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이번에는 갈레리우스의 맹렬한 공격이 페르시아군 진영에 혼란과 경악을 불러일으켰다. 약간의 저항 끝에 끔찍한 대량학살이 벌어졌고 대혼란 속 부상당한 왕은(나르세스는 군대를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메디아 사막을 향해 달아났다. 정복자는 나르세스와 태수들의 호화로운 천막에서 막대한 전리품을 얻었다. 용감한 로마군이 그들의 우아한 사치품들을 보고 얼마나 촌스러운 무지를 드러냈는지를 보여 주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어떤 병사가 진주가 가득 든 반짝거리는 가죽 주머니 하나를 차지했다. 그는 주머니는 조심스럽게 간직했지만, 내용물은 던져 버렸다. 아무 쓸 데도 없는 물건은 값도 전혀 안 나가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나르세스가 입은 손실은 훨씬 더 애처로웠다. 군대를 따라왔던 여러 아내와 누이들, 자녀들이 이 패배로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갈레리우스는 비록 성품은 알렉산데르 대왕과 거의 닮은 점이 없었지만, 이번 승리 후에는 다리우스 왕의 가족에게 보여 주었던 저 마케도니아 왕의 관대한 행동을 본받았다. 나르세스의 아내와 아이들을 폭행과 약탈을 당하지 않도록 안전한 장소로 옮겨 놓은 다음, 각자의 나이, 성별, 왕족으로서의 신분에 따라, 관대한 적이라면 당연히 취해야 할 정중하고 친절한 태도로 대우했다.

 

동방 세계가 걱정스럽게 이 대전투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시리아에 강력한 감시 부대를 집결시켜 놓고 먼 후방에서 로마군 위력의 근원을 과시하면서 앞으로의 비상 사태에 대비해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것은 삼가고 있었다. 승전보를 듣자 곧 그는 자신이 직접 조언을 하여 갈레리우스의 오만을 억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국경 지대를 향해 짐짓 생색을 내면서 진격해 갔다. (…)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페르시아 대왕의 사신을 접견한 것도 이 도시에서였다. 나르세스는 최근의 패배로 위력, 아니 적어도 그 기세가 꺾여 있었으며, 로마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즉시 강화 조약을 맺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총애와 신임을 받는 신하 아파르반을 파견하면서 강화 조약을 교섭하거나 아니면 차라리 정복자가 강요하는 어떠한 조건이라도 수락하도록 일임했다. 아파르반은 회담을 시작하면서, 가족에 대한 관대한 처우에 감사한다는 왕의 뜻을 전하고 그 고귀한 포로들을 석방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는 나르세스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갈레리우스의 무용을 찬양하면서, 자기 종족의 모든 군주들보다 뛰어난 페르시아 왕에게 승리한 갈레리우스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페르시아의 대의명분은 여전히 정당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이번 분쟁을 두 황제의 결정에 일임한다는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하면서, 번영의 절정에 있는 두 황제가 운명의 변화무쌍함을 염두에 두리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아파르반은 발언을 마무리하면서, 동방의 우회를 예로 들어 로마와 페르시아 두 나라는 세계의 두 눈과 같아서 어느 한 쪽이 뽑히면 세계는 불구가 될 것이라고 했다. "과연 페르시아인다운 일이로다." 갈레리우스는 분노로 온몸을 떨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운명의 변화무쌍함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짐에게 태연하게 중용의 미덕을 강론하다니 과연 페르시아인다운 일이로다. 저 불운한 발레리아누스 황제께 그들이 어떤 온건함을 베풀었는지 상기하도록 하라. 그들은 그분을 속여서 패배시키고 오만무례하게 대했도다. 그들은 그분이 생을 마칠 때까지 수치스러운 포로 신세로 억류했다가, 돌아가신 후에도 그 시신을 영원히 모욕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갈레리우스는 여기서 말투를 부드럽게 하면서, 굴복하여 엎드린 적을 다시 짓밟는 것은 결코 로마인의 관습이 아니며, 이번 경우에도 페르시아의 가치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위엄을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넌지시 말해 주었다. 그는 아파르반을 물러가도록 하면서도 나르세스가 곧 황제들의 자비로 항구적인 평화와 처자식의 송환을 실현시킬 수 있는 조건을 통보받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 주었다.(455∼457쪽)

 

 

 

 * * *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부하 장군들의 빈틈없는 경계로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의 안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고 자부했지만, 유프라테스 강의 방어를 위해서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몸소 행군에 나서야겠다고 결심했다. (…) 그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에데사 성벽 부근에서 페르시아의 왕과 충돌했는데, 결국 샤푸르 왕에게 패하여 포로로 사로잡혔다. 이 엄청난 사건의 세부적인 내용은 모호하고 불완전한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희미한 단서를 참조해 볼 때, 이 로마 황제가 연달아 수많은 경솔한 행동과 과실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재난을 자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페르시아 군을 정면 돌파하려던 로마군의 격렬한 시도는 완패로 끝나고 말았으며, 월등한 병력으로 로마군 진영을 포위한 샤푸르 왕은 기아와 질병이 갈수록 맹위를 떨쳐 자신의 승리를 확실히 굳혀줄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고만 있었다. 머지않아 로마군 내부에서는 변덕스러운 불평분자들이 이 모든 재난의 원인이 발레리아누스 황제에게 있다고 비난을 하게 되었고, 불온한 소요 사태를 일으켜 즉각적인 항복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로마군은 치욕스럽게도 퇴각을 허가받기 위해 막대한 양의 금을 내겠다는 제안까지 했다. 그러나 자신이 우세하다고 확신한 페르시아 왕은 이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사신들을 억류한 다음 전투 대형을 갖춰 로마군의 방벽 바로 아래까지 진격하여 로마 황제와의 직접 협상을 주장했다. 발레리아누스는 자신의 생명과 위엄을 적의 신의에 내밭겨야만 하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회담은 예상했던 대로 끝을 맺었다. 황제는 포로가 되었고 겁에 질린 그의 군대는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322∼323쪽)

 

 

 * * *

 

 

흔히 증오나 아첨을 표현하는 통로에 지나지 않는 역사의 목소리는 대체로 샤푸르가 정복자의 권리를 오만하게 남용했다고 비난한다. 황제의 자주색 의복을 입은 채 사슬에 묶인 발레리아누스가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몰락한 귀인의 모습으로 군중 앞에 내세워진 데다 페르시아 왕은 말에 올라탈 때면 이 로마 황제의 목을 발판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동맹국들이 그에게 운명이 변화무쌍함을 명심하고 로마가 국력을 되찾을지 모르니 고귀한 신분의 포로들을 모욕의 대상이 아닌 평화를 위한 볼모로 삼으로고 거듭 충고했지만, 샤푸르는 여전히 완고한 태도를 유지했다. 발레리아누스가 수치심과 비통함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사망하자, 샤푸르는 시체의 피부 속에 짚을 채워 넣어 인간의 형상과 흡사하게 만든 후 이것을 페르시아의 가장 유명한 신전에 오랫동안 보존하도록 했다. 이것은 허영심에 찬 로마인들이 세우곤 했던 놋쇠와 대리석으로 만든 가공의 전승 기념물보다 훨씬 더 실감나는 승리의 기념물이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교훈적이며 감상적이지만 그 진실성에 의문이 제기된 적은 매우 드물었다.(326쪽)

 

 

 * 갈레리우스(재위 305∼311년)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로부터 로마제국의 동부를 다스리는 카이사르에 임명되었으며, 도나우강변에 웅거하던 야만족을 격퇴하여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다. 298년 페르시아와 우세한 전투를 함으로써 유리한 강화()를 맺을 수 있었다.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게 헌책()하여 그리스도교의 대박해를 시행하도록 하였으며,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위에서 물러난 뒤 서부의 통치자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즈와 함께 정식 황제가 되어 동부를 통치하였다. 309년 병을 얻은 후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완화하게 되었다.

 

 

* 나르세스

 

나르세스는 즉위 후, 로마에 빼앗긴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의 탈환에 착수했다. 당시의 로마 제국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의 양자 갈레리우스의 치세였다. 이윽고 8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페르시아군은 296년에 아르메니아에서 독립한 티리다테스를 왕위로부터 추방했다. 297년에는 로마에서 티리다테스를 돕기위해 갈레리우스가 출진했다. 하지만 갈레리우스는 3번의 교전 뒤 패배하여 로마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2만 5천의 군사를 다시 일으켜 아르메니아로 향했다.

 

결국 갈레리우스는 아르메니아인의 도움으로 나르세스의 군대에 피해를 입히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수복했다. 나르세스는 초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결국 수도 크테시폰을 빼았기고 후궁과 아내 및 자손들을 인질로 잡혔다. 동시에 티리다테스는 다시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복위했다. 이윽고 로마는 니시비스를 가르지르는 선을 중심으로 아르메니아와 크테시폰을 교환하는 것을 제안했다. 나르세스는 승낙했으며 이후 40여년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다.

 

 

* 발레리우스(재위 253∼260년)

 

황제가 된 발레리아누스는 아들 갈리에누스에게 서부 지역을 맡기고, 자신은 페르시아의 침략 위협이 있는 동부 지역을 담당하였다. 페르시아의 왕 샤푸르 1세가 시리아를 침략하여 안티오키아(지금의 터키 안타키아)까지 넘보자 발레리아누스는 이를 물리치려 출정하였다. 그러나 에데사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고, 260년 처형되었다. 재위 기간 동안 발레리아누스는 데키우스 황제에 이어 그리스도교 박해정책을 펴서 교회의 재산을 압수하고 집회를 금지하였다. 또 그리스도교를 처벌하는 내용의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발레리아누스의 재위 기간에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와 로마의 주교 식스투스 2세, 타라고나의 투루투어스 등이 처형되었다.

 

 

* 샤푸르 1세(재위 241∼272년)

 

사산왕조의 창건자 아르다쉬르 1세의 아들이다. 전왕()의 만년부터 계속된 로마와의 싸움에서 로마의 세력을 메소포타미아에서 몰아내고 아르메니아를 정복하였으며 시리아에도 침입하였다. 260년 에데사 부근의 전투에서 로마의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사로잡고 이 승리를 나크시 에 로스탐(이란 남부의 유적지)의 암벽에 조각하였다. 또 군데샤푸르의 대도시를 수사 부근에 건설하는 한편, 로마군의 포로들을 사역하여 슈스타르 부근의 카륜강()을 막고 유명한 농경용의 관개공사를 완성하였다. 그는 한때 마니교를 비호하기도 했으나 뒤에는 조로아스터를 신봉하였다.(출처 : 네이버 백과)

 

 

<페르시아 왕에게 굴욕당하는 발레리아누스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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