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6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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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그 자신의 시대보다 훨씬 더 옛적의 일이므로, 그 이야기의 곰삭은 나이는 일수(日數)로도 헤아릴 수 없으며, 이야기를 내리누르는 세월의 햇수는 태양 주위를 도는 혹성들의 수로도 헤아릴 수 없다.

 - 토마스 만, 『마의 산』중에서

 

 * * *

 

토마스 만은 80세까지 사는 동안 많은 작품을 남겼다. 『마의 산』, 『요셉과 그 형제들』, 『파우스트 박사』등이 유명하지만 정작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작품은 스물다섯 살에 완성한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었다.

 

그는 독일 철학자인 니체와 쇼펜하우어뿐만 아니라 음악가인 바그너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은 작가였다. 그의 고향은 북독일 항구 도시인 뤼벡이었지만 10대 후반에 뮌헨으로 이사했기 때문에 북부 독일과 남부 독일의 서로 다른 이질적인 문화에 고루 영향을 받았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시민적 도덕률'을 중시하던 아버지와 '남국인의 예술적인 재능'을 지닌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으면서 '아폴론적인 성격'과 '디오니소스적인 성격'을 함께 타고났다는 점에서 남다른 특징을 보였다. 그는 평생 동안 이 둘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상을 끊임없이 작품에 투영시켰다.

 

1901년에 발표된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은 '고뇌와 갈등의 시기'를 대표하는 작가 초기의 작품이다. 『마의 산』으로 대표되는 중기(조화와 모색의 시기)의 작품이나 『요셉과 그 형제들』과 같은 말기(성숙의 시기)에 쓰인 작품들보다 훨씬 읽기가 쉽다는 이유 때문에 대중들에게 널리 사랑받은 작품이 되었다.

 

작품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부덴브로크 일가의 4대(代)에 걸친 가족사를 그린 작품이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과 그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누구나 겪는 가족의 출생, 결혼, 이혼, 성공과 실패, 죽음 등이 아주 가까이에서 벌어지는 현실처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가족사의 저변을 흐르는 또다른 주제인 '가문의 흥망성쇠를 통한 시민 계급의 성장과 몰락'도 함께 다룬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가끔씩 '가족들의 이야기'를 그린 다른 장편 소설들인『까라마조프 형제들』이나 『전쟁과 평화』를 함께 떠올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두 편의 러시아 소설과 오버랩되는 부분은 그리 넓지 않다. 세 작품 모두 가족사를 다루고 있지만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가 다루는 이야기는 너무나 거창한 다른 주제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부류의 소설이며, 그런 면에서 토마스 만의 소설이 훨씬 더 가족적이다.

 

부친 살해, 죄와 벌, 선과 악, 천국과 지옥 등의 묵직한 주제가 심연처럼 끝모를 깊이로 독자를 끌고 내려가는『카라마조프 형제들』과, '거대한 조국 전쟁'을 배경으로 볼콘스키 가문의 사람들과 로스토프 가문의 사람들이 겪는 파란만장한 운명의 변천을 통해 '개인의 운명과 역사와의 관계'를 심오하게 고찰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삶의 근원적인 문제에 집요하게 파고드는『전쟁과 평화』에 비해,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의 분위기는 때로는 너무 평화로운 가운데 행복이 넘치며, 때론 너무나 고요한 가운데서도 슬프고 우울하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에서는 외부 환경의 격변은 '가족 회사의 번영과 쇠퇴' 말고는 달리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가문의 구성원들 각자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각기 어떤 시기에 어떤 개성들을 발현시키면서 삶을 꾸려나가는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지가 주된 이야기 줄기이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 끊임없이 발견되는 '진지한 삶의 성찰' 같은 태도는『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굳이 세 작품 사이의 '연관'을 찾는다면 토마스 만과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 공히 '형제간의 갈등'이 소설의 전편을 오래도록 지배하고 있다는 점과 토마스 만과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공히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 이처럼 평화로운 가운데 행복해 하고 고요한 가운데 우울하고 슬픈 이유는 무엇보다도 토마스 만의 자전적인 삶이 작품에 깊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소설을 완성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소설 속의 분위기'와 아주 흡사한 삶을 살았다. 단적으로 토마스 만 가문의 선조들도 독일 북부의 부유한 상업 도시인 뤼벡에서 1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사업체를 운영했고, 작가의 아버지 역시 뤼벡의 시의회 의원이자 도시의 제2인자 였다. 그는 1890년 그의 나이 15세 때 <요한 지그문트 만 상회> 창립 백 주년 축하회를 생생히 목도했으며,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 상회는 해산되고 그 다음해인 1892년에는 어머니와 누이동생들과 함께 뮌헨으로 이주했다. 소설 속에서도 <부덴브로크 상사>는 100주년을 맞아 거창한 축하행사를 벌인다. 이 장면에 대한 묘사는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독자들이 도리어 놀랄 정도다.

 

긴 이야기의 시작은 1835년부터다. 번창일로를 걷는 <부덴브로크 상사>의 리더인 일흔 살의 요한 부덴브로크(1세)는 멩 가의 대저택을 새로 구입하고, 온 가족들은 기쁨에 넘쳐 행복해 한다. 가문의 조상들은 오래 전부터 남달리 부지런하고 성실한 태도로 사업에 전념한 덕분에 '오늘날의 영광'에 이르렀다. 남들이 모두 부러워할 만한 위치에 오르기까지는 그만큼 남다른 근검절약과 절제와 근면성실이 뒷받침되었던 셈이다. 가죽표지에 싸인 두툼한 노트에는 '가문의 역사'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고, 구성원들은 모두 자부심이 넘친다. 사업을 돕는 직원들과 가사를 돕는 하인들까지도 모두 하나같이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다. 쇠퇴의 징후는 어디에도 없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부덴브로크 가문의 가훈은 이렇다.

 

<나의 아들아, 낮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밤에는 조용히 쉴 수 있도록 해라.>

 

그로부터 6년 후 안토아네트 노부인이 사망하자 요한 부덴브로크(1세)도 급격히 몸이 쇠약해져 사업에서 손을 뗀 후 1842년에 사망한다.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은 부덴브로크 영사는 현명하고 활동적인 장남 토마스 부덴브로크를 16세의 어린 나이에 회사일에 참여시킨다. 영사의 큰 딸인 토니는 고상한 척하나 허영심이 강하고, 셋째인 크리스찬은 끈질기지 못하고 어딘가 경솔하다. 막내딸인 클라라는 진지하고 조용하다. 그러나 집안 사람들 모두가 애정 어린 가족애로 결속된 데다가 풍족한 환경에서 별 탈 없이 자라난다. 뤼벡 시내에서 경쟁할 만한 새로운 신흥 가문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지나치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다. 토니는 '교육'을 위해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훗날까지 인연을 이어갈 귀족 가문의 귀엽고 아리따운 소녀들을 여럿 사귄다.

 

토니가 기숙학교를 마치고 다시 대저택으로 돌아온 어느 날, 집안에 낯선 손님이 명함을 들고 찾아온다. 부덴브로크 가문에 첫 번째 충격을 가할 인물인 그 사나이의 이름은 그륀리히였다. 그는 어딘가 마뜩찮은 언행으로 토니의 눈밖에 나지만 다른 가족들로부터 적잖은 호감을 얻고 돌아간다. 잦은 방문 끝에 그는 토니에게 청혼하기에 이르지만 토니는 언감생심이어서 결단코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아예 드러눕는다. 심신이 쇠약해진 끝에 가족들의 여름 휴양지인 트라베뮌데로 홀로 요양을 떠나고, 한적한 바닷가 시골집에서 묵던 그녀는 진보적인 의대생 모르텐을 만나 첫사랑을 느끼고 행복에 빠진다. 그러나 이내 집요한 성격의 그륀리히가 시골까지 찾아와 둘 사이에 끼어 들어 훼방을 놓고, 끈질긴 청혼 공작 끝에 토니는 마지 못해 함부르크 사업가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스무 살에 함부르크로 시집을 간 토니는 딸 에리카를 낳고 행복해 하지만 어딘지 공허롭다. 머잖아 그륀리히가 오랫동안 저질러온 '분식회계'가 들통나고 파산위기에 몰린 그는 장인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부덴브로크 영사(2세)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딸과 사위를 도와주려고 '그만한 금액을 빼내면 회사도 약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게' 결정적으로 문제였다. 여기서 부덴브로크 가문의 딸 토니가 아버지 앞에서 보여준 단호한 모습은 가히 영웅적이었다!

 

「좋아요! 됐어요! 절대 안 돼요!」그녀는 그륀리히에 대한 혐오감보다 <회사>라는 그 한마디에 훨씬 더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아빠까지도 파산하려고 그러세요? 됐어요! 절대 안 돼요!」 그륀리히는 장인에게 애원하고 나중엔 협박까지 하지만 부덴브로크 영사는 꿈쩍도 않는다. 사위와 냉정히 결별한 그는 딸과 손녀딸 에리카를 데리고 뤼벡으로 되돌아가고, 그륀리히는 이내 파산하고 만다. 사위가 잔뜩 기대했던 장인한테 들었던 말은 이랬다.「지불능력을 과시한답시고 돈을 인근에 있는 하수구에 던져 넣을 필요는 전혀 없으니까.」청혼 단계에서 세밀하게 진행되었던 그륀리히에 대한 '신용도 조사' 마저도 조작된 것이었음은 나중에 밝혀졌다.

 

젊은 나이에 회사를 물려받은 장남 토마스는 모방하기 힘든 근면함과 정확하고 빈틈없는 일처리로 부덴브로크 상사의 경영을 맡아 능숙하게 대처한다. 다만 차츰 성장할수록 우울증과 불안에 시달리며 경거망동하는 동생 크리스찬이 늘 말썽이었다. 동생을 회사 일에도 참여시켜 보지만 일처리가 너무나 미숙하고 부실하여 형과 갈등만 일으키다가 끝내 회사에서 쫓겨난다. 크리스찬은 이때부터 어느 한 군데 진득하니 적을 두지 못하고 평생을 부초처럼 떠돌며 생활한다. 멩 가의 저택에는 바깥 생활에 지쳤을 때만 잠깐씩 되돌아올 뿐이다. 

 

돌싱녀가 된 토니는 친정으로 되돌아온 이후 한참 동안이나 <과거사> 때문에 침울해 하지만, 이내 특유의 활기를 되찾는다. 그저 불운했을 뿐 자신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드러내 놓고 '사기꾼 남편 그륀리히'를 들먹이고 욕을 하고 다닌다. 그러는 사이에 기숙학교 동창생이던 귀족 소녀들은 하나둘씩 명문가 귀족 집안으로 보기 좋게 시집을 가면서 토니를 자극한다.

 

1855년에는 요한 부덴브로크(2세)는 지나친 긴장으로 몸이 병약해져 어느날 심장발작을 일으켜 갑자기 죽고 만다. 이듬해에는 크리스찬 부덴브로크가 8년 만에 남아메리카에서 돌아온다. 그는 가족들이 기대했던 방향보다 훨씬 더 나쁜 쪽으로 변해서 돌아왔다. 반면, 젊은 나이에 커다란 무역 상사의 대표가 된 토마스는 어느새 진지한 위엄이 얼굴에 배어 들고 머잖아 <네덜란드 영사>의 직함까지 얻는다. 두 형제 사이의 성장 곡선이 완전히 정반대로 향한 지 오래지만 더이상 서로 용인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자 두 형제는 서로에 대해 잔뜩 쌓인 악감정들을 쏟아낸다. 다툼 끝에 퍼부운 막말이 서로의 감정을 더욱 부채질한 끝에 두 형제는 다시는 안 볼 사이처럼 멀어진다. 이때 그들이 치고받은 대화에서는 아주 익숙한 표현도 빠지지 않았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

 

사업차 암스테르담에 체류중이던 토마스로부터 어느날 '열의에 찬 편지'가 영사 부인에게 날아든다. 기나긴 편지에는 평생의 반려자를 만난 기쁨으로 가득했다. 상대는 마침 여동생 토니의 기숙학교 동창생인 게르다 아놀트선이었다. 그녀는 진품 스트라디바리를 켜는 부유한 음악가 집안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훌륭한 가문, 탁월한 미모, 많은 지참금, 예술가라는 고상한 이미지끼지 어느 하나라도 만족스럽지 않은 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내 양가 가족들끼리 만나고 약혼과 결혼이 부유한 가문끼리의 혼사답게 화려하게 치러졌다. 뤼벡 시내에선 이구동성으로「극상이야」라는 소문이 쫙 퍼져나갔다. 그러나 훗날 밝혀지게 되지만 토마스에게 있어서나 부덴브로크 가문에게 있어서나 화려한 미모를 갖춘 여류 음악가와의 결혼이야말로 '명백한 몰락 징후의 시작'이었다.

 

토니는 어느 덧 30줄에 접어 들어 다시 '새로운 결혼'과 '화려한 부활'을 꿈꾸기 시작한다. 이대로 딸만 키우며 홀로 지내기엔 인생 자체가 너무 따분한 데다가 자신은 여전히 미모와 자신감을 조금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문에 오점으로 남긴 얼룩도 어서 말끔히 지우고 싶었다. 때마침 양조장 사장한테 시집을 간 동창생으로부터 '꼭 한 번 뮌헨으로 놀러 오라'는 연락을 받은 그녀는 열 일 제쳐두고 그곳으로 날라간다. 거기서 그는 외양은 그다지 볼품 없지만 돈깨나 있어 보이는 홉 무역상 페르마네더 씨를 알게 된다. 머잖아 '뮌헨에서의 행복한 재혼 생활'에 재빨리 뛰어든 그녀에게 남부 독일 생활은 어딘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못내 어색했다. 그러나 이제 막 새출발한 만큼 보란 듯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 그녀는 무진 애를 쓰며 살았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으로부터 이미 온갖 험악한 말도 들었던 터였는데도 말이다. 가령,「입 닥치고 가만 있지 못해!」등등.

 

남편은 결혼 후 몇 주도 지나지 않아 사업체를 정리하고 '집세'만 받아 챙기는 한량으로 변신했다! 억장이 다 무너졌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허구헌 날 단골 호프집에서 카드놀이나 하고 매번 만취한 상태로 밤늦게 귀가하던 남편과 그녀는 마침내 어느 날 오밤중에 대판 싸움을 벌이지 않을 수 없는 불행한 사건과 마주했다. 그날 밤 남편으로부터 상상하기 어려운 폭언까지 들은 토니는 쌓인 불만과 암담한 미래와도 영영 결별해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고, 밤새 짐을 꾸리고 새벽에 득달같이 딸을 깨워 서둘러 친정으로 돌아오고 만다.

 

두 번째로 친정으로 되돌아온 딸과 외손녀를 영사 부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만 오빠인 토마스는 쉽게 수긍하지 못한다. 남편의 잘못에 대해 펄펄 뛰고 성을 낼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소해하면서 그와 인간적으로 좀더 가까워지는 계기를 만들었어야 한다는 논리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지만, 결국 나중엔 또다시 가문에 먹칠을 할 셈이냐는 심한 말까지 내뱉고 만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토니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토마스! 추문이라고? 내 인격에 먹칠을 당하는 치욕적인 일을 당했는데도 추문을 일으키지 말라고 명령하는 거야? 그게 오빠로서 할 말이야? 그래, 이런 질문을 내가 꼭 해야겠느냐 말이야! 체면과 사리분별이 좋은 것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거야. 톰. 나도 오빠만큼은 인생을 알고 있어. 추문을 두려워하는 곳에는 비겁함이 도사리고 있다는 거야! 바보 멍청이에 불과한 내가 이런 말을 해야 하다니. 내 참 기가 막혀서......"

 

그녀는 도대체 남편한테 무슨 험한 꼴을 당했던 것일까. 만취한 상태로 오밤중에 귀가한 남편은 집안의 얼굴 반반한 요리사 처녀와 '불륜의 레슬링'을 벌였다. 잠결에 깨어나 현장까지 목도한 토니는 격분해서 남편과 극언을 퍼부우며 싸운 후에 거실 소파에서 자려고 방을 나오다가 그만 그녀의 뒤통수를 때리는 남편의 폭언 한마디에 모든 게 끝장났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 엄청난 말'을 엄마에게도 오빠에게도 털어놓지 못한다. 막노동자나 개한테도 퍼부울 수 없는 말을 도대체 어떻게 자신의 입으로 남에게 옮길 수 있단 말인가,(토마스 만은 짖굿게도 수십 쪽이 지나서야 토니가 들었던 폭언을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알려 주지만 나는 토니를 위해서라도 그 말을 여기에 차마 옮기지 못하겠다! 궁금한 독자들은 책을 직접 읽는 수밖에.)

 

두 번째 결혼에서도 실패했다고 좌절할 토니가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점점 더 그륀리히를 닮아 가는 에리카에게 마지막 희망을 건다. 마침내 교양은 없어 보이지만 우직하고 돈 잘 번다고 소문난 화재 보험 회사 사장 바인센크를 사위로 맞아들인다. 그렇지만 믿음직했던 사위는 어느 날 갑자기 횡령죄로 기소되고, 몇 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하다가 풀려나서는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엄밀히 말하자면 '토니의 세 번째 결혼 생활'도 그렇게 파탄난 셈이었다.

 

토마스와 게르다 이놀트선 사이에는 병약한 기질의 요한 부덴브로크가 태어난다. 산모까지도 극도로 위험한 난산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토마스는 시의원에 선출되고 어부 골목에 화려한 새 집을 지어 이사한다. 회사는 창사 100주년을 맞아 뤼벡 시내가 들석거릴 정도로 성황을 이루지만 어린 하노에게는 그저 모든 게 낯설고 이상하게만 비친다. 오래도록 건강하게 생활하며 집안의 어른역을 도맡았던 영사 부인도 마침내 기나긴 사투 끝에 눈을 감고, 유산의 적지 않은 부분이 '상속 과정'에서 가문 밖으로 '유출'된다. 부덴브로크 상사의 사업은 예전처럼 좋은 수익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매출은 정체를 넘어 차츰 부진으로 빠져든다. 마침내 멩 가의 대저택마저 신흥 가문으로 떠오른 하겐슈트룀한테 '억울한 값'에 넘어간다. 크리스찬은 클럽이나 들락거리다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식을 둘씩이나 둔 과부 알리네 푸보겔과 결혼하지만, 도리어 그녀는 크리스찬의 정신 질환을 이유로 정신 병원에 수용시키고 만다.

 

시의원 토마스는 신체적으로도 병약하고 정신적으로도 음악에나 빠져드는 심약한 아들이 갈수록 걱정이다. 사업 부진, 음악 속에서만 살고 바깥 세계와는 소원하게 지내는 아내, 사업가의 자질은 찾아보기도 힘든 아들 등으로 갈수록 걱정과 괴로움에 번민하던 토마스 부덴브로크는 어느 날 격심한 치통 때문에 이를 악다물고 치과를 찾아간 끝에 수술을 받지만 치료가 잘못되는 바람에 도리어 더 큰 고통을 겪는다.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정신을 잃고 길거리에 처박혀 쓰러지는 바람에 인생을 마감하고 만다.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왔을 때 그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는 평생 동안 몸에 먼지 하나 안 묻혔지 …… 아, 마지막을 그런 꼴로 장식해야 한다는 것은 치욕이요, 수치야!

 

졸지에 미망인이 된 게르다가 시누이이자 동창생인 토니에게 한 말이 그랬다. 그로부터 2년 후 어린 하노는 열네 살의 나이에 티푸스로 죽고, 부덴브로크 상사는 마침내 문을 닫는다. 남편과 사별한 뒤로 어부 골목에 새로 지었던 집마저 처분하고 아들과 함께 아답한 집으로 새로 이사해 살던 미망인 게르다는 이제 아들마저 잃자 홀로 아버지가 사는 암스테르담으로 쓸쓸히 떠난다.

 

부덴브로크 일가의 몰락은 경제적 실패 때문이라기 보다는 병약한 하노의 죽음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더 멀게는 바이올리니스트와의 결혼이 몰락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토마스 만은 부덴브로크 가문의 몰락의 원인을 길고 짧은 다양한 연원에서 찾는데, 대표적인 것들은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에 약화된 시민적 경향'과 '후손들에게서 뚜렷이 나타난 바다와 종교와 음악에 심취하는 경향'들이다. 이런 성향들이 '몰락에의 의지'의 표출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작가가 니체와 쇼펜하우어로부터 받은 직접적인 영향이다. 오랫동안 부덴브로크 가문 사람들에겐 '음악'에는 도무지 취미가 없었다. 하노의 음악에 대한 사랑은 그 성질상 도취와 망아, 몰락에의 욕구와 방종에 다름아니었고, 현실보다 음악으로의 도피 자체가 '일상적인 시민적 의무의 중압감'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욕구였다.

 

무한정 향유하고 이용하면서 절제를 잃고 끊임없이 갈증을 호소하는 가운데 무언가 방탕한 요소가 나타났다. 그리고 탐욕 속에서 무언가 냉소적인 절망감과 아울러 열락과 몰락에의 의지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최후의 감미로움까지 빨아들임으로써 기진맥진하고 구역질과 넌더리가 나게 되었다. 급기야는 모든 무절제하고 방탕한 생활을 한 후 맥이 풀려 오랫동안 나지막한 소리로 단조의 아르페지오로 졸졸 흘러갔다. 그러다가 한 음이 솟아올라 장조로 녹아내리더니 슬픈 듯 머뭇거리다가 소멸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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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kim 2017-08-12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oren님.그의 형인 하인리히만의 ‘충복‘이나 ‘작은 도시‘보셨으면 독후감 올려 주심 안될까요?

oren 2017-08-13 00:08   좋아요 0 | URL
하인리히 만도 뛰어난 작가라는 건 알지만 <충복>이나 <작은 도시>는 제목조차 금시초문이네요. 토마스 만의 작품도 이번이 처음이고요. 진작부터 읽고 싶었던 『마의 산』도 이제사 읽기 시작했는데, 은근히 끌어당기는 힘이 강해서 왠지 푹 빠져들 것 같은 예감도 드네요.^^

bgkim 2017-08-13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녜!그러셨군요.절판된지 오래라 저도 몇년 전에 겨우 헌책으로 구해놓고 읽어야지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네요.oren님!마의산 다 보심 꼭 독후감올리세요.많이 궁금해요.시간 나심 요셉과 그의형제들도 보시길 감히 추천해요.무더웠던 이번여름 수고하셨어요.

oren 2017-08-13 14:52   좋아요 0 | URL
『마의 산』도 읽고 나면 독후감을 남겨보겠습니다. 불끈.
『요셉과 그의 형제들』은 동네 도서관에 가서 몇십 분 동안 살펴봤더랬습니다. 토마스 만의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 단연 ‘압도적인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대작이더군요. 과연 저도 그 책을 읽을 날이 있을까 잘은 모르겠는데 하여튼 bgkim 님께서 추천해 주시니 꼭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bgkim 2017-08-13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응원 할께요.

oren 2017-08-13 14:59   좋아요 0 | URL
네. 격려의 말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