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인류가 가지고 있는 가장 훌륭한 친구들 중 하나이다.

 - 조지 산타야나

 

 * * *

찰스 디킨스는 영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 중의 한명이지요. 영국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작가가 셰익스피어라면, 찰스 디킨스는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의 명성은 스물다섯 살 때 갑자기 '불꽃처럼' 하늘 높이 솟아오른 뒤 지금까지도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고 있지요.

 

셰익스피어를 두고 어느 한 작품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디킨스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스크루지 영감이 등장하는 작품 『크리스마스 캐럴』 하나만으로도 그는 이미 크리스마스를 새롭게 창조한 인물로까지 칭송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린이나 유아를 위한 작품을 쓴 작가는 아니지요.

 

그의 작품은 비교적 읽기가 쉽기 때문에 무척 대중적인 작가로 보이지만 실상은 아주 진지한 예술가로 대접받아야 마땅한 인물입니다. 디킨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때로는 '만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특징과 용모가 매우 부풀려지고 희화화 되곤 하지만, 그런 방식이야말로 디킨스가 아주 즐겨 사용하는 인물 조형 방법이자 인생을 폭로하는 중요한 장치나 방식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이런 대목들을 놓치게 되면 그를 자칫 오해하기 쉽지요.


(『위대한 유산』의 주인공, 핍)


디킨스의 작품 속에는 고아가 중심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으며, 부랑자나 죄수들을 비롯한 버림받고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이 꽤나 많이 등장합니다. 그건 바로 작가 스스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었기 때문이지요. 그가 맛본 어린 시절의 고독과 절망, 굴욕과 비참함이 한평생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의 불행을 아주 심오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그는 때때로 도스토예프스키와 거의 동급으로 평가받기도 하지요. 하지만 디킨스의 작품이 러시아 작가보다는 훨씬 덜 심각하며,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등 분위기도 훨씬 밝은 편입니다. 무엇보다 디킨스의 작품은 종교, 과학, 정치, 예술 등에 대해서 아주 초연하다는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와는 뚜렷이 구별됩니다.

 

디킨스는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무렵인 1812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때 잠깐 동안은 해군 경리국에서 일하던 아버지의 안정적인 수입 덕분에 매우 행복한 분위기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꾸만 빚을 져서 심각한 위기에 빠지자 '목가적인 시대'는 갑자기 끝나버렸고, 가족들이 모두 런던으로 이사를 떠난 뒤 홀로 '하숙'을 하며 몇 주 더 학교를 다녔던 디킨스는 이내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작은 짐 하나만 가지고 홀로 승합 마차를 타고 가족을 찾아가는 여정은 작가에게 깊은 상처로 각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우울한 여행을 그는 평생 잊지 못했다. 눅눅한 지푸라기 냄새도 그 기억에 들러붙어 있었다. "나는 사냥당한 짐승처럼 지푸라기에 싸인 채 발송된 것이다." 몇 년이 지나서 그는 괴롭게 술회했다. "승합마차 좌석에는 다른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혼자서 쓸쓸한 기분에 젖어 샌드위치를 씹었다. 가는 길 내내 비가 세차게 내렸다. 인생은 내가 기대하던 것보다 축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1017쪽)

 

디킨스가 홀로 런던에 도착해 보니 가족은 '누구라도 눈을 돌리고 싶을 만큼' 칙칙하고 누추하고 초라한 동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집안 형편은 나날이 비참해졌고 독이 오른 채권자들은 집으로 몰려와 모욕적인 말을 마구 퍼부어댔지요. 어린 디킨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재도구를 골라 전당포에 내다파는 일이 고작이었습니다. 열두 살이 된 디킨스는 결국 강기슭에 위치한 어두침침하고 쥐들이 우글거리는 구두약 공장에 고용되지요. 여기서 겪은 경험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그는 나중에 친구에게 이렇게 털어놓습니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그토록 쉽게 내버려지다니…… 아무도 나를 동정해 주지 않았다. 비범한 재능을 가졌고 머리 회전도 빠르며 의욕이 넘치고 섬세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상처받기 쉬운 아이였는데. 그런 나를 어디 평범한 학교에 들여보내 주려고 조금이라도 노력하든가-실제로 그럴 수 있었을 테니까."


(12살 때 구두약 공장을 다니던 시절의 데이비드 코퍼필드, 작가의 실제 경험 그대로를 담았다.)

 

이때 그가 경험한 공장 생활은 그의 작품들뿐 아니라 그의 삶에도 오래도록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가 그토록 어린 나이에 육체노동을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새겨진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심각했던지는 몇 해 전에 개봉된 영화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에서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불행은 구두약 공장 생활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주급 6∼7실링의 수입으로는 하숙비와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처지였는데, 그나마 버티던 아버지가 빚 때문에 체포되어 감옥에 투옥된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일요일을 손꼽아 기다리며 그런 비참함을 버텨냈습니다. 일요일이 되면 6마일을 걸어 마샬시 감옥에 가서 부모님과 형제자매들과 함께 '온갖 시름을 다 잊고'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토록 눈물겨운 이야기는 존 포스터가 쓴 방대한 분량의 《디킨스 전기》(1872∼1874)를 통해 자세히 살필 수 있지만, 디킨스가 쓴 자전적 전기인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여기서 찰스 디킨스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데이비드 코퍼필드』에서 구두약 공장을 다닐 때의 역경을 그린 대목은 <11장. 힘겨운 홀로서기>에 나오는데, 그 가운데 일부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그렇게 살아도 1주일에 6,7실링 가지고는 모자랐다. 그래도 나는 온종일 창고에서 일하고, 그 돈으로 1주일을 살아가야만 했다. 월요일 아침에서 토요일 밤까지, 누구의 충고도 없었고, 어떠한 조언도, 격려도, 위로도, 도움도, 어떠한 종류의 지원도 받지 못한, 거짓도 위선도 없는 곳이었다.

 

나는 너무 어렸고 철이 없었기에 내 생활을 꾸려갈 만한 능력이 없었다. 어린 내가 달리 어떻게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겠는가? 아침에 머드스톤 앤드 그린비 상점에 가는 도중, 빵집 앞에 내놓은, 반값에 파는 오래된 과자를 먹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점심 먹을 돈으로 과자를 미리 사먹어버릴 때도 있었다. 그런 때는 점심을 거르거나 롤빵 한 개, 아니면 푸딩 한 조각으로 요기를 했다.(190∼191쪽)

 

 - 찰스 디킨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11장. 힘겨운 홀로서기> 중에서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어릴 때 겪는 '온갖 고생담'은 눈물 없이는 읽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 아픈 이야기들로 빼곡하지만, 그 이야기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서 독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작가 자신이 직접 겪었던 어린 시절의 체험들이 도대체 얼마만큼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있기에 이토록 실감나는 이야기를 쓸 수 있었까 싶은 생각에 애처로운 생각이 들면서도 작가에 대해 감탄을 거듭하며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되지요. 태어나서 고작 12살때까지 겪은 '파란만장한' 이야기만 하더라도 벌써 이 소설이 200쪽을 훌쩍 넘어갈 정도이니, 어린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만 하더라도 얼마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을지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지요. 주인공이 갓 태어난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마침내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작가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될 때까지 만났던 수많은 인물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요.


이 소설을 읽는 재미가 오로지 '작가 찰스 디킨스의 드라마틱한 실제 삶'에 거의 대부분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만큼 크나큰 오해도 없을 듯합니다. 물론 이 방대한 소설의 상당 부분이 작가의 실제 삶을 깊게 투영한 건 맞지만, 그런 이야기가 소설에서 크나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요. 특히나 20대 중반부터 갑작스레 찾아온 작가로서의 놀라운 성공 과정이나 벼락출세한 작가의 화려한 모습들은 소설 속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을 완성할 때만 하더라도 작가의 나이는 고작 37세였고, 소설에 1인칭으로 등장하는 '나'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글을 쓰고 있는 소설 속 '지금'의 나이 또한 겨우 30대 중반쯤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주인공이 비교적 어린 나이인 20대 초반에 사랑하는 도라와 결혼식을 올리고 신접살림을 차릴 때쯤이면 이 소설은 벌써 740쪽을 훌쩍 지나면서 서서히 종반부로 치닫게 되지요. 그러나 주인공의 삶을 다루는 시기가 이처럼 아직 한창이나 다름없는 나이인 30대 중반으로 한정된다고 해서 작품 내용마저 철없는 10대와 20대 시절의 이야기에 치우쳐 있으리라고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비록 30여 년에 걸친 짧은(?)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이 작품 속에는 결코 적잖은 사람들이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주변에 머물면서 저마다 엄청난 사건들과 엮이면서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 더러는 아주 오래도록 살아 남아서 뒤늦게나마 주인공인 '나'와 '눈물겨운 상봉'을 겪기 때문이지요. 지난 날에 대한 온갖 추억과 회한과 상념들을 두루 떠올리면서 말이지요.

 

이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펜을 놓기 전에 다시 한 번 ㅡ 마지막으로 떠올려 본다.

(……)

빠르게 스쳐 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뚜렷이 보이는 얼굴은 누구일까? 아아, 그렇다, 이 얼굴들! 내가 속으로 그것을 물어보면 모두가 일제히 나를 뒤돌아 본다!(1006쪽)

 

 - 찰스 디킨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64장. 마지막 회상> 중에서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여느 이름난 장편소설들과는 사뭇 분위기부터 다릅니다. 대개 걸작으로 평가받는 '장편소설'들이 다루는 주제들부터 묵직하기 마련이고, 거대한 건축물을 마주 대하듯 '외관'에서부터 어떤 압되되는 분위기를 지니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요.


러시아의 대문호인 톨스토이도 찰스 디킨스를 무척 좋아했다고는 하지만 이 두 작가의 대표작인 『전쟁과 평화』와 『데이비드 코퍼필드』만 비교해 보더라도 그들은 달라도 너무 다르지요. 그러나 이 두 작품 속에서도 몹시 닮은 점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두 작품에 똑같이 등장하는 '주연급 청춘남녀가 철없이 저지르는 무대뽀 야반도주 사건'입니다. 사실 그들 두 커플은 자세히 살펴보면 용모나 성격까지도 쏙 빼닮았습니다. 심지어 두 여주인공이 도주할 때 남기는 '급하게 갈겨 쓴 편지'까지도 닮았습니다. 러시아 소설에선 오드리 햅번이 배역을 맡았던 나따샤와 돌로호프가 그 주인공이고, 영국 소설에선 에밀리와 스티어포스가 그런 역할을 떠맡았는데, 자세히 모르긴 해도 톨스토이가 『데이비드 코퍼필드』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지 싶습니다.

 

그러나 『전쟁과 평화』에는 숱한 인물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작가가 밝히고자 애썼던 '삶의 의미'에 언제나 전쟁과 평화, 역사와 우연, 종교와 정치 등과 같은 묵직한 주제들이 끈덕지게 들러붙었으나, 찰스 디킨스의 작품에서는 그런 무거운 요소들이 조금도 필요하지 않았다는 점이 달랐지요.


(『데이비드 코퍼필드』 삽화, 바닷가 뱃집에 패거티 씨와 에밀리 등이 오손도손 살고 있다.)


 

이 소설이 지닌 치명적인 매력 가운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과거에 대한 회상'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너무나 정확하게 되살려 내는 주인공의 비상한 기억력과, 그걸 너무나 매혹적으로 기술하는 작가의 솜씨일 듯합니다. 이 작품이 아무리 전기적인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작가가 이 정도로 세밀하게 '어린 시절의 온갖 추억'을 비디오처럼 생생하게 되살려 그려내고, 그런 회상 장면 자체까지도 놀랍도록 매혹적인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인생의 매 순간마다 우리의 눈앞을 스치듯 사라져가는 수많은 광경들과 감각들, 다시 말해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통해 우리의 뇌리에 저장되는 기억들을 이처럼 생생하게 되살려 놓은 작품을 일찌기 저는 접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소설 덕분에 저 역시 오래된 옛 추억들을 셀 수도 없을 만큼 되살려낼 수 있었습니다. 실로 오랫동안 '낡은 기억의 저장고'에서 먼지를 푹 뒤집어쓴 채 무질서하게 널브러져 있던 온갖 자질구레한 기억의 잡동사니들이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얼마나 자주 먼지를 털고 불쑥불쑥 솟아났는지는 일일이 셀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것들은 때로는 기적적으로 기억의 심연 속에서 한 순간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올랐으며, 그때마다 저는 그런 기억들을 어떤 식으로든 붙잡아 두기 위해서 한참이나 그걸 노트에 끄적거려야 했습니다.

 

프로이트가 가장 좋아한 소설이 『데이비드 코퍼필드』였다는 사실을 어디선가 발견하고 나서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 기억도 있습니다. 주인공 데이비드가 심리적으로 강렬한 충격을 받을 때마다 그는 '현실에서 비롯된 꿈'을 잠자리에 들어서도 내내 이어가는 버릇이 있는데, 그 이야기가 어찌나 사실적이면서도 생생했던지 '그래, 맞아, 나도 예전에 그런 비슷한 꿈을 자주 꾸었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인간 내면 심리에 대한 탁월한 연구결과를 내놓은 천재 심리학자 프로이트가 이 소설을 두고 얼마나 '자신의 경험'과 일일이 대조하면서 거듭 이 소설을 감탄하며 읽었을지도 능히 짐작됩니다.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에 담긴 이야기는 '기억의 본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독자들한테 끊임없이 과거를 회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매력적입니다. 디킨스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계급과 성()의 차이에서 오는 '관계의 불안정'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했는데, 이는 노동자 계급인 여주인공 에밀리를 유혹하는 스티어포스, 성녀 같은 아그네스에게 흑심을 품은 우라이아, 그리고 결혼 이후에도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관능적인 도라에서 정숙한 이성 아그네스에게로 차츰 관심이 옮겨가는 데이비드 코퍼필드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요.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인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오래 전부터 그 명성 만큼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좀처럼 쉽게 손에 잡히는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서머싯 몸이 <세계 10대 소설> 중에서도 최고라고 격찬한 작품이었으니 도대체 얼마만큼 대단한 작품인가 하는 궁금증이 늘 뒤따라 다녔지만, <호밀밭의 파수꾼>과 같은 작품에서는 이 소설을 읽고픈 열망을 한 순간에 싹 달아나게 만드는 문장이 소설의 첫머리에서부터 떡하니 등장하니 말이지요.


정말로 이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아마도 가장 먼저 내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끔찍했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우리 부모님이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태어나기 전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와 같은 데이비드 코퍼필드 식의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이야기들에 대해서 알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난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지가 않다.


그러나 어느 유명한 마술사 이름과 똑닮은 제목을 지닌 이 특별한 작품은 가끔씩 마술을 부리듯 독자들을 확 끌어당길 때도 없진 않았습니다. 지난 2008년 느닷없이 들이닥친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전세계가 공포에 휩싸였을 때 미국 의 워싱턴 포스트에서 작금의 경제난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추천받은 적이 있었는데, 온갖 이름난 경제 서적들을 다 제치고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유일하게 복수로 추천을 받았다는 깜짝뉴스가 떴으니 말이지요.


더군다나 그 책을 추천한 인물이 세계적인 대부호 빌 게이츠와 경영 구루로 널리 인정받는 피터 드러커였으니 다들  그 뉴스를 우스개로 치부할 수도 없었을 테지요. 그 두 사람이 이 책을 추천한 까닭은 바로 작품 속 인물인 미코버가  데이비드 코퍼필드에게 건넨 진심어린 충고 때문이었습니다.


"너도 알겠지만, 한 해 수입이 20파운드인데, 지출이 19파운드 19실링 6펜스면 결과는 행복이고, 한 해 수입이 20파운드인데, 지출이 20파운드 6실링이면 결과는 비참하지."


톨스토이는 “디킨스 소설에 나오는 인물은 모두 내 친구”라면서 디킨스를 19세기 최고의 문호라 평하고 디킨스 초상화를 서재에 걸어 놓을 정도로 존경했다고 하지요. 그가 디킨스의 작품을 "영문학의 백미"라고 칭송한 것도 작가 특유의 옹골차면서도 눈물겹도록 놀라운 이야기 솜씨 때문이었습니다.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양적으로 어마어마하게 긴 장편소설이다. 아무리 세계 걸작으로 이름 높은 작품이라도 이 정도로 길면 두세 군데는 이야기가 느슨해지기 때문에, 독자는 지루해도 다음에 올 절정을 기대하며 꾹 참고 책장을 넘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그러한 곳이 전혀 없다. 어느 부분을 골라 읽어도 독특한 재미가 있고, 계속 읽으면 읽을수록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책을 놓을 수 없게 된다. 이야기에 이끌려가는 게 아니라 뒤쫓아 가는 것이다. 늘어지는 곳 없이 팽팽하게 조여진 소설, 이것이 이 작품이 많은 독자를 사로잡은 까닭이다. 인생의 고뇌와 비통을 날실로 삼고, 오락성과 환희를 씨실로 삼아 작품 전체를 옹골지게 엮어냈기 때문이며, 눈물과 더불어 웃음이 절묘하게 얽혀서 혼연하고 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1109쪽)

 

 - 찰스 디킨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찰스 디킨스 생애와 문학> 중에서


이제 『데이비드 코퍼필드』와도 다시 작별할 시간입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들 가운데 꽤나 많은 사람들을 저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듯합니다. 가장 먼저 페거티와 그의 오빠가 떠오릅니다. 쌀쌀맞던 의붓아버지 머드스톤과 그의 누나도. 학창시절부터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스티어포스와 트레들스도. 페거티 씨네 뱃집에서 의좋게 살았던 에밀리와 햄과 거미지 부인도. 구두약 공장에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오래도록 함께 한 미코버 부부도. 5박 6일 동안의 고난의 행군 끝에 만난 대고모 트롯우드도. 캔터베리의 대성당 근처에 살았던 우라이아 힙과 아그네스까지도 벌써 그립습니다. 아직도 사전 편찬에 계속 몰두하고 있을 것만 같은 스트롱 박사 부부도 그립고, 도라와 집(애완견 이름)도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스티어포스 부인과 로사 다틀과 하인 리티머는 어떻게 생겼을까. 에밀리의 친구 마사와 미스 모처의 실제 모습도 여전히 궁금합니다. 트레들스의 아내가 된 소피와 여러 발랄한 처제들까지도...

 

이제는 그들과 헤어져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만날 그때까지 모두들 부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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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KSUIT 2022-01-14 1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보려고 주문했어요.감사합니다

oren 2022-01-14 19:22   좋아요 0 | URL
와우~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독자가 되신 것을 격하게 환영합니다!!
 

러스킨은 인류를 노동자의 종족과 놀이하는 종족으로 대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자는 땅을 갈고 물건을 만들고 집을 짓는 등 생활 필수품을 제공하는 자들이다. 반면에 후자는 일을 하지 않아 시간적 여유가 많으므로 레크리에이션을 필요로 하는데 노동자의 종족을 자신들의 가축으로 혹은 인형으로 혹은 죽음의 게임에 투입하는 졸(卒)로 여긴다는 것이다.

  -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 * *


지금으로부터 대략 30년쯤의 시간이 더 흐른 뒤, 어느 누가 문득 고개를 돌려 2021년을 되돌아 본다면 그 사람은 과연 올해 일어난 별의별 사건들 가운데 무엇을 가장 먼저 떠올릴까요? 코로나19? 비트코인? 테슬라? 대장동? 화천대유? 물론 이런 굵직굵직한 이슈들도 빠질 순 없겠지만, 아무래도 최우선순위는 오징어게임이 차지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이 드라마는 삽시간에 전세계를 점령했으며, 예전에는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온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가 이토록 엄청난 인기를 끌어모은 원천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요? 이미 해외의 수많은 미디어들이 이 기괴한 9부작 드라마의 흥행 요인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해 왔지만, 정작 이 드라마 속에 가장 깊숙히  감춰진 핵심들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왜냐하면 이 드라마의 인기를 로켓처럼 하늘 높이 쏘아올린 거대한 추진 에너지 가운데 하나는 분명 '놀이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놀이하는 인간'은 라틴어로는 호모 루덴스라고 하는데, 네덜란드가 배출한 세계적인 역사학자 요한 호위징아(1872∼1945) 덕분에 널리 확산된 개념이지요. 그는 『호모 루덴스』보다 훨씬 앞서 출간한 책 『중세의 가을』로도 유명세를 떨쳤는데, 그 책의 핵심은 <험난하고 참담한 세상을 부정하는 길> 대신에 <보다 더 아름다운 삶을 꿈꾸기> 위해 중세의 기사도 정신과 궁정 연애가 발달했다는 놀라운 분석을 펼칩니다.


만약 지상의 현실적인 삶이 절망적일 정도로 비참한데도 그 세상을 부정하기 어렵다면 결국 남은 한 가지는 빛나는 환상의 꿈나라에 살면서 그러한 이상의 황홀 속에서 지저분한 현실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수밖에 없을 테지요. 요한 하위징아는 중세의 기사도와 궁정 연애가 바로 그런 연유로 탄생했음을 밝혔는데, 이것을 「호모 루덴스」의 관점으로 바꿔 말하면 '진지함의 세계'에서 벗어나 '놀이의 세계'로 들어갈 때 강력한 새로운 문화가 탄생된다는 것입니다.


하위징아는 자신이 쓴 작품이 후일 성공작으로 평가받게 된다면 자신의 기발한 상상력 덕분이라고 말했는데, 어쩌면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만든 황동혁 감독이야말로 역사학자 하위징아가 발견했던 '놀이의 정신'을 자신만의 '기발한 상상력'과 결합시킴으로써 요한 하위징아 못지않은 거대한 성공 스토리를 써낸 게 아닌가 싶습니다.


도대체 「호모 루덴스」라는 책에서 주장하는 바가 무엇이길래 그것이 <오징어 게임>과 결부되는 걸까요? 까마득한 옛날인 1938년에 출판된 「호모 루덴스」는 인류 문화의 발생 단계에서부터 현대 문명에 이르기까지 '놀이'가 얼마만큼 광범위하면서도 뿌리 깊게 인간의 문화 속에 두루 스며들어 있는지를 탁월하게 묘파한 걸작이지요.


사실 인류는 오랫동안 자기 자신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라고 불러왔지요.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인류는 그리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게 밝혀졌고,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인류를 "호모 파베르(Homo Faber: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라고 바꿔부르기 시작했지요. 인간의 본질을 도구를 사용하고 만들 줄 아는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관은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주장했는데, 과학도서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정도로 아름다운 그의 문장은 읽어볼수록 깊은 통찰이 느껴지지요.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한 세기가 흘렀는데 이제서야 우리는 그것이 야기한 심층적인 동요를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그것이 산업에 일으킨 혁명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조차 뒤집어 놓았다. 새로운 생각들이 떠오른다. 새로운 감정들이 개화하고 있다. 수천 년 후에 과거를 되돌아보고 그 주요한 선들만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면, 전쟁과 혁명들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아직 기억한다고 해도 별 것 아니게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증기기관 그리고 거기에 수반되는 각종 발명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아마도 우리가 청동이나 석기(石器)에 대해 말하듯이 말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한 시대를 정의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가 모든 오만에서 벗어나 인간종을 정의하기 위해 역사시대와 선사시대가 우리에게 인간과 지성의 항구적인 특성으로 제시하는 것에 엄밀히 머물기로 한다면, 우리는 인간을 아마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 말하지 않고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잠깐만 둘러보더라도 우리는 이미 수많은 도구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신체의 일부처럼 꼭 움켜쥐고 다니는 스마트폰 하나만 보더라도 원시인들은 감히 상상도 못했던 '마법의 도구'를 사용하는 셈이지요. 인간은 이미 고성능 컴퓨터를 이용하여 인공지능을 활용하기 시작했으며 디지털 '가상 인간'을 창조하는 지경에 이르렀지요.일찌감치 고대 그리스의 비극시인 소포클레스는 불멸의 비극작품 『안티고네』를 통해 이토록 위험천만한 '인류의 위대성'을 절묘한 싯구절로 노래한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많다 하여도
사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네.

사람은 사나운 겨울 남풍 속에서도
잿빛 바다를 건너며 내리 덮치는
파도 아래로 길을 연다네.
그리고 신들 가운데 가장 신성하고
무진장하며 지칠 줄 모르는 대지를
사람은 말馬의 후손으로
갈아엎으며 해마다, 앞으로 갔다가
뒤로 돌아서는 쟁기로 못살게 군다네.

그리고 마음이 가벼운 새의
부족들과 야수의 종족들과
심해 속의 바다 족속들을
촘촘한 그물코 안으로 유인하여
잡아간다네. 총명한 사람은.
사람은 또 산속을 헤매는 들짐승들을
책략으로 제압하고,
갈기가 텁수룩한 말을 길들여
그 목에 멍에를 얹는가 하면,
지칠 줄 모르는 산山소를 길들인다네.

또한 언어와 바람처럼 날랜 생각과,
도시에 질서를 부여하는 심성을 사람은 독학으로
배웠다네, 그리고 맑은 하늘 아래서 노숙하기가
싫어지자 서리와 폭우의 화살을 피하는 법도.
사람이 대비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 대비 없이 사람이 미래사를 맞이하는 일은
결코 없다네. 다만 죽음 앞에서 도망치는
수단을 손에 넣지 못했을 뿐이라네.

하지만 사람은 고통스런 질병에서
도망치는 방법은 이미 궁리해냈다네.

 - 《안티고네》332∼372행


이처럼 호모 사피엔스 또는 호모 파베르로 불리던 인간이 언젠가부터 호모 루덴스로 불리기 시작합니다. 인류에게 이 새로운 호칭을 붙인 인물이 요한 하위징아였습니다.


인간과 동물에게 동시에 적용되면서 생각하기와 만들어내기처럼 중요한 제3의 기능이 있으니, 곧 놀이하기이다. 그리하여 나는 호모 파베르 바로 옆에,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수준으로, 호모 루덴스(Homo Ludens:놀이하는 인간)를 인류 지칭 용어의 리스트에 등재시키고자 한다.(21쪽)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행위를 '놀이'라고 부르는 것이 곧 고대의 지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결론을 천박하다고 여겼지요. 하위징아는 놀이 그 자체가 문화적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요한 하위징아가 『호모 루덴스』라는 책에서 놀이에 대해 어떤 주장을 펼쳤고, 바로 그 놀이 정신이 얼마만큼 치밀하게 『오징어 게임』속에 녹아들어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지요.


우리는 누구나 어린 시절에 아주 다양한 놀이들을 즐기며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가장 단순한 숨바꼭질부터 시작하여 공기놀이, 딱지치기, 땅따먹기, 구슬치기, 비석치기, 자치기를 지칠 줄도 모르며 즐겼고,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오징어 게임뿐 아니라【우리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를 목청것 부르며 놀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놀이들은 비단 우리 인간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동물들도 인간들처럼 놀이를 즐기기 때문이지요.


강아지들의 즐거운 놀이를 유심히 지켜보면 거기에 인간의 놀이에 깃든 본질적 측면이 모두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강아지들은 어떤 일정한 자세와 동작을 취하면서 상대를 놀이에 끌어들인다. 네 형제의 귀를 물어서는 안 된다. 물더라도 세게 물어서는 안 된다 등의 규칙을 지키면서 즐겁게 논다. 강아지들은 짐짓 화난 체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인데 강아지들은 이렇게 놀면서 엄청난 재미와 즐거움을 느낀다. 강아지들이 이처럼 뛰어노는 것은 동물 놀이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다.(30쪽)



동물들의 놀이 본능에 대해서는 16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도 날카롭게 통찰한 적이 있었지요. 그는 원숭이, 코끼리, 까치, 개 등의 학습능력이 얼마만큼 놀라운지를 감탄을 거듭하며 자세히 소개한 끝에 특별히 고양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입니다.


내가 고양이와 희롱하고 있자면,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소일하는 것인지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소일하는 것인지 누가 알 일인가?


요한 하위징아는 강아지의 새들의 놀이 본능과 인간에게 내재된 놀이 본능들을 깊이 탐구한 끝에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놀이는 문화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29쪽)


놀이가 이토록 놀라운 뿌리를 지니고 있었으니, 「오징어 게임」을 시청한 수억 명의 지구인들이 단박에 그 드라마의 매력에 풍덩 빠져든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지요. 문화권이 아무리 서로 다르더라도 인간이 즐기는 놀이는 보는 즉시 강력한 공감의 마력을 불러일으키니 말이지요. 인류가 창조한 그 어떤 문화보다도 더 뿌리가 깊은 '놀이'를 주된 소재로 드라마를 만든 황감독은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놀이의 본질을 깊이 꿰뚫어본 걸까요?


놀이를 동물이나 어린아이의 생활에 나타나는 행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기능으로 인식할 때, 비로소 생물학과 심리학의 경계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문화를 예의 주시해 보면 놀이가 문화의 정립 이전부터 당당한 크기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고, 이어 선사 시대의 초창기부터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문화를 수반하면서 그 속에 침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세계 어디에서나 놀이가 ‘일상’ 생활과는 구분되는 잘 정의된 특질을 가진 행위로 정립되어 있음을 발견한다.(34쪽)



이처럼 놀이의 요소는 인간 사회의 온갖 중요한 행위들 속에 놀라우리만치 깊숙히 스며들어 있지만,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문화인류학적 탐구가 아닌 만큼 여기서 다시 고개를 돌려 오징어 게임이 펼쳐지는 그 이름모를 섬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전세계인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은 그 마법 같은 드라마 속에 '놀이의 특징들'이 얼마만큼 절묘하게 버무려져 있는지를 자세히 파헤칠 필요가 있으니까요.


요한 하위징아가 놀이의 일반적 특징으로서 가장 먼저 내세운 건 자발성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지요. 명령에 의한 놀이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며, 기껏해야 놀이를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와 동물은 재미있어서 놀이를 하는 것이며, 바로 거기에 그들의 자유가 깃들어 있지요. 그런데 오징어 게임은 어떤가요? 그 드라마에서는 놀이의 첫 번째 특징들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지요.


오징어 게임에 뛰어든 456명의 참가자들은 (유일한 예외인 오일남 할아버지를 제외하면) 모두가 하나같이 막다른 골목에 내몰려 어쩔 수 없이 그 게임에 참가하지요. 물론 그들은 문틈에 낀 초대장을 보고 자발적으로 그 게임에 참가하는 형식을 띠고 있지만 진짜 속사정은 전혀 다르지요. 온사방을 둘러봐도 희망이라고는 더이상 찾을 수 없을 때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 탈출구로 그 게임에 참가하게 됩니다. 이토록 자발적이면서도 비자발적인 게임은 상상하기가 어려울 정도이지요. 또한 그들은 그 잔인한 게임을 중도에 그만둘 수도 있었지만 끝끝내 자발적으로(!) 다시 그 게임을 계속 하기 위해 되돌아오지요. 이 얼마나 지독한 아이러니인가요?



사정이 그렇기는 하지만, 어른이나 책임 있는 사람의 경우, 놀이는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는 기능이다. 놀이는 피상적인 것이다. 놀이의 필요라는 것은 그 놀이를 즐기고자 하는 욕망에 정비례한다. 놀이는 언제라도 연기되거나 정지될 수 있다. 그것은 결코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자유 시간'에 한가롭게 할 수 있는 행위이다.(42쪽)


『호모 루덴스』를 쓴 이 놀라운 역사가의 문장을 읽노라면 마치 그가 2021년에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를 일찌감치 미리 내다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이지요.


놀이의 두 번째 특징은 '일상적인' 혹은 '실제' 생활에서 벗어난 행위라는 점입니다. 놀이는 '실제' 생활에서 벗어나 그 나름의 성향을 가진 일시적 행위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모든 아이는 놀이가 '∼인 체하기'이며 '오로지 재미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지요. 놀이는 '일상적' 생활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필요와 욕구의 충족이라는 명제 바깥에 있으며, 그래서 생활의 욕구 과정을 방해하지요.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도 이러한 특징은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그들은 일상생활과는 너무나 멀리 벗어난 어느 무인도에서 그 잔인한 게임을 수행하지요. 그들이 게임에 참가하기 위해 승합차에 탑승한 직후부터 그들은 철저하리만큼 현실과 분리되며, 그 게임이 벌어지는 무인도 속 공간은 심지어 뚜껑이 덮히면 드론으로도 수색이 불가능할 정도로 이 세상과 완벽히 차단되지요. 이 드라마가 얼마만큼 치밀하게 '놀이의 특징'을 극대화한 작품인지는 이런 대목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놀이는 일단 시작되면 적절한 순간에 종료되며 시간의 제약보다 더 놀라운 것은 공간의 제약입니다. 모든 놀이는 운동성을 갖고 있고, 그 놀이가 벌어지는 공간은 따로 마련되지요. 드라마 오징어 게임 속에서 펼쳐지는 모든 게임들은 거의 대부분 '공간의 제약'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게임의 참가자들에게는 퇴로조차 철저히 차단되며, 살벌한 줄다리기 게임은 공포스러운 높이 위에 설치된 데다가 벼랑끝처럼 단절된 공간 속에서 펼쳐지며, 징검다리 게임에선 한발짝만 잘못 내디뎌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공간 제약'의 극치를 보여주지요.



놀이터 내부에는 특정하면서도 절대적인 질서가 지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이의 또 다른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놀이는 자체적으로 지고하고 절대적인 질서를 요구한다. 이런 질서에서 조금이라도 일탈하면 그것은 "게임을 망쳐 버리고", 그 특징을 박탈해 버리고, 그리하여 무가치한 것이 되어 버린다. 놀이는 이처럼 질서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미학의 한 부분이 된다. 놀이는 아름다워지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런 미학적 요소는 질서정연한 형태를 창조하려는 충동과 동일한 것인데, 놀이의 모든 측면에 스며들어가 있다.(46쪽)


그렇습니다. 오징어 게임 속 풍경만큼 '질서'가 놀이 속에 극명하게 드러나 있는 경우도 보기 어렵습니다.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표시된 가면을 쓴 '진행요원'들은 게임의 질서를 상징하는 핵심이지요. 세상에 그 어떤 놀이라도 총을 든 진행요원이 게임의 질서를 유지하는 경우는 없는 법이지요. 그런 무시무시한 통제를 보여주는 장면들이야말로 '놀이는 절대적인 질서를 요구한다'는 명제에 더없이 충실한 설정이며, 오징어 게임 속에 숨어있는 놀라운 통찰들을 다시 한번 드러냅니다.


놀이에서 또다른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건 긴장의 요소입니다. 긴장은 불확실성과 우연성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놀이하는 사람은 어떤 것이 진행되고 추진되기를 바라며, 자신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기를 바라지요.


오징어 게임에서 긴장의 요소를 가장 잘 드러낸 장면은 단연 설탕뽑기 게임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인공 성기훈이 우산 모양을 완성하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해서 혀로 핥는 모습은 오징어 게임을 대표하는 명장면으로 꼽히지요. "놀이는 긴장이다"라는 요한 하위징아의 표현이 설탕뽑기에서처럼 잘 녹아드는 사례도 찾기 어렵습니다.


놀이의 세계에서 규칙을 위반하거나 무시하는 자는 '놀이 파괴자'가 됩니다. 놀이 파괴자는 놀이를 잘못하거나 놀이를 속이는 자보다 죄질이 더 무겁습니다. 사회는 게임을 망치는 자보다는 게임을 속이는 자에게 훨신 관대합니다. 오징어 게임 속에서도 게임을 속이는 자들은 그다지 큰 비난을 받지는 않지요. 그들은 게임 자체를 파괴하려는 외부의 침입자보다는 훨씬 관대하게 받아들여집니다.


놀이는 예외적이고 특별한 지위를 인정받습니다. 이것은 '우리만'의 놀이이고 '남들'은 끼지 못하게 만들지요. 이렇게 경계를 둘러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들'이 우리의 경계가 아닌 저기 '바깥'에서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은 현재로서 우리의 관심사가 되지 못합니다. 원시사회에서는 어린 소년이 남성 공동체에 입회하는 성인식 대축제 동안에 부족 내의 모든 불화가 일시적으로 중지된다고 합니다. 신성한 놀이-계절을 위하여 이처럼 정상적 사회 생활을 일시적으로 중지하는 것은 발전된 문명 사회에서도 그 흔적을 다수 발견할 수 있지요.


고대 그리스에서는 전쟁 중에도 신성한 축제기간 동안에는 전쟁을 멈출 정도였지요. 기원전 480년에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던 스파르타의 300 전사 이야기 속에도 축제와 전쟁을 구분하고자 노력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뿌리깊은 전통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이 이렇듯 레오니다스와 그의 군대를 먼저 내보낸 것은 동맹군들이 페르시아에 부역하는 측에 가담할 우려가 있어서 이를 막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카르네이아 제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 축제가 끝나는 대로 그들은 수비대만 남겨두고 전군을 이끌고 신속히 구원하러 갈 참이었다. 그들은 테르모필레 전투가 그렇게 빨리 결판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고, 그래서 선발대만 내보냈던 것이다.(740쪽)


오래 전에 읽었던 헤로도토스의 『역사』속에서 이런 구절을 다시 찾아내느라 적잖은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2021년에 탄생한 기념비적 드라마 오징어 게임 덕분에 이토록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을 직접 소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몹시 기쁩니다. 이쯤에서 다시 『호모 루덴스』에 담긴 하위징아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지요.


사실 축제와 놀이의 관계는 아주 밀접하다. 둘 다 일상 생활의 정지를 요구한다. 둘 다 환희와 즐거움이 지배하지만, 축제 또한 진지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환희와 즐거움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둘 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진정한 자유에다 엄격한 규칙을 가미한다. 간단히 말해서, 축제와 놀이는 주된 특징들을 공유한다.(66쪽)


원시 사회의 남자들은 축제 기간 동안 아무 데나 돌아다니고 축제의 피크 동안에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유령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남자들이 유령의 의례를 연출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들은 유령의 가면들을 조각 · 장식했고, 직접 사용했으며, 사용한 후에는 여자들로부터 감추어 놓았다. … 그 예식에 처음 참여하는 사람들은 황홀, 가짜 광기, 전율, 청년다운 자부심 따위를 교대로 느꼈다. 또한 여자들도 완전히 속아 넘어간 건 아니었다. 그들은 이런 저런 가면 뒤에 누가 숨어 있는지 잘 알았다.(68쪽)


이런 이야기를 읽노라면 한국만의 고유하고도 독창적인 놀이를 주된 드라마 장치로 엮어낸 오징어 게임이 단번에 서양 최대의 축제 가운데 하나인 할로윈 축제와 그토록 긴밀하게 찰떡궁합을 이룬다고 해도 그다지 놀랍지 않습니다.


"원시 부족의 사람들은 놀이 중의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역할에 몰두하는 훌륭한 배우이다. 또 어린이처럼 훌륭한 구경꾼이다. 진짜 사자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사자로 분장한 인물이 포효하면 금방 죽을 것처럼 겁을 집어 먹는다."(69쪽)






현대인들은 멀리 떨어진 것과 낯선 것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 가면과 위장에 대한 이해만큼 현대인으로 하여금 원시 문화를 이해하게 해주는 것도 없다. 오늘날의 교양인들에게도 가면은 그 무서운 힘을 전달한다. 그 가면에 종교적 감정이 전혀 부여되어 있지 않은데도 말이다. 가면 쓴 인물의 광경은 우리로 하여금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 더 이상 햇빛이 지배하지 않는 달빛의 세계로 들어가게 한다. 그것은 우리를 원시인, 어린아이, 시인의 세계, 즉 놀이의 세계로 안내한다.(74쪽)


대체로 놀이라는 행위는 그 자체로 시작하여 그 자체로 끝이 나지요. '중요한 건 승부가 아니라 게임이다'라는 속담은 놀이의 무목적성을 잘 보여주지요. 객관적으로 말해서 놀이의 결과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사소한 문제이지요. 그러나 오징어 게임에서는 이런 놀이의 특징이 완전히 전복되지요. 그들이 벌이는 게임의 결과는 매번 '사느냐, 죽느냐'로 결판이 났으니 말이지요. 사실 최종상금 456억원이라는 엄청난 돈은 목숨을 건 사투 끝에 얻어지는 일종의 덤일 뿐이라는 느낌마저 들지요. 승리로부터 얻는 보상이 제아무리 크더라도 그런 승리를 얻기까지 치른 댓가가 너무나 가혹하다면 승리의 달콤함조차 참을 수 없이 가볍게 여겨지는 법이지요.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하여' 놀이하고 경쟁한다. 놀이하고 경쟁하는 목표는 첫째도 둘째도 승리이다. 하지만 승리를 누리는 방식은 아주 다양하다. 가령 집단적으로 축하하는 승리는 장엄, 칭송, 기립박수가 뒤따른다. 승리의 열매는 명예, 존경, 위신 등이다. 그러나 승리에는 명예 이상의 것이 걸려 있다. 모든 게임에는 부상이 걸려 있다. 그것은 물질적 · 상징적 가치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상적 가치일 수도 있다. 그 부상은 황금 잔, 보석, 왕의 딸, 실링 화 한 잎, 나아가 놀이하는 사람의 목숨, 전 부족의 안녕일 수도 있다.(115쪽)


놀이에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행위 중 하나는 부정행위 즉 속임수이지요.그러나 원시 문화는 현대인의 도덕적 판단을 무시하는 듯합니다. 신화 속의 많은 영웅들도 기만술이나 외부의 도움으로 승리를 거두지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뒷세우스는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를 함락했고, 펠롭스는 오이노마우스의 수레꾼에게 뇌물을 먹여 바퀴 축에다 왁스를 바르도록 한 뒤 전차경주에서 승리하고, 이아손과 테세우스는 메데아와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그들에게 부과된 과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지요.


『마하바라타』의 카우라바스는 주사위 놀이에서 속임수를 써서 승리한다. 프레야는 보탄을 속여서 랑고바르드족에게 승리를 안겨 준다. 에다 신화의 아제 신족은 거인들에게 한 맹세를 깨뜨린다. 이 모든 경우에서, 상대방을 속여 이기는 사기 행위는 그 자체로 경쟁의 주제 혹은 새로운 놀이 주제가 되었다.(118쪽)




『마하바라타』에서 세상은 시바 신이 왕비와 함께 노는 주사위 게임으로 상징되어 있다고 합니다. 게르만 신화도 신들이 놀이판 위에서 노는 게임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신들이 주사위를 가지고 놀이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세계의 질서가 고정된다고 합니다. 기원전 8세기에 쓰여진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를 읽어보면 인간들의 전쟁 또한 신들의 전쟁 놀이를 대신해 주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지요.


『일리아스』를 맹렬히 비판한 덕분에 독일 철학자 니체로부터 '유럽이 낳은 예술의 가장 강력한 적'이라고 불렸던 플라톤 역시 인간 세계를 신들의 놀이를 놀아주는 자로 비유한 적이 있었지요. 그는 『법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만이 최고의 진지함을 행사할 수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놀이를 놀아 주는 자이고 그것이 그의 가장 좋은 역할이다. 따라서 모든 남녀는 이에 따라 생활하면서 가장 고상한 게임을 놀이해야 하고 지금과는 다른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인생은 놀이처럼 영위되어야 한다. 일정한 게임들을 놀이하고, 희생을 비치고, 노래하고 춤춰야 한다. 이렇게 하면 인간은 신들을 기쁘게 할 것이고, 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것이며, 경기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다."(62쪽)

오징어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 역시 자신이 장기판 위의 말인지 아닌지에 관해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누지요. 그들 스스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실상 그들은 VIP들의 놀이 본능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존재들이었지요. 영국의 사회비평가 존 러스킨이 말한 '가진 자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오징어 게임에서 너무 정곡을 찔렀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러스킨은 인류를 노동자의 종족과 놀이하는 종족으로 대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자는 땅을 갈고 물건을 만들고 집을 짓는 등 생활 필수품을 제공하는 자들이다. 반면에 후자는 일을 하지 않아 시간적 여유가 많으므로 레크리에이션을 필요로 하는데 노동자의 종족을 자신들의 가축으로 혹은 인형으로 혹은 죽음의 게임에 투입하는 졸로 여긴다는 것이다.(205쪽)


천진난만하던 어린 시절에 그저 아무런 생각없이 신나게 즐겼던 좁은 동네 골목길에서의 온갖 사소한 놀이들이 2021년에 공개된 드라마 한 편 때문에 전세계 사람들이 난리법석을 피울 만큼 세계적인 유행이 되어버린 이 기묘한 상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과 충격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분석가들이 <오징어 게임>을 두고 한류문화의 세계적 확산을 상징하는 대사건으로 규정하기도 하고요.


그러나 6,70년대 몹시 가난하고 못 살던 시대에 동네 꼬마녀석들이라면 누구라도 즐겼던 그 천진난만한 게임들이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재연되는 모습은 처절하리만치 잔인한 생존 게임으로 더 도드라져 보이게 만든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오징어 게임의 이런 스토리 라인이야말로 코로나 펜데믹 사태 등으로 점점 더 삶의 벼랑끝으로 내몰린 우리네 이웃들의 고달픈 삶에 대한 거대한 메타포임을 깨닫게 만들지요.


황동혁 감독은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사회의 승자가 패자들의 시체 위에 서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 패자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가 오랜 세월 각고의 노력끝에 완성한 9부작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희비가 교차하는 호모 루덴스의 오래된 운명적 비극을 21세기에 또다시 명징하게 부각시킨 작품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이 놀라운 드라마는 어쩌면 우리들의 천진난만한 예상보다 훨씬 더 질긴 생명력을 지닌 드라마로 살아남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해 봅니다. 이토록 멋진 작품을 만든 제작진과 배우들께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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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1-25 00: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렌 님, 오징어 게임의 잔인한 서바이벌 게임이 싫어서 조금 보다가 멈추고 다신 안 보지만
놀이하는 인간에 대한 통찰은 맞장구치고 싶네요.
고전적인 우리 옛놀이가 등장하여 추억을 불러주기에 오징어게임이 재밌다고들 하더군요.
달고나가 나오는 편을 보면서 저도 추억이 소환되었더랬어요. 침을 발라 바늘을 대는 게 신의 한 수^^
집에서 쪽짜 해먹다가 태워먹고 그랬는데요 ㅎㅎ
얼마전에 청정바지락에 가서 들깨수제비 먹었어요. 진짜 맛났어요. 김치도 완전 맛났고요.^^
유튜브로 다시 보겠습니다. 알찬 자료 꾸준히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oren 2021-11-29 22:38   좋아요 1 | URL
<오징어 게임>은 장르상 호불호가 제법 나뉘는 드라마 같아요. 뜻밖에도 이런 종류의 드라마가 싫다면서 보다 말았다는 분들이 꽤나 많더라구요.^^ 저는 어릴 때 초등학교 4학년까지는 우리 마을에 있는 <감천분교>엘 다녔는데, 우리 동네에서 그 드넓은(!) 분교 운동장만큼 신나게 뛰어놀 만한 장소가 없었더랬지요. 물론 마을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던, 조상님들이 잠들어 계신 ‘뭉미‘(오래 묵은 묘의 오리지널 경상북도 사투리)에서도 레슬링 비슷한 놀이를 즐기며 엄청 뒹굴고 놀았지만, 학교 운동장만큼 훌륭한 놀이터는 없었지요. 거기서 축구, 야구, 땅따먹기, 닭다리싸움, 씨름(철봉 앞에 모래사장이 있었지요.), 기마전, 말타기 등등 안 해본 게임이 없을 정도인데, 그 가운데서도 단연 최고의 게임이 <오징어 게임>이었어요. 그 당시 우리들은 그 게임을 ‘익가 다리‘라고 불렀지요. 오징어의 일본 발음이 익가(いか [烏賊])였기 때문이었죠. 익가 다리 한 판 하자고 하면 누구 하나 마다하는 아이들이 없었고, 지금 생각해도 서로 이기기 위해 참 격렬하게 싸우며 놀았던 기억이 생생해요. 1970년 전후에 허구헌 날 즐겼던 그 게임을 새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그걸 무려 50년 만에 넷플릭스 드라마로 다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그 드라마가 더욱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아요... 오징어 게임 이야기는 이만 하고요.. <청정 바지락 칼국수> 가보셨군요!! 들깨수제비, 열무김치, 배추김치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 정도로 맛깔나긴 하지요? 언제 들르더라도 실망하는 법이 없는, 참 변치 않는 맛집이에요.^^

프레이야 2021-11-29 23:20   좋아요 1 | URL
네. 진짜 맛났어요. 건강하고 깔끔한 맛요 ㅎㅎ 오징어 게임은 저는 해 본 적도 하는 걸 본 적도 없어요. 격렬한 몸싸움이 발어지니 주로 남자아이들 놀이였나 봐요. 아무튼 참 엄청난 트랜드입니다. ^^.
 


이 거대한 작품 속에서 만은 20세기의 사상을 주름잡아 온 십여 가지의 주제와 문제들, 가령 정신분석과 영성주의, 예술, 질병, 죽음을 서로 연결시키는 연결고리, 아인슈타인이 말한 시간의 상대적 속성, 서구인 특히 중산층 서구인들의 정신 상태, 예술가와 사회의 관계, 제대로 된 인간 교육 등을 폭넓게 다룬다. 만의 특별한 재능은 이런 수준 높은 사상, 등장인물들의 창조, 소설 속 분위기의 설정을 잘 종합한다는 것이다.

 - 클리프턴 패디먼

 

 * * *


안녕하세요? 오늘은 토마스 만의 대표작 『마의 산』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토마스 만은 1875년 독일의 북부도시 뤼벡에서 부유한 곡물상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한자동맹의 중심도시인 뤼벡에서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자란 토마스 만은 자전적 소설인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속의 이야기처럼, 아버지에게서는 엄격하고 철두철미한 시민적 기질을 물려받았고, 어머니에게서는 예술적인 기질을 이어받았습니다. 


독일 북동부에 위치한 뤼벡은 13세기 무렵만 하더라도 '한자동맹의 여왕'으로 불리며 독일무역의 중심지였던 곳이지요. 트라베 강 상류 연안에 위치한 이 도시는 토마스 만의 고향이자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긴 작품인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의 배경으로도 유명합니다. 뤼벡 시내에는 아직도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의 주무대이자 토마스 만 집안의 소유였던 대저택이 남아있다고 하지요.


저도 2014년 여름에 17일 동안 독일의 여러 도시들을 자동차를 몰고다니며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드레스덴에서 함부르크로 이동할 때 이 유명한 독일의 항구도시를 쏙 빼놓고 지나친 게 얼마나 후회스러운지 모른답니다. 아무튼 뤼벡에서 태어나 뮌헨으로 이주했던 토마스 만의 작품 속에는 독일 북부의 주요도시인 뤼벡과 함부르크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찮게 등장하면서 그 도시들을 직접 방문하지 못한 독자들의 여행의욕을 자극하지요.


뤼벡의 시의원과 부시장을 지냈던 아버지 덕분에 금수저로 자란 토마스 만은 19세기 말의 군국주의적이고 강압적인 학교 분위기를 싫어했던 탓에 학교공부 대신 음악과 시와 연극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일찍부터 작가가 되기 위해 부지런히 습작들을 썼다고 하지요. 1895년 이후에는 철학자인 니체로부터 중요한 영향을 받았고, 특히 1899년에 읽은 쇼펜하우어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토마스 만은 1905년에 카타리나 프링스하임과 결혼하는데, 1912년 결핵 증상을 보인 아내는 스위스 다보스의 요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작가는 1912년 5월과 6월 사이에 3주 예정으로 문병을 갔다가 요양원의 독특한 분위기와 손님들의 모습에 매료되어 자신의 체험을 단편으로 쓰기 시작합니다. 이 작품이 점차 방대해져 12년 후에 완성된 것이 바로 그의 문학의 정점을 이루는 『마의 산』이었습니다. 1913년에 쓰기 시작한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1915년에 중단되었다가 종전 후 다시 쓰기 시작하여 1924년에야 완성되었습니다.


토마스 만은 『마의 산』의 서문에서 "철저한 탐구만이 진정한 즐거움을 준다."라고 밝혔는데, 이 작품이야말로 작가가 12년 동안이나 고심을 거듭하면서 그 당시 서구 세계가 안고 있던 온갖 병리적인 현상들을 종합적으로 탐구하는 방대한 작품으로 녹여냈습니다.


『마의 산』은 제목에서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처럼 '쉽게 읽히지 않는 고전 소설'로도 악명이 높은데, 그 까닭은 작가 자신이 깊이 고민했던 정신 탐구의 온갖 주제들이 작품의 전편에 걸쳐 끝없이 펼쳐지기 때문이지요. 이 작품이 쓰여진 시대의 사상적 특징이었던 정신분석과 영성주의, 아인슈타인이 말한 시간의 상대적 속성, 질병과 죽음과의 관계, 예술가와 사회의 관계, 제대로 된 인간 교육, 보수와 진보와의 갈등 등이 그런 주제들이지요.


그래서 이 소설은 작가의 또다른 대표작인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처럼 여러 세대에 걸친 가족 구성원들의 대하 드라마식 이야기와도 전혀 성격이 다르며, 획기적이거나 크나큰 사건 하나 없이 극히 좁은 공간과 인물들(베르크호프 요양원과 환자들)로 좁혀진 상태에서 기나긴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점에서 드라마틱한 사건 전개와는 거리가 먼 관념소설의 진수를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가받고 있지요.


아무튼 이 소설은 '이야기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설명하면 결국 작품의 겉껍데기만 다루는 셈이 되는 그런 작품이지만, 소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배경과 등장인물들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이 소설의 배경은 스위스의 고산 지대인 다보스에 있는 폐결핵 요양원 '베르크호프'이지요. 다보스는 오늘날 <다보스 포럼>으로 더욱 유명해진 스위스의 휴양도시인데, 요양소, 의학연구소, 눈사태 연구소 등으로도 유명한 곳이지요. 소설 속에도 자주 등장하는 중심지인 다보스플라츠의 해발고도는 1,575m이며, 베르크호프 요양원은 좀 더 위쪽에 자리잡고 있지요. 우리의 주인공인 23세의 젊은 청년 한스 카스토르프는 바르 그곳에 입원해 있는 사촌 요아힘의 병문안을 위해 3주 예정으로 그곳을 찾아가지요. 그는 대학에서 조선 공학을 전공하고 이제 막 조선 기사 시험에 합격하여 곧 함부르크의 조선소에 취직할 예정인 상태에서 잠시 여행을 떠나듯 그곳을 방문했던 셈이지요.


함부르크에서 그곳까지는 먼 여행길이다. 3주 동안 짧게 머물기에는 사실 참으로 멀고 먼 길이다. 여러 군주들이 다스리는 나라를 지나, 수많은 산들을 오르내리고, 남독일의 고원에서 슈바벤의 호숫가로 가서는, 배를 타고 넘실거리는 파도를 헤치며 그 옛날 깊이를 알 수 없던 심연을 건너가야 한다.(제13쪽)


소설 속 주인공 청년은 맨 처음엔 마치 아내의 병문안에 나섰던 작가처럼 그저 4촌 동생의 병문안을 위해 그 요양원에 임시로 방문했다가 결국 폐결핵에 감염되어 그곳에서 무려 7년을 더 머무르게 되지요.


소설 속의 이야기는 꽤나 오랫동안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이야기로 진행됩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정기적으로 체온을 재고 식사를 하는 규칙적으로 산책을 다니는 등 요양병원의 따분한 일상 이야기로 진행됩니다. 그러다가 차츰 그곳 요양원에 입원한 환자들과 서로 알고 지내게 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방의 사소한 언행들 때문에 언짢아 하기도 하고, 매력적인 이성에 끌려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점차 평지에서의 수평생활에서 점점 멀어져 해발 1600m에 위치한 고산지대 폐결핵 요양원만의 독특한 분위기 속으로 빠져들지요.


주인공인 한스 카스토르프는 사관후보생이었던 사촌동생 요아힘 침센과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지만, 어느새 그곳에서 요양중인 러시아 출신의 클라브디아 쇼샤 부인에게 마음을 빼앗기지요. 그녀는 남편을 고향에 남겨 두고 유럽 각지의 요양원과 온천장을 전전하는 방종하고 퇴페적인 분위기의 여성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이상한 매력을 지닌 여성입니다.


요양원에는 이탈리아 출신의 인문주의자 세템브리니가 젋은 청년 한스 카스토르프의 '교육자'를 자처하는데, 그는 주인공 청년에게 '죽음'의 세계에 흘러 들어와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저 아래'의 시민 세계로 복귀하라고 충고하지요. 그러나 청년은 쇼샤 부인에게 매혹되어 그곳을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사육제 날 저녁에 마침내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그날 밤 그녀에게 연필을 돌려주기 위해 그녀의 방을 찾아가지요. 그러나 하룻밤 사랑은 짧게 끝나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말자 그녀는 요양원을 훌쩍 떠나고 말지요.


한스 카스토르프는 세템브리니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면서 온갖 정신적 수업을 받는 동안 요양원 아래 다보스 플라츠에서 지내는 유대인 나프타와도 알고 지내게 됩니다. 그는 한때 수도원에서 생활한 적이 있던 예수회 회원이면서 테러를 긍정하며 공산주의적 이상향의 도래를 확신하는 급진주의자였는데,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합리적 진보주의자인 세템브리니와 자주 충돌하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지요.


사촌 요아힘 침센은 호전되지 않는 병세에 지친 나머지 결국 완치하지 못한 상태로 하산하여 군복무를 시작하고, 혼자 요양원에 남은 카스토르프는 그곳에서 차츰 더 오래 머물 채비를 갖추는데 그런 방편의 하나로 스키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그는 스키를 타고 산으로 갔다가 눈보라 때문에 천지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운 처지에서 오두막에 갇혀 꿈을 꾸게 됩니다. 그 꿈을 통해 그는 지금까지의 삶을 반성하고 인간이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공감에서 벗어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지요.


인간은 착한 마음씨와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각에 대한 지배권을 죽음에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자, 이제 눈을 뜨기로 하자. 이것으로 나는 꿈을 끝까지 다 꾸고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 잠과 꿈에 빠지면 내 젊은 목숨이 치명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물론 나도 잘 알고 있다. 아, 일어나라! 눈을 뜨라! 너의 다리와 팔이 여기 눈 속에 빠져 있다! 다리를 끌어당기고 일어나라! 자, 보렴, 날씨가 얼마나 좋은가를!(293∼295쪽)


평지로 되돌아갔던 요아힘 침센은 병이 악화되어 다시 요양원으로 되돌아오는데, 씩씩한 군인이 되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끝내 접고 일찍 삶을 마감하는 청년의 죽음은 한스 카스토르프에게도 큰 슬픔으로 다가오지만, 그무렵 갑작스레 요양원을 떠났던 쇼샤 부인이 다시 되돌아오면서 주인공의 생활도 아연 긴장 관계에 접어듭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아니라 은퇴한 대사업가인 커피 왕 페퍼코른이라는 인물과 함께 등장하기 때문이지요. 그 사람은 현실적인 삶에 충실하면서도 온갖 긍정적인 에너지와 힘을 갖춘 인물이었는데, 자신이 여행의 동반자로 데려온 쇼샤 부인이 한때 이곳에 머무는 동안 한스 카스토르프와 심상찮은 관계였음을 간파하고 난 뒤 결국 '사랑의 패배자'가 된 자신의 처지를 견디지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자살하고 말지요.


페퍼코른이 죽고 나자 쇼샤 부인은 또다시 요양원을 떠나고, 한스 카스토르프는 몹시 허탈한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요양원에는 히스테리 환자가 속출하고, 세템브리니와 나프타는 어느 날 자유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벌이다가 서로 입밖에 내어서는 안 될 온갖 험악한 언사와 모욕을 주고받은 끝에 서로 결투를 하기에 이릅니다. 결투장에서 세템브리니가 하늘을 향해 권총을 쏘자 나프타는 비겁자라고 흥분하며 자기 머르를 권총으로 쏘아 자살하고 말지요.


이처럼 과도한 흥분상태는 결국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이라는 청천벽력으로 이어지고, 카스토르프는 마침내 외부의 강제적인 힘에 의해「마의 산」을 내려와 전쟁에 참전하게 되지요. 여기저기서 포탄이 터지고 흙덩이며 산산조각이 난 인체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와중에 커다란 흙덩이가 그의 정강이에 부딪힙니다. 그는 몸을 털고 일어서, 흙이 달라붙어 무거운 발을 이끌고 다리를 절며 갈지자로 계속 걸어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보리수」를 흥얼거립니다.


가지가 살랑거리네,

나를 부르는 듯이 ㅡ


이리하여 그는 아비규환 속으로, 빗속으로, 어스름 속으로 우리의 눈에서 사라져 간다.


이 소설은 한편으로는 시간에 대한 소설이면서, 또다른 한편으로는 삶과 죽음을 다룬 소설입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인데도 건강한 사람들이 평지에서 수평생활을 바삐 영위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언제나 저멀리 동떨어진 문제로 인식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평지에서 생활하기가 불가능할 만큼 병세가 깊은 환자들만 모여 있는 요양병원에서의 생활은 수평생활과는 전혀 다릅니다. 요양병원 환자들은 늘상 죽음과 대면하는 삶을 영위해 나갑니다. 그들의 일상은 오로지 건강을 회복하는데 촛점이 맞춰져 있고, 하루 다섯 차례의 푸짐한 식사와 디저트, 오전과 오후의 산책, 저녁 식사후의 오락 시간 등으로 촘촘히 짜여 있지만, 건강을 회복하여 요양병원을 빠져나가는 환자보다는 그곳에서 일찍 삶을 마감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매일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요양병원 생활 속에서 한스 카스토르프도 한때나마 잠시 죽음을 긍정하고 애착을 보이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데, 이는 작가 토마스 만이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로부터 받은 영향이며, 죽음에 친근감을 느꼈던 주인공이 그것을 탈피하고 삶을 긍정하는 태도로 전환하는 모습은 니체의 '생에 대한 긍정'의 영향 때문이지요.


『마의 산』은 흔히 시대 소설, 교양 소설, 철학 소설 등으로 일컬어지지만 딱히 어떤 소설이라고 단정짓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어떤 작품이든 그 작품이 쓰여지고 나서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시대적 배경'은 차츰 뒷편으로 저만치 물러나고 작품 속에 내재된 본질적인 문제들만 앙금처럼 남기 마련이지요. 이 작품도 어느새 발표된지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만큼 시대소설이나 교양소설로서보다는 철학소설로 보는 게 더 마땅하지 싶습니다. 토마스 만은 특히나 쇼펜하우어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작가이다 보니 몇몇 대목들에서는 이 작품이 소설인지 철학책인지 헷갈릴 정도이지요. 가령, 제6장의 첫 소절인 <변화들>에서 길게 이어지는 '시간에 대한 묘사'는 얼마나 철학적인가요?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이란 불가사의한 것이다. 실체가 없으면서 전능한 것이다. 현상계(現象界)의 하나의 조건으로 공간 속에 존재하는 물체와 그것의 운동과 결부되고 혼합된 하나의 운동이다. 그러면 운동이 없으면 시간도 없는 걸까? 뭐든 물어 보라! 시간은 공간이 행하는 기능의 하나인가? 또는 그 반대일까? 또는 두 개가 동일한 것일까? 얼마든지 물어 보라! 시간은 활동적이고, 동사적인 속성을 갖고 있어, 그것은 '낳는' 힘을 지닌다. 그러면 시간은 무엇을 낳을까? 변화를 낳는 것이다! 지금이 당시가 아니고, 이곳이 저곳이 아닌 것은, 이 두 개 사이에 운동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시간을 재는 운동은 순환적이고, 자체적으로 완결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운동과 변화는 거의 정지와 정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당시는 부단히 현재 속에, 저곳은 이곳 속에 쉬지 않고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한한 시간과 한정된 공간이라는 개념은 아무리 필사적인 노력을 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영원하고 무한하다고 '생각'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분명 이게 사리에 맞을 거리는 믿음에서, 딱히 옳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좀 더 나을 거라는 믿음에서이다. 하지만 영원한 것과 무한한 것을 확실하게 정한다는 것은 한정된 것과 유한한 것을 논리적으로나 수학적으로 부정하고, 상대적으로 그것을 영(零)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닐까? 거리, 운동, 변화 같은 개념들이나, 또는 우주 속의 한정된 물체라는 존재가 영원한 것과 무한한 것이라는 임시적인 가정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좌우간 얼마든지 물어 보라!


어쩌면 이 소설은 문학과 예술의 본질이 늘 그러하듯이,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의 체험을 통해 '평지에서의 삶'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를 강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작품에서 카스토르프가 7년 동안 머무르는 스위스 고산지대 폐결핵 요양원이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되지만, 그것은 암시, 은유, 비유, 지시, 인용을 통하여 마치 마법에 걸린 산이 되기도 하고, 고대 신화 세계의 저승인 하데스가 되기도 하고,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발푸르기스 밤」의 마녀 산이 되기도 하며, 일반적으로는 시간 감각을 상실한 채 의무를 잊어버린 반시민적인 세계가 되기도 합니다.


베르크호프 요양원이라는 무대는 지리적으로 고산 지대일 뿐만 아니라 밀폐되고 외부와 차단된 세계를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지요. 그곳에서 생활하는 다양한 국적의 환자들은 과거의 직업이나 신분 혹은 재산상태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똑같은 시설에서 똑같은 식사와 똑같은 진료를 받으며 다시 일상생활로 복귀하길 염원하지만, 정상적인 삶에서 궤도이탈한 요양병원 생활은 이미 신화 속의 하데스처럼 신비한 분위기에서 살아가고 있지요.


요양병원을 총괄하는 베렌스 고문관은 염라대왕인 라다만토스로 군림하는 존재이며, 카스토르프는 3주간의 일정으로 요양원을 방문할 때만 하더라도 저승세계를 잠시 방문하는 오뒷세우스로 자신을 비유하며, 아둔한 슈퇴어 부인은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요양병원 생활을 시시포스와 탄탈로스 이야기를 꺼내며 요양원 생활에 비유하기도 하지요.


신화적인 숫자 7이 일관된 흐름으로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마의 산』은 모두 일곱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체온계를 입에 무는 시간도 7분이며, 카스토르프는 일곱 개의 식탁에 일년에 한 번씩 바꿔 앉아 보며 7년간 그곳에 머무르게 되지요. 카스토르프의 방번호도 34호실이며, 소설의 정점인 「발푸르기스의 밤」 장면 또한 주인공이 요양원에 도착한 지 7개월이 지난 시점에 벌어지며, 페퍼코른이 자살을 결심할 때에도 일곱 명이 함께하지요. 여기서 다시 재미삼아 이 방대한 소설의 서문으로 잠시 되돌아갈 필요도 있을 듯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한스 카스토르프의 이야기를 금방 끝내 버리지 않을 작정이다. 일주일의 7일은 부족할 것이고, 7개월로도 모자랄 것이다. 작가인 내가 이야기에 휩쓸려 가는 동안 지상의 시간이 얼마나 지나가는지를 미리 정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그렇다고 설마 7년이나 걸리지는 않겠지!


소설 『마의 산』에는 두고두고 음미할 만한 온갖 명문장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것으로도 꽤나 유명하지요. 그 문장들은 굳이 『마의 산』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지 않더라도 다른 데서 가끔씩 마주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방대한 작품 속에서 이런 명문장들을 직접 마주치노라면 그 감흥이 훨씬 더 배가되는 걸 부정하긴 힘들지요. 그런 문장들을 몇몇 덧붙이면서 이 작품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 …… 장례식에는 사람을 고양시켜 주는 무언가가 있어. 나는 정신적으로 고양이 되려면 옛날부터 교회에 가지 말고 장례식에 가야 한다고 가끔 생각한 적이 있어. 사람들은 다들 멋있는 검은 복장을 하고 모자를 손에 벗어 들고는 관을 바라보면서 엄숙하고 경건한 태도를 취하지. 평소 때처럼 쓸데없는 농담을 하는 사람도 없어. ……"


시간에는 사실 눈금이 없고, 새로운 달이나 해가 시작될 때 천둥이 치는 것도 아니고 나팔 소리가 울리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될 때 예포를 쏘거나 종을 치는 것도 인간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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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0-14 21: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렌 님 오랜만에 포스팅 반갑습니다 ^^
토마스 만은 늘 숙제인데 “부덴브로크가 사람들” 민음사 두 권 사두고 읽다 말고 영화는 봤네요. 오래전이지만 그 느낌이 참 좋았어요. 오랜만에 오렌 님 유튜브로 가 봐야겠어요.

oren 2021-10-14 21:29   좋아요 2 | URL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도 영화로 나온 게 있는 모양이군요! 그 작품도 언젠가는 ‘유튜브 영상‘으로 꼭 만들고 싶은데, 영화가 있다니 영상을 만들고픈 의욕이 갑자기 불쑥 생겨납니다.

『마의 산』과 같은 작품은 도저히 영화로 만들어졌을 것 같지 않았는데, 여기저기 뒤져보니까 1982년에 만든 영화가 있더라고요. 어찌나 반갑던지 그 영화 덕분에 『마의 산』을 (올해 여름 내내 또다시 붙잡고서) 두 번째로 읽고 어렵사리 ‘유튜브 영상‘까지 만들게 되었답니다.

이 영상을 만들면서, 2014년에 독일 여행을 갔을 때 ‘뤼벡‘을 들르지 못한 아쉬움을 다시금 절절하게 느꼈답니다. 사전에 짜놓은 여행계획에는 분명(!) 뤼벡에 들러서 ‘부덴브로크 하우스‘에도 들를 참이었던데 말이죠. 토마스 만의 생가이자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의 주무대인 그 멋진 저택이 왜 그리 중요한지를 그때 진작에 알았더라면 그 멋진 도시를 덜컥 빼먹을 일은 결코 없었을 텐데 말이죠. 그게 다 토마스 만의 소설을 너무 늦게 읽은 탓이려니 합니다...

프레이야 2021-10-14 22:27   좋아요 3 | URL
그랬군요. 뤼백을 뛰어넘어 버려 무척 아쉬우시겠어요. 저도 못 가 본 도시에요.
부덴브로크가 사람들 영화는 이곳 지금은 사라진 예술관에서 우리나라 최초 개봉으로 보았어요. 찾아보시면 있을지 모르겠어요. ^^

oren 2021-10-14 22:43   좋아요 2 | URL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오프라인 공간에서 아날로그 필름으로 만든 영화로 보셨군요. 예술관에서 상영한 영화였으면 어디엔가 틀림없이 파일 형태로 돌아다니고 있겠군요. 귀중한 정보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mini74 2021-10-15 11: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게 이 책은 정말 마의 산 ㅠㅠ 오렌님 반가워서 댓글 달아요. 오렌님 글 읽어보니 이해도 좀 되는 것 같고. 줄거리만 따라가려 하다 실패한 건가 싶기도 하고 ㅎㅎ 어떻게든 올해는 읽단 만 책들을 다 읽을 목표를 가지고는 있는데, 요양원에서 좀 더 진도를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ㅎㅎ

oren 2021-10-15 12:08   좋아요 3 | URL
mini 님 오랜만이고 참 반갑습니다.^^ 만의 <마의 산>을 두 번 읽을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올해 여름에 이 책을 붙잡고 낑낑거리면서 기어이 <마의 산>을 두 번 다녀오고 말았네요. 사실 제가 이 소설을 다시 읽은 까닭이 따로 있긴 했답니다. 40년지기 대학친구가 2년쯤 전에 췌장암 판정을 받고 힘겹게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데, 올해 봄부터 홀로 ‘깊은 산 속 요양원‘에 들어가서 치료를 받고 있거든요. 올해 5월쯤에 요양원 근처 숲속에서 반나절 가량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있는데, 그 친구의 얘기를 들어보니 꼭 <마의 산>에 나오는 베르크호프 요양원 생활과 똑같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그 친구 얘기가 그렇더라구요.. 시설도 좋고, 식사도 좋고, 사람들도 다 좋다, 비용은 꽤나 비싸지만 부족한 건 조금도 없다.. 다만 환자들의 건강 상태만 위중할 뿐... 25년전쯤 싱가포르로 이민을 가서 꽤나 잘 살아왔던 친군데... 사업도 번창해서 돈도 많이 벌고... 해마다 몇 번씩 한국에 들어오면 어김없이 만나 함께 운동도 즐기고 시간 가는줄 모르고 웃고 떠들고 지내왔는데.. 몇 해 전 함께 휴가차 제주도에서 신나게 놀고 먹고 떠들고 했던 게 그 친구와 보낸 ‘마지막 한 때‘라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서 <마의 산>으로 다시 찾아갔지요. 그 소설 속의 주인공은 과연 ‘삶과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던가, 그 소설을 다시 읽으면 친구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고요.. 그 친구는 지금까지 항암만 11차까지 받고도 비교적 잘 견뎌내고 있는데, 경과를 봐서 그 요양원에 계속 머물지 ‘바깥 세계‘로 다시 나올지 고민중이라고 하더라구요. 아무튼 젊은 나이에 요양원 등에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들한텐 너무나 절박한 문제들이 그 소설 속에 아주 잘 담겨 있어서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듯해요. 토마스 만의 책들을 꾸역꾸역 다 읽어내시길 뜨겁게 응원하겠습니다.^^

mini74 2021-10-15 12:13   좋아요 2 | URL
아이고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친구분 쾌차를 정말로 기원합니다. 그리고 응원 고맙습니다 *^^*

oren 2021-10-15 12:22   좋아요 2 | URL
mini 님의 응원 정말 고마워요.^^

잠자냥 2021-10-15 12:49   좋아요 3 | URL
전 을유문화사판으로 1권만 읽기를 두 번.... ㅠㅠ
앞의 내용 다 잊혀서 다시 읽고 했는데 올핸 그냥 2권으로 갈까봐요.

oren 2021-10-15 13:13   좋아요 3 | URL
1권에는 그나마 이야기의 줄거리가 비교적 잘 잡히지만 2권으로 넘어가면 거의 철학책 수준의 장광설이 너무 자주 등장하여 이야기의 줄거리는 온데간데 없고, 담론들만 끝없이 펼쳐져 있는 느낌도 듭니다.^^ 그래도 토마스 만의 명문장들의 2권에 훨씬 더 많이 담겨 있으니, 그걸 읽는 재미로 쭉 밀고 나가다 보면 결말까지 다다를 수 있을 듯합니다.^^ 암튼 <마의 산>을 정복하는 기쁨은 남다른 데가 있긴 합니다.^^

중독자 2021-10-17 2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섹시 스타!

그레이스 2021-11-05 16: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마의산 도전
그리고 당선작 축하드려요

oren 2021-11-10 21:56   좋아요 2 | URL
댓글이 너무 늦었네요.
축하해 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mini74 2021-11-05 17: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앗, 제가 포기한 마의 산. 리뷰 넘 잘 쓰셔서 부러웠던 ㅎㅎㅎ 축하드리옵니다 *^^*

oren 2021-11-10 21:57   좋아요 2 | URL
이 책을 두 번씩이나 읽을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문득 이 작품을 소개하고픈 마음이 생겨나는 바람에,
기어코 두 번째로 붙잡고 또(!) 읽었네요.
mini 님께서도 나중에 문득 마음이 동하실 때, 꼭 완독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축하해 주셔서 감사해요.^^

초딩 2021-11-07 11: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Oren님 잘 지내셨죠~?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oren 2021-11-10 21:58   좋아요 2 | URL
초딩 님~ 무척 오랜만이네요.^^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밀란 쿤데라는 1929년 체코의 브르노에서 태어나 프라하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1968년에 일어난 '프라하의 봄' 사건 이후 반체제 인사로 내몰려 출판금지 등의 탄압을 받은 끝에 1975년 프랑스 파리로 망명한 작가이지요.


그는 아버지가 저명한 음악학자였던 덕분에 보헤미아 전통 음악과 피아노를 배웠고, 대학에서는 문학과 미학뿐 아니라 영화학을 전공하기도 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연극예술아카데미에서 시나리오 작가와 영화 감독 수업을 받은 뒤 이 학교의 강사와 교수로 지냈는데,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아마데우스》를 만든 영화감독 밀로스 포먼이 그의 제자였다고 하지요. 그는 나찌 독일에 대한 반발심으로 젊어서 일찌감치 공산당에 입당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반체제 활동' 죄목을 뒤집어쓰고 공산당에서 추방당했고(1950년), 1956년에 재입당했지만 1968년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운동'을 표방한 프라하의 봄에 참여한 이후 1970년 또다시 공산당으로부터 추방당하고 말지요.


이러한 작가의 독특한 체험은 그의 첫 번째 소설 『농담』(1967)에도 깊이 반영되어 있는데, 사소한 농담 때문에 인생이 송두리채 뒤바뀌고 마는 경직된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과 경멸에 가까운 조소가 담겨있지요. 작가가 프랑스로 망명한 이후 1984년에 출간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또한 『농담』에서처럼 전체주의 공산체제가 개인의 삶을 얼마만큼 억압하고 뒤틀리게 만드는지를 여실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제목만 봐도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을 자아내는데, 1988년에 필립 카우프만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진 덕분에 더욱 유명해집니다. 1989년 여름 한국에서 개봉된 영화의 제목은 놀랍게도 《프라하의 봄》이었습니다. 뛰어난 제작진과 인기 배우들의 연기 덕분에 큰 인기를 끌었지만, 정작 작가 자신은 이 영화를 본 뒤에 자신의 작품을 영화로 만드는 걸 몹시 후회했다고 하지요.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지닌 고유의 색깔이나 의미가 왜곡되는 걸 싫어하기 마련인데, 밀란 쿤데라야말로 그런 점에 관해 유난히 예민한 작가이지요. 그는 자신의 작품이 번역 출간될 때 작가에 대한 자세한 이력은 물론 「작품 해설」조차 싣지 못하도록 까다로운 조건을 붙이는 작가로도 유명합니다.


작가와 작품을 둘러싼 대략적인 설명은 이쯤으로 그치고 이제부터는 작품 속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보지요. 이 작품은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원제목이 있는데도 굳이 국내에서는 《프라하의 봄》이라는 다소 별난 제목을 달았는데, 아무래도 원제목이 지나치게 철학적이어서 그것만으로는 작품의 내용을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는 점이 고려된 듯합니다. 그러나 영화의 제목을《프라하의 봄》으로 바꾼 탓에 정치적인 색깔이 너무 도드라져 자칫 공산주의 국가에서 일어난 반체제 민주화 운동을 그려낸 정치 영화가 아닐까 하는 오해도 생겼습니다. 물론 영화가 원작보다 '프라하의 봄'을 좀 더 부각시킨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 작품은 몹시 철학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꽤나 정치적인 소설이 맞습니다. 어쨌든 작가는 1968년에 일어났던 체코의 민주화 운동과 그 반작용으로 초래된 소련군의 무참한 무력침공 때문에 개개인의 삶이 어떤 식으로 억눌리고 파괴되는지를 아주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으니까요. 그런데도 이 소설은 네 명의 등장 인물들이 펼치는 유별난 애정행각 때문에 '영화에서 자주 보여주듯이' 에로틱한 장면들이 가득한 영화 제작을 염두에 둔 각본처럼 여겨질 때도 있지요. 더구나 등장인물들이 정사를 벌이는 장소들 또한 체코의 프라하뿐 아니라 스위스의 제네바나 취리히 등지였으니 그런 분위기가 더해졌지요.


이 영상을 보시는 시청자분들은 아마도(!) 이 작품을 다들 한 번쯤은 읽어보셨겠지요? 혹은 줄리엣 비노쉬가 청순가련한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청소년 관람불가의 「프라하의 봄」을 보신 적이 있으시겠지요? 혹시 이 둘을 모두 놓치셨더라도 체코의 프라하를 가 보신 적은 있으시겠지요? 이마저도 아니라구요? 아무튼 좋습니다. 우연히 클릭한 이 영상 덕분에 저와 함께 이 세 가지를 한 방에 모두 체험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저 또한 이 책을 두 번째로 읽기 전까지는 「프라하의 봄」이라는 영화를 못 봤습니다. 또한 프라하를 직접 찾아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밀란 쿤데라의 작품은 단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었고, 이 작가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조차 없었더랬습니다. 물론 프라하가 배출한 천재 작가였던 프란츠 카프카에 대해서도 새까맣게 몰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인가 늦봄에 덜컥 프라하로 날라갔습니다. 무슨 특별한 문학기행도 아니었고 말 그대로 흔해빠진 '동유럽 여행'의 첫 번째 기착지로 프라하에 닿았던 셈이지요. 꽤 오랜 시간 동안의 지루한 비행 끝에 말입니다.


사실 갑작스레 결정된 동유럽 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나름대로의 여행 준비작업으로 마음이 몹시나 분주했더랬습니다. 동유럽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도시인 프라하 방문을 목전에 두고도 그때까지 프란츠 카프카나 밀란 쿤데라의 책 한 권조차 읽은 게 없었으니 그 가운데 한 두 권쯤은 반드시 읽어봐야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은 정말 쏜살같이 흘렀고, 프라하에 도착할 때까지 뒤적거린 책이라고는 고작 몇 권의 여행 안내서와 음악 및 미술에 관한 안내서 몇 권이 전부였고, 프라하 올로케로 찍었다는 모차르트 영화 「아마데우스」를 밀린 숙제하듯 간신히 다운받아 감상한 게 전부였습니다. 아, 참, 빈 국립 오페라 극장 구경을 놓칠세라 빈에 머무는 날짜에 맞춰 음악 공연 티켓을 예매하느라 낑낑댔던 기억도 있긴 있었군요.


아무튼, 체코의 역사와 쿤데라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인 상태로 저녁 무렵에 도착한 프라하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습니다. 마침 우리 일행들이 묵을 숙소가 카를교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자리잡은 덕분에, 우리 일행은 도착한 첫날부터 밤늦게까지 블타바 강가에 자리잡은 야외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며 (카페가 문을 닫을 때까지) 프라하의 고성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다리 밑에' 숙소를 잡았던 게 정말로 대박이었습니다!


이처럼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읽기 훨씬 전부터 우연한(!) 기회에 미리 샅샅이 다녀본 프라하 관광 체험은 훗날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읽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되었더랬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지요.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이며, 시계탑이며 , 얀 후스의 동상이며, 바츨라프 광장 등등을 직접 걸어다니며 카메라에 쏙쏙 담아냈던 기억들은 밀란 쿤데라의 작품 속에서 그 장소들을 다시 만날 때마다 어김없이 되살아났습니다. 그 멋진 도시를 전혀 가 보지 못한 독자들조차 밀란 쿤데라의 작품이 지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에 빠져들기 쉬운데, 그의 문학의 고향과도 같은 그 도시의 독특한 분위기에서 사흘씩이나 보낸 제가 이 작가의 작품들을 계속 외면하기란 어려웠지요.


그런데도 이 작품은 생각보다는 읽기가 조금 까다로운 책이었습니다. 적잖은 독자들이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고들 하지요. 그건 바로 밀란 쿤데라가 이 작품 속에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나 고대 그리스 철학자였던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을 소설의 도입부에 덜컥 내밀면서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 때문이지요. 다음과 같이 말이지요.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이처럼 밀란 쿤데라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소설의 도입부에 배치함으로써 지금까지도 많은 독자들을 곤경에 빠뜨리고 있지요. 작가가 이 말을 꺼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의 삶이 무한히 반복된다면 우리의 몸짓 하나하나는 견딜 수 없이 무거워지고, 그 반대로 우리의 삶이 단 한 번만 주어진다면 우리의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택해야 할까요?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고대의 철학자인 파르메니데스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반대되는 한 쌍으로 양분되어 있으며,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주장했지요. 작가는 그의 말이 맞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고 규정합니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고 말이지요.


이렇게 시작된 소설 속 이야기는 '존재의 무게'를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쪽으로, 혹은 그 반대쪽으로 끊임없이 옮기려는 등장 인물들의 삶의 궤적들을 잔잔하게 그려나가고 있지요. 


남자 주인공인 토마시는 프라하에서 유능한 외과의사로 일하는 바람둥이이자 이혼남입니다. 그는 여러 여성들과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지속하면서도 결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는 에로틱한 우정을 모토로 삼아, 두 사람 중 누구도 상대방의 인생과 자유에 대한 독점권을 내세우지 말자고 단단히 못을 박지요. 그는 얼마 전에 우연히 보헤미아의 한 작은 마을에서 테레자를 만납니다. 불과 한 시간 남짓한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열흘이 지난 뒤 그녀는 대뜸 프라하에 있는 토마시를 찾아가지요.


토마시는 테레자와 함께 일주일을 지냈으면서도 그녀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도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을 느낍니다. 그녀는 마치 송진으로 방수된 바구니에 넣어져 강물에 버려졌다가 그의 침대 머리맡에서 건져 올려진 아이처럼 보였습니다. 테레자와 함께 사는 게 좋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게 나을까를 고민하던 토마시는 독일 속담을 되뇌이지요.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던 어느 날, 토마시는 테레자의 목소리를 다시 듣습니다. 그녀가 역에서 전화를 걸어온 것입니다. 토마시는 선약이 있어서 다음날 저녁에나 찾아오라고 하지요. 다시 만난 그녀는 지난번보다 훨씬 우아해 보였고, 손에는 두꺼운 책 한 권을 들고 있었지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였습니다. 그녀는 다른 용건 때문에 프라하에 왔다가 우연히 들렀음을 애써 강조했지만, 사실은 이미 무거운 트렁크를 수화물 보관소에 맡겨둔 참이었지요.


그녀는 토마시가 전날까지도 염려했던 그대로, 인생 전체를 이 남자에게 헌납하기 위해 프라하로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그녀와 그녀의 트렁크를 그의 아파트에 들여놓습니다. 그는 스스로 놀랍니다. 10년 전 첫 번째 부인과 헤어질 때 거의 환호성을 지를 뻔했던 그는 오로지 독신일 경우에만 자신답다는 걸 깨달은 터였고, 비록 여자와 동침하더라도 자정 이후에는 모든 여자를 내쫓았는데 테레자 때문에 그런 원칙을 어긴 때문이었지요. 다음날 아침까지도 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테레사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다시 한번 테레자가 바구니에 담겨 강물에 버려진 아기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기가 담긴 바구니를 난폭한 강물에 띄워 보낼 수 있다니!


수많은 고대 신화의 도입부에는 버려진 아기를 구하는 누군가가 있다. 폴리보스가 아기 오이디푸스를 줍지 않았다면, 소포클레스는 그의 가장 아름다운 비극도 쓰지 않았을 것을! (21쪽)


이렇게 해서 토마시와 테레자와의 운명은 차츰 고대 그리스 비극의 이른바 '운명적 비극'과 셰익스피어 비극의 '성격적 비극'이 기묘하게 뒤섞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토마시와 테레자와의 사랑은 결국 따지고 보면 거듭된 여러 우연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엮일 수 없었다는 점에서 「오이디푸스 왕」처럼 '운명적으로' 엮여있기 때문이고, 남자의 타고난 바람기 때문에 아내와 끊없는 갈등을 지속한 끝에 결국 유능한 외과 의사에서 시골의 트럭 운전사로 점점 추락한 끝에 끝내 부부가 함께 시골 언덕의 커브길에서 동반 추락사하고 말기 때문이지요.


여주인공인 시골 처녀 테레사는 토마시와 동거하게 되면서 토마시의 애인인 사비나의 도움을 받아 프라하에서 잡지사 사진기자 일자리를 얻어 차츰 정착하게 되지만, 토마시의 끝없는 애정행각 때문에 매일밤 악몽을 꾸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여자는 토마시의 잠재적 애인이었고, 그녀의 악몽은 텔레비전 연속극처럼 반복되지요. 토마시는 테레자의 고통을 잠재우기 위해 결국 그녀와 결혼하고, 작은 강아지까지 사 줍니다. 강아지의 이름은 『안나 카레니나』의 남편이었던 카레닌으로 짓습니댜.


테레자는 충직한 카레닌이 늘 곁에 있어도 행복하진 못합니다. 소련 탱크가 전국을 점령하고 난 뒤로 차츰 토마시의 일자리가 불안해졌기 때문이지요. 테레자도 소련군이 진주한 후 일주일 동안은 거의 행복과 유사한 일종의 전율 상태에 빠져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나섰지만, 너무 대담해져 시위 군중에게 권총을 겨누는 한 장교의 사진을 찍다가 체포된 적도 있었지요. 그녀가 찍은 사진이 빌미가 되어 많은 시민들이 구금되고 체포되는 일도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국민들의 행복한 도취는 점령 후 일주일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체코 정치인들은 잡범처럼 소련군에게 끌려갔고,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모든 사람이 그들의 안위를 걱정했고, 소련군에 대한 증오는 술기운처럼 치밀어 올랐다. 증오감에 도취된 축제였다. …… (47∼48쪽)


토마시와 테레자와 카레닌은 결국 체코를 떠나 스위스 취리히로 건너가지요. "사비나도 스위스로 망명했는데 그래도 괜찮아?" 라는 토마시의 걱정어린 물음에도 테레자는 개의치 않지요. 이제 사비나는 토마시를 만나기 위해 제네바를 떠나 취리히의 호텔에 더욱 자주 머물게 되고, 토마시는 그녀와 헤어져 취리히의 집으로 돌아가면서 달팽이가 자신의 집을 메고 다니듯 자기도 자신의 삶의 방식을 휴대하고 다닌다는 생각을 하며 행복해 하지요. 테레자와 사비나는 그의 삶에 있어서 서로 멀리 떨어진 아름다운 두 극점 같았습니다.


테레자는 취리히에서도 밤마다 악몽을 꾸며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프라하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그녀는 토마시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고,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원하지 않았던 것이었지요. 텅 빈 집에서 테레자의 이별 편지를 발견한 토마시는 모든 상황을 아무리 되짚어 보아도 테레자를 되돌아오게 할 수 없다는 걸 깨닿고 좌절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자 차츰 생각이 바뀌지요.


그는 그녀와 함께 보낸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았고 그들의 관계가 이보다 더 잘 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누가 꾸며낸 이야기일지라도 달리 마무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느 날 테레자는 예고도 없이 그의 집에 찾아왔다. 어느 날 그녀는 같은 방식으로 떠났다.그녀는 묵직한 트렁크를 들고 왔다. 그리고 다시 묵직한 트렁크를 들고 떠났다.(53∼54쪽)


테레자가 떠난 뒤 우울에 빠져 홀로 거리를 산책하는 동안에 토마시는 뜻밖의 자유를 느낍니다. 거리 모퉁이마다 연애 가능성이 널려 있었고, 오로지 독신으로만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살 수 있는 '예전의 삶'으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는 테레자에게 얽매여 칠 년을 살았는데, 마침내 그의 발목에 채워 놓은 방울을 벗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는 존재의 달콤한 가벼움을 만끽합니다.


나흘 때 되던 날 갑자기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테레자가 이별의 편지를 쓰며 겪었던 쓰라린 감정을 느낀 것이지요. 한 손에는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다른 손에는 카레닌을 묶은 줄을 잡고 천천히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고, 홀로 된 그녀의 슬픔이 그의 가슴에 사무치게 와닿습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 그는 미래로부터 존재의 감미로운 가벼움이 그에게 다가옴을 느꼈다. 월요일, 그는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중압감에 짓눌리는 듯했다. 수천 톤이나 나가는 소련 탱크의 무게도 이 중압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동정심보다 더 무거운 것은 없다. ……


그는 동정심에 굴복하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채찍질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지요. 테레자가 떠난 지 닷새 후 그는 취리히의 병원 원장에게 당장 프라하로 돌아가야 한다고 선언하지요. 원장은 정말 화를 냈지만, 토마시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Es muss sein. Es muss sein."


이 말은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 가운데 마지막 악장에 나오는 말이었지요. 베토벤은 필연성과 무거움과 가치가 내면적으로 서로 연결된 개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토마시는 스위스 국경을 향해 차를 몰았고, 머리가 헝클어지고 표정은 침울한 베토벤은 이민 생활에 작별을 고하는 그를 위해 'Es muss sein!'을 기꺼이 연주해준 셈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런 것이어야만 한다고 상상한다. 또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도 더 이상 삶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 덥수록한 머리가 끔찍한, 침울한 베토벤도 몸소 그의 'Es muss sein!'을 우리의 위대한 사랑을 위해 연주했다고 확신한다.(63∼64쪽)


그러나 프라하로 되돌아온 토마시는 잠든 테레자 곁에서 뒤척이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테레자가 자기와 사랑에 빠진 것은 철저히 우연이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칠 년 전 테레자가 살던 도시의 병원에 우연히 치료하기 힘든 편도선 환자가 발생했고, 토마시가 일하던 병원의 과장이 급히 호출되었다. 그런데 우연히 과장은 좌골 신경통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대신 토마시를 시골 마을에 보냈던 것이다. 그 마을에는 호텔이 다섯 개 있었는데, 토마시는 우연히 테레자가 일하던 호텔에 들었다. 우연히 열차가 떠나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그는 술집에 들어가 앉았던 것이다. 테레자가 우연히 당번이었고 우연히 토마시의 테이블을 담당했다. 따라서 토마시를 테레자에게 데려가기 위해 여섯 우연이 연속적으로 존재해야만 했고, 그것이 없었다면 그는 테레자에게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64쪽)


토마시는 테레자 때문에 보헤미아로 되돌아왔지만 지금 그의 곁에 누워 깊은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는 '우연의 화신인 그 여자'에게 추호도 동정심을 느끼지 못하지요. 그가 느낀 유일한 감각은 귀향으로 인한 절망감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작가는 소설 속에서 '우연의 가치'를 다시 한번 땅바닥으로부터 높이 들어올립니다. 만약에, 어떤 한 사건이 보다 많은 우연에 얽혀 있다면 그 사건에는 그만큼 중요하고 많은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지요.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87쪽)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93쪽)


프라하를 떠나 제네바에서 살게 된 사비나에게 어느 날 멋진 남자친구가 나타납니다. 프란츠는 그녀의 아뜰리에에 자주 들렀지만 결코 그곳에서 정사를 나누지는 않지요. 불과 몇 시간 만에 한 여자의 침대에서 다른 여자의 침대로 가는 것은 애인과 부인을 모욕하는 짓이며 결국 자신도 모욕하는 짓으로 보였기 때문이지요. 몇 달 전에 프란츠가 반한 이 여인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 소중해서 그는 자신의 삶 속에 그녀만을 위한 독자적 공간을 만들어내려고 고심합니다. 외국 대학으로부터의 강연 초청은 100% 받아들였고 여행을 정당화하기 위해 없는 세미나까지 만들어내지요. 


그는 미남이며 학계에서도 출세가도의 정상에 서 있는 인물이었지만 늘상 사비나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휩싸여 지냅니다. 그런데 사비나는 이 진지한 남자와 만날 때에도 (토마시와 만날 때처럼) 중산모자를 쓰지요. 그것은 사비나 아버지의 기념품이자 토마시와의 에로틱한 게임에 사용하는 엑세서리였지만, 프란츠는 그 모자를 보는 순간 마치 누군가가 '미지의 언어'로 자신에게 말을 거는 듯한 불편함을 느끼고 몹시 당혹해 하지요. 사비나와 프란츠 사이엔 '이해할 수 없는 어휘들'의 목록이 너무 많았습니다.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토마시와 사비나가 중산모자의 모티프를 서로 나눠 가졌듯)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152쪽)


언제나 삶에 진지했던 프란츠는 결국 아내에게 사비나의 존재를 당당히 밝히고 아내와의 결별을 선언하지요. 하루 아침에 멀쩡한 아내와 결별하고 자신과의 공개적인 사랑을 선언하는 이 남자는 어느덧 사비나에게 점점 더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그날 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흥분한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격렬하게 그를 사랑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동시에 이미 그곳에서 먼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또다시 멀리에서 배반의 황금 나팔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이부름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녀 앞에 아직도 광활한 자유의 공간이 열려 있으며 그 공간의 넒이가 그녀를 흥분시키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프란츠를 미친 듯 거칠게 사랑했다.(194쪽)


프란츠는 그녀의 몸 위에서 흐느꼈고, 그녀의 몸짓을 통해 모든 걸 깨달았다고 확신하지요. 식사 시간 내내 침묵을 지키던 사비나가 마침내 그와 함께 영원히 살고 싶다고 말이지요. 그가 사비나와 함께 살리라 결심한 바로 그 순간, 사비나는 제네바에서 떠날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도 말이지요.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 어깨에 짐이 얹혔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비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그 후 그 남자가 그녀를 따라왔던가? 그가 복수를 꾀했던가?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201쪽)


이렇듯 소설은 작품의 제목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상징하는 두 인물 토마시와 사비나, 그리고 이 두 사람의 대척점에서 삶의 무게에 짓눌려 고통 받는 테레자와 프란츠를 중심으로 차분하면서도 길게 이어지지요.  


사비나가 제네바를 떠나 파리로 온 지 삼 년이 지난 뒤 그녀는 토마시와 테레자의 사망 소식을 전해듣지요. 편지에 따르면 그들은 죽기 전 몇 해 동안 시골 마을에서 살았으며, 트럭 운전사로 일하던 토마시는 테레자와 함께 자주 인근 마을로 가서 항상 조그만 호텔에서 밤을 보내곤 했습니다. 언덕을 타고 넘는 도로에는 꼬불꼬불한 구간이 많았는데, 트럭이 그만 계곡 아래로 떨어져 즉사하고 만 것이었지요. 이처럼 두 주인공의 죽음은 소설의 앞부분에서 너무 빨리 노출되지만 그렇다고 이 소설이 거기서 끝나는 건 아니지요.


스위스를 떠나 프라하로 되돌아온 토마시와 테레자는 차츰 밑바닥으로 떨어지는데, 유능한 외과의사였던 그가 점점 더 변방의 끄트머리로 밀려난 까닭은 범죄적이고 야만스런 정치체제에 대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언젠가 소련 점령군 체제에 협력한 비양심적인 지식인들을 비판하는 기고문을 잡지에 발표하는데, 당국은 반공주의를 조장하는 그의 글을 철회하도록 끈질기게 회유하고 압박하지요. 그는 결국 외과과장으로 승진하는 대신 현직에서 물러나 시골 병원으로, 다시 무료 진료원으로, 거기서 다시 유리창 닦는 노동자로 전락한 끝에 맨 나중엔 시골마을에서 트럭운전사로 살아갑니다.


이 소설은 희극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우연으로 시작된 주인공들의 삶이 '프라하의 봄'이라는 정치적인 격랑에 휘말리면서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지를 때로는 우수에 찬 선율로, 때로는 감성 넘치는 철학 에세이의 필치로 유려하게 그려내고 있어서 의미심장한 문장들의 행간을 자꾸만 반복해서 읽게 되는 아주 독특한 작품이지요.


인생의 고비마다 운명처럼 다가오는 '그래야만 한다(es muss sein)'는 필연성은 우연성과 어떻게 교차하면서 삶에 희비쌍곡선을 그려나가는지, 소련군 탱크의 무게만큼이나 강한 압력으로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정치적 격변의 와중에 개인의 자유와 소신은 얼마만큼 부당하고 또 나약하게 침해당하는지, 참으로 생각할 게 많은 작품입니다.


망명 작가인 밀란 쿤데라는 이 작품 속에서 자신이 직접 체험했던 '프라하의 봄'에 대해 그 누구보다 예민한 감각으로 당시의 정치체제를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작가는 '범죄적 정치체제는 (범죄자가 아니라) 자신들이 유일하게 옳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이 만든 것'이라고 따끔하게 지적합니다. 이런 비난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은 '우린 몰랐어! 우리도 속았어! 우리도 그렇게 믿었어! 따지고 보면 우리도 결백한 거야!'라고 외칠지도 모른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주인공 토마시는 바로 이 논쟁에서 핵심을 포착합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알았는지 몰랐는지에 있지 않다고 말이지요. '권좌에 앉은 바보가, 단지 그가 바보라는 사실 하나로 모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토마시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인 줄도 모르고 라이코스를 죽였고, 자신의 어머니인 줄도 모르고 이오카스테와 결혼했지만, 사태의 진상을 알고 나자 자신이 결백하다고 느끼지 않았으며, 자신의 무지가 저지른 불행의 참상을 견딜 수 없어 스스로 자기 눈을 찌르고 장님이 되어 테베를 떠났었지요.


토마시는 영혼의 순수함을 변호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악쓰는 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당신의 무지 탓에 이 나라는 향후 몇 세기 동안 자유를 상실했는데 자신이 결백하다고 소리칠 수 있나요? 자, 당신 주위를 돌아보셨나요? 참담함을 느끼지 않나요? 당신에겐 그것을 돌아볼 눈이 없는지도 모르죠! 아직도 눈이 남아 있다면 그것을 뽑아 버리고 테베를 떠나시오!(289쪽)


토마시는 이 비유가 너무나 마음에 들어 체코 작가 동맹이 발간하는 주간지에 글을 투고하지요. 토마시의 글이 발표되고 불과 두세 달 후 '프라하의 봄'은 끝장이 납니다. 이제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감히 우리 눈을 뽑아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써 대다니! 소련은 그들의 변방에서 자유로운 토론이 허용될 수 없다고 결정했고, 그들 군대는 하룻밤 사이에 토마시의 나라인 체코를 점령하고 맙니다. 토마시는 결국 '프라하의 오이디푸스'였던 셈이었습니다. 자신이 우연히 투고했던 글 때문에 그는 결국 외과의사의 옷을 벗어야 했고 프라하를 떠나야 했으니까요.


끔찍한 교통사고가 일어나기 하루 전날, 토마시 부부는 우연한 일로 기분이 좋아진 동네 사람들과 함께 인근 호텔로 춤을 추러 가지요.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스텝을 밞는 동안 테레자는 토마시의 어깨에 기대면서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낍니다. 그 슬픔은 종착역에 다다랐다는 암시였지요. 작가는 말합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라고 말이지요.


이것으로 작품 설명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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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6-01 23: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파르메니데스‘가 모든 것이 쌍으로 존재한다는 것으로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불멸을 증명했고, 저는 한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논리로 영혼과 불멸을 수긍할 수 있게 증명할까라고 탄식했었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쿤데라는 그 쌍이라는 것이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이 결국에는 모순을 가진다를 이야기하고 어떻게 보면 소크라테스의 영혼 불멸 증명을 무너뜨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키치를 던지는 것 같습니다. :-)
제 인생의 책을 반추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oren 2021-06-02 00:17   좋아요 2 | URL
한 권의 소설 속에 이렇게 다양한 철학이 녹아들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에요. 가벼움과 무거움, 영원과 순간, 우연과 필연, 단 한 번과 영원한 반복 등등 말이죠. 거기다가 키치를 뿌리고, 오이디푸스의 눈알까지 빼는 이야기가 더해지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읽기 힘든 책이 된 것 같기도 하고요. 오랜만에 두 번째로 읽으니, 훨씬 더 깊은 맛이 느껴지고, 영화를 앞뒤로 돌려가면서 동영상을 만들다보니 참으로 두고두고 곱씹을 만한 책이구나 싶었습니다. 초딩 님의 인생책으로서도 안성맞춤인 듯하고요.^^

모나리자 2021-06-02 11: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oren님~ 너무나 잘 보았습니다~ 이 책 오래전에 읽었고 19년 9월에 프라하도 다녀왔지만 이 작품에 카를교의 풍경이 나오는 줄 몰랐네요.ㅎ 니체의 사상 등 여러 철학사상이 들어 있어서 그렇게 어려웠군요.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어렵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ㅋㅋ 다시 읽으면 작품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유튜브 영상 해설도 끝까지 다 보았습니다. 마치 빨려들듯이..ㅎㅎ 안나카레니나도 2권까지 읽다 말고 오래되었는데 새로 읽어야 할 것 같아요. 정말 아름다운 프라하의 야경 다시 보고 싶네요. 여행하는 기분으로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멋진 글과 영상 올려주세요.^^!

oren 2021-06-02 22:01   좋아요 1 | URL
모나리자 님, 반갑습니다.^^ 이 책을 오래 전에 읽으시고, 프라하에도 2년 전에(!) 다녀오셨군요! 그 멋진 ‘카를교의 풍경‘은 제가 만든 ‘유튜브 영상‘에도 나오고, 영화 <프라하의 봄>에도 나오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에도 나오지요. 저는 지금까지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4권(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농담, 불멸, 배신당한 유언들) 읽었는데, 그 작품들 모두에서(?) 프라하의 인상적인 장소들이 매번 등장했던 것 같아요. 단 한 번이라도 프라하를 다녀온 사람들은 그 인상적인 장소들이 오래도록 머리속에 남아 영영 떠나지 않을 듯한데, 밀란 쿤데라의 작품 속에서 그 장소들을 다시 마주치는 기쁨이 상상 이상으로 크더군요. 카프카의 작품에서는 아무리 뒤져봐도 프라하의 ‘프‘자도 등장하지 않는데 말이지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2권까지만 읽으셨다니 너무 안타깝습니다. 이번 기회에 그 멋진 작품을 다시 한번 완독하시는 건 어떨까요? 카레닌도 만나보고, 브론스키도 만나보고, 카레니나, 레빈, 키티 등등도 두루 ‘다시‘ 만나보시길 바래요.^^

초딩 2021-07-07 2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렌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oren 2021-07-08 21:55   좋아요 1 | URL
알라딘 서재에 오랜만에 접속했다가 초딩 님의 댓글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글이 당선작으로 뽑혀 있었군요!
하마터면 여러 날 지나서 이 댓글을 확인할 뻔했네요.
늘 챙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꾸벅~

모나리자 2021-07-08 1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ren님~ 축하드립니다~^^
역시 정성과 배경지식이 듬뿍 담긴 리뷰 잘 읽었는데 선정되셨네요!
7월도 화이팅 하세요~^_^

oren 2021-07-08 21:57   좋아요 1 | URL
오늘에야 이 댓글을 발견했네요.^^
요즘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붙들고 한 달째 헤매고 있어서,
알라딘에 접속하는 일조차 새까맣게 잊어버린 듯한 기분이에요.
모나리자 님께서 남겨주신 축하 댓글, 너무 고맙습니다.^^
 

“진정으로 내게 가장 큰 체험은 프루스트였어요. 그 책이 있는데 과연 앞으로 쓸 게 뭐가 남아 있을까요? 어떻게 어떤 사람이 내 손에서는 언제나 빠져나갔던 것을 확고하게 담아내서 이 아름다우면서도 완벽하게 영원한 것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요? 책을 내려놓고 한숨을 쉴 수밖에 없군요.”

- 버지니아 울프

 * * *

안녕하세요? 오늘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2편인 <꽃핀 처녀들의 그늘에서>라는 작품 속으로 들어가볼까 합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모두 7편에 이르는 엄청난 길이의 연작소설이지요. 민음사에서 총 열세 권을 목표로 2012년부터 새롭게 번역 출간중인 이 작품은 어느새 제5편인 <갇힌 여인>(9,10권)까지 출간되었고, 앞으로 완간까지는 딸랑 세 권만 남겨두고 있지요.

 

이 소설은 작품의 길이뿐만 아니라 작가 특유의 만연체 문장으로도 독자들을 질리게 만드는 걸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그 악명 높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을 읽는 동안에도, 때때로 독자가 미리 만나본 몇몇 친숙한 철학자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발걸음은 한결 가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철학자들이야말로 이 방대한 작품의 독서 탐험에 더없이 소중한 안내자가 될 테니까요. 마치 어두컴컴한 지옥을 여행하는 이탈리아 시인 단테에게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꼭 그런 존재였던 것처럼 말이지요.

 

총 13권 가운데 지금까지 딸랑 네 권밖에 읽지 못한 저같은 독자라면, 마치 수십 년에 걸쳐 정교하게 축조된 고딕 양식의 거대한 대성당 안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처럼 자주 길을 잃고 당황스러워 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무리는 아니겠지요. 그런데도 잠깐씩, 이토록 생소하고도 복잡한 건축물 속을 두리번거리면서도, 다시 말해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낯설고도 빽빽한 문장들의 숲속을 헤쳐 가면서도 잠깐씩이나마 안도감을 느낄 때도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몽테뉴, 쇼펜하우어, 니체, 베르그송과 같은 철학자들이 예전에 어디선가 미리 언급했던 내용들이 이 작품 속에서도 자주 엿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 몇몇 철학자들 가운데서도 특히 앙리 베르그송(1859∼1941)은 프루스트(1871∼1922)와는 동시대의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가까운 친인척 사이였다는 점에서도 우리의 흥미를 끕니다. 베르그송은 1892년에 프루스트의 사촌누이인 루이즈 뇌부르주와 결혼했는데 매형이 될 새신랑보다 열두 살이나 어렸던 프루스트도 그 결혼식에 화동으로 참석했다고 하지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전공했던 베르그송은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무려 2,2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새로운 철학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 인물인데, 마침 그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베르그송이 직접 영역했던 책의 제목은 『시간과 자유의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담겨 있어서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합니다.

 

가령 내가 [앞으로] 살 도시를 처음으로 산책할 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은 나에게, 지속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인상과 끊임없이 수정될 인상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나는 매일 같은 집들을 보며, 또 그것들이 동일한 대상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것들을 끊임없이 동일한 이름으로 부르고,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나에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당히 긴 시간이 지난 후 처음 몇 해 동안 느낀 인상을 돌이켜 보면, 그 속에서 일어난 독특하며 설명할 수 없고, 특히 표현할 길 없는 변화에 놀란다.122) 내가 계속 지각했고 나의 정신 속에서 끊임없이 그려지던 그 대상들이 결국에는 나로부터 나의 의식적 존재의 무엇인가를 빌린 것처럼 보인다. 나처럼 그것들도 살았고, 나처럼 그것들도 늙었다.(166쪽)

122) 이런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가령 어렸을 때 살던 동네를 커서 가 볼 경우이다. 그 길이, 그 집이 그렇게 좁고 작았던가 하고 놀라게 된다. 이 경우는 그 차이가 너무나 크므로 쉽사리 말로 표현되지만, 그 느낌의 차이는 사실 단지 좁다든지 작다든지 하는 말로는 다 표현되지 않는 무한히 복잡한 감정의 복합체이다. 이것이 가령 20대에(키가 다 자란 다음) 살던 곳을 40대 정도에 가보는 경우라면 훨씬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분명히 느낌의 차이는 있다. 어쨌든 이러한 현상은 그 집, 그 동네에 관한 인상이 항상 동일한 것이 아니라 변해왔음을 말해주는 것이 분명하다.

 

 - 앙리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이처럼 '질적인 시간과 양적인 시간'을 구분할 필요성을 제기한 베르그송의 철학은 곧바로 프루스트의 소설 속에 그대로 녹아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닮았습니다. 그런데 베르그송의 상상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마치 한참 뒤에나 세상에 등장할 프루스트의 소설을 미리 정확하게 내다보기나 한 듯이 곧바로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지요.

 

이제 어떤 과감한 소설가가 우리의 상투적인 자아의 교묘하게 짜인 직물을 찢고 그러한 외견적 논리 아래에서 근본적인 부조리를 보여주고, 단순한 상태들의 그와 같은 병치 아래에서, 명명하는 순간 이미 존재하기를 멈추어 버렸던 수만의 다양한 인상들의 한없는 침투를 보여주면, 우리는 그에게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가 우리의 감정을 동질적 시간 속에 펼쳐 놓고, 그 요소들을 말로 표현한다는 사실 자체에 의해, 그 역시 그의 차례가 되어 우리에게 그 감정의 그림자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단,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 그림자를 투사한 대상의 특별하면서도 비논리적인 본성을 의심케 하도록 그것을 배치했다. 표현된 요소들의 본질 자체를 이루는 그런 모순, 그런 상호 침투의 뭔가를 외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를 반성으로 초대했다. 그에 의해 고무되어 우리는 잠시 우리와 우리 의식 사이에 개입시킨 막을 걷어 제쳤다. 그는 우리를 우리 자신 앞에 다시 세운 것[뿐]이다.(170쪽)

 

 - 앙리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베르그송이 이 논문을 발표한 해는 1889년이었고,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처음으로 출간한 해는 1913년이었습니다. 프루스트가 자신의 소설 속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직접 거명하고,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철학들을 은연중에 자주 드러낸 점들을 감안한다면, 자신의 사촌누이와 결혼한 매형이자 당대 프랑스 지성계에서도 가장 우뚝한 인물로 인정받던 베르그송의 책들을 읽지 않았다고 단정기는 어렵겠지요.

 

또한 프루스트의 소설 자체가 굳이 '시간에 관한 소설'임을 따로 고려하지 않더라도, 프루스트는 이미 자신의 작품 속에서 '시간' 말고도 '지속'이라는 베르그송 철학의 핵심 단어를 끊임없이 자주 불러내고 있습니다. 프루스트가 베르그송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특히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으로부터 깊이 연구되었다고도 알려져 있는데, 베르그송 작품의 번역본(작품 해설)에서도 그런 영향의 일단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적 자아, 심층 자아와 내적 지속에 대한 그의 이론은, 외적 조형미의 부각에 힘쓰던 문학으로 하여금 자기 내부의 무의식 세계로 그 시선을 돌리게 하여 상징주의의 개화와 함께 내면문학의 붐을 촉진시켰고, 그의 직관주의는 방대한 반지성적 경향의 움직임을 태동하게 하였는데, 그 대표가 시인 페리(Charles Peguy)였다. 문학비평에서도 티보데(Thibaudet)를 통하여 그의 영향이 뚜렷이 드러났으나, 가장 중요한 영향은 프루스트(Proust)에 대한 영향이라고 하겠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은 바로 그의 지속을 가리키고 있고, 끊일 줄 모르고 무한히 계속되는 그의 문장은, 끊임없이 생동하는 내면세계의 지속을 포용하는 문장으로서 베르그송적인 문체를 대변하고 있다.(750쪽)

 

베르그송의 철학이 프루스트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이정도로 그치고, 이제부터는 프루스트의 문장 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지요. 어쨌든 저는 '프루스트의 문장'을 읽는 동안에 새록새록 떠오르는 '철학자들' 혹은 '작가와 작품들'은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런 작품들이 이 책을 읽는 어려움을 어떻게 타개하는지를 밝히는 게 주목적이니까요.

 

그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2부 격인 <꽃핀 처녀들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 보지요.


아! 슬프게도 더없이 싱싱한 꽃 속에서도 우리는 지극히 미세한 점을 알아볼 수 있으니, 이 점은 정통한 정신에게 오늘 꽃핀 육체마저도 건조하고 열매를 맺어 씨앗이라는 예정된 불변의 형태가 되리라는 걸 벌써부터 그려 보인다. 아침 바다를 감미롭게 부풀리며, 조수가 밀려와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그토록 고요한 바다이기에 움직이지 않아, 그린 듯 보이는 잔물결과도 흡사한 코를 우리는 기쁘게 쫓아간다. 인간의 얼굴은 우리가 바라보는 동안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눈으로 지각하기에는 얼굴 변화가 너무도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녀들 곁에서는 소녀들의 어머니나 아주머니만 보아도 그들 모습이 관통한 거리를 충분히 측정할 수 있으며, 내면의 인력 작용에 따라 대개는 끔찍한 형태로 바뀌는 그 모습은, 삼십 년도 안 되는 사이에 눈매가 처지고 얼굴이 지평선 너머로 저물어 더 이상 빛을 받지 못한다. 자기 종족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줄로 믿고 있던 사람들 안에 감추어진 유대인 애국주의나 그리스도교인의 유전적 특징처럼 그렇게도 깊숙이 피할 수 없는 채로, 난 알베르틴이나 로즈몽드와 앙드레의 장미 꽃송이 아래서 그녀 자신들도 인식하지 못하는, 어떤 상황을 위해 보존한 듯한 커다란 코나 튀어나온 입, 통통한 몸집이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모습은 사람들을 놀라게 할 테지만, 실은 무대 뒤에 있어 언제라도 무대에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어떤 상황의 부름을 받아 개인 자체를 앞선 본성에서 갑자기 발생한, 예기치 않은 운명적인 드레퓌스주의나 교권주의, 또는 민족적이고 봉건적인 영웅주의 같은 것들이다. 개인은 이러한 본성을 통해, 그리고 자신이 본성이라고 여기는 것을 개인적인 동기와 구별하지도 못한 채 생각하고 살고 진화하고 확고히 하며 또는 죽어간다.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자연계 법칙에 의존하므로, 우리 정신은 어느 은화식물이나 이런저런 벼과 식물마냥 우리 스스로 선택한 줄로만 여기는 여러 특징들을 미리 소유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일차적 원인을(유대인 혈통이나 프랑스 가문 등) 인식하지 못하고 이차적 관념만을 포착하는데, 실은 이 일차 원인이 이차 원인을 필연적으로 생산해 냈으며, 그것이 때가 오면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어떤 관념은 심사숙고의 결과처럼 보이며, 또 다른 관념은 건강상 부주의의 결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마치 콩과식물이 종자로부터 그 형태를 이어받듯이, 실은 우리도 우리 가족으로부터 사는 데 필요한 관념이나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이어받는다.

 

마치 모종관 하나에서 꽃들이 저마다 다른 시기에 무르익어 가듯, 나는 발베크 해변의 노부인들에게서 언젠가는 내 친구들도 닮을 그 단단한 씨앗과 무른 덩이줄기를 보았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그때는 꽃들의 계절이었으니. ……(411­∼413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중에서

 

 

저는 이 복잡미묘한 구절을 읽는 동안에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잇따라 머릿속에 나타났다가 재빠르게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프루스트의 문장들은 때로는 극히 느린 움직임으로 포착한 미세한 떨림들의 연속처럼 느껴지는데, 이 대목에서는 마치 오늘날의 카메라 기술이 자주 보여주듯 '시간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매우 빠르게 재생시킨 듯한 느낌을 줍니다.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불과 1,2초 만에 빠르게 지나가고, 태양과 별들이 뜨고 지는 것도 불과 몇 분 사이에 일어난 것처럼 만들어진 영상을 우리는 이미 유튜브에서도 너무나 쉽게 목격하고 있지요.

 

꽃핀 풍경들은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그 꽃들이 다 스러지고 난 다음의 풍경들은 또 얼마나 서늘하고 쓸쓸한가! 시인들은 또 얼마나 자주 꽃들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뚝뚝 흘렸던가! 또한 꽃들이 '사랑'과 자연스레 연결될 때 '꽃이 피고 지는 일'은 그 얼마나 상징적인가!

 

이 대목을 읽으면서 제게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은『폭풍의 언덕』이었습니다. 언제나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던 그 황량한 언덕에도 어김없이 피어났던 히스 꽃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그토록 세찬 바람을 맞으면서도 싱그럽게 피어났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미친 듯한 사랑은 또 얼마나 빨리 시들어 광기어린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던가요.

 

두 번째로 떠오른 작품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극한까지 밀어부친 소설 『율리시스』였습니다. 제임스 조이스 또한 '꽃'을 '애정'과 결코 따로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율리시스』를 읽은 독자들은 그 난해한 책 속에서도 '호우드 언덕'만큼은 결코 잊을 수 없을 테지요. 꽃이 흐드러지게 핀 호우드 언덕에서 주인공인 블룸과 몰리가 '사랑의 절정'에 다다른 장면은 얼마나 농밀하면서도 해독하기 쉬웠던가요! 이번 기회에 일부러 시간을 들여 그 두툼한 책 속에서 간신히 다시 찾은 그 부분을 여기서 인용해 보지요.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포도주가 그의 입천장에서 맴돌다가 꿀꺽 넘어갔다. 버건디 포도를 기계에 넣고 짜는 것이다. 그건 태양열이지. 마치 비밀의 촉감이 내게 기억을 되살려 주는 듯. 그의 감각에 감촉되어 촉촉하게 기억났다. 호우드 언덕의 야생 고사리 아래 숨겨진 채 우리들 아래 잠자는 만(灣) : 하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하늘, 라이온 곶(串) 옆의 자색의 만(灣). 드럼레크 곁에는 녹색. 서턴 쪽으론 황록색. 바다 밑의 들판, 희미한 갈색의 선(線)들, 매몰된 도시. 그녀는 나의 코트를 베개 삼아 머리를 괴고 있었지. 헤더 숲속의 가위 벌레가 그녀의 목덜미 밑에 있던 나의 손을 간질이고, 이러다가 저를 뒹굴게 하겠어요. 오 얼마나 근사하랴! 연고(軟膏)로 차고 부드러워진 그녀의 손이 나를 어루만지며, 애무했다: 내게 쏟은 그녀의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릴 줄 몰랐지. 황홀한 채 나는 그녀 위에 덮쳐 누워 있었지. 풍만하게 벌린 풍만한 입술, 그녀의 입에 키스했다. 냠. 따뜻하게 씹혀진 시드케이크(씨 과자)를 그녀는 나의 입에다 살며시 넣어 주었지. 메스꺼운 과육을 그녀의 입은 따뜻한 신 침과 얼버무렸다. 환희: 나는 그걸 먹었지: 환희. 싱싱한 생기. 뾰족하니 내게 내민 그녀의 입술. 부드럽고 따뜻하고 끈적끈적한 고무 젤리 같은 입술. 그녀의 눈은 꽃이었어, 저를 안아 줘요, 욕망에 찬 눈. 자갈이 굴렀다. 그녀는 잠자코 누워 있었지. 산양 한 마리. 아무도 없고. 만병초 꽃 우거진 호우드 언덕에 한 마리 암 산양이 발 디딤을 든든히 하면서 걷고 있었다. 까치밥나무 열매(똥)를 떨어뜨리며. 고사리 숲 아래 가려져 따뜻하게 안긴 채 그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그녀 위에 마구 덮쳐 누워, 그녀에게 키스했다: 눈, 그녀의 입술, 혈관이 뛰는 그녀의 뻗친 목, 얇은 망사의 블라우스 속에 부푼 여인의 앞가슴, 그녀의 위로 솟은 도톰한 젖꼭지에. 뜨거운 혀를 나는 그녀에게 내밀었지. 그녀는 내게 키스했지. 나는 키스 받았지. 몸을 온통 맡기며 그녀는 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흔들었지. 키스를 받고, 그녀는 내게 키스했지.*(144쪽)

 

* 몰리에게 한 구애가 절정을 이루는, 호우드 언덕에서의 블룸의 숨가쁜 기억(제18장, 몰리의 최후의 독백 참조). 무성한 만병초꽃과 고사리 숲에는 어느 관광객이 꽂아 놓은 '블룸을 방해하지 말라(No disturbing Bloom)'라는 푯말이 있음.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 <제8장 더블린 시 한복판(레스트리고니언즈)> 중에서

 

 

만병초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던 호우드 언덕의 추억은 '역자의 주석'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듯이, 『율리시스』에서도 가장 유명한 제18장에서 다시 한번 반복되지요. 이번에는 블룸이 아닌 몰리의 회상을 통해서 말이죠. 그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몰리의 독백은 Yes에서 시작해서 Yes로 끝나는 '세상에서 가장 긴' 문장이지요. 그녀의 독백에는 쉼표와 마침표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생각엔 쉼표나 마침표가 없으니까요.) 


그이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 나는 가능한 한 그이를 흥분시키기 위해 앞가슴이 터진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어 지나치게 벌어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유방이 막 통통하게 살찌기 시작하고 있었지 전 피곤해요 하고 나는 말했지 우리들은 전나무 동굴 위에 누워 있었지 황량한 곳이었어 세상에서 제일 높은 바위임에 틀림없을 거야 회랑이랑 포곽(砲郭) 및 저 무시무시한 바위들 그리고 고드름인지 뭔지는 모르나 늘어져서 사다리를 이루고 있는 성 미가엘 동굴 진흙이 온통 내 구두를 더럽히고 원숭이가 죽으면 저 길을 통해 바다 밑으로 해서 아프리카까지 가는 것임에 틀림없어요 저 멀리 배들은 마치 나뭇조각 같았어 그것은 몰타를 향해 지나가는 보트였지 그렇지 바다와 하늘 누구든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었어요 그곳에 누워 영원토록 말이야 그이는 옷 위로 유방을 애무했어 남자들이란 그런 짓을 좋아하지요 거기가 동그랗기 때문이야 나는 그이에게 기대고 있었어 하얀 밀짚모자를 쓰고 너무 새것이 되어서 조금 햇볕을 쬘 양으로 말이야 내 얼굴은 왼쪽에서 보는 것이 제일 예쁘지 나는 블라우스를 그와 헤어지는 날을 위해서 터놓았어 살이 다 들여다뵈는 셔츠를 그이는 입고 있었지 나는 그의 가슴이 분홍빛임을 볼 수 있었어요 그이는 한동안 자기 것을 내 것에다 터치시키려고 했지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도록 두지는 않았어 정말 후련해졌어 처음에 그는 몹시 당황했지 두려운 것은 폐병인지도 모르는데다가 혹시 임신될지도 모르잖아 저 늙은 하녀 아이네스가 내게 가르쳐줬지 한 방울이라도 들어가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나는 나중에 바나나를 가지고 시험해 보았지 그러나 그것이 부러지지 않을까 그리하여 어딘가 몸속에 토막이 남아 있지나 않을까 걱정했어 왜냐하면 한때 의사들이 여자의 몸에서 무엇을 꺼낸 적이 있었으니까 고놈의 것이 수년 동안 석탄염에 덮인 채 그곳에 숨어 있다나 남자들이란 자기들이 나온 곳으로 도로 들어가고 싶어서 죽고 못 살지 그들은 결코 속 깊이까지 도달할 수 없는 것 같아 그리고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서 일을 다 치러 버리거든 다음번까지 그렇지 왜냐하면 거기는 참 근사한 너무나 부드러운 기분이 들지 그동안 내내 정말로 보드라운 감촉 어떻게 하여 우리들은 끝나 버렸는지도 몰라 그래 오 그렇고 말고 나는 그이 것을 내 손수건에다 빼게 했지 나는 흥분하지 않은 척 하려 하고 있었지만 내 두 다리를 벌렸지 그가 내 패티코트 속을 터치하지 못하도록 했어 나는 옆이 벌어지는 스커트를 입고 있었어 그이에게서 억지로 생명을 짜냈던 거야 처음엔 그이를 간질이고 있었지 나는 호텔에 있던 그놈의 개를 흥분시키는 것을 좋아했어 르르스스트 그르르릉 그이는 눈을 감고 그리고 새 한 마리가 우리들의 아래쪽을 날고 있었지 그이는 부끄러워했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저 아침의 기분처럼 그이가 좋았어 내가 그런 식으로 그이를 덮쳤을 때 그이는 약간 얼굴을 붉혔지 내가 그이의 단추를 풀고 그것을 꺼내 살갗을 벗겼을 때 그 끝이 일종의 눈(眼) 모양을 하고 있었어 남자들은 안쪽으로 아랫배 밑까지 단추 투성이야 내 사랑 몰리 하고 그는 나를 불렀지 ……(626∼627쪽)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 <제18장 침실(페넬로페)>

 

 

한편, 우리의 성격이 미리 정해진 경로를 따라 핋연적으로 - 프루스트가 말한 대로 '언제라도 무대에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던 상태로' - 때가 되면 저절로 나타난다는 생각은 오늘날의 진화심리학자들이나 뇌신경과학자들의 주장과 놀랍도록 닮아 있어서 특히 놀랍습니다. 『빈 서판』과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쓴 스티븐 핑커야말로 이런 프루스트의 주장들을 가장 강력하게 뒷받침해온 진영의 주역이었지요. 물론 이런 생각은 앙리 베르그송이 1907년에 발표한 『칭조적 진화』에서도 뚜렷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두뇌의 운동기작은, 거의 모든 기억을 무의식 속에 억압하기 위해서, 그리고 의식 속에서 현재 상황을 조명하고 행동이 준비되는 것을 도와 결국에는 유용한 일을 낳을 수 있는 것만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잉여의 기억들은 기껏해야 살짝 열린 문틈으로 몰래 통과할 뿐이다. 그것들은 무의식의 전달자로서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우리 뒤에서 이끌고 가는 것을 알도록 해준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에 대한 명백한 생각을 갖지 않을 때라도 우리는 모호하게 과거가 우리에게 현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의 성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출생 이후부터 살아온 역사를 응축한 것이고, 심지어 출생 이전의 역사를 응축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출생 이전의 성향들도 더불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 과거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욕망하고 의지하고 행위하는 것은 우리의 원초적 영혼의 만곡(彎曲)을 포함하는 과거 전체와 더불어서이다. 따라서 우리의 과거는, 비록 그것의 아주 작은 부분만이 표상으로 된다 하더라도, 전체가 그 추진력에 의해 그리고 경향의 형태로 남김없이 우리에게 나타난다.(24∼26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중에서

 

프루스트의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담긴 7편의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시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받는 작품입니다. 프루스트는 이 작품으로 공쿠르 상을 받았다고 하지요. 바야흐로 지금이야말로 온갖 꽃들이 만발하는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니만큼,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가운데 특히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과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에 담긴 생각들을 거의 동시에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느낌을 주는 화려한 문장을 한 대목만 더 인용해 보지요.


소녀들의 얼굴은 대부분 어렴풋한 붉은 빛 여명에 섞여 확실한 특징들이 아직 솟아나지 않은 상태였다. 몇 해가 지나서야 분명해질 그 구별되지 않는 윤곽 아래로 매혹적인 빛깔만이 보일 뿐이었다. 지금의 윤곽에는 결정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었으며, 그저 자연이, 가족 가운데 고인이 된 분에게 추모 인사를 드리는 정도의 일시적인 유사성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고  우리 몸이 어떤 놀라움도 약속하지 않는 부동성 속에 고정되는 순간은 너무도 빨리 오는 법이어서 그때 가면 한여름에도 벌써 죽은 잎이 보이는 나무들처럼 아직은 젊은 얼굴 둘레에 머리칼이 빠지고 희끗해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모든 희망을 상실한다. 이 찬란한 아침은 그토록 짧기에 우리는 소중한 밀가루 반죽마냥 아직 만들어지는 중인 살갗을 가진 어린 소녀들만을 특히 사랑한다. 소녀들은 매 순간 그녀들을 지배하는 일시적인 인상들로 응고된 유연한 물질의 물결에 지나지 않는다. 소녀들 저마다가 차례차례로 솔직하고 완벽하며 그러나 덧없는 표현으로 주조되어 쾌활함과 진지한 젊음, 응석과 놀람을 담고 있는 작은 조각상인 듯하다. 그러나 가소성(可塑性) 덕분에 우리는 한 소녀가 보여 주는 상냥한 배려에 다양한 모습과 매력을 느낀다. 물론 이런 상냥함은 성숙한 여인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그 여인들은 우리 마음에 들지 않으며, 또는 우리가 마음에 든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아 뭔가 따분하게도 획일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상냥함 자체도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더 이상 얼굴에 유연한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하여, 생존경쟁이 영원히 투사의 얼굴 또는 종교적 황홀에 사로잡힌 얼굴로 만들고 굳어지게 한다. 어떤 얼굴은 ㅡ 남편이 아내를 복종하게 하는 그 지속적인 지배력 탓에 ㅡ 여성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병사의 얼굴로 보이며, 어떤 얼굴은 어머니가 자식들 때문에 날마다 견디어 온 희생이 새겨져 사도(使徒)의 얼굴로 보인다. 또 어떤 얼굴은 수년간의 항해와 폭풍우가 늙은 뱃사공을 연상시켜 단지 복장에서만 여성이란 성별이 드러난다. 물론 우리에 대한 한 여인의 관심은 우리가 그 여인을 사랑할 때면 그녀 곁에서 보내는 시간들에 새로운 매력의 씨앗을 뿌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에게 연달아 다른 여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쾌활하든 쾌활하지 않든 여인의 겉모습은 항상 똑같다. 그러나 청소년기는 완전한 응고가 진행되기 전이라, 소녀들 곁에 있을 때면 그 불안정한 대립 속에 끊임없이 변화하고 유희하는 형태가 주는 광경에 상쾌함을 느끼게 되고, 이 대립은 우리가 바다 앞에서 관조하듯, 자연의 기본 원소들이 끊임없이 재창조되는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434∼436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중에서

 

 

어떤가요? 마르셀 프루스트의 문장들이 참으로 놀랍지 않나요? 그가 여느 과학자 못지 않은 날카로운 관찰력을 지녔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프루스트의 작품 속에 담긴 문장들이 철학자 베르그송의 작품 속 문장들과 긴밀히 조응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합니다.


그러나 분열의 진정한 심층적 원인은 생명이 자신 안에 보유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생명은 경향이며 경향의 본질은 다발의 형태로 발달하는 것인데, 생명은 단지 커진다는 사실로 인해 자신의 약동을 공유한 채로 갈라지는 방향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관찰할 때 성격이라는 특수한 경향의 전개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역사를 잠시 돌아보기만 해도 어린 시절의 인격이 비록 불가분적이지만 다양한 인물들을 그 안에 결합하고 있었음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발생 상태에 있음으로 해서 전체가 혼합되어 있을 수 있었다. 이러한 약속으로 충만한 불확실성이야말로 유년기의 최대 매력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상호침투하는 인격들은 성장하면서 양립 불가능하게 되고 우리 각자는 하나의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선택을 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하고 있으며 또한 끊임없이 많은 것을 버리고 있다. 우리가 시간 속에서 거쳐가는 길은 우리 자신이 처음에 그러했던 상태, 또 될 수 있었음에 틀림없는 상태들 전체의 잔해들로 덮여 있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삶을 가지고 있는 자연은 결코 그러한 희생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 자연은 성장하면서 분기된 다양한 경향들을 보존하고 있다. 그것은 따로따로 진화하는 종들의 분기하는 계열들을 그 경향들과 함께 창조한다.(161∼162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중에서


이것으로 마르셀 프루스트와 앙리 베르그송의 작품 속에 담긴 문장들에 대한 소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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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1-05-10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기서도 만나게 되었네요.ㅎ
영상을 보고 한눈에 알았습니다.^^

oren 2021-05-10 19:42   좋아요 1 | URL
아... 모나리자 님이 알라딘에도 계셨었군요!!
정말 깜놀이고, 또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