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전집 4 - 국가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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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그리고 누군가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가 누차 언급한 바 있는 원칙29과 방법에 의해서일 것이네."

 

"그야 당연하지요."

 

주석

 

29 각자가 제 할일을 해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다. 433b, 441d 참조

 

"우리는 또한 정의란 제 할 일이나 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을 많은 사람들한테서 들었고, 우리 자신도 가끔 그렇게 말했네."

 

"그래요. 우리는 그렇게 말했지요."

 

그래서 내가 말했네. "그러니 여보게, 이처럼 각자가 제 할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정의인 것 같네. 자네는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겠는가?"

 

"아니요. 말씀해주세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말했네. "우리가 절제와 용기와 지혜를 찾아낸 지금 아직도 남아 있는 자질은, 우리나라에 그런 것들이 생기게 할 힘을 갖고 있고 그런 것들이 생겨난 뒤에는 자신이 존재함으로써 그런 것들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그런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일세. 우리는 또한 다른 세 가지를 발견한다면 남은 것은 정의일 것이라고 말했네."(플라톤, 『국가』, 제4권, 433b)

 

"그렇다면 글라우콘, 우리는 또한 개인도 국가와 같은 방법으로 올바르다고 말하게 될 것이네."

 

"그 역시 아주 당연해요."

 

"우리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겠지만, 나라가 올바른 것은 나라 안의 세 부류가 저마다 제 할 일을 할 때일세."

 

"우리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우리 각자가 올바르고 제 할 일을 하는 것은 각자 안의 각 부분이 제 할 일을 할 때라는 것도 우리는 기억하고 있어야 하네."

 

"물론 기억하고 있어야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플라톤, 『국가』, 제4권, 441d)

 

 - 플라톤, 『국가』, <제4권>

 

 

 * * *

 

 

"어떤가?" 하고 내가 말했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린 정의는 윤곽이 희미해서, 개인 안의 정의는 우리가 국가 안에 있는 것으로 발견한 정의와 달라 보이는가?"

 

"나에게는 달라 보이지 않는데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말했네. "만약 우리 마음속에 아직도 미심쩍은 점이 있다면 비근한 예를 들어 최종적으로 확인할 수도 있네."

 

"비근한 예라니, 어떤 건가요?"

 

"우리가 예컨대 본성적으로 그리고 훈련을 통해 우리나라와 닮은 사람이 자기가 맡은 금이나 은을 착복했는지 질문을 받았다고 가정해보게.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그럴 가능성이 더 높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게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런 사람은 신전을 털거나 남의 것을 훔치거나, 사적으로는 친구를, 공적으로는 국가를 배신하는 행위와는 거리가 멀겠지?"

 

"네, 멀어요."

 

"그는 또한 맹세나 그 밖의 다른 합의도 충실히 지킬 것이네."

 

"어찌 안 그러겠어요?"

 

"그 밖에도 그는 간통이라든가 불효라든가 신들에 대한 불경과는 어느 누구보다 거리가 멀 것이네."

 

"어느 누구보다도 거리가 멀어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지배 또는 피지배와 관련해서 그 안의 부분들이 저마다 제구실을 다하기 때문이 아닐까?"

 

"바로 그게 유일한 원인이에요" 하고 그가 말했네.

 

"이제야 자네는 정의가 바로 그런 사람들과 국가들을 만드는 그런 힘이라고 확신하는가?"

 

"제우스에 맹세코, 확신해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우리의 꿈은 완전히 이루어졌네. 그리하여 우리가 짐작한 대로, 우리는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하자마자 운 좋게도 신의 도움으로 정의의 기원과 윤곽을 만나게 되었네그려."

 

"네, 그래요."

 

"그렇다면 글라우콘, 타고난 제화공은 다른 일은 하지 말고 제화공 일을 해야 하고, 목수는 목수 일을 해야 하며, 그 밖의 다른 사람들도 그래야 한다는 원칙이야말고 사실은 정의의 영상이었던 셈이네그려. 그래서 쓸모가 있었던 것이고."

 

"그런 것 같아요."

 

"정의가 분명 그런 원칙이라 해도, 정의의 진정한 관심사는 누군가의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의 내적인 행위, 그의 진정한 자아, 그의 진정한 기능일세. 올바른 사람은 자신 안의 세 부분이 각각 남들이 할 일을 제가 하거나 서로 참견하지 못하게 하고, 음계에서의 세 음정, 즉 최고음, 최저음, 중간음처럼 세 부분을 조율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살림을 잘 꾸려나가고 자주독립과 질서를 유지하며 자신과 사이좋게 살게 될 걸세. 그리고 그가 이런 부분들과 그 사이에 있는 다른 부분들을 잘 훈련되고 조화로운 하나의 전체로 결합하여 여럿 대신 완전한 하나가 되면, 그때는 돈 버는 일이 됐든 몸을 돌보는 일이 됐든 정치가 됐든 개인 간의 계약 체결이 됐든 행동에 나서게 될 걸세. 그리고 이런 행위들 가운데 이런 심적 상태를 유지하거나 이런 심적 상태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행위는 올바르고 훌륭한 행위라고 부르고, 이런 행위를 통제하는 지식을 지혜라고 믿고는 지혜라고 부를 것이네. 반면 이런 심적 상태를 언제나 깨뜨리는 행위를 불의한 행위라고, 그런 행위를 통제하는 의견을 무지라고 부를 것이네."

 

"소크라테스 선생님, 전적으로 옳은 말씀이에요" 하고 그가 말했네.

 

"좋았어" 하고 내가 말했네. "그렇다면 올바른 사람과 올바른 국가와 이들 안의 정의가 무엇인지 찾아냈다고 주장하더라도 우리가 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 듯하네."

 

"제우스에 맹세코, 아니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우리는 그렇다고 주장할까?"

 

"네, 주장해요."

 

"그 문제는 이쯤 해두세" 하고 내가 말했네. "다음에는 불의를 고찰해야 할 것이네."

 

"분명 그래야겠지요."

 

"정의가 그런 것이라면 불의는 틀림없이 이들 세 부분 사이의 일종의 내전이요 참견이요 간섭이며, 혼의 한 부분이 전체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네. 그런데 혼의 그 부분이 혼 전체를 지배한다는 것은 부적절하네. 그 부분은 정당하게 지배하는 부분에게 종노릇하는 것이 제격이기 때문일세. 그 밖에도 우리는 세 부분의 혼란과 방황이 불의뿐만 아니라 무절제, 비겁함, 무지, 한마디로 모든 악의 원인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네."

 

"그렇고말고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물었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불의와 정의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는 만큼, 불의한 짓을 하는 것 또는 불의를 행하는 것과 올바른 행위를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겠지?"

 

"설명해주세요."

 

그래서 내가 말했네. "올바른 행위와 불의한 행위가 혼에 끼치는 영향은, 건강에 좋은 행위와 건강에 좋지 않은 행위가 몸에 끼치는 영향과 다를 바 없네."

 

"어째서 그렇지요?"

 

"건강에 좋은 것들은 건강을 낳고, 병적인 것들은 병을 낳네."

 

"네, 그래요."

 

"그리고 올바른 행위른 하는 것은 정의를 낳고, 불의한 짓을 하는 것은 불의를 낳겠지?"

 

"당연하지요."

 

"건강은 몸의 구성 성분들 사이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자연의 의도에 맞게 정립함으로써 생기고, 병은 그런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자연의 의도에 맞지 않게 정립합으로써 생기는 것일세."

 

"네, 그래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하고 내가 물었네. "정의는 혼의 구성 성분들 사이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자연의 의도에 맞게 정립함으로써 생기고, 불의는 그런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자연의 의도에 맞지 않게 정립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마다요" 하고 그가 대답했네.

 

"그렇다면 미덕은 일종의 정신적인 건강 또는 아름다움 또는 좋은 상태이지만, 악덕은 일종의 병 또는 수치스러운 상태 또는 허약함인 것 같네."

 

"그건 그래요."

 

"그렇다면 좋은 생활방식은 미덕으로 이끌지만, 수치스러운 생활방식은 악덕으로 이끌지 않을까?"

 

"당연하지요."(255∼260쪽)

 

 - 플라톤, 『국가』,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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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01-02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 2017 서재의 달인 축하드리며 무술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oren 2018-01-05 00:22   좋아요 0 | URL
카스피 님도 2018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루크레티우스가 대략 어느 시대의 인물이었는지를 아주 쉽게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가 한 사람의 시인을 더 필요로 한다면 그는 바로 베르길리우스(BC70∼19)다. 왜냐하면 루크레티우스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게 없지만 후세의 기록 가운데 <베르길리우스의 생애>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루크레티우스가 죽던 바로 그 해에 베르길리우스가 때마침 '성인식'을 치렀다는 사실이. 말하자면 그 두 시인은 로마 최고의 시인이라는 명예로운 자리를 두고 서로 '바톤 터치'를 주고 받은 사이였던 셈이다.

 

물론 루크레티우스가 (나중에 위대한 시인으로 추앙받게 된) 베르길리우스에 비견될 만한 인물이 될 가능성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베르길리우스는 누가 뭐래도 호메로스의 전통을 직접적으로 물려받은 '로마 최고의 국민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인은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본받아 『아이네이스』라는 '로마 건국 신화'를 빚어 냄으로써 무려 이천 년 동안이나 '로마 최고의 시인'이라는 드높은 영예를 굳건히 지켜 왔다. '지상 최고의 국가 탄생'을 장엄한 가락으로 노래하고 '로마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빛나는 문장으로 빚은 웅혼한 예술 작품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그를 뛰어넘은 로마의 시인은 여태까지 없었다.

 

그에 반해 루크레티우스는 '민족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철학'을 시로 노래했다. 그것도 단순한 곁가지 철학이 아니라 '우주 만물의 기원과 사물의 본성'을 근원적으로 파고드는 심오한 철학을 담은 시였다. 그러니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가 베르길리우스의 애국시와는 얼마나 서로 '차원'이 다른 작품이었는지는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다. '로마의 영광'이 극치에 다다른 시기에 쓰여진 베르길리우스의 빛나는 예술작품이 결국 '로마인'들을 향한 '애국의 노래'였다면,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바로 인류 전체를 향해 '사물의 근본 원인'을 긍구하도록 깨우치는 '진리의 노래'였던 셈이다. 그러니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극소수의 독자들에게나 겨우 읽힐 정도로 몹시 어렵고도 희귀한 작품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시인의 명성'과 직결되는 '대중성'과는 오래도록 담을 쌓고 지낼 운명이었다.

 

그런데 루크레티우스의 표현대로 '긴 세월을 통해 어떤 것도 손실 없이 유지될 수 없는 이치' 가운데서도 그의 시는 꿋꿋이 살아 남아 어느새 베르길리우스의 걸작을 도리어 하찮은 것쯤으로 여기게 만들 정도가 되었다. 그가 죽으면서 베르길리우스에게 넘겨줬던 그 바톤이야말로 앞선 주자에게나 뒤따르는 주자에게나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끝끝내 서로의 '우열'을 다툴 여지가 많았던 탁월한 주자에게 어울릴 만한 것이었다. 오직 붓끝을 통해서 오래도록 종이 위를 내달렸을 뿐인 재주이긴 하지만.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오로지 독창적이기만 했다면 그의 위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데까지 다다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대부분 그보다 몇백 년 앞서 살았던 위대한 철학자인 에피쿠로스로부터 흘러나온 것들이었다. 여기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에피쿠로스의 철학으로까지 거술러 올라가는 건 너무 샛길로 깊숙히 빠져드는 일이기에 피하고 싶다. 다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쾌락주의의 창시자'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흔히 통념적으로 말하는 '쾌락의 추구'와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는 사실만은 알고 넘어갔으면 좋겠다.

 

에피쿠로스는 '우주 만물의 근본 원인'에 대하여 깊이 천착한 '신과 같은' 철학자였고, 엄청난 저작을 저술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게 하나도 없는 형편이다. 오늘날에는 기껏해야 그가 쓴 '세 통의 편지'가 『그리스 철학자 열전』(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저술)이라는 작품을 통해 전해질 뿐인데, 그 책이 집필된 시기가 2세기말이나 3세기 초엽이어서 도리어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보다 250년쯤 뒤처지는 형편이다.

 

루크레티우스 철학시가 탁월한 건 그의 이론이 놀랍도록 '현대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우주 만물은 '원자'와 '공간'으로 이뤄져 있고, 사물의 씨앗이나 마찬가지인 원자의 크기는 극히 작지만 그 수는 무한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공간 또한 무한하다. 우주 만물의 생성과 소멸은 원자들의 만남과 연결이 빚어낸 결과일 뿐이며, 거기에 '신이 개입할 여지'는 조금도 없다. 우주는 '펼연'으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우연'도 개입하는데 그것은 바로 '원자들이 일탈하여' 생기는 결과이다. 인간의 영혼 또한 '원자들의 결합'에 따라 생성되었다가 육신이 흩어지면서 함께 소멸한다. 따라서 영혼은 신체와 함께 죽는다. 그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요약하자면 '유물론적 무신론'이라고 할 수 있다.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지닌 또다른 놀라운 점은 '지극히 현대적'이면서도 또한 '몹시 체계적'이라는 점이다.

 

'원자론의 기본 원리'에서 시작하여 우주의 무한함까지 설명하는 부분은 고작 제1권의 내용일 뿐이다. 원자의 운동으로부터 '자유의지'를 찾아 내고, '물질의 근원'과 '신의 부존재 증명'까지 나아가는 내용까지도 제2권으로 족하다. 제3권에서 다루는 '영혼과 육체의 분리불가능 증명'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증명하는 데로 나아간다. 제4권에서 다루는 '감각과 사고'는 '현대 과학'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영상들과 시지각(視知覺)에 대한 통찰들'은 프랑스의 철학자인 앙리 베르그송이 『물질과 기억』에서 주장하는 논리와 너무나 닮아 있다. 그밖에 '수면과 꿈에 대한 내용'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직접 맞닿아 있고, 성욕(性慾)과 성애(性愛)에 대한 놀라운 통찰은 쇼펜하우어가 '연애의 형이상학'에서 주장한 논리의 원형을 보는 듯 생생하다. 

 

제5권에서 설명하는 '천문 현상들'은 '첨단 우주물리학'과 사뭇 현격한 격차를 느끼게 하는 설명들이 많지만 결코 허황된 주장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죽하면 갈릴레이와 아인슈타인이 이 책으로부터 영감을 얻었겠는가. 이어지는 '생명체의 발생'에 대한 설명은 다윈의 『종의 기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문명의 발전'을 다룬 온갖 시적 표현들은 마치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쓴 『총,균,쇠』나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빼닮았다. 문명의 시작, 언어의 기원, 불의 기원과 사용, 금속의 발견과 사용, 농업의 기원과 발달, 기술의 발달 등이야말로 루크레티우스가 제5권에 다루는 소주제들이기 때문이다. 제6권에서 다루는 '대기의 현상들'과 '지상의 현상들'은 오늘날 기상학과 지질학이 다루는 문제들을 포괄하고 있다. 천둥, 번개, 벼락, 구름의 형성을 다루고, 화산과 지진 현상까지도 빼놓지 않았다.

 

(루크레티우스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와 서로 깊은 교감을 주고 받은 책들. 책이 최초로 쓰여진 순서대로 쌓았다_나중에 보니 마키아벨리의 책이 너무 높이 올라갔다. 그 책은 무려 『그리스철학자열전』 바로 위에 놓여야 옳다. 비록 그 두 책 사이에 놓인 세월의 간극이 '천 년'도 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마키아벨리는 몽테뉴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셰익스피어도 이 책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맥베스』의 2막 2장에는 셰익스피어가 이 책에서 그대로 인용한 싯구 일부가 등장한다. 맥베스의 '명대사' 가운데 하나가 바로 루크레티우스의 시에서 옮겨졌던 셈이다.)

 

이토록 방대한 내용들을 한 권의 시로 다 담아내다니, 루크레티우스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책이 지닌 '엄청난 위험성'을 직감한 쪽이 '종교계'였음을 추정하기란 조금도 어렵지 않다. 결국 이 책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금서'로 지정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고, 언제부터인가 이 지구상에서 아예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어느 순간부터 이 책은 말 그대로 구전을 통해서나 희미하게 그 존재가 전해지는 '전설적인 신비의 책'이 되고 말았다. 어느 고서 수집광이 그 책을 먼지 속에서 다시 찾아낼 때까지는.

 

이 책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세상의 빛을 다시 보게 되었는지 나는 자세히 모른다. 이 책의 재발견을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가 책으로 나왔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여태까지도 스티븐 그린블랫이 쓴 『1417년, 근대의 탄생』이라는 책을 직접 사서 읽은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크레티우스의 책이 오늘날에 와서야 엄청난 재조명을 새로이 받게 된 건 결코 아니다. 켜켜이 쌓인 먼지 속에서 기나긴 세월 동안 은둔을 계속하던 이 책을 독일의 수도원에서 마침내 구출해 낸 포조의 노력 덕분에 1417년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곧장 이 책에 매료되었으니 말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중세의 프랑스 철학자인 몽테뉴였다. 르네상스를 활짝 열어젖혔던 숱한 천재들, 가령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마키아벨리 또한 그런 인물들이었다. 고대 철학에 정통했던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이 책을 탐독했음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루크레티우스가 남긴 장시는 현대인들이 읽기에는 자칫 딱딱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적지 않다. 또한 오늘날의 엄청나게 축적된 온갖 과학적 지식들에 비춰보면 어이없는 실소를 자아낼 만한 대목들도 아예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의 시는 '사물의 본성을 탐구하려는 끈질긴 열정'과 더불어 여느 문학작품도 쉽사리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로 힘찬 문장들과 아름다운 표현들이 가득하다. 그토록 오래 전에 살았던 인물이 오로지 물질과 공간만으로 '우주의 근본 원리'를 구축하고 그걸 빼어난 시로 노래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로마 최고의 시인이었던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의 예술작품 속에 알게 모르게 스며든 '인생에 대해서 느끼는 기이한 우울감'을 좀처럼 숨기지 못했는데, 비극적이라기보다는 멜랑코리에 가까운 그 느낌으로부터 'lacrimae rerum(사물에 대한 눈물)'이라는 유명한 용어가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 시인이 남겼던 유명한 문장인 "사물의 원인을 아는 자는 행복하여라(felix qui potuit rerum cognoscere causas)"는 후세 사람들의 짐작으로는 아마도 루크레티우스를 향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고 한다. 루크레티우스를 읽는 매력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오로지 사물의 근본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끝없이 탐색에 몰두하는 놀라운 열정, 아무런 근거도 되지 못하는 신화에 대한 철저한 거부, 때로는 난해하고 투박하지만 오롯이 진실만을 전달하고자 하는 진정성 넘치는 시적 표현 등은 고대의 여느 다른 시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물질의 근원과 우주의 비밀'을 밝히기 위한 숱한 도구들을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던 까마득한 그 옛날에, 오로지 '관찰'과 '상식'과 '추론'에만 의지한 채 이토록 '지극히 현대적인 자연과학적 철학'을 예술작품으로 빚어냈다는 사실이 참으로 경이롭다.

 

오늘날 우상 숭배나 다름없을 만큼 맹목적인 종교로 변질된 기독교에 대해 격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월든』에서 '한 권의 책과 새로운 기원'에 대해 아주 함축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을 남겨 놓았다. 아주 가끔씩 만나게 되는 '고대의 진귀한 책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게 되면 나는 어김없이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그 옛날의 현자(賢者)를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혹시나 이 책이 바로 그 책이 아닐까, 하면서.

 

 

 한 권의 책과 새로운 기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을 읽고 자기 인생의 새로운 기원을 마련했던가! 우리의 기적들을 설명해주고 새로운 기적들을 계시해줄 책이 어쩌면 우리를 위하여 존재할 가능성은 크다. 지금 내가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어느 책에 표현되어 있을지 모른다. 우리를 당혹하게 하고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며 우리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문제와 똑같은 문제들이 일찍이 모든 현명한 사람들에게도 제기되었다. 한 문제도 빠짐없이 말이다. 그리고 이들 현인들은 저마다 이 질문들에 대해 해답을 제시했다. 자기 능력에 따라, 또 자기 고유의 언어와 생활 방식으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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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12-11 0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책이 쌓인 순서가 시대순이었군요. oren님의 섬세한 자리 배치에 깊은 뜻이 있었다는걸 뒤늦게 알게 됩니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와 관련해서 「1417년 근대의 탄생」은 책을 구입해 놓고 아직 읽지 못했는데, oren님 덕분에 꺼내 놓게 됩니다^^:

oren 2017-12-11 09:42   좋아요 1 | URL
제가 루크레티우스라는 시인을 처음 알게 된 건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을 때였답니다. 몽테뉴가 얼마나 자주 그 시인의 이름과 싯귀를 인용하는지를 셀 수도 없을 정도였지요. 도대체 ‘루크레티우스‘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견딜수가 없었지만 그에 관해 자세히 알 도리가 없더군요. 제가 수상록을 처음 읽은 때가 1983년이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그 흔한 인터넷조차 아예 없었으니까요. 34년 만에 루크레티우스가 쓴 책을 직접 읽고, 책탑까지 시대순으로 쌓고 나서 곰곰 생각해 보니 루크레티우스가 새삼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1417년, 근대의 탄생』은 저도 꼭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루크레티우스의 책을 찾아낸 인문학자 ‘포조 브라치올리니‘는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라는 책에서도 상세히 기술되어 있을 정도로 ‘고문서 수집가로서의 활약‘이 참으로 대단했던 인물이더군요. 이미 네이버 지식백과에도 등재되어 있을 정도고요.

nodiggety 2017-12-11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티븐 그린블랫의 책을 읽은 후 관심이 생겨 루크레티우스를 읽고 그 후 Epictetus의 철학에 관한 Penguin에서 나온 The Art of Happiness을 읽었어요. 개인적으로 Swerve (1417년 근대의 탄생)도 The Art of Happiness도 루크레티우스의 작품에 비해 좀 미흡한 점이 많아서 관심 있으면 읽어볼만하지만 퓰리처상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oren 2017-12-11 09:54   좋아요 0 | URL
스티븐 그린블랫의 책이 나온 덕분에 루크레티우스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예전보다 훨씬 더 높은 관심을 끌게 된 분위기도 있는 듯합니다. 저도 이번에 루크레티우스의 책을 읽고 나서 『그리스철학자열전』에 담긴 「에피쿠로스 편」을 다시 읽어 봤지만, 루크레티우스의 탁월한 시적 표현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더군요.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그 책에서 ‘에피쿠로스‘가 수많은 ‘그리스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더군요. 『그리스철학자열전』에 담긴 인물들이 무려 73명인데 말이지요.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제논,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디오게네스, 데모크리토스 등등 그 숱한 걸출한 철학자들을 다 제쳐두고 에피쿠로스에게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한 점이 고맙기까지 하더군요.

2017-12-11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2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리스철학자열전 동서문화사 월드북 79
전양범 지음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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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밑줄긋기)

 

그의 책 권수는 약 300을 웃돌고 있었기 때문

 

또한 철학자인 에피쿠로스는 매우 다작이고 책의 수로는 모든 사람을 능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책 권수는 약 300을 웃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가운데에는 남의 책으로부터의 인용은 하나도 없고 그 전부가 에피쿠로스 자신의 말인 것이다. 그런데 (스토아파인) 크리시포스는 에피쿠로스와 다작을 겨루려 하고 있었던 것인데 (새 아카데미파인) 카르네아데스는 이 크리시포스를 에피쿠로스의 책을 좀먹는 기생충으로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에피쿠로스가 어느 것을 쓰면 크리시포스는 이에 지지 않으려고 같은 분량만큼 쓰려고 했다.(669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을 재빠르게 활용할 수가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또 우리는 그 기본적인 원리로 끊임없이 되돌아가 그것만의 것은 기억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해는 얻을 수 있을 것이고 게다가 매우 개략적인 것이라도 나의 학설의 개요가 올바르게 파악되고 기억되고 있는 것이라면 개개의 특수한 사항에 대한 정확한 지식도 모두 발견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충분히 철학의 수업을 쌓은 사람에게 있어서도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을 재빠르게 활용할 수가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정확한 지식이 갖추고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항이) 단순한 기본원리로 환원되어 말로 표현됨으로써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개의 특수한 사항에 관한 것이 모두 정확하게 알려졌다고 해도 그것을 간결한 말로 자기자신 속에 받아들이지 (기억해두지) 못한다면 그것은 학설 전체를 끊임없이 열심히 연구해온 것의 성과로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675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아톰은 끊임없이 그리고 영원히 운동을 하고 있는 것

 

그러나 또 (우주) 만유는 한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정되어 있는 것은 끝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그 끝은 (그 앞에 있는) 다른 무언가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그런데 만유는 다른 무언가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유는 끝이 없기 때문에 한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이 없다면 만유는 한이 없는 것이고 한정된 것이 아닐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만유는 물체(아톰)의 수에 있어서나 공허의 크기에 있어서나 한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공허가 한없이 큰데 물체는 한정된 수의 것이라고 한다면 물체는 이를 지탱하거나 저항해서 되돌리거나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어디에도 머무는 곳은 없어 무한한 공허 속에 흩어져 운반되어 갈 것이고, 만일 공허의 크기가 한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무한히 수많은 물체는 존재해야 할 곳을 갖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여러 가지 물체 가운데서도 불가분으로 충실한 것, 즉 합성물이 그것에서 낳고 또 그것으로 분해되는 요소(아톰)에는 우리에게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형태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고 있는 합성물의) 이 정도로까지 수많은 차이가 우리가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한정된 수의) 같은 형(의 아톰)에서 생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형태마다 비슷한 것(아톰)은 수에 있어서 완전히 무한하게 있지만 형태가 다른 것은 결코 무한으로 수없이 있는 것은 아니고 우리에게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이 있을 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분할은 무한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그는 그것에 이어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의 성질은 변화하는 것이므로 (아톰형의 무한한 다양성을 상정하려고 하는데)] 만일 사람이 크기의 점에서도 아톰 속에 있는 것을 완전히 한없이 큰 것으로 (해서 눈에 보일 정도의 것으로)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앞서와 같이 상정할 필요는 없다)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아톰은 끊임없이 그리고 영원히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677∼678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세계가 무한히 수많은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또 세계는 수없이 무한히 있고 그 어느 것은 우리의 이 세계와 비슷한데 다른 것은 비슷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아톰은 앞서 명확해진 것처럼 수없이 무한히 있고 그런 것들은 매우 멀리까지 운반되어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계가 그런 것에서 생길 수 있는, 또는 그런 것에 의해서 형성될 수 있는, 그와 같은 여러 가지 아톰은 하나의 세계를 위해, 또는 한정된 수의 세계를 위해 ㅡ 그런 것들의 세계가 우리들의 세계와 비슷한 것이든, 다른 것이든 ㅡ 모두 사용되고 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가 무한히 수많은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679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사물의 형태를 보는 것

 

그런데 외계의 사물에서 어떤 것(에이드론)이 우리 안에 들어옴으로써 우리는 그런 사물의 형태를 보거나 그런 사물에 대해서 사고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외계의 사물이 그것들 자체가 지닌 색깔이나 형체의 있는 그대로를 우리에게 인상을 남기는 것은 우리와 그런 사물과의 중간에 개재하는 공기에 의해서도, 또는 (눈에서 나오는) 광선에 의해서도, 또는 우리에게서 그 사물에 이르고 있는 무언가의 흐름에 의해서도 다음에 말하는 것과 같은 방법에 따를 정도로는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사물 그 자체에서 색깔도 형체도 사물과 비슷한 일종의 모방된 것 (티포스=에이드론)이 우리에게로 와 제각기 상응한 크기에 따라서 우리의 시각이나 정신에 잠입하는 데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런 모방된 것(영상)은 매우 신속하게 운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와 같은 이유 때문에 그와 같이 모방된 것(영상)은 하나의 연속된 것이란 표상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고, 또 대상으로부터의 적당한 출격에 의해서ㅡ이 충격은 (대상인) 고체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아톰이 진동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인데ㅡ이런 모방된 것(영상)은 그 대상에서 유래하는 곳의, 그것과 대응하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정신에 따라서이든, 다양한 감각기관에 따라서이든,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으로 어떤 표상을 갖는다고 해도ㅡ형태에 대한 표상이든, 속성에 대한 표상이든ㅡ이 표상되고 있는 것이 (그것의) 고체형태 (내지는 속성)이고 그것은 에이드론(영상)이 잇따라 응집함으로써, 또는 우리의 정신 속에 잔존하고 있음으로써 낳게 된 것이다.(681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어느 세계는 구상(球狀)이고 다른 세계는 계란형

 

또 이들 여러 세계는 필연에 의해서 하나의 똑같은 형을 지니고 '생성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또 온갖 형태를 지니고 생성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 이런 모든 세계에는 동물이나 식물, 그밖에 우리가 이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 여러 세계는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도 그(에피쿠로스) 자신이 <자연에 대해서> 제12권 가운데서 쓰고 있다. 즉 어느 세계는 구상(球狀)이고 다른 세계는 계란형이며 또 다른 세계는 그것과는 다른 형상을 이루고 있는데, 그러나 온갖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생명이 있는 것은 무한한 것에서 (직접) 분리되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것은 동물이나 식물이나 그 밖에 (우리의 세계에서) 관찰되는 모든 것이 그런 것에서 낳게 되는 씨앗이 여기저기의 세계 속에는 포함되어 있었겠지만ㅡ또 사정에 따라서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 때도 있었겠지만ㅡ그러나 이런저런 세계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을 아무도 논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동물 그 밖의 것이 (태어난 후에) 세계 속에서 키워진다는 점도 똑같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세계에 있어서나 대지 위에 똑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692∼693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매우 단기간 안에 개관하게 되는 것

 

따라서 만일 나의 이 설명이 정확하게 파악될 수 있는 것이 된다면 설사 사람이 개개의 사항에 대한 정확한 것 모두를 알기까지에 이르지 않는다고 해도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학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실제로 그 사람은 나의 학설체계 전체에 의거해 개개의 사항에 관한 수많은 정확한 것을 자기 자신이 명확히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원칙적인 사항이 기억 속에 담겨져 있다면 그것은 끊임없이 그 사람의 연구에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그것은 이런 원칙적인 사항은 그와 같은 효과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개개 사항에 대해서 이미 충분할 정도로, 또는 완벽한 정도로까지 정확한 지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지식을 이와 같은 원칙적인 사항의 파악으로 환원함으로써 자연전체에 관한 연구의 대부분의 것을 수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또 아직 완전하게 나의 학설을 습득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 속하는 자들 쪽은 구술에 따르지 않은 학습방법이라도 이곳에 언급되고 있는 원칙에 의거해 혼의 평안에 도움이 되는 가장 중요한 사항을 매우 단기간 안에 개관하게 되는 것이다.(697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다중우주

 

또 이와 같은 여러 세계가 수없이 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또 그와 같은 세계는 이미 생기고 있는 세계 가운데서도 또 중간계ㅡ세계와 세계와의 사이의 공간을 우리는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인데ㅡ그 중간계에서도 생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은 일부의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드넓고 전혀 섞임이 없는 순수하게 공허한 곳 가운데서,라는 것은 아니고 공허가 많은 곳 가운데서,라는 것이다. 즉 세계를 만드는 데 적합한 일종의 씨앗(아톰)이 하나의 세계 또는 중간계에서, 또는 몇 개의 세계 또는 중간계에서 (이 공허가 많은 곳으로 흘러들어와 조금씩 결합하거나 분절화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곳으로 위치를 바꾸거나 함으로써) 세계는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씨앗은 세계가 완성해 안정이 될 때까지 적당한 곳으로부터 계속 유입하는 것인데 이와 같은 과정은 세계의 바탕이 되는 밑에 놓인 씨앗이 새로운 씨앗을 받아들이는 것이 될 수 있는 한 계속되는 것이다.(700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현자가 하지 않는 일

 

또 현자는 소송을 제기할 때도 있을 거싱고 저작을 남기는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공 집회에서 연설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 현자는 자기재산에 배려해 장래에 대비할 것이다. 또 전원을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운명에는 감연히 맞서고 어느 벗도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 경멸당하지 않을 정도로 세상의 평판에는 두루 신경을 쓸 것이다. 또 국가의 제례 때에는 다른 사람들 이상으로 즐길 것이다.(712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많은 사람들이 안고 있는 사고를 신에게 밀어붙이고 있는 자들이 오히려

 

한편, 내가 이제까지도 끊임없이 들려준 것, 그것이야말로 훌륭하게 살기 위한 기본원리로 생각해 그것을 생각함과 동시에 이를 실행하도록 하기 바란다. 즉 우선 첫째로 신에 대한 공통의 관념이 사람들 마음에 새겨 있는 대로 신은 불멸이고 지복한 삶으로 믿고 신의 불멸성과는 무관한 일도, 또 그 지복성에 걸맞지 않은 일도, 아무것도 신에게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신의 불멸성과 지복성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신에 대해서는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신들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고 신들의 인식은 명료한 (直覺的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신들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계속 지키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신들을 부인하는 자가 불경신(不敬神)인 사람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안고 있는 사고를 신에게 밀어붙이고 있는 자들이 오히려 불경신의 사람인 것이다.(715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훌륭하게 판단한 것이 우연한 탓으로 잘 안 된다고 해도 그 쪽이 더 낫기 때문

 

또 우연(운)에 대해서 사려있는 사람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처럼 이를 신으로 여기지는 않고(그것은 신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무질서하게 이루어지는 일은 없기 때문에) 또 우연을 온갖 사항의 불확실한 원인으로도 여기지는 않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한 일이나 나쁜 일이 지복한 삶을 보내기 위해 우연에 의해서 인간들에게 주어진다고는 사려있는 사람은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커다란 선이건, 악이건 그런 것의 계기가 되는 것은 우연에 의해서도 가져오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려있는 사람은 잘 생각함도 없이 행동하면서 행운이기보다는 잘 생각해서 행동하면서 불운인 쪽이 낫다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행위에 있어서는 훌륭하게 판단한 것이 우연한 탓으로 잘 안 된다고 해도 그 쪽이 더 낫기 때문이다.(720∼721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헛된 망상에 따른 것

 

자연적인 욕망이기는 한데 충족되지 않아도 괴로움으로 이끄는 일이 없는 욕망 가운데 대상에 대한 격한 욕망이 깃들고 있는 경우에는 그와 같은 욕망은 헛된 망상에 의해서 낳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욕망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욕망 자체의 본성 탓은 아니고 그 사람의 헛된 망상에 따른 것이다.(727쪽)

 

 - 디오케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제10권」<1. 에피쿠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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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대우고전총서 29
루크레티우스 지음, 강대진 옮김 / 아카넷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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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하지만 만일 윱피테르와 다른 신들이 공포스러운 뇌성으로

천상의 빛나는 영역을 뒤흔들고,

불을 각자가 원하는 대로 어디로든 던진다면,

그들은 왜, 어떤 혐오스러운 죄악을 아무 생각 없이 행한 자들에게

타격의 불길을 일으키지 않는가, 가슴이 꿰뚫려

벼락 내를 뿜으며 필멸의 인간들에게 날카로운 가르침이 되도록?

왜 그러지 않고 오히려, 그 어떤 사악한 일도 알지 못하는 이가

죄 없이 불길 속에 돌며 갑작스레 천상적인

소용돌이와 불속에 잡혀 엉키게 되는가?

또, 왜 그들은 외딴 장소를 지향하고 헛되이 애를 쓰는가?

그때는 팔을 훈련시키고 지체를 튼튼하게 만들려는 것인가?

또 그들은 왜 아버지의 무기가 땅에서 무뎌지는 것을

용인하고 있는가? 그 자신은 왜 이것을 허용하며, 적들을 겨냥해 아껴두지 않는가?

또한, 윱피테르는 왜 맑은 하늘로부터는 어디서도 결코

땅으로 벼락을 던지거나 뇌성을 쏟아붓지 않는가?

혹시 구름이 올라가자마자, 자신이 그때 그 안으로

내려가는 것일까, 거기 가까이서 무기의 타격을 겨냥하려고?

나아가, 무슨 이유에서 바다로 그것을 보내는가? 무엇을 그는 탓하는가,

물결들과 그 유동하는 부피와 헤엄치는 들판에게?

더욱이, 만일 그가, 우리가 벼락의 타격에 주의하기를 원한다면,

왜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 던져진 것을 분간할 수 있게 만들기를 주저하는가?

혹시 그가, 우리가 예상치 못할 때 불로 기습하기를 원한다면,

왜 그는 우리가 피할 수 있도록 저 부분에서 천둥 치는가,

왜 어둠과 포효와 우르릉거림을 앞질러 일으키는가?

또한 그대는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가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그것을 던진다는 것을? 아니면 그대는 이것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감히 주장할 것인가,

수많은 타격이 하나의 같은 순간에 이뤄지는 일이?

하지만 아주 자주 그 일은 일어났으며, 또 일어나야만 한다,

여러 지역에서 비가 오고 소나기가 내리는 만큼,

그만큼 하나의 같은 순간에 많은 낙뢰가 생겨야 하는 것이다.

끝으로, 왜 그는 신들의 신성한 성역과 자신의

영광스런 거처를 적대적인 벼락으로 쳐 흔들며,

신들의 잘 조성된 상들을 깨어버리고, 험한 상처로써

자신의 조상(彫像)들로부터 아름다움을 빼앗는가?

그리고 왜 그는 대개 높은 장소를 지향하며, 우리는 왜

산꼭대기에서 그의 불의 자취들을 가장 많이 보게 되는가?

(465∼4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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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대우고전총서 29
루크레티우스 지음, 강대진 옮김 / 아카넷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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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 일으키는 환각

 

그런데 이러한 질병들은 성공적이고 지극히 순탄한 사랑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반면에 불운하고 가망 없는 사랑 속에는,

그대가 눈의 빛을 가리고서도 파악할 수 있을,

헤아릴 수 없는 질병들이 있다. 그러니 미리 깨어 주의하고,

내가 가르친 방법에 따라, 걸려들지 않게 조심하는 편이 더 나으리라.

우리가 사랑의 그물 속에 던져지지 않도록 피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저 사냥망에 잡혔다가

빠져나오는 것, 베누스의 단단한 매듭을 끊고 나가는 것에 비하면.

하지만 그대가 얽히고 발이 묶였다 해도 그 적을

피할 수는 있다, 그대 스스로 자신을 막아서지 않는다면,

그리고 처음에 그대가 추구하고 원하는 그 여인의

몸이나 마음의 모든 흠들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개 욕망에 눈멀어 이 일을 행하고,

여인들에게, 사실은 그들에게 속하지 않은 장점들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방식으로 변형되고 추한 여자들이

총애를 받고, 최고의 영예 속에 잘 사는 것을 우리는 본다.

하지만 사람마다 다른 이를 비웃고, 베누스의 마음에 들어보라고

촉구한다, 끔찍한 사랑에 괴루움을 당하고 있다 하여.

하지만 이 비참한 사람들은 자주 자신의 크나큰 질병은 돌아보지 않는다.

검은 여자는 '꿀 빛'이라고,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여자는 '꾸밈없다'고,

청회색 눈은 '팔라스의 눈빛'이라고, 뻣뻣하고 나뭇결 같은 머리칼은 '사슴 같다'고,

키 작고 왜소한 이는 '카리스 중 하나'라고, '알짜배기 순수 소금'이라고,

덩치 크고 우람한 이는 '감탄을 자아낸다, 위엄 있다' 한다.

말을 더듬고 잘 못하는 이는 '발음이 부정확한 편'이라고, 벙어리는 '얌전하다'고 한다.

밉살스럽고 성질 급한 수다쟁이는 '불같은' 것이 된다.

너무 말라서 살지도 못할 정도면 '호리호리한 내 사랑'이

된다. 기침으로 거의 죽은 여자는 '여리다' 한다.

통통하고 가슴 큰 여자는 '이악코스를 품에 안은 케레스 자신'이다.

들창코는 '여자 실레누스, 여자 사튀로스'고, 입술이 두꺼우면 '뽀뽀'라고 한다.

이런 종류의 다른 것을 다 말하려면 길고 긴 작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그대가 원하는 대로 용모의 영예를 갖추게 하라,

그녀의 온 지체에서 베누스의 힘이 솟아나도록.

그래도 진실로 다른 것들이 있다. 진실로 그녀 없이도 우리는 이전에 살아왔다.

진실로 그녀는 같은 것을 행한다, (우리도 그것을 안다), 못생긴 여자들이 하는 모든 것을.

또 그녀는 스스로 비참하게도 끔찍한 냄새를 피워낸다,

그래서 하녀들은 그녀를 피해 멀리 달아나고, 몰래 킥킥댄다.

하지만 내쳐진 구애자는 눈물을 흘리며 자주 문지방을

꽃들과 화환들로 덮고, 오만한 기둥들을

마요라나 향료로 문지르고, 불쌍하게 문들에 입을 맞춘다.

하지만 이제 허락을 얻어서 들어서는 그를 한 줄기

바람이 마주친다면, 그는 물러갈 예의 바른 핑계를 찾을 것이고,

오랫동안 궁리해온 가슴 깊은 데서 끌어낸 탄식은 추락해버릴 것이며,

거기서 자신의 우매함을 저주할 것이다, 자신이 그녀에게, 필멸의 존재에게

허용해 마땅한 것 이상의 많은 것을 부여했음을 그제야 볼 터이니.

이 사실을 우리의 베누스들도 모르지 않는다. 그런 만큼 더 그녀들은

최고의 노력을 경주하여 삶의 무대 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숨긴다,

그들의 사랑 속에 붙잡아 묶어두기를 원하는 이들로부터.

공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정신으로써 모든 것을 빛으로

이끌어내고, 모든 웃음들을 탐색해낼 수 있으며,

만일 그녀가 예쁜 마음씨를 지녔고 혐오스럽지 않다면, 입장을 바꿔서

인간적인 흠들을 지나쳐 보내고 그것에 양보할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340∼343쪽)

 

 -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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