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사회(과)학계에는 오래전부터 베버의 지적 세계를 카를 마르크스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이 두 거장을 비교하려는 시도가 일종의 '전통'이 되었다. 아니 그것은 어찌 보면 일종의 '강박관념'이다. 이러한 '전통'과 '강박관념'의 근저에는 마르크스냐 베버냐 또는 베버냐 마르크스냐 하는 양자택일적 태도와 베버의 지적 세계는 마르크스의 '망령'과 싸우는 과정에서 발전했다는 지성사적 전제가 깔려 있다.

 

물론 베버를 마르크스와 비교하는 것이 역사적 측면과 이론적 측면 모두에서 좁게는 베버 연구에 그리고 넓게는 사회(과)학 연구에 결정적으로 기여해온 사실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마르크스냐 베버냐 또는 베버냐 마르크스냐 하는 논의의 축이 사회(과)학 연구의 가장 중요한 틀이라고 말하는 것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두 거장의 비교는 사회(과)학적 인식과 사유를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롭게 해주었고 해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러한 방식의 접근에는 베베의 지적 세계를ㅡ그리고 사회(과)학적 발달 과정을ㅡ지나치게 단순화하고 도식화할 위험ㅡ 이른바 '베버의 마르크스화'ㅡ이 도사리고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베버의 마르크스화는 그의 진정한 이론적·실천적 문제의식이 무엇이며 그의 지적 세계가 구축되는 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철학적·과학적 조류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린다.

 

베버의 마르크스화가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물론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ben Ökonomie)을 비교하는 경우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대한 유뮬론적 해석을 제시했으며 베버는 자본주의에 대한 이상주의적 해석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시도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실상 베버가 보기에 상품, 가치, 화폐, 자본 등을 인식 도구로 해서 근대 사회의 경제적 운동 법칙, 즉 자본주의의 생산양식과 생산관계를 분석하는 『자본』은 매우 탁월한 과학적 업적이었다. 사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자본』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두 고전 중의 고전을 비교하는 것이 의의가 없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보다 더 사회(과)학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비교연구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베버는 유물론이 방법론적 측면에서 매우 생산적인 원리라고 확신해 마지않았다. 그는 다만 도그마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즉 형이상학이나 세계관 또는 역사철학적 예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베버는ㅡ그의 제자이자 역사학자이며 사회학자인 파울 호니스하임(Paul Honigsheim, 1885∼1963)에 의하면ㅡ독일의 역사학자이자 정치가인 한스 델브뤽(Hans Delbrück,1848∼1929)이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제시된 칼뱅주의·자본주의 이론을 반(反)마르크스주의적, 즉 이상주의적 역사관으로 해석한 데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거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나는 델브뤽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물론적이다.

 

아무튼ㅡ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ㅡ「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자본』과 전혀 다른 문제 영역과 문제 의식 및 문제 해결 그리고 전혀 다른 지성사적 맥락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자본주의 연구에 자극을 주거나 영향을 끼친 것은 마르크스가 아닌 다른 여러 지식인들로서, 우선 이미 앞에서 논한 에버하르트 고트하인, 베르너 좀바르트, 게오르그 짐멜, 게오르그 옐리네크, 에른스트 트뢸치를 언급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신학자 알브레히트 리츨(Albrecht Ritschl, 1822∼89), 미국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 제자 마르틴 오펜바허(Martin Offenbacher, ?∼1942) 그리고 부인 마리안네 베버 등이 거론될 수 있다.

 

(중략)

 

1902년 좀바르트의 주저 『근대 자본주의』가 출간되었다. 이 저서는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권 제목은 구체적으로 『자본주의의 기원』(Die Genesis des Kapitalismus)과 『자본주의 발달 이론』(Die Theorie der kapitalistischen Entwicklung)이다. ······ 좀바르트의 『근대 자본주의』에서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곳은 제1권 제3부 「자본주의 정신의 기원」(Die Genesis des Kapitalistischen Geistes)이다. 이는 다시 '영리욕의 싹틈'(Das Erwachen des Erwebrstiebes)을 다루는 제14장과 '경제적 합리주의의 형성'(Die Ausbildung des Ökonomishen Rationalismus)을 다루는 제1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서 좀바르트는 자본주의 정신을 돈을 벌고자 하는 욕구로 파악하고 있다. 즉 그에게 자본주의 정신은 좀바르트에 따르면 중세 말경부터 일종의 집단 현상이 되었으며 주로 유대인에 의해 발전했다. 그리고 좀바르트는 근대 자본주의의 토대를 특정한 종교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찾는 것을 불충분하다고 보며, 또한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 정신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인과관계를 주장할 수 있고 이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의해 경험적으로 입증할 수 있으리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처럼 좀바르트는 종교가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에 끼치는 영향에 별로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어떤 의미에서 좀바르트가 『근대 자본주의』에서 제시한 자본주의 정신과 그 형성 과정에 대한 답변과 비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베버가 전적으로 좀바르트의 테제를 논박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논문을 썼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물론 안 된다. 다만 베버는 동일한 주제에 대해 좀바르트와 상이한 테제를 내세웠으며, 또한 이 과정에서 좀바르트를 비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좀바르트가 비판적으로 응답하고 다시 베버가 그에 반론을 제기하는 과정이 지속되면서 두 거장은 아주 풍요로운 논쟁을 전개했다. 아무튼 베버의 '주적'은ㅡ적어도「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관한 한ㅡ일반적으로 표상하는 바와 다르게 마르크스가 아니라 좀바르트였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연구의 전체적인 실마리가 되는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윤리적으로 채색된 생활양식의 준칙이라는 성격"이라고 정의하면서 이 점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이 글의 문제설정이 좀바르트와 다른 근거이다. 그 차이점이 갖는 아주 현저한 실제적 의미는 후술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좀바르트도 자본주의적 기업가의 이러한 윤리적 측면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미리 말해두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사유 맥락에서는 이 윤리적 측면이 자본주의에 의해 야기된 결과물로 나타나는 반면, 우리는 우리의 연구 목적상 그와 상반되는 가설을 고찰하지 않을 수 없다. 최종적인 입장은 연구가 마무리되어야 비로소 결정될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베버에게 자본주의 정신은 좀바르트와 근본적으로 달리 영리욕, 이윤 추구 또는 돈을 벌려는 욕구가 아니라 윤리이고 의무 이행이자 금욕적 생활양식이다. 그것은 오히려 좀바르트가 말하는 욕구의 합리적 조절이자 억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에는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 그중에서도 특히 칼뱅주의가 인과적 요소로 작용했다는 것이 베버의 견해이다.

 

그후 좀바르트는 다양한 저작을 통해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자본주의 테제에 응답했다. 이 두 거장과 더불어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저널』의 공동 편집인이던 에드가 야페에 따르면, 좀바르트는 베버의 비판에 자극을 받아 1911년 『유대인과 경제적 삶』(Die Juden und das Wirtschaftsleben)을 그리고 1913년 『부르주아: 근대 경제인간의 정신사에 대하여』(Der Bourgeois: Zur Geistesgeschichte des modernen Wirtschaftsmenschen)를 썼다. 이들 저서와 또 다른 일련의 저작에서ㅡ이를테면 1912년에 출간된 『사치와 자본주의』(Luxus und Kapitalismus)등에서ㅡ좀바르트는 베버의 입장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비판했다.

 

베버와 근본적으로 다르게, 좀바르트는 유대교가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인과적 요소임을 광범위하게 입증하고자 시도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돈을 벌려는 욕구인 자본주의 정신은 바로 유대인들의 특성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려면 인간의 정신이 자연적인 상태를 벗어나고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획득해야 한다. 즉 '모든 경제적 가치의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바로 이 같은 정신적 단계의 인간이 '자본주의 인간'(homo capitalisticus)인데, 이 유형의 인간은 '유대인'(homo Judaeus)과 '동일한 종'에 속한다. 양자는 '인위적인 합리적 인간들'(homines rationalistic artificiales)인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생활양식이 합리화한 데는 유대교가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결국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가장 중요한 인과적 요소는 베버가 주장하는 바와 달리 프로테스탄티즘이 아니라 유대교라는 것이 좀바르트의 확신임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좀바르트는 사치 등의 경제적 행위가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테제를 내세우는데, 이는 금욕적 생활양식에서 그 결정적 요소를 찾는 베버의 입장과 근본적인 대조를 이룬다.

 

이에 대해 베버는 『종교사회학논총』제1권, 『경제와 사회: 이해사회학 개요』, 『경제사: 보편 사회사 및 경제사 개요』등에서 좀바르트를 비판했는데, 그 강도가 1904∼1905년보다 훨씬 더 커졌다. 예컨대 베버는 『부르주아: 근대 경제인간의 정신사에 대하여』를 좀바르트의 "가장 보잘것없는 책"이라고 혹평했다. 그리고 유대교에 의해 발전한 자본주의는 합리적 근대 자본주의가 아니라 천민자본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베버의 확고한 입장이었다. 유대교가 근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해 갖는 결정적인 의미는 기독교에 주술에 적대하는 태도를 정신적 유산으로 물려주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즉 탈주술화 과정의 종교사적 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근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유대교의 문화의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베버와 좀바르트가 자본주의 정신을 둘러싸고 거의 20년에 걸쳐 주고받은 비판은 논쟁인 동시에 '일종의 대화'이기도 했다. 즉ㅡ역사학자 오토 힌체(Otto Hintze, 1861∼1940)의 표현을 빌리자면ㅡ"보다 르네상스적 색채를 띤 좀바르트의 자본주의 정신과 보다 종교개혁적 색채를 띤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 사이의 논쟁이자 대화였던 것이다. 양자는 이 장기간의 논쟁을 통해 상대방에게 통렬하고 파멸적인 비판을 가한 동시에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고 그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자신의 지적 세계를 보다 풍요롭게 만들 수 있었다.

 

이 맥락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 한 가지는,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의 제2세대를 대표하는 학자 가운데 한 명인 루요 브렌타노(Lujo Brentano, 1844∼1931)가 1916년에 출간된 자신의 저서 『근대 자본주의의 기원』(Die Anfange des modernen Kapitalismus)에서 베버와 좀바르트를 동시에 비판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브렌타노는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의 제3세대를 대표하는 두 학자를 비판했던 것이다. 먼저 브렌타노에 따르면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카톨릭이 근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해 갖는 의미를 간과했다. 그리고 브렌타노는 좀바르트의 『유대인과 경제적 삶』을 독일 과학의 가장 불행한 현상 가운데 하나라고 혹평했으며, 자본주의 발전에서 유대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좀바르트의 주장을 논박했다. 베버는 브렌타노의 비판에 대해 1920년판의 여러 곳에서 답했다.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근대 자본주의와 선택적 친화력을 가진 정신과 행위에 끼친 심리학적 동인 때문이라는 것이 베버의 논지였다. 또한 베버는 중세 가톨릭 수도회의 문화의의를 잘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비세속적인 수도승적 금욕주의와 세속적인 직업적 금욕주의 사이의 내적인 연속성을" 강조했다. 사실 그의 전체적인 논의가 깔고 있는 기본 전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 둘 사이의 연속성이었다. "즉 종교개혁은 합리적인 기독교적 금욕주의와 조직적인 생활양식을 수도원에서 끌어내어 세속적인 직업 생활의 영역으로 전파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베버는 브렌타노가 자본주의를 화폐 획득 및 화폐경제와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좀바르트와 같은 범주로 분류했다. 베버가 보기에 게오르그 짐멜의 철학적 주저 『돈의 철학』(1900)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 우리의 존경하는 스승 루요 브렌타노와 ······ 견해를 달리한다. 우선 용어상 그러하다. 그러나 더 나아가 실제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내가 보기에 전리품의 획득을 통한 영리와 공장의 성과를 통한 영리처럼 아주 이질적인 개념들을 동일한 범주에 넣는 것은 유용치 못하다. 그리고 화폐 획득에 대한 모든 추구를 자본주의 '정신'으로ㅡ다른 영리 형태들과 대비하면서ㅡ표현하는 것은 더더욱 유용치 못하다. 왜냐하면 나의 생각으로는 전자에 의해서는 모든 개념적 엄밀성이 상실되고, 후자에 의해서는 무엇보다 서구 자본주의가 다른 영리 형태들에 비해 지니는 특성을 뚜렷하게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또한 게오르그 짐멜의 『돈의 철학』에서도 '화폐경제'와 '자본주의'가 너무나도 동일시되어 객관적 논증을 손상시킨다. 베르너 좀바르트의 저술들, 그중에서도 특히 그의 탁월한 주저인 『근대 자본주의』최신판에서는ㅡ적어도 내 문제의 관점에서 보자면ㅡ서구의 특수성, 즉 합리적 노동조직이 지나치게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는 반면 세계 도처에서 작동한 발전 요소들이 중시되고 있다.138)

 

역자 주

138) 베버의 생각과 달리 짐멜은 실제로 자본주의를 화폐경제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돈의 철학』은 돈이라는 외적이고 개별적인 현상이 현대 사회, 현대 문화 그리고 현대인의 삶과 숙명에 끼치는 영향, 즉 현대 세계에 대해 가지는 문화적 의의를 형이상학적으로 고찰한 책이다. 이 책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돈과 영혼의 관계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의 책 『게오르그 짐멜의 모더니티 풍경 11가지』78쪽 이하, 354쪽 이하 참조.

 

이렇게 보면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연구에서 싸워야 했던 '망령'은 자본주의를 유물론적으로 분석한 마르크스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정신을 화폐 획득 및 화폐경제와 동일시한 좀바르트와 브렌타노 그리고 짐멜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베버는 1920년의 『종교사회학논총』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영리욕', '이윤 추구', 화폐 취득, 그것도 가능한 한 많은 화폐 취득을 추구하는 것 자체는 자본주의와 전혀 상관이 없다. 이러한 추구는 웨이터, 의사, 마부, 예술가, 매춘부, 부패한 관리, 군인, 도적, 십자군, 도박사, 거지들 사이에 존재했고 또한 존재한다. 이는 그러한 추구의 객관적 가능성이 어떻게든 주어졌고 또한 주어진 동서고금의 "모든 종류와 상황의 인간들" 사이에서 그래왔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개념 규정은 이미 육아실에서 배우는 문화사 수준에서 영원히 불식되어야 할 것이다. 무제한적으로 영리를 탐하는 것은 자본주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자본주의 '정신'과는 더더욱 그러하다. 자본주의는 오히려 이러한 비합리적인 충동의 억제, 또는 적어도 합리적 조절과 동일할 수 있다. 물론 자본주의는 지속적이고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경영을 통한 이윤 추구, 즉 끊임없이 재생되는 이윤인 수익성의 추구와 동일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반드시 그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즉 경제 전체가 자본주의적인 질서 안에서는, 수익성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지향하지 않는 자본주의적 개별 기업은 몰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와 그 정신에 대한 베버, 좀바르트, 브렌타노 그리고 짐멜의 이론과 이들 상호 간의 영향과 수용 그리고 비판과 논쟁을 체계적으로 연구해보면 좁게는 근대 자본주의와 그 정신을, 넓게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문화과학과 사회과학의 판도를 보다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베버는 마르크스의 '망령'과 싸우지 않았다.「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 『자본』은 근대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으로서 상호 배척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 바로 이런 한에서 그리고 오직 이런 한에서만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근대 경제에 대한 유심론 또는 이상주의로 보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베버가 마르크스의 '망령'과 싸우지 않았지만 다른 '망령들'과는 싸웠다는 사실이다. 즉 마르크스의 위대한 과학적 업적을 폄훼하거나 부정하고자 하는 '망령', 자신의 연구를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의 유산을 극복하고 청산하려는 시도로 보고자 하는 '망령', 그리고 유물론을 엄격한 사회과학적 연구 방법이 아니라 형이상학과 세계관 그리고 예언의 수단으로 만들고자 하는 '망령'과 싸웠다. 그리고 특히 자본주의 및 자본주의 정신과 관련해서는 이를 화폐 획득 및 화폐경제와 동일시하려는 '망령'과 싸웠다. (588∼599쪽)


 - 막스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옮긴이 해제 <종교·경제·인간·근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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