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 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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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는 행복한 사람의 모습을 잘 그려낸 것일 터이다

 

물론 행복한 자도 인간이라 외적인 유복함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관조를 하기 위한 자족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며, 오히려 [관조를 하려면] 육체도 건강해야 하고 음식이나 여타의 보살핌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긴 해도, 비록 외적인 좋음들이 없이 지극히 복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장차 행복하게 되기 위해 많고 큰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족이나 행위는 지나침에 의존하지 않으며, 비록 땅과 바다를 다스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고귀한 것들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적당한 정도의 외적 조건들로부터도 탁월성에 따라 행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백하게 관찰될 수 있다. 보통 사람들도 권력을 가진 사람에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더 많이 훌륭한 일을 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정도만 가지면 충분하다. 탁월성에 따라 활동하는 사람의 삶이 행복할 것이니까. 솔론이, '행복한 사람'이란 외적인 좋음들이 적당하게 주어져 있었으나 자신이 가장 훌륭한 행위들로서 여기는 것을 행했으며, 또 절제 있게 [자신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고 말했을 때34, 아마도 그는 행복한 사람의 모습을 잘 그려낸 것일 터이다. 사람은 외적인 조건들을 적당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해야만 하는 일들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낙사라고스 역시 행복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다중]에게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지라도 그는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행복한 사람이 부자나 권력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외적인 것들만을 지각하며 그것을 가지고 판단하니까.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들의 견해도 우리의 논의와 일치하는 것 같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도 물론 일종의 신뢰(pistis)를 갖긴 하지만, 실천적인 문제들에 있어 진실은 실제의 삶으로부터 판단된다. 중요한 것은 이것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서 이야기된 것들을 실제의 삶에 적용하면서 살펴보아야만 한다. 실제와 부합하는 것은 받아들여야 하지만, 일치하지 않는 것은 말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성에 따라 활동하며 이것을 돌보는 사람이, 최선의 상태에 있으면서 신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인 것 같다. 만일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듯 신들이 인간적인 것에 관심을 가진다면, 신들이 가장 뛰어나고 가장 그들을 닮은 것(지성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에서 기뻐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신들이 무엇보다 지성을 사랑하고 가장 영예롭게 여기는 사람들을 신들에게 사랑스러운 것을 아끼는 사람으로, 또 옳고도 고귀하게 행위하는 사람으로 생각해서 응분의 보답을 한다는 것도 이치에 맞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지혜로운 사람(sophos)에게 가장 많이 속한다는 것은 명명백백하다. 따라서 그는 신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받는 사람이다. 동일한 그 사람이 가장 행복하기도 하다는 것은 그럴 듯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런 방식으로도 지혜로운 사람이 누구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376∼377쪽)

 

 

주석

34 헤로도토스, 『역사』1권 30∼32행에 나오는 솔론과 크로이소스의 대화를 참고하라. 솔론과 크로이소스는 이미 1권 10장 46번 주석에서 언급되었다.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0권 제8장 <정의된 행복과 통념의 부합> 중에서

 

 * * *

 

 

크로이소스가 이들 모두를 복속시켜 뤼디아 왕국에 합병하자, 당시에 살아 있던 헬라스의 모든 학자들이 번영의 절정에 있던 사르데이스를 방문했는데 때로는 이 사람이, 때로는 저 사람이 찾아왔다. 아테나이의 솔론도 그중 한 명이었다. 솔론은 아테나이인들의 요구에 따라 입법을 해주고 나서 10년 동안 외국에 머물렀다. 그는 세상 구경차 외유 중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만든 법을 폐기하도록 강요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아테나이인들은 솔론이 만든 법을 10년 동안 지키겠다고 엄숙히 맹세한 터라 자기들만으로는 법을 폐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론은 견학도 할 겸 외유 중이었다. 그는 여행 중에 아이귑토스에서 아마시스를, 사르데이스에서 크로이소스를 방문했다. 크로이소스는 솔론을 맞아 궁전에서 환대했다. 솔론이 도착한 지 2,3일 뒤 크로이소스는 시종들을 시켜 그를 자신의 보물창고들로 데리고 다니며 보물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굉장하고 값진 것인지 보여주게 했다. 솔론이 꼼꼼히 모든 것을 살펴보았을 때 크로이소스가 기회를 엿보다 그에게 물었다. "아테나이에서 온 손님이여, 그대의 지혜에 관한 소문은 우리도 익히 들어 알고 있소. 우리는 또 그대가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세상을 구경하고자 여러 나라를 방문했다는 말도 들었소. 그래서 나는 그대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지 진심으로 묻고 싶소이다." 크로이소스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솔론은 그에게 아부하지 않고 진실을 말했다. "전하, 아테나이의 텔로스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옵니다." 뜻밖의 대답에 깜짝 놀라 크로이소스가 다급하게 물었다. "어째서 그대는 텔로스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여기시오?" 솔론이 대답했다. "텔로스는 번성하는 도시에 살며 훌륭하고 탁월한 아들들을 두었는데, 그 아들들에게 빠짐없이 아이들이 태어나 모두 살아있사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 기준에서 보아 살림이 넉넉할 때 장렬한 죽음을 맞았사옵니다. 그는 아테나이인들이 엘레우시스에서 이웃 나라들과 싸울 때 전투에 참가하여 적군을 패주케 하고는 더없이 아름답게 죽었던 것이옵니다. 그래서 아테나이인들은 그가 전사한 곳에 국비(國費)로 그를 매장해주고 그의 명예를 드높여주었사옵니다."

 

이처럼 솔론이 텔로스를 기리는 말을 자꾸 늘어놓자, 크로이소스는 궁금증이 생겨 그에게 텔로스 다음으로는 누가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크로이소스는 자신이 두 번째로 행복한 사람은 되리라 믿었던 것이다. 솔론이 말했다. "그 다음은 클레오비스와 비톤이옵니다. 아르고스에서 태어난 이들 형제는 살림도 넉넉하고 체력고 뛰어났사옵니다. 둘 다 경기에서 상을 탄 적이 있는 이들에 관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사옵니다. 아르고스에서 헤라 축제가 개최되었을 때 이들 형제의 어머니는 소달구지를 타고 급히 신전으로 가야 하는데, 들판에 나가 있던 소들이 제때에 돌아오지 못했사옵니다. 시간이 촉박하지 두 젊은이가 몸소 멍에를 쓰고 어머니가 타고 있는 달구지를 끌었사옵니다. 그리고 45스타디온을 달려 신전에 도착했답니다. 그들은 축제에 모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일을 완수한 다음 가장 훌륭한 죽음을 맞았는데, 신들께서는 그들의 죽음을 통해 인간에게는 삶보다 죽음이 더 좋은 것임을 보여주셨던 것이옵니다. 아르고스인들이 둘러서서 남자들은 두 젊은이의 체력을 찬양하고, 여인들은 그런 자식들을 두어 행복하겠다고 어머니를 칭찬했사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들의 행위와 명성이 너무나 기뻐 여신의 신상 앞으로 다가가, 어머니의 명예를 그토록 높여준 두 아들 클레비오스와 비톤에게 여신께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베풀어달라 기도했사옵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끝나자 두 젊은이는 제사와 회식에 참가한 뒤 쉬기 위해 신전 안에 누웠다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사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던 것이지요. 아르고스인들은 그들이야말로 가장 휼륭한 장부(丈夫)들이라 보고, 그들의 입상을 제작해 델포이에 봉헌했나이다."

 

솔론이 두 번째로 행복한 사람으로 이들 젊은이를 이야기하자 화가 치민 크로이소스가 말했다. "아테나이에서 온 손님이여, 나를 그런 평범한 자들보다 못하다고 여기다니 그대는 내 행복은 완전히 무시하는 거요?" 솔론이 대답했다. "크로이소스 전하, 전하께서는 제게 인간사에 관해 물으시지만, 저는 신께서 매우 시기심이 많으시고 변덕스러우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나이다. 인간은 오래 살다 보면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많이 보고, 겪고 싶지 않은 것도 많이 겪어야 하나이다. 저는 인간의 수명을 이른 살로 잡는데, 70년은 윤달을 빼고도 25,200일이나 되옵니다. 계절이 역월(曆月)과 일치하도록 거기에 한 해 걸러 한 번씩 한 달을 덧붙이면, 70년에 35개 윤달이 추가되는데, 이 윤달들은 1,050일이 될 것이옵니다. 그러면 70년은 모두 26,250일이 되는데, 그중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 일은 단 하루도 없사옵니다. 따라서 크로이소스 전하, 인간이란 전적으로 우연의 산물이옵니다. 보아하니, 전하께서는 거부(巨富)에다 수많은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이시옵니다. 하지만 저는 전하께서 행복하게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알기 전에는 전하의 물음에 답할 수가 없사옵니다. 큰 부자라도 운이 좋아 제가 가진 부를 생을 마감할 때까지 즐기지 못한다면 그날그날 살아가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 할 수 없기 때문이옵니다. 많은 거부들이 불운했는가 하면, 재산이 넉넉하지 못하더라도 운이 좋은 사람도 많사옵니다. 재산이 많지만 불운한 사람은 단 두 가지에서 후자보다 유리하지만, 가난하지만 운이 좋은 사람은 여러 가지에서 유리하나이다. 부자는 자신의 욕구를 쉽게 충족시킬 수 있고 재난을 견디기가 수월하나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그리 쉽게 욕구를 충족시키고 재난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운이 좋으면 피할 수는 있사옵니다. 그는 또 몸이 온전하고, 건강하고, 시련을 당하지 않고, 자식 복이 있고, 잘생겼을 수도 있사옵니다. 게다가 그가 훌륭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전하께서 찾고 계시는 사람, 곧 행복하다고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옵니다. 누군가 죽기 전에는 그를 행복하다고 부르지 마시고, 운이 좋았다고 하소서. 물론 한 사람이 그런 복을 다 타고날 수는 없사옵니다. 한 나라도 필요한 것을 다 갖추지 못하고, 어떤 것이 있으면 어떤 것이 없나이다. 가장 휼륭한 나라는 가장 많이 가진 나라이옵니다. 사람도 자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무엇인가 부족하기 마련이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한 복을 가장 많이 타고나고 그것을 끝까지 누리다가 편안하게 죽는 사람이야말로 제가 보기에 행복한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것 같나이다. 전하! 무슨 일이든 그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눈여겨보아야 하옵니다. 신께서 행복의 그림자를 언뜻 보여주시다가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뜨리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까요."

 

솔론의 이런 말이 크로이소스에게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크로이소스는 솔론을 냉담하게 떠나보냈다. 그는 현재의 행복을 무시하고 무슨 일이든 그 결말을 눈여겨보라는 솔론을 아는 척하는 바보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솔론이 떠나간 뒤 크로이소스에게 무서운 신벌(神罰)이 내렸는데, 아마도 그가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여겼던 탓인 듯하다. 그 뒤 곧 그는 자기 아들에게 닥칠 불행을 거짓 없이 사실대로 미리 알려주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크로이소스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은 농아(聾啞)로 불구자였고, 다른 아들 아튀스는 또래 중에서도 출중했다. 크로이소스는 다름 아닌 아튀스가 무쇠 창끝을 맞고 죽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크로이소스는 꿈에서 깨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먼저 아들을 장가들였고, 다음으로는 지금까지 늘 군대를 싸움터로 이끌곤 했던 아들의 출진을 막았으며, 투창이며 창이며 그 밖에 다른 무기들을 남자들이 기거하는 방에서 규방으로 옮겨 쌓아두게 했으니, 벽에 걸려 있던 무기가 아들의 머리에 떨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 헤로도토스, 『역사』 제1권 29∼34

 

 

한편 크로이소스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의 아들들 중에 한 아들은 다른 점에서는 정상이었지만 말을 못하는 벙어리였다. 행복했던 지난날 크로이소스는 그런 아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주었고, 그에 관해 묻고자 델포이로 사절을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자 퓌티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많은 민족을 다스리는 뤼디아 왕이여, 아둔한 크로이소스여,

궁전에서 그대가 오랫동안 고대하던, 그대 아들의 목소리를

듣기를 바라지 마라. 그러는 것이 그대에게 훨씬 좋으리라.

그가 처음 말하는 그날이 그대에게는 재앙의 날이 되리라.

 

 

성채가 함락되었을 때 한 페르시아인 병사가 크로이소스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이려고 다가갔다. 크로이소스는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으나 자신의 불행에 압도되어 내버려두었다. 칼에 찔려 죽더라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인 병사가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것을 본 그의 벙어리 아들은, 두렵고 괴로운 나머지 말문이 터져 소리를 질렀다. "이봐, 크로이소스를 죽이지 마!" 이것이 그가 맨 처음 한 말이었고, 그 뒤로는 살아 있는 동안 계속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페르시아인들은 사르데이스를 점령하고 크로이소스를 포로로 잡았다. 크로이소스는 14년간 통치했고, 14일간 포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신탁이 예언한 대로 대국을 멸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대국이었다. 페르시아인들은 그를 붙잡아 퀴로스에게 데려갔다. 퀴로스는 거대한 화장용 장작더미를 쌓게 하더니 결박된 크로이소스를 14명의 뤼디아 소년들과 함께 그 꼭대기에 올라서게 했다. 퀴로스가 그렇게 한 것은 어떤 신에게 승리의 첫 제물로 그들을 바칠 의도였거나, 전에 자신이 서약한 어떤 것을 이행할 의도였거나, 그도 아니면 크로이소스가 경건한 삶을 살았음을 알고 그가 산 채로 불타 죽게 함으로써 위급한 순간에 어떤 신이 나서서 구해주는지 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무튼 퀴로스는 그렇게 했다. 장작더미에 올라선 크로이소스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직면해 "인간은 살아 있는 한 그 누구도 행복하지 못하다"는 솔론의 영감 어린 말이 생각났다. 이 말이 생각나자 그는 오랜 침묵을 깨고 깊게 탄식하며 "솔론!"이라는 이름을 세 번 불렀다. 이 말을 들은 퀴로스는 그가 대체 누구를 부르는지 통역들을 시켜 물어보게 했다. 통역들의 물음에 크로이소스는 처음에는 대답하지 않다가 통역들이 대답을 다그치자 마침내 실토했다. "모든 왕들이 천금을 주더라도 반드시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인물이지요." 그의 대답이 모호해 무슨 뜻인지 통역들이 다시 물었다. 그렇게 통역들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자 크로이소스는, 전에 솔론이라는 아테나이인이 사르데이스에 온 적이 있는데 온갖 재물을 다 보여주었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 특별히 그에 관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행복하다고 여기는 인간들과 인생 일반에 관해 말했는데도 솔론의 예언은 모두 적중했다고 말했다. 크로이소스가 대답하고 있을 때, 어느새 장작더미에 불이 붙었고 가장자리는 타오르는 중이었다. 그런데 통역들에게서 크로이소스가 한 말을 전해 들은 퀴로스는 자신도 한갓 인간이면서 자기 못지않게 행운을 누렸던 다른 인간을 산 채로 불태우려 했던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그는 또 응보가 두려웠고, 인생이 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타오르는 불길을 되도록 빨리 끄고 크로이소스와 소년들을 끌어내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불길은 이미 걷잡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 헤로도토스, 『역사』 제1권 85∼87

 

 

 



 
 
pek0501 2014-11-06 11:46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그동안 글을 많이 올리셨네요. 다 읽으려면 한참 걸릴 듯하네요.
좋은 글들만 엄선해 올리셨겠지요. 덕분에 편히 읽습니다.

˝인간은 살아 있는 한 그 누구도 행복하지 못하다˝
- 아마 살아 있는 한, 근심이 끊이지 않아서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oren 2014-11-06 16:22   URL
책을 읽고 난 뒤에도 `책 속 구절들`을 어딘가에 꼭 붙들어 두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가 많아요. 그럴 땐 `알라딘`에 이런 식으로라도 올려 두는 게 여러모로 유용하더라구요. 가끔씩 `어디선가 읽은 듯한 바로 그 대목들`이 다시금 떠오를 때, 알라딘에 접속하기만 하면 금방이라고 그 책 속 구절들을 금세라도 되찾아 읽을 수도 있고, 또 `미지의 독자들`한테도 제가 읽었던 책 속 구절들의 일부분을 (의도했든 안 했든 상관없이) 이렇게 보여 드릴 수도 있고 말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어 보니, 인간과 다른 동물과의 차이를 들여다 봄으로써 `인간의 본질`을 날카롭게 꿰뚫어 보는 혜안이 정말 남다르다 싶더군요. 이 철학자로부터 특히나 많은 영향을 받은 후세의 철학자들 가운데 몽테뉴를 비롯해서 쇼펜하우어와 베르그송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와 유사한 통찰을 드러낸 걸 많이 봐왔는데, 이 책을 읽으며 그런 후세 철학자들의 `생각의 뿌리`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책 속에서 재발견하는 느낌이 정말 남다르게 다가오더군요. pek 님께서 말씀해 주신 부분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방식으로 풀어본다면, `인간만이 현재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듯싶어요. `살아 있는 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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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지혜에 대한 사랑', 즉 '철학'은

 

행복이 탁월성에 따른 활동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최고의 탁월성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최고의 탁월성은 최선의 것에 대한 탁월성이다. 이것이 지성(nous)이건 혹은 다른 어떤 것이건, 이것은 본성상 우리를 지배하고 이끌며, 고귀하고 신적인 것들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 자체가 신적인 것이든 아니면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신적인 것이든, 자신의 고유한 탁월성에 따르는 이것의 활동이 완전한 행복일 것이다. 이 활동이 관조적인 것임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이것은 이전에 논의했던 바에, 또 진리에 일치하는 것 같다. 이것이 최고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 지성이 최고이며, 지성이 상대하는 대상 또한 앎의 대상들 중 최고이니까. 게다가 이 활동이 가장 연속적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행위하는 것보다 더 연속적으로 관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행복에는 즐거움이 섞여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들 중 '지혜(sophia)'에 따르는 활동이, 동의되는 것처럼 가장 즐거운 것이다. 여하튼 '지혜에 대한 사랑', 즉 (철학(philosophia)'은 그 순수성이나 견실성에서 놀랄 만한 즐거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앎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앎을 추구하는 사람보다 그러한 관조에서 더 즐겁게 삶을 영위할 것이라는 점은 당연하다. 더욱이 우리가 논의하는 자족(自足)도 다른 무엇보다 관조적 활동과 관련한다. 철학적 지혜를 가진 사람이나 정의로운 사람, 다른 탁월성을 가진 사람 모두 삶을 위해 필수적인 것들을 필요로 하지만, 이것들이 충분히 갖춰졌을 경우, 정의로운 사람은 그가 그 사람에 대해 정의로운 행동을 하게 될 상대방, 혹은 그들과 더불어 정의로운 행동을 하게 될 동반자를 필요로 하며, 절제 있는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 또 그 밖의 탁월한 사람들 각각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철학적] 지혜를 가진 사람은 혼자 있어도 관조할 수 있으며, 그가 지혜로우면 지혜로울수록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가 동반자를 가지면 아마 더 잘 관조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가 가장 자족적이다.(370∼371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0권 제7장 <관조적 활동으로서의 행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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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제외한다면

 

그러므로 행복은 놀이 속에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또 우리의 목적이 놀이이며, 고작 놀기 위해 우리가 삶 전체에 걸쳐 애쓰고 어려움을 감내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제외한다면-행복이 바로 목적이니까-우리가 선택하는 거의 모든 것은 [그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목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단지 놀이를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를 감내한다는 것은 한심하고 너무 어린아이 같은 짓으로 보인다. 아나카르시스가 말한 것처럼 오히려 "진지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놀이한다"는 것이 옳은 이야기로 보인다. 놀이는 휴식과 같은 것이며, 사람은 연속적으로 일을 할 수 없기에 휴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니까. 따라서 휴식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활동을 위해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행복한 삶은 탁월성에 따르는 삶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진지함을 동반하는 삶이지, 놀이에서 성립하는 삶이 아니다. 우리는 또 우습고 놀이를 동반하는 것보다 진지한 것들이 더 낫다고 하며, 더 좋은 것의 활동이-그것이 더 나은 부분의 활동이건 더 나은 사람의 활동이건 간에-언제나 더 진지한 활동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더 나은 것의 활동은 더 우월한 것이고 더 많은 행복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또 육체적 즐거움은 아무나, 심지어 노예까지도 가장 훌륭한 사람 못지않게 향유할 수 있다. 그러나 노예가 [진정한] 삶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행복에 참여하고 있다고까지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행복은 이런 종류의 소일거리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탁월성에 따른 활동 속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368∼369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0권 제6장 <행복: 지금까지의 논의의 요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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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활동을 완성시키는 즐거움이야말로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일에 있어서 신실한 사람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은 실제로도 그런 것 같다. 만일 이것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듯 [실제로도] 올바로 말해진 것이라면, 또 탁월성과 좋음인 한에서의 좋은 사람이 각각의 사안에 있어서 척도(metron)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즐거움 또한 좋은 사람에게 즐거움으로 보이는 것이 즐거움일 것이며, 이 사람이 기뻐하는 것이 즐거운 것일 것이다. 설령 그에게 불쾌한 것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즐거운 것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인간은 파괴되기 쉽고 망가지기 쉬우므로. 그러나 이것들은 실제로 즐거운 것이 아니며, 그런 사람들과 그런 상태에 빠진 사람들에게만 즐거운 것이다. 그러므로 부끄러운 즐거움이라고 동의하는 것들은 즐거움이 아니라고, 그렇게 타락한 사람에게만 그럴 뿐이라고 말해야만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훌륭한 것으로 보이는 즐거움들 중에서 어떤 성질의 즐거움을, 혹은 어떤 즐거움을 인간의 것이라고 말해야만 하는가? 즐거움은 활동을 뒤따르는 것이므로 그 답은 활동으로부터 명백해지는 것이 아닐까? 완전하고 지극히 복 받은 인간의 활동이 하나이건 그 이상이건 간에, 이러한 활동을 완성시키는 즐거움이야말로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에게 속하는 즐거움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즐거움들은 이차적인 의미에서, 또 한참 떨어진 의미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활동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366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0권 제5장 <즐거움의 종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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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적어도 인간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런데 시각은 순수성에서 촉각과 다르고, 청각은 미각과 다르며, 후각 또한 미각과 다르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즐거움들도 사실 다른데, 사유에 관련한 즐거움은 또 이런 즐거움들과 다르다. 그리고 양 부류의 즐거움 안에서도 각각의 즐거움들은 서로 다르다.

 

그런데 각각의 동물에 고유한 기능이 있는 것처럼 고유한 즐거움도 있는 것 같다. 그 활동을 따르는 즐거움이 고유한 즐거움이니까. 이것은 우리가 구체적 동물들 각각을 살펴보면 분명해질 것이다. 말이 느끼는 즐거움, 개가 느끼는 즐거움, 인간이 느끼는 즐거움이 각각 다르며, 헤라클레이토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나귀는 황금이 아니라 여물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귀에게는 황금보다 먹을거리가 더 즐거운 것이니까. 따라서 종류가 다른 동물들의 즐거움은 그 종류에 따라 다르고, 같은 종에 속하는 동물들의 즐거움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사리에 맞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의 경우에 있어서는 [선호하는] 즐거움들 간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동일한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즐거움을 주지만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통을 주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통스럽고 싫은 반면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즐겁고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이 단 것과 관련해서도 일어난다. 열병을 앓고 있는 사람과 건강한 사람이 동일한 것을 달게 느끼지 않으며, 몸이 약한 사람과 활기찬 사람이 동일한 것을 따뜻하게 느끼지는 않으므로. 이러한 일은 마찬가지로 다른 경우에서도 일어난다.(365쪽)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0권 제5장 <즐거움의 종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