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과 기억 대우고전총서 17
앙리 베르그손 지음, 박종원 옮김 / 아카넷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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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어떤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달리 소통할 수 없는, 두 상이한 세계

 

그러나 만일 실재에 대한 이 최초의 세분이 직접적 직관에 답하기보다는 오히려 삶의 근본적인 필요에 응답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이 분할을 더 멀리 밀고 감으로써 사물들에 더욱 근접한 인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생명적 운동(욕구의 충족을 의미-역자)을 연장하는 것이고 진정한 인식에 등을 돌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물체를 그것과 동일한 본성의 부분들로 해체시키는 이 조야한 작용은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이끈다. 즉 우리는 왜 이 분할이 멈출 것인지도, 어떻게 이 분할이 무한히 계속될 것인지도 생각할 수 없다고 곧 느끼게 된다. 이 분할 작용은 실로 유용한 행동의 일상적인 형식을 순수 인식의 영역으로 부당하게 이전한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물질의 단순한 속성들은 입자들이 어떤 것이든 간에 결코 입자들에 의해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사람들은 물체가 행하는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을 물체 자체와 마찬가지로 인위적인 미립자들에까지 추척할 것이다. 화학의 목표가 바로 그러하다. 화학은 물질보다는 물체를 연구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화학이 물질의 일반적 속성을 지니는 원자에서 멈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물리학자의 시선 아래서 원자의 물질성은 점점 더 해체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원자를 액체나 기체보다는 고체로서 표상할 어떤 이유도 없으며, 원자들의 상호작용을 아주 다른 방식이 아니라 바로 충돌에 의해 표상할 어떤 이유도 없다. 왜 우리는 충돌을 생각하는가? 왜냐하면 고체들은 우리가 가장 명백하게 힘을 행사하는 물체들이어서 외부 세계와 우리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야기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접촉은 우리 신체가 다른 물체들에 작용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단순한 실험들만 참조해도 어떤 실제적 접촉도 없이 서로 밀어내는 두 물체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 고체성은 절대적으로 뚜렷한 물질의 상태가 아니다. 따라서 고체성과 충돌은 그것들의 외관상의 명백성을 실천적 삶의 습관들과 필요성으로부터 빌려 온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이미지들은 사물들의 근거에 관해 어떤 빛도 던져주지 않는다.

 

게다가 과학이 모든 반론들 위에 놓는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물질의 모든 부분들이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물체를 구성한다고 가정된 분자들은 인력과 반발력을 행사한다. 중력의 영향은 행성 사이의 공간을 통해 펼쳐진다. 따라서 원자들 사이에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더 이상 물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힘에 속한다고 말할 것이다. 사람들은 원자들 사이에 평행하게 이어져 있는 선들을 상상하고 그것들이 점점 더 얇아져서 보이지 않으며 심지어 비물질적인 것이라고 믿게 될 때까지 그것들을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야한 이미지가 무엇에 소용될 수 있겠는가? 삶을 보존하기 위해 우리는 아마도 일상적 경험에서는 불활성적인inertes 사물들과 그것들이 공간 속에서 행하는 작용들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물을 접촉할 수 있을 정확한 지점에 그것의 자리를 고정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용하기 때문에, 사물의 촉지할 수 있는palpable 윤곽은 우리에게 그것의 실제적 한계가 된다. 그 때 우리는 사물의 작용에서 그것으로부터 분리되고, 그것과 다른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본다. 그러나 물질의 이론은 바로 우리의 욕구에 전적으로 상대적인 이 일상적인 이미지들 아래서 실재를 재발견하려 하기 때문에, 그것이 우선적으로 벗어나야 하는 것은 이 이미지들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힘과 물질이 물리학자가 그 효과들을 깊이 탐구함에 따라 서로 접근하고 다시 결합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힘이 물질화되고, 원자가 관념화되며, 이 두 항들이 하나의 공통적 경계로 수렴하고, 이렇게 해서 우주가 자신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을 본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원자에 대해서 말할 것이고, 심지어 원자는 그것을 고립시킨 우리 정신에 대해 그 개체성을 보존할 것이다. 그러나 원자의 고체성과 관성은 운동들이나 역선(力線)들로 용해될 것이며, 그것들의 상호 연대성이 우주적 연속성을 회복할 것이다. 물질의 구성 안으로 가장 깊게 파고 들어간 19세기의 두 물리학자인 톰슨과 패러데이도, 비록 아주 다른 관점의 입장이라 하더라도, 바로 이 결론에 필연적으로 도달했음에 틀림없다. 패러데이에게 원자는 하나의 <힘들의 중심>이다. 이 말이 의미한 것은 원자들의 개별성이란 공간을 통해 방사되는 무한한 역선들이 교차하는 수학적인 점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각 원자는, 그의 표현을 빌리면, <중력이 전개되는 공간 전체>를 점유하며, <모든 원자들은 상호침투한다>. 톰슨은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관념들에 위치하여 완벽하고 연속적이며 동질적이고 압축불가능한 어떤 유체를 가정하고 그것이 공간을 채우고 있을지 모른다고 한다. 우리가 원자라고 부르는 것은 이 연속성 속에서 소용돌이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속성들을 자신의 형태와 존재에 빚지고, 따라서 자신의 개체성을 자신의 운동에 빚지고 있는 불변적인 형태의 고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쪽 가설에서 우리는 물질의 궁극적 요소들에 접근함에 따라 우리 지각이 표면에 세워 놓은 불연속성이 사라지는 것을 본다. 심리학적 분석은 우리에게 이미 이 불연속성이 우리의 욕구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내 주었다. 모든 자연 철학이 마침내 불연속성이 물질의 일반적인 속성들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실인즉, 소용돌이와 역선들은 물리학자의 정신 속에서는 계산을 도식화할 목적으로 마련된 편리한 형태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철학은 왜 이 상징들이 다른 상징들보다 더욱 편리하고, 더 멀리 나아갈 것을 허용하는지를 물어야만 한다. 이 상징들에 상응하는 개념들이 실재의 표상을 찾게 해 주는 적어도 하나의 방향을 우리에게 지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상징들 위에서 작업하면서 경험과 다시 결합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상징들이 지시하는 방향은 의심스럽지 않다. 그것들은 구체척 연장을 가로질러 가면서 우리에게 긴장tension 또는 에너지의 변양, 교란perturbations, 변화를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그런 사실들에 의해서 이 상징들은 우리가 처음 운동에 관해 제공했던 순수하게 심리적인 분석과 다시 결합하는 경향이 있다. 심리학적 분석은 우리에게 운동을 대상들의 관계 위에 우연처럼 덧붙여지는 단순한 변화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실재성으로, 말하자면 독립적인 실재성으로 제시하였다. 따라서 과학도 의식도 결코 다음의 명제에 혐오감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지속과 긴장

 

Ⅳ. 실재적 운동은 한 사물의 이동이라기보다는 한 상태의 이동이다.

 

이 네 가지 명제들을 공식화하면서 우리는 사실 단지 사람들이 서로 대립시킨 두 항들, 즉 성질이나 감각 그리고 운동 사이의 간격을 점진적으로 다시 좁혔을 뿐이다. 처음에 그 거리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성질ㅇ느 서로간에 이질적이고, 운동은 동질적이다. 본질상 불가분적인 감각은 측정을 벗어난다. 언제나 가분적인 운동은 방향과 속도의 계산가능한 차이에 의해 구분된다. 사람들은 성질을 감각의 형태로 의식 속에 놓기를 좋아한다. 반면에 운동은 공간 속에서 우리와 독립적으로 실행된다. 이 운동은 자신들로 구성되며 운동만을 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운동을 접촉할 수 없는 우리의 의식은 어떤 신비로운 과정에 의해서 그것들을 감각으로 번역할 것이고, 그 다음에 이 감각은 공간 속에 투사되어 자신들이 번역하는 운동을 아무도 모르는 방법으로 뒤엎으러 올 것이다. 거기서부터 어떤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달리 소통할 수 없는, 두 상이한 세계가 비롯되는데, 그것들은 한편으로는 공간 속의 운동의 세계이고, 다른 편으로는 감각을 갖는 의식이다. 그리고 확실히 우리 자신이 이전에 제시한 바 있듯이 한편으로는 질과 다른 편으로는 순수 양 사이에서 차이는 환원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실재적 운동들이 자신들 사이에서 단지 양의 차이만을 나타내는지, 아니면 내적으로 진동하는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존재르르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순간들로 분절하는, 질 자체가 아닌지를 아는 일이다.(332∼339쪽)

 

 - 앙리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제4장 이미지들의 한정과 고정에 관하여>

 

 

 

 

우주적인 변화를 응축하고 있는 것

 

일 초의 공간 속에서 적색 빛ㅡ가장 긴 파장을 가지며 따라서 파동vibration의 빈도가 가장 적은 빛ㅡ은 400조(兆)의 잇따르는 파동들을 완성한다. 이 수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고자 하는가? 우리 의식이 그것을 세기 위해서는 또는 적어도 그것들의 순차성succession을 명시적으로 기록하기 위해서는 그 파동들을 서로간에 충분히 벌려 놓아야 할 것이가. 그리고 사람들은 이 잇따름이 며칠, 몇 달 또는 몇 년을 점유하는지를 탐구할 것이다. 그런데 엑스너Exner에 따르면, 우리가 의식하는 텅 빈 시간의 가장 짧은 간격은 천분의 이(2/1,000) 초와 동등하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가 그렇게 짧은 여러 간격들을 연이어 지각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그러나 우리가 무한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인정해 보자. 한마디로 아주 순간적인 400조의 파동들의 행렬을 목격하는 어떤 의식을 상상해 보자. 이 파동들은 단지 그것들을 구별하기 위해 필요한 2/1,000초에 의해서만 서로 분리된다. 단순 계산으로도 이 작용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2만 5000년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일초 동안 우리에게 체험된 이 적색 빛의 감각이 우리 지속 속에서 가능한 가장 경제적인 시간으로 펼쳐진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우리 역사의 250세기 이상을 점유할 현상들의 잇따름에 상응한다. 그것이 생각할 수 있는 일인가? 여기서 우리의 고유한 지속과 시간 일반을 구별해야만 한다. 우리 의식이 지각하는 지속, 우리의 지속 속에 주어진 한 간격은 제한된 수의 의식적 현상들만을 포함할 수 있다. 이 [지속의] 내용이 증가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무한히 가분적인 시간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지속인가?

 

…… 따라서 우리가 우리 주변에 간간이 던지는 시선은 단지 무수한 반복들과 내적인 진화들의 결과들만을 포착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 자체에 의해 이 결과들은 불연속적이 되고, 우리는 그것들의 연속성을 우리가 공간 속의 <대상들>에 부여하는 상대적 운동들에 의해서 회복한다. 변화는 도처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심층적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변화를 여기저기 위치시키지만 그것은 표면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해서 그것들의 질에 관해서는 안정적이고, 그것들의 위치에 관해서는 움직이는 물체들을 구성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단순한 장소의 변화는 자신 안에 우주적인 변화를 응축하고 있는 것이다.(343∼349쪽)

 

 - 앙리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제4장 이미지들의 한정과 고정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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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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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내 모든 작품은 일종의 낚싯바늘이다 : 나야말로 낚시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겠는가? ……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면,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고기들이 없는 것이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중에서

 

 * * *

 

니체만큼 사람의 정신을 온통 뒤흔들어 놓는 철학자는 없다. 그가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들의 머리를 호되게 내리치는 걸 누군가가 느꼈다면, 그 사람으로서는 머리가 제법 아프겠지만 철학자로서는 자신의 의도가 제대로 맞아떨어졌다고 한바탕 너털웃음을 지을 지도 모르겠다. 니체의 책이 여전히 한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얼음처럼 차갑고 매끄럽게만 느껴지고, 심지어 그 얼음이 너무 두껍게 얼어붙어 있어 그 얼음 아래에서 즐겁게 노니는 온갖 물고기들은 언감생심 구경조차 할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그 사람의 한계이지 니체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얼음에 다가가는 사람이 두툼한 방한복과 장갑과 도끼와 심지어 낚시도구까지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를 나무랄 사람은 없다. 어쩌면 그 사람은 '얼음을 깰' 생각을 아예 품지 않고 그저 얼음을 구경하러 다가가는 일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니까 말이다. 어쩄든 니체는 머리를 제대로 얻어맞을 준비가 된 사람들에겐 '망치를 든 철학자'이고, 그저 썰매라도 한바탕 신나게 타고 싶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겐 아무리 단단한 돌멩이를 들고 덤벼들더라도 좀처럼 깨트리기 어려운 두껍고 매끄러운 얼음일 수밖에 없겠다 싶다. 그러나 단단히 각오를 하고 니체에게 다가갈 사람들은 도끼는 물론 물고기를 낚는 방법까지도 미리 얼마쯤 배워둘 필요가 있겠다 싶다. 물론 얼음 아래에 '고기들이 없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니체는 왜 이토록 어려운 책을 써서 사람들이 스스로 제 머리에 망치질을 하는 느낌이 들도록 했을까. 그는 왜 자신의 책이 무려 '2000년경'에야 읽힐 수 있다고 말했을까. 그 문제는 그가 거의 전적으로 '너무나 멀리' 내다본 때문이다. 이 말은 결코 그의 시선이 단지 한 방향으로만 향해 있다고 미리 단정해서 말하는 게 아니다. 실상 그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방향은 거의 없다고 말해도 좋다. 덧보태자면 방향 뿐만 아니라 거리까지도 그렇다고 말해야 옳다. 그의 시선은 까마득한 과거와 머나먼 미래뿐만 아니라 끝모를 심연과 지옥 너머까지도 내다보는 듯하다. 책의 제목조차 '선악의 저편'이니 그의 시야를 제약하는 모든 벽들은 이미 그 책을 쓰기 전부터 '극복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무시무시한 시야를 갖춘 영혼이 거침없는 속도로 써내려간 힘찬 문장들을 대하면 마치 여러 차례 거듭 세심하게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릴까 말까 한 몹시도 낯설고 난해한 음악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어쨌든 '정선된 귀'를 갖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니 말이다.

 

'미래 철학의 서곡'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사실 '오랜 구상'을 거쳐 나온 작품이다. 니체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출간한 이후 '다음 단계에 올라서는 자신의 새로운 철학'을 기술하려는 열망을 마침내 실행에 옮길 작정이었다. 그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그는 한동안『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근본적으로 다시 바꾸어 쓰려는 마음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계획을 포기하고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쓰게 되는데 그게 바로 이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 담긴 내용들이 모두 한꺼번에, 말하자면 니체가 '네 번째로 질스마리아에 체류하던 시기'에 전부 쓰여진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제4장인 <잠언과 간주곡>은 이미『차라투스트라』가 씌어지기도 전에 미리 쓰여졌다. 어떤 내용들은 소위 '가치전도 시기의 노트'에 쓰여진 단상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보면 이 책은 '가치전도와 새로운 철학의 구상 시기'에 쓴 노트와 단상들을 바탕으로 쓰여졌으며, 이 작품에 뒤이어 곧바로 쓰여진『도덕의 계보』와 함께 '니체의 후기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책이라고 평가받는다.

 

이 책은 본질적으로 '현대성에 대한 비판'을 다룬 책이다. 문제는 그가 다루는 '현대성'의 범위가 너무나 광범위하다는 점이다. '현대 학문', '현대 예술', '현대 정치', '현대 철학' 모두가 그의 비판 대상이다. 왜 '현대'가 이토록 문제인가. 그가 보기에 '현대'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평범화, 왜소화'에 방향을 잡은 것으로 비춰졌다. 엘리트 중심의 귀족 정치에 반하는 '민주주의'는 그래서 비판을 받는다. 니체는 '문명', '인간화', '진보'라고 부르는 유럽의 민주화 운동의 배경에는 '인간의 퇴화'라는 생리학적 과정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음을 밝힌다. 인간의 평준화와 평범화는 결국 무리동물적인 인간의 형성을 도울 뿐이며, 고귀하면서도 보다 높은 인간 유형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약자와 불우한 자, 병든 자와 고통받는 자에 대한 동정으로 가득 찬 '그리스도교의 도덕' 또한 그가 보기엔 '노예 도덕'에 불과할 뿐이다. 그가 보기엔 강자, 지배하는 자, 가치를 창조하는 자의 도덕, 말하자면 '주인 도덕'이 훨씬 더 고귀하고 추구되어야 할 올바른 방향이다. 그래서 니체는 현대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바로 '자유정신의 인간'을 육성하는 데서 찾았다. 그는 '미래 철학자'는 '자유 정신'을 지녀야 하며, '진정한 철학자'는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는 입법자이자 자기 명령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진정한 과제는 바로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며, 이는 선과 악의 저편에서 "가장 대담하고 생명력 넘치며 세계를 긍정하는 인간의 이상"에 눈을 뜨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노예도덕을 강요하는 기독교로 물든 '왜소한 현대적 인간'에서 벗어나 주인도덕을 되찾는 '귀족적 인간', 스스로 가치를 창조할 줄 아는 위버멘쉬적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찾아낸 하나의 철학적 방법론이 '모든 가치의 전도'이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도덕이 추구해 온 '선악의 명명법' 자체가 '노예 도덕'을 바탕으로 삼았기 때문에 '인류의 도덕'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는 것이며 이를 비로소 바로 잡을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도덕에 대한 통찰'이 너무나 심오하면서도 거침이 없기 때문에 이 책은 아주 위험한 책으로 돌변한다. 니체 또한 그런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니체는 스위스 작가 비트만이 쓴 이 책의 서평 내용을 주위 사람들에게 편지로 소개하기도 했는데,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같다. 

 

"고트하르트 기차선로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다이너마이트를 비축하고자 하는 저 차량은 죽음의 위험을 알리는 검은 경고의 깃발을 휘날리고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철학자 니체의 책을 위험한 책이라고 부른다"

 

이는 니체 스스로도 이 저서가 기독교 신앙과 도덕에 깊이 물든 서양의 전통적 사유나 형이상학을 거침없이 강타하는 '다이너마이트의 위력을 가진 위험한 책'으로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대변한다. 여기서 비롯된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니체 사후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0년 10월에 독일의 어느 박물관에서 있었던 유물 전시회의 제목 또한 "고트하르트 터널은 언제 완성되는가?" 였던 것이다. 니체가 기독교와 서양 전통 형이상학을 상대로 벌인 가혹하리만큼 혹독한 투쟁과 '미래 철학'을 위해 새로운 사유의 길을 내는 지난한 건설 작업이 마치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며 몹시도 위험하게 진행되었던 백여 년 전의 '고트하르트 터널 공사'와 유사했다는 점과, 이러한 니체의 엄청난 작업이 아마도 2000년경에야 비로소 사람들도부터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겠다는 니체 스스로의 평가를 모두 염두에 두고 저런 멋진 제목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이 작품이 현대 사상 전반에 끼친 엄청나게 놀라운 영향과 그 위상을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니체는 자신의 친구에게 보내는 어느 편지에서 『선악의 저편』이 "내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일종의 주석서"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가 한 말은 자신이『차라투스트라』에서 거의 문학적으로 다룬 철학적 주제들이 독자들에게 제대로 충분히 이해되지 못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차라투스트라』에서 노래했던 주제들, 가령 디오니소스, 생명, 건강, 자유, 지혜, 고귀한 덕, 위버멘쉬, 영원회귀사상 등은 사실 이 책에 와서 한층 드넓고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들, 가령 역사, 종교, 인류학, 심리학, 생리학, 문학, 음악 등 거의 전방위에 이르는 광범위한 학문과 예술 영역에 걸친 니체 특유의 심연처럼 깊디깊은 사색이 더해짐으로써, 단지 '『차라투스트라』의 주석'이라고 불리기엔 너무 아까울 정도로 '가장 니체적인 색깔'을 띤 작품이 되었고, 그가 이 책에서 가혹하게 비판했던 '현대성'에서 벗어난 '새로운 철학'은 결국 '미래 철학의 서곡'으로 격상되어 오늘날 니체의 철학을 이해하는 결정적 작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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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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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록하고 그려낸 사상이여! 나의 고통에서 갑자기 나타난 불꽃과 기적이여!

 

아, 그대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대들 내가 기록하고 그려낸 사상이여! 그대들이 여전히 그렇게 다채롭고 젊고 악의적이고 가시가 가득 돋아 있고 은밀한 향냄새를 내어, 내가 재채기가 나게 하고 웃게 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ㅡ 그런데 지금은? 이미 그대들은 자신의 참신함을 잃어버렸고, 그대들 가운데 몇몇은 두렵게도 벌써 진리가 되려고 한다 : 그것들은 벌써 그만큼 불멸의 것으로 그만큼 가슴이 메어질 정도로 성실한 것으로 그만큼 지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전에는 사정이 달랐단 말인가? 우리는 도대체 어떤 일들을 기록하고 그린다는 말인가, 중국 붓을 사용하는 중국 관리인 우리, 기록할 수 있는 사물들이 영원히 전해지게 만드는 자인 우리, 우리가 오로지 그릴 수 있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 언제나 막 시들어가려 하고 향기를 잃어가기 시작하는 것뿐이다! 아, 언제나 물러가는 지칠 대로 지친 폭풍우나 누렇게 변한 말년의 감정들뿐이다! 아, 언제나 날다가 지쳐서 헤매는, 이제 손으로 ㅡ 우리의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새들뿐이다! 우리가 영원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더 이상 오래 살 수 없고 날 수 없는 것, 지치고 약해질 대로 약해진 사물들뿐이다! 그대들 내가 기록하고 그려낸 사상들이여, 오직 그대들의 오후만을 위해 나는 색깔을, 아마 많은 색과 많은 다채로운 애정을, 50가지 정도의 황색, 갈색, 녹색, 적색을 가지고 있다 : 그러나 그 누구도 그대들이 아침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의 고독에서 갑자기 나타난 불꽃과 기적이여, 그대 나의 오래되고 사랑스러운 ㅡ ㅡ 나쁜 사상들이여!

 

- 니체, 『선악의 저편』, <제9장> 고귀함이란 무엇인가?, 29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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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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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디오니소스 신의 마지막 제자이자 정통한 자이다

 

저 위대한 은둔자가 가지고 있는 심정의 천재, 유혹하는 자인 신이며, 천성적인 양심의 유혹자, 그의 소리는 모든 영혼의 지하세계에까지 내려갈 수 있으며, 그가 던지는 말 한마디, 눈길 하나에도 유혹의 동기나 저의가 담겨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그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대가의 실력에 속한다. ㅡ 이것은 그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더욱더 그에게 가까이 오도록 강요하기 위한, 더욱 내면적으로 철저하게 그를 따르도록 하기 위한, 강제 이상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 ㅡ 심정의 천재, 그는 시끄럽고 자만하는 사람들을 모두 침묵하게 만들며 경청하는 법을 가르치고, 거친 영혼을 지닌 자들을 잔잔하게 하고, 마치 깊은 하늘이 그들 위에 모습을 비추는 거울처럼 고요하게 누워 있고자 하는 새로운 갈망을 그들에게 맛보게 한다 ㅡ . 심정의 천재는 우둔하고 성급한 손에 망설이는 법을 가르치고 좀더 우아하게 붙잡는 법을 가르친다. 그는 감추어지고 잊혀진 보물을, 선의와 달콤한 정신성의 물방울을 흐리고 두꺼운 얼음 밑에서 찾아내며, 오랫동안 여러 가지 진흙이나 모래의 감옥 속에 파묻혀 있었던 모든 황금의 알을 찾는 마법의 지팡이다. 이 심정의 천재와 접촉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좀더 풍요로워져가는데, 이는 은혜를 받거나 놀라서도 아니고, 마치 미지의 재물에서 혜택을 입거나 억눌려서가 아니다. 오히려 억지로 열리게 되고,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캐내게 하며, 아마 더욱 불확실하게 되어 더욱 부드럽고 깨지기 쉽고 부서진 것이 되었으나, 아직 이름도 없는 희망에 부풀고 새로운 의지와 흐름에 넘치고 새로운 불만과 역류에 넘쳐 자신에 대해 좀더 풍요로워지고, 그전보다 더 새로워지게 된다 ……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의 친구들이여? 나는 누구에 대해 그대들에게 말하고 있는가? 내가 그대들에게 한번도 그의 이름을 말한 적이 없을 정도로 스스로를 잊어버렸단 말인가? 그대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칭찬받기를 원하는 이 의심스러운 정신이나 신이 누구인지 이미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면 말이다. 즉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돌아다니며 낯선 고장에 살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처럼, 나 역시 희귀하고 위험한 많은 정신과 부딪쳐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방금 말했던 정신과 부딪혔던 것이다. 이 정신은 언제나 다시 나타나는 바로 디오니소스 신이며, 그대들이 알다시피 내가 일찍이 은밀히 경외심을 가지고 내 처녀작을 바쳤던 저 위대한 양의(兩義)적인 신, 유혹자인 신이다.내가 생각하기에는 나야말로 그 신에게 희생을 바쳤던 마지막 인간이었다 : 왜냐하면 내가 그 당시에 했던 일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나는 이러한 신의 철학에 관해 많은 것을,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배웠으며, 이것은 이미 말했듯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ㅡ 나는 디오니소스 신의 마지막 제자이자 정통한 자이다 : 나는 기어이 한 번쯤 내 친구인 그대들에게, 나에게 허락하는 한, 이 철학을 조금은 맛보게 하는 일을 시작해도 좋을 것이 아닌가? 당연히 반쯤 낮은 목소리로 말이다 : 왜냐하면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여러 가지 은밀한 것, 새로운 것, 낯선 것, 기이한 것, 섬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디오니소스가 철학자이며, 신들도 철학을 한다는 사실은 나에게는 위험이 없지 않으며 아마도 바로 철학자들 사이에서 불신을 일으킬 수도 있는 새로운 것처럼 생각된다. ㅡ 나의 친구 그대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너무 늦게 오게 되거나, 적당한 때 오지 않는다면 몰라도, 이미 저항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왜냐하면 내게 은밀히 누설했듯이, 그대들은 오늘날 신과 신들에 대해 마지못해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또한 나는 내 이야기를 솔직히 할 때, 그대들 귀의 엄격한 습관에 항상 유쾌하게 울리는 정도를 넘어 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확실히 이미 언급한 신은 이와 같은 대화를 할 때 더 나아가 있으며 훨씬 멀리 나아가 있고, 항상 나보다 먼저 몇 발짝 앞서 있었다 …… 만일 인간의 풍습에 따라 그 신에게 아름답고 장엄한 장식의 명칭과 덕성의 명칭을 붙이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그의 탐구자로서의 용기나 발견자로서의 용기를, 그의 대담한 성실성과 진실성, 지혜에 대한 사랑을 대단히 칭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은 이러한 모든 귀한 잡동사니나 장식품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고 있다. "너와 너의 동료들이나, 그 밖에 그것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이러한 것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고 그는 말하고 싶어할 것이다. 나는 ㅡ 내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감출 이유가 없다!" ㅡ 사람들은 이러한 종류의 신이나 철학자에게는 아마 수치심이 없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ㅡ 언젠가 그 신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 "상황에 따라 나는 인간들을 사랑한다 ㅡ 이때 그 신은 그 자리에 있었던 아리아드네Ariadne를 넌지시 암시했다 ㅡ : 나에게 인간이란 지상에서 그와 비견될 만한 것이 없는 유쾌하고 용기 있고 창의적인 동물이다. 이 동물은 어떤 미궁에 있어도 여전히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찾아낸다. 나는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 : 나는 종종 현재의 그보다 어떻게 하면 그를 앞으로 진전시키고 그를 좀더 강하게, 좀더 악하게, 좀더 깊이 있게 만들 것인가를 숙고하곤 한다." ㅡ "좀더 강하고, 악하고, 깊이 있게라고?"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는 다시 한번 말했다. "그렇다. 좀더 강하고 악하고 깊이 있고, 또한 아름답게" ㅡ 그리고 게다가 유혹하는 자인 신은 마치 그가 방금 매혹적인 인사말이라도 한 것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여기에서 동시에 볼 수 있는 것은 이 신에게 없는 것이 수치심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ㅡ . 대체로 몇 가지 점에서 신들도 모두 우리 인간들에게서 배울 수도 있다는 것을 추측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 인간들이 ㅡ 더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9장> 고귀함이란 무엇인가?, 29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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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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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도 위버멘쉬적이고 새로운 방식으로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올림포스적인 악덕. ㅡ 순수한 영국인으로서 모든 사색하는 인간들에게서 웃음에 관한 나쁜 평판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저 철학자에 거역하여 ㅡ "웃음은 인간 본성이 지닌 나쁜 결함이니, 사색하는 모든 인간은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홉스) ㅡ 나는 그 웃음의 등급에 따라 ㅡ 황금의 웃음을 웃을 수 있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ㅡ 심지어 철학자들의 순위가 있음을 인정하고 싶다. 만일 신들도 철학을 한다면 ㅡ 많은 추론에서 이미 나는 그렇게 추론했는데 ㅡ 그들도 또한 그때 ㅡ 모든 진지한 것들을 희생해서라도 ㅡ 위버멘쉬적이고 새로운 방식으로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신들은 조소하기를 좋아한다 : 그들은 신성한 행위를 할 때조차 웃음을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9장> 고귀함이란 무엇인가?, 29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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