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보론: 프로테스탄티즘의 분파들과 자본주의 정신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21
막스 베버 지음, 김덕영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밑줄긋기) 

 

근대적 직업노동이 일종의 금욕주의적 특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도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을 전문 노동에 한정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로 다방면에 걸친 삶을 살려는 파우스트적 인간성을 포기하는 것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가치 있는 행위를 위한 일반적인 전제 조건이 되며, 따라서 '행위'와 '체념'은 오늘날 불가피하게 서로를 조건 짓고 제약한다. 시민계층적 생활양식의 이러한 금욕주의적 기조─이 생활양식이 무(無)양식이 아니라 어떻게든 양식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러한 기조를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는 이미 괴테도 그 삶의 지혜가 절정에 이른 시기에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를 통해 그리고 희곡의 주인공 파우스트의 삶의 마지막 단계에 대한 묘사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다. 괴테에게 이러한 인식은 완전하고 아름다운 인간성의 시대로부터 체념 어린 작별을 고하는 것을 의미했다. 고대 아테네의 전성기가 되풀이될 수 없듯이, 그러한 시대 역시 우리의 문화 발전 과정에서 되풀이될 수 없을 것이다. 청교도들은 직업 인간이 되기를 원했다 ─ 반면 우리는 직업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금욕주의가 수도원의 골방에서 나와 직업 생활 영역으로 이행함으로써 세속적 도덕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또 공장제·기계제 생산의 기술적·경제적 전제 조건과 결부된 저 근대적 경제질서의 강력한 우주를 건설하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우주는 그 추진력에 편입된 모든 개인들의 생활양식을 ─ 비단 직접적으로 경제적 영리 활동에 종사하는 자들의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 엄청난 강제력으로 규정하며 아마도 그 마지막 톤의 화석연료가 다 타서 없어질 때까지 규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박스터의 견해에 따르면, 외적인 재화에 대한 염려는 마치 "언제든지 벗어버릴 수 있는 얇은 외투"처럼 성도들의 어깨 위에 걸처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운명은 이 외투를 쇠우리로 만들어버렸다. 금욕주의가 세계를 변형하고 세계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이 세계의 외적인 재화는 점증하는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는 역사에서 결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오늘날 금욕주의의 정신은 그 쇠우리에서ㅡ 영구적으로 그런 것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ㅡ사라져버렸다. 아무튼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는 기계적 토대 위에 존립하게 된 이래로 금욕주의 정신이라는 버팀목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정신을 웃으면서 상속한 계몽주의의 장밋빛 분위기도 마침내 빛이 바래가고 있는 듯하며, 또한 '직업 의무' 사상도 옛 종교적 신앙 내용의 망령이 되어 우리 삶을 배회하고 있다. '직업 수행'이 최고의 정신적 문화가치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질 수 없는 경우ㅡ혹은 역으로 말하자면 직업 수행을 심지어 주관적으로는 단순히 경제적 강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경우ㅡ현대인들은 대개 직업 수행이 지니는 의미의 해석을 완전히 포기한다. 그 종교적·윤리적 의미를 박탈당한 영리 추구 행위는 그것이 가장 자유로운 지역인 미국에서 오늘날, 드물지 않게 그것에 직접적으로 스포츠적 특성을 각인하는 순수한 경쟁적 열정과 결합하는 경향이 있다.111 미래에 누가 저 쇠우리 안에서 살게 될는지,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발전 과정의 끝자락에 전혀 새로운 예언자들이 등장하게 될는지 혹은 옛 사상과 이상이 강력하게 부활하게 될는지, 아니면ㅡ둘 다 아니라면ㅡ일종의 발작적인 자기 중시로 치장된 기계화된 화석화가 도래하게 될는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만약 기계화된 화석화가 도래하게 된다면, 그러한 문화 발전의 '마지막 단계의 인간들'41)에게는 물론 다음 명제가 진리가 될 것이다. "정신 없는 전문인, 가슴 없는 향락인ㅡ이 무가치한 인간들은 그들이 인류가 지금껏 도달하지 못한 단계에 올랐다고 공상한다."42)

 

 

-----

 

저자 주

 

111 "그 노인은 연 7만 5천 달러의 수입으로 만족하고 은퇴할 수는 없는 것일까?ㅡ없다! 상점의 전면을 400피트 확장해야 한다. 왜?ㅡ그는 말하기를, 그것으로 만사가 잘 될 것이다.ㅡ저녁에 부인과 딸들이 모여서 독서를 하면, 그는 한시라도 빨리 잠자리에 들고 싶어한다. 일요일에 그는 이제나저제나 하루가 저물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5분마다 시계를 쳐다본다ㅡ이 얼마나 잘못된 삶인가!"ㅡ이렇게 오하이오 강변에 위치한 한 도시의 (독일에서 이주해온) 어떤 굴지의 포목상(dry-good-man)의 사위가 장인에 대한 평가를 요약했다ㅡ이 판단은 그에 반해 '노인'의 입장에서는 분명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독일인의 무기력이 표출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

 

역자 주

 

41) 여기에 언급된 '마지막 단계의 인간들'(die letzten Menschen)이라는 용어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용한 것이다. 니체가 사용한 die letzten Mensch와 그 복수형인 die letzten Menschen은 철학계에서 지금까지 '마지막 인간(들)', '최후의 인간(들)', 또는 심지어 '인간 말종(들)'이나 '말종 인간(들)' 등으로 번역되어왔다. 이 가운데서 '인간 말종(들)'이나 '말종 인간(들)'이 주는 메시지가 가장 강력한 것이 사살이다. 그리고 니체의 철학적 사유가 시적이고 문학적인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충분히 의미 있는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치중립적 문화과학과 사회과학을 추구하는 베버의 경우에는 '인간 말종'이라고 옮기는 것에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연구가 근대적 직업윤리와 노동윤리, 그러니까 근대의 합리적 문화와 정신의 발달사임을 감안해 '마지막 인간들'이나 '최후의 인간들'보다는 '마지막 단계의 인간들'로 옮기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장기간에 걸친 서구 합리화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 나타날 (수도 있는) 인간 유형이라는 의미가 확연해진다.

 

니체의 저서에서 '마지막 인간들', '최후의 인간들' 또는 '인간 말종'에 대한 부분을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보라! 내 그대들에게 마지막 인간[최후의 인간, 인간 말종, 말종 인간]을 보여주리니.


'사랑은 무엇인가? 창조는 무엇인가? 동경은 무엇인가? 별은 무엇인가?'ㅡ마지막 인간은 이렇게 묻고는 눈을 깜박인다.


그런데 대지는 작아졌고, 그 작아진 대지 위에선 만물을 왜소화하는 저 마지막 인간이 날뛰고 있다. 그 족속은 벼룩과도 같아서 박멸할 수가 없다. 마지막 인간이 누구보다도 오래 사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을 찾아냈다'ㅡ마지막 인간들은 이렇게 말하며 눈을 깜박인다.

 

저들은 살기 힘든 고장을 버리고 떠났다. 따스함이 필요해서이다. 게다가 아직도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의 몸에 자신의 몸을 비벼댄다. 따스함이 필요해서이다.

 

병에 걸리거나 의심하는 것이 저들에게는 죄악이 된다. 그리하여 조심조심 걸어다닌다. 아직도 돌이나 사람에 걸려 넘어지는 자는 바보일 뿐이다!

 

이따금씩 얼마간의 독을 마시고는 아늑한 꿈을 꾼다. 그리고 끝내 많은 독을 마시고 아늑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저들은 여전히 노동을 한다. 노동 자체가 일종의 소일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 소일거리로 인해 몸이 상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한다.

 

저들은 더 이상 가난해지거나 부유해지려 하지 않는다. 둘 다 너무나도 번거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다스리려는 자가 있는가? 아직도 복종하려는 자가 있는가? 둘 다 너무나도 번거로운 일이다.

 

돌보아줄 양치기는 없고 가축떼만 있을 뿐! 모두가 평등하기를 원하고 모두가 평등하다. 그 누구든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끼는 자는 제 발로 정신병원으로 가기 마련이다.

 

'옛날에는 세상이 온통 미쳤었지'ㅡ더없이 명민한 자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깜박인다.

 

저들은 영리하여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조소에는 끝이 없을 수밖에 없다. 저들은 다투기도 하지만 이내 화해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위에 탈이 나기 때문이다.

 

저들은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조촐하게 즐긴다, 그러면서도 건강은 끔찍이도 챙긴다.

 

'우리는 행복을 찾아냈다'ㅡ마지막 인간들은 이렇게 말하며 눈을 깜박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4∼15쪽)

 

 

42) 이 구절은 그동안 베버 연구자들이 오랫동안 철저하게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출처가 밝혀지지 않았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에서 왔다는 주장도 있고, 미학자 프리드리히 테오드르 피셔에서 왔다는 주장도 있다.

 

베버가 인용한 구절 Fachmenschen ohne Geist, Genussmenschen ohne Herzen은 우리말로 "정신 없는 전문인, 가슴 없는 향락인"이 아니라 "영혼 없는 전문인, 감정 없는 향락인"으로 옮기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이러한 표현이 한국인의 언어 감각에는 더 잘 와 닿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한국어에서 '정신없다'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경황이 없다' 또는 '몹시 바쁘다'의 의미를 지니며, 또한 영혼은 인간 내면의 저 깊은 지층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버가 이 논의의 맥락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인간의 본원성, 내면성, 순수성 등을 뜻하는 '영혼'(Seele,soul)이 아니라, 각 개인이 이 세상에서 주관적으로 입지를 정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삶과 행위를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영위하며 또한 그에 대해서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의지와 능력을 뜻하는 '정신'(Geist, sprit 또는 mind)임을 감안해 이렇게 옮기기로 했다. 사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베버의 연구는 바로 이러한 정신이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삶과 행위의 영역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라는 종교적 이념에 의해 형성되고 발전되는 과정을 문화사적·사회학적으로 추적한 것이다. 그리고 Henzen은 감정, 정서 그리고 마음을 모두 포괄하며 이를 상징하는 '가슴'으로 옮기기로 했다.

 

 *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