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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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허위가 엄연히 구별되어 있는 터에 전 세계와 대항하면서까지 진실을 고집한다고 할지라도 미친 사람은 아니다.

 - 조지 오웰, 『1984』

 

 * * *

 

참여작가는 그 시대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 때문에 결국 세월이 흐르면 낡은 작가가 되고 마는 숙명을 떠안는다. 그런 일반 통념에 반하는 작가가 바로 조지 오웰이다.

 

그가 1948년에 완성한 『1984』는 너무나 정치색이 짙은 소설이어서 일반적인 문학 작품과는 사뭇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의도한 정치적 신념이 예술적 목적을 압도한다고나 할까. 『1984』는 그만큼 암울한 분위기를 띄고 있으며, 우리가 이미 지나쳐 온 '1984년의 세계'에 얼마쯤 안도해도 좋을 만큼 디스토피아적이다.

 

조지 오웰은 영국이 지배하던 식민지 인도에서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창 시절 영국의 이튼 스쿨을 다녔으나,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다시 버마로 건너가 경찰에서 5년간 근무했다. 그는 '버마 시절'을 겪으며 영국의 식민 지배 가치관을 거부했으며, 자기 자신을 아나키스트 혹은 사회주의자로 자처했다. 그는 1930년대에 벌어진 스페인 내전에도 공화파로 참전했는데, 그 때의 경험으로 그는 '전체주의 정치사상'에 대하여 깊은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미 1945년에 발표한 『동물농장』을 통해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통렬한 풍자'로 일약 유명해진 터였다. 그

보다 4년 뒤에 발표한 『1984』는 앞선 작품보다 훨씬 더 나아갔다.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텔레스크린을 통해 모든 일상이 낱낱이 감시되고, 사상 경찰에 의해 생각할 수 있는 자유마저 통제된다. 극단적인 전체주의 사회인 오세아니아에선 심지어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성욕마저 통제한다. 체제에 반발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은 당국에 의해 체포되고, 구금되고, 가혹한 고문을 거쳐 결국 사회에서 '증발'된다.

 

『1984』에서 그려진 암울한 모습들은 과거에 일당 독재와 비밀 경찰을 통해 끔찍한 정치체제를 유지했던 많은 공산권 국가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구 소련, 동독, 동유럽 공산 국가들과 구 소련 연방을 이뤘던 여러 공산국가들이 대표적이다. 구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도 『1984』에 그려진 암울한 정치체제를 유지하는 나라가 있다면 그건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 국가요, 3대에 걸쳐 절대 권력이 세습되고 잔학한 통치가 이뤄지는 북한이다. 조지 오웰의 상상력이 어쩌면 이토록 오늘날의 북한의 모습과 빼닮았는지 경이로울 지경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윈스턴 스미스는 외부 당원이다. 서른 아홉 살인 그는 1930년경에 지어진 승리 맨션 7층에 홀로 살고 있다. 그의 주위에는 어디에든 거대한 컬러 포스터가 붙어 있다. 복도 한쪽 끝 벽에도 걸려 있고, 엘리베이터 맞은편 벽에도 붙어 있다. 포스터에서는 언제나 커다란 얼굴이 그를 노려보고 있다.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라는 글과 함께. 또한 윈스턴이 생활하는 곳곳엔 어디서나 '텔레스크린'이 그를 감시한다. 텔레스크린은 수신과 송신을 동시에 행한다. 이 기계는 윈스턴이 내는 소리가 아무리 작아도 낱낱이 포착한다.

 

 

물론 언제 감시를 받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사상경찰이 개개인에 대한 감시를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행하는지는 단지 추측만 할 수 잇을 뿐이다. ……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내는 소리가 모두 도청을 당하고, 캄캄한 때 외에는 동작 하나하나까지 감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야 했는데, 오랜 세월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그런 생활이 본능적인 습관이 되어 버렸다.(11∼12쪽)

 

 

소설의 배경인 1984년의 런던은 전체주의 초국가인 오세아니아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다. 윈스턴은 300미터나 하늘 높이 솟아 있는 피라미드 모양의 웅장한 건물에서 근무한다. 그의 일터는 진리부다. 그 건물의 전면에는 당의 세 가지 슬로건이 우아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런던에는 외형과 규모가 진리부와 비슷한 건물이 세 동이나 더 있었고, 이 건물들에는 모든 정부기관이 들어 있었다. 보도 · 연예 · 교육 및 예술을 관장하는 진리부(眞理部), 전쟁을 관장하는 평화부(平和部),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애정부(愛情部), 경제 문제를 책임지는 풍요부(豊饒部)가 그것이다. 이 이름들은 신어로 각각 '진부', '평부', '애부', '풍부'라고 한다. 이 가운데 가장 끔찍한 곳은 허울좋은 명칭이 붙은 애정부다.

 

 

애정부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곳이다. 그 건물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다. 윈스턴은 애정부에 들어가 보기는커녕 그 근처에 얼씬거린 적도 없다. 그곳은 공적인 일로만 들어갈 수 있는데, 그것도 가시철조망과 철문을 비롯하여 기관총이 숨겨져 있는 삼엄한 경계망을 통과해야 가능하다. 건물 외곽의 방책으로 이어진 길에서조차 고릴라처럼 생긴 위병들이 검은 제복에 곤봉을 차고는 어슬렁거린다.(13∼14쪽)

 

 

윈스턴이 텔레스크린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있는 사각지대에서 시도하는 최초의 반항은 '일기'를 쓰는 일이었다. 일기 쓰기는 불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발각될 경우 사형 아니면 적어도 강제노동 25년 형의 선고를 받을 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종이에 글을 쓴다는 것은 결단력이 필요한 중대 행위'였다. 그가 서툴게 쓴 글씨는 '1984년 4월 4일'이었다. 일기 쓰기를 통해 그는 좀 더 구체적으로 체제에 맞설 수 있는 방법과 행동들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윈스턴은 진리부의 기록국에서 일한다. 정정이 필요한 논문이나 뉴스 기사들을 수정해서 '과거를 날조'하는 일이 주된 업무였다. 정정된 기사들을 바탕으로 신문을 다시 인쇄하고, 원래의 신문을 폐기하고 정정된 기사가 실린 새 신문을 신문철에 꽂는다. '이같은 과정은 신문뿐만 아니라 일반 서적, 정기간행물, 팸플릿, 포스터, 전단, 영화, 녹음테이프, 만화, 사진 등 조금이라도 상관없이 그 모든 것에 적용되었다.'

 

그들은 근무시간 도중에도 틈틈이 '이 분 증오(Two Minutes Hate)'를 통해 체제 전복을 도모했던 반역자인 골드스타인을 향해 극도의 집단적인 분노와 증오를 표출함으로써 '체제 수호'를 위한 정신 교육에 동원된다. 반역자들에 대한 증오가 절정에 달할 때면 으레 빅 브라더의 얼굴이 스크린에 나타난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 "나의 구세주여!' 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때 모든 사람들이 "빅──브라더! ……빅──브라더!  ……빅──브라더!"라는 찬가를 낮고 느린 가락으로 반복해서 부르기 시작했다. '빅'과 '브라더' 사이가 길게 늘어지면서 이어지는 그 장중한 합창은 마치 야만인들이 맨발로 춤추며 쳐대는 북소리를 배경 음악으로 깔고 있는 듯했다.(29쪽)

 

 

기록국 사무실에서 진행된 '이 분 증오' 활동 시간에 윈스턴이 만난 인상적인 사람이 둘 있었다. 복도를 오가며 자주 얼굴을 마주친 여자는 창작국에서 근무하는 스물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윈스턴은 행동이 민첩하고 대담해 보이는 그녀가 처음부터 싫었다.(윈스턴은 특히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싫어했다. '고집스럽게 당에 충성하는 사람들, 슬로건을 곧이곧대로 신봉하는 사람들, 아마추어 스파이들, 이단의 냄새를 귀신같이 맡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여자들, 그것도 젊은 여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한 사람은 '오브라이언'이라는 내부 당원이었다. 뭔가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은밀한 직위에 있는 남자였다. 그가 오브라이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정치적인 신조가 불완전하리라는 은밀한 믿음, 아니 단순히 믿음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는 '텔레스크린이 없는 데서' 단 둘이 만날 수만 있다면, 한번쯤 말을 걸어봄직한 사람이었다.

 

윈스턴은 그날 오전 중에 있었던 '이 분 증오' 시간에 일어났던 여러 풍경들을 떠올리면서도 무의식중에 계속 일기를 쓰고 있었다. 그는 큼직한 대문자로 보기 좋게 다음과 같이 똑같은 글을 되풀이해서 일기장에 적어 넣었다.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

 

이렇게 무의식중에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된 윈스턴 스미스의 '반체제 의식'은 뜻밖의 일로 한층 탄력을 받게 된다. 사무실 복도에서 가끔씩 마주치던 검은 머리의 대담한 여자(줄리아)가 어느 날 자신과 갑작스럽게 맞닥뜨려 쓰러지는 그 짧은 틈을 이용해 자신의 손에 몰래 '종이쪽지'를 건네 준 것이 시작이었다. 그 쪽지엔 놀랍게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사실 윈스턴은 기혼자였지만 아내 캐서린과 헤어진 지 오래였다. 당은 이혼을 허락하지 않은 대신, 아이가 없다면 차라리 별거를 하라고 권했다. 당에서는 '남녀 간의 애정'조차 통제했다.

 

 

당의 목적은 단순히 남녀간에 당이 통제할 수 없는 애정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막자는 데 있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진짜 목적은 성행위로부터 얻게 되는 모든 쾌락을 사전에 제거하려는 데 있었다. 결혼하든 안 하든 사랑보다 더 죄가 되는 것은 성욕이었다. 당원들 간의 모든 결혼은 담당 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만 하는데 두 남녀가 서로의 육체에 이끌린 듯한 인상을 보이기만 해도 그 결혼 허가는 곧바로 취소되었다. 유일하게 인정된 결혼의 목적은 당에 봉사할 아이를 낳도록 하는 데 있었다. 성교는 마치 관장을 하는 것처럼 역겨운 행위로 간주되었다.(93∼94쪽)

 

 

'당신을 사랑합니다'란 글로 인해 살고 싶은 욕망이 불타오른 윈스턴은 '온갖 현실적 제약과 난관'을 뚫고 감시의 눈을 피해 그녀와의 밀회를 즐긴다. 누구보다도 열성 당원으로 왕성한 활동을 보여왔던 그녀에 대해 오랫동안 사상 경찰이나 스파이단의 정보원으로까지 오해했던 윈스턴은 그녀로부터 뜻밖의 고백을 듣게 된다.

 

"당신 얼굴에 쓰여 있는 걸 봤어요. 그래서 기회를 노렸죠. 저는 얼굴만 보고도 당의 충복이 아닌 사람을 금방 알아맞힐 수 있어요. 당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놈들'에게 저항하고 있다는 것을 알겠더군요."(173쪽)

 

윈스턴과 줄리아의 밀회는 점점 더 위험한 국면으로 빠져든다. 둘만이 밀회를 즐길 수 있는 방을 빌리기에 이른 것이다. 둘은 그것이 미친 짓이란 걸 알았다. 그것은 '일부러 무덤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과 같았다. 윈스턴과 줄리아는 채링턴 씨의 상점 2층에 있는 방에서 더 자주 밀회를 즐겼고, 두 사람은 거기서 사카린 대신 설탕을, 싸구려 커피 대신 진짜 커피를, 흑딸기 이파리가 아닌 진짜 홍차를 즐겼으며, 줄리아는 얼굴에 화장을 하고 향수까지 뿌렸다. 거기서만큼은 당의 동지가 아니라 진짜 여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고물상 위의 그 방이 계속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방이 누구의 침해도 받지 않고 거기에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윈스턴은 그 방에 가 있는 것 같은 안온함을 느꼈다. 그 방은 하나의 세계였고, 멸종된 동물들이 다시 살아나서 돌아다니는 과거의 주머니였다.(213쪽)

 

 

윈스턴에게 마침내 고대하던 순간이 왔다. 오브라이언에게서 기대했던 메시지가 온 것이다. 윈스턴은 오브라이언의 부름에 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일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옮겼지만, 이제는 글을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라고 여겼다. 윈스턴과 줄리아는 오브라이언을 만나러 내부당원의 으리으리한 저택을 찾아간다. 방문객을 맞은 오브라이언은 텔레스크린을 미리 끄는 친절까지 베푼다. 윈스턴은 마침내 용기를 내어 방문 동기를 말한다.

 

"저희는 당을 전복시키려는 모종의 비밀단체와 음모가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당신이 거기에 가담해서 일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희도 거기에 가담해서 일하고 싶습니다. 저희는 당의 적입니다. '영사'의 강령을 믿지 않습니다. 사상범입니다. 게다가 간통자이기도 합니다. 저는 저희 운명을 당신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240쪽)

 

 

오브라이언은 와인을 대접하며 그들을 냉담하게 환영한다. "자, 건강에 좋은 것이니 마십시다. 우리의 지도자, 임마누엘 골드스타인을 위해!" 라고. 그리고는 골드스타인이 쓴 '그 책'을 보내 줄테니 읽고 다시 돌려달라고 말한다. 얼마 후 윈스턴은 '그 책'을 은밀한 방법을 통해 전달받는다.

 

책의 제목은 《과두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제》였다. 소설에서는 윈스턴이 줄리아에게 이 책을 읽어준다는 설정으로 무려 43쪽에 걸쳐 책 내용이 아주 길게 이어진다. 윈스턴이 먼저 펼친 <제3장, 전쟁은 평화>에서는 '전쟁의 본질'을 다루고, <제1장, 무지는 힘>에서는 '계급투쟁의 본질'을 다루는데, <조지 오웰이 쓴 정치철학 강의>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내용이 체계적이면서도 깊이 있고 논리정연하다. 반체제 인사인 골드스타인이 쓴 그 책의 내용이야말로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1984년의 역사적인 배경과 정치·경제적인 제반 환경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어서 소설 『1984』를 한층 더 깊숙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독자들을 이끄는 훌륭한 교재가 된다.

 

채링턴 씨의 2층 방에서 밀회를 즐기던 윈스턴과 줄리아는 끝내 그곳에서 사상 경찰에게 체포되고 만다. 방을 선뜻 빌려줬던 채링턴 영감은 나중에 알고 보니 서른다섯 살쯤 된, 빈틈없고 냉정한 얼굴의 소유자로 드러난다.

 

소설의 <제3부>는 거의 전부가 감방 안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하는 윈스턴의 이야기뿐이다. 반역죄를 저지른 정치범이자 사상범인 윈스턴에게 가해지는 모진 고문은 뜻밖에도 오브라이언의 몫이었다. 애정부에서 그를 만난 건 이미 관례적인 예비 심문에서 주먹과 곤봉과 쇠몽둥이와 구둣발질에 만신창이가 된 이후였다. 오브라이언의 전기 고문은 마치 '학생과 선생 사이처럼' 진행된다. 윈스턴은 과거에 일어난 명백한 사실에 대해서조차 부정을 강요하는 오브라이언의 심문에 대해 완강히 거절한다. 그건 당에 반항하는 일이었다. 오브라이언이 새삼 당의 슬로건을 상기시킨다.

 

"과거를 지배하는 데 대한 당의 슬로건이 있네. 그걸 한 번 외워보게."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345쪽)

 

 

그렇다. 당이 현재를 지배하고 있으므로, 모든 과거는 당의 뜻대로 조작되고, 날조되고, 바뀌어야 한다. 그게 바로 과거를 지배하는 일이므로. 오브라이언은 '네 개의 손가락'을 윈스턴에게 펼쳐 보이면서 그게 '다섯 개'라고 대답하도록 끈질기게 강요한다. 당이 네 개가 아니라 다섯 개라고 말하면 결국 '다섯 개'가 맞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윈스턴은 전기 고문의 다이얼이 최대치에 이를 때까지도 '다섯 개'라는 대답을 선뜻 내놓지 못한다. 그게 네 개인데 어떻게 다섯 개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식으로 오브라이언의 고문은 계속된다.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하는 도중에도 간간이 자못 친절한 태도로 윈스턴과 길고 긴 대화를 나눈다. 온갖 사상범들을 잔인하게 고문할 게 아니라 간단히 없애버리면 그만일 텐데, 왜 당국은 그토록 힘들여서 정치범들을 고문하고 심문하는지, 당은 어떻게 권력을 유지하는지, 우리는 왜 권력을 원하는지 등에 관한 '고문실의 대화' 속에는 오웰의 예리하고도 깊이 있는 통찰들이 담겨 있다.

 

"…… 당은 오직 그 자체의 이익을 위해서 권력을 추구하네. 우리는 타인의 행복 따위에는 관심도 없네. 오로지 권력에만 관심을 둘 뿐이지. 재산도, 사치도, 장수도, 행복도 아닐세. 오직 권력, 순수한 권력만 바랄 뿐이네. 순수한 권력이 뭐냐고? 자네도 그게 뭔지 이해하게 될 걸세.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과두정치와 다르네. 우리와 다르든 비슷하든 과거의 사람들은 모두 겁쟁이이고 위선자일세. 독일의 나치와 소련의 공산당은 그 수법에서는 우리와 매우 흡사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동기를 인정할 만한 용기가 없었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한시적으로만 권력을 장악하겠다고 약속하고는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낙원이 도래할 것이라고 꾸며댔지.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믿기까지 했네. 우리는 그들과 다르네. 누구든 권력을 장악하면 그것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 법이지. 권력은 수단이 아닐세. 목적 그 자체이네. 혁명을 보장하기 위해서 독재를 행사하는 게 아니라 독재를 하기 위해서 혁명을 일으키는 걸세. 박해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박해일 뿐이네. 고문의 목적은 고문이고 말일세. 그처럼 권력의 목적도 권력 그 자체이네. 이제 내 말을 이해하겠나?"(367∼368쪽)

 

 

윈스턴은 오브라이언의 가혹한 고문 때문에 점차 '당에 대한 이해와 수용' 쪽으로 기울지만 끝내 감정적인 벽을 넘지 못한다. 결국 그는 오브라이언에게 '빅 브라더를 증오한다'고 고백하고 '마지막으로 밟아야 할 단계'인 공포의 101호실로 끌려간다. 거기서 가장 끔찍한 공포와 전율을 마주한 그는 자신부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순간에 줄리아마저 배신한다. 모진 고문과 세뇌교육 끝에 정상적인 사고 능력까지 망가진 채 석방된 윈스턴은 과거 반체제 인사들이 자주 드나들던 체스넛트리 카페에서 술로 허송세월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애정부로 돌아가 모든 죄를 고백하고,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공범자로 만든다. 그리고는 총살을 당한다.

 

소설 『1984』는 고도로 정보화된 미래 사회에 대한 암울한 예언이나 경고를 담은 상징적인 작품이 되었다. 이 소설에 담긴 '고도로 억압되고 통제된 감시 사회'는 과거의 숱한 공산권 국가들뿐 아니라, 2018년 현재까지도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 북한 정권의 가공할 만한 지배 체제를 거듭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인간의 얼굴을 짓밟고 있는 구둣발'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회이다. 오웰이 상상했던 1984년의 공포스런 정치 체제는 다행히 1980년대 후반에 진행된 소련 연방의 해체와 더불어 급격히 줄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 일부 국가들의 암담한 현실은 여전히 당혹스럽기만 하다.(게다가 빅 브라더를 연상시키는 통치자가 핵무기 버튼까지 움켜쥔 채 전세계를 상대로 게임을 벌이는 듯한 모습이 현실에서 벌어질 줄 그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조작과 날조, 감시와 통제, 억압과 처벌로 유지되는 끔찍한 사회를 차츰 견디다 못한 윈스턴이 오랫동안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어 왔던 오브라이언으로부터 도리어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끝내 제거되는 이야기는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윈스턴이 '반체제 혁명을 꿈꾼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줄리아마저 고문 과정에서 끝내 배신하고, 석방된 이후에 우연히 서로 조우했을 때조차 이내 서로 냉랭하게 돌아서는 모습은 너무 황량하고도 서늘하다. "그런 일이 닥치면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죠."라는 그녀의 말이 귓가에서 온전히 다 사라지기도 전에 텔레스크린에서는 마치 그들 두 사람을 비웃는 듯한 음악이 흘러 나온다.

 

울창한 밤나무 아래

나 그대를 팔고, 그대 나를 팔았네…….

 

물론 가장 진한 아이러니는 빅 브라더를 타도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오브라이언을 만나기를 갈망했고, 그로부터 온갖 고문과 심문을 당하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선생님에게 배우는 학생처럼' 사상 교육을 받은 윈스턴이 마침내 죽는 순간에 빅 브라더를 사랑하게 된 사실이다. 이보다 더 완전한 파멸과 아이러니가 어디에 있겠는가. 가눌 수 없는 허탈감이 밀려드는 소설의 맨 끝줄을 온전히 다시 음미하기 위해서라도 소설의 처음으로 다시 되돌아갔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두 번째로 읽었을 때 오웰의 진면목을 훨씬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다는 사실도?

 

윈스턴은 빅 브라더의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그 검은 콧수염 속에 숨겨진 미소의 의미를 알아내기까지 사십 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오, 잔인하고 부질없는 오해여! 오, 저 사랑이 가득한 품 안을 떠나 제멋대로 고집을 부리며 지내온 유랑의 삶이여! …… 그러나 잘되었다. 모든 것이 잘되었다. 투쟁은 끝이 났다. 그는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브라더를 사랑했다.(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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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폐한 집 동서문화사 월드북 231
찰스 디킨스 지음, 정태륭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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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킨스의 애독자들은 『위대한 유산』을 그의 소설 중 제1로 치지는 않는다. 대중적 인기로 치자면 『올리버 트위스트』보다 뒤진다. 디킨스 본인은 『코퍼필드』를 더 우위에 두었지만, 나를 포함해서 많은 비평가들은 『황량한 집』을 첫 손가락으로 꼽는다. (헤럴드 블룸)

 

 * * *

 

많은 작가들이 많은 작품을 남겼다. 찰스 디킨스도 다작으로 유명한 작가다. 그런데 작가가 남긴 여러 작품 가운데 최고의 작품이 가장 널리 읽히는 경우는 그리 일반적이지는 않은 듯하다. 당장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만 떠올려 보더라도 그런 사정은 금세 알 수 있다. 토마스 만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대표작이 『마의 산』이라고 해서 토마스 만의 독자들이 그 작품을 가장 많이 읽었으리라고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이 훌륭한 소설이 찰스 디킨스의 다른 많은 작품들에 비해 훨씬 덜 읽힌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가볍게 수긍해야 옳지 싶다. 비록 이 작품이 지닌 훌륭한 가치에 비해 독자들의 독서 열정이 지나칠 정도로 반비례 관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좀처럼 떨치기 어렵더라도 말이다.

 

찰스 디킨스의 주된 특징은 '유머와 위트와 재치와 긍정'으로 요약할 수 있지 싶다. 문학의 역사에서 이런 특징이 극에 달했던 작가는 누가 뭐래도 셰익스피어였다. 이같은 이유로 찰스 디킨스는 자주 셰익스피어에 비견된다. 시인이자 극작가이자 배우였던 셰익스피어가 넘치는 열정과 문재(文才)를 시로 마음껏 발산했다면, 소설가이면서도 배우에 대한 열정과 기질이 넘쳤던 디킨스는 자신의 머리 속에 끊임없이 샘솟는 이야기를 통해 그런 기분을 풀어냈다.

 

그가 『황폐한 집』에서 은연 중에 발설했던 다음 대화는 바로 작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으흠! 셰익스피어처럼 말씀을 잘하시는데요!"

 

심지어 그는 소설 속에서조차 시인처럼 '반복되는 후렴'을 리드미컬하게 구사할 정도였다. 그게 등장 인물의 대화 속이든 전경이나 배경 묘사든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등 뒤로는 셰익스피어가 슬쩍슬쩍 엿보일 때가 자주 발견되고,  때로는 그 너머에 아스라히 고대 그리스 비극 시인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때도 있다. 가령 『황폐한 집』에서 주인공 격인 에스더 서머슨 양이 마침내 자신의 생모로 밝혀진 데들록 부인을 만났을 때 나눈 대화가 그렇다.

 

"어머니, 이미 결심하셨나요?"

 

"결심했어. 난 지금까지 어리석음에 어리석음을 더하고, 자존심에 자존심을 더하고, 경멸에 경멸을 더하고, 자만에 자만을 더하고, 큰 허영에 더욱 큰 허영을 덧칠하며 살아왔어. 할 수 있다면 이 위기도 잘 극복해 죽을 때까지 무사할지도 몰라. 난 위험에 둘러싸여 있어. 체스니 월드가 이 깊은 숲에 둘러싸여 있듯이. 하지만 난 언제까지나 그 안을 걸을 거야. 내가 걸을 길은 오직 하나, 단 하나밖에 없단다."

 

 

찰스 디킨스는 남달리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은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어릴 때 겪었던 감정인 부모에게 버림받아 비천한 신분으로 떨어졌다는 절망감과 굴욕감은 그에게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이 체험이 그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굳은 결심과 향상심과 출세욕을 심어주긴 했지만 말이다.

 

'이런 생각이 가져오는 비통함과 굴욕감이 내 성격 전체에 스며들어 버려서 나는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칭송받고 행복해진 지금까지도 가끔 꿈을 꾼다. 그 꿈에서 나는 내게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생겼다는 사실, 아니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홀로 외롭게 그 시절을 헤매다가 돌아온다.'

 

바로 이런 작가의 경험 때문에 그가 쓴 작품에는 유독 고아나 가난한 사람들이나 부랑자나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올리버, 『위대한 유산』의 핍,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데이비드, 『어려운 시절』의 루이자, 『황폐한 집』의 에스더 서머슨, 에이더 클레어, 리처드 카스톤, 부랑아 조 등이 대표적이다.

 

몹시도 아픈 과거를 지닌 작가를 과거로부터 마침내 해방시킨 작품은 『데이비드 코퍼필드』(1849∼1850)였다. 주인공이 세상에 막 태어날 때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어엿한 작가로 성공할 때까지의 온갖 삶의 기억들을 '웃음과 눈물과 기쁨과 애환'을 가득 담아 그려낸,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 자전적 소설이야말로 작가에게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나의 사랑하는 자식' 같은 작품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데이비드 코퍼필드』야말로 작가를 끊임없이 붙들고 옭아매던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뚜렷이 결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작품이기도 했다.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끝낸 작가는 곧이어 『황폐한 집』(1852∼1853)을 통해 본격적인 사회 비판에 깊숙하게 발을 들여놓게 된다. 디킨스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방대한 장편소설은 이보다 나중에 쓰여진 『어려운 시절』(1854년),  『리틀 도릿』(1855∼1857)과 『우리 서로의 친구』(1864∼1865) 등과 함께 묶여 '사회 비판'을 다룬 작품군을 이루는데, 이 가운데 단연 뛰어난 작품이 바로 『황폐한 집』이다.(사실 디킨스는 알고 보면 초기 작품인 『피크위크 페이퍼스』에서부터 일찌감치 '사회정의'를 일깨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작가였다. 이러한 디킨스의 작품 경향으로부터 자못 강렬한 인상을 받은 버나드 쇼는 『리틀 도릿』에 대해 "『자본론』 보다도 더 폭동을 유발하는 책"이라고 말할 정도였고, 칼 마르크스는 『리틀 도릿』을 최초의 자본주의 공격 소설로 평가했다고 한다. 칼 마르크스는 심지어 "세계의 모든 정치인, 사회운동가들이 한 모든 것보다 디킨스가 세상의 핍박 받는 민중을 위해 한 일이 더 많다"고 말할 정도였다.)

 

『황폐한 집』이 다루는 주제는 얼핏 손에 쉽게 잡히는 빤한 주제들을 다루지는 않는다. 디킨스의 초기 작품들에서는 특정한 사회적 폐해가 개별 현상으로서 언급되고, 사회악의 책임이 특정한 개인의 탓으로 돌려지는 반면, 후기 작품을 대표하는 『황폐한 집』에서는 각종 사회 제도나 조직 자체가 사회악의 근원으로 다뤄진다. 의회 정치에 대한 불신이나 하릴없이 무위도식하면서 무료한 나날을 보내는 상류층에 대한 조롱과 풍자와 비난이 함께 담겨 있지만 그 방식이 대체로 모호하게 그려져 있다. 그건 마치 런던을 가득 덮고 있는 안개와 진창을 바라보는 식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안개다. 템스 강 상류에도 안개가 푸른 섬과 목장 사이를 흘러간다. 강 하류에도 안개가 자욱하다. 이곳에서는 수없이 정박한 배들 사이와 이 커다란(그리고 더러운) 도시의 지저분한 강기슭을 더러운 안개가 소용돌이를 그리며 지나간다. 에섹스 주 늪지 위도 안개요, 켄트 주 구릉 위도 안개다. 안개는 석탄을 운송하는 범선 상갑판 주방으로도 스멀스멀 들어 오고, 커다란 배 돛대 위에도 잠들어 있으며, 식구 안을 돌아다니고, 거룻배도 작은 뱃전에도 웅숭그리고 있다. 그리니치 해군병원 병실 난로 옆에서 콜록거리는 노병의 눈과 목구멍 안으로 기어들어 가고, 공연히 성질난 선장이 비좁은 자기 방에서 피워대는 오후의 담뱃대와 재떨이에 기어들어 가고, 갑판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어린 수습 선원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매몰차게 꼬집는다. 다리 위를 지나가는 난간 너머로 하늘에 낮게 깔린 안개를 바라본다. 그들 사이에도 안개가 자욱해서 이들은 마치 열기구에 올라타 구름 속을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11∼12쪽)

 

 

안개가 가장 자욱하고 거리가 가장 진흙으로 범벅이 된 곳에 링컨 법조원의 대법관 법정이 자리잡고 있다. 거기가 바로 소설의 주무대이다. 해롭기 그지없는 늙은 무뢰한이나 다름없는 이 법정에 대한 묘사는 아주 길게 이어진다.

 

오늘 같은 오후에야말로 대법관은ㅡ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지만ㅡ이 법정에 자리 잡고 앉아 안개처럼 몽롱한 후광에 싸이고 하늘거리는 붉은 천과 커튼에 둘러싸인 채, 요란한 구레나룻을 기른 거구이면서도 목소리는 개미만 한 변호사의 끝없이 장황한 설명을 들으면서, 안개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붕의 들창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야 한다. 이런 오후에야말로 수십 명에 이르는 대법관 법정 판사들은ㅡ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듯이ㅡ언제 끝날지 모르는 소송 중 수천 단계 째의 일에 막연히 매달리고, 막히기 쉬운 판례에서 서로 꼬투리를 잡고, 소소한 전문적 법률 사항에 무릎까지 파묻혀 허우적거리고, 산양 털이나 말 털로 만든 가발을 뒤집어쓰고는 그것으로 법률 조문의 벽을 깨부수겠다고 무모하게 머리를 갖다 박고, 연극배우 뺨치게 자못 진지한 얼굴로 공명정대한 태도를 꾸며내야 한다. 이런 오후에야말로 사건에 관계된 온갖 사무변호사는ㅡ그중에는 부모님 대부터 담당하던 일을 맡은 사람도 두서넛 있고 모두 그 사건으로 이미 부를 쌓았지만ㅡ서기 책상과 칙선변호사 비단 법복 사이에 놓인 매트 깔린 기다란 변호사석에 앉아(그러나 이 우물 바닥에서 '진리'를 찾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다) 저마다 눈 앞에 소장, 답변서, 재항변서, 제2답변서, 강제명령서, 선서진술서, 소송쟁점서, 법원 주사가 읽을 심사보고서, 법원 주사의 보고서, 그 밖의 온갖 값비싼 잡동사니를 쌓아놓고 있어야 한다. 다 꺼져가는 촛불이 법정을 어두침침하게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안에 낮게 깔린 안개가 영원히 나가지 않겠다는 듯이 버티는 것만 같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색유리가 끼워진 창문들이 색채를 잃고 대낮의 햇빛이 통과시키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도시의 문외한들이 입구의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다가 내부의 올빼미 같은 광경을 보고 또 천이 깔린 윗자리에서 천장까지 우울하게 울리는 멍청한 변설을 듣고는 안으로 들어가기를 포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윗자리에서는 대법관이 햇빛을 통과시키지 않는 들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고, 그 옆에 앉은 가발 쓴 법관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안개에 파묻혀 있다! 바로 여기가 대법관 법정이다. 이 법정을 위해 나라 곳곳에 다 쓰러져가는 집과 황폐한 땅이 존재한다. …… (12∼13쪽)

 

 

소설 『황폐한 집』의 <제1장_대법관 법정>은 오로지 '런던의 안개'와 그 가운데 자리잡은 '대법관 법정'을 묘사하는 데 온전히 할애하는데, 위에서 인용한 두 단락은 제1장 전체 분량에 비하면 고작 1/8 정도에 불과하다. 그만큼 이 소설의 '서주' 부분이 자못 장대하게 펼쳐져 있는 셈인데, 디킨스의 여느 작품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무게 와 깊이'를 반증하고 있다.(번역본에는 따로 설명이 없지만, 여기서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런 오후에야말로'가 리드미컬하게 반복되는 수법은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5막 1장>에서 로렌초와 제시카가 달밤에 나누는 감미로운 사랑 노래와 너무나 닮았다. 거기서 두 연인은 '이런 밤에'를 '후렴'처럼 무려 일곱 번이나 주고 받는다. 디킨스는 유독 이 작품에서 이같은 '후렴'을 반복하는 수법을 여러 곳에서 자주 구사한다.)

 

총 67장으로 구성된 이 방대한 장편소설은 '여러 층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대체로 재미있으면서도 술술 읽힌다는 평가'를 받는 디킨스의 여느 소설과는 궤를 달리하는 소설이다. 음악에 비유하자면 제1주제와 제2주제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의 부차 주제(題)들까지 다양하게 포함하고 있으며, 그런 주제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여러 악장들 속에서 때로는 단조로, 때로는 장조로 아주 다양하게 제시되고 전개되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구성 때문에 처음에는 따로 떨어져 서로 낯설게만 들리는 여러 소소한 이야기들이 차츰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다가 나중에 마침내 하나로 합쳐져 피날레를 향해 숨가쁘게 내달릴 때에는 거대한 감동의 쓰나미에 휩싸이게 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런던 대법관 법정과 그 주변, 레스터 데들록 경과 데들록 부인이 살고 있는 링컨셔의 대저택, 잔다이스 씨가 살고 있는 '황폐한 집' 등이다. 공간이 생각보다 그리 넓은 편은 아니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설의 방대한 규모에 어울릴 정도로 충분히 많다. 제1의 주인공은 에스더 서머슨 양이다. 소설의 절반 정도는 에스더가 '나'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에스더의 이야기'가 두 장 혹은 세 장쯤 이어지고 나면 다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가 (시간과 공간을 바꿔) 두 장 혹은 세 장 정도 분량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개한다.(이런 방식의 독특한 이야기 전개가 극대화한 작품으로는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떠올릴 수 있다. 그 작품에서는 매 장마다 등장 인물의 이름이 장의 제목으로 달려 있는데, 바로 그 인물이 '1인칭 화자'로 나서서 이야기를 이끈다. 윌리엄 포크너는 찰스 디킨스를 모방한 셈이다.) 

 

주인공인 에스더가 '나'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끄는 부분은 자연스럽게 에스더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진다. 어릴 때부터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로 대모의 손에서 자란 에스더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진 채  '복종과 극기와 부지런함'을 강요받으며 자란다. 열네 살 때 대모마저 사망하면서 외톨이 신세가 된 에스더는 예기치 못한 후원자의 손길 덕분에 기숙사가 딸린 학교에 들어가고, 나중에는 잔다이스 씨의 '황폐한 집'으로 이주해서 그 집의 살림살이를 도맡게 되고, 점차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믿음과 사랑을 얻게 된다.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 전개는 에스더 서머슨 양의 주변을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맴돌긴 하지만 직접적으로 맞닿지는 않는다. 벌써 수십 년째 해결될 기미조차 없이 지리하게 이어지고 있는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소송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거기에 더해 상류 사회를 대변하는 레스터 데들록 집안의 거대한 저택에 머무는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보태진다. 다채롭고도 흥미로운 인물들은 대법관 법정 주변에 가장 많이 모여 있다. 대서인, 문방구점 주인, 변호사, 하숙인 등등이 저마다 자기 직분에 몰두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끝없이 전개된다.

 

독자들은 소설을 한참이나 읽어도 계속 '안개에 휩싸인 듯한 기분'을 떨치기 어렵다. 도대체 에스더 서머슨 양의 이야기가 이제 막 흥미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겠구나 싶으면 어김없이 거기서 이야기는 중단되고, 다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로 전환되면서 '다른 공간에서 펼쳐지는 다른 이야기'로 뒤바뀌고 마는데, 그들 두 이야기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기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읽을 때 끊임없이 '화자'가 뒤바뀌면서 '이게 도대체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하는 당혹감을 맛보는 경우와 아주 흡사하다. 이런 이야기 수법이야말로 작가가 일부러 의도한 '교묘한 이야기 전달 방식'의 핵심 장치이다.

 

자욱한 안개 속에 휩싸인 사람은 자주 길을 잃게 마련이고, 여기 저기 안개 속에서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들 때문에 적이 놀라기 마련이다. 하지만 안개 속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과연 어디에서 왔으며 또 앞으로 어디를 향해 발걸음을 옮길 것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황폐한 집』에 등장하는 여러 배경들이나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매 장마다 다르게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배경과 인물들이 끝없이 펼쳐지기만 할 뿐 좀처럼 정리되는 듯한 느낌을 갖기 어렵기 때문에 처음부터 긴장감을 갖고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이내 길을 잃기 쉽다. 어떤 인물들이 어떤 장면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를 무심코 지나치다 보면 한참 후에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그 사람이 불쑥 다시 등장했을 때 그 까닭을 금세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교묘한 장치들이 잔뜩 숨겨져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을 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 사람의 이름과 특징과 해당 쪽수를 함께 적어둘 필요가 있다.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어도 어쩔 수 없다. 이 기나긴 장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아마도 백 명 가까이 될 듯한데, 나중에 이야기 전개가 차츰 '안개가 걷히듯'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 때쯤이면,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어떤 식으로든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소송 사건'과 서로 연관을 맺고 있거나, 혹은 이 소설의 주요 인물들인 에스더 서머슨 양과 데들록 부인 혹은 잔다이스 씨와 깊은 연관 관계를 맺고 있음이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에스더의 이야기와 전지적 작가의 이야기가 팽팽하게 평행선을 달리듯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이끌다가 마침내 서로 맞닿는 지점은 언제쯤일까. 그 해답을 찾을 때쯤이면 이 소설은 어느새 클라이맥스에 가까이 다가가 있다. '미모와 자존심과 야심과 교만한 고집'으로 똘똘뭉친 데들록 부인이 아무도 모르게 '편지 한장' 딸랑 남기고 느닷없이 가출한 사실이 발견되고, 그 소식을 들은 잔다이스 씨가 한밤중에 에스더 서머슨 양을 깨우는 장면이 '마침내' 서로 이어지는 것이다. 무려 1,000쪽에 가까운 소설이 바로 여기서부터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하고 빠르게 전개되는데, 이 극적인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로 진입하기 위한 연결 다리는 866쪽에 이르러서야 겨우 발견할 수 있다.

 

『황폐한 집』을 읽고 나면 작가로서의 찰스 디킨스가 얼마만큼 탁월한 이야기꾼인지를 깨닫고 새삼 놀라게 된다. 그가 꾸며내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놀랍고 초정밀 시계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치밀하고도 교묘하다. 또한 찰스 디킨스의 여느 다른 작품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그만의 '심오한 경지'를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찰스 디킨스가 도스토옙스키의 스승으로 불리우고 톨스토이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심지어 프란츠 카프카, 제임스 조이스, 윌리엄 포크너 등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듯한 기분도 든다.

 

디킨스는 오로지 소설만 쓴 작가가 아니었다. 자신의 작품을 연재할 주간지도 20년이나 계속해서 발행했고, 잡지에 게재되는 원고를 일일이 검토했고, 자신의 소설뿐만 아니라 잡지 기사도 직접 작성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선사업과 사회사업, 곳곳에서 열리는 강연과 사교 모임에도 활발히 참석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편지만 하더라도 한 권이 700쪽이 넘는 스물두 권짜리로 간행되어 있다고 한다. 작가의 넘치는 에너지와 활력을 보고 랄프 왈도 에머슨이 "그토록 왕성한 창작력과 다채로운 재능을 지닌 한 예술가에 대해서, 또한 한 인간으로서 그가 가진 복합적인 성격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던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찰스 디킨스의 작품들이 국내에 여럿 번역되어 나와 있지만 아직도 그의 방대한 작품 세계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올리버 트위스트』를 시작으로, 『위대한 유산』, 『데이비드 코퍼필드』, 『황폐한 집』에 이르는 네 권의 대표작만 하더라도 완독하기 벅찬 게 사실이지만 디킨스를 아주 좋아하는 독자라면 그리 힘든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사족이지만, 아직까지도 국내에 번역조차 되지 않은 디킨스의 다른 많은 작품들이 어서 빨리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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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5-04 1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찰스 디킨스의 작품을 많이 접하지 못했지만, 예전에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으면서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어두운 면을 깊이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 불평등, 억압 등 사회 부조리에 대한 수많은 이론을 다룬 책들보다, 현실을 반영한 문학 작품이 더 큰 울림을 준다는 것을 <올리버 트위스트>를 통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oren님의 글을 통해 디킨스의 다른 저작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oren 2018-05-05 20:17   좋아요 1 | URL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찰스 디킨스에 대한 관심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많은 작품들이 국내에는 번역조차 되지 않은 상태이니까요. TV와 영화가 대세인 시대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을 작가로 당당히 인정받는 사람이 찰스 디킨스인데 말이지요. 좀 더 알아 보니, 그의 작품 가운데 『위대한 유산』, 『리틀 도릿』, 『올리버 트위스트』, 『크리스마스 캐럴』,『황폐한 집』등이 이미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었고, 심지어 찰스 디킨스를 주인공으로 삼는 영화까지 나와 있더군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저는 『황폐한 집』만이라도 기필코 ‘영화‘로 다시 한번 감상하고 싶습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풍경들과 인물들의 ‘영화 속 모습‘이 너무 너무 궁금해서 말이지요.

혜덕화 2018-05-04 2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위대한 유산>재미있게 읽었어요.아주 오랫만에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좋은 고전을 만나는 기쁨을 님 덕분에 누릴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oren 2018-05-05 20:22   좋아요 0 | URL
혜덕화 님께서 『위대한 유산』을 아주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저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작품은 커녕 찰스 디킨스에 대해서는 완전 문외한이었는데, 그 작품 덕분에 디킨스의 다른 많은 작품들을 잇따라 읽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더랬지요.^^

* * *

…… 그러나 『두 도시 이야기』처럼 『위대한 유산』은 대단히 대중적이라는 면에서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수십 편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 비견될 만하다. 왜냐하면 영화나 텔레비전이 아닌 모습으로 이 정보화 시대에 살아남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햄릿』과 『맥베드』를 읽듯이 우리는 『위대한 유산』을 끊임없이 읽을 것이다.(헤럴드 블룸)
 
데이비드 코퍼필드 동서문화사 월드북 138
찰스 디킨스 지음, 신상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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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류가 가지고 있는 가장 훌륭한 친구들 중 하나이다.

 - 조지 산타야나

 

 * * *

 

찰스 디킨스는 영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이다. 영국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작가가 셰익스피어라면, 찰스 디킨스는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다. 그의 명성은 스물다섯 살 때 갑자기 '불꽃처럼' 하늘 높이 솟아오른 뒤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고 있다.

 

셰익스피어를 두고 어느 한 작품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디킨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스크루지 영감이 등장하는『크리스마스 캐럴』 하나만으로도 그는 크리스마스를 새롭게 창조한 인물로까지 칭송 받는다. 그러나 그는 얼핏 보면 어린이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작가로 보이지만 어린이나 유아를 위한 작가는 아니다.

 

그의 작품은 읽기가 쉽기 때문에 대중적인 작가로 보이지만 실상은 아주 진지한 예술가로 대접받아야 마땅한 인물이다. 디킨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때로는 '만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특징과 용모가 매우 부풀려지고 '희화화' 되지만, 그런 방식이야말로 디킨스가 아주 즐겨 사용하는 인물 조형 방법이자 인생을 폭로하는 중요한 장치나 방식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대목을 놓치면 그를 오해하기 쉽다.

 

디킨스의 작품 속에는 고아가 중심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으며, 부랑자나 죄수들을 비롯한 버림받고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가 소설 못지 않게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때 맛본 고독과 절망, 굴욕과 비참함이 한평생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인생에서의 불행을 아주 심오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그는 때때로 도스토예프스키와 거의 동급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디킨스의 작품이 러시아 작가보다는 훨씬 덜 심각하며,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등 분위기도 훨씬 밝은 편이다. 무엇보다 디킨스의 작품은 종교, 과학, 정치, 예술 등에 대해서는 아주 초연하다는 점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와는 아주 다르다.

 

디킨스는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태어났지만 어릴 때 잠깐 동안은 해군 경리국에서 일하던 아버지의 안정적인 수입 덕분에 매우 행복한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꾸만 빚을 져서 심각한 위기에 빠지자 '목가적인 시대'는 갑자기 끝이 났고, 가족들이 런던으로 이사를 떠난 뒤 홀로 '하숙'을 하며 몇 주 더 학교를 다녔던 디킨스도 끝내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작은 짐 하나만 가지고 홀로 승합 마차를 타고.

 

이 우울한 여행을 그는 평생 잊지 못했다. 눅눅한 지푸라기 냄새도 그 기억에 들러붙어 있었다. "나는 사냥당한 짐승처럼 지푸라기에 싸인 채 발송된 것이다." 몇 년이 지나서 그는 괴롭게 술회했다. "승합마차 좌석에는 다른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혼자서 쓸쓸한 기분에 젖어 샌드위치를 씹었다. 가는 길 내내 비가 세차게 내렸다. 인생은 내가 기대하던 것보다 축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1017쪽)

 

홀로 런던에 도착해 보니 가족은 '누구라도 눈을 돌리고 싶을 만큼' 칙칙하고 누추하고 초라한 동네에서 살고 있었다. 집안 형편은 나날이 비참해졌고 독이 오른 채권자들은 집으로 몰려와 모욕적인 말을 퍼부어댔다. 어린 디킨스가 하는 일이라고는 가재도구를 골라 전당포에 내다파는 일이 고작이었다. 열두 살이 된 디킨스는 결국 강기슭에 위치한 어두침침하고 쥐들이 우글거리는 구두약 공장에 고용된다. 여기서 겪은 경험이 얼마나 비참했던 것인가를 그는 나중에 친구에게 이렇게 털어놨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그토록 쉽게 내버려지다니…… 아무도 나를 동정해 주지 않았다. 비범한 재능을 가졌고 머리 회전도 빠르며 의욕이 넘치고 섬세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상처받기 쉬운 아이였는데. 그런 나를 어디 평범한 학교에 들여보내 주려고 조금이라도 노력하든가-실제로 그럴 수 있었을 테니까."

 

이때 그가 경험한 공장 생활은 그의 생애와 작품에 깊고도 영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가 육체노동을 하는 비참한 아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 새겨진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심각했던지는 최근에 개봉된 영화에도 아주 생생하게 담겨 있다.(☞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원제는 The Man Who Invented Christmas))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주급 6∼7실링의 수입으로는 하숙비와 끼니를 해결하기 어려운 처지였는데, 그나마 버티던 아버지가 빚 때문에 체포되어 감옥에 투옥된 것이다. 그래도 그는 일요일을 기다리며 버텨냈다. 일요일이 되면 6마일을 걸어 마샬시 감옥에 가서 부모님과 형제자매들과 함께 '온갖 시름을 다 잊고' 하루를 보낼 수 있었으므로.

 

이런 눈물겨운 이야기는 작가와 절친이었던 존 포스터가 지은 방대한 《디킨스 전기》(1872∼1874)를 통해 자세히 살필 수 있지만, 디킨스가 쓴 자전적 전기인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맛볼 수 있다. 그렇다. 내가 여기서 찰스 디킨스의 어린 시절을 다소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데이비드 코퍼필드』에서 구두약 공장을 다닐 때의 역경은 <11장. 힘겨운 홀로서기>에 나오는데, 일부만 소개하면 이렇다.

 

그렇게 살아도 1주일에 6,7실링 가지고는 모자랐다. 그래도 나는 온종일 창고에서 일하고, 그 돈으로 1주일을 살아가야만 했다. 월요일 아침에서 토요일 밤까지, 누구의 충고도 없었고, 어떠한 조언도, 격려도, 위로도, 도움도, 어떠한 종류의 지원도 받지 못한, 거짓도 위선도 없는 곳이었다.

 

나는 너무 어렸고 철이 없었기에 내 생활을 꾸려갈 만한 능력이 없었다. 어린 내가 달리 어떻게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겠는가? 아침에 머드스톤 앤드 그린비 상점에 가는 도중, 빵집 앞에 내놓은, 반값에 파는 오래된 과자를 목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점심 먹을 돈으로 과자를 미리 사먹어버릴 때도 있었다. 그런 때는 점심을 거르거나 롤빵 한 개, 아니면 푸딩 한 조각으로 요기를 했다.(190∼191쪽)

 

 - 찰스 디킨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11장. 힘겨운 홀로서기> 중에서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어릴 때 겪는 '온갖 고생담'은 눈물 없이는 읽기 어려울 정도로 불쌍하면서도 놀랍도록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작가 자신이 직접 겪었던 체험들이 도대체 얼마나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기에 이토록 실감나는 이야기를 쓸 수 있었까 싶은 생각에 애처로운 생각이 들면서도 감탄을 거듭하며 읽게 된다. 방금도 살펴봤지만 태어나서 고작 12살때까지 겪은 '파란만장한' 이야기만 하더라도 벌써 이 소설은 200쪽을 훌쩍 넘어간다. 그러니 전체 1,010쪽에 이르는 이 방대한 소설이 어린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둘러싸고 얼마나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을지는 쉽게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주인공이 갓 태어난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마침내 고명한 작가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될 때까지 만났던 수많은 인물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이 소설을 읽는 재미가 오로지 '작가 찰스 디킨스의 드라마틱한 실제 삶'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만큼 크나큰 오해도 없을 것이다. 물론 이 방대한 소설의 상당 부분이 작가의 실제 삶을 깊게 투영한 건 맞지만, 그게 크나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다. 특히나 20대 중반부터 갑자기 시작된 작가로서의 놀라운 성공 과정이나 출세한 작가로서의 화려한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작품을 완성할 때만 하더라도 작가의 나이는 고작 37세였고, 소설에 1인칭으로 등장하는 '나'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이 또한 30대 중반쯤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주인공이 비교적 어린 나이인 20대 초반에 사랑하는 도라와 결혼식을 올리고 신접살림을 차릴 때쯤이면 이 소설은 벌써 740쪽을 훌쩍 지나면서 서서히 종반부로 치닫게 된다. 그러나 주인공의 삶을 다루는 시기가 이처럼 아직 한창이나 다름없는 나이인 30대 중반으로 한정된다고 해서 작품 내용마저 철없는 10대와 20대 시절의 이야기에 너무 치우쳐 있으리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비록 30여 년에 걸친 짧은(?)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이 작품 속에는 결코 적잖은 사람들이 저마다 엄청난 사건들을 겪고, 홀연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 더러는 독자들의 예상보다 훨씬 일찍 갑작스러운 변화와 죽음을 마주하지만, 더러는 오래도록 살아 남아서 뒤늦게나마 주인공인 '나'와 다시 '눈물겨운 상봉'을 갖기 때문이다. 지난 날에 대한 온갖 추억과 회한과 상념들을 골고루 떠올리면서.

 

이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펜을 놓기 전에 다시 한 번 ㅡ 마지막으로 떠올려 본다.

(……)

빠르게 스쳐 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뚜렷이 보이는 얼굴은 누구일까? 아아, 그렇다, 이 얼굴들! 내가 속으로 그것을 물어보면 모두가 일제히 나를 뒤돌아 본다!(1006쪽)

 

 - 찰스 디킨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64장. 마지막 회상> 중에서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여느 이름난 장편소설들과는 사뭇 다르다. 대개 '장편소설'들이 다루는 주제들은 묵직하기 마련이고, 거대한 건축물을 마주 대하듯 '외관'에서부터 압도되는 경우도 많은데 이 소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도 찰스 디킨스를 무척 좋아했다고는 하지만 『전쟁과 평화』와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다만 두 소설이 아주 닮은 점 한 가지는 꼭 밝히고 싶다. 두 작품에 똑같이 등장하는 '주연급 청춘남녀가 철없이 저지르는 무대뽀 야반도주 사건'만큼은 닮아도 너무 닮았다. 그들 두 커플은 용모나 성격까지도 쏙 빼닮았다. 심지어 두 여주인공이 도주할 때 남기는 '급하게 갈겨 쓴 편지'까지 닮았다. 러시아 소설에선 나따샤(오드리 햅번이 맡았던 배역)과 돌로호프가 주인공이고, 영국 소설에선 에밀리와 스티어포스가 그런 역할을 떠맡았는데, 아마도 잘 모르긴 해도 톨스토이가 『데이비드 코퍼필드』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지 싶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쓴 『전쟁과 평화』에는 숱한 인물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밝히고자 애썼던 '삶의 의미'에 언제나 전쟁과 평화, 역사와 우연, 종교와 정치 등과 같은 묵직한 주제들이 끈덕지게 들러붙었으나, 찰스 디킨스의 작품에서는 그런 요소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는 점이 서로 다르다.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에 그런 요소가 왜 필요하겠는가.

 

이 소설이 지닌 치명적인 매력 가운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과거에 대한 회상'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너무나 정확하게 되살려 내는 주인공의 비상한 기억력이고, 그걸 너무나 매혹적으로 기술하는 작가의 솜씨다. 아무리 작가의 전기적인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작가가 이 정도로 적재적소에서 아주 세밀하게 '어린 시절의 온갖 추억'을 비디오처럼 생생하게 되떠올리고, 그런 회상 장면 자체까지도 놀랍도록 매혹적으로 묘사해 놓은 줄은 몰랐다.

 

인생의 매 순간마다 우리의 눈앞을 스치듯 사라져가는 수많은 광경들과 감각들, 다시 말해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통해 우리의 뇌리에 저장되는 기억들을 이처럼 생생하게 되살려 놓은 작품을 일찌기 나는 접해본 적이 없었다. 이 소설 덕분에 내가 '낡은 기억의 저장고'에서 먼지를 푹 뒤집어쓴 채 오랫동안 널브러져 있던 온갖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들 틈을 헤집고 다니다가 문득문득 새롭게 꺼내 본 풍경과 기억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일일이 셀 수도 없을 정도다. 그것들은 때로는 기적적으로 기억의 심연 속에서 갑자기 불쑥 떠오르기도 했고, 그때마다 나는 그런 기억들을 어떤 식으로든 붙둘어 매어 두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트에 옮겨적었다.

 

어디선가 프로이트가 가장 좋아한 소설이 『데이비드 코퍼필드』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나서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기도 했다. 주인공 데이비드가 심리적으로 강렬한 충격을 받을 때마다 그는 '현실에서 비롯된 꿈'을 잠자리에 들어서도 내내 이어가는데, 그 이야기가 어찌나 사실적이면서도 생생했던지 '그래, 맞아, 나도 예전에 그런 비슷한 꿈을 자주 꾸었지'라는 말도 자주 되뇌었다. 인간 내면 심리에 대한 탁월한 연구결과를 내놓은 천재 심리학자 프로이트가 이 소설을 두고 얼마나 '자신의 경험'과 일일이 대조하면서 자주 읽었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데이비드 코퍼필드』에 담긴 이야기는 '기억의 본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독자들한테 끊임없이 회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몹시 매력적이다. 디킨스는 또한 계급과 성()의 차이에서 오는 '관계의 불안정'도 깊이 연구했는데, 이는 노동자 계급인 에밀리를 유혹하는 스티어포스, 성녀같은 아그네스에게 흑심을 품은 우라이아, 그리고 결혼 이후에도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관능적인 도라에서 정숙한 이성 아그네스에게로 차츰 관심이 옮겨가는 데이비드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어느덧 『데이비드 코퍼필드』와도 작별할 시간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꽤나 많은 사람들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듯하다. 가장 먼저 페거티와 그의 오빠가 떠오른다. 쌀쌀맞던 의붓아버지 머드스톤과 그의 누나도. 학창시절부터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스티어포스와 트레들스도. 페거티 씨네 뱃집에서 의좋게 살았던 에밀리와 햄과 거미지 부인도. 구두약 공장에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오래도록 함께 한 미코버 부부도. 5박 6일 동안의 고난의 행군 끝에 만난 대고모 트롯우드도. 캔터베리의 대성당 근처에 살았던 우라이아 힙과 아그네스까지도 벌써 그립다. 아직도 사전 편찬에 계속 몰두하고 있을 것만 같은 스트롱 박사 부부도 그립고, 도라와 집(애완견 이름)도 다시 만나고 싶다. 스티어포스 부인과 로사 다틀과 하인 리티머는 어떻게 생겼을까. 에밀리의 친구 마사와 미스 모처의 실제 모습도 궁금하다. 트레들스의 아내가 된 소피와 여러 발랄한 처제들까지도...

 

이제는 그들과 헤어져야 할 때가 다가왔다. 언젠가 다시 만날 그때까지 모두들 부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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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18-03-31 0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과평화>와 비교된 작품의 특징부문이 너무 좋았어요. 멋진 글 잘보고 갑니다~

oren 2018-03-31 14:35   좋아요 1 | URL
그 부분을 쓸까 말까 몇 번이나 고민하다가 결국 되살렸는데, 인상깊게 봐 주시니 고맙습니다.^^

남녀 사이의 애정 관계로만 살펴보면 두 작품이 서로 묘하게 닮은 점이 정말 많이 발견되더라구요.

<전쟁과 평화>에서의 여주인공은 나따샤인데, 그녀는 맨 처음엔 (제1의 남주인공 격인) 안드레이 공작을 사랑하지만 끝내 그 사람과 결혼에 이르지는 못하고 ‘가슴 아픈 이별과 안타까운 재회‘를 반복하게 되지요. 전쟁 중에 큰 부상을 입고 후송되는 안드레이 공작과 ‘피난길‘에 오른 나따샤가 극적으로 재회한 이후, 오랫동안 아주 가까이서 그를 극진하게 보살피는 나따샤의 헌신적인 모습만큼 감동적인 장면도 흔치 않지요.

그녀는 처녀때부터 꽃봉오리처럼 아름답고 발랄하면서도 몹시 순종적이고 고결한 심성을 지닌 매력적인 여성인데(어딘가 모르게 오드리 햅번의 성격과도 닮은 듯한), 안드레이가 전쟁터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결국 죽고 난 이후 훨씬 나중에야 (첫 결혼을 ‘파혼‘한 돌싱남이자 매력적인 제2의 남주인공인) 베주호프와 결혼하게 되면서 활짝 소생하게 되지요.

<데이비드 코퍼필드>에서의 에밀리 또한 어릴 때부터 제1의 주인공인 데이비드와 서로 아주 좋아하는 사이였고, 사춘기를 지날 때까지도 서로 부끄럼을 타면서도 내심 좋아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안드레이와 나따샤와의 순애보‘와 아주 닮았더라구요. 나중에 에밀리가 (제2의 남자주인공 격인) 스티어포스와 야반 도주를 하는 모습도 꼭 닮았고, 그에게 버림받은 뒤에도 끝내 고결한 심성을 잃지 않고 새로운 삶을 찾는 과정까지도 왠지 <전쟁과 평화> 속의 나따샤를 아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더군요.

톨스토이는 소외받는 낮은 계급의 사람들인 하인이나 마부나 농노 등에 대해서도 따스한 애정과 관심을 보여주는데, 찰스 디킨스의 여러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고아나 마부나 하녀 등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끝없는 관심과 따스한 눈길과도 무척이나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국가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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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그리고 누군가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가 누차 언급한 바 있는 원칙29과 방법에 의해서일 것이네."

 

"그야 당연하지요."

 

주석

 

29 각자가 제 할일을 해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다. 433b, 441d 참조

 

"우리는 또한 정의란 제 할 일이나 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을 많은 사람들한테서 들었고, 우리 자신도 가끔 그렇게 말했네."

 

"그래요. 우리는 그렇게 말했지요."

 

그래서 내가 말했네. "그러니 여보게, 이처럼 각자가 제 할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정의인 것 같네. 자네는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겠는가?"

 

"아니요. 말씀해주세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말했네. "우리가 절제와 용기와 지혜를 찾아낸 지금 아직도 남아 있는 자질은, 우리나라에 그런 것들이 생기게 할 힘을 갖고 있고 그런 것들이 생겨난 뒤에는 자신이 존재함으로써 그런 것들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그런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일세. 우리는 또한 다른 세 가지를 발견한다면 남은 것은 정의일 것이라고 말했네."(플라톤, 『국가』, 제4권, 433b)

 

"그렇다면 글라우콘, 우리는 또한 개인도 국가와 같은 방법으로 올바르다고 말하게 될 것이네."

 

"그 역시 아주 당연해요."

 

"우리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겠지만, 나라가 올바른 것은 나라 안의 세 부류가 저마다 제 할 일을 할 때일세."

 

"우리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우리 각자가 올바르고 제 할 일을 하는 것은 각자 안의 각 부분이 제 할 일을 할 때라는 것도 우리는 기억하고 있어야 하네."

 

"물론 기억하고 있어야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플라톤, 『국가』, 제4권, 441d)

 

 - 플라톤, 『국가』, <제4권>

 

 

 * * *

 

 

"어떤가?" 하고 내가 말했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린 정의는 윤곽이 희미해서, 개인 안의 정의는 우리가 국가 안에 있는 것으로 발견한 정의와 달라 보이는가?"

 

"나에게는 달라 보이지 않는데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말했네. "만약 우리 마음속에 아직도 미심쩍은 점이 있다면 비근한 예를 들어 최종적으로 확인할 수도 있네."

 

"비근한 예라니, 어떤 건가요?"

 

"우리가 예컨대 본성적으로 그리고 훈련을 통해 우리나라와 닮은 사람이 자기가 맡은 금이나 은을 착복했는지 질문을 받았다고 가정해보게.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그럴 가능성이 더 높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게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런 사람은 신전을 털거나 남의 것을 훔치거나, 사적으로는 친구를, 공적으로는 국가를 배신하는 행위와는 거리가 멀겠지?"

 

"네, 멀어요."

 

"그는 또한 맹세나 그 밖의 다른 합의도 충실히 지킬 것이네."

 

"어찌 안 그러겠어요?"

 

"그 밖에도 그는 간통이라든가 불효라든가 신들에 대한 불경과는 어느 누구보다 거리가 멀 것이네."

 

"어느 누구보다도 거리가 멀어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지배 또는 피지배와 관련해서 그 안의 부분들이 저마다 제구실을 다하기 때문이 아닐까?"

 

"바로 그게 유일한 원인이에요" 하고 그가 말했네.

 

"이제야 자네는 정의가 바로 그런 사람들과 국가들을 만드는 그런 힘이라고 확신하는가?"

 

"제우스에 맹세코, 확신해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우리의 꿈은 완전히 이루어졌네. 그리하여 우리가 짐작한 대로, 우리는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하자마자 운 좋게도 신의 도움으로 정의의 기원과 윤곽을 만나게 되었네그려."

 

"네, 그래요."

 

"그렇다면 글라우콘, 타고난 제화공은 다른 일은 하지 말고 제화공 일을 해야 하고, 목수는 목수 일을 해야 하며, 그 밖의 다른 사람들도 그래야 한다는 원칙이야말고 사실은 정의의 영상이었던 셈이네그려. 그래서 쓸모가 있었던 것이고."

 

"그런 것 같아요."

 

"정의가 분명 그런 원칙이라 해도, 정의의 진정한 관심사는 누군가의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의 내적인 행위, 그의 진정한 자아, 그의 진정한 기능일세. 올바른 사람은 자신 안의 세 부분이 각각 남들이 할 일을 제가 하거나 서로 참견하지 못하게 하고, 음계에서의 세 음정, 즉 최고음, 최저음, 중간음처럼 세 부분을 조율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살림을 잘 꾸려나가고 자주독립과 질서를 유지하며 자신과 사이좋게 살게 될 걸세. 그리고 그가 이런 부분들과 그 사이에 있는 다른 부분들을 잘 훈련되고 조화로운 하나의 전체로 결합하여 여럿 대신 완전한 하나가 되면, 그때는 돈 버는 일이 됐든 몸을 돌보는 일이 됐든 정치가 됐든 개인 간의 계약 체결이 됐든 행동에 나서게 될 걸세. 그리고 이런 행위들 가운데 이런 심적 상태를 유지하거나 이런 심적 상태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행위는 올바르고 훌륭한 행위라고 부르고, 이런 행위를 통제하는 지식을 지혜라고 믿고는 지혜라고 부를 것이네. 반면 이런 심적 상태를 언제나 깨뜨리는 행위를 불의한 행위라고, 그런 행위를 통제하는 의견을 무지라고 부를 것이네."

 

"소크라테스 선생님, 전적으로 옳은 말씀이에요" 하고 그가 말했네.

 

"좋았어" 하고 내가 말했네. "그렇다면 올바른 사람과 올바른 국가와 이들 안의 정의가 무엇인지 찾아냈다고 주장하더라도 우리가 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 듯하네."

 

"제우스에 맹세코, 아니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우리는 그렇다고 주장할까?"

 

"네, 주장해요."

 

"그 문제는 이쯤 해두세" 하고 내가 말했네. "다음에는 불의를 고찰해야 할 것이네."

 

"분명 그래야겠지요."

 

"정의가 그런 것이라면 불의는 틀림없이 이들 세 부분 사이의 일종의 내전이요 참견이요 간섭이며, 혼의 한 부분이 전체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네. 그런데 혼의 그 부분이 혼 전체를 지배한다는 것은 부적절하네. 그 부분은 정당하게 지배하는 부분에게 종노릇하는 것이 제격이기 때문일세. 그 밖에도 우리는 세 부분의 혼란과 방황이 불의뿐만 아니라 무절제, 비겁함, 무지, 한마디로 모든 악의 원인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네."

 

"그렇고말고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물었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불의와 정의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는 만큼, 불의한 짓을 하는 것 또는 불의를 행하는 것과 올바른 행위를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겠지?"

 

"설명해주세요."

 

그래서 내가 말했네. "올바른 행위와 불의한 행위가 혼에 끼치는 영향은, 건강에 좋은 행위와 건강에 좋지 않은 행위가 몸에 끼치는 영향과 다를 바 없네."

 

"어째서 그렇지요?"

 

"건강에 좋은 것들은 건강을 낳고, 병적인 것들은 병을 낳네."

 

"네, 그래요."

 

"그리고 올바른 행위른 하는 것은 정의를 낳고, 불의한 짓을 하는 것은 불의를 낳겠지?"

 

"당연하지요."

 

"건강은 몸의 구성 성분들 사이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자연의 의도에 맞게 정립함으로써 생기고, 병은 그런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자연의 의도에 맞지 않게 정립합으로써 생기는 것일세."

 

"네, 그래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하고 내가 물었네. "정의는 혼의 구성 성분들 사이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자연의 의도에 맞게 정립함으로써 생기고, 불의는 그런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자연의 의도에 맞지 않게 정립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마다요" 하고 그가 대답했네.

 

"그렇다면 미덕은 일종의 정신적인 건강 또는 아름다움 또는 좋은 상태이지만, 악덕은 일종의 병 또는 수치스러운 상태 또는 허약함인 것 같네."

 

"그건 그래요."

 

"그렇다면 좋은 생활방식은 미덕으로 이끌지만, 수치스러운 생활방식은 악덕으로 이끌지 않을까?"

 

"당연하지요."(255∼260쪽)

 

 - 플라톤, 『국가』,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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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01-02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 2017 서재의 달인 축하드리며 무술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oren 2018-01-05 00:22   좋아요 0 | URL
카스피 님도 2018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스철학자열전 동서문화사 월드북 79
전양범 지음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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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그의 책 권수는 약 300을 웃돌고 있었기 때문

 

또한 철학자인 에피쿠로스는 매우 다작이고 책의 수로는 모든 사람을 능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책 권수는 약 300을 웃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가운데에는 남의 책으로부터의 인용은 하나도 없고 그 전부가 에피쿠로스 자신의 말인 것이다. 그런데 (스토아파인) 크리시포스는 에피쿠로스와 다작을 겨루려 하고 있었던 것인데 (새 아카데미파인) 카르네아데스는 이 크리시포스를 에피쿠로스의 책을 좀먹는 기생충으로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에피쿠로스가 어느 것을 쓰면 크리시포스는 이에 지지 않으려고 같은 분량만큼 쓰려고 했다.(669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을 재빠르게 활용할 수가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또 우리는 그 기본적인 원리로 끊임없이 되돌아가 그것만의 것은 기억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해는 얻을 수 있을 것이고 게다가 매우 개략적인 것이라도 나의 학설의 개요가 올바르게 파악되고 기억되고 있는 것이라면 개개의 특수한 사항에 대한 정확한 지식도 모두 발견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충분히 철학의 수업을 쌓은 사람에게 있어서도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을 재빠르게 활용할 수가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정확한 지식이 갖추고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항이) 단순한 기본원리로 환원되어 말로 표현됨으로써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개의 특수한 사항에 관한 것이 모두 정확하게 알려졌다고 해도 그것을 간결한 말로 자기자신 속에 받아들이지 (기억해두지) 못한다면 그것은 학설 전체를 끊임없이 열심히 연구해온 것의 성과로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675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아톰은 끊임없이 그리고 영원히 운동을 하고 있는 것

 

그러나 또 (우주) 만유는 한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정되어 있는 것은 끝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그 끝은 (그 앞에 있는) 다른 무언가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그런데 만유는 다른 무언가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유는 끝이 없기 때문에 한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이 없다면 만유는 한이 없는 것이고 한정된 것이 아닐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만유는 물체(아톰)의 수에 있어서나 공허의 크기에 있어서나 한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공허가 한없이 큰데 물체는 한정된 수의 것이라고 한다면 물체는 이를 지탱하거나 저항해서 되돌리거나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어디에도 머무는 곳은 없어 무한한 공허 속에 흩어져 운반되어 갈 것이고, 만일 공허의 크기가 한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무한히 수많은 물체는 존재해야 할 곳을 갖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여러 가지 물체 가운데서도 불가분으로 충실한 것, 즉 합성물이 그것에서 낳고 또 그것으로 분해되는 요소(아톰)에는 우리에게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형태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고 있는 합성물의) 이 정도로까지 수많은 차이가 우리가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한정된 수의) 같은 형(의 아톰)에서 생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형태마다 비슷한 것(아톰)은 수에 있어서 완전히 무한하게 있지만 형태가 다른 것은 결코 무한으로 수없이 있는 것은 아니고 우리에게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이 있을 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분할은 무한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그는 그것에 이어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의 성질은 변화하는 것이므로 (아톰형의 무한한 다양성을 상정하려고 하는데)] 만일 사람이 크기의 점에서도 아톰 속에 있는 것을 완전히 한없이 큰 것으로 (해서 눈에 보일 정도의 것으로)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앞서와 같이 상정할 필요는 없다)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아톰은 끊임없이 그리고 영원히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677∼678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세계가 무한히 수많은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또 세계는 수없이 무한히 있고 그 어느 것은 우리의 이 세계와 비슷한데 다른 것은 비슷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아톰은 앞서 명확해진 것처럼 수없이 무한히 있고 그런 것들은 매우 멀리까지 운반되어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계가 그런 것에서 생길 수 있는, 또는 그런 것에 의해서 형성될 수 있는, 그와 같은 여러 가지 아톰은 하나의 세계를 위해, 또는 한정된 수의 세계를 위해 ㅡ 그런 것들의 세계가 우리들의 세계와 비슷한 것이든, 다른 것이든 ㅡ 모두 사용되고 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가 무한히 수많은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679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사물의 형태를 보는 것

 

그런데 외계의 사물에서 어떤 것(에이드론)이 우리 안에 들어옴으로써 우리는 그런 사물의 형태를 보거나 그런 사물에 대해서 사고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외계의 사물이 그것들 자체가 지닌 색깔이나 형체의 있는 그대로를 우리에게 인상을 남기는 것은 우리와 그런 사물과의 중간에 개재하는 공기에 의해서도, 또는 (눈에서 나오는) 광선에 의해서도, 또는 우리에게서 그 사물에 이르고 있는 무언가의 흐름에 의해서도 다음에 말하는 것과 같은 방법에 따를 정도로는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사물 그 자체에서 색깔도 형체도 사물과 비슷한 일종의 모방된 것 (티포스=에이드론)이 우리에게로 와 제각기 상응한 크기에 따라서 우리의 시각이나 정신에 잠입하는 데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런 모방된 것(영상)은 매우 신속하게 운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와 같은 이유 때문에 그와 같이 모방된 것(영상)은 하나의 연속된 것이란 표상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고, 또 대상으로부터의 적당한 출격에 의해서ㅡ이 충격은 (대상인) 고체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아톰이 진동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인데ㅡ이런 모방된 것(영상)은 그 대상에서 유래하는 곳의, 그것과 대응하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정신에 따라서이든, 다양한 감각기관에 따라서이든,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으로 어떤 표상을 갖는다고 해도ㅡ형태에 대한 표상이든, 속성에 대한 표상이든ㅡ이 표상되고 있는 것이 (그것의) 고체형태 (내지는 속성)이고 그것은 에이드론(영상)이 잇따라 응집함으로써, 또는 우리의 정신 속에 잔존하고 있음으로써 낳게 된 것이다.(681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어느 세계는 구상(球狀)이고 다른 세계는 계란형

 

또 이들 여러 세계는 필연에 의해서 하나의 똑같은 형을 지니고 '생성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또 온갖 형태를 지니고 생성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 이런 모든 세계에는 동물이나 식물, 그밖에 우리가 이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 여러 세계는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도 그(에피쿠로스) 자신이 <자연에 대해서> 제12권 가운데서 쓰고 있다. 즉 어느 세계는 구상(球狀)이고 다른 세계는 계란형이며 또 다른 세계는 그것과는 다른 형상을 이루고 있는데, 그러나 온갖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생명이 있는 것은 무한한 것에서 (직접) 분리되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것은 동물이나 식물이나 그 밖에 (우리의 세계에서) 관찰되는 모든 것이 그런 것에서 낳게 되는 씨앗이 여기저기의 세계 속에는 포함되어 있었겠지만ㅡ또 사정에 따라서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 때도 있었겠지만ㅡ그러나 이런저런 세계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을 아무도 논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동물 그 밖의 것이 (태어난 후에) 세계 속에서 키워진다는 점도 똑같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세계에 있어서나 대지 위에 똑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692∼693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매우 단기간 안에 개관하게 되는 것

 

따라서 만일 나의 이 설명이 정확하게 파악될 수 있는 것이 된다면 설사 사람이 개개의 사항에 대한 정확한 것 모두를 알기까지에 이르지 않는다고 해도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학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실제로 그 사람은 나의 학설체계 전체에 의거해 개개의 사항에 관한 수많은 정확한 것을 자기 자신이 명확히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원칙적인 사항이 기억 속에 담겨져 있다면 그것은 끊임없이 그 사람의 연구에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그것은 이런 원칙적인 사항은 그와 같은 효과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개개 사항에 대해서 이미 충분할 정도로, 또는 완벽한 정도로까지 정확한 지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지식을 이와 같은 원칙적인 사항의 파악으로 환원함으로써 자연전체에 관한 연구의 대부분의 것을 수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또 아직 완전하게 나의 학설을 습득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 속하는 자들 쪽은 구술에 따르지 않은 학습방법이라도 이곳에 언급되고 있는 원칙에 의거해 혼의 평안에 도움이 되는 가장 중요한 사항을 매우 단기간 안에 개관하게 되는 것이다.(697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다중우주

 

또 이와 같은 여러 세계가 수없이 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또 그와 같은 세계는 이미 생기고 있는 세계 가운데서도 또 중간계ㅡ세계와 세계와의 사이의 공간을 우리는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인데ㅡ그 중간계에서도 생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은 일부의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드넓고 전혀 섞임이 없는 순수하게 공허한 곳 가운데서,라는 것은 아니고 공허가 많은 곳 가운데서,라는 것이다. 즉 세계를 만드는 데 적합한 일종의 씨앗(아톰)이 하나의 세계 또는 중간계에서, 또는 몇 개의 세계 또는 중간계에서 (이 공허가 많은 곳으로 흘러들어와 조금씩 결합하거나 분절화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곳으로 위치를 바꾸거나 함으로써) 세계는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씨앗은 세계가 완성해 안정이 될 때까지 적당한 곳으로부터 계속 유입하는 것인데 이와 같은 과정은 세계의 바탕이 되는 밑에 놓인 씨앗이 새로운 씨앗을 받아들이는 것이 될 수 있는 한 계속되는 것이다.(700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현자가 하지 않는 일

 

또 현자는 소송을 제기할 때도 있을 거싱고 저작을 남기는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공 집회에서 연설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 현자는 자기재산에 배려해 장래에 대비할 것이다. 또 전원을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운명에는 감연히 맞서고 어느 벗도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 경멸당하지 않을 정도로 세상의 평판에는 두루 신경을 쓸 것이다. 또 국가의 제례 때에는 다른 사람들 이상으로 즐길 것이다.(712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많은 사람들이 안고 있는 사고를 신에게 밀어붙이고 있는 자들이 오히려

 

한편, 내가 이제까지도 끊임없이 들려준 것, 그것이야말로 훌륭하게 살기 위한 기본원리로 생각해 그것을 생각함과 동시에 이를 실행하도록 하기 바란다. 즉 우선 첫째로 신에 대한 공통의 관념이 사람들 마음에 새겨 있는 대로 신은 불멸이고 지복한 삶으로 믿고 신의 불멸성과는 무관한 일도, 또 그 지복성에 걸맞지 않은 일도, 아무것도 신에게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신의 불멸성과 지복성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신에 대해서는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신들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고 신들의 인식은 명료한 (直覺的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신들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계속 지키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신들을 부인하는 자가 불경신(不敬神)인 사람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안고 있는 사고를 신에게 밀어붙이고 있는 자들이 오히려 불경신의 사람인 것이다.(715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훌륭하게 판단한 것이 우연한 탓으로 잘 안 된다고 해도 그 쪽이 더 낫기 때문

 

또 우연(운)에 대해서 사려있는 사람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처럼 이를 신으로 여기지는 않고(그것은 신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무질서하게 이루어지는 일은 없기 때문에) 또 우연을 온갖 사항의 불확실한 원인으로도 여기지는 않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한 일이나 나쁜 일이 지복한 삶을 보내기 위해 우연에 의해서 인간들에게 주어진다고는 사려있는 사람은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커다란 선이건, 악이건 그런 것의 계기가 되는 것은 우연에 의해서도 가져오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려있는 사람은 잘 생각함도 없이 행동하면서 행운이기보다는 잘 생각해서 행동하면서 불운인 쪽이 낫다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행위에 있어서는 훌륭하게 판단한 것이 우연한 탓으로 잘 안 된다고 해도 그 쪽이 더 낫기 때문이다.(720∼721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헛된 망상에 따른 것

 

자연적인 욕망이기는 한데 충족되지 않아도 괴로움으로 이끄는 일이 없는 욕망 가운데 대상에 대한 격한 욕망이 깃들고 있는 경우에는 그와 같은 욕망은 헛된 망상에 의해서 낳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욕망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욕망 자체의 본성 탓은 아니고 그 사람의 헛된 망상에 따른 것이다.(727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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