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드디어 내일이면 히말라야로 간다!
1. 드디어 네팔이다.
2. 히말라야로 들어서다.
3. 트레킹 첫날, 발걸음도 가볍다.
4. 둘째날, 랑탕계곡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다.
5. 랑탕빌리지에서 체르코리까지
6. 캉진 곰파에서 라마호텔로
7. 샤브루베시를 거쳐 다시 카트만두로
8. '여행자의 천국' 포카라를 가다
9. 포카라의 '낮술'에 모두가 쓰러질 뻔.
10. 다시 카트만두로, 스와얌부나트와 왕궁을 둘러보다
11. 타멜에서 아침을,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주석 달린 월든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 깊이 읽기 주석 달린 시리즈 (현대문학) 3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제프리 S. 크래머 엮음, 강주헌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월든』의 경이로운 문장들을 읽어보십시오. 그것들은 우리의 가장 절실한 체험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 마르셀 프루스트

 * * *


(『주석달린 월든』 31쪽)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쓴 책은『월든』과 『주석달린 월든』달랑 두 권만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올해 봄에 한꺼번에 무려 여덟 권을 더 샀었다. 그때 마침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날 예정이었던 히말라야 트레킹 때 짐꾸러미에 챙겨 넣을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소로우가 쓴 책이라면 따져볼 필요가 없겠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신들과 함께 걷는 곳'이 히말라야가 아니던가. 소로우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문명'에서 오롯이 벗어난 그곳 히말라야와는 너무나 잘 어울릴 것이라 여겨졌다.

히말라야로 떠나는 준비물 가운데 '몇 권의 책'은 필수품이라고 했다. 일찍 산행을 끝내고 롯지에서 저녁을 먹고 나면 다음날 아침까지는 '별 보는 일'과 '책 읽는 일' 말고는 별달리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구르카 병사들을 이끌고'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밧 능선 저편으로 영원히 사라진 '시대의 반항아' 알버트 머메리가 쓴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를 비롯해 소로우의 책도 세 권씩이나 챙겼다.(2년 전에 실크로드로 여행을 갔을 때 나는 걷는다 1 쓴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책 네 권을 들고 갔다가 깔끔하게 다 읽고 돌아온 기억도 그런 '무모한 욕심'에 보탬이 되었다. 사실 올리비에의 책은 걷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었지만 나는 정작 '날아다니며' 거의 다 읽었던 듯싶다. 인천 공항에서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까지 오가는 비행시간이 제법 넉넉했기 때문이었다.)

히말라야의 장엄한 풍경 속에 잠겨 '시대의 반항아'이자 '참된 등산가'였던 머메리의 책과 '문명의 반항아'이자 '참된 철학자의 삶'을 살았던 소로우의 책을 읽는 재미는 얼마나 짜릿할까. 기대가 무척 컸었다. 실제로 네팔에 도착한 이후 카트만두를 벗어나 히말라야에 접어든 첫날 밤에는 (다음날부터 만나게 될 히말라야의 눈덮힌 산봉우리들을 상상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른 채 침낭 속에 들어가 머메리의 책을 두세 시간쯤 읽다가 잠들었었다. 그러나 히말라야에서 책을 펼치는 일은 그날 밤이 마지막이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내 얘기를 히말라야의 여러날 밤 속으로 더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다. 나는 어서 빨리 소로우에 대한 얘기로 발걸음을 옮겨야겠다.
 
올해 봄에 사들였던 소로우의 책은 나와 함께 히말라야에 올랐던 목사님(네팔 카트만두에 거주)께서 '여긴 읽을 만한 책들이 별로 없으니 다 읽은 책들은 좀 남겨두고 가라'는 부탁까지도 애써 외면한 채 고스란히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고, 나는 그때 무사히 되돌아온 그 책들을 다행히 요 몇 달 동안 거의 다 읽었다.

엊그제 마침내 제법 두툼한-그리고 주석도 제법 많이 달린-『소로우의 강』(원제는『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을 다 읽고 나니 이제야『주석달린 월든』을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반가움마저 생겨났다. (이 책은 진작에 사 두고 가끔씩 드문드문 펼쳐보기만 했다. 왠지 소로우의 다른 책들을 다 읽고 나서 읽어야만 좋겠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오랫만에 다시 펼치는『월든』이지만 빼곡하게 '주석이 달린' 이 책은 역시나 처음에 읽었던 그냥『월든』과는 확실히 다르게 다가온다. 그리고『월든』에 왜 이토록 방대한 주석이 덧붙여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제는 분명하게 알 수 있을 듯하다.

『월든』에 필요한 주석을 쓰느라 오랜 시간을 바쳤던 제프리 S. 크래머는 말한다. "『월든』은 한 영웅에 대한 책이기 때문에 영웅을 그린 책이다." 라고. 그래서 '이 책은 신화처럼 읽힌다.'라고. 나도 그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고 싶다. 그의 말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월든』을 한번 읽어보고 나서 판단해도 물론 늦지 않다. 영웅을 그린 신화는 그렇게 쉽게 읽히지 않는다.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멀리서 답을 찾을 필요는 없다. 소로우 스스로 이 책 속의 한 장인 「독서」에서 그 방법을 미리 밝혀 놓았다.

"영웅을 그린 책들이 우리 모국어의 문자로 인쇄되더라도 타락한 시대에 사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와 용기와 관용을 발휘해 일상적인 용법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추측해가며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의 뜻을 열심히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영웅처럼' 여기고 있다. 『월든』은 어느덧 영웅에 대한 이야기로 격상된지 얼마쯤 지났고, 어떤 독자들에게는 신화처럼 읽혀야 하는 책으로 바뀌었다.『주석달린 월든』은 괜히 나온 책이 결코 아니었다.

이 책 속에 담긴 주석은 과연 얼마나 될까. 두 번씩이나 두드린 내 계산기는 정확하게 1,640개라고 두 번 말한다. 놀라운 숫자이고 이렇게 주석이 많이 달린 책은 여태 읽어본 적이 없어서 내게는 더욱 놀라운 책이다.

소로우 형제와 함께 '일주일 동안'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으로 보트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제 다시 콩코드의 숲속으로 되돌아가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 놓인 빈 의자 하나를 끌어다 놓고 그의 곁에 앉아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일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소로우가 말하는 대로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의 뜻'을 열심히 찾아 가면서 들어야겠다. "책은 처음 씌어졌을 때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읽혀져야 한다"는 그의 권고를 염두에 두고.

이 책이 없었더라면 새까맣게 놓치고 말았을 얘기들이 과연 얼마나 많을지 몹시 궁금하다.



(『주석달린 월든』 52쪽)

 


어떤 날씨에나, 낮이나 밤 어떤 시간에나 나는 시간의 홈85을 활용하고 그 순간을 내 지팡이86에도 표시해두고 싶었다. 달리 말하면, 과거와 미래라는 두 영원이 만나는 점,87 요컨대 현재의 순간에 서고 싶었고, 현재라는 출발선에 발끝을 대고 서고 싶었다.88
(52쪽)


주석

85. ['시간의 홈'은 'the nick of time'을 번역한 것이다-옮긴이] 이 표현은 16세기에 'in the nick'으로 처음 사용됐다.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 'nick'이라는 단어는 '아슬아슬한 순간'이나 막대에 새겨진 눈금을 뜻한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혔다면 그는 용케 시간에 맞춰 늦지 않게 들어간 것이며 따라서 '시간의 홈'에, 즉 아슬아슬하게 들어간 것이 된다.

86. 소로는 측량하기 위해 눈금이 새겨진 막대를 갖고 다녔지만, 여기에서는 대니얼 디포(Daniel Defoe, 1660-1731)의 로빈슨 크루소를 빗댄 표현이다. 크루소는 나무 기둥에 눈금을 새겨 시간을 기록했다. 소로는 일기에서도 "로빈슨 크루소가 막대기에 매일 표식을 했듯이, 우리는 매일 우리의 품성에 눈금을 매겨야 한다"(일기 1:220)라고 썼다. 소로는 자급자족하며 독립된 삶을 살았던 크루소에게 매력을 느꼈던지 「커타딘 산」과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에서 거듭 크루소에 대해 언급했다.

87. 토머스 무어(Thomas Moore, 1779-1852)가 동양의 화려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삼아 쓴 이야기체 시 「랄라 루크」에서 "과거와 미래-두 영원! / 두 끝없는 바다 사이의 이 좁은 지협"을 빗댄 표현으로 여겨진다.

88. '출발선에 발끝을 대고 서라toe the line'는 선원들에게 갑판 점호 시간에 두 판재를 이은 자리에 발끝을 대고 서라는 지시였다. 그래야 열이 반듯하게 정렬됐다.



접힌 부분 펼치기 ▼



(주석을 쓴  제프리 S. 크래머의 머리말 가운데 소로우가 쓴 편지에 실린 '등산에 대한 숙제'도 무척 흥미롭다.)

                                               머리말

"『월든』출간."  『월든』이 출간된 1854년 8월 9일, 소로가 일기에 쓴 내용의 전부다. 그가 월든 호수로 이주한 후 9년 동안 일곱 번이나 원고를 고쳐 쓴 후에 맺은 결실이었다.

(중략)

월든 호수로 이주한 날의 일기도 간단하기 그지없다.
"7월 5일 토요일. 월든-어제 이곳에 살려고 왔다."

(중략)


소로는 일기에서 언급하고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에서 되풀이했듯이, 자서전이 전기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내가 내가 아니면 누가 나이겠는가?" 라고 묻고, 『월든』을 출간한 후인 1857년 10월 21일의 일기에서 "시인이라면 자신의 전기를 써야 하는가? 훌륭한 일기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가 창조해낸 상상의 영웅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은 게 아니라 현실의 주인공이었던 그가 매일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중략)

그러나 우리는 『월든』이 엄격한 의미에서는 자서전이 아니라, 소로가 자신이 만들어간 신화적인 삶에 예술적인 완전함을 더하기 위해 자유롭게 써내려간 문학 작품임을 기억해야 한다.

(중략)

소로가 쓰고 있던 것은 분명히 신화였다. 『월든』을 의도된 방향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읽는 독자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소로는「독서」에서 "올바른 독서, 즉 참다운 책을 참다운 정신으로 읽는 것은 고귀한 운동이며, 요즘의 세태가 높이 평가하는 어떤 운동보다도 독자에게 힘든 운동이다. 운동선수들이 받는 것과 같은 훈련이 요구되고, 책을 읽겠다는 마음가짐을 거의 평생 동안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책은 처음 씌어졌을 때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읽혀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월든』을 월든 호숫가에 잠시 살았던 사람의 기록으로 생각해서 자서전으로 읽는다면, 소로가 에머슨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고 어머니와 누이들이 빨래를 대신 해주었다는 사실을 들먹이며 쓸데없이 트집 잡는 사람들의 주장에 귀가 솔깃해질 수 있다.

소로는 「독서」에서 "영웅을 그린 책들이 우리 모국어의 문자로 인쇄되더라도 타락한 시대에 사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와 용기와 관용을 발휘해 일상적인 용법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추측해가며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의 뜻을 열심히 찾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의도와 방향을 분명히 밝혔다. 소로는 먼 옛날의 책, 동서양의 정신적인 고전에 대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소로는 지금 당신이 손에 쥐고 있는 책에 대해 쓴 것이다.
『월든』은 한 영웅에 대한 책이기 때문에 영웅을 그린 책이다.

(중략)

소로가 경험에서 진실을 이끌어내는 방법은 1857년 11월 16일 블레이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네에게 숙제 하나를 내겠네. 산을 오르는 게 궁극적으로 자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고 빠짐없이 적어보게. 그렇게 쓴 글을 반복해서 읽고, 자네 경험의 중요했던 모든 것을 담아냈다고 만족할 때까지 고쳐 써보게. 인간은 앞으로도 산에 올라야 할 테니 자네가 산에 올랐던 이유를 먼저 자네 자신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해보게. 처음 열두 번 정도를 시도해서 정확하게 해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게. 하지만 끈기 있게 반복해보게. 특히 충분한 휴식을 가진 후에 자네가 문제의 핵심이나 정점에 닿았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도전해서 산에 오르는 이유를 자네 자신에게 설명해보게. 이야기가 꼭 길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간략하게 정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거네. 산에 오르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자네가 진정으로 산의 정상에 오른 적이 있었던가? 자네가 워싱턴 산의 정상에 올랐다면, 거기에서 무얼 보았는지 묻고 싶군. 자네도 알겠지만, 모든 것이 그런 식으로 입증되는 걸세. 산 정상에 올라 상쾌한 기분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네. 정상에 오르면 우리는 더 이상 오르지 않으니까. 대신 점심 같은 걸, 여하튼 집에서처럼 푸짐하게 먹네. 어쩌면 집에 돌아온 후에야 우리는 진정으로 산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네. 산이 뭐라고 말하던가? 산이 무엇을 하던가?


『월든』을 읽는 독자에게도 똑같은 충고가 주어질 터다. 『월든』을 읽는 데는, 즉 산을 오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는 '진정으로 산에 올랐는가? 거기에서 무엇을 보았는가?'라고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월든』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대답은 시대마다, 또 개인에게도 매년 달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산에 오르고 월든 호수로 되돌아가며 『월든』을 다시 읽는다. 『월든』이 출간된 지 1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가슴에 설득력 있게 와 닿는 글이라는 사실은, 위대한 스승의 우화처럼 보편성을 띤다는 증거이며, 우화를 만드는 선각자이자 시인이었던 소로에게 보내는 찬사다.

 - 제프리 S. 크래머(주석을 쓴 사람)


 

 

펼친 부분 접기 ▲




 




























 




 
 
2013-12-10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10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oren 2013-12-10 01:34   댓글달기 | URL
제가 오래 전에 올렸던, '내일이면 히말라야로 간다'는 그 소식만 듣고, 그 이후 '간다, 온다' 소식을 듣지 못한 어느 알라디너 분께서, 그 먼 데까지 '링크'를 걸어달라는 정중한 부탁을 해주신 덕분에, '먼댓글'이 제법 '멀리까지' 내려간 점을 부디 양해해 주세요~

함께살기 2013-12-10 05:57   댓글달기 | URL
소로우 님은 영웅이라기보다는 시골이웃이리라 하고 생각해요.
어느 책으로 돌아보더라도
호미와 연필을 손에 쥐고 즐겁게 삶을 지은
시골이웃.

이러한 시골이웃, 영웅 아닌 시골이웃이 차츰차츰 늘어날 때에
지구별에 평화와 사랑이 감돌 수 있으리라 느껴요.

oren 2013-12-10 09:50   URL
비록 콩코드에 사는 이웃 사람들 대부분은 소로우의 독특한 삶의 방식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고, 소로우 또한 지역 잡지에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할 때마다 이웃 주민들이 '재미없어 할까봐' 고민했던 흔적도 여러차례 드러냈지만, 그런 점들은 소로우에게 결코 아무런 문제도 되지 못했지요. 그는 시골 이웃 사람들로서는 쉽게 짐작하기 어려웠던 '전혀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는 사람이었으니까 말이지요.
* * *
내가 아는 한 청년은 몇 에이커의 땅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는데 그는 '여력만 있다면' 나처럼 살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남이 내 생활양식을 그대로 따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 까닭은 그 사람이 내 생활양식을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나는 또 다른 생활양식을 찾아낼지 모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제각기 다른 인간들이 존재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각자가 자기 자신의 고유한 길을 조심스럽게 찾아내어 그 길을 갈 것이지, 결코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 또는 이웃의 길을 가지는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월든』중에서

oren 2013-12-10 10:20   URL
저는 월든을 처음 읽을 때 소로우에게서 받았던 강렬한 인상 때문에 제 생각을 적어둔 게 있는데, 소로우의 책을 읽으면 아직도 가끔씩 그때 떠올렸던 시골 할아버지 생각이 난답니다. 그분은 손수 호미를 들고 밭을 가꾸시기 보다는 주로 꿀벌을 키우셨지만요.

* * *

이웃에 사람이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되던 모든 이점이 대단치 않은 것임을 느꼈고 그 후로는 그런 것을 생각해본 일이 없다. 솔잎 하나하나가 친화감으로 부풀어올라 나를 친구처럼 대해주었다. 나는 사람들이 황량하고 쓸쓸하다고 하는 장소에서도 나와 친근한 어떤 것이 존재함을 분명히 느꼈다. 나에게 혈연적으로 가장 가깝거나 가장 인간적인 것이, 반드시 어떤 인간이거나 어떤 마을 사람이지는 않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부터 어떤 장소도 나에게는 낯선 곳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P189)

(나의 생각)
소로우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릴 때 우리 마을에 사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자꾸만 떠오른다. 내가 태어나 자란 마을은 집성촌이었던 때문에 그 할아버지도 집안 어른이셨는데, 학문의 깊이로는 이웃 수십킬로 이내에서는 따라올 만한 분이 없다고 할 정도였었다.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이라 자세한 건 생각나지 않지만 사서삼경에 통달하셨고, 주역을 비롯한 동양철학에 대한 깊이가 대단하다고 하셨던 것 같다. 그 할아버지는 특이하게도 우리 마을에서 2∼3km쯤 떨어진 강 건너 산 아래에 홀로 사셨다. 머리도 백발이셨고 콧수염과 턱수염도 백발이셨기 때문에 어떨 땐 산신령을 좀 닮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우리가 가끔씩 강을 건너 산으로 땔깜나무를 하러 다니거나, 한 겨울에 토끼나 꿩을 잡으로 다닐 때나, 농삿일을 도우러 할아버지가 사시던 집 근처를 지나칠 때면, 그 할아버지는 언제나 책만 열심히 들여다보셨던 것 같다. 우리는 늘 '혼자 산 밑에 사시면 깜깜한 밤이 되면 얼마나 무서울까?' 하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 분의 삶 또한 소로우와 매우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늘 자연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조금도 외롭지 않고, 늘 옛 성현들과 만나고 또 그 분들과 대화하기 위해 '고전'을 읽는 데 평생을 보냈던 것 같다.

마녀고양이 2013-12-10 11:41   댓글달기 | URL
이유를 모르겠으나,
오늘 제 어깨에 지나치가 힘이 들어가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잠시 힘을 빼봅니다. 하아.......
한때 소로우를 정말 부러워하고 그렇게 살고 싶어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실은 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욕구와 맞물려 있음을 깨달으면서
소로우처럼 순수하게 그 자연 속에서 사는 목적이 아니었구나 싶더군요. 언젠가
저도 소로우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히말라야 여행 궁금합니다. 곧 올려주실거죠? ^^
다시 보니 먼댓글에 다 있었군요.... 와아,

oren 2013-12-10 13:47   URL
소로우는 월든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일기에서 "삶! 삶이 무엇이고, 삶이 무엇을 하는지 누가 알겠는가?" 라고 썼을 정도로 '삶 자체를 모험 속에 내던진' 사람이었죠. 그의 나이 스물여덟 살일 때였으므로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나이가 아니었나 싶기도 해요. 누구나 한때 집을 떠나 홀로 살고 싶은 꿈을 꿔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싶어요. 그러나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이래저래 여러 '삶의 굴레' 속으로 점점 빠져들 수밖에 없으니, 우리가 더욱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는 지도 모르구요.

히말라야에 다녀온지 겨우 일곱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제겐 벌써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지네요. ㅎㅎ

팜므느와르 2013-12-11 10:57   댓글달기 | URL
주석달린 월든, 보관함에 담았어요.
제가 이해하든 못하든 오렌님의 발자국이 지나간 책은 관심을 아니 가질 수가 없지요.
소로우처럼 살고 싶지도 않고, 살지도 못해요.
다만 소로우 내면의 행적과 그 삶을 존중하고 알고 싶습니다.

논술 교재로 주석 없는 월든 읽을 땐 별 감흥이 없었는데, 오렌님 안내를 보니 다시 읽어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고맙습니다^^*

oren 2013-12-11 15:38   URL
『주석달린 월든』을 찬찬히 읽어 보니 한 권의 책 속에 무수히 많은 신화와 전설, 역사와 문화, 경제와 철학, 자연과 과학, 소설과 시를 비롯한 문학 등등,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인간의 삶'에 대한 거의 모든 부분이 빼곡히 들어차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어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에서 불쑥 내던지는 원대한 생각은 어른이 된다고 해서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의 생각은 그 자체로 빛나기 때문에 구름에서 번갯불을 끌어내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 소로우 님이 스스로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날만큼 지혜롭지 못한 걸 항상 한탄한다'면서 무려 9년 동안이나 묵히고 다듬어 쓴 글이니, 팜므님이 다시 읽어보시면 틀림없이 새롭게 다가오는 대목이 많으리라 믿어요.

함께살기 2013-12-14 06:01   댓글달기 | URL
이육사 위인전을 읽으니,
이육사 님도, 이녁 형제와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모두,
집안이 넉넉한 살림이었어도
손수 농사지으면서 학문도 함께 하면서 지내셨더라고요.

oren 2013-12-14 12:15   URL
아하.. 이육사 님도 손수 농사지으면서 시를 쓴 시인이었군요. 『소로우의 강』에서 소로우 님이 글을 잘 쓰려면 '장작 패는 법이라도 배우라'고 했던 깊은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되는군요.

* * *

한가로이 공부만 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있을까? 장작 패는 법이라도 배워라. 학자도 땀 흘려 일하고, 여러 사람과 대화하고, 갖가지 일을 보고 들을 기회를 가져야 한다. 꾸준히 해야 하는 노동은 공부 못지않게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글과 말에서 쓸데없는 수다와 감상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노동을 하는 것이다. 당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고 나서 그 시간 동안 생각의 흐름을 놓쳤다고 안타까워할지 모른다. 하지만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그날의 경험을 단 몇 줄이라도 적어보라. 상상력은 뛰어나나 게으른 공상에 불과한 글보다는 훨씬 음악에 가까운 진실한 글이 나올 것이다. 작가란 모름지기 노동자들의 세계를 다뤄야 하므로, 그의 삶의 원칙도 그러해야 한다.

짧은 겨울해가 지고 어둠이 오기 전에 패서 묶어내야 할 장작들이 많이 쌓여 있는 작가를 상상해보라. 그는 일터에서 쓸데없이 춤을 추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시간을 아껴 굳은살이 박힌 투박한 손으로 도끼를 들어 장작을 내리찍는 소리가 쩌렁쩌렁 숲을 울릴 것이다. 이렇게 일하는 투박한 손에서 나온 그의 글들은 도끼 소리가 잦아들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독자들의 귀에 쩌렁쩌렁 울릴 것이다. 학자는 손에 못이 박힐 정도로 강인한 진실을 쓰기 위해 애써야 한다. 손에 박힌 못이 그가 쓰는 글을 튼튼하게 만들어준다. 실제로 몸이 활기차지 못하면 정신의 노력이 나아질 수 없고,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 우리는 글 쓰는 훈련을 거의 받지 못한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내몰렸을 때, 금세 힘차고 정확한 글투에 도달하는 모습에 깜짝 놀라곤 한다. 솔직하고 생기 있고 성실하면서 잘 다듬어진 글투는 학교가 아니라 농장과 일터에서 더 잘 배울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 투박한 손으로 쓰여진 글들은 잘 무두질된 가죽끈이나 사슴의 근육, 소나무 뿌리에 못지않게 질기고 억세다.
 
소로우의 강 - 강에서 보낸 철학과 사색의 시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윤규상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들려주는 '우정'은 자연을 쏙 빼닮았다. 담백하면서 거짓없이 해맑고 순수하다. 아침 햇살처럼 눈부시면서 이슬처럼 영롱하다. 바람처럼 부드럽고 강물처럼 꾸준히 흐르며 호수처럼 깊게 잠긴다. 마침내 대양에 이르러 대륙을 이어주는 드넓은 길을 안내해 줄 것만 같다. 그러나 해와 달의 움직임에 따라 거대하게 일렁이는 성난 물결과, 비바람과 함께 일어나는 드높은 파도와도 맞서 싸우며, 야자수가 자라는 섬을 찾아 기나긴 항해를 오랫동안 함께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모든 뛰어난 것들은 희귀한 만큼 어렵다'는 스피노자의 말은 '우정'에도 역시 예외가 아니지 싶다.


접힌 부분 펼치기 ▼


 

(밑줄긋기)


진심으로 애태우지만

우리는 벗과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고 나서도, 슬기롭고 다정한 말보다는 자신에게 기억나는 쌀쌀한 낯빛이나 생각 없이 한 행동을 거듭거듭 되새겨보곤 한다. 한참 지난 후에 어떤 친절을 깨달으면서, 벗이 대단히 순수하고 고결한 마음으로 우리를 대했기에 하늘의 바람처럼 주의를 끌지 못한 채 지나갈 적이 있었음을, 우리의 모습 그대로 우리를 대하지 않고 우리가 되기 바라는 모습으로 대할 적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잊혀진 것도 아니고, 기억에 남는 것도 아닌 고귀한 무언의 행동이 그저 우리에게로 온 것으로, 우리는 우리의 차가운 마음에 어떻게 그런 것이 오게 되었는지 생각하면서 몸을 떨게 된다. 이 빚을 갚고 싶은 마음에 진심으로 애태우지만, 너무 때 늦은 시간에 말이다.(339쪽)

 


 

개개인의 인격을 들어 말하기 시작하면

내가 겪은 바에 따르면, 좋은 벗과 대화를 나누더라도 개개인을 이야깃거리로 삼게 되면 으레 메마르고 하찮은 사실이나 이야기하게 된다. 개개인의 인격을 들어 말하기 시작하면, 그 즉시 우주가 파산한 것처럼 여겨진다.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헐뜯기로 기울기 쉽고,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이야기의 테두리는 더욱더 좁아진다. 새로운 벗과 사귀게 되면 오래된 벗은 불친절하게 대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가정주부는 말한다. 나는 평생 도자기를 새로 장만한 적은 없으나 낡은 도자기를 보면 깨트리게 된다고. 나는 차라리 숲의 나무와 버섯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말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조용히 혼자서 여유를 갖고 벗을 기억하게 될 때가 있다.(340쪽)

 

 

 

벗이란 넓은 바다에 떠다니는 아름답고 자그마한 야자수 섬과 같다.

누구에게나 우정은 지나고 나면 덧없는 것으로, 지난 여름철에 먼 하늘을 밝히던 번개처럼 희미하게 생각나게 마련이다. 이처럼 우정은 아름답지만 휙 지나고 마는 여름철의 구름과 같다. 하지만 가뭄이 오래 가더라도 대기 중에는 늘 수증기가 남아 있는 법이고, 봄 소나기까지 있지 않은가. 그 흔적은 정년 사라지지 않기에, 그것이 이따금 우리 주위를 감돈다. 해와 달처럼 오래되고 친숙한 것이지만 언제나 같은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법칙이 있어 다시 찾아올 것이 분명하기에 식물이 자라나듯 수많은 모습으로 움터온다. 그 본질을 경험하기란 영원히 불가능하다.

그것은 맑고 고요한 날에 반짝이는 양털구름처럼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시각을 속이는 일 없이 마법에 의해서인 듯 조용히 몰려온다. 벗이란 뱃사람들을 교묘히 피해 태평양 넓은 바다에 떠다니는 아름답고 자그마한 야자수 섬과 같다. 그는 적도 근처에서 부는 강풍, 산호초와 같은 많은 위험과 맞서고 나서야 항구적인 무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누가 세찬 비바람을 뚫고, 더욱이 대서양 성난 물결까지 헤치고 나가 금욕하는 사람이 틀어박힌 바닷가에까지 이르려 하겠는가?(343쪽)

 

 

우리는 언제나 벗들이 우리의 벗이자, 우리가 그 벗들의 벗이기를 꿈꾼다

우정만큼 사람들의 입술에 자주 오르내리는 말도 없다. 사실 사람들은 우정을 가장 간절히 바란다고 믿는다. 누구나 우정을 꿈꾸기에, 날마다 무대에는 비극으로 끝나는 드라마가 올려진다. 우정은 우주의 비밀이다. 당신이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온 나라를 헤매도 우정에 대해 어떤 말도 듣지 못할 터이나, 우정에 대한 생각만은 어디에서나 왁자지껄하다. 낯선 남녀든, 오래 만나온 남녀든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우정과 관련하여 무슨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문헌을 통틀어 내가 기억하는 이 주제를 다룬 에세이는 고작 두어 편에 불과하다.

우리가 신화모음집, 아라비안나이트, 셰익스피어, 스콧의 소설을 읽으며 즐거워하는 게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니, 우리 스스로가 시인이자 우화작가이고, 극작가이자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드라마보다 흥미로운 드라마에서 한 역을 맡아 연기한다. 우리는 언제나 벗들이 우리의 벗이자, 우리가 그 벗들의 벗이기를 꿈꾼다. 그렇지만 현실에서의 벗이란 우리가 벗하기로 언약한 이들과는 그저 먼 사이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이 있는 그대로 우러나는 말 세 마디 이상을 벗과 나눠본 적이 거의 없다. "반갑네, 벗이여!" 라고 말할 채비를 갖추고서 만나나, 헤어지면서 나누는 인사라는 게 고작 "망할 놈"이다. 그렇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겁쟁이들은 참된 벗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 벗이여, 진정 네가 내 벗이라면, 단 한번만이라도 내가 네 벗이라는 게 통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우정에 들일 시간을 내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 중요하지 않은 의무와 관계가 영원히 우위에 있다면, 아무리 친절한 성격이라도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우정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하지만 우리가 벗을 잊는 일이 불가능하듯, 마찬가지로 벗으로 하여금 우리의 숭고한 목적에 응답하도록 만드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 우리는 작별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사실상 벗과 동행하게 된다. 우리는 상상으로 그려온 벗의 사촌을 만나러 가기 위해 정작 벗으로부터 얼마나 자주 등을 돌리게 되는가. 내가 어떤 사람의 벗이 될 만한 값어치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347∼348쪽)

 

 

벗끼리는 어울려 살아갈 뿐만 아니라 선율과 가락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자신의 벗이라고 말하더라도 대개는 그가 자신의 적이 아니라는 뜻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정이 주는 우연하면서도 자그마한 이득, 예컨대 벗이 재산이나 영향력이나 조언으로 필요한 도움을 주는 그런 이득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벗과의 관계에서 이런 이득을 내다보는 사람은 실제 이득은 보지 못하거나, 이 관계 자체에 전혀 경험이 없음을 드러낸다. 그런 기여는 우정 자체의 지속적이면서 포괄적인 기여에 비하면 하찮고 비천한 것이다. 우정은 서로 화합하고, 신의를 다하고, 실제 친절을 베푸는 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벗끼리는 어울려 살아갈 뿐만 아니라 선율과 가락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벗이 우리를 먹이고 입히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이 점에서는 이웃들도 충분히 친절하다-우리의 영혼의 일이라 할 그런 일을 맡아 하길 바란다. 일이 어떤 방식으로 처리되든, 그것만으로도 넉넉하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어리석게도 어떤 사람을 또 다른 사람과 혼동하곤 한다. 아둔한 이는 인종이나 국적, 기껏 잘해야 계급이나 식별하지만 슬기로운 이는 개개인을 식별한다. 한 사람의 독특한 성격은 갖가지 특징과 행동으로 벗에게 나타나므로, 그의 성격이 벗에게 드러나 고쳐지게 된다.

인간의 교육에서 우정이 지닌 중요성을 생각해 보라.

    사랑하면서 가릴 줄 아는 이가
    누구보다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우정이 한 사람을 정직하게 만들어 주고, 영웅으로 만들어 주고, 성자로도 만들어준다. 우정은 공정함으로 공정함을, 관대함으로 관대함을, 참됨으로 참됨을 대하며, 인간됨으로 인간됨을 대한다.

이에 대해 또 다른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갖가지 미덕 가운데 사랑이 잘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그것이 온갖 미덕을 하나로 줄여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349∼350쪽)

 


 

우리는 황금을 주려 하지만, 그들은 구리만 달라 한다

우리는 날마다 사람들과 만나지만, 고귀한 재능을 쓰지 않고 버려두어 녹이 슬고 있다. 아무도 우리에게 경의를 표하며 고귀함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황금을 주려 하지만, 그들은 구리만 달라 한다. 우리가 이웃 사람에게 참으로 성실하고 고귀하게 대할 수 있게 해 달라 요청하더라도, 그는 귀가 먹었는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그는 이 바람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거짓말쟁이이고 천하고 불성실하고 이기적인 "그런 나 그대로" 대접해주면 만족한다고 말한다. 우리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서로를 대접하고 대접받으면 만족한다. 진실하고 고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데도, 그런 관계를 맺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른바 좋은 이웃과 친지가 있을 터이고, 이런 태도로만 서로를 대하는 좋은 일벗, 아내, 부모, 형제, 누이, 자식까지 있을 터이다. 이런 형편에서는 구성원들 사이에 정당함이 필요치 않고, 불량배의 짓거리와 그리 다르지 않은 변변찮은 일들만 하면서도 대단히 잘되어간다고 생각하며, 이웃과 가족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우정마저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불량배끼리 중시하는 체면보다 별반 나을 것이 없는 형편이다.

하지만 우리가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가 있다. 다시 말해, 그와 맺은 관계가 참되기에 그에게 최선의 것을 주고, 그로부터 최선의 것을 받게 될 때가 있다. 둘 사이에는 따뜻한 진실이 있고, 사랑이 있다. 그리고 서로에게 참되다는 확신을 갖는 그만큼 우리의 삶은 거룩해지고, 기적이 되며, 높은 뜻을 좇게 된다. 이 세상에서 사람을 사귈 때는 애정에서 굴곡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런 사귐은 세속의 삶을 넘어서서 천당의 삶을 기다리라고 말하는 예언서에서는 배우지 못한다. 어느 신에 견주어도 꿀리지 않을 만큼 고프스타운의 그저 그런 하루 한가운데로 곧장 들어갈 수 있는 이 사랑은 무엇인가? 속된 눈에는 우주에 먼지 한 알이 내려앉을 때, 구세계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면서도 아름답고, 신선하고, 영원한 신계계를 찾아내는 이 사랑은 무엇인가? 달리 해서는 이 세계가 다다르지 못하고, 존재하지 못하는 이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말보다 기억할 만한 소중한 말이 있는가, 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말들이 계속해서 널리 퍼졌음은 놀라운 일이다. 사실 그런 말들은 무척 드물지만, 음악의 곡조처럼 조바꿈되면서 끊임없이 기억에 되새겨진다. 그렇지 않은 말들은 사랑을 꾸며놓은 벽토와 더불어 모조리 부서져 내린다. 우리는 감히 그런 말들을 큰소리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런 말들을 늘 들을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350∼351쪽)

 


 

우정과는 잠시라도 함께 할 수 없기에

"우정이 두드러지는 까닭은 그 뛰어난 미덕에 있다."지만, 우리는 벗을 전혀 칭찬할 수 없고, 칭찬받을 만하다고 여길 수도 없으며, 그가 어떤 행위를 통해 우리를 즐겁게 하거나, 넉넉히 대접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서도 안 된다. 다른 경우에는 훌륭하다고 칭찬받는 이런 친절이 우정과는 잠시라도 함께 할 수 없기에, 벗에게는 그의 본성에 필요치 않은 선의나 상냥함과 같은 무례를 행해서는 안 된다. (353쪽)

 


 

우정은 성을 차별해서 다루지는 않는다

남녀끼리는 어떤 체질상의 차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강하게 끌리게 마련이고, 대개의 경우 서로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게 된다. 남성이 자신과 관련된 일들로 여성의 주의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이기가 얼마나 쉬운가. 남녀가 대등한 문화에서는 우연히 만난 남녀끼리라도 남성 대 남성에 견주어볼 때 더 나은 어떤 값어치를 갖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 사회에서는 청렴함과 관대함이 이미 자연스럽게 존재하므로, 나는 남자라면 누구나 남성들의 모임보다는 지적인 여성들의 모임에 더 자신 있게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들고 가 읽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남성이 남성을 찾아가면 방해가 되는 경우가 흔한 반면에, 남녀끼리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기다린다. 그렇지만 우정은 성을 차별해서 다루지는 않는다. 그렇더라도 남녀 사이의 우정은 동성인 두 사람 사이에서보다 드문 편일지 모른다. (354쪽)

 


 

벗이란 내가 고르고 고른 생각에 걸맞은 사람이어야 한다

공자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벗으로 사귀지 말라."고 말했다. 우정에 이로움이 있고 우정이 지속되는 까닭은, 양 당사자의 실제 성격으로 미루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그런 수준보다 높은 수준에서 우정이 맺어지기 때문이다. 우정의 빛줄기는 만나는 사람이 실제보다 더 커 보이는 그런 곡선을 그리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바탕은 정중함이다. 벗이란 내가 고르고 고른 생각에 걸맞은 사람이어야 한다. 나는 그와 더불어 무슨 일을 할 때보다는 내가 없을 때 그에게 더 고귀한 임무를 맡긴다. 그러면서 그가 더 고귀한 만남에 써야 할 시간을 내게 낸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어떤 벗이 값싸게 오래 얼굴을 익혔을 경우에나 허물이 덮어질 그런 버릇없는 행동을 했으면서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조차 없이 여전히 다정한 어조로 내게 말을 걸어왔을 때, 이제까지 벗과 맺은 관계에서 가장 쓰라린 업신여김을 느꼈다. 당신의 벗이 당신의 나약함을 너그러이 대하는 법을 배워 결국 사랑의 진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세워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 우리는 벗을 꽤나 허물없이 대해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욕되게 할 때가 드물지 않다. 그럴 때는 차라리 종교적 고독과 침묵으로 물러남으로써 고결하게 사귈 마음을 갖추는 편이 낫다. 벗과의 사귐에서 침묵은 아주 향기로운 밤으로, 그 안에서 진심이 되돌아오고, 더 깊숙이 뿌리를 내린다.(355쪽)

 

 

 

우정은 계속해서 증명을 필요로 하는 기적이다

우정은 서로를 이해했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당신은 내가 자신보다 뒤떨어지는 벗이기를 바라서 나를 알고 싶어 하는가? 게다가 어떤 사람이 내게 각별한 감정을 품었다고 생각할 권리가 내게 있는가 말이다. 우정은 계속해서 증명을 필요로 하는 기적이다. 우정은 가장 순수한 상상력과 희귀한 믿음의 발현이다. 우정은 감동을 주는 무언의 행동으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가 상상하는 만큼, 심지어 네가 믿는 그대로 너와 관계를 맺을 것이다. 나는 네게 진실을, 즉 나의 모든 부를 바칠 것이다" 라고. 그리고 벗은 말없이 자신의 본성과 삶으로 그 행동을 받아들이면서, 마찬가지의 거룩한 정중함으로 나를 대한다. 나의 벗은 나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남김없이 잘 안다. 그는 사랑의 증표를 바라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관계의 특징으로 사랑인지 아닌지 가릴 수 있다. 그가 찾아올 때 지나치게 그의 체면을 살펴줄 필요는 없다. 내가 오라고 청할 때까지 기다리지는 말아다오. 하지만 내게로 올 때는 내가 당신을 기꺼이 맞이하는지 살펴다오. 찾아와 달라고 하면 그 때문에 당신이 곤욕을 치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벗이 있는 곳에는 갖가지 부와 마음을 끄는 물건이 있고, 그와 나 사이에는 어떤 걸림돌도 있을 수 없다. 어떤 경우라도 내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는 일은 없게 해다오. 우리의 사귐이 우리보다 온전히 높은 곳에 있어 우리를 그리로 끌어올리게 해다오.(356쪽)


 

 

우정의 언어는 말이 아니라 뜻이다

우정의 언어는 말이 아니라 뜻이다. 우정은 언어 위에 있는 지성이다. 사람들은 벗과는 혀가 풀릴 때까지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생각을 머뭇거리지 않고 다 털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대체로 내가 겪은 바에 따르면, 우정은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서로를 아는 데 불과한 사이라면 서로 오갈 때마다 미리 준비된 말이 있지만, 호흡이 바로 생각이자 뜻인 벗이 변변찮은 말을 어떻게 입 밖에 내야 한단 말인가? 당신이 여행을 떠나는 벗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간다고 상상해보자. 당신은 그와 악수 나누는 일 말고 다른 어떤 외적인 표현을 알고 있는가? 그를 위해 어떤 수다를 준비해 놓았단 말인가? 어떤 아첨을 그의 주머니에 넣어줄 것인가? 그를 통해 특별히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라도 있단 말인가? 아니면 당신도 가끔 깜빡 잊을 적이 있다는 듯, 전에 미처 하지 못했던 어떤 말을 그에게 할 터인가? 그렇지 않다. 그의 손을 잡고 '안녕' 하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당신이 자주 잊어먹고 하지 못하던 인사로 충분하다. 이 점에서는 관습이 우위에 있다.

그가 가야 한다면, 오랫동안 그가 우물쭈물하며 떠나지 못하는 모습이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가 가야 한다면, 빨리 보내줘라. 아직 하지 못한 어떤 마지막 말이라도 남아 있단 말인가. 아, 슬프도다. 그 마지막 말은 당신이 그토록 애타게 찾아온 말 중의 말인데도, 아직 그 첫 낱말조차 찾아내지 못했다. 내가 진심으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조차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 이름이 딸린 개인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내 이름을 정확히 발음할 수 있는 사람은 나를 부를 수 있고, 나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아 자리에서는 연인 사이의 자유와 방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이렇게 바탕이 싸늘하고 무관심한 관계에 대해 미뤄두는 까닭은 마음이 맞고 사이가 좋은 관계에 길을 터주기 위해서이다(356∼357쪽)

 

 

 

우정은 온대지방에서 가장 잘 자랄 식물과 같다.

사랑의 폭력은 증오의 그것만큼이나 무섭다. 사랑이 계속 이어지려면 조용하고 한결같아야 한다. 널리 알려진 사랑의 고통조차 사랑이 쇠퇴하면서 시작되는데, 누구나 기꺼이 연인이길 바랄지라도 실제 사랑하는 사이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쉽게 애욕에 빠지는 값싼 사랑 없이도 편히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우정을 나누기에 걸맞다는 한 증거이다. 참된 우정은 부드러우면서 슬기롭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자신들의 사랑이 이끄는 대로 따를 뿐, 어떤 다른 법칙이나 친절도 알지 못한다. 참된 우정은 미칠 만큼 엄청나지는 않더라도, 그 이후로부터 확립될 어떤 것을 나타내기에, 그것이 낡아지더라도 견딜 터이다. 이것이 더 참된 진실이고, 더 낫고 올바른 소식이다. 어느 때건 이런 일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을 터이니,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바로 이것이 여름과 겨울이 갈리는 온대지방에서 가장 잘 자랄 식물이다.

벗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벗끼리는 수수한 바닥에서 만난다. 즉 자연의 소박한 법칙을 따르면서 양탄자나 방석이 아니라 땅이나 바위에 앉는다. 그들은 소리치지 않고 만나고, 떠들썩한 슬픔 없이 헤어진다. 우정에는 전사戰士들이 소중히 여기는 그런 특성이 들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성문을 여는 것에 못지않은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동정이나 상호 위안이 아닌, 열망과 노력의 영웅적인 공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357∼358쪽)

 


 

우정은 상상하는 것만큼 친절하지 않다

우정은 상상하는 것만큼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즉 인간의 혈기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사람들의 성취, 기독교적 의무와 박애 같은 것들은 가볍게 여기는 반면, 전기처럼 공기를 깨끗하게 만든다. 고결한 천성에 도달하는 깨끗하고 참된 관계를 맺었음에도 호된 비극마저 생길지 모른다. 우정은 본디 자유롭고, 책임이 없으며, 아무 값없이 온갖 미덕을 실천하는 본질적으로 이교적인 사귐이다. 그것은 높은 경지의 공감이 아니라, 아직도 가끔씩 지켜지는 어떤 순수하고 고결한 사귐이다. 즉 먼 옛날부터 이어져온 짤막하면서 거룩한 사귐으로, 그 자체를 기억하면서 인류의 비천한 권리와 의무를 업신여기길 머뭇거리지 않는다.

우정은 티 없이 거룩한 특성들이 충분히 익어야 하고, 정중함과 먼 앞날에 대한 기대에 의해서만 존재해야 한다. 우리는 그저 선하기만 하고 아름답지는 않은 것을 사랑하지는 않는다-그런 것이 있다면 말이다. 자연은 열매 맺히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먼저 꽃을 피우지, 열매 맺힌 뒤에 그저 꽃받침만 자라게 하지는 않는다. 벗이 어떤 새로운 신약新約의 가르침에 따라 개종해서는 자신의 이교와 미신에서 벗어날 때, 그가 자신의 신화를 잊고 기독교인처럼 친구를 대하거나 대하려 할 때, 우정은 우정이길 그치고 자선이 되고 만다. (359∼360쪽)

 


 

벗은 셀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어떤 이가 더 사랑받을 만한 값어치가 있음을 알고 있다면, 그 아닌 다른 이에게 빠져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우정은 숫자와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 벗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벗을 세지는 않는다. 벗은 셀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더 많은 이들이 이 관계로 들어올수록-그들이 진정으로 들어온다면 말이다-그들을 한데 묶는 사랑의 질은 더욱더 귀하고 거룩해진다. 나는 둘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셋 사이에서도 개인적이면서 친밀한 관계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 사실 벗을 그지없이 많이 둘 수는 없다. 인생의 갖가지 관계에 보다 알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인정하는 미덕을 어느 정도까지는 스스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 속된 우정은 남을 물리치면서 좁아지려 하지만 고귀한 우정은 남을 물리치지 않는다. 바로 이처럼 흘러넘치고 흩어지는 사랑이 사회를 향기롭게 하고, 다른 나라의 아픔을 위로한다. 우정은 개개인을 바탕으로 하지만, 사실은 공적인 일이자 이득으로, 참된 벗은 한 가족의 가장 이상으로 나라에 커다란 기여를 하기 때문이다.(360∼361쪽)

 

 

 

가장 좋은 사이는 침묵 깊은 곳에 묻혀 있는 사이이다

우정에서 단 한 가지 위험은 언젠가는 끝이 날지 모른다는 점이다. 우정은 토박이식물인데도 무척 민감하다. 자신의 자아마저도 잘 깨닫지 못하는 그런 조그마한 비열함에도 상처를 입는다. 자신의 흠집이 벗에게서 드러나는 그런 흠집을 끌어당긴다는 점을 벗에게 일러줘라. 의심하게 되면 그 의심이 사실로 드러난다는 변치 않는 법칙이 있다. 우리는 좁고 치우친 소견에서 벗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벗이여, 나는 네가 이런저런 정도면 만족할 것이다, 라고. 길이 변치 않는 참된 우정을 위해서는 너그럽고, 고르고, 슬기롭고, 귀하고, 꿋꿋한 기운이 늘 흘러넘쳐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벗들로부터 자신의 좋은 점을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은근히 불평하는 말을 듣곤 한다. 실제로 내가 그런지 아닌지는 그들에게 말해주지 않겠다. 그들은 좋은 말과 행동을 할 때마다 공식적으로 감사 표시라도 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런 말과 행동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빈틈없이 값어치가 매겨졌다. 어쩌면 당신의 침묵이 가장 섬세한 인정일지 모른다. 인간이 결코 말해서는 안 되는 어떤 것이 있고, 그런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편이 훨씬 좋다. 우리는 참으로 숭고한 전갈을 들으면 그 순간 오로지 침묵으로 귀를 기울인다. 가장 좋은 사이는 그저 침묵을 지키는 사이가 아니라,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게 침묵 깊은 곳에 묻혀 있는 사이이다. 서로 얼굴조차 모를 수도 있다. 사람끼리의 사귐에서 비극은 말을 오해했을 때가 아니라, 침묵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시작된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도 그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당신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무슨 값어치가 있겠는가? 그런 사랑은 저주나 다를 바 없다.

자신의 침묵이 벗의 침묵보다 늘 뜻이 깊다고 생각하는 그는 도대체 어떤 부류의 벗인가? 얼마나 미련하고, 방정맞고, 당치 않기에 침해한 쪽은 오직 당신뿐이라는 듯 그렇게 행동하는가! 자신의 벗이 언제나 같은 까닭에서 불평을 말하지는 않는가? 벗들이 이따금 내게 호들갑스럽게 말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내가 무엇을 듣는지 그들은 알지 못하고, 말한 그들 자신도 무엇을 말했는지 깨닫지 못한다. 나는 그들이 기대했던 말이나 그 비슷한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자주 실망시키곤 한다. 나는 벗을 만날 때마다 이야기를 나누지만, 내가 기대하는 사람, 즉 귀가 달린 사람은 그가 아니다. 그들은 당신더러 차갑다고 불평할 것이다. 야자열매를 까뒤집으려는 오 그대들이여, 내가 다음번에 눈물을 흘리게 되면 그대들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주겠다. 어찌 보면 참된 관계란 말과 행동인데도, 그들은 이런저런 말과 이런저런 행동을 해주길 바란다. 이런 일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것을 알려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느낌을 털어놓기 꺼려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데, 그것은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그런 애정의 증거를 달라고 조르는 그들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361∼362쪽)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려 하지 말고, 내가 어디를 보는가를 보고, 더 멀리까지 본다면

나는 내 천성에 걸맞으면서 내게 동등한 대우를 바라는 벗과 동행하길 바란다. 그러한 벗은 늘 치우침 없이 너그러울 것이다. 이보다 못한 어떤 관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자살행위이고, 좋은 관계들을 타락시킨다. 나는 내 성취보다는 내 포부를 사랑하고 높이 쳐주는 사람을 더 소중히 생각하고 믿는다.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려 하지 말고, 내가 어디를 보는가를 보고, 더 멀리까지 본다면 정녕 나는 당신과 동행함으로써 더욱더 나아질 것이다. (364쪽)


 

 

이해가 모자란 것은 애정의 온갖 미덕으로도 깁기 어려운 흠이다

당신이 실제로 벗을 잘 알지 못하면, 우정이 필요치 않은 문제가 생길 때 질 낮고 변변찮은 기여 말고는 벗을 도울 일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어떤 사람과 사회적, 영적 이유로, 무척 가깝게 지내는데, 그는 내게 어떤 실무능력이 있는지 모른다. 우정이 필요치 않은 문제에서 그가 내게 도움을 구할 경우에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하기에 그 문제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내 능력을 쓰지 않고 나의 일손만을 쓴다. 나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 중에서 판단력이 아주 뛰어나면서 자신의 재능이 모자랄 때는 다른 이의 재능을 쓸 줄 알며, 언제 상대를 보살피지 않고 내버려둬도 좋은지를 잘 아는 사람이 있다. 모든 품꾼이 이야기하듯, 그의 일을 해주게 되면 좀체 없는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이와는 다른 대우를 받게 되면 대단히 큰 고통을 느낀다. 그것은 무척 다정하고 높은 사귐을 갖고 난 후에, 좋은 뜻에서이기는 하나 벗이 당신을 망치처럼 사용하여 당신 머리로 못을 박아 넣는 것과 같다. 당신은 그의 좋은 벗일 뿐 아니라, 꽤나 유능한 목수여서 그를 도와 즐겁게 망치질을 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이해가 모자란 것은 애정의 온갖 미덕으로도 깁기 어려운 흠이다. (366쪽)

 

 

 

우정은 자신도 모르게 너그러워지고 자유로워지는 보람이 있어야 한다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이를 벗함은 자신의 미덕을 벗함과 같다. 우정에는 이 밖에 다른 뜻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벗이 자신의 악덕과도 사귀길 바란다. 내 벗 중에는 내가 그릇된 줄 뻔히 아는데도 옳다고 해주길 바라는 벗이 한 사람 있다. 하지만 우정이 내게서 눈을 앗아가고 낮을 어두워지게 한다면 근처에는 얼씬하지 않겠다. 우정은 자신도 모르게 너그러워지고 자유로워지는 보람이 있어야 한다. 참된 우정은 참된 슬기를 가져다준다. 우정은 어두움과 어리석음에 기대지 않는다. 분별력의 결여가 우정의 요소가 될 수는 없다. 벗의 미덕을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은 벗의 흠집 또한 그만큼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누구보다도 벗을 미워할 건전한 권리가 있다. 흠집은 그것과 통하는 미덕으로 기워지게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흠집은 흠집이고, 실제보다 여러모로 두드러지게 보일지라도 흠집이기에 구실을 붙일 나위가 없다. 나는 비판을 참아내고 아첨에 우쭐하지 않으며, 재판관을 꾀어 제 편으로 만들려 하지 않고 언제나 자신보다 진리가 사랑받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만난 적이 없다.(367쪽)

 


 

나는 벗들을 길들이느니 차라리 하이에나를 길들이겠다

두 여행자가 사이좋게 길을 가려면 둘 다 비슷한 정도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옳게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둘이 동행하는 길이 그리 즐겁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은 장님과도 유익하고 즐겁게 길을 갈 수 있다. 그가 예의에서 벗어나지 않고, 당신이 경치를 이야기할 때 자신은 장님이지만 당신은 볼 수 있음을 잊지 않고, 당신 또한 그가 시력을 잃었지만 청각은 더 뛰어날지 모른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둘이 오랫동안 동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 장님과 시력이 좋은 사람이 함께 걷다가 벼랑 끝에 이르렀다. 시력이 좋은 사람이 "조심하게나, 여기는 가파른 절벽이니 이리로는 갈 수가 없네"라고 말하자, 그 장님은 "내가 더 잘 아네"라고 말하면서 발을 내디뎌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더없이 참다운 친구 사이라도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모조리 말할 수는 없다. 불평하느니 차라리 영원히 작별을 고하는 편이 낫다. 불평은 너무나도 근거가 확실하여 입 밖에 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둘이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느 한쪽이 상대의 흠집을 심각하게 지적하면 그 지적이 신랄할수록 서로의 오해는 더욱더 깊어지게 마련이다. 설사 온전히 우정을 맺는 데 방해가 될지라도 늘 존재하는 기질상의 차이는 영원히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이다. 자신의 행위 전체로 타이르고 격려해야 한다. 사랑 말고는 어떤 것도 둘을 화해시길 수 없다. 설명해야 하고 적처럼 흥정하게 되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된다. 누가 벗에게 용서를 빌겠는가? 벗끼리의 사죄는 태양이 떠오르면 다시 사라지고 마는 이슬이나 서리와 같다. 사람은 누구나 진심으로 인정을 베풀어야 함을 알고 있다. 설명의 필요성에 대해 한 마디만 더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죄가 씻기겠는가 말이다.

참된 사랑이라면 하찮은 일로 다투지 않고, 서로 익히 아는 잘못은 쉽게 풀려 나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겉으로는 하찮게 보일지라도 결코 얕볼 수 없는 심각하고 오래가는 까닭들이 있다. 그런 까닭이 있다면 무지개가 아무리 아름답고 비가 갠다는 틀림없는 조짐이라 해도 맑은 날씨를 영원히 약속하지 못하고 잠깐에 그치고 말듯, 눈물에 쉼 없이 금박을 입히는 애정의 빛에도 다툼은 여전히 되풀이된다. 내가 잘 아는 두어 쌍이 바로 이런 처지에 있는데, 한순간의 하찮은 문제 말고는 충고가 이로운 경우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한쪽은 상대가 모르는 것을 잘 알지 모르나, 아무리 친절하게 일러주더라도 그 충고가 보람을 거두지는 못한다.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물리쳐야 한다. 나는 벗들을 길들이느니 차라리 하이에나를 길들이겠다. 그는 어떤 광산 장비로도 다룰 수 없는 광물질과 같다. 벌거벗은 야만인은 관솔로 떡갈나무를 넘어뜨리고, 손도끼를 바위에 문질러 바위를 닳게 한다. 그러나 나는 벗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라서든, 바뀌기를 바라서든 벗의 인격에서 조그마한 한 조각이라도 떼어낼 수 없다.

연인 사이라도 온전히 맑고 믿을 만한 사람은 결국 없음을 알게 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악령이 있어 길게 보면 어떤 범죄라도 저지를 수 있다. 그렇지만 어느 동양학자가 말하듯, "선인善人끼리도 우정이 끊길 수 있으나, 그들의 원칙은 변치 않고 남아 있다. 연꽃줄기도 꺽이나, 그 안에 섬유질은 이어져 있듯."(367∼369쪽)

 

 

 

벗은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이다. 그는 나의 실제 형제이다

사랑이 있는 어리석음과 서투름이 사랑이 없는 슬기와 재간보다 낫다. 어떤 경우에는 점잖고 치우치지 않으면서 위트와 재능이 있고, 재기가 번득이는 대화도 있으며, 선한 뜻까지도 함께 지니고 있는데도 가장 거룩한 인간적 능력은 안타깝게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사랑이 없는 삶은 타지 않는 해탄骸炭이나 재와 같다. 페르시아 대리석이나 설화석고에 못지않게 순수하고, 토스카나식 빌라처럼 우아하고, 나이아가라 폭포에 뒤지지 않는 웅장한 성격을 지녔다 할지라도 사람을 청해놓고서 우유 섞인 포도주를 내놓지 않는다면, 기쁘게 맞아주는 고트족이나 반달족을 찾아가는 편이 차라리 더 나을 것이다.

벗은 나와는 다른 종족이나 가문이 아니라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이다. 그는 나의 실제 형제이다. 나의 본성과 마찬가지로 벗의 본성도 저쪽에서 나를 더듬어 찾고 있음을 나는 안다. 그는 내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다. 『비슈누 푸라나』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고결한 우정을 맺기까지 통틀어 일곱 발짝이면 충분하다. 게다가 나는 그대와 더불어 살아왔다.

우리 두 사람은 이렇게 오랫동안 같은 빵을 나누고, 같은 샘의 물을 마시고, 사시사철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같은 열기와 추위를 느끼고, 같은 과일을 즐겨 먹으며 기운을 되찾아왔다. 서로 바탕이 다른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어찌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는가!(369∼370쪽)


 

펼친 부분 접기 ▲

 





 
 
함께살기 2013-12-07 08:12   댓글달기 | URL
너른 냇물을 타고 형과 둘이서 조용히 삶을 누리면서
이 아름다운 이야기 조곤조곤 떠올렸겠지요.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살가운 형제나 부모,
또는 사랑스러운 님과
숲속 냇물을 천천히 흐르며
숲노래 듣는다면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새롭게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oren 2013-12-09 10:50   URL
저도 어릴 땐 우리 동네를 빙 둘러 흐르던 '강줄기'를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꼬박 '강'과 함께 놀았던 기억이 가득합니다.

<소로우의 강>을 읽으면서 어릴 적 그 시절들이 손에 잡힐듯이 떠올라,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었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아름다운 삶을 누리는 이들이 어딘가엔 분명 살고 있으리라 저도 믿습니다.

pek0501 2013-12-07 18:43   댓글달기 | URL
우정도 지키기 위해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무조건 사귄 지 오래되었다고 해서 우정이 지켜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위의 글은 하나하나 곱씹어 읽어야 할 듯해요. ^^

oren 2013-12-09 10:57   URL
'우정'에 대해 쓴 글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소로우 님의 '우정'에 대한 글은 정말 깊디깊은 생각에서 우러나오는 글이어서 정말 감동적이더라구요. 말을 너무 잘 하기로 소문난 키케로의 '우정에 대하여' 쓴 '윤기나는' 글이나, 몽테뉴의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우정에 대한 멋진 글'보다 소로우의 글이 제게는 훨씬 더 가슴깊이 다가오더라구요. 앞으로도 가끔씩 '우정'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될 때, 이 글을 다시금 읽어볼 요량으로 '기나긴 내용'이지만 아낌없이 옮겨 적어 봤어요. ㅎㅎ
 
소로우의 강 - 강에서 보낸 철학과 사색의 시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윤규상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밑줄긋기)

가장 슬기로운 보수주의는 힌두교의 그것이다. 마누43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이어져온 관습은 법률을 초월한다"고 말한다. 즉 그때의 관습은 인간이 정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신들의 관습인 것이다. 우리 뉴잉글랜드의 관습은 정한 날을 기릴 수 있다는 흠이 있다. 도덕이란 아득히 먼 옛날부터 어어져온 관습 말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양심이 보수주의자들의 우두머리다.

『바가바드기타』에서 크리슈나는 말한다.44 "너는 네게 맡겨진 일을 행하여라. 행함은 행함이 없는 것보다 낫다. 행함이 없이는 네 몸조차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45-"타고난 본바탕에서 맡겨진 의무는 설사 잘못함이 있더라도 버리지 말지니, 모든 일은 다 흠집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마치 불길이 연기에 싸여 있듯,"46-"전체를 터득한 사람이라고 해서 전체를 모르는 둔한 사람을 흔들어놓아서는 안 된다."47-"오, 아르주나야, 일어나라, 싸우기를 결심하여라"48가 참으로 아끼는 친족들을 죽이기 두려워하여 싸움에 나서기 망설이는 전사에게 주는 하느님의 충고이다. 그것은 마음에 나타난 그대로의 우주를 아시아적 염원으로 간직하려는, 온 누리만큼 넓고 시간만큼 지칠 줄 모르는 장엄한 보수주의이다.

이 인도철학자들은 변치 않는 필연의 법칙들, 그리고 성향과 소질을 뜻하는 세 가지 구나49 곧 삼성三性과, 태어남과 그로 인해 얽힌 인연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그들은 무한한 인식, 곧 브라흐마와의 영원한 합일을 간절히 원한다. 그런 만큼 그 사색은 높고도 넓지만, 인도 고원 너머로까지 모험에 나서지는 않는다. 그들은 '형언할 수 없으신 이Unnamed'의 특성이기도 한 쾌활함, 자유로움, 부드러움, 다양함, 앞날의 가능성과 같은 일들까지 다루지는 않는다. 신의 풍성한 보답은 끝없이 단조로우면서 고된 일로 얻어내야 한다. 말하자면, 앞날에 대한 기약 없는 약속이라는 짐을 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그들의 보수주의는 효과가 없다고 말하겠는가? 한 프랑스인 번역가는 중국과 인도 왕조들의 예스러움과 끝없이 이어짐, 그리고 입법자들의 슬기를 높이 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확실히 그곳에는 세상을 다스리는 영원한 법칙의 어떤 흔적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

반면에 기독교는 인도주의와 실천을 소중히 여기고, 넓게 볼 때 급진적이다. 저 동양의 현인들은 오래도록 신들의 시대를 살고 침묵 속에서 신비의 '옴Om'50을 토해내며, 자기 안에서 나오기는커녕 오히려 더 멀리 물러나고, 더 깊이 가라앉으면서 최고 실재Supreme Being의 본바탕으로 깊숙이 빠져들어갔다. 따라서 참으로 슬기로운데도 꽉 막혀 있어, 마침내 같은 아시아이기는 하나 먼 서쪽에서 브라흐마51에 빠지지 않고 브라흐마를 이 땅으로, 곧 인류에게로 끌어내린 그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한 청년이 나타났다. 그 청년으로부터 브라흐마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현대가 시작되었으니, 말하자면 하느님이 새롭게 몸을 입은 것이었다. 브라만52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거나 인류의 형제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리스도는 개혁가들과 급진주의자들의 왕이다. 신약성서에 들어 있는 수많은 구절들은 자연스럽게 프로테스탄트의 입술로 옮아가고, 그것들이 가장 풍부하고 실천적인 교재들을 내놓는다. 그 안에는 순수한 공상이나 슬기로운 성찰은 없으되, 상식의 기틀이 곳곳에 놓여 있다. 그 가르침은 되비추지 않고, 단지 뉘우칠 따름이다. 그 안에는 시도 없고, 아름다움의 빛으로 바라본 것도 없으며, 도덕적 진실만이 그 목적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 도덕관념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

신약성서에서 두드러진 점이 순수한 도덕성이라면, 최고의 힌두경전에서 두드러진 점은 순수한 지성이다. 독자들이 참으로 높고, 순수하고, 드문 생각의 자리에까지 올라 계속해서 머물 수 있는 곳은 오직 『바가바드기타』뿐이다. 워렌 헤이스팅스53는 동인도회사 이사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책의 번역을 권하면서, 원전이 지닌 "개념과 추론과 표현의 숭고함은 어떤 문헌과도 견주기 어려운" 것임을 밝히고 나서, 인도 철학자들의 이 저술은 "영국 통치가 끝나고 오랜 기간이 흐른 뒤에도-한때 인도에서 부와 권력을 가져다주던 원천들이 말끔히 잊혀지고 난 후에도 오래도록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가바드기타』는 우리에게 전해진 가장 숭고하고 거룩한 경전의 하나인 것만은 분명하다.

책은 주제를 어떻게 다루느냐보다는 얼마나 거룩한 주제를 다루느냐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 동양철학은 현대 서구철학이 다루는 주제들보다 훨씬 높고 중요한 주제들에 손쉽게 다가가므로, 이따금 동양철학이 이런 주제들을 대수롭지 않게 줄줄 이야기하더라도 하나도 이상할 것은 없다. 동양철학만이 행동과 사색 양자를 올바르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니, 동양철학만이 사색을 올바로 본다. 서구철학자들은 사색의 중요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헤이스팅스는 브라만이 받는 영적 훈련과 그들이 다다르는 놀라운 추상능력의 몇 가지 예에 주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느껴지는 감각으로부터 마음을 떼어놓는 훈련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방법을 써야 그런 능력에 다다르는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서반구에서는 지극히 신중하다는 이들조차 지금 느껴지는 대상이나 지난날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오락가락해서 그렇게 주의를 한 곳에 모으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파리 한 마리가 윙윙거리는 소리에도 그의 주의는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 젊은 시절부터 늙을 때까지 자신보다 앞선 이들이 모아놓은 지식의 곳간에 일정한 지식을 덧붙이면서 날마다 마음 모으는 명상을 했음을 알게 된다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해도 전혀 엉뚱한 짐작만은 아닐 것입니다. 몸을 단련시키는 일이 그러하듯, 그들이 꾸준히 마음을 단련시킴에 따라 저마다 바라는 힘을 얻어냈을지 모르고, 그런 집단 연구를 통해 다른 나라의 학자들에게 익숙한 교리와는 완전히 다른, 감정이 흐르고 뒤섞이는 길을 찾아냈을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진리는 뜻하지 않게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에 거의 휘둘리지 않는 원천에서 비롯된다는 이점을 지녔으므로, 깊이 생각해야 하는 미묘한 내용일지라도 사실상 우리 자신의 가장 단순한 진리에 못지않게 진리에 바탕을 두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크리슈나는 아득히 먼 옛날부터 사람들에게 "행위 속에서의 포기"를 가르쳤고, 그것이 대대로 전해지다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이 요가가 마침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구나, 오 아르주나여."
54 "모든 행위는 빠짐없이 슬기에 이르러서야 그 마루터기에 이른다"55면서 이렇게 말한다.


"네가 악인 중에서 가장 악독한 악인일지라도 슬기의 배에 의지하면 온갖 죄악을 어렵지 않게 건널 수 있다."56

"이 세상에 슬기처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은 없다."57

"슬기를 쓰는 일에 비기면 행동은 아득히 먼 밑자리에 있다."58

"성자59의 슬기는 거북이가 팔다리를 끌어들이듯, 제 감각기관을 감각의 대상으로부터 온전히 끌어들인다. 그런 사람은 슬기가 튼튼히 섰느니라."60

"어린아이들은 학식과 요가가 다르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어진 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하나에만 올바로 서더라도 양쪽 열매를 다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61

"사람이 무위에 이르는 것은 행동하지 않기에 되는 것이 아니요. 또 단순히 행동을 내버림으로써 온전한 경지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도 한 순간이나마 행동하지 않을 수는 없다. 누구나 타고난 성품에서 일어나는 충동으로 말미암아 아쩔 수 없이 일을 하도록 되어 있다. 행동의 감각기관을 억누르면서도 그 마음이 감각 대상을 생각하는 사람은 무언가에 혼이 홀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위선자라 부른다. 그러므로 모든 집착을 떠나 결과야 어떻든 마음에 두지 말고 맡겨진 일을 거리낌 없이 행하는 자가 높이 떠받들어질 것이다."62

"네가 할 일은 행함에만 있지, 조금도 그 결과에 있지 않다. 행동하는 까닭을 결과에다 두지 말라. 그렇다고 해서 행하지 아니함에도 집착하지 말라."63

"언제나 집착을 떠나 해야 할 일을 하는 이가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다."64

"행위 속에서 무위를, 무위 속에서 행위를 보는 자가 인류 가운데 슬기롭다. 그는 모든 의무의 온전한 실행자이다."65

"모든 몫이 욕망과 탐욕을 떠났으며, 모든 행위가 슬기의 불로 태워져 버린 사람을 어진 이라 부른다. 행함의 결과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만족할 줄 알며,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는다면 아무리 행함 속에 있다 해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과 같다."66

"행함이 결과에 매이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탁발승이요, 요기이다. 그는 제사 불을 피우지도 않고 행함도 없는 사람과는 다르다."67

"희생을 바친 뒤에 남은 음식이 감로이니, 그 음식을 받아먹는 자는 영원한 브라흐마에 들어가느니라."68


결국 삶의 실상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몸소 하는 일들이란 아주 하찮은 것들이다. 나는 이 메뚜기의 노랫소리를 듣기 위해 모든 일을 뒤로 미룰 수 있다. 내가 겪은 일 중에서 가장 찬란히 빛나는 것들은 내가 무엇을 했거나 하고자 작정한 일이 아니라, 내가 간직한 어느 한순간의 생각, 비전, 꿈이다. 나는 하나의 참된 비전을 위해서라면 이 세상의 온갖 부, 온갖 영웅들의 온갖 행위까지도 기꺼이 치르겠다. 하지만 이 땅에서 연필제조업자이고, 제정신인 내가 어떡하면 신들과 교통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어떻게 오든 나는 그를 받아준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내 길을 따르는 것이다."69라고 크리슈나는 말한다.

신약성서에 비춰보면, 이런 가르침은 실제적이지 않다. 다시 말해, 현실에 걸맞지 않다고 여겨질 때가 적지 않다. 브라만은 용감하게 악을 무찌르라고 말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다. 단지 악을 끈기 있게 굶겨 죽이라고 말할 뿐이다. 카스트 관념,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생각,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생각, 그리고 시대라는 거칠고 사나운 정치가 움직임에 써야 할 그들의 힘을 굳어지게 했다. 크리슈나의 주장은 흠집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르주나가 왜 싸워야 하는지 그럴 만한 이유가 나타나 있지 않다. 아르주나는 크리슈나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을지 모르나, 그의 판단은 "상키야샤스트라70가 깊이 생각해서 다다르는 신앙의 진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므로, 독자들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직 슬기에서만 피난처를 구하"라지만, 서구 정신에서 슬기란 무엇인가? 크리슈나가 말하는 의무는 그에 타당한 이유가 빠져 있다. 그 의무는 언제 정해지는가? 브라만의 미덕은 옳은 일을 하는 데서가 아니라, 맡겨진 일을 하는 데서 생긴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이란 무엇인가? "행함"이란 무엇인가? "맡겨진 의무"란 무엇인가? 다른 이의 종교보다 훨씬 좋은 "그 사람 자신의 종교"란 무엇인가? "그 사람 자신만의 특별한 소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카스트 제도의 옹호, "싸움터에서 달아나지 않고", "전투에 참여하는" 크샤트리아, 곧 전사의 의무와 같은 "자연스러운 의무"라 부르는 것에 대한 옹호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행함의 결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을지라도, 자신의 행함에 대해 관심이 없지는 않았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보라. 동양은 이승에서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고, 서양은 행함으로만 가득 차 있다. 동양은 눈이 멀 때까지 해를 쳐다보고, 서양은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를 부지런히 쫓아간다. 서양에도 카스트 제도와 같은 것들이 있으나, 동양보다는 훨씬 힘이 약하다. 그것이 이곳 서양에서의 보수주의이다. 너의 의무를 저버리지 말고, 어떤 제도도 어기지 말고, 어떤 폭력도 행하지 말고, 어떤 차용증도 찢어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곧 국가가 너의 부모이다. 그 미덕과 인격은 전적으로 자식으로서의 미덕과 인격이다. 모든 나라에는 동양과 서양 사이의 갈등, 말하자면 해를 끊임없이 바라보려는 자와 해 지는 쪽으로 서둘러 가려는 자 사이의 갈등이 존재한다. 전자의 부류는 후자더러, 너희가 해 지는 곳까지 이르더라도 해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후자는, 설사 그렇더라도 우리는 하루해를 조금이라도 더 늘려놓지 않았느냐고 대꾸한다. 전자에 따르면, "깨달은 성자牟尼는 모든 산 것들이 밤 시간에 쉬러 가는 때인 밤에만 걷고, 모든 산 것들이 깨어 있는 낮 시간에만 잠을 잔다."71

나는 다음과 같은 산자야72의 말을 빌려 여기에 끌어 쓴 글월 전체의 요약으로 삼겠다.


오 대왕이시여, 크리슈나와 아르주나 사이의 이 놀라운 대화를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저는 더욱더 커다란 기쁨을 느낍니다. 대왕이시여, 저 놀라운 하리 신
73의 모습을 생각할수록 기쁨과 놀람이 점점 더해가는 것을 느낍니다. 요가의 주이신 크리슈나가 계신 곳, 훌륭한 궁술가이신 아르주나가 계신 곳, 그곳에서는 언제나 행운이 있고, 승리가 있고, 영광이 있고, 굳건한 다스림이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확고한 믿음입니다.74



경전을 읽고 싶어 하는 이들이 좋은 책을 원한다면, 나는『마하바라타』75에 들어 있는 에피소드의 하나로, 4천 년도 더 지난 시기에-4천 년 전이든 3천 년 전이든 그 시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비야사76가 썼다고도 하고, 아무아무개가 썼다고도 하는, 찰스 월킨스77가 옮긴 『바가바드기타』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책은 한 경건한 민족의 거룩한 전승의 한 부분으로서, 양키들이라도 존경심을 갖고 읽어볼 값어치가 있으며, 지성을 갖춘 히브리인이라면 그 안에서 히브리 경전에 못지않은 장엄하고 웅대한 도덕을 발견하고서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다.


(중략)

참으로 뛰어난 영국의 학자 겸 비평가에 속하는 이조차 세계의 명사들을 추려내면서 유럽 문화가 옹졸하게 치우친 독서를 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유럽 문화의 아들딸 중에서 페르시아와 인도의 시인과 철학자를 올바르게 자리매김한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전문적인 시인과 사상가들보다는 상인으로서 아마추어 학자인 이들이 그 시인과 철학자들을 더 잘 알아보았다. 영국 시 전체를 훑어보더라도 이 주제를 다룬 기억할 만한 단 한 편의 시도 찾기 어렵다. 독일이 문헌을 뒤지는 노력을 통해 철학과 시의 큰 줄거리에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기는 했으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괴테가 어느 정도 인도철학에 가까이 다가가기는 했으나, 괴테도 인도철학을 올바르게 자리매김할 만한 재능을 지니지는 못했다. 그의 재능도 사물을 가리고 따지는 분야에 더 얼맞은 실제적인 재능이고, 명상의 영역에서는 저 현인들의 재능에 미치지 못한다.

페르시아의 힘이 줄어들고 나서야 유럽 문학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도 현대 유럽의 명사 목록에서 동양인의 이름은 고작해야 호머와 히브리인 몇 사람에 국한된다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한다. 인류의 가장 훌륭한 명사이자 현대 사상의 아버지로 받아들여질 만하고, 아직까지도 그 작품이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살아 있는 저 인도의 현인들은-그들의 명상이 인류의 지적 발전에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도-존재했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들이 화가였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나 젊은 시절의 꿈에서는 철학이 희미하게나마 독특한 진실을 지니고서 동양과 불가분의 연관을 맺고 있는데도, 서구 세계에서는 그것의 자리매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동양철학자들과 견주어 이제껏 현대 유럽은 어떤 철학자도 낳지 못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의 셰익스피어조차 『바가바드기타』처럼 드넓게 우주를 껴안는 철학에 대보면 청년의 미숙함이자 실천만 앞세우는 것처럼 보일 때가 적지 않다. 자라투스트라의 갈데아 신탁78처럼 수많은 변혁기를 치르고 번역까지 거치면서 살아남은 이 장엄한 글월 중 일부만 살펴보더라도 그 시적 형식과 의복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참으로 보람 있고 꾸준한 생각을 나타내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학자들은 여전히 '빛은 동방으로부터Ex oriente lux'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아야 한다. 서구 세계는 동양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할 모든 빛을 아직까지 끌어오지 못했다.

중국, 인도, 페르시아, 히브리와 같은 나라의 경전들과 거룩한 글월들을 모아 '인류의 경전'으로 펴내는 일이 이 시대에 당장 서둘러 해야 할 일인지 모른다. 신약성서는 너무 자주 사람들의 입술과 심장을 오르내리고 있어, 어떤 면에서 보면 경전이라 부를 자격이 없는 것 같다. 이렇듯 나란히 놓고 견주어보면, 사람들이 믿음이라는 멍에에서 풀려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인쇄기의 노력에 한껏 영광의 관을 씌워줄, 시간이 편집해야 할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이야말로 선교사들이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할 바이블, 다시 말해 책 중의 책이다.

(중략)

앞은 물론 뒤에까지 눈을 달고서 그 자체를 굽어보는 즐거운 지혜인 『비슈누사르마의 히토파데샤』80와 같은 아주 오래된 책에서 자신의 생각과 닮은 생각들을 만나면 늘 기분이 야릇해지면서 자극을 받게 된다. 이런 책들을 통해 후세가 겪는 일들도 건강하고, 홀로 설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건전함의 증거는 어느 한 책에만 따로 떼어놓을 수 없으니, 그것이 이따금 즐겁게 그 자체를 돌이켜보기 때문이다. 『히토파데샤』의 줄거리와 그 안에 든 우화들은 사막의 수많은 오아시스처럼 글월에서 글월로 뻗어나가지만, 무르죽81과 다르푸르82 사이를 지나는 낙타의 자취처럼 희미해진다. 그것은 무수히 밀려오는 현대 서적들에 대한 논평이기도 하다. 읽는 이가 징검돌에서 징검돌로 건너뛰듯 글월에서 글월로 건너뛰는 동안, 줄거리는 급히 흘러가서 잊혀지곤 한다.

이에 비해 『바가바드기타』는 시적이거나 간결한 면은 떨어질지 모르나, 줄거리가 훌륭하게 지탱되면서 발전한다. 그것은 병사나 상인의 마음까지도 감동시킬 만큼 건전하고 숭고하다. 위대한 시는 읽는 이가 성격이 조급하든 신중하든, 그 나름에 알맞은 비율로 그 뜻을 밝혀준다. 콸콸 흐르는 시내에서 여행자들은 목을 축이고 군인들은 수통에 물을 채우듯, 위대한 시는 실천적인 이에게는 상식일 터이고, 슬기로운 이에게는 지혜일 터이다.(195쪽)


주석
43. 힌두 신화에서 마누(Manu)는 절대존재이고, 대홍수 후 다시 인류를 번성시킨 인간의 시조이자 최초의 법 편찬자이다.
44. '거룩한 자의 노래'를 뜻하는 『바가바드기타』는 세계에서 가장 긴 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harat)』의 일부를 이룬다. 두 형제 집안이 왕국을 놓고 싸움을 벌이기 직전, 그 한 집안의 셋째인 아르주나에게 크리슈나(비슈누의 화신)가 깨우침을 베푸는 말씀이 주가 되어 있다.
45.『바가바드기타』3장 카르마요가 8절 참조.
46. 18장 내버림에 의한 해탈 48절 참조.
47. 3장 29절 참조.
48. 2장 삼캬요가 37절 참조. 삼캬는 학식이나 이론을 뜻한다.
49. 원문에는 goon: 오늘날은 구나(gunas)라고 표기한다(goon→gunas). 모든 마음과 물질의 근본을 구성하는 성질을 말한다. 순수한 성질(善性), 사나운 성질(動性), 게으른 성질(暗性) 셋으로 이루어져 있다.
50. 영어로 aum이라고도 표기한다.ㅏ,ㅜ,ㅁ 세 음(音)이 합쳐져 우주의 틀을 이루는 체계를 총칭하고, 우주의 질대진리인 브라흐마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51. 힌두교의 절대자는 브라흐마(거룩한 창조의 능력), 비슈누(유지의 신), 시바(파괴의 신)의 세 가지 인격화된 모습을 지니고 있다.
52. 인도의 승려 계급
53. Warren Hastings(1732∼1818): 1750년에 인도로 가서 1764∼1769년 사이의 귀국기간을 제외하고 20여 년을 인도 통치에 종사하고, 1773년 초대 벵골 총독이 되었다.
54. 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 2절 참조. 즈나나는 지식, 카르마는 행위, 산야사는 욕망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크리슈나는 『바가바드기타』전체에 걸쳐 아르주나에게 요가(요컨대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55. 4장 33절 참조.
56. 4장 36절
57. 4장 38절.
58. 4장 37절.
59. Moonee → muni: 성자(牟尼)다. 고통 속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즐거움 속에서도 집착이 없으며, 애욕도 두려움도 화도 다 벗어버린 현인을 일컫는다.
60. 2장 58절 참조.
61. 5장 내버림의 요가 4절 참조.
62. 3장 4∼7절 참조. 여기에서 무위는 얽매임 없는 행위를 일컫는다. 모든 함의 보이지 않는 근본이지만, 아무런 집착 없이 하기에 함이 없다 한다.
63. 2장 47절 참조.
64. 3장 19절 참조.
65. 4장 18절 참조.
66. 4장 19∼20절 참조. 여기에서 어진 이(Pandeel→pandita)는 자아실현에 이른 이를 뜻한다.
67. 6장 진정한 요가 1절 참조. 요기는 요가수행자를 일컫는다.
68. 4장 31절 참조.
69. 9장 최고의 지식과 신비 29절 참조.
70. Sankhya Sastra: 상키야 학파는 자아에 대한 올바른 인식, 즉 지식을 강조한다. 이에 비하면 『바가바드기타』에서는 믿음이 중시되어 있다.
71.『바가바드기타』2장 69절 참조. 사람들은 밤에 잠을 자면서 욕망에서 벗어나 참모습이 된다. 그러므로 잠잘 때 깨어 있다.
72. Sanjay: 왕의 마부로,『바가바드기타』는 그가 장님인 왕에게 전장의 모습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짜여 있다.
73. Haree: Hare Krishna로, 크리슈나 자신의 별칭이기도 하다.
74. 18장 76∼78절 참조.
75. Mahabharat: 옛 인도의 서사시, 세계에서 가장 길다.
76. Kreeshna Dwypayen Veias: Veias는 '편집자'라는 의미로, 그가 네 『베다』의 편집자이기도 하다.
77. Charles Wilkins(1749∼1836): 식자공이면서 작가로, 1785년에 처음으로 『바가바드기타』를 영역했다.
78. Chaldaean oracles: 갈데아, 즉 바빌로니아에서 유래한다고 여겨지는 단편적인 텍스트들.
79. Madeira: 포르투칼령의 한 대서양 군도.
80. Hitopadesa of Veeshnoo Sarma: 벵골에 전해진 설화집 『판차탄트라』의 이본(異本)으로서, 9세기에 지었다고 한다. 원본의 이야기 5편을 4편으로 개작하고 새로이 17가지의 설화를 추가했다. 이 책도 찰스 월킨스가 처음으로 번역하여 서구에 소개했다.
81. Mourzouk: 리비아 서남부의 오아시스 마을.
82. Darfour: 수단 서부에 있는 주.

 

 

 













 






























 




 
 
팜므느와르 2013-12-05 11:58   댓글달기 | URL
오렌 님 덕에 철학적 사유가 깃든 책 더러 샀는데 이번에도 굿이네요.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결과에 개의치 않고 행함이 행하지 않은 것보단 낫다는 말씀에 용기를 얻습니다.
오렌님 서재는 알라디너들 영혼의 안식처 역할을 톡톡히 하옵니다.

oren 2013-12-07 02:13   URL
<소로우의 강>은 <월든>에 못지 않게 깊이가 있고 좋은 책인 듯해요. 팜므님께도 강추합니다.

<바가바드 기타>와 <마하바라따>는 너무나 오래된 경전인데도 그동안 이 책 저 책에서 이름만 몇 번 들어봤을 뿐, 저도 여태 구경조차 하지 못하고 '알라딘 상품소개'만 기웃거리고 있답니다. 저는 이 책들을 사더라도 과연 제대로 읽을 수 있을지 걱정되어 아직까지 선뜻 장바구니에 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소로우의 강 - 강에서 보낸 철학과 사색의 시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윤규상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밑줄긋기)

여행하는 내내 강물 따라 흐르기를 바라는 독자는 내해內海를 다니는 자신의 작은 배가 큰 물결이 이는 바다에 이르면 바닷물이 자꾸 솟구쳐 올라와 멀미가 난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바다의 흐름은 배 쪽으로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해와 달 쪽으로 밀려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책들을 읽으며 글이 지닌 흐름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숨 쉴 때처럼 페이지마다에서 솟아오르고 드르릉 돌아가는 맷돌처럼 옳으니 그르니 따지는 생각들을 싹 씻어버리리라는 것을 짐작해야 한다. 물결이 자신의 앞이나 뒤에서 좀 더 높은 곳까지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홍수처럼 잔물결을 일으키고, 물방아 시내처럼 둑길 아래로 즐거이 흘러가는 글들도 많다. 그런 이야기가 마루터기에까지 닿을 때면 피타고라스, 플라톤, 얌블리코스155가 그 곁에 멈춰 선다. 그런 작가들의 길고 끈질기고 힘줄 많은 글월들은 꾸준히 흘러가며 자연스럽게 뒤섞인다. 그것은 군인이나 사업가를 위한 글처럼 읽히는데, 그 안에 신속함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작가들과 비교할 때 엄숙한 사상가나 철학자들은 이제껏 배내옷을 벗지 못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지난밤 선봉이 진을 친 곳에 오늘밤 후미가 다시 진을 치는 로마군대의 행진보다도 느리다. 슬기로운 얌블리코스는 물기 많은 늪지처럼 소용돌이치며 반짝인다.

(중략)

처음부터 끝까지 건강하기만 한 글은 무척 보기 드문 게 사실이다. 사람들은 글에 담겨진 생각에서 나오는 빛깔과 향기를 놓쳐버리기 일쑤이다. 빛깔이야 어떻든 아침이슬과 저녁이슬을 보면 기쁨을 느끼고, 색깔이야 어떻든 하늘을 보면 기쁨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가장 매력적인 글은 지혜가 가득 담긴 글이 아니라,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는 진솔한 글이다. 말하는 이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안다는 듯, 탁 터놓고 잘라 말하기에, 슬기로운 글은 못 된다 해도 적어도 확실히 터득된 글이기는 하다.


월터 롤리 경161의 글은 대가 중에서도 눈에 확 뜨이므로, 글투가 뛰어나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자세히 살펴볼 값어치가 있는 인물이다. 그의 글투에는 사람의 발걸음과 같은 자연스러운 강약이 있고, 현대 최고의 저술가도 내놓지 못하는 글월과 글월 사이에 숨 돌릴 공간이 있다. 그의 글은 영국의 공원, 좀 더 정확히 말해 높이 자란 나무들이 잔 나무들을 억눌러 빈 공간을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는 유럽의 숲과 같다.

당시의 모든 뛰어난 작가들은-우리 시대를 헐뜬는 말처럼 들리더라도 용서하기 바란다-오늘날의 작가들보다 훨씬 활기 넘치는 글을 척척 써냈다. 우리가 현대 작가를 읽던 중에 그들의 글에서 끌어온 구절들을 읽게 되면 돌연 흙질이 좋고 깊은, 싱싱한 초록의 땅을 만난 것처럼 느껴진다, 겨울철이나 이른 봄날에 뜻밖에 싱싱한 풋나무를 보게 되듯, 푸른 나뭇가지 하나가 페이지에 가로놓인 것처럼 보여 기분이 상쾌해진다. 이런 글들을 꾸준히 읽어가다 보면 삶의 체험에 놓인 바탕을 알게 된다. 짧은 글에 담겨진 암시를 통해 많은 일들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글은 사상과 경험에 뿌리를 내렸기에 상록수처럼 푸른 잎이 우거져 꽃처럼 피어나지만, 우리 시대의 꾸며낸 글들은 수액과 뿌리는 없이 꽃의 화려한 색깔만 띠고 있다. 모든 사람은 말이 지닌 꾸밈없는 아름다움에 매료되게 마련인데도, 그들은 그렇게 현란한 글투로 남을 흉내 낸 글을 쓴다. 그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글을 화려하게 쓰고 싶어 한다.

(중략)

모든 글은 오래된 단련의 결과이다. 일반 서민들의 말이 아니면 어디에서 표준영어를 찾을 수 있겠는가? 가장 좋은 말은 말하지 않은 것과 다를 바 없으니, 그런 말은 글쓴이가 더 잘할 수 있었을 어떤 행위와 무척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이다. 아니, 아주 급한 사정에 의해서든, 불운에 의해서든 그것이 행위를 대신한 것과 다를 바 없으므로, 결국 가장 진실한 작가는 사로잡힌 기사의 몸이어야 한다. 운명의 여신은 그런 계획을 갖고서 롤리로 하여금 실제의 삶을 넉넉히 겪어보도록 한 다음 그를 죄수로 만들어, 그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삼고, 자신이 했던 중요하고도 진실한 행동을 말로 옮기도록 한 것이 아닐까.

(중략)

한가로이 공부만 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있을까? 장작 패는 법이라도 배워라. 학자도 땀 흘려 일하고, 여러 사람과 대화하고, 갖가지 일을 보고 들을 기회를 가져야 한다. 꾸준히 해야 하는 노동은 공부 못지않게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글과 말에서 쓸데없는 수다와 감상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노동을 하는 것이다. 당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고 나서 그 시간 동안 생각의 흐름을 놓쳤다고 안타까워할지 모른다. 하지만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그날의 경험을 단 몇 줄이라도 적어보라. 상상력은 뛰어나나 게으른 공상에 불과한 글보다는 훨씬 음악에 가까운 진실한 글이 나올 것이다. 작가란 모름지기 노동자들의 세계를 다뤄야 하므로, 그의 삶의 원칙도 그러해야 한다.

짧은 겨울해가 지고 어둠이 오기 전에 패서 묶어내야 할 장작들이 많이 쌓여 있는 작가를 상상해보라. 그는 일터에서 쓸데없이 춤을 추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시간을 아껴 굳은살이 박힌 투박한 손으로 도끼를 들어 장작을 내리찍는 소리가 쩌렁쩌렁 숲을 울릴 것이다. 이렇게 일하는 투박한 손에서 나온 그의 글들은 도끼 소리가 잦아들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독자들의 귀에 쩌렁쩌렁 울릴 것이다. 학자는 손에 못이 박힐 정도로 강인한 진실을 쓰기 위해 애써야 한다. 손에 박힌 못이 그가 쓰는 글을 튼튼하게 만들어준다. 실제로 몸이 활기차지 못하면 정신의 노력이 나아질 수 없고,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 우리는 글 쓰는 훈련을 거의 받지 못한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내몰렸을 때, 금세 힘차고 정확한 글투에 도달하는 모습에 깜짝 놀라곤 한다. 솔직하고 생기 있고 성실하면서 잘 다듬어진 글투는 학교가 아니라 농장과 일터에서 더 잘 배울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 투박한 손으로 쓰여진 글들은 잘 무두질된 가죽끈이나 사슴의 근육, 소나무 뿌리에 못지않게 질기고 억세다.

뛰어난 표현과 관련하여 한 마디만 더 덧붙이자면, 훌륭한 생각이 형편없는 의복에 싸여 있는 경우는 정말 보기 드물지만, 훌륭한 생각이라면 월로프족166의 입술에서 나온 말일지라도 뮤즈의 아홉 여신과 미의 세 여신이 맞들어서 그에 알맞은 옷을 입혀줄 것이다. 그런 교육이 바로 교양이고, 그 속에 든 재치가 대학에 기금을 가져다준다.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아름다움의 세계는 이렇게 배겨내지 못하는 온갖 장식들을 조금씩 없애버림으로써 이룩되었다. "시빌167이 오랜 세월 이어져올 수 있었던 것은 신의 능력을 받아 진지하고 꾸밈없으며, 향내 풍기지 않는 영감을 받은 입술로 말했기 때문이다."

학자는 될수록 자주 농부가 소를 부르는 소리에서 강조하는 방법과 특징을 배우려 애써야 한다. 농부의 소 부르는 소리가 글로 쓰여진다면 공들인 자신의 글보다 훨씬 나을 것임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누구의 글이 진정으로 공들인 글일까? 우리는 정치가나 문학가의 얄팍하고 나약한 미문美文에서 벗어나 한 달 동안 해야 할 일들을 간단히 적어놓은 농부의 달력이나 작업일지와 같은 것들로 관심을 돌림으로써 활달한 기풍과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 글이란 글쓴이가 펜 대신 쟁기를 집어든다면 끝까지 깊고 곧게 밭고랑을 낼 것이라는 느낌을 읽는 이에게 주어야 한다. 학자라도 활달하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되고 진지한 노동이 있어야 한다. 그런 뒤에 굳게 펜을 잡아야만 도끼나 칼을 휘두르듯이 펜을 품위 있고 효과적으로 휘두를 수 있다.

키가 자기 종족의 표준을 훌쩍 넘어서고, 허리둘레 또한 모자라지 않은 일부 문학가들이 갈겨대는 얄팍하고 생기 없는 미문을 생각할 때, 그 근력과 힘줄의 엄청난 낭비에 깜짝 놀라게 된다. 어떤가, 이러한 대비가! 엄청난 몸집과 나약한 글투 사이의 이러한 어긋남은 왜 생기는가? 황소도 내리쳐 쓰러뜨릴 수 있는 두 손으로 숙녀의 손으로도 가볍게 해치울 수 있는 무른 물건이나 자르다니! 이것이 등에 뼛골이 있고, 뒤꿈치에 아킬레스건이 있는 건강한 사내가 할 짓인가? 스톤헨지168에 커다란 돌을 세운 이들은 단 한 번 힘을 썼을 뿐인데도 온힘을 다했기 때문에 그 일을 해냈다.

그렇지만 대단히 능률적인 노동자는 하루를 일에 치여 보내는 법이 없다. 오히려 어슬렁어슬렁 일하는 그는 안락하고 한가하다. 지극히 하고 싶은 일이 아니면 아예 손도 대지 않는다. 그는 열매를 맺힐 시간의 알맹이만 성실하게 이용한다. 암탉이 왜 하루 종일 알을 품어야 하는가? 암탉은 하루 한 번 이상은 알을 낳지 않는다. 암탉은 또다시 알을 낳기 위해 모이를 쪼아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손톱 깍는 일과 같은 하잖은 일일지라도 그에게 시간을 넉넉히 갖게 해주자. 새싹은 짧은 봄날이 마치 영원이라도 되는 양 서두르거나 허둥대지 않고 천천히 돋아난다.

           그러니 자신의 욕구를 돋우는 데 한 시절을 보내라.
           꿋꿋이 서 있으면 서두르지 않아도 자라난다.

어떤 시간은 일을 하기에는 도무지 알맞지 않고, 숨을 들이쉴 작정이나 하기에 알맞은 것 같다. 그럴 때는 피가 끓어 당장 달려들려고 조바심을 낼 일이 아니라, 반쁨은 벌써 이루어졌다는 듯 조용히 뒤로 물러나 문을 닫고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서 이리저리 거닐어야 한다. 씨앗이 자체에 들어 있는 배젖으로 싹을 틔워 땅 밑으로 내려 보내고 나서야 햇빛을 향해 자라나듯, 우리의 결심도 그렇게 하고 나서야 땅에 뿌리를 내리고 굳건해진다.(130∼136쪽)


주석
155. Jamblichus(245∼325): Iamblichus Chalcidensis로도 알려져 있다. 후기 신(新)플라톤 철학과 서구 이교(異敎) 사상의 방향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 아시리아의 철학자.

161. Sir Walter Raleigh(1552∼1618): 영국의 귀족, 시인, 작가, 군인,조신(朝臣),탐험가. 1591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여왕 시녀와 결혼한 죄로 런던타워에 갇힌다. 풀려난 후 자신의 영지로 물러나나, 1594년 남미의 '황금 도시' 소식을 듣고 남미로 항해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엘도라도 전설에 큰 기여를 한 책을 썼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고, 제임스 1세에 대항하는 모의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다시 런던타워에 갇히나 2차 엘도라도 탐험을 위해 풀려나지만, 이 탐험은 성공하지 못하고, 귀국 후 스페인을 달래려는 영국정부에 의해 살해된다.
166. Wolofs:세네갈과 감비아 대서양 연안에 사는 흔인 종족.
167. Sibyl: 델포이 신전이 세워지기 전 델포이 여자 예언자 시뷜레에서 온 말로, 예언자, 신탁을 전하는 사람의 뜻.
168. Stonehenge: 영국 Salisbury 평원에 있는 선사 시대의 거석기둥들.

 

 




 
 
 
소로우의 강 - 강에서 보낸 철학과 사색의 시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윤규상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밑줄긋기)

우리는 책을 골라 읽을 필요가 있으니, 책은 평생 사귀어야 하는 길동무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맑게 하는 진실한 책만 읽어라. 통계, 소설, 뉴스, 보고서, 정기간행물 따위는 읽지 말고, 위대한 시만 읽어라. 그것들이 동이 났을 때는 되풀이해서 읽거나, 아니면 스스로 더 많이 쓰려고 해보라. 우리는 신들에게 희생 제물보다는 자신의 온전한 생각을 시나 찬송으로 바쳐야 한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삶의 길을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어야 한다. 하루가 온종일 대낮일 필요는 없으나, 하루가 저절로 싹틔울 수 없는 시간이 적어도 하루에 한 시간씩은 있어야 한다. 학자들은 학식 한 더미면 장자상속권을 팔아넘기려 할 것이다. 투기꾼들이 출판하고, 생각이 모자란 이들이 탐구하고, 게으른 이들이 읽는 책, 즉 러시아인들과 중국인들의 문학, 심지어 프랑스 철학과 대다수 독일의 비평조차 과연 알 필요가 있을까. 참으로 훌륭한 책부터 읽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을 읽을 기회를 영영 놓치게 될지 모른다.


어떤 이들은 재물을 희생으로 바치고, 어떤 이들은 고생을 희생으로 바치고, 또 어떤 이들은 열띤 헌신을 희생으로 바친다. 마찬가지로 열정을 가라앉히고 굳은 맹세를 한 수행자들은 경전 읽기를 희생으로 바친다. ······ 재물의 희생보다는 지식의 희생이 더 낫다. 오 아르주나여, 모든 행위는 지식에서야 그 마루터기에 이른다.141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늘 보살핌이나 칭찬을 받아야 할 필요는 없다. 피곤하다고 읽기 쉬운 소설책에 엎드리기보다는 낮잠을 자두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훌륭한 생각을 제대로 앞쪽에서 누리기 위해서는 그 생각이 다다르는 지점에 서 있어야 한다. 굽실거리는 재미를 주는 책이 아니라, 그 속에 든 생각 하나하나가 보기 드물게 담이 큰 책, 게으름뱅이는 읽을 수 없고, 마음 약한 이는 즐기기 어려운 책, 심지어 현존 제도에서는 읽는 이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는 책을 나는 좋은 책이라 부른다.

인쇄하고 제본했다고 해서 전부 책이 되는 것은 아니고, 책이라고 해서 다 문필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문명생활에 딸려오는 다른 부속품이나 사치품과 다를 바 없는 경우가 더 흔하다. 질 낮은 물건을 속여 떠넘기는 방법은 수천 가지에 이른다. 언젠가 어느 행상인이 내게 말했듯, 물건이야 어떻든 "팔아치우려거든," 조건만 맞으면 "재빨리 넘겨버려야 한다."


너희 굽실거리는 속물들아.
햇살이 비춘 적 없는 곳에서
자기 지식을 사고파는구나.


서적업과 문필업이 번창한 덕분에 책들이 교묘히 편집되어 나와서는 학식 깨나 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새로운 궁리가 열매를 맺고, 자연스럽게 산고를 거쳐 태어나기라도 한 듯, 커다란 인기와 성공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머지않아 표지가 떨어져 나가 어떻게 꾸미더라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지 못하기에 도무지 경經이나 서書로 보이질 않게 된다. 인류의 삶을 나아지게 한다고 주장하는 이런 종류의 발명품들이 현재 시중에 많이 나와 있다. 읽는 법을 배운 수많은 순진한 학자들과 천재들이 한순간 거기에 홀려 거룩하고 고요한 진리를 찾다가 말이 끄는 써레나 방적기, 나무로 만든 육두구열매, 떡갈나무잎담배, 증기다리미, 화덕을 읽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상인들은 일어나
상품과 양심을
뒤섞어 놓는다.142


이제 종이 값이 싸졌기에 저자들은 또 다른 책을 쓰기 위해 예전에 쓴 책을 지울 필요가 없다. 그들은 땅뙈기에 밀과 감자를 키우는 대신에 '학식의 공화국'에 지식뙈기를 차지하여 문학을 키운다. 사람들이 낟알 작물을 키워 증류주를 만들듯, 어떤 이들은 순전히 이름을 날리기 위해 글을 쓸지도 모른다. 실제로든, 상상으로든 대부분의 책은 하나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더 큰 물건의 부품으로 쓸 요량으로 급작스레 만들어진 것이다. 자연사를 다룬 책들은 대부분 점원들이 쓴 보기표, 다시 말해 하느님의 특성 목록을 알릴 속셈으로 서둘러 작성된 것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연의 거룩한 관점은 조금도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탐구하는 통속적인 견해와 방법만을 가르치면서 끈기 있는 학생들을 자신이 늘 갇혀 있는 딜레마로 서둘러 이끈다.


그는 가운을 입고 아테네로 가서
많은 교육을 받은 바보로 천천히 돌아온다.143


실제로 그들은 지식의 요소들이 아닌 무지의 요소들을 가르친다. 가장 높은 진리의 경지에서 생각해보면, 지식의 바탕을 알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지식과 무지 사이에 놓인 틈새는 과학의 아치로는 건널 수 없는 틈새이다. 땅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한 번도 항해해본 적 없는 사람들의 항해 기술이 아니라, 배가 부서져 바다를 떠도는 뱃사람들이 얼핏 본 마른 땅과 같은 그런 순수한 발견을 책에 담아야 한다. 지은이가 꼭 밀과 감자를 거둬야 할 필요까지는 없고, 열매 자체가 지은이 스스로 자연스럽게 거둔 삶의 열매라야 한다.


배운 건 모두 나의 것, 나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니, 뮤즈들로부터 귀한 진리를 깨우쳤기에.


우리는 학술 서적에서 배우기보다는 참사람이 정성을 다해 쓴 책, 다시 말해 성실하고 정직한 전기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선량한 사람의 삶이라고 해서 우리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데 해적의 삶보다 더 좋은 것은 아니다. 필연의 법칙은 규칙을 따르는 이에 못지않게 어기는 이에게도 뚜렷이 드러나고, 우리의 삶은 거의 엇비슷한 미덕을 값으로 치르고서야 배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썩어가는 나무라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싱싱한 나무와 마찬가지로 햇빛, 바람, 비가 필요하다. 썩어가는 나무에도 수액이 배어나오고, 일부 활동은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당신이 원한다면 나무 겉재목144만 연구해도 좋다. 옹이가 많은 그루터기도 새싹은 어린 나무의 새싹에 못지않게 부드럽다.


우리는 아무리 못해도 말이 끄는 튼튼한 써레 하나와 깨지지 않는 화덕 하나, 그리고 건강한 책 몇 권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 한다. 시인이 공공의 일에만 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안 된다. 열매도 맺지 못한 채 봄철에 잘려나가 진액을 흘리다가 죽고 마는 덩굴과는 달리, 구유로 흘러드는 수액 말고도 자체적으로 목숨을 이어가기에 충분한 수액을 갖춘 사탕단풍나무와 같은 씩씩한 기운을 갖고 있어야 한다.

시인이란 곰이나 마멋처럼 겨울 내내 긁어대기에 충분한 지방질을 모아둔 사람이다. 그는 이 땅에서 겨울잠을 자면서 자신의 뼛골을 먹고 산다. 우리는 겨울철에 눈 덮인 들판을 걸으면서 땅속에 누운 행복한 몽상가들에 대해, 산쥐류에 대해, 다시 말해 냉기가 스며들지 못하는 두툼한 몇 겹의 털가죽에 싸여 있어 삶의 여유를 갖게 된 저 모든 종족들에 대해 즐거이 상상해보게 된다. 슬프게도 시인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주변 상황에 무감각해진 채 깊고, 고요한 생각의 겨울 숙소로 들어간 산쥐류와 같다. 그의 언어는 가장 오래되고 정제된 기억의 진술이자 아득히 먼 체험에서 이끌어낸 지식이다. 그동안 다른 이들은 매처럼 공중에 떠 있으면서 가끔씩 참새라도 낚아챌 수 있길 기대하며 기꺼이 굶주린 삶을 이어간다.

우리에게는 이미 이 땅에서 키워낸 내세울 만한 에세이와 시들이 있다. 하지만 대형 서랍 하나만 있어도 남김없이 모조리 집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영감을 숨 쉬게 해달라는 요청을 신들이 아무 값없이 들어주었다 해도, 대중은 이런 에세이와 시들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하늘에 들리는 진리의 글이라면 결국 땅에서도 들리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그 에세이와 시들은 이미 케케묵어 보이고, 벌써 타고난 자취를 얼마쯤 잃어버렸다. 그러기에 여기 "참되고 뚜렷한 삶을 위해 쉼 없이 평생의 빛을 요구하는" 이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모랫둑을 뒤덮지는 못했을지라도, 초원에서 나고 자라 단 한 번도 뿌리가 뒤집혀본 적 없는 잔디처럼 솟아나는 글월 몇 개를 떠올리면서, 시인의 다음과 같은 기도에 응답해보고자 한다.


우리 공정하게 지식의 등급을 정하자.
세상이 시인의 글을 믿을 수 있도록,
모든 작품이 그 자체에 대한 아첨이라고
여전히 주장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145


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도 고장의 항구로 가서 새로운 뉴잉글랜드 시대를 열어갈 그리스의 올림픽 대회와도 같은 평화의 라이시엄146 대회에 자주 참석한 편은 아닌 것 같다. 헤로도토스는 올림피아로 역사책을 들고 가 권투경기와 육상경기가 끝난 후 읽었다고 한다. 하지만 라이시엄에서 그렇게 역사책을 외는 소리는 듣지 못했으니, 가끔씩 그리스를 잊어도 좋을 만큼 주민들이 그렇게 많이 읽었기 때문일까? 철학 또한 그곳에 제법 나무가 우거진 길과 주랑柱廊을 갖추었기에, 그래도 요즈음에는 사람들이 간혹 찾는 편이다.

(중략)

지금 당신의 얼굴에서 아폴로가 빛나고 있다. 오, 드문 인연으로 같은 시대를 사는 이들이여, 우리 저 열기에서 멀리 떨어져 있자. 지나고 지나는 덧없는 아름다움일망정 좀 더 미묘하고 거룩한 것들을 우리에게 가져다다오. 그러면 시에도 머무르지 않고, 포도주의 본디 색깔을 오롯이 비추는 저 순수한 물에도 머무르지 않으리라. 호탕한 무역풍아, 불어라. 그래서는 이 영감의 왈츠를 멈추어다오. 인디언의 하늘에서 우리 뺨 위로 불어오는 부드러운 남서풍이라도 더 자주 느껴보도록 하자. 수많은 별똥별들을 다 잃어버린다면 하늘 깊은 곳과 우주 먼지와 흩어놓지 못하는 성운이 남은들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수많은 슬기로운 신탁들을 다 잃어버리는 대신에 일구지 않은 몇 에이커의 이오니아 땅을 갖게 된들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122∼129쪽)


주석
141.『바가바드기타』제4장 28절 이하 참조.
142. Francis Quarles의 시.
143. Francis Quarles의 시.
144. 나무의 생명 유지에 가장 중요하다.
145. William Habington의 시.
146. Lyceum: 성인을 위한 독서회, 토론회. 강연회가 열리던 마을 회관을 일컫는다. 이 라이시엄 운동은 1828년 메사추세츠 밀버리에서 강좌가 열리면서 급속히 퍼져나가 1830년대 중반까지 수천 개가 생겨났다. 시골 작은 마을에까지 널리 퍼졌고, 강사는 주로 목사, 교수, 과학자, 개혁가, 작가였고 청중은 대체로 젊은 노동자나 상인이었다. 초월주의 운동의 전개는 이 라이시엄의 확산과 연관이 있고, 미국이 문화적으로 유럽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걷는 데 기여했다.

 


 

 




 
 
함께살기 2013-12-04 07:12   댓글달기 | URL
마음을 맑게 하는 책을 읽고
마음을 사랑스레 다스리는 글을 써야지요!
맞습니다.

oren 2013-12-04 16:53   URL
제가 책에서 옮겨 쓴 내용들에 대해 함께살기 님께서 뜨겁게(?) 공감해 주시니 그저 고맙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사실은 일정한 직업조차 없이 '자발적 빈곤'을 실천하던 소로우가 불과 서른두 살에 이토록 깊이있는 내용의 책을, 그것도 '자비'로 출판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어요. 더군다나 이 책의 주된 무대 배경인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 동안의 여행'은 소로우가 (이 책을 출판하기 무려 10년 전인) 스물두 살에 겪었던 일이었다는 점도 제겐 참 놀랍더군요.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