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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박중서 옮김 / 청미래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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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문학 고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금방 몇 가지를 떠올릴 수 있으리라. 첫째, 둘 다 문학사에 길이 남을 대단한 소설을 썼다는 점. 둘째, 두 작품 모두 그 어떤 작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대단한 분량의 소설이라는 점, 셋째, 읽기가 비교적 난해한 작품이어서 두 소설 모두 아무에게나 쉽게 읽히기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

내가 여기에 재미있는 한 가지를 더 추가할 수 있다면 그건 (물론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두 사람이 공교롭게도 서로의 작품을 전혀 읽어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적어도 프루스트가 죽었던 1922년 까지는 그랬다.

마침 1922년에 두 작가는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초연을 축하하는 파리의 저녁만찬에 함께 참석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두 사람이 만찬 주최자로부터 서로 소개를 받은 뒤에 벌어진 일에 대해 훗날 조이스가 친구에게 밝힌 내용이 걸작이다. 
 

우리의 대화는 "아니요"라는 말로만 이루어졌네. 프루스트는 나더러 아무개 공작을 아느냐고 묻더군. 내가 그랬지. "아니요." 여주인은 프루스트에게 『율리시스(Ulysses)』의 이런저런 대목을 읽어보았는지 물어보더군. 그러자 프루스트가 말했지. "아니요." 이런 식이었지.(154쪽)


나 역시 방금 대화를 나눈 저 두 사람의 소설을 읽어봤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도 "아니요."라는 대답밖에 내놓을 게 없다. 다만 거기에 덧붙여 뭔가 주절주절 잡다한 얘기를 더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면 그건 순전히 알랭 드 보통이 쓴 책『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을 읽은 덕분이 아닐까 싶다.
 

내가 낯설게만 느껴지던 프루스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 건 앙리 베르그송의 책『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을 읽으면서부터다. 그 후 프루스트의 그 유명한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구매하면서 우연히 알랭 드 보통의 이 책도 함께 주문했는데, 그건 내가 이 책에 대해 전혀 모른채 순전히 '즉흥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이 책이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고 궁금해서 금새 후딱 읽어버렸다.(사실 며칠은 걸렸다. 다만 KTX를 기다리던 때, 그리고 KTX를 타고 엄청난 속도로 내달릴 때, 그리고 사무실에 앉아 일할 때, 그런 바쁜 틈만 골라서 말 그대로 '틈틈이' 읽었는데 금새 책의 끄트머리에 다다랐다는 얘기다.) 근래에 읽은 책 가운데 이 책만큼 빨리 읽은 책도 없을 듯한데, 우연히 구입한 책이 이렇게 재치있고 세련되고 재미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이 책에서 내가 느꼈던 가장 유쾌한 감정들은 아마도 거의 틀림없이 저자인 알랭 드 보통이 남몰래 추구한 '진부하지 않음에의 열망' 때문이지 싶다. 그런데 이 책에서 다루는 우리의 주인공 '프루스트'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그야말로 '진부한 표현' 즉 클리셰[Cliché]에 대해서는 극도로 싫어했던 인물이 아닌가. 그가 뭇 소설가들을 거의 절망에 빠트릴 만큼 놀라운 문학적 표현들로 가득한 이 걸작소설을 쓸 수 있었던 배경도 어찌보면 '클리셰에 대한 특유의 예민한 거부감'을 타고난 데 힘입은 바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진부함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작품과 어쩌면 그보다 더한 삶을 살았던 프루스트에 대해 쓴 책이며, 알랭 드 보통의 남다른 글솜씨 덕분에 '신선하고, 흥미롭고, 유머러스하고, 생기넘치고, 매력적이고, 눈부시다'는 온갖 진부한 찬사들을 역설적으로 얻게 된 듯싶다.

내가 이 책의 리뷰를 쓰면서 조금이나마 클리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런데 나만큼 진부한 표현을 자주 쓰는 사람도 그런 진부함에서 벗어난다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어쨌든 내가 손쉽게 떠올린 생각 하나는 카메라 셔터를 좀 누르면서 글을 써보자는 것이다. 그건 물론 이 책을 쓴 알랭 드 보통의 방식(그림이 많이 포함된 글쓰기)을 얼마간 모방하는 일이고, 또 그의 책으로부터 직접 '이미지'를 불러내 온 것이긴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고 본다.


시간 여유를 가지는 방법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의 중심 주제는 '시간의 소실과 상실 뒤에 놓인 원인에 대한 탐색'이다. 그러나 프루스트가 자신의 책 제목을 두고 '오해받기 쉽다'고 말한 것처럼 '아름답고 서정적이던 시대의 추이를 추적하는 회고록'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오히려 이 작품은 어떻게 하면 '시간의 낭비를 중지하고 음미할 수 있는 삶을 시작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래서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에 대해 쓴 소설을 기본 소재로 삼아 알랭 드 보통이 박학다식하고 장난스러울 정도로 아이러니컬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시 들려주는 '음미하는 삶을 사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림 1> 한 문장

 

마치 뱀처럼 길게 늘어진 위의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저건 '무려 4미터에 이르고, 웬만한 와인 병의 아랫부분을 17번은 충분히 감을 수 있을 정도'로 긴 '한 문장'이다. 프루스트 소설의 몇 가지 거북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문장 하나하나의 어마어마한 길이인데, 그걸 그림으로 그려 놓으니 마치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에 나오는 보아뱀 그림을 보는 것처럼 흥미롭기만 하다.

의사였던 프루스트의 동생이 말한 것처럼 "한 가지 슬픈 일은 사람들이 아주 많이 아프거나, 아니면 다리가 부러지거나 하기 전에는『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 말고도 우리는 또하나의 도전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저토록 긴 문장들을 마주 대하는 어려움 말이다.

프루스트는 왜 '잠들기 전에 침대에서 어떻게 뒤척이고 돌아눕는지를 묘사하기 위해 무려 30쪽이나 할애하는' 파격을 시도했을까. 그건 어떤 경험을 전달하기 위한 문장에서 단어의 적절한 개수를 규정하는 길이의 근본 법칙을 무시하는 것으로부터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잠들기에 관해서 무려 30쪽이나 쓰도록 프루스트를 인도한 정신'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생각보다 너무 만연되어 있고 뿌리가 깊다.

<그림 2> 기차시간표 

 


그는 일생의 마지막 8년 동안을 파리를 떠나지 않았는데, 저 시간표를 마치 시골생활에 관한 흥미진진한 소설처럼 읽고 즐겼다고 한다. '취향이 고상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시시하기 짝이 없을 이 인쇄물에는 그가 어린 시절 이래로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름들이 가득한 까닭에, 그에게는 훌륭한 철학책보다도 훨씬 더 큰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럼으로써 그는 우리에게 충고한다.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자신은 할 '시간이 없음'을 이유로 들어 '바쁜' 사람들-그들의 일이 제아무리 어리석다고 하더라도-이 느끼는 자기만족'에 대항하라고.


성공적으로 고통받는 방법

프루스트의 삶은 한편으로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분별없는 극단적인 유대인 어머니의 문제("어머니에게 나는 항상 네 살짜리에 불과헀다"), 거북한 욕망(어릴 적부터의 동성애적 취향), 데이트의 문제들(여자친구들로부터의 숱한 퇴짜), 연극계 경력의 실패, 친구들의 몰이해(천재에게는 전형적인 문제), 그 밖의 신체적 고통(천식, 식단의 애로, 소화불량, 과민성 피부, 추위, 기침, 침대에서 나오기 싫어함, 이웃의 소음, 다른 질환들(감기,발열,시력 감퇴, 치통, 팔꿈치 통증, 현기증), 타인의 불신) 등등.

"행복은 몸에 좋지만, 정신의 강인함을 발달시켜주는 것은 바로 슬픔이다"라는 그의 말에 담긴 암시로부터 생겨난 말은 '프루스트적 자극'이다.

가령 자동차가 잘 움직인다면, 무슨 이득을 바라고 우리가 굳이 그 기계의 복잡한 내부 작동에 관해서 배워야 할까? 연인이 충성을 맹세한다면, 우리가 왜 굳이 인간의 배신행위의 역학에 관해서 숙고해야 할까? 우리의 모든 만남을 존중해야 한다면, 왜 우리가 사회생활의 굴욕에 관해서 조사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게 될까? 우직 슬픔 속에 빠졌을 때에야만 비로소 우리는 어려운 진실에 맞서고자 하는 프루스트적인 자극을 받게 된다. 우리가 이불 밑에서 울부짖을 때,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도 같을 때에야 비로소.(96쪽)


 

걸작의 창조라는 야심이 전혀 없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보다 성공적으로 고통을 체험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비록 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행복의 추구에 관심을 기울여왔지만, 사실은 적절하고도 생산적으로 불행해지는 방법을 추구하는 쪽에 훨씬 더 큰 지혜가 놓여 있는 것만 같다. 불행의 끈덕진 반복은 이 문제에 대한 어떤 효과적인 접근방식이야말로 행복을 향한 모든 유토피아적 추구의 가치를 거뜬히 능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슬픔의 베테랑이던 프루스트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100쪽)


 "온전한 삶의 기술이란 우리에게 고통을 일으키는 개인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 슬픔이 생각으로 바뀌는 바로 그 순간, 슬픔은 우리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는 그 능력 가운데 일부를 잃어버린다." 프루스트의 말이다.

알랭 드 보통이 이 책의 제4장 '성공적으로 고통받는 방법'의 말미에서 주장하는 '교훈'은 이렇다.
 

타인이 얘기치 못한 그리고 상처가 되는 행동을 했을 경우, 단순히 안경을 닦는 것보다는 더한 뭔가로 반응하라는 것, 다시 말해서 그 행동을 우리의 이해를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로 바라보라는 것이다. 비록 프루스트가 우리에게 경고한 것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의 진정한 삶을, 그러니까 보이는 세계 아래에 있는 현실 세계를 발견할 때, 우리는 마치 평범한 외관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감춰진 보물과 고문실, 또는 해골이 가득 찬 집에 들어갔을 때처럼 상당한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116쪽)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

프루스트를 가장 짜증나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던 클리셰의 문제였다. 

 

클리셰의 문제란, 그것들이 잘못된 생각을 담고 있다는 점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매우 좋은 생각의 피상적인 연결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해질녘에 해는 종종 불타는 듯하고, 달은 은은하게 마련이지만, 만약 우리가 해나 달을 볼 때마다 번번이 그렇다고 말한다면, 결국 우리는 이것이야말로 그 대상에 관해서 이야기되는 최초의 말이 아니라 최후의 말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클리셰가 유해하지 않은 경우는, 그것들이 표면만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어떤 상황을 적절하게 묘사하는 것처럼 믿도록 우리에게 영감을 제시했을 때뿐이다.(124쪽)



좋은 친구가 되는 법

프루스트가 죽고 난 뒤 (상당히 많았던) 그의 친구들은 한 목소리로 프루스트야말로 교우관계의 모범이었으며, 우정의 화신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그는 '우정은 피상적인 노력'에 불과하며, "우리가 치유 불가능할 정도로 혼자는 아니라고 믿게 만들려고 하는 거짓말'이라고 봤다. 그리고 대화 역시 쓸모없는 활동이라고 치부하며 "우리가 평생 동안 아야기를 한다고 해도, 어쩌면 단 일분의 공허함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프루스트는 실제로 우정을 비호하는 예찬 위주의 주장들에 도전했고, 그건 앞에서 언급했던 1922년에 있었던 '제임스 조이스와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두 사람은 그날 저녁식사 후에 택시에 올라탔는데, 동승한 내내 그들은 서로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고, 프루스트의 아파트가 있는 아믈랭 거리에 도착하자, 프루스트는 동승했던 다른 만찬 주최자한테 "조이스씨께 이 택시로 집까지 모셔다 드려도 괜찮겠느냐고 여쭤봐주세요."라고 말을 건넸고, 택시는 부탁받은 대로 떠났으며, 그 이후 두 사람은 두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대화는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를 표현하는 장으로 보았을 때' 너무나 많은 한계를 지닌 셈이다. <저자와의 대화>를 너무 기대할 필요는 없다는 게 저자의 주장인 셈이다.


<그림 3> 저자와의 대화



프루스트가 1913년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1권을 간행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 작품이 그렇게 어머어마한 분량이 되리라고는 그 자신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던 건 잘 알려진 일화다. 그는 애당초 3부작이 될 것이라고 행각했지만 '말하고 싶은 새로운 것들을 상당수 발견'했고 결국에는 원래의 50만 단어가 100만 단어 하고도 25만 단어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일찍이 그가 완벽하다고 판단했던 요점들은 그가 들여다보자마자 다시 써달라고 또는 새로운 이미지나 은유를 이용하여 잘 다듬거나 더 발전시켜달라고 울부짖는' 듯했고, 그래서 결국 원고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림 4> 원고 ①




<그림 5> 원고 ②




프루스트는 친구와 사귀는 일과 독서 활동 모두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과 연관되어 있는 점에 주목하여 우정을 독서에 비유한 적이 있는데, 친구가 아주 많았던 그도 '우정의 한계'를 깊이 인식하게 되면서 '독서 쪽에 핵심적인 이익이 있다'고 보았다.

<그림 6> 원래의 순수성 




<그림 7> 종이책과의 소통



눈을 뜨는 방법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바라봄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행복이야말로 프루스트의 치료 개념에서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우리의 불만이 각자의 삶에 본래적으로 결여되었던 무엇인가의 결과가 아니라, 다만 우리가 각자의 삶을 적절하게 바라보기에 실패한 결과일 가능성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인지를 밝혀준다. (193∼194쪽)



<그림 8> 프루스트의 핵심적인 구분


<그림 9> 전혀 다른 이미지에 근거해서 판단을 내리기 때문




<그림 10> 미숙한 화가의 봄그림



사랑 안에서 행복을 얻는 방법

우리가 프루스트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과 행복'을 얻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심리적으로 너무나 빠지기 쉬운 '친숙한 것을 경멸하게 될 가능성'을 피하라는 것이다. (순전히 내 방식대로 진부하게 말하면) '결핍'을 겪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애써 간절히 소망하던 온갖 다양한 대상들 혹은 목표들을 이루고 난 뒤에 우리가 그 친숙한 대상들로부터 '눈을 떼는 속도'는 참으로 놀랄 만하다. 하이데거式으로 말하자면 '호기심의 무정주성'을 주의하라는 것이다.

호기심의 무정주성(無定住性)

그러나 자유롭게 된 호기심은 본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시 말해서 그것에 대한 존재에 이르기 위하여 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기 위해서 보려고 애쓴다. 호기심이 새로운 것을 찾는 이유는 그 새것에서 다시금 새로운 새것으로 뛰어들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봄의 염려에서 중요한 것은, 파악하여 알면서 진리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세계에 맡겨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러기 때문에 호기심은 특이하게 가까운 것에는 머물지 않는 특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호기심은 또한 고찰하며 머무는 여가도 추구하지 않으며, 언제나 새것과 만나는 것을 계속 바꿈으로써 생기는 동요와 흥분을 찾는다. 호기심은 아무 데도 머무르지 않음으로 해서 부단히 산만함[부산함]의 가능성을 배려한다. 호기심은 존재자를 경탄하면서 고찰하는 것, 즉 타우마체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호기심의 관심사항은 경이에 의해서 이해하지 못함에 인도되는 것이 아니다. 호기심은 앎을 배려하는데, 순전히 안 것으로 간주하기 위해서이다. 호기심을 구성하는 두 계기, 즉 배려된 주위세계에 머물지 않음과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산만함[부산함]은 이 현상의 세번째 본질성격의 기초를 부여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무정주성(無定住性)이라고 이름한다. 호기심은 도처에 있으면서 어디에도 없다. 세계-내-존재의 이러한 양태는 일상적 현존재가 그 안에서 끊임없이 뿌리 뽑히고 있는 그런 새로운 존재양식을 드러낸다.

  -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中에서


어쩌면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친숙함 때문에 잊어버리거나 진짜로 잃어버린 소중한 대상들'을 찾을 수 있도록 환기해 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림 11> 창백한 모사품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한참 동안이나 여러가지 생각에 잠겼던 부분도 바로 이 대목이었다. 프루스트가 말하고 싶어했던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소중한 대상들'을 떠올리게 하는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내가 그토록 애써 가지려 했던 그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 나는 지금 얼마나 까마득히 먼 과거의 일처럼 잊고 지내왔는지, 혹은 얼마나 당연시 여기며 살고 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런 대상들은 가령 (진부한 표현으로 되돌아와) 내차, 내집, 내방,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 나만의 서재, 일자리, 내 계좌의 잔고뿐만은 아니다. 오히려 훨씬 더 소중한 대상들은 정작 나의 아내와 아이들, 나의 부모님과 형제들, 그리고 늘 함께 웃고 떠들 수 있는 소중한 친구들과 이웃들일 것이다.


<그림 12> 현존하는 어떤 것 




<그림 13> 거짓된 친숙함 




<그림 14> 음미와 부재간에 맺어진 관계




우리는 뭔가를 사기 전에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을 거듭해야 했던가에 따라 그것을 성취했을 때 뒤따르는 만족감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프루스트 역시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지연에 수반되는 이익'을 예시했다. 알베르틴과 게르망트 공작부인은 모두 패션에 관심이 있었고, 알베르틴은 돈이 없었고, 공작부인의 옷장에는 옷이 넘쳐흐를 지경이었다. 그 결과 알베르틴은 비록 옷은 더 적었을지 모르지만, 옷에 대한 이해나 음미나 사랑은 훨씬 더 컸다.

<그림 15> 부가 욕망을 성취시키는 속도



책을 내려놓는 방법

알랭 드 보통이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책을 내려놓는 방법'이다. 프루스트의 얘기를 먼저 들어보자.

······ 사람이 무엇을 스스로 느끼는지를 자각하게 되는 방법으로 말하자면, 어떤 거장이 어떻게 느꼈는지를 스스로 재창조하려고 시도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이런 심오한 노력에서는 우리가 그의 생각과 함께 빛 속으로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생각 그 자체이다.(246쪽)

알랭 드 보통의 생각은 어떤가. 그는 말한다. '책이 우리를 눈뜨게 해주고, 우리를 예민하게 만들고 , 우리의 지각 능력을 향상시켜줄지는 모르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그런 작용은 중지되고 만다. 이런 중지는 우연에 의한 것도, 가끔 그런 것도, 운이 나빠서 그런 것도 아니며, 다만 불가피한 것이고, 오히려 자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는 우리가 아니다라는 순전하고도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독서와 학문 전반에 '어딘가 속박된 차원'이 있다는 것이고 프루스트는 이 점을 제대로 인식했다. 그래서 좋은 책의 저자에게 '결론'이라고 불릴 수 것들이 결국 독자들에게는 다만 '자극'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림 16> 자극에 불과한 것


이 말에 대한 알랭 드 보통의 부연 설명은 이렇다. '책이라는 것이 우리가 느끼는 특정한 사물을 자각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프루스트는 이런 대상에 대한 우리의 삶을 해석하는 일 전체를 순순히 내팽개치고 싶은 유혹이 얼마나 큰지를 인식했던 것'이라고. 따라서 우리는 책을 주의깊게 읽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우리의 독립성을 예속시키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지나치게 의존적인 독자'가 될 수밖에 없고, '일리에 콩브레를 방문하고 싶은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된다.

우리가 방문해야 할 곳은 일리에 콩브레가 아닐 것이다. 프루스트에게 바치는 진정한 경의는 그의 눈으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 우리의 눈으로 그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아닐 테니까.(272쪽)



십 년쯤 전에 가족과 함께 피렌체에 갔을 때 단테의 생가를 가본 적이 있었다. 나는 거기서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사실 아무것도 보고 느낀 게 없었다. 정작 단테를 제대로 만난 건 그로부터 몇 년 후『신곡』을 온전히 다 읽고 나서였다. 무려 100곡에 달하는 대서사시의 서곡인 제1곡을 펼치면 어두운 숲 속에서 헤매는 주인공 단테가 등장한다. 그런데 천국을 향한 머나먼 여정을 시작한 그에게는 다행히도 친절한 안내자 베르길리우스가 곁에 있었다. 그런데 그 서사시의 주인공인 단테는 '죽어서'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다닌 것이 아니다. 우리처럼 생생히 살아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또다른 세계를 두루 여행한 것이다. 단테는 그걸 통해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역시 프루스트가 창조해 낸 또다른 세계이다. 그가 만들어낸 낯선 세계로 불쑥 들어서기가 조금은 두려운 나같은 사람에겐 이 책의 저자 알랭 드 보통이 어둠 속 베르길리우스처럼 반갑기 그저없는 훌륭한 안내자인 셈이다. 나는 아직 프루스트의 소설 마지막 제7부「되찾은 시간」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까마득한 길을 내 앞에 남겨두고 있지만 이제 그리 머지않아 잃어버린 무엇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프루스트가 만든 가상의 마을 콩브레로 나볼 생각이다.

이쯤에서 책들을 다 내려놓고 다시 되돌아 보는 '나의 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이 책의 저자가 그토록 강조했던 클리셰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소설가는 언어를 통해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위대한 소설가는 그들만의 언어로 우리가 무심결에 놓치고 마는 삶의 온갖 다양한 측면들을 끊임없이 부각시킨다. 그런 소설가들 가운데 프루스트는 분명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눈부신 역작을 우리에게 남겼다. 그러나 내가 최근에 만난 철학자 베르그송은 '언어 예술'이 지니는 '통약 불가능한' 대목을 기어이 지적하고 만다. 그것이 철학자의 임무일 것이고 프루스트 또한 그점을 절실히 인식하면서 자신의 소설을 써나갔을 것이다. 결국, 도대체 낯선 단어인 Cliché와 incommensurable이라는 두 단어가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 이처럼 우리들 각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나름의 방식이 있으며, 그러한 미움과 그러한 사랑은 인격 전체를 반영한다. 그러나 언어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동일한 말로 그런 상태를 지시한다. 따라서 그것은 사랑, 증오, 그리고 영혼을 흔드는 수천의 감정들의 객관적이고 비개성적인 면만을 고정할 수 있을 뿐이다. 소설가는 다수의 세부들을 병렬함으로써 감정과 관념들에 그들의 원시적이고 살아 있는 개성을 되돌려 주려고 애쓰는데, 우리는 그 감정과 관념들을 공공의 영역-언어가 그처럼 그것들을 내려가게 했던-으로부터 끌어내는 힘에 의해 그의 재능을 판단한다. 그러나 한 운동체의 두 위치 사이에 점들을 무수히 끼워 넣어도 지나간 공간을 결코 메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말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관념들을 서로 연계시키며 그 관념들이 상호 침투하지 않고 병치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느끼는 것을 완전히 번역하는 데 실패한다. 즉, 사유는 언어와 통약 불가능한incommensurable 것으로 남는다.
  -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中에서


 




 
 
 
머나먼 사마르칸트 ①
실크로드를 지나며......
나는 걷는다 2 - 머나먼 사마르칸트
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 고정아 옮김 / 효형출판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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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기만 바란다면, 역마차를 집어타고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여행을 하고자 한다면, 걸어가야 한다." 장 자크 루소가 그의 저작《에밀(Emile)》에서 한 말이다. 나도 '도착하기' 만을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어디에 도착한다는 말인가?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늘 얘기했던 것처럼, '가는 것' 그 자체다.


- 베르나르 올리비에, 『여행』수채화판 실크로드 여행수첩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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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유난히 휴일이 잦았던 시기를 이용하여 몇몇 친구들과 함께 우즈베키스탄과 사마르칸트를 다녀올 수 있었다. 4박6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중앙아시아로의 여행은 처음이었고, 특히 그 유명한 '실크로드'의 중심지 '사마르칸트'를 가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설레는 가슴'을 억누르기 힘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중앙아시아와 우즈베키스탄과 실크로드 등에 대해서 그저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었던 터여서, 여행을 떠나기 전에 '미리' 예습이라도 해 둘 작정으로 이리 저리 인터넷을 뒤적거리다가 발견한 책이 바로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3부작과 『여행』수채화판 실크로드 여행수첩이라는 책이었다. 한꺼번에 4권의 책을 인터넷으로 주문했지만, 정작 여행을 떠날 때까지 책을 전혀 펼쳐볼 시간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여행을 떠날 때 챙겨간 책이『나는 걷는다』2 - 머나먼 사마르칸트와 『여행』수채화판 실크로드 여행수첩의 두 권이었다. 수채화판 실크로드 여행수첩은 말 그대로 '수채화'가 많이 담겨 있어서 금방 읽을 수 있었는데,『나는 걷는다』2 - 머나먼 사마르칸트는 제법 두툼한 편이어서 타슈켄트로 가는 비행기에서 뿐만 아니라,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까지 내내 읽었었다.

아무리 기자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직장에서도 은퇴한 이후인 60대의 나이에 무모하리만치 도전적인 '도보여행'을 감행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고, 저자의 고집스런 열정이 한편으로는 부럽기 까지 했다. 우린 올리비에보다 훨씬 더 젊었지만 '실크로드'를 비행기와 기차와 자동차를 이용해서 찾아갔을 뿐이다.

30여년 간 기자로 일하며 숨가쁘게 살아온 저자가 퇴직한 후에도 쉬면서 편히 보내기를 거부하면서 '걷기' 위해 선택한 코스는 이스탄불과 중국의 시안을 잇는 신비의 실크로드였다. 그는 총 4년에 걸쳐서 무려 11,000 km를 도보로 걸었다. 이 여행이 4년이나 걸린 이유는 그가 통과해야 하는 사막이 겨울엔 통행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저자는 실크로드를 여행하면서 노트에 기록한 여행 기록을 파리로 되돌아 온 후 정리하여 책으로 펴 냈는데, 그것이 『나는 걷는다』3부작 시리즈이다. 저자는 여행기록을 읽어보면 '실크로드'를 도보로 여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금새 알아차릴 수 있다. 아무나 '체력만 있으면' 걸을 수 있는 무슨 '산티아고 가는 길' 같은 곳과는 차원을 달리 한다는 얘기이다. 어쨌든 저자는 불굴의 의지로 그 험난하고도 머나먼 길을 '도보'에만 의지해서 완수해 낸다.

그는 왜 그토록 험난한 여정을 걸어갔을까? 그의 책 속에는 그 이유들이 시도때도 없이 수시로 등장한다.

"나는 인간의 눈높이에서 만들어진 세계로 되돌아가려는 것이다. 걸음으로써 시선을 올바른 차원으로 되돌리고 시간을 다스리는 법을 익힐 수 있다. 걷는 사람은 왕이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데는 고통을 당하지만, 좀더 잘 살기 위해서 조립식 소파보다 넓은 공간을 선택한 왕 ······. 나는 내 안에 차곡차곡 쌓였던 제약과 두려움에서 내 머리와 몸을 해방시키고 싶었다."


인생을 좀 더 깊이있게 살고 싶은 '갈증'을 느끼는 많은 현대인들에게 올리비에의 이 책은 많은 생각과 용기를 불러 일으키게 만들 것임에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목차 바로 뒤에 나오는 멋진 시를 하나만 더 인용하고 싶다.


인생의 대상隊商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라,
매 순간 환희를 맛보라!
오, 사키여, 내일의 양식을 걱정하지 마라,
잔을 돌려 포도주를 붓고, 내 말을 들어라, 밤이 가고 있다.

- 오마르 하이얌



 
 
 
나는 걷는다 2 - 머나먼 사마르칸트
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 고정아 옮김 / 효형출판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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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평 내일 오후에 타슈켄트로~ 며칠뒤엔 사마르칸트에 도착할 것이다. 흥분과 설렘!!


 
 
애티커스 2011-05-05 13:37   댓글달기 | URL
엇, 정말요? 정말 설레이시겠습니다.
한동안 못 뵙겠군요. 잘 다녀오시고,
나중에 여행기 읽어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 언제나 꼬옥~ 안아주고 싶은 책이다.
   어느 봄날이나 가을 혹은 겨울이라도 좋겠다. 햇살만 따스하다면.
   이 책을 들고 고요한 호숫가에 나가 소로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해가 저물도록......




- 밑줄을 치지 않은 페이지가 없을 정도로 정말 줄을 많이 치며 읽었던 책이다.



- 자발적인 빈곤, 소박하고 독립적인 삶......



"한 방울의 식초 안에 사는 괴균들을 연구하면서 자기의 주위에서 우글거리는 괴물들에게
 자신이 잡아먹히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 그는 당장 다락방에 올라가 시를 쓰기 시작했어야 했다.



- 뉴스......



- 독서를 잘하는 것



- 한 권의 책과 '새로운 기원'



- 더 현명한 사람들과 사귀기를 갈망한다.



- 우정......



- 자연......



- 9월이나 10월의 이런 날 월든 호수는......



- 물아일체



- 지평선을 송두리째 차지하고도......



- 산토끼와 꿩들......



- 북소리......



- 이 시대가 지나가는 동안......



- 월든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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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첨 : 밑줄긋기>



진흙수렁, 빚, 남의 놋쇠

여러분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얼마나 누추하고 비루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는 경험에 의해 날카로워진 나의 눈에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인다. 여러분은 새로운 사업을 시도하고 빚을 청산하려고 노력하지만 은행에서 빌린 돈은 항상 대부 상한선까지 와 있다.빚이란 태곳적부터 있는 진흙수렁인데, 놋쇠로 만들어 썼던 로마 사람들은 이것을 "남의 놋쇠"라고 불렀다. 여러분은 살아 있기는 하지만 이 "남의 놋쇠"에 묻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으며 항상 빚을 갚겠다고, 내일은 꼭 갚겠다고 약속하지만 끝내 갚지 못하고 오늘 죽는 신세이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갖은 애를 쓰며, 형무소에 갈 죄만 빼놓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고객을 확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P14)


돈을 벌려고

이처럼 여러분은 병들 때를 대비하여 돈을 벌려고 무척이나 애를 쓴다. 그 돈을 보관할 장소가 낡은 장롱이든, 벽 뒤에
숨겨 둔 양말짝이든, 또는 보다 안전한 벽돌로 지은 은행이든 관계없으며, 금액도 크든 작든 관계없다. 그러나 돈을 벌려고 너무나 무리를 한 결과 끝내 여러분은 병이 들고 마는 것이다.(P15)


자발적인 빈곤

사치품과 편의품에 대한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가장 현명한 사람들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보다도 더 간소하고 결핍된 생활을 해왔다. 중국, 인도, 페르시아 및 그리스의 옛 철학자들은 외관상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가난했으나 내적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부유한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어쩌면 지금만큼이라도 아는 것이 대단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들보다 후대에 살았던 인류의 개혁자들과 은인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으리라. '자발적인 빈곤'이라는 이름의 유리한 고지에 오르지 않고서는 인간 생활의 공정하고도 현명한 관찰자가 될 수 없다. 농업, 상업, 문학, 예술을 막론하고 불필요한 삶의 열매는 사치일 뿐이다.(P26)


소박하고 독립적인 삶

오늘날 철학교수는 있지만 철학자는 없다. 삶다운 삶을 사는 것이 한때 보람있는 일이었다면 지금은 대학 강단에 서는 것이 그렇단 말인가?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심오한 사색을 한다거나 어떤 학파를 세우는 일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고 그것의 가르침에 따라 소박하고 독립적인 삶, 너그럽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자가 되는 것은 인생의 문제들을 그 일부분이나마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뜻한다. 위대한 학자들과 사상가들의 성공은 군자답거나 남자다운 성공이 아니고 대개는 아첨하는 신하로서의 성공이다.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타협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기 때문에 보다 고귀한 인간류의 원조는 될 수 없는 것이다.(P26)


투박한 일에서 여가를 얻어 인생의 모험을 떠나는 것

이미 말한 여러 방법으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나면 사람들은 그 다음에는 무엇을 바라겠는가? 같은 종류의 열을 더 바라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즉 더 풍부하고 기름진 음식, 더 크고 화려한 집, 입고 남을 정도의 더 좋은 옷, 끝없이 타오르는 더 뜨거운 불 따위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생활필수품을 마련한 다음에는, 여분의 것을 더 장만하기보다는 다른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바로 먹고 사는 것을 마련하는 투박한 일에서 여가를 얻어 인생의 모험을 떠나는 것이다.(P27)


현재의 순간

어떤 날씨건 낮과 밤의 어떤 시간이건, 나는 그 시점을 최대한 선용하고 나의 지팡이에도 새겨놓으려고 했다. 과거와 미래라는 두 개의 영원이 만나는 바로 이 현재의 순간에 서서 줄을 타듯이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다.(P28)


과대평가

사람들이 찬양하고 성공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삶은 단지 한 종류의 삶에 지나지 않는다. 왜 우리는 다른 여러 종류의 삶을 희생해가면서까지 하나의 삶을 과대평가하는 것일까?(P33)


허수아비

우리는 사람은 몇 알지 못하나 외투나 바지는 무던히도 많이 알고 있다. 당신이 마지막 입었던 옷을 허수아비에게 입혀놓고 그 옆에 알몸으로 서 있어보라. 그러면 누구나 당신보다는 허수아비에게 먼저 인사를 할 것이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어느 개는 낯선 사람이 옷을 입고 주인집 가까이에 오면 짖어댔으나 발가벗고 침입한 도둑에게는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자기의 헌 옷, 헌 외투가 너무 낡아서 원래의 구성 재료로 되돌아가는 것을 실제로 본 사람이 있는가? 그래서 그 외투를 불쌍한 아이에게 주는 것이 결코 자비로운 행동이 되지 못할 정도의 외투 말이다. 옷을 새롭게 입는 사람보다는 새 옷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업을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싶다.(P37)


자연적인 동경

우리는 인류의 초창기에 진취적인 누군가가 바위 굴로 기어들어가 그곳을 집으로 삼았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어느 면에서 아이들은 그 하나하나가 인류사를 다시 시작한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들은 비가 오거나 날씨가 추워도 밖에 나가 있기를 좋아한다. 아이들은 말놀이나 집놀이를 하는데 그것은 그러한 놀이에 대한 본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평평한 바위나 동굴의 입구를 보고도 흥미를 느끼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그것은 우리의 가장 원시 때의 조상이 아직도 우리 좀에 살아 있어 느끼는 자연적인 동경의 감정인 것이다.(P44)


본말전도

수레를 말 앞에 매는 식의 본말전도는 아름답지도 않고 실용적이지도 않다.(P58)

(나의 생각)
최근에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북한 핵 문제 해결'에 관해 언급하면서 인용한 인상깊었던 서양 속담



인생 공부


젊은이들이 당장에 인생을 실험해보는 것보다 사는 법을 더 잘 배울 수 있는 방법이 또 있겠는가? 그렇게 하면 수학 공부만큼이나 그들의 정신을 단련시키게 될 것이다. 가령 한 소년에게 예술과 과학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치고 싶다면 나는 그 아이를 어떤 교수가 있는 곳으로 보내는 식의 흔해빠진 방법은 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강의되고 실습되지만 삶의 예술은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망원경이나 현미경으로 세계를 관찰하는 법은 가르치지만, 육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는다. 화학은 공부하되 자기의 빵이 어떻게 구워지는가는 배우지 않으며, 기계학은 배우되 빵은 어떻게 버븐가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는다. 해왕성의 새로운 위성은 발견해내지만, 자기 눈의 티는 보지 못하며 또한 자기가 지금 어떤 악당의 위성 노릇을 하고 있는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한 방울의 식초 안에 사는 괴균들을 연구하면서 자기의 주위에서 우글거리는 괴물들에게 자신이 잡아먹히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P75)

(나의 생각)
 
로버트 루트번스타인생각의 탄생에 나오는 내용과 너무나도 흡사한 것 같다.


여행 의욕


물론 오래오래 살아서 차비라도 벌어놓은 사람은 언젠가는 기차를 타게 되겠지만 그때는 활동력과 여행 의욕을 잃고 난 다음일 것이다. 이처럼 쓸모없는 노년기에 미심쩍은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인생의 황금 시절을 돈 버는 일로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 고국에 돌아와 시인 생활을 하기 위하여 먼저 인도로 건너가서 돈을 벌려고 했던 어떤 영국 사람이 생각난다. 그는 당장 다락방에 올라가 시를 쓰기 시작했어야 했다.(P78)

(나의 생각)
최근 미국 동부지방과 캐나다를 여행하던 중에 현지 가이드가 했던 말인 즉슨, '다리 떨릴 때 여행 다니지 말고 가슴 떨릴 때 열심히 여행다녀라'


피라미드

여러 민족들은 그들이 다듬어서 남긴 석재의 양으로 자신들에 대한 추억을 영구화하려는 광적인 야망에 사로잡혀 있다. 차라리 그만한 노력을 자신의 품행을 가다듬는 데 바쳤다면 어땠을까? 한 조각의 양식良識은 달까지 솟아오른 기념비보다 더 기릴 만한 것이 아닐까?

제발, 돌들은 제자리에 그냥 놓아두라. 테베의 장관은 천박한 장관일 뿐이다. 인생의 참다운 목적에서 멀어져버린 100개의 대문을 가진 테베의 신전보다는 어느 정직한 사람의 밭을 둘러싸고 있는 자그마한 돌담이 더 의미가 있다. 야만스럽고 이교도적인 종교와 문명은 화려한 신전들을 짓는다. 그러나 기독교, 참다운 기독교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한 민족이 다듬는 돌은 대부분 그들의 무덤으로 간다. 그야말로 그들은 스스로를 생매장하는 것이다.

피라미드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어떤 야심한만한 멍청이의 무덤을 만드느라고 자신들의 전 인생을 허비하도록 강요되었다는 사실 말고는 별로 놀라울 것이 없다. 차라리 그 작자를 나일 강물에 처박아 죽인 후, 그 시체를 개들에게 주어 뜯어 먹게 하는 것이 더 현명하고 당당했으리라.(P83)


(나의 생각)
2008년 2월에 이집트 일주여행 기회가 있어서 '테베'에 가 본 적이 있었다. 현재의 지명은 '룩소르'라고 불리는 도시인데, 이집트에 있는 여러 거대한 신전 가운데에서도 그 규모면에서 다른 신전들(아부심벨 대신전 등)을 압도하는 신전이 바로 테베에 있는 카르낙 신전이다. 이 신전은 18왕조의 아멘호테프 2세때부터 건설되기 시작해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이르기까지 무려 1,500년 동안 지어졌다고 하는데, 약 200년 전 쯤 나폴레옹 군대가 이 곳에 진주했을 때 신전 정문 쪽의 거대한 높이의 신전 벽 높이에 감동받아 여기에 '맞장'을 뜨기 위해 자신의 군대병력을 동원시켜 흙벽돌을 마주 쌓아 올렸던 흔적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기념비

많은 사람들이 동서양의 기념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누가 세웠는가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 시대에 그런 것을 세우지 않은 사람, 즉 그런 사소한 것을 초월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하는 것이다.(P85)



궁지

덫에 걸린 꼬리를 잘라내고 달아난 여우는 운 좋은 놈이었다. 덫에 걸린 사향쥐는 자유의 몸이 되기 위하여 세번째 다리라도 물어서 끊는다고 한다. 인간이 자신의 탄력성을 잃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얼마나 자주 궁지에 빠지는가? "여보시오, 선생! 외람된 말이지만 궁지에 빠진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오?" 당신이 예민한 관찰력의 소유자라면,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 뒤로 그가 소유하는 모든 것과 자신의 것이 아닌 척하는 물건들, 심지어는 부엌 가구와 그 외에 그가 계속 모아두면서 태워버리지 못하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것들에 묶인 채로 어떻게든지 앞으로 전진해보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을 것이다. 자신은 옹이구멍이나 출입문을 빠져나갔지만 썰매에 실은 자신의 가구와 짐은 문턱에 걸려 나오지 못할 때 나는 그가 궁지에 빠졌다고 말한다.(P95)


장사, 장삿속


나는 또 장사도 해보았다. 그러나 장사가 본궤도에 오르려면 10년 가량 걸리는 데다 그때쯤이면 나는 도덕적으로 파탄의 길을 걷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소위 사업이란 것에 성공하게 될까 봐 두려워하게까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장삿속은 모든 것을 망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하느님의 말씀을 취급하는 사업이라도 장삿속에 따르는 저주는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P100)


더 많은 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여가보다도 더 많은 여가가 생기면 어찌할 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현재의 일으르 곱절로 늘리라고 권하고 싶다. 그래서 빚을 다 갚고 자유의 증서를 얻을 수 있도록 말이다.(P101)


여력만 있다면


내가 아는 한 청년은 몇 에이커의 땅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는데 그는 '여력만 있다면' 나처럼 살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남이 내 생활양식을 그대로 따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 까닭은 그 사람이 내 생활양식을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나는 또 다른 생활양식을 찾아낼지 모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제각기 다른 인간들이 존재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각자가 자기 자신의 고유한 길을 조심스럽게 찾아내어 그 길을 갈 것이지, 결코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 또는 이웃의 길을 가지는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P102)


방해하는 것


젊은이는 목수나 농부나 선원이 되어도 좋으니,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짓만은 제발 삼가도록 하자. 항해하는 사람이나 도망치는 노예가 항상 북극성을 지켜보듯이 우리는 어떤 수학적인 점에 의해서만 방향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 그 점은 평생 동안 우리의 길을 가리켜주기에 충분한 지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일정한 시일 안에 항구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올바른 진로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P102)


'사람이 한가하면'

왜냐하면 속담에도 있듯이 사람이 한가하면 악마가 일거리를 찾아주니 말이다.(P104)


알 가치가 없는 것


우여곡절 끝에 당신이 어떤 자선 행동을 하게 되었다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 그것은 알 가치가 없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한 다음에는 묵묵히 구두끈을 매라. 숨을 돌린 다음에는 당신이 하고 싶은 자유로운 일에 착수하라.(P112)


삼나무처럼

"그러니 그대들도 덧없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칼리프들이 망한 다음에도 티그리스 강은 바그다드를 뚫고 길이 흐르리라. 그대가 가진 것이 많거든 대추야자처럼 아낌없이 주라. 그러나 가진 것이 없거든 삼나무처럼 자유인이 될지어다."
(페르시아의 시인 사아디가 쓴 《굴리스탄》에 나오는 대목) (P113)


많으면 많을수록


왜냐하면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람은 더 부유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P117)


바로 달려들지 말고

"농장을 살 때는 탐을 내서 바로 달려들지 말고, 먼저 그것을 머릿속에 넣고 이리저리 굴려보라. 그것을 살펴보는 데에 수고를 아끼지 말 것이며, 한 번 돌아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만약 그것이 좋은 농장이라면 자주 가서 보면 볼수록 더 마음에 들게 될 것이다." (고대 로마의 카도가 쓴 《전원생활론》중에서)(P121)

(나의 생각)

'주식'을 고르는 일과 무척이나 닮았다


탕왕의 욕조


중국 탕왕의 욕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날마다 그대 자신을 완전히 새롭게 하라. 날이면 날마다 새롭게 하고, 영원히 새롭게 하라.: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P127)


아침

태양과 보조를 맞추어 탄력 있고 힘찬 생각을 유지하는 사람에게 하루는 언제까지나 아침이다. 시계가 몇 시를 가리키든, 다른 사람들의 태도와 일이 어떻든 상관없다. 아침은 내가 깨어 있고, 내 속에 새벽이 있는 때이다.(P128)


인간의 능력

나는 의식적인 노력에 의하여 생활을 향상시키는 그 의심할 여지없는 인간의 능력보다도 더 고무적인 사실을 알지 못한다.(P129)


깊게 살기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보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으려고 했으니, 삶은 그처럼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정말 불가피하게 되지 않는 한 체념의 철학을 따르기는 원치 않았다.

나는 인생을 깊게 살기를, 인생의 모든 골수를 빼먹기를 원했으며, 강인하게 스파르타인처럼 살아, 삶이 아닌 것은 모두 때려 엎기를 원했다. 수풀을 폭 넓게 잘라내고 잡초들을 베어내어 인생을 구석으로 몰고 간 다음에, 그것을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압축시켜서 그 결과 인생이 비천한 것으로 드러나면 그 비천성의 적나라한 전부를 확인하여 있는 그대로 세상에 알리며, 만약 인생이 숭고한 것이라면 그 숭고성을 스스로 체험하여 다음다음번의 여행 때 그에 대한 참다운 보고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이 악마의 것인지 또는 신의 것인지 이상하게도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으며, 사람이 사는 주요 목적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영원한 기쁨을 얻는 것'이라고 다소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 같다.(P129∼P130)

(나의 생각)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의 삶이 내게는 '이상하게' 비쳐지는 느낌이 드는데, 소로우의 지적이야말로 내가 찾던 '해답'과 꼭 맞는 것 같다. 최근에(오래전부터 꼭 읽어보리라 마음먹었던) 단테의《신곡》을 읽어봤는데, 무신론자인 리뷰어의 세계관에 비춰봐도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영원한 기쁨을 얻는 것'에 너무 촛점이 맞춰져 있다는 데 대해 적지않이 실망을 느꼈다고 말하고 싶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제발 바라건대, 여러분의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일 것이며, 백 가지나 천 가지가 되도록 두지 말라. 백만 대신에 다섯이나 여섯까지만 셀 것이며, 계산은 엄지손톱에 할 수 있도록 하라.

간소화하고 간소화하라. 하루에 세 끼를 먹는 대신 필요하다면 한 끼만 먹어라. 백 가지 요리를 다섯 가지로 줄여라. 그리고 다른 일들도 그런 비율로 줄이도록 하라.(P132)


뉴스

하룻밤을 자고 나면 뉴스는 아침 식사만큼이나 필수불가결한 것이 된다. "제발 이 세상 어디서 그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든 관계없으니 무슨 새로운 일이 있었으면 알려주오." 하며, 그는 커피와 롤빵을 들면서 신문을 읽는다. 그가 읽는 뉴스는 와치토 강변에서 어떤 사람이 싸우다가 눈을 뽑혔다는 소식인데, 그 자신이 이 세상이라는 어둡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동굴에 살고 있으며, 자신도 퇴화되어서 흔적뿐인 눈 하나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꿈에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P135)

뉴스가 도대체 무엇인가? 그보다는 시간이 지나도 낡지 않는 것을 아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위나라의 대부 거백옥은 공자에게 사람을 보내 근황을 물었다. 공자는 사자를 자기 옆에 앉히고 그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그대의 주인은 지금 무엇을 하시는가?" 사자는 공손히 대답했다. "저의 주인은 스스로의 허물을 줄이려고 하시지만 여의치 않사옵니다." 사자가 간 다음에 공자는 말했다. "좋은 사자로다! 참 좋은 사자로다!"(P137)

(나의 생각)
우리는 매일 매일 정말 너무나도 '쓸데없는 뉴스'들에 함몰되어 지내는 것 같다. 일주일이나 혹은 열흘쯤 '온갖 뉴스와 핸드폰'으로부터 해방되어 마음껏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마친 후, 불쑥 귀국편 비행기를 올라타보면 국내 신문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는 뉴스들은 '이게 정말 내게 무슨 의미람'하고 느껴지는 내용들이 너무나 많다. 특히 신문의 여러면에 걸쳐 도배된 특정의 정치적인 현안이나 이슈들은 '내 삶의 본질에 비춰봐서는 정말 너무나도 무의미해서' 어이없이 느껴지는 경우들도 많았던 것 같다.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뉴스전달 매체들이 넘쳐나는 현대에 와서는 특히 '뉴스의 홍수'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겠지만, 엘빈 토플러의 지적처럼 '쓰레기 정보'들을 얼마나 빨리 치우거나 무시할 수 있는가 하는 것도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삶의 요령'일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해보게 된다.


참된 현실의 그림자


만약 우리가 필연적인 것과 당연히 존재할 권리가 있는 것만을 존중한다면 음악과 시가 거리에 흘러넘칠 것이다. 우리가 서두르지 않고 분별력을 발휘할 때, 오직 위대하고 가치 있는 것들만이 항구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며, 사소한 두려움이나 사소한 쾌락은 참된 현실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숭고한 진리는 항상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P138)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진실

사람들은 진리가 멀리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진리가 우주의 외곽 어디에, 가장 멀리 있는 별 너머에, 아담의 이전에, 혹은 최후의 인간 다음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영원 속에는 진실하고 고귀한 무엇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시간과 장소와 사건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느님 자신도 현재의 순간에 지고의 위치에 있으며, 과거와 미래를 포함하여 그 어느 시대도 지금보다 더 거룩하지는 않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진실을 계속적으로 흡입하고 그 안에 적셔짐으로써만 비로소 숭고하고 고결한 것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P139)


종이 울린다고 해서 우리가 뛰어갈 이유가 있는가?

긴장을 풀지 말고 아침의 기백을 그대로 가지고, 율리시스처럼 돛대에 몸을 묶은 채 외면을 하면서 그 소용돌이 옆으로 빠져나가자. 만약 기적이 울면 목이 쉴 때가지 울도록 내버려두자. 종이 울린다고 해서 우리가 뛰어갈 이유가 있는가? 우리는 이것들이 내는 음악 소리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볼 뿐이다.

이제 침착하게 자리를 잡고 작업을 시작해보자. 그리하여 의견, 선입관, 전통, 망상과 외양이라는 이름의 진흙 구덩이 속에 발을 넣고 아래로 뚫고 나가 지구를 덮고 있는 충적층을 지나서, 파리와 런던, 뉴욕과 보스턴과 콩코드를 지나고 교회와 국가, 시와 철학과 종교를 지나서 마침내 우리가 "바로 이것이야! 여기가 틀림없어!"라고 말할 수 있는 '진실'이라는 이름의 단단한 바위에 닿을 때까지 내려가 보자. 이제 거점을 마련했으면 홍수와 서리와 불 아래쪽으로 성벽이나 국가의 토대를 닦을 수 있는 장소, 안전하게 램프 기둥을 세울 수 있고 어쩌면 측량 계기를 하나 달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보자. 이 측량 계기는 '나일 강 계기'가 아니고 '진실의 계기'로서, 이것을 보고 거짓과 허식의 홍수가 때때로 얼마나 깊게 범람했던가를 후세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말이다.(P140)


태어나던 그날처럼

시간은 내가 낚시질하는 강을 흐르는 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 강물을 마신다. 그러나 물을 마실 때 모래 바닥을 보고 이 강이 얼마나 얕은가를 깨닫는다. 시간의 얕은 물은 흘러가 버리지만 영원은 남는다. 나는 더 깊은 물을 들이켜고 싶다. 별들이 조약돌처럼 깔린 하늘의 강에서 낚시를 하고 싶다. 나는 셈을 전혀 할 줄 모른다. 알파벳의 첫 글자도 모른다. 나는 태어나던 그날처럼 현명하지 못함을 항상 아쉬워한다.(P141)

 
'굴을 파는 기관'

지성은 식칼과 같다. 그것은 사물의 비밀을 식별하고 헤쳐 들어간다. 나는 필요 이상으로 나의 손을 바쁘게 놀리고 싶지 않다. 나의 머리가 손과 발이기 때문이다. 나는 최상의 기능이 머릿속에 있음을 느낀다. 어떤 동물이 코와 앞발로 굴을 파듯 나는 내 머리가 굴을 파는 기관임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나는 이 머리를 가지고 이 주위의 산들을 파볼 생각이다. 이 근처 어딘가에 노다지 광맥이 있는 것 같다. 탐지 막대와 엷게 솟아오르는 증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자, 이제부터 굴을 파내려 가야겠다.(P143)


불멸의 생명

직업을 선택하는 데 좀더 신중을 기한다면 아마 누구나 본질적으로는 연구가나 관찰자가 되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본성과 운명에 대해서는 누구나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손들을 위해 재산을 모으고, 가문이나 국가를 창설하고, 명성까지 얻는다고 해도 우리는 결국에는 죽게 되어 있다. 그러나 진리를 다루면 우리는 불멸의 생명을 얻게 되며 변화나 재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P143)

(나의 생각)
세네카의 책 인생이 왜 짧은가에서 본 내용과 닮았다.


내 속에 있는 옛 철학자

신의 입상立像에서 처음으로 베일의 한쪽을 들췄던 사람은 이집트 아니면 인도의 철학자였을 것이다. 그 떨리는 옷은 지금도 들춰진 채로 있으며, 그 영광의 장면은 아직도 내 눈에 선하다. 왜냐하면 옛날에 그처럼 대담하게 베일을 들췄던 사람은 철학자의 내부에 있던 바로 나 자신이었으며, 오늘 그 광경을 다시 그려보는 사람은 내 속에 있는 옛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그 옷 위에는 아직도 먼지 하나 내려앉지 않았다. 신의 입상이 들춰진 이래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고의 시간으로 승화시키는, 또는 승화시킬 수 있는 시간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것이다.(P143)

고전

때때로 사람들은 고전 연구가 더 현대적이고 더 실용적인 학문에게 자리를 내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탐구적인 학생은 그것이 어떤 언어로 쓰였고 얼마나 오래되었고 간에 항상 고전을 연구할 것이다. 고전이란 인류의 가장 고귀한 생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고전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유일한 신탁이며, 그 안에서 가장 현대적인 질문에 대하여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의 신탁이나, 도도나에 있는 제우스 신의 신탁도 밝히지 못한 해답들이 들어 있다. 고전 연구를 그만두는 것은 자연이 낡았다고 해서 자연 연구를 그만두는 것이나 다름없다.(P145)


독서를 잘 하는 것

독서를 잘 하는 것, 즉 참다운 책을 참다운 정신으로 읽는 것은 고귀한 '운동'이며, 오늘날의 풍조가 존종하는 어떤 운동보다도 독자에게 힘이 드는 운동이다. 그것은 운동선수들이 받는 것과 같은 훈련과, 거의 평생에 걸친 꾸준한 자세로 독서를 하려는 마음가짐을 요한다. 책은 처음 쓰여졌을 때처럼 의도적으로 그리고 신중히 읽혀져야 한다.(P146)


알렉산더와 일리아스

알렉산더 대왕이 원정을 나갈 때 귀중품 보관 상자에 《일리아스》를 항상 넣어 가지고 다녔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기록된 말은 역사적 유물 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것이다. 그것은 다른 어떤 예술 작품보다 더 우리에게 친밀감을 주며 동시에 더 큰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삶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예술 작품이다. 그것은 모든 언어로 옮겨질 수 있으며, 단순히 읽혀질 뿐만 아니라 실제로 모든 인간의 입으로부터 숨결처럼 토해질 수 있다. 즉 화포나 대리석으로 표현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생명의 입김으로 조각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고대인의 사상적 상징이 현대인의 말이 된다.(P148)


한 가문의 창시자

무식하고 냉소적인 장사꾼이 열심히 사업을 해서 바라고 바라던 여유와 자립을 이루면 그는 부와 유행의 사회에 일원으로 끼게 된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필연적으로, 더 높은 그러나 아직은 접근이 불가능한 지성과 천재의 사회 쪽으로 눈길을 돌리지만, 자기의 교양 부족을 통감하게 되며 많은 재산으로도 어쩔 수 없는 무력감과 공허함을 느낀다. 그러나 이때 그는 뛰어난 양식을 발휘하여 자기 자식들만큼은 스스로 부족하다고 뼈저리게 느끼는 지적 교양을 갖추게 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한 가문의 창시자가 되는 것이다.(P148)


고귀한 지적 운동으로서의 독서

사람들은 장부를 기입하고 장사에서 속지 않기 위해서 셈을 배운 것처럼 하찮은 목적을 위해서 읽기를 배운다. 고귀한 지적 운동으로서의 독서에 대해서 그들은 거의 또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그것만이 진정한 의미의 독서인 것이다. 자장가를 듣듯이 심심풀이로 하는 독서는 우리의 지적 기능들을 잠재우는 독서이며 따라서 참다운 독서라고 할 수 없다. 발돋움하고 서듯이 하는 독서, 우리가 가장 또렷또렷하게 깨어 있는 시간들을 바치는 독서만이 참다운 독서인 것이다.(P150)


더 현명한 사람들과 사귀기를 갈망한다.

나는 우리 콩코드 땅이 배출한 인물들보다 더 현명한 사람들과 사귀기를 갈망한다. 비록 그들의 이름이 이곳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내가 플라톤의 이름을 듣고도 끝내 그의 저서를 읽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플라톤이 바로 우리 마을 사람인데도 내가 그를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이며, 그가 바로 옆집 사람인데도 그의 말을 들어보지 못하고 그 말의 예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데 실상은 어떠한가? 플라톤의 《대화편》은 그의 영원불멸한 지혜를 담은 책이며 바로 옆 선반에 놓여 있는데도 나는 그 책을 거의 들추지 않는다.(P154)


무식하며 천박한 삶

우리는 버릇이 없고 무식하며 천박한 삶을 살고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책을 전혀 읽지 못한 사람의 무식과, 어린애들과 지능이 낮은 사람들을 위한 책만 읽는 사람들의 무식 사이에 그리 큰 차이를 두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고대의 위인들만큼 훌륭해져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이 얼마나 훌륭했던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우리는 소小인종이며, 지적인 비상에서 일간 신문의 칼럼 이상은 날지 못하고 있다.(P155)


한 권의 책과 새로운 기원

모든 책이 다 독자들만큼 따분한 것은 아니다. 어떤 책에는 어쩌면 우리의 현 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들이 들어 있을 가능성도 크다. 만약 우리가 이 말들을 정말로 듣고 이해할 수만 있다면 아침이나 봄보다 우리의 삶에 더 큰 활력을 줄 것이며, 우리에게 사물의 새로운 측면을 보여줄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을 읽고 자기 인생의 새로운 기원을 마련했던가! 우리의 기적들을 설명해주고 새로운 기적들을 계시해줄 책이 어떠면 우리를 위하여 존재할 가능성은 크다. 지금 내가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어느 책에 표현되어 있을지 모른다. 우리를 당혹하게 하고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며 우리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문제와 똑같은 문제들이 일찍이 모든 현명한 사람들에게도 제기되었다. 한 문제도 빠짐없이 말이다. 그리고 이들 현인들은 저마다 이 질문들에 대해 해답을 제시했다. 자기 능력에 따라, 또 자기 고유의 언어와 생활 방식으로.(P155)


고귀한 마을을 건설하자

우리 뉴잉글랜드는 여러 마을이 체재비를 공동 부담하는 조건으로 세계의 모든 현인들을 불러들여 우리를 가르치게 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지방성을 완전히 탈피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성인들을 위한 학교인 것이다. 귀족들 대신에 보통 사람들로 구성된 고귀한 마을을 건설하자. 필요하다면 강에 다리 하나를 덜 놓고, 그래서 조금 돌아서 가는 일이 있더라도 그 비용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보다 어두운 무지의 심연 위에 구름다리 하나라도 놓도록 하자.(P159)


제대로 보는 사람

어떠한 관찰 방법과 훈련도 항상 주의 깊게 살피는 자세를 대신 해주지는 못한다. 볼 가치가 있는 것을 그때그때 놓치지 않고 보는 훈련에 비하면 아무리 잘 선택된 역사나 철학이나 시의 공부도, 훌륭한 교제도, 가장 모범적인 생활 습관도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당신은 단순한 독자나 학생이 되겠는가, 아니면 '제대로 보는 사람'이 되겠는가? 당신 앞에 놓여진 것들을 보고 당신의 운명을 읽으라. 그리고 미래를 향하여 발을 내디뎌라.(P160)


완고함

나는 어떤 사람의 참된 성품을 알게 되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 성품을 더 좋게든 혹은 더 나쁘게든 바꿀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전혀 갖지 않는다. 동양 사람들이 말하듯이 "개의 꼬리를 뜨겁게 한 다음 눌러서 노끈으로 묶는 일을 12년간이나 되풀이하더라도 그것은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이들 소 꼬리나 개 꼬리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완고함을 고치는 데에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법은 흔히하듯이 이것들을 끓여서 아교로 만드는 것인데, 아교가 된 다음에는 붙여놓은 대로 붙어 있을 것이다.(P174)


(나의 생각)
정말 맞는 말 같다.
스티븐 핑커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나오는 내용 가운데에서도 이같은 내용이 나오는데, 사람의 마음이나 성격이 얼마나 바꾸기 어려운가에 대한 핑커의 주장은 섬뜩하리만치 전율이 느껴지는 내용이 많았던 것 같다.

보슬비

내가 사계절을 벗삼아 그 우정을 즐기는 동안에는 그 어떤 것도 삶을 짐스러운 것으로 만들지 못할 것이다. 오늘 내 콩밭을 적시면서 한편으로 나를 집에 머물도록 하는 저 보슬비는 지루하고 우울한 느낌을 주지 않고 오히려 내게 좋은 일을 해주고 있다. 비 때문에 콩밭을 매지 못하지만, 비는 밭 매는 것보다 훨씬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 비가 계속되어 땅속의 종자들이 썩고 낮은 지대에서 감자 농사를 망치더라도 높은 지대의 풀에게는 좋을 것이며, 풀에게 좋다면 나에게도 좋은 것이다.(P188)

우정_무한하고도 설명할 수 없는 우호적인 감정

조용히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나는 갑자기 대자연 속에,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빗속에, 또 집 주위의 모든 소리와 모든 경치 속에 너무나도 감미롭고 자애로운 우정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나를 지탱해주는 공기 그 자체처럼 무한하고도 설명할 수 없는 우호적인 감정이었다. 이웃에 사람이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되던 모든 이점이 대단치 않은 것임을 느꼈고 그 후로는 그런 것을 생각해본 일이 없다. 솔잎 하나하나가 친화감으로 부풀어올라 나를 친구처럼 대해주었다. 나는 사람들이 황량하고 쓸쓸하다고 하는 장소에서도 나와 친근한 어떤 것이 존재함을 분명히 느꼈다. 나에게 혈연적으로 가장 가깝거나 가장 인간적인 것이, 반드시 어떤 인간이거나 어떤 마을 사람이지는 않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부터 어떤 장소도 나에게는 낯선 곳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P189)

(나의 생각)
소로우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릴 때 우리 마을에 사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자꾸만 떠오른다. 내가 태어나 자란 마을은 집성촌이었던 때문에 그 할아버지도 집안 어른이셨는데, 학문의 깊이로는 이웃 수십킬로 이내에서는 따라올 만한 분이 없다고 할 정도였었다.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이라 자세한 건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사서삼경에 통달하셨고, 주역을 비롯한 동양철학에 대한 깊이가 대단하다고 하셨던 것 같다. 그 할아버지는 특이하게도 우리 마을에서 2∼3km쯤 떨어진 강 건너 산 아래에 홀로 사셨다. 머리도 백발이셨고 수염도 백발이셨는데, 가끔씩 강을 건너 산으로 땔깜나무를 하러 다니거나, 한 겨울에 토끼나 꿩을 잡으로 다닐 때나, 농삿일을 도우러 할아버지가 사시던 집 근처를 지나칠 때면, 그 할아버지는 언제나 책만 열심히 들여다보셨던 것 같다. 우리는 늘 '혼자 산 밑에 사시면 깜깜한 밤이 되면 얼마나 무서울까?' 하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 분의 삶 또한 소로우와 매우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늘 자연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조금도 외롭지 않고, 늘 옛 성현들과 만나고 또 그 분들과 대화하기 위해 '고전'을 읽는 데 평생을 보냈던 것 같다.



친해지기 쉬운 벗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내는 것이 심신에 좋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라도 같이 있으면 곧 싫증이 나고 주의가 산만해진다. 나는 고독만큼 친해지기 쉬운 벗을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대개 방 안에 홀로 있을 때보다 밖에 나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닐 때 더 고독하다. 사색하는 사람이나 일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항상 혼자이다. 고독은 한 사람과 그의 동료들 사이에 놓인 거리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버드 대학의 혼잡한 교실에서도 정말 공부에 몰두해 있는 학생은 사막의 수도승만큼이나 홀로인 것이다.(P194)


사교


대체로 사람들의 사교는 값이 너무 싸다. 너무 자주 만나기 때문에 각자 새로운 가치를 획득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우리는 하루 세 끼 식사 때마다 만나서 우리 자신이라는 저 곰팡내나는 치즈를 서로에게 맛보인다. 이렇게 자주 만나는 것이 견딜 수 없게 되어 서로 치고받는 싸움판이 벌어지지 않도록 우리는 예의범절이라는 일정한 규칙들을 협의해놓아야 했다.(P195)


자연

자연은(해와 바람과 비, 그리고 여름과 겨울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순수하고 자애로워서 우리에게 무궁무진한 건강과 환희를 안겨준다. 그리고 우리 인류에게 무한한 동정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약 어떤 사람이 정당한 이유로 슬퍼한다면 온 자연이 함께 슬퍼해줄 것이다. 태양은 그 밝음을 감출 것이며 바람은 인간처럼 탄식할 것이며 구름은 눈물의 비를 흘릴 것이며 숲은 한여름에도 잎을 떨구고 상복을 입을 것이다. 내가 어찌 대지와 교제를 갖지 ㅇ낳겠는가? 나 자신의 일부분이 그 잎사귀이며 식물의 부식토가 아니던가!(P198)

(나의 생각)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언과 닮았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농사, 혹은 참다운 농부

카토는 농사에서 생기는 이익이 그 무엇보다 성스럽고 정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로마의 대학자 바로에 의하면, 고대 로마인은 "대지를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하고 농업의 여신 케레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은 경건하고 유익한 삶을 살고 있으며 그들만이 사투르누스 왕족의 유일한 후손이라고 생각했다."

이 콩의 결실을 내가 다 거둬들이는 것은 아니다. 이 콩들의 일부는 우드척을 위해서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밀의 이삭이 농부의 유일한 희망이 되어서는 안 되겠으며, 그 낟알만이 밀대가 생산하는 모든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농사가 실패하는 일이 있겠는가? 잡초들의 씨앗이 새들의 주식일진대, 잡초가 무성한 것도 실은 내가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닌가? 밭농사가 잘되어 농부의 광을 가득 채우느냐 아니냐는 비교적 중요한 일이 아니다. 금년에 숲에 밤이 열릴 것인지 아닌지 다람쥐가 걱정을 않듯 참다운 농부는 걱정에서 벗어나 자기 밭의 생산물에 대한 독점권을 포기하고, 자신의 최초의 소출뿐만 아니라 최종의 소출도 제물로 바칠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P238∼P239)


호수

호수는 하나의 경관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표정이 풍부한 지형이다. 그것은 대지의 눈이다. 그 눈을 들여다보면서 사람은 자기 본성의 깊이를 잰다. 호숫가를 따라 자라는 나무들은 눈의 가장자리에 난 가냘픈 속눈썹이며, 그 주위에 있는 우거진 숲과 낭떠러지들은 굵직한 눈썹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고요한 9월의 어느 오후, 동쪽 물가의 매끈한 모래사장에 서서 호수를 바라보면 맞은편 물가는 엷은 안개로 인해 어렴풋이밖에 보이지 않는데, '유리 같은 호수의 수면'이라는 표현이 어디서 유래한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고개를 박아 머리를 거꾸로 해서 보면 호수의 수면은 계곡에 걸쳐놓은 섬세하기 짝이 없는 한 가닥의 거미줄처럼 보인다. 멀리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반짝반짝하면서 수면은 대기를 두 개의 층으로 갈라놓고 있다. 맞은편의 산까지 물에 젖지 않고 수면 밑으로 해서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호수 위를 스치듯 나는 제비들이 수면에 앉을 수도 있을 듯한 생각이 든다. 사실, 제비들은 때때로 착각이라도 한 듯 수면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가다가는 깜짝 놀라 다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호숫물은 액체 상태로 녹아 있던 유리가 식기는 했으나 아직 굳지 않은 것과 같으며, 그 속에 떠 있는 몇 개의 티눈은 유리 속의 불순물처럼 차라리 순수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9월이나 10월의 이런 날 월든 호수는 완벽한 숲의 거울이 된다. 그 거울의 가장자리를 장식한 돌들은 내 눈에는 보석 이상으로 귀하게 보인다. 지구의 표면에서 호수처럼 아름답고 순수하면서 커다란 것은 없으리라. 하늘의 물. 그것은 울타리가 필요없다. 수많은 민족들이 오고갔지만 그것을 더럽히지는 못했다. 그것은 돌로 깰 수 없는 거울이다. 그 거울의 수은은 영원히 닳아 없어지지 않으며, 그것의 도금을 자연은 늘 손질해준다. 어떤 폭풍이나 먼지도 그 깨끗한 표면을 흐리게 할 수는 없다. 호수의 거울에 나타난 불순물은 그 속에 가라앉거나 태양의 아지랑이 같은 솔이, 그 너무나도 가벼운 마른걸레가 쓸어주고 털어준다. 이 호수의 거울에는 입김 자국이 남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입김을 구름으로 만들어 하늘로 띄워 올리는데, 그 구름은 호수의 가슴에 다시 그 모습이 비친다.(P268)

(나의 생각)
마치 피천득의 수필을 읽는 것 같다. 정말 아름다운 글이다.



옛날과 다름없이

나무 베는 사람들이 호숫가의 여기저기를 야금야금 베어내고, 아일랜드 사람들이 호수 근처에 돼지우리 같은 집을 짓고, 철도가 그 경계선을 침범하고, 얼음 장사꾼들이 호수의 얼음을 걷어갔지만, 월든 자체는 변함이 없으며 내가 어릴 때 보았던 바로 그 호수 그대로이다. 무수한 잔물결이 호수에 일었었지만 항구적인 주름살은 단 한 개도 없다. 월든 호수는 영원히 젊다. 지금이라도 호숫가에 서면 옛날과 다름없이 제비가 벌레를 잡으려고 살짝 물을 스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P277)

(나의 생각)
가곡 '가고파'의 한 구절 같다



물아일체

나는 오늘 밤에도 내가 지난 20여 년 동안 거의 매일같이 이 호수를 보아오지 않은 것처럼 새로운 감동을 받았다. 아, 여기 월든 호수가 있구나! 내가 그 옛날 발견했던 것과 똑같은 숲  속의 호수가. 지난 겨울에 숲의 일부가 잘려나간 물가에는 새로운 어린 숲이 기운차게 자라고 있다. 그때와 똑같은 사념이 호수 표면에 샘처럼 솟아오르고 있다. 이 호수는 그 자신이나 그 창조자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기쁨과 행복의 샘물이다. 그것은 확실히 마음에 아무런 흉계를 품지 않은 용감한 사람의 작품이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이 호수의 주위를 둥글게 가다듬었으며 그의 사념 속에 호수를 깊이 파고 그 물을 맑게 하였으며 마침내는 유산으로 콩코드 마을에 남겨준 것이다.

호수의 얼굴을 보니 나와 똑같은 회상에 잠긴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이런 말이 내 속에서 나오려고 한다. 오, 월든이여, 정녕 그대인가?(P277)


자연주의


자연은 이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홀로 활짝 피어난다. 자연을 놓아두고 천국을 이야기하다니! 그것은 지구를 모독하는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P287)


그들의 인생

사람들은 저녁에는 꼬박꼬박 집에 돌아온다. 그러나 기껏해야 근처의 밭이나 길거리로부터 돌아오는 것이며, 그곳은 집에서 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곳이다. 자신이 내쉰 공기를 다시 들이마시기 때문에 그들의 인생은 시들고 있다. 차라리 아침저녁 때의 그들의 그림자가 그들이 매일 걷는 걸음보다 더 멀리 뻗쳐 있다. 우리는 매일 먼 곳으로부터 집에 돌아와야 하겠다. 모험을 하고, 위험을 겪고, 어떤 발견을 한 끝에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성격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야 하겠다.(P300)


지평선을 송두리째 차지하고도

지평선을 송두리째 차지하고도 그는 가난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아일랜드의 가난과 또 아담의 할머니 때부터 내려온 진흙 수렁 같은 생활방식을 유산처럼 물려받고 있으니 그와 그의 자손들은 늪을 헤매고 다니는 그들의 오리발 뒤꿈치에 날개라도 돋기 전에는 이 세상에서 일어설 도리가 없는 것이다.(P301)

(나의 생각)
컴퓨터 단말기의 관심종목들을 송두리째 차지하고도(혹은 증시 주변에 넘쳐나는 뉴스들을 송두리째 차지하고도) '돈을 벌지 못하는' 주식 투자자들이 떠오른다.



가장 큰 이유

내가 거친 노동을 오랫동안 지속하는 데에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런 노동을 하고 나서는 거칠게 먹고 마셔대야 했기 때문이다.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천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음식을 먹을 때의 탐욕스러운 식욕이 그를 천하게 하는 것이다. 음식의 양이나 질이 문제가 아니고 감각적인 풍미에 빠지는 자세가 문제이다. 먹는 음식이 우리의 동물적 생명을 유지하는 양식, 우리의 정신적인 삶을 고무하는 양식이 되지 못하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벌레들의 양식이 될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P312)

(나의 생각)
내가 거친 주식들을 투자하는 데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런 주식들을 투자하게 되면 나 자신의 인생도 거칠게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주식 종목이 투자자를 천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투자수익을 추구할 때의 탐욕스러운 욕심이 그럴 천하게 하는 것이다. 종목의 질이 문제가 아니고 허황된 탐욕에 빠지는 자세가 문제이다. 투자하는 종목이 우리의 여유자금을 증식시키는 양식, 우리의 풍요로운 삶을 고무하는 양식이 되지 못하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벌레들의 양식이 될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덕과 악덕 사이


우리의 인생은 놀라울 만큼 도덕적이다. 덕과 악덕 사이에는 한 순간의 휴전도 없이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선이야말로 절대적으로 실패하지 않는 유일한 투자이다. 온 세상에 울려 퍼지는 하프의 소리 속에서 우리에게 특별히 감명을 주는 것은 이 선에 대한 강조인 것이다. 이 하프는 우주의 법칙을 선전하고 돌아다니는 '우주보험주식회사'의 출장 세일즈맨이다. 그리고 우리의 조그만 선행은 우리가 지불하는 유일한 보험료이다. 젊은이는 나이가 들면 무감각해지지만 우주의 법칙은 결코 무감각해지는 일이 없으며 영원히 민감한 사람의 편에 선다.(P314)


순수함

만약 우리가 순수함을 얻을 때 어떤 종류의 삶을 살게 될지 그 누가 알 것인가? 나에게 순수함을 가르쳐줄 만큼 현명한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그를 찾아 나설 생각이다. "정욕을 억제하고 육신의 외부적 감각을 억제하는 힘과 선행, 이 두 가지야말로 인간의 마음이 신에 접근하는 데 필요 불가결한 것"임을 베다는 선언하고 있다. 정신은 한정된 시간이나마 육신의 모든 부분과 기능을 전반에 걸쳐 장악하여 겉보기에 천박스럽기 짝이 없는 관능을 순결과 헌신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P315)


정결

정결하게 되고 싶으면 여러분은 절제를 해야 한다. 정결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스스로가 정결한지를 어떻게 아는가?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미덕에 대하여 듣고는 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들은 소문에 따라서 이러쿵저러쿵 말할 따름이다. 몸을 부지런히 놀리는 데서 지혜와 순결이 온다. 나태로부터는 무지와 관능이 온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관능은 마음의 게으른 습성이다. 깨끗지 못한 사람은 열이면 열 게으른 사람이며, 난로 옆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이며, 해가 떠 있는데도 누워 있는 사람이며, 피곤하지도 않은데 휴식을 취하는 사람이다.(P317)


봄에 대한 찬미

봄의 첫 참새! 그 어느 해보다 파릇파릇한 희망을 가지고 시작하는 새로운 해! 반쯤 헐벗은 축축한 들판에 어렴풋이 들리는 유리울새와 노래참새와 티티새의 은방울 같은 노랫소리는 겨울의 마지막 눈송이들이 떨어지면서 내는 짤랑거리는 소리 같기만 하다. 이런 때에 역사와 연대기, 전통과 모든 기록된 계시 같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냇물은 흐르면서 기쁨의 찬가를 봄에 바친다. 어느새인가 강 옆의 풀밭 위를 빙빙 도는 개구리매는 겨울잠에서 깨어 나오는 첫 개구리를 찾고 있다. 모든 계곡에서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여러 호수의 얼음도 하루가 다르게 빨리 녹고 있다.

"봄비의 부름을 받고 풀들은 처음으로 싹튼다." 하고 어느 옛사람은 말했지만, 언덕마다 풀들이 봄 불처럼 타오르는 모습이 마치 대지가 돌아오는 태양을 맞기 위해 내부의 열을 발산하는 것만 같다. 그 불길의 색깔은 붉은 색이 아니고 초록색이다. 영원한 청춘의 상징인 풀잎은 흙에서 솟아올라 기다란 푸른 리본처럼 여름 속으로 환히 피어나지만 겨울 추위의 제지를 받고는 시들어버린다. 그러나 봄이 다시 오면 뿌리 속에 간직한 싱싱한 생명의 힘으로 지난해의 마른 잎의 끝을 치켜들며 또다시 뻗어 오르는 것이다.(P442)


보다 훌륭한 생각

부드러운 이슬비가 한번 내리면 풀밭은 한층 더 푸르러진다. 우리 역시 보다 훌륭한 생각을 받아들이면 우리의 전망도 훨씬 밝아지리라. 우리가 항상 현재에서 살면서 자신의 몸 위에 떨어진 한 방울의 작은 이슬도 놓치지 않고 받아들여 커가는 풀잎처럼 우리에게 생기는 모든 일을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과거에 잃어버린 기회에 대해 애통해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 복 받은 존재가 될 것이다.(P447)


콜럼버스가 되라

우리는 호기심 많은 선객처럼 우리가 탄 배의 난간 너머로 자주 밖을 내다보아야 할 것이며, 뱃밥만을 만들고 있는 우둔한 선원처럼 항해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신 내부에 있는, 보다 위도가 높은 지역을 탐험하도록 하라.

진실로 바라건대 당신 내부에 있는 신대륙과 신세계를 발견하는 콜럼버스가 되라. 그리하여 무역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상을 위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라. 각자는 하나의 왕국의 주인이며, 그에 비하면 러시아 황제의 대제국은 보잘것없는 작은 나라, 얼음에 의해 남겨진 풀더미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아무런 존경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 애국심에 불타서 소를 위해 대를 희생시키는 일이 있다. 그들은 자기의 무덤이 될 땅은 사랑하지만, 지금 당장 자신의 육신에 활력을 줄 정신에 대해서는 아무런 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애국심은 그들의 머리를 파먹고 있는 구더기라고 할 수 있으리라.

만약 당신이 모든 나라의 말을 하고 모든 나라의 습관을 배우고자 한다면, 그리고 그 어떤 여행가보다 더 멀리 여행하고 모든 풍토에 익숙해지며,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머리를 바위에 부딪쳐 죽게 만들려고 한다면 옛 철인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당신 자신을 탐험하라. 여기에는 맑은 눈과 굳건한 용기가 필요하다. 패배한 자, 자신의 의무를 버리는 자들만이 전쟁터에 간다. 그들은 도망쳐서 군대에 몸을 맡기는 겁쟁이들이다.

지금 당장 가장 먼 서쪽 길을 향해 떠나라. 그 길은 미시시피 강이나 태평양 해안에서 멈추지 않으며, 케케묵은 중국이나 일본에 가는 것도 아니며, 당신의 세계와 직접적인 접선을 이루며 당신을 그리로 인도해줄 것이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낮에도 밤에도, 해가 지고 달이 지고 마침내 지구마저 지더라도 말이다.(P456∼P459)


굳은 결심

미라보는 "충분히 생각해본 끝에 어떤 굳은 결심을 하게 되면 명예나 종교의 구애를 받지 않고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말했다.(P460)


인생의 돛대 앞에

땅의 표면은 부드러워서 사람의 발에 의해 표가 나도록 되어 있다. 마음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세계의 큰길은 얼마나 밟혀서 닳고 먼지투성이일 것이며, 전통과 타협의 바퀴 자국은 얼마나 깊이 패었겠는가! 나는 선실에 편히 묵으면서 손님으로 항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인생의 돛대 앞에, 갑판 위에 있기를 원했다. 나는 이제 배 밑으로 내려갈 생각은 없다.(P461)


경험에 의해 배운 것

나는 경험에 의하여 적어도 다음과 같은 것을 배웠다. 즉 사람이 자기 꿈의 방향으로 자신 있게 나아가며, 자기가 그리던 바의 생활을 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보통 때는 생각지도 못한 성공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때 그는 과거를 뒤로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넘을 것이다. 새롭고 보편적이며 보다 자유로운 법칙이 그의 주변과 내부에 확립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묵은 법칙이 확대되고 더욱 자유로운 이미에서 그에게 유리하도록 해석되어 그의 존재의 보다 높은 질서를 허가받아 살게 될 것이다. 그가 자신의 생활을 소박한 것으로 만들면 만들수록 우주의 법칙은 더욱더 명료해질 것이다. 이제 고독은 고독이 아니고 빈곤도 빈곤이 아니며 연약함도 연약함이 아닐 것이다. 만약 당신이 공중에 누각을 쌓았더라도 그것은 헛된 일이 아니다. 누각은 원래 공중에 있어야 하니까. 이제 그 밑에 토대만 쌓으면 된다.(P461)


북소리

왜 우리는 성공하려고 그처럼 필사적으로 서두르며, 그처럼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두라. 그 북소리의 음률이 어떻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P466)

(나의 생각)
이 문단이야말로 이 책의 핵심이다. 오래 전에 우연히 다른 책에서 이 문장을 접한 일이 있었는데, 비유가 너무나 멋지고 표현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머리에 쿵! 하는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난다. 다소 늦었지만『월든』을 읽을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이고 또 행복한지 모르겠다.



쿠우루의 지팡이

쿠우루에 완전을 갈구하던 한 장인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지팡이를 만들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불완전한 일에는 시간이 한 요소가 되겠으나 완전한 일에는 시간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그는, 비록 한평생 딴 일은 아무것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점에서 완벽한 지팡이를 만들리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부적당한 재료를 써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으므로 그는 재목을 구하러 즉시 숲으로 떠났다. 그가 쓸 만한 나무 하나하나를 살피다가 퇴짜를 놓는 사이에 그의 친구들은 점차로 그의 옆을 떠났으니, 그들은 각자의 일을 하다 늙어서 죽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늙지 않았다. 한 가지 목표를 추구하는 그의 결심과 숭고한 믿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영원한 젊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간과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았으므로 시간은 그의 길에서 비켜나 그를 굴복시키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멀리서 한숨만 지을 뿐이었다. 그가 모든 점에서 알맞은 재목을 찾아냈을 때는 쿠우루는 폐허가 된 지 이미 오래였다. 그는 그 폐허의 어느 흙 둔덕에 앉아 지팡이를 깍기 시작했다.

지팡이의 모양이 채 갖추어지기도 전에 칸다하르 왕조가 망했다. 그는 지팡이의 끝으로 모래 위에 그 왕조 마지막 왕의 이름을 쓰고는 다시 일을 계속했다. 그가 지팡이를 매끄럽게 다듬어놓았을 때 칼파는 이미 북극성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지팡이 끝에 쇠붙이을 달고 보석으로 장식된 지팡이의 손잡이 부분을 달았을 때는 브라마 신은 수없이 잠이 들었다 깼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그의 작품에 마지막 손길이 가해지자 지팡이는 깜짝 놀라는 장인의 눈앞에서 브라마 신의 창조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승화되어갔다. 그는 지팡이를 만드는 가운데 새로운 체계, 충실하고도 균형 잡힌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옛 도시들과 왕조들은 사라졌지만 그보다도 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도시와 왕조들이 그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는 발밑에 수북이 샇여 있는 나무 깎은 부스러기를 내려다보았는데, 그것들이 아직도 생생한 것을 보고 이제까지의 시간의 경과는 단지 하나의 환각에 지나지 않았으며, 브라마 신의 두뇌에서 나온 한 섬광이 인간 두뇌의 부싯깃에 떨여져서 불붙은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재료가 순수했고 그의 기술도 순수했으니 그 결과가 경이로운 것 외에 무엇일 수 있겠는가?(P466)


최초의 한 바늘

정신이 온전할 때 우리는 사실만을, 즉 실제로 존재하는 사정만을 응시한다. 당신의 의무감으로 느끼는 것을 말하지 말고 진실로 내부에서 느끼는 것을 말하라. 어떤 진실도 거짓보다는 낫다. 땜장이 탐 하이드는 교수대에 섰을 때 할 말이 있느냐고 질문을 받았다.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재봉사들에게 최초의 한 바늘이 꿰매기 전에 실 끝을 매듭짓는 것을 잊지 말라고 전해주시오." 그 옆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던 동료의 기도의 말은 전해져 있지 않다.(P468)


똑바로 맞이해서 살아나가라

당신의 인생이 아무리 비천하더라도 그것을 똑바로 맞이해서 살아나가라. 그것을 피한다든가 욕하지는 마라. 그것은 당신 자신만큼 나쁘지는 않다. 당신이 가장 부유할 때 당신의 삶은 가장 빈곤하게 보인다. 흠을 잡는 사람은 천국에서도 흠을 잡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이 빈곤하더라도 그것을 사랑하라. 당신이 비록 구빈원의 신세를 지고 있더라도 그곳에서 유쾌하고 고무적이며 멋진 시간들을 가질 수 있다. 지는 해는 부자의 저택이나 마찬가지로 양로원의 창에도 밝게 비친다. 봄이 오면 양로원 문 앞의 눈도 역시 녹는다. 인생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그런 곳에 살더라도 마치 궁전에 사는 것처럼 만족한 마음과 유쾌한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P468)


생각은 그대로 간직하라

옷은 팔더라도 생각은 그대로 간직하라. 신은 당신이 외롭지 않도록 보살펴줄 것이다. 만약 내가 날마다 온종일 거미처럼 다락방의 한구석에 갇혀 있더라도 나의 생각만을 잃지 않는다면 세상이 조금이라도 좁아진 것으로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철학자는 말했다. "3군으로 된 큰 군대라도 그 우두머리를 사로잡으면 무너뜨릴 수 있으나, 필부일지라도 그의 지조를 빼앗을 수는 없다."고(P469)


무절제

자신을 개발하기 위하여 서두른 나머지 수많은 영향력에 자신을 내맡기지 마라, 그것도 일종의 무절제이다. 겸손은 어둠이 그러하듯이 천상의 빛을 드러나게 한다. 가난과 옹색함의 그림자는 우리 주위에 드리워 있지만, "그런데 보라! 창조는 우리 시야에서 전개되어간다."(P469)


남아 돌아가는 부

부자로 유명했던 크로이소스 왕의 재산을 우리가 물려받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목적은 전과 다름없을 것이며 우리의 수단 역시 본질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가난하기 때문에 활동 범위에 제한을 받더라도, 예를 들어 책이나 신문을 살 수 없는 형편이 되더라도 당신은 가장 의미 있고 중요한 경험만을 갖도록 제한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은 가장 많은 당분과 가장 많은 전분을 내는 재료만을 다루도록 강요를 받게 된 것이다. 뼈 가까이에 있는 살이 맛있듯이 뼈 가까이의 검소한 생활도 멋진 것이다. 당신은 인생을 빈둥거리며 보내지 않도록 보호받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도 높은 수준의 정신 생활을 하는 것으로 인해 낮은 차원에서 손해를 보지는 않는다. 남아돌아가는 부는 쓸모없는 것들밖에 살 수 없다. 영혼에게 필요한 단 한 가지의 필수품을 사는 데는 돈이 필요없다.(P470)


이 시대가 지나가는 동안

나는 내 자신의 본연의 자세에 돌아와서야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이다. 나는 남의 눈에 잘 띄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화려하게 과시하며 돌아다니기보다는,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우주를 창조한 분과 함께 거닐어보고 싶다. 그리고 이 들떠 있고 신경질적이며 어수선하고 천박한 19세기에 사는 것보다는 이 시대가 지나가는 동안 서 있거나 앉아서 생각에 잠기고 싶다. 사람들은 무엇을 축하하고 있는 것인가? 그들은 모두 준비 위원회의 자리 하나씩을 차지하고서는 매 시간마다 누군가가 연설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느님도 그날의 사회자에 불과하며, 연설은 웹스터가 하게 되어 있다.(P471)


단단한 토대

나는 저울대에 매달려 자신의 무게를 달면서 균형을 잡다가 나를 가장 강하게 그리고 가장 정당하게 끌어당기는 것에게 인력에 의해 끌려가고 싶다. 저울대에 매달려 몸무게가 적게 나가려고 발버둥치고 싶지 않다. 어떤 사정을 지레짐작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사정만을 받아들이고 싶다. 나는 내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 그 위에서는 그 어떤 권력도 나를 막을 수 없는 길을 가고 싶다. 단단한 토대를 쌓기도 전에 아치를 세우는 따위의 짓은 나에게는 아무런 기쁨을 주지 못한다. 살얼음판에서 벌이는 아이들 장난은 그만두도록 하자. 어느 곳이든지 단단한 밑바닥은 있다.(P472)

(나의 생각)
'가치투자'에 정말 기막히도록 잘 들어맞는 말이다



늪의 밑바닥과 대갈못


어떤 나그네가 한 소년에게 자기 앞에 있는 늪의 밑바닥이 단단한지 아닌지를 물어보았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소년은 밑바닥이 단단하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앞으로 나간 나그네의 말은 이내 복대끈까지 빠져 들어갔다. 나그네는 소년에게 물었다. "너 이 늪의 밑바닥이 단단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소년은 대답했다. "밑바닥은 정말 단단해요. 하지만 아저씨는 아직 절반도 못 들어가셨어요."

사회의 늪과 流沙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알게 되기까지에는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어떤 생각, 말 또는 행동은 아주 드문 경우에만 가치를 갖는다. 외와 회벽에 그냥 못을 박는 어리석은 짓은 하고 싶지 않다. 그런 짓을 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 내게 망치를 주고 나로 하여금 벽의 세로 홈을 더듬어볼 수 있게 해달라. 접합제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못을 완전히 다 박고 그 끝을 성심껏 구부려 밤중에 혹시 잠을 깨더라도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되돌아볼 수 있도록 하라. 그 일을 위해 시신詩神을 불러도 부끄럽지 않도록 말이다. 그 일에, 오직 그런 일에 신은 당신을 도울 것이다. 당신이 주체가 되어 일을 해나가되, 박는 못 하나하나가 우주라는 기계의 구조를 단단하게 하는 대갈못이 되도록 하라.(P472)


아침의 성격

뉴잉글랜드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사람들 사이에 퍼진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즉 처음엔 코네티컷 주, 다음에는 메사추세츠 주 어느 농가의 부엌에 60년 동안이나 놓여 있던 사과나무로 만들어진 오래된 식탁의 마른 판자에서 아름답고 생명력이 넘치는 곤충이 나왔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 곤충이 자리잡고 있던 곳의 바깥쪽으로 겹쳐 있는 나이테의 수를 세어본즉, 그보다도 여러 해 전 그 나무가 살아 있을 때에 깐 알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이었다. 아마 커피 주전자가 끓는 열에 의해 부화되었겠지만 그 곤충이 밖으로 나오려고 판자를 갉아 먹는 소리가 여러 주일 전부터 들렸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부활과 불멸에 대한 자신의 신념이 새로워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떤 날개 달린 아름다운 생명이 처음에는 푸른 생나무의 백목질 속에 알로 태어났으나, 그 나무가 차츰 잘 마른 관처럼 되는 바람에 오랜 세월을 사회의 죽은 듯 건조한 생활 속에서 목질의 공심적共心的인 나이테 속에 뭍혀 있다가(아마 지난 수년 동안, 일가족이 즐겁게 식탁에 둘러앉아 있을 때 밖으로 나오려고 갉는 소리를 내서 모두를 놀라게 한 적도 여러 번 있었으리라.),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값싸고 흔한 가구 속에서 튀어나와 마침내 찬란한 여름 생활을 즐기게 될지 그 누가 알겠는가?

나는 영국인이나 미국인이 이런 이야기를 다 이해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것이 단순한 시간의 경과만 가지고는 결코 동트게 할 수 없는 저 아침의 성격인 것이다. 우리의 눈을 감기는 빛은 우리에겐 어두움에 불과하다. 우리가 깨어 기다리는 날만이 동이 트는 것이다. 동이 틀 날은 또 있다. 태양은 단지 아침에 뜨는 별에 지나지 않는다.(P476∼P477)



<끝>


 
 
마녀고양이 2010-09-17 08:44   댓글달기 | URL
월든을 아주 오래 전에 읽었습니다.
도시에서만 살 수 있다고, 도시를 떠난 삶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저에게 일종의 충격을 준 작품이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소로우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오늘 오렌님의 리뷰로 인해, 구절을 다시 새겨봅니다. 참 좋습니다.

저 역시 북소리라고 하신 그 문구가 마음에 와닿습니다. 저마다의 리듬, 속도에 관하여 존중하고 존중받고 싶습니다.

oren 2010-09-17 14:06   URL
월든을 아주 오래전에 읽으셨다니 훌륭한 독서이력이 부럽습니다.
저는 오래 전에 사두고 못 읽다가(한 때 책꽂이에서 사라져서 며칠을 찾아 헤맨 적도...)
작년 가을에 읽었답니다.

특히, 일산에 살면서부터 호수공원의 봄,여름,가을,겨울을 10년 이상 겪어보니,
소로우의 마음이 더더욱 가깝고도 친하게 느껴지는 느낌도 드는 것 같구요.

시아 2010-09-17 11:28   댓글달기 | URL
별찜했어요~~~.
oren님께서 밑줄 그어놓으신 것과 생각을 적어 놓으신 것을 보니
제 자신이 부끄러워 지네요~.^^;;
책에 대한 리뷰 이외에도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oren 2010-09-17 15:52   URL
별찜은 어떤 건가요?
아무튼 자주 들러주시고 특별한 찜까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소로우의 책을 읽고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정말 좋은 책 내용이어서 '꼭꼭 씹듯이' 읽은 책인데,
예전에 컴퓨터에 갈무리해둔 내용도 있고 해서
'포토리뷰' 형식을 흉내내어 사진과 함께 올려봤습니다.

이미 수많은 분들이 오래 전에 이 책을 읽으셨겠지만,
그래도 아직 못 읽으신 분들이 있다면 도움이 될까 싶어
책 내용의 부분마다 소제목만 달고 가끔씩 제 생각도 조금 보태서 해서
'기나긴 내용을 조금도 아끼지 않고' 길다랗게 덧붙였습니다.

양철나무꾼 2010-09-19 22:01   댓글달기 | URL
마고님이 인상적이었다고 한 페이퍼 보고 트랙백해 들어와서 보니,
음...전에 멋진 서재 올려주신 그 분이시군요.

마고님이 인상적이었다고 하실만 하네요.

월든을 이렇게 꼭꼭 씹듯 정리한 페이퍼라니요~
많은 생각과 많은 반성을 하게 합니다.

oren 2010-09-20 10:55   URL
양철나무꾼님 안녕하세요?
다른 분들 서재에서 무척 자주뵙던 유명하신 분을 제 서재에서 뵈니 더더욱 반갑네요.

인상적인 느낌도 제각각일 수 있는데,
아무쪼록 '긍정적인' 방향이었으면 하는 바램도 드는군요.

저 또한 월든을 읽을 때 밑줄친 부분들을 다시금 정리하면서,
그동안 새까맣게 잊고 지냈던 '소로우의 이야기와 생각들'에 귀 기울이고,
월든 호숫가의 멋진 풍경 속으로 잠시나마 되돌아 가볼 수 있어서 좋았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pjy 2010-09-21 15:19   댓글달기 | URL
가슴떨릴때 여행을 다닌다면 다리떨릴때쯤에 철이 좀 들지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책 좀 제대로 읽어야겠습니다~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
알버트 머메리 / 수문출판사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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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스포츠의 고도의 숙달은 타고난 소질이 오랜 세월의 실행과 결합될 때 비로소 이루어지며, 생명과 육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어쩌면 많은 위험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행히도 성실한 등산가는 인생의 책임에 아직도 단단히 휘어잡히기 전에, 그리고 이런 종류의 사항에 있어서 어느 정도 상당한 자유를 주장할 수 있는 나이에 이 기술을 획득하는 것이 보통이다. 반면에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과, 자연 속의 가장 아름다운 모든 것에 대한 사랑과, 약동하는 청춘의 정력을 쏟을 다른 어느 스포츠도 제공해주지 않는 배출구를 얻는다. 아마 어떤 값을 매겨도 너무 비싸지 않은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위대한 산릉이 때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등산가는 자신이 숙명적인 희생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산에 대한 숭앙을 거의 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들 대부분에게 있어 무한한 공간 속으로 기울어진 거대한 갈색 슬랩, 바람이 형성하는 눈처마의 직선과 곡선, 갈라진 눈의 미묘하게 너울져 나간 파도는 언제나 우리를 건강과 재미와 웃음으로 이끌어 주고, 시간과 생명이 반대하는 모든 악에 굳건히 항거하게 해주는 우리의 오랜 믿을 만한 친구들이다.– 4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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