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크레티우스가 대략 어느 시대의 인물이었는지를 아주 쉽게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가 한 사람의 시인을 더 필요로 한다면 그는 바로 베르길리우스(BC70∼19)다. 왜냐하면 루크레티우스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게 없지만 후세의 기록 가운데 <베르길리우스의 생애>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루크레티우스가 죽던 바로 그 해에 베르길리우스가 때마침 '성인식'을 치렀다는 사실이. 말하자면 그 두 시인은 로마 최고의 시인이라는 명예로운 자리를 두고 서로 '바톤 터치'를 주고 받은 사이였던 셈이다.

 

물론 루크레티우스가 (나중에 위대한 시인으로 추앙받게 된) 베르길리우스에 비견될 만한 인물이 될 가능성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베르길리우스는 누가 뭐래도 호메로스의 전통을 직접적으로 물려받은 '로마 최고의 국민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인은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본받아 『아이네이스』라는 '로마 건국 신화'를 빚어 냄으로써 무려 이천 년 동안이나 '로마 최고의 시인'이라는 드높은 영예를 굳건히 지켜 왔다. '지상 최고의 국가 탄생'을 장엄한 가락으로 노래하고 '로마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빛나는 문장으로 빚은 웅혼한 예술 작품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그를 뛰어넘은 로마의 시인은 여태까지 없었다.

 

그에 반해 루크레티우스는 '민족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철학'을 시로 노래했다. 그것도 단순한 곁가지 철학이 아니라 '우주 만물의 기원과 사물의 본성'을 근원적으로 파고드는 심오한 철학을 담은 시였다. 그러니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가 베르길리우스의 애국시와는 얼마나 서로 '차원'이 다른 작품이었는지는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다. '로마의 영광'이 극치에 다다른 시기에 쓰여진 베르길리우스의 빛나는 예술작품이 결국 '로마인'들을 향한 '애국의 노래'였다면,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바로 인류 전체를 향해 '사물의 근본 원인'을 긍구하도록 깨우치는 '진리의 노래'였던 셈이다. 그러니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극소수의 독자들에게나 겨우 읽힐 정도로 몹시 어렵고도 희귀한 작품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시인의 명성'과 직결되는 '대중성'과는 오래도록 담을 쌓고 지낼 운명이었다.

 

그런데 루크레티우스의 표현대로 '긴 세월을 통해 어떤 것도 손실 없이 유지될 수 없는 이치' 가운데서도 그의 시는 꿋꿋이 살아 남아 어느새 베르길리우스의 걸작을 도리어 하찮은 것쯤으로 여기게 만들 정도가 되었다. 그가 죽으면서 베르길리우스에게 넘겨줬던 그 바톤이야말로 앞선 주자에게나 뒤따르는 주자에게나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끝끝내 서로의 '우열'을 다툴 여지가 많았던 탁월한 주자에게 어울릴 만한 것이었다. 오직 붓끝을 통해서 오래도록 종이 위를 내달렸을 뿐인 재주이긴 하지만.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오로지 독창적이기만 했다면 그의 위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데까지 다다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대부분 그보다 몇백 년 앞서 살았던 위대한 철학자인 에피쿠로스로부터 흘러나온 것들이었다. 여기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에피쿠로스의 철학으로까지 거술러 올라가는 건 너무 샛길로 깊숙히 빠져드는 일이기에 피하고 싶다. 다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쾌락주의의 창시자'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흔히 통념적으로 말하는 '쾌락의 추구'와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는 사실만은 알고 넘어갔으면 좋겠다.

 

에피쿠로스는 '우주 만물의 근본 원인'에 대하여 깊이 천착한 '신과 같은' 철학자였고, 엄청난 저작을 저술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게 하나도 없는 형편이다. 오늘날에는 기껏해야 그가 쓴 '세 통의 편지'가 『그리스 철학자 열전』(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저술)이라는 작품을 통해 전해질 뿐인데, 그 책이 집필된 시기가 2세기말이나 3세기 초엽이어서 도리어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보다 250년쯤 뒤처지는 형편이다.

 

루크레티우스 철학시가 탁월한 건 그의 이론이 놀랍도록 '현대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우주 만물은 '원자'와 '공간'으로 이뤄져 있고, 사물의 씨앗이나 마찬가지인 원자의 크기는 극히 작지만 그 수는 무한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공간 또한 무한하다. 우주 만물의 생성과 소멸은 원자들의 만남과 연결이 빚어낸 결과일 뿐이며, 거기에 '신이 개입할 여지'는 조금도 없다. 우주는 '펼연'으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우연'도 개입하는데 그것은 바로 '원자들이 일탈하여' 생기는 결과이다. 인간의 영혼 또한 '원자들의 결합'에 따라 생성되었다가 육신이 흩어지면서 함께 소멸한다. 따라서 영혼은 신체와 함께 죽는다. 그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요약하자면 '유물론적 무신론'이라고 할 수 있다.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지닌 또다른 놀라운 점은 '지극히 현대적'이면서도 또한 '몹시 체계적'이라는 점이다.

 

'원자론의 기본 원리'에서 시작하여 우주의 무한함까지 설명하는 부분은 고작 제1권의 내용일 뿐이다. 원자의 운동으로부터 '자유의지'를 찾아 내고, '물질의 근원'과 '신의 부존재 증명'까지 나아가는 내용까지도 제2권으로 족하다. 제3권에서 다루는 '영혼과 육체의 분리불가능 증명'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증명하는 데로 나아간다. 제4권에서 다루는 '감각과 사고'는 '현대 과학'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영상들과 시지각(視知覺)에 대한 통찰들'은 프랑스의 철학자인 앙리 베르그송이 『물질과 기억』에서 주장하는 논리와 너무나 닮아 있다. 그밖에 '수면과 꿈에 대한 내용'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직접 맞닿아 있고, 성욕(性慾)과 성애(性愛)에 대한 놀라운 통찰은 쇼펜하우어가 '연애의 형이상학'에서 주장한 논리의 원형을 보는 듯 생생하다. 

 

제5권에서 설명하는 '천문 현상들'은 '첨단 우주물리학'과 사뭇 현격한 격차를 느끼게 하는 설명들이 많지만 결코 허황된 주장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죽하면 갈릴레이와 아인슈타인이 이 책으로부터 영감을 얻었겠는가. 이어지는 '생명체의 발생'에 대한 설명은 다윈의 『종의 기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문명의 발전'을 다룬 온갖 시적 표현들은 마치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쓴 『총,균,쇠』나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빼닮았다. 문명의 시작, 언어의 기원, 불의 기원과 사용, 금속의 발견과 사용, 농업의 기원과 발달, 기술의 발달 등이야말로 루크레티우스가 제5권에 다루는 소주제들이기 때문이다. 제6권에서 다루는 '대기의 현상들'과 '지상의 현상들'은 오늘날 기상학과 지질학이 다루는 문제들을 포괄하고 있다. 천둥, 번개, 벼락, 구름의 형성을 다루고, 화산과 지진 현상까지도 빼놓지 않았다.

 

(루크레티우스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와 서로 깊은 교감을 주고 받은 책들. 책이 최초로 쓰여진 순서대로 쌓았다_나중에 보니 마키아벨리의 책이 너무 높이 올라갔다. 그 책은 무려 『그리스철학자열전』 바로 위에 놓여야 옳다. 비록 그 두 책 사이에 놓인 세월의 간극이 '천 년'도 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마키아벨리는 몽테뉴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셰익스피어도 이 책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맥베스』의 2막 2장에는 셰익스피어가 이 책에서 그대로 인용한 싯구 일부가 등장한다. 맥베스의 '명대사' 가운데 하나가 바로 루크레티우스의 시에서 옮겨졌던 셈이다.)

 

이토록 방대한 내용들을 한 권의 시로 다 담아내다니, 루크레티우스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책이 지닌 '엄청난 위험성'을 직감한 쪽이 '종교계'였음을 추정하기란 조금도 어렵지 않다. 결국 이 책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금서'로 지정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고, 언제부터인가 이 지구상에서 아예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어느 순간부터 이 책은 말 그대로 구전을 통해서나 희미하게 그 존재가 전해지는 '전설적인 신비의 책'이 되고 말았다. 어느 고서 수집광이 그 책을 먼지 속에서 다시 찾아낼 때까지는.

 

이 책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세상의 빛을 다시 보게 되었는지 나는 자세히 모른다. 이 책의 재발견을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가 책으로 나왔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여태까지도 스티븐 그린블랫이 쓴 『1417년, 근대의 탄생』이라는 책을 직접 사서 읽은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크레티우스의 책이 오늘날에 와서야 엄청난 재조명을 새로이 받게 된 건 결코 아니다. 켜켜이 쌓인 먼지 속에서 기나긴 세월 동안 은둔을 계속하던 이 책을 독일의 수도원에서 마침내 구출해 낸 포조의 노력 덕분에 1417년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곧장 이 책에 매료되었으니 말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중세의 프랑스 철학자인 몽테뉴였다. 르네상스를 활짝 열어젖혔던 숱한 천재들, 가령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마키아벨리 또한 그런 인물들이었다. 고대 철학에 정통했던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이 책을 탐독했음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루크레티우스가 남긴 장시는 현대인들이 읽기에는 자칫 딱딱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적지 않다. 또한 오늘날의 엄청나게 축적된 온갖 과학적 지식들에 비춰보면 어이없는 실소를 자아낼 만한 대목들도 아예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의 시는 '사물의 본성을 탐구하려는 끈질긴 열정'과 더불어 여느 문학작품도 쉽사리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로 힘찬 문장들과 아름다운 표현들이 가득하다. 그토록 오래 전에 살았던 인물이 오로지 물질과 공간만으로 '우주의 근본 원리'를 구축하고 그걸 빼어난 시로 노래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로마 최고의 시인이었던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의 예술작품 속에 알게 모르게 스며든 '인생에 대해서 느끼는 기이한 우울감'을 좀처럼 숨기지 못했는데, 비극적이라기보다는 멜랑코리에 가까운 그 느낌으로부터 'lacrimae rerum(사물에 대한 눈물)'이라는 유명한 용어가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 시인이 남겼던 유명한 문장인 "사물의 원인을 아는 자는 행복하여라(felix qui potuit rerum cognoscere causas)"는 후세 사람들의 짐작으로는 아마도 루크레티우스를 향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고 한다. 루크레티우스를 읽는 매력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오로지 사물의 근본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끝없이 탐색에 몰두하는 놀라운 열정, 아무런 근거도 되지 못하는 신화에 대한 철저한 거부, 때로는 난해하고 투박하지만 오롯이 진실만을 전달하고자 하는 진정성 넘치는 시적 표현 등은 고대의 여느 다른 시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물질의 근원과 우주의 비밀'을 밝히기 위한 숱한 도구들을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던 까마득한 그 옛날에, 오로지 '관찰'과 '상식'과 '추론'에만 의지한 채 이토록 '지극히 현대적인 자연과학적 철학'을 예술작품으로 빚어냈다는 사실이 참으로 경이롭다.

 

오늘날 우상 숭배나 다름없을 만큼 맹목적인 종교로 변질된 기독교에 대해 격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월든』에서 '한 권의 책과 새로운 기원'에 대해 아주 함축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을 남겨 놓았다. 아주 가끔씩 만나게 되는 '고대의 진귀한 책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게 되면 나는 어김없이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그 옛날의 현자(賢者)를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혹시나 이 책이 바로 그 책이 아닐까, 하면서.

 

 

 한 권의 책과 새로운 기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을 읽고 자기 인생의 새로운 기원을 마련했던가! 우리의 기적들을 설명해주고 새로운 기적들을 계시해줄 책이 어쩌면 우리를 위하여 존재할 가능성은 크다. 지금 내가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어느 책에 표현되어 있을지 모른다. 우리를 당혹하게 하고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며 우리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문제와 똑같은 문제들이 일찍이 모든 현명한 사람들에게도 제기되었다. 한 문제도 빠짐없이 말이다. 그리고 이들 현인들은 저마다 이 질문들에 대해 해답을 제시했다. 자기 능력에 따라, 또 자기 고유의 언어와 생활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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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12-11 0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책이 쌓인 순서가 시대순이었군요. oren님의 섬세한 자리 배치에 깊은 뜻이 있었다는걸 뒤늦게 알게 됩니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와 관련해서 「1417년 근대의 탄생」은 책을 구입해 놓고 아직 읽지 못했는데, oren님 덕분에 꺼내 놓게 됩니다^^:

oren 2017-12-11 09:42   좋아요 1 | URL
제가 루크레티우스라는 시인을 처음 알게 된 건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을 때였답니다. 몽테뉴가 얼마나 자주 그 시인의 이름과 싯귀를 인용하는지를 셀 수도 없을 정도였지요. 도대체 ‘루크레티우스‘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견딜수가 없었지만 그에 관해 자세히 알 도리가 없더군요. 제가 수상록을 처음 읽은 때가 1983년이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그 흔한 인터넷조차 아예 없었으니까요. 34년 만에 루크레티우스가 쓴 책을 직접 읽고, 책탑까지 시대순으로 쌓고 나서 곰곰 생각해 보니 루크레티우스가 새삼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1417년, 근대의 탄생』은 저도 꼭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루크레티우스의 책을 찾아낸 인문학자 ‘포조 브라치올리니‘는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라는 책에서도 상세히 기술되어 있을 정도로 ‘고문서 수집가로서의 활약‘이 참으로 대단했던 인물이더군요. 이미 네이버 지식백과에도 등재되어 있을 정도고요.

nodiggety 2017-12-11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티븐 그린블랫의 책을 읽은 후 관심이 생겨 루크레티우스를 읽고 그 후 Epictetus의 철학에 관한 Penguin에서 나온 The Art of Happiness을 읽었어요. 개인적으로 Swerve (1417년 근대의 탄생)도 The Art of Happiness도 루크레티우스의 작품에 비해 좀 미흡한 점이 많아서 관심 있으면 읽어볼만하지만 퓰리처상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oren 2017-12-11 09:54   좋아요 0 | URL
스티븐 그린블랫의 책이 나온 덕분에 루크레티우스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예전보다 훨씬 더 높은 관심을 끌게 된 분위기도 있는 듯합니다. 저도 이번에 루크레티우스의 책을 읽고 나서 『그리스철학자열전』에 담긴 「에피쿠로스 편」을 다시 읽어 봤지만, 루크레티우스의 탁월한 시적 표현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더군요.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그 책에서 ‘에피쿠로스‘가 수많은 ‘그리스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더군요. 『그리스철학자열전』에 담긴 인물들이 무려 73명인데 말이지요.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제논,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디오게네스, 데모크리토스 등등 그 숱한 걸출한 철학자들을 다 제쳐두고 에피쿠로스에게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한 점이 고맙기까지 하더군요.

2017-12-11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2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