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대우고전총서 29
루크레티우스 지음, 강대진 옮김 / 아카넷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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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에는 만족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사랑을 피하는 사람에게 베누스의 결실이 결핍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피해 없는 즐거움을 누린다.

왜냐하면 확실히 여기서 나오는 쾌락은 사랑으로 비참해진 이들에게보다는

건전한 사람들에게 더 순수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열정은

소유의 바로 그 순간에도 불확실한 방향으로 출렁이고,

확신하지 못하니 말이다, 무엇을 먼저 눈과 손으로 즐길지에 대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했던 바를 졸라 누르고, 그 육체에 고통을

가하며, 자주 이로 입술을 깨물고

입끼리 부딪게 한다. 이는 쾌감이 순수하지 않아서고,

무엇이든 그 대상 자체를 다치게 하도록 부추기는

자극이 숨어있어서다. 거기서 저 광기의 싹이 돋아난다.

하지만 베누스는 사랑 가운데서 이 고통을 가볍게 부수고,

달래주는 쾌락을 섞어 그 입을 재갈 물린다.

왜냐하면 거기에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열정을 발생시킨

같은 몸 안에서 불길이 다시 꺼질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이.

하지만 자연이 모든 게 반대로 되도록 맞서 싸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그걸 더 많이 가질수록

가슴이 더욱더 무서운 욕망으로 불타게 되는 유일한 대상이다.

왜냐하면, 먹을 것, 마실 것은 지체들 내부에서 흡수되고,

이것들은 정해진 부위에 자리 잡을 수 있어서,

물과 빵에 대한 이 욕구는 쉽사리 채워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람의 얼굴과 아름다운 색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즐기도록 육체 안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섬세한

영상 외에는. 비참한 희망은 자주 그것을 바람에게서 취한다.

마치 목마른 사람이 꿈속에서 물 마시길 꾀하나, 그의 사지에서

열기를 꺼줄 수 있는 물은 주어지지 않고,

그는 음료의 영상을 좇으며 헛되이 애쓰고

타는 불길 가운데서 마시면서도 목마른 것처럼,

꼭 그렇게 베누스는 사랑 속에서 영상으로써 사랑에 빠진 자들을 희롱하고,

그들은 눈앞에 보면서도 자신들의 몸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손으로써 부드러운 사지에서 무엇 하나 벗겨내지

못한다, 확신 없이 온몸을 방황하면서.

마침내 사지로써 결합하여 청춘의 꽃을

즐기게 되고, 이제 육체가 즐거움을 예고하며,

여성의 밭에 베누스가 씨를 뿌릴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은 탐욕스레 육체를 부딪고, 입의 타액을

서로 섞으며, 이로써 입을 누르고 숨을 헐떡인다,

헛되이. 왜냐하면 이들은 거기서 아무것도 벗겨낼 수 없으며,

몸 전체에서 아무것도 몸속으로 뚫고 들어가거나 떠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들이 이것을 이루고자 원하는 듯, 또는 그러려 애쓰는 돗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 정도까지 그들은 열망으로써 베누스의 연합 속에 엉겨붙는다,

사지가 쾌감의 힘에 풀려 늘어진 동안에도.

 

결국 모여 있던 욕구가 힘줄에서 무너지게 되면,

잠깐 동안 열정의 광란에 작은 휴식이 생겨난다.

그런 후에 같은 광기가 되돌아오고, 저 광포함이 다시 찾아온다,

자신들이 스스로 닿기를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는데,

그리고 자신들의 이 병을 이길 방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정도까지 불확실한 채로 그들은 보이지 않는 상처에 스러져 간다.

(336∼338쪽)

 

 -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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