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상상력이 넘치는 펜으로 옮겨지면 보잘것없는 연극소극장도 하나의 드넓은 우주로 변해 온갖 계층의 신분을 지닌 등장인물들이 '무대가 좁다'는 듯이 대활약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러면 순식간에 우리들 주위의 세계가 '희미한 달빛'처럼 현실감을 잃고 만다.

 - 랄프 왈도 에머슨

 

 * * *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다. 뒤늦게 만난 셰익스피어의 글을 도둑질하듯 밤마다 찾아 읽느라 정신이 없다. 뿔 달린 달님조차 눈을 감은 오밤중이나, 희뿌연 여명이 밤을 쫓아낼 새벽이 다가올 때까지도 그가 남긴 연극의 대사를 찾아 읽느라 짧은 밤이 아쉬울 지경이다. 심지어『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을 속삭이는 새벽 장면마저도 '글 도둑질에 빠진 사람'의 심정을 묘사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도 해봤다. 이 밤이 지나면 '당신'을 다시 만나기 위해 길고도 무료한 낮을 또 보내야만 해요, 하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우린 서로 아무 사이도 아니고 연인이 될 수도 없는데 말이다.


       줄리엣

가려고요? 날은 아직 밝지도 않았는데,

걱정하는 당신의 텅 빈 귀를 꿰뚫은 건

종달새가 아니라 밤 꾀꼬리였어요.

밤마다 저기 저 석류나무 위에서 우니까.

내 말을 믿으세요, 여보, 밤 꾀꼬리였어요.


       로미오

종달새였다니까, 아침의 전령이지

밤 꾀꼬린 아니오. 저 봐요, 저 건너 동녘에

시샘하는 빛살이 터진 구름 수놓는 걸.

밤 촛불은 다 꺼지고 유쾌한 낮의 신이

안개 낀 산마루에 발끝으로 서 있다오.

난 가서 살거나 남아서 죽어야만 한답니다.


       줄리엣

저 빛은 햇빛이 아니란 걸 알아요, 예,

저것은 태양이 내뿜은 혜성으로

오늘 밤 당신 위해 횃불잡이 노릇하며

만토바로 가는 길을 밝히려 한다고요.

그러니까 머물러요, 갈 필요 없다니까.


       로미오

잡혀가게 해 줘요, 죽임을 당하도록.

당신이 그러기를 원하면 난 만족이랍니다.

나는 저 잿빛이 아침의 눈망울이 아니라

창백한 달님 이마 반사한 것뿐이며

저 높은 곳에서 노래로 창공을 울리는 게

종달새가 아니라고 우겨 말할 테니까.

난 가려는 의지보다 머물 맘이 더 많아요.

죽음이여 어서 와라. 줄리엣의 뜻이다.


       줄리엣

밝았어요, 밝았어. 어서 여길 떠나세요.

거슬리는 불협화음 불유쾌한 올림표로

엉망진창 노래하는 저것은 종달새랍니다.

종달새는 고운 음을 분산 연결한다는데

저것은 못 하네요. 우릴 분리시키니까.

종달새와 역겨운 두꺼비가 눈을 바꿨다는데

오, 서로의 목소리도 바꿨으면 좋았을걸.

그 소리에 놀라서 우리 포옹 풀어지고

일어나라 노래하며 당신 쫓아내니까요.

아, 이제 가요, 점점 더 밝아지고 있어요.


       로미오

날은 점점 밝아지고 우리 한탄 짙어지네.


『로미오와 줄리엣』, <3막 5장>

 


『햄릿』부터 시작하여『오셀로』, 『맥베스』,『리어왕』을 차례대로 만난 뒤,『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줄리어스 시저』를 빠르게 지나쳤다. 눈물 없인 만날 수 없는『로미오와 줄리엣』을 (안타깝게도) 메마른 눈으로 만난 뒤에는 다시『한여름 밤의 꿈』을 꾸고 나서 『베니스의 상인』을 만났다. 별이 총총한 새까만 밤, 덴마크의 엘시노어 성 위의 망대에서 출발했던 여정이 어느새 데스데모나가 살았던 베네치아의 길거리로 되돌아와 있었다.


셰익스피어 덕분에 내가 만나는 인물들이 갑자기 부쩍 많아졌고, 생전 못 가 본 '장소'까지도 실컷 쏘다니는 기분도 든다. 그런데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온갖 인물들을 아무리 실감나게 실컷 만나고 돌아다녔더라도 내가 그들을 또다른 독자들에게 실감나게 생생하게 재현할 방법이 없다는 점은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 셰익스피어가 그토록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도록 만든 인물들을 어찌 나의 둔필로 다시 살려낼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모습을 전하고자 애를 쓸수록 도리어 그들을 덧칠해서 셰익스피어가 본래 그렸던 그림을 더 망칠 뿐이라는 생각마저 고개를 든다.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인물들이 지닌 특색 한 가지는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모습이나 생각이 '모호'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햄릿만 하더라도 그렇다. 누가 그를 두고 '이런 인물'이라고 단정적으로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극중 인물들이 명쾌하게 '나, 이런 사람이야' 하고 곧바로 독자들에게 선명하게 다가오는 경우도 물론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많은 인물들은 독자들에게 명쾌하게 '규정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게 바로 셰익스피어 희곡의 특징이자 매력인 듯하다.


거듭 말하지만 셰익스피어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 번만 만나서는 결코 그들의 진면목을 제대로 다 알기 힘들다. 그들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오로지 '등장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만 그들을 파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극작가는 희곡을 쓸 때 '배경 설명'만 생략하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대화'나 '장면'까지도 생략하기 마련이다. 그런 생략과 함축을 통해 작가는 독자들의 주의를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싶어 하고, 독자들이 각자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여지'를 가능한 한 풍부하게 남겨주고 싶어하는 듯하다.


셰익스피어 읽기의 숱한 매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독자들만이 겪고 있는 특별한 고충을 나 또한 절감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우선 극이 쓰여졌던 시대 상황이 우리나라와는 너무나 다르다. 그의 작품들은 우리나라 역사에 대입하자면 임진왜란이 한창일 무렵에 머나먼 영국땅에서, 그것도 고대 영어로 쓰여진 '고색창연한 연극의 대본'인 셈이다. 그러니 그 대본이 우리 실정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거기서 연유하는 문제는 곧바로 번역상의 어려움으로 이어진다. 수많은 대사들이 '우리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숱한 뒤틀림이 생길 게 너무나 뻔하다. 우리말도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인데, 무려 400년 전에 다른 나라 언어로 씌여진 대사가 온전히 우리가 쓰는 지금의 우리말에 가깝게 번역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거듭 '여러 번' 읽으라고 권유하는 듯싶다. 심지어 소설도 '여러 번' 읽을 것을 강조하는 형편인데 희곡이야 오죽하랴.


이만 각설하고, 나는 이쯤에서 내가 읽은 작품들 가운데 '명대사' 만이라도 몇 대목쯤 다시 찾아 보고 거듭 재음미하고 싶다. 셰익스피어를 읽는 즐거움이 반드시 그의 작품이 다루는 이야기에만 있는 건 결코 아닐 것이다. 어쩌면 숱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잊지 못할 대사 하나 하나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찬란하게 빛내는 보석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보석은 원래 자리잡고 있던 보석함에서 잠시 꺼내 놓더라도 결코 그 가치가 퇴색하지는 않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셰익스피어의 반짝이는 대사들을 여기에 옮겨 적는 일은 구석진 내 서재를 잠시나마 그런 보석들로 환하게 빛내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너무 많은 보석들을 여기에 한꺼번에 꺼내 놓아 '보석 구경'에 싫증을 일으킬 생각까지는 없다. 그리고 너무나 잘 알려진 '보석 같은 명대사'를 식상하게 다시 꺼내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랬다가는 이내 보석을 돌처럼 여기고 금방이라도 고개를 돌릴지 모를 테니까 말이다.


우선『햄릿』부터 시작해 보자. 그가 바로 셰익스피어를 영원토록 빛낼 대표적인 인물이니까.


나에겐 까마득한 옛날에 아동용 버전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그때의 기억들은 뿔뿔이 어디론가 다 흩어지고 달아났지만 아직까지도 단 한 가지는 남겨 놓았다. 그건 바로 '암투에 휩싸인 궁궐 속 인물들이 서로 싸우다가 죽이고 죽는 이미지'다. 햄릿이나 오셀로나 맥베스나 리어 왕이나 하나같이 '궁궐'과 '권력을 둘러싼 투쟁'이 빠지지 않았으니 당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읽었던 아동용 작품 속에 그런 이미지들이 실제로 그림으로 실려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햄릿』의 수많은 대사 가운데 나는 다음 대목을 맨 처음으로 내세우고 싶다. 대사의 맨 끝 부분에 특히 주목하기 바란다.


       호레이쇼

보십시오, 왕자님, 왔습니다.


            햄릿

구원의 천사들은 저희를 지키소서!

네가 좋은 귀신이든 저주받은 악귀든

하늘 바람 타고 왔든 지옥 돌풍 몰아왔든

네 의도가 사악하든 자비롭든지 간에

질문하기 알맞은 모습으로 왔으니까

난 말을 걸겠다. 난 너를 햄릿, 대왕, 아버지,

덴마크 왕이라 부르겠다. 오, 대답하라.

내가 몰라 터질 것만 같으니 말을 해라,

죽었을 때 예를 갖춰 입관한 시신이 왜

수의를 찢었으며 묘지는 왜 너를

우리가 봤을 땐 조용히 누워 있었는데도

육중한 대리석 턱을 열고 입 밖으로

다시 토해 내었는지, 이게 무슨 뜻이기에

너, 죽었던 시신이 완전 무장 다시 하고

이렇게 명멸하는 달빛 속에 되돌아와

이 밤을 무섭게 만들면서 자연의 노리개인

우리의 마음을 영혼이 못 미칠 생각들로

이토록 끔찍하게 흔드느냐? 웬일이냐?

뭣 때문에? 우리더러 어떡하란 말이냐?


 『햄릿』, <1막 4장>



비단『햄릿』만이 아니다. 셰익스피어가 쓴 많은 희곡들을 읽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뭣 때문에? 우리더러 어떡하란 말이냐?' 이 말이야말로 우리가 『햄릿』을 읽고,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들을 더 찾고, 더 나아가 숱한 문학작품을 끊임없이 찾아 읽는 궁극적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햄릿과 묘를 파는 산역꾼>, 빠스깔 다낭-부베레, 1883년



《햄릿》의 오필리아, 칼 프리드리히 빌헬름 트라우트숄트(1815∼1877), 독일



이제 『오셀로』로 넘어가 보자. 이 질투심 많은 무어 인 장군에게 우리가 너무 많은 질책을 하진 말자. 그가 데스데모나를 죽일 만큼 강력한 질투심을 일으킨 원인이 어디에 있었든지 말이다. 그가 '자신의 행적과 인간성'을 베네치아 정부에 고할 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알려달라고 말한 대목만큼 인상적인 대사도 드물다.


           오셀로


무엇을 줄이거나

악의로 적지도 마시오. 그러면 당신은

분멸없이 너무 많이 사랑했던 사람을

질투를 쉽게 하진 않지만 하도록 만들면

극도로 혼란되는 사람을, 제 손으로

자기네 부족보다 더 값진 진주를 던져 버린

비천한 인도인 같은 자를, 차분한 두 눈은

기분 따라 쉬 녹진 않지만 아라비아 나무가

약용 진액 흘리듯 눈물을 줄줄 쏟는 사람을

말해야만 할 것이오.


『오셀로』, <5막 2장>


<오셀로, 데스데모나, 이아고>, 헨리 먼로(1791∼1814)


오셀로와 가슴 아픈 사별을 나눴다면 늙은 리어 왕을 한결 가볍게 만날 수도 있다. 그는 비록 늙어 비참한 모습으로 두 딸로부터 버림까지 받아가며 방황하는 노인이지만, '아내를 죽이고 자결한 오셀로' 만큼 독자들을 울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가장 사랑했던 막내딸 코델리어가 자객에게 죽임을 당한 걸 알고 나서 비통하게 울부짖는 리어 왕의 다음 대사는 눈물 없이는 듣기 어려운 대사가 이닐 수 없다.


          리어 왕


불쌍한 내 바보가 죽었다. 생명이 없다 없어!

왜 개나 말이나 쥐는 살아 있는데

넌 숨조차 못 쉬느냐? 넌 다시 못 돌아와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리어 왕』, <5막 3장>


<감옥에서 아버지 리어왕을 위로하는 코델리아>, 조지 윌리엄 조이(1844∼1925), 1886년


『햄릿』과 『오셀로』와 『리어 왕』의 주인공이 하나같이 독자들에게 일종의 '측은지심'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이라면, 『맥베스』는 도리어 주인공의 죽음이 독자들에게 만족을 안겨준다는 점이 다르다. 그것도 맥베스에 의해 부인과 어린 아들까지 잃은 맥더프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니. 맥베스가 맥더프의 처자식들을 죽인 뒤에 '휩싸인 불안' 때문에 겪는 고통을 노래하는 대목은 '인생 무상'을 떠올리게도 만드는 '아주 여운이 긴' 대사이다.


         맥베스

내일과 또 내일과, 내일과 또 내일이

이렇게 쩨쩨한 걸음으로, 하루, 하루,

기록된 시간의 최후까지 기어가고

우리 모든 지난날은 죽음 향한 바보들의

흙 되는 길 밝혀 줬다.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

인생이란 움직이는 그림자일 뿐이고

잠시 동안 무대에서 활개치고 안달하다

더 이상 소식 없는 불쌍한 배우이며

소음, 광기 가득한데 의미는 전혀 없는

백치의 이야기다.

『맥베스』, <5막 5장>


벌써 우리는 덴마크의 엘시노어 성(『햄릿』의 무대 배경)에서 출발하여 베네치아와 키프로스 섬(『오셀로』의 무대 배경)을 거쳐 브리튼의 리어 왕궁과 스코틀랜드의 덩컨 왕궁(『맥베스』의 무대 배경)을 모두 빠르게 지나왔다. 이젠 지중해에 자리잡은 알렉산드리아와 로마를 숨가쁘게 오갈 차례다. '세기의 연인'으로 불려 마땅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활동무대가 바로 거기이기 때문이다.


이 극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사는 '클레오파트라'를 몹시도 궁금해 하는 '로마 사람들'에게 '안토니우스의 부관 이노바부스'가 그녀를 묘사하는 대목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도 『안토니우스 편』에 이르면 갑자가 귓가를 세차게 때렸던 칼 부딪치는 소리와 대포소리가 어느새 모두 사라지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은은한 음악 소리와 '여인의 향기'가 꼬끝을 휘감는 듯한 분위기 때문에 정신이 아찔할 정도인데, 셰익스피어는 플루타르코스보다 한술 더 뜬다.



     이노바부스

그녀가 탄 배는 물 위에서 불타는

빛의 옥좌 같았는데 선미는 금박이고

돛은 자주색으로 향수 냄새 진동하여

바람이 상사병에 걸렸죠. 피리 소리 따라서

은으로 된 노 저을 때 부딪치는 물결은

얻어맞는 애무를 받고 싶어 하는 듯

더 빨리 따라가게 되었죠. 그녀의 자태는

형용이 불가능했답니다. 천막 안에

금실로 수놓은 옷을 입고 누웠는데

실물보다 상상력이 뛰어난 그림 속의

비너스보다 더 나았지요. 그녀의 양쪽엔

귀여운 보조개 소년들이 큐피드처럼 웃으며

색색의 부채 들고 섰었는데, 그 바람은

섬세한 그녀 뺨을 식혔다가 태우는 듯

한 일을 망치는 것 같았죠.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2막 2장>


'세상의 절반을 가졌던' 남자와 '세상의 전부를 가질 수도 있었던 남자를 사랑했던' 여자의 러브 스토리는 결국 비극으로 끝나지만, 우리는 안토니우스가 좀 더 팔팔했던 한 때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할 때 자칫 도매금으로 그와 함께 휩쓸려 죽임을 당할 뻔했으나 '브루투스의 방심'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심복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에선 남자 주인공이지만『율리우스 카이사르』에서도 남우조연상을 받을 만큼 두루 맹활약을 펼친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일당에 의해 카이사르가 살해된 직후, 죽은 카이사르의 명예를 빠르게 회복시킨 건 바로 그였다. '사자후'를 토하듯 뜨겁게 쏟아낸 그의 연설이 로마 시민들을 삽시간에 흥분시키고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브루투스 일당은 '안토니우스의 명연설' 때문에 졸지에 '개혁의 상징'에서 '불의의 쿠데타 세력'으로 내몰려 도망다니는 신세로 돌변한다.


『줄리어스 시저』의 주인공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아니라 브루투스이다. 이 멋지고 용감하고 고상한 로마인은 단지 자신만 훌륭한 게 아니었다. 小카토의 딸이었던 그의 아내 또한 브루투스 못지 않았다. 몽테뉴와 마키아벨리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위대하다고 칭송했던 로마의 인물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아니라 小카토와 브루투스였다.『줄리어스 시저』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은 아마도 브루투스가 고백한 말 "내가 시저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었소. 나는 로마를 시저보다 더 사랑했을 뿐이오."라는 대사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브루투스의 죽음 이후에 안토니우스가 그를 기려 고별사에서 했던 말이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그런 대사를 나는 이번에야 비로소 접했기 때문이다.


        브루투스

이 사람이 그들 중 가장 귀한 로마인이었다.

그를 뺀 나머지 공모자들 모두는

위대한 시저에게 악심 품고 그 짓 했다.

오직 그만 공적이고 정직한 생각에서

모두의 공익을 위하여 한패가 되었다.

그의 삶은 고귀했고 인성은 완벽하여

자연의 여신조차 일어서서 온 세상에

'이게 사람이었다,'라고 했을 것이다.


『줄리어스 시저』, <5막 5장> 중에서



《줄리어스 시저》의 한 장면, 브루투스 역의 에드먼드 킨, 제임스 노스코트(1745∼1831)



연극의 무대가 아직까지도 지중해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베로나가 그리 멀지 않다. 그러나 몬터규 家와 캐풀릿 家의 싸움이 벌어지는 베로나 거리는 서둘러 건너뛰도록 하자. 이미 로미오와 줄리엣이 날이 새도록 나눴던 대화를 앞에서 길게 인용했으니 말이다.


이젠 슬픔과 비탄과 유령과 무덤과 죽음 등이 가득했던 비극을 건너 뛰어 '유쾌한 희극'으로 넘어갈 차례다. 내가 찾은 첫 번째 무대는 테세우스가 다스리는 그리스의 아테네다. 그곳에선 세 쌍의 커플이 곧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지만, '한여름밤의 꿈'을 꾸고 나서 한바탕 '대소동'을 치를 때까진 '아직' 아니다. 연인들끼리 서로 복잡한 사랑의 갈등을 겪기 때문인데, 그 갈등을 풀기 위해 오베론이 쓰는 '마법의 즙'이 도리어 일을 더 꼬이게 만든다.


        오베론

바로 그 순간에 (너는 못 봤지만) 나는 봤어,

차가운 달님과 땅 사이를 날아가는

중무장한 큐피드를. 서쪽에서 등극한

아름다운 정녀(貞女)를 그는 겨냥했었고

십만의 가슴을 뀌뚫을 듯 세차게

사랑의 화살을 시위를 놓으면서 날렸지.

하지만 그 어린 큐피드의 불같은 화살은

순결하고 습기 찬 달빛 속에 꺼졌으며

수녀 여왕께서는 연정에 안 빠진 채

처녀의 명상을 계속하고 계셨단다.

근데 난 그 화살이 떨어진 곳 지켜봤어.

서쪽의 작은 꽃에 떨어졌고 원래의 우윳빛이

사랑의 상처로 이제는 자주로 변했는데

처녀들은 그것을 팬지라고 부른단다.

내가 한 번 보여 줬던 그 꽃을 가져와라,

잠자는 눈꺼풀에 그 꽃 즙을 바르면

눈 뜨고 처음 보는 생물에게, 남자든 여자든

미치도록 혹하게 만들 수 있단다.

그 약초를 가져와, 그런 다음 너는 다시

큰 고래가 삼 마일을 가기 전에 여기로 와.


『한여름 밤의 꿈』, <2막 1장>



《한여름 밤의 꿈》의 허미아와 라이샌더, 존 시몬즈 作



《한여름 밤의 꿈》의 허미아와 헬레나, 조지프 세번(1793∼1879)



이제 아테네 근처 숲에서 겪은 대소동은 '한여르 밤의 꿈'처럼 지나갔다. 나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물의 도시' 베네치아로 다시 한번 건너갈 필요가 생겼다. 악명높은 유대인 샤일록이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에게 '계약 이행'을 하라며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불쌍한 안토니오는 이미 파산지경이라 돈을 갚을 능력이 전혀 없다.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처녀를 신부로 맞아들인 친구 바사니오가 원금의 몇 배를 쳐서 그 빚을 갚아주겠다고 나섰으나 샤일록은 오로지 '1파운드의 살'만 가져가겠노라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베니스의 상인』에서는 특히 '삶의 교훈'으로 삼을 만한 '뛰어난 처세훈' 이 많은 게 특징이다. 그 가운데 하나를 소개해 보겠다. '베네치아의 신사' 그라티아노가 말한 '이 세상 모든 것은 얻었을 때보다 좇을 때가 더 좋은 법'이라는 말은 몽테뉴가 『수상록』에서 거듭 주장하는 대표적인(?) 철학 가운데 하나다. 이런 대목이야말로 셰익스피어가 몽테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명백한 증거다. 그렇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싯구들은 셰익스피어가 아니었다면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표현임에 틀림없다.


        살라리노

오, 비너스의 비둘기는 안 깨진 서약을

지켜 주러 갈 때보다 사랑의 새 언약을

맺어 주러 날아갈 때 열 배나 더 빠르다네.


     그라티아노

언제나 맞는 말씀. 연회석에 앉을 때의

그 왕성한 식욕 갖고 그 누가 일어서죠?

지겨운 걸음걸음 같은 길을 되밟는데

처음 뛸 때 치솟았던 열기가 살아나는

그런 말은 또 어딨죠? 이 세상 모든 것은

얻었을 때보다 좇을 때가 더 좋은 법.

깃발 덮인 범선이 고향 해안 떠나갈 때

창녀 같은 바람 품에 얼싸안긴 그 모습은

얼마나 멋들어진 막내 또는 탕아인가!

창녀 같은 바람에게 돈 뺏기고 몸을 망쳐

비바람에 찢긴 늑골, 걸레 조각 돛을 달고

돌아올 땐 또 얼마나 비참한 탕아인가!


 『베니스의 상인』, ,2막 6장>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악명높은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조연일 뿐이다. 몇 척의 배를 '모험 사업'에 몽땅 올인한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 역시 조연이다. 진짜 주인공은 '막대한 유산'과 '미모'와 '미덕'을 두루 갖춘 예비 신부감 포셔다. 그녀의 아버지가 딸의 신랑감을 고르기 위해 '유언'과 함께 준비해 놓은 '금궤, 은궤, 납궤 고르기 게임'과 '반지의 혼란'이 '인육 재판'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낭만적 희극의 묘미'를 만끽하게 만든다.


《베니스의 상인》의 포셔, 찰스 에드워드 페루기니(1839∼1918, 이탈리아)


또한『베니스의 상인』에서는 '음악'이 유별나게 중요한 역할을 떠맡는다. 샤일록의 현명한 딸 제시카와 그녀에게 구혼하는 로렌초가 주고 받는 '달빛 소나타' 같은 이중창은 그 어떤 오페라의 이중창도 감히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 '이런 밤에' 이토록 멋진 가락을 제쳐 놓고 『베니스의 상인』을 서둘러 덮긴 힘들다. 게다가 '별이 빛나는 깜깜한 밤'에 이 글을 시작했으니 '달빛이 밝은 밤'이 나오는 대사로 마무리짓는 것도 나로선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닐 듯싶다. 벌써 어디선가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린다. 어서 여길 벗어나 다시 셰익스피어로 되돌아 가자. 그가 유혹하는 다음 작품이 맞춤하다.『좋으실 대로』


        로렌초

달빛이 참 밝네. 이 같은 밤이었지.

달콤한 바람이 나무에게 부드럽게 입 맞추면

나무는 소리 없이 서 있는 이런 밤에

트로일로스는 트로이 성벽에 올라가

크레시다 잠자는 그리스 편 천막을 향하여

혼 빠진 듯 한숨을 쉬었겠지.


        제시카

                                    이런 밤에

티스베는 겁을 내며 이슬 밟고 걷다가

사자의 그림자를 사자 앞서 보고는

놀라서 도망을 쳤었지.


        로렌초

                                    이런 밤에

황량한 바닷가 제방에 디도는 홀로 서서

버들가지 잡은 손을 애인에게 흔들었지,

카르타고 다시 찾아오라고.


        제시카

                                    이런 밤에

메데이아는 이아손 노인을 정말로 회춘시킨

마법의 약초를 모았었지.


        로렌초

                                    이런 밤에

제시카는 부유한 유대인에게서 도망쳐

반편이 애인과 더불어 베니스를 벗어나

저 멀리 벨몬트로 달아났지.


        제시카

                                    이런 밤에

로렌초는 확실한 사랑을 맹세하며

수많은 서약으로 그녀 혼을 훔쳤는데

진실된 건 하나도 없었지.


        로렌초

                                    이런 밤에

어여쁜 제시카는 말괄량이 소녀처럼

애인을 욕했으나 그는 용서했었지.


          제시카

아무도 안 왔으면 밤새 해도 이길 텐데.

하지만 들어 봐, 사람의 발소리야.


『베니스의 상인』, <5막 1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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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5-19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익스피어를 깊이 있게 읽지는 못했지만, 읽다보니 대화 하나하나가 ‘시‘로 구성되어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 대화 몇 구절만 외워도 별 의미없는 영어회화 공부하는 것보다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요즘 「맥베스」를 읽는데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네요. 감사합니다.

oren 2017-05-19 11:23   좋아요 1 | URL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들이 ‘대사의 절반 이상이 운문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번역 과정‘에서 그런 운율을 충분히 제대로 살릴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더군요. 다행히 최종철 교수님이 ‘운문 형식‘으로 새로 번역한 ‘민음사 셰익스피어 전집 시리즈‘는 그런 문제점을 적잖이 해소한 중요한 시도라 보여집니다. 최종철 교수님이 번역한 똑같은 작품도 더러 비교해 봤더니 ‘과거의 산문 번역‘과 ‘새로운 운문 번역‘은 적잖은 차이가 있더군요. 겨울호랑이 님께서 지금 읽고 계신 『맥베스』의 영문판은 소위 ‘약강 오보격 무운시‘의 형식을 얼마만큼이나 느낄 수 있는지도 갑자기 궁금해 지는군요. 이쯤에서 다시 한번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에머슨이 셰익스피어의 ‘시적인 문장들‘에 대해 남겼던 참으로 인상적인 말을 다시금 떠올려 봅니다.
* * *
셰익스피어 극의 명대사는 그 모두가 마음이 황홀해질 정도의 문장이고 누구나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 그 주옥같은 명문을 맛보고 싶다는 유혹에 사로잡히는데 동시에 그 문장에는 논리학자까지도 감탄하게 하는 깊은 뜻이 담겨 있고 시종 훌륭한 논리로 일관되어 있다.

작품의 피날레도 훌륭한데 그곳에 이르기까지의 조리가 또 대단한 것이다. 언뜻 보기에 상호 양립이 안 될 것으로 보이는 모순된 요소를 절묘한 창의로 결부시키는 문장의 묘기 그 자체가 자연스럽게 한 편의 시가 되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말하자면 문학의 명마를 타고 어디까지라도 달리는 기수와도 같은 것이다. 어디로 가건 아름다운 문예의 꽃을 피울 수 있으므로 말에서 내려 수수한 산문의 대지를 걸을 필요는 전혀 없다.

겨울호랑이 2017-05-19 11:36   좋아요 1 | URL
영어 원문을 읽기는 하지만, 그 깊이를 영문화권에 사는 이들처럼 느끼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많이 드네요. 다소 아쉬움이 들지만, 자주 접하다보면 더 깊이 있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