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성찰 을유세계문학전집 90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신정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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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오렌지의 겉면과 이면을 눈앞에 동시에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가능할까?

 

내가 하는 말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부가적인 설명 없이 넘어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눈앞에 직접 오렌지를 들이대는 식으로 모든 것을 명쾌하게 보여 달라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만일 그들이 순전히 감각적인 기능을 통해 본 것으로 이해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물론이고 아무도 오렌지를 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오렌지는 둥그런 구체로서 겉면과 이면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오렌지의 겉면과 이면을 눈앞에 동시에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는 눈으로 오렌지의 한 부분을 본다. 그러나 이 과일의 전체 모습은 우리의 감각에 주어지지 않으며, 더 많은 부분이 우리의 시선으로부터 감추어져 있다.

 

따라서 사물이 자신을 드러내는 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난해하고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 각각의 사물은 모두 나름의 질서 속에서 해명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해명 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 몸이 가지고 있는 3차원 역시 다른 두 차원과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해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시각이라는 수동적 방법 외에 사물을 보는 방법이 없다면 그 사물 혹은 그것의 특질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53쪽)

 

 

 

표층 세계와 심층 세계

 

여기서 우리는 현존하는 어떤 사물들의 실질적인 특질은 바로 거리이며, 그 특질은 오로지 주체의 행위를 통해서만 얻어진다는 점을 알게 된다. 소리는 멀리 있지 않다. 단지 내가 그것을 멀게 만들 뿐이다.

 

우리는 나무의 시각적 거리나, 숲의 심장부를 찾아가는 오솔길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할 수 있다. 이 모든 거리의 깊이는 나의 협력을 통해 존재하는 것으로, 나의 정신이 하나의 감각과 다른 감각 사이에 설정하는 관계의 구조에서 탄생한다.

 

결국 눈과 귀를 그냥 열어 두기만 해도 우리에게 제공되는 현실의 전체적인 한 부분, 즉 순수 인상의 세계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명백한 세계(patent world)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인상들이 구조화되어 이루어진 배후 세계도 있는데, 명백한 세계와의 관계에서 볼 때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실재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이 상위의 세계가 우리 앞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눈을 뜨는 것만으론 부족하고 더 큰 노력의 행위가 수반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노력의 정도가 그 세계의 실재성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심층 세계는 표층 세계만큼 명백하다. 다만 더 많은 우리의 노력을 요구할 뿐이다.(56∼57쪽)

 

 

 

의지를 가진 사람만을 위해 존재한다

 

숲은 나에게 실재의 1차원이 있음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것은 강렬한 방식으로 내게 부과되는 것으로서 색깔, 소리, 감각적 쾌감과 고통 같은 것들이다. 그 앞에서 나는 수동적 입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실재 뒤에 또 다른 실재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마치 우리가 첫 번째 고개에 올랐을 때 더 높은 산들의 윤곽이 펼쳐지는 모습과 같다. 산들의 윤곽이 다른 산들의 윤곽과 중첩되어 있고, 갈수록 더 심층적이고 암시적인 실재의 새로운 차원들은 우리가 직접 산에 올라 자신에게 다다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 상위의 실재들은 수줍음을 잘 타서 마치 사냥감을 덮치듯 우리에게 달려들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들은 오직 한 가지 조건하에서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즉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여 자기들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것들은 어느 정도 우리의 의지에 따라 살고 있는 셈이다. 학문, 예술, 정의, 예절, 종교는 배고픔이나 추위처럼 인간을 무자비하게 침범하는 실재의 범주들은 아니다. 그것들은 오로지 자신들에 대한 의지를 가진 사람만을 위해 존재한다.(59쪽)

 

 

 

관찰

 

신앙심 깊은 사람이 꽃이 만발한 들판이나 밤하늘의 천체에서 신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할 때 오렌지 하나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은유적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만일 수동적으로 바라보는 것 외에 보는 방법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이 세계는 단지 반짝이는 점들의 무질서한 무더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수동적인 것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있으니, 보면서 해석하고 해석하면서 보는 것이다. 이를 관찰이라고 한다. 플라톤은 이렇게 관찰되는 시각들을 위하여 하나의 신성한 단어를 찾아 냈는데, 바로 '이데아(idea)'이다. 그렇다면 오렌지의 3차원은 하나의 이데아이고, 신은 들판의 최상의 차원이라 할 수 있다.(59∼60쪽)

 

 

 

왜 우리가 빛바랜 색깔 앞에서 우울해지는지

 

빛바랜 색을 보고 있다고 말할 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정확히 무슨 색인가? 우리는 한때 더 진했던 푸른색을 염두에 둔 채 바로 눈앞에 있는 푸른색을 보고 있다. 이처럼 현재의 색깔을 한때 그러했던 과거의 것과 함께 보는 것은 거울을 통해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능동적 시각인데, 이것이 바로 '이데아'이다. 한 색깔의 퇴락 혹은 퇴색은 그것이 겪게 되는 새로운 가상의 성질로서 일시적 심층성과 같은 무언가를 부여한다. 굳이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순간적으로 한눈에 그 색깔과 역사, 그것이 생생했던 시간과 현재의 쇠락을 발견한다. 그리고 우리 안의 무언가가 곧바로 그 몰락과 쇠퇴의 운동을 반복하는데, 이는 왜 우리가 빛바랜 색깔 앞에서 우울해지는지를 설명해 준다.(60쪽)

 

 

 

전형적인 원근법 책

 

내 주위로 숲이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드러내 보인다. 한 권의 책이 내 손에 있다. 그것은 관념적인 밀림, 바로 『돈키호테』이다.

 

여기 심층성을 대표하는 또 다른 경우를 보고 있으니, 그것은 책이 가지고 있는, 이 위대한 책이 가지고 있는 심층성이다. 『돈키호테』는 전형적인 원근법 책이다.

 

스페인 역사에서 『돈키호테』의 깊이를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는데 역사책에는 왕정복고기(Restoration)라는 이름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 시기 동안 스페인의 심장은 가장 낮은 맥박 수를 기록하기에 이른다.(62쪽)

 

 

 

"장님의 나라에서는 애꾸가 왕"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모든 사람이 그런 허위적인 가치에 만족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수량의 세계에서는 최솟값이 측정 단위가 되지만 가치의 세계에서는 최댓값이 측정 단위가 된다. 사물은 가장 가치 있는 것과 비교될 때 비로소 올바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진정한 최상의 가치들이 소멸되면서 그 뒤에 있던 차상의 가치들이 그 자리를 잇게 된다. 사람의 마음은 최고와 최상의 것이 공백 상태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비록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옛 속담에서 말하듯, "장님의 나라에서는 애꾸가 왕"인 것이다. 자리의 순위는 날이 갈수록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사물과 사람들에 의해 자동적으로 채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진정 강하고 뛰어나고 완전하며 심오한 것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왕정복고기에 사라지고 말았다. 스쳐 지나가는 비범한 천재성 앞에서 전율을 느낄 수 있는 능력도 퇴화되었다. 니체라면 이 시대가 가치 평가의 본능이 퇴보하는 국면에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위대한 것이 위대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순수한 것이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았으며, 완전함과 위대함의 특질이 마치 자외선처럼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이후 평범하고 경박한 것들이 점차 득세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언덕이 산으로 부풀려지고 누네스 데 으레세 같은 작가도 시인 행세를 하게 되었다.(64∼65쪽)

 

 

 

스페인의 길

 

지중해 철학자와 게르만 철학자 사이를 갈라놓는 거리는 우리가 지중해의 망막(網膜)과 게르만의 망막을 비교할 때 다시 한 번 동일하게 발견된다. 단, 이번 비교에서는 우리에게 더 우호적인 결정이 내려진다. 우리 지중해 사람들의 사고는 명료하지 않지만 시력만큼은 명료하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신곡(神曲)』이라는 건축물을 구성하는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알레고리의 복잡한 개념적 발판을 치워 버린다면 우리의 두 손에는 종종 11음절의 빈약한 육체 안에 갇혀 있는, 그러나 보석처럼 반짝이는 간결한 이미지들이 남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미지들을 위해 작품의 나머지 부분을 기꺼이 포기할 것이다. 그것은 초월적 의미가 없는 단순한 영상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색깔과 풍경과 아침 시간의 장면을 시인이 포착한 것이다. 세르반테스 작품에서 이러한 시각적 힘은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 시각적 이미지는 너무나도 뚜렷해서, 굳이 사물을 묘사하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의 순수한 색과 소리와 전체 몸뚱이가 서술 과정에 저절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다. 이에 플로베르가 『돈키호테』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외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어디에도 기술되어 있지 않은 스페인의 길들이 어쩌면 이토록 잘 보인다는 말인가!"(78∼79쪽)

 

 

눈앞에 보여야 한다는 것

 

만일 세르반테스를 읽다가 괴테를 읽으면, 우리는 두 시인이 창조한 세계들의 가치를 비교하기에 앞서 결정적인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즉 괴테의 세계는 우리 눈앞에 즉각적인 방식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사물과 등장인물들이 마치 자신의 기억이나 꿈에 나타나는 것처럼 멀리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떠돌아다닌다.

 

하나의 사물이 설사 지금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요건이 하나 빠져 있으면 소용이 없다. 그것은 바로 눈앞에 보여야 한다는 것, 즉 현재성이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에 맞서기 위해 칸트가 말한, "가능한 30탈러가 눈에 보이는 30탈러보다 못하지 않다"라는 유명한 구절은 철학적으로 정확하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게르만주의 스스로의 한계를 순진하게 고백하는 말이기도 하다. 지중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의 본성이 아니라 그것의 현존, 그 현재성이다. 즉 우리는 사물에 앞서 사물의 생생한 감각을 더 선호하는 것이다.

 

우리 라틴 사람들은 이를 리얼리즘이라 불렀다. 그러나 '리얼리즘'은 라틴적 개념일 뿐 라틴적 시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므로 명료하지 않은 용어이다. 이 리얼리즘이란 말은 무엇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가? 만일 우리가 사물과 그 사물의 외양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남방 예술의 정수는 우리의 이해에서 멀어지고 말 것이다.

 

괴테 역시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사물을 추구한다. "내가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눈이라는 신체 기관 덕분이다. 에머슨도 이렇게 덧붙인다. "괴테는 온몸을 집중해서 관찰한다."

 

아마 게르만 문화 내부로만 한정한다면 괴테는 밖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시각적 기질의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방의 우리 예술가와 대비할 때 사실 괴테는 보는 것이라기보다는 눈을 통해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에 정통한 눈을 가지고 있다"라는 키케로의 말도 있듯이, 무언가를 볼 때 순수 인상에 속하는 것은 지중해에 가면 그 무엇보다 강력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 자체로 만족하는 경향이 있다. 눈동자를 통해 사물의 표면을 보고 살피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우리 예술이 차별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그러나 이를 리얼리즘이라고 부르지는 말자. 왜냐하면 그것은 사물이나 실체가 아니라 사물의 외관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명칭으로는 외양주의, 환영주의(幻影主義), 인상주의 등이 더 어울릴 것이다.(79∼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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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11-18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맑고 청명한 지중해성 기후와 춥고 어두운 북유럽의 기후가 그곳에 사는 인간의 사고에 깊은 영향을 주는 듯합니다. 인간은 주변의 환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임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오랫만에 oren님 글을 보니 좋습니다^^:

oren 2017-11-18 17:36   좋아요 1 | URL
오랫만에 알라딘에 접속하니 조금은 낯선 느낌도 듭니다. 바깥 날씨는 어느새 겨울이 찾아온 듯 매서운데, 겨울호랑이 님의 댓글은 언제나 따뜻한 온기가 가득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