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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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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나 예술이나, 단 한 가지 필수적인 사항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 레프 톨스토이

 

 * * *

 

 톨스토이는 그냥 작가가 아니라 언제나 '러시아의 대문호'라는 특별한 칭호가 따라붙는 작가다. 그가 남긴 대표작은 누가 뭐래도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다. 『전쟁과 평화』는 "지금까지 쓰여진 가장 위대한 장편소설"이라 평가받는다. 그 작품 하나만 하더라도 너무나 스토리가 거대하고 등장 인물들이 방대한 데다가, 인간의 삶을 둘러싼 온갖 다양한 주제들을 너무나 드넓게 포괄하고 있어서 그 스케일만으로도 경이로울 지경인데, 그는 거기에 더해 기어코 『안나 카레니나』라는 불멸의 사랑 이야기마저 창조했다. 두 작품 모두 집필하는 데만 꼬박 대여섯 해씩 걸렸는데, 『안나 카레니나』(1873∼1877년)가 『전쟁과 평화』(1964∼1869년)보다 몇 년 뒤에 쓰였다.

 

『전쟁과 평화』가 주로 '전쟁과 파괴'를 다루고, 『안나 카레니나』가 '유부녀의 잘못된 사랑'을 다룬다고 해서 그 두 작품 사이에 공통점이 아예 없을 순 없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을 다룬 이야기가 아무리 거창하다고 하더라도 그 작품을 꿰뚫고 흐르는 작가의 문제 의식은 언제나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삶의 본질적인 문제와 강렬하게 맞닿아 있고, 그 점은 『안나 카레니나』에서도 전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 앞에서 심각하게 숙고하지 않는 인물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물론 그 문제를 두고 가장 고통스럽게 싸웠던 인물은 단연 안나 카레니나였다. 그 반면에 삶 자체를 가장 순수하고도 진지하게 성찰한 인물은 농장을 돌보던 시골 귀족 레빈이었다.

 

 

톨스토이는 스스로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평생 동안 끊임없이 성찰한 인물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톨스토이에 대해 '세계를 움직이는 제1원인을 찾고자 했던 사람'이라고도 평했다. 그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귀족 출신이면서도 평생 자신의 영지인 야스나야 폴랴나에 파묻혀 지냈으며, 저술 활동뿐 아니라 농노 해방과 자선 사업은 물론 교육 문제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작가의 모습이 작품 속에 투영된 인물이 바로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 피에르 베주호프와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하는 레빈이다. 시골 영지 포크로프스코예에 파묻혀 지내는 귀족 레빈이 여름철마다 풀베기에 열정을 쏟는 장면, 애완견과 함께 멧도요를 사냥하는 장면, 모스크바에서의 생활에 대한 강한 반감, 러시아의 농민들에 대한 사랑 등은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서 인간 톨스토이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어떻게 해서 안나 카레니나라는 젊은 귀부인이 겪은 부적절한 사랑, 다시 말하자면 어느 한 순간 느닷없이 빠져들고 만 치명적인 불륜과 그로부터 파생된 온갖 불가피하고 불쾌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문제들, 가령, 남편과의 이혼 문제(이 문제는 안나가 기차에 뛰어드는 순간까지도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의 양육 문제, 브론스키와의 혼인 문제와 주거 문제, 친인척과 사교계 등에서 맺은 온갖 인간관계 문제 등에 대해 어쩌면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을까? 그 자신이 도저히 그런 경험을 했을 리도 없는데?

 

이 소설이 탄생한 데에는 기막힌 우연이 있었다. 작가는 『전쟁과 평화』를 끝낸 뒤 표트르 대제 시대에 관한 역사소설을 쓰고자 자료를 수집하던 어느날 우연히 《툴라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발견한다.

 

휼륭한 옷차림을 한 신원 불명의 여인이 모스크바ㅡ쿠르스크 선의 야센키 역에 도착하여 선로에 뛰어 들었다. 화물차 7호가 지나갈 때, 그녀는 성호를 긋고 기차 아래로 몸을 던졌고, 그녀의 몸은 두 동강이 났다.

 

그런데 이 기사의 주인공인 안나 피고로바라는 여인은 마침 톨스토이도 알던 여자였다. 그녀는 톨스토이의 이웃 영주 비비코프라는 사람의 내연녀였다. 톨스토이는 심지어 기차역에서 실시된 검시에도 참관했다. 1872년 1월에 발생한 이 사건이 작가의 뇌리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다가 1873년 3월에 우연히 푸슈킨의 『벨킨 이야기』를 다시 읽는 동안에 '점화'되어 '갑자기 너무나 아름답고 강력하게 구체화되어' 소설로 쓰이게 된 것이다.

 

그것은 정말 생생하고 열정적이고 완벽한 소설입니다. 나는 이 소설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하느님이 내게 건강을 허락하신다면 2주 안에 완성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2주가 아니라 무려 5년에 걸쳐 집필된 소설이 『안나 카레니나』로 탄생했다. 이 소설은 월간 잡지에 첫 연재가 실릴 때부터 엄청난 반향과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왜 아니 그랬겠는가? 심지어 도스토예프스키조차 한 지인의 찬사를 인용하며 당시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소개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것은 전대미문의 걸작입니다. 우리 작가들 가운데 어느 누가 그에 필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소설이 당대의 수많은 논의들을 소설 속 담론으로 끌어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목적, 여성 문제, 노동자 문제, 민중 교육 문제, 유몰론적 철학에 반하는 인상 등으로 인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사실 톨스토이는 작가로서는 아주 드물게 '쇼펜하우어'의 열럴한 찬미자였다. 그는 쇼펜하우어에 대하여 "나는 쇼펜하우어가 인간들 중 가장 천재적인 인물이라 생각하네."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또한 톨스토이의 서재에는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만 유일하게 걸려 있었다고 한다. 『전쟁과 평화』에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드물지 않게 드러나 있으며, 『안나 카레니나』에는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직접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 견해들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비판은 '예술적 구조를 결여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안나 카레니나』에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 웅장한 테마 두 개가 나란히 전개될 뿐 전체 소설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톨스토이의 대답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오히려 나는 건축술에 긍지를 갖고 있습니다. 둥근 천장은 아무도 연결 지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릴 수 없는 그런 방식으로 지어졌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그 무엇보다 공들인 부분입니다. 구조의 통일성은 행위와 인물들 간의 관계가 아니라 내적인 연속성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물론 비평가의 지적에도 일리는 있다. 총 8부에 이르는 작품의 구성은 일견 '안나 카레니나의 사랑에 얽힌 테마'와 '레빈의 소박한 전원 생활에 대한 테마'가 뚜렷이 구분된 채 좀처럼 서로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제7부에서 안나 카레니나가 기차에 몸을 던지고 난 이후에도 제8부가 다시 길게 이어지는 점은 충분히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할 만하다. 여주인공의 죽음으로 인해 '모든 이야기'가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고 여길 법한데도, '안나의 충격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죽음'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느낌을 주는 '레빈의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소소한 시골 농장에서의 일상' 이야기를 제법 길게 덧붙여 놓음으로서 도리어 소설의 구조를 무너뜨리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제8부는 편집자와의 의견 충돌로 출간 당시에도 잡지에 연재되지 못하고 톨스토이가 자비로 따로 출간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작가를 대신해서 조금이나마 더 해명해 보고 싶다. 사실 『안나 카레니나』에서 톨스토이가 보여준 기법은 이미 찰스 디킨스가 『황폐한 집』에서 일찌감치 미리 선보였던 방식이기도 하다. 『안나 카레니나』만큼 방대한 디킨스의 그 걸작 소설에서 작가는 1인칭 화자의 이야기와 3인칭 작가 시점의 이야기를 계속 교대로 바꾸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여주인공인 에스더가 1인칭 화자인 '나'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두세 장쯤 진행되다가 멈추고 나면, 다음에 이어지는 장에서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가 (비록 시간대는 엇비슷하지만 공간과 등장 인물이 바뀌면서) 전혀 다르게 전개되는 식이다. 그런데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야기가 맨 처음엔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고, '마치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도무지 인물들 사이의 관계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느껴지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차츰 그 두 가지 이야기가 서로 조금씩 겹치면서 뒤섞이기 시작한다. 등장 인물들도 차츰 가까운 곳에서 스치듯이 지나치며 때로는 직접 서로 맞닥뜨리기 시작한다. 오래도록 평행선을 달리듯 따로 진행되는 두 이야기는 마침내 서로 더이상 피할 여지가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완전히 하나로 합류한다.(그 지점은 총 67장으로 구성된 그 방대한 소설이 막바지 클라이막스에 다가설 때쯤인 56장 말미에서야 발견된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또한 '안나의 이야기'와 '레빈의 이야기'가 전혀 상반된 공간에서 서로 전혀 다른 삶을 꾸려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되지만,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 두 주인공들은 차츰 필연적으로 서로에게 조금씩 가까이 다가간다는 점에서 디킨스의 소설 전개 방식을 닮았다.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면 브론스키는 좀 더 자주 레빈을 만나게 되고, 마침내 얼마 지나지 않아 스티바(오블론스키)의 권유에 이끌려 안나까지 만나게 된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등장 인물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상황 속으로 떠밀려 가고, 그때마다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판단과 행동을 요구받는다는 점이다. 안나, 브론스키, 카레닌, 레빈, 키티, 스티바, 돌리 등이 한결같이 그런 선택 앞에서 매번 갈등한다. 비단 이들뿐 아니라 소설 속에 아주 잠깐식 등장했다 사라지는 수많은 다른 인물들 또한 끊임없이 '다른 상황'에 부딪히고, 그때마다 다른 판단을 요구받는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러시아를 떠나 이탈리아를 전전할 때 만난 화가 미하일로프는 아마도 그런 측면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그는 자신의 그림들을 살피기 위해 일부러 찾아온 방문객들에게 자신의 작품들을 일일이 설명해 나가는데, '그림이 바뀔 때마다' 천당과 지옥을 오갈 만큼의 진폭으로 확연히 달라지는 감상평 때문에 그는 자신의 표정은 물론 자신의 작품과 예술가로서의 재능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과 생각까지도 (짧은 시간 동안에 자주) 근본적으로 뒤바꿔야만 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무리 안간힘을 다하더라도 자신들이 뿌린 선택의 씨앗이 파생시키는 사태의 예기치 못한 진행을 뒤바꾸지는 못한다. 자신들의 삶에 불쑥불쑥 개입하는 거대한 힘과 우연과 비이성은 인간으로서는 차마 거역하기 힘들 만큼 불가항력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사랑스러운 안나가 키티의 보호자를 자청하면서 함께 참여했던 무도회 장면부터 그렇다. 브론스키는 키티에게 구애하는 입장이었고, 키티는 브론스키에 이끌려 그보다 훨씬 더 진실한 사랑을 호소하는 청순남 레빈의 청혼까지도 거절한 마당이었지만, 정작 안나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브론스키에게 빠져들고 만다. 그 남자에게 매혹적인 생기로 화답하는 자신에게 스스로 놀라고 당혹해 하면서 황급히 모스크바를 떠난 안나는 자신의 평온한 가정이 있는 페테르부르크로 되돌아 왔다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전에 기차역까지 직접 마중나온 남편의 귀를 보고 느닷없이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고 만다. 남편에 대해 더욱 성실하리라 다짐했던 굳은 각오는 그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영영 다시는 복구되지 않는다.

 

 

 

이처럼 불가항력으로 브론스키에게 매혹되고 마는 안나의 모습은 마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연애의 형이상학'에서 갈파했던 '보이지 않는 무시무시한 종족에의 의지'를 눈 앞에서 생생히 목도하는 듯해서 소름이 돋을 정도다.

 

마치 그녀의 존재에서 어떤 것이 넘쳐흘러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반짝이는 눈빛과 미소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일부러 눈 속의 빛을 꺼 버리긴 했지만, 그 빛은 그녀의 의지에 반해 희미한 미소로 반짝였다.

 

『안나 카레니나』의 시공간은 『전쟁과 평화』보다는 훨씬 단촐한(?) 편이다. 안나와 카레닌과 브론스키가 살았던 페테르부르크, 안나의 오빠이자 브론스키의 친구인 오블론스키 공작 부부가 살았던 모스크바, 레빈이 농장을 가꾸며 살았던 포크로프스코예,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이탈리아를 떠돌며 지내던 안나와 브론스키가 나중에 터잡고 지낸 시골 영지인 보즈드비젠스코예 등이 거의 전부다. 그런데 그들은 러시아의 귀족답게(?) 끊임없이 서로의 삶의 터전을 자주 방문하여 오랫동안 머물며 함께 지낸다. 함께 사냥도 하고, 승마와 산책을 즐기기도 하고, 함께 테니스를 치기도 하고. 함께 만찬을 즐기며 열띤 토론도 벌인다.

 

이 소설의 거의 모든 장면들은 이처럼 등장 인물들 사이의 예정된 방문이 아니면 우연한 부딪힘으로 이뤄져 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 만남이 단순한 친지 방문이든 정식으로 초대받은 만찬 모임이나 화려한 무도회든, 혹은 우연히 찾아간 음악 연주회나 오페라 극장이든 그건 중요치 않다. 그 만남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궁극적으로는 '결혼과 가정'이라는 테두리와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이 소설이 흔히 가정 소설이라고 불리는 까닭도 오롯이 '사랑 때문에 남편과 아들과 가정까지 다 팽개친' 안나의 이야기만 다루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실 애시당초에 문제가 된 가정은 정작 카레닌 부부가 아니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라는 그 유명한 첫 문장의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 속에 등장하는 문제의 가정은 안나의 오빠인 오블론스키 부부였다. "오블론스키의 집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아내는 남편이 전에 자기 집의 가정교사로 있던 프랑스 여자와 바람이 난 것을 알아차리고, 남편에게 더 이상 한집에서 살 수 없다고 선언했다. …… 아내는 자기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고, 남편은 사흘째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가정을 수습하기 위해 안나는 일부러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찾아온다. 오빠의 부탁으로 올케 언니를 설득하기 위해서.

 

안나는 오빠를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에 왔지만 정작 미남 청년 브론스키부터 먼저 만난다. 그것도 기차역에서, 아주 우연히. 그러고 나서 오빠를 만나고, 올케 언니인 돌리를 설득하고, 페테르부르크로 되돌아 와서는 남편의 귀를 만나고, 외아들 세료자를 만나고, 결국 나중엔 (한때 브론스키를 두고 서로 경쟁 관계였던) 키티와 그녀의 남편인 레빈까지 만난다. 브론스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공작의 딸이자 아름다운 처녀였던 키티에게 청혼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가 유부녀인 안나부터 먼저 만난다. 그 다음으로 키티를 만나고, 친구인 스티바(오블론스키)를 만나고, 저녁 무도회에서 다시 안나를 만나고, 나중엔 안나 카레니나의 남편인 카레닌과도 어쩔 수 없이 자주 맞닥뜨린다.

 

부유한 미남 청년과 아름다운 귀부인 안나 사이에 급작스레 휘몰아친 격정적인 사랑은 평온하기만 하던 두 사람의 삶의 조건들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다. 마냥 우호적이었던 주변의 인간 관계들은 급속도로 붕괴되기 시작하고, 불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그들의 사랑은 온갖 모욕가 냉대와 시련을 불러 일으키지만, 안나와 브론스키는 오로지 그들 사이의 굳건한 사랑에만 의지한 채 모든 걸 희생하면서 꿋꿋하게 버텨 나간다. 심지어 안나는 자신의 불륜을 눈치챈 남편에게 자신의 부정을 먼저 털어 놓고 당당히 이혼을 요구한다. 자신의 인생 역정에 크나큰 흠결이 생긴 카레닌은 파장을 최소화하려 안간힘을 쓰면서 수습에 골몰한다.

 

출중한 능력을 지닌 남편과 함께 사랑스런 아들을 키우며 8년 동안 아무런 문제없이 행복하게 살았던 과거는 어느새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까마득한 딴 세상의 일처럼 변해 버리고, 오로지 브론스키와의 사랑만이 자신의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안나는 낯선 현실에 몹시 당혹해 하지만 결코 비굴해 하지도 않고 회피할 생각도 없다. 자기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한 일들에 대해 어느 누구를 탓하고 나무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녀는 브론스키와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이라도 기꺼이 감내하고 불편한 현실 조건에 맞선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안나 카레니나의 성격을 상징한다. 당대 러시아의 사교계를 빛냈던 사랑스럽기 그지 없던 안나는 그렇게 자신의 새로운 삶을 스스로 선택한다. 알게 모르게 그녀와 비슷한 처지에 빠졌던 수많은 다른 귀부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헤쳐나갔는지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톨스토이가 그려낸 '사랑과 번민과 고통과 기쁨이 함께 뒤섞인 안나의 모습'은 너무나 생생하면서도 현실적이어서, 그녀가 아무리 기를 쓰더라도 도저히 다른 길을 찾아낼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 정도다.

 

안나가 브론스키와의 사랑 때문에 때로는 몹시 행복해 하지만, 도처에 도사린 벅찬 현실적 난관 때문에 늘상 불안정한 삶과 가정(완전히 해체되지 못한 채 어정쩡한 외관만 유지하는 첫 번째 가정, 아들 양육 문제 때문에 남편과의 이혼을 마무리짓지 못하면서 브론스키와의 정식 결혼조차 이룰 수 없는 두 번째 가정)을 꾸려 나가는 데 비해 레빈의 삶과 가정은 너무나 튼실하면서도 평온하고 이상적이어서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청혼을 거절당했던 레빈과 키티가 오랜 좌절감과 단절을 극복하고 다시 사랑을 되찾고 행복한 결혼에 이르는 모습이나, 신혼 초에 불거지기 마련인 생경한 갈등까지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는 모습들은 흐뭇한 미소를 절로 떠올리게 만든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듯한 안나의 위태롭고도 투쟁적인 삶에 비하면 레빈의 일상들은 얼마나 평화롭고도 자연스러우면서 또한 목가적인가.

 

제인 오스틴의『오만과 편견』이 당대의 인습적인 결혼관이나 편견들에 용감히 맞선 끝에 극적으로 '결혼'에 이르는 주인공들을 묘사했다면, 『안나 카레니나』는 '결혼' 이후에 찾아온 또다른 사랑 때문에 번민하고 좌절하는 기혼녀 안나의 삶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몹시 대조적이다. 또한 안나에게 찾아온 결혼 이후의 사랑이 비자발적이면서도 불가항력적이고 운명적이라는 면에서 똑같은 '불륜 소설'로 분류되는 『마담 보바리』와도 사뭇 대조적이다. 가난한 시골 의사의 아내로서 살아가는 따분한 일상이 지겨워 자발적으로 불장난을 저지른 끝에 스스로 쌓아 올린 과오를 감당하지 못해 음독 자살로 자멸하고 마는 마담 보바리는 안나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보바리의 죽음에는 일말의 동정이나 미련도 느껴지지 않지만 안나 카레니나의 죽음엔 왠지 모르게 진한 아쉬움과 묘한 여운이 남기 때문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소설이 시작되기 전에 짤막한 성경 구절 하나가 먼저 제시된다.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안나를 자살로 몰고 간 것이 결혼 서약을 깨고 간통을 저지른 안나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안나의 죄악'은 스스로 찾아 나선 것도 아니며, 안나와 비슷한 처지면서도 감쪽같이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는 러시아 사교계의 다른 여성들과도 다른 것이었다. 또한 안나는 솔직하면서도 용기 있고 지성을 갖춘 여성이었다. '불륜을 저지른 죄'에 대해 분명하게 자각했으며 거듭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다. 또한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브론스키를 버려야 한다는 사실까지도 알았지만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워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브론스키와 동거하면서 '용서받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자신을 느꼈다. 그녀의 궁극적인 죄는 브론스키와의 간통도 아니었고, 카레닌보다 브론스키를 더 사랑한 것도 아니었다. 하느님보다 브론스키를 더 사랑한 게 궁극적으로 문제였다.

 

'용서받을 수 없을 만큼' 행복했던 그녀는 결국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였던 '브론스키와의 사랑'이 흔들리는 걸 느끼면서 절망감을 느낀다. 그리고 하느님을 버리면서까지 기대고 의지했던 브론스키를 도리어 심판하기 위해 '죽음'을 떠올린다. 브론스키가 더 이상 자신의 뜻대로 늘상 자신의 곁에만 머물러 있지 않을 거라는 불안감을 해결할 수 없을 바에는 차라리 죽음으로서 브론스키를 벌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마침내 기차에 몸을 던진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문득 소스라치게 놀란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하느님, 나의 모든 것을 용서하소서!" 라고 회개한다. 브론스키를 사랑한 죄뿐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인 '심판자'의 역할까지 떠맡은 불경죄를 뉘우친 셈이었다. 결국 톨스토이가 소설 앞에 내세운 에피그램은 안나의 죄악에 대한 신의 심판을 빗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삶을 버린 안나에 대한 '신의 탄식과 위로'를 담은 것인지도 모른다. '여태껏 꿋꿋하게 잘 살아오지 않았느냐, 심판은 나의 몫이거늘, 너는 왜 용서 대신 심판을 구하고 벌써 때이른 죽음을 맞은 것이냐.'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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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8-10 0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톨스토이도 쇼펜하우어를 좋아했군요. oren님 역시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좋아하시는 만큼 인간의 의지의 관점에서 <안나 카레니나>를 해석하셨음을 이번 페이퍼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oren 2018-08-10 12:14   좋아요 1 | URL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일부러 애쓴 흔적도 있는 듯해요. 왜냐하면 안나나 브론스키나 그 어떤 인물들도 사랑 때문에 고뇌하면서도 사랑 너머에 깔려 있는 철학적 문제에 대해셔는 결코 질문을 던지지 않거든요. 톨스토이가 쇼펜하우어로부터 배웠던 ‘사랑의 형이상학‘을 최대한으로 희미하게 드러내는 솜씨야말로 대문호답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 * *
사랑은 인간이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마지막 목적으로서, 심지어는 가장 중요한 사건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며, 가장 진실한 과업을 중단시키고, 때로 가장 위대한 정신도 흐리게 하며, 외교적 교섭이나 학술연구에 몰두할 때도 체면불구하고 연출하여 장관의 문서철이며 철학자의 원고 속에 연애편지나 머리카락을 끼워넣게 한다. 또 수많은 나날 시끄러운 사건에 가장 악질적으로 사주한 사람이나 동지끼리 맺은 가장 친밀한 사이도 끊어버리고, 견고한 사슬도 풀며, 허다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생명과 건강과 부와 지위와 행복을 빼앗아갈 뿐더러, 정직한 사람을 철면피로 만들고, 충신을 파멸시키려 한다. 이 모든 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토록 소란을 피우고 애쓰고 고민하며 불행에 빠지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외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듯 하찮은 일이 그처럼 큰 파문을 일으키며 안정된 생활에 소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인가? - 쇼펜하우어

포스트잇 2018-08-10 0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반으로 갈수록 레빈편은 건너뛰었습니다요..;;;;;;;;
다시한번 읽을 기회가 온다면, 님의 글을 상기하며 읽어볼랍니다^^

oren 2018-08-10 12:24   좋아요 0 | URL
저는 레빈 편도 아주 흥미롭게 읽었답니다. 때로는 너무 이야기가 길어져서 ‘안나의 이야기‘가 몹시 궁금할 때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가 바로 톨스토이의 분신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읽으니까 아주 재미있더라구요. 나중에 다시 읽으실 때는 레빈 이야기도 꼭 빼놓지 말고 마저 읽으시길요.^^
 
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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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허위가 엄연히 구별되어 있는 터에 전 세계와 대항하면서까지 진실을 고집한다고 할지라도 미친 사람은 아니다.

 - 조지 오웰, 『1984』

 

 * * *

 

참여작가는 그 시대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 때문에 결국 세월이 흐르면 낡은 작가가 되고 마는 숙명을 떠안는다. 그런 일반 통념에 반하는 작가가 바로 조지 오웰이다.

 

그가 1948년에 완성한 『1984』는 너무나 정치색이 짙은 소설이어서 일반적인 문학 작품과는 사뭇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의도한 정치적 신념이 예술적 목적을 압도한다고나 할까. 『1984』는 그만큼 암울한 분위기를 띄고 있으며, 우리가 이미 지나쳐 온 '1984년의 세계'에 얼마쯤 안도해도 좋을 만큼 디스토피아적이다.

 

조지 오웰은 영국이 지배하던 식민지 인도에서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창 시절 영국의 이튼 스쿨을 다녔으나,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다시 버마로 건너가 경찰에서 5년간 근무했다. 그는 '버마 시절'을 겪으며 영국의 식민 지배 가치관을 거부했으며, 자기 자신을 아나키스트 혹은 사회주의자로 자처했다. 그는 1930년대에 벌어진 스페인 내전에도 공화파로 참전했는데, 그 때의 경험으로 그는 '전체주의 정치사상'에 대하여 깊은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미 1945년에 발표한 『동물농장』을 통해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통렬한 풍자'로 일약 유명해진 터였다. 그

보다 4년 뒤에 발표한 『1984』는 앞선 작품보다 훨씬 더 나아갔다.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텔레스크린을 통해 모든 일상이 낱낱이 감시되고, 사상 경찰에 의해 생각할 수 있는 자유마저 통제된다. 극단적인 전체주의 사회인 오세아니아에선 심지어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성욕마저 통제한다. 체제에 반발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은 당국에 의해 체포되고, 구금되고, 가혹한 고문을 거쳐 결국 사회에서 '증발'된다.

 

『1984』에서 그려진 암울한 모습들은 과거에 일당 독재와 비밀 경찰을 통해 끔찍한 정치체제를 유지했던 많은 공산권 국가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구 소련, 동독, 동유럽 공산 국가들과 구 소련 연방을 이뤘던 여러 공산국가들이 대표적이다. 구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도 『1984』에 그려진 암울한 정치체제를 유지하는 나라가 있다면 그건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 국가요, 3대에 걸쳐 절대 권력이 세습되고 잔학한 통치가 이뤄지는 북한이다. 조지 오웰의 상상력이 어쩌면 이토록 오늘날의 북한의 모습과 빼닮았는지 경이로울 지경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윈스턴 스미스는 외부 당원이다. 서른 아홉 살인 그는 1930년경에 지어진 승리 맨션 7층에 홀로 살고 있다. 그의 주위에는 어디에든 거대한 컬러 포스터가 붙어 있다. 복도 한쪽 끝 벽에도 걸려 있고, 엘리베이터 맞은편 벽에도 붙어 있다. 포스터에서는 언제나 커다란 얼굴이 그를 노려보고 있다.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라는 글과 함께. 또한 윈스턴이 생활하는 곳곳엔 어디서나 '텔레스크린'이 그를 감시한다. 텔레스크린은 수신과 송신을 동시에 행한다. 이 기계는 윈스턴이 내는 소리가 아무리 작아도 낱낱이 포착한다.

 

 

물론 언제 감시를 받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사상경찰이 개개인에 대한 감시를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행하는지는 단지 추측만 할 수 잇을 뿐이다. ……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내는 소리가 모두 도청을 당하고, 캄캄한 때 외에는 동작 하나하나까지 감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야 했는데, 오랜 세월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그런 생활이 본능적인 습관이 되어 버렸다.(11∼12쪽)

 

 

소설의 배경인 1984년의 런던은 전체주의 초국가인 오세아니아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다. 윈스턴은 300미터나 하늘 높이 솟아 있는 피라미드 모양의 웅장한 건물에서 근무한다. 그의 일터는 진리부다. 그 건물의 전면에는 당의 세 가지 슬로건이 우아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런던에는 외형과 규모가 진리부와 비슷한 건물이 세 동이나 더 있었고, 이 건물들에는 모든 정부기관이 들어 있었다. 보도 · 연예 · 교육 및 예술을 관장하는 진리부(眞理部), 전쟁을 관장하는 평화부(平和部),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애정부(愛情部), 경제 문제를 책임지는 풍요부(豊饒部)가 그것이다. 이 이름들은 신어로 각각 '진부', '평부', '애부', '풍부'라고 한다. 이 가운데 가장 끔찍한 곳은 허울좋은 명칭이 붙은 애정부다.

 

 

애정부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곳이다. 그 건물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다. 윈스턴은 애정부에 들어가 보기는커녕 그 근처에 얼씬거린 적도 없다. 그곳은 공적인 일로만 들어갈 수 있는데, 그것도 가시철조망과 철문을 비롯하여 기관총이 숨겨져 있는 삼엄한 경계망을 통과해야 가능하다. 건물 외곽의 방책으로 이어진 길에서조차 고릴라처럼 생긴 위병들이 검은 제복에 곤봉을 차고는 어슬렁거린다.(13∼14쪽)

 

 

윈스턴이 텔레스크린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있는 사각지대에서 시도하는 최초의 반항은 '일기'를 쓰는 일이었다. 일기 쓰기는 불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발각될 경우 사형 아니면 적어도 강제노동 25년 형의 선고를 받을 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종이에 글을 쓴다는 것은 결단력이 필요한 중대 행위'였다. 그가 서툴게 쓴 글씨는 '1984년 4월 4일'이었다. 일기 쓰기를 통해 그는 좀 더 구체적으로 체제에 맞설 수 있는 방법과 행동들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윈스턴은 진리부의 기록국에서 일한다. 정정이 필요한 논문이나 뉴스 기사들을 수정해서 '과거를 날조'하는 일이 주된 업무였다. 정정된 기사들을 바탕으로 신문을 다시 인쇄하고, 원래의 신문을 폐기하고 정정된 기사가 실린 새 신문을 신문철에 꽂는다. '이같은 과정은 신문뿐만 아니라 일반 서적, 정기간행물, 팸플릿, 포스터, 전단, 영화, 녹음테이프, 만화, 사진 등 조금이라도 상관없이 그 모든 것에 적용되었다.'

 

그들은 근무시간 도중에도 틈틈이 '이 분 증오(Two Minutes Hate)'를 통해 체제 전복을 도모했던 반역자인 골드스타인을 향해 극도의 집단적인 분노와 증오를 표출함으로써 '체제 수호'를 위한 정신 교육에 동원된다. 반역자들에 대한 증오가 절정에 달할 때면 으레 빅 브라더의 얼굴이 스크린에 나타난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 "나의 구세주여!' 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때 모든 사람들이 "빅──브라더! ……빅──브라더!  ……빅──브라더!"라는 찬가를 낮고 느린 가락으로 반복해서 부르기 시작했다. '빅'과 '브라더' 사이가 길게 늘어지면서 이어지는 그 장중한 합창은 마치 야만인들이 맨발로 춤추며 쳐대는 북소리를 배경 음악으로 깔고 있는 듯했다.(29쪽)

 

 

기록국 사무실에서 진행된 '이 분 증오' 활동 시간에 윈스턴이 만난 인상적인 사람이 둘 있었다. 복도를 오가며 자주 얼굴을 마주친 여자는 창작국에서 근무하는 스물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윈스턴은 행동이 민첩하고 대담해 보이는 그녀가 처음부터 싫었다.(윈스턴은 특히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싫어했다. '고집스럽게 당에 충성하는 사람들, 슬로건을 곧이곧대로 신봉하는 사람들, 아마추어 스파이들, 이단의 냄새를 귀신같이 맡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여자들, 그것도 젊은 여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한 사람은 '오브라이언'이라는 내부 당원이었다. 뭔가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은밀한 직위에 있는 남자였다. 그가 오브라이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정치적인 신조가 불완전하리라는 은밀한 믿음, 아니 단순히 믿음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는 '텔레스크린이 없는 데서' 단 둘이 만날 수만 있다면, 한번쯤 말을 걸어봄직한 사람이었다.

 

윈스턴은 그날 오전 중에 있었던 '이 분 증오' 시간에 일어났던 여러 풍경들을 떠올리면서도 무의식중에 계속 일기를 쓰고 있었다. 그는 큼직한 대문자로 보기 좋게 다음과 같이 똑같은 글을 되풀이해서 일기장에 적어 넣었다.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

 

이렇게 무의식중에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된 윈스턴 스미스의 '반체제 의식'은 뜻밖의 일로 한층 탄력을 받게 된다. 사무실 복도에서 가끔씩 마주치던 검은 머리의 대담한 여자(줄리아)가 어느 날 자신과 갑작스럽게 맞닥뜨려 쓰러지는 그 짧은 틈을 이용해 자신의 손에 몰래 '종이쪽지'를 건네 준 것이 시작이었다. 그 쪽지엔 놀랍게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사실 윈스턴은 기혼자였지만 아내 캐서린과 헤어진 지 오래였다. 당은 이혼을 허락하지 않은 대신, 아이가 없다면 차라리 별거를 하라고 권했다. 당에서는 '남녀 간의 애정'조차 통제했다.

 

 

당의 목적은 단순히 남녀간에 당이 통제할 수 없는 애정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막자는 데 있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진짜 목적은 성행위로부터 얻게 되는 모든 쾌락을 사전에 제거하려는 데 있었다. 결혼하든 안 하든 사랑보다 더 죄가 되는 것은 성욕이었다. 당원들 간의 모든 결혼은 담당 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만 하는데 두 남녀가 서로의 육체에 이끌린 듯한 인상을 보이기만 해도 그 결혼 허가는 곧바로 취소되었다. 유일하게 인정된 결혼의 목적은 당에 봉사할 아이를 낳도록 하는 데 있었다. 성교는 마치 관장을 하는 것처럼 역겨운 행위로 간주되었다.(93∼94쪽)

 

 

'당신을 사랑합니다'란 글로 인해 살고 싶은 욕망이 불타오른 윈스턴은 '온갖 현실적 제약과 난관'을 뚫고 감시의 눈을 피해 그녀와의 밀회를 즐긴다. 누구보다도 열성 당원으로 왕성한 활동을 보여왔던 그녀에 대해 오랫동안 사상 경찰이나 스파이단의 정보원으로까지 오해했던 윈스턴은 그녀로부터 뜻밖의 고백을 듣게 된다.

 

"당신 얼굴에 쓰여 있는 걸 봤어요. 그래서 기회를 노렸죠. 저는 얼굴만 보고도 당의 충복이 아닌 사람을 금방 알아맞힐 수 있어요. 당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놈들'에게 저항하고 있다는 것을 알겠더군요."(173쪽)

 

윈스턴과 줄리아의 밀회는 점점 더 위험한 국면으로 빠져든다. 둘만이 밀회를 즐길 수 있는 방을 빌리기에 이른 것이다. 둘은 그것이 미친 짓이란 걸 알았다. 그것은 '일부러 무덤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과 같았다. 윈스턴과 줄리아는 채링턴 씨의 상점 2층에 있는 방에서 더 자주 밀회를 즐겼고, 두 사람은 거기서 사카린 대신 설탕을, 싸구려 커피 대신 진짜 커피를, 흑딸기 이파리가 아닌 진짜 홍차를 즐겼으며, 줄리아는 얼굴에 화장을 하고 향수까지 뿌렸다. 거기서만큼은 당의 동지가 아니라 진짜 여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고물상 위의 그 방이 계속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방이 누구의 침해도 받지 않고 거기에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윈스턴은 그 방에 가 있는 것 같은 안온함을 느꼈다. 그 방은 하나의 세계였고, 멸종된 동물들이 다시 살아나서 돌아다니는 과거의 주머니였다.(213쪽)

 

 

윈스턴에게 마침내 고대하던 순간이 왔다. 오브라이언에게서 기대했던 메시지가 온 것이다. 윈스턴은 오브라이언의 부름에 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일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옮겼지만, 이제는 글을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라고 여겼다. 윈스턴과 줄리아는 오브라이언을 만나러 내부당원의 으리으리한 저택을 찾아간다. 방문객을 맞은 오브라이언은 텔레스크린을 미리 끄는 친절까지 베푼다. 윈스턴은 마침내 용기를 내어 방문 동기를 말한다.

 

"저희는 당을 전복시키려는 모종의 비밀단체와 음모가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당신이 거기에 가담해서 일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희도 거기에 가담해서 일하고 싶습니다. 저희는 당의 적입니다. '영사'의 강령을 믿지 않습니다. 사상범입니다. 게다가 간통자이기도 합니다. 저는 저희 운명을 당신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240쪽)

 

 

오브라이언은 와인을 대접하며 그들을 냉담하게 환영한다. "자, 건강에 좋은 것이니 마십시다. 우리의 지도자, 임마누엘 골드스타인을 위해!" 라고. 그리고는 골드스타인이 쓴 '그 책'을 보내 줄테니 읽고 다시 돌려달라고 말한다. 얼마 후 윈스턴은 '그 책'을 은밀한 방법을 통해 전달받는다.

 

책의 제목은 《과두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제》였다. 소설에서는 윈스턴이 줄리아에게 이 책을 읽어준다는 설정으로 무려 43쪽에 걸쳐 책 내용이 아주 길게 이어진다. 윈스턴이 먼저 펼친 <제3장, 전쟁은 평화>에서는 '전쟁의 본질'을 다루고, <제1장, 무지는 힘>에서는 '계급투쟁의 본질'을 다루는데, <조지 오웰이 쓴 정치철학 강의>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내용이 체계적이면서도 깊이 있고 논리정연하다. 반체제 인사인 골드스타인이 쓴 그 책의 내용이야말로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1984년의 역사적인 배경과 정치·경제적인 제반 환경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어서 소설 『1984』를 한층 더 깊숙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독자들을 이끄는 훌륭한 교재가 된다.

 

채링턴 씨의 2층 방에서 밀회를 즐기던 윈스턴과 줄리아는 끝내 그곳에서 사상 경찰에게 체포되고 만다. 방을 선뜻 빌려줬던 채링턴 영감은 나중에 알고 보니 서른다섯 살쯤 된, 빈틈없고 냉정한 얼굴의 소유자로 드러난다.

 

소설의 <제3부>는 거의 전부가 감방 안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하는 윈스턴의 이야기뿐이다. 반역죄를 저지른 정치범이자 사상범인 윈스턴에게 가해지는 모진 고문은 뜻밖에도 오브라이언의 몫이었다. 애정부에서 그를 만난 건 이미 관례적인 예비 심문에서 주먹과 곤봉과 쇠몽둥이와 구둣발질에 만신창이가 된 이후였다. 오브라이언의 전기 고문은 마치 '학생과 선생 사이처럼' 진행된다. 윈스턴은 과거에 일어난 명백한 사실에 대해서조차 부정을 강요하는 오브라이언의 심문에 대해 완강히 거절한다. 그건 당에 반항하는 일이었다. 오브라이언이 새삼 당의 슬로건을 상기시킨다.

 

"과거를 지배하는 데 대한 당의 슬로건이 있네. 그걸 한 번 외워보게."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345쪽)

 

 

그렇다. 당이 현재를 지배하고 있으므로, 모든 과거는 당의 뜻대로 조작되고, 날조되고, 바뀌어야 한다. 그게 바로 과거를 지배하는 일이므로. 오브라이언은 '네 개의 손가락'을 윈스턴에게 펼쳐 보이면서 그게 '다섯 개'라고 대답하도록 끈질기게 강요한다. 당이 네 개가 아니라 다섯 개라고 말하면 결국 '다섯 개'가 맞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윈스턴은 전기 고문의 다이얼이 최대치에 이를 때까지도 '다섯 개'라는 대답을 선뜻 내놓지 못한다. 그게 네 개인데 어떻게 다섯 개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식으로 오브라이언의 고문은 계속된다.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하는 도중에도 간간이 자못 친절한 태도로 윈스턴과 길고 긴 대화를 나눈다. 온갖 사상범들을 잔인하게 고문할 게 아니라 간단히 없애버리면 그만일 텐데, 왜 당국은 그토록 힘들여서 정치범들을 고문하고 심문하는지, 당은 어떻게 권력을 유지하는지, 우리는 왜 권력을 원하는지 등에 관한 '고문실의 대화' 속에는 오웰의 예리하고도 깊이 있는 통찰들이 담겨 있다.

 

"…… 당은 오직 그 자체의 이익을 위해서 권력을 추구하네. 우리는 타인의 행복 따위에는 관심도 없네. 오로지 권력에만 관심을 둘 뿐이지. 재산도, 사치도, 장수도, 행복도 아닐세. 오직 권력, 순수한 권력만 바랄 뿐이네. 순수한 권력이 뭐냐고? 자네도 그게 뭔지 이해하게 될 걸세.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과두정치와 다르네. 우리와 다르든 비슷하든 과거의 사람들은 모두 겁쟁이이고 위선자일세. 독일의 나치와 소련의 공산당은 그 수법에서는 우리와 매우 흡사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동기를 인정할 만한 용기가 없었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한시적으로만 권력을 장악하겠다고 약속하고는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낙원이 도래할 것이라고 꾸며댔지.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믿기까지 했네. 우리는 그들과 다르네. 누구든 권력을 장악하면 그것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 법이지. 권력은 수단이 아닐세. 목적 그 자체이네. 혁명을 보장하기 위해서 독재를 행사하는 게 아니라 독재를 하기 위해서 혁명을 일으키는 걸세. 박해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박해일 뿐이네. 고문의 목적은 고문이고 말일세. 그처럼 권력의 목적도 권력 그 자체이네. 이제 내 말을 이해하겠나?"(367∼368쪽)

 

 

윈스턴은 오브라이언의 가혹한 고문 때문에 점차 '당에 대한 이해와 수용' 쪽으로 기울지만 끝내 감정적인 벽을 넘지 못한다. 결국 그는 오브라이언에게 '빅 브라더를 증오한다'고 고백하고 '마지막으로 밟아야 할 단계'인 공포의 101호실로 끌려간다. 거기서 가장 끔찍한 공포와 전율을 마주한 그는 자신부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순간에 줄리아마저 배신한다. 모진 고문과 세뇌교육 끝에 정상적인 사고 능력까지 망가진 채 석방된 윈스턴은 과거 반체제 인사들이 자주 드나들던 체스넛트리 카페에서 술로 허송세월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애정부로 돌아가 모든 죄를 고백하고,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공범자로 만든다. 그리고는 총살을 당한다.

 

소설 『1984』는 고도로 정보화된 미래 사회에 대한 암울한 예언이나 경고를 담은 상징적인 작품이 되었다. 이 소설에 담긴 '고도로 억압되고 통제된 감시 사회'는 과거의 숱한 공산권 국가들뿐 아니라, 2018년 현재까지도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 북한 정권의 가공할 만한 지배 체제를 거듭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인간의 얼굴을 짓밟고 있는 구둣발'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회이다. 오웰이 상상했던 1984년의 공포스런 정치 체제는 다행히 1980년대 후반에 진행된 소련 연방의 해체와 더불어 급격히 줄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 일부 국가들의 암담한 현실은 여전히 당혹스럽기만 하다.(게다가 빅 브라더를 연상시키는 통치자가 핵무기 버튼까지 움켜쥔 채 전세계를 상대로 게임을 벌이는 듯한 모습이 현실에서 벌어질 줄 그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조작과 날조, 감시와 통제, 억압과 처벌로 유지되는 끔찍한 사회를 차츰 견디다 못한 윈스턴이 오랫동안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어 왔던 오브라이언으로부터 도리어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끝내 제거되는 이야기는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윈스턴이 '반체제 혁명을 꿈꾼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줄리아마저 고문 과정에서 끝내 배신하고, 석방된 이후에 우연히 서로 조우했을 때조차 이내 서로 냉랭하게 돌아서는 모습은 너무 황량하고도 서늘하다. "그런 일이 닥치면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죠."라는 그녀의 말이 귓가에서 온전히 다 사라지기도 전에 텔레스크린에서는 마치 그들 두 사람을 비웃는 듯한 음악이 흘러 나온다.

 

울창한 밤나무 아래

나 그대를 팔고, 그대 나를 팔았네…….

 

물론 가장 진한 아이러니는 빅 브라더를 타도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오브라이언을 만나기를 갈망했고, 그로부터 온갖 고문과 심문을 당하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선생님에게 배우는 학생처럼' 사상 교육을 받은 윈스턴이 마침내 죽는 순간에 빅 브라더를 사랑하게 된 사실이다. 이보다 더 완전한 파멸과 아이러니가 어디에 있겠는가. 가눌 수 없는 허탈감이 밀려드는 소설의 맨 끝줄을 온전히 다시 음미하기 위해서라도 소설의 처음으로 다시 되돌아갔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두 번째로 읽었을 때 오웰의 진면목을 훨씬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다는 사실도?

 

윈스턴은 빅 브라더의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그 검은 콧수염 속에 숨겨진 미소의 의미를 알아내기까지 사십 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오, 잔인하고 부질없는 오해여! 오, 저 사랑이 가득한 품 안을 떠나 제멋대로 고집을 부리며 지내온 유랑의 삶이여! …… 그러나 잘되었다. 모든 것이 잘되었다. 투쟁은 끝이 났다. 그는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브라더를 사랑했다.(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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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은 발표 당시에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현대에 와서 대단한 호평을 받는 작품으로 자리매김된 걸작 소설이다. 이 작품을 읽어 본 독자들은 어쩌면 '당대의 혹평'을 재빨리 수긍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작품의 기괴한 분위기와 막장으로 흐르는 듯한 온갖 비도덕적 내용들이 소설 속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인간의 격정'을 너무나 독창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달리 견줄 작품을 찾기 어렵다.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허먼 멜빌의 <모비딕>과 더불어 ‘영문학 3대 비극’으로도 묶인다. 그러나 이 세 작품이 지닌 '인간 본성에 대한 심오한 비극성'이 서로 아무리 상통하는 면이 크다고 하더라도, 이들 작품들은 이야기의 내용이나 주제 자체가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서 어떤 식으로든 한 데 묶이기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작품처럼 여겨진다.

 

『폭풍의 언덕』은 '운명적으로 엮인 사랑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지속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여러 뛰어난 다른 비극 작품들을 함께 떠올리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엉뚱하게도(?)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비극의 모든 요건을 갖춘 가장 짜임새 있는 드라마'라고 극찬한 그 드라마가 도대체 무슨 연유로 『폭풍의 언덕』과 닮을 수 있을까,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언뜻 생각해 보더라도 그들 사이의 공통점이 한둘이 아니다.

 

소포클레스 비극의 주인공인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출생'이 완전히 베일에 싸인 채 버림받은 아이였다가 나중에 양떼를 치는 목자의 손에 의해 길러지는데, 이런 배경은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인 히스클리프의 사정과 너무나 흡사하다. 히스클리프 역시 '자신의 출생'을 전혀 모르는 떠돌이였다. 소설의 주무대인 워더링 하이츠의 큰 주인인 언쇼가 무려 60 마일이나 떨어진 리버풀에 여행을 갔다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그와 마주치는 바람에 데려오게 된, 다시 말하자면 '주워 온 아이'였기 때문이다. 히스클리프와 언쇼 가문과의 '운명적인 사슬'은 그렇게 아주 우연한 동기에서 비롯된 셈인데, 이 대목에서 나는 오이디푸스 왕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아버지와 우연히 마주친 바로 그 '운명의 삼거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오, 삼거리여, 그리고 후미진 골짜기여,
너희들은 내 손에서 내 자신의 피인 내 아버지의
피를 마셨으니, 아마 기억하고 있으리라.
너희들이 보는 앞에서 내가 어떤 일을 저질렀으며,
그 뒤 또 이곳에 와서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오오, 결혼이여, 결혼이여, 너는 나를 낳고는 다시
네 자식에게 자식들을 낳아줌으로써 아버지와 형제와
아들 사이에, 그리고 신부와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 근친상간의 혈연을 맺어주었으니,
이는 인간들 사이에 일어난 가장 더러운 치욕이로다.

 - 《오이디푸스 왕》1398∼1408행

 

 

『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가운데 히스클리프의 비중이나 역할은 단연 압도적이다. 히스클리프는 언쇼 집안의 또래 아이들인 힌들리 언쇼와 캐서린 언쇼 남매와 함께 자라고, 캐서린 언쇼를 운명적으로 사랑한다. 나중에 캐서린은 이웃마을 대저택에 사는 드러시크로스 집안의 장남인 에드거 린튼과 결혼하고, 히스클리프는 에드거의 여동생인 이사벨라와 결혼하지만, 이사벨라와의 결혼은 정작 자신이 사무치게 사랑하는 연인인 캐서린과의 결혼이 좌절된 데 따른 반발이자 부작용일 뿐이요, 숙명적으로 끈질기게 이어지는 '어긋나는 운명'의 본격적인 서곡일 뿐이다.

 

『오이디푸스 왕』이야기도 꼭 그렇다. 남자 주인공의 기구한 운명이 지속적으로 스토리를 지배한다는 점이 너무나 흡사하다. 또한 오이디푸스의 '잘못된 결혼'으로부터 본격화된 비극이 자식대까지 아주 길게 이어진다는 점도 『폭풍의 언덕』을 꼭 닮았다. 오이디푸스 왕과 이오카스테와의 결혼이야말로 단지 우발적으로 일어난 단발적인 사건인 '부친 살해'보다 훨씬 더 지속적이고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잘못된 결혼'으로 태어난 자식들이 서로 뿌리 깊은 증오를 품거나 고결한 희생정신을 발휘하는 점도 닮았다. 오이디푸스 왕의 두 아들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는 권력 다툼 끝에 서로가 서로를 살해하고, 오이디푸스 왕의 딸인 안티고네는 국법을 어기고 오라비의 장례를 치러주다가 비극적 운명을 맞는다. 그게 바로 소포큭레스의 또다른 비극인 『안티고네』이야기다.

 

『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자식들도 오이디푸스의 자식들과 엇비슷한 운명을 걷는다. 히스클리프와 이사벨라 사이에서 태어난 허약한 린튼은 아버지에 의해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강요받는 삶'으로 점철된 끝에 일찍 죽는다. 에드거 린튼과 캐서린 언쇼 사이에서 태어난 캐시('캐서린 린튼'으로 자라서 나중에 '캐서린 히스클리프 부인'이 된다)가 히스클리프의 아들인 린튼과 결혼할 뿐만 아니라, 린튼이 죽고 미망인이 된 이후에도 끝내 외삼촌의 아들인 힌들리 언쇼까지 사랑으로 포용하는 모습은 일견 안티고네의 모습과 닮았다.

 

다른 인물들에 비해 유독 오래 살아남은 히스클리프가 생애 막바지에 '나흘 동안이나 끼니를 굶은 끝에' 스스로 죄 많은 삶을 마감하는 모습에서는 어쩐지 늙은 오이디푸스 왕이 죄책감에 사로잡혀 제 손으로 제 눈을 멀게 한 끝에 방랑길을 떠나는 모습이 어른거리는 듯하다. 눈먼 오이디푸스가 안티고네의 손에 이끌려 콜로노스에 있는 복수의 여신들, 일명 '자비로운 여신들'의 성역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평화를 얻고 고통스런 삶을 마감하는 이야기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 담겨 있는데, 히스클리프가 죽기 직전 며칠 동안에 보인 모습인, '그의 눈에는 이상하게도 기쁨에 찬 빛이 서려 있었고, 그 때문에 얼굴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던 것과 흡사하다. 히스클리프는 그때 이미 죽기로 작정하고 곡기를 끊기 시작한지 이틀째였다. 그는 곧이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젯밤엔 지옥의 문턱까지 갔었어. 오늘은 내 천국이 보이는 곳에 있지만. 난 지금 천국을 눈앞에 보고 있어. 불과 3피트도 떨어져 있지 않아!"(548쪽)

 

 

『오이디푸스 왕』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나 길었다. 애당초 나는 『폭풍의 언덕』을 읽는 동안에 소포클레스의 작품까지 떠올릴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폭풍의 언덕』에서 다뤄지는 사랑과 질투가 끝내 극도의 분노와 뒤섞여 마침내 '광기어린 복수'로 치닫는다는 점에서는 차라리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를 닮은 점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 두 비극에서는 남자 주인공의 얼굴색이 까맣다는 점도 서로 닮았다. 질투심에 사로잡혀 죄 없는 데스데모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오셀로는 무어인 용병대장이었고, 캐서린에 대해 광적으로 집착하다가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히스클리프도 '얼굴색이 까무잡잡한 아이'였다.

 

온갖 격정이 광풍처럼 휘몰아친 뒤 마침내 거센 폭풍이 잦아들 무렵, 히스클리프가 자조섞인 투로 소설 끄트머리에서 내뱉는 말인 "초라한 종말이군 그래." 라는 말은 일견 카프카의 소설 『소송』의 결말 부분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초라한 종말이군 그래." 그는 방금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나의 맹렬한 노력이 이렇게 끝장난단 말인가? 두 집을 부숴버리려고 지렛대며 곡괭이를 장만해 놓고 헤라클레스와 같이 괴력을 낼 수 있도록 나 자신을 훈련했건만, 막상 만반의 준비가 되고 내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자 어느 쪽 집에서도 기와 한 장 들어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으니! 나의 숙적들은 나를 넘어뜨리지는 못했어. 이제야 말로 바로 그들의 후손에게 복수를 할 때지. 내 힘으로 할 수 있지. 그리고 아무도 막지 못해. 하지만 그래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난 사람을 때리고 싶지 않아.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귀찮아졌단 말이야! 이렇게 말하니 마치 오직 아량의 미덕을 보이기 위해서 이제까지 애를 써온 것처럼 들리는데, 그와는 거리가 먼 얘기지. 난 그들의 파멸을 즐길 만한 힘도 없어졌고 쓸데없이 남을 파멸시킬 생각도 없어졌단 말이야.(538쪽)

 

 

불과 서른 살에 죽은 에밀리 브론테(1818∼1848)는 여러모로 『오만과 편견』의 작가 제인 오스틴(1775∼1817)과 비교된다. 둘 다 목사의 딸이었고 독신으로 삶을 마감했다는 공통점만 있을 뿐 '그들의 세계'는 사뭇 달랐다. 심지어 그들은 같은 성(性)에 속한 것 같지도 않을 정도다. 어느 비평가의 말대로 "제인에게는 열정이 없지만 브론테는 열정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그만큼 브론테의 소설은 격정적인데, 그녀가 살아생전에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요크셔의 거친 황무지를 그대로 빼닮았다는 생각부터 앞선다. 폭풍이 부는 바람 많은 언덕과 그녀 자신의 가족을 둘러싼 삶 말고는 다른 세계를 거의 경험하지 못했던 그녀는 순전히 '공상의 세계' 속에서 살았던 셈인데, 소설의 분위기도 오스틴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백일몽처럼 환상적이면서도 멜로드라마처럼 처절하고 비극적이다.

 

그러나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이 어딘가 비현실적이고 막장 드라마처럼 읽힌다고 해서 비난받았던 '당대의 혹평'은 브론테가 추구한 '진정성'을 과소평가한 때문이었다. 인간 실존의 궁극적인 진실을 탐구하려는 작가의 진지함이야말로 '도덕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뚜렷한 근거는 그녀의 다음 시에서도 발견된다.(에밀리는 언니인 샬럿과 여동생 앤과 함께 필명을 써서 『커러, 엘리스, 액턴 벨의 시집』을 펴냈다. 『폭풍의 언덕』이 출판되기 1년 전이었다. 후대의 비평가들은 한결같이 '에밀리에게 진정한 시인으로서의 재능이 엿보인다'고 평가했다.)

 

나는 걷노라, 하지만 옛 영웅들의 발걸음이나

높은 도덕의 길,

오랜 과거의 역사가 보여 주는 희미한 형태들,

반쯤 두드러진 얼굴들 사이를 걷는 것은 아니리니.

 

나는 걷노라, 나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ㅡ

또 다른 안내를 택하는 것은 성가신 일인 것을ㅡ

양치식물 계곡에 회색의 양떼들이 풀을 뜯는 곳,

거친 바람이 산허리에 불어 오는 곳.

 

저 외로운 산들은 무엇을 보여 줄 수 있을까?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영광과 슬픔이겠지:

한 인간의 마음에 감정을 일깨우는 대지는

천국과 지옥의 두 세계 가운데 있을 테니.

 

 

그렇다. 작가가 그리고 싶었던 세계는 천국과 지옥의 두 세계가 맞닿아 있는 '바람부는 대지 위의 세계'였다. 리버풀에서 집시처럼 떠도는 부랑아로 살던 히스클리프는 어느 날 우연히 '주변에서 두 번째로 멋진' 워더링 하이츠의 저택으로 이끌려 오지만, 거기에서 여섯 살 꼬마 아가씨인 캐서린 언쇼라는 천국과 끊임없이 그를 학대하는 그녀의 오빠 힌들러 언쇼라는 지옥을 만난다. 언제나 거친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는 언덕 주변의 삶에서 히스클리프에게 유일한 삶의 기쁨은 언제나 다정하고 발랄하고 살갑게 대하는 캐서린뿐이었다.

 

(2012년에 개봉된 『폭풍의 언덕』의 한 장면, 감독: 안드리아 아놀드, 주연: 카야 스코델라리오_캐서린 언쇼)

 

 

친아들 힌들리보다 자신을 더 아껴주던 언쇼 영감이 죽고 나자 상황은 더욱 나빠진다. 잠시 유학을 떠났던 힌들리가 젊은 아내를 데리고 워더링 하이츠로 급작스레 되돌아온 것이다. 히스클리프는 하루 아침에 '헛간에서 지내야 할 정도로' 새로운 포악한 주인인 힌들리로부터 걸핏하면 폭행 당하고 모진 냉대를 받는다. 이때부터 히스클리프에게는 깊은 증오와 복수심이 싹튼다. 게다가 캐서린은 이웃 마을 대저택에 사는 에드거 린튼 도련님에게 '시집갈 마음'이 생긴다. 그녀가 아무리 히스클리프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인 결혼 상대'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좌절한 히스클리프는 갑자기 워더링 하이츠에서 사라지고 만다.

 

3년 만에 다시 폭풍이 부는 언덕을 홀연히 찾아온 히스클리프는 이미 결혼한 캐서린이 살고 있는 드러시크로스의 대저택을 주저없이 찾아간다. 그녀의 남편인 에드거의 존재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는 그들 둘 사이의 대화야말로 앞으로 닥칠 '엄청난 폭풍우와 비극'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내일쯤이면 꿈같다는 생각이 들 거야!" 아씨는 외쳤어요. "다시 너를 보고 만지고 이야기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거야. 잔인한 히스클리프! 사실은 이렇게 맞이해 줄 것도 없지. 삼 년 동안이나 자취도, 소식도 없이 내 생각은 하지도 않았으니!"

 

"네가 나를 생각한 것 이상으로 널 생각했을 거야!" 그는 중얼거렸어요. "캐시, 네가 결혼했다는 소식은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 그리고 저 밑 뜰에서 기다리는 동안 이런 생각을 했지. 아마 놀랄 것이고 기쁜 척하겠지만, 그러는 너의 얼굴을 한 번만 보고, 그 뒤에는 힌들리에 대한 원한을 풀고, 그러고는 자살을 해서 법의 신세를 지지 않겠다고 말이야. 그러나 네가 이렇게 반겨줘서 그러한 생각이 내 마음에서 사라져버렸어. ……" (159∼160쪽)

 

 

히스클리프는 어느새 술주정뱅이로 전락한 채 도박에 빠져 지내던 힌들리에게 찾아가 1년치 방세를 미리 건네 주면서 다시 워더링 하이츠에 눌러 앉는다. 사라진 3년 동안에 히스클리프는 사람이 몰라보게 달라졌고 돈도 많이 벌어온 듯했고, 집주인인 힌들리를 제압할 정도로 건장한 모습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히스클리프가 차츰 드러시크로스 저택에 찾아갈 수 있는 어엿한 손님이 되자 엉뚱하게도 에드거의 여동생인 이사벨라 린튼이 걷잡을 수 없이 그에게 빠져든다. 캐서린이 히스클리프의 본심을 꿰뚫어보고 "만약 아가씨가 귀찮다고 생각되면 그는 아가씨를 참새 알처럼 쥐어서 터뜨릴걸. 그가 린튼 집 사람을 사랑할 리 없다는 걸 난 알고 있어." 라고 경고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히스클리프가 성가실 정도로 캐서린을 자주 찾아오고 심지어 자신의 여동생까지 넘보게 되자 에드거는 마침내 폭발한다. 힘으로는 도저히 그를 제압할 수 없게 되자 에드거는 하인들을 시켜 그를 강제로 집밖으로 쫓아내려고 하지만 캐서린이 도리어 나약한 남편의 그런 행동을 비웃고 방해한다.

 

 

"아! 세상에! 옛날 같으면 이 정도 용기로도 기사가 됐을 텐데! 그래요. 우리가 졌어요. 우리가 졌어! 히스클리프는 왕이 생쥐 떼에게 군대를 보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에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을 거예요. 기운 내요. 다치지는 않을 테니까! 당신 같은 사람은 양 새끼가 아니라 젖먹이 토끼 세끼예요." 캐서린 아씨가 소리쳤어요.

 

"이 젖내 나는 겁쟁이를 남편으로 둔 행복을 즐기기를 빌어, 캐시! 당신의 취향을 치하하지. 나보다도 이렇게 침 흘리고 벌벌 떠는 녀석을 좋아하는 취향 말이야! 이런 녀석은 주먹이 아니라 발로 뻥 차줘야 속이 후련하겠는데. 그가 울고 있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무서워서 까무러치려고 하고 있는 거야?"(190쪽)

 

 

대소동 끝에 히스클리프는 드러시크로스 저택을 쫓기듯 도망쳐 나오고, 에드거와 캐서린의 사이는 회복할 수 없는 파탄지경으로 내몰린다. 에드거는 서재에 박혀 지내고 캐서린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 채 사흘씩이나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단식을 계속했다. 급속도로 쇠약해진 캐서린은 절망적인 발작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며 한탄한다.

 

 

"오, 내 몸이 불덩이 같아! 밖으로 나갔으면, 다시 야만에 가까운, 억세고 자유로운 계집아이가 되어 어떠한 상처를 입더라도 미치거나 하지 않고 깔깔 웃을 수 있었으면! 왜 나는 이렇게 달라졌을까? 왜 조금만 뭐라고 해도 내 피는 끓어오를까? 저 언덕 무성한 히스 속에 한번 뛰어들면 틀림없이 정신이 날 텐데. 다시 창을 활짝 열어줘, 빨리.(206쪽)

 

 

그러는 와중에 이사벨라 린튼은 히스클리프와 함께 몰래 마을에서 달아난다. 큰 병을 얻은 끝에 악성 뇌막염까지 시달렸던 캐서린은 에드거의 극진한 보살핌 덕에 간신히 병을 이겨낸다. 달아난지 두 달이 지난 뒤에야 에드거는 여동생으로부터 '용서해 달라'는 짤막한 편지를 받는다. 히스클리프와 결혼했으며 지금은 워더링 하이츠에서 지내고 있다는 말과 함께. 하녀 엘렌에게도 따로 편지가 왔다. 그런데 신혼여행에서 갓 돌아온 신부가 쓴 편지와는 너무나 딴판이었다. 그녀는 벌써부터 히스클리프를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만약에 인간이라면 미친 것인지, 만약 인간이 아니라면 귀신인지? 내가 이렇게 묻는 이유는 말하지 않겠어. 그러나 엘렌이 알고 있다면 대체 내가 결혼한 상대가 무엇인지 설명해 줬으면 해."

 

시집간 이사벨라 아가씨를 만나보러 급히 워더링 하이츠로 찾아간 하녀 넬리(엘렌 딘)은 도리어 히스클리프에게 애원하고 부탁하는 처지가 된다. 제발 더이상 캐서린 아씨를 만나러 드러시크로스 저택으로 넘어오지 말라고. 그러나 에드거를 향한 복수심에 끓어 넘치는 히스클리프를 제지할 방법은 없다. 더구나 캐서린을 다시는 만나지 말라는 경고와 종용을 받자 히스클리프는 도리어 강력하게 반발한다.

 

 

"당신은 그녀가 나를 거의 잊었다고 생각해? 아, 넬리! 그렇지 않다는 건 당신이 알잖아! 린튼을 한 번 생각하는 동안에 나를 천번이나 생각하고 있다는 걸 당신은 잘 알잖아! 내 평생 가장 비참했던 시기엔 나도 캐서린에게 잊혀졌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작년 여름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도 줄곧 그런 생각을 했지. 하지만 이제는 캐서린 자신이 그렇다고 단언하지 않는 한 다시는 그런 무서운 생각은 하지 않을 거야. …… 나의 장래는 단 두 마디면 족할 거야. 죽음과 지옥이라는 두 마디. 캐서린을 잃어버린 뒤의 내 삶이란 지옥일 거야.

 

그러면서도 한때는 어리석게도 캐서린이 나의 애정보다도 에드거 린튼의 애정을 더 소중히 여긴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 설사 그가 그 빈약한 몸집으로 온 힘을 다해 사랑한대도 그의 팔십 년 동안의 사랑은 내 하루 동안의 사랑에도 미치지 못할 거야. 그리고 캐서린은 나와 마찬가지로 속이 깊은 사람이지. 그러니 그 애정을 에드거가 송두리째 차지한다는 것은 바닷물을 말죽통에 담을 수 있다는 거나 마찬가지야."(243∼244쪽)  

 

 

캐서린을 향한 무서운 집념은 끝내 히스클리프를 폭주하게 만든다. 에드거가 집을 비운 틈을 노려 그는 또다시 캐서린을 찾아가고, 위중한 병세 때문에 더이상 회복될 가망이 없는 그녀를 껴안고 떨어질 줄 모른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눈물로 얼굴을 적시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만, 어느새 에드거가 돌아올 시간이다. "안 돼! 아, 가지 마. 가지 마. 이게 마지막이야. 에드거도 우리를 어쩌지는 못할 거야. 히스클리프, 나는 죽어! 죽는다고!" 라고 외치는 절규 앞에 히스클리프는 다시 그녀를 꼭 껴안고, 그 모습을 본 에드거는 그 불청객에 대한 놀라움과 분노에 휩싸여 덤벼든다. 캐서린은 혼절했다가 간신히 의식을 회복하지만 그날밤 자정 무렵 딸 캐시를 낳다가 숨을 거둔다.


여기까지가 총 34장 가운데 16장까지의 내용이다. 소설 『폭풍의 언덕』은 여주인공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사이에 폭풍처럼 휘몰아친 사랑이 '캐서린의 죽음'으로 모두 마무리되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훨씬 더 여운이 많이 남는 얘기가 더욱 길게 남아 있었다. 남은 이야기들은 캐서린이 낳은 딸 캐시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히스클리프의 처절한 사랑과 복수를 향한 뜨거운 정념은 조금도 꺾일 줄 모른다. 에밀리 브론테가 히스클리프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치밀하고도 촘촘하게 그려낼 수 있었는지는 정작 이제부터라고 말할 정도로,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는 더욱 촘촘해지고 히스클리프는 더욱 뚜렷이 부각될 뿐 조금도 힘을 잃는 법이 없다.

 

그러나 아쉽지만 이쯤에서 이야기를 훨씬 더 줄여야 마땅하지 싶다. 나머지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남편인 히스클리프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간 이사벨라는 홀로 아들을 낳아 기르다가 세상을 떠난다. 캐서린이 죽은 뒤 13년쯤 뒤의 일이었다. 캐서린의 오빠인 힌들리 언쇼는 그보다 훨씬 일찍 세상을 떠났다. 캐서린이 죽은지 반 년도 못 되어서였고, 그의 나이는 스물일곱 살에 불과했다. 이제 워더링 하이츠에는 히스클리프와 힌들리의 아들 헤어튼 언쇼만 남았고, 그 집의 실소유주는 히스클리프였다. 어릴 때부터 제멋대로 거칠게 자라난 헤어튼은 히스클리프한테 딸린 하인 신세나 다름없었다. 식객이던 사람이 마침내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이 된 셈이었다.

 

'언쇼 집안의 아름다운 검은 눈에다 린튼 집안의 고운 살결과 오밀조밀한 생김새와 노란 곱슬머리를 물려받은 정말 예쁜 아가씨' 캐시는 열세 살이 되도록 숲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고, 워더링 하이츠와 히스클리프 씨에 대한 존재조차도 모르고 자란다. 캐서린과 사별한 에드거가 워더링 하이츠 쪽으로는 얼씬도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 기간이야말로 워더링 하이츠 주변에 살던 사람들에겐 짧으나마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캐시는 페니스턴 절벽 쪽으로 가보고 싶은 오랜 열망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홀로 그곳으로 다가가다가 우연히 워더링 하이츠에 발을 들여놓고 거기서 자신의 외사촌인 헤어튼을 난생 처음으로 만난다. 그녀는 이제 막 '워더링 하이츠의 거친 바람' 속에 뒤섞인 '처절한 사랑과 뿌리깊은 원한과 복수와 갈등'의 초입에 겨우 첫발을 들여놓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여동생 이사벨라는 죽기 직전에 홀로 키우던 아들 린튼을 부탁하기 위해 오빠인 에드거에게 편지를 띄우고, 외삼촌인 에드거는 기꺼이 린튼을 떠맡아 드러시크로스 저택으로 데려 오지만, 이내 낌새를 알아차린 히스클리프에게 발각되어 조카를 강제로 빼앗기고 만다. 고종사촌 린튼과 함께 즐거운 나날을 보내리라는 기대에 잔뜩 부풀었던 캐시는 하루 아침에 린튼이 집안에서 사라진 걸 알고 몹시 실망한다.

 

호시탐탐 드러시크로스 대저택마저 자신의 손아귀에 넣을 궁리를 하던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병약한 아들 린튼을 캐시와 결혼시키기 위해 온갖 간계를 꾸미는 일을 서슴치 않는다. 병약한 아들 린튼이 자신의 계획이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마다 무서운 협박과 강요를 마다 않는다. 오랜 노력 끝에 그 두 사람을 서로 사귀게 만들고, 결국 워더링 하이츠에 억지로 감금하는 데까지 성공한 히스클리프는 그 둘을 강제로 결혼시킨다. 그러나 병약한 린튼은 결혼하자 말자 이내 세상을 떠난다. 이런 사태에 대비해 변호사를 미리 매수해 둔 히스클리프는 린튼이 죽고 난 이후에도 드러시크로스 저택이 자신에게 귀속되도록 빈틈없이 일을 꾸민다.

 

히스클리프의 아들마저 세상을 떠나자 이제는 젊은이라고는 '언쇼 집안'의 마지막 인물인 헤어튼 언쇼와 '린튼 집안'의 마지막 인물인 캐시밖에 남지 않게 된다. 히스클리프가 그토록 처절하게 사랑했던 캐서린과 사별한 이후 끔찍스러울 정도로 잔혹하게 진행된 히스클리프의 복수가 거의 완성된 셈이었다. 워더링 하이츠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학대했던 힌들리는 주정뱅이로 전락한 끝에 노름빚으로 재산까지 몽땅 히스클리프에게 빼앗기고 빈털털이로 삶을 마감했고, 캐서린과 결혼한 에드거 역시 딸 캐시를 히스클리프의 아들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온갖 괴로움과 시름을 겪다가 서른아홉 살에 일찍 삶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이다.

 

에드거마저 죽고 그의 딸 캐시를 자신의 며느리로 삼게 되자 그는 곧장 드러시크로스 저택을 '주인 자격'으로 찾아간다. 그 자리에서 그는 넬리에게 다음과 같은 끔찍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젯밤에 린튼의 무덤을 파고 있는 교회 머슴을 시켜 캐서린의 관 뚜껑에 덮인 흙을 치우게 하고 관을 열어보았다는 것이다!

 

"당신은 참 악독하기도 하군요, 히스클리프! 죽은 이를 괴롭히다니 부끄럽지도 않던가요?" 저는 큰 소리로 말했어요.

 

"난 아무도 괴롭히지 않았어, 넬리. 내 마음이 다소 안정되긴 했지. 이젠 훨씬 더 마음이 편해질 거야. 내가 죽더라도 땅속에 조용히 누워 있게 될 테니까. 그녀를 괴롭혔다고? 천만에! 그녀야말로 십팔 년 동안을 밤낮으로 나를 괴롭혀 왔어. 늘 끊임없이. 그리고 잔인하게. 바로 어젯밤까지도 말이야. 어젯밤에서야 내 마음이 가라앉은 거야. 난 어젯밤, 심장이 멎은 채 차디찬 내 볼을 그녀의 볼에 맞대고 그녀 옆에서 마지막 잠을 자는 꿈을 꾸었지." 하고 그는 말했어요.

 

"그럼 만약 아씨가 썩어 흙이 되어버렸다든가 그보다 더한 상태에 있었더라면 그땐 무슨 꿈을 꾸었을까요? 제가 물었어요.

 

"그녀와 함께 썩어서 더욱더 행복해지는 꿈을 꾸었겠지!" 그는 대답했어요. "넬리는 내가 그따위 변화를 무서워할 줄 알아? 난 그 관 뚜껑을 열 때 이미 그런 변화를 기대했던 거야. 그러나 내가 죽을 때까지 그 변화가 시작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더욱이 그녀의 생기 없는 용모에서 강렬한 인상만 받지 않았던들 그 묘한 감정은 여간해선 가시지 않았을 꺼야. 그건 이상하게 시작됐지. 알다시피 난 그녀가 죽은 뒤로 미치광이처럼 밤낮으로 늘 그녀가 내게 돌아오기를 빌었어. 영혼이라도 돌아오라고 말이야. 난 유령의 존재를 믿어. 유령이라는 게 이 세상에 있을 수 있고 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단 말이야!"(479∼480쪽)

 

 

나는 『폭풍의 언덕』 속에 이처럼 격정적이고도 놀라운 이야기가 담겨 있는 줄은 차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름다운 워더링 하이츠를 배경으로 무척이나 낭만적인 러브 스토리가 끝없이 장대하게 펼쳐지는 줄로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소설의 제목에서 풍기는 낭만적인 느낌과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처녀가 쓴 작품이라는 두 가지 선입견이 어우러져 빚어낸 엄청난 오해와 무지 때문이었다.


세계 10대 소설이라고 해서 누구나 10대 혹은 20대쯤에는 그 작품들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강제 조항은 어디에도 없다.『폭풍의 언덕』 같은 야성이 넘실대는 강렬한 소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거센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는 언덕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처절하면서도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라고 해서 그 소설을 읽는 나이가 반드시 '폭풍의 세월'을 살고 있는 10대나 20대에 한정될 이유도 없다. 이 소설을 10대 혹은 20대의 아주 어린(?) 나이에 읽었더라면 과연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아예 없지는 않다. 그러나 뒤늦게나마 이 소설을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여간 기쁜 게 아니라는 생각부터 앞선다. 그만큼 이 소설은 강력하다. 요크셔의 황량한 언덕 위에 자리잡은 워더링 하이츠에 부는 바람은 지금도 여전히 세차게 불고 있지 싶다. 예전에 에밀리 브론테가 오래도록 홀로 서 있었던 그때 그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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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블룸이 쓴 『교양인의 책읽기』에서는 에밀리 브론테를 '시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윗 글에서 인용한 에밀리 브론테의 시는 그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 시에 뒤이어 나오는 내용 일부를 추가로 덧붙여 본다.

 

팝 발라드 가운데 시적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의 하나로 「소란한 무덤The Unquiet Grave」이 있는데, 이는 18세기 후반에 쓴 듯하다.

 

내 사랑이여, 오늘 바람이 불고,

  몇 방울의 비도 내리는구려;

진정한 사랑 외에 내 가진 것이 무엇이겠소,

  차디찬 무덤 속에 그녀가 누워 있으니,

 

내 진정한 사랑을 위하여서는 무엇이든 하겠소.

  그 어떤 젊은 연인보다도;

그녀의 무덤 앞에 앉아 언제까지나 서러워하리오.

  열두 달 하루라도.

 

열두 달 하루가 끝나자

  죽은 자가 말하기 시작했다:

"오 내 무덤 앞에 흐느끼며

  그리하여 날 잠들지 못하게 하는 분은 누군가요?"

 

"내 사랑, 그대 무덤 앞에 앉은 자는 나요.

  그대 잠들지 못하게 하는 자는:

진흙처럼 차가운 그대의 입술로 한 번의 키스를 해 주길 갈망하오.

  그것이 내가 구하는 전부일 테니."

 

"그대 진흙처럼 차가운 내 입술로 한 번의 키스를 받고 싶어하는군요.

  하지만 내 숨결에는 진한 흙 냄새;

내 진흙처럼 차가운 한 번의 키스를 받는다면

  그대의 삶도 오래지 않아 끝나고 말 거예요."

 

"저 건너 아래 초록의 정원,

  사랑, 우리가 걷던 그곳에,

이전에 보았던 그 멋진 꽃도

  시들어 줄기만 남으리니."

 

"줄기가 시들어 마르듯, 내 사랑,

  그렇듯 우리의 심장도 썩어갈 거예요;

그러니 내 사랑, 이제는 단념하세요.

  신이 그대를 부를 때까지."

 

 

이 연인들이 주고받는 냉담한 대화는 가히 필적할 데가 없는 듯하다. 많은 속설에 따르면 사랑의 애도를 일 년 이상 지속하는 일은 위험한 일이라고 한다. 「소란한 무덤」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더욱 강조한다. 일 년에서 하루 더 애도가 계속되자 죽은 연인이 놀라 영면에서 깨어난다. 애인을 읽은 젊은 남자가 자신의 위험을 정확히 안다는 것,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 그에게 아무런 환상도 주지 않고 단지 죽음만을 제시하는 것은 일종의 사악한 즐거움이다.

 

어느 편에도 거짓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일 년하고 하루 더 애도하는 것은 산 자에게는 위험이 되고 죽은 자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두 연인 사이의 인식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시가 나타내는 어둡고 무거운 의미는 즐거우면서도 병적인 발라드가 들려주는 육감적 음악과 어느 정도 대립해 있다. "나로 하여금 잠들지 못하게 한다"는 죽은 여인의 불평을 듣는 순간, 독자는 처음으로 충격에 빠진다.

 

또 젊은 남자가 흔들림 없이 그녀의 진흙처럼 차가운 한 번의 키스를 갈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 번이나 반복되는 "진흙처럼 차가운 입술의 키스"라는 표헌이 시 전체를 압도하며, 다음 연에서 가장 강력한 감정을 고조시키고 있다.

 

"그대 진흙처럼 차가운  입술로 한 번의 키스를 받고 싶어하는군요.

하지만 내 숨결에는 진한 흙 냄새;

내 진흙처럼 차가운 한 번의 키스를 받는다면

그대의 삶도 오래지 않아 끝나고 말 거예요.

 

우리는 죽은 여인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렇게 직접적으로 진실을 토로했는지에 대해 궁금해진다.(149∼152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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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5-14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른 살에 이런 대작을 쓰고 운명을 달리한 에밀리 브론테, 음악의 신동이라 불리우는 모짜르트, 「도덕경」「주역」에 주석을 단 왕필 등을 보면서 짧은 시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태운 이들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oren 2018-05-14 15:01   좋아요 1 | URL
에밀리 브론테는 단 한 편의 소설만 남겼는데도 저런 걸작을 남길 정도였으니, 다른 자매들과 더불어 특출난 문학적 재능을 타고난 작가임에는 틀림없는 듯합니다. 소설의 내용으로나 더없이 강렬한 필치로 보나 말이죠.. 그런데 까마득한 옛날 사람인 소포클레스는 아흔이 넘도록 장수하고도 수많은 걸작들을 남겼으니 더욱 대단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hnine 2018-05-14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잘은 모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보면 비극이 갖춰야 할 요소에 대해 조목조목 잘 설명이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저도 아직 직접 읽어보진 못했어요). 이상적인 비극이 되기 위한 소재, 플롯, 성격, 주제는 물론이고 어떤 배경을 거쳐 어떻게 주제를 전달하느냐 까지요.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쓴 작가라면 고대 비극, 그것도 유명한 비극 작품과 언뜻언뜻 연상되는 장면이 그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게 무리는 아닐 듯 싶어요. 아마 예리한 독자 눈에만 발견되겠지만요 ^^
그런 이야기로 시작하셔서 그런지, 올려주신 에밀리 브론테의 시를 읽는데 전 또 문득 세익스피어의 소넷이 떠오르네요. 제가 따라쟁이죠? ^^

oren 2018-05-14 15:11   좋아요 0 | URL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주로 고대의 서사시와 비극시를 다루지만, 의외로 현대 사람들의 글쓰기에도 참고할 만한 유익한 내용들이 아주 풍성하게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에밀리 브론테의 시를 읽고 나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떠올리셨다니, hnine 님께서도 예사롭지 않은 시적 감각을 지니신 듯합니다. 저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전부 읽어봤지만, 에밀리 브론테의 시와 닮았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답니다.^^
 
황폐한 집 동서문화사 월드북 231
찰스 디킨스 지음, 정태륭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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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킨스의 애독자들은 『위대한 유산』을 그의 소설 중 제1로 치지는 않는다. 대중적 인기로 치자면 『올리버 트위스트』보다 뒤진다. 디킨스 본인은 『코퍼필드』를 더 우위에 두었지만, 나를 포함해서 많은 비평가들은 『황량한 집』을 첫 손가락으로 꼽는다. (헤럴드 블룸)

 

 * * *

 

많은 작가들이 많은 작품을 남겼다. 찰스 디킨스도 다작으로 유명한 작가다. 그런데 작가가 남긴 여러 작품 가운데 최고의 작품이 가장 널리 읽히는 경우는 그리 일반적이지는 않은 듯하다. 당장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만 떠올려 보더라도 그런 사정은 금세 알 수 있다. 토마스 만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대표작이 『마의 산』이라고 해서 토마스 만의 독자들이 그 작품을 가장 많이 읽었으리라고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이 훌륭한 소설이 찰스 디킨스의 다른 많은 작품들에 비해 훨씬 덜 읽힌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가볍게 수긍해야 옳지 싶다. 비록 이 작품이 지닌 훌륭한 가치에 비해 독자들의 독서 열정이 지나칠 정도로 반비례 관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좀처럼 떨치기 어렵더라도 말이다.

 

찰스 디킨스의 주된 특징은 '유머와 위트와 재치와 긍정'으로 요약할 수 있지 싶다. 문학의 역사에서 이런 특징이 극에 달했던 작가는 누가 뭐래도 셰익스피어였다. 이같은 이유로 찰스 디킨스는 자주 셰익스피어에 비견된다. 시인이자 극작가이자 배우였던 셰익스피어가 넘치는 열정과 문재(文才)를 시로 마음껏 발산했다면, 소설가이면서도 배우에 대한 열정과 기질이 넘쳤던 디킨스는 자신의 머리 속에 끊임없이 샘솟는 이야기를 통해 그런 기분을 풀어냈다.

 

그가 『황폐한 집』에서 은연 중에 발설했던 다음 대화는 바로 작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으흠! 셰익스피어처럼 말씀을 잘하시는데요!"

 

심지어 그는 소설 속에서조차 시인처럼 '반복되는 후렴'을 리드미컬하게 구사할 정도였다. 그게 등장 인물의 대화 속이든 전경이나 배경 묘사든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등 뒤로는 셰익스피어가 슬쩍슬쩍 엿보일 때가 자주 발견되고,  때로는 그 너머에 아스라히 고대 그리스 비극 시인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때도 있다. 가령 『황폐한 집』에서 주인공 격인 에스더 서머슨 양이 마침내 자신의 생모로 밝혀진 데들록 부인을 만났을 때 나눈 대화가 그렇다.

 

"어머니, 이미 결심하셨나요?"

 

"결심했어. 난 지금까지 어리석음에 어리석음을 더하고, 자존심에 자존심을 더하고, 경멸에 경멸을 더하고, 자만에 자만을 더하고, 큰 허영에 더욱 큰 허영을 덧칠하며 살아왔어. 할 수 있다면 이 위기도 잘 극복해 죽을 때까지 무사할지도 몰라. 난 위험에 둘러싸여 있어. 체스니 월드가 이 깊은 숲에 둘러싸여 있듯이. 하지만 난 언제까지나 그 안을 걸을 거야. 내가 걸을 길은 오직 하나, 단 하나밖에 없단다."

 

 

찰스 디킨스는 남달리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은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어릴 때 겪었던 감정인 부모에게 버림받아 비천한 신분으로 떨어졌다는 절망감과 굴욕감은 그에게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이 체험이 그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굳은 결심과 향상심과 출세욕을 심어주긴 했지만 말이다.

 

'이런 생각이 가져오는 비통함과 굴욕감이 내 성격 전체에 스며들어 버려서 나는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칭송받고 행복해진 지금까지도 가끔 꿈을 꾼다. 그 꿈에서 나는 내게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생겼다는 사실, 아니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홀로 외롭게 그 시절을 헤매다가 돌아온다.'

 

바로 이런 작가의 경험 때문에 그가 쓴 작품에는 유독 고아나 가난한 사람들이나 부랑자나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올리버, 『위대한 유산』의 핍,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데이비드, 『어려운 시절』의 루이자, 『황폐한 집』의 에스더 서머슨, 에이더 클레어, 리처드 카스톤, 부랑아 조 등이 대표적이다.

 

몹시도 아픈 과거를 지닌 작가를 과거로부터 마침내 해방시킨 작품은 『데이비드 코퍼필드』(1849∼1850)였다. 주인공이 세상에 막 태어날 때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어엿한 작가로 성공할 때까지의 온갖 삶의 기억들을 '웃음과 눈물과 기쁨과 애환'을 가득 담아 그려낸,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 자전적 소설이야말로 작가에게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나의 사랑하는 자식' 같은 작품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데이비드 코퍼필드』야말로 작가를 끊임없이 붙들고 옭아매던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뚜렷이 결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작품이기도 했다.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끝낸 작가는 곧이어 『황폐한 집』(1852∼1853)을 통해 본격적인 사회 비판에 깊숙하게 발을 들여놓게 된다. 디킨스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방대한 장편소설은 이보다 나중에 쓰여진 『어려운 시절』(1854년),  『리틀 도릿』(1855∼1857)과 『우리 서로의 친구』(1864∼1865) 등과 함께 묶여 '사회 비판'을 다룬 작품군을 이루는데, 이 가운데 단연 뛰어난 작품이 바로 『황폐한 집』이다.(사실 디킨스는 알고 보면 초기 작품인 『피크위크 페이퍼스』에서부터 일찌감치 '사회정의'를 일깨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작가였다. 이러한 디킨스의 작품 경향으로부터 자못 강렬한 인상을 받은 버나드 쇼는 『리틀 도릿』에 대해 "『자본론』 보다도 더 폭동을 유발하는 책"이라고 말할 정도였고, 칼 마르크스는 『리틀 도릿』을 최초의 자본주의 공격 소설로 평가했다고 한다. 칼 마르크스는 심지어 "세계의 모든 정치인, 사회운동가들이 한 모든 것보다 디킨스가 세상의 핍박 받는 민중을 위해 한 일이 더 많다"고 말할 정도였다.)

 

『황폐한 집』이 다루는 주제는 얼핏 손에 쉽게 잡히는 빤한 주제들을 다루지는 않는다. 디킨스의 초기 작품들에서는 특정한 사회적 폐해가 개별 현상으로서 언급되고, 사회악의 책임이 특정한 개인의 탓으로 돌려지는 반면, 후기 작품을 대표하는 『황폐한 집』에서는 각종 사회 제도나 조직 자체가 사회악의 근원으로 다뤄진다. 의회 정치에 대한 불신이나 하릴없이 무위도식하면서 무료한 나날을 보내는 상류층에 대한 조롱과 풍자와 비난이 함께 담겨 있지만 그 방식이 대체로 모호하게 그려져 있다. 그건 마치 런던을 가득 덮고 있는 안개와 진창을 바라보는 식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안개다. 템스 강 상류에도 안개가 푸른 섬과 목장 사이를 흘러간다. 강 하류에도 안개가 자욱하다. 이곳에서는 수없이 정박한 배들 사이와 이 커다란(그리고 더러운) 도시의 지저분한 강기슭을 더러운 안개가 소용돌이를 그리며 지나간다. 에섹스 주 늪지 위도 안개요, 켄트 주 구릉 위도 안개다. 안개는 석탄을 운송하는 범선 상갑판 주방으로도 스멀스멀 들어 오고, 커다란 배 돛대 위에도 잠들어 있으며, 식구 안을 돌아다니고, 거룻배도 작은 뱃전에도 웅숭그리고 있다. 그리니치 해군병원 병실 난로 옆에서 콜록거리는 노병의 눈과 목구멍 안으로 기어들어 가고, 공연히 성질난 선장이 비좁은 자기 방에서 피워대는 오후의 담뱃대와 재떨이에 기어들어 가고, 갑판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어린 수습 선원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매몰차게 꼬집는다. 다리 위를 지나가는 난간 너머로 하늘에 낮게 깔린 안개를 바라본다. 그들 사이에도 안개가 자욱해서 이들은 마치 열기구에 올라타 구름 속을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11∼12쪽)

 

 

안개가 가장 자욱하고 거리가 가장 진흙으로 범벅이 된 곳에 링컨 법조원의 대법관 법정이 자리잡고 있다. 거기가 바로 소설의 주무대이다. 해롭기 그지없는 늙은 무뢰한이나 다름없는 이 법정에 대한 묘사는 아주 길게 이어진다.

 

오늘 같은 오후에야말로 대법관은ㅡ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지만ㅡ이 법정에 자리 잡고 앉아 안개처럼 몽롱한 후광에 싸이고 하늘거리는 붉은 천과 커튼에 둘러싸인 채, 요란한 구레나룻을 기른 거구이면서도 목소리는 개미만 한 변호사의 끝없이 장황한 설명을 들으면서, 안개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붕의 들창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야 한다. 이런 오후에야말로 수십 명에 이르는 대법관 법정 판사들은ㅡ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듯이ㅡ언제 끝날지 모르는 소송 중 수천 단계 째의 일에 막연히 매달리고, 막히기 쉬운 판례에서 서로 꼬투리를 잡고, 소소한 전문적 법률 사항에 무릎까지 파묻혀 허우적거리고, 산양 털이나 말 털로 만든 가발을 뒤집어쓰고는 그것으로 법률 조문의 벽을 깨부수겠다고 무모하게 머리를 갖다 박고, 연극배우 뺨치게 자못 진지한 얼굴로 공명정대한 태도를 꾸며내야 한다. 이런 오후에야말로 사건에 관계된 온갖 사무변호사는ㅡ그중에는 부모님 대부터 담당하던 일을 맡은 사람도 두서넛 있고 모두 그 사건으로 이미 부를 쌓았지만ㅡ서기 책상과 칙선변호사 비단 법복 사이에 놓인 매트 깔린 기다란 변호사석에 앉아(그러나 이 우물 바닥에서 '진리'를 찾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다) 저마다 눈 앞에 소장, 답변서, 재항변서, 제2답변서, 강제명령서, 선서진술서, 소송쟁점서, 법원 주사가 읽을 심사보고서, 법원 주사의 보고서, 그 밖의 온갖 값비싼 잡동사니를 쌓아놓고 있어야 한다. 다 꺼져가는 촛불이 법정을 어두침침하게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안에 낮게 깔린 안개가 영원히 나가지 않겠다는 듯이 버티는 것만 같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색유리가 끼워진 창문들이 색채를 잃고 대낮의 햇빛이 통과시키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도시의 문외한들이 입구의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다가 내부의 올빼미 같은 광경을 보고 또 천이 깔린 윗자리에서 천장까지 우울하게 울리는 멍청한 변설을 듣고는 안으로 들어가기를 포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윗자리에서는 대법관이 햇빛을 통과시키지 않는 들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고, 그 옆에 앉은 가발 쓴 법관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안개에 파묻혀 있다! 바로 여기가 대법관 법정이다. 이 법정을 위해 나라 곳곳에 다 쓰러져가는 집과 황폐한 땅이 존재한다. …… (12∼13쪽)

 

 

소설 『황폐한 집』의 <제1장_대법관 법정>은 오로지 '런던의 안개'와 그 가운데 자리잡은 '대법관 법정'을 묘사하는 데 온전히 할애하는데, 위에서 인용한 두 단락은 제1장 전체 분량에 비하면 고작 1/8 정도에 불과하다. 그만큼 이 소설의 '서주' 부분이 자못 장대하게 펼쳐져 있는 셈인데, 디킨스의 여느 작품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무게 와 깊이'를 반증하고 있다.(번역본에는 따로 설명이 없지만, 여기서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런 오후에야말로'가 리드미컬하게 반복되는 수법은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5막 1장>에서 로렌초와 제시카가 달밤에 나누는 감미로운 사랑 노래와 너무나 닮았다. 거기서 두 연인은 '이런 밤에'를 '후렴'처럼 무려 일곱 번이나 주고 받는다. 디킨스는 유독 이 작품에서 이같은 '후렴'을 반복하는 수법을 여러 곳에서 자주 구사한다.)

 

총 67장으로 구성된 이 방대한 장편소설은 '여러 층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대체로 재미있으면서도 술술 읽힌다는 평가'를 받는 디킨스의 여느 소설과는 궤를 달리하는 소설이다. 음악에 비유하자면 제1주제와 제2주제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의 부차 주제(題)들까지 다양하게 포함하고 있으며, 그런 주제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여러 악장들 속에서 때로는 단조로, 때로는 장조로 아주 다양하게 제시되고 전개되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구성 때문에 처음에는 따로 떨어져 서로 낯설게만 들리는 여러 소소한 이야기들이 차츰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다가 나중에 마침내 하나로 합쳐져 피날레를 향해 숨가쁘게 내달릴 때에는 거대한 감동의 쓰나미에 휩싸이게 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런던 대법관 법정과 그 주변, 레스터 데들록 경과 데들록 부인이 살고 있는 링컨셔의 대저택, 잔다이스 씨가 살고 있는 '황폐한 집' 등이다. 공간이 생각보다 그리 넓은 편은 아니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설의 방대한 규모에 어울릴 정도로 충분히 많다. 제1의 주인공은 에스더 서머슨 양이다. 소설의 절반 정도는 에스더가 '나'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에스더의 이야기'가 두 장 혹은 세 장쯤 이어지고 나면 다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가 (시간과 공간을 바꿔) 두 장 혹은 세 장 정도 분량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개한다.(이런 방식의 독특한 이야기 전개가 극대화한 작품으로는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떠올릴 수 있다. 그 작품에서는 매 장마다 등장 인물의 이름이 장의 제목으로 달려 있는데, 바로 그 인물이 '1인칭 화자'로 나서서 이야기를 이끈다. 윌리엄 포크너는 찰스 디킨스를 모방한 셈이다.) 

 

주인공인 에스더가 '나'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끄는 부분은 자연스럽게 에스더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진다. 어릴 때부터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로 대모의 손에서 자란 에스더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진 채  '복종과 극기와 부지런함'을 강요받으며 자란다. 열네 살 때 대모마저 사망하면서 외톨이 신세가 된 에스더는 예기치 못한 후원자의 손길 덕분에 기숙사가 딸린 학교에 들어가고, 나중에는 잔다이스 씨의 '황폐한 집'으로 이주해서 그 집의 살림살이를 도맡게 되고, 점차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믿음과 사랑을 얻게 된다.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 전개는 에스더 서머슨 양의 주변을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맴돌긴 하지만 직접적으로 맞닿지는 않는다. 벌써 수십 년째 해결될 기미조차 없이 지리하게 이어지고 있는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소송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거기에 더해 상류 사회를 대변하는 레스터 데들록 집안의 거대한 저택에 머무는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보태진다. 다채롭고도 흥미로운 인물들은 대법관 법정 주변에 가장 많이 모여 있다. 대서인, 문방구점 주인, 변호사, 하숙인 등등이 저마다 자기 직분에 몰두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끝없이 전개된다.

 

독자들은 소설을 한참이나 읽어도 계속 '안개에 휩싸인 듯한 기분'을 떨치기 어렵다. 도대체 에스더 서머슨 양의 이야기가 이제 막 흥미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겠구나 싶으면 어김없이 거기서 이야기는 중단되고, 다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로 전환되면서 '다른 공간에서 펼쳐지는 다른 이야기'로 뒤바뀌고 마는데, 그들 두 이야기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기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읽을 때 끊임없이 '화자'가 뒤바뀌면서 '이게 도대체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하는 당혹감을 맛보는 경우와 아주 흡사하다. 이런 이야기 수법이야말로 작가가 일부러 의도한 '교묘한 이야기 전달 방식'의 핵심 장치이다.

 

자욱한 안개 속에 휩싸인 사람은 자주 길을 잃게 마련이고, 여기 저기 안개 속에서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들 때문에 적이 놀라기 마련이다. 하지만 안개 속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과연 어디에서 왔으며 또 앞으로 어디를 향해 발걸음을 옮길 것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황폐한 집』에 등장하는 여러 배경들이나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매 장마다 다르게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배경과 인물들이 끝없이 펼쳐지기만 할 뿐 좀처럼 정리되는 듯한 느낌을 갖기 어렵기 때문에 처음부터 긴장감을 갖고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이내 길을 잃기 쉽다. 어떤 인물들이 어떤 장면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를 무심코 지나치다 보면 한참 후에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그 사람이 불쑥 다시 등장했을 때 그 까닭을 금세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교묘한 장치들이 잔뜩 숨겨져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을 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 사람의 이름과 특징과 해당 쪽수를 함께 적어둘 필요가 있다.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어도 어쩔 수 없다. 이 기나긴 장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아마도 백 명 가까이 될 듯한데, 나중에 이야기 전개가 차츰 '안개가 걷히듯'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 때쯤이면,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어떤 식으로든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소송 사건'과 서로 연관을 맺고 있거나, 혹은 이 소설의 주요 인물들인 에스더 서머슨 양과 데들록 부인 혹은 잔다이스 씨와 깊은 연관 관계를 맺고 있음이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에스더의 이야기와 전지적 작가의 이야기가 팽팽하게 평행선을 달리듯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이끌다가 마침내 서로 맞닿는 지점은 언제쯤일까. 그 해답을 찾을 때쯤이면 이 소설은 어느새 클라이맥스에 가까이 다가가 있다. '미모와 자존심과 야심과 교만한 고집'으로 똘똘뭉친 데들록 부인이 아무도 모르게 '편지 한장' 딸랑 남기고 느닷없이 가출한 사실이 발견되고, 그 소식을 들은 잔다이스 씨가 한밤중에 에스더 서머슨 양을 깨우는 장면이 '마침내' 서로 이어지는 것이다. 무려 1,000쪽에 가까운 소설이 바로 여기서부터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하고 빠르게 전개되는데, 이 극적인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로 진입하기 위한 연결 다리는 866쪽에 이르러서야 겨우 발견할 수 있다.

 

『황폐한 집』을 읽고 나면 작가로서의 찰스 디킨스가 얼마만큼 탁월한 이야기꾼인지를 깨닫고 새삼 놀라게 된다. 그가 꾸며내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놀랍고 초정밀 시계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치밀하고도 교묘하다. 또한 찰스 디킨스의 여느 다른 작품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그만의 '심오한 경지'를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찰스 디킨스가 도스토옙스키의 스승으로 불리우고 톨스토이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심지어 프란츠 카프카, 제임스 조이스, 윌리엄 포크너 등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듯한 기분도 든다.

 

디킨스는 오로지 소설만 쓴 작가가 아니었다. 자신의 작품을 연재할 주간지도 20년이나 계속해서 발행했고, 잡지에 게재되는 원고를 일일이 검토했고, 자신의 소설뿐만 아니라 잡지 기사도 직접 작성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선사업과 사회사업, 곳곳에서 열리는 강연과 사교 모임에도 활발히 참석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편지만 하더라도 한 권이 700쪽이 넘는 스물두 권짜리로 간행되어 있다고 한다. 작가의 넘치는 에너지와 활력을 보고 랄프 왈도 에머슨이 "그토록 왕성한 창작력과 다채로운 재능을 지닌 한 예술가에 대해서, 또한 한 인간으로서 그가 가진 복합적인 성격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던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찰스 디킨스의 작품들이 국내에 여럿 번역되어 나와 있지만 아직도 그의 방대한 작품 세계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올리버 트위스트』를 시작으로, 『위대한 유산』, 『데이비드 코퍼필드』, 『황폐한 집』에 이르는 네 권의 대표작만 하더라도 완독하기 벅찬 게 사실이지만 디킨스를 아주 좋아하는 독자라면 그리 힘든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사족이지만, 아직까지도 국내에 번역조차 되지 않은 디킨스의 다른 많은 작품들이 어서 빨리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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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5-04 19: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찰스 디킨스의 작품을 많이 접하지 못했지만, 예전에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으면서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어두운 면을 깊이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 불평등, 억압 등 사회 부조리에 대한 수많은 이론을 다룬 책들보다, 현실을 반영한 문학 작품이 더 큰 울림을 준다는 것을 <올리버 트위스트>를 통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oren님의 글을 통해 디킨스의 다른 저작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oren 2018-05-05 20:17   좋아요 2 | URL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찰스 디킨스에 대한 관심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많은 작품들이 국내에는 번역조차 되지 않은 상태이니까요. TV와 영화가 대세인 시대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을 작가로 당당히 인정받는 사람이 찰스 디킨스인데 말이지요. 좀 더 알아 보니, 그의 작품 가운데 『위대한 유산』, 『리틀 도릿』, 『올리버 트위스트』, 『크리스마스 캐럴』,『황폐한 집』등이 이미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었고, 심지어 찰스 디킨스를 주인공으로 삼는 영화까지 나와 있더군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저는 『황폐한 집』만이라도 기필코 ‘영화‘로 다시 한번 감상하고 싶습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풍경들과 인물들의 ‘영화 속 모습‘이 너무 너무 궁금해서 말이지요.

혜덕화 2018-05-04 2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위대한 유산>재미있게 읽었어요.아주 오랫만에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좋은 고전을 만나는 기쁨을 님 덕분에 누릴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oren 2018-05-05 20:22   좋아요 1 | URL
혜덕화 님께서 『위대한 유산』을 아주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저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작품은 커녕 찰스 디킨스에 대해서는 완전 문외한이었는데, 그 작품 덕분에 디킨스의 다른 많은 작품들을 잇따라 읽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더랬지요.^^

* * *

…… 그러나 『두 도시 이야기』처럼 『위대한 유산』은 대단히 대중적이라는 면에서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수십 편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 비견될 만하다. 왜냐하면 영화나 텔레비전이 아닌 모습으로 이 정보화 시대에 살아남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햄릿』과 『맥베드』를 읽듯이 우리는 『위대한 유산』을 끊임없이 읽을 것이다.(헤럴드 블룸)
 
데이비드 코퍼필드 동서문화사 월드북 138
찰스 디킨스 지음, 신상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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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류가 가지고 있는 가장 훌륭한 친구들 중 하나이다.

 - 조지 산타야나

 

 * * *

 

찰스 디킨스는 영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이다. 영국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작가가 셰익스피어라면, 찰스 디킨스는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다. 그의 명성은 스물다섯 살 때 갑자기 '불꽃처럼' 하늘 높이 솟아오른 뒤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고 있다.

 

셰익스피어를 두고 어느 한 작품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디킨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스크루지 영감이 등장하는『크리스마스 캐럴』 하나만으로도 그는 크리스마스를 새롭게 창조한 인물로까지 칭송 받는다. 그러나 그는 얼핏 보면 어린이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작가로 보이지만 어린이나 유아를 위한 작가는 아니다.

 

그의 작품은 읽기가 쉽기 때문에 대중적인 작가로 보이지만 실상은 아주 진지한 예술가로 대접받아야 마땅한 인물이다. 디킨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때로는 '만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특징과 용모가 매우 부풀려지고 '희화화' 되지만, 그런 방식이야말로 디킨스가 아주 즐겨 사용하는 인물 조형 방법이자 인생을 폭로하는 중요한 장치나 방식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대목을 놓치면 그를 오해하기 쉽다.

 

디킨스의 작품 속에는 고아가 중심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으며, 부랑자나 죄수들을 비롯한 버림받고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가 소설 못지 않게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때 맛본 고독과 절망, 굴욕과 비참함이 한평생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인생에서의 불행을 아주 심오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그는 때때로 도스토예프스키와 거의 동급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디킨스의 작품이 러시아 작가보다는 훨씬 덜 심각하며,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등 분위기도 훨씬 밝은 편이다. 무엇보다 디킨스의 작품은 종교, 과학, 정치, 예술 등에 대해서는 아주 초연하다는 점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와는 아주 다르다.

 

디킨스는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태어났지만 어릴 때 잠깐 동안은 해군 경리국에서 일하던 아버지의 안정적인 수입 덕분에 매우 행복한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꾸만 빚을 져서 심각한 위기에 빠지자 '목가적인 시대'는 갑자기 끝이 났고, 가족들이 런던으로 이사를 떠난 뒤 홀로 '하숙'을 하며 몇 주 더 학교를 다녔던 디킨스도 끝내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작은 짐 하나만 가지고 홀로 승합 마차를 타고.

 

이 우울한 여행을 그는 평생 잊지 못했다. 눅눅한 지푸라기 냄새도 그 기억에 들러붙어 있었다. "나는 사냥당한 짐승처럼 지푸라기에 싸인 채 발송된 것이다." 몇 년이 지나서 그는 괴롭게 술회했다. "승합마차 좌석에는 다른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혼자서 쓸쓸한 기분에 젖어 샌드위치를 씹었다. 가는 길 내내 비가 세차게 내렸다. 인생은 내가 기대하던 것보다 축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1017쪽)

 

홀로 런던에 도착해 보니 가족은 '누구라도 눈을 돌리고 싶을 만큼' 칙칙하고 누추하고 초라한 동네에서 살고 있었다. 집안 형편은 나날이 비참해졌고 독이 오른 채권자들은 집으로 몰려와 모욕적인 말을 퍼부어댔다. 어린 디킨스가 하는 일이라고는 가재도구를 골라 전당포에 내다파는 일이 고작이었다. 열두 살이 된 디킨스는 결국 강기슭에 위치한 어두침침하고 쥐들이 우글거리는 구두약 공장에 고용된다. 여기서 겪은 경험이 얼마나 비참했던 것인가를 그는 나중에 친구에게 이렇게 털어놨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그토록 쉽게 내버려지다니…… 아무도 나를 동정해 주지 않았다. 비범한 재능을 가졌고 머리 회전도 빠르며 의욕이 넘치고 섬세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상처받기 쉬운 아이였는데. 그런 나를 어디 평범한 학교에 들여보내 주려고 조금이라도 노력하든가-실제로 그럴 수 있었을 테니까."

 

이때 그가 경험한 공장 생활은 그의 생애와 작품에 깊고도 영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가 육체노동을 하는 비참한 아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 새겨진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심각했던지는 최근에 개봉된 영화에도 아주 생생하게 담겨 있다.(☞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원제는 The Man Who Invented Christmas))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주급 6∼7실링의 수입으로는 하숙비와 끼니를 해결하기 어려운 처지였는데, 그나마 버티던 아버지가 빚 때문에 체포되어 감옥에 투옥된 것이다. 그래도 그는 일요일을 기다리며 버텨냈다. 일요일이 되면 6마일을 걸어 마샬시 감옥에 가서 부모님과 형제자매들과 함께 '온갖 시름을 다 잊고' 하루를 보낼 수 있었으므로.

 

이런 눈물겨운 이야기는 작가와 절친이었던 존 포스터가 지은 방대한 《디킨스 전기》(1872∼1874)를 통해 자세히 살필 수 있지만, 디킨스가 쓴 자전적 전기인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맛볼 수 있다. 그렇다. 내가 여기서 찰스 디킨스의 어린 시절을 다소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데이비드 코퍼필드』에서 구두약 공장을 다닐 때의 역경은 <11장. 힘겨운 홀로서기>에 나오는데, 일부만 소개하면 이렇다.

 

그렇게 살아도 1주일에 6,7실링 가지고는 모자랐다. 그래도 나는 온종일 창고에서 일하고, 그 돈으로 1주일을 살아가야만 했다. 월요일 아침에서 토요일 밤까지, 누구의 충고도 없었고, 어떠한 조언도, 격려도, 위로도, 도움도, 어떠한 종류의 지원도 받지 못한, 거짓도 위선도 없는 곳이었다.

 

나는 너무 어렸고 철이 없었기에 내 생활을 꾸려갈 만한 능력이 없었다. 어린 내가 달리 어떻게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겠는가? 아침에 머드스톤 앤드 그린비 상점에 가는 도중, 빵집 앞에 내놓은, 반값에 파는 오래된 과자를 목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점심 먹을 돈으로 과자를 미리 사먹어버릴 때도 있었다. 그런 때는 점심을 거르거나 롤빵 한 개, 아니면 푸딩 한 조각으로 요기를 했다.(190∼191쪽)

 

 - 찰스 디킨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11장. 힘겨운 홀로서기> 중에서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어릴 때 겪는 '온갖 고생담'은 눈물 없이는 읽기 어려울 정도로 불쌍하면서도 놀랍도록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작가 자신이 직접 겪었던 체험들이 도대체 얼마나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기에 이토록 실감나는 이야기를 쓸 수 있었까 싶은 생각에 애처로운 생각이 들면서도 감탄을 거듭하며 읽게 된다. 방금도 살펴봤지만 태어나서 고작 12살때까지 겪은 '파란만장한' 이야기만 하더라도 벌써 이 소설은 200쪽을 훌쩍 넘어간다. 그러니 전체 1,010쪽에 이르는 이 방대한 소설이 어린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둘러싸고 얼마나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을지는 쉽게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주인공이 갓 태어난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마침내 고명한 작가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될 때까지 만났던 수많은 인물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이 소설을 읽는 재미가 오로지 '작가 찰스 디킨스의 드라마틱한 실제 삶'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만큼 크나큰 오해도 없을 것이다. 물론 이 방대한 소설의 상당 부분이 작가의 실제 삶을 깊게 투영한 건 맞지만, 그게 크나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다. 특히나 20대 중반부터 갑자기 시작된 작가로서의 놀라운 성공 과정이나 출세한 작가로서의 화려한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작품을 완성할 때만 하더라도 작가의 나이는 고작 37세였고, 소설에 1인칭으로 등장하는 '나'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이 또한 30대 중반쯤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주인공이 비교적 어린 나이인 20대 초반에 사랑하는 도라와 결혼식을 올리고 신접살림을 차릴 때쯤이면 이 소설은 벌써 740쪽을 훌쩍 지나면서 서서히 종반부로 치닫게 된다. 그러나 주인공의 삶을 다루는 시기가 이처럼 아직 한창이나 다름없는 나이인 30대 중반으로 한정된다고 해서 작품 내용마저 철없는 10대와 20대 시절의 이야기에 너무 치우쳐 있으리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비록 30여 년에 걸친 짧은(?)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이 작품 속에는 결코 적잖은 사람들이 저마다 엄청난 사건들을 겪고, 홀연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 더러는 독자들의 예상보다 훨씬 일찍 갑작스러운 변화와 죽음을 마주하지만, 더러는 오래도록 살아 남아서 뒤늦게나마 주인공인 '나'와 다시 '눈물겨운 상봉'을 갖기 때문이다. 지난 날에 대한 온갖 추억과 회한과 상념들을 골고루 떠올리면서.

 

이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펜을 놓기 전에 다시 한 번 ㅡ 마지막으로 떠올려 본다.

(……)

빠르게 스쳐 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뚜렷이 보이는 얼굴은 누구일까? 아아, 그렇다, 이 얼굴들! 내가 속으로 그것을 물어보면 모두가 일제히 나를 뒤돌아 본다!(1006쪽)

 

 - 찰스 디킨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64장. 마지막 회상> 중에서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여느 이름난 장편소설들과는 사뭇 다르다. 대개 '장편소설'들이 다루는 주제들은 묵직하기 마련이고, 거대한 건축물을 마주 대하듯 '외관'에서부터 압도되는 경우도 많은데 이 소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도 찰스 디킨스를 무척 좋아했다고는 하지만 『전쟁과 평화』와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다만 두 소설이 아주 닮은 점 한 가지는 꼭 밝히고 싶다. 두 작품에 똑같이 등장하는 '주연급 청춘남녀가 철없이 저지르는 무대뽀 야반도주 사건'만큼은 닮아도 너무 닮았다. 그들 두 커플은 용모나 성격까지도 쏙 빼닮았다. 심지어 두 여주인공이 도주할 때 남기는 '급하게 갈겨 쓴 편지'까지 닮았다. 러시아 소설에선 나따샤(오드리 햅번이 맡았던 배역)과 돌로호프가 주인공이고, 영국 소설에선 에밀리와 스티어포스가 그런 역할을 떠맡았는데, 아마도 잘 모르긴 해도 톨스토이가 『데이비드 코퍼필드』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지 싶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쓴 『전쟁과 평화』에는 숱한 인물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밝히고자 애썼던 '삶의 의미'에 언제나 전쟁과 평화, 역사와 우연, 종교와 정치 등과 같은 묵직한 주제들이 끈덕지게 들러붙었으나, 찰스 디킨스의 작품에서는 그런 요소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는 점이 서로 다르다.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에 그런 요소가 왜 필요하겠는가.

 

이 소설이 지닌 치명적인 매력 가운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과거에 대한 회상'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너무나 정확하게 되살려 내는 주인공의 비상한 기억력이고, 그걸 너무나 매혹적으로 기술하는 작가의 솜씨다. 아무리 작가의 전기적인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작가가 이 정도로 적재적소에서 아주 세밀하게 '어린 시절의 온갖 추억'을 비디오처럼 생생하게 되떠올리고, 그런 회상 장면 자체까지도 놀랍도록 매혹적으로 묘사해 놓은 줄은 몰랐다.

 

인생의 매 순간마다 우리의 눈앞을 스치듯 사라져가는 수많은 광경들과 감각들, 다시 말해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통해 우리의 뇌리에 저장되는 기억들을 이처럼 생생하게 되살려 놓은 작품을 일찌기 나는 접해본 적이 없었다. 이 소설 덕분에 내가 '낡은 기억의 저장고'에서 먼지를 푹 뒤집어쓴 채 오랫동안 널브러져 있던 온갖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들 틈을 헤집고 다니다가 문득문득 새롭게 꺼내 본 풍경과 기억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일일이 셀 수도 없을 정도다. 그것들은 때로는 기적적으로 기억의 심연 속에서 갑자기 불쑥 떠오르기도 했고, 그때마다 나는 그런 기억들을 어떤 식으로든 붙둘어 매어 두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트에 옮겨적었다.

 

어디선가 프로이트가 가장 좋아한 소설이 『데이비드 코퍼필드』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나서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기도 했다. 주인공 데이비드가 심리적으로 강렬한 충격을 받을 때마다 그는 '현실에서 비롯된 꿈'을 잠자리에 들어서도 내내 이어가는데, 그 이야기가 어찌나 사실적이면서도 생생했던지 '그래, 맞아, 나도 예전에 그런 비슷한 꿈을 자주 꾸었지'라는 말도 자주 되뇌었다. 인간 내면 심리에 대한 탁월한 연구결과를 내놓은 천재 심리학자 프로이트가 이 소설을 두고 얼마나 '자신의 경험'과 일일이 대조하면서 자주 읽었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데이비드 코퍼필드』에 담긴 이야기는 '기억의 본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독자들한테 끊임없이 회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몹시 매력적이다. 디킨스는 또한 계급과 성()의 차이에서 오는 '관계의 불안정'도 깊이 연구했는데, 이는 노동자 계급인 에밀리를 유혹하는 스티어포스, 성녀같은 아그네스에게 흑심을 품은 우라이아, 그리고 결혼 이후에도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관능적인 도라에서 정숙한 이성 아그네스에게로 차츰 관심이 옮겨가는 데이비드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어느덧 『데이비드 코퍼필드』와도 작별할 시간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꽤나 많은 사람들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듯하다. 가장 먼저 페거티와 그의 오빠가 떠오른다. 쌀쌀맞던 의붓아버지 머드스톤과 그의 누나도. 학창시절부터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스티어포스와 트레들스도. 페거티 씨네 뱃집에서 의좋게 살았던 에밀리와 햄과 거미지 부인도. 구두약 공장에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오래도록 함께 한 미코버 부부도. 5박 6일 동안의 고난의 행군 끝에 만난 대고모 트롯우드도. 캔터베리의 대성당 근처에 살았던 우라이아 힙과 아그네스까지도 벌써 그립다. 아직도 사전 편찬에 계속 몰두하고 있을 것만 같은 스트롱 박사 부부도 그립고, 도라와 집(애완견 이름)도 다시 만나고 싶다. 스티어포스 부인과 로사 다틀과 하인 리티머는 어떻게 생겼을까. 에밀리의 친구 마사와 미스 모처의 실제 모습도 궁금하다. 트레들스의 아내가 된 소피와 여러 발랄한 처제들까지도...

 

이제는 그들과 헤어져야 할 때가 다가왔다. 언젠가 다시 만날 그때까지 모두들 부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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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18-03-31 0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과평화>와 비교된 작품의 특징부문이 너무 좋았어요. 멋진 글 잘보고 갑니다~

oren 2018-03-31 14:35   좋아요 1 | URL
그 부분을 쓸까 말까 몇 번이나 고민하다가 결국 되살렸는데, 인상깊게 봐 주시니 고맙습니다.^^

남녀 사이의 애정 관계로만 살펴보면 두 작품이 서로 묘하게 닮은 점이 정말 많이 발견되더라구요.

<전쟁과 평화>에서의 여주인공은 나따샤인데, 그녀는 맨 처음엔 (제1의 남주인공 격인) 안드레이 공작을 사랑하지만 끝내 그 사람과 결혼에 이르지는 못하고 ‘가슴 아픈 이별과 안타까운 재회‘를 반복하게 되지요. 전쟁 중에 큰 부상을 입고 후송되는 안드레이 공작과 ‘피난길‘에 오른 나따샤가 극적으로 재회한 이후, 오랫동안 아주 가까이서 그를 극진하게 보살피는 나따샤의 헌신적인 모습만큼 감동적인 장면도 흔치 않지요.

그녀는 처녀때부터 꽃봉오리처럼 아름답고 발랄하면서도 몹시 순종적이고 고결한 심성을 지닌 매력적인 여성인데(어딘가 모르게 오드리 햅번의 성격과도 닮은 듯한), 안드레이가 전쟁터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결국 죽고 난 이후 훨씬 나중에야 (첫 결혼을 ‘파혼‘한 돌싱남이자 매력적인 제2의 남주인공인) 베주호프와 결혼하게 되면서 활짝 소생하게 되지요.

<데이비드 코퍼필드>에서의 에밀리 또한 어릴 때부터 제1의 주인공인 데이비드와 서로 아주 좋아하는 사이였고, 사춘기를 지날 때까지도 서로 부끄럼을 타면서도 내심 좋아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안드레이와 나따샤와의 순애보‘와 아주 닮았더라구요. 나중에 에밀리가 (제2의 남자주인공 격인) 스티어포스와 야반 도주를 하는 모습도 꼭 닮았고, 그에게 버림받은 뒤에도 끝내 고결한 심성을 잃지 않고 새로운 삶을 찾는 과정까지도 왠지 <전쟁과 평화> 속의 나따샤를 아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더군요.

톨스토이는 소외받는 낮은 계급의 사람들인 하인이나 마부나 농노 등에 대해서도 따스한 애정과 관심을 보여주는데, 찰스 디킨스의 여러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고아나 마부나 하녀 등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끝없는 관심과 따스한 눈길과도 무척이나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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