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생물에게는 단 한 가지의 생물학만으로 충분하다. 생물학을 음악에 비유해 볼 때, 지구 생물학은 단성부, 그리고 단일 주제 형식의 음악만을 우리에게 들려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수천 광년 떨어진 저 먼 곳의 생명은 우리에게 어떤 형식의 음악을 들려줄 준비를 해 놓고 있을까 무척 궁금하다. 풀피리 하나로 연주되는 지구 생명의 이 외로운 음악 하나가 우리가 우주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음악일까? 우주 생물이 들려줄 음악은 외로운 풀피리 소리가 아니라 푸가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우주 음악에서 화음과 불협화음이 교차하는 다성부 대위법 양식의 작품을 기대한다. 10억 개의 성부로 이루어진 은하 생명의 푸가를 듣는다면, 지구의 생물학자들은 그 화려함과 장엄함에 정신을 잃고 말 것이다.”
 - 칼 세이건

 * * *

위의 인용글은 유명한 과학책『코스모스』의 2장 ‘우주 생명의 푸가’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이다. 그런데 그가 '우주의 아름다움'을 구태여 음악이라는 매우 독특한 예술에 빗대어 설명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우선은 그가 무엇보다도 '음악'을 가슴깊이 사랑했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또다른 이유는 '음악' 자체가 '지구와 우주'를 비유적으로 설명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예술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자연과학과 음악에 두루 깊은 지식과 놀라운 혜안을 지녔던 쇼펜하우어가 '음악'에 대해 설명한 대목을 상기시킨다. 칼 세이건의 아름다운 설명이 얼마나 철학적인 깊이를 더한 것인지를 새삼 느끼게 해준다.

 

 

음악이 세계에 대해 모방 또는 재현이라는 관계에 서 있다는 점

음악과 세계에 대한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는 묘사와 묘사되는 것의 관계, 모상과 원상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것을 다른 예술과의 유사성에서 추론할 수 있다. 그 밖의 예술은 모두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음악이 우리의 마음에 주는 효과도 이것들의 효과와 대체로 같지만, 단지 음악 쪽이 더 강하고 빠르고 필연적이며 더 확실하다는 차이가 있다. 음악은 누구에게나 곧 이해되고, 그 형식은 숫자로 표시할 수 있는 일정한 규칙으로 바뀐다. 음악은 이 규칙에서 떠날 수 없으며, 만약 떠난다면 음악임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음악에는 인정되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음악의 묘사적인 관계는 극히 절실하고, 무한히 진실하며, 핵심을 찌른 관계여야 한다. 그러나 음악과 세계의 비교점, 즉 음악이 세계에 대해 모방 또는 재현이라는 관계에 서 있다는 점은 깊이 감추어져 있다. 어떤 시대에도 사람들은 음악을 영위하면서도 이 점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음악을 직접 이해하는 데 만족하여, 이 직접적인 이해를 추상적인 개념으로서 파악하는 것은 단념해 버린다.(788쪽)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중에서



그런데 칼 세이건의 문장을 읽으면서 우리는 한 가지 예상밖의 어려움과 맞닥뜨린다. 그의 설명에 따라 우리가 가령 우주선을 타고 드넓은 우주공간으로 나아가 실제로 '우주 음악'을 얼마쯤 감상한다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귓가에 어떤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지 잠시나마 거기에 정신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 때 들려오는 (듯한) 그 음악 소리의 '화려함과 장엄함'에 정신을 잃기도 전에, 도대체 칼 세이건이 말한 그 '다성부 대위법 양식'의 푸가라는 그 음악이 어떤 것인지부터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주 음악의 화려함과 장엄함을 맛보기도 전에 그 '음악 양식'의 난해성이라는 전혀 엉뚱한 장벽 때문에 도리어 머리가 어지럽게 되는 것이다.

내가 굳이 어느 천문학자의 문장 한 대목을 가지고 이렇게 복잡하게 '의식의 흐름'을 좇아가며 얘기하는 까닭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베토벤의 현악 4중주'가 끝없이 귓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이 영화를 얘기하면서, '음악의 형식'이 던져주는 독특한 '어려움'을 빼놓고는 뭔가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천문학자로는 보기 드물게 유명했던 칼 세이건은 어려서 부터 음악적 재능이 특별히 뛰어났던 인물이다. 평생 동안 음악을 매우 사랑했고 늘 음악과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다성부 대위법' 작품 만큼은 맨귀로 듣기에는 무언가 성에 차지 않았던 점이 있었던 듯하다.

그는 하버드 의대에서 마약의 효과를 깊이 연구하던 그의 친구가 쓴 책에 '익명의 경험자'라는 신분으로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을 때 기어코 자신의 마약 경험담을 털어놓고 만다. 마약을 통한 황홀경 상태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었을 때 '처음으로 3옥타브의 화성을 분명히 구분해서 들을 수 있었고, 여러 성부로 이루어진 대위법 작품에서도 각각의 선율을 완벽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그만큼 클래식 음악은 어딘가 모르게 예민한 정서적 감응 능력을 요구하는 영역이며, 나처럼 무딘 정신의 소유자에게는 더더욱 쉽게 그 아름다움을 함부로 드러내주지 않는다는 것도 별로 이상할 것은 없어 보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마지막 사중주'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이 영화의 '주제음악'에 대해서는 가슴 깊숙히 느껴지는 감동을 제대로 붙잡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음악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영화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인 '베토벤 현악 4중주 제14번 Op.131'을 제대로 감상할 줄도 모르면서 영화를 보고 난 이야기를 쓰는 일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래도 나는 이 영화에 대해 '음악 감상이 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뭔가 여운이 남아서 내가 할 수 있는 얘기가 뭐 좀 없을까 하고 궁리해 본다.

음악영화가 주는 장점 가운데 하나는 명백히 '영상에 얹어진 음악'은 그 감동이 훨씬 더 배가되는 점에 있지 싶다. 관객을 감동시킬 생각에만 골몰하는 영화제작진들이 '음악과 영상의 절묘한 결합'이 제공하는 커다란 감동을 놓칠 리가 없다. 연주자들의 경쾌한 손놀림과 몸짓은 보는 것만으로도 음악이 저절로 춤을 추고 선율이 가슴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도와 준다. 이런 사정은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저 수십 장의 사진을 책장 넘기듯이 보는 것보다 '멋진 음악이 배경으로 깔린 슬라이드쇼'를 통해서 볼 때 그 사진속 풍경과 인물들은 또 얼마나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인지 놀랄 지경이다.

이 영화에서 시종일관 흐르는 음악은 베토벤의 생애 말기에 작곡한 '후기' 현악 4중주 여러 작품 가운데 7악장으로 이루어진 제14번 곡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 다섯 곡(Op.127, Op.130, Op.131, Op.132, Op.135) 가운데 '일부'를 이루는 작품으로서 반드시 '다섯 곡'의 전체를 '한 작품'으로 조망할 수 있어야만 그 깊디깊은 음악을 제대로 맛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그 심오한 깊이를 나같은 사람이 어찌 제대로 느껴볼 도리가 있겠는가.

베토벤이 이들 작품을 쓴 시기는 불후의 걸작인 '교향곡 9번'까지도 작곡을 마저 끝내고 난 뒤 자신의 삶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이었는데, 그가 최후의 예술적 열정을 쏟아부어 자신의 생명과 맞바꾸다시피 만들어낸 작품이 바로 후기 현악 4중주 다섯 곡이다. 그런만큼 '베토벤 만년 예술의 심오함'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는 작품이며, 특히 이 가운데 《마지막 사중주》에 등장하는 작품은 베토벤 스스로 자신의 현악 4중주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앞둔 슈베르트가 연주회장에서 이 곡을 듣고 너무나 흥분해서, 함께 갔던 친구가 걱정을 했다는 기록으로도 더욱 유명해진 작품이다.

베토벤 만년의 깊이 있는 사색과 차원 높은 고매함이 엿보인다는 이 작품이 '마지막 사중주'로 번역된 건 조금 아쉽다. 마지막이란 형용사는 늘 극적인 느낌을 고조시킬 수는 있겠지만 뒤를 없애버리는 '여운 없는' 느낌 때문에 그리 달갑지 않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은퇴할 수밖에 없는 어느 노쇠한 첼로 연주자에겐 '마지막'일 수 있겠지만 다른 세 사람의 연주자에겐 또다른 사중주의 시작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원제(A Late Quartet)만 보면 '마지막'으로 번역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영화를 본 나로서는 왠지 '뒤늦은' 혹은 '만년의' 느낌을 주는 제목이 더욱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마지막 사중주'가 끝나더라도 현악 사중주는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 첼리스트 '피터'에게만 마지막이었을 뿐.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25년 씩이나 별다른 흔들림없이 '합주 연주'를 해 오던 어느날, 첼로를 맡은 노년의 연주자 피터에게 찾아온 파킨슨 병은 '잠재해 있던 여러 문제들'을 한꺼번에 불러오는 촉매 역할을 한다. '언젠가는 닥쳐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우리는 가끔씩 너무 오랫동안 외면하며 살아간다. '낡은 기계'처럼 더 이상 원할하게 작동하기 어려운 '육체적 노화'는 오래 살아가고픈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그런 상황이 그렇게 빨리 닥쳐 오지는 않을 거라고 애써 부정하거나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음도 사실이다.

아무튼 이 영화는 현악 사중주단의 최고참 리더에게 '뒤늦게' 찾아온 시련이 파생시키는 '여러 갈등들'의 전개가 그 중심을 이룬다. 첼리스트를 제외한 나머지 세 단원들은 줄리어드 음대에서 함께 공부한 동창생들인데, 25년 동안의 '평탄했던' 음악 생활과 가정 생활이 결코 매우 단단한 기반 위에서 지속되어 온 것은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재미있는 것은 베토벤이 (기존의 현악 4중주 형식에서 벗어나) 모두 7악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을 악장 사이의 휴식도 없이 '쉬지 않고' 계속해서 연주하게 한 뜻이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제1주제' 역할을 해 준다는 점이다. 그것은 쉽게 말해서 우리의 삶도 '도중에 악장이 바뀌거나 혹은 예상치 못한 여러 불협화음이 생기더라도' 결코 쉬지 않고 이어 나가야 한다는 측면을 빗대어 이야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파킨슨 병이 찾아온 이후에 미리 예정된 '현악 사중주' 공연을 앞두고 피터가 보인 행동들에 유난히 관심이 많이 갔다. 그리고 '더이상' 연주를 이어나갈 능력을 상실한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가운데 어느 미술관에서 '램브란트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저 늙은 나이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예술가의 강렬한 눈빛'을 몹시도 부러워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노년에 찾아온 병은 순순히 받아들일 만한 일이다.

철 맞추어 생명을 내놓지 않는 자에게

세월이 그들과 오래 교제하는 자들에게 주기로 되어 있는 여러 선물들 중에도 내가 수락할 수 있는 것을 그들이 골라 주었더라면 좋았을 성싶다. 그들은 내가 어릴 적부터 가장 흉측하게 생각하던 것을 줄 수는 없을 테니까. 이것은 노년기에 일어나는 모든 재앙들 중에도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이었다. 나는 앞으로 나가는 것이었고, 이렇게 먼 길을 가다가는 결국 어떤 불쾌한 일에 걸리고 말 것이라고 혼자 여러 번 생각했다. 나는 이미 떠날 시간이 되었다고, 외과의들이 신체의 어느 부분을 끊어 낼 때의 규칙을 따라서 이 인생을 생짜로 그 알맹이에서 잘라 내야 하는 것이고, 철 맞추어 생명을 내놓지 않는 자에게 대자연은 아주 호된 높은 이자를 물리는 습관이 있다고 어지간히 느끼고 있다고 주장했다.
 - 몽테뉴, 『수상록』中에

 

 

이제 막 오십대 초반에 접어든 나머지 세 사람의 단원들에겐 여전히 '사랑'과 '지배'가 그들의 삶을 뒤흔들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4중주단의 유일한 여성 멤버인 비올리스트 '줄리엣'은 다른 세 사람의 단원들과 다소 복잡한 관계에 놓여 있다. 스승과 제자, 옛 애인, 그리고 부부 사이가 그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래 전에 이미 굳어진 그들의 ''든든한 관계'가 새로운 갈등 국면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화의 불씨'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25년 동안 제2바이올린을 맡아온 착한 남편 '로버트'의 숨겨진 욕망에서부터 시작된다.

언제나 제1바이올린의 리드를 졸졸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자신의 역할'이 너무나 싫은 로버트는 단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을 결코 굽히지 않는다. 자신도 이 기회에 '제1바이올린'을 연주해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1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친구 '다니엘'은 자신의 친구 로버트가 제1바이올린을 연주할 성격이 못 된다고 반박한다. 아내 줄리엣의 견해도 마찬가지이다. 상심한 로버트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아내와 그 아내의 옛 애인이자 자신의 친구인 다니엘이 '합창하듯' 자신을 '그 자리에 머물도록' 강요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분해 한다. 언제나 완전한 지배나 소유는 우리의 욕심과는 거리가 멀게 마련인데, 로버트는 워낙에 착하게 살아온 남자여서 여태껏 별로 느껴볼 기회조차 없었던 '주변 인물들과의 거리감'이 갑자기 크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그런 상실감에 결국 '사고'를 치게 된다.

늘 완벽한 연주만을 추구하는 '다니엘'의 삶은 한편으로는 존경받을 만하지만 또다른 한편으로는 고독하다. 그런 그에게 옛 애인이었던 줄리엣의 딸인 알렉산드라는 바이올린을 매개로 하는 '스승과 제자' 사이지만 단지 그런 상태로 계속 머물지는 않는다. 흔히 그렇듯 이들 사제지간이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뒤늦은' 혹은 '너무 이른' 사랑의 대상도 너무 가까이에서 찾아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의 일치된 감상평 가운데 하나가 '음악은 참 좋은데....'에 뒤이어 나오는 '한편의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는 얘기이다. 옛 애인의 딸을 가르치다가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두 인물과 '홧김에 조깅 파트너이자 댄서로 일하는 여성과 외도'를 벌이는 로버트의 애정행각을 두고 하는 말인데, 나로서는 '막장 드라마'를 별로 보지 못해서 그럴지 몰라도 그들의 연애가 그리 부자연스럽지는 않아 보였다. '사랑' 만큼 우리의 모든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 또 어디 있으며, 오래도록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엿보고 파고드는 일이 또 무엇이 있길래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런 에피소드를 가지고 흥분하는지 모를 일이다.


사랑은 인간이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마지막 목적

연정은 겉보기에는 별나라 같아도, 사실은 성욕이라는 본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니, 이 본능이 특수화된 것이며 개체화된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사랑이 희곡이나 소설에서뿐 아니라 실제 사회에서(거기서는 자기보존 본능과 함께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며, 모든 동작 중에서 가장 활동적이다) 연출하는 중요한 역할을 관찰하면, 언제나 모든 생애에서 가장 젊은 시절, 즉 청춘시절 뭇사람들의 정력과 사고를 거의 절반쯤 강제로 동원한다. 또한 사랑은 인간이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마지막 목적으로서, 심지어는 가장 중요한 사건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며, 가장 진실한 과업을 중단시키고, 때로 가장 위대한 정신도 흐리게 하며, 외교적 교섭이나 학술연구에 몰두할 때도 체면불구하고 연출하여 장관의 문서철이며 철학자의 원고 속에 연애편지나 머리카락을 끼워넣게 한다. 또 수많은 나날 시끄러운 사건에 가장 악질적으로 사주한 사람이나 동지끼리 맺은 가장 친밀한 사이도 끊어버리고, 견고한 사슬도 풀며, 허다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생명과 건강과 부와 지위와 행복을 빼앗아갈 뿐더러, 정직한 사람을 철면피로 만들고, 충신을 파멸시키려 한다. 이 모든 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토록 소란을 피우고 애쓰고 고민하며 불행에 빠지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외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듯 하찮은 일이 그처럼 큰 파문을 일으키며 안정된 생활에 소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인가?

진리 탐구 정신이 투철한 사상가라면 이 물음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내릴 수 있다. 즉, 그것은 결코 작은 일에 관련되어 있지 않으며, 그 중대성은 그것을 추구하는 경우 맞닥뜨리게 되는 진지하고 열렬한 모습에 맞먹는다.

정사의 목적은 비극으로 나타나든 희극으로 나타나든 인생의 여러 가지 목적 가운데 가장 엄숙하고 중요한 것이며, 누구나 끈질기게 추구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기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일은 다음 세대의 조정이라는 중대한 일이며, 다음 무대 위에 우리를 대신해 등장할 인원은 이같이 사소한 장난처럼 보이는 정사에 의해 그 존재와 양상이 결정된다.

 - 쇼펜하우어, 『사랑의 형이상학』中에서


 

예술의 형식 가운데 음악이 독특할 수 있다면, 음악의 형식 가운데는 역시 '푸가'가 그 '독특성' 면에서 앞장을 설 만한 위치에 있다고 본다. 칼 세이건은 '보이저 우주비행계획'에서 외계 생명체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떠맡았다. '귀가 없을지도 모르는 외계인'에게 음악을 보낸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지 모르겠으나, 그는 우주에 음악을 보내자는 계획을 고집스럽게 밀어붙였다고 한다.


(보이저 금제 음반)

골든디스크에 실린 27곡의 음악 중에는 베토벤의 후기 현악 사중주 가운데 한 곡도 빠지지 않았다. 그의 선택기준은 '적어도 몇 곡은 우주의 고독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과 '추상적인 구조를 지닌 곡들도 선택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개념있는 동물'인 인간의 존재를 알아달라는 셈이다. 이를 위해 선택된 음악이 바로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3번과 바흐의 대위법 작품의 '푸가'였다.
 
1977년 8월에 발사된 보이저 1호는 2003년에 태양계를 벗어나 앞으로 4만 년 뒤에는 다른 행성계에 접근하게 된다고 한다. "보이저호는 음악과 사랑이 흐르는 작은 행성의 메시지를 간직한 채 태양계의 행성들을 지나 광활한 우주의 바다로 항해하고 있다. 두 대의 우주선은 시속 4만 5천 마일의 빠른 속도로 머나먼 별들과 미지의 운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베토벤의 현악 4중주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위대한 걸작'의 지위를 잃지 않으며 중단없이 연주될 것으로 믿는다. 영화 한 편을 두고 내 이야기가 너무 먼 곳까지 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다시 우리의 삶으로 되돌아 오자. 우리의 삶에서 '위대한 걸작'은 무엇일까. 몽테뉴의 글에서 한 가지 대답을 찾아보는 것도 그리 어리석지는 않아 보인다.


적당하게 살아가는 일

우리의 영광스럽고 위대한 걸작은 우리가 적당하게 살아가는 일이다. 지배한다, 재물을 모은다, 건설한다는 따위의 모든 일들은 기껏했자 부수적이며 부차적인 데 지나지 않는다.

나는 한 군대의 장군이 방금 공격하려고 하는 돌격구(突擊口) 아래에서, 친구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서 마음을 터놓고 한가로이 담소하는 장면이나, 천지가 자기와 로마의 자유에 반대해서 음모를 꾸미고 있는 때에 브루투스가 순회 근무에서 물러나와 밤의 몇 시간을 안심하고 사학자 폴리비오스를 읽으며 주(註)를 달던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다. 하찮은 심령들이나 자기 일의 무거운 부담에 눌려 지내며, 그런 일에서 완전히 풀려나와 채워 두었다가 다시 잡아서 처리할 줄 모르는 것이다.

오오, 나와 함께 가장 독한 시련을 겪어 온 용감한 전사여,
오늘은 그대 근심을 술잔에 담그라.
내일 우리는 망망한 대해로 배 띄워 나가리라.
                                                                       (호라티우스)

농담으로건 진담으로건, 소르본 대학의 신학주(神學酒)와 향연은 속담에도 오르지만, 그들이 오전은 유익하고 근직하게 학문의 단련에 보낸 만큼, 저녁 만찬은 태평하고 더 유쾌하게 든다는 것은 지당한 일이라고 본다. 다른 시간들을 잘 사용했다는 생각은 식탁에서 더 정당하고 맛있는 향미가 된다. 현자들은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저 두 카토가 도덕을 위해서 남이 모방할 수 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에 놀라는 바이지만, 그들의 그 어색할 만큼 엄격한 심정은 그들 학파의 교훈을 따라서 인간 조건의 법칙과 비너스와 바쿠스의 법칙에도 유순하게 복종하며 그 법칙들을 즐겼던 것이다. 그들 학파는 완벽한 현자에게, 인생의 다른 모든 의무와 마찬가지로 타고난 탐락의 습성에도 똑같이 기술이 있고 이해가 깊기를 요구하고 있다. "미묘한 판단력을 가졌으면, 미묘한 구미도 가져야 한다."(키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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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3-08-16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오렌님의 리뷰를 보니, 이 영화를 안 볼 수 없군요!
좋은 영화를 멋지게 리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oren 2013-08-16 17:21   좋아요 0 | URL
이 영화 상영관이 그리 많지 않던데 혹시나 종영되지나 않았을까 염려됩니다.
얼른 찾아보시고 아직도 상영중이라면 꼭 '개봉관'에서 보시길 바랄께요~

야클 2013-08-16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글 쓰실 때의 엄청난 양의 reference에 놀랍니다. ^^

oren 2013-08-16 17:30   좋아요 0 | URL
'푸가풍'의 '베토벤 현악 4중주'가 보이저호에 실려 '머나먼 여행길'에 올랐다는 얘기를 여러 곳에서 읽은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마침 이 영화가 현악 4중주 14번을 주제로 하고 있어서 저도 놀랬습니다.

1FM에서 새벽 1시에 들려주는 '한밤의 실내악'에서도 가끔 들었던 곡인데, 요즘 이 영화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1FM에서 자주 듣는 호사를 누리기도 합니다.

1FM 오후 2시에 방송되는 '명연주 명연반'에서도 최근에 방송된 적이 있었는데, '라디오 다시듣기'로 7.29(월) 방송분을 찾아보시면 'Alban Berg Quartet'의 멋진 연주를 들으실 수도 있답니다. ㅎㅎ

Jeanne_Hebuterne 2013-08-17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잘 보았는데 오렌님의 서재에서 이 영화와 음악 이야길 읽으니 반가워서 흔적 남겨요.

막장 드라마 때문에 저역시 욕설을 퍼붓고 싶은 심정이긴 하였습니다만(퍼부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옵고), 음악은 그것과는 별개로 참 좋았어요. 이야기와 소리를 섞은 영화로 보자면 아름다웠지만 이야기와 소리 사이의 균형이 약간 아쉬웠거든요. 그렇지만 연주자의 입장이 얽히는 그 시선을 표현하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과 사운드 싱크는 정말 놀라웠습니다. 아마도 이 영화로 인해 14번을 찾아듣는 많은 이들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고요.

언젠가 인류가 우주에 흘려보낸 어떤 소리들 가운데엔 바흐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서 들은 적 있었어요. 무한과 유한이 만나는 그 지점이 깊을 것 같았는데, 오렌님의 멋진 글로 다시금 그 침묵의 소리를 떠올려 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주말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


oren 2013-08-19 15:34   좋아요 0 | URL
음악은 그것과는 '별개로' 참 좋았다는 말씀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요. Jeanne님처럼 예민한 감각을 가지신 분들은 배우들의 거짓 연주 때문에 영화에 완전히 몰입하는데 다소 애를 먹을 수도 있었지 않을까 하고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Jeanne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감독의 역량' 때문에 '연주자들의 숨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건 기대 이상의 놀라운 수확이었던 것 같아요. 가령, 솔로와 합주단원이나 교향악단원들 간의 '연주 방식' 혹은 '삶의 방식'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다룬 부분과 '음악가를 부모로 둔 자식의 애환' 같은 데서 화장을 지운 '생얼'을 보는 느낌이 확 들더군요.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앞으로는 음악을 듣거나 연주회를 보러 갈 때에도 음악 뿐만 아니라 연주의 이면에 묻혀 있을 '그들의 삶'이 더욱 궁금해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klavier1561 2013-08-25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바로 영화 내내 어설픈 연주 장면이 거슬려 음악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1인 중의 하나입니다.. ㅎㅎ (음악을 전공했거든요) 그렇지만 영화에의 몰입도는 상당히 좋았는데 감독의 역량이 정말 돋보이는 것이었죠.

외국에 오래있다가 와서인지 저에겐 그런 사랑이 막장으로 보이지만은 않았지만, 우리의 정서로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게 되었어요. 반드시 윤리만을 따지기 이전에 서양인들은 자기의 순수한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요. 현실이라면 어떻게 끝났을지 알 수없지만 영화에서는 적어도 올바른 윤리쪽으로 결말을 짓는 영화들을 종종 보았습니다. 그들도 역시 기독교 윤리에 맞게 그런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믿고 있는 듯 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감정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실화들도 많이 접했었죠. 이야기가 두서 없네요.

oren 2013-08-26 09:52   좋아요 0 | URL
klavier님 반갑습니다. klavier님의 댓글을 읽어보니 '아는 만큼 보인다'는 속담과 비슷하게 '듣는 만큼 보인다'는 생각도 듭니다. 귀에 들려오는 음악이 눈에 보이는 영상과 어긋날 때, 관객뿐 아니라 영화배우들과 제작진들이 당혹스러워 했을 풍경을 떠올려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해요.

저로서는, 그래도 수많은 연습끝에 저런 정도로 맞췄겠거니 했고, 빠르게 내달려가는 선율을 (음악가가 아닌) '배우의 어설픈 흉내'로 따라잡는 모습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여기며 '귀로만' 음악을 들으려 애썼더니 그런대로 봐줄 만하다 싶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