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는 그의 위대한 정신을 보여주기에는 너무나도 좁다. 그뿐인가. 이 눈에 보이는 모든 세상마저 그에게는 너무나도 좁았다."

 - 괴테


 * * *


위의 말은 요한 페터 에커만이 지은 『괴테와의 대화』에 담긴 말이다. 물론 저 문장 속에서 말하는 '그'는 셰익스피어를 가리킨다. 니체가 '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양서'라고 격찬한 에커만의 그 유명한 책을 내가 직접 읽고 저 문장을 여기서 인용한 건 아니다. 일본 최고의 셰익스피어 전문가로 일컬어지는 오다시마 유시의 책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에서 우연히 발견했을 뿐이다.(어쨌든 저 문장 덕분에 마침내 이번에『괴테와의 대화』를 실물로 구경할 수 있었다. 1,2권으로 나온 민음사판을 장만하고 보니 책이 장난이 아니게 두껍다. 두 권을 합하면 무려 1,140쪽이다.)


내게도 뒤늦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온 덕분에 셰익스피어의 작품 말고도 이런 저런 '셰익스피어와 관련된 책들'도 함께 읽어 보고 있는데, 마침 도쿄대학 명예교수로 재직중인 오다시마 유시의 책 덕분에 셰익스피어를 읽는 재미가 훨씬 배가되는 느낌을 받고 있다. 그는 일본 최고의 셰익스피어 전문가로 인정받는 인물인데, 일본에서 인정받는『셰익스피어 전집』을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어릿광대의 눈』,『어릿광대의 귀』, 『마음은 언제나 셰익스피어』등 숱한 셰익스피어 관련 책들을 썼고 국내에도 그가 쓴 책들이 적잖이 번역되어 나올 만큼 권위있는 인물이다.


그의 말을 들어 보면 셰익스피어가 얼마나 '굉장한 눈'을 지닌 인물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숱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는 동안에 우리가 잠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거듭 놀라게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가 쏟아내는 경이로운 문장들 때문이고, 그런 문장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의 놀랍도록 풍부한 상상력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셰익스피어 자신이 극작가이면서 동시에 무대 위에서 직접 연기를 했던 배우였기 때문에 좀 더 특별하게 보고 들을 수 있었던 세상이 있었고, 그런 세상을 볼 수 있었던 '어릿광대의 눈'과 '어릿광대의 귀'가 너무나 광대무변하면서도 초능력적인 데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가 떠올렸던 '놀라운 영상들'이 다시금 고스란히 '빛나는 문장들'로 변환되어 영롱한 보석처럼 다채로운 빛깔로 우리의 눈앞에서 반짝거리니 어찌 거듭 놀라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그의 눈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면 때로는 밋밋하거나 단조로운 세상도 갑자기 흥미롭게 다가온다. 우리가 진짜로 겪고 있는 '실제 세계'도 마치 '무대 위에 올려진 연극의 세계'처럼 정반대로 뒤집어 바라볼 수도 있게 된다. 우리에게도 셰익스피어처럼 잠시나마 '어릿광대의 눈'이 갖춰지기 때문이다. 실제 세계를 마치 연극 처럼 바라볼 수 있다는 건 어쨌든 굉장한 경험이다. 그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반드시 연극의 연출자나 배역을 맡은 배우여야 할 필요는 없다. 연극의 관객이나 구경꾼의 입장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현실 세계'를 마음껏 '새롭게' 바라볼 수 있고 또 '흥미롭게' 즐길 수도 있다.


우리가 맞닥뜨리는 '현실 세계'를 이런 방식으로 마치 '연극적 상황'인 것처럼 쉽게 뒤바꿔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줄 만한 작품들이야말로 참다운 희곡이 아닐까. 셰익스피어는 '인간 생활'에서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상황들을 '오래 전부터 미리 넉넉히 알고 있었다는 듯이' 숱한 작품들 속에 아주 풍부하게 묘사해 놓았다. 괴테가 괜히 저런 엄청난 말을 한 게 결코 아니었다.(에머슨도 셰익스피어에 관한 괴테의 특별한 위치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셰익스피어 정신의 지평은 끝없이 펼쳐져 있으므로 현재로서는 누구도 그 전모를 전망할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가 평소에 막연하게 직감하고 있는 셰익스피어에 대한 이미지를 적절한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은 콜리지와 괴테 정도"라고 말했다.)


이쯤에서 '셰익스피어의 눈과 귀'를 '오늘날의 현실'과 연결짓는 시도를 해보면 어떨까. 최근에 우리가 겪고 있는 '흥미로운 현실 문제' 몇 가지에 셰익스피어를 끌어들이자는 말이다. 내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가장 자주 떠올렸던 현실 문제는 어느날 갑자기 전세계적 뉴스로 급부상한 사드 추가 배치에 관한 '보고 누락' 문제였다. 이 문제는 결코 아무나 함부로 '떠들 만한' 단순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국내적으로든 국제적으로든 '각자의 입장에 따라' 워낙 첨예한 이해 관계가 걸린 '극도로 예민한 이슈'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이 문제가 한창 뜨거웠을 때 이 글을 끄적거리다가 말았다. 몇 번씩이나 다시 꺼냈다가 '중도 포기'를 거듭한 끝에 이제야 겨우 다시 꺼내 어설픈 마무리를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각자의 예민한 입장 차이는 될 수 있는 한 건드리지 않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다뤄보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기본적으로 '셰익스피어의 눈과 귀'를 빌린다는 가정 아래에서 이 문제를 바라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내가 이토록 예민한 문제에 괜시리 존숭받는 극작가를 억지로 끌어들여 첨예한 문제를 '희화화'하자는 의도는 조금도 없다. 나는 단지 그의 희곡 작품이 우리의 현실에 얼마나 예민하게 호소하는 힘을 지녔는지를 되살펴 보고 싶을 뿐이다. 문학 작품이 지닌 이런 힘을 확인하는 작업이야말로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는 이유를 새삼 되돌아 볼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까 말이다.


이토록 예민한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내가 처한 곤란한 입장에 대해 조심스러운 얘기를 몇 가지 더 늘어놓고도 싶지만 시간이 아깝다. 이쯤에서 본론으로 넘어 가자.


셰익스피어의 대표작이자 최고의 걸작은 단연『햄릿』이다. 그 유명한 작품에 등장하는 숱한 명대사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대목은 누가 뭐래도 (심지어 책과는 담을 쌓은 사람도 다 아는) 다음 대사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햄릿의 이 유명한 독백 하나가 수많은 세월에 걸쳐서 얼마나 다양한 해석을 쏟아냈는지를 여기서 따질 이유는 없다. 다만 이 짧은 대사 하나가 그토록 논란을 빚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을 반증하는 결정적인 증좌인지도 모른다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다시 기본으로 살짝 되돌아 가자.『햄릿』은 과연 어떤 작품인가? 이런 물음엔 아무래도 전문가의 '깔끔하게 정리된' 대답에 기대는 게 최고다.


햄릿의 핵심 주제는 복수다. 그러나 이는 형식상의 주제이고 내용상으로 이 작품의 핵심 주제는 복수심과 양심의 대결이다. 그리고 양심은 복수를 지연시키는 힘으로서 무의식적인 행위로 나타나고 복수심은 살인을 실행시키는 힘으로서 의식적인 행위로 나타난다. 또한 복수심은 햄릿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힘을 대표하고 양심은 그가 삶을 유지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힘을 대표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 극의 핵심 주제는 삶과 죽음의 문제, 즉 존재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 최종철 옮김,『셰익스피어 전집 4』, 『햄릿』, <역자 서문> 중에서

『햄릿』의 확장성은 놀랍다. 꼭 『햄릿』만 그런 것도 아니다. 위대한 문학작품들은 대개 '놀라운 확장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셰익스피어의 여러 작품들이 하나같이 칭송받는 것도 어느 작품이든 '누구에게나 마음 속 깊이 호소하는 목소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면에 기대어 나는 여기서 '햄릿'을 과감하게 '고뇌하는 문재인 대통령'으로 치환해서 해석해 보고 싶었다. 문학 작품이 '현실'을 일찌감치 미리 내다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또한 문학이 얼마나 놀라운 신축성을 발휘해서 현실을 사로잡는가를 고려해 보면 이 문제는 누구나 '대입해 보고 싶은 매혹적인 방정식'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런가?


우선, '사드'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이 처한 곤란한 입장 자체가 햄릿과 너무나 닮았다.


그런데 햄릿이 '복수'를 꿈꾸도록 도와준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가? 당연히 '유령으로 나타난 선왕' 때문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을까. 묘하게도 그에겐 친구이자 '선왕'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존재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유령으로 나타난 선왕'을 여태껏 '아예' 한 번도 만나지 못했으리라는 단정을 내리기는 어렵다. 설사 유령의 모습으로 만나지는 못했더라도 늘 대통령의 마음 한 켠에 '그 분의 존재'를 자주 떠올리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한편, 햄릿의 복수심을 더욱 부추긴 요인 중엔 어머니 거트루드와 작은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사이의 '근친상간적인' 빠른 결혼도 한 몫 단단히 했다. 문재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의 '이명박근혜 정부'와 '미국' 사이에 진행된 너무나 빠른 '근친상간적 결합'도 마음 속으로 그리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리라고 추론해 볼 수도 있다.(더군다나 이명박 정부는 '선왕의 죽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게다가 노 전 대통령의 수사를 맡았던 우병우는 하필이면 박근혜 정부의 핵심 수족을 맡으면서 '묘한 악연'을 계속 이어 왔다.)


더군다나 『햄릿』에서는 '선왕 햄릿'의 서거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왕' 클라우디우스의 '나쁜 인간성'도 햄릿의 복수를 부추겼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나쁜 인간성'이 '착한 문재인'에게 복수심을 자극했으리란 건 어찌 보면 추론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명약관화한 사실로 봐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햄릿 1막 5장에 나오는 재미있는 대사 하나만 인용해 보자.


"소중한 네 아버질 사랑한 적 있다면 (중략)  이 흉악무도한 살인의 원수를 갚아 다오."


이제는 이런 대사마저 그저 단순한 햄릿만의 대사로만 들리지 않는다. 되짚어 보자면,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장에서 일어났던 돌발 상황 때문에 자칫 험한 꼴을 당할 뻔한 이명박 대통령에게 도리어 먼저 다가가 사과를 한 사람이 문재인 대통령이었다는 점도 '착한 햄릿'이 새로운 왕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건네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과 무척이나 닮았다.


문재인 대통령과『햄릿』과의 또다른 유사점은 '성급한 복수의 실패'에서도 찾을 수 있다.


햄릿은 유령으로부터 '진실'을 알고 난 뒤에 '즉각적인 복수'를 맹세한다. 그러나 복수는 생각만큼 빨리 이뤄지지 못하고 계속 미뤄진다. '극중극'을 통해 '클라우디우스의 반응'을 살핀다든지, 「쥐덫」상연을 통해 왕의 죄를 확인한 뒤에도 (끝내 스스로에게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기도하는 왕'을 죽이지 못하고 놔주기 때문이다.("아냐. 아서라 내 칼아, 더 끔찍한 상황을 만나자.")


햄릿의 '성급한 복수'는 결국 엉뚱하게도 휘장 뒤에 숨어 있던 폴로니우스(오필리아의 아버지)에게로 향한다. 휘장을 뚫고 검을 찌르면서 햄릿이 내뱉은 대사가 여전히 우리의 관심을 다시 한 번 자극한다.

"이건 뭐냐? 쥐새끼다! 죽어 싸다, 죽어라."

주저함의 대명사로 통하는 '햄릿'이 마침내 무서운 결단을 내려 실행에 옮겼는데 결국 알고 보니 '쥐새끼' 같은 클라우디우스의 신하 폴로니우스였던 것이다. 쥐새끼 하면 MB도 떠오르고, 뒤이어 속담 하나도 곧바로 더 떠오른다. 이번 '사드 보고 누락 사태'로 숱한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들먹인 말이 바로 '태산명동 서일필'이었으니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사드 배치'에 대해 시종일관 '모호한 전략'을 취해 왔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이 갈수록 심각해 지고 있는 상황을 빤히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결같이 '사드 배치'에 선뜻 동의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입장을 계속 유지해 왔다. 무엇보다 '안보가 최우선'이라는 '보수 우파 진영'이나 군사 동맹국인 미국 입장에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태도다. 미국이 '자신들의 부담'으로 '한국'을 '북한의 핵과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첨단 방어 무기를 설치해 주겠다는데도 '애매한 태도'를 계속 취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문재인 대톨령이 계속 이런 태도를 취하는 데는 '복잡한 사정'이 깔려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사드 배치'와 꼭 닮은 문제가 바로 노무현 정부 초기의 '해외 파병 문제'였음을 상기해 보면 의외로 문제가 간단해 보인다. 해외 파병이나 사드 배치나 '군국주의 미국'에 '맞장구치는 일'일 뿐, 오랜 지지기반인 '민주주의 국가 시민들'에겐 결코 어울리지 않는 짓이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념 문제까지 얽힌 복잡한 정치 얘기는 이쯤에서 살짝 접어두고 여기서 다시 햄릿의 독백으로 돌아와 보자.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를 쓴 오다시마 유시는 햄릿의 그 유명한 독백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이대로 괜찮은가, 괜찮지 않은가, 그것이 문제로다."

이런 '신선한 해석'을 접하면서 나는 바로 이 해석이야말로 '사드 보고 누락'에 대해 '충격과 분노'와 더불어 즉각적인 '진상 조사'를 엄명한 문재인 대통령을 떠올리게 만드는 번역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느꼈던 이유는 오다시마 유시의 책 속 구절 속에서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을, 나는 "이대로 괜찮은가, 괜찮지 않은가,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번역했다. (…)


나중에 나의 이 번역이 신문에 소개됐을 떄, 나카노 교수님은 "자네가 드디어 해냈구먼"이라며 전화로 칭찬을 해주셨다. …… 셰익스피어는 중요한 독백을 할 때는 모호한 말투를 쓴 다음에 그 내용에 대한 설명을 붙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 꼭 이어서 확실한 답을 해주고 있었다. 그런 생각으로 이어지는 다음 행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어느 쪽이 더 당당한 삶인가. 이대로 마음속에서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참는 것인가, 아니면 다가오는 고난의 거센 파도에 정면으로 맞서 싸워, 그것에 종지부를 찍는 것인가. ……"


이처럼 상당히 중요한 내용으로 자문을 하고 있다.


분명히 to be는 '이대로 마음속에서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참는 것'이며, not to be는 '다가오는 고난의 거센 파도에 정면으로 맞서 싸워 그것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즉 햄릿은 '삶이냐, 죽음이냐'의 관념론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놓인 상황 속에서 고민하고 있다.(110∼111쪽)


 - 오다시마 유시,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중에서


비단 '사드 문제' 뿐만은 아니다. '이명박근혜 정부의 여러 조치' 때문에 그동안 몹시도 혼란스러웠던 문재인 대통령이 '사드 배치 보고 누락'을 보고받았을 때 순간적으로 느꼈던 심정이야말로 '햄릿'의 심정을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둘 사이의 뚜렷한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햄릿'은 끊임없이 심사숙고하면서 '복수'를 계속 미뤘다는 점이다. 문재인 대톨령이 '만약' 햄릿처럼 행동했더라면 아마도 '사드 추가 배치 보고 누락'에 대해 그토록 급작스러우면서도 '세계 만방에 널리 알리는 식으로' 호통을 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문제가 당초 의도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쁜 방향으로 '여러 반향'을 불러왔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문재인 대통령에겐 햄릿이 연극의 막바지에 이르러 읊는 유명한 대사 하나를 앞으로도 계속 떠올려야 하는 '과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 '사드 배치 문제'는 그저 잠시 지연시켰을 뿐, 결국 언젠가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시점이 반드시 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와야 할 것이 지금 오면 나중에는 오지 않는다. 나중에 오지 않는다면 지금 오겠지. 지금은 아니라도 반드시 올 것은 언젠가 온다."


 - 『햄릿』, <5막 2장> 중에서



이쯤에서 두서없는 글을 마무리지어야겠다. 마침 오늘 서울국제도서전이 있었던 모양이다. 거기서 흘러나온 뉴스 하나가 내 눈에 번쩍 띄었다. 문재인 대톨령이 "책 선물을 많이 받는 편인데 꼭 다 읽는다"는 내용이었다. 혹시 문재인 대통령한테 '셰익스피어의 책'을 선물한 사람은 없었을까, 그게 갑자기 궁금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은 '셰익스피어 마니아'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모처럼 대통령다운 대통령을 맞이한 국민의 입장에서 '세익스피어 읽는 대통령'을 바라는 게 너무 무리한 욕심일까.


한 나라의 지도자가 셰익스피어를 좋아한다면


판단보류, 즉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바로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바로 '만약'의 중요한 예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만약에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지를 상상하면서, 안 된다고 하는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어떨까. 간단히 절망에 빠질 것이 아니라 '만약 내가 해낼 수 있다면'이라고 생각해 보자.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상상력을 가지게 된다면 그 어떤 부모자식이라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고, 이 세상에서 전쟁은 사라질 것이다. 화를 내기 전에 모든 사람들이 이 '만약'을 머릿속에 떠올린다면, 부모자식과 부부는 물론이고, 이웃, 나아가 이웃나라와의 외교문제까지 모두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 특히 한 나라의 지도자가 셰익스피어를 좋아한다면, 세상에서 전쟁은 사라질 것이다. 결투는 그만두고 악수를. 이것이 바로 셰익스피어다.(25쪽)


 - 오다시마 유시,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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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셰익스피어'를 읽으면서 '정치 현실'을 떠올리지 않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정치'만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분야도 드물다. 그런 껄끄러운 문제에 대해서조차 셰익스피어는 놀랄만큼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다. 이 글에서 좀 더 엮어보려 했던 내용들도 있었지만 부족한 능력 탓에 더 이상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미 글 밖으로 빠져 나왔지만 원래의 글 속에 포함시키고 싶었던 '책 속 내용들'을 덧붙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 * *

역사라는 톱니바뀌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폴란드의 얀 코트라는 비평가가 적절하게 표현한 것처럼, 그들을 한데 묶어서 바라보면 역사는 '위대한 기계장치Grand Mechanism'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성군이든 폭군이든 어차피 역사라는 톱니바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헨리 5세는 프랑스를 무찌르고 프랑스의 왕녀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끝을 맺지만, 다음으로 왕이 된 헨리 6세는 금방 무능함이 드러난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한명의 인간, 한 명의 왕은 아무것도 아니다. 순간적으로는 여러 일이 벌어져도 한 개인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역사 속에서 하나의 기계처럼 움직인다.(67쪽)


 - 오다시마 유시,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중에서



지배자가 극단으로 치우칠 경우엔


민중은 지배자가 공정한 정치를 하고 있다면 그에 조용히 따른다. 그러나 지배자가 극단으로 치우칠 경우엔 그 균형을 다시 맞추려고 한다. 극단적으로 폭군이 등장하면 이래서는 안 된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면, <리처드 2세>에 정원사가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나온다. 리처드 2세는 정치능력도 없으면서 간신배 때문에 국가의 재산을 전부 써버린다. 그러다 결국 볼링브룩(뒤에 헨리 4세)에게 왕위를 뺴앗긴다. 그런 정치 상황을 서민은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정원사 스승은 제자에게 나무란 쓸모없는 가지를 잘라야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와 같은 민주국가에서 자기들이 잘난 줄 알고 날뛰는, 지나치게 자라버린 그런 자잘한 가지들의 머리를 싹둑 잘라버려야 하느니라. 우리들의 정치란 모두가 평등해야 하기 때문이다."

(68∼69쪽)


 - 오다시마 유시,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중에서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햄릿』은 여전히 가장 실험적인 극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무엇도 『햄릿』을 파괴시키지는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연극 전체'라는 표현은 옳지 않은 듯하다.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햄릿』은 여전히 가장 실험적인 극으로 남아 있다. 베케트, 루이기 피란델로, 그리고 모든 부조리 작가들의 시대에서조차도 말이다. 『오델로』,『리어 왕』,『맥베스』가 모두 비극이었던 것처럼 『햄릿』또한 반드시 비극이라고 보아야 하는가는 생각해 볼 문제다. 비극적 결함 혹은 비극적 덕성에 대해 이야기해도 덴마크의 햄릿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뿐만 아니라 그 이상까지도 지닌 듯하다.


에머슨은 자유를 '야성의 것Wilderness'이라고 정의했는데, 그렇다면 『햄릿』이야말로 모든 연극 가운데서도 가장 야성적이며 자유로운 연극이다. 심지어『12야』의 부제인 '뜻대로 하세요'를 붙여서 '햄릿, 혹은 뜻대로 하세요'라고 불러도 좋을 법하다.


『햄릿』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사실 이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질문이다. 주인공 햄릿을 포함해 여덟 명이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시각에 따라서 달리 볼 수 있는 여지가 있긴 하다. 유령의 입장에서 보면 끝까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살아 있는 자에 대한 복수의 갈망은 여전히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381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중에서



           리처드


내게 왕관을 건네라. 자, 사촌, 왕관을 받게나.

자, 사촌, 이쪽엔 내 손, 그리고 그쪽엔 자네 손.

이제 이 황금 왕관은 깊은 우물과 같아서,

물통 둘을 번갈아 채우며 들락거리게 하지 ㅡ

빈 통은 허공에서 흔들흔들 춤추고,

다른 통은 물이 꽉 차 내려가 안 보이지.

눈물로 채워져 내려간 통은 나인데,

슬픔 마시는 중이고, 자넨 높이 오르는 중이야.


 - 『리처드 2세』, <4막 1장> 중에서


 

(나의 생각)


『리처드 2세』는 '무능한 왕이었던 '리처드 2세'가 실정을 거듭한 끝에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고 버림받는 내용을 다룬다. '리처드 2세'가 추락을 거듭할 때 새롭게 왕위에 오른 인물은 랭커스터 왕조를 연 '헨리 4세'였다. 비극의 주인공 '리처드 2세'가 백성들로부터 쫓겨난 끝에 폐위되고 결국 감옥에 갇혔다가 헨리 4세의 부하로부터 살해되기 까지의 과정이 눈물겹다. 아마도 박근혜 정부 시절에 벼슬깨나 했던 사람들이나 '태극기 부대' 사람들은 이 작품을 '눈물 없이는' 읽기 힘들 지도 모르겠다. 집권하는 과정만 보면 얼핏 '반역'일지 몰라도 일단 '민심'을 얻은 이후의 헨리 4세의 행보는 거침이 없다. 어쨌든 이 사극에서 가장 인상깊은 대목은 리처드 2세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새로운 왕에게 '왕관'을 물려주는 소위 '탈관식 장면'이다. '눈물로 채워져 내려간 통'과 '허공에서 흔들흔들 춤추는 통'을 대비시킨 것도 놀랍지만, 진정한 절정은 리처드 2세가 '거울'을 바닥에 내던지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거울'을 좋아했던, 지금은 감옥에서 재판을 받느라 몹시도 초췌한 박근혜를 떠올리지 못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어쨌든 '셰익스피어의 눈'은 참으로 놀라운 데가 있다. '경이로움에 의해 상처입은 청자들'은 세익스피어의 관객들을 가리키는 항구적인 구절이 되었다던 헤럴드 블룸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리처드


그자들은 내가 만족시켜 주지. 내 죄상이 다 기록된

바로 그 문서를 내가 보게 되는 순간,

다 읽어 주마 ㅡ 그게 바로 나이니까.


(시종 하나 거울 들고 등장)


거울을 다오. 그걸 보고 읽으련다.

아직 주름이 덜 잡혔어? 슬픔이 이 내 얼굴 위에

그 숱한 가격(加擊)을 하였으되, 더 깊은 상흔을

남기지 못했나? 아, 거울도 아첨을 하는구나 ㅡ

나 한창 좋은 세월이었을 때 날 따르던 무리처럼,

거울도 날 속이는구나. 이 얼굴이, 날이면 날마다

왕실 지붕 아래에서 일만 명을 거느리던

바로 그 얼굴인가? 이 얼굴이, 마치 태양인 양,

보려는 사람 눈부셔 눈 감게 하던 그 얼굴인가?

이것이, 그 숱한 망동(妄動)들을 눈감아 주다가 마침내

볼링브로크가 들고일어나도록 한 그 얼굴인가?

부서지기 쉬운 영광 이 얼굴에 빛나는구나.

이 얼굴도 영광처럼 부서지기 쉬운 것 (거울을 바닥에 집어 던진다)

저것 보아, 일백 개의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진 걸.

말씀 없으신 임금, 잘 새겨 두시오. 이 장난의 의미를 ㅡ

내 슬픔이 내 얼굴을 얼마나 빨리 깨뜨렸는지.


『리처드 2세』, <4막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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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7-06-17 1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15일날 빨리 보고 나중에 정독해야지 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읽으니, 이런 글은 오렌 님처럼 세익스피어를 탐독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인 듯합니다. 이런 글을 알라딘에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런 글이 이달의 당선작이 안 된다면 참으로 문제가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글에 당선작이라도 안 주면 알라딘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접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암요~!

oren 2017-06-17 13:37   좋아요 0 | URL
yamoo 님 반갑습니다. yamoo 님께서 얼핏 스쳐 읽은 뒤에 나중에라도 기어코 다시 찾아와 정독해주시니 글쓴이로서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사실 글의 소재로 삼은 ‘사드 배치 보고 누락‘은 너무 예민한 문제여서 그 분야를 잘 알지도 못하는 나같은 사람이 글로 쓴다는게 여간 주저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한두번 끄적거리다 말았는데, 그 뒤로 ‘쥐새끼 한 마리‘도 자주 언급되고, 중국도 ‘꼼수 부리지 말라‘는 식으로, ‘결국 언젠가 결정할 때가 올 것‘이니 그때까지 예의주시하겠다는 식으로 나오니 햄릿 이야기를 쓰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더군요. 저 역시 햄릿처럼 이 글을 쓰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to be ot not to be˝ 문제에 붙잡힌 꼴이었다고나 할까요? 저는 yamoo님의 고무적인 댓글 만으로도 글쓴 보람을 충분히 맛보았으니, 알라딘이 ‘당선작 누락 시비‘로 생존이 위협받는 일까진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