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성찰 을유세계문학전집 90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신정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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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아! 만일 세르반테스의 문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아낸다면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헤맨 지 350년 후에 국가의 전통을 좇으라고 우리에게 권고하는 것은 잔인하기 그지없는 빈정거림이 아닌가? 전통이라! 스페인에서 전통이라는 것의 실상을 알아보면 그것은 스페인의 잠재적 가능성을 서서히 없애 버리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을 따를 수 없다. 내게 스페인은 극히 드문 경우에만 실현되었던 드높은 소망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로 전통을 따를 수 없다. 아니, 욓려 그 반대이다. 우리는 전통을 거슬러 가야 하고, 전통을 초월해서 가야 한다. 우리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전통의 잔해 사이에서 우리 인종 최고의 본질과, 스페인적인 가치 기준과 혼돈에 맞서 떨고 있는 스페인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스페인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 스페인이 아니라 그것의 실패작이다. 고통스러울지라도 무기력한 전통의 스페인, 그동안 늘 그래 왔던 스페인의 모습을 불살라 버린다면 남은 재를 체로 걸러 내어 보석처럼 영롱한 광채가 빛나는 스페인, 잘될 수 있었던 스페인을 발견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의 미신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스페인이 과거에 고정되어 있다고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해 온 꼬임에 넘어가면 안 된다. 지중해를 항해하던 뱃사람들은 세이렌이 유혹하는 치명적인 노랫소리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단 하나의 방법만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것은 그에 맞서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스페인의 가능성을 확신하는 사람들 역시 거꾸로 스페인 역사의 전설을 힘차게 불러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빈약해진 우리 인종의 심장이 순수하고 강렬하게 뛰기 시작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본질적인 경험 가운데 하나가, 아니 가장 본질적인 경험이 바로 세르반테스이다. 바로 여기에 스페인적인 충만함이 있다.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우리가 언제든 휘두를 수 있는 단어가 여기 있다. 아! 만일 세르반테스의 문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아낸다면, 사물에 접근하는 세르반테스의 방식을 알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성취해 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정신적인 봉우리들에는 시적 문체가 철학, 도덕, 과학 그리고 정치를 함께 아우르는 단단한 연대감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느 날 누군가 와서 세르반테스 문체의 면모를 밝혀 주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지침에 따라 다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고 새로운 삶에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우리에게 용기와 재능이 있다면 정말 순수하게 우리는 새로운 스페인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109∼110쪽) 

 

 

 

마치 우주의 심장인 것처럼

 

황혼 녘의 하늘색이 모든 풍경을 도배하고 있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는 그들의 연약한 목구멍에 걸려 잠들어 버렸다. 나는 물줄기가 흘러가는 개천에서 벗어나 절대 적막의 세계에 접어들었다. 그때 나의 가슴은 마치 배우가 극적인 마지막 대사를 읊기 위해 무대에 오르는 것처럼 사물의 깊숙한 바닥에서 빠져나왔다. 쿵 …… 쿵 …… 리드미컬한 망치질이 시작되었고 그 덕분에 대지의 감정이 내 기운 속으로 스며들었다. 높은 하늘의 별 하나가 규칙적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우주의 심장인 것처럼, 내 별의 쌍둥이 형제인 것처럼, 그리고 경이로움 자체인 세계에 대한 놀라움과 부드러움으로 가득 찬 나의 별인 것처럼.(111쪽)

 

 

문학 장르

 

형식과 내용은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서 시적 내용은 추상적 규칙의 제한을 의식하지 않고 매우 자유롭게 흘러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과 내용은 구별되어야 한다. 그것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플로베르는 마치 불에서 열기가 나오듯 형식은 내용에서 나온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비유는 정확하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형식은 신체 기관이고 내용은 그것을 창조하는 기능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문학 장르는 시적 기능으로서, 미학적 생성을 끌어당기고 있는 방향이다.

 

내용 혹은 주제와 그 형식 혹은 표현 장치의 구분을 거부하는 최근의 경향은 그것의 현학적인 구분 못지않게 쓸모없는 일이다. 사실 그것은 하나의 도로와 그 도로의 방향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 같은 것이다. 방향을 정한다고 해서 우리가 생각했던 목표지점에 도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날아가는 돌은 공중의 궤도를 그리는 곡선을 이미 내부적으로 예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곡선은 최초의 추진력을 설명하는 동시에 그것을 전개시키고 완성시킨다.(117쪽)

 

 

 

내용과 형식은 불가분의 관계

 

결국 비극이란 어떤 근본적인 시적 주제의 확장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극성의 확장이다. 그렇다면 형식에 있는 것이든 내용에 있는 것이든 똑같은 것이다. 다만 내용상으로 하나의 성향이나 단순한 의도였던 것이 형식을 통해 분명하게 전개될 뿐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의 사물이 각기 다른 순간에 있다고 해서 다른 것이 아니듯 내용과 형식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나는 고대 시학에서 말하는 바와 반대로, 문학 장르라는 것이 다른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근본적인 주제이며 진정한 미학적 범주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서사시는 시적 형식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확장되고 발현되는 과정에서 완성에 이르는 본질적인 시적 내용의 이름이다. 서정시 역시 극이나 소설의 형태로 번역될 수 있는 관습적인 언어가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분명한 내용인 동시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방식인 것이다.(118쪽)

 

 

 

시대 자체가 해석이다

 

어떻든 간에 예술의 본질적 주제는 언제나 인간이다. 그리고 상호 배타적이고 필연적인 동시에 궁극적인 미학적 주제로 인식되는 장르는 인간성의 중요한 흐름을 포착하는 폭넓은 시각이 된다. 각 시대는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해석을 낳는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시대가 해석을 낳는 것이 아니라 시대 자체가 해석이다. 따라서 각 시대는 특정한 장르를 선호하게 된다.(118∼119쪽)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에서 재미를 느낀다는 것

 

두 계열의 장르가 가진 예술적 의도는 매우 큰 대조를 보여 준다. 전자의 경우 등장인물과 그들의 행보 자체가 미적인 즐거움의 원천이다. 즉 작가는 자신의 개입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후자에서는 반대로,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세속적 인물들이 망막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보여 주는 그 방식 자체가 우리에게 유일한 흥미를 끈다. 세르반테스가 분명 이러한 대조점을 인식하지 못했을 리 없는데, 이는 「개들이 본 세상」에 나오는 다음 대사에서도 알 수 있다.

 

너에게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내 인생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들으면 넌 아마도 내 말이 옳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다시 말해, 어떤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서 재미있는가 하면, 다른 이야기들은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에서 재미를 느낀다는 거야.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장황한 서론이나 말의 향연이 없어도 만족감을 주는 이야기들이 있고, 반면에 미사여구나 얼굴 표정, 몸짓 발짓 그리고 목소리를 바꿔 가며 말해야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는 거지. 아무리 내용이 사소하고 지루하고 따분하더라도 이렇게 얘기하면 재미가 있어지고 즐거움을 주는 거야.

 

그렇다면 소설이란 무엇인가?(124쪽)

 

 

 

서사시

 

만일 시인이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에게 고대 그리스인의 고통을 말해 달라고 한다면 그녀가 의존하는 것은 주관적 기억이 아니라 우주 안에 맥박이 뛰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우주적 회상의 힘이다. 므네모시네는 개인의 회상이 아니라 근원적 힘의 회상이다.

 

전설과 우리 사이에 놓인 심원한 거리는 서사시적 대상들을 결코 썩지 않게 만든다. 그들이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 와서 자기들에게 현재의 생생한 젊음을 부여하지 못하도록 막는 이유는 자기들 몸을 노화의 작용으로부터 막아 주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호메로스의 노래가 보여 주는 영원한 신선함과 불멸의 순수한 향기는 청춘이 지속된다기보다는 노화가 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화가 정지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늙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물이 늙는 것은 매 시간이 흘러 우리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이것이 무한히 진행되기 때문이다. 늙음은 시간이 갈수록 더 세를 떨친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우리에게나 플라톤에게나 항상 같은 거리를 지키고 있다.(126∼127쪽)

 

 

 

『일리아스』와 『보바리 부인』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스페인 사람이 『일리아스』를 이해하려면 카스티야의 두 마을에 사는 젊은이들이 시골의 예쁜 처녀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싸움을 떠올리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는데 나는 그 말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 그러나 『보바리 부인』을 읽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 바람난 시골 여자를 상상해 보라고 우리에게 주문한다면 납득이 될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맞는 말이다. 소설가는 우리가 추상적으로 이미 알고 있던 것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하는 데 성공할 때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책을 덮으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시골의 바람난 여자는 정말 이렇지. 시골 마를에선 정말 그렇더라고." 이렇게 결론을 내리면서 우리는 소설가를 만족시켜 왔다.(136쪽)

 

 

 

예술은 기술이고, 리얼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서사시의 주제가 있는 그대로 과거로서의 과거라면, 소설의 주제는 있는 그대로 현재로서의 현재이다. 만일 서사시의 인물이 창조된 존재이고 그 본성은 유일무이한 동시에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서 그 자체가 시적인 가치를 지닌다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유형적 존재로서 시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미적이고 창조적인 요소나 분위기를 가진 신화에서 불러온 존재가 아니라, 작가와 독자가 실제로 살고 있는 거리나 물리적 세계 그리고 생생한 환경에서 취한 존재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세 번째로 명료한 점을 알게 된다. 문학예술은 시의 전부가 아니며, 단지 제2의 시적 행위라는 사실이다. 예술은 기술이고, 리얼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이 장치는 때로 리얼리즘적인 것이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고 모든 경우에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시대의 특징인 리얼리즘 선호가 규범화될 수는 없다. 우리는 외관에 환상을 가지지만 다른 시대에는 또 다른 선호도가 있는 법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항상 우리와 같은 것을 원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헛된 환상이다. 이제 우리 마음을 넓게 열고 비록 우리와는 다르더라도 인간의 모든 것을 포착해 보자. 단조로운 획일성보다는 길들이기 힘든 다양성을 이 세상에서 더 선호해 보도록 하자.(137∼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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