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반 고흐 그림은 가짜요."

 

로맹 가리의 단편 소설 『가짜』는 이렇게 시작된다.

 

진짜와 가짜. 이 둘 사이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음모와 협잡과 긴장과 속임수가 있었을까. 상상하기도 어렵다. 진짜로 보이기 위한 가짜가 어느 시대에 어떤 목적으로 얼마나 많이 만들어졌는지를 제대로 헤아려 본 사람이 있기나 했을까. 대체로 가짜는 결국 언젠가는 들통나게 마련이다. 진짜를 닮은 가짜는 그 종류도 너무 많다. 무슨 유명한 화가의 그림뿐일까. 값진 보석들만 하더라도 진위를 가리기 힘든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책도 예외는 아니다. 한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왕의 특명으로 '희귀한 책들'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을 때, 몰래 그 틈을 타서 그 유명한 도서관에 자리잡게 된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책'은 가짜로 판명되기까지 무려 수백 년이 걸렸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들어오는 책들이 모두 진짜였던 것은 아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들이 고전을 열정적으로 수집한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위조범들이 왕들에게 가짜 아리스토텔레스 논문을 팔았는데, 그 논문들은 학자들이 몇 세기에 걸쳐 연구한 끝에야 가짜로 판명되었다.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중에서

 

 

그런데 가짜는 사람이 만들어낸 물건에만 판을 치는 것도 아니다. 온갖 생물들에도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기 마련이다. 값비싼 산삼이나 녹용 같은 건 말할 필요도 없으며, 우리가 흔히 먹는 광어조차도 양식을 자연산으로 속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홍어 또한 흑산도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진짜는 시중에 유통되는 물량의 5%에도 미치지 못할 거라고 한다. 국산이 아닌 게 국산으로 버젓이 유통되는 수많은 농산물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사람의 경우에는 어떨가. 사람에 대해서도 진짜와 가짜에 대한 구분이 필요할까. 물론이다. 사람도 얼마든지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도리어 진짜가 가짜 행세를 하기도 한다. 작년에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검찰총장의 아들'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자신의 진짜 아들을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한사코 부정하느라 그 아들의 친부는 온갖 '거짓말'을 다 지어내야 했다. 그러고 보면 진짜와 가짜, 참말과 거짓말 사이에는 무한히 가깝고도 먼 어떤 '거리'가 있다. 진실은 단 하나밖에 없지만, 거짓말은 무한대로 그 모양을 지어낸다.

 

글뭉치들이 담긴 자루를 꺼내며 드는 생각

 

다시 로맹 가리의 소설 『가짜』로 되돌아 오자. 내가 다루고 싶은 진짜 얘기는 그 단편 소설과 그 작품을 읽으며 저절로 떠오르던 내 생각이니까. 그가 다루는 소재는 딱 둘이다. 가짜 그림과 가짜 인간. 정말 탁월한 조합이다. 그 작품에 등장하는 그림 중개상 바레타는 '반 고흐의 가짜 그림'을 진짜로 인정받기 위해 거물급 화상(畵商)인 주인공 S···에게 협조를 간청하지만 끝내 거부당하고 만다. 결국 바레타는 훗날 주인공 S···에게 치명적인 복수를 한다. 바로 주인공 S···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사물보다 가장 확고하게 믿었던 미모의 아내가 바로 '가짜'였음을 밝히는 방식으로. 그러니 그 소설이 얼마나 자기전복적이고 짜릿할지는 말로 형언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그 언젠가 쇼펜하우어가 했던 말이 비수처럼 파고드는 순간이다.

 

온갖 협잡으로 게임이 진행되는 이 세계에서 사람은 강철같은 의지를, 운명의 일격을 막아낼 갑옷을, 사람들을 밀치며 나아가기 위한 무기를 지녀야 한다. 인생은 하나의 기나긴 전투다. 인생의 매 단계에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볼테르가 정확히 말했듯이, 우리가 성공할 때는 칼날 바로 끝에서 성공하며, 우리가 죽을 때는 손에 든 그 무기로 죽는다.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내가 이 단편 소설을 읽으며 떠올린 '숱한 가짜'를 다 들춰내자면 끝이 없을 정도이다. 그 가운데 딱 하나만이라도 소개하고 싶어서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그건 바로 사이버 세상에도 숱한 '가짜'가 존재하고 있겠거니 하는 생각이고, 거기서 범위를 훨씬 좁혀 나가다 보니 최근에 론칭된 어플 가운데 하나인 '북플'에 등장한 '수많은 마니아'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는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북플을 통해 '떠오른' 숱한 마니아들을 보면 그 정도(굳이 엄밀하게 얘기하자면 '가짜'라기 보다는 진실에서 벗어난 정도?)가 너무 심하다 싶다. 우선 당장 나만 하더라도 그렇다. 내가 무슨 무슨 마니아에 도대체 얼마나 많이 올라 있는지를 보면 나 자신조차 너무 당혹스럽다.

 

그리 많지는 않지만 여러 권의 책에서 '1번째 매니아'에 오른 것도 모자라, 분야별 마니아에도 민망할 정도로 여러 곳에 랭크되어 있다. 이게 과연 '내가 맞나' 싶다.

 

서양고전문학 4번째 마니아(3015점) 

생명과학 2번째 마니아(1953점)

심리학/정신분석학 6번째 마니아(1659점)

뇌과학 2번째 마니아(1468점)

신화/종교학 2번째 마니아(1301점)

서양고전사상 2번째 마니아(1260점)

자연에세이 2번째 마니아(908점)

사회운동 4번째 마니아(754점)

 

더욱 놀라운 건 저자/아티스트 분야에도 '마니아'라는 딱지가 여기 저기 붙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에 나오는 '저자'들에 대해서 내가 모두 '5번째 이내에 드는 마니아'라니. 정말 낯이 화끈거릴 지경이다.(그런데 내가 정말 좋아하는 몽테뉴, 아담 스미스, 찰스 다윈, 쇼펜하우어 등은 정작 '매니아 리스트'에 아예 뜨지 않는다. 이 분들에 대한 나의 애정은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다는 건가? 도대체 뭘 보고 마니아라는 딱지를 붙이는지 모르겠고, 대략 난감하다.)

 

 

 

 

 

어쨌거나 이건 좀 너무 심하다 싶고, 도무지 말이 안 된다 싶다. 좀 더 심하게 얘기하면 북플 마니아는 '무늬만 매니아'인 경우가 너무 많은 게 아닐까 싶고, 심지어는 '가짜 매니아'라는 말을 들어도 싸다는 생각마저 든다.

 

여기서 다시 로맹 가리의 작품 이야기를 계속해 보겠다. 우리의 주인공 S···가 단정적인 어조로 내뱉은 "당신의 반 고흐 그림은 가짜요."라는 말에 뒤이어, 그 말을 듣고 있는 그림 중개상 바레타의 모습이 '그림처럼' 소개된다.

 

회색 넥타이에 흑진주 장식, 순백의 머리칼, 은근한 품위를 풍기는 단정하게 재단된 정장, 살집 좋은 체격과 어룰리지 않는 외알박이 안경, 지중해의 역동성이 어린 통통한 이목구비를 한 바레타는 소파 깊숙이 앉아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았다.

 

'반 고흐의 그림'을 경매를 통해 여러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꽤나 비싸게 사들인 바레타가 S···의 날카로운 지적에 진땀을 흘리며 애원 섞인 반론을 가한다. 그에 뒤어이 나오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결코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란 말이오? 그런 걸작을 소유했다는 걸 행복해하면 될 텐데."

 

"내가 선생한테 바라는 건 떠들고 다니지만 말아달라는 거요. 압력을 가하지 말란 말이오."

 

'북플 마니아'에 대해서도 혹시 저런 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걸 옹호하는 사람의 입장이라면, 그런 '훈장'을 소유했다는 걸 행복해하면 될 텐데 뭐가 문제냐 할 수도 있겠고, 나같은 경우라면 그게 가짜처럼 보인다고 좀 떠들고도 싶고, 또 '진위'를 밝혀야 한다며 어딘가에 압력을 가하고도 싶은, 그런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이다.

 

반 고흐의 그림 경매에서 어렵사리 그 그림을 차지한 바레타는 S···가 제발 그 그림에 대해 더이상 위작 여부에 대해 언급하지 말아줄 것을 간곡히 요청한다. 그런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자못 흥미롭다.

 

"이보시오, 우리 진지해집시다. 내가 반 고흐 작품을 사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진품임을 의심하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부상한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내가 저 작품을 샀다면, 당신은 그걸 손에 넣지 못했을 거요. 그러면? 당신은 내가 정확히 어떻게 행동하기를 바라시오?"

 

"선생은 이 그림에 맞서 온갖 권위 있는 견해를 동원했소." 바레타가 말했다. "난 알고 있소. 선생이 자신의 영향력을 모두 동원해서 저 그림이 가짜라는 사실을 증명하려 하고 있다는 걸 말이오. 선생의 영향력은 막강하오. 당신이 한마디만 해도 ······."

 

이런 대화에 뒤이어 우리의 주인공 S···가 바레타에게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대목이 정말 압권이다.

 

"유감이오, 친애하는 선생. 정말 유감이오. 당신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건 원칙의 문제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하오. 난 사기 사건에 공범이 될 순 없소. 암묵적인 동의를 통해서라도 말이오. 당신은 정말 멋진 소장품들을 갖고 있소. 그러니 이번엔 솔직하게 당신이 속았다는 걸 인정해야 하오. 난 작품의 진위 문제에 대해 타협 같은 건 하지 않소. 속임수와 거짓된 가치가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확실성이 있다면 걸작의 그것 아니겠소. 우리는 온갖 위조범들로부터 우리 사회를 지켜야 하오. 내게 예술작품이란 신성한 거요. 나에게 작품의 진위는 종교라고 할까 ······. 당신의 반 고흐 작품은 가짜요. 그 불행한 천재는 살아 있는 동안 충분히 배반을 맛보았소. 적어도 사후에는 우리가 그를 배신으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고, 또 그래야 하잖소."

 

"말 다했소?"

 

"놀라운 일이오. 당신처럼 명망 있는 사람이 내게 그런 조작에 공범이 되어달라고 하다니······."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문득 지난 여름에 암스테르담에 갔을 때 '반 고흐 미술관'에서 직접 느꼈던 그 '불행한 천재'의 눈물겨운 그림들을 여러 장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가짜 그림이 비싸게 팔린다 하더라도 최소한 반 고흐의 작품에 대해서만은 제발 가짜를 그리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내게도 순식간에 스며들었다.

 

(Shooting Date/Time 2014-07-07 오후 11:41:01, 한국시간)

 

'어쨌든'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심각한' 대화는 계속해서 좀 더 소개할 필요를 느낀다.

 

"어쨌든 선생이 불길한 말을 내뱉은 후, 내 그림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취하는 당혹스런 태도라니······. 어쨌든 선생이 이해를 해줘야······."

 

"이해하오." S···가 말했다. "하지만 인정할 순 없소. 그 그림을 태워버리시오. 그거야말로 당신 수집품의 진가를 높이는 것은 물론 명망 높은 인사인 당신의 평판까지 높이는 일이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신을 문제삼는 게 아니오. 반 고흐의 작품을 문제삼는 거지."

 

바레타의 얼굴이 굳어졌다. S···가 늘 보아오던 표정이었다. 자신이 시장에서 경쟁자들을 물리칠 때면 그들의 얼굴에 어김없이 떠오르던 표정. 좋은 기회이긴 한데, 하고 그는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이럴 때 친구를 만들 수 있는 건데······. 하지만 문제는 그가 진정으로 애착을 갖고 있고, 그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를 건드리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인 작품의 진위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왜 그런 욕구를 갖고 있는지 자문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기묘한 동경이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환상을 전혀 갖지 않은 데서 연유하는지도 몰랐다. 그는 자신이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것, 모든 것이 자신의 놀라운 재정적 성공과 누리고 있는 권력과 돈 덕택이라는 것, 자신이 아첨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이 작품 속 주인공인 S···는 사실 출신이 좋지 못한 컴플렉스를 지니고 있었다. '상점에서 물건을 훔치고, 항구에서 에로 엽서나 팔던 스미른의 부랑자'가 온갖 노력 끝에 '벼락 출세'한 처지의 인물이었다.

 

정체성이 분명한 예술작품은 불안정한 영혼 속에서 절대적인 확실성만이 일깨울 수 있는 그런 경건함을 그에게 불러일으켰다. 프랑스의 성 두 채와 뉴욕과 런던의 최고급 거처, 흠잡을 데 없는 취향,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장식품들, 영국 여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유창하게 구사하는 일곱 개 국어에 배어 있는 리듬 섞인 억양의 흔적과, 수메르에서 이집트, 아슈르에서 이란까지 예술이 융성했던 시기의 조각상에서도 확인되는, 편의상 '중동인'이라고 불리는 신체적 특징만으로도, 그가 짙은 사회적 열등감-차마' 인종적' 열등감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에 시달리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의 수집품들은 그리스 미술 작품들만큼이나 막강했고, 그의 집 거실에는 반 미게렌의 위작 이후 발견된 유일한 진품인 베르메르의 그림과 티치아노의 그림들과 벨라스케스의 그림들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머잖아 또다른 대가의 작품이 걸린다면 정말 벼락부자처럼 보이리라고 사람들은 수군댔다. S···는 자기 등뒤에서 난무하는 이런 피곤한 독설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당연히 감내해야 할 경의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그러니 그의 융숭한 대접 때문에라도 파리의 명사들이 그를 위해 '정보 제공자' 역할을 마다할 수 없었던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의 과시적인 사치를 앞장서서 비웃는 사람들이야말로 열심히 그를 따라다니면서 '그런 사치를 조바심내며 이용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자신에게 아첨하고 빌붙고 있다는 사실도, 자기 주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끼는 좀 모호한 자신의 허영심도 그는 알고 있는 터였다. 그는 그들을 '내 가짜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자기 집 탁자에 앉아 있거나 자신이 제공한 고속 모터보트가 이끄는 수상스키를 타고 있는 것을 빌라의 창을 통해 바라보며 그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고는 만족의 빛이 역력한 눈길로, 의심의 여지 없이 진품인 자신의 가장 귀한 수집품들을 바라보곤 했다.

 

'가짜 그림'을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바레타와 그 작품이 위작임을 기어이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S···· 사이에 결국 파국이 찾아온다. 그 장면에 대한 작가의 묘사 또한 일품이다.

 

그는 바레타가 소장하고 있는 반 고흐 작품의 진위를 밝히려는 운동을 벌이고 있긴 했지만 바레타에게 개인적인 원한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나폴리의 작은 식품점에서 출발해 오늘날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식품회사의 대표가 된 그 사내는 오히려 그가 좋아하는 타입의 인물이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가문(家紋)인 거장들의 그림을 동원해 자기 집 벽에 남아 있는 살라미 소시지와 고르곤졸라 치즈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그런 욕구를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반 고흐 그림은 가짜였다. 바레타는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전문가의 승인이나 묵인을 돈으로 사서 그 그림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려 애쓰는 바람에 그는 도리어 타협의 여지 없이 힘의 영역으로 들어선 셈이었다. 게임의 법칙을 엄격히 지키는 이들에게서 교훈을 얻는 것이 마땅했다.

 

"내 책상 위에는 팔켄하이머의 감정보고서가 놓여 있소." S···가 말을 이었다. "그걸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했는데 당신 이야기를 듣고 보니······ 오늘부터 그 보고서를 신문사에 돌려야겠소. 친애하는 선생, 좋은 그림을 살 능력이 있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소. 우리 둘 다 돈이 있소. 진품에 대해 소박한 경의는 표해야 하오. 진정한 경애심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예술품이란 경배의 대상이니 말이오."

 

마침내 바레타는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S···는 그런 위협적이고 원한에 찬 표정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반드시 복수하겠소." 이탈리아인은 이를 갈며 말했다. "내 말을 믿어도 좋소. 우리는 비슷한 삶의 여정을 거쳤소. 나폴리 거리에서도 스미른 거리에서만큼이나 치사한 짓거리를 배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요."

 

바레타는 서재를 나갔다. S···는 자신을 그 무엇에도 끄떡없는 사람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아무리 부자라 해도 자신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시가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그의 두뇌는 그의 재산을 만들 수 있었던 원동력인 기민함을 동원해 자신이 하고 있는 거래들을 검토했고, 모든 구멍들이 잘 막혀 있다는 것, 어디에도 물 샐 틈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쯤에서 소설은 다시 무대를 바꾼다. 그가 '피우던 시가를 재떨이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푸른빛의 응접실에 있는 아내에게로' 다가가는 장면으로. 단편 특유의 빠른 전개와 경쾌한 필치도 인상적이지만, 우리의 주인공 S···의 아내에 대한 '탁월한 미모'를 묘사한 대목이 아주 절창이다.

 

그는 이 년 전 로마의 레바논 대사관에서 점심식사를 하다가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그녀는 자신이 성장한 시칠리아에 있는 집안 소유의 영지를 처음으로 떠나 어머니와 함께 그곳에 온 참이었는데, 유난히 권태로워진 사교계에 몇 주에 걸쳐 일대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그녀는 겨우 열여덟 살이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말 그대로 '귀한' 것이었다. 마치 자연이 자신의 전지전능한 권위를 과시하고, 인간의 손이 만들어낸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그녀를 창조한 것 같았다. 빛을 받는다기보다는 빛에게 자신의 광채를 빌려주는 듯한 검은 머리채 아래 이마와 눈과 입술은 예술에 대한 생명의 도전인 양 조화로웠고, 개성과 꿋꿋함까지 갖춘 섬세한 코는 그 얼굴에 경쾌한 터치를 부여함으로써, 위대한 영감의 순간이나 우연의 신비로운 작용 가운데 자연만이 도달하거나 피할 수 있는, 지나친 완벽 추구와 거의 언제나 짝을 이루는 그런 차가움으로부터 그 얼굴을 구해 주고 있었다. 걸작, 그것이야말로 알피에라의 얼굴을 바라보는 이들의 한결같은 의견이었다.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만난 지 삼 주 만에' 결혼식을 올린다. '전 세계 증권거래소와 연결된 전화에 줄곧 매달려 있는, 이유는 모르지만 '모험가'라고 불리는 '해적' S···가 그렇게 빨리 '얌전'해질 수 있으리라는 것, 사업이나 수집품보다 젊은 아내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친절하고 헌신적인 남편이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세계 각국에 있는 그이 대리인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물건과 계획되고 있는 굵직한 매매에 대한 보고서를 줄곧 그에게 타전했지만, 그 무엇도 그를 알피에라에게서 벗어나게 할 수 없음은 명백했다. 행복감 때문에 세상이 멀고 재미없는 위성 정도로 축소되었던 것이다.'

 

"당신, 걱정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오. 개인적으로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어떤 사람의 최대 약점인 허영심을 공격하는 건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게 이제 내가 하려는 일이오."

 

"어째서요?"

 

S···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고, 짜증이 날 때면 늘 그렇드싱 가락 있는 억양이 평소보다 더 심하게 드러났다.

 

"원칙의 문제라오, 여보. 위조된 작품에 대해 수백만 달러를 동원해 묵인의 공모를 얻어내려 하고 있소. 만약 우리가 거기에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진품과 가짜를 가려내는 일에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될 테고, 그러면 최고의 수집품도 의미가 없어질 테니······."

 

이제 소설은 마지막 클라이막스만 남겨 두고 있다. '반 고흐의 알려지지 앟은 걸작'을 둘러싼 논쟁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은 뒤 약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아무런 설명도 들어 있지 않은 사진 한 장'이 S···에게 배달되었고, 똑같은 사진을 담은 우편물은 그 후 일주일 동안이나 계속해서 그에게 전해졌다. 그때마다 그는 '흉물스런 매부리코의 그 얼굴'을 계속해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는 사진과 함께 동봉된 짤막한 쪽지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내용은 물론 간단했다. "당신이 소장한 걸작은 가짜요." 이쯤 되면 그 이후의 전개는 불보듯 뻔하다. 등장 인물들에 대한 로맹 가리의 기가 막힌 묘사들만 다를 뿐.

 

모든 것이 다 들통난 이후 '성형 미인' 알피에라는 '한 손으로 문손잡이를 잡고 애원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차마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울고 있었고····· 하지만 주인공 S···의 앞에 서 있는 것은 '알피에라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알지도 못하는, 위조범의 노련함이 그의 눈길로부터 영원히 감춰버린 다른 낯선 여자였다. 거역 못 할 어떤 힘이 그를 밀어붙여 그 사랑스러운 얼굴 위에다 딱 벌어진 탐욕스런 콧구멍이 달린 끔찍한 매부리코를 되살려내고 있었다. 그는 예리한 눈길로 구석구석을 살피며 가짜임을 나타내는 흔적, 간사한 중개상의 손길을 드러내는 표시를 찾고 있었다. 가혹하고 가차없는 무언가가 그의 마음속에서 움직였다. 알피에라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오, 제발, 절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진정하시오. 당신도 알 거요. 이런 상황에서 ······"

 

S는 이혼 결정을 내리기까지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가 처음에 내세운, 언론에서 논란이 된 이혼 사유, 곧 아내의 얼굴이 가짜라는 사실은 법정의 빈축을 샀고 예심에서 기각되었으므로, 알피에라 일가와의 은밀한 협상-정확한 금액은 끝내 알려지지 않았다-끝에야 그는 진품만을 원하는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

 

로맹 가리의 작품 소개에만 너무 열중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함께 떠올렸던 '가짜스러운' 북플 매니아 얘기를 쏙 빼먹고 한 걸음도 더 전개시키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다. 아마 상상력이 풍부한 독자들은 이 글을 읽는 동안 나처럼 계속 '북플 매니아'를 머릿속에 오버랩시키면서 읽었을 지도 모른다. 혹은 다른 수많은 얼굴을 지닌 '가짜들'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그 정도면 나로서는 이 글을 쓴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 셈이다.

 

'가짜'가 지닌 '치명적인 위험'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준 로맹 가리의 이 단편이 나에게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언뜻 스치는 '껍데기는 가라'던 어느 시인의 절규까지 이 글에 덧보태는 건 아무래도 좀 지나친 비약이겠지 싶어 이쯤에서 내 글을 마무리짓고 싶다. 아무튼 북플 매니아는 '비록 악의는 별로 개입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로서는 여러모로 좀 '가짜'스러운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더군다나 무슨 분야에서는 내가 '1363번째 마니아'라는 사실까지도 친절히 알려 주던데, 그게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필요하단 말인가. 무슨 '레이스'를 벌이자는 것도 아니고. 이쯤 하자. 내 글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을 테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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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떤 공동체
    from Value Investing 2016-01-05 23:03 
    알라딘은 말하자면 어떤 공동체이다. 거기선 서로 얼굴도 모른 채 마치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인 양 시도 때도 없이 인사를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꼭 인사성이 밝은 사람들만이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떨 땐 다른 사람과 코가 맞닿을 만큼 아주 가까이 스쳐 지나가면서도 그냥 아무런 인사도 없이 불쑥 돌아서서 제 갈 길을 간다. 그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굴'을 하나씩 파고 있다. 물론 활달한 사람들은 수시로 자신의 '굴'에서 빠져 나와 남의
 
 
2014-12-11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12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4-12-12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플 마니아... 이야기 공감해요!
뭔 앱인가를 안 깔아서 내 기록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컴터에서 보여지는 마니아를 보면 좀 황당했어요.

oren 2014-12-12 11:55   좋아요 0 | URL
`마니아`라는 타이틀을 너무 졸속으로 꾸미다 보니, 온갖 책들과 분야와 저자들에 대해서 `마니아` 타이틀을 주렁 주렁 달아 붙여 놓은 꼴이 너무 우습다 싶은 생각부터 앞서더군요. 만든 취지는 수긍할 수 있을지 모르나 지금과 같은 방식은 좀 아니다 싶어요.

yamoo 2014-12-16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짜>를 보니 전에 이 페이퍼를 볼 땐 생각이 나지 않았던 영화였었는데...혹시 안보셨다면 <베스트 오퍼>를 꼭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쓰신 페이퍼를 보니 이 영화 생각이 계속 났는데, 제목이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oren 2014-12-16 15:27   좋아요 0 | URL
<베스트 오퍼>라는 영화도 있었군요. 언제 기회가 되면 꼭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야무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