것을, 인간다움과 유머, 깊이 등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요는 그 동굴들이 서로 이어지고, 각기 현재의 순간에 밝은 데로 나온다는 것이다.>

 

1925년 5월에 출간된 『댈러웨이 부인』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나 부정적인 평가도 뒤따랐다. 3년 앞서 출간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의 비교를 피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제임스 조이스의 <사실주의적 활력>의 <유치한 아류>로 평가되기도 했다. 울프 또한 『율리시스』를 잘 알고 있었고, 「현대 소설론」에서 제임스 조이스를 자기 세대의 대표적인 작가로 내세우며 인정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율리시스』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여드름을 긁어 대는 역겨운 학부생>에 대해 느끼듯 짜증이 나고 환멸을 느낀다거나, <실패작, 천재성은 있지만 질이 낮다. 산만하고 찝찔하고 젠체하며 상스럽다>는 악평까지도 서슴치 않았다.

 

실제로 『댈러웨이 부인』과 『율리시스』는 많이 닮았다. 무엇보다도 '의식의 흐름 기법'과 '내적 독백'이라는 독특한 형식이 닮았다. 작품의 시공간적 구도도 닮았다. 『율리시스』는 1904년 6월 16일의 더블린이 주무대다. 『댈러웨이 부인』은 1923년 6월 중순의 어느 하루, 런던에서의 아침부터 저녁까지가 배경이다. 『율리시스』의 남자 주인공인 레오폴드 블룸이 아내 몰리와의 옛 추억이 담긴 '호우드 언덕'을 자주 떠올리는 것과 『댈러웨이 부인』의 남자 주인공 피터 월시가 첫사랑 클라리사와의 추억이 담긴 '부어턴'을 자주 떠올리는 것도 닮았다.

 

『율리시스』가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 대한 현대판 오마주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면, 『댈러웨이 부인』에서도 뚜렷하지는 않지면 호메로스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우선, 클라리사의 첫사랑인 피터 월시가 오랜 방랑을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클라리사에게로 돌아오기 위해 애쓰는 점이 그렇다. 비록 남의 아내가 되어 있지만 피터의 '영원한 고향'은 언제나 클라리사한테 고정되어 있다. 이미 '댈러웨이 부인'이 된 지 오래인 클라리사도 마찬가지다. 마치 정절을 지키며 바느질로 소일하는 페넬로페처럼 그녀는 자신의 드레스를 고치며 피터 월시를 그리워한다. 클라리사는 그녀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자주 다락방으로 올라간다. <침대는 좁았고 …… 아이를 낳았는데도 여전한 처녀성이 새하얀 시트처럼 자신을 감싸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점들 말고도 『댈러웨이 부인』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닮은 점은 더 있다. 그 어떤 작가들보다 셰익스피어가 유난히 자주 인용된다든지, 주인공의 옛 애인이 작품 전체에서 골고루 출몰한다든지 하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그 두 작품 사이의 몇몇 유사성은 사실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인생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과감한 문학적 시도에서 이 정도는 얼마든지 우연의 일치로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율리시스』와 『댈러웨이 부인』 사이의 차이점은 유사한 점들에 비해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거론하기도 벅찰 정도이다.

 

무엇보다 『율리시스』는 작품의 규모나 방대함, 주제의 다양함에서 『댈러웨이 부인』과 비교되지 않는다. 『율리시스』에는 인간의 삶을 둘러싼 거의 모든 문제들이 총망라된 느낌이 든다. 거기엔 탄생과 죽음뿐만 아니라 문학, 예술, 종교, 역사, 음악, 정치, 의학 등 온갖 분과 학문들이 한꺼번에 마구 뒤섞여 들끓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델러웨이 부인』은 그 주제가 오로지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데로 오롯이 모아져 있다. 그걸 설명하는데 쓰이는 핵심 도구들은 피터 월시와 클라리사의 사랑, 클라리사가 준비한 파티, 전쟁에서 귀환한 셉티머스의 자살 등이다.

 

『댈러웨이 부인』은 난해하거나 과시적인 요소가 없다는 점에서 보면 『율리시스』보다는 훨씬 읽기 쉬운 작품이다. 독자가 겪는 유일한 어려움 한 가지는 '카메라의 앵글'이 너무나 자주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옮겨 간다는 점이다. 카메라는 그저 단순히 등장 인물들의 어깨 위로만 옮겨 다니지는 않는다. 옮겨 간 사람의 머릿속으로 잠입하기도 한다.(정신 분열증을 앓고 있는 셉티머스에게서 이런 경향이 유독 두드러진다.) 그 점에만 주의를 기울이면 충분하다. 가끔씩 카메라가 시공간을 통째로 옮겨갈 경우도 더러 있지만 그걸 따라가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댈러웨이 부인은 런던에 사는 쉰두 살의 여성이다. 최근에 심장병을 앓고 난 후로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셀 정도로 부쩍 늙긴 했지만 영국 상류층의 부인다운 외모는 여전히 아름답다. 그녀는 아침 일찍부터 꽃을 사러 집을 나선다. 그날 저녁 자신의 집에서 열릴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시작된 소설 속의 이야기는 클라리사의 행동 반경을 따라, 혹은 빅벤에서 매시각 울리는 종소리를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런던 시내의 평온한 일상들을 비추면서 아주 차분하게 진행된다. 이런 하루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결국 우리의 삶이 된다는 것처럼.

 

그런 평온 속에서도 갑자기 삶을 뒤흔드는 건 뇌리에 깊이 박힌 어느 한 때의 잊지 못할 기억들이다. 한때 클리라사의 삶을 송두리째 차지했던 피터 월시와 샐리 시튼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하며 사는지? 상쾌한 아침 공기를 느끼는 순간 그녀는 곧장 30여 년 전의 과거 속으로 풍덩 뛰어든다. 그때만큼 삶의 에너지가 충만한 때는 다시 없었다.

 

얼마나 유쾌했는지! 마치 대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그런 느낌이었다. 부어턴에서 프랑스식 유리문을 열어 젖히고 ㅡ 그 문의 경첩이 약간 삐걱대는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만 같다 ㅡ 활짝 열린 대기 속으로 뛰어들 때면 언제나 그런 기분이 들곤 했다. 이른 아침의 공기는 얼마나 신선하고, 얼마나 고요했던지. 물론 오늘 아침보다도 더 조용했었다. 파도의 찰싹임처럼, 파도의 입맞춤처럼. 싸늘하고 날카롭고 그러면서도 (당시 열려덟 살이던 소녀에게는) 엄숙했다. 저기 그렇게 열린 창문 앞에 서 있노라면 무엇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꽃들과, 나무들과, 나무들을 감돌아 지나가는 연기와, 갈까마귀들이 날아오르고 내리는 것을 바람보며 서 있노라면. 그때 피터 월시가 물었다. 「채소밭 가운데서 명상하는 거야?」ㅡ 그렇게 말했던가? ㅡ 「난 꽃양배추보다는 사람들이 더 좋아.」ㅡ 그렇게 말했던가?(7∼8쪽)

 

 

이렇게 갑자기 불려 나온 과거 속의 인물인 피터 월시는 한때 클라리사와 결혼할 뻔한, 지금도 여전히 잊지 못하는 첫사랑의 남자였다. 한때는 온 세상을 개혁할 것처럼 자신감이 넘쳤고, 언제나 클라리사를 너무 감상적이라고 몰아세웠던 당당한 남자, 나중엔 결국 옥스퍼드에서 퇴학 당하고 인도로 떠난 남자, 불행한 결혼 끝에 지금은 영락하고 만 불쌍한 처지의 남자가 피터 월시였다.

 

그녀는 세인트제임스 파크에서 여전히 논쟁을 벌이면서, 그와 결혼하지 않은 것이 옳았다고 ㅡ 또 그래야 했다고 ㅡ 결론을 내리곤 했다. 왜냐하면 결혼해서 날이면 날마다 한집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는 약간의 방임, 약간의 독립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리처드는 그녀에게, 그녀는 그에게, 그런 여유를 허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피터와는 모든 것이 공유되어야 했고 모든 것이 설명되어야 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고, 그 작은 정원의 분수 곁에서 말다툼이 벌어졌을 때는 그와 절교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둘 다 파멸해 버렸을 것이다. 분명히 그랬다. 그 슬픔을, 그 고뇌를 여러 해 동안이나 가슴에 박힌 화살처럼 지녀야 하기는 했지만.(13∼14쪽)

 

 

부어턴을 떠올리면 클라리사는 언제나 아름다움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열여덟 소녀 시절을 그토록 황홀하게 수놓았던 그 모든 것들과 함께. 첫사랑 피터 월시, 절친 샐리 시튼, 지금은 남편이 된 리처드 댈러웨이, 심지어 늙은 고모님까지도. 그런데 별다른 소식조차 없던 피터가 런던으로 돌아온다는 소문이 그녀의 머리 속에 갑자기 떠올랐다.

 

그가 곧 돌아온다지. 유월, 아니면 칠월? 잊어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하필이면 파티 준비로 정신이 없던 와중에 피터가 불쑥 클라리사를 찾아 온다. <누구지 ㅡ 대체 누가> 파티를 여는 날 아침 11시에 이런 식으로 방해하는 사람이? 오, 맙소사! 그가 이렇게 아침 일찍 예고도 없이 찾아오다니! '그를 보자 그녀는 그렇게도 놀라고, 기쁘고, 수줍고, 어리둥절했다.'

 

불행한 처지로 런던에 되돌아온 첫사랑의 남자와 클라리사의 만남은 안타깝게도 그리 길지는 못했다. 열일곱 살 딸아이가 불쑥 끼어드는 바람에. 그러나 불쌍한 피터 월시가 클라리사 앞에서 까닭 모르게 한바탕 눈물을 왈칵 쏟아낼 틈마저 없었던 건 아니다.( <정말이지 자기도 모르게, 억누를 수 없이 솟구치는 힘에 북받쳐서, 그는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울고 또 울었다. 아무 부끄러움 없이, 소파에 앉은 채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피터와의 짧은 만남 이전에 클라리사의 머릿속에 피터와 함께 떠오른 옛 친구는 샐리 시튼이었다. 그녀는 여러모로 놀라운 능력을 지닌 여자 친구였다. 클라리사에게서는 도무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재능과 개성들을 지닌 그녀. 샐리는 정말이지 사람들을 너무 자주 놀라게 했다.

 

돌이켜 보면 신기한 것은 샐리에 대한 감정의 순수함, 그 완전함이었다. 그것은 이성에 대한 감정과는 달랐다. 전혀 사심이 없고, 여자들, 막 사춘기를 지난 여자들 사이에나 존재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 편에서는 다분히 보호자 같은 감정이기도 했다. 둘만의 연맹이라도 맺은 듯한 느낌, 자신들을 갈라 놓을 무엇인가에 대한 예감(그들은 결혼을 항상 파탄으로 이야기했다)에서 생겨난 이 기사도적인 감정은 샐리보다는 주로 그녀 편에서 느끼는 것이었지만. (48∼49쪽)

 

 

샐리와 함께라면 클라리사는 심지어 이런 느낌까지 들곤 했다. <만일 지금 죽어야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때이리> 그러나 그날 저녁 파티에서 다시 만난 샐리는 실제로 어땠는가. 까마득한 옛날 부어턴에서 함께 보았던 꽃양배추를 보고 '거친 청동 같다'고 말할 정도로 문학적이었던 그 소녀는?

 

이름이 뭐라고? 레이디 로시터? 도대체 레이디 로시터가 누구지?

 

「클라리사!」 아, 저 목소리! 샐리 시튼이었다! 샐리 시튼! 대체 몇 년 만인가! 그녀의 모습은 안개라도 통해 보듯 어슴푸레했다. 그녀가 아는 샐리 시튼은 저런 모습이 아니었다. 클라리사가 더운 물병을 손에 쥐고서 그녀가 이 지붕 아래 있어, 이 지붕 아래! 하고 가슴 뛰며 생각하던 시절의 샐리는 저렇지 않았는데!

 

서로 얼싸안고, 당황하고, 웃어 대는 동안,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ㅡ 런던을 지나는 길이었어, 클라라 헤이든한테서 들었지. 널 만날 절호의 기회잖아! 그래서 불쑥 끼어들었어 ㅡ 초대도 안 받고 …….(223쪽)

 

 

클라리사가 그날 저녁 파티에 참석하는 손님들을 맞이할 때까지 얼마나 더 피터 월시와 샐리 시튼과 (남편인) 리처드 댈러웨이를 머릿속에 떠올렸는지, 혹은 파티에 초대한 사람들이 얼마만큼 멋진 모습으로 나타날지. 혹은 매시각 어김없이 울려퍼지는 빅밴의 종소리가 그날 하루 런던 시내를 오가는 뭇 사람들의 귓가에 어떤 색조로 들렸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결국 중요한 건 삶이 클라리사와 피터와 샐리처럼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난 바로 그 때문에 파티를 여는 거야.」 그녀는 삶을 향해 소리내어 말했다.

 

방 안에 갇혀 소파에 가만히 누워 있자니, 그처럼 명백하게 느꼈던 삶이라는 것이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듯 느껴졌다. 그것은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옷자락처럼 휘감고, 화창한 모습으로, 뜨거운 숨결로, 속삭이면서, 커튼을 휘날리게 했다. 그러나 만일 피터가 그녀에게 <좋아, 좋아. 하지만 당신의 파티들은, 대체 그 파티들은 무슨 의미가 있지?> 하고 묻는다면, 그녀는 (아무도 이해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지만) 그건 하나의 봉헌이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을 것이고, 그 말은 한심할 만큼 막연하게 들릴 것이었다. 하지만 피터가 무슨 자격으로 인생이란 그저 단조로운 항해라고 주장할 것인가? 당신 사랑은 어떻고요? 하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면 그의 대답은 뻔했다. 그거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며 여자들은 도저히 이해 못한다고. 뭐 그렇다고 해두자. 하지만 그렇다면 그녀가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어떤 남자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160∼161쪽)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도 이런 것들이었다.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삶, 사람들 사이의 고독, 서로의 눈에 비치는 그 인간적인 왜소함과 나약함 등.> 삶의 표층 아래에 도사린 온갖 모순들은 비단 주인공들에게서만 발견되는 게 아니다. 레이디 브루턴의 무리한 이주 계획, 속물주의의 극치인 휴의 예법과 교양,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셉티머스에 대해 '권위'로 억압하는 닥터 훔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작중 인물 가운데 가장 불행한 인물은 클라리사의 파티가 시작되려는 바로 그 시각에 홀연 창밖으로 몸을 던진 셉티머스다. 그의 자살은 결국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를 결여한 닥터 훔스의 잘못된 권위와 횡포 때문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셉티머스의 죽음으로부터 도리어 삶을 긍정하는 미학을 얻는다. 셉티머스가 전쟁 후유증으로 삶에 적응하지 못해 고통받는 모습은 클라리사와는 전혀 별개로 따로 떨어진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 또한 매시각 늙어가는 중이며, 언젠가 마주칠 죽음이 두렵긴 마찬가지였다. 그런 두려움에서 그녀를 벗어나게 해 주는 유일한 방법은 살아있는 순간들 자체를 즐기는 것 뿐이다. 흩어져 가는 순간들과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살아 있는 그 순간들을 배합하는 파티는 그런 노력의 일환이자 그녀의 유일한 재능이었다.

 

이제 블라인드를 내렸다. 시계가 종을 치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자살을 했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계가 시간을 알린다, 한 점, 두 점, 석 점. 그녀는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여전히 계속되는 것이다. 저기! 노부인이 불을 껐다! 온 집이 어두워졌다. 이 모든 것이 여전히 계속되는 가운데, 하고 그녀는 되뇌었다. 그러자 그 말이 떠올랐다. 태양의 열기를 더는 두려워 말라. 손님들에게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얼마나 특별한 밤인가! 그녀는 왠지 그와 ㅡ 자살을 한 청년과 ㅡ 아주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이,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린 것이 기뻤다. 시계가 종을 쳤다. 납처럼 둔중한 원이 공중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가봐야 했다. 손님들과 어울려야 했다. 샐리와 피터를 찾아야 했다.(243쪽)

 

 

『댈러웨이 부인』은 삶의 이면에 감춰진 꿈처럼 형체 없는 느낌들을 극도로 예민한 감각으로 포착한 걸작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한 번만 읽어서는 작가가 의도한 바를 충분히 음미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놀랍도록 정교하게 직조해 놓은 아름다운 무늬들이 단번에 드러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녀가 문장들 사이로 미묘하게 이어놓은 거미줄처럼 세밀한 가닥들은 아침 햇살이 환하게 비칠 때만 아주 가끔씩 그 모습을 드러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의 깊게 읽는 독자들이라면 그녀의 문장들이 얼마나 섬세하며, 인물들 사이를 연결해 놓은 가느다란 거미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물방울들을 매달고 있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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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8 0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렌님 땜에 <댈러웨이부인> 곧 지르지 않을까 싶네여 ㅎㅎ👍

oren 2019-02-08 11:26   좋아요 1 | URL
카알벨루치 님도 분명 좋아하실 꺼에요.
처음 읽을 때보다, 두 번째 읽을 때 더 재미있는 신기한 소설이에요.^^

hnine 2019-02-08 0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댈러웨이 부인> 저는 지금 영화로 보고 있는 중이예요. youtube에서 한글 자막 제공 안되는 공짜 영화로 보다보니 이해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oren님 이 글 읽으며 참고가 많이 되겠습니다.

oren 2019-02-08 11:42   좋아요 0 | URL
일단은, 한글 자막 안 나오는 영화를 보실 수 있는 hnine 님의 영어 실력이 부럽습니다.^^

저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동안에 그 옛날 딱 한 번 가봤던 ‘런던 시내 풍경‘이 문득 문득 떠올라서 괜스레 기분이 좋더군요. 버킹검 궁전, 웨스트민스터 사원, 세인트폴 성당, 빅벤, 하이드 파크, 리젠트 파크, 등등.

hnine 님께서는 런던에서 직접 살아보기도 하셨으니, 이 소설을 읽는 재미가 아주 특별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런던 시내가 주요 배경으로 아주 디테일하게 그려져 있으니 말이지요.

『댈러웨이 부인』은 잇따라 두 번 읽고, 리뷰까지 다 쓰고 나서도 그 여운이 오래 남더군요. 그래서 결국 『The Hours』라는 영화를 찾아봤어요. 그런데 그 영화는 생각보다 너무 우울하게 그려져 있어서 적잖이 놀랐답니다. 시종일관 무한반복처럼 흐르는 음악까지도요.
 
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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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1821∼1881)

 

 

도스토예프스키는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젊어서부터 삶이 송두리째 요동치는 고통들을 겪었다. 16세때 인자한 어머니를 잃었고, 2년 후에는 아버지까지 농노들에게 살해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의지할 사람이라곤 형 하나밖에 없었고, 이 무렵부터 간질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해 평생 동안 그 질병에 시달렸다. 스물여덟이던 1849년에는 몽상적인 과격파 청년들의 비밀단체에 가입했다가 긴급 체포되었고, 재판 끝에 사형 선고를 받은 뒤에는 총살형 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구제되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서 4년 동안 혹독한 강제노역을 겪은 뒤 출옥하고 나서도 시베리아 전선에 주둔 중인 군대에 배치되어 4년을 더 복무했다. 그가 예전의 신분이었던 세습 귀족으로 되돌아온 건 체포된 뒤 8년이 지난 1857년, 36세때였다.

 

그는 마침내 1859년에 뻬쩨르부르그로 되돌아온다. 그때부터 그는『가난한 사람들』, 『죽음의 집의 기록』, 『지하로부터의 수기』등을 잇따라 발표하고, 1866년 1월부터 『죄와 벌』을 연재하기 시작해 그해 12월에 완결한다. 『죄와 벌』을 집필하는 동안에도 늘 곤궁했던 그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악덕 출판업자와 소설 출판 계약을 맺는데, 이때 출판사와 약속한 소설을 제때 끝내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속기사를 고용한다. 그 덕분에 그는 『죄와 벌』을 연재하는 와중에도 29일 만에 거뜬히 『노름꾼』을 탈고할 수 있었고, 그때 한 달 가까이 속기를 맡았던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곧바로 결혼한다. 45세이던 그해야말로 작가에게는 여러모로 삶에 이정표를 세운 해였던 셈이다.

 

『죄와 벌』 또한 여러모로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살인을 다룬 문학작품 가운데 이토록 유명하고도 널리 알려진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작품에 필적할 만한 작품으로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부친 살해를 다룬 저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품인 『오이디푸스 왕』까지 떠올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소포클레스의 비극이 제아무리 살인과 깊은 연관이 있는 주제를 다룬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오이디푸스의 운명적인 비극은 다른 두 작품과는 그 성격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그 핵심 주제가 야망으로 표현되는 권력욕을 다룬다는 점에서도 일견 『죄와 벌』을 닮은 데가 있다. 왜냐하면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의 살해 동기 속에도 '나폴레옹이 되려는 권력욕'이 은연중에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맥베스와 달리 라스꼴리니꼬프의 범죄 동기는 그보다 훨씬 더 순수하면서도 어리석을 만큼 비현실적이고 몽상적이라는 점이 다르다.

 

맥베스는 권력을 뺏기 위해 아무런 죄가 없던 덩컨 왕을 죽이고, 더 나아가 맥더프 부인과 어린 아들까지 살해하지만, 결국에는 '살인'을 저지른 직후부터 극심한 공포에 시달리다가 자신마저 맥더프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점에서 오롯이 파멸적인 비극이다. 그러나 아무런 죄가 없는 노파를 죽인 뒤 돈을 훔쳐 자신의 암울한 현실을 일거에 타개하려던 청년 라스꼴리니꼬프는 맥베스와는 조금 다르다. 살인을 저지른 직후부터 휴학생 신분에서 졸지에 끔찍한 살인죄를 저지른 추악한 범죄자로 전락한 주인공은 거기서 단 한발짝도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극심한 불안과 공포와 고통에 시달리면서 열병에 빠진다. 계획했던 범행은 성공했지만 정작 범행의 목적인 힘을 얻는 데는 완전히 실패한 셈이다. 그는 범행 이후 끝모를 번민과 고뇌와 참담함을 두루 맛본 끝에 간신히 절망에서 벗어나기 시작하고, 마침내 자백과 재판을 거쳐 시베리아의 강제노역 작업장에 당도하고 나서야 희미하게나마 갱생을 엿보기 시작한다.

 

『죄와 벌』에는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직접 겪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생한 삶의 체험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라스꼴리니꼬프가 까닭없이 두 여인을 살해하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고자 자신의 나폴레옹적 비전을 최초로 시도한 때가 스물세 살 되던 해 여름이었다는 사실부터 흥미롭다. 작가가 러시아 군대를 제대하고, 본격적으로 문학의 길로 들어서서 『가난한 사람들』을 집필하기 시작한 때도 스물세 살 되던 여름이었기 때문이다.

 

『죄와 벌』의 주인공은 가난 때문에 학업조차 잇지 못하는 고학생이었지만 두뇌가 명석한 데다가 장래에 대한 원대한 포부를 지녔으면서도 순수하고도 착한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을 옥죄는 답답하고 궁핍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오랜 번민 끝에 전당포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하기로 마음 먹지만, 범행 이후에도 좀처럼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크게 뉘우치지는 않는다. 도리어 그 정도의 난관 조차도 제대로 뛰어넘지 못하고 불안과 공포에 내몰려 안절부절 못하는 자기 자신을 자책하며 괴로워한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이토록 반항적인 기질이야말로 온갖 간난신고에도 아랑곳없이 위대한 작품을 쓰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게 아닐까. 라스꼴리니꼬프가 허구헌 날 골방에 틀어박혀 온갖 공상과 자신만의 이념에 몰두하는 모습 또한 궁핍한 여건 속에서도 오로지 창작에만 매달려 지내는 작가 자신의 모습과 본질적으로는 닮은 게 아닐까.

 

라스꼴리니꼬프는 아무런 죄가 없는 노파를 살해한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분명 추악한 범죄라고 여기지만, 인류의 숱한 영웅들이 저지른 유혈 사태와 범죄나 다름없는 대규모 살육 전쟁에 비하면 도리어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로 치부한다. 이런 대목들이야말로 '인류 문명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라면' 쓸모없는 존재들은 얼마쯤 쓸어내 버리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로운 일일까 싶은 작가의 '테러리스트적 면모'가 다분히 엿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비록 몇 푼의 돈을 위해 노파를 살해하지만, <범죄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직접 써서 잡지에 기고할 정도로 나름대로는 아주 탄탄한 이론으로 무장된 확신범이었다. 그가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기 위해 경찰서에 자진 출두한 자리에서 예심 판사인 뽀르피리와 나눈 대화 속에는 이런 생각들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저는 다만 <비범한> 사람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 ……. 즉 공식적인 권리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양심상 …… 모든 장애를 제거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말한 것뿐입니다. (중략) 더 나아가서 제가 기억하기로 저는 논문에서 모든 사람들 …… 예를 들면, 아주 고대로부터 시작해서 리쿠르고스, 솔로몬, 마호메트, 나폴레옹 등으로 이어지는 인류의 입법자들과 제정자들은 새로운 법률을 제시하고, 그로 인해 선조로부터 전해져서 사회에서 성스러운 추앙을 받은 낡은 법률을 파괴했고, 만약 유혈만이 그들을 도울 수 있었다면, 피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다는 점만을 보더라도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범죄자들이었다는 생각을 발전시킨 거지요. 이런 인류의 은인과 건설자들의 대부분이 특히 무서운 살인자들이었다는 점은 흥미롭기까지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저는 위대한 사람만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상궤를 벗어난 사람, 즉 조금이라도 뭔가 새로운 것을 말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천성상 물론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분명히 범죄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겁니다.(377∼378쪽)

 

 

그는 자신을 유력한 살해 용의자로 지목한 예심 판사 뽀르피리와 치열한 두뇌 싸움을 펼친다. 자신이 결코 범죄자일 수 없다는 탄탄한 방어 논리로 무장한 채 상대방의 날카로운 공격을 매번 무력화하고, 급소를 찔리는 와중에도 교묘한 반격의 틈을 찾아낸다. 그러나 범인이 반격하면 할수록 뽀르피리의 합리적인 의심은 더욱 굳건한 확신으로 변해갈 뿐이다. 이토록 급진적인 사상으로 꽉 찬 용모준수한 열혈 청년을 그 누가 한번쯤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심 판사 앞에서 그가 격정적으로 토해낸 열변을 잠깐만 더 들어보자.

 

재료가 되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은 어떤 노력을 거쳐서, 이제까지는 신비로 남아 있는 일종의 과정, 종족과 가문의 결합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결국 이 세상에 수천 명 중 한 사람이라도 어느 정도 독립적인 사람을 태어나게 하려고 애쓰기 위해, 오로지 이 목적을 위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조금 더 독립적인 성품의 사람들은 어쩌면 수만 명에 한 사람 정도밖에 태어나지 않을지 모르지요. 그리고 그보다 더 독립적인 성품을 가진 사람들은 수십만 명에 한 명꼴로 태어날 것이고, 독창적인 사람들은 수백만 명의 한 명이고, 위대한 천재, 인류의 완성자는 어쩌면 지구상에서 수억의 사람들이 살다가 죽어 간 이후에야 나올지 모르는 일이지요.(382쪽)

 

 

이 대목에서 분출된 라스꼴리니꼬프의 과격한 주장은 마치 쇼펜하우어나 니체의 책에서 그대로 옮겨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닮아 있어서 놀랍다. 그러나 젊어서부터 칸트와 헤겔까지도 즐겨 읽었던 도스토예프스키였으니, 그가 다윈의 진화론이나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을 몰랐을 리 없다. 그보다 스무 살 이상이나 더 젊었던 니체가 도스토예프스키를 그토록 좋아했던 것도 '뿌리깊은 교감'의 산물인 셈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기질은 어느 평론가의 표현 대로 '그리스도와 사탄이 뒤엉켜 서로 싸우는 모순의 경기장' 같았다. 『죄와 벌』의 주인공인 라스꼴리니꼬프의 성격 역시 작가와 닮은 데가 적지 않다. 불쌍한 이웃을 보면 자신이 가진 마지막 몇 푼까지도 아낌없이 건네주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순수한 모습부터 작가를 닮았다. 위대하고 고매한 사상이나 뜨거운 인류애를 갈구하고 고민하지만 현실에서는 언제나 좁고 답답하고 벽지마저 누렇게 변색된 초라한 구석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일 뿐인 라스꼴리나꼬프의 모습 속엔 휴머니스트이면서도 과격한 테러리스트의 면모를 동시에 지닌 작가의 모습이 언제나 겹쳐 떠오른다.

 

『죄와 벌』은 주인공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 때문에 빚어지는 인간 내면의 어둡고 복잡한 구석들을 극한까지 파고 들어갈 정도로 몹시 심각하고도 무거운 작품이지만, 그 자체로는 아주 스릴 넘치는 탐정 소설이자 범죄 심리 소설의 형식을 겸비하고 있다. 돈이 없어서 공부까지 그만둘 정도로 극단에 내몰린 청년이 한 달 동안의 심각한 번민 끝에 살인을 저지르지만, 막상 끔찍한 범행 이후의 모든 상황들은 (훔친 지갑은 건드려보지도 못한 채!) 극도의 긴장과 두려움과 공포의 연속일 뿐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범죄를 통해 움켜 쥘 얼마간의 돈만 있으면 눈앞에 닥친 온갖 현실적 장애들은 단번에 모두 걷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을 뿐, 범행 이후의 온갖 위험천만하고 곤란한 처지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은 범행을 위해 그가 자신의 방을 빠져 나오면서 살인 도구로 미리 점찍어 두었던 도끼를 확보할 때부터 어그러진다.

 

소설 속 이야기는 7월 초의 찌는 듯이 무더운 어느 날 해질 무렵, 뻬쩨르부르그의 골목길을 천천히 걷고 있는 한 청년의 모습으로부터 시작된다. 여느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죄와 벌』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분위기가 흠씬 풍기는 음울한 묘사가 이내 뒤따른다.

 

거리는 지독하게 무더웠다. 게다가 후텁지근한 공기, 혼잡, 여기저기에 놓인 석회석, 목재와 벽돌, 먼지, 근교에 별장을 가지지 못한 뻬쩨르부르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독특한 여름의 악취, 이 모든 것들이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청년의 신경을 한꺼번에 뒤흔들어 놓았다. 이 지역에 특히 많은 선술집에서 풍기는 역겨운 냄새와 대낮인데도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술 취한 사람들이 거리의 모습을 더욱 불쾌하고 음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한순간 이목구비가 뚜렷한 청년의 얼굴에는 침을 수 없다는 듯 혐오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실 그는 멋진 검은 눈동자에 짙은 아맛빛 머리털을 가진 미남으로, 약간 큰 키에 균형이 잘 잡힌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대목 하나만 읽더라도 독자들은 이야기의 시공간 속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간다. 주인공이 처해 있는 답답하고 암울한 현실을 그대로 빼닮은 듯한 공간 배경은 단순히 물리적인 환경만으로 그치지 않고, 그 속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의 정신 세계를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러나 이런 배경과 뚜렷이 대비되는, 꽤나 매력적이고 균형잡힌(?) 모습으로 등장하는 우리의 주인공은 얼마나 멋진가. 이 청년의 외관이야말로 주인공의 정신 세계가 결코 평범하지는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들은 어느 하나 산뜻하거나 흡족한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그의 옷은 차라리 넝마라고 하는 편이 옳았다. 그러나 센냐야 광장에서 가까운, 창녀촌들이 운집해 있는 뻬쩨르부르그 한복판에 위치한 이 거리와 골목은 수공업자들과 공장 노동자들이 우글거리는 낯선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으므로, 색다른 모습을 한 사람과 만난다고 해서 놀라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인 그런 세계다.

 

작가는 이야기를 곧장 '사건 현장'으로 빠르게 이끈다. 소설이 시작되자 말자 라스꼴리니꼬프는 <그 일>을 위한 '최종 리허설'을 위해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간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처럼 주저하는 인간형은 결코 아니다. 이때부터 이야기는 팽팽한 긴장 모드로 일변한다. 이야기의 템포 또한 더욱 빨라진다. 이 대목에서 불현듯 떠올릴 수 있는 음악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모짜르트의 교향곡 25번 G단조의 1악장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도입부를 극적으로 팽팽하게 잡아 당기면서, 어딘지 모르게 '천재의 열정과 고뇌와 슬픈 운명'까지도 예감하게 만드는 바로 그 오묘한 음악 말이다.

 

이렇게 해서 저 유명한 <뻬쩨르부르그의 고리대금업자, 14등 문관의 과부 노파인 알료나 이바노브나와 그녀의 여동생 리자베따 이바노브나 연쇄 도끼 살인 사건>은 뜻밖에도(!) 아주 신속하게 실행된다. 그 어떤 물증이나 목격자도 남기지 않은 채로, 그것도 소설이 시작된지 겨우 사흘째 되던 날 저녁에 말이다. 여기까지가 제6부까지 길게 이어지는 『죄와 벌』의 제1부 내용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진정한 이야기는 정작 그 다음부터라고 말해도 좋다. 왜냐하면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에게 닥치는 '인간으로서 맛보기 싫은 거의 모든 나쁜 감정들'은 그때부터 바야흐로 거대한 파도처럼 그를 덮치고 나서 소설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그를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의 제2부에서 제6부에 이르기까지 길게 펼쳐지는 '인간 심리의 드라마'는 마치 한 편의 '고뇌하는 인간이 맛보는 지옥에서의 향연'에 내내 동석해 있는 기분이 든다. 기껏(?) 서막에 불과했던 제1부에 비해 그 뒤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바닥을 모를 정도의 심연으로 내려간다. 작가는 지금부터야말로 '인간의 마음'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 여행이 제대로 시작될 터이니 너무 어둡고 컴컴하더라도 눈을 감지 말고 벨트를 단단히 매라는 식의 친절을 베풀 생각은 조금도 없다. 이야기의 템포는 단 한 번도 안단테로 바뀔 겨를을 허용치 않는다. 주인공의 운명은 벌써부터 거센 폭풍을 만난 조각배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다. 끔찍한 살인죄를 저지른 범죄자임을 자각한 순간부터 온 세상이 그를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그를 사정없이 물어뜯을 것처럼 사납게 덤벼든다. 극심한 충격을 받은 그는 기절하고 만다. 사흘 동안의 의식 불명 상태에서 깨어난 그는 끝없는 고독감과 음울한 소외감에 몸부림친다.

 

 

는 이 순간 모든 사람과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가위로 도려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169쪽)

 

 

그러나 그는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주인공의 가슴 속에 존재하는 삶을 향한 무서운 에너지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해 악마처럼 교활하고 대범하게 '투쟁'을 선택한다.

 

 

내겐 인생이 있다! …… 그 늙은 할망구와 함께 나도 죽은 것은 아니다! 천당에서 고이 잠드시길, 그걸로 된 거다. 노파도 이제 평안히 쉬셔야지! 이성과 빛의 왕국이 도래했다 ……. 의지와 힘의 왕국이 온 거야 ……. 어디 두고 보자! 한번 겨뤄 보자고!(274쪽)

 

 

제3부에서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내면에 깊이 감춰져 있던 다른 성격이 드러난다. 그는 절친인 라주미힌의 표현에 따르자면, '어둡고 음울하고 오만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때로는 냉정하고 비인간적이다 싶을 정도로 무정한' 친구이다. 또한 '그는 자기 자신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데다가, 그게 또 전혀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닌' 친구였다. 라주미힌은 라스꼴리니꼬프가 지닌 생각의 위험성을 간파한다.

 

 

네가 한 모든 말 중에서 정말로 <독창적인 것>은, 내 생각에는 정말 무서운 일이지만, 어쨌거나 네가 <양심상> 유혈을 허용한다는 점이야.(383쪽)

 

 

라스꼴리니꼬프는 무신론자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노파를 살해하고 난 직후부터 극도의 혼란과 공포와 좌절감을 맛보고 나서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던 '강인한 힘'에 대해 스스로 의심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무서운 꿈으로도 나타난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노파의 정수리를 도끼로 힘껏 내리치지만, 고개를 숙인 노파는 <온 힘을 다해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자제하며 남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소리를 죽여 웃기> 시작한다. '노파도 이제 평안히 쉬셔야지!' 라고 말하던 호기로운 모습은 어느새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제4부에 이르러 라스꼴리니꼬프의 투쟁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는 여전히 예심판사인 뽀르피리로부터 '합리적인 의심'을 받는 유력한 살해 용의자에 머물러 있지만, 뚜렷한 물증이나 목격자가 없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여전히 '범행'을 부인한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그가 여전히 승리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건 승리가 아니라 차라리 패배에 가까웠다. 그의 눈앞에 슬며시 등장한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그걸 증명한다. 그는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지만 라스꼴리니꼬프의 어두운 분신이다. <우리에게는 무언가 공통점이 있습니다 ……. 그래서 내가 우리는 같은 들판에 열린 딸기라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범죄를 알고 있는 아주 위험한 존재이다. 라스꼴리니꼬프가 번민 끝에 소냐에게 자신의 범행을 털어놓을 때 그가 엿들었던 것이다.

 

제6부의 대단원에 이르러 라스꼴리니꼬프는 '출구가 없는 담답한 공간'에서 숨을 쉴 공간을 열망한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언제나 그의 주위를 맴돈다. 그에게는 경찰서에 출두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그는 결국 소냐의 간곡한 설득 끝에 자수하지만 그가 회개했기 때문이 아니라 소심한 때문이었다. 그는 경멸 어린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는 내가 생각도 없이 그들 모두 앞에 고개를 숙이고, 마음 속 깊은 신념으로부터 굴복하는 일이 생기게 될 것인가!(767쪽)

 

그는 광장으로 걸어나가 소냐로부터 명령받은 대로 <대지에 입을 맞추고 민중들에게 절을 하지만> 끝내 <내가 죽였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심지어 자수를 위해 경찰서에 들어가서도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고 다시금 발걸음을 되돌려 그곳을 빠져 나온다. 그러나 경찰서 마당에서 절망에 찬 표정으로 그를 간절히 바라보는 소냐를 발견하고는 다시 위층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범행을 자백한다.

 

<바로 제가 그때 고리대금업자 노파와 그의 여동생 리자베따를 도끼로 살해하고 돈을 훔친 사람입니다.>

 

에필로그에서 이어지는 뒷 이야기는 라스꼴리니꼬프가 아직도 완전한 회개로 옮아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뉘우치지 않고 있다. 이제 감옥에 들어와서 <자유의 몸>이 된 그는, 다시금 예전의 모든 행동들을 되돌아본 결과, 자신의 범죄 행위들이 그렇게 어리석고 추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과연 어떤 점에서…….> 그는 생각했다. <내 사상의 어떤 부분이 천지개벽 이후로 세상을 휘저으며 서로 부딪치고 있는 서로 다른 사상과 이론들보다 더 어리석단 말인가? 흔해 빠진 영향에서 벗어나, 완전히 독립적이고 폭넓은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물론, 나의 사상도 전혀 그렇게…… 이상한 것만은 아닌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오! 5꼬뻬이까 은화의 값어치밖에 나가지 않는 허무주의자들과 현인들이여, 그대들은 어째서 길을 가다가 멈춰 섰는가!>(800쪽)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을 읽으면서 내내 떨치기 힘들었던 생각 하나는 '톨스토이에게는 있고,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없는 것들의 목록'이었다. 이 두 작가야말로 러시아 문학에서 언제나 거대한 쌍벽을 이루고 있으니 두 사람의 비교는 어쩌면 불가피한 구석이 있다. 내가 즉흥적으로 떠올린 그 목록들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무도회, 춤, 공작, 백작, 황제, 시종무관, 장교, 저녁만찬, 귀족, 귀부인, 삼두마차, 외국여행, 사냥, 카드 게임, 영지, 대지주, 저택, 하인, 대자연에 대한 묘사, 사랑의 심리학, 지배계층 등등.

 

물론 이와 반대되는 것들도 떠올랐다. '톨스토이에게는 없고,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있는 것들의 목록' 말이다.

 

선술집, 주정뱅이, 창녀, 가난한 사람들, 빈민가, 지하로 통하는 계단, 부랑아, 병자, 고아, 농아, 사생아, 비열한, 악한, 사기꾼, 협잡꾼, 감옥, 죄수, 살인, 범죄, 도시 빈민가에 대한 묘사, 범죄의 심리학, 피지배계층 등등

 

이들 목록은 비단 작가의 작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작가의 삶 자체가 이들 목록의 내용 만큼이나 서로 달랐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평생 동안 자주 도박으로 큰 돈을 잃고 매번 궁지에 몰렸던 탓인지 고통 받는 영혼을 탐구하는데 아주 특출난 재능을 발휘했고, 악의 세계에서 벗어나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는 길을 맹렬하게 뒤쫓았다. 어떤 작가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런 경향 때문에 그의 독보적인 문학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드러내 놓고 그런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양대 봉우리 사이가 아무리 멀다 해도 가끔씩은 그들 사이를 이어주는 희미한 오솔길 하나쯤은 엿보일 때도 있기 마련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이어주는 오솔길이 하나 있다면 거기에서 두 작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폴레옹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 나폴레옹은 적군의 총사령관이자 우두머리일 뿐이고, 러시아 총사령관 꾸뚜조프 장군의 맞상대일 뿐이었다. 나폴레옹이 마침내 모스크바까지 진군했을 때 그는 '거대한 환영식'과 '황제의 알현'을 기대했지만, 꾸뚜조프는 도리어 모스크바를 텅텅 비워놓고 외곽으로 군대를 후퇴시킨 뒤 잠복 근무 상태로 결정적인 때를 기다렸다. 다친 짐승이 지쳐서 제발로 도망칠 때까지. 인류의 황제가 될 뻔한 나폴레옹은 그해 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끝내 패퇴하고, 빌니우스에서는 '숭고와 우스개 사이의 거리는 불과 한 발짝에 지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에서 나폴레옹을 주목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아니, 그 사람들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어. 진짜 《거인》,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는 사람은 툴롱을 호령하고 파리에서 대학살극을 벌이고, 이집트에서 군대를 《잃고》, 모스끄바로의 진군에서 50만의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빌니우스에서는 그 일을 우스갯소리로 넘겼다. 그런데도 죽은 후에는 그를 우상으로 떠받들지 않았는가. 즉 《모든 것》이 허용된 것이다. 아니, 아마도 이런 사람의 몸은 살로 되어 있지 않고 청동으로 되어 있는 모양이다!> (398쪽)

 

 

『죄와 벌』의 주인공인 라스꼴리니꼬프는 이런 상념들을 떠올리고 나서 갑작스레 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어떤 생각이 떠올라, 그는 거의 웃움을 터뜨릴 뻔한다.

 

<나폴레옹, 피라미드, 워털루, 그리고 여위고 추한 14등 문관 미망인, 노파, 고리대금업자, 침대 및 붉은 궤짝 ㅡ 설령 뽀르피리 뻬뜨로비치라고 할지라도 어떻게 이것들을 소화시킬 수 있겠는가……! 어떻게 이것들을 소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미학이 방해할 것이다. 나폴레옹이 노파의 침대 밑에 기어들겠느냔 말이다! 아하, 엉터리 같은 이야기다 ……!> (399쪽)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누구라도 한번쯤 들어봤을 <러시아 청년 대학생의 묻지마식 노파 살해 사건> 때문에 누구에게나 아주 친숙한 이야기처럼 여겨지는 작품이다. 작품의 주제 또한 널리 알려져 있다. <좌와 벌>, <선과 악>, <가난과 불행>, <선한 목적과 악한 수단>, <정의란 무엇인가?>, <왜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하게 사는가?>, <빈부차이는 얼마만큼 용인되어야 하는가?> 등등이 바로 그런 주제들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은 대체로 『고리오 영감』에서 보여준 <발자크의 돈>과 『위대한 유산』에서 보여준 <디킨스의 곤궁>과 『레미제라블』에서 보여준 <빅토르 위고의 불쌍한 사람들>이 기묘하게 뒤섞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지만, 앞선 작가들이 충분히 제대로 건드리지 못한 '인간 심리의 탐구'라는 측면에서는 그들을 훨씬 뛰어 넘는다.

 

그가 '세계 최대의 심리 작가'라는 명성을 얻은 건 이런 이유들 때문이었다. 『죄와 벌』은 그런 명성에 가장 어울리는 작품이다. 아직도 『죄와 벌』을 만나지 못한 독자들이 있다면 더이상 죄를 짓지 말고 달콤하게 벌을 받으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죄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아직까지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끝끝내 숨기고 자백하지 않고 있는 사실을 빗댄 표현이다. 벌을 받으라는 말은 이쯤에서 자백하고 당당히 감옥으로 들어가라는 말이다. 죄를 자백하고 시베리아의 형무소로 떠난 라스꼴리니꼬프처럼.(그 청년도 버틸 데까지는 버텼다!)『죄와 벌』을 읽는 일은 도스토예프스키가 만든 거대한 '정신의 감옥'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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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1-19 21: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죄와 벌>을 오래전에 읽었어요. 두꺼운 줄 모르고 책에 완전히 빨려들어가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를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밤12시 넘어까지 책을 봤어요. 읽으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천재야, 라고 생각했어요.

‘인류 문명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라면‘ 쓸모없는 존재들은 얼마쯤 쓸어내 버리더라도 - 이 부분을 읽으며 저는 헷갈리기 시작하더군요. 살인을 했지만 주인공의 주장이 그럴 듯해 보였거든요.

님의 글 중 압권을 제가 뽑았어요. - 작가는 지금부터야말로 ‘인간의 마음‘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 여행이 제대로 시작될 터이니 너무 어둡고 컴컴하더라도 눈을 감지 말고 벨트를 단단히 매라는 식의 친절을 베풀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하하 ~~ 재밌습니다. 정말 그런 분위기로 독자들을 빨아들이고 매혹시키죠. 잠시도 한눈을 팔 틈을 주지 않지요.

도스토예프스키가 심리 묘사에 능해 심리학자 같다면 톨스토이는 교훈을 말하는 교장선생님 같죠.

저는 4대 비극 중 <리어왕>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어요. 자식에게 버림 받고 거지꼴이 된 리어는 이렇게 절규하죠.
˝이건 리어가 아니다.˝라고. 자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몰라고 자식들이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던 어리석은 리어왕의 운명은 파국을 향해 갈 수밖에 없었던 거죠.

고전 읽기, 저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데미안, 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오래전 이미 읽은 것이라서 재독인 셈인데 새 책으로 사 놔서 기대됩니다. 아까워서 아직 첫 장을 읽지도 않았습니다. ㅋ 책을 사 놓고 아까워서 손을 못 대고 있는 이 심정을 이해하실런지요. 얼마간 빳빳한 종이책을 유지하고 싶은 욕심입니다. 제가 펼치기 시작하면 밑줄을 치는 바람에 새 책이 중고가 되어 버려서요.

쓰다 보니 댓글이 길어졌습니다. 제가 님의 글을 너무 꼼꼼히 읽는 바람에 쓸 말이 길어졌나 봅니다.
좋은 글 흥미롭게 읽고 갑니다.

oren 2019-01-19 22:39   좋아요 1 | URL
저 역시 『죄와 벌』을 그 어떤 소설보다 ‘단숨에‘ 읽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최소한 사나흘은 걸렸지 싶어요. 워낙 책을 천천히 읽는 습관이 있어서요. 부지런히 메모도 해 가며 읽는 습관도 한 몫 했고요. 책을 읽을 때 강렬하게 다가오는 느낌들을 ‘메모‘로 붙들어 놓지 않으면 나중에 그 구절들을 다시 찾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걸 한두 번 경험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제 멋대로 느낀 감정의 일단을 나름대로 솔직하게 전달해 볼까 싶어 일부러 평소와는 달리 표현하고자 했던 부븐을 콕 집어서 제 글의 압권이라고 추켜세워 주시니 괜히 쑥쓰럽기도 합니다만,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 바로 ‘박진감 넘치는 인간 심리 묘사‘에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천재 음악가였던 모짜르트의 교향곡 25번을 여러 번 반복해서 들어가면서 이 글을 써 보기도 했고요. 모짜르트나 도스토예프스키나 인류가 낳은 천재임은 너무나 분명하니까 말이지요.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저도 청년(!) 시절에 아주 감명깊게 읽었던 작품인데, 다시 읽을 생각은 아직까지도 가져보지 못했네요. 그 대신 저는 『까라마조프 형제들』을 다시 읽고픈 열망은 간직하고 있답니다. 그 작품을 대학에 입학하기 직전에 읽었으니까 도대체 뭘 얼마나 제대로 알고 읽었겠나 싶은 생각이 강하게 남아 있거든요. 더군다가 그 작품이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장 뒤늦게 완성한 대작인데 말이지요. 사실, 이번에 『죄와 벌』을 읽은 것도 ‘다시‘ 『까라마조프 형제들』을 만나기 위한 예비 작업 성격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고요.

아무튼 진솔하고도 긴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카알벨루치 2019-01-19 22: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장대한 페이퍼, 그로테스크한 리뷰를 작성하셨네요~👏👏👏도스토예프스키에게도 어여 다가가고 싶네요!

oren 2019-01-19 22:48   좋아요 2 | URL
작품의 분량도 그렇지만 깊이 또한 결코 만만치 않아서 짧은 글로 이 대작을 요약하기가 쉽진 않더군요. 맨 처음엔 지금 분량의 두 배쯤 되는 아주 상세한 리뷰를 썼는데, 그걸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고는 도저히 짧게 줄일 수 없겠다 싶어서 그걸 다 버리고 아예 처음부터 다시 쓰느라 애를 좀 먹긴 했답니다. 그래도 분량이 너무 길어 다소 흉하긴 하지만, 뭐 어쩌겠나 싶어서 그냥 올려 봤습니다. 여기서 또 절반으로 더 줄인다고 해서 특별히 나아질 것도 기대하기 힘들겠다 싶었고요.^^

카알벨루치 2019-01-19 23:10   좋아요 1 | URL
아름답습니다 오렌님의 문학사랑과 열정이 너무나 보기 좋습니다 저도 좋은 영향 받고 갑니다

요즘 정말 짧은 글이 도외시되고 동영상과 이미지만 난무하는 세상에서 깊고 깊은 사유의 파이프를 지난 긴 글이 박수받길 진정으로 고대하며 응원해 봅니다 ~ㅎㅎ

oren 2019-01-19 23:23   좋아요 1 | URL
카알벨루치 님의 뜨거운 성원에 글 쓴 보람을 느낌니다. 늘 감사합니다.^^

카알벨루치 2019-01-19 23:39   좋아요 1 | URL
이 정도 쓰실라믄 얼마나 사투를 벌이셨을까 그런 생각에 더 감동이 됩니다 고전을 후벼파볼려면 얼마나 산고를 겪어야하는지... 몸살은 나지 마셔요! 건강이 제일 중요합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제가 도스토예프스키에 입문한다면 오렌님 덕입니다 ^^

oren 2019-01-20 13:26   좋아요 1 | URL
무슨 사투까지야 벌였을라고요. ㅎㅎ 그런데 책을 읽고 나서 곧장 그 책에 대한 리뷰를 쓰지 않으면 결국 두고 두고 후회가 남긴 하더라고요. 책을 읽은 직후가 아니라면 그 생생한 감동을 도저히 되살려 낼 방법이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리뷰를 쓰기 위해서는 방금 읽은 책을 다시 요모조모 뜯어 보고 작가의 생각까지도 찬찬히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데, 그런 과정에서 그 작가와 작품을 훨씬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점이 저는 참 좋더라구요.

어쨌든 『죄와 벌』은 이미 숱한 전문가들이 다양한 연구논문을 쓸 정도로, ‘인간 심리에 관한 탁월한 절창들‘이 너무 많아서, 쓰고 싶은 말들이 끊임없이 떠오르는 책이었는데, 그걸 짧은 리뷰 하나로는 담아낼 수 없다는 게 아쉽긴 하더라구요.

제가 조금이라도 더 쓰고 싶었던 얘기들은 가령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술주정뱅이 퇴역 관리였던 마르멜라도프네 가족의 비극(이 가족의 비극 가운데 특히 아내 까쩨리나 이바노브나의 비극은 흡사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아 여인들』을 보는 듯하더군요. 그녀의 처지가 여러모로 ‘헤카베‘와 너무 닮아 있어서 도스토예프스키도 틀림없이 그 작품을 염두에 두고 쓴 게 아닐까 싶더군요.), 라스꼴리니꼬프가 죄를 정화하는 과정(이건 흡사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3부작 『오레스테이아』가운데 《자비로운 여신들》를 보는 것 같았어요. 오레스테스가 누이동생인 엘렉트라와 함께 친모인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살해하고 나서 ‘복수의 여신들‘에 쫒기는 ‘오레스테스 이야기‘는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 에우리피데스의 『오레스테스』에도 거듭 다뤄질 정도로 고대로부터 아주 익숙했던 비극의 주제였으니, 도스토예프스키가 그 점을 몰랐을 리는 없겠다 싶어요.) 스비드리가일로프와 라스꼴리니꼬프와의 대비(스비드리가일로프야말로 ‘죄와 벌‘의 탁월한 예술성을 확고하게 보증하는 인물이 아닐까 싶어서요.), 『죄와 벌』에 엿보이는 니체의 철학(특히, 니체의 ‘초인 철학‘을 그대로 빼닮은 듯한 문장들이 여럿 나타나고, 이 작품에서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자연 풍광 묘사에서 하필이면 ‘아침노을‘이 강조된 점도 니체의 책 제목인 『아침노을』을 떠올리게 만들더군요.)

하여튼, 이 작품은 ‘그냥 이렇게 넘어갈 게 아니로구나‘ 싶은 생각이 참 많이 들었어요. 이 작품의 후반부에 라스꼴리니꼬프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예심판사 뽀르피리의 입을 통해 표출했던 작가의 말처럼요.^^

* * *

당신의 논문을 읽고 나서, 나는 그것을 따로 간직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 그때 따로 간직하면서 생각했지요. <음, 이 사람은 그냥 이렇게 넘어갈 사람이 아니로구나!> 자,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이런 전제들이 있었는데, 어떻게 그 다음 작업에 열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665쪽)

카알벨루치 2019-01-20 13:34   좋아요 1 | URL
오렌님의 댓글을 좋아요 클릭 한번으로 퉁치기엔 너무 미안하네요 댓글도 고퀄리티라 ㅎㅎ

인생에 인간이 책을 볼 수 있는 시간이 100년이고 그렇게 따지면 하루에 한권 읽는다 가정했을때 3만6천5백권의 책을 읽을수 있다는데, 그렇게 생각해보면 인생의 살아갈수있는 숫자와 이 세상에 널려진 책의 숫자는 비교불가한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과연 우리가 어떤 책을 선택해서 읽어야할지 고민이 요즘 됩니다 끝이없는 계산인데, 암튼 오렌님 글도 댓글도 최애 팬으로 남고 싶네요 ㅎㅎㅎ

oren 2019-01-20 13:43   좋아요 1 | URL
카알벨루치 님께서 일부러(?) 댓글창에서는 보기 드문 표현인 ‘얼마나 사투를 벌이셨을까‘ 라는 말씀을 남겨 주시는 바람에 뜻밖에도 꽤나 긴 댓글을 쓰게 되네요. 그 정도로 격한 표현이 없었다면 결코 꺼낼 생각조차 하기 힘든 속 깊은 내용까지 포함해서요. 암튼 늘 저를 북돋아 주셔서 감사드려요.^^

카알벨루치 2019-01-20 13:46   좋아요 0 | URL
사투 맞습니다 ^^ㅎㅎㅎ

oren 2019-01-20 13:47   좋아요 1 | URL
사투는 아니고요.. ㅎㅎ... 고투라면 그나마... ㅎㅎ
 
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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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저녁 8시 무렵, 해가 지고 있었다. 여전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악취와 먼지에 가득 찬 도시의 공기를 탐욕스럽게 흠뻑 들이마셨다. 약간 현기증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떤 야수적인 에너지가 그의 타는 듯한 눈동자와 누렇게 뜬 해쓱한 얼굴에서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할 지도 몰랐고, 또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단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오늘 《이 모든 일》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단번에 지금 당장. 그렇게 하지 않고는 집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끝낼 것인가? 무슨 수로 끝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지니고 있지 않았을뿐더러, 또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상념을 쫓아 버렸다. 상념이 그를 괴롭혔던 것이다. 그는 다만 이렇게든 저렇게든 모든 것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만 느끼고 있었을 뿐이다. <어떻게든 상관없어.> 그는 필사적이고 질긴 자기 확신과 결단성을 가지고 이런 말을 되뇌고 있었다.(225∼226쪽)

 

(나의 생각)

 

전당포 여주인과 그녀의 여동생까지 도끼로 살해한 뒤 극도의 혼란과 공포 때문에 실신하고 마는 라스꼴리니꼬프는 며칠 만에 간신히 깨어난 후 라주미힌과 조시모프에게 둘러싸인 자신을 발견하지만, 그들의 따뜻한 관심과 염려로부터 그 어떤 위안도 얻지 못한다. 마침내 그는 절망에 휩싸여 그들을 자기 방에서 내쫓는다. 절규하면서.

 

「나를 내버려 둬! 나를, 모두 다!」 라스꼴리니꼬프는 흥분해서 소리 질렀다. 「언제쯤 나를 내버려 둘 거야, 이 고문자들아! 나는 너희들 따윈 두렵지 않아! 나는 아무도, 아무도 이젠 두렵지 않아! 저리 나가! 난 혼자 있고 싶어, 혼자 있고 싶다고! 제발!」

 

그들을 모두 내쫓고 간신히 자신의 방을 빠져나와 무작정 거리로 나선 라스꼴리니꼬프가 마땅히 찾아갈 만한 데가 과연 어디 있으랴. 더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도 않고, 어떻게, 무슨 수로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지도 모른 채 방황하고 몸부림치는 젊은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독자의 마음은 살인을 저지른 죄인에 대한 분노보다는 까닭모를 연민과 동정에 훨씬 가깝다.

 

 

 * * *

 

 

<그게 어디였더라.> 라스꼴리니꼬프는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했다. <어디서 읽었더라? 사형 선고를 받은 어떤 사람이 죽기 한 시간 전에 이런 말을 했다던가, 생각했다던가. 겨우 자기 두 발을 디딜 수 있는 높은 절벽 위의 좁은 장소에서 심연, 대양, 영원한 암흑, 영원한 고독과 영원한 폭풍에 둘러싸여 살아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평생, 1천 년 동안, 아니 영원히 1아르신밖에 안 되는 공간에 서 있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지금 죽는 것보다는 사는 편이 더 낫겠다고 했다지! 살 수만 있다면, 살 수만, 살 수만 있다면! 어떻게 살든, 살 수 있기만 하다면……! 그만한 진실이 또 어디 있겠나! 그래, 이건 정말 대단한 진실이 아닌가! 인간은 비열하다……! 또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를 비열하다고 하는 놈도 비열하다.> 잠시 후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230∼231쪽)

 

 -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 <제2부>

 

(나의 생각)

 

도스토예프스키가 여기서 인용한 책 속 내용은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이 절망의 벼랑 끝에서 문득 떠올린 '사형 선고를 받은 어떤 사람' 이야기조차 작가 자신이 직접 겪은 사형수 체험보다 더 강렬할 수는 없다.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라스꼴리니꼬프조차 저토록 간절히 살고 싶어 발버둥치는데, '벨린스끼의 <사악한> 편지를 퍼뜨린 죄목'으로 체포되어 졸지에 사형 직전까지 내몰렸던 도스토예프스키는 과연 얼마만큼 더 간절하게 삶을 이어가고 싶었을까.

 

 

 * * *

 

 

벌써

코사크 사람 하나가 성급하게 다가와

총을 보지 못하게 두 눈을 묶는다.

그리고ㅡ그는 안다. 이제 마지막이구나!ㅡ

그의 눈길은 이제 눈멀기에 앞서

탐욕스럽게 저쪽에 펼쳐진

저 작은 한 조각 세상을 바라본다.

아침빛 속에 교회가 타오르는 것을 본다.

최후의 행복한 만찬을 위해서인 듯

그 접시는 성스런 아침노을로

가득 채워져 불타고 있다.

그리고 그는 갑작스러운 행복감에 넘쳐

죽음 뒤의 신의 삶을 그리워하듯 교회를 바라본다….

 

그 때 그들이 그의 눈 위로 밤의 띠를 둘렀다.

 

그러나 내면에서는

피가 색깔을 가지고 돌기 시작한다.

모든 것을 비추어주는 물 속에서

이미 지나가 버린 삶이

피로부터 솟구쳐 나온다.

그리고 그는

죽음에 바쳐진 이 순간이

한 번 더 자기 영혼을 통과하며

모든 잃어 버린 과거를 씻어 버리는 것을 느낀다.

그의 전 일생이 다시 깨어나서

그림이 되어 그의 가슴을 유령처럼 스쳐간다.

창백하고 잃어 버린 잿빛 유년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 아내,

세 개의 파편 같은 우정, 두 잔의 즐거움,

명성의 꿈, 한 더미의 수치.

그리고 그림으로 된 충동이 잃어 버린

청년 시절을 혈관을 따라 굴린다.

그들이 자신을 기둥에 묶는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살아온 전 존재를

그는 한 번 더 깊은 내면으로 느낀다.

사려 깊은 생각이 어둡고 무겁게

그 자신의 그림자들을 그의 영혼 위로 던진다.

그리고 그 때

누군가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느낀다.

검고, 침묵하는 걸음걸이를 느낀다.

가까이, 아주 가까이

그가 손을 자기 가슴 위에 올려놓는 것을,

심장은 점점 약하게…  약하게…  그러다가 이제 더는

뛰지 않는다.

1분이 지나면…  그러면 끝이다.

코사크 사람들은

저편에서 사격을 위해 대열을 이룬다… .

총을 맨 벨트는 흔들리고…

손들은 방아쇠 소리를 내고…

북이 울려서 공기를 가른다.

그 1초는 수천 년 나이를 먹게 한다.

 

그 때 외침소리 하나,

멈추어라!

장교가 앞으로

나선다. 종이 한 장이 하얗게 펄럭인다.

그의 음성은 맑고도 분명하게

기다리는 적막 속으로 파고든다.

차르(러시아의 황제)께서

그 성스러운 의지의 은총으로

판결을 취소하셨다. 이제

판결은 감형되었다.

 

그 말들은 아직

낯설게 들린다. 그는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의 혈관 속을

흐르는 피는 다시 붉어지고,

솟구쳐 흐르며 다시 조용히 노래하기 시작한다.

죽음은 망설이면서 마비된 관절에서 물러서고

두 눈은 아직 캄캄하지만 영원한 빛이

둘러싸며 인사하는 것을 느낀다.

형리는

말없이 묶은 끈을 풀어주고

두 손이 갈라진 자작나무 껍질 벗기듯

하얀 천을

타오르는 관자놀이에서 벗겨낸다.

비틀거리며 두 눈은 무덤에서 빠져 나온다.

아직도 약하게 눈이 먼 채로

이미 사라졌던 존재 속으로

다시 서투르게 더듬으며 들어간다.

(201∼204쪽)

 

 - 슈테판 츠바이크, 『광기와 우연의 역사』, 죽음에서 건져올린 삶-사형 직전의 도스토예프스키

 

(나의 생각)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1849년 12월 22일이었다. 황제의 특사로 형 집행 직전에 기적적으로 풀려난 그는 강제 노동형으로 감형되고, 시베리아의 비참한 수용소에서 4년 동안 유형 생활을 보낸다. 젊은 시절부터 이토록 드라마틱한 체험을 겪은 사람이었으니, 그의 작품이 지옥을 넘나드는 것처럼 생생하지 않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할 법하다. 도스토에프스키의 많은 작품들 속에 작가의 체험이 핏빛처럼 선연하게 뿌려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싶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필연을 두고 우연을 가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탄생한 데에도 무수한 우연이 개입되어 필연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억측일까? 어쩌면 이같은 생각조차도 '우연과 필연' 사이의 불가해한 간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 심리의 '참을 수 없는 구분의 욕망' 때문에 빚어지는 오해일지도 모르겠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숭고와 우스개' 사이의 거리는 불과 한 발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어느 위인의 말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우연과 필연 사이의 거리도 그만큼 바싹 붙어 있는 게 아닐까.

 

도대체 어째서 이것이 이런 형태로 생겼고 다른 형태가 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이것은 이런 형태로 생겼기 때문이다. "우연이 상황을 만들고 천재가 그것을 이용했다"고 역사는 말한다.

 

그러나 우연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천재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연이나 천재라고 하는 말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나 그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정의를 내릴 수가 없다. 이 말은,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어떤 단계를 나타내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지를 못한다.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알려고 하지 않고 우연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일반적인 인간의 성질로부터 동떨어진 행위를 일으키는 힘을 본다. 왜 그것이 생기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천재라고 말하는 것이다.(1542-1543쪽)

 

 -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에필로그>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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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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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존경하는 선생.」 그는 득의만면해서 말문을 열었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는 말은 진실입니다. 저도 음주가 선행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건 더할 나위 없는 진실이지요. 그러나 빌어먹어야 할 지경의 가난은, 존경하는 선생, 그런 극빈(極貧)은 죄악입니다. 그저 가난하다면 타고난 고결한 성품을 그래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극빈 상태에 이르면, 어느 누구도 결단코 그럴 수 없지요. 누군가가 극빈 상태에 이르면, 그를 몽둥이로 쫓아내지도 않습니다. 아예 빗자루로 인간이라는 무리에서 쓸어내 버리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더 모욕을 느끼라고 말입니다. 잘 하는 일입니다. 극빈 상태에 이르면 자기가 먼저 자신을 모욕하려 드니까요. 그래서 술집이 있는 겁니다! ……」(25쪽)

 

(나의 생각)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라면 과연 어느 누가 이런 대화를 들려줄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그들은 이토록 통절한 가난을 느낄 정도의 표현은 보여주지 못했다. 그렇다면 세르반테스? 어쩌면 그에게서라면 이 정도로 처절하고 절박한 느낌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외에는? 찰스 디킨스? 혹은 발자크? 작가의 형편상으로는 이 두 작가의 표현이 그나마 도스토예프스키에 필적할 수 있겠다 싶지만, 그들의 작품에서도 뭔가 이토록(!) 비장한 느낌은 찾아보기 어렵지 않을까. 도스토예프스키는 다른 작가들에게서는 좀체 느끼기 어려운 뭔가가 느껴진다. 뭔가 찌르는 듯한 혹은 깊숙히 찔리는 듯한. 그런 느낌만을 강조한다면 차라리 도스토예프스키는 니체에 훨씬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나를 찌르는 것이 있구나. 애석하게도, 심장을? 심장을!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 *

 

 

「…… 한 가지만 묻지요, 젊은 선생, 혹시 …… 음, 음, 선생은 아무 희망도 없이 돈을 꾸러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꾸러 가본 적은 있지요 ……. 그런데 희망이 없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지?」

 

 

「그러니까 조금도 희망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절대 꿔줄 리가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가는 거니까요. 아주 선량하고 사회에 유익한 그 시민이 결단코 선생에게 돈을 꿔줄 리 만무하다는 점을 선생은 확실히 아신다는 겁니다. 제가 묻지요, 그가 무엇 때문에 꿔주겠습니까? 그는 내가 갚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동정 때문이라고요? 그렇지만 새로운 사상을 좇고 있는 레베쟈뜨니꼬프 씨는 동정이 우리 시대의 과학으로도 금지되어 있고, 정치경제학이 발달한 영국에서조차도 그것을 금지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가 왜 꿔주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쭤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여전히 꾸러 가는 겁니다. 그리고…….」

 

「대체 왜 가는 거지요?」 라스꼴리니꼬프가 끼어들었다.

 

「어쩌면 찾아갈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아니면 더 이상 찾아갈 데가 없으니까 그렇지요! 어떤 인간이든 아무 데라도 찾아갈 만한 곳은 필요한 법이니까요. 왜냐하면 어디든 반드시 가야만 할 때가 있으니까요. 내 하나밖에 없는 딸이 처음으로 노란 딱지를 받고 거리로 나갔을 때, 나는 그때도 역시 갔었지요…….(내 딸은 노란 딱지로 산다오…….)」(26∼27쪽)

 

 

 * * *

 

 

「이게 내 모습이란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아시겠어요, 선생? 난 아내의 양말짝마저 술과 바꿔 마셔 버렸습니다. 신발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발로 마시는 건 그래도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양말이었습니다. 마누라 양말짝까지 마셔 버린 겁니다! 염소 털로 만든 아내의 목도리도 마셔 버렸지요. 전에 선물로 받은 것인데, 내 물건이 아니라 아내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추운 구석방에서 살고 있는데, 아내는 이번 겨울에 감기가 들어서, 기침을 하면 피를 토합니다. 애들은 어린것이 셋인데, 까쩨리나 이바노브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합니다. 그 여자는 어릴 때부터 깨끗하게 자란 터라, 쓸고 닦고 아이들을 목욕시킵니다. 가슴이 약해져서 폐병기가 있는데, 난 그걸 느낍니다. 그래서 마시는 겁니다. 마시면서 그녀가 겪고 있는 고통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싶어서입니다. 즐거움이 아니라, 단 한 가지, 비애만을 찾고 있는 겁니다……. 고통을 배가시키려고 마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마치 절망한 듯이 고개를 탁자에 떨궜다.(28∼29쪽)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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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1-09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죄와 벌> 사 놓은지가 언제인데 싶네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처절한 가난은 그의 삶에서 우러나오기에 그런 대작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불행이 성공의 이유이다”라는 말이 나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문학은 위대하다는 생각을 늘 해 봅니다

oren 2019-01-10 12:00   좋아요 1 | URL
<죄와 벌> 같은 책이 책장에 고시 모셔져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괜시리 이 책을 쓴 작가와 작품에 대해 까닭모를 불경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긴 하더군요. <까라마조프 형제들>을 읽은 이후 아주 오랫동안 작가에 대한 외경심을 떨치기 어려웠는데, 언젠가 우연히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을 통해 그가 겪은 지독한 가난과 도벽은 물론 한 순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뻔했던 얘기까지 접하고 나니 그가 경험했을 삶의 깊이가 도대체 얼마만큼 깊었던가를 새삼 헤아려보게 되더군요.^^

카알벨루치 2019-01-10 12:02   좋아요 1 | URL
저도 올해안에 꼭 읽고 리뷰 한번 남겨보도록 하겠습니다 ^^ 멋찐 하루 되십시오!~

oren 2019-01-10 12:39   좋아요 1 | URL
올해는 오늘 기준으로 보면 아직도 열한 달도 더 남았으니 <죄와 벌>만큼은 아주 여유롭게 읽으실 듯합니다.^^ 카알벨루치 님의 멋진 리뷰 기대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