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제위 공백으로 인한 어떠한 소란도 발생하지 않았다. 포부가 큰 장군들의 야심은 서로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견제되었고, 동생 누메리아누스와 현장에 없던 형 카리누스가 함께 만장일치로 로마 황제로 승인되었다. 국민들은 카루스의 후계자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페르시아인들이 냉정을 되찾을 여유를 주지 않은 채 수사와 에크바타나의 궁전까지 칼을 들고 진격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병력과 기강 면에서는 우세했지만 당시 로마군은 가장 절망적인 미신에 사로잡혀 당황하고 있었다. 카루스 황제의 죽음에 대한 억측을 막기 위해 실행된 모든 술책에도 여론을 불식시키기는 불가능했다. 여론의 힘이란 억누를 수 없는 것이다. 종교적인 공포심을 가지고 있던 옛 사람들은 벼락을 맞았던 장소들이나 사람들을 특별히 신에게 헌납된 것으로 여겼다. 티그리스 강을 로마 군대의 운명적인 한계로 정해 주었던 어느 신탁이 상기되었다. 카루스의 운명과 자신들에게 닥친 위험에 놀란 군대는 젊은 누메리아누스에게 신들의 의지에 복종하여 자신들을 이처럼 불길한 전쟁터에서 데리고 나가 달라고 큰 소리로 요구했다. 이 나약한 황제는 그들의 완강한 편견을 불식시킬 수 없었고, 페르시아인들은 승승장구하던 적의 돌연한 퇴각에 놀랐다.(417∼418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_1권』 

 

(나의 생각)

 

최고 통치자의 갑작스런 병사(病死)나 암살 혹은 탄핵 등으로 인해, 갑작스럽고도 운 좋게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경우를 떠올려 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 * *

 

 

전대 황제의 불가사의한 죽음에 대한 정보는 머지않아 페르시아의 변경에서 로마로 전해졌고, 속주들뿐만 아니라 원로원도 카루스의 두 아들의 즉위를 축하했다. 그러나 이 운 좋은 젊은이들은 옥좌를 차지하는 것을 마치 당연한 것인 양 손쉽게 해 주는 출신 가문이나 재능에 있어서는 전혀 우월하지 않았다. 그들은 평민 신분으로 태어나고 교육받았으며, 아버지의 등극으로 일거에 왕자의 신분으로 올라선 데 불과했다. 그리고 그 후 대략 16개월 만에 일어난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들은 광대한 제국이라는 뜻밖의 유산을 받았다. 이처럼 급속한 영달을 침착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미덕과 사려분별이 필요했다. 그런데 형인 카리누스는 이 두 자질이 일반적인 경우보다도 더 부족했다. 그는 갈리아 전쟁에서는 어느 정도의 개인적인 용기를 드러냈지만, 로마에 도착하는 순간부터는 수도의 향락에 빠져 행운을 남용했을 뿐이다. 나약하지만 잔인했고, 쾌락에 탐닉했지만 심미안은 부족했다. 게다가 허영심에는 영향을 받기가 몹시 쉬웠지만, 국민의 평가에는 무관심했다. 불과 몇 달 만에 연달아 아홉 명의 처와 결혼했다가 이혼했고, 더욱이 그들 대부분은 임신 상태였다. 또한 그는 이처럼 합법적인 바람기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과 로마의 최고 명문가들에 불명예를 안겨 준 온갖 부정한 욕망에 탐닉할 여유까지 가졌다. 카리누스는 이전의 자신의 미천한 신분을 기억하거나 현재의 행동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모두 집념 어린 증오심을 가지고 대했다. 그는 아버지가 미숙한 젊음을 이끌어 주도록 그의 주변에 두었던 친구들과 조언자들을 모조리 추방하거나 처형했다. 또한 몹시 비열한 복수심을 가지고 자신에게 잠재해 있던 황제로서의 위엄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았던 학우들과 친구들을 박해했다. 카리누스는 원로원 의원들에 대해서는 거만하고 제왕다운 태도를 즐겨 취하고, 종종 그들의 재산을 로마 시민들에게 분배해 줄 계획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쓰레기 같은 자들을 자신의 총신, 심지어는 대신으로도 발탁했다. 궁전뿐 아니라 심지어 황제의 식탁에까지도 가수, 무희, 창녀를 비롯하여 그 밖의 모든 잡다한 악덕과 우행의 추종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문지기 가운데 한 사람에게 수도의 행정권을 위임하기도 했다. 또 카리누스는 자신이 처형한 근위대장의 자리에 방종한 쾌락의 추종자 가운데 한 명을 대신 앉힌 적도 있었다. 똑같이 아니 심지어는 좀 더 파렴치한 또 다른 총신에게는 집정관직을 부여하기도 했다. 위조 기술이 보기 드물게 뛰어났던 심복 비서관 한 사람은 황제의 승낙을 얻어 서류에 대신 서명함으로써 게으른 황제를 지루한 임무에서 구해 주었다고도 한다.(418∼419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_1권』

 

(나의 생각)

 

어떤 경우이든 관계없이 갑작스럽게 '국가 최고의 지도자'로 올라서게 되는 경우는 역사에서 그리 드물지 않다.(지금 현재의 남북한의 최고 통치자들 역시 '준비가 덜 된 상태로' 갑작스레 무대에 데뷔했다는 점에서는 서로 닮았다.) 그러나 그런 직위에 오른 사람이 '급속한 영달을 침착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미덕과 사려분별이 필요'하다. 한 국가의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풍부한 인물이 어떻게 우연히 찾아온 그런 기회를 기가 막히게 활용했는지, 혹은 그와 반대로 자질이 부족한 인물이 그런 기회를 틈타(?) 국가와 국민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폐혜를 끼쳤는지는 숱한 지난 날의 역사만 살펴 봐도 충분하다. 

 

 

* 카루스(재위 282∼283년)

 

276년 프로부스가 황제로 즉위하자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근위대장)가 되었다. 프로부스가 죽은 뒤, 군인들에 의하여 황제로 추대되었다. 황제가 된 뒤, 두 아들 카리누스와 누메리아누스를 카이사르(부황제)로 삼았다. 다른 부족들이 도나우강과 판노니아 지역을 침범하자 누메리아누스와 함께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프로부스가 계획하였던 메소포타미아 정복을 실현하기 위하여 누메리아누스와 함께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 카리누스는 로마에 남게 하여 서부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283년 페르시아 군대를 무찔러 티크리스강 유역까지 진격함으로써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장악하고, 주변 지역까지 압박하였다. 그러나 폭풍우가 심하게 몰아치던 날에 갑작스럽게 목숨을 잃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질병에 걸렸다는 설과 벼락에 맞았다는 설, 훈족과 벌인 전투에서 입은 상처 때문이라는 설 등이 있다. 또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이는 데 반대한 군대에서 암살하였다는 설도 있다. 아들 카리누스와 누메리아누스가 뒤를 이어 공동황제가 되었다.(출처:네이버 백과)

 

 

* 카리누스(재위 283∼285년)

 

카루스의 장남이다. 282년 카이사르(부황제) 칭호를 받았다. 283년 아버지가 죽은 뒤, 동생 누메리아누스와 공동 황제가 되었다. 카리누스는 서부 지역을, 누메리아누스는 동부 지역을 통치하였다. 284년 아버지 카루스가 페르시아 원정을 승리로 이끈 것을 기념하여 경기를 벌였다. 또 게르만족이 라인 지방을 침범하자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같은 해 누메리아누스는 페르시아 원정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오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285년 봄, 베네치아의 총독 아우렐리우스 율리아누스가 스스로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하자, 베로나 부근에서 그의 군대와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285년 6월 모이시아에서 누메리아누스의 뒤를 이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군대와 전투를 벌이던 중 마르구스 강변에서 살해당하였다. 황제로서 통치하는 동안 악정()을 펼쳐 민심을 잃었다.(출처:네이버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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