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훌륭한 왕친(王親)의 ㅡ 못돼먹은 임금이라니!

그럼에도, 경들, 이 끔찍한 태풍 다가오는 소리 듣기만 하고,

폭풍우 피할 은신처를 우리는 찾지도 않고 있구려.

 -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2막 1장> 중에서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에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흉상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황제는 『명상록』의 저자로 유명하다. 그가 얼마나 자신을 엄격하게 수양했는지는 『명상록』만 읽어봐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황제로서 마땅히 누려도 좋을 온갖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기 보다는 도리어 황제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마땅히 갖춰야할 인격을 도야하는데 훨씬 더 노력했다.

 

그는 로마 제국의 황제이면서도 스토아 학파 철학자였다. 그는 『명상록』에서 보듯이, 숨이 막힐 정도로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약삭빠른 재능과 지식은 타고나지 않았을지 모르나, 타협하지 않는 철저한 진지함, 인간적 성실함, 근엄함은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었다.

 

그가 재위했던 때는 이른바 '5현제의 치세'의 마지막 20년 동안이었다.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맨 처음으로 다룬 시기도 바로 5현제가 다스렸던 '서기 98년∼180년'이었다. 기번의 대작은 이렇게 시작된다.

 

서기 2세기의 로마 제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토와 가장 문명화된 인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광대한 군주국의 변경은 예로부터 전해 오는 명성과 엄격하게 훈련된 용맹으로 지켜졌다. 법과 관습의 온건하지만 강력한 영향력은 점진적으로 모든 속주들을 하나로 결속시켜 나갔다. 그곳의 평화로운 주민들은 부와 사치를 마음껏 향유하고 또 남용하기도 했다. (…) 80년이 넘게 지속된 행복한 시기 동안에는 미덕과 능력을 두루 갖춘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그리고 두 명의 안토니누스 황제에 의한 선정이 베풀어졌다. …… (1쪽)

 

 - 『로마 제국 쇠망사』, 제1장, 안토니누스 가 황제들 시대의 로마 제국의 범위와 군사력, 서기 98∼180년

 

* 에드워드 기번이 말한 '두 명의 안토니누스  황제'란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년) 황제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재위 161∼180년) 황제를 말한다.(oren)

 

 

이들 다섯 황제가 다스리던 시대만 하더라도 로마 제국 전역은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넘쳐 흘렀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였다. 온갖 이민족들이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고, 온갖 다양한 종교들이 넘쳐났지만 그들 사이엔 '종교 갈등'조차 없었다. 대중들은 로마에서 유행하던 다양한 형태의 숭배가 모두 똑같이 진실하다고 생각했고, 철학자들은 똑같이 거짓되다고 생각했으며, 행정관들은 똑같이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종교에 대한 관용과 화합은 그렇게 작동되었다.

 

고대인들은 대체로 온화하고 관대했기 때문에 종교 간의 차이점보다는 유사점에 더 주목했다. 그리스인, 로마인, 야만족들이 서로 다른 제단에서 마주쳤을 때, 그들은 비록 신의 이름이나 예배 형식은 다르지만 결국은 같은 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호메로스의 품위 있는 신화는 고대 세계의 다신교에 아름답고 전형적인 형태를 부여하고 있다.(33쪽)

 

 

두 명의 안토니누스 황제는 하드리아누스(재위117∼138)가 발굴해냈다. 그는 가장 훌륭한 황제 둘을 한꺼번에 찾아냄으로써 길이 후세의 칭송을 받았다. 그는 일생 동안 그 어떤 오점도 남기지 않은 50세의 원로원 의원을 그의 양자로 입양하면서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양자로 하여금 '성인이 되면 모든 미덕을 갖출 것이 분명해 보이는' 17세의 소년을 양자로 받아들이게 했다. 그렇게 해서 한꺼번에 발굴된 두 명의 황제는 42년간 변함없는 지혜와 미덕으로 로마 제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영광보다는 제국의 번영을 생각해서' 자신의 딸 파우스티나를 양자로 입양한 마르쿠스와 결혼시켰다. 그에게 호민관과 집정관의 권력을 주었으며 나중에는 황제의 자리까지 넘겨주었다. 에드워드 기번은 말한다. 이 두 황제가 다스리는 시기야말로 '정부의 목표가 오로지 전국민의 행복이었던 역사상 유일한 시대일 것'이라고.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 전체에 질서와 평화를 전파했다. 그의 시대는 역사에 거의 자료를 남기지 않은 시대로 손꼽히는데, 사실 역사란 인간의 범죄와 우행과 불행의 기록에 다름 아닌 것이고 보면, 이것은 참으로 보기 드문 영예라 하겠다. 사생활에서의 그는 선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천성이 소박해서 허영이나 위선을 몰랐다. 그는 지위에서 비롯되는 편의나 악의 없는 쾌락들은 적당히 누릴 줄도 알았고, 자비로운 마음과 유쾌하면서도 차분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황제의 미덕은 보다 엄격하고 근면한 수련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미덕은 수많은 학자들을 만나고 수많은 강의들을 인내심 있게 듣고 밤 늦게까지 공부해서 얻은 결실이었다. (…) 소란한 병영에서 기록한 그의 『명상록』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는 현자의 겸손이나 황제의 권위와는 다소 동떨어진 방식으로 공개 철학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의 삶 자체가 제논의 교훈에 대한 고귀한 해설이었다.(86∼87쪽)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황제의 유일한 약점이라면 '온화한 성품'이었다. 그는 이성적인 사람이었지만 의심할 줄 모르는 순진한 마음 때문에 종종 기만당했다. 특히 황제는 양부(養父)의 딸인 파우스티나와 아들 콤모두스에게 무조건적인 애정을 쏟았는데, 그들의 악덕으로 인한 폐해가 너무 커서 공적인 피해로 연결되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딸이자 마르쿠스의 아내였던 파우스티나는 미모뿐만 아니라 화려한 연애 편력으로도 유명했다. 엄숙하고 고지식한 성격을 지녔던 마르쿠스 황제로서는 아내의 자유분방한 기질이나 무모한 열정을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로마 제국 안에서 파우스티나의 부정을 모르는 사람은 남편밖에 없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황제는 아내의 부정을 새까맣게 몰랐다는 게 문제였다. 그는 아내의 연인을 위해서도 고위 공직을 맡겼고, 30년 동안 한결같이 아내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존중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그녀가 죽은 후까지도 그녀를 존경했다.

 

마르쿠스는 『명상록』에서 그토록 정숙하고 온화하며 검소한 부인을 내려주신 것에 대해 신께 감사드리고 있다. 아첨 잘 하는 원로원은 황제의 진지한 요청을 받아들여 그녀를 여신으로 선포했고, 그녀는 유노, 베누스, 케레스의 특성을 지닌 여신으로 신전에 모셔졌다. 모든 청춘남녀는 결혼식 날에 이 정숙한 수호 여신 앞에서 서약해야 한다는 법령까지 선포되었다.(94쪽)

 

 

파우스티나, 프랑스 국립박물관

 

마르쿠스 황제를 뒤이은 아들의 극악무도한 악덕은 아내의 부정과는 비교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젊은 콤모두스의 편협한 정신을 열어주고 악독한 마음을 순화시키기 위해 아버지와 신하들은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허사였다. '교육의 힘이란 교육이 필요 없는 타고난 우수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행해질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법'(기번)이기 때문이다. 아들이 겨우 14∼15세가 되었을 때 '황제의 권력'을 함께 누리게 만든 것도 치명적이었다. 이 때문에 어린 콤모두스는 어떤 제약에도 굴하지 않는 오만불손한 젊은이로 변해버렸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누릴 것만 있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이를 두고 기번은 다음과 같이 통찰하고 통탄한다.

 

사회의 내부적 평화를 위협하는 범죄의 대부분은 필요하기는 하지만 불공평한 소유의 법칙이 모든 사람이 갈망하는 대상을 소수의 소유로 국한시킴으로써 인간의 욕구를 제약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모든 열정과 욕구 중에서도 권력욕이 가장 중대하면서도 반사회적인 것이다. 한 사람의 권력과 자부심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복종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내란의 소용돌이에서는 사회의 법률은 효력을 잃고 그 빈자리를 인간성의 법칙이 대신하지도 못한다. 경쟁심, 승리에 대한 갈망, 좌절된 희망, 과거의 상처에 대한 기억, 미래의 위험에 대한 불안 등이 정신을 극도로 자극시켜 인간적인 동정심을 잠재운다. 위에 열거한 동기들로 인해 역사의 모든 페이지는 내전의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이런 동기들로도 콤모두스의 이유 모를 잔인성을 설명할 수는 없다.(95쪽)

 

 

카피톨리니 미술관의 헤라클레스 모습의 콤모두스 석상

 

 

콤모두스는 유아기부터 잔인한 행동을 서슴치 않은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사악하기보다는 유약했고, 단순하고 소심했기 때문에 측근들의 말만 믿었고, 그들 때문에 저지른 잔인행 행동들이 점점 습관화된 끝에 마침내 잔인성이 그의 영혼을 지배했던 케이스였다.

 

아버지인 마르쿠스 황제가 도나우 강변의 전장터에서 죽고 나서 19세에 황제에 오른 그는 치세 첫 3년 동안은 그럭저럭 사정이 괜찮은 편이었다. 마르쿠스 황제 시대의 형식과 정신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고, 아버지가 남겨 놓은 훌륭한 고문관들이 있었기때문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빚어진 치명적인 사건이 그를 망쳐놓고 말았다. 어느날 밤 어둠에 잠긴 콜로세움의 좁은 주랑을 지나는 길에 한 자객으로부터 습격을 받은 사건이 일어났다. 암살은 실패했고 음모를 꾸민 일당들은 체포되었지만 이 사건 때문에 충격을 받은 그는 원로원 전체를 마음속 깊이 두려워하고 증오하게 되었다. 황제가 원로원 의원들의 불만과 음모를 찾아내려 하자 약삭빠른 밀고자들이 갑자기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마르쿠스 황제가 언제나 '국가최고회의'로 생각하며 존중했던 원로원은 가장 고결하고 훌륭한 로마 시민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이제 그들은 모두 범죄자가 되어 버렸다. 부자들은 밀고자들의 주요 목표가 되었고, 엄격한 미덕을 갖춘 자는 콤모두스의 방탕에 무언의 비난을 노내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주요 공직에 오른 자는 너무 뛰어나서 오히려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었으며, 아버지 마르쿠스 황제의 친구들은 항상 아들의 혐오를 불러일으켰다. 의심은 곧 증거가 되었고 재판은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지명도가 높은 원로원 의원을 처형할 때는 그 죽음을 슬퍼하며 복수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까지 함께 처형했다. 이렇게 한번 피의 맛을 알게 되자 톰모두스는 연민을 느낄 줄도 후회를 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98쪽)

 

 

이 대목을 읽으면 갑자기 불쾌한 기억이 솟아오른다. 39년 전 어느 봄날 국가 방위를 위해 만든 군대를 동원하면서까지 잔인하게 무고한 시민들을 죽였던 흉포한 독재자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번 피의 맛을 알게 되자 그 독재자는 집권기간 내내 철권통치로 일관했으며, 국민들의 손으로 직접 지도자를 뽑게 해달라는 '직선제 개헌 요구'마저 거부하다가 온국민이 들고 일어난 6.10 항쟁 앞에서 겨우 폭주를 멈췄다. 그를 제대로 단죄하지 않고 아직까지도 뻔뻔스런 얼굴로 궤변을 늘어놓도록 놔둔 건 한국 정치의 오랜 수치이자 오욕으로 기록될 것임에 틀림없다.

 

다시 콤모두스로 돌아오자. 능력보다는 우행이나 만행을 과시하기 바빴던 콤모두스 황제 덕분에 벼락 출세한 인물들이 잇따라 등장했고, 그들은 황제와 더불어 덩달아 춤을 추었다. 고위직에 있으면서 국민들을 착취하고 부정축재를 일삼는 무리들이 점점 늘어났다. 도적떼들이나 다름없던 인물들 중엔 콤모두스의 제위를 넘볼 만큼 뻔뻔스러운 인물들도 더러 있었지만 음모가 조기에 발각된 덕분에 모조리 실패로 돌아갔다. 이런 일들을 겪는 동안에 갈수록 의심이 늘어난 군주는 측근들만 총애하고 중용하기 시작했다. 교활한 신하들이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자 콤모두스는 '자신의 발밑에 갖다 바치는 어머어마한 선물'에만 점점 눈이 멀기 시작했다. 이때 목욕탕, 주랑, 경기장들이 황제의 이름으로 많이 건설된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목숨을 걸고 충언을 마다하지 않는 충신들도 더러 나타났으나 폭군은 그들이 건넨 충언의 보답으로 그들의 목숨을 빼았았다.

 

혹사병과 기근까지 겹쳐 로마의 재앙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첫 번째 기근은 신들의 정당한 분노 탓으로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기근은 클리안데르가 부와 권력을 이용해 곡식을 전매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생각되었다. 대중의 불만은 오랫동안 은밀히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사람들이 운집해 있던 대경기장에서 폭발했다. 그들은 복수라는 더 즐거운 오락을 위해 그들이 무척 좋아하던 여흥을 포기하고 교외에 있는 황제의 별장으로 몰려가서 공공의 적, 클리안데르의 머리를 내놓으라고 사납게 요구했다. 근위대의 지휘권을 갖고 있었던 클리안데르는 기병대를 보내서 폭도들을 해산시키도록 했다. 사람들은 로마 시내로 재빨리 도망쳤다. 이 과정에서 몇몇은 기병대의 칼을 맞아 죽었고 훨씬 많은 사람들이 밟혀 죽었다. 그러나 기병대가 로마 거리로 들어서자 주택의 창문이나 지붕에서 돌과 화살이 날아와 그들을 저지했다 (…) 기병대가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자 대중의 분노는 더욱 불타올라 그들은 성난 파도와 같이 거침없이 황제의 궁전까지 나아갔다.(102∼103쪽)

 

 

이 대목에서 우리가 겪었던 지난날의 여러 '유혈 시위 사태'를 떠올리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머나먼 다른 나라의 케케묵은 역사를 다시금 살피는 목적도 바로 그런 데 있을 터이다. 다시금 로마로 눈을 돌리자. 콤모두스가 시시각각으로 극도로 위험한 상황에 내몰려 있기 때문이다. 황제의 애첩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클리안데르의 죄상과 대중의 분노를 설명하고 성난 군중이 곧 황제의 궁전으로 들어닥칠 것이라고 황제에게 알렸다. 황제는 급히 묘책을 떠올렸다. 성난 군중들에게 클리안데르의 머리를 던져 줄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폭동은 곧 가라앉았다.

 

이를 계기로 콤모두스가 정신을 바짝 차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럴 능력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는 무능한 총신들에게 제국의 통치를 맡겨두고는 관능적인 욕구에 빠져들었다. 모든 계급, 모든 속주에서 모아들인 300명의 아름다운 여인들과 후궁에서 모든 시간을 보냈다. 고대 역사가들은 이 방탕한 매음굴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지만, 기번은 자신의 점잖은 언어로 그 기록들을 다시 옮겨놓기를 거부한다.

 

품위 있는 시대의 영향력 아래서 세심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거칠고 야수 같은 마음에는 학문의 흔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콤모두스는 학문의 즐거움을 전혀 몰랐던 최초의 로마 황제였다. 네로 황제조차도 음악과 시에 뛰어났거나, 적어도 뛰어난 척은 했다. (…) 그러나 콤모두스는 어린 시절부터 이성적이거나 학문적인 것은 혐오했고, 대경기장과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경기들, 즉 검투사들의 시합과 맹수 사냥 같은 대중적인 오락만을 즐겼다. 마르쿠스가 아들을 위해 불러 모은 학문의 대가들은 산만하고 쉽게 싫증 내는 학생을 가르쳐야 했지만, 투창이나 활 쏘는 법을 가르쳤던 무어인이나 파르티아인들은 즐겁게 배우면서 눈썰미나 기교에서 곧 스승을 따라잡는 기특한 학생을 가르쳤던 것이다.(104∼105쪽)

 

 

황제의 악덕을 부추기고 함께 놀아났던 측근들은 황제의 저열한 취미에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들은 네메아의 사자와 에리만투스의 야생 멧돼지를 죽임으로써 신의 반열에 오른 헤라클레스를 상기시켰다. 맹수들의 조용한 은거지를 애써 찾아다니며 포획해서 로마로 끌고 온 다음, 황제가 직접 죽이는 장관을 연출하는 오락이 잦아졌다. 콤모두스는 어느새 자신을 '로마의 헤라클레스'로 여겼다. 황제의 옥좌 옆에는 황제의 기장은 물론 사자 가죽과 곤봉까지 함께 놓여 있었다. 콤모두스의 동상은 이내 헤라클레스를 본따 만들어졌다. 콤모두스는 아첨꾼들의 칭찬에 한껏 고무되어 궁전 안에서의 이벤트를 대규모 장외 행사로까지 격상시켰다. 로마 시민들을 원형경기장으로 끌어모은 것이다.

 

콤모두스는 초승달 모양의 화살촉이 달린 화살로 재빨리 질주하는 타조의 길고 여윈 목을 정확히 맞추었다. 풀어 놓은 표범이 떨고 있는 죄수에게 달려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정확히 화살을 쏘아서 표범은 죽이고 죄수는 전혀 다치지 않게 만들기도 했다. 경기장에 백 마리의 사자를 풀어 놓고 그것들이 경기장 안을 으르렁거리며 달리는 동안 정학하게 백 개의 화살을 쏘아 모두 죽이기도 했다. 코끼리의 거대한 몸집도 코뿔소의 단단한 가죽도 그의 화살을 피할 수는 없었다. 에티오피아와 인도로부터 희귀한 동물들이 보내져 왔고, 예술 작품이나 공상 속에서나 나왔던 진귀한 동물들도 원형경기장에서 죽임을 당했다.(106쪽)

 

 

급기야 황제는 몸소 검투사가 되어 경기장에 '선수'로 등장했다. 그는 세쿠토르(Secutor)의 의복과 무기를 갖추고 나타났는데, 그와 싸우는 상대인 레티아리우스(Retiarius)의 대결은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시합들 중에서도 가장 생생하면서도 잔인한 시합이었다. 황제는 세쿠토르의 역할을 맡아 735번이나 시합을 벌였다.

 

콤모두스의 악행과 오욕이 남긴 희생자들의 긴 목록은 그가 얼마나 자신의 신변에 닥칠 위험을 두려워했으며, 만성화된 살육의 습관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준다. 에드워드 기번은 이 당시 로마의 총독이나 군 지휘관들이 거의 매일 매시간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의 극단적인 잔인성이 결국에는 자신의 죽음까지 초래하였다. 그는 가장 고귀한 로마인들을 죽이고도 무사했지만, 가신들까지 그의 잔인성을 두려워하게 되자 그의 죽음이 찾아왔다. 친구들이나 동료들의 죽음에 놀란 애첩 마르키아와 시종장 엘렉투스, 근위대장 라에투스는 황제의 미친 듯한 변덕이나 국민의 분노의 폭발로 언제 자기들 머리에 떨어질지 모르는 죽음을 미연에 방지하기로 결심했다. 마르키아는 맹수 사냥 후 지친 콤모두스에게 포도주를 가져다줄 때를 노려 독약을 탔다. 잠자리에 든 콤모두스가 독과 술기운 때문에 정신을 가누지 못하고 있을 때 레슬링 선수였던 한 건장한 젊은이가 방으로 들어와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그를 목 졸라 죽였다. 황제의 죽음을 궁정 사람들이나 국민들이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유해는 은밀히 궁전 밖으로 운반되었다. 이것이 마르쿠스의 아들의 최후였다. 13년의 치세 동안 가상적인 권력을 이용해 힘이나 능력에서 자신보다 못할 것이 없던 수백만의 국민들을 억압해 온 폭군의 종말은 이렇게 쉽게 찾아왔다.(108∼109쪽)

 

 

음모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를 지지해 줄 새로운 황제를 재빨리 찾아냈다. 집정관급 원로원 의원이자 그 당시 로마 총독이었던 페르티낙스는 밤늦은 시간에 시종장과 근위대장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황제의 명령대로 어서 자신을 처형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로마의 황제 자리를 받아주라고 읍소했다. 그는 황제의 자리가 진심으로 내키지 않았지만 마지못해 그 제의를 받아들이고는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냈다.

 

기나긴 그날 밤이 지나자 서기 193년 새해의 첫날이 밝았다. 페르티낙스는 원로원 회의를 소집하고 자신보다 더 고귀한 원로원 의원 몇 명을 새로운 황제로 선출해줄 것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콤모두스에게는 죄과에 합당한 수치가 주어졌다. 폭군, 검투사, 공공의 적이라는 칭호들이 부여되었고, 모든 동상들을 파괴할 것, 대중의 분노를 만족시키기 위해 시체를 갈고리에 찍어 검투사들의 탈의실로 끌고 갈 것 등이 법률로 선포됐다.

 

원로원이 황제가 살아 있을 때에는 아첨하면서 비굴하게 굽실거리다가 죽은 다음에야 이렇게 무기력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납득이 가기는 하지만 다소 비열한 복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법령들은 로마 제정의 원칙 내에서는 완전히 합법적인 것이었다. 공화국의 최고 행정관이 자신에게 위임된 임무를 남용했을 때 원로원이 그를 탄핵하고 폐위하거나 처형할 권리는 오랫동안 확고하게 유지되어 왔다.(111쪽)

 

 

역사를 살펴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쩌면 이토록 닮았을까' 싶은 대목이 너무 많아 깜짝깜짝 놀라기도 한다.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제국 쇠망사』라고 해서 사정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가 쓴 역사 기록을 살펴 보더라도 우리가 이미 겪었던 숱한 불행한 과거사들이 너무 자주 떠오르기 때문이다. '로마사'를 깊이 연구했던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와 똑같은 현상이 숱한 사람 사이에서 여러 차례 되풀이되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입버릇처럼 하게 되었다.

 

"정계에만 들어가면 재야 때의 뜻은 어디로 가 버리는지." 

 

 -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제1권> 제47장 중에서

 

 

예나 지금이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가장 중대하면서도 반사회적인 '권력욕'이 늘 문제다. 에드워드 기번의 말대로, 한 사람의 권력과 자부심을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복종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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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4-14 11: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책 명성에 비해 시시하군, 하고 느꼈어요. 지금 읽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요....
문제는 권력욕이군요. 그리고 올바르게 보지 않는 시각. 신하들을 범죄자로 보고 의심하는 본인도 괴로웠을 것 같습니다.
복수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까지 죽였다니... 유능한 사람들은 전부 없어지고 무능하고 아첨 떨기 좋아하는 사람들만
옆에 남았겠군요. 역사는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북한의 누구도 조금만 의심 들면 처형하고 그랬잖아요.

인용하신 글과 오렌 님의 글, 이 두 가지가 잘 구분되지 않은 채로 읽었습니다. 오렌 님의 글로 읽고 나면 인용문이었고,
인용문이구나 하고 읽으면 오렌 님의 글이고... 좋은 뜻으로 말하는 거예요. ㅋ 잘 읽었습니다.

oren 2019-04-14 14:30   좋아요 2 | URL
로마 제국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공화정에서 다시 제정으로 바뀌었는데,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이 5현제의 시대때 다시 ‘공화정‘으로 되돌리지 못한 걸 못내 아쉬워하더군요. 그 정도로 훌륭한 사람들이었으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었다고 보더군요. 그때 다시 공화정으로 되돌아갔다면 서양 역사가 통째로 뒤바뀌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고대 그리스로부터 ‘민주주의‘를 비롯한 온갖 탁월한 문명들을 거의 다 모방하고 받아들였으면서도, 통치자 한 사람에게로 모든 힘이 집중되는 비민주적인 권력구조만큼은 끝내 바로잡지 못했던 로마 제국은 필연적으로 ‘황제가 바뀔 때마다‘ 나라의 운명도 그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던 듯합니다. 카이사르나 옥타비아누스에게 맞서서 목숨을 걸고 로마의 공화정을 끝까지 지키려고 애썼던 인물들이 그래서 더욱 빛나 보이고요. 브루투스, 카토, 키케로 같은 인물들 말이지요.^^

겨울호랑이 2019-04-14 1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 쇠망사」의 시작을 5현제로 잡은 것은 상당히 인상적이라 여겨집니다. 제국의 절정에서 쇠망의 요인을 끌어내는 것도 이 책을 고전으로 끌어올린 요인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oren 2019-04-14 20:28   좋아요 1 | URL
로마 제국의 기나긴 쇠퇴 과정을 다루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모든 것이 훌륭하게 작동되었던 전성기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겠다 싶기도 합니다. 제국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로마 제국의 광대한 영토, 막강한 군사력, 내부적 번영, 예술, 사람들, 정치 체계 등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이 끝나자 말자, 어리석고 잔인한 황제들의 잔인성, 우행, 살육, 학정, 찬탈, 내전, 폭동 등등이 줄줄이 이어져 ‘찬란했던 한 때‘가 과연 있긴 있었나 싶은 심정이 들기도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