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니체전집 13
프리드리히 니체 / 책세상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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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도대체 언제부터 두 발로 걷기 시작했던 것일까? 적어도 600만 년쯤 거슬러 올라가 보더라도 '걷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라 생각된다. 비록 숲속에서 오랫동안 나무를 오르내리던 습성 때문에 날렵한 걸음걸이를 보여주지는 못하더라도.

 

'걷기'를 빼놓고도 철학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그리 쉽지는 않지 싶다. 장 자크 루소는 '나는 걸어 다녀야만 명상을 할 수 있다. 걷기를 멈추면 생각도 함께 중단된다'고 말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나는 얼마간 녹이 슬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방 안에 머무를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몇 주 혹은 몇 달, 나아가, 합하면 대략 몇 년 동안이나 자기들 스스로를 하루 종일 가게나 사무실에 가둘 수 있는 내 이웃들의 그 인내력이 나를 놀라게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을 따르는 학도들과 산책하면서(페리파테인) 강의하고 논의한 페리파토스(산책길)에서 유래되어 페리파토스 학파(소요학파)라고 불리는 철학 학파도 있었다.

 

'걷기와 철학'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두고 우리의 시야를 그렇게 너무 먼 데까지 확장시킬 필요도 없지 싶다. 독일에서도 학문의 도시로 이름난 하이델베르크로 시선을 돌리면 우리는 금세 '철학이 용솟음치던 숲속길'로 명성이 드높은 그 유명한 '철학자의 길'을 아주 쉽게 발견할 테니 말이다. 그 길은 칸트를 비롯해서 헤겔, 야스퍼스, 하이데거 등 걸출한 철학의 영웅들이 숱한 시간을 할애해서 자신의 철학에 몰두하며 발걸음을 옮겼던 아주 생생한 현장이다.

 

 - 철학자의 길(Shooting Date/Time 2014-07-12 오후 10:09:28, 한국시간)

 

독일엔 고작 두 번밖에 가보지 못한 나는 용케도 두 번 모두 하이델베르크를 빼놓지 않고 들렀고 또 그 때마다 '철학자의 길'을 걷는 시간을 낼 수 있었다. 특히나 작년에는 하이델베르크에서만 무려 2박 3일이나 자유롭게 머물렀고, 둘째날엔 온종일 '하이델베르크 시내를 걷는 일'로 그 학문의 도시를 보다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었다. 그렇게 걷거나 쉬는 시간의 대부분을 '철학자의 길'과 네카 강변에서 보냈던 내가 정작 '철학자의 길'을 걸으며 잠시나마 떠올렸던 철학자들 가운데 아쉽게도 '니체'는 없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거기서 고작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인물들은 칸트, 쇼펜하우어, 하이데거 정도였다.(나는 '철학자의 길'을 걸으며 엉뚱하게도 철학자가 아닌 인물들인 막스 베버와 천병희 선생님을 한참이나 생각했었다. 두 사람은 내가 아는 한 하이델베르크와는 결코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인물이지 싶다. 막스 베버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교수로도 재직했고 네카 강변의 저택에 살면서 오랜 시간 동안 학문 연구에 몰두했던 독일 사회학의 거두였다. 라틴 고전 번역에 크게 기여한 유명한 천병희 선생님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다년간 독문학과 라틴 고전문학을 연구했다.)

 

  - 하이델베르크 시내 풍경(Shooting Date/Time 2014-07-12 오후 7:40:13, 한국시간)

 

어쩌면 니체는 철학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인 하이델베르크와는 그다지 인연을 맺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신의 생애 가운데 가장 왕성하게 저작물을 쏟아낸 시기인 1879년부터 1888년까지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를 전전하면서 싸구려 하숙집에서 외로운 생활을 했다. 그도 젊은 시절부터 교수직을 얻었으나 칸트만큼 드높은 명성과 경제적 안정을 누리지 못했고, 유능한 사업가였던 선친으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받은 덕분에 평생 동안 '개를 데리고 산책을 다니며' 철학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쇼펜하우어와도 영 딴판이었다. 니체는 어쩔 수 없이 '방황하는 독일인'이었고 그의 철학은 그래서 그만큼 자신의 스승들인 칸트나 쇼펜하우어가 활약했던 하이델베르크와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그 덕분에 그들보다 더 다채로우면서도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풍기는 듯하다. 

 

 - 하이델베르크 고성에서 내려다본 네카강, 카를 테오도르 다리, '철학자의 길'이 있는 숲

 

니체가 하이델베르크와 너무나 동떨어진 장소를 떠돌아다녔다고 해서 그의 철학이 '걷기'와도 영 멀어진 건 결코 아니었다. '차라투스트라의 걸음걸이'만큼 니체의 철학을 제대로 드러내는 것도 찾기 어려우니 말이다. 그가 쏟아낸 수많은 저작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여느 철학책들과는 너무나 판이하다. 외관상으로만 보면 이 책은 한마디로 '차라투스트라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기나긴 여정'을 담은 책일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철학책으로서는 아주 독특하게도 엄연히 주인공이 있다. 이야기 전개방식도 매우 독특하다. 마치 여행기를 읽는 듯하다. 공간적 배경은 주로 산과 바다와 섬, 혹은 사막과 오아시스와 동굴과 시장터 등이다. 때는 아침이나 낮 혹은 밤이며 정오와 자정도 물론 포함된다. 등장 인물들도 하나같이 특이하면서도 아주 다양하다. 숲속의 성자, 줄타는 광대, 죽음의 설교자, 시체를 매장하는 자, 예언자, 마술사, 제 발로 거지가 된 자, 사막의 딸 등이 나온다. 차라투스트라가 장소를 옮길 때마다 뒤바뀌는 풍경들과 함께 등장하는 동물과 식물들도 몹시 다채롭다. 독수리, 뱀, 낙타, 용, 독두꺼비, 악어, 타란툴라, 공작, 올빼미, 거미, 불개, 방울뱀, 호랑이, 비둘기, 사자, 말, 타조, 돼지, 뱀, 고래, 거미, 등에, 거머리, 개구리 등을 비롯해서, 사과나무, 무화과나무, 야자나무, 종려나무, 딸기, 포도, 장미, 백합 등이 나타난다. 온갖 짐승들과 식물들과 인물들이 한데 어우러진 장면들에 대한 묘사는 마치 거대한 제작비를 들여 만든 최신식 판타지 모험 영화를 보는 듯하다. 차라투스트라가 마치 간달프가 되어 종횡무진 드넓은 시공간을 넘나들며 활약하는 '반지의 제왕'을 닮았다고나 할까. 차라투스트라는 심지어 짐승들과도 대화하며 사자와도 교감한다.

 

철학책에 이토록 다양한 인물들과 짐승들이 등장하는 경우도 없지 싶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이 책 속에는 철학사에서 결코 빼놓기 어려운 인물들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얼씬도 않는다. 그렇다고 니체가 그런 인물들에 아예 관심이 없었던 건 결코 아니었다. 그의 초기작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비극의 탄생』과 『반시대적 고찰』만 읽어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정통 철학'에 깊이 천착했던 인물인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는 왜 이런 이야기 형식을 빌려서 이런 책을 썼을까. 어쩌면 그의 사상이 너무나 '난숙한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마치 판타지 형식을 빌리지 않고서는 자신의 농익은 철학을 마음껏 목을 놓아 노래하며 읊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차라투스트라의 거침없는 여정과 행동과 말과 생각들을 따라 가노라면 어느새 우리는 니체가 그토록 강조하고 갈망했던 '위버멘쉬'를 언젠가는 틀림없이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굳건한 희망마저 품을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니체가 정신적인 고조를 경험하는 동안 1부에서 4부까지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씌어진 작품이다. 형식적으로는 네 개의 부로 나뉘어져 있고 그 아래에 하나하나의 독립된 이야기들이 다양한 주제에 걸쳐 펼쳐져 있다. 초월적 세계에 대한 망상, 이웃사랑, 신체에 대한 경멸, 아이와 혼인, 사제, 학자, 시인, 과학자에 대한 생각 등등이 거침없이 전개된다. 무려 10년 동안 산 속에 들어가 명상에 열중했던 차라투스트라가 깊은 깨달음을 얻고 나서 '새로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인간 세계로 내려왔으니 얼마나 할 말이 많겠는가. 이러한 차라투스트라의 '편력'과 '문답' 혹은 '가르침'은 그때그때 마주치는 수많은 인물들과 나누는 '선문답'과 같은 대화들을 통해 전개된다. 그래서 이 철학책에는 '논증'이라는 것도 없으며, 차라투스트라가 하는 말이 설교조이거나 선언적인데다가 어떨 땐 매우 선동적일 때도 많다. 어떤 부분들은 무슨 지혜서나 성찰록 또는 성서와도 닮은 표현들이 자주 나타난다. 니체는 <신약성서> 가운데서도 특히 예수의 언행을 그린 복음서를 의도적으로 자주 빗대면서 자신의 철학을 설파하는데 끌어들였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감람산과 최후의 만찬이 책 속의 소제목으로 그대로 쓰였고, 호수와 강을 가로지르고 산을 오르내리는 예수처럼 차라투스트라 또한 그와 비슷한 모습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펼쳤다. 그럴 때마다 양과 목자, 비둘기와 뱀, 산과 호수, 사막과 오아시스는 자연스레 뒤따르는 배경이 되었다.

 

니체의 글은 다른 어떤 철학자도 흉내내기 어려울 만큼 독특하면서도 강렬하다. 그래서 아주 젊을 때 그의 글을 접한 사람들은 순식간에 그의 글에 사로잡히고 만 경험들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는 글을 매우 쉽고 간결하게 썼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몹시도 흥미롭고 극적인 데다가 문장 또한 너무나 유려하여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다. 그런데도 묘한 건 그의 글을 다 읽고 나면 손아귀에 뚜렷이 붙잡히는 게 도대체 뭔지 파악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명쾌하고 시원시원한 이야기 전개와 더불어 현란한 어휘 구사 등에 매혹되어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받은 나머지 열광을 거듭하며 읽은 그의 글들이 정작 다 읽고 나면 모래알처럼 독자들의 손에서 스르르 빠져나간다는 건 도대체 무슨 연유일까.

 

무릇 어떤 철학자의 사상이라고 해도 단 한 권의 저서를 통해 그의 사상을 온전히 파악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님은 자명하다. 더군다나 니체처럼 '유난히 심오한 사상'을 설파한 인물이 쓴 수많은 책들 가운데 이 작품 한 권만 읽고도 그가 펼친 철학의 핵심 주제들인 '영원회귀 사상'이나 흔히 '초인사상'으로 불리는 '위버멘쉬'에 대해 모조리 이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 책은 수많은 비유와 함축으로 철철 넘쳐흐르는 책이니 그의 사상을 제대로 움켜쥐기가 오죽이나 어렵겠는가. 그렇다고 평범한 독자들이 니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숱한 입문서'를 거치고, 니체의 다른 여러 작품들을 두루 다 읽고 난 뒤에야 비로소 이 주저에 접근하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나 또한 오래 전에 니체의 책을 '주마간산 격으로' 몇 권 읽은 기억은 있지만 그의 사상이 좀처럼 뚜렷이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듯하여 그의 옷자락을 계속 붙잡고 늘어질 생각을 더이상 품지 못했던 생각이 난다. 그렇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니체에게 특별한 영향을 끼친 쇼펜하우어의 책들까지 읽고 난 다음에야 이 책을 다시 접하니 니체의 철학이 한결 덜 낯설고, 그를 향해 손을 뻗으면 그의 옷자락 끝이라도 어설프게 만져볼 수는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어쨌든 니체는 우리가 붙들어 두고 자주 대화를 나눌 정도로 쉽게 다가오는 그런 철학자가 아님은 분명한 듯하다.

 

니체의 철학을 누가 나에게 아주 쉽게 요약해달라고 말한다면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생의 철학'이라는 말부터 앞세우겠다. 그는 인간의 삶을 그 누구보다도 지극히 긍정하고 강조했던 철학자였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현재의 삶'을 부정하는 모든 어설픈 가정들을 단호히 부정했다. 그러니 그로서는 '배후를 믿는 자들의 철학'이나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사후 세계'를 당연히 부정했다. 또한 그는 '현재의 삶'이 너무나 중요했으므로 아무런 근거도 없는 '원죄설'과 '예수의 속죄설'도 철저히 배격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이편의 불완전한 세계'와 '저편의 완전한 세계'로 나누어 놓은 철학자인 플라톤의 형이상학까지도 부정했으며, '덧없는 지상의 것'과 '영원한 천상의 것'으로 나눈 기독교의 교의도 당연히 부정했다. 그로서는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가 '신이 없는 세계'를 설파하기 시작함에 따라 오랫동안 견고하게 자리잡은 '기존의 가치 체계'는 자연스럽게 전복된다. 니체의 철학이 다른 어떤 철학자들보다 '가치전복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물론 이러한 그의 사상들은 『안티 크리스트』, 『우상의 황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악의 저편』등의 작품으로 발전한다.

 

니체는 신이 없는 세계를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계기 속에서 새롭게 파악한다. 니체가 받아들이고 있는 세계는 유한한 공간 속에서의 무한한 시간이다. 그래서 그는 '공간'조차 굽어있다고 말한다. 밖으로 닫혀 있는 이런 세계에 새삼 밖으로 소멸할 것도 없으니 새로이 끼어들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능한 것은 에너지의 끝없는 운동에 의해 촉발되는 만물의 영원한 이합집산뿐'이다. 이렇게 하여 모든 만물이 영원히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 곧 '영원회귀 사상'이다. 그가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영원의 반지'를 노래하는 대목이 바로 니체의 우주론인 셈이다. 영원회귀 사상은 그의 철학적 스승이었던 쇼펜하우어의 사상과도 적잖이 닮은 듯하다. 쇼펜하우어 또한 시간을 마치 레코드판 위를 끝도 없이 영원히 맴도는 듯한 표상으로 이해했다.(고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굴드 역시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이라는 책을 통해 시간이 어느 한 방향으로 영원히 '진행'되는 화살이 아니라 거대한 바퀴를 도는 '순환'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드러낸다.)

 

쇼펜하우어는 만물의 삶이 결국은 다른 생명들을 끊임없이 잡아먹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그러한 생존양식이야말로 '존재의 비극'이라는 점을 깊이 인식했던 철학자였다. '온갖 생명 내부에도 강탈과 살육이란 것이 들어 있지 않느냐'는 니체의 말 또한 쇼펜하우어의 생각과 별반 다를 게 없다.(앙리 베르그송 또한 자신의 주저인『창조적 진화』라는 책의 '생명의 의미'라는 절에서 이 점을 강조했다. "종은 자신만을 생각하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간다. 그로부터 자연이라는 무대에서 무수한 투쟁이 유래한다. 또한 놀랍고도 충격적인 부조화도 거기서 유래한다. 그러나 그에 대해 생명 원리 자체에 책임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 

 

어쨌든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의 생존양식'을 두고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명확히 서로 다른 방향으로 철학적인 해결을 모색한 점은 흥미롭다. 모든 만물이 끝도 없이 '윤회'하면서 영원히 맴도는 듯한 '삶'을 곧 '고뇌의 원천'으로 인식했던 쇼펜하우어는 '순환의 고리'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궁극적 해결인 '의지의 완전한 소멸'에 주목했다. 그래서 결국 쇼펜하우어는 일견 허무주의와도 가까운 염세주의로 흐르고 말았다. 그에 반해 니체는 '굳건하게 삶을 긍정하는' 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그래서 '영원한 순환이 불러올 권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내세운 인물이 바로 '위버멘쉬'였다.

 

한때 철학을 버리면서까지 과학을 연구하고 싶어했던 니체가 새로운 유형의 인간인 '위버멘쉬'를 주창한 데에는 아무래도 찰스 다윈의 영향이 컸으리라 짐작된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철학적 스승인 쇼펜하우어가 쓴『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을 통해서도 적잖이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생물종'이 오랜 시간에 걸쳐 이 지구상에 존재해 왔던 극히 다양한 여러 '생물종' 가운데 단지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니체는 온갖 케케묵고 낡은 가치관에 갖혀 옴짝달싹 못하는 '비천한 인간'이 '몰락'하고 난 다음에 도래할 '보다 진화한 미래의 인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셈이다. 니체의 '위버멘쉬'를 보면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창조적 진화』의 마지막 대목에서 묘사한 '인간 진화의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풍경과도 어렴풋이 겹친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 동물은 식물 위에서 거점을 취하며 인간은 동물성 위에 올라타고 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 속의 인류 전체는, 모든 저항을 넘어뜨릴 수 있고 많은 장애물 심지어 죽음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열광적인 돌격 속에서 전후좌우로 질주하는 거대한 군대이다."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중에서

 

니체의 사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철학적 주제는 흔히 '권력의지'로 불려온 '힘에의 의지'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같이 '힘을 향한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며, 모든 존재는 단순히 존재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해 끝없이 분투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 또한 '의지의 형이상학'으로 일컬어지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빼닮았다. 그런데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우리에게 흔히 '적자생존' 또는 '자연선택'으로 널리 알려진 생물학자인 다윈의 사상과도 일면 서로 맞닿는 부분이 엿보인다.("생명은 최초의 창조자에 의해 소수의 형태로, 또는 하나의 형태로 모든 능력과 함께 불어 넣어졌다고 보는 견해, 그리고 이 행성이 확고한 중력의 법칙에 의해 회전하는 동안 이렇게 단순한 발단에서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경탄스러운 무한의 형태가 태어났고, 지금도 태어나고 있다는 이 견해에서는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니체가 주장한 '힘에의 의지' 사상의 원형은『종의 기원』보다 수십 년 앞서 발표된 쇼펜하우어의 책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에서 훨씬 더 간결하고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사실상 모든 기관은 하나의 보편적인, 즉 단 한번 만들어진 의지표명, 즉 개별자가 아니라 종(種, Spezies)의 고정된 하나의 동경, 하나의 의지작용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모든 동물 형상은 상황에 의해 불러 일으켜진, 생명에의 의지의 한 동경이다."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니체의 책이 언뜻 읽기 쉬우면서도 정작 이해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여러가지를 들 수 있다. 그런 이유들을 니체가 스스로 쓴 작품 속에서 발견하는 일도 흥미롭다. 그의 초기작인『비극의 탄생』에는 기묘하게도 먼 훗날 니체 스스로 '그 책에 대한 서문 또는 후기' 형식으로 쓴 <자기비판의 시도>라는 글이 딸려 있다.『비극의 탄생』이 출간된 해는 1872년이었고 <자기 비판의 시도>가 그 작품에 덧붙여진 건 1886년이었다. 다음의 대목을 읽어보면 니체가 바로 이 책『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두고도 나중에 얼마나 이와 달리 표현할 수 있었을까를 의심하게 된다.

 

내가 당시 깨닫게 된 것은 두렵고 위험한 것이었다. 그것은 황소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뿔이 달린 문제였으며, 아무튼 하나의 새로운 문제였다. ······ 이 책은 온통 너무 때 이르고 조숙한 자기 체험들, 즉 한결같이 거의 전달 가능성의 한계에 놓여 있는 체험들로 건립되었으며, ······ 이 책은 처음부터 "민중"보다 "교양인"을 더 꺼리는 교만하고 열광적인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이 끼친 영향이 증명한 바 있고 또 지금도 증명해주는 것처럼, 이 책은 함께 열광할 사람들을 찾아내어 그를 새로운 샛길과 무도회장으로 인도하기에 충분하며 ······

 

 - 니체, 『비극의 탄생』, <자기 비판의 시도> 중에서

 

어쨌든 니체라는 '새로운 영혼'은 기필코 '삶을 긍정하는 철학'을 노래했어야 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삶에 적대적인 것과 원한으로 가득 차고 복수심에 불타는 삶'에 대해 엄청난 적의를 느꼈던 인물이었다. 그는 '도덕(특히 기독교적인, 다시 말해 무조건적인 도덕) 앞에서 삶은, 삶이 본질적으로 비도덕적인 까닭에, 늘 어쩔 수 없이 부당한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보았던 철학자였다. 나는 이쯤에서 니체가 쓴 <자기 비판의 시도> 가운데 일부를 한번 더 길게 인용할 필요를 느낀다. 바로 거기에도 (내가 필요로 하는 대로) '차라투스트라'가 다시금 멋지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대담한 시선으로 무시무시한 것을 향해 영웅적으로 행진해 가는, 자라나는 다음 세대를 생각해보자. 그리고 이 용 정복자들의 당당한 걸음을 생각해보고, 완전하고 충만한 가운데 '결연하게 살아가기' 위하여 모든 낙천주의의 나약한 교리들에 등을 돌리는 과감성을 생각해보자. …… 파우스트처럼 다음과 같이 외쳐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나는 그래서는 안 되는가? 가장 커다란 동경의 힘으로

오직 하나뿐인 인물에 생명을 부여해서는?

 

그대들이 이와는 달리 전적으로 염세주의자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면, 나의 젊은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웃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아마도 그대들은 언젠가 모든 형이상학적 위로 나부랭이를 악마에게 ㅡ 특히 형이상학을 제일 먼저 던져주게 될 것이다! 혹은 차라투스트라라고 불리는 저 디오니소스적 괴물의 언어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가슴을 들어 올려라, 높이, 더 높이! 그리고 다리도 잊지 말아라! 그대들의 다리도 들어 올려라, 그대들, 춤을 멋지게 추는 자들이여, 그대들이 물구나무를 선다면 더욱 좋으리라!

 

예언자 차라투스트라, 참된 웃음을 웃는 자, 성급하지 않은 자, 무조건적이지 않은 자, 도약과 탈선을 좋아하는 자, 나는 스스로 이 왕관을 머리에 썼다.

 

웃는 자의 이 왕관, 이 장미 화환의 관, 내 형제들이여, 나는 이 왕관을 그대들에게 던진다! 나는 웃음이 신성하다고 말했다.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내게 배워라 ㅡ 웃음을!"

 

 - 니체, 『비극의 탄생』, <자기 비판의 시도> 중에서

 

 

니체는 스스로 이 어려운 책에 흥미로운 부제를 달았다.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설령 니체가 안내하는 대로 '기나긴 차라투스트라의 여정'을 한 눈 팔지 않고 부지런히 뒤따라 가더라도 끝끝내 '그의 생각'을 좀처럼 제대로 포획하기 어렵다고 해서 무슨 허물이 되겠는가. 그의 사상은 어쨌든 많은 시대를 앞질러 나아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래도 니체는 먼 훗날에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상을 널리 이해하게 될 날이 틀림없이 오리라 확신했음에 틀림없다.

 

오래 전에(여주인공 에미 로섬이 10대 후반의 나이일 때) 무척이나 흥미롭게 봤던 재난 영화《투모로우》가 문득 생각난다. 배경은 이렇다. 지구에 다시 빙하기가 도래하여 뉴욕 항구가 꽁꽁 얼어붙는다. 주인공 남녀는 뉴욕의 공공도서관에 갇힌 채 구출되기만을 기다린다. 그들은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기 위해 도서관 서가에 꽂힌 '수많은 책들'을 꺼내 불을 지핀다. 인류의 소중한 지적 유산들이 담긴 수많은 책들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꺼내 불태우면서도 그들은 니체의 책만은 끝내 서가에 다시 꽂는다. "차마 '인류의 양심상' 니체의 책만은 불태울 수 없다"는 게 그들의 대화였다. 내가 그 때 그 영화를 보면서 그 대사에 얼마만큼 격하게 동의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그렇지만 니체의 책이 먼 미래에도 오랫동안 인류에게 충분히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라는 사실 만큼은 나도 주저없이 동의하고 싶다. 

 

오래 전에 니체가 가르쳐준 차라투스트라의 발걸음을 따라 우리 인류가 굳건히 앞으로 계속 길을 걷다 보면 언젠가는 위버멘쉬가 저만치 우리의 눈앞에서 늠름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는 걷는 게 아니라 춤을 추며 달려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니체의 말대로 자신의 목표에 접근해 있는 사람은 춤을 추게 마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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