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어떤 왕이 전 유럽의 웃음거리가 되고도 자기만은 이것을 모를 수도 있다.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듣는 사람에게는 유익하지만 말하는 사람에게는 해롭다, 미움을 사기 때문에. 그런데 왕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섬기는 왕의 이익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더 소중히 여긴다. 따라서 자기를 해치면서까지 왕의 이익을 도모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이런 불행은 분명히 신분이 높을수록 더 크고 더 일반적이다. 그러나 신분이 낮다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데에는 항상 이익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의 삶은 영원한 환각일 뿐이다. 서로를 속이고 피차 아첨하기만 한다. 우리에 대해 우리의 면전에서 마치 우리가 없을 때처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 사이의 결합이란 오직 이 상호 기만 위에 서 있을 뿐이다. 만약 자기가 없는 자리에서 친구가 자기에 대해 말하는 것을 알게 된다면 설사 그가 진실되게 사사로운 감정 없이 말하였다 해도 존속할 우정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자신 안에서나 타인에게나 위장이고 기만이고 위선일 뿐이다. 그는 타인이 자기에게 진실을 말해 주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타인에게 진실을 말하기를 피한다. 정의와 이치에서 이토록 동떨어진 이 모든 성향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천성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다.(71쪽)

 

 - 블레즈 파스칼, 『팡세』 중에서

 

 

(나의 생각)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작년 여름에 뜬 블룸버그 통신의 그 기사마저도 여태까지 '보고'가 안 된 건 아닐까?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든 연설 덕분에(?) 이제는 삼척동자까지도 훤히 알게 된 그 유명한 뉴스 말이다.

또한 철 지난 외신 보도를 부각시킨 것만으로도 그토록 발끈한 게 다 '진실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던 걸까.

파스칼의 이토록 날카로운 글 한 대목을 읽으니 갑자기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 * *

 

 

진실에 대한 혐오에는 갖가지 정도가 있다. 그러나 이 혐오가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은 확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애심과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을 책망해야만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갖가지 우회적이고 부드러운 표현을 택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그릇된 조심성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의 결함을 축소시켜야 하고 이것을 변명하는 척해야 하며 칭찬과 함께 사랑과 존경의 표시를 섞어야 한다. 이 모든 것으로도 이 약이 자애심에 쓰디쓴 것임에는 변함이 없다. 자애심은 가능한 한 그 최소량을 취하되 항상 불쾌감을 가지며 또 왕왕 이 약을 제공하는 사람들에 대해 남모를 원한을 품는다.

 

사람들이 우리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이익을 얻게 될 때 우리에게 불쾌감을 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서 멀어지는 것은 여기서 유래한다. 그들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우리를 대해 준다. 진실을 혐오하기에 진실을 덮어주고 아첨받기를 바라기에 아첨하며 속임당하기를 바라기에 속인다.

 

출세의 길을 여는 행운의 각 단계마다 우리를 진실에서 더욱더 멀어지게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사랑을 받으면 유리해지고 반감을 사면 불리해지는 그런 인물들의 비위를 거슬리는 것을 더욱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70쪽)

 

 

 - 블레즈 파스칼, 『팡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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