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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성찰 을유세계문학전집 90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신정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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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성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짜 리얼리스트는 그리스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리얼리즘도 사물을 회상하는 것을 의미했다. 회상은 대상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그것을 정화시키고 이상화시키며, 특히 그 과정에서 거친 부분을 제거한다. 하지만 아무리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감각에 직접 작용할 때에는 거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로마에서 시작된, 그리고 카르타고, 마르세유 혹은 말라가에서도 시작되었을지 모르는 지중해 예술은 바로 있는 그대로의 거친 생경함을 추구했던 것이다.

 

(중략)

 

한마디로 말해, 감각주의는 우리가 지중해 내해의 전형적인 성향으로 간주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감각 기관들을 지탱하는 몸뚱이로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감촉을 느끼고, 맛보며, 신체적 쾌락과 고통을 느낀다. 일종의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고티에의 말을 만복한다. "외부 세계는 우리만을 위해 존재한다."

 

외부 세계라! 그렇다면 바로 감각으로 느낄 수는 없지만 더 심층적인 영역에 있는 세계 역시 주체가 볼 때에는 외부 세계가 아니던가?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이 외부 세계일 뿐만 아니라 더욱 고도의 외부 세계라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관념성이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얻어지는 데 반해 리얼리티, 즉 실재는 감각들의 틈새를 뚫고 들어와 야수나 표범처럼 난폭하게 우리를 덮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외부의 침입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게 만들고, 우리 내면을 텅텅 비게 하며, 이로 인해 우리는 결국 사물의 무리들이 드나드는 통로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할 위험에 직면하는 것이다. 감각의 지배는 이처럼 내면의 힘을 상실하게 만든다. 보는 것과 비교할 때 성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의 망막이 외부의 화살에 맞아 손상되는 순간, 우리 개개인의 내적 에너지가 그곳을 메움으로써 침입을 멈추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인상은 문명화된 질서 속에 사고의 형태로 종속되고 기록되며,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인격이라는 건축물을 형성하는 데 협조하며 들어온다.(81∼82쪽)

 

 

 

이것이야말로 사랑이 하는 일이 아니던가?

 

만일 사물이 홀로 고립되어 있는 상태 그대로의 것이라면 얼마나 하찮은 존재가 될까! 그것은 얼마나 빈약하고 쓸모없고 흐릿해질까! 각각의 사물에는 더 커질 수 있는 어느 정도의 비밀스러운 잠재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힘은 다른 사물 혹은 사물들이 관게를 맺으며 들어올 때 비로소 해방되어 확장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사물은 다른 것들에 의해 풍요로워진다고 할 수 있고, 그것들은 마치 암수의 한 쌍처럼 서로를 갈구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서로 사랑하여 공동체, 조직, 기구, 세계에서 결합하고 하나가 되기를 열망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대자연'이라 부르는 그것은 모든 물질 요소가 들어가 있는 최고의 구조물이다. 고로 자연은 사랑의 작품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사물 속에 있던 다른 사물의 번식 혹은 창조와, 다른 사물 안에서 이미 예정되고 형성되어 있으며 실질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사물의 탄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경험해 본 적이 있겠지만, 우리가 눈을 뜰 때 최초의 순간에는 대상들이 거칠게 우리의 시야를 통과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거품 풍선처럼 확장되고 늘어나다가 한 줄기 거친 바람에 의해 터져 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씩 질서가 잡힌다. 우선 사태가 진정되고 나면 먼저 시각의 중심부에 들어오는 사물들, 조금 후에는 주변부를 차지하는 사물들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렇게 윤곽이 구별되고 초첨이 잡히는 것은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다시 말해 그것들 사이에 하나의 관계망을 설정하는 우리의 관심에서 비롯된다. 하나의 사물은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서가 아니라면 초점이 잡힐 수도 없고 규정될 수도 없다. 만일 우리가 하나의 대상을 계속 주목한다면 이것의 초점은 더욱 뚜렷하게 잡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거기에서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이 반영되고 연계되어 있는 점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것은 각걱의 사물을 우주의 중심으로 만드는 것이리라.

 

이것이 바로 무엇인가의 '심층'이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다른 사물이 암시되면서 반영된다. 반영이란 한 사물이 다른 사물 안에 진정으로 존재하게 되는 가장 가시적인 형식이다. 한 사물의 '의미'는 다른 사물과 '공존(coexistence)'하는 최상의 형식이고 이것이 심층의 차원이다. 한 사물의 '물질성'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우주의 잔여물이 쏟아지고 있는 신비의 그림자가 가진 '의미'를 필요로 한다.

 

사물들의 의미에 대해 한번 자문해 보자. 다시 말해 각각의 사물을 세계의 실질적인 중심이 되게 해 보자.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사랑이 하는 일이 아니던가? 하나의 대상을 두고 우리가 그것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그 대상이 우리에게 우주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같은 표현이 아닐까? 그 우주에서는 모든 실들이 우리의 삶과 세계의 직물을 잣고 있다. 아! 물론이다. 물론이고말고. 사실 이런 생각은 매우 오랜 기원을 가지고 있다. 플라톤은 '에로스'에서 사물들 사이를 엮어 주는 힘을 보았다. 그는 말하길, 그것은 결합시키는 힘이고 종합을 향한 열망이다. 따라서 그의 주장대로라면, 사물의 의미를 추구하는 철학은 '에로스'에 의해 유도된다. 성찰은 에로틱한 활동이고 개념은 사랑의 의식이다.

 

매력적인 아가씨가 땅을 찍어 누르는 하이힐을 신고 우리 곁을 지날 때 경험하는 근육의 경련이나 끓는 혈기를 철학적 감수성과 연관시키는 것이 조금 이상해 보일지도 모른다. 여성을 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철학을 하는 것 역시 이상하고 헷갈리고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외치는 니체의 말이 어떠면 옳을지도 모른다. "모두들 위험하게 살지어다."(84∼87쪽)

 

 

고대 그리스인들이 개념을 발명한 이유

 

그런데 그리스 사람들의 가슴속에 새로운 진동처럼 울리기 시작해 이내 유럽 대륙의 다른 나라로 확산된 관심사는 확실하고 견고한 것에 대한 갈망이었다. 이오니아, 아티카, 시칠리아, 그리스 등지의 검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이 성찰하고 입증하고 노래하고 예언하고 꿈꿨던 문화는 흔들리지 않고 확고한 것, 덧없이 달아나지 않고 고정된 것, 불분명하지 않고 명확한 것이었다. 문화는 삶의 모든 국면이 아니라 확실하고 견고하며 명확한 순간을 말한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삶의 즉흥성을 대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확실히 하려는 도구로서 개념을 발명한 것이다.(95쪽)

 

 

 

우리는 개념들을 가지고 본다.

 

명료성은 평온한 정신을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우리 의식이 이미지들을 충분히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포착된 대상이 우리를 피해 달아날지도 모른다는 위협 앞에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이 명료성은 우리에게 개념을 통해 주어진다. 이 명료성, 확실성, 이러한 소유의 충만함은 다른 유럽 작품들로부터 우리에게 잘 전해지며 스페인의 예술, 과학, 정치에는 일반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것들이다. 모든 문화적 작업은 해명과 설명 혹은 주석을 통해 삶을 해석하는 것이다. 삶은 그 자체가 영원한 텍스트이고, 하느님이 설교하는 길가에서 불타고 있는 금작화( 金雀花)이다. 문화는, 그것이 예술이든 과학이든 정치든 간에 하나의 해설로 삶을 자체 내애서 굴절시키며 더 윤기 흐르게 하고 질서를 주는 방법이다. 따라서 문화적 작품은 생명 있는 모든 것에 부속된 문제적 성격을 결코 유지할 수 없다. 삶의 거친 격랑을 통제하기 위해 현인은 성찰하고 시인은 감동에 떨며 정치적 영웅은 자기 의지의 성문을 연다. 이 모든 노력의 결과가 우주의 문제점을 복사하는 데 그친다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물론 그럴 수는 없다. 인간은 명료성을 추구하는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이러한 사명은 신에 의해 계시된 것이 아니고 외부의 그 누구에 의해서도,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부과된 것이 아니다. 그는 내부적으로 스스로 이를 수행하는데 이것이 바로 자신을 구성하는 뿌리다.

 

그 가슴속에서 명료성에 대한 깊은 열망이 영속적으로 일어난다. 마치 괴테가 줄지어 선 높은 인간 봉우리들 가운데 자신의 자리를 만들면서 이렇게 노래했듯이 말이다.

 

나는 엄숙하게 선언한다. 어둠에서 명료성을 열망하는

저 사람들의 가문에 속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초봄의 어느 한낮에 죽음을 마잤을 때 마지막 말을 내뱉으며 최후의 소원을 말한다. 훌륭한 늙은 궁수의 마지막 화살이었다.

 

빛을 더 많은 빛을!

 

명료성은 삶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삶의 완성이다.

 

만일 개념의 도움이 없다면 어떻게 그것을 얻을 수 있을까? 삶 내부의 명료성, 사물들 위를 비추는 빛이 개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각각의 새로운 개념은 이전에는 말이 없고 보이지도 않았던 세계의 한 부분에 대해 우리에게 개방되는 새로운 기관이다. 당신에게 사상(이데아)을 주는 사람은 당신의 삶을 증진시키고 당신 주변의 실재를 확장시켜 준다. 우리가 눈을 가지고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 본다는 플라톤의 의견은 글자 그대로 맞는 말이다. 우리는 개념들을 가지고 본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98∼100쪽)

 

 

 

스페인 문학에서 진정 이보다 더 심오한 작품은 없을 것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돈키호테』는 애매모호한 작품이다. 민족주의적 감성을 통해 이 작품에 쏟아졌던 모든 찬사들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세르반테스의 생애에 대한 모든 현학적인 연구들 역시 애매모호한 덩어리의 조그마한 부분조차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세르반테스는 무언가를 풍자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무엇을 풍자하는가? 탁 트인 라만차 평원 저 멀리에 홀로 서 있는 돈키호테의 삐쩍 마른 형상은 의문 부호처럼 굽어 있다. 이것은 마치 스페인의 비밀, 스페인 문화의 애매모호함을 지키고 있는 파수꾼 같다. 저 지하 감옥에서 이 가여운 세금 징수원은 무엇을 풍자하고 있는가? 그리고 풍자란 무엇인가? 풍자는 곧 부정하는 행위인가?

 

삶의 보편적 의미를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힘이 이토록 큰 작품은 일찍이 없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석하기 위한 지표나 실마리가 이토록 부족한 작품도 일찍이 없었다. 이 때문에 세르반테스와 비교할 때 셰익스피어는 이념가라고 해도 될 정도이다. 셰익스피어는 우리에게 작품의 이해를 도와주는 일련의 미세한 개념들이라 할 수 있는 일종의 대위법을 빼놓지 않고 제공한다.

 

지난 세기 독일의 위대한 극작가인 헤벨은 내가 말하고 싶은 부분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지적한다. "나는 내 작업에서 특정한 사상적 배경을 항상 의식해 왔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그 배경으로부터 출발해 작품을 쓴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상적 배경은 경치를 보이지 않게 가로막는 산맥과 같은 것이다." 나는 셰익스피어 문학에도 이런 점이 있다고 믿는다. 그의 영감이 서린 문장에 들어 있는 일련의 개념들은 우리가 환상적인 시의 밀림을 지나는 동안 우리의 눈을 안내해 주는 매우 섬세한 기준과 같은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익스피어는 항상 자기 자신이 나서서 말한다.

 

세르반테스에게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누군가 그를 리얼리스트라고 지칭한다면 이는 그가 단순한 인상에 머무르거나 일반적이고 이념적인 형식을 회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혹시 이 점이 세르반테스가 가진 최고의 재능은 아닐까?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스페인 문학에서 진정 이보다 더 심오한 작품은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로 하여금 『돈키호테』에 매달리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느님, 대체 스페인은 무엇입니까?" 라는 거대한 질문이다. 별들이 반짝이는 광대하고 우주적인 냉기 속에 무한한 과거와 끝없는 미래 사이에 끼인 채 지구상의 수많은 종족 중에서 길을 잃어버린 스페인, 유럽의 영성적인 언덕이자 유럽 대륙 영혼의 뱃머리와 같은 이 스페인은 대체 무엇인가?

 

스페인의 운명을 밝혀 줄 단어, 정직한 가슴과 섬세한 정신을 만족시켜 줄 확실한 단어, 광채 나는 하나의 단어는 어디 있을까?

 

자신의 길을 재촉하느라 교차로에서 멈추지 않는 민족, 자기 내면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민족, 자신의 운명을 정당화하고 역사적 사명을 명확히 되짚어 보는 영웅적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민족은 불행하도다!

 

개인은 자신의 민족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주 내의 행로를 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마치 떠도는 구름 속의 빗방울처럼 민족 안에 녹아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103∼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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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오렌지의 겉면과 이면을 눈앞에 동시에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가능할까?

 

내가 하는 말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부가적인 설명 없이 넘어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눈앞에 직접 오렌지를 들이대는 식으로 모든 것을 명쾌하게 보여 달라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만일 그들이 순전히 감각적인 기능을 통해 본 것으로 이해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물론이고 아무도 오렌지를 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오렌지는 둥그런 구체로서 겉면과 이면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오렌지의 겉면과 이면을 눈앞에 동시에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는 눈으로 오렌지의 한 부분을 본다. 그러나 이 과일의 전체 모습은 우리의 감각에 주어지지 않으며, 더 많은 부분이 우리의 시선으로부터 감추어져 있다.

 

따라서 사물이 자신을 드러내는 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난해하고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 각각의 사물은 모두 나름의 질서 속에서 해명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해명 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 몸이 가지고 있는 3차원 역시 다른 두 차원과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해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시각이라는 수동적 방법 외에 사물을 보는 방법이 없다면 그 사물 혹은 그것의 특질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53쪽)

 

 

 

표층 세계와 심층 세계

 

여기서 우리는 현존하는 어떤 사물들의 실질적인 특질은 바로 거리이며, 그 특질은 오로지 주체의 행위를 통해서만 얻어진다는 점을 알게 된다. 소리는 멀리 있지 않다. 단지 내가 그것을 멀게 만들 뿐이다.

 

우리는 나무의 시각적 거리나, 숲의 심장부를 찾아가는 오솔길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할 수 있다. 이 모든 거리의 깊이는 나의 협력을 통해 존재하는 것으로, 나의 정신이 하나의 감각과 다른 감각 사이에 설정하는 관계의 구조에서 탄생한다.

 

결국 눈과 귀를 그냥 열어 두기만 해도 우리에게 제공되는 현실의 전체적인 한 부분, 즉 순수 인상의 세계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명백한 세계(patent world)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인상들이 구조화되어 이루어진 배후 세계도 있는데, 명백한 세계와의 관계에서 볼 때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실재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이 상위의 세계가 우리 앞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눈을 뜨는 것만으론 부족하고 더 큰 노력의 행위가 수반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노력의 정도가 그 세계의 실재성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심층 세계는 표층 세계만큼 명백하다. 다만 더 많은 우리의 노력을 요구할 뿐이다.(56∼57쪽)

 

 

 

의지를 가진 사람만을 위해 존재한다

 

숲은 나에게 실재의 1차원이 있음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것은 강렬한 방식으로 내게 부과되는 것으로서 색깔, 소리, 감각적 쾌감과 고통 같은 것들이다. 그 앞에서 나는 수동적 입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실재 뒤에 또 다른 실재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마치 우리가 첫 번째 고개에 올랐을 때 더 높은 산들의 윤곽이 펼쳐지는 모습과 같다. 산들의 윤곽이 다른 산들의 윤곽과 중첩되어 있고, 갈수록 더 심층적이고 암시적인 실재의 새로운 차원들은 우리가 직접 산에 올라 자신에게 다다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 상위의 실재들은 수줍음을 잘 타서 마치 사냥감을 덮치듯 우리에게 달려들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들은 오직 한 가지 조건하에서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즉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여 자기들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것들은 어느 정도 우리의 의지에 따라 살고 있는 셈이다. 학문, 예술, 정의, 예절, 종교는 배고픔이나 추위처럼 인간을 무자비하게 침범하는 실재의 범주들은 아니다. 그것들은 오로지 자신들에 대한 의지를 가진 사람만을 위해 존재한다.(59쪽)

 

 

 

관찰

 

신앙심 깊은 사람이 꽃이 만발한 들판이나 밤하늘의 천체에서 신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할 때 오렌지 하나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은유적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만일 수동적으로 바라보는 것 외에 보는 방법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이 세계는 단지 반짝이는 점들의 무질서한 무더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수동적인 것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있으니, 보면서 해석하고 해석하면서 보는 것이다. 이를 관찰이라고 한다. 플라톤은 이렇게 관찰되는 시각들을 위하여 하나의 신성한 단어를 찾아 냈는데, 바로 '이데아(idea)'이다. 그렇다면 오렌지의 3차원은 하나의 이데아이고, 신은 들판의 최상의 차원이라 할 수 있다.(59∼60쪽)

 

 

 

왜 우리가 빛바랜 색깔 앞에서 우울해지는지

 

빛바랜 색을 보고 있다고 말할 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정확히 무슨 색인가? 우리는 한때 더 진했던 푸른색을 염두에 둔 채 바로 눈앞에 있는 푸른색을 보고 있다. 이처럼 현재의 색깔을 한때 그러했던 과거의 것과 함께 보는 것은 거울을 통해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능동적 시각인데, 이것이 바로 '이데아'이다. 한 색깔의 퇴락 혹은 퇴색은 그것이 겪게 되는 새로운 가상의 성질로서 일시적 심층성과 같은 무언가를 부여한다. 굳이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순간적으로 한눈에 그 색깔과 역사, 그것이 생생했던 시간과 현재의 쇠락을 발견한다. 그리고 우리 안의 무언가가 곧바로 그 몰락과 쇠퇴의 운동을 반복하는데, 이는 왜 우리가 빛바랜 색깔 앞에서 우울해지는지를 설명해 준다.(60쪽)

 

 

 

전형적인 원근법 책

 

내 주위로 숲이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드러내 보인다. 한 권의 책이 내 손에 있다. 그것은 관념적인 밀림, 바로 『돈키호테』이다.

 

여기 심층성을 대표하는 또 다른 경우를 보고 있으니, 그것은 책이 가지고 있는, 이 위대한 책이 가지고 있는 심층성이다. 『돈키호테』는 전형적인 원근법 책이다.

 

스페인 역사에서 『돈키호테』의 깊이를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는데 역사책에는 왕정복고기(Restoration)라는 이름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 시기 동안 스페인의 심장은 가장 낮은 맥박 수를 기록하기에 이른다.(62쪽)

 

 

 

"장님의 나라에서는 애꾸가 왕"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모든 사람이 그런 허위적인 가치에 만족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수량의 세계에서는 최솟값이 측정 단위가 되지만 가치의 세계에서는 최댓값이 측정 단위가 된다. 사물은 가장 가치 있는 것과 비교될 때 비로소 올바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진정한 최상의 가치들이 소멸되면서 그 뒤에 있던 차상의 가치들이 그 자리를 잇게 된다. 사람의 마음은 최고와 최상의 것이 공백 상태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비록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옛 속담에서 말하듯, "장님의 나라에서는 애꾸가 왕"인 것이다. 자리의 순위는 날이 갈수록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사물과 사람들에 의해 자동적으로 채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진정 강하고 뛰어나고 완전하며 심오한 것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왕정복고기에 사라지고 말았다. 스쳐 지나가는 비범한 천재성 앞에서 전율을 느낄 수 있는 능력도 퇴화되었다. 니체라면 이 시대가 가치 평가의 본능이 퇴보하는 국면에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위대한 것이 위대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순수한 것이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았으며, 완전함과 위대함의 특질이 마치 자외선처럼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이후 평범하고 경박한 것들이 점차 득세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언덕이 산으로 부풀려지고 누네스 데 으레세 같은 작가도 시인 행세를 하게 되었다.(64∼65쪽)

 

 

 

스페인의 길

 

지중해 철학자와 게르만 철학자 사이를 갈라놓는 거리는 우리가 지중해의 망막(網膜)과 게르만의 망막을 비교할 때 다시 한 번 동일하게 발견된다. 단, 이번 비교에서는 우리에게 더 우호적인 결정이 내려진다. 우리 지중해 사람들의 사고는 명료하지 않지만 시력만큼은 명료하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신곡(神曲)』이라는 건축물을 구성하는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알레고리의 복잡한 개념적 발판을 치워 버린다면 우리의 두 손에는 종종 11음절의 빈약한 육체 안에 갇혀 있는, 그러나 보석처럼 반짝이는 간결한 이미지들이 남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미지들을 위해 작품의 나머지 부분을 기꺼이 포기할 것이다. 그것은 초월적 의미가 없는 단순한 영상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색깔과 풍경과 아침 시간의 장면을 시인이 포착한 것이다. 세르반테스 작품에서 이러한 시각적 힘은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 시각적 이미지는 너무나도 뚜렷해서, 굳이 사물을 묘사하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의 순수한 색과 소리와 전체 몸뚱이가 서술 과정에 저절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다. 이에 플로베르가 『돈키호테』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외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어디에도 기술되어 있지 않은 스페인의 길들이 어쩌면 이토록 잘 보인다는 말인가!"(78∼79쪽)

 

 

눈앞에 보여야 한다는 것

 

만일 세르반테스를 읽다가 괴테를 읽으면, 우리는 두 시인이 창조한 세계들의 가치를 비교하기에 앞서 결정적인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즉 괴테의 세계는 우리 눈앞에 즉각적인 방식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사물과 등장인물들이 마치 자신의 기억이나 꿈에 나타나는 것처럼 멀리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떠돌아다닌다.

 

하나의 사물이 설사 지금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요건이 하나 빠져 있으면 소용이 없다. 그것은 바로 눈앞에 보여야 한다는 것, 즉 현재성이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에 맞서기 위해 칸트가 말한, "가능한 30탈러가 눈에 보이는 30탈러보다 못하지 않다"라는 유명한 구절은 철학적으로 정확하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게르만주의 스스로의 한계를 순진하게 고백하는 말이기도 하다. 지중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의 본성이 아니라 그것의 현존, 그 현재성이다. 즉 우리는 사물에 앞서 사물의 생생한 감각을 더 선호하는 것이다.

 

우리 라틴 사람들은 이를 리얼리즘이라 불렀다. 그러나 '리얼리즘'은 라틴적 개념일 뿐 라틴적 시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므로 명료하지 않은 용어이다. 이 리얼리즘이란 말은 무엇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가? 만일 우리가 사물과 그 사물의 외양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남방 예술의 정수는 우리의 이해에서 멀어지고 말 것이다.

 

괴테 역시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사물을 추구한다. "내가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눈이라는 신체 기관 덕분이다. 에머슨도 이렇게 덧붙인다. "괴테는 온몸을 집중해서 관찰한다."

 

아마 게르만 문화 내부로만 한정한다면 괴테는 밖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시각적 기질의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방의 우리 예술가와 대비할 때 사실 괴테는 보는 것이라기보다는 눈을 통해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에 정통한 눈을 가지고 있다"라는 키케로의 말도 있듯이, 무언가를 볼 때 순수 인상에 속하는 것은 지중해에 가면 그 무엇보다 강력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 자체로 만족하는 경향이 있다. 눈동자를 통해 사물의 표면을 보고 살피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우리 예술이 차별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그러나 이를 리얼리즘이라고 부르지는 말자. 왜냐하면 그것은 사물이나 실체가 아니라 사물의 외관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명칭으로는 외양주의, 환영주의(幻影主義), 인상주의 등이 더 어울릴 것이다.(79∼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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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11-18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맑고 청명한 지중해성 기후와 춥고 어두운 북유럽의 기후가 그곳에 사는 인간의 사고에 깊은 영향을 주는 듯합니다. 인간은 주변의 환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임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오랫만에 oren님 글을 보니 좋습니다^^:

oren 2017-11-18 17:36   좋아요 1 | URL
오랫만에 알라딘에 접속하니 조금은 낯선 느낌도 듭니다. 바깥 날씨는 어느새 겨울이 찾아온 듯 매서운데, 겨울호랑이 님의 댓글은 언제나 따뜻한 온기가 가득하군요.^^
 
돈키호테 성찰 을유세계문학전집 90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신정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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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비평이 할 일

 

비평이 작가에 대해, 심지어 작품의 세부 사항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작가에게는 없으나 그를 완성시키는 모든 요소를 모으고 가능한 한 그에게 가장 호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야말로 비평이 할 일이기 때문이다.(36쪽)

 

 

근대적 고뇌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고딕풍의 그리스도

 

돈키호테라는 인물이, 마치 모든 신호를 잡아내는 안테나처럼 작품 중심에 우뚝 서서 독점적인 주목을 받는 바람에 작품의 다른 부분이 피해를 입었고 결국 돈키호테 자신도 피해를 입고 말았다. 분명히 말하건대, 약간의 사랑과 또 다른 약간의 겸손만 있다면 ㅡ 두 개가 아예 모두 없다면 불가능하지만 ㅡ 『그리스도의 이름들에 대하여』를 솜씨 있게 패러디한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신학적 열망에 가득 찬 루이스 데 레온 수사가 플레차 농장에서 써 내려 간 중세 로마네스크 상징주의의 걸작이다. 그리고 '돈키호테의 이름들에 대하여'라는 이름의 작품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면에서 볼 때 돈키호테는 신성하고 고독한 그리스도의 슬픈 패러디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근대적 고뇌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고딕풍의 그리스도이다. 그는 순수성과 의지를 상실하고 또 다른 새로운 것을 찾아 방황하는 고통 속의 상상력으로 창조된 우리 동네의 희화화된 그리스도이다. 과거의 사상적 빈곤, 현재의 천박함 그리고 미래의 신랄한 적대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스페인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을 때마다 그들 사이로 돈키호테가 강림한다. 기이한 그의 용모에서 발산되는 열기는 그들의 갈라진 마음들을 조화시키고 영적인 끈으로 묶어 놓고 민족주의자로 바꾸어 버리며, 개인적인 비탄을 넘어 민족의 집단적 고통으로 승화시킨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오의 복음서」18:20)

(36∼37쪽)

 

 

『돈키호테』정도의 걸작은 예리고의 성처럼 접근해야 한다.

 

자연의 비밀들이 가차 없이 드러나고 있다. 우주의 숲에서 조준을 마친 과학자는 사냥꾼처럼 문제를 향해 곧바로 달려든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과 마찬가지로 플라톤에게도 학자라는 존재는 사냥을 떠나는 사람, 즉 엽사(獵師, venator이다. 만일 그가 무기와 의지만 가지고 있다면 사냥은 분명 성공한다. 즉 새로운 진리가 마치 화살을 맞은 새처럼 그의 발치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천재적인 예술 작품은 지식의 공격을 받아도 이런 식으로 자기 비밀의 문을 열지 않는다. 그것은 강압적으로 굴복하는 것에 저항하며, 자기가 원하는 상대에게만 자신을 허락한다고 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우리의 지극한 관심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선 학문적 진실과 비슷하지만, 사냥꾼처럼 목표물을 향해 곧바로 달려드는 것은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기에 굴복하지 않고, 굳이 한다면 성찰 의식에 굴복한다. 『돈키호테』정도의 걸작은 예리고의 성처럼 접근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넓게 동심원을 그리면서 서서히 압박해 들어가야 하며 마치 천상의 나팔소리가 울리는 것처럼 해야 한다.(38∼39쪽)

 

 

관심의 넓은 동심원일 뿐

 

한 권의 책을 쓴 끈기 있는 양반 세르반테스는 3세기 전부터 이상향의 초원에 자리잡고 앉아서 우수에 젖은 시선을 주위에 뿌리며 자신을 이해할 자손이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또 다른 글로 이어질 이 성찰의 글들이 『돈키호테』가 간직하고 있는 최후의 비밀을 범하려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것은 불멸의 작품에 운명적으로 매혹된 생각이, 멀리서 조급함 없이 그려내고 있는 관심의 넓은 동심원일 뿐이다.(39쪽)

 

 

덧없는 어느 봄날의 오후

 

이 웅대한 잿빛 건축물은 빽빽이 들어선 숲을 망토처럼 두르고 있어 계절이 변함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한다. 겨울에는 구릿빛, 가을에는 황금빛, 여름에는 짙은 녹색으로 변화하며, 봄은 마치 수도사의 완고한 영혼을 통과하는 에로틱한 영상처럼 강렬하고 재빠르게 획 지나가 버린다. 숲속 나무들은 순식간에 밝고 신선한 초록색으로 단장한 나뭇잎으로 뒤덮인다. 대지는 에메랄드빛 풀 아래로 모습을 감추는데, 그 풀 역시 하루는 노란색으로, 다른 날은 라벤더의 자줏빛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지극한 고요함이 지배하는 장소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인 침묵은 결코 아니다. 사물들이 돌아가면서 완벽하게 입을 다물지만 소리가 멈추어 버린 그 자리는 또 다른 무언가로 채워지길 기다리고, 그때서야 우리는 심장의 박동 소리, 관자놀이의 피가 맥박 치는 소리, 우리의 허파 속으로 스며들자마자 부지런히 달아나는 공기의 부글거리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구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 최후의 박동이 될 것처럼 느껴지고, 뒤를 잇는 새로운 구원의 박동은 항상 우연한 것일 뿐 다음을 보장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냥 장식적이고 근원을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리는 침묵이 차라리 더 좋다. 바로 여기가 그런 곳이다. 맑은 물이 재잘거리며 정처 없이 흘러 가고 녹음 사이로는 검은 방울새, 분홍 방울새, 개똥지빠귀 그리고 때때로 아름다운 꾀꼬리에 이르기까지 작은 새들이 지저귄다.

 

덧없는 어느 봄날의 오후, 에레리아를 방문한 나의 머릿속에서 사색이 펼쳐진다.(45∼46쪽)

 

 

독일에도 나무들 때문에 숲이 보이지 않는다는 격언이 있다.

 

하나의 숲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나무가 있어야 할까? 하나의 도시가 되려면 얼마나 많은 집들이 있어야 할까?

 

푸아티에의 농부는 이렇게 노래했다.

 

지붕들이 너무 높아

거리를 내다보는 데 방해가 되네.

 

독일에도 나무들 때문에 숲이 보이지 않는다는 격언이 있다. 숲과 도시는 본질적으로 깊이를 간직한 두 개의 사물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을 때는 표면으로 나서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47쪽)

 

 

어쨌든 누군가는 꼴찌를 해야 하지 않겠어?

 

이 세계에는 동등하게 존중받고, 똑같이 세상에 필요한 여러 운명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좋은 교훈이 있다. 드러나는 순간 자신의 가치를 훼손하거나 상실하는 사물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모습을 감추거나 간과된 상태에서 완전함에 도달하는 것들도 있다. 부차적인 지위에 있으면서도 완전한 자아 확장에 이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최고의 지위에 앉으려고 발버둥 치느라 자신의 모든 덕을 폐기해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현대 소설 한 권을 읽었는데, 거기엔 머리는 별로 안 좋지만 도덕적 감수성이 뛰어난 소년이 등장한다. 그는 학교에서 항상 꼴찌를 하지만 '어쨌든 누군가는 꼴찌를 해야 하지 않겠어?' 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것은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해 주는 훌륭한 사례가 된다. 고귀한 정신은 첫째가는 자리뿐 아니라 마지막 자리에도 있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첫째와 꼴찌 모두 세상에 똑같이 필요하고, 서로에게도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51쪽)

 

 

무정한 죄

 

어떤 사람들은 심층의 사물에게 표층의 사물처럼 나타나라고 요구하면서 그것의 진정한 깊이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양한 종류의 명료함(clacidad)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표층이 보여 주는 특수한 형태의 명료함에만 집착한다. 그들은 표층 아래 숨어 있는 것이 심층의 본질이고, 그것이 표층 밑에서 맥박 치다가 표층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내 생각에는, 각각의 사물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에게 있는 고유한 조건을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죄악인데, 이것이 근본적으로는 사랑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나는 이를 가리켜 '무정(無情)한 죄'라 부르겠다. 우리들의 나쁜 성향과 맹목성을 통해 세계를 축소하고 실재를 왜곡하며 실제로 존재하는 부분들을 상상 속에서 없애 버리는 것만큼 의롭지 못한 것은 없다.

 

이는 심층적인 것에 대해 표층적인 것과 같은 방식으로 드러나길 요구할 때 발생한다. 하지만 사물의 이치는 그렇지 않다.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는 데 꼭 필요한 만큼만 자신을 드러내는 사물들이 있는 것이다.(5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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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성찰 을유세계문학전집 90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신정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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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세상에 내려온 신성한 건축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볼 때 스페인 사람들의 심성은 언제부터인가 증오로 가득 차게 되었고 거기 웅크려 있으면서 세상에 대해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 어쨌거나 증오는 가치들을 말살하는 길로 이끄는 질환이다. 무언가를 증오할 때 우리는 그 무언가와 우리 마음 사이에 거대한 강철 용수철을 집어넣고 사물과 우리 영혼 사이의 일시적인 융화마저도 불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증오의 용수철에 의해 접촉되는 사물의 부분만 알게 되고 다른 부분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거나 잊히면서 점차 우리와는 무관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런 식으로 스페인 사람들에게 우주는 점점 더 경직되고, 건조하고, 천박하고, 황량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의심 많고 회피적인 태도로 인생 여정을 지나면서 마치 메마르고 굶주린 개처럼 험악한 표정으로 삶을 바라본다.

 

이와는 반대로, 사랑은 비록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사물과 연결시킨다. 우리 스스로 한번 자문해 보자. 만일 한 사물이 사랑받는 존재가 될 때 어떤 새로운 일이 일어날까? 우리가 한 여인을 사랑할 때, 학문을 사랑할 때, 조국을 사랑할 때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사랑하는 그것이 우리에게 뭔가 꼭 필요한 것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사랑받는 존재는 우리에게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비치는 존재이다. 필수 불가결한 것이란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것, 우리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빠진 삶은 인정할 수 없는 것, 우리 자신의 일부분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다른 사물들을 우리 안에 빨아들이고 융합하면서 우리의 개체를 확장시킨다. 이러한 결속과 교감은 사랑받는 존재의 본성에 우리가 보다 깊숙이 들어가게 해 준다. 우리는 그것을 전체적으로 완전히 볼 수 있게 되고, 그것은 자신의 모든 가치를 우리에게 드러낸다. 그때 우리는 사랑받는 존재 역시 다른 사물의 일부이며 그것을 필요로 하고 그것에 결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랑받는 존재에게 필수 불가결한 것은 우리에게도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사랑은 굳건하고 본질적인 구조 아래 사물과 사물을 연결시키고 그 모두를 우리와 연결시킨다. 플라톤에 따르면 사랑은 "우주 안의 모든 것이 분리되지 않고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세상에 내려온 신성한 건축가이다.(13∼14쪽)

 

 

원한은 열등감의 분출

 

플라톤의 대화편에서는 이해하고자 하는 이런 열망을 가리켜 '사랑의 광기'라고 부른다. 나는 비록 사물을 이해하려는 힘이 모든 사랑의 원형이나 기원 혹은 절정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의 필수적인 징후는 된다고 믿는다. 나는 적군이나 적의 깃발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친구나 국기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관찰해 보건대, 적어도 우리 스페인 사람들은 진실을 요구하는 데에 마음을 열기보다는 도덕적인 교리에 근거해 더 흥분하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바람직한 개혁과 교정보다는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기 위해 항상 판단력을 곤두세우면서 우리의 의지를 소진한다. 아마도 우리는 이 세상이 주는 큰 몫을 포기하면서 삶을 단순화하기 위해 도덕률을 하나의 무기처럼 수용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 이미 특정한 도덕적 행위가 원한의 한 형태이자 산물임을 날카롭게 간파한 바 있다.

 

이러한 원한의 산물이 우리의 공감을 얻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원한은 열등감의 분출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현실에서 제거할 수 없는 사람을 상상 속에서 제거하는 것이다. 우리가 원한을 품었던 대상은 우리의 환상 안에서 시체와 같은 창백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고의적으로 그를 죽이고 말살한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왔을 때 건재하고 평온한 그의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시체는 더욱 다루기 힘들고 우리 능력보다 더 강력하게 비쳐지며, 그 존재 자체가 우리의 허약한 조건을 비웃고 깔보는 인격화된 화신이 된다.(16∼17쪽)

 

 

이해한다는 것과 단순히 안다는 것의 뉘앙스 차이

 

이런 의미에서, 나는 철학이 사랑에 대한 보편 학문이라고 간주한다. 그것은 지적 세계에서 상호 연관된 완전체를 지향하는 가장 강력한 충동을 의미한다. 철학 안에서는 이해한다는 것과 단순히 안다는 것의 뉘앙스 차이가 명백히 드러난다. 우리는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알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 사물에 대한 모든 지식은 사실상 불가해하며 이론의 도움을 빌려야만 해명될 수 있다.

 

관념적으로 말할 때, 철학은 정보나 박식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박식을 경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정보가 담긴 지식은 의심할 여지 없이 학문의 한 방법이었다. 그것이 흥했던 시대도 있었다.  ……

 

결국 사실들의 축적에 지나지 않는 박식은 학문의 주변부를 차지할 뿐이다. 반면 철학은 순수한 종합으로서 학문의 중심부를 구성한다. 축적 과정에서 자의적으로 수집된 자료들은 한 무더기이지만 각각의 자료는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따로따로 놀게 된다. 반면, 종합이 이루어지면 각각의 사실들은 잘 소화된 음식처럼 흡수되고 본질적인 활력만 남게 된다.(20∼21쪽)

 

 

  

환경

 

환경(circunstancia)! 그것은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말 없는 사물들이다! 그것들은 우리와 매우 가까운 곳에서 겸손하고 간절한 표정으로 마치 자기들이 바치는 것들을 우리가 받아 주기를 기다리면서 조용히 얼굴을 내미는 듯하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너무 소박하기만 한 자기들 선물을 부끄러워하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 사이를 활보하면서도 그 존재를 간과한 채 멀리 윤곽만 보이는 도시를 정복하기 위해 기획된 거창한 사업에만 눈길을 빼앗기고 있다. 마치 날쌔고 우직한 투창처럼 영광의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영웅 옆에서 겸손하고 애처로운 표정으로 존재감도 없이 남몰래 그를 사모하며 따라다니는 소녀 이야기처럼 나를 감동시키는 책은 드물다. 그녀의 백옥 같은 몸속의 심장은 영웅을 위한 검붉은 불덩이가 되어 타오르고, 영웅의 영광을 기리는 향이 피어오른다. 우리는 영웅에게 한마디라도 해 주고 싶다. 열정에 불타면서 그 발치에 피어 있는 한 송이 꽃을 향해 단 한 번이라도 눈길을 보내라고 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가 바로 이 영웅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주변의 겸허한 사랑을 향유하고 있다.(24∼25쪽)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일 뿐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강 유역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자기 주변 환경을 그렇게 인식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고,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반대로 그 의미를 축소시켜 버린다. 어떤 사람들은 한 사물이 세상의 전부이거나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는 환상을 품지 않게 되면, 그 사물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못하면서 자신의 근본적인 약점을 드러낸다. 이처럼 경직되고 유치한 관념론은 우리 의식에서 근절되어야 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부분들뿐이다. 전체는 부분들을 추상화한 것이고 부분들을 필요로 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좋은 것들이 있지 않다면 더 좋은 것이라곤 있을 수 없으며, 전자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통해서만 후자는 최상급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병사들이 없는데 어떻게 대장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세계의 궁극적 존재가 물질이나 정신처럼 확정적인 어떤 사물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일 뿐이라는 확신을 언제쯤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신은 관점이며 분류 체계일 뿐이다. 사탄이 범한 죄는 관점의 오류였다.

 

그렇다면 시점(point of view)들이 많아질수록, 그리고 각각의 단계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정확할수록 관점은 더욱 완벽해진다. 상위 가치들에 대한 직관적 통찰은 그보다 하위인 것들과의 접촉을 값지게 만들고, 가까이 있는 소소한 것들에 대한 사랑은 숭고한 것의 현실감과 효율성을 우리 가슴에 제공한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큰 것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28∼29쪽)

 

 

"들어와, 들어와! 여기에도 신들이 있다고."

 

결국 지구상에서 신성한 신경망이 하나라도 지나가지 않는 사물은 없다. 문제는 그 신경에 도달하여 그것의 반응을 일으키는 일이 어렵다는 점이다. 자기가 있는 부엌에 들어오기를 주저하는 친구들에게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들어와, 들어와! 여기에도 신들이 있다고." 괴테는 식물학과 지질학 탐사 여행 중에 야코비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기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며 풀과 돌 속에서 신성을 찾고 있네." 한편 루소는 카나리아 새장에 풀을 키웠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사실을 언급한 파브르는 자기 책상 다리에 붙어 살고 있는 미세한 벌레들에 대한 책을 쓴다.

 

정신의 행위라 할 수 있는 영웅성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삶의 일부 내용만 해당되는 특별한 것이라고 간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표면 바로 아래 어디서나 영웅이 탄생할 수 있으며, 누구든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을 힘껏 차기만 해도 샘물이 솟아나길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영웅 모세가 보기에는 모든 바위에서 샘물이 솟아날 수 있다.(30∼31쪽)

 

 

술 한잔이 가져다주는 기분 좋은 느낌

 

사실, 염세주의의 심연에 도달하여 우주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기에 충분한 긍정적인 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할 때 우리의 시선은 일상의 소소한 사물들로 향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죽어 가는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자신에게 일어났던 아주 사소한 일들을 기억해 내는 것과 같다. 그때 우리는 이 지구상에 우리의 삶을 붙들어 매 주는 것이 위대한 일이나 커다란 즐거움 혹은 거창한 야심이 아니라 한겨울에 화롯불 옆에서 따스한 가정의 온기를 느끼는 순간, 술 한잔이 가져다주는 기분 좋은 느낌, 사랑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얌전한 한 아가씨가 총총히 걸어가는 모습 그리고 위트 있는 친구가 건네는 재미있는 농담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나는 절망에 빠져 나무에 목을 매러 갔던 사람이 자기 목에 줄을 거는 순간 나무둥치에 핀 장미꽃 향기를 맡고 자살을 포기했다는 얘기가 무척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고상한 삶을 위해 현대인이 성찰하고 깨달아야 할 생명력의 원천이 되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적 충동의 경우처럼, 수없이 감추고 숨기려 해도 마침내 인생 행로에서 승리를 거두는 수많은 어둠의 세력처럼 그것을 취급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그것을 감추기를 강요하고 외면하는 것이다. 인간 이하의 성질도 인간 안에서 지속된다. 그것이 지속되는 의미는 무엇일까? 셰익스피어가 한 희곡 작품에서, 마치 자신의 소네트로부터 방울방울 떨어지는 듯한 친밀하고 다정하고 진지한 말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감정을 접하고 우리가 취해야 할 로고스, 즉 확실한 자세는 무엇일까? 『자에는 자로(Measure for Measure)』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남이 들으면 아니 될 일이지만,

자부심을 느끼던 위엄에 찬

내 태도조차도

이제 덤을 붙여서라도, 공중에

속절없이 나부끼는 깃털 장식과 바꾸고 싶다.

 

이것은 부적절한 욕망이 아니던가? 게다가 ……!(31∼33쪽)

 

(나의 생각)

 

셰익스피어의 희극 작품에서 다루는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는 결혼이다. 그런데 유독『자에는 자로(Measure for Measure)』라는 작품만은 그 이전의 작품들, 가령 『한여름 밤의 꿈』, 『베니스의 상인』,『좋으실 대로』,『십이야』등과는 사뭇 다르게 분위기가 그리 밝지 못하다. 그 주된 이유는 셰익스피어가 이 희극의 핵심 주제를 다른 작품에서 다루었던 '사랑과 결혼'이 아니라 '욕정과 욕정의 억압'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에는 자로』 는 세익스피어의 전통적인 희극에서 가장 멀어진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오르테가가 『돈키호테 성찰』에서 인용하고 싶었던 '부적절한 욕망'을 두고『자에는 자로(Measure for Measure)』에서 인용한 대사는 너무나 짧아서 실상 '저자의 생각'을 온전히 제대로 포착하기가 너무나 어렵다. 조금이나마 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나오는 '안젤로의 대사'를 조금 더 길게 인용해 보면 이렇다.(이사벨라는 '수감된 오빠'를 구하기 위해 감옥을 찾아왔는데, '공작 대행'인 안젤로는 그녀의 오빠를 풀어 주는 대가로 이사벨라에게 '성 상납'을 요구한다.)

 

뭐야? 뭐? 이게 그녀 허물인가, 내 것인가?

유혹하고 받는 자, 누구 죄가 더 크지, 하?

그녀는 아니지, 유혹도 안 했고, 바로 나야,

햇볕을 받으며 오랑캐꽃 곁에 누워

활기찬 계절에 꽃처럼 못 피고

사체처럼 썩고 있지. 여자의 정숙함이

가벼움보다도 우리의 관능을 더 크게

자극할 수 있는 걸까? 쓰레기장도 많은데

우리가 그 성소를 허물고 거기에다

뒷간을 만들고 싶을까? 오, 퉤, 퉤, 퉤!

어쩌려고, 혹은 넌 무엇이냐, 안젤로?

그녀를 착하게 만드는 것 때문에

흑심을 품느냐? 오, 그 오빠를 살려 줘라!

(중략)

두 배의 정력과 재주와

본능을 다 가진 창녀조차 내 평정을 한 번도

흔들 수 없었는데 고결한 이 아가씬

날 완전히 정복했다. 남자들이 빠졌을 때

지금까지 난 웃었고 왜 저럴까 했었지.

 - 『잣대엔 잣대로』, <2막 2장 164∼188행>

 

 

 

선조들의 땅!

 

칸트는 『인류학』에서 스페인에 대해 평가하고 있는데 그 말이 얼마나 심오하고 정확한지 나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이다. 칸트에 따르면, 터키 사람들은 여행할 때 방문하는 나라의 특징적인 결점에 따라 그 나라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그 방법을 사용하여 칸트는 다음과 같은 표를 만든다. 1. 유행의 땅(프랑스) 2. 못된 기질의 땅(영국) 3. 선조들의 땅(스페인) 4. 과시의 땅(이탈리아) 5. 직함의 땅(독일) 6. 양반들의 땅(폴란드)

 

선조들의 땅! 결국 스페인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이 시대를 사는 스페인 사람들의 자유로운 재산도 아니다. 이 땅에 살았던 과거의 사람들이 지금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으며 우리를 억압하는 죽음의 과두 정치를 형성하고 있다. 아이스킬로스의 『제주를 바치는 여신들』에서 하인은 이렇게 말한다.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죽이고 있습니다."(33쪽)

 

 

"죽은 자에게 죽음이란 곧 삶이다."

 

간결한 표현을 위해 역설적인 문장을 하나 써 보겠다. "죽은 자에게 죽음이란 곧 삶이다." 이미 소멸해 버린 사물의 영역인 과거를 지배하는 길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우리의 혈관을 열고 뽑아낸 피를 죽은 자의 빈 혈관에 주입하는 일이다. 과거를 마치 삶의 한 방식으로 다루는 이런 행위는 반동주의자라면 결코 할 수 없는 것이다. 반동주의자는 과거를 죽음의 상태 그대로 삶의 영역에서 빼내어 우리의 영혼을 다스리는 옥좌에 앉힌다. 셀티베로족이 고대에 죽음을 숭배했던 유일한 부족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과거를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이러한 무능력함이야말로 진정한 반동주의의 특성이다. 반면, 새로운 것에 대한 반감은 다른 민족의 심리적 기질들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기차로 여행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로시니가 흥겨운 소리를 내는 방울 마차를 타고 유럽을 돌아다닌 것을 반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작 심각한 것은 다른 데 있다. 즉 우리가 오염된 영혼의 범주를 가지고 있어서, 마치 독기를 내뿜는 호수 위를 날아가는 새들처럼 과거가 우리의 기억 속으로 떨어지면서 죽는 것이다.(34쪽)

 

 

독서가 완성되면서 작품 역시 완성된다.

 

나는 문학 작품들을 나쁜 작품과 좋은 작품으로 분류하면서 딱지를 매기는 것이 비평의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갈수록 판결을 내리는 데 흥미를 잃어 가고 있다. 나는 사물을 재판하는 대신 그들의 애인이 되고 싶다.

 

나는 비평에서 선택된 작품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려는 지극한 노력을 본다. 그것은 독자들을 작품에서 벗어나 작가에게 데려간 다음, 결국 자잘한 일화들 속에 작가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생트뵈브의 방식과는 정반대이다. 비평은 전기가 아니고, 작품을 완성시키는 역할을 하지 못하는 한 독립된 작업으로 정당화되지도 못한다. 이는 평범한 독자가 작품에서 강렬하고 명확한 인상을 받을 수 있도록 정서적이고 이념적인 도구들을 이용해 비평가가 자신의 작업에서 안내해 주어야 한다는 점을 뜻한다. 비평은 보다 긍정적인 의미를 지향해야 하고, 작가를 교정하기보다는 독자에게 보다 완전한 시각 기관을 갖추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독서가 완성되면서 작품 역시 완성된다.(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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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 -하 을유세계문학전집 2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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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중세의 학자들은 시간이란 하나의 망상에 불과하고, 인과 관계 속에서 연속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되는 시간의 경과는 우리의 감각 기관의 산물에 지나지 않으며, 사물의 진정한 본질은 영원한 현재라고 설명했다. 가장 먼저 그런 생각을 한 학자는 영원의 쓴맛을 약하게 입술에 느끼며 해변을 산책하던 중이었을까?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휴가의 특전에 관해 말하고 있고, 건장한 남자라면 따스한 모래 속에 누워 있는 것에 금방 싫증을 내고 말듯이, 도덕적인 인간이라면 금방 싫증을 내고 말 여가 중의 공상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인간의 인식 방법과 형식에 비판을 가하고 그것의 온전한 타당성을 의문시하는 것은, 이성의 경계선을 드러내 보이려는 의미 외에 다른 의미가 결부되어 있다면 불합리하고 파렴치하며 모순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만약 이성이 그러한 경계선을 넘어선다면 이성은 자신의 본래적인 과제를 소홀히 한다는 누명을 쓰게 될 것이다.(392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7장》, <해변 산책>

 

어떤 날씨건 낮과 밤의 어떤 시간이건, 나는 그 시점을 최대한 선용하고 나의 지팡이에도 새겨놓으려고 했다. 과거와 미래라는 두 개의 영원이 만나는 바로 이 현재의 순간에 서서 줄을 타듯이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다.(28∼29쪽)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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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9-02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의 산>을 읽기 위해서는 중세 스콜라 철학도 공부해야겠군요. 많은 사전 공부가 필요한 작품임을 oren님 덕분에 알게 됩니다.^^:

oren 2017-09-03 00:13   좋아요 1 | URL
『마의 산』에는 온갖 철학 사상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복잡하게 뒤섞여 있어서, 작가가 독자들을 일부러 ‘마의 산‘ 속에 붙잡아 두고서 끊임없이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소설 속에서 괴테, 바그너, 니체, 쇼펜하우어 등의 영향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데, 정작 문제는 작가가 과연 무슨 의도로 ‘그런 사상들‘을 작품 속에서 여러 등장인물들을 통해 끊임없이 부각시키고 있는지를 제대로 포착하기가 힘들다는 점에 있는 듯합니다.
* * *
토마스 만은 쇼펜하우어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서문에서 그랬듯이 시도동기적인 암시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소설을 두 번 읽으라고 요구한다. 이는 소설의 줄거리보다 시도동기구조가 더 중요하다는 암시를 내포한다. 그럴 적에 사실적인 외부 묘사는 가상으로 드러나고 그 배후에 제2의 차원이 드러난다. 심층 세계에는 알레고리 구조가 자리 잡고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줄거리가 사실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점이 토마스 만의 뛰어난 작품 기법이다. - 홍성광, <작품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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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0 17: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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