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자들은 텍스트를 읽는 입장이라는 데 따르는 굉장한 힘을 깨닫고 그런 특권을 열광적으로 지키려 들었음에 틀림없다. 오만방자하게도 대부분의 메소포타미아 필사자들은 텍스트 말미를 이런 간기로 장식하곤 했다. "현명한 사람들이 현명한 사람들을 교육하도록 하자. 무식한 사람들은 볼 줄도 모를 테니까" 라고. 이집트에서는 B.C. 2300년경인 19대 왕조에 어느 필사자가 자신의 일을 찬양하는 노래를 이렇게 적었다.

 

필사자가 되려므나! 이 말을 그대 가슴에 각인하라.

그대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

두루마리는 돌새김보다 훌륭하느니라.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먼지가 되고,

그의 사람들도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니.

사람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책이니라

그를 읽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 * *

 

(밑줄긋기)

 

04_희곡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


그의 희곡은 문학적 힘에 있어서 성서에 필적할 만한 유일한 문헌이다.


단테와 밀턴, 블레이크는 작품을 통해 숭고한 정신을 그려 내려는 야심을 가진 위대한 작가들이었다. 반면 셰익스피어는 초서나 세르반테스와는 관심의 영역이 달랐다. 즉 근본적인 인간의 모습만을 재현하고자 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우리 삶에 성서의 역할을 대신하지 않더라도 그의 희곡은 문학적 힘에 있어서 성서에 필적할 만한 유일한 문헌이다.


히브리어 성경이나 신약, 코란 등에서 표현된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대해 셰익스피어만큼 미묘하고 멋진 대안과 비전을 제시한 작가는 없었다. 야훼와 예수, 알라의 말에는 권위가 있다. 어떤 면에서 햄릿이나 이아고, 리어 왕, 클레오파트라의 말도 같은 권위를 지닌다. 설득에서는 오히려 셰익스피어의 풍부함이 더욱 커 보인다. 그의 수사적이고 창조적인 재능들이 야훼와 예수, 알라의 그것을 능가한다고 말하면,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신성 모독이 될 수 있으리라.(367쪽)



호레이쇼가 관객과 대체되었다는 것


햄릿은 호레이쇼를 찬양하는 데 있어 철저하리만큼 진지하다. 호레이쇼는 엘지노어의 법정에서 클라우디우스(햄릿의 숙부로 형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인물)가 조종할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다. 햄릿은 호레이쇼에 대해 "진정 허다한 고난을 겪었으면서도 마음의 동요가 조금도 없어"라고 말했는데, 이는 호레이쇼가 관객과 대체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관객으로서 작가가 주는 모든 고통을 받아야 하지만, 또한 그것이 연극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기 때문에 아무런 동요 없이 받아들인가. 한 인간으로서의 호레이쇼에 대해 셰익스피어가 "격정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 데에는 관객 역시 보다 금욕적이고 현명해지길 원하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다.(370쪽)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셰익스피어의 극시가 그렇듯


나는 셰익스피어가 "인간을 발명했다"고 말한 후로 다른 비평가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왔다. 존슨 박사는 "시의 본질은 발명"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따라서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셰익스피어의 극시가 그렇듯 실용적으로 인간을 개조하고 재발견했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초연함은 『소네트』와 『햄릿』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원형적 양식이라 할 수 있다.(370쪽)



우리는 햄릿이 되어야만 햄릿을 엿볼 수 있다.


일곱 번에 걸친 햄릿의 독백이 나온다. 관객은 우리와 햄릿, 두 부류다. 따라서 우리는 엿듣고 그를 흉내낸다. 햄릿이든 누구든 우리는 말하는 사람의 인식과는 반대로, 의도와 어긋나게 그의 말을 엿듣는다. 야훼나 예수, 알라에 대해서 엿듣는 일은 불가능하진 않지만 어려운 일임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햄릿이 되어야만 햄릿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이 셰익스피어의 모든 희곡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작품에 드러나는 기법이다.(371쪽)



시인으로서의 성취되지 못한 명성에 관한 연구


일반적으로 우리는 '천재성'을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정의한다. 때론 거기에 '창조적인 능력'이라는 은유를 덧붙이기도 한다. 햄릿은 작품에 등장하는 허구적 인물 가운데 단연 천재성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의 지적인 힘에 대해 많은 증거들을 제시했다. 반면 창조의 힘은 대부분 모호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극중 극에 등장하는 왕의 연설이나 무덤에서 햄릿이 부르는 광적인 노래의 경우는 예외로 볼 수 있다.


희곡 『햄릿』은 주인공의 좌절된 창의성, 즉 햄릿 왕자의 시인으로서의 성취되지 못한 명성에 관한 연구라고 생각한다. 이는 결코 새로운 생각은 아니다. …… 다만 분명히 말하고 싶은 사실은 햄릿은 실패한 시인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371∼372쪽)



거대한 토르소의 팔다리처럼 많은 내용이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작가들 가운데 가장 개방적인 셰익스피어는 또한 가장 생략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작품에 지나치게 무언가 첨가했다가 그것들을 다시 삭제함으로써 교묘하게 우리를 가르친다. 『햄릿』은 대작이지만 거대한 토르소의 팔다리처럼 많은 내용이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372쪽)



셰익스피어는 진정한 최초의 다문화적 작가


『햄릿』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4막과 5막 사이의 전환에서 하나의 정점을 건드리는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왜『햄릿』을 읽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이 작품이 우리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전통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란 지극히 포괄적인 개념을 말한다.


햄릿은 지식인 중의 지식인이다. 그는 서구 의식의 고귀성과 파멸을 동시에 내포한 존재다. 또한 동서양, 남녀, 흑인과 백인을 막론하고 인류 전체의 지성을 대변하는 대표성을 지녔다. 셰익스피어는 진정한 최초의 다문화적 작가였던 것이다.(372쪽)



몽테뉴와 비교할 때 햄릿은 자신과 타인들 모두에게 야만적이다.


『햄릿』을 다른 문학 작품과 비교하는 일은 어렵다.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들이나 혹은 단테, 초서, 세르반테스, 몰리에르, 괴테, 톨스토이, 체호프, 입센, 조이스, 프루스트 등이 쓴 뛰어난 작품과의 비교도 또한 어렵다. 『햄릿』은 그 자체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햄릿은 끝부분에 이르러서 실제로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고 말한다. 햄릿이 정통한 지식을 갖고 있는 듯 보이는 몽테뉴가 아마 유일하게 유용한 비유가 될 것이다. 몽테뉴와 비교할 때 햄릿은 자신과 타인들 모두에게 야만적이다.


위대한 수필 「경험에 대하여」를 쓴 몽테뉴가 5막에 나오는 햄릿보다 더 현명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는 햄릿보다 자신의 지혜에 더욱 관대하다. 5막에서 햄릿이 제 아무리 강한 카리스마를 가졌다 해도 결국 '은총'이 그를 버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성서에서 은총이라는 말을 쓰는데, 내가 말하는 의미는 "무한의 시간 속으로 빠져드는 더 많은 삶"이다.(373∼374쪽)



5막 전체에 나타난 그의 시각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사후적이다.


햄릿 안에 있는 무언가는 그가 바다에 있을 동안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덴마크로 돌아오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다. 5막 전체에 나타난 그의 시각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사후적이다. 이는 햄릿이 후손에게 전해질 자기 '오명'을 견디지 못하리라는 강박관념을 보여 준다. 『햄릿』의 독자나 관객은 햄릿이 자신의 추종자 호레이쇼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 끊는 일을 말리고 그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서 오명을 회복하도록 하는 모습에서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우리가 햄릿의 모호한 광증의 일시적인 현실을 받아들인다 해도 햄릿에게는 엄청난 긴장이 가해진다. 햄릿이 오필리아에게 가학적일 정도로 잔혹했기 때문에 결국 그녀는 미치고 자살에까지 이르게 된다. 햄릿은 자기가 누구를 죽이는가도 모르는 채 커튼 사이로 검을 찔러 넣어 폴로니어스를 살해했다. 이후에 그는 환희만을 표명한다. 로젠크란츠와 길텐스턴은 기회주의자들이기는 하지만 햄릿이 이유 없이 죽음에 이르게 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햄릿은 두 사람의 죽음에 관해 별 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374쪽)



세익스피어의 관객들을 가리키는 항구적인 구절


'경이로움에 의해 상처입은 청자들'은 세익스피어의 관객들을 가리키는 항구적인 구절이 되었다. 우리는 "자, 나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다." 라는 햄릿의 자긍심에 가득 찬 적대감에 전율한다.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자제된 위험은 전적으로 아이러니칼하진 않지만 우리들에게 다음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게 만든다. 즉 햄릿은 호레이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가 항해를 마치고 돌아왔다고 밝히면서 냉정하게 말한다.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영국으로 향하고 있네."


햄릿은 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 모습을 본 호레이쇼는 충격을 받고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길덴스턴과 로젠크란츠가 그곳으로 가고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햄릿이 그들이 죽음에 대해 "그건 그들이 좋아서 한 짓이니까" 라고 말하며 냉담한 태도를 보일 때, 그들이 햄릿의 예일 대학 동창생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햄릿이 아니며, 따라서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377∼378쪽)



햄릿은 마지막까지 당신을 사랑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아고처럼 햄릿은 다른 등장 인물들의 삶에 대해 글을 쓴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다. 우리는 이아고에게서는 이런 능력에 대해 두려워하면서 왜 힘릿에게는 매료되는가? 모든 허구적 인물 중에서 가장 지적으로 복잡한 이 인물의 여러 가지 신비 중 하나는 그가 우리에 대해 카리스마적 지배력을 행사한다는 점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념가나 청교도적 도덕주의자가 아니라면 지난 200여 년 이상 동안 보편적 병폐였던 햄릿과 사랑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햄릿은 마지막까지 당신을 사랑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다.(378쪽)



어떤 허구적 인물도 햄릿만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데 능숙한 인물은 없었다


햄릿이 자신의 '오명'을 남기는 고통을 묘사했을 때 무대 위는 그의 어머니, 클라우디우스, 레어티즈 등의 시체들이 널려 있고, 햄릿 역시 죽어 가고 있었다. 그는 폴로니어스를 살해했고, 오필리아를 미치게 해 자살로 몰아갔으며, 불쌍한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에 이르게 했으므로 그의 이름에 흠집이 날 만했다. 그러나 햄릿은 자신의 죽음을 포함한 여덟 명의 죽음에 대해서 별로 슬퍼하지 않는다. '덴마크의 햄릿'은 그의 이름으로 우리를 경이로움에 빠지게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의 성취는 과연 무엇일까? 그의 놀라운 재능에 비례해 어떤 허구적 인물도 햄릿만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데 능숙한 인물은 없었다.(378∼379쪽)



글로브 극장 관객들은 한 번에 네 편의 연극을 보았던 셈


셰익스피어는 『햄릿』이후에는 복수극을 쓰지 않았는데, 이는 그 장르를 작가가 좋아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햄릿』은 복수극이 아니라 극장성Theartricalty에 대한 극이다. 햄릿 이전의 그 어떤 서구의 희곡에서도 그토록 '극장성'에 사로잡힌 작품은 없었다. 한마디로 글로브 극장 관객들은 한 번에 네 편의 연극을 보았던 셈이다.


1막에서 2막 1장은 일종의 복수극이다. 그리고 극 중 극의 배우들이 도착하는 2막 2장에서부터 클라우디우스가 '거짓 불에 놀라서' 「쥐덫The Mouse Trap」에서 도망치는 3막 2장까지는 극장성에 관한 막간극으로 이어진다. 4막까지 계속되는 세 번째 극은 모든 이들에게 각자 의미 있는 만화경 같은 것으로 한마디로 규정짓기는 어렵다.


마지막 5막은 불과 몇 주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도 햄릿이 10년이나 나이 들어 보이고, 부왕의 유령은 기억에서조차 존재하지 않으며, 부왕도 단지 오랜 기억만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햄릿』은 복수의 비극으로 시작해 어느 순간 연극과 배우들에 대한 거친 사색으로 이어지고, 셰익스피어의 창조적 정신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 초월적 비극 안으로 빠져든다. 이 순간 새로 탄생한 인간은 죽음이란 스스로를 조롱하고 또한 조롱당하는 것이라는 절대적 자기 인식의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연극 『햄릿』이 가장 강력하면서도 또한 당혹스러운 부분이 바로 이것인데,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그러한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379∼380쪽)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햄릿』은 여전히 가장 실험적인 극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무엇도 『햄릿』을 파괴시키지는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연극 전체'라는 표현은 옳지 않은 듯하다.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햄릿』은 여전히 가장 실험적인 극으로 남아 있다. 베케트, 루이기 피란델로, 그리고 모든 부조리 작가들의 시대에서조차도 말이다. 『오델로』,『리어 왕』,『맥베스』가 모두 비극이었던 것처럼 『햄릿』또한 반드시 비극이라고 보아야 하는가는 생각해 볼 문제다. 비극적 결함 혹은 비극적 덕성에 대해 이야기해도 덴마크의 햄릿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뿐만 아니라 그 이상까지도 지닌 듯하다.


에머슨은 자유를 '야성의 것Wilderness'이라고 정의했는데, 그렇다면 『햄릿』이야말로 모든 연극 가운데서도 가장 야성적이며 자유로운 연극이다. 심지어『12야』의 부제인 '뜻대로 하세요'를 붙여서 '햄릿, 혹은 뜻대로 하세요'라고 불러도 좋을 법하다.


『햄릿』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사실 이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질문이다. 주인공 햄릿을 포함해 여덟 명이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시각에 따라서 달리 볼 수 있는 여지가 있긴 하다. 유령의 입장에서 보면 끝까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살아 있는 자에 대한 복수의 갈망은 여전히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381쪽)



『햄릿』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게 느껴져 마치 다른 작품을 보는 듯하다.


우리는 독자로서 이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햄릿』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게 느껴져 마치 다른 작품을 보는 듯하다.(382쪽)



햄릿 왕을 제외하고 무대 위에서 다른 관심의 중심은 없다.


『햄릿』이라는 극은 끊임없이 변하는데, 주인공 자체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도 변화무쌍하다. 모호한 전사-연인-아버지 없는 존재, 햄릿 왕을 제외하고 무대 위에서 다른 관심의 중심은 없다.(383쪽)



『햄릿』에서 중요한 건 햄릿이 처한 곤경이 아니라 그의 재능


셰익스피어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아이러니를 구사한 작가로, 미묘하고 변덕스러우며 극도로 지성적인 햄릿만이 존재하는 극을 남겼다. 만일 우리가 진지하고 깊이 있게 이 희곡을 읽는다면 틀림없이 스스로 햄릿이 되고, 그래서 간혹 당혹감도 느끼게 될 것이다. 『햄릿』에서 중요한 건 햄릿이 처한 곤경이 아니라 그의 재능이다. 그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확대시켜 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햄릿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잃지 않으려고 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햄릿은 우리를 그의 의식의 심연 속으로 이끌 것이다. 그곳에는 이아고나 『리어 왕』의 에드문드 혹은 『겨울 이야기』의 레온테스를 초월하는 허무주의가 존재한다.


정의를 내리자면, 셰익스피어는 햄릿보다 포괄적이며 다양하다. 하지만 단일한 인물로서 셰익스피어 안에 있는 허무주의적 시심을 의인화할 수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햄릿이다. 이아고는 다른 등장 인물이나 그들의 삶으로 '글을 쓰지만', 햄릿은 배우들을 위해 새로운 글을 쓰고 불가사의한 짧은 노래들을 즉흥적으로 지어 내기 때문이다. 햄릿은 '주제'와 '자세'라는 이중적 면에서 허무주의 시인이다. 독백의 언어에서, 극에 대해 이야기하는 극들에서, 언어와 자아를 포함해 햄릿은 그 어느 것도 믿지 않는다.383∼384쪽)



『햄릿』을 읽을 때 우리는 햄릿 내부에 있는 배우와 시인의 기질 모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모든 비극이 끝난 뒤 셰익스피어는 햄릿을 멋지게, 그러나 슬프게 시인이 아닌 배우로 만들었다. 독자들도 햄릿의 시에 매료되면서 그의 연기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햄릿』을 읽을 때 우리는 햄릿 내부에 있는 배우와 시인의 기질 모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385쪽)



"사느냐 죽느냐"로 시작되는 그의 독백


200여 년 이상이나 "사느냐 죽느냐"로 시작되는 그의 독백은 끊임없이 인용되어 왔고, 때문에 오히려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다. 나는 낭만주의 시대의 비평가 찰스 램을 대단히 존경하는데, 그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는 일은 제대로 만들지 못한 연극을 관람하는 것보다 낫다고 주창한 선구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나는 햄릿의 멋진 독백과 다시금 마주친다면, 절망적인 찰스 램의 다음과 같은 말에 독자들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유명한 구절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심지어는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아니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그 구절은 사내아이나 남자들에 의해 연설 투로 너무 거칠게 함부로 다루어지고, 그 살아 있는 장소와 극의 계속성이란 원리에서 그렇듯 비인간적으로 괴리되어 있어서 내게는 완전히 죽은 대사가 되고 말았다.


일곱 개 중 세 번째인 '사느냐 죽느냐' 독백은 지식과 행위 사이의 부정적 관계에 대해 다루었다. 이 부분은 햄릿이 극에서 왕 역할을 하는 배우를 위해 쓴 대사의 절정을 이루며, 또한 다음 위대한 시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야기의 매듭을 지으려 하오.

인간의 의지와 운명은 서로 어긋나는 것이므로

계획은 언제나 무너지게 마련이지.

생각은 우리 자신이 하지만 그 결과는 우리도 어쩔 수 없는 것이오.    ㅡ 3막 2장 (386쪽)



햄릿에 대한 불쾌함은 그가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게 아니라 너무 잘 생각한다는 점


셰익스피어가 소네트에서 흔히 그러했듯이 햄릿은 의지에 대해서 숙고한다. 우리는 행동할 의지가 있는가? 마지못해 움직이는 것인가? 의지의 한계는 무엇인가? 햄릿의 광대한 의식은 사고의 끝이 무언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종말을 의도한 모든 관련된 불확실성에 대해 어떻게 충분히 인식하는가?


니체가 인식하듯이 햄릿에 대한 불쾌함은 그가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게 아니라 너무 잘 생각한다는 점이다. 햄릿은 예술을 향하지 않으면 진실에 의해 죽을 것이다. 햄릿은 귀족 중에서도 왕족이므로 지성적인 행위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이면서도 그것에 대한 향수에 사로잡혀 있다.


양심이 우리를 겁쟁이로 만드는구나.

결단의 선명한 색채가

망설임으로 창백해지고 침울해짐으로 녹슬고 만다.

지극히 중요한 거대한 과업도

이 때문에 그 흐름이 틀어지고

실천의 힘을 잃고 마는구나.                                         ㅡ 3막 1장 (387∼388쪽)

 


그래서 햄릿은 마지막에 우리의 의견을 묻는다.


햄릿은 극의 결말 부분에서 살육이 있기 전에 호레이쇼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길 승산이 있어. 그러나 자네는 내 마음에 얼마나 악이 들끓고 있는지 모를 거야." 이는 자신의 훼손된 이름을 남기는 일에 대한 두려움을 암시한다. 그래서 햄릿은 마지막에 우리의 의견을 묻는다.


지금 와 버리면 장차 오지 않고, 장차 오지 않으려면 지금 올 것일세.

만일 지금 와 있지 않다면, 결국엔 올 것이라니까. 모든 것은 각오일세.       (389쪽)



그 안에는 "왜『햄릿』을 읽는가?"에 대한 최상의 답이 들어 있기 때문


햄릿의 영혼은 의지에 차 있으며 육신도 약하지 않다. 그는 자기의 음악에 맞춰 특이하게 죽음을 맞는다. "그냥 내버려 둬." 세속적인 문학에서도 이것만큼 독자를 사로잡지는 못할 것이다. 왜? 햄릿이 마지막으로 "이젠 침묵이야"라고 한 말은 정신적으로 매우 모호하지만 나는 그 말은 부활이 아닌 몰락을 예견했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는 "왜『햄릿』을 읽는가?"에 대한 최상의 답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햄릿은 우리를 위한 대리적 속죄양으로 죽는 게 아니라 훼손된 이름을 남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지닌 채 죽는다. 몰락과 부활, 어느 쪽을 기대하든 간에 우리는 각자의 이름이나 명예에 대해 걱정하는 것으로 독서를 끝낼 가능성이 높다. 모든 허구적 인물 가운데 가장 카리스마 넘치고 지적인 햄릿은 누구나 겪게 될 종국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보여 주었다.(389쪽)

































 

















헨릭 입센(1828∼1906)


만일 입센이 페미니스트라면


내가 쓰는 글에는 트롤Troll이 있는 게 틀림없다. ㅡ 입센


나는 내 자신이 의식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위해 일한다는 명예로운 사실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ㅡ 입센


만일 입센이 페미니스트라면 나는 가톨릭 주교다. ㅡ 제임스 조이스



헤다의 자기 파괴 안에서 와일드 자신의 파멸에 대한 열정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


오스카 와일드는 공연 <헤다 가블러>를 본 뒤, 이렇게 말했다.


"나는 희랍 비극을 본 것 같은 연민과 공포를 느꼈다."


1891년 와일드는 그 연민과 공포의 감정이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그가 워낙 영민하므로 헤다의 자기 파괴 안에서 와일드 자신의 파멸에 대한 열정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헤다만큼 마음에 든 인물이 있었을까


우리는 헤다가 자살을 찬양하는 가운데 클레오파트라만큼 우아하진 않지만 아름답게 목숨을 끊었으리라 확신한다. 그녀는 페미니스트적인 순교자도 아니고 무대 역시 클레오파트라의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것에 비해 훨씬 좁지만, 헤다는 입센 시대의 노르웨이에서 중산 계급의 숨막히는 도덕성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


만일 그녀가 이아고만큼 우리를 놀라게 하지 못했다면 뢰브보리도 결코 오델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입센은 거친 아이러니로 헤다 주변을 이류 인간들로 둘러싸이게 했다. 그들은 헤다의 아름다운 사악함의 완전한 잠재력에 그 어떤 자극도 주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지난 100여 년간 작품 속의 그 어떤 인물 중에서도 헤다만큼 마음에 든 인물이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 체호프의 작품에 나오는 여 주인공들도 사랑스럽지만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고통당하고 또 고통을 가하는 헤다는 우리 가까이에 널려 있다. 입센은 글을 쓸 때 책상 위의 컵에 전갈을 두고 멜론을 먹여 키웠다고 한다. 치명적이면서도 매력적인 헤다 가블러는 바로 이런 작가의 감성의 산물이 아닐까.


















오스카 와일드(1854∼1900)


셰익스피어의 『12야』이래 영국 최고의 희극


셰익스피어 이후, 대부분의 걸작 희극은 아일랜드 작가들의 작품이다. 윌리엄 콩그리브의 『세상의 길』, 올리버 골드스미스의 『정복을 위한 굴복』, 리차드 브린슬리 셰리단의 『스캔들 학교』,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오스카 와일드의 『어니스트가 되는 것의 중요성』,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 존 밀링턴 싱의 『서방 세계의 플레이보이』,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등이 그러하다.


와일드의 『어니스트가 되는 것의 중요성』은 위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셰익스피어의 『12야』이래 영국 최고의 희극이다. 이 작품은 신선함이 가득한 기적 같은 작품이며, 와일드가 쓴 두 편의 수필 「사회주의에서의 인간의 영혼」,「거짓말의 부패」만큼 훌륭하다.



『어니스트가 되는 것의 중요성』의 은밀한 뜻은 '창작'


와일드는 자신의 최고의 희곡 제목을 『무관심한 것의 중요성』이라고 지을 수도 있었다. 앞서 살펴보 것처럼 『어니스트가 되는 것의 중요성』의 은밀한 뜻은 '창작'이었다. 독창적이라는 것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을 위한 무관심한 거짓말이다. 와일드는 이 극의 철학에 대해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모든 사소한 일에 매우 진지해야 한다. 그리고 삶의 모든 심각한 일은 '성실하고 의도된 사소함'으로 다루어야 한다."


우리는 알거논의 음식에 대한 관심을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난 음식에 대해 진지하지 않은 인간들을 증오해. 너무 가벼운 짓이거든."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성찰이 비평의 핵심인 까닭


보르헤스는 "와일드는 언제나 옳거나 아니면 거의 언제나 옳다"고 말했다.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아더 사이먼스가 언급했듯 와일드는 희곡 작가면서 뛰어난 비평가이기도 했다. 그는 인용에서 언제나 독창적이었다. 또 와일드는 품위 있는 자서전 작가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성찰이 비평의 핵심인 까닭이다.



레이디 브랙넬이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만일 입센이 헤다 가블러라면, 와일드는 레이디 브랙넬이라 할 수 있다. 터무니없는 그녀의 행동은 극중 그 누구보다 앞서 있다.


레이디 브랙넬: (자신의 시계를 꺼내며) 봐라, 얘야. (그웬돌렌이 일어선다) 벌써 우린 여섯 아니 다섯 대의 기차를 놓쳤다니까. 하나만 더 놓치면 정류장에 적힌 글이나 읽고 있을 거야.


나는 이 구절을 『서구의 정전』이라는 책의 권두에 인용하고 싶었다. 그러나 편집자들의 반대로 책에 싣지는 못했다. 나는 위의 구절이 2000년대의 독자들, 진정으로 정전이 될 만한 창의적 문학에 시금석이 되리라고 보았다. 『어니스트가 되는 것의 중요성』을 어떻게 읽을까? 우리는 레이디 브랙넬이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류장에서 그웬돌렌과 그녀의 어머니를 보고 있는 그 누구도 모녀가 다섯 혹은 여섯 대의 기차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이 기차를 놓치거나 한 건지조차 알 수 없다. 레이디 브랙넬은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전 세계가 자신의 관객이며 일정 관리자가 될 수 있다. 그것이 그녀와 희곡의 익살맞은 위대성인 까닭에 우리는 『어니스트가 되는 것의 중요성』을 계속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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