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성찰 을유세계문학전집 90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신정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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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긋기)

 

마치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음악을 들려주는 오페라 대본과 같은 것

 

우리가 그리스 비극에 지나친 관심을 두는 일은 피하자.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인문학조차도 그리스 비극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이해력을 우리에게 전수하지 못했다. 아마 그리스 비극만큼 순전히 역사적이면서도 중립적인 주제들이 뒤섞인 작품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는 비극이 당시 아테네에서 종교 의례였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비극 작품은 무대 위보다는 관객들의 마음속에서 더 생생하게 실현되었다. 당시에는 문학 외적인 면, 즉 종교적 분위기가 무대와 관객을 사로잡았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것은 마치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음악을 들려주는 오페라 대본과 같은 것이다. 혹은 종교적 주제의 그림이 있는 테피스트리에서 다양한 색깔의 실만 있는 뒷면만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지금 고대 그리스를 전공하는 학자들은 아테네인들의 신앙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므로 그것을 재구성하는 일을 해낼 수가 없다. 만일 그것을 못해 낸다면 그리스 비극은 사전도 없는 외국어로 쓰인 책과 다름없을 것이다.(173∼174쪽)

 

 

 

신학 시인(神學詩人, teopoet)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 비극 시인들이 영웅들의 가면을 쓰고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말을 붙인다는 점이다. 셰익스피어는 언제 이렇게 하는가? 아이스킬로스는 시학과 신학 사이의 모호한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쓴다. 그가 다루는 방대한 주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고르라면 미학적, 형이상학적 그리고 윤리적인 것이 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신학 시인(神學詩人, teopoet)이라 부르고 싶다. 그를 고뇌에 빠지게 했던 문제들로는 선과 악, 자유, 정의, 우주의 질서, 만물의 원인 등이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이러한 초월적인 문제들을 점진적으로 다루기 위한 시리즈였다. 따라서 그의 영감은 차라리 종교 개혁의 추동과 비슷해 보인다. 그리고 그는 글 쓰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사도 바울이나 루터 쪽을 더 닮았다. 그는 믿음을 통해 민중 종교를 극복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민중 종교란 한 시대가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이었다면 이러한 충동이 시를 쓰는 쪽으로 이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에서는 종교가 사제의 영향을 덜 받는 반면에 환경의 영향을 더 받고 더 유연했기 때문에 신학적 관심이 시적, 정치적 그리고 철학적 관심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조명받을 수 있었다.(174∼175쪽)

 

 

 

영웅이 비극적 운명을 겪는 것도 스스로가 원해서이다

 

나는 고전적인 이론들이야말로 지나친 단순화의 희생물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영웅들의 행위를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일반 관객들의 마음속에 영웅주의가 불어넣은 효과를 이용해 그 이론들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척 화려하지만 실속은 없는 행위들만 일어나는 그러한 층위의 삶을 보통 사람은 알 수가 없다. 그는 생기 넘치고 충만한 상태도 알지 못한다. 그는 필요한 일만 하고 근근이 살아가면서 남들이 억지로 시킬 때만 행동에 나선다. 그는 항상 떠밀려 살고 있으며, 그의 행위는 반사 작용일 뿐이다. 그는 자기 관심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경우에 따라선 나서야 한다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그에게는 모험의 의지가 가득한 사람이 미친 사람처럼 보이고, 비극의 주인공은 아무도 시키지 않았던 일의 후유증을 겪으며 사서 고생하는 사람일 뿐이다.

 

결국 비극의 기원은 숙명과는 거리가 멀고, 영웅이 비극적 운명을 겪는 것도 스스로가 원해서이다. 그러므로 무위도식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비극의 인물들은 언제나 허구적이다. 모든 고통은 영웅이 관념적 역할, 즉 자신이 선택한 상상의 임무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가 또 다른 배역을 맡아 연기하면서 나중의 배역을 더 진지하게 연기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전적인 자유 의지는 비극적 과정의 근원이 되어 사건을 진행시킨다. 이러한 '의지의 행위'는 그것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일련의 새로운 실재들, 즉 비극적 질서를 창조한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기본 욕구 외에는 더 바라는 게 없고 그 욕구란 것도 그냥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사람들에게는 이 '의지의 행위'가 당연히 허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176∼177쪽)

 

 

 

눈을 높여야 하고 고양되어야 한다

 

비극은 우리의 일상 수준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는 거기에 맞춰 눈을 높여야 하고 고양되어야 한다. 그것은 비현실적이다. 만일 현존하는 것 가운데 비슷한 것을 찾으려면 우리는 눈을 들어 역사의 가장 높은 봉우리들을 봐야 한다.(178쪽)

 

 

 

우리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평범성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야심에 찬 사람이기 때문

 

비극은 위대한 행위를 지향한다는 점이 우리 마음에 전제되어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허세일 뿐이다. 비극은 바로 우리 발밑에서 작품을 시작하게 하여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수동적으로 작품 속에 끌고 들어가는 리얼리즘의 명료성과 핍진성을 부과하지 않는다. 마치 영웅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운명으로 택하듯, 비극을 즐기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어느 정도 그것을 원해야 한다. 그럴 때 그것은 우리에게 위축된 형태로나마 남아 있던 영웅성을 사로잡으러 온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내면적으로 조금씩 영웅의 잔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단 영웅의 행보에 올라타기만 하면, 우리는 비극을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힘과 상승 충동이 내면 깊은 곳에서 고동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역시 초인적인 긴장을 걸머지고 영웅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주위의 모든 것이 거대해지면서 한층 고결한 존엄성을 띠게 되는 것을 놀라움 속에서 발견할 것이다. 무대 위의 비극은 현실 속의 영웅을 발견하고 경탄하게끔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준다. 그렇기에 사람의 심리를 조금 알았던 나폴레옹은 프랑크푸르트에 머물고 있을 때 자신의 진중 극단이 항복한 여러 국왕 앞에서 희극을 공연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탈마로 하여금 라신과 코르네유 비극의 주인공만 연기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내면에 품고 있는 영웅의 흔적 주위에는 천박한 본능을 가진 무리들이 배회하며 소동을 일으킨다. 우리는 새로운 길을 내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 본능적으로 커다란 불신을 품는다. 우리는 누가 세속적 차원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러나 반대로 세속을 초월하려 하는 대담한 사람에게는 단호하게 그 이유를 따지고 나선다. 우리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평범성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야심에 찬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웅의 길은 이렇게 야심을 품으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아무리 천박한 사람도 잘난 사람보다 우리를 화게 하는 일은 없다. 그러니까 영웅이 직면한 위험은 불행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불행은 딛고 일어서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숭고함과 웃음거리는 백지 한 장 차이다"라는 경구는 영웅을 진정으로 위협하는 위험이 무엇인지를 표현하는 말이다. 영웅이 넘치는 위대함과 최고의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되는대로 생겨 먹은" 보통 사람들처럼 되기 싫다는 자신의 우월성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면 그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새로운 예술, 새로운 과학, 새로운 정치를 시험하는 개혁가는 평생을 적대적이고 부패한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이 환경은 영웅에게 사기꾼은 아니라 할지라도 허깨비 같은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환경, 즉 전통, 통념, 관습, 기성세대의 방식, 민족적 풍습, 전형 등 한마디로 말해 광범위하게 형성된 타성을 거부할 때 영웅이 된다. 이 모든 것은 오랜 세월 켜켜이 쌓여 땅속 깊은 지각을 형성하고 있다. 영웅은 생각을 통해 두껍고 부담되는 이 단층을 폭파시켜야 한다. 불현듯 그의 환상 속에 나타난 이 생각은 공기 입자보다도 가벼운 미립자이다. 타성과 자기 보존의 본능은 그것을 참을 수 없어 복수에 나선다. 이리하여 그 대항마로서 리얼리즘을 보내고 영웅을 우스꽝스럽게 포장해 버린다.

 

영웅의 면모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존재가 되려고 하는 의지에서 볼 수 있다. 따라서 비극적 인간은 그 몸의 반이 현실 바깥으로 나가 있다. 그러므로 그의 발을 잡아 그 몸 전체를 현실로 돌려보내는 것만으로 그는 희극적 인물로 전락한다. 고귀한 영웅의 이야기는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으며 어렵사리 현실 세계의 타성을 딛고 일어난다. 그것은 포부를 통해 영위되며, 미래는 그것을 증거하게 된다. 희극성(vis comica)은 영웅의 순수한 물질적 측면만 강조할 뿐이다. 현실은 픽션을 통해 전개되고 자기 존재를 우리에게 부과하면서 비극적 역할을 재흡수한다.

 

영웅은 이 역할을 자기 일부로 받아들이고 아예 자신을 그것과 섞어 버린다. 그리고 영웅은 현실에 의해 재흡수되면서 그의 야심찬 의도는 자신의 몸에 굳어지고 물질화된다. 결국 우리는 그의 역할을 우스꽝스러운 변장, 즉 천박한 존재가 쓰고 다니는 가면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179∼181쪽)

 

 

 

희극은 비극을 딛고 살아간다

 

영웅은 시대를 앞서가면서 미래에 기대를 건다. 그의 태도는 유토피아적 의미를 갖는다. 그는 지금의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하지 않고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말한다. 그래서 여성 페미니즘 운동가는 여자들이 더 이상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가 없을 그날을 희구한다. 그러나 희극 작가는 페미니스트들의 이상 대신 현재 그 이상을 실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근대 여성을 내세운다. 미래의 환경을 전제하고 만들어진 어떤 것이 현재에 얼어붙어 주춤거릴 때 그것은 가장 사소한 생존 기능조차 잃어버리게 되고, 이를 보는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사람들은 날아가던 관념의 새가 썩은 물이 내뿜는 독기를 맡고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그것은 유익한 웃음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웅 한 명에게 상처를 줄 때마다 백명의 사기꾼들을 징벌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소설이 서사시를 딛고 살아가는 것처럼, 희극은 비극을 딛고 살아간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볼 때, 희극은 고대 그리스에서 새로운 신들을 도입하고 새로운 관습을 만들어 내려는 비극 작가와 철학자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태어났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민중 전통의 이름으로, '우리 선조들'의 이름으로 그리고 성스러운 관습의 이름으로 소크라테스와 에우리피데스의 인물들을 무대 위에 올렸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철학에, 에우리피데스가 문학 작품에 담았던 내용을 같은 이름의 두 등장인물에게 반영한다.(181∼182쪽)

 

 

 

비극에서 희극으로 가는 사이의 거리

 

희극은 보수적인 사람들의 문학 장르이다.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 상태와 이미 되어 있다고 믿는 상태 사이의 거리가 비극에서 희극으로 가는 사이의 거리이다. 그것은 숭고미와 익살미 사이의 통로이다. 영웅 캐릭터가 의지의 단계에서 지각의 단계로 이행하면서 비극이 퇴화하고 붕괴한 결과인 희극의 등장을 야기한다. 신기루는 그냥 신기루로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돈키호테에게도 일어나는데, 모험의 의지를 천명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돈키호테가 스스로를 모험가라고 굳게 확신할 때이다. 불멸의 소설은 단순한 희극으로 전락할 지경에 처한다. 앞서 말했듯이, 소설과 순수한 희극은 단지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다.

 

『돈키호테』를 처음 읽은 독자들에게는 이런 형태의 소설이 새로운 문학 형식으로 비쳤을 것이다. 아베야네다판 서문에서 작가는 두 번에 걸쳐 이와 관련된 언급을 한다. 서문 첫머리에서 "『돈키호테』는 작품 전체가 희극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하는 아베야네다는 계속해서 이렇게 덧붙인다. "세르반테스는 『갈라테아』와 산문 희극들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좋으리라. 그가 쓴 소설이라곤 이것들이 거의 유일하니까 말이다." 세르반테스 시대의 모든 극작품을 지칭하는 장르의 이름이 희극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실 이 문장들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182∼183쪽)

 

 

 

 

플라톤이 여기서 소설의 씨앗을 뿌렸다는 것

 

소설의 상위 레벨은 비극이다. 음악의 여신 뮤즈는 희극으로 전락하는 비극성을 따라 비극으로부터 하강한다. 이러한 비극적 행로는 불가피한 것이다. 비극은 소설의 일부를 형성해야 한다. 설사 그 경계를 이루는 것이 섬세한 테두리선에 지나지 않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나는 페르단도 데 로하스가 『셀레스티나』를 쓰면서 불렀던 희비극이라는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희비극이다. 이 장르의 발전은 『셀레스티나』에 와서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고, 마침내 『돈키호테』에 이르러서야 숙성되어 만개한다.

 

물론 비극적 요소는 크게 확장되면서 심지어 희극적 부분과 대등한 정도의 공간과 가치를 소설 내에서 차지하기에 이를 것이다. 그것이 차지하는 정도와 변동의 폭은 정해진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가능하다.

 

비극과 희극의 종합으로서 소설은 언젠가 플라톤이 특별한 해석 없이 암시했던 신기한 희망이 실현된 결과이다. 그것은 이른 새벽의 향연에서였다. 디오니소스의 액체에 잔뜩 취한 손님들이 무질서하게 잠들어 있다. 아리스토데모스가 "아침 닭이 울 때" 몽롱한 상태로 잠에서 깨어 보니 소크라테스, 아가톤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는 뜬눈으로 밤을 새운 것 같다. 그는 이들이 어려운 주제의 대화에 빠져 있는 소리를 들었다고 믿는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젊은 비극 작가인 아가톤과 희극 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에 꼿꼿이 맞서 비극과 희극의 시인은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이 대목에 대해서는 만족스러운 해석이 없었다. 그러나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독창적인 영혼을 가진 플라톤이 여기서 소설의 씨앗을 뿌렸다는 것이다. 희미한 여명 속에 소크라테스가 향연에서 취했던 태도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영웅이자 광인이었던 돈키호테와 마주칠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185∼186쪽)

 

 

 

『일리아스』와 『돈키호테』

 

스페인 사상에서 애국으로 통했던 것이 결과적으로 해 놓은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정작 스페인이 이룬 위대한 업적들에 대해서는 충분한 연구가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서 명백해진다. 별로 칭찬받을 만한 것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열광적인 찬사가 쏟아지고, 정작 모든 에너지를 바쳐 찬사를 보내야 할 곳에는 그러한 반응이 전혀 없는 것이다.

 

모든 서사시가 안으로는 마치 과일의 씨처럼 『일리아스』를 품고 있는 것처럼, 모든 소설 역시 안으로는 종이의 줄무늬 세공처럼 『돈키호테』를 품고 있다는 것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책이 아직까지 없다.(187쪽)

 

 

 

치마 입은 돈키호테

 

플로베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책 읽는 법조차 몰랐지만 이미 가슴으로 알고 있던 『돈키호테』에서 나의 모든 근원을 발견했다." 보바리 부인은 영혼에 최소한의 비극성을 지니고 있는 치마 입은 돈키호테이다. 보바리 부인은 낭만주의 소설의 독자이면서 반세기 이상 유럽을 떠돌았던 부르주아적 이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가련한 이상이여! 부질없는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여, 실증주의적 낭만주의여!

 

플로베르는 소설 예술이 비판적 의도와 희극적 동력을 가진 장르임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보바리 부인』을 집필할 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비판을 지향한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은 나의 능력을 더욱 붇돋아 준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비판적이고 더 나아가 해부학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 다른 대목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아! 근대 사회에 부족한 것은 그리스도도, 워싱턴도, 소크라테스도, 볼테르도 아니라 바로 아리스토파네스이다."(187∼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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