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이 뭡니까?

 

 

노력은 항상 그 필요성에 비례한다

 - 아담 스미스

 

 * * *

 

저도 좀 강하게 주장해 보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서평'은 그야말로 '서평꾼'이 대체로 '직업적인 필요'에 의거해서 쓰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부 전문 블로거들이 인터넷 공간에 '거의 프로에 가까운 솜씨로' 쓰는 글들도 어쩌면 '서평'이라고 부르는 게 맞지 싶고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책을 읽고 나서 쓰는 글'은 그게 리뷰든 페이퍼든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이든 또다른 어떤 형식의 글이든 상관없이 대체로 '책에 대한 감상문' 즉 '독후감'을 쓰는 경향으로 자연스레 흐르게 마련이라고 봅니다.

 

요즘 알라딘 서재에서 블로거들이 쓰는 ('페이퍼'가 아닌) '리뷰' 또한 예전에는 꽤나 오랫동안 '서평'이 주류였다고 기억됩니다. 그래서 글의 구성요소나 스타일이나 분량들이 쳔편일률까지는 아니었더라도 대체로 '어떤 범주'를 크게 벗어나는 일이 없었던 듯하고요. 저 또한 알라딘에 들어온 초창기(대략 2003년 ∼ 2008년? 또는 2010년?) 여러 해 동안에는 철저히 '서평'만 썼더랬습니다. 소위 서평꾼도 아니면서 서평꾼이 되려고 노력했었던 셈이지요. 그러다가 '페이퍼'가 점차 활성화되면서 저도 언제부턴가 용기를 내어 '페이퍼'를 쓰기 시작했더랬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알라딘의 분위기 또한 점점 더 '서평'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알게 모르게 어느새 '페이퍼'와 '리뷰'의 경계가 모호할 정도로 '독후감'이 대세를 점하게 되더군요.(이건 제 판단입니다.)

 

 

잠행성 정상 상태, 풍경 기억 상실

 

불규칙한 변동으로 인해 느리게 진행되고 있는 변화가 잘 드러나지 않는 현상을 정치학자들은 '잠행성 정상 상태(creeping normalcy)'라고 부른다. 경제 문제, 교육 문제, 교통 체증 문제, 혹은 그 어떤 문제가 매우 천천히 악화되고 있을 경우 한 해의 평균 수준이 그 전 해에 비해 아주 약간 낮아졌다는 사실을 깨닫기 힘들며, 따라서 미세하지만 한 사람이 정상(normalcy)이라고 생각하는 기준도 매년 조금씩 변동하게 된다. 이와 같은 변화는 사람들이 깨닫는 순간까지 수십 년간 계속 진행되어 어느 순간 몇십 년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상태였으며, 현재 정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태가 사실은 악화된 상태임을 알게 되고는 갑자기 놀라게 되는 것이다.

 

'잠행성 정상 상태'와 관련 있는 또 다른 용어는 '풍경 기억 상실(landscape amnesia)'이다. 이는 변화가 매년 매우 느리게 진행됨으로써 50년 전의 풍경이 지금과는 얼마나 달랐는지 깨닫지 못하는 현상을 말한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몬태나 빙하 및 설원의 용해 현상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 재레드 다이아몬드, 『문명의 붕괴』중에서

 

 

저도 과거에 '서평'만 쓰던 시절에는 '리뷰'를 쓸 때 다음의 '네 가지'를 항상 염두에 두고 글을 썼던 기억이 납니다.

 

1. 전반적으로 무엇에 관한 책인가?

2. 무엇을, 어떻게 자세히 다루고 있는가?

3. 전반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볼 때 그 글은 맞는 이야기인가?

4. 의의는 무엇인가?

 

최소한 서평을 쓰자면 '서평의 기본'은 반드시 글에 담겨야 한다고 여겼거든요.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에서 배운 걸 실천하려는 의미도 있었고요.

 

그런데 '페이퍼'가 차츰 활성화되면서부터 '리뷰'를 쓰는 일이 점점 힘겹게 느껴지기 시작하더군요. 정작 '서평'을 쓰기 위해서는 '정해진 틀'에 대충이라도 맞춰야 하는데 그게 싫어지기 시작한 거지요. 더군다나 글에 쏟아 넣고 싶은 온갖 재료들을 '억지로' 빼는 일도 참기 어려웠고요. 그래서 차츰 '페이퍼' 위주로 글을 쓰면서 '책의 생김새'를 비롯한 온갖 '다양한 이미지'들을 넣을 수 있게 되고, 심지어 '음악'과 '미술'까지도 넣을 수 있으니 정말 좋더군요.

 

어느덧 알라딘 블로거들이 올리는 페이퍼나 리뷰는 '과거의 잣대'로만 재단하기에는 너무나 힘들 정도로 빠르게 변모하고 진화하는 듯합니다. '북플' 서비스도 그런 경향을 심화시킨 요인 가운데 하나인 듯하구요. 이런 변화와 경향들을 무시하고 굳이 다시 옛날 스타일로 되돌아가서 '서평' 다운 '서평'을 써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그 점이 제일 궁금합니다. 서평꾼이라면 서평을 써야 되겠지요. 서평가를 지향하시는 분들도 서평을 열심히 쓸 필요가 있겠지요. 혹은 '서평'이 아니면 '리뷰'도 아니라고 여기는 분들도 계속 '서평' 형식으로 글을 쓸 테지요. 그러나 '영혼이 자유로운' 수많은 일반 블로거들까지 굳이 '서평가'를 흉내내어 그런 형식과 내용에 걸맞는 '서평'을 쓸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한가지만 더 언급하자면, '리뷰'나 '페이퍼'에 '인용문'이 많냐 적으냐 하는 건 '서평'을 쓸 때 제기될 만한 문제이지 '독후감'이나 '책에 대한 자유로운 글'을 쓸 땐 전혀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 스스로는 글을 쓸 때 '인용문'을 최대한 많이 집어 넣기 위해서 일부러 애를 쓰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제 판단으로는, 제가 쓰는 글보다는 '인용문'이 훨씬 더 강렬하게 독자들에게 와닿는 경우가 많을 지도 모르고, 제가 쓰는 허접한 글보다는 제가 다루는 책 속에 담긴 '빛나는 문장들'을 독자분들이 꼭 한번 눈여겨 봐주십사 하는 마음 또한 쉽게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심지어 다른 분들이 쓴 글 속에서도 가급적 '인용문'이 많은 글을 일부러 더 열심히 찾아서 읽는 편입니다. 그런 글들을 읽으면 '아하, 그 책 속에는 저런 빛나는 문장들이 실려 있구나' 하는 걸 단번에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누구든지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책이나 읽어 보지 못한 책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기 마련인데, 그 책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려고 하면 '책 속 문장들'을 직접 내 눈으로 살피는 일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심지어 '인용문'이 거의 없는 글들은 아예 지나치기도 합니다. 어떤 책에 대해서 '소감'을 밝히는 글이라면 그 책 속에 담긴 가장 명백한 실체라고 할 수 있는 '책 속 문장들'은 얼마쯤 보여주는 게 좋다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책 속에 담긴 절묘한 문장들을 조금도 보여주지 않은 채 혼자서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들어봐야 도무지 '납득'이 안 될 경우도 있거든요. 인용할 게 아무리 없더라도 '단 한 줄' 정도는 인용할 수도 있지 싶은데, 오로지 자기 자신의 느낌과 주장만 장황하게 늘어놓은 글은 아예 읽기조차 싫어질 때도 있더라구요. 뭐, 각자의 스타일이 있겠지요. 두서없는 글이 자꾸만 길어지네요. 그럼 이만 총총...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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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yrus 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속 여러 구절들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제 고약한 버릇이 또다시 발동된 셈이지요. 님의 용기있는 '문제 제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원인과 결과의 혼동

 

한 사람은 부유하고 그 이웃은 가난한 것은 외출할 때 한 사람은 마차를 타고 그 이웃은 걸어다니기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은 부유하기 때문에 마차를 탈 수 있고 그의 이웃은 가난하기 때문에 걸어다니는 것이다.

 

 

분업을 야기하는 원리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고려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자비심에 호소하지 않고 그들의 자애심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말하지 않고 그들 자신에게 유리함을 말한다. 거지 이외에는 아무도 전적으로 동포들의 자비심에만 의지해서 살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거지조차도 전적으로 타인의 자비심에 의지하지는 않는다.

 

 

버릇을 고칠 만한 용기

 

하인의 수를 대폭 줄이거나 식탁의 음식차림을 매우 호화로운 것에서 매우 검소한 것으로 바꾸는 일, 호화로운 마차를 만들어 놓고는 타지 않는 것은 주변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길 없는 변화이며, 이전의 나쁜 행동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변화이다. 그러므로 한때 이러한 종류의 지출에 빠져들만큼 불행했던 사람들은, 파멸·파산으로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는, 그런 버릇을 고칠 만한 용기를 내지 못한다.

 

 

상인들의 궤변

 

어떠한 나라에서든 대다수의 국민들로서는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가장 싸게 파는 사람들로부터 사는 것이 가장 이익이 되며 실제 그러함에 틀림없다. 이 명제는 너무나 명백해서 그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상인·제조업자들의 사리(私利)에서 나온 궤변이 인류의 상식을 혼동시키지 않았던들, 그 명제는 결코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점에서 그들의 이익은 국민 대다수의 이익과 정반대이다. 주민들이 자기들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고용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동업조합원의 이익이 되듯이, 국내시장의 독점권을 확보하는 것이 상인과 제조업자에게 이익이 된다. 따라서 잉글랜드나 대부분 유럽 나라에서는 외국상인에 의해 수입되는 대부분의 재화에 특별관세가 부과된다. 또 자기 나라의 제품과 경쟁할 수 있는 모든 외국제품에 높은 관세와 금지조치가 부과된다. 무역수지가 자국에 불리하다고 생각되는 나라, 즉 국민적 반감이 가장 격렬히 타오르는 나라로부터 수입되는 거의 모든 종류의 상품에 대해 특별제한을 가한다.

 

 

상인들의 허풍

 

나는 공공이익을 위해 사업한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사실 상인들 사이에 이러한 허풍은 일반적인 것도 아니며, 그런 허풍을 떨지 않게 하는 데는 몇 마디 말이면 충분하다.

 

 

우둔하고 황당한 사람의 수중에 있을 때

 

자기의 자본을 국내산업의 어느 분야에 투자하면 좋은지, 그리고 어느 산업분야의 생산물이 가장 큰 가치를 가지는지에 대해, 각 개인은 자신의 현지 상황에 근거해서 어떠한 정치가나 입법자보다 훨씬 더 잘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민간인들에게 그들의 자본을 어떻게 사용하라고 지시하려는 정치가는 스스로 불필요한 수고를 할 뿐만 아니라, 어떤 한 개인에게 안심하고 위임할 수 없으며 어떤 위원회나 참의원에게도 안심하고 위임할 수 없는 권력을, 또한 자신만이 이와 같은 권력을 행사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우둔하고 황당한 사람의 수중에 있을 때 가장 위험해지는 그런 권력을, 자신이 멋대로 휘두르려는 것이다.

 

 

노력은 항상 그 필요성에 비례한다

 

어떤 직업에서도 그 직업을 수행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노력은 그 노력을 해야 할 필요성에 항상 비례한다. 이 필요성이 가장 큰 것은 자기 직업에서 받는 보수가 그들이 획득하기를 기대하는 재산 또는 일반수입이나 생활수단의 유일한 원천인 사람들의 경우이다. (중략) 어떤 특정 직업에서의 성공으로 달성할 수 있는 위대한 목표는 물론 특별한 의지(spirit)와 야심(ambition)을 가진 소수 사람들로 하여금 열심히 노력하도록 분발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최대의 노력을 끌어내는 데 반드시 위대한 목표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비천한 직업에서도 경쟁과 대항의식이 남보다 성적이 뛰어나는 것을 야심의 목표로 하여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도록 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이에 반해, 목적이 위대하긴 하나 노력해야 할 필요성이 별로 절실하지 않은 경우에는 크게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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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1-21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0년 알라딘 블로그에 첫 글을 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의 북플까지 쭉 보면서 사람들의 글 형식이 조금씩 변화하는 걸 느꼈습니다. 저도 처음에 서평을 쓸 때 기준이 있었는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기준을 유지하면서 쓰는 일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런데 인용문을 넣는 글에 대한 저의 입장은 oren님의 입장과 다릅니다. 오늘 곰곰생각하는발 님의 글에서 발견한 인용문입니다.

내용 중의 일부를 따다가 원고를 채우면서 서평자와 원저자 사이의 입장 차이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도 서평이랄 수 없다. (< 과학서평의 위치와 갈 길 > , 최종덕 / 상지대 교수)

아무리 감상문을 자유롭게 쓰더라도 작성자가 인용문에 의존하듯이 지나치게 많이 인용하면 가독성을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제 인용문이 많은 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독자가 읽기 편한 인용문만 찾아 읽으면 글 작성자 본연의 생각을 외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최종덕 교수의 지적처럼 잘못된 인용이 글의 주제를 모호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oren님의 글과 최종덕 교수의 글을 종합해서 제가 얻은 결론은 인용문이 많은 글은 장단점이 있습니다. 글에 쓸 때 인용문을 어디쯤에 넣어야 하는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oren 2016-01-21 16:08   좋아요 1 | URL
`리뷰`를 옛날처럼 `서평`의 형식으로 쓰는 글들을 점점 찾아보기 어렵게 된 점에 대해서는 저로서도 몹시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평`은 어쨌든 `책이 중심이 되는 글들`이기 마련인데, 여러 환경변화(포토리뷰, 밑줄긋기, 100자평 활성화, 북플 등)와 사용자들의 취향 변화(`딱딱한 서평 쓰기`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독후감` 또는 `책에 대한 느낌을 강조하는 글쓰기` 확산) 등에 따라 갈수록 `책에 대한 날카로운 안목과 비판`이 담긴 깊이 있는 서평을 점점 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어쨌든 깊이 있는 서평을 쓰자면 `품`이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그런 고된 노력을 들여야 할 이유가 점차 희박해지기도 했구요.

인용문의 과다 여부 문제는 획일적인 잣대로 재단할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어쨌든 글을 쓰는 사람은 건축에 비유하자면 설계도와 함께 온갖 재료들을 써서 건축물을 지을 텐데, 인용문은 그런 건축물에 들어가는 일종의 건축 재료 혹은 장식물과도 비슷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런 재료나 장식물이 너무 넘쳐나서 어디가 `토대`이고, 어디가 `기둥`이고 어디가 `박공`인지 `지붕`인지조차 구별되지 않는다면 문제는 심각해지겠지요.

물론 건축물 가운데서도 `창고형 건축물`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인용문`이라는 건축재료 혹은 장식물만 가득 담기 위해 쓴 글이 그런 경우이겠지요. 혹은 `전시관` 같은 건축물도 생각해 볼 수 있겠구요. 물론 저도 그런 `창고형 건물`이나 `전시관`을 미리 염두에 두고 `인용문`으로만 가득 채우는 글을 쓸 때도 있답니다.(`창고형 건물`은 때로는 비공개글로도 잔뜩 써놓습니다. 다른 건축물을 지을 때 혹시나 필요할까 싶어서요. 창고를 들락거리며 그런 건축재료나 장식을 찾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답니다.)

`인용`을 얼마나 할 것인가는 결국 글쓴이의 의도와 글의 용도에 따라 판단할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알베르토 망겔이 쓴『독서의 역사』나『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읽어 보면 숨돌릴 틈도 없이 이어지는 기나긴 `인용`이 수도 없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렇다고 그 책이 `인용`이 너무 지나치다고 비판받을 일은 없다고 봅니다. 그런 책은 `인용`이 많을수록 더욱 풍성해지기만 할 뿐이지요.)

cyrus 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서평이랍시고 `내용 중의 일부를 따다가 원고를 채우면서` 쓰는 글이나, `글쓴이 본연의 생각조차 희미해지고 마는` 글들은 단점이 단번에 드러나고 마는 글이어서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겠지요...

yamoo 2016-01-21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논의는 관점의 차이가 매우 큰 것 같습니다.

대체로 오렌 님과 같이 생각하시는 분, 사이러스 님과 같이 생각하시는 분, 아니면 그런 거 필요없이 난 독후감이 좋아 독후감을 쓸래...이런 분들...

그냥 답은 없는 듯해요.

단지, 매체에 서평이라는 글을 기고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형식에 맞는 글이 필요한데, 이때에는 글쓴 사람의 주관적인 감상은 최대한 배제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oren 2016-01-21 15:35   좋아요 1 | URL
좋은 책을 많이 읽고, 그와 더불어 좋은 서평까지도 꾸준히 쓸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게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 `책에 대한 감상글`이 점점 더 득세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야만 할 듯해요. `서평`은 꼭 이래야만 하고, 독후감은 꼭 저래야만 한다는 `명확한 구분이나 규정`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테니까 각자 `자신의 능력에 걸맞게` 글을 쓸 수밖에 없는 노릇이라고도 생각되고요.

어쨌거나 `서평다운 서평`을 쓰고 싶은 욕심은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폭넓게 잠재되어 있는 뜨거운 욕망일 터이니, `서평` 자체가 너무 뒷전으로 밀려나거나 차츰 사라지는 건 아닐까 지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transient-guest 2016-01-2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인지, 독후감인지 뭔지 모를 글을 계속 써오고 있는 저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보다는 그저 좀 잘쓴 글이 나왔으면 하는 맘이 더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책의 이야기를 정리하는건 뭔가 스포일러 같아 꺼려지구요.ㅎㅎ 딱 free writing정도가 제 현재의 수준인 듯 합니다.

oren 2016-01-23 11:14   좋아요 0 | URL
저도 한 때는 `서평 쓰는 일`이 미뤄둔 숙제처럼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좋은 책, 감동받은 책들은 나 자신을 위해서나 다른 분들을 위해서나 `서평`은 꼭 남겨 보자는 욕심과 그걸 해소하지 못하는 현실 사이를 오래도록 방황했었던 셈이지요. 그런데 시간이 차츰 흐르면서 그런 부질없는 욕심을 차츰 버리게 되더군요. 어쨌든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단순한 사실에만 시선을 돌렸다고나 할까요. 이번 논쟁을 보면서 저는 `책보다는 느낌이 강조되는 작금의 글쓰기 경향`에 대해서 은근히 반기를 들고 (마치 숨어서라도) `옛 영토 복원`을 꿈꾸는 듯한 희망이 남아있다는 느낌도 받았어요. 물 흐르듯 흘러가는 `서평이냐 독후감이냐`에 대한 변천의 흐름을 그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구요.

감은빛 2016-01-31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는 책에 대해 설명하는 글을 써야 최소한 서평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책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글이 서평이 아닐까라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책의 줄거리나 내용을 주로 쓴 글이 별로 재미가 없더라구요.
대개 책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는 출판사에서 제공하기 때문에 굳이 서평에서 그런 정보를 써야할까 싶구요.
`나는 왜 이 책을 읽었는지, 어땠는지, 왜 이 책에 대한 글을 남기는지`
이런 내용이 들어가야 제대로 된 서평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로 저는 왜 굳이 서평과 독후감을 구분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책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재밌고,
다른 사람이 이 책을 읽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궁금하고,
그런 여러 생각들을 살펴보고 교류하는 것이 그저 좋은데,

왠지 이 논의가 한 편으로
`이건 서평이고, 이건 독후감이야. 제대로 된 서평을 써야해`
같은 방향으로 가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요.
(절대 오렌님의 글이 그렇게 읽힌다는 뜻은 아닙니다.
전반적으로 그런 경향이 느껴진다는 말씀입니다.)

oren 2016-01-31 16:51   좋아요 0 | URL
`서평과 독후감`을 구분짓고자 하는 열망 같은 게 누구에게나 알게 모르게 잠재되어 왔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과거 오랜 시간 동안 `서평`만이 `리뷰 카테고리`에 적합하고, `독후감에 가까운 감상문들`은 `페이퍼 카테고리`에 적합하다는 암묵적 구분이 있어왔다고나 할까요? 이제는 그런 구분마저 희미해진 게 사실이지요. 그래서 제가 이 글에서 `서평은 서평꾼들이 쓰는 전문적이고도 직업적인 글`이라고까지 범위를 확 좁혀서 말씀드리게 된 것이구요.

북다이제스터 2016-02-27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인용문 사용 방법에 크게 공감합니다.
한가지 궁금한 점은 페이퍼가 형식 혹은 내용 무엇을 규정한다는 뜻인지 말씀하신 의미가 궁금합니다.
알라딘의 페이퍼는 단지 형식 아닌가요? 아니면 대체 무엇인지요?

oren 2016-02-28 13:46   좋아요 0 | URL
아... 아주 옛날에는, 그러니까 알라딘에서 `페이퍼`라는 `형식`조차 아예 없었을 때를 말하는데요, 그 땐 글을 쓰려면 `리뷰`라는 카테고리에서만 쓸 수밖에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서평이든, 독후감이든 모두 오로지 `리뷰`를 쓸 수 있을 뿐이었었죠. 그러다가 `좀 더 자유로운 글쓰기` 카테고리가 필요하게 되면서 일부러 생겨난 게 `페이퍼`였던 걸로 기억합니다.(그 후에도 100자평, 밑줄긋기, 포토리뷰 형식들이 계속 추가되었었지요.) 그러니까 `페이퍼`는 애시당초에 만들어진 취지에 따르자면, `리뷰가 아닌, 자유로운 형식과 내용의 글쓰기` 범주의 글들을 수용하려는 형식이었던 셈이었죠. 그런데 북다이제스터 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이제는 `페이퍼가 단지 형식일 뿐`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페이퍼가 `형식과 내용 가운데 그 무엇을 규정한다`는 생각은 저도 여태껏 따로 해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