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록 - 미래사회를 이끌어 갈 주인공들에게 남긴 100년을 내다본 지혜 모음
탄허 지음 / 휴(休)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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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4·19혁명은 청년학생(소남)의 궐기로 이승만 정권(아버지)을 무너뜨렸는데, 이렇게 청년학생의 힘으로 정권이 붕괴된 일은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4·19혁명의 영향으로 전 세계 여러 곳에서 학생들의 봉기 운동이 일어나 유행처럼 번져 나갔으며, 그 결과 선진국에서 ‘스튜던트 파워’를 형성하였다.

 

소남인 우리나라의 수많은 청년학생이 자유당 정권을 붕괴시킨 것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두운 역사가 종결되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상의 원리로 볼 때 소남은 시종始終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간방에 간도수가 접합됨으로써 어두운 역사는 끝을 맺게 되고, 이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수밖에 없으며, 인류 역사의 시종이 지구의 주축主軸 부분에 위치한 우리 땅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인류 역사의 종결이라고 한 것은 그 안에 새로운 인류 역사의 시작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보더라도 이미 1백 년 전부터 하나의 결실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역학의 원리는 오래 전부터 이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결국 시종을 함께 포함한 간방의 소남인 우리나라에 이미 간도수가 와 있기 때문에 전 세계의 문제가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게 될 것이다.

 

구체적인 예로 우리나라의 남북 분단과 통일 문제를 살펴보자. 전체 인류사적 관점에서 보면 작고 사소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이 문제야말로 오늘날 국제 정치의 가장 큰 쟁점이며, 한반도 문제 해결이 곧 세계 문제 해결로 직결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현상은 곧 지구의 남극과 북극의 상대적인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하겠다. 지구에 남극과 북극은 있지만 서극과 동극은 없지 않은가. 이는 지난 세기에 있었던 동서의 문제가 바로 역사의 결실기를 맞아 남북의 문제, 즉 지구의 표상인 남극과 북극의 상대적인 현상과 닮아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간방인 우리나라에 간방의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간도수가 와 있다. 소남인 청년학생들의 역사적인 출발점이 시작되기 15년 전(1975년 기준)부터 세계는 그동안 해결되지 못한 오랜 문제들을 서서히 청산해 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나라에는 서광이 비치고 있으며 희망찬 미래를 약속받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여러 난제들, 예를 들면 남북 분단, 경제적 양극화, 세대 간 갈등, 급속한 변화로 인한 가치관의 충돌 등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5천 년 동안 고난과 역경 속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의 불행한 역사는 머지않아 종결될 것이다.

 

역시 역학의 원리로 본다면 오늘날 우리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도 일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일본이 우리나라를 36년 동안 강점할 당시 그들은 일본 황궁皇宮을 한반도로 옮기려고 궁터까지 마련한 적이 있었다. 또한 영구히 일본 본토로 만들기 위해 우리 민족의 대부분을 만주 등으로 이전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36년이라는 일시적 강점 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끝이 났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가 일시적 현상으로 끝났듯이 우리나라의 남북 분단 문제 또한 그러할 것이다. 물론 위정자나 학자들이 남북 분단 문제를 민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 중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앞으로도 멈추지 말고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천륜天倫의 법칙에는 당할 수가 없다. 인간이 자연에 아무리 강력하게 도전한다 해도 결코 자연을 완전히 정복할 수 없듯이 말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추세가 아닌가.

 

오늘날 서구의 몰락을 살펴보자. 지금 그들은 서구 문명의 한계를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사상과 동양 문화에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이 날로 커지고, 그 필요성도 점차 증대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머지않아 통일을 위한 우리의 모든 노력에 하늘의 섭리가 필연적으로 작용할 것이다.(44∼47쪽)

 

(나의 생각)

 

4·19 운동만 하더라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혁명이라는 평가를 내린 탄허 스님이 6·10 민주화 운동을 직접 목도했더라면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한국이라는 나라는 '과거 100년 동안만' 되돌아 보더라도, 지금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처지의 나라였다. 36년 동안 나라를 통째로 빼았겼고, 3년 동안 동족끼리 싸우는 것도 모자라,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수많은 군인들이 이 땅에서 한데 엉켜 잿더미가 되도록 피터지게 싸운 나라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느새 우리도 모르게 이만큼 올라섰다. 우리의 현재 위치만 곰곰 생각해 보더라도, 35년 전에 입적하신 탄허 스님의 말씀이 결코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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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동아시아에서 주된 세력을 형성하는 한국, 중국, 일본 민족은 동양 사상을 구축한 요체로서 역학의 원리를 새겨 볼 만하다.

 

이 관점에서 한국, 중국, 일본 세 민족의 장단점을 들어 동양 사상의 형성 과정이나 동아시아의 문화 문명에 어떤 역할을 해왔고, 앞으로 동아시아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살펴보자.

 

불교에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리가 있다. 즉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는 인과법칙이다. 이것은 조상의 죄과罪過를 후손이 치른다는 유교의 권선징악 원리와 일맥상통한다. 동양 사상에 있어 대표적 사상인 유교, 불교, 선교(도교)는 이런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내가 역사를 보는 시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역사 진화 과정을 유교, 불교, 선교의 동양 사상을 중심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일반 역사학자들과는 달리 과거의 역사보다는 미래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대부분의 사학자들은 정사正史로 밝혀진 내용 위주로 이야기한다. 즉 세계 역사에서 중국을 동아시아 문명의 발상지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이를테면 중국에서 문명이 발생해서 우리나라로 전파되었고, 여기에서 다시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시각이다. 또한 일본이 제일 늦게 동양의 전통 문화권에 들어갔지만, 현실적으로는 동양 문화의 세계성을 가장 잘 실현하고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를 근거로 예측해 본다면 미래 역사에서 일본은 가장 불행한 나라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의 선조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결과가 미래에 분명히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례로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살펴보자. 일본은 지난 5백 년 동안 무려 49차례나 우리나라를 침략했다. 만약 임진왜란 때 천운이 우리 편이 되어 주지 않았다면 세력으로만 보자면 일본에게 우리 땅을 열 번도 더 빼앗겼을 것이다. 수차례 왜군의 침략으로 삼남三南은 쑥대밭이 되었고, 결국 함경도까지 함락되면서도 나라를 완전히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우리나라의 국운 덕분이었다. 즉 우리 선조들이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동양의 전통적 가치를 지키며 남을 해칠 줄 모르고 살아온 것이 결국은 우리나라의 미래를 밝히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동양 사상의 근본 원리인 인과법칙이자 인과응보이며 우주의 법칙이다. 이것을 역학의 원리로 풀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주역》의 팔괘에서 우리나라는 ‘간방艮方’에 위치해 있다. 《주역》에서 ‘간艮’은 사람에 비유하면 ‘소남小男’이다. 이것을 나무에 비유하면 열매다. 열매는 시종始終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소남을 풀이하면 ‘소년少年’이라 할 수 있는데, 소년은 시종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소년은 청산靑山이면서, 아버지 입장에서는 결실이기 때문이다. 소년이 다시 시작되면 성장하여 언젠가는 아버지가 된다. 열매는 결실 전 뿌리에 거름을 주어야 효과가 있고, 일단 맺게 되면 자기를 낳아 준, 다시 말해 열매를 만들어 준 뿌리와 가지의 말을 듣지 않는다. 오히려 열매는 뿌리를 향하여 자기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간艮’의 원리이자 소남의 해석이며 시종의 논리다.

 

《주역》을 지리학상으로 전개해 보면 우리나라는 간방에 해당되는데 지금 역의 진행 원리로 보면 이 간방의 위치에 간도수(艮度數; 《주역》에서 인간과 자연과 문명의 추수 정신을 말함)가 비치고 있다. 이 간도수는 이미 1900년 초부터 시작되었다.(42∼44쪽)

 

(나의 생각)

 

탄허 스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일본이라는 나라는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나라이다. 남의 나라를 강제로 빼앗고 병합시킨 것도 모자라, 우리 민족 자체를 말살하기 위해 온갖 만행을 저질렀으면서도 도무지 진솔한 사과조차 할 줄 모르니 말이다. 전세계가 인정하는 '위안부 문제' 하나로도 모자라, 최근에는 '일제시대 강제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해서도 온갖 험담과 위협을 일삼고 있고, 독도 훈련을 트집 잡아 말도 안 되는 트집과 해악질을 부리고 있다. 저들이 과연 '제정신인가'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저토록 반성이라곤 할 줄 모르는 일본 사람들이라면, 탄허 스님의 말씀대로 미래가 진행된다 한들 무슨 변명이 소용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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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탄허 스님에게는 몇 차례 예지 적중 내력이 있다는 사실은 알 만한 이들은 이미 아는 일이다. 그 하나는 6·25 직전, 스승 한암 스님의 만류도 뿌리치고 양산 통도사로 남하했던 이력이다. 그 둘은 울진, 삼척 지방에 무장공비가 몰려들기 직전 《화엄경》의 번역 원고를 월정사에서 영은사로 옮겼던 이력이다.

 

그러나 탄허 사상과 예지의 매력은 더욱 깊은 곳에 있다. 그는 예언한다. 지구에 잠재하는 화질火質이 북방의 빙산을 녹이기 시작한 것은 지구의 규문閨門이 열려 성숙한 처녀가 되는 과정이라고 비유하는 것이다. 지구의 초조初潮 현상은 소멸이 아니라 성숙의 모습이라는 낙관론이다. 그는 또한 머지않아 민중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믿는다. 땅의 민중이야말로 핵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리라는 것을 역학의 산리算理로 헤아려 내는 것이다.(14쪽)

 

 

 * * *

 

6·25 동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49년, 당시 나는 오대산에서 한말韓末 이래로 가장 존경받던 고승 한암漢岩 스님을 모시고 수도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한암 스님을 10년 이상 모신 상좌上座가 없었는데 황송하게도 나는 22년을 모셨다. 한암 스님께 가르침을 받으면서 존경하는 마음은 날로 더해 갔다.

 

기축년己丑年인 1949년 어느 날, 개미 떼가 자기들끼리 싸움을 해서 법당과 중대 뜰에 수백 마리씩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난亂을 예감했다.

 

‘남북 간에 큰 싸움이 벌어지겠구나!’

 

하늘은 하늘의 상象을 보이고, 땅은 땅의 상을 보이고, 꼭 사람의 상만 보는 것이 관상이 아니다. 짐승들도 지진을 예지하는데, 하물며 그런 큰 난리는 다 미리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그동안 공부를 통하여 얻은 역학 원리易學原理로 분석해 보니 곧 난이 일어날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일단 어려운 상황을 피하자는 생각이었다.

 

“스님, 오대산을 떠나 남행南行을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한암 스님께 말씀드렸다. 그러나 한암 스님은 30년 이상을 살아온 오대산을 떠날 수 없다며 완강하게 거절하셨다.

 

당시 내 나이 서른네 살, 인생에서 가장 혈기왕성한 시기여서 어떻게든 남행을 관철시키려고 애썼다. 더욱이 당시 스물셋, 스물넷이었던 젊은 상좌들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앞으로 닥칠 난을 피해 오대산을 떠나려는 결심을 굳혔다.

 

내 결심이 굳건하다는 사실을 안 한암 스님은 어쩔 수 없이 남행을 허락하고, 양산 통도사 백련암으로 가서 먼저 자리를 잡고 기다리라고 하셨다. 한암 스님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오대산의 중대암에 기거하다가 3일 만에 짐을 챙겨 몇몇 상좌와 함께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기축년己丑年 봄, 통도사 백련암에 도착했다. 그런데 당시 통도사 주지는 우리에게 암자를 내줄 수 없다고 했다. 한암 스님께서 곧 오실 것이라는말로 겨우 암자를 얻어 머물 수 있었다.

 

그러나 한암 스님은 끝내 백련암에 오시지 않았다. 30년 이상을 오대산에 머무르셨으니 움직이지 않겠다고 하신 그분의 결의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여든 살의 고령이었던 한암 스님은 오대산에서 6·25 동란을 고스란히 겪으셨다.

 

그때 상원사를 불태우려고 군인들이 들이닥쳤는데, 한암 스님은 가사 장삼을 갖춰 입으시고 법당에 의연히 앉아 그대로 태우라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노승의 의연함에 놀란 군인들이 차마 불태우지 못하고 떠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한암 스님은 1·4 후퇴 무렵에야 오대산을 떠나 천리가 넘는 남행길을 선택했고, 그 과정에서 겪은 고생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또 다른 일을 이야기하자면 어느 해인가 동해안을 통해서 울진·삼척 지방에 공비 120여 명이 침투한 일이 있었다. 당시 나는 월정사의 한 암자에서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을 번역하고 있었는데, 어떤 직감에 의해 공비 침투가 있기 한 달 전에 장서藏書와 번역 원고들을 모두 삼척 영은사靈隱寺로 옮겨 두었다.

 

갑자기 짐을 몽땅 싸서 다른 곳으로 옮기자,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작은 소동이 일었다. 그때 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몸은 떠나지만 마음은 여기 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라.”

 

《신화엄경합론》 번역 원고들을 모두 옮기고 난 후 15일 만에 울진과 삼척 지역에 공비 침투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거의 모든 공비가 소탕되었지만, 일부 남은 공비들이 험준하기 이를 데 없는 오대산으로 도주했다. 그 바람에 월정사를 중심으로 오대산 일대에 소탕작전이 벌어졌다. 이때 공비들을 소탕하기 위해서 동원된 군대가 얼마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하필이면 군단 사령부가 월정사에 소탕작전 본부를 설치했다.


그동안 나는 강릉에서 한달가량 머물다가 공비 소탕작전이 끝난 다음 월정사 암자로 돌아왔다.

 

그런데 내가 살던 암자 주변에 사방으로 참호를 파 놓아 암자는 완전히 폐허 상태였다. 만약 그때 필생의 노력과 심혈을 기울여 온 《신화엄경합론》 번역 원고들을 다른 장소로 옮겨 놓지 않았더라면 이 번역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35∼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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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당개라는 선비가 운명을 보았는데 “천정무원穿井無源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즉 “우물을 파는 데 근원이 없다”라는 뜻으로 다시 말해서 “너의 팔자는 기구해서 어렵다”는 말이었다.

 

그러자 당개는 즉각 “천정무원穿井無源가?”라고 현토를 고쳐서 반박했다. 이 말의 뜻은 “우물을 파는 데 근원이 없을 소냐?”라는 말로 파다가 중단하면 근원이 없지만 끝까지 파면 근원의 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꾸준히 70년을 공부했다. 그러면서도 결코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를 몰라준다고 세상을 원망하는데도 그는 한 번도 원망함이 없이 꾸준히 노력했다. 대신 학문이 능통하면 내가 벼슬을 할 텐데, 학문이 부족하니 내가 이렇듯 등용 안 되었지 하면서 늘 반성하고 노력을 했다.

 

그러다 일흔이 되던 해에 역시 글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공중에서 “당개, 당개!” 하고 불러서 밖으로 나가보니 허공은 공적하고 부르는 소리만 있지 모양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자 당개가 “무엇이 나를 찾느냐” 하니 공중에서 귀신이 하는 말이 “너의 운명을 어찌하겠니?” 물었다. 듣고 보니 젊었을 때 말과 같았다. 우물을 파서 근원이 없다는 말이나 지금의 “운명을 어찌하겠니?” 이 두 문장은 말만 다르지 뜻이 같으니 당개가 다시 반박을 했다. 

 

“야, 이놈아 운명인들 당개를 어찌하겠느냐?”

 

“당개가 밀고 나가는데 어찌 운명이 당개를 이길 수 있단 말이냐?”

 

이렇게 호통을 쳤다. 그리고 그 해에 등과를 했다. 이렇게 운명은 당개처럼 자기 자신이 개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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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a 2018-12-14 11: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때 제 짝꿍은 고교졸업 후 노동운동에 투신, 감옥에도 다녀왔는데요. 그 친구가 어느 날 친구따라 점집엘 갔었대요. 그 때 점쟁이가 제 친구를 보자마자 그러더래요. ˝당신은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라 이런 데 올 필요가 없소.˝라고요. 아주 당찬 친구였는데 늘 경제적인 문제로 어려워했어요.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지만 가끔 마음이 약해질 때 이 친구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지곤하지요. 그리운 친구입니다.

oren 2018-12-14 12:05   좋아요 0 | URL
그런 친구분이 계셨군요. 사람들 중엔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경우도 능히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예지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 또한 아예 무시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사실 <탄허록>에 보면 오늘날에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개인의 운명을 훨씬 뛰어넘는) 굵직굵진한 예언들이 아주 많고, 오늘날의 현실과도 잘 맞아떨어지는 부분들도 적잖아서 꽤나 놀라운 책인데, 가끔씩 곁들여 놓은 ‘개인의 운명‘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들까지 있어서 금세 다 읽게 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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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공이 부인을 왜 소박했습니까?

강태공은 생활이 어려울 때 소 잡는 일을 했다.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었다. 강태공이 80년을 수조垂釣, 즉 ‘낚시’를 하니 이를 답답해하던 부인이 도망갔다. 견디기 어려워서 떠난 것이다.

 

강태공은 훗날 문왕에게 발탁되어 부귀공명을 누렸다. 문왕은 그를 존위사부尊爲師傅 라고 높여서는 사부라 했다. 또 호위상부號爲尙父라 하여 호를 높은 아버지라 했다. 그래서 사상부師尙父라는 별호가 생긴 것이다.

 

그렇게 왕에게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던 어느 날 떠났던 부인이 태공을 다시 찾아왔다. 이때 태공은 부인에게 물을 한 동이 가져오게 한 다음 그 물을 땅에 쏟으라고 했다. 그리고 부인에게 물을 다시 쓸어 담으라고 했다. 그러자 부인이 대답했다.

 

“못 담겠습니다.”

 

이에 태공이 다음과 같이 말하며 거절했다.

 

“당신과 나는 바로 이와 같소.”

 

이 말은 들은 부인은 자살을 했다고 한다.(235∼236쪽)

 

 

 * * *

 

 

주매신周梅臣은 강태공과 반대로 떠난 부인을 다시 맞아했다는데 사실입니까?

주매신의 표맥漂麥이란 유명한 말이 있다. 보리멍석이 떠내려갔다는 이야기는 주매신의 일화다. 그는 일생을 무릎이 썩을 정도로 글만 읽은 선비인데 부인이 하루는 이웃 마을에 가면서 검은 구름이 곧 비를 몰고 올 것 같아 남편 주매신에게 부탁했다.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은데 만약 비가 오면 보리멍석을 거두어 주십시오.”

 

주매신은 “그렇게 하리다”라고 대답을 하고서 글을 계속 읽었다. 그런데 소나기가 내려서 보리멍석이 다 떠내려 가버렸다. 부인이 돌아와서 이 광경을 보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남편을 책망하며 개가해 버렸다.

 

얼마 후 주매신이 대과에 급제해서 군수로 발령받아 가는 길에 도망간 부인을 만났다. 그녀는 가난한 집에 개가를 했던지 산에서 나물을 뜯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주매신은 옛날의 고생을 위로하면서 부인을 데려와 다시 재결합해서 살았다고 한다. (236∼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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