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로우의 강 - 강에서 보낸 철학과 사색의 시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윤규상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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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들려주는 '우정'은 자연을 쏙 빼닮았다. 담백하면서 거짓없이 해맑고 순수하다. 아침 햇살처럼 눈부시면서 이슬처럼 영롱하다. 바람처럼 부드럽고 강물처럼 꾸준히 흐르며 호수처럼 깊게 잠긴다. 마침내 대양에 이르러 대륙을 이어주는 드넓은 길을 안내해 줄 것만 같다. 그러나 해와 달의 움직임에 따라 거대하게 일렁이는 성난 물결과, 비바람과 함께 일어나는 드높은 파도와도 맞서 싸우며, 야자수가 자라는 섬을 찾아 기나긴 항해를 오랫동안 함께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모든 뛰어난 것들은 희귀한 만큼 어렵다'는 스피노자의 말은 '우정'에도 역시 예외가 아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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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진심으로 애태우지만

우리는 벗과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고 나서도, 슬기롭고 다정한 말보다는 자신에게 기억나는 쌀쌀한 낯빛이나 생각 없이 한 행동을 거듭거듭 되새겨보곤 한다. 한참 지난 후에 어떤 친절을 깨달으면서, 벗이 대단히 순수하고 고결한 마음으로 우리를 대했기에 하늘의 바람처럼 주의를 끌지 못한 채 지나갈 적이 있었음을, 우리의 모습 그대로 우리를 대하지 않고 우리가 되기 바라는 모습으로 대할 적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잊혀진 것도 아니고, 기억에 남는 것도 아닌 고귀한 무언의 행동이 그저 우리에게로 온 것으로, 우리는 우리의 차가운 마음에 어떻게 그런 것이 오게 되었는지 생각하면서 몸을 떨게 된다. 이 빚을 갚고 싶은 마음에 진심으로 애태우지만, 너무 때 늦은 시간에 말이다.(339쪽)

 


 

개개인의 인격을 들어 말하기 시작하면

내가 겪은 바에 따르면, 좋은 벗과 대화를 나누더라도 개개인을 이야깃거리로 삼게 되면 으레 메마르고 하찮은 사실이나 이야기하게 된다. 개개인의 인격을 들어 말하기 시작하면, 그 즉시 우주가 파산한 것처럼 여겨진다.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헐뜯기로 기울기 쉽고,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이야기의 테두리는 더욱더 좁아진다. 새로운 벗과 사귀게 되면 오래된 벗은 불친절하게 대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가정주부는 말한다. 나는 평생 도자기를 새로 장만한 적은 없으나 낡은 도자기를 보면 깨트리게 된다고. 나는 차라리 숲의 나무와 버섯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말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조용히 혼자서 여유를 갖고 벗을 기억하게 될 때가 있다.(340쪽)

 

 

 

벗이란 넓은 바다에 떠다니는 아름답고 자그마한 야자수 섬과 같다.

누구에게나 우정은 지나고 나면 덧없는 것으로, 지난 여름철에 먼 하늘을 밝히던 번개처럼 희미하게 생각나게 마련이다. 이처럼 우정은 아름답지만 휙 지나고 마는 여름철의 구름과 같다. 하지만 가뭄이 오래 가더라도 대기 중에는 늘 수증기가 남아 있는 법이고, 봄 소나기까지 있지 않은가. 그 흔적은 정년 사라지지 않기에, 그것이 이따금 우리 주위를 감돈다. 해와 달처럼 오래되고 친숙한 것이지만 언제나 같은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법칙이 있어 다시 찾아올 것이 분명하기에 식물이 자라나듯 수많은 모습으로 움터온다. 그 본질을 경험하기란 영원히 불가능하다.

그것은 맑고 고요한 날에 반짝이는 양털구름처럼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시각을 속이는 일 없이 마법에 의해서인 듯 조용히 몰려온다. 벗이란 뱃사람들을 교묘히 피해 태평양 넓은 바다에 떠다니는 아름답고 자그마한 야자수 섬과 같다. 그는 적도 근처에서 부는 강풍, 산호초와 같은 많은 위험과 맞서고 나서야 항구적인 무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누가 세찬 비바람을 뚫고, 더욱이 대서양 성난 물결까지 헤치고 나가 금욕하는 사람이 틀어박힌 바닷가에까지 이르려 하겠는가?(343쪽)

 

 

우리는 언제나 벗들이 우리의 벗이자, 우리가 그 벗들의 벗이기를 꿈꾼다

우정만큼 사람들의 입술에 자주 오르내리는 말도 없다. 사실 사람들은 우정을 가장 간절히 바란다고 믿는다. 누구나 우정을 꿈꾸기에, 날마다 무대에는 비극으로 끝나는 드라마가 올려진다. 우정은 우주의 비밀이다. 당신이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온 나라를 헤매도 우정에 대해 어떤 말도 듣지 못할 터이나, 우정에 대한 생각만은 어디에서나 왁자지껄하다. 낯선 남녀든, 오래 만나온 남녀든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우정과 관련하여 무슨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문헌을 통틀어 내가 기억하는 이 주제를 다룬 에세이는 고작 두어 편에 불과하다.

우리가 신화모음집, 아라비안나이트, 셰익스피어, 스콧의 소설을 읽으며 즐거워하는 게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니, 우리 스스로가 시인이자 우화작가이고, 극작가이자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드라마보다 흥미로운 드라마에서 한 역을 맡아 연기한다. 우리는 언제나 벗들이 우리의 벗이자, 우리가 그 벗들의 벗이기를 꿈꾼다. 그렇지만 현실에서의 벗이란 우리가 벗하기로 언약한 이들과는 그저 먼 사이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이 있는 그대로 우러나는 말 세 마디 이상을 벗과 나눠본 적이 거의 없다. "반갑네, 벗이여!" 라고 말할 채비를 갖추고서 만나나, 헤어지면서 나누는 인사라는 게 고작 "망할 놈"이다. 그렇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겁쟁이들은 참된 벗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 벗이여, 진정 네가 내 벗이라면, 단 한번만이라도 내가 네 벗이라는 게 통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우정에 들일 시간을 내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 중요하지 않은 의무와 관계가 영원히 우위에 있다면, 아무리 친절한 성격이라도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우정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하지만 우리가 벗을 잊는 일이 불가능하듯, 마찬가지로 벗으로 하여금 우리의 숭고한 목적에 응답하도록 만드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 우리는 작별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사실상 벗과 동행하게 된다. 우리는 상상으로 그려온 벗의 사촌을 만나러 가기 위해 정작 벗으로부터 얼마나 자주 등을 돌리게 되는가. 내가 어떤 사람의 벗이 될 만한 값어치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347∼348쪽)

 

 

벗끼리는 어울려 살아갈 뿐만 아니라 선율과 가락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자신의 벗이라고 말하더라도 대개는 그가 자신의 적이 아니라는 뜻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정이 주는 우연하면서도 자그마한 이득, 예컨대 벗이 재산이나 영향력이나 조언으로 필요한 도움을 주는 그런 이득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벗과의 관계에서 이런 이득을 내다보는 사람은 실제 이득은 보지 못하거나, 이 관계 자체에 전혀 경험이 없음을 드러낸다. 그런 기여는 우정 자체의 지속적이면서 포괄적인 기여에 비하면 하찮고 비천한 것이다. 우정은 서로 화합하고, 신의를 다하고, 실제 친절을 베푸는 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벗끼리는 어울려 살아갈 뿐만 아니라 선율과 가락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벗이 우리를 먹이고 입히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이 점에서는 이웃들도 충분히 친절하다-우리의 영혼의 일이라 할 그런 일을 맡아 하길 바란다. 일이 어떤 방식으로 처리되든, 그것만으로도 넉넉하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어리석게도 어떤 사람을 또 다른 사람과 혼동하곤 한다. 아둔한 이는 인종이나 국적, 기껏 잘해야 계급이나 식별하지만 슬기로운 이는 개개인을 식별한다. 한 사람의 독특한 성격은 갖가지 특징과 행동으로 벗에게 나타나므로, 그의 성격이 벗에게 드러나 고쳐지게 된다.

인간의 교육에서 우정이 지닌 중요성을 생각해 보라.

    사랑하면서 가릴 줄 아는 이가
    누구보다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우정이 한 사람을 정직하게 만들어 주고, 영웅으로 만들어 주고, 성자로도 만들어준다. 우정은 공정함으로 공정함을, 관대함으로 관대함을, 참됨으로 참됨을 대하며, 인간됨으로 인간됨을 대한다.

이에 대해 또 다른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갖가지 미덕 가운데 사랑이 잘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그것이 온갖 미덕을 하나로 줄여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349∼350쪽)

 


 

우리는 황금을 주려 하지만, 그들은 구리만 달라 한다

우리는 날마다 사람들과 만나지만, 고귀한 재능을 쓰지 않고 버려두어 녹이 슬고 있다. 아무도 우리에게 경의를 표하며 고귀함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황금을 주려 하지만, 그들은 구리만 달라 한다. 우리가 이웃 사람에게 참으로 성실하고 고귀하게 대할 수 있게 해 달라 요청하더라도, 그는 귀가 먹었는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그는 이 바람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거짓말쟁이이고 천하고 불성실하고 이기적인 "그런 나 그대로" 대접해주면 만족한다고 말한다. 우리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서로를 대접하고 대접받으면 만족한다. 진실하고 고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데도, 그런 관계를 맺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른바 좋은 이웃과 친지가 있을 터이고, 이런 태도로만 서로를 대하는 좋은 일벗, 아내, 부모, 형제, 누이, 자식까지 있을 터이다. 이런 형편에서는 구성원들 사이에 정당함이 필요치 않고, 불량배의 짓거리와 그리 다르지 않은 변변찮은 일들만 하면서도 대단히 잘되어간다고 생각하며, 이웃과 가족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우정마저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불량배끼리 중시하는 체면보다 별반 나을 것이 없는 형편이다.

하지만 우리가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가 있다. 다시 말해, 그와 맺은 관계가 참되기에 그에게 최선의 것을 주고, 그로부터 최선의 것을 받게 될 때가 있다. 둘 사이에는 따뜻한 진실이 있고, 사랑이 있다. 그리고 서로에게 참되다는 확신을 갖는 그만큼 우리의 삶은 거룩해지고, 기적이 되며, 높은 뜻을 좇게 된다. 이 세상에서 사람을 사귈 때는 애정에서 굴곡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런 사귐은 세속의 삶을 넘어서서 천당의 삶을 기다리라고 말하는 예언서에서는 배우지 못한다. 어느 신에 견주어도 꿀리지 않을 만큼 고프스타운의 그저 그런 하루 한가운데로 곧장 들어갈 수 있는 이 사랑은 무엇인가? 속된 눈에는 우주에 먼지 한 알이 내려앉을 때, 구세계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면서도 아름답고, 신선하고, 영원한 신계계를 찾아내는 이 사랑은 무엇인가? 달리 해서는 이 세계가 다다르지 못하고, 존재하지 못하는 이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말보다 기억할 만한 소중한 말이 있는가, 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말들이 계속해서 널리 퍼졌음은 놀라운 일이다. 사실 그런 말들은 무척 드물지만, 음악의 곡조처럼 조바꿈되면서 끊임없이 기억에 되새겨진다. 그렇지 않은 말들은 사랑을 꾸며놓은 벽토와 더불어 모조리 부서져 내린다. 우리는 감히 그런 말들을 큰소리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런 말들을 늘 들을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350∼351쪽)

 


 

우정과는 잠시라도 함께 할 수 없기에

"우정이 두드러지는 까닭은 그 뛰어난 미덕에 있다."지만, 우리는 벗을 전혀 칭찬할 수 없고, 칭찬받을 만하다고 여길 수도 없으며, 그가 어떤 행위를 통해 우리를 즐겁게 하거나, 넉넉히 대접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서도 안 된다. 다른 경우에는 훌륭하다고 칭찬받는 이런 친절이 우정과는 잠시라도 함께 할 수 없기에, 벗에게는 그의 본성에 필요치 않은 선의나 상냥함과 같은 무례를 행해서는 안 된다. (353쪽)

 


 

우정은 성을 차별해서 다루지는 않는다

남녀끼리는 어떤 체질상의 차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강하게 끌리게 마련이고, 대개의 경우 서로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게 된다. 남성이 자신과 관련된 일들로 여성의 주의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이기가 얼마나 쉬운가. 남녀가 대등한 문화에서는 우연히 만난 남녀끼리라도 남성 대 남성에 견주어볼 때 더 나은 어떤 값어치를 갖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 사회에서는 청렴함과 관대함이 이미 자연스럽게 존재하므로, 나는 남자라면 누구나 남성들의 모임보다는 지적인 여성들의 모임에 더 자신 있게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들고 가 읽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남성이 남성을 찾아가면 방해가 되는 경우가 흔한 반면에, 남녀끼리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기다린다. 그렇지만 우정은 성을 차별해서 다루지는 않는다. 그렇더라도 남녀 사이의 우정은 동성인 두 사람 사이에서보다 드문 편일지 모른다. (354쪽)

 


 

벗이란 내가 고르고 고른 생각에 걸맞은 사람이어야 한다

공자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벗으로 사귀지 말라."고 말했다. 우정에 이로움이 있고 우정이 지속되는 까닭은, 양 당사자의 실제 성격으로 미루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그런 수준보다 높은 수준에서 우정이 맺어지기 때문이다. 우정의 빛줄기는 만나는 사람이 실제보다 더 커 보이는 그런 곡선을 그리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바탕은 정중함이다. 벗이란 내가 고르고 고른 생각에 걸맞은 사람이어야 한다. 나는 그와 더불어 무슨 일을 할 때보다는 내가 없을 때 그에게 더 고귀한 임무를 맡긴다. 그러면서 그가 더 고귀한 만남에 써야 할 시간을 내게 낸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어떤 벗이 값싸게 오래 얼굴을 익혔을 경우에나 허물이 덮어질 그런 버릇없는 행동을 했으면서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조차 없이 여전히 다정한 어조로 내게 말을 걸어왔을 때, 이제까지 벗과 맺은 관계에서 가장 쓰라린 업신여김을 느꼈다. 당신의 벗이 당신의 나약함을 너그러이 대하는 법을 배워 결국 사랑의 진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세워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 우리는 벗을 꽤나 허물없이 대해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욕되게 할 때가 드물지 않다. 그럴 때는 차라리 종교적 고독과 침묵으로 물러남으로써 고결하게 사귈 마음을 갖추는 편이 낫다. 벗과의 사귐에서 침묵은 아주 향기로운 밤으로, 그 안에서 진심이 되돌아오고, 더 깊숙이 뿌리를 내린다.(355쪽)

 

 

 

우정은 계속해서 증명을 필요로 하는 기적이다

우정은 서로를 이해했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당신은 내가 자신보다 뒤떨어지는 벗이기를 바라서 나를 알고 싶어 하는가? 게다가 어떤 사람이 내게 각별한 감정을 품었다고 생각할 권리가 내게 있는가 말이다. 우정은 계속해서 증명을 필요로 하는 기적이다. 우정은 가장 순수한 상상력과 희귀한 믿음의 발현이다. 우정은 감동을 주는 무언의 행동으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가 상상하는 만큼, 심지어 네가 믿는 그대로 너와 관계를 맺을 것이다. 나는 네게 진실을, 즉 나의 모든 부를 바칠 것이다" 라고. 그리고 벗은 말없이 자신의 본성과 삶으로 그 행동을 받아들이면서, 마찬가지의 거룩한 정중함으로 나를 대한다. 나의 벗은 나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남김없이 잘 안다. 그는 사랑의 증표를 바라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관계의 특징으로 사랑인지 아닌지 가릴 수 있다. 그가 찾아올 때 지나치게 그의 체면을 살펴줄 필요는 없다. 내가 오라고 청할 때까지 기다리지는 말아다오. 하지만 내게로 올 때는 내가 당신을 기꺼이 맞이하는지 살펴다오. 찾아와 달라고 하면 그 때문에 당신이 곤욕을 치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벗이 있는 곳에는 갖가지 부와 마음을 끄는 물건이 있고, 그와 나 사이에는 어떤 걸림돌도 있을 수 없다. 어떤 경우라도 내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는 일은 없게 해다오. 우리의 사귐이 우리보다 온전히 높은 곳에 있어 우리를 그리로 끌어올리게 해다오.(356쪽)


 

 

우정의 언어는 말이 아니라 뜻이다

우정의 언어는 말이 아니라 뜻이다. 우정은 언어 위에 있는 지성이다. 사람들은 벗과는 혀가 풀릴 때까지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생각을 머뭇거리지 않고 다 털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대체로 내가 겪은 바에 따르면, 우정은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서로를 아는 데 불과한 사이라면 서로 오갈 때마다 미리 준비된 말이 있지만, 호흡이 바로 생각이자 뜻인 벗이 변변찮은 말을 어떻게 입 밖에 내야 한단 말인가? 당신이 여행을 떠나는 벗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간다고 상상해보자. 당신은 그와 악수 나누는 일 말고 다른 어떤 외적인 표현을 알고 있는가? 그를 위해 어떤 수다를 준비해 놓았단 말인가? 어떤 아첨을 그의 주머니에 넣어줄 것인가? 그를 통해 특별히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라도 있단 말인가? 아니면 당신도 가끔 깜빡 잊을 적이 있다는 듯, 전에 미처 하지 못했던 어떤 말을 그에게 할 터인가? 그렇지 않다. 그의 손을 잡고 '안녕' 하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당신이 자주 잊어먹고 하지 못하던 인사로 충분하다. 이 점에서는 관습이 우위에 있다.

그가 가야 한다면, 오랫동안 그가 우물쭈물하며 떠나지 못하는 모습이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가 가야 한다면, 빨리 보내줘라. 아직 하지 못한 어떤 마지막 말이라도 남아 있단 말인가. 아, 슬프도다. 그 마지막 말은 당신이 그토록 애타게 찾아온 말 중의 말인데도, 아직 그 첫 낱말조차 찾아내지 못했다. 내가 진심으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조차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 이름이 딸린 개인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내 이름을 정확히 발음할 수 있는 사람은 나를 부를 수 있고, 나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아 자리에서는 연인 사이의 자유와 방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이렇게 바탕이 싸늘하고 무관심한 관계에 대해 미뤄두는 까닭은 마음이 맞고 사이가 좋은 관계에 길을 터주기 위해서이다(356∼357쪽)

 

 

 

우정은 온대지방에서 가장 잘 자랄 식물과 같다.

사랑의 폭력은 증오의 그것만큼이나 무섭다. 사랑이 계속 이어지려면 조용하고 한결같아야 한다. 널리 알려진 사랑의 고통조차 사랑이 쇠퇴하면서 시작되는데, 누구나 기꺼이 연인이길 바랄지라도 실제 사랑하는 사이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쉽게 애욕에 빠지는 값싼 사랑 없이도 편히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우정을 나누기에 걸맞다는 한 증거이다. 참된 우정은 부드러우면서 슬기롭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자신들의 사랑이 이끄는 대로 따를 뿐, 어떤 다른 법칙이나 친절도 알지 못한다. 참된 우정은 미칠 만큼 엄청나지는 않더라도, 그 이후로부터 확립될 어떤 것을 나타내기에, 그것이 낡아지더라도 견딜 터이다. 이것이 더 참된 진실이고, 더 낫고 올바른 소식이다. 어느 때건 이런 일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을 터이니,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바로 이것이 여름과 겨울이 갈리는 온대지방에서 가장 잘 자랄 식물이다.

벗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벗끼리는 수수한 바닥에서 만난다. 즉 자연의 소박한 법칙을 따르면서 양탄자나 방석이 아니라 땅이나 바위에 앉는다. 그들은 소리치지 않고 만나고, 떠들썩한 슬픔 없이 헤어진다. 우정에는 전사戰士들이 소중히 여기는 그런 특성이 들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성문을 여는 것에 못지않은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동정이나 상호 위안이 아닌, 열망과 노력의 영웅적인 공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357∼358쪽)

 


 

우정은 상상하는 것만큼 친절하지 않다

우정은 상상하는 것만큼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즉 인간의 혈기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사람들의 성취, 기독교적 의무와 박애 같은 것들은 가볍게 여기는 반면, 전기처럼 공기를 깨끗하게 만든다. 고결한 천성에 도달하는 깨끗하고 참된 관계를 맺었음에도 호된 비극마저 생길지 모른다. 우정은 본디 자유롭고, 책임이 없으며, 아무 값없이 온갖 미덕을 실천하는 본질적으로 이교적인 사귐이다. 그것은 높은 경지의 공감이 아니라, 아직도 가끔씩 지켜지는 어떤 순수하고 고결한 사귐이다. 즉 먼 옛날부터 이어져온 짤막하면서 거룩한 사귐으로, 그 자체를 기억하면서 인류의 비천한 권리와 의무를 업신여기길 머뭇거리지 않는다.

우정은 티 없이 거룩한 특성들이 충분히 익어야 하고, 정중함과 먼 앞날에 대한 기대에 의해서만 존재해야 한다. 우리는 그저 선하기만 하고 아름답지는 않은 것을 사랑하지는 않는다-그런 것이 있다면 말이다. 자연은 열매 맺히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먼저 꽃을 피우지, 열매 맺힌 뒤에 그저 꽃받침만 자라게 하지는 않는다. 벗이 어떤 새로운 신약新約의 가르침에 따라 개종해서는 자신의 이교와 미신에서 벗어날 때, 그가 자신의 신화를 잊고 기독교인처럼 친구를 대하거나 대하려 할 때, 우정은 우정이길 그치고 자선이 되고 만다. (359∼360쪽)

 


 

벗은 셀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어떤 이가 더 사랑받을 만한 값어치가 있음을 알고 있다면, 그 아닌 다른 이에게 빠져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우정은 숫자와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 벗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벗을 세지는 않는다. 벗은 셀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더 많은 이들이 이 관계로 들어올수록-그들이 진정으로 들어온다면 말이다-그들을 한데 묶는 사랑의 질은 더욱더 귀하고 거룩해진다. 나는 둘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셋 사이에서도 개인적이면서 친밀한 관계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 사실 벗을 그지없이 많이 둘 수는 없다. 인생의 갖가지 관계에 보다 알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인정하는 미덕을 어느 정도까지는 스스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 속된 우정은 남을 물리치면서 좁아지려 하지만 고귀한 우정은 남을 물리치지 않는다. 바로 이처럼 흘러넘치고 흩어지는 사랑이 사회를 향기롭게 하고, 다른 나라의 아픔을 위로한다. 우정은 개개인을 바탕으로 하지만, 사실은 공적인 일이자 이득으로, 참된 벗은 한 가족의 가장 이상으로 나라에 커다란 기여를 하기 때문이다.(360∼361쪽)

 

 

 

가장 좋은 사이는 침묵 깊은 곳에 묻혀 있는 사이이다

우정에서 단 한 가지 위험은 언젠가는 끝이 날지 모른다는 점이다. 우정은 토박이식물인데도 무척 민감하다. 자신의 자아마저도 잘 깨닫지 못하는 그런 조그마한 비열함에도 상처를 입는다. 자신의 흠집이 벗에게서 드러나는 그런 흠집을 끌어당긴다는 점을 벗에게 일러줘라. 의심하게 되면 그 의심이 사실로 드러난다는 변치 않는 법칙이 있다. 우리는 좁고 치우친 소견에서 벗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벗이여, 나는 네가 이런저런 정도면 만족할 것이다, 라고. 길이 변치 않는 참된 우정을 위해서는 너그럽고, 고르고, 슬기롭고, 귀하고, 꿋꿋한 기운이 늘 흘러넘쳐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벗들로부터 자신의 좋은 점을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은근히 불평하는 말을 듣곤 한다. 실제로 내가 그런지 아닌지는 그들에게 말해주지 않겠다. 그들은 좋은 말과 행동을 할 때마다 공식적으로 감사 표시라도 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런 말과 행동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빈틈없이 값어치가 매겨졌다. 어쩌면 당신의 침묵이 가장 섬세한 인정일지 모른다. 인간이 결코 말해서는 안 되는 어떤 것이 있고, 그런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편이 훨씬 좋다. 우리는 참으로 숭고한 전갈을 들으면 그 순간 오로지 침묵으로 귀를 기울인다. 가장 좋은 사이는 그저 침묵을 지키는 사이가 아니라,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게 침묵 깊은 곳에 묻혀 있는 사이이다. 서로 얼굴조차 모를 수도 있다. 사람끼리의 사귐에서 비극은 말을 오해했을 때가 아니라, 침묵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시작된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도 그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당신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무슨 값어치가 있겠는가? 그런 사랑은 저주나 다를 바 없다.

자신의 침묵이 벗의 침묵보다 늘 뜻이 깊다고 생각하는 그는 도대체 어떤 부류의 벗인가? 얼마나 미련하고, 방정맞고, 당치 않기에 침해한 쪽은 오직 당신뿐이라는 듯 그렇게 행동하는가! 자신의 벗이 언제나 같은 까닭에서 불평을 말하지는 않는가? 벗들이 이따금 내게 호들갑스럽게 말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내가 무엇을 듣는지 그들은 알지 못하고, 말한 그들 자신도 무엇을 말했는지 깨닫지 못한다. 나는 그들이 기대했던 말이나 그 비슷한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자주 실망시키곤 한다. 나는 벗을 만날 때마다 이야기를 나누지만, 내가 기대하는 사람, 즉 귀가 달린 사람은 그가 아니다. 그들은 당신더러 차갑다고 불평할 것이다. 야자열매를 까뒤집으려는 오 그대들이여, 내가 다음번에 눈물을 흘리게 되면 그대들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주겠다. 어찌 보면 참된 관계란 말과 행동인데도, 그들은 이런저런 말과 이런저런 행동을 해주길 바란다. 이런 일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것을 알려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느낌을 털어놓기 꺼려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데, 그것은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그런 애정의 증거를 달라고 조르는 그들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361∼362쪽)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려 하지 말고, 내가 어디를 보는가를 보고, 더 멀리까지 본다면

나는 내 천성에 걸맞으면서 내게 동등한 대우를 바라는 벗과 동행하길 바란다. 그러한 벗은 늘 치우침 없이 너그러울 것이다. 이보다 못한 어떤 관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자살행위이고, 좋은 관계들을 타락시킨다. 나는 내 성취보다는 내 포부를 사랑하고 높이 쳐주는 사람을 더 소중히 생각하고 믿는다.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려 하지 말고, 내가 어디를 보는가를 보고, 더 멀리까지 본다면 정녕 나는 당신과 동행함으로써 더욱더 나아질 것이다. (364쪽)


 

 

이해가 모자란 것은 애정의 온갖 미덕으로도 깁기 어려운 흠이다

당신이 실제로 벗을 잘 알지 못하면, 우정이 필요치 않은 문제가 생길 때 질 낮고 변변찮은 기여 말고는 벗을 도울 일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어떤 사람과 사회적, 영적 이유로, 무척 가깝게 지내는데, 그는 내게 어떤 실무능력이 있는지 모른다. 우정이 필요치 않은 문제에서 그가 내게 도움을 구할 경우에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하기에 그 문제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내 능력을 쓰지 않고 나의 일손만을 쓴다. 나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 중에서 판단력이 아주 뛰어나면서 자신의 재능이 모자랄 때는 다른 이의 재능을 쓸 줄 알며, 언제 상대를 보살피지 않고 내버려둬도 좋은지를 잘 아는 사람이 있다. 모든 품꾼이 이야기하듯, 그의 일을 해주게 되면 좀체 없는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이와는 다른 대우를 받게 되면 대단히 큰 고통을 느낀다. 그것은 무척 다정하고 높은 사귐을 갖고 난 후에, 좋은 뜻에서이기는 하나 벗이 당신을 망치처럼 사용하여 당신 머리로 못을 박아 넣는 것과 같다. 당신은 그의 좋은 벗일 뿐 아니라, 꽤나 유능한 목수여서 그를 도와 즐겁게 망치질을 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이해가 모자란 것은 애정의 온갖 미덕으로도 깁기 어려운 흠이다. (366쪽)

 

 

 

우정은 자신도 모르게 너그러워지고 자유로워지는 보람이 있어야 한다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이를 벗함은 자신의 미덕을 벗함과 같다. 우정에는 이 밖에 다른 뜻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벗이 자신의 악덕과도 사귀길 바란다. 내 벗 중에는 내가 그릇된 줄 뻔히 아는데도 옳다고 해주길 바라는 벗이 한 사람 있다. 하지만 우정이 내게서 눈을 앗아가고 낮을 어두워지게 한다면 근처에는 얼씬하지 않겠다. 우정은 자신도 모르게 너그러워지고 자유로워지는 보람이 있어야 한다. 참된 우정은 참된 슬기를 가져다준다. 우정은 어두움과 어리석음에 기대지 않는다. 분별력의 결여가 우정의 요소가 될 수는 없다. 벗의 미덕을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은 벗의 흠집 또한 그만큼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누구보다도 벗을 미워할 건전한 권리가 있다. 흠집은 그것과 통하는 미덕으로 기워지게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흠집은 흠집이고, 실제보다 여러모로 두드러지게 보일지라도 흠집이기에 구실을 붙일 나위가 없다. 나는 비판을 참아내고 아첨에 우쭐하지 않으며, 재판관을 꾀어 제 편으로 만들려 하지 않고 언제나 자신보다 진리가 사랑받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만난 적이 없다.(367쪽)

 


 

나는 벗들을 길들이느니 차라리 하이에나를 길들이겠다

두 여행자가 사이좋게 길을 가려면 둘 다 비슷한 정도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옳게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둘이 동행하는 길이 그리 즐겁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은 장님과도 유익하고 즐겁게 길을 갈 수 있다. 그가 예의에서 벗어나지 않고, 당신이 경치를 이야기할 때 자신은 장님이지만 당신은 볼 수 있음을 잊지 않고, 당신 또한 그가 시력을 잃었지만 청각은 더 뛰어날지 모른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둘이 오랫동안 동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 장님과 시력이 좋은 사람이 함께 걷다가 벼랑 끝에 이르렀다. 시력이 좋은 사람이 "조심하게나, 여기는 가파른 절벽이니 이리로는 갈 수가 없네"라고 말하자, 그 장님은 "내가 더 잘 아네"라고 말하면서 발을 내디뎌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더없이 참다운 친구 사이라도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모조리 말할 수는 없다. 불평하느니 차라리 영원히 작별을 고하는 편이 낫다. 불평은 너무나도 근거가 확실하여 입 밖에 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둘이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느 한쪽이 상대의 흠집을 심각하게 지적하면 그 지적이 신랄할수록 서로의 오해는 더욱더 깊어지게 마련이다. 설사 온전히 우정을 맺는 데 방해가 될지라도 늘 존재하는 기질상의 차이는 영원히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이다. 자신의 행위 전체로 타이르고 격려해야 한다. 사랑 말고는 어떤 것도 둘을 화해시길 수 없다. 설명해야 하고 적처럼 흥정하게 되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된다. 누가 벗에게 용서를 빌겠는가? 벗끼리의 사죄는 태양이 떠오르면 다시 사라지고 마는 이슬이나 서리와 같다. 사람은 누구나 진심으로 인정을 베풀어야 함을 알고 있다. 설명의 필요성에 대해 한 마디만 더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죄가 씻기겠는가 말이다.

참된 사랑이라면 하찮은 일로 다투지 않고, 서로 익히 아는 잘못은 쉽게 풀려 나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겉으로는 하찮게 보일지라도 결코 얕볼 수 없는 심각하고 오래가는 까닭들이 있다. 그런 까닭이 있다면 무지개가 아무리 아름답고 비가 갠다는 틀림없는 조짐이라 해도 맑은 날씨를 영원히 약속하지 못하고 잠깐에 그치고 말듯, 눈물에 쉼 없이 금박을 입히는 애정의 빛에도 다툼은 여전히 되풀이된다. 내가 잘 아는 두어 쌍이 바로 이런 처지에 있는데, 한순간의 하찮은 문제 말고는 충고가 이로운 경우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한쪽은 상대가 모르는 것을 잘 알지 모르나, 아무리 친절하게 일러주더라도 그 충고가 보람을 거두지는 못한다.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물리쳐야 한다. 나는 벗들을 길들이느니 차라리 하이에나를 길들이겠다. 그는 어떤 광산 장비로도 다룰 수 없는 광물질과 같다. 벌거벗은 야만인은 관솔로 떡갈나무를 넘어뜨리고, 손도끼를 바위에 문질러 바위를 닳게 한다. 그러나 나는 벗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라서든, 바뀌기를 바라서든 벗의 인격에서 조그마한 한 조각이라도 떼어낼 수 없다.

연인 사이라도 온전히 맑고 믿을 만한 사람은 결국 없음을 알게 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악령이 있어 길게 보면 어떤 범죄라도 저지를 수 있다. 그렇지만 어느 동양학자가 말하듯, "선인善人끼리도 우정이 끊길 수 있으나, 그들의 원칙은 변치 않고 남아 있다. 연꽃줄기도 꺽이나, 그 안에 섬유질은 이어져 있듯."(367∼369쪽)

 

 

 

벗은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이다. 그는 나의 실제 형제이다

사랑이 있는 어리석음과 서투름이 사랑이 없는 슬기와 재간보다 낫다. 어떤 경우에는 점잖고 치우치지 않으면서 위트와 재능이 있고, 재기가 번득이는 대화도 있으며, 선한 뜻까지도 함께 지니고 있는데도 가장 거룩한 인간적 능력은 안타깝게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사랑이 없는 삶은 타지 않는 해탄骸炭이나 재와 같다. 페르시아 대리석이나 설화석고에 못지않게 순수하고, 토스카나식 빌라처럼 우아하고, 나이아가라 폭포에 뒤지지 않는 웅장한 성격을 지녔다 할지라도 사람을 청해놓고서 우유 섞인 포도주를 내놓지 않는다면, 기쁘게 맞아주는 고트족이나 반달족을 찾아가는 편이 차라리 더 나을 것이다.

벗은 나와는 다른 종족이나 가문이 아니라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이다. 그는 나의 실제 형제이다. 나의 본성과 마찬가지로 벗의 본성도 저쪽에서 나를 더듬어 찾고 있음을 나는 안다. 그는 내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다. 『비슈누 푸라나』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고결한 우정을 맺기까지 통틀어 일곱 발짝이면 충분하다. 게다가 나는 그대와 더불어 살아왔다.

우리 두 사람은 이렇게 오랫동안 같은 빵을 나누고, 같은 샘의 물을 마시고, 사시사철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같은 열기와 추위를 느끼고, 같은 과일을 즐겨 먹으며 기운을 되찾아왔다. 서로 바탕이 다른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어찌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는가!(369∼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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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07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른 냇물을 타고 형과 둘이서 조용히 삶을 누리면서
이 아름다운 이야기 조곤조곤 떠올렸겠지요.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살가운 형제나 부모,
또는 사랑스러운 님과
숲속 냇물을 천천히 흐르며
숲노래 듣는다면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새롭게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oren 2013-12-09 10:50   좋아요 0 | URL
저도 어릴 땐 우리 동네를 빙 둘러 흐르던 '강줄기'를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꼬박 '강'과 함께 놀았던 기억이 가득합니다.

<소로우의 강>을 읽으면서 어릴 적 그 시절들이 손에 잡힐듯이 떠올라,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었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아름다운 삶을 누리는 이들이 어딘가엔 분명 살고 있으리라 저도 믿습니다.

페크pek0501 2013-12-07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정도 지키기 위해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무조건 사귄 지 오래되었다고 해서 우정이 지켜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위의 글은 하나하나 곱씹어 읽어야 할 듯해요. ^^

oren 2013-12-09 10:57   좋아요 0 | URL
'우정'에 대해 쓴 글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소로우 님의 '우정'에 대한 글은 정말 깊디깊은 생각에서 우러나오는 글이어서 정말 감동적이더라구요. 말을 너무 잘 하기로 소문난 키케로의 '우정에 대하여' 쓴 '윤기나는' 글이나, 몽테뉴의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우정에 대한 멋진 글'보다 소로우의 글이 제게는 훨씬 더 가슴깊이 다가오더라구요. 앞으로도 가끔씩 '우정'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될 때, 이 글을 다시금 읽어볼 요량으로 '기나긴 내용'이지만 아낌없이 옮겨 적어 봤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